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호연…… 기억하마. 그럼, 이만 가 봐라. 밤이 많이 늦었다.
다정한 목소리가 내 등을 떠밀었다. 하지만 나는 선뜻 발걸음을 뗄 수 없었다.
-저기…….
머뭇거리는 내게 그는 무슨 일이냐는 시선을 보냈고, 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또……, 우리 또 만날 수 있을까요?
먼 훗날, 단 한 번이라도, 다시. 혹시나 하고 떠올린 기대가 긴장으로 몸을 뻣뻣하게 만들었다. 목구멍 너머로 꿀꺽 마른침이 삼켜졌다.
-아니, 그건 어려울 것 같구나. 이번에는 사정이 있어 예외였지만, 나는 본래 인간과 만나지 않는다. 아니, 만날 수 없다. 지금껏 네가 머물렀던 곳은 네가 사는 세상과 다름없이 보였어도, 사실은 다른 차원의 세상이다. 인간은 그곳으로 들어올 수 없다.
-그렇, 지만…….
-너는 본래 나와 같은 세상에 있을 수도 없는, 아니, 나의 존재조차 모르고 살아갔어야 했을 존재. 이번이 아주 특별한 일이었다. 꿈이라 생각하고, 이곳을 떠나는 순간부터는 잊어라.
-…….
완전히 못을 박는 금왕의 모습에 차마 아무런 반박을 할 수 없었지만, 작게 고개를 저었다. 잊고 싶지 않았다. 아니, 절대로 못 잊을 것이었다. 내가 잊으려 해도, 너무 행복했던 그 시간은 절대 잊히지 않을 것이었다. 잊힐 리가 없었다.
자신의 말을 부정하는 나를 금왕은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그러다가 몸을 낮춰 고개를 숙였다. 거대한 흑호의 도톰한 이마가 내 이마에 닿았다. 보드라운 감촉에 자연스레 눈을 감았다.
-잘, 지내라.
다정한 말과 함께 볼가에 보드라운 입맞춤이 있었던 것도 같다.
……그렇게, 꿈과 같았던 닷새가 끝났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다.
‘아, 기분 좋아.’
분명 그 꿈처럼 황홀했던 나날은 끝이 났는데 나는 여전히 흑호를 만지고 있었다. 익숙한 감촉의 보드라운 털을 가진 이마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그러다 고개를 들자 흑호도 고개를 들어 콕, 내 볼에 입 맞췄다. 순간 입가를 말아 올리며 그 동그란 입매에 내 볼을 비볐다. 모든 것이 흑호와 헤어지던 그날과 같았다.
아니, 아니다. 나는 그날 내 볼에 입 맞춘 보송보송한 털을 지닌 입가에 볼을 비비지 않았다.
할짝.
그날은 그 거대한 흑호가 내 얼굴을 쓸어 올리지도 않았을 텐데?
‘앗.’
의문을 떠올린 순간 갑자기 내가 끌어안고 있던 흑호가 사라졌다. 그 거대한 몸체가 마술처럼 한순간에 자취를 감췄다. 아니, 진짜 없어진 건지는 불확실했다. 희미하게 밝혀져 있던 주위에 갑자기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려앉았다. 어쩌면 저 짙은 암흑 때문에 호랑이의 검은 털이 가려진 것일지도 몰랐다. 나는 서둘러 혹시 어딘가에 있을지 모를 흑호를 찾았다. 하지만 다급히 주위를 더듬으며 걸음을 옮겨 봐도 호랑이는 느껴지지 않았다.
‘금왕님?! 금왕님!’
목소리를 높여 소리쳐 봐도 대답이 없었다. 어쩐지 초조해져서 발걸음을 서두르며 주위를 내달렸지만 소용없었다. 그저 끝없이 뻗은 어둠을 휘젓다가 무언가에 걸려 털썩, 주저앉았다. 그 순간 눈앞의 어둠이 일렁거렸다. 혹시 흑호의 움직임 때문인가 싶어서 벌떡 고개를 들었지만 아니었다.
‘으윽!’
허공에서 무언가 기분 나쁜 것이 스멀스멀 내게로 다가왔다. 분명 칠흑 같은 어둠에 묻힌 상황인데도 그것이 구름처럼 뭉게뭉게 피어나며 내게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순간 두려움에 휩싸여 뒤돌아서 도망쳤다. 달리고, 또 달렸다. 한데 이상하게 다리가 무거웠다. 다급한 마음에 고개를 내리자 어느새 내 다리가 그 기분 나쁜 것에 붙잡혀 있었다.
‘으악!’
공포에 질려 도움을 청하기 위해 주위를 살펴봐도 아무도 없었다. 내가 필사적으로 버둥거릴수록 발아래의 것은 점점 더 나를 집어삼켰다. 그것이 스멀스멀 내 몸을 타고 오를수록 무어라 형언할 수 없이 끔찍한 감각이 살갗으로 전해졌다. 두려움에 숨이 막히고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더욱 초조히 주위를 둘러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결국 그 끔찍한 것이 내 목까지 차올라 나를 집어삼켰을 때였다.
‘아!’
저 위에서 왠지 익숙한 굵기의 두툼한 밧줄이 내려왔다. 그걸 잡기 위해 어둠에 먹힌 팔을 필사적으로 뻗었다. 안간힘을 쥐어 짜내 겨우 손끝이 아슬아슬하게 닿기 직전,
“헉……!”
아주 작은 간극만을 남겨 두고 잠에서 깼다. 번쩍 눈을 뜬 채 멍하니 허공을 올려다보다가 하, 허탈한 한숨을 흘렸다. 온몸이 땀으로 축축했다. 땀에 젖어 살갗에 달라붙은 옷처럼 기분 나쁜 감각이 아직 등줄기에 남아 있었다. 그래서 움직이고 싶지 않았지만, 벌써 일주일째 반복된 꿈을 가지고 처음처럼 몇 시간이고 멍하니 얼어 있고 싶지 않았다.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앉았다.
요즘 계속 악몽을 꾸는 탓에, 밤에 잠들지 못하고 다음 날 오후 늦게야 겨우 지쳐 잠들다 보니 잠에서 깨면 늘 한밤중이었다. 꿈에서처럼 까만 어둠이 가득한 방에 덩그러니 앉아 불안한 눈으로 주위를 살피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장 욕실로 가 불을 켜자 순식간에 환한 빛이 어둠을 물리쳤다. 눈부심에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뜨자 마음에 드리웠던 불안도 어느새 걷혔다.
쏴아아―.
세면대로 다가가 물을 틀자 고요한 밤의 정적에 물소리가 유독 크게 울렸다. 그를 잠시 내려다보다 곧 손에 물을 받아서 세수했다. 철벅철벅, 조금 거칠다 싶은 손길로 거듭 얼굴에 물을 퍼붓고 나자 완전히 잠기운이 가셨다.
