소설리스트

연인들의 만찬 (9/11)

연인들의 만찬

드넓은 아프리카 평원. 나를 태운 금왕은 두툼한 발의 둥그런 끝부터 살며시 내디디며 사뿐사뿐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마치 리듬을 타듯 가볍고 유연한 움직임이 느긋하게 이어졌다. 아마도 내가 주위에 어슬렁거리는 맹수들을 마음껏 구경할 수 있게 해 주려는 배려일 터였다.

하지만 미안하게도 나는 지금 주위를 둘러볼 여유가 없었다. 내 시선은 오직, 걸음을 옮기다가도 저 먼 곳의 작은 소리까지 모두 알아듣고 까딱까딱 반응하는 금왕의 둥근 귀에 고정되어 있었다. 솜털이 보송보송한 그 귀를 보고 있노라면 손이 절로 움찔거렸지만 왕으로서 자신의 백성들을 두루 살펴보는 중인 금왕을 방해할 수 없어서 참았다.

다만 홀린 듯 멍하니 바라보며 침을 꼴깍꼴깍 삼켰다. 한데 금왕의 예민한 청력은 내가 침을 삼키는 그 작은 소리도 다 잡아내는 모양이었다. 갑자기 고 동그란 귀가 나를 향해 까딱 기울었다. 그 순간, 나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아아. 정말이지……!’

마침 금왕의 몸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목덜미에 앉아 있던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귀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리고 덥석 움켜잡았다. 혹시나 아플까 싶어 손에서 최대한 힘을 푼 채로. 그래도 갑작스러운 접촉에 놀랐는지 금왕이 움찔, 귀뿐만 아니라 몸 전체를 굳히며 멈춰 섰다가 이내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런 금왕의 반응에 용기를 얻은 나는 손바닥으로 보드라운 귀를 살살 쓸던 것을 멈추고 좀 더 적극적으로 만지기 시작했다. 아니, 만지다 뿐일까.

“쪽, 쪽!”

손이 녹을 것처럼 보드라운 감촉에 안 그래도 넘치던 애정이 마구 샘솟아서 나도 모르게 잔뜩 입 맞췄다. 중간중간 흠칫거리기는 했지만 의외로 크게 개의치 않고 나아가던 금왕이 움찔, 온몸으로 놀라며 다시 멈춰 섰다.

“호연…….”

뽀뽀를 날린 후 이번에는 마구 뺨을 비비고 있는데 금왕이 곤란한 목소리를 냈다.

“앗, 네?”

“……그렇게 일어서 있으면, 위험하다.”

동작을 멈추고 묻자 잠시 머뭇거리던 금왕이 조용한 목소리로 타일렀다.

“아. 죄송해요.”

또 너무 흥분해서 이성을 잃었구나, 반성하며 아직 귀에 닿아 있던 뺨을 떼고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려는데 금왕이 말을 이었다.

“아니. 물러나라는 게 아니다, 호연. 좀 더 안전하게 있으라는 얘기다.”

“아아.”

금왕의 세심한 배려에 나지막한 탄성을 터뜨린 나는 금왕의 동그란 머리 너머로 두 팔을 쭉 뻗어 늘이며 몸을 기댔다. 그 정도면 되었다 싶었던지 금왕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가 내가 금왕의 뒷머리를 덮은 뽀송뽀송한 털에 고개를 비비자 또 움찔 멈춰 섰지만, 곧 다시 걸음을 이어 갔다.

“반려님, 반려님!”

여유롭게 평원을 둘러보는 와중 무척이나 앙증맞은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그를 좇아 시선을 옮겼다가 나도 모르게 입가를 말아 올렸다.

“치타!”

고개를 돌리자마자 내가 발견한 것은, 망토 같은 등 털을 휘날리며 콩콩 뛰어오는 새끼 치타였다. 금왕이 내 손가락에 묶어 준 금신의 머리카락을 먹은 이후 나는 각 금수 대표뿐만 아니라 모든 동물과 대화가 가능해졌다.

“얘, 그렇게 뛰면 다친대도.”

뭐가 그리 바쁜지 열심히도 달려오는 새끼 치타를 엄마 치타가 걱정스레 뒤쫓았다. 그 모습을 보며 내가 머리를 톡톡 두드리자 금왕이 곧바로 내 허리에 꼬리를 휘감아 바닥으로 내려 주었다.

“반려님!”

어미 치타의 걱정 어린 목소리에도 여전히 허겁지겁 달려온 새끼 치타가 내게로 점프했다. 곧장 두 팔을 뻗어 새끼 치타를 끌어안았다.

“안녕, 아가.”

내가 막 품 안의 새끼 치타에게 인사를 건넨 찰나.

“안녕하세요, 금왕님, 반려님.”

어느새 새끼를 뒤쫓아 온 어미 치타가 나와 금왕에게 인사했다. 그저께 보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두 눈에 한가득 감사의 빛이 담겨 있었다. 이 치타는 예전에 내가 아프리카를 떠나기 전에 만난 새끼 치타의 어미로, 다행히 살아 있었다. 사냥을 나갔다 구역을 잘못 침범해 다른 맹수와 싸움이 붙었고, 그 때문에 부상을 입어 빨리 돌아오지 못한 거였다.

그래도 다행히 목숨이 위험할 정도는 아니어서 무사히 도망쳐 새끼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내 품에 안긴 것이 바로 그때 내가 만난 새끼 치타로, 그날 내가 금왕과 함께 오랜 시간 곁에 있어 준 덕분에 다른 맹수들에게 공격당하지 않고 안전했다며 처음 만나던 날 어미 치타는 거듭 감사 인사를 했다. 며칠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그 마음을 잊지 않았다.

그냥 내가 좋아서 새끼 치타랑 놀았던 것뿐인데 이리 고마워하니 왠지 민망한 기분이 들어서 품에 안은 새끼 치타에 집중하는 척 뺨을 비볐다.

“아으, 귀여워!”

솜털의 보들보들한 감촉과 기분 좋은 듯 골골거리는 새끼 치타가 무척이나 사랑스러워서 얼굴을 비빌 뿐만 아니라 쪽, 입술을 맞추려던 때였다. 갑자기 금왕의 보송보송한 꼬리가 우리 사이에 끼어들었다. 내가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자, 금왕이 꼬리로 내 머리를 가볍게 두드렸다.

“녀석. 금왕의 반려는 금수들을 편애하면 안 된대도.”

“아, 맞다.”

그제야 아차 싶어진 나는 뽀뽀를 멈추고 내 품에 안긴 새끼 치타를 그저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앙증맞을 만큼 조그마한 머리와 볏처럼 머리 위에 송송 난 하얀색의 긴 털, 눈물 길이 까맣게 그려진 깜찍한 얼굴, 또 동그란 눈으로 초롱초롱 나를 올려다보는 모습까지. 정말 머릿속이 흐물흐물 녹을 것처럼 귀여웠다. 그 덕분에 내 머리는 평소라면 절대 발휘하지 못할 유연성을 발휘했다.

“어, 그…… 편애는 일부만 좋아하니까 좋지 않은 거잖아요. 하지만 모두를 다 엄청 좋아하면 그건 편애가 아니지 않을까요? 맹수만 말고 전부 다 좋아하면요.”

“호연…….”

나름대로 기발하다고 생각한 대답인데, 금왕은 왜인지 한숨을 내쉬었다.

“어머나, 금왕님. 우리 반려님이 너무 둔하셔서 걱정이겠네요. 얼른 혼례를 치르고 진짜 반려로 만드셔야지, 안 되겠어요.”

어미 치타의 말 또한 이해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라서 의아한 얼굴을 하는데 갑자기 머리 위로 가벼운 무게감이 전해졌다. 게다가 귓가까지 늘어지는 보송보송한 긴 털의 느낌을 보아 아마도 금왕이 내게 턱을 얹은 듯했다. 갑자기 왜 그러나 싶어 올려다보려 했지만 머리를 누르는 무게에 여의치 않았다.

“호연…….”

금왕이 내 머리에 턱을 괸 채로 속삭였다. 덕분에 근사한 음성이 무척 가까이서 들려와 심장이 두근, 제멋대로 떨렸다.

“그래도 뽀뽀는…… 하지 마라.”

……어?

두근두근. 뜀박질을 시작하려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애쓰다 말고 금왕을 쳐다봤다. 말끝에 그가 고개를 들었기에 이번에는 가능했다. 하지만 목표했던 대로 금왕의 얼굴을 확인할 수는 없었다. 어째선지 그가 딴청을 피우듯 내게서 고개를 돌려 버린 탓이었다. 그래도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 그만 보라는 듯 도톰한 앞발로 내 머리를 토옥 짚었다.

“우와!”

