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6/11)

5.

“인간, 눈을 감아라.”

이제 정말로 집으로 돌아가기 직전이었다. 금왕은 나를 태우기 위해 다시 흑호의 모습으로 돌아가고자 내 눈을 감겼다. 하지만 나는 그의 말에 따르는 대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어, 금왕님.”

“왜 그러지?”

무심히 고개를 갸웃거리는 금왕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제는 그 얼굴에 적응을 했다 싶었는데 이렇게 정면으로 눈이 마주치자 아직도 조금 놀라웠다.

“호랑이 모습으로 돌아가시기 전에요…….”

나는 또 거친 발길질을 시작한 심장을 진정시키려고 노력하며 대답했다.

“그, 금왕님 머리카락을…… 꼭 한 번 만져 보고 싶어요.”

원래도 조심스러웠지만 마지막 말은 더욱 작고 은밀하게, 거의 속삭이듯 말했다. 내가 생각해도 좀 어이없는 요청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허?”

아니나 다를까. 내 뜬금없는 요구에 금왕이 기막힌 신음을 내뱉었다. 하지만 나는 굴하지 않고 간절한 눈빛으로 애원했다. 꼭 한 번 만져 보고 싶었다. 본체인 흑호의 털을 연상케 하는 그 흑단 같은 머리칼이 과연 감촉도 그처럼 부드러울까 너무 궁금했다.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기에 더욱.

“인간, 너는 정말…….”

초롱초롱한 눈으로 열렬히 바라보자 금왕이 못 말리겠다는 듯이 중얼거리고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살짝 체념에 가까운 허락이었지만 모르는 척 냉큼 인사하며 손을 뻗을 때였다.

“인간, 인간!”

익숙하면서도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도도돗! 다급히 달려오는 미어캣이 보였다.

“어?”

“하아, 하아…… 아, 아직 안 떠나서, 하아, 다행……이다.”

전력 질주를 했는지 내 앞에 멈춰 선 미어캣이 연신 작은 가슴을 들썩이며 힘겨워했다. 그 모습이 안쓰러워서 토닥여 주려 몸을 굽히다 말고 멈칫했다. 방금까지 보이지 않았던 문조가 토돗토돗, 미어캣의 등을 타고 오르며 머리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뭐야, 단식 투쟁 때문에 아프다더니 이제 다 나은 거야? 다행…… 응?”

말을 건네다 말고 잠시 문조를 살폈다. 미어캣의 머리 위에 완전히 올라와 자리를 잡은 하얀 문조가 입에 웬 꽃 한 송이를 물고 있었던 덕분이다. 그때 미어캣이 자신의 머리 위에 있던 문조를 두 손으로 감싸 내렸다.

“인간, 받아.”

“어?”

미어캣이 손에 든 문조를 내게 내밀었다. 설마 저 문조를 내게 준다는 뜻은 아닐 테고. 설마, 하며 손을 내밀자 미어캣에게 들려 있던 문조가 자신이 물고 있던 꽃을 그 위에 내려놓았다.

“이건…… 혹시, 나한테 주는 선물이야?”

놀란 눈으로 손에 놓인 꽃을 바라보다가 묻자 문조와 미어캣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이 무척 귀엽고 또 너무 고마워서 감격 어린 눈빛을 보내는데 어째서인지 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미안해, 인간. 괜히 우리가 네 이야기를 해서…….”

“정말 미안해. 우리 때문에 이렇게 벌써 떠나게 돼서…….”

문조와 미어캣이 울먹이며 사과했다. 잔뜩 우울한 기운을 풍기며 고 작은 머리를 폭 꺾은 모습이 너무 애처로워 보여서 나는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아냐, 그건 진짜 신경 쓰지 말라니까. 그보다 이 꽃 정말 고마워.”

화제를 바꾸어 손에 놓인 꽃을 조심스럽게 감싸 쥐며 웃자 그제야 두 금수가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그거, 행운의 꽃.”

“그리고 기적의 꽃!”

“오, 그래?”