세수를 마치고 잠시 눈앞의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그곳에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내가 있었다. 물기가 가득 묻어 있음에도 생기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며칠 사이에 눈에 띄게 야윈 얼굴의 내가.
그래서일 것이다.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보고, 마치 현실에 없는 이질적인 존재를 보듯 기묘한 위화감이 드는 것은. 오히려 조금 전의 그 끔찍한 꿈속의 내가 더 친근하게 느껴졌다. 벌써 며칠째 같은 꿈을 꾸어서 그런가.
‘꿈…….’
처음 그 꿈을 꾸었을 때는 정말 깜짝 놀랐다. 그 모든 상황이 내가 금왕과 헤어지던 순간과 너무 똑같아서 현실인 줄로만 착각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금왕에게 가지 말라고 그를 붙잡으며 엉엉 울었다.
그 순간에 벌써 알았어야 했는데. 내가 이미 그와의 이별을 경험하고 힘들어 봤기에 그를 붙잡았다는 걸 알아야 했는데. 바보처럼 나는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붙잡은 금왕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자꾸만 밀려드는 위화감에 무언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오늘처럼 순식간에 그를 잃고, 절망에 빠져 허우적거리다가 잠에서 깼다.
그렇게 꿈에서의 상황이 이상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금왕과 거의 반나절 이상 아무 생각 없이 뒹굴었는데, 방금은 몇 분도 채 되지 않아서 그 사실을 깨달았다. 이러다가 언젠가는 금왕이 아예 나타나지 않으면 어쩌지. 왠지 불안해져서 천천히 손끝을 말아 쥐었다. 그러다가 나도 모르게 하, 실소하며 손을 폈다.
‘불안이라니…….’
고개를 젓고는 욕실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이불이 잔뜩 흐트러진 침대가 아니라 그 앞의 바닥에 엉덩이를 대고 앉았다. 그러다 딱딱한 매트리스가 등에 닿는 것을 느끼고 이불을 끌어와 쿠션처럼 댔다. 그 푹신함이 조금은 금왕과…….
‘아니.’
전혀 아니었다. 이불도 분명 보들보들 기분 좋은 감촉이지만, 금왕의 품은 이보다 훨씬 더 따듯하고 기분 좋았다. 그 품을 생각하니 그와 함께했던 지난 시간이 떠올랐다. 그것은 꿈이 아니었지만, 금왕이 말했던 대로 정말 꿈같은 시간이었다. 꿈처럼 행복했다. 그리고…… 나는 아직도 그 꿈속에 살고 있었다. 이제 꿈을 벗어나 현실로 왔는데도 나는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내 현실 곳곳에 그가 존재했다. 매일같이 그의 꿈을 꾸는 것은 다반사고, 눈을 뜨고 있어도 그때를 생각했다. 굳이 생각하지 않으려 눈을 감아도 자연히 떠올랐다. 가끔 아무 생각도 하기 싫어 TV를 틀면 꼭 우연히 아프리카가 나오고, 동물이 나왔다.
그러면 자연스레 금왕이 떠오르고, 그와 함께한 시간이 그려졌다. 꼭 아프리카나 동물이 아니라도, 사람을 보면 또 사람의 모습을 한 그가 떠올랐다. 매 순간 무엇을 하든.
가끔은 밤에 혼자 멍하니 넋을 놓고 있다가 밖에 금왕이 서성거리는 건 아닌가 싶어져 화들짝 놀라 창밖을 살펴볼 정도로 온통 그의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게다가 혼자인데 두 명분의 삶을 사느라 온 힘을 빼앗겼는지, 나는 요즘 무엇을 해도 의욕이 없었다. 아니, 의욕의 문제가 아니었다. 무언가가 이상했다. 거울 속 물기 젖은 내 얼굴처럼, 모든 것이…… 위화감을 느끼게 했다.
주변 모든 것이 무채색의 그림 같았다. 색을 가진 것이 무채색으로 느껴지는 것은 단지 위화감이 느껴질 뿐만 아니라, 아무런 의미도 생기도 의욕도 없는 무기질적이고 비현실적인 기분을 들게 했다.
오히려 지극히 꿈같았던 아프리카에서의 날들이 더욱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내게 익숙했던 이십여 년의 삶이 그 며칠에 완전히 부정당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흔히들 겪는 여행의 후유증이겠거니, 아주 특별한 여행이어서 여운이 더 강한 것이려니,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악화되는 것 같았다. 머릿속을 가득 채운 추억이 내 몸을 잠식하는 듯 시간이 지날수록 더 숨이 막히고 힘들어졌다.
그때를 떠올리면 무언지 모를 것이 명치를 꽉 막아서 밥조차 넘길 수 없었다. 실상 돌아온 이후로 밥을 먹은 기억이 별로 없다. 하지만 마음이 더 허해서 허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너무 행복해서 배고픈 줄 몰랐던 그곳에서와는 딴판이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그토록 소원했던 아프리카 여행도 취소했다. 아니, 벌써 다녀왔으니 굳이 갈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곳에 가서 잘 찾아보면 금왕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피어올라 갈등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 만나지 못하면 그 실망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건 내가 꾸었던 그 끔찍했던 꿈보다 배는 더 괴로울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그게 아니더라도, 그곳에서의 기억과 비슷한 모습을 한 아프리카를 견뎌 낼 자신도 없었다. 단지 내 방 안에 앉아서도 이렇게 쉴 새 없이 그때를 떠올리는데, 그와 비슷한 풍경을 보고서는 어떻게 될지 상상만으로도 버거웠다. 그렇게나 떠올리는 금왕이 곁에 없다는 사실을 실감하는 것은 더욱 끔찍했다.
“하하…….”
갑자기 입에서 어이없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뭐야. 이러니까 나, 꼭…… 상사병이라도 앓는 것 같잖아.’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서였다.
‘아니, 어쩌면…… 진짜 그런 걸지도.’
비웃던 생각에 의심을 품었다. 단지 여행의 후유증이라기에는 지금 내 상태는 너무 처참했다. 아무리 그 시간이 행복했어도, 꿈같이 황홀했어도 보통 이렇게까지 그리워하며 지치고 힘이 들까. 단지 행복했던 기억에 대한 미련이라기에는, 나는 너무 하나에만, 금왕에만 집착하고 있지 않은가. 그때 만난 다른 수많은 맹수와 설왕과 그 반려, 염왕은 단 한 번도 떠올리지 않으면서 오직 모든 걸 금왕과 연결하고 있었다.
그러니 이건 상사병이라고 해도 전혀 무리가…….
‘……아.’
뒤늦은 탄성과 함께 비로소 깨달았다. 내가 지금껏 그리워하던 것은, 그 닷새의 추억이 아니라…… 금왕이었다는 걸.
딩동, 딩동딩동.