언덕으로 돌아오자마자 나는 시찰 중 만난 원숭이가 선물로 준 과일 보따리를 풀었다. 새끼 치타 이후로도 여러 동물과 뒹굴며 놀았더니 제법 배가 고팠던 탓이다. 노랗게 잘 익은 망고의 껍질을 벗기고 한 입 베어 물자 절로 감탄이 새어 나왔다. 입 안 가득 달콤한 향내가 스며들며 말랑한 과실이 사르르 녹았다.

“음, 이번엔 뭘 먹을까?”

순식간에 망고를 다 먹어 치우고 다음 과일을 고르다가 문득 내 머리만큼 크고 잘 익은 멜론에 시선이 꽂혔다. 지난번에 먹었을 때 굉장히 달고 맛있었다. 손가락으로 가벼이 두드리자 통통, 기분 좋은 소리가 나는 게 이것도 맛이 좋을 것 같았다. 구미가 당기기에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멜론을 깰 만한 돌을 찾고 있을 때였다.

“호연, 무얼 찾는 거냐?”

내 바로 뒤에 엎드려 폭신한 배에 등을 기대게 해 주던 금왕이 물었다.

“어, 멜론을 먹고 싶어서요. 그래서 깰 만한…….”

나도 모르게 말끝을 흐렸다. 문득 예전에 금왕이 멜론을 쪼개 준 사실이 떠올라서였다. 멜론을 들고 물끄러미 금왕을 바라보았다. 내 의도를 눈치챘는지 금왕이 내 등을 꼬리로 받치고 몸을 살짝 일으키더니 파칭, 앞발의 발톱을 꺼냈다. 그러고는 톡톡 건드리는 것만으로 순식간에 멜론을 잘라 냈다.

“호연, 먹어라.”

그 두꺼운 멜론이 눈 깜빡할 새에 조각난 모습을 조금 멍한 얼굴로 바라보던 나는 금왕이 내미는 멜론 조각을 보고 정신을 차렸다.

“아,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풀밭에 흩어진 멜론 조각을 집어 한 입 크게 베어 무는 순간, 나는 마치 술을 들이켜기라도 한 사람처럼 캬아! 감탄사를 내뱉었다.

“맛있나?”

자신이 깨 준 멜론을 열심히 먹는 모습이 보기 좋았는지 금왕이 즐거운 목소리로 물었다.

“네! 어, 근데…….”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멈칫했다.

“저기, 금왕님은 금신의 샘물만 드셔야 하는 거예요?”

백호가 예전에 금왕과 금수 대표들은 금신의 샘물만 먹고도 살아갈 수 있다고 했지만, 미어캣과 문조가 나와 함께 과일을 먹었던 걸 보면 꼭 금신의 샘물만 먹어야 하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물었다.

“아니, 꼭 그렇진 않다. 고기가 아닌, 과일이나 채소 정도는 먹어도 상관없다.”

“그렇죠? 그럼, 이거 좀 드셔 보세요. 무척 달아요!”

예상대로의 대답에 환하게 웃으며 금왕에게 멜론을 내밀었다. 예전에 미어캣이 문조에게 그랬던 모습이 떠올라 괜히 혼자 흐뭇해하는데, 금왕은 좀 놀란 얼굴로 머뭇거렸다.

“아. 혹시 멜론 싫어하세요?”

“그런 게 아니라…….”

내가 멜론을 좋아하다 보니 미처 배려는 못 했던 건가? 걱정하며 묻자 금왕이 잠시 주저하다가 이내 내가 내민 멜론을 살포시 물어 삼켰다.

‘우와! 와…….’

갑자기 심장이 쿵쾅쿵쾅 뛰어 대기 시작했다. 바로 눈앞에서, 큼지막한 멜론을 한입에 쏙 집어삼키며 합 다물린 동그란 입매가 너무 귀여운 덕분이었다. 하나 금왕은 그런 내 상태를 미처 눈치채지 못하고 입 안에 녹아드는 멜론을 음미하는 중이었다. 오물거리며 움직이는 동그란 입매와 솜털이 보송보송한 턱이 점점 더 선명하게 눈에 박혀 들어왔다.

“아아!”

결국 참지 못하고 달려들어 금왕의 입 근처에 마구 얼굴을 비볐다. 움찔, 금왕이 몸을 굳혔지만 피한다거나 싫어하는 기색을 보이지는 않았다. 그에 용기를 얻어 몇 번 더 금왕에게 얼굴을 문지른 나는 쪽, 입을 맞춘 뒤에 다시 떨어져 과일을 먹었다. 물론, 중간중간 금왕에게도 과일을 건네 그가 과일을 먹으며 보여 주는 귀여움을 감상하는 걸 잊지 않았다. 전혀 생각지 못하게 식사 시간이 내게 더없는 행복을 가져다주었다.

이 식사 시간뿐이랴. 아프리카에 돌아와 다시 금왕과 함께 지내게 된 이후로 매 순간순간이 지금처럼 행복했다. 아니, 아프리카로 돌아오기도 전부터. 금왕과 다시 만난 그때부터 그랬다.

-저기, 금왕님…….

문득 내가 이 행복을 되찾았을 즈음의 기억이 떠올랐다. 금왕이 한밤중에 내게 찾아와 금신의 머리카락으로 반지를 만들어 주며 반려가 되기를 청하고 난 직후의 일이었다.

-……해서, 조금만 시간을…….

반려가 되겠다고 냉큼 대답했지만 그렇다고 그 즉시 금왕을 쫓아 이곳으로 올 수는 없었다. 여러 가지 사정이 있었지만 가장 우선적으로는 내 주변을 정리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반려가 되려면 내가 살던 집을 떠나야 했으니까. 이전처럼 그냥 잠시 떠나는 게 아니라 평생을 이곳에서 살아가기로 한 것이니, 주위에 아무 말도 없이 그냥 훌쩍 떠날 수만은 없었다.

어차피 다른 차원으로 떠나는 것이니 다른 현실적인 문제는 다 버려두고 와도 상관없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사람 관계는, 특히 친척들이 갑자기 사라진 나를 실종 신고 하고 사방팔방 찾아다니는 것만은 막아야 했다. 그러니 정리할 시간을 조금 달라는 내 청에 금왕은 흔쾌히 그러라고 대답해 주었다.

그리하여 약 사흘 정도 시간을 얻은 나는 곧장 친척들에게 멀리 떠나게 됐다는 소식을 전했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저 떠난다고만 한다면 걱정을 살 게 뻔했고, 그렇다고 사실대로 말하기도 곤란했다. 그래서 수많은 핑곗거리를 찾아봤지만 좀처럼 마땅한 것이 없었다.

그 와중에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 순식간에 금왕과 약속한 사흘이 끝나 가려 했다. 어쩔 수 없이 일단 가장 가깝게 지내던 고모부터 만나기로 했는데, 의외로 쉽게 이야기가 풀렸다. 그날 고모를 만나는 자리에 금왕이 함께 나갔는데―물론, 인간 모습을 하고―금왕이 대뜸 고모에게 내가 얼마 뒤면 자신의 반려가 될 예정이라고 솔직히 고백해 버린 것이다.

고모는 처음엔 그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한 듯하다가 곧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그대로 한참 동안 말없이 나를 바라보던 고모는 의외로 담담하게 그 사실을 받아들였다.

-호연이 네가 그래서 그렇게…….

지난 일주일간 내가 무척 괴로워했던 것을 아는 고모는 그게 남자를 좋아하게 되어서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물론 그 뒤에 내가 금왕과 함께하기 위해 이곳을 떠난다고 했더니―정확히는 말하지 않고 무척 먼 곳이라고만 했으니 아마 외국의 어딘가라고 생각했을 것이다―그때는 깜짝 놀라 좀 더 신중히 생각하라며 나를 말렸다.

하지만 그것도 인간으로 변신한 금왕이 내뿜는 그 어마어마한 야성의 페로몬이 효력을 발휘해 생각 외로 순조롭게 설득됐다.

그 뒤에는 고모의 도움과 또 사람을 홀리는 금왕의 페로몬이 더해지며, 얼떨떨할 정도로 간단히 친척들에게 인사를 고하고 떠날 준비를 마쳤다. 비록 금왕 자신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 같지만, 내게는 정말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모든 일이 다 끝날 때까지 믿음직스럽고 든든하게 내 옆자리를 지키며 내 손을 꼭 잡아 준 것이 무척 고마웠다.

아, 이래서 사람들이 사랑을 하는구나 싶을 만큼, 내 옆에서 온전한 내 편이 되어 손을 잡아 주는 그가 있다는 사실이…… 무척 행복했다. 그때부터 벌써 행복했으니, 내가 좋아하는 맹수들이 가득한 아프리카에 돌아온 이후는 말할 것도 없었다.