뿌듯한 얼굴로 자랑스러워하는 두 금수의 모습에 웃으며 맞장구치고는 손에 놓인 꽃을 다시 자세히 살폈다. 내 손가락 두 마디 정도의 크기라 무척 작고 앙증맞은 데다가 빨간 꽃잎이 탐스러워 보였다. 어디서 본 기억이 없는 걸 보니, 아마 흔한 꽃은 아닌 듯했다.

“사막의 선인장에서 피는 꽃인가.”

요리조리 조심조심 돌려 가며 꽃을 구경하고 있노라니 금왕이 말했다.

사막의 꽃? 아…….

나는 납득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문조는 몰라도 미어캣은 본래 사막, 혹은 그와 비슷한 지대에서 사는 동물이었다. 그러니 사막에서 꽃을 가져오고도 남았다. 그리고 어제 찾아온 염왕도 사막 여우의 모습이었던 걸 보면, 또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을 정도로 친한 걸 보면 어아무래도 미어캣이 사는 사막의 주인이 염왕일 것 같았다.

“다 죽어 가던 나무가 되살아나는 순간에만 핀다고 해서, 기적의 꽃이라고도 불리지.”

“어, 그래요? 와, 신기하다. 그런 나무도 있어요?”

금왕의 설명에 손에 들린 꽃을 새삼스러운 눈길로 다시 훑었다. 아까와 같은 꽃인데 그 이야기를 들으니 왠지 조금 더 특별하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아마 네가 사는 세상에는 없을 거다. 그건 초목을 다스리는 초왕이 염왕께 특별히 선물한 나무로 알고 있으니…….”

“응? 염왕……?”

귀에 익은 호칭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무언가 생각하듯 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금왕의 모습이 눈부셔서 잠시 넋을 잃었다.

“맞아. 우리가 염왕께 부탁해서 허락받고 가져온 거야.”

“응. 그러니까 걱정 말고 받아도 돼.”

미어캣과 문조의 대답에 정신을 차린 나는 손에 들린 꽃을 또 한 번 내려다봤다. 앞서 두 번이 각각 달랐듯이 이번에도 꽃이 색다르게 보였다. 이 귀엽고 앙증맞은 꽃이 갑자기 좀 도도해 보인다고 할까.

“그걸 가지고 있으면, 행운과 기적이 한꺼번에 찾아온대.”

“응. 그러니까 꼭 가지고 있어.”

미어캣과 문조가 뿌듯한 얼굴로 말했다.

“그럴게. 둘 다 정말 고마워!”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꽃이 망가지지 않도록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감싸 쥐었다. 그리고 기도하듯 맞잡은 두 손을 입가에 잠깐 대었다 내리며 두 금수에게 웃어 보였다. 그러자 두 금수도 기분 좋은 듯 활짝 웃더니 급한 일이 있다며 곧장 돌아가 버렸다. 올 때처럼 갑작스럽고 빠르게. 미어캣과 문조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배웅해 주다가, 그들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다시금 손을 내려다봤다.

“아, 정말 생각지도 못한 선물이네요.”

그래서 더 기쁘고 반가웠다. 이별에 술렁거리던 마음이 순식간에 다 위로가 될 만큼.

“나도 선물은 전혀 생각지 못했군.”

어쩐지 미안함이 담긴 금왕의 목소리에 나는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이미 잔뜩 선물해 주신걸요.”

“그래도 뭔가…… 아. 넌 맹수들이 그렇게 좋다 하니…….”

잠시 아쉬운 얼굴을 하던 금왕이 알아들을 수 없는 혼잣말과 함께 나를 바라봤다.

“나도, 선물을 하나 할 수 있을 것 같군.”

“네?”

무슨? 의문을 채 내뱉기도 전에 갑자기 금왕이 내 팔을 훅 잡아당겼다.

“우왓!”

기우뚱, 몸이 기울어져서 놀라 비명을 지른 찰나, 갑자기 단단한 손길이 목덜미를 꽉 움켜쥐었다. 그리고,

“읍……!”

깜짝 놀라 부릅떠진 내 눈에 사람의 형상을 한 맹수가 비쳐 들었다.