주위가 밝아 오는지도 모르고 멍하니 넋을 놓고 있다가 시끄러운 초인종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호연 오빠, 안녕!”
“호연아, 너 오늘도 이러고 있니?”
문을 열자 익숙한 얼굴들이 나를 반겼다.
“고모, 어서 오세요. 서연아, 어서 와.”
이제 막 7살이 된 명랑한 사촌 동생과 엄한 얼굴을 한 고모를 어색한 미소로 반기며 집으로 들였다.
“호연이 너, 어제도 밥 거른 거야?”
두 손 가득 들고 온 밑반찬을 식탁에 올려 두고 냉장고부터 확인한 고모가 조금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안 그래도 어색하던 웃음이 더욱 어설프게 변했다.
“그냥…… 어쩌다 보니…….”
“넌 어쩌다 보니 밥을 굶니?”
“어, 그게…… 식욕이 별로 없어서…….”
내가 눈치를 보며 웅얼거리자 고모가 굳혔던 표정을 풀고 이내 걱정스러운 기색을 띠었다.
“그렇게 밥 잘 먹던 애가 대체 왜 식욕이 없어. 보약이라도 지어 줘?”
“아니, 보약은 무슨…….”
나는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요즘 내가 식욕이 없는 건 마음의 문제였다. 보약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보니까 어제도 계속 집에만 있었던 것 같고. 너 갑자기 왜 이래. 진짜 무슨 일 있는 거 아니니?”
가져온 밑반찬을 모두 냉장고에 넣고, 서연이에게 책을 줘 읽게 한 후 나와 마주 앉은 고모가 자못 심각한 얼굴을 했다. 그동안 학교며 알바, 그 외에도 친구들과의 약속, 혹은 동물원 방문으로 집에 붙어 있을 틈 없이 바쁘게 돌아다녔으면서, 벌써 일주일째 외출도 하지 않고 집에만 콕 처박혀 있는 내가 고모로서는 이상할 만도 했다.
“그런 거 아냐, 고모. 그냥 좀…… 마음이 허해서 그래. 가끔 그럴 때 있잖아. 학교는 방학해서 안 가고, 알바도 여행 때문에 그만둔…….”
“그래, 그것도 이상해. 그렇게 아프리카, 아프리카 노래를 불렀으면서 왜 갑자기 준비까지 다 한 여행을 안 가? 너 어릴 때부터 그렇게 소원했잖아? 그리 가고 싶으면 우리가 보내 준대도 거긴 네 돈 모아 가고 싶다며 한사코 거절하고 몇 년을 힘들게 일했으면서.”
준비한 변명이 단숨에 쓸모없어졌다. 민망한 얼굴을 문지르며 열없이 웃었다.
“그냥…….”
“세상에 그냥이 어디 있어.”
“그래도 그냥이라고 생각해 줘.”
고모가 반박했지만 할 말이 없던 나는 그냥 뻔뻔하게 밀어붙였다. 고모의 입에서 나지막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네가 아프리카에 안 간다고 할 정도면 모르긴 해도 엄청 심각한 일일 텐데. 고모한테 말해 주면 안 돼? 그렇게 말 못 할 거야?”
“그게, 좀…….”
나는 난감한 미소를 지으며 말끝을 흐렸다. 고모는 억지로 캐묻지 않았다.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었을 뿐. 잔뜩 걱정스러운 시선을 보내는 고모에게는 미안했지만, 그렇다고 내가 겪은 그 비현실적인 일을 설명하기도 곤란했다. 그러니 그때의 일 때문에 마음이 허하다고 하소연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그때의 일이 아니라 그때 만난 금왕 때문이지만. 이제 막 깨달은 그 사실은 내게도 벅차서 더욱 다른 이에게 말하기가 어려웠다. 너무 버거워 그 모든 게 다 꿈이었다고, 그냥 그렇게 여기고 싶을 정도였다. 그래도 될 것 같았다. 그게 아니라고 하기에는…….
“호연 오빠야, 이거 뭐야? 예쁘다!”
“어…….”
고모가 준 책을 다 읽었는지 서연이가 문득 고 조그만 손에 무언가를 들고 다가왔다. 아마도 내 책상을 구경하다가 발견했을 그것은, 투명한 플라스틱 상자 안에 담긴 작은 꽃이었다. 아프리카를 떠나기 직전 미어캣과 문조가 선물로 준 그 붉은 꽃.
아프리카에서 돌아온 지 며칠 안 돼서 벌써 마르기 시작하기에 혹시 바스러지기라도 할까 봐 서둘러 통에 담아 둔 이것은…… 내 기억을 제외하고 내가 금왕과 만났다는 유일한 증거였다.
‘아아.’
입 안에서 신음 같은 소리가 메아리쳤다. 나는 잠시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러면…… 꿈이라고 생각할 수가 없어지잖아.
꿈이었으면 좋았을걸. 다시 만날 수도 없는 상대인데……. 그게 다 현실이어서 정말로 내가 금왕을 좋아하게 된 거라고 해도, 이루어질 일은 절대 없는데. 깨닫자마자 실연인데. 그냥 그런 거 아니라고 억지라도 쓸 수 있도록, 전부 꿈이라고 믿을 수 있으면 좋았을걸…….
“호연 오빠야?”
“호, 호연아?”
서연이와 고모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마 내 눈가를 타고 흐르는 뜨거운 액체 때문일 것이었다. 금왕을 떠올릴 때마다 밥도 먹을 수 없고, 숨도 쉴 수 없도록, 지금껏 명치를 꽉 막고서 나를 괴롭혔던 답답함이 울컥울컥 치솟더니 끝내 눈물이 되어 쏟아졌다.
나를 잔뜩 걱정하며 안절부절못하는 서연이와 고모를 알았지만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아니,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목청을 높여 실컷 울고 싶었다. 하지만 다 큰 성인이 어린 사촌 동생 앞에서 부끄럽게 엉엉 울기는 민망했다. 나는 이를 악물어 흐느낌을 참고, 볼가를 타고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훔쳐 닦았다. 그래도 눈물은 계속 흘렀다. 계속, 계속. 많지 않았지만 쉬지 않고 또르르, 또르르 뺨을 타고 흘렀다.
끊임없이 흐르는 눈물을 감당하기 버거워 닦아 내는 대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그러자 억눌러 둔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래, 울어, 호연아. 힘든 일은 원래 눈물에 다 씻겨 보내는 거야.”
손에 얼굴을 묻고 우는 내 등을 고모가 부드러이 토닥여 주었다. 순간 꼬리로 내 등을 토닥거려 주던 금왕이 떠올라 더욱 가슴이 아팠다. 예전에는 그것을 단지 행복했던 추억에 대한 그리움이라고 여겼을 텐데, 이제는 그것이 다정하던 금왕에 대한 그리움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왜 진작 깨닫지 못했을까. 왜 기회가 있을 때는 몰랐던 걸까.