이렇게 종일 금왕의 품에서 뒹굴거리며 언덕 아래 맹수들을 행복한 마음으로 감상하는 것이 내 주요 일과였다. 감상하는 와중에 때로 폭발하는 사랑스러움에 당장 뛰어 내려가고 싶어지기도 했지만 가능한 자중하며, 요즘에는 거의 금왕만 조물거렸다.

그건 앞으로 반려가 될 예정이므로 중립을 지켜야 하기에 예전처럼 맹수들만 편애하면 안 된다는 규칙의 영향도 분명 있었지만, 그보다는 어쩐지 다른 맹수들보다 금왕과 함께 있는 데 정신이 팔린 탓이 더 컸다.

지금도 나는 언덕 아래의 수많은 맹수를 내버려 두고서 손안의 도톰한 꼬리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금왕의 품에 안겨 고 보드라운 것을 두 팔로 꼭 끌어안고 있노라면 가슴 안쪽이 말랑말랑해지며 행복이 퐁퐁 솟아올랐다. 그러니 굳이 더 다른 동물을 만질 필요가 없는지도 몰랐다.

그래도 사이즈 차이에서 오는 일반 금수들의 앙증맞은 귀여움이 그리울 때가 있기는 하지만. 새끼 동물들의 귀여움만은 포기할 수 없을 것 같지만. 어쨌든 지금은 손에 들어온 요 도톰한 꼬리가 내 모든 신경을 빼앗아 가는 중이었다. 이제는 제법 익숙해졌는지 내게 끌어안긴 채로도 기분 좋게 살랑거리는 꼬리가 정말이지 너무 사랑스러웠다.

“쪽!”

치솟는 충동에 살랑거리던 꼬리를 붙잡아 입 맞췄다. 요즘에는 단지 사랑스러워 보일 뿐만 아니라, 애정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흘러넘쳐서 꼭 이렇게 뽀뽀를 하지 않고는 견디기 힘들 지경이었다.

“쪽, 쪽!”

털이 보송보송 도톰한 꼬리를 두 손으로 꼭 붙잡아 계속 입맞춤을 날릴 때였다.

“호연…….”

내 손길에는 제법 적응을 했지만 뽀뽀에는 아직 익숙지 않은 금왕이 당황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만류의 뜻인 걸 알면서도 입가를 간질이는 감촉이 너무 좋아서 멈추지 못하고 계속 쪽쪽거리자 금왕이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앞발로 토옥, 내 머리를 짚어 왔다.

“이 녀석. 아직 혼례도 올리지 않았는데, 요즘 너무 짓궂구나.”

내 머리를 누른 손을 거두며 금왕이 한숨을 내쉬었다.

응? 나는 의아한 눈으로 금왕을 보았다. 사랑스러운 꼬리를 보고 샘솟는 애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표현했을 뿐인데 왜 짓궂다고 말하는가 싶었다. 그에 금왕이 다시 한번 한숨을 쉬더니 살며시 몸을 낮춰 내 머리 위에 동그란 입을 톡 맞췄다.

“금왕님?”

머리에 더해진 중량감에 의문을 표해도 금왕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저 정신을 차리라는 의미인지 할짝, 내 얼굴을 그 크고 촉촉한 혀로 핥아 주었을 뿐.

“하하.”

강아지의 혀처럼 보드랍고 따스한 감촉에 절로 웃음이 터졌다. 그러자 동그래진 눈으로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는 금왕의 모습이 귀여워서 그의 목을 힘껏 끌어안아 얼굴을 비볐다. 그때였다.

“이야, 누가 신혼 아니랄까 봐. 정말 깨가 쏟아지는데?”

등 뒤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놀라서 고개를 돌리는 나와 달리 진작 기척을 느꼈는지 금왕이 자신의 목에 매달려 있던 나를 꼬리로 말아 바닥으로 살포시 내려 주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지룡왕(地龍王).”

지룡왕?

“설마, 설왕에 이어 금왕 너까지 이렇게 될 줄이야.”

정말 의외라는 표정을 짓고 있는 지룡왕은 주황빛 머리칼이 눈부신 장신의 사내였다. 금왕이나 설왕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보다 반 뼘 이상은 컸고, 한눈에 확 띌 만큼 뚜렷한 이목구비는 아니지만 무척 단정한 인상이었다.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놀러.”

하나 금왕의 물음에 대답하는 심드렁한 목소리는 썩 단정치 못했다.

“용왕께서 용케 허락을 해 주셨습니다.”

“허락 안 해 주면 용신께 가출할 거라고 협박했거든.”

이어지는 대답 역시 그랬다.

“용왕을 너무 괴롭히지 마십시오.”

“뭐.”

금왕의 당부에 가볍게 어깨를 으쓱거리는 모습은 더욱.

“그 자식이 내가 너무 좋아 죽겠다고 괴롭히지만 않으면 말이야.”

자신의 손으로 제 목을 조르며 혀를 쭉 빼내는 모습은 참…… 단정이라는 말과는 안 어울릴 정도로 불량했다.

금왕의 설명에 따르면, 금수들의 세상이 오기 전 용들이 세상을 지배하던 때가 있었다고 한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공룡보다 훨씬 오래된, 신비로운 용(龍)들이 살아가던 세상이. 그리고 그 용들의 세상을 다스리던 용왕이 셋 있었다.

수룡을 비롯한 바다의 모든 생물을 다스리던 해룡왕, 지룡을 비롯한 땅 위의 모든 생물을 다스리던 지룡왕, 비룡을 비롯한 하늘의 모든 생물을 다스리던 비룡왕. 이들은 각각 용신의 눈물과 용신의 손톱, 용신의 머리카락에 용신의 숨결이 닿아 탄생했다. 용신의 눈물에서 탄생한 이가 해룡왕, 손톱에서 탄생한 이가 지룡왕, 머리카락에서 탄생한 이가 비룡왕이었다.

그렇게 형제처럼 한 몸에서 태어난 그들은 셋이서 사이좋게 세상을 다스리며 평화롭게 지냈지만, 안타깝게도 시간이 지나 용의 세상이 끝나 버렸다. 그래도 바다의 해룡왕은 계속 바다에 머물며 용왕이 되어 바다 생물들을 다스렸고, 비룡왕 또한 비왕이 되어 하늘을 계속 지배했다. 하지만, 지룡왕은 그렇지 못했다. 그는 용의 세상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금왕이 탄생하자 자신의 자리를 물려주고 오래전부터 친구였던 해룡왕의 곁으로 갔다고 한다.

아니, 그 이야기가 나왔을 때쯤 곁에서 듣고 있던 지룡왕이 ‘끌려갔다’는 표현이 맞는다며 정정해 주었다. 자신은 이 지상 어딘가에서 세상과 동떨어져 짱박힐 장소를 물색하고 있었는데, 그 스토커 같은 물뱀이 자신을 강제로 끌고 갔다면서 이를 갈았다.

어쨌든 세 용왕들의 역사가 그러하니, 따지자면 용왕들은 모두 금왕보다 선배 왕들인 셈이었다.

“정말 별일이야, 금왕 네가 인간 반려를 맞다니.”

그러니 금왕을 향한 지룡왕의 하대는 무척 자연스러운 것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금왕도 엄연히 금수들을 다스리는 훌륭한 왕. 결코 위엄이 뒤처지지는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름 뿌듯한 얼굴을 할 때였다.

“인간이 아니라, 호연이라고 합니다.”

어?

“뭐?”

나와 동시에 놀란 표정을 짓던 지룡왕은 이내 하하하, 통쾌한 웃음을 토해 냈다.

“정말 아주 깨가 쏟아지네.”

지룡왕의 중얼거림에 어쩐지 쑥스러운 기분이 들어서 곁에 있던 금왕의 배로 달라붙었다. 그러자 뒷다리를 굽히고 앉아 있던 금왕이 앞발을 들어 내 등을 자신에게로 살짝 끌어당겼다. 그 모습을 본 지룡왕이 ‘정말 신혼이라니까.’ 하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근데, 너희 속도위반인 거 알지?”

소, 속도위반?!

지룡왕의 말에 깜짝 놀라서 눈을 부릅떴다.

“금왕 너 혼례도 올리기 전에 벌써 반려에게 금신의 머리카락을 먹게 했다며. 대충 사정을 들어서 급했다는 건 알고 있지만…… 혼례는커녕 우리 왕들에게 소개해 주기도 전에 그러는 건 심하게 빨랐다고.”

아. 이 세상에서는 그런 걸 속도위반이라고 하는구나.

새로운 깨달음과 함께 놀란 마음을 진정시켰다.