아니, 왜 이제 와 굳이 깨달은 거지. 차라리 깨닫지 말지. 왜 하필 깨달아서…….
어차피 이제 다시는 만날 수 없는데. 마음을 전하기는커녕 두 번 다시 볼 수조차 없는데……. 그렇게 생각하자 가슴이 찢어질 것처럼 괴로웠다.
잔인하게도, 금왕에 대한 마음을 자각하자마자 곧바로 실연의 아픔이 찾아왔다.
“호연아, 정말 괜찮니?”
한참을 울어 붉게 충혈된 눈으로 배웅하는 내가 미덥지 못했던지 고모는 마지막까지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난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이제 정말 괜찮아. 걱정 마요, 고모.”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다행이 아니라, 진짜 괜찮다니까.”
다시 한번 단호하게 대답하자 그제야 고모의 얼굴에 드리웠던 미심쩍은 기색이 조금 걷혔다.
“알았어, 믿을게. 대신 진짜로 또 힘들거나 하면 꼭 고모한테 연락해. 응?”
“알았어. 나도 이제 들어갈 테니까, 고모도 얼른 가.”
벌써 한참 전에 집을 나와 놓고도 선뜻 걸음을 옮기지 못하는 고모의 등을 살며시 밀었다.
“이 녀석, 방금까진 다 죽어 갔으면서 좀 살 만하니까 바로 날 쫓아내려고 하네.”
“에이. 내가 나 때문에 그러나? 우리 서연이 다리 아플까 봐 그러지.”
내 손길에 떠밀리듯 걸음을 옮긴 고모가 괘씸하다는 듯 던지는 타박에 능청스럽게 웃어 보였다. 얼마만의 웃음인지도 알 수 없을 만큼 오랜만이었는데, 신기하게도 상당히 자연스럽게 터져 나왔다.
고모 말대로 슬픈 일은 눈물에 씻어 보내는 게 맞는 모양이었다.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느닷없는 실연의 아픔에 견딜 수 없이 괴로웠는데 한껏 눈물을 쏟고 나자 믿을 수 없을 만큼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런 내 웃음이 아직 남아 있던 걱정마저 씻어 주었는지 고모가 내 머리를 콩, 가볍게 쥐어박았다.
“말은 잘한다. 그래도 얼굴 보니 진짜 살아났나 보네. 그러니, 네가 그렇게 싫어하는 고모는 이만 가 보마.”
“에이, 내가 사랑하는 거 다 알면서.”
“됐네요. 서연아, 가자.”
고모가 내 아부 섞인 애교를 차갑게 뿌리치며 서연이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를 따라가기 전 서연이가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러고는 또 신나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오빠 잘 있어!”
“응. 잘 가, 서연아.”
“그럼, 간다.”
“응, 조심히 가, 고모. 아 참, 밑반찬 고마워. 잘 먹을게.”
“그래, 잘 좀 먹어. 예전에는 너무 잘 먹어서 반찬 해 댈 일이 걱정이더니, 설마 반찬이 남아돌아 걱정하게 될 줄이야. 두 번 다시 그런 걱정시키면 가만 안 둔다.”
“아무렴요.”
고모가 주먹을 쥐어 보이는 모습에 나는 환한 미소로 대답했다. 그리고 멀어져 가는 두 사람의 등 뒤에서 열심히 두 손을 흔들어 주다가 두 사람이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쯤에야 다시 집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곧장 욕실로 들어가 샤워를 했다. 상사병인지도 모르고 여행 후유증입네 혼자 궁상을 떠느라 며칠간 제대로 씻지 않아 찌든 몸을 깨끗이 씻었다.
눈물에 슬픔을 흘려보낸 것처럼 몸을 타고 흐르는 물줄기에 자꾸 떠오르는 금왕에 대한 마음도 씻겨 나가길 바라면서.
탁.
욕실에서 나온 뒤 대충 머리만 말리고 바로 옷을 챙겨 입었다. 지갑과 휴대폰만 주머니에 챙겨 넣고 집을 나가려다가 문득 발걸음을 멈췄다. 책상 위에 놓인 빨간 꽃이 든 플라스틱 상자를 발견한 탓이었다. 잠시 갈등한 끝에 그 통을 집어 입고 있던 반소매 와이셔츠 윗주머니에 넣었다.
“정말 이게 행운이랑 기적을 가져다주면 좋겠는데…….”
아무래도 부피가 있어 주머니 너머로 조금 볼록하게 튀어나오는 플라스틱 통을 가볍게 두드리며 집을 나섰다.
“역시, 없구나.”
내 목적지는 금왕과 처음 만나고 헤어진 뒷산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삵에게 물렸던 그 장소였다. 내가 금왕과 만난 그곳은 뒷산이지만 뒷산이 아닌 다른 세계라고 했으니, 아마 여기가 아닐 것이었다. 그것을 증명하듯 내가 도착한 곳에는 금왕을 비롯해 여러 맹수는 물론, 그때 내가 쓰러져 있던 넓은 공터 같은 것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하긴……. 어쩔 수 없지.”
혹시나 하는 마음에, 꽤 먼 곳까지 두루 살폈는데도 그냥 듬성듬성 나무가 심긴 숲만 계속될 뿐 비슷한 장소조차 보이지 않았다. 결국 체념을 삼킨 나는 근처에 있던 바위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공터를 찾는 동안 꽤 높이 올라왔는지 바위에 앉자 동네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거주 구역으로 계획된 동네라 키 작은 상가들이 앞쪽에 이어졌고 그 뒤에는 높다란 아파트가 즐비하게 늘어서서 시선을 막았다. 예전에는 아무렇지 않았던 것 같은데, 아프리카의 드넓게 펼쳐진 초원을 보고 난 지금에는 어쩐지 조금 답답하게 느껴졌다. 괜히 숨이 턱 막히는 기분에 나는 길게 구경할 것도 없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며칠간 집에 틀어박혀 식사도 거르고 꼼짝도 하지 않다가 갑자기 산에 오르느라 무리를 한 모양이다. 갑자기 눈앞이 핑 돌며 다리가 풀렸다.
“우왓!”
내가 앉은 곳이 길이 아니라 숲 언저리에 있는 비탈면이었기에 잘못했다간 아래로 크게 굴러떨어질 수도 있었다. 비틀거리는 와중에 필사적으로 팔을 허우적거리며 무언가를 잡으려고 애썼다. 그러나 마땅히 잡히는 것이 없어서 결국 그대로 넘어지며 한 바퀴 작게 굴렀다.
다행히 내가 구른 방향이 다른 곳에 비해 경사가 완만했고, 또 앞쪽에 자리한 나무가 막아 주어 큰 사고는 막을 수 있었다. 다만, 구르는 동안 온몸에 흙이 달라붙어 엉망이 되는 바람에 서둘러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하, 맛있어.”
고모가 가져다준 장조림의 소스가 혀끝에 짭짤하게 배어들자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집으로 돌아와 흙투성이가 된 몸을 깨끗이 씻어 낸 나는 속옷과 바지만 입고 머리를 닦아 낸 수건을 목에 건 채로 우선 식사부터 했다. 아무래도 기력을 보충할 필요가 있다 느껴서였다.
며칠째 물과 우유 이외에는 공복이던 몸이었지만, 평소 워낙에 잘 먹는 데다가 산을 헤매며 본의 아니게 운동까지 해서인지 의외로 음식이 잘 넘어갔다. 덕분에 밥 한 공기를 순식간에 뚝딱 해치우고 설거지까지 단숨에 마쳤다. 그리고 샤워 전 벗어 둔 옷가지를 가지러 욕실로 향했다.
“맞다.”
세탁기에 옷을 던져 넣다가 한 가지 사실을 깨닫고는 서둘러 와이셔츠의 주머니를 뒤적였다. 외출 전 챙긴 꽃이 든 플라스틱 통을 꺼내기 위해서였다.
“행운이랑 기적을 가져온다더니 이거 덕분에 큰 부상이 없었…… 어? 이쪽이 아닌가?”
자칫하면 큰 사고로 번질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그만하게 끝난 것에 효력을 실감하며 주머니 깊숙이 손가락을 찔러 넣었지만 어쩐지 텅 비어 있었다. 서둘러 반대쪽 주머니를 살폈지만 여전히 손끝에 걸리는 게 없었다.
“어라?”
와이셔츠를 구기듯 쥐어도 보고 전부 펼친 채 더듬어도 봤지만 찾을 수 없었다. 세탁기에 넣어 둔 바지랑 속옷도 살펴봤지만 마찬가지였다. 혹시 싶어 욕실과 집 안 곳곳을 살폈지만 보이지 않았다.
“말도 안 돼!”
서둘러 새 옷을 챙겨 입고는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러나 몇 걸음 나아가지도 못하고 멈춰 서야 했다. 아무렇게나 구겨 신은 운동화가 벗겨져서였다.
“젠장.”
불과 몇 초도 안 되는 짧은 시간이 지체된 것뿐인데 나도 모르게 욕지거리가 나왔다. 괜히 또 벗겨지지 않도록 이번에는 신발을 제대로 챙겨 신고 다시 다급한 발걸음을 옮겼다.
조금 전 산에서 집으로 돌아왔던 길을 그대로 따라 거슬렀다. 서두르면서도 길 구석구석 꼼꼼히 살피는 걸 잊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그 플라스틱 상자를 찾지 못한 채 뒷산에 도착했다.
내려온 길을 그대로 타고 올라 앞서 내가 뒹굴었던 장소를 찾았다. 제일 먼저 바위 주변을 살피고 내가 굴렀던 것 같은 동선을 따라 움직였다. 그 이외에도 주변을 샅샅이 뒤졌지만 여전히 꽃이 든 상자는 찾을 수 없었다.
“아, 안 되는데…….”
한 번 급하게 살핀 후 두 번 더 꼼꼼하게 확인을 거쳤는데도 나오지 않는 상자에 당황해서 중얼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주머니에 얌전히 들어 있던 그 상자를 흘렸을 만한 장소는 데구루루 구른 이곳밖에 없었다. 하지만 거듭 침착하게 주위를 훑어봐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내가 흘린 뒤 저 아래로 굴러떨어진 게 아닐까 싶어서 본래 찾던 곳보다 훨씬 멀리, 멀리 나아갔다. 그러자 결국 금왕을 처음 만난, 삵에게 목을 물린 곳까지 내려오게 됐다. 여전히 플라스틱 상자는 흔적도 찾지 못한 채로. 혹시 금왕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마지막까지 미련을 못 버리고 찾아왔던 그곳에서 나는 잠깐 발길을 멈췄다.
“아, 진짜 안 되는데. 그것뿐인데…….”
조금 전과 다름없이, 금왕과 처음 만난 공터와는 전혀 다르게 나무숲의 모습을 하고 있는 풍경을 살피며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동시에 눈가가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진짜 그것뿐인데…….’
목구멍에도 무언가가 울컥 치밀어 올라 차마 내뱉지 못한 목소리가 내 안에서 메아리쳤다.
정말로 그것뿐이었다. 금왕과 처음 만난 공터조차 이 산에 없다는 걸 확인한 지금, 그와의 만남이 사실이었음을 확인시켜 주는 증거는 그 꽃뿐이었다.
그것만이 유일한 증거인데! 그런 중요한 걸 잃어버리다니…… 이호연, 이 바보 멍청이!
자책을 넘어 스스로를 비난하며 나는 오랫동안 산을 헤매고 다녔다. 그러다 결국 해가 지고 어둠이 내려 도저히 주위를 살필 수 없게 되었을 때야 겨우 포기하고 다시 산에서 내려왔다.
꽃을 잃어버린 그날의 꿈은 조금 특별했다.
금왕을 만나 그와 헤어진 순간을 재현하고, 멀어지는 그를 붙잡아 비벼 대다가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닫고 절망에 빠진 건 여느 때와 다름없었다. 그다음에 늘 그렇듯이 저 하늘에서 굵은 밧줄이 내려와 손을 뻗어 아슬아슬하게 닿으려던 순간까지도 비슷했다.
그래서 오늘도 어김없이 이 꿈이구나, 생각하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문득 하늘에서 내가 잃어버린 그 빨간색 꽃이 떨어져 내리며 밧줄과 내 손 사이의 작은 틈을 메워 주었다.
“……!”
손끝을 따스하게 물들이는 익숙한 온기를 느끼며 눈을 떴다. 잠시 멍하니 허공을 올려다보다가 이내 정신을 차렸다. 어제 꽃을 잃고 밤늦도록 잠 못 들다가 날이 밝아서야 잠들었더니 주위는 벌써 늦은 오후였다.
“하아…….”
시계를 확인하고는 곧 한숨을 내쉬었다. 꿈에 나타난 붉은색 꽃이 떠올라서였다. 결국 찾지 못했다는 생각에 아직도 마음이 무거웠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꿈에서라도 다시 봐서 반가웠고, 혹시 이게 좋은 예감이 아닐까 하고 혼자 헛된 기대를 부풀리기도 했다.
나는 곧바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욕실로 달려 들어갔다. 가볍게 외출 준비를 마치고는 다시 산으로 향했다. 하지만…… 결국 어제와 마찬가지로 잔뜩 지쳐 터덜터덜 산에서 내려왔다.
“없어…….”
또 빈손으로 돌아오게 되자 허탈한 기분을 가누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이제……, 진짜 아무것도 없어.’