“죄송합니다. 안 그래도 자리를…….”

“우리가 이미 비왕의 성에 자리는 만들어 놨어. 이제 너희만 가면 돼.”

지룡왕이 금왕의 말을 자르며 대답했다.

“네?”

금왕이 반응하기 전에 내가 먼저 당황해서 반문했다.

“벌써 비왕의 성에 모두 모여서 너희를 기다리고 있다니까? 쉽게 말해, 속도위반을 했으면서도 느긋해 빠진 너희들 때문에 성질 급한 우리가 참지 못하고 자리를 준비해 놓았으니, 너희는 참석만 하라고.”

“저기, 조금 전에는…….”

놀러 왔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물음을 다 내뱉기도 전에 지룡왕이 대수롭잖은 듯 손을 흔들었다.

“응. 놀러 오기도 했지. 근데 마침 너희를 데려가기도 할 거라니까? 너희 둘이서는 하늘에 있는 비왕의 성에 가지 못할 테니까.”

“하늘…….”

하늘에 간다고? 그 소식에 잠시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나와 금왕은 그렇다 쳐도 지룡왕도 지상의 생물일 텐데 대체 어떻게 하늘에 간단 말인가. 나와 금왕이 하늘을 날지 못하듯, 지룡왕도 비슷한 거 아닌가?

의문을 떠올린 순간, 갑자기 금왕이 큼지막한 앞발을 이용하여 보드라운 털이 가득한 자신의 품에 나를 묻었다. 얼굴에 착 감기는 부들부들한 감촉이 기분 좋아서 나도 모르게 얼굴을 비비는데 등 뒤에서 파앗―! 강렬한 빛이 번쩍이는 게 느껴졌다. 마치 금왕이 모습을 바꿔 변신할 때처럼. 설마, 하는 생각에 고개를 돌렸다가 그대로 입이 턱 벌어졌다.

“자, 얼른 올라타라고. 오늘의 주인공들.”

집채만 한 금왕조차 작아 보일 만큼, 거대한 강과 같이 굵고 긴 몸체가 온통 반짝이는 주황색 비늘로 덮인 용이 말했다. 하지만 나는 꼼짝하지 못했다. 앞서 몇 번이고 그가 용이라고 들었지만, 워낙에 비현실적인 이야기라 실감이 되지 않았다. 사실 눈으로 직접 보고도 잘 믿기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정말이지 이건 만화에서나 봤을 법한, 그야말로 당장 신성한 여의주를 들고 하늘로 승천할 것만 같은 위엄이 가득한 용 그 자체였다.

그럼에도…… 나는 그 모습에서도 귀여움 포인트를 찾아내고야 말았다.

덩치만큼이나 큼지막한 눈 위를 소복이 덮은 뽀송뽀송해 보이는 주황색의 눈썹이라든지, 눈에 그늘이 질 만큼 기다란 속눈썹이라거나, 반짝이는 금빛 눈이라거나, 턱 아래에서부터 목 뒤를 뒤덮은 갈기처럼 복실거리는 털이라거나.

그리고 코 아래 난 긴 수염과 길쭉한 등 가운데에 나 있는 보드라운 털, 몸 아래 작게 붙어 있는 꼭 오므려진 앙증맞은 발까지 다 귀여웠지만, 그 무엇보다 머리에 난 루돌프처럼 큰 뿔과 그 아래의 까딱거리는 사슴 같은 귀가 정말…….

‘귀여워!’

지룡왕의 본체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나도 모르게 와락 달려들려던 찰나였다. 어쩐지 내 몸이 허공에서 허우적거린다고 생각했는데, 허리를 감싼 익숙한 감촉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자 금왕이 작게 고개를 흔들어 보였다.

‘아차.’

그제야 정신이 들어서 눈앞의 상대는 여느 금수가 아닌 지룡왕이라는 걸 깨달았다. 동시에 금왕도 감히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그에게 무례를 저지를 뻔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잠시 얼어붙었다. 그러자 금왕이 괜찮다는 듯 동그란 앞발로 내 머리를 토옥 두드리더니, 내 허리를 꼬리로 감싼 그대로 훌쩍 뛰어 지룡왕의 등에 올라탔다.

“자, 꽉 붙잡으라고!”

우리가 올라타기를 기다리고 있던 지룡왕이 힘찬 외침과 함께 스르르, 긴 몸체로 물결을 만들며 움직이더니 언덕을 벗어나 그대로 공중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우왓!’

날 거라고 듣기는 했지만, 정말 그 상황을 경험하자 나도 모르게 옆에 있던 금왕의 앞다리를 끌어안았다. 금왕이 나를 안심시키듯 꼬리로 등을 톡톡 두드려 주었다. 그동안 완만하게 하늘로 떠오르던 용이 거의 수직에 가깝게 솟구치기 시작했다. 나는 더욱 놀라서 금왕에게 매달렸지만, 금왕은 익숙한 듯 균형을 잡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를 태운 지룡왕이 다시 완만한 각을 그려 냈다. 대신 이전보다 훨씬 속도가 빨라져서 나는 털이 복슬복슬한 금왕의 품을 더욱 파고들어야 했다.

지룡왕의 비행은 금왕의 등을 타고 달리는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이 빨랐다. 하나 당황해 연신 놀라는 나와 달리 금왕은 익숙한 듯 늠름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그 상황이 왠지 너무 비현실적이라 나는 도리어 여유를 찾을 수 있었다.

아니, 여유가 아니라 얼이 빠져 좀 멍해진 것에 가까웠다.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상황에 비하면, 처음 금왕과 만나 말하는 동물들을 본 건 놀랄 거리도 아니었던 것 같다. 세상에 흑호와 함께 용을 타고 날다니, 이런 꿈같은 일이…… 이건 내 평생 상상조차 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인간, 아니, 호연. 넌 처음 날아 보나?”

지룡왕이 황금색 눈을 뒤쪽으로 굴려 어안이 벙벙해진 나를 보며 물었다. 그 어마어마한 속도로 날아가는 것치고 무척 여유로운 목소리였다.

“네에…….”

당연히, 라고 덧붙이고 싶었으나 참았다. 그렇게 말한다고 한들 거침없이 하늘을 나는 지룡왕은 전혀 이해하지 못할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문득 떠오르는 의문에 지룡왕을 내려다보았다.

“저어, 근데…… 지룡도 원래 날 수 있는 건가요?”

“설마. 그럼 비룡이지 지룡이 아니지.”

“어, 그럼…….”

당신은 어떻게? 혹시 왕이라서 특별히 가능한 건가? 나름대로 추측을 떠올릴 때였다.

“나도 원래는 못 날았는데, 예전에 시퍼런 물뱀한테서 도망가려고 용신한테 조르고 졸라 날 수 있게 됐지. 나중엔 망할 물뱀도 이 기술을 얻어서 소용없어졌지만.”

쳇, 지룡왕이 아직도 불만이라는 듯 혀를 찼다. 하나 나는 그에 상관치 않고, 나를 감싸듯 앉아 있는 금왕을 올려다보았다. 만약 지룡왕이 하늘을 날 수 있는 거라면 혹시 금왕도?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런 내 생각을 읽었는지 지룡왕이 말했다.

“아서라. 날개 달린 용은 몰라도 날개 달린 호랑이는 이상하잖아.”

“아.”

묘하게 납득이 가는 말이라 가만 고개를 끄덕이자 어째선지 지룡왕이 하하, 호탕하게 웃었다.

“자, 다 왔다.”

점점 빨라지는 지룡왕의 비행에 금왕의 넓은 품에 꼭 안겨 있기를 한참, 마침내 그가 속도를 줄이더니 결국에는 멈춰 섰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나는 지룡왕을 보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다시 한번 입을 떡 벌리지 않을 수 없었다.

“구, 구름바다?”

지룡왕이 멈춰 선 곳은 무척 길게 뻗은 직선로였다. 결코 그 폭이 좁지 않았지만 지룡왕이 워낙 거대해서 그가 건너니 길이 꽉 찼다. 그래서 아래를 내려다본 나는 길이 아닌 그 길옆의 공간을 가득 채운 것들, 그러니까 구름만을 잔뜩 볼 수 있었다. 몽실몽실, 금왕의 뽀얀 배를 보는 것처럼 귀여운 구름이 가득한 그곳에는 또.

뀨우―.

구름보다 더 하얀, 예전에 설왕의 성에 다녀오며 본 적 있는 흰고래와 똑같이 생긴 고래가 몽실몽실한 구름 사이를 오가며 놀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 곁에는 고래만큼이나 새하얀, 눈을 연상케 하는 흰색의 바다표범이 있었다. 하프 바다표범이라고 불리는, 바다표범의 새끼였다.