금왕과 만난 유일한 증거였던 꽃이 사라졌으니 내게 남은 증거는 내 기억뿐이었다. 하지만 이는 언제 흐려질지 몰랐다.
언젠가 나 스스로도 그 만남이 의심스러울 때가 오면 어쩌지. 만약 금왕에 대해 잊어버리고 만다면…….
멍멍! 왈왈! 월월!
무언가 날카로운 것에 찔리기라도 한 것처럼 지독한 통증에 가슴을 움켜쥐고 굳어진 찰나, 왠지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와 정신을 차렸다.
어느 애견 동호회의 모임이라도 있었는지 근처의 카페에서 십수 명의 사람이 저마다 한 마리, 혹은 두 마리의 개를 끌고 나오는 중이었다. 그를 방해하지 않으려고 잠시 옆으로 비켜서는데 웬 귀여운 포메라니안 한 마리가 멀지 않은 곳에서 나를 바라보며 꼬리를 흔들었다.
“안녕?”
왕!
뽀얀 털 위에서 별처럼 반짝이는 까만 눈동자가 귀여워 손을 흔들자, 고 녀석이 귀엽게도 짖었다. 적대감을 느꼈다기보다도 왠지 신이 나 반겨 주는 것 같은 느낌에 나는 무릎을 굽혀 앉아 양손을 펼쳐 보였다.
“멍멍아, 이리 온.”
왕!
다시 한번 귀엽게 짖은 강아지가 내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 곧장 달려왔다. 그 모습이 귀여워 손을 내밀어 주다가 무언가 시끄럽다는 생각에 고개를 든 순간이었다.
왈왈! 왈! 멍! 멍멍!
저 앞쪽에서부터 십수 마리의 개와 강아지들이 내게로 달려오고 있었다. 조금 전 카페에서 나온 모든 개와 강아지들이…… 일제히 나를 향해 질주하고 있었다. 주인이 방심해서 끈을 놓고 있던 개들은 물론이고 주인에게 붙들려 있던 녀석들마저 그를 뿌리치고, 심지어 어떤 녀석들은 주인을 끌고서라도 내 쪽으로 달려오려고 안간힘을 쓰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커다란 골든 레트리버가 그 순한 눈을 초롱초롱 빛내고 혀까지 내밀고 할딱이면서 제일 먼저 내게 달려오고 있었고 그 뒤를 시베리안 허스키와 닥스훈트가 빠르게 뒤쫓았으며 그 외에도 십수 마리는 더 있었다. 아무튼 결론은 엄청나게 몰려오고 있었다는 것이다.
“우, 우왓! 자, 잠깐 멈춰!”
갑작스러운 상황에 너무 놀라서 피할 생각도 못 하고 목소리만 높였다. 그 순간 더 놀라운 일이 펼쳐졌다. 내게 정신없이 달려오던 골든 레트리버가 갑자기 끼익, 소리가 날 것처럼 급작스럽게 딱 멈추더니 그 뒤의 개들도 모두 끼이익, 급브레이크 밝은 자동차처럼 다급히 멈춰 섰다.
쿠당탕탕!
달려오던 가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강아지들이 앞으로 미끄러지며 바닥을 나뒹구는 모습에 나는 잠시 어안이 벙벙해졌다. 달리는 개에 질질 끌려오던 주인들도, 갑자기 달려 나가는 개를 뒤늦게 발견한 주인들도, 그리고 지나가던 사람들까지 모두 시선이 몰릴 정도의 진풍경이었다. 놀란 눈으로 개를 한번 살펴본 이들은 어김없이 나를 돌아봤다.
“아, 하하…… 강아지들이 다들 참…… 말을 잘 듣네요.”
생각지 못한 주목에 어색한 웃음을 흘린 나는 도망치듯 후다닥 그 자리를 벗어나 집으로 내달렸다.
“하아, 하…….”
민망함에 전력 질주를 했더니 집에 도착하자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때문에 문을 열 정신도 없어서 현관문에 등을 기대고 잠시 주저앉았다.
‘아까 그건 대체…….’
한참을 헐떡이며 숨을 고르고 나니 조금 여유가 생겨서 아까의 상황을 되새겨 볼 수 있게 된 나는 이윽고 한 가지 기억을 떠올렸다.
-방금 그걸로 넌 내가 없이도 금수들을 다룰 수 있게 된 거다. 네 혀에 내 타액을 흡수시켜 놓았기 때문에 이제 네 말은 내 포효와 같은 효과를 지니니까. 물론, 영원히는 아니고 당분간일 뿐이지만.
“하하…….”
절로 허탈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금왕과 내가 만났다는 유일한 증거라며 그렇게 열심히 꽃을 찾아 헤맸는데, 알고 보니 나는 또 다른 증거를 가지고 있었다. 당연히 기가 막힐 수밖에.
하지만 한편으로는 조금 믿기지 않기도 해서, 손끝으로 입술을 매만졌다. 순간 나도 모르게 금왕과 입 맞추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뺨이 화끈 달아오르며 손끝이 불에 덴 듯 뜨거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아니, 손뿐만 아니라, 팔이, 가슴이, 다리가…… 온몸이…….
‘윽…… 그건 키스가 아니야. 그냥 이별 선물이라고…….’
눈가까지 번져 간 열기에 울보가 된 듯 또다시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그날도 예의 그 꿈을 꿨다. 늘 그렇듯 나를 데려다준 금왕과 헤어진 순간을 재현하고, 멀어지는 그를 붙잡아 비벼 대다가 이것이 이상하다는 걸 깨닫고 검은 절망에 빠졌다. 그리고 저 하늘에서 굵은 밧줄이 내려오는 걸 보고 손을 뻗어 아슬아슬하게 닿을 뻔한 순간까지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혹시 어제처럼 또 꽃이 나오려나 기대했지만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이렇게 끝인가, 체념하던 때였다.
멍멍! 왕! 왈왈!
갑자기 멀지 않은 곳이 시끌벅적해지더니 십수 마리의 개와 강아지 무리가 몰려왔다. 어둠에 먹혀 바닥으로 가라앉기 시작한 터라 밖으로 나온 것은 높이 뻗은 손뿐이었다. 그렇기에 내게 몰려든 강아지들은 저마다 내 손에다 축축한 코를 대고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한참 동안 정신없이 냄새를 맡던 강아지들은 다가왔을 때처럼 또 정신없이 저 어둠 너머 어딘가를 향해 달려갔다. 왠지 아쉬운 느낌에 멍하니 그 뒷모습을 좇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강아지들이 달려간 저 끝에서 눈부신 빛이 번쩍였다. 그리고 손목에 무언가 부드러운 것이 감기는 느낌과 함께 눈을 떴다.
“아……!”
왠지 모를 탄성과 함께 깨어난 나는 잠시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미 질리도록 경험한 일이라 금세 정신을 차렸다.