이름에 걸맞게 진짜 표범처럼 둥그런 입매에 동그란 머리, 코 옆에 송송 난 수염, 그리고 라인이 선명한 까만색의 큼지막한 눈과 그 위에 눈썹처럼 두어 가닥 난 수염, 타원형의 오동통한 몸매, 맹수들처럼 날카로운 발톱이 돋보이는 보송보송한 털로 덮인 앙증맞은 앞발과 물고기의 꼬리지느러미처럼 유연한 뒷발, 거기에 어린 하프 바다표범 특유의 뽀얀 털빛이 더없이 귀여웠다.

하지만 다 자란 하프 바다표범은 털갈이를 하며 회색의 털을 갖게 되고, 또 암수에 따라 모양과 진하기가 다른 하프 모양의 얼룩무늬가 생겼다. 이렇게 눈처럼 하얀 털빛은 어릴 때 잠깐으로, 그리 오래가지 않는 편이었다.

그래서 이 하프 바다표범이 어린 새끼일 때 가지는 하얀 털은 귀하고 한눈에도 탐스러워 비싼 모피로 사용되었다. 그러자 수많은 사냥꾼이 다 자라지도 않은 어린 새끼들을, 태어난 지 채 며칠, 혹은 몇 달도 안 된 어린 새끼들을 잔인하게도 죽여 댔다.

그런 배경이 자연스레 떠올라 왠지 마음이 짠해지는데, 구름으로 만들어진 바다에서 흰고래와 함께 놀고 있는 하프 바다표범을 보자 조금 위로가 되었다. 그래서 뒤늦게, 작게 웃음까지 지으며 그 모습을 구경했다.

특히나 우리를 태운 지룡왕이 나아가는 것에 맞춰 흰고래와 하프 바다표범이 함께 바다를 헤엄쳐 뒤따라오는 모습이 그렇게 귀여울 수 없었다. 둘 다 반갑다는 듯이 눈을 일자로 만들어 웃는 모습이 더없이 사랑스러워 나는 자칫 저 구름바다로 뛰어들 뻔했다.

사실 벌써 금왕의 품에서 벗어나 지룡왕의 등 가장자리까지 걸어가 있는 상태, 아니, 내가 밟고 선 지룡왕의 등이 거의 발끝에 걸려 있었다. 만약 금왕이 내 허리를 꼬리로 감싸지 않았으면, 벌써 빠지고도 남았을 상황이었다.

“호연…….”

금왕이 못 말린다는 듯 나를 부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제야 정신이 든 나는 서둘러 변명했다.

“어, 저기…… 진짜 귀여워서요. 그래서 저도 모르게…….”

“그래, 하지만 저곳에 잘못 들어갔다가는 지상으로 추락할 수 있으니 조심하는 게 좋다.”

“추, 추락이요?”

다정한 목소리와 달리 조금 살벌한 내용에 나는 깜짝 놀라 금왕을 보았다.

“그래. 비왕에게 허락받지 않은 이들이 들어가면 그렇게 돼.”

우리를 태우고 있던 지룡왕이 금왕을 대신해 대답했다.

“그러니 죽으려는 게 아니라면. 허락을 받지 못했거나, 날지 못하는 녀석들은 함부로 들어가지 않는 게 상책이지.”

그 말에 비로소 내가 얼마나 위험한 일을 하려 했는지 실감하며 가슴을 쓸어내리던 때였다.

“호연아!”

어쩐지 무척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자, 저 멀리 길이 끝나는 지점에서 폴짝폴짝 뛰며 신나게 손을 흔드는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바로…… 설왕의 반려, 백하(白夏) 님이었다. 그리고 그들 너머에, 생전 처음 보는 낯선 얼굴 셋이 더해져 우리를 맞이했다.

“기어 와?! 왜 이렇게 늦어?”

우리가 길 끝에 도착하자마자 짙은 청색 머리칼을 허리까지 길게 늘인, 지룡왕만큼이나 단정하게 생겼지만 조금 더 선이 굵고 키가 큰 사내가 다급히 달려왔다. 그는 지룡왕의 기다란 귀를 한 손으로 꽉 붙잡아 당기며 얼굴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나운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그래, 기어 왔다. 봤으면서 뭘 물어. 그리고 전혀 안 늦었거든? 난 네놈처럼 무식하게 달리지 않으니 이 정도면 충분히 빠른 거라고.”

지룡왕이 지지 않고 심드렁하니 받아쳤다. 그에 푸른 머리칼의 사내가 막 무어라고 사납게 소리치려다가 문득, 지룡왕의 위에 올라타 있는 우리에게 시선을 던졌다.

“금왕, 오랜만이다. 아, 네가 요즘 한창 시끄러운 금왕의 인간 반려인가?”

청발의 사내는 지룡왕을 대할 때와는 사뭇 다른 살가운 태도로 우리를 맞이했다.

“근데, 다 왔으면 얼른 내 거에서 내리지 그래?”

……아니, 그런 듯 보였으나 돌연 살벌하게 눈을 빛내며 인상을 썼다. 그 순간 금왕이 내 허리에 꼬리를 감아 나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날렵한 몸놀림으로 풀쩍 뛰어 지룡왕의 등 위에서 지상으로 순식간에 이동했다.

“죄송합니다, 용왕(龍王).”

바닥에 내려선 금왕이 고개를 낮추며 정중히 사과하자 청발의 사내, 용왕은 가벼이 손을 흔들었다.

“아니, 죄송할 것까진 없고. 그냥 내 거에 다른 게 닿는 게 싫어서. 이럴 줄 알았으면 내가 데리러 갈 걸 그랬나.”

“퍽이나. 네가 잘도 네 등 위에 누굴 태우겠다.”

지룡왕이 가당치도 않다는 듯 코웃음 쳤다. 그에 용왕이 씩, 어쩐지 소름이 돋을 것처럼 능글맞은 미소를 띠었다.

“넌 수도 없이 타 놓고 왜 이래?”

“이 망할 물뱀! 말은 똑바로 해. 그게 내가 탄 거냐? 네가 억지로 납치해 태운 거지!”

“아, 그래? 그럼, 오늘은 네가 자진해서 타 보는 거 어때. 내 등에 널 태우고 데이트를 가 보는 것도 좋을 거 같은데?”

지룡왕이 울컥해서 외치다가 자신을 바라보는 용왕의 뜨거운 눈빛에 아차, 하며 입을 다물었다.

“응?”

“……변신할 거니까 눈이나 감아, 물뱀 자식!”

용왕이 비늘로 덮인 미간을 야릇하게 쓸어내리며 재촉하자 지룡왕이 사납게 쏘아붙였다. 그 순간 금왕이 꼬리로 내 눈을 가려 주었다. 익숙한 상황에 눈을 감자 눈꺼풀 너머로 파아앗, 강렬한 빛이 폭발하는 감각이 느껴졌다. 이윽고 금왕의 꼬리가 멀어지는 느낌에 눈을 뜨자, 처음 만났을 때의 모습으로 돌아간 지룡왕이 보였다.

“야아, 다들 오랜만이네. 설왕의 반려 소개 때 이후 처음 모이는 건가? 설왕네야 뭐 아직 신혼이니 깨가 쏟아져 잘 살지 않을 리 없고. 염왕 넌 요새 은근히 자주 외출한다? 아, 오늘은 초왕이랑 같이 와서 그런가.”

‘염왕?’

지룡왕의 말에 서둘러 주위를 살폈다. 그리고 목가에 늘어져 찰랑거리는 연둣빛 머리칼을 가진 순진한 눈망울의 어린 소년과 그 품에 안긴 익숙한 얼굴의 사막 여우를 발견했다. 키가 큰 설왕 뒤에 가려져 있어서 아까는 미처 보지 못했다.

“당연하지. 내가 쓸데없이 인간 따윌 보고 싶어 할 것 같으냐. 이 녀석이 혼자 가기 쑥스럽다고 하도 부탁을 해서 함께 온 것뿐이야.”

염왕의 퉁명스러운 대답에 그를 안고 있던 연둣빛 머리칼의 소년, 초왕이 당황한 듯 뽀얀 뺨을 붉게 물들였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빤히 바라보자 초왕이 마치 식은땀이라도 흘릴 것처럼 깜짝 놀라더니 얼굴을 더욱 빨갛게 물들이며 고개를 숙였다.

무척이나 수줍음을 많이 타는 아이, 아니, 왕인 듯했다. 흡사 귀여운 새끼 토끼를 연상케 할 것처럼 무해하고 귀여우며 사랑스러운 모습이라 멍하니 바라볼 때였다.

“쳇. 나 때는 초왕이 꼬셔도 안 와서 우리가 찾아가게 만들었으면서.”