“하아…….”
그리고 제일 먼저 한 건 어제와 같이 한숨을 내쉬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금왕과의 만남이 자꾸 짧아지며 변화를 추구하는가 싶더니, 이제는 이렇게 다채롭게 현실을 반영하며 발전해 가는구나. 약간은 어이가 없기도 했고. 설마 평생 이런 식으로 그날 있었던 일을 꿈에 반영하게 되는 건가, 조금 무서운 생각마저 들었다.
“그럼 평생 꿈에서 금왕을 만나는 건가…….”
좋아하는 걸 깨닫자마자 실연당한 것도 괴로운데, 평생 그 아픔을 떠올리며 살아가야 한다니 왠지 가슴 한구석이 지끈거렸다.
“뭐, 싫다는 건 아니고…….”
나도 모르게 변명하듯 덧붙였다. 하지만 거짓말은 아니었다. 후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아직은 평생 금왕을 본다는 사실이 괴로운 한편으로 반갑기도 했다. 금왕과 내가 만난 첫 번째 증거인 꽃이 사라지고 새로운 증거를 찾았지만, 그건 한시적인 것이었다. 그러니 꿈이라도 꾸지 않으면 세월이 흐를수록 점점 금왕을 잊어 갈 수밖에 없었다.
왠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괴롭더라도 계속 그 꿈을 꾸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게다가 지금처럼 이렇게 매일 끝 내용이 변한다면 그걸 기대하는 재미도 있을 거고…….
톡톡.
혼자 이런저런 상념에 잠겨 있는데 문득 어디선가 작은 소리가 들렸다. 흡사 창문을 두드리는 것과 비슷한 소리여서 처음에는 잘못 들었나 생각했지만 다시 그 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서 윗집이나 아랫집에서 이 새벽에 뭔가 하는 건가?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또 그 소리가 들려왔다.
그때서야 아무래도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감지하고 침대에서 일어나 방 밖으로 조심스럽게 걸어 나갔다. 밖으로 나오자 소리가 더 커졌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찰나,
톡톡.
다시 그 소리가 들려왔다.
“대체 뭐…… 우왁!”
빠르게 소리를 좇던 나는 깜짝 놀라 비명을 내질렀다. 방금 소리가 들려온 방향은 다름 아닌, 거실의 베란다였다. 참고로 나는 4층에 살고 있었다.
“귀, 귀, 귀신인가?!”
기겁해 뒤로 물러나며 방으로 도망치려 했다. 한데 그 순간, 내 시선을 잡아끄는 것이 있었다. 바로 베란다 창문 가운데쯤에 삐죽이 튀어나온 익숙한 두께의 까만 무엇. 아니, 까맣고 은빛이 뒤섞인 무엇.
‘서, 설마!’
나는 귀신을 떠올렸을 때보다 더 눈을 부릅뜨며 다급히 베란다로 달려갔다. 그 순간이었다.
“왁!”
갑자기 눈앞의 것이 사라지고 검은 그림자가 나를 덮쳐 왔다. 깜짝 놀라 질끈 눈을 감았는데, 나를 덮친 그림자가 가벼이 흔들리는 게 느껴졌다. 다시 조심스럽게 눈을 뜨자마자 눈가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서, 설마…….”
믿을 수 없다는 듯 내뱉은 목소리도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내 눈에 들어오는 장면은 그대로였다.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떴다. 그래도 변함이 없었다. 다음으로 볼을 꼬집었다. 아팠다. 하지만 여전히 믿을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말도, 안 돼…….”
어떻게 믿을 수 있으랴. 바로 내 눈앞에 내가 꿈속에서 그토록 찾아 헤매던 금왕이 있었다. 그의 크고 둥그런 바다 빛 눈동자가 베란다 창밖에서 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금, 금왕…….”
목이 메어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따라서 혼잣말보다도 작게 웅얼거리는 소리였는데도 금왕은 바로 귀를 까딱이며 반응했다. 톡톡, 처음 내가 들었던 그 자그마한 소리가 또 들려왔다.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창밖을 살피자 아니나 다를까. 앞서 내가 보았던 그 검은색과 은빛이 섞인 도톰한 것이, 금왕의 꼬리가 베란다 창 가운데 잠금장치를 창 너머에서 두드리고 있었다.
그제야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깨달은 나는 서둘러 잠금을 풀고 창문을 열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금왕은 앞발을 높이 들어 일어선 채로, 자신의 키보다 높은 우리 집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호연……, 오랜만이다.”
문을 열자마자 금왕이 다정한 인사를 건넸다. 미처 생각지 못한 갑작스러운 부름에 두근, 심장이 떨려 왔다. 그리고 불붙은 연처럼 갑자기 정신없이 휘몰아치기 시작하는 격한 감정을 가슴을 부여잡아 겨우 억눌렀다.
“어, 어떻게…….”
최대한 목소리를 고르려고 노력했는데도 떨리는 건 막을 수 없었다.
“……네가 잃어버린 걸 찾아 주러 왔다.”
금왕이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더니 갑자기 입에 물고 있던 것을 톡 뱉어 냈다. 타다닥, 가벼운 소리를 내며 베란다 타일 위로 무언가 굴러떨어졌다. 무심코 그것을 좇던 나는 곧 두 눈을 부릅뜨며 몸을 굽혔다.
“이건…….”
나는 깜짝 놀라서 금왕을 쳐다보았다. 내가 막 집어 올린 그것은 지난 이틀간 그렇게 찾아 헤맸어도 찾지 못한, 바로 그 빨간 꽃이 담긴 플라스틱 상자였다.
“이, 이걸 어떻게…….”
“우연히 주웠는데 아는 사람 거라…… 그냥 버릴 수도 없고.”
잔뜩 떨리는 내 목소리와 달리 금왕의 대답은 태연하기만 했다. 그게 조금 야속해지려는데 곧바로 다른 목소리가 이어졌다.
“―라는 건 변명입니다! 미련 없이 이별하는 척했으면서 지난 열흘간 어떻게 인간님을 다시 볼 수 없을까 그리워하면서 전전긍긍, 새벽마다 산을 서성거리다가 그 꽃을 발견하고는 핑곗거리 삼아서 냉큼 찾아온 거라구요! 그런데 도무지 집을 몰라서 헤매다가 오늘 인간님이 강아지들과 접촉하면서 거처를 알게 되어 이 야밤에 바로 달려…… 읍.”
깜짝 놀라서 아래를 내려다보자 눈에 익은 설표가 한쪽 앞다리를 들고 가볍게 흔들며 신이 나서 말하다가 금왕의 꼬리에 입이 틀어막혔다. 평소에 제 꼬리는 잘도 물고 다니면서 금왕의 굵은 꼬리가 입으로 밀려들자 질겁을 하며 물러났다. 그 모습이 너무 반갑고 귀여워서 잠시 홀린 듯 바라보다가, 설표의 입을 막은 금왕의 꼬리 끝이 가볍게 감겨 뭔가를 쥐고 있음을 깨달았다.
저게 뭐지?
“호연…… 오해하지 마라. 난 오늘 설표의 말처럼 그 꽃을 핑계 삼아서 온 게 아니다.”
“암요, 그러셔야죠. 그냥 그 꽃만 주고 가실 것 같으면 이 설표가 이렇게 쫓아오지도 않았죠.”
금왕의 말끝에 설표가 뿌듯한 기색으로 맞장구를 쳤다. 하지만 잘 이해가 가지 않아 의아한 눈길을 던지는데, 갑자기 휘익 금왕의 꼬리가 베란다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러자 앞서 발견한 것을 좀 더 자세히 볼 수 있었다. 금왕이 꼬리로 감싸고 있던 건 곱게 접은 하얀 천이었다.
“호연, 받아라.”
“어?”
저 천의 정체는 또 뭘까. 새로운 궁금증이 떠오르는데 금왕이 내게 그것을 내밀었다. 어서 받으라는 듯이 가벼이 꼬리까지 흔들면서. 순간 나도 모르게 그를 덥석 붙잡았다.
“……안 펼쳐 보나?”
“아, 네.”
잠시 멍하니 서 있던 나는 서둘러 하얀 천을 펼쳤다. 그러자 기다란 금색의 실이 하나 나왔다. 아니, 실이라기에는 손에 닿는 감촉이나 보이는 질감이 좀 이상했다.
“이, 이건 대체?”
“……금신의 머리카락이다.”
금왕이 잠시 가만히 나를 들여다보더니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네?”
금신의, 머리카락?
전혀 생각지 못한 대답에 혹시 잘못 들은 건 아닌가 싶어서 반문하자 금왕이 또 대답 대신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어, 저기…….”
지긋한 시선이 조금 부담스러워질 때쯤,
“호연.”
“아, 네.”
부드럽게 울리는 근사한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쳐다보자 금왕이 긴 꼬리를 살랑거리며 내 얼굴을 쓸었다. 오래도록 그리워한 그 보드라운 감촉에 왠지 가슴 한구석이 저릿해지고, 코끝이 찡해 왔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숙이는데 금왕이 꼬리에 힘을 주며 내 턱을 들어 올렸다.
“호연. 너, 내 아이가 돼라.”
“……네?”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 말에 나도 모르게 반문했다.
“이런! 금왕, 그게 아니죠. 반려가 되어 달라고 하셔야죠!”
금왕이 대답하기에 앞서 아래에서 설표가 답답한 듯 소리쳤다.
‘어? ……반려?’
“아이가 되어 달라니요. 금왕의 아이라면 모든 금수를 말하는데, 그 귀한 금신의 머리카락을 대체 어느 금수에게 함부로 나눠주나요.”
어쩐지 익숙한 단어에 반응하는 동안 아래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설표와는 다른, 하지만 귀에 익은 목소리에 깜짝 놀라 내려다보자 어느새 온 건지 설표 옆에 사자가 서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백호를 비롯해 재규어, 퓨마, 치타, 늑대, 여우까지 그 옆을 채웠다. 다들 하나같이 흐뭇한 미소를 짓고서. 멀어서 잘 보이지 않는데도 왠지 그런 기운이 잔뜩 풍겨 왔다.
“윽.”
아래의 동물들을 구경하는 동안 금왕이 곤란한 신음을 흘렸다. 그에 시선을 던지자 왜인지 흠, 헛기침을 삼켰다. 두어 번 더 그렇게 하며 목소리를 고르고서야 금왕은 입을 열었다.
“호연. 금신의 머리카락을 먹으면 너도 금왕의 운명을 얻어 나와 같은 생을 살아갈 수 있다. 내…… 반려가 되어서.”
“……!”
이건, 설마…….
순간 밀려드는 의심에 떨리는 시선을 던지노라니, 금왕이 창문으로 밀어 넣은 꼬리로 내 허리를 감싸 왔다. 이윽고 허공으로 붕 떠올라 바깥까지 끌려간 몸에 당황할 새도 없이, 금왕이 아파트 벽을 짚고 있던 앞발을 바닥으로 내린 뒤 나도 그 곁에 내려 주었다.
“아이고, 금왕님. 너무하시네요. 저희야 금신님의 머리카락이면 그저 감지덕지겠지만, 호연님은 아직 인간 아닙니까. 인간들은 프러포즈할 때 반지라는 걸 끼워 준다구요. 머리카락만으로는 좀…….”
금왕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라 멍하니 얼이 빠져 있는데 늑대가 안타까운 목소리로 탄식했다. 하지만 그의 말은 채 마무리되지 못했다. 금왕이 문득 꼬리로 내 눈을 가려 온 것이다. 그에 나를 비롯해 모두 무언가 눈치채고 눈을 감았다.
잠시 후, 빛이 폭발하듯 강렬한 번쩍임이 감은 눈꺼풀 너머로 느껴졌다가 사그라졌다. 그를 느꼈지만, 나는 또 이전처럼 인간형으로 변한 금왕을 보고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 댈까 봐 쉬이 눈을 뜨지 못했다. 그러다 문득 내 손에 쥐어져 있던 금신의 머리카락을 누군가 당기는 느낌에 놀라 눈을 떴다.
“잠깐……!”
혹시 내 대답이 늦어 금왕이 제안을 철회하려나 싶어 당황해 소리쳤으나 말을 잇지는 못했다. 내 왼쪽 손에 쥐어져 있던 금신의 머리카락의 한쪽 끝을 빼낸 금왕이 갑자기 그것을 내 약지에 감기 시작했다.
생각과는 다른 풍경에 금신의 머리카락을 빼앗길까 봐 꽉 힘주었던 손에서 자연스레 힘이 풀렸다. 금왕은 남은 부분마저 손가락에 다 감고 마지막에는 예쁜 리본 모양으로 매듭까지 지었다. 머리카락이 무척 길어서 다 감고 나니 제법 두꺼워졌다. 길게 늘어진 가닥일 때보다 훨씬 선명한 금빛을 뿌리는 게 흡사 금반지같이도 보였다. 그래서 더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데, 금왕이 머리카락이 감긴 내 손을 끌어당기더니 두 손으로 꼭 움켜쥐었다.
“호연…… 제발, 받아 주지 않겠나?”
내가 그토록 그리워했던 금왕의 푸른 눈이 애원하듯 간절히 빛났다. 그런데 어찌 거절할 수 있을까. 나는 목이 메어 와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입술 대신 고개를 끄덕여 답했다.
“호연…….”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나를 보는 금왕의 모습에, 나는 뺨을 타고 흐르던 눈물이 바람에 날리도록 다시 힘껏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안겨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