목소리의 주인은 백하 님이었다. 그는 자신을 끌어안은 설왕의 가슴에 뒷머리를 기대어 고개를 꺾으며 그치? 하고 동의를 구했다. 하지만 설왕이 대답하기도 전에 염왕이 쯧, 혀를 찼다.

“네놈이 하필 설왕의 성에서 보자고 하니 그랬지. 난 추운 건 딱 질색이라고.”

“열기 조절하면 되잖아.”

“내가 뭐 하러 인간 따위를 위해 그렇게까지 해. 하긴, 넌 사실 인간 같지도 않았지만. 처음 보자마자 감히 내 꼬리를 쥐고 흔들다니. 건방지게.”

“이 시비쟁이야. 너 자꾸 이러면 네 사막을 눈으로 뒤덮어 꽝꽝 얼리는 수가 있어.”

“흥. 그만큼 눈을 다룰 능력도 안 되면서.”

“난 안 되지만, 우리 설왕은 되지.”

“그래서, 붙어 보자는 거냐?”

“……저어기.”

염왕과 백하 님이 한창 티격태격하는 가운데 갑자기 낯선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어린아이의 가녀린 미성처럼 앳된 목소리였다.

“싸우지…… 마세요.”

아니나 다를까, 갑자기 둘 사이에 끼어든 이는 무척이나 키가 작은 어린아이였다. 어깨 근처에서 하늘하늘 흩날리는 하늘색 머리칼이 탐스러운 아이는 초왕보다도 더 작고 어려 보였지만, 초왕과 마찬가지로 크고 순진한 눈망울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 그 느낌은 사뭇 달랐다. 초왕이 그 순진하고 큰 눈망울을 하고서 아무 말도 못 한 채 고개만 꾸벅 숙일 정도로 내성적이고 수줍음 많은 소년이었다면, 비왕은 그야말로 천진한 어린아이의 모습이었다. 초왕이 뽀송뽀송한 솜털을 가진 겁 많은 토끼라고 한다면, 비왕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돼 솜털이 가득 덮인 순진무구한 아기 새 같은 느낌이었다. 비슷한 듯하면서도, 미묘하게 달랐다.

“안녕……하세요.”

진짜 아이처럼 내게 꾸벅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는 비왕은, 예전에 독수리가 들고 온 고풍스러운 취향의 두루마리와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몸에 두른 하얀 옷에 빼곡히 새겨진 우아한 꽃 자수는 조금쯤 연관성이 있어 보였다. 그 사실을 확인하느라 나는 한 박자 늦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아, 안녕하세요!”

“저는, 비왕이에요…….”

비왕이 연푸른색의 눈동자로 멍하니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넋이 빠진 것처럼 초점이 풀린 눈에 의아한 시선을 보내는데 갑자기 무척이나 강해 보이는 인상의 사내가 비왕의 곁으로 다가오더니 손날로 그 머리를 사정없이 내리쳤다.

“제발, 말하다 졸지 좀 마십시오. 비왕.”

“……아파.”

사내의 공격에 비왕이 한 박자 늦게 울먹였다. 그건 흡사 눈물이 그렁그렁했던 삵을 연상케 할 만큼 무척 애처롭고도 안쓰러운 표정이었는데 사내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대신 나를 향해 돌아서더니 비왕을 대할 때와는 전혀 다르게 정중한 태도로 허리를 굽혔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인간. 아니, 금왕의 반려.”

어? 처음 뵙겠습니다, 가 아니라?

“독수리, 나빠!”

비왕이 고 작은 발로 뻥, 사내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덕분에 내 앞에 선 사내가 예전에 금왕에게 전갈을 전해 주러 온 독수리의 인간형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동안 독수리는 비왕에게 걷어차인 자신의 정강이를 부여잡으며 신음을 삼켰다. 강인해 보이는 얼굴답게 자리를 방방 뛰며 소란을 피우지는 않았지만 그 냉정하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는 걸로 봐서 여간 아픈 게 아닌 모양이었다.

“비왕…… 이러시면 오늘 간식은 없습니다.”

한참 만에 겨우 아픔을 삭인 독수리가 조금 잠긴 목소리로 나지막이 내뱉었다. 비왕이 냉큼 그를 올려다보며 불만스럽게 소리쳤다.

“치사한 독수리!”

“그게 싫으시면 얼른 오늘 해야 할 일을 마치세요. 대신 잘하시면, 두 배로 드리겠습니다.”

“진짜?”

“제가 언제 거짓말하는 거 보셨습니까.”

보살핀 역사가 오래되었는지 독수리는 무척 능숙하게 비왕을 다뤘다. 비왕이 갑자기 의지가 샘솟는 듯 눈을 반짝이기 시작했다. 그 순간, 염왕의 쌀쌀맞은 목소리가 공기를 울렸다.

“뭐야, 결혼하는 건 금왕이랑 저 인간인데 왜 다들 하나같이 쌍쌍이야?”

“쌍쌍은 누가!”

“설마 저희도 포함입니까?”

지룡왕이 즉시 반발했고 인상을 잔뜩 찡그린 독수리가 그 뒤를 이어 불만을 표출했다.

“뭐야, 너 아직도 너랑 내 관계를 몰라?”

“지금 싫다는 거야, 독수리?”

용왕과 비왕이 거의 동시에 지룡왕과 독수리에게 눈을 부라리며 다그쳤다. 먼저 말을 뱉은 둘은 윽, 신음을 삼키며 딴청을 피웠다.

“그럼, 둘인데 부러 혼자 올까. 왜 괜히 시비야. 혹시 질투하는 거라면 너도 반려를 맞지 그래? 전에 외롭다며.”

진짜 완벽한 한 쌍이라 아무 불만 없이 염왕의 말을 듣고 넘긴 백하 님이 뒤늦게 핀잔을 주었다. 그에 염왕이 무어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초왕이 화들짝 놀라며 품에 안긴 그를 내려다봤다.

“외롭기는 누가. 난 혼자가 아주 편하다고.”

“그럼, 말던가. 평생 그리 혼자 살아.”

“당연하지. 반려는 무슨.”

백하 님과 티격태격하는 염왕을 지켜보던 초왕이 소리 없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어?’

설마……. 하는 의심을 품으며 주위를 훑어봤다. 하지만 백하 님은 어느새 설왕을 마주 안으며 연인 간의 긴밀한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고, 용왕과 지룡왕은 둘이서 무언가 토닥거리고, 독수리도 비왕에게 한껏 시달리느라 바빠 다들 초왕의 그 모습을 보지 못한 듯했다. 그래서 조금 실망했다가 문득 내 옆에 선 금왕을 돌아보았다.

“호연?”

마침 금왕도 나를 걱정스레 보고 있던 터라 눈이 마주쳤다. 그에 왠지 우리도 염왕이 말한 한 쌍이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면서 웃음이 나왔다. 나는 금왕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그런 내 행동에 금왕이 처음엔 조금 당황하다가 고 도톰한 앞발로 나를 살며시 끌어당겼다.

“어, 근데 금왕님은 변신 안 하세요?”

금왕의 복슬복슬한 목털이 기분 좋아 얼굴을 마구 비비다 한참 만에야 그를 놓아주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주위를 채운 왕 가운데 염왕을 제외하고는 모두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염왕이야 인간을 싫어하니 변신하지 않는다고 해도 금왕은 그게 아닐 텐데 싶어서.

“안 그래도, 지금 막 변하려던 참이다.”

금왕이 살랑거리는 꼬리로 내 눈을 가렸다. 자연스레 눈을 감았다가 다시 천천히 떴다. 그러자 눈앞에, 벌써 두 번이나 보았지만 여전히 가슴 두근거리게 멋진 금왕이 서 있었다. 눈이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쿵쿵, 뛰어 대는 심장을 주체하지 못할 때였다. 금왕이 문득 손을 내밀었다.

“호연…….”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멀거니 바라보자 금왕이 그윽한 목소리로 나를 부르더니 덥석, 내 손을 붙잡았다.

“아…….”

그제야 상황을 파악하고 멍하니 탄성을 내뱉자 금왕이 붙잡은 손에 더욱 힘주어 나를 끌어당겼다. 흑호의 모습인 그와의 접촉도 무척 기분 좋고 행복하지만, 인간의 모습을 한 그는 더욱 내 심장을 뛰게 만들었다. 그래서 손이 맞닿은 것만으로도 심장이 쿵쾅쿵쾅 터질 것처럼 뛰어 댔지만,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너무 기분 좋아 심장을 부여잡으면서도 놓지 않았다.

“모두 모였으니 이제 그만 준비된 자리로 가시지요.”

드디어 비왕과의 실랑이가 끝났는지 독수리가 지친 표정으로 말했다. 그에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옮겼다.

“젠장, 이거 안 놔?!”

“안 놔.”

용왕은 한껏 빠져나가려고 몸부림치는 지룡왕의 허리를 꼭 끌어안은 채로.

“괜찮으니까, 그냥 걸어.”

염왕은 혹시나 자신이 불편할까 봐 연신 걱정하는 초왕에게 그만하면 됐다고 안심시켜 주면서.

“어서 와, 호연.”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보이는 백하 님은 설왕의 품에 폭 안긴 모습으로.

“비왕, 넘어지십니다.”

앞서 걸어가던 독수리는 뒤따라오다가 또 중간에 졸며 비틀거리는 비왕을 부축하며.

“호연, 가자.”

“네.”

금왕과 나는 손을 꼭 맞잡은 그대로, 모두 각양각색의 모습을 하고 같은 길을 걸어 나갔다.

비록 만찬이라고 이름 붙였지만, 상 위에 차려진 음식은 간단했다. 금왕뿐만 아니라 다른 왕들 전부가―그 반려도―자신들을 보살펴 주는 신의 샘물만 마시고도 살아갈 수 있기에 굳이 다른 음식을 먹지 않는 이들이 많았다. 그래서 수많은 과일과 채소, 그리고 달콤한 음료들만 한가득 올라와 있을 뿐이었다. 게다가 왕들의 만찬은 음식을 즐기는 것보다 여러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 더 중요해 보였다.

“그나저나 커플 하니까 말인데, 최근에 우리 용궁에도 바다표범이랑 백상아리라는 말도 안 되는 커플이 생겼거든. 진짜 그것들이 어떻게 연결됐는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신기하게도 그렇게 됐더라고.”

여러 가지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주고받던 와중 용왕이 설왕과 그 반려를 보며 말했다.

“그래서 생각났는데 설왕네 북극곰이랑 북극여우는 잘 지내?”

“어. 완전 찰싹 붙어 지내지. 원래 걔네들은 자연에서도 사이가 나쁘지 않잖아.”

입을 열면 앞에 있는 식탁에 눈보라를 뿌리게 되는 설왕을 대신해 백하 님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근데 바다표범이랑 백상아리면, 좀 의외긴 하네.”

“솔직히 연애라기보다 바다표범이 백상아리만 보면 벌벌 떨기 바쁘지.”

백하 님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지룡왕이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그에 백하 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근데 진짜 어쩌다 그렇게 조합이 됐대? 용왕네 바다표범 워낙에 겁이 많아서 대표가 되어서도 백상아리나 다른 사나운 놈들한테는 다가가지도 못했잖아.”

“왜, 그전에 바다표범이랑 짝을 지어 줬던 돌고래가 갑자기 연애를 시작해서 좀 즐기다 오라고 휴가 줬잖아.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백상아리한테 그 빈자리를 잠깐만 채워 달라고 했는데…… 어느새 그리 되었더라고.”

“하아…… 불쌍해라.”

보나 마나 백상아리가 홀딱 벗겨 먹은 거겠네. 혼잣말을 삼킨 백하 님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동안 용왕이 나를 쳐다봤다. 둘이서 나누는 대화가 너무 신기해 잔뜩 집중해 있다가 갑자기 마주친 시선에 흠칫 놀랐을 때였다.

“그나저나 금왕네 사자랑 설표는 어때?”

“네?”

사자랑 설표는 왜 갑자기? 의아해하는 나와 달리 백하 님은 무언가 짐작 가는 바가 있는지 아, 하며 탄성을 흘렸다.

“맞다. 걔네도 전부터 이야기 나왔지. 근데 둘 다 완전 둔해서 시간 꽤 걸리겠던데……. 한 십 년쯤은 지나야 엮어지지 않을까?”

“네에?!”

깜짝 놀라서 반문하고는 곧바로 금왕을 돌아봤다. 저 이야기가 사실이냐고 뜨악한 얼굴로 묻자 금왕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를 대신해 용왕과 백하 님에게 대답했다.

“아직은 짝사랑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래? 여전히 그 상태인가.”

“거보라니까.”

곧바로 이해한 둘과 달리 나는 얼굴 가득 ‘누가?’ 하는 의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자 금왕이 내게 살며시 고개를 숙인 채 ‘사자가’ 하고 속삭여 주었다. 순간 울림 좋은 목소리와 함께 귀를 파고드는 숨결에 오싹한 기분이 들어 귀를 부여잡았던 나는 뒤늦게 그 말을 이해하고는 다시 한번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저, 정말요?’

금왕은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조금 충격에 휩싸여 있는데 지룡왕이 갑자기 흠흠, 헛기침을 하며 우리를 주목시켰다.

“그럼, 이제 본격적인 이야기에 들어가서. 혼례는 언제쯤 할 계획이야, 너희?”

“다음 주로 예정하고 있습니다.”

“뭐 하러 미뤄, 그냥 바로 후딱 하지.”

금왕의 대답에 지룡왕이 답답하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금신께도 아직 인사를 못 드려서…….”

“아, 맞다. 급해서 머리카락을 먼저 받아 왔다고 했지? 그럼, 혼례 장소는…….”

그렇게 본격적으로 혼례에 대한 의논이 시작되었다. 아직 정식으로 반려가 된 것도 아니고, 이 세계도 다소 낯설어 오가는 이야기만 멍하니 듣고 있노라니 금왕이 잠깐 산책이라도 하고 오라며 나를 보내 주었다.

내 혼례 이야기 중인데 그래도 될까 싶어서 머뭇거렸지만, 금왕을 비롯해 다른 왕들이 전혀 상관없다며 손을 휘젓는 모습에 발걸음을 뗐다. 사실 안 그래도 앞서 본 구름바다가 너무 신기해서 제대로 한번 구경하고 싶었다. 그곳에 살고 있는 흰고래와 하프 바다표범 새끼도.

마치 동화 속인 것처럼 몽실몽실한 구름바다를 구경하느라 너무 느긋하게 걸어서일까. 올 때는 꽤 빨리 지나온 것 같은데, 흰고래와 하프 바다표범을 만난 곳까지 나오려니 시간이 제법 걸렸다. 그래도 살랑살랑 걷다 보니 어느덧 근처에 도착했다.

“……어?”

흰고래와 하프 바다표범을 찾기 위해 좌우를 살피다 말고 멈칫했다. 그리 멀지 않은 구름바다 한가운데 누군가가 서 있었다. 말 그대로, 구름을 딛고 서 있었다. 그것이 무척 놀라워 멍하니 바라보다가 그 앞에서 잔뜩 기분 좋은 목소리를 내며 울고 있는 흰고래와 하프 바다표범을 발견했다. 그래서 잠시 망설인 끝에 용기를 내어 다가가 보기로 했다.

‘우왓!’

거리를 좁히고 다가갔다가 더욱 눈이 휘둥그레졌다. 가까이 가서 보자 그 낯선 이는 구름을 밟고 있는 게 아니라, 딱 한 뼘 높이만큼 허공에 떠 있었다. 그리고 한 손을 앞으로 내민 채였는데, 흰고래와 하프 바다표범이 연신 점프하여 거기에 코를 부딪치며 장난쳤다.

뒷모습일 뿐이었지만 그가 무척이나 즐거워하는 중이고 두 동물도 더없이 행복해하는 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내가 괜히 방해를 하는 것 같은 기분에 다시 걸음을 돌리려는데, 기척을 느꼈는지 그가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

‘아…….’

나도 모르게 탄성을 삼켰다. 고개를 돌리고 선 상대는 무척 미인이었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 수 없을 중성적인 얼굴이었지만 무척 아름답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티 없이 맑고 고운 피부에 가지런한 눈썹, 크고 선명한 눈, 숱 많은 속눈썹, 곧게 뻗은 균형 잡힌 코, 붉은빛을 지닌 고운 입술 선. 그 모든 게 모였는데도 화려하다기보다는 화사하다는 느낌이 드는 묘한 얼굴이었다.

특히나 나를 발견한 그가 살며시 입가를 말아 올린 순간에는 흡사 인간으로 변신한 금왕이 처음 웃는 모습을 보았을 때처럼 눈이 부셨다. 그에 홀린 듯 시선을 빼앗겼던 나는 뒤늦게 그의 매끈한 피부 위에 부드럽게 늘어진 금빛 머리칼이 어쩐지 낯익다고 느꼈다. 나도 모르게 내 왼손을 내려다보았다. 금왕에게 선물 받고 며칠 동안 그곳에 곱게 끼워져 있었던 금빛 머리카락의 잔영이 떠올랐다.

그 순간, 갑자기 고요하던 대기에 돌풍이 일었다. 깜짝 놀라서 고개를 들자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분명히 눈앞에 있던 이가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그에 더욱 놀라 주위를 살피는데, 문득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호연아!”

고개를 돌리자 저 멀리 길 끝에서 낯익은 얼굴이 내게 달려오고 있었다.

“백하 님……?”

“너 혼자 심심할 것 같아서 나도 따라 나왔어. 어차피 거기 있어 봤자 나도 모르는 이야기투성이거든.”

내가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설왕의 곁에 꼭 붙어 앉아 이야기를 나누던 그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당황한 얼굴을 하자 백하 님이 웃으며 대답했다. 혹시 무슨 일이 있어서 호출이라도 하러 나온 걸까 잠시 걱정했던 나는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

“근데, 다음 주라고는 해도 진짜 금방이겠다. 우리 다시 만났을 땐 벌써 결혼했겠네?”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던 끝에 백하 님이 건넨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마도.”

“그래그래, 얼른 결혼해서 나중에 우리랑 쌍으로 파티도 가고 그러자.”

백하 님의 장난스러운 말에 작게 웃음을 터뜨릴 때였다.

“어, 이거 뭐야?”

백하 님이 놀란 얼굴로 손을 뻗었다. 그 손에 보통의 인간이 닿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반사적으로 어깨를 움츠렸다가, 이내 금신의 머리카락을 먹은 내게는 해당치 않는 이야기라는 걸 깨닫고 긴장을 풀었다. 그때쯤, 내 팔로 향하는 줄 알았던 백하 님의 손이 더 뒤쪽까지 뻗어 갔다.

팔락.

이윽고 다시 앞으로 돌아온 백하 님의 손에는 한 장의 종이가 들려 있었다.

“누가 장난을 친 건가?”

백하 님이 확인해 보라는 듯 내게 손에 든 종이를 건네며 중얼거렸다. 나는 설마 그럴 리가 있겠느냐고 웃으며 그를 받아 들었다.

“아까, 백하 님이 오시기 전에 바람이 세게 불었는데 아마 그때…….”

말을 하며 무심코 종이를 내려다봤다가 그대로 입을 딱 다물었다. 종이에는 짧은 두 문장이 쓰여 있었다.

「인간 아이야, 내 아이에게 와 주어서 고맙다. 앞으로 그 아이와 내 또 다른 아이들을 잘 보살펴 주기 바란다.」

‘인간 아이? 나를 말하는 건가?’

이곳에 인간 아이라고 지칭할 만한 존재는 나와 백하 님 둘뿐이었다. 그런데 이 종이가 내게 붙어 있었던 걸로 보아, 아마도 나일 가능성이 더 높았다. 하지만 선뜻 와 닿지 않는 내용에 고개를 갸웃거릴 때였다.

“호연아, 이거 어디서 났어?”

함께 종이를 살피던 백하 님이 물었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백하 님이 발견하고야 나도 알게 된 것이기에 출처를 알 리가 없었다.

“혹시 나 오기 전에 누구 만난 적 있어?”

“아…… 그러고 보니 아까, 어떤 사람이 저기 구름바다 위에 떠서 흰고래하고 흰 바다표범이랑 놀고 있더라고요. 금발에, 정말 엄청난 미인이었는데…….”

그제야 내가 앞서 만난 이를 떠올리고 설명하자 백하 님의 눈이 커졌다.

“호연이 너 그럼 금신을 뵌 거야?”

백하 님의 물음에 나는 잠시 눈을 끔뻑였다. 그리고 뒤늦게 깜짝 놀라 반문했다.

“네?! 그분이 금신님이세요?”

“응. 아마도. 금신이 인간형일 때 진짜 미인이거든. 특히 여기가 아무나 올 수 있는 곳도 아니고, 여기에 올 수 있는 이들 중에 금발의 미인이라면 거의 맞을 거야. 그리고 너한테 이런 내용의 쪽지를 남긴 걸 보면 더욱.”

“아…….”

딱 맞아떨어지는 백하 님의 추측에 나는 나지막한 탄성으로 수긍을 대신했다. 그리고 손에 든 쪽지를 다시금 살폈다. 그 내용을 보고 있으니 나 역시 이제 금신의 아이로 인정받았다는 생각에 어쩐지 가슴 한구석이 뭉클해졌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그 종이를 살며시 끌어안았을 때였다.

“아무튼 신들은 진짜 예고도 없이 그냥 막 온다니까.”

백하 님이 휴, 피곤한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설신 처음 만났을 때 그랬거든. 어느 날 혼자 성 밖에 나갔는데 저 멀리 누가 있는 거야. 이 극지방에 웬 손님인가 싶어서 달려갔는데 갑자기 그 사람은 사라지고, 사라진 자리에 발자국도 하나 없이 나를 환영한다고 설왕을 잘 부탁한다는 글만 눈에다 적어 놨더라고.”

투덜거리는 한편으로, 백하 님의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아마 나와 같은 감동을 그도 느꼈으리라.

“눈에 쓴 편지라니, 낭만적이네요.”

“응. 좀 그렇긴 해.”

백하 님이 내 말에 냉큼 수긍했다.

“근데, 방금 제가 본 게 금신님의 인간형이라고 하셨는데, 그럼 금신님도 본체가 따로 있으세요?”

“어. 너 혼롓날 볼 수 있을 거야. 그때는 축복 때문에 무조건 본체로 오니까. 나도 설신 본체를 그때 처음 봤거든. 설신의 본체는 진짜 엄청 큰 설인이었어. 그리고 난 못 봤지만, 듣기로 금신의 본체는 천호(天虎)라고 하늘색에 푸른 줄무늬가 들어간 엄청 큰 호랑이야.”

“……네?!”

혹시, 금신님도 본체가 호랑이려나? 혼자 추측을 해 보던 나는 깜짝 놀라 백하 님을 보았다.

‘하, 하늘색에, 푸른 줄무늬라니……!’

“왜, 왜 그래?”

내 격렬한 반응에 백하 님이 도리어 당황한 듯 반문했다.

“금신……님 본체가 정말 하늘색 호랑이예요?”

“응. 그게 왜?”

“그, 실은…….”

내가 막 입을 열었을 때였다.

“호연…….”

문득 귀에 익은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그것만으로도 두근, 가슴이 떨려 왔다. 고개를 들어 낯익은 얼굴을 눈에 담자 심장이 더욱 세차게 뛰어 대기 시작했다.

“회의 끝났어요?”

내 물음에 금왕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 대답했다.

“앗, 커플들끼리 시간 보내게 방해꾼은 이만 사라져야겠네.”

금왕이 내 곁으로 다가오는 모습에 백하 님이 슬쩍 몸을 돌렸다. 굳이 그럴 필요 없다며 붙잡으려 했지만, 이제 회의가 끝난 것 같으니 우리 설왕을 만나러 가야겠다는 말에 그만뒀다.

그사이 내 앞에 멈춰 선 금왕이 나를 살며시 끌어당겼다. 별다른 거부 없이 끌려가자 금왕이 나를 양팔로 감싸 안아 등 뒤에서 손깍지를 끼더니 내 어깨에 가만히 턱을 괴었다. 그 다정한 자세가 기분 좋아서 얌전히 안겨 있다가 이내 꼼지락거리며 금왕을 살짝 밀어냈다. 그에 의아한 눈길을 보내는 금왕에게 들고 있던 종이를 척 하니 내밀었다.

“저…… 금신님 뵀어요.”

내가 너무 불쑥 내밀어 그 종이가 무언지 미처 알아보지 못했던 금왕의 눈이 순간 커졌다. 그리고 곧바로 내 손에 들린 종이를 건네받았다. 내가 그랬듯 몇 번이나 내용을 읽으며 확인하는 금왕에게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기, 제가 만난 금신님은 사람의 모습이었지만…… 사실 본체는 푸른 호랑이시라면서요?”

금왕이 멈칫, 종이에서 시선을 떼고 나를 보았다.

“왜 말 안 했어요?”

“……그냥.”

처음에는 다소 당황한 듯 보였던 금왕이 이내 담담히 대답했다. 그 모습이 너무 태연해서 하긴, 굳이 꼭 말해야 하는 일은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그래도 말해 주면 좋았을걸. 그랬으면 좀 더 빨리 알았을 테니까.

딱히 서운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왠지 아쉬운 기분에 두 팔로 금왕의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금왕을 보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운명…… 같아요, 우리.”

아, 너무 감성적인 표현인가. 뒤늦게 민망해지려는데 금왕이 다정히 웃으며 내 이마에 입 맞췄다. 그리고 대답했다.

“나도.”

아아. 이것이 운명이라면 난 정말 천운을 타고난 행운아였다.

이 얼마나 달콤하고 행복한 운명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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