‘무, 뭐, 뭐……?!’

그야말로 사나운 맹수가 달려드는 듯 무시무시한 기세에 눌려 얼어붙은 사이, 입술에 뜨거운 것이 부딪치듯 격렬하게 닿았다. 충격에 벌어진 틈으로 더 뜨거운 것이 파고들었다. 당황해 굳어 있는 혀를 열기 덩어리가 힘을 주며 꽉 눌러 왔다.

꾹꾹, 마치 도장이라도 찍듯 계속해서 짓누르는 생경한 감촉에 놀라 뒤로 물러나자 어떻게 된 일인지 그것이 내 혀를 휘감았다. 그리고 강한 압력으로 빨아 당긴 덕분에, 혀뿌리가 뽑힐 듯 얼얼했다. 그에 멈칫한 사이 뜨거운 것이 계속해서 치덕치덕 부딪쳐 왔다.

혀가 마치 불에 덴 듯, 아니, 입 안 가득 열기가 들어찼다. 그 열이 번진 듯 얼굴이 터질 듯 뜨거워지며 머릿속이 몽롱해졌다. 나른한 기분을 이기지 못하고 절로 눈꺼풀이 내려앉았다. 뻣뻣하게 굳었던 혀도 어느새 사르르 녹아내렸다. 그러자 다시 뜨거운 것이 안을 마음껏 짓누르고 비비며 압박해 왔다.

그러다가 갑자기 혀 옆면을 쓸어내리더니 이내 아래쪽을 파고들어 핥았다. 혀 아래에 닿는 보드라운 감촉이 간지러워 움찔 굳어지자 그것이 다시 내 혀를 휘감았다. 그리고 쪽쪽 빨아 당겼다. 억세게 잡아당기는 데도 이상하게 부드러운 느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어? 이거…….

둔한 머릿속으로도 내 혀에 얽혀 오는 감촉이 어쩐지 익숙하다고 느꼈다.

이게, 뭐였더라…….

열기의 정체가 잘 생각나지 않아서 멍하니 의문을 품는데 잔뜩 힘이 들어가 나를 잡아당기던 것이 힘을 풀고 다시 다정하게 내 혀를 쓸어 주었다. 열기가 내 혀를 보드랍게 간질이듯 훑고 지나갔다. 꽉 붙잡아 괴롭히던 혀를 사방으로 핥을 뿐만 아니라 그 아래쪽, 보들보들한 곳과 까끌까끌한 입천장, 연한 볼 안쪽과 치아까지 차례로 핥는 그 느낌에 나는 비로소 그 정체를 깨달았다.

‘아, 이거 혀……!’

순간 반가움에 눈을 번쩍 떴다가 그대로 우뚝 굳어졌다.

‘무, 무슨……!’

그제야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깨닫고 경악하는데, 금왕은 여전히 얼굴을 기울인 채 내게 바싹 달라붙어 떨어질 줄 몰랐다. 그 가운데 그가 내 입 안을 핥는 질척한 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하지만 그건 배경음처럼 그저 스쳐 지나갈 뿐, 나는 그보다 쿵쿵쿵쿵, 미친 듯이 뛰어 대는 심장 소리를 더 크게 듣고 있었다.

입 안을 헤매는 열기를 느낄수록 심장이 더욱 격렬히 반응했다. 이미 터질 것 같던 얼굴이 더욱 달아올랐고, 열기로 가득하던 입 안은 그대로 불타 없어질 것만 같았다.

‘아으…….’

한계를 넘어서까지 요동치는 심장이 아파 나도 모르게 나를 붙든 금왕의 팔을 꽉 움켜쥐었다. 막 내 아랫입술 안쪽의 보드라운 곳을 쓸어내리던 그의 혀가 멈칫하더니 드디어 나를 휘젓던 열기가 사라졌다.

‘아…….’

초점이 풀린 눈으로 멍하니 시선을 던지자 어째선지 멀어지던 금왕이 우뚝 멈춰 서서 나를 바라봤다.

‘……윽!’

터져 나오려는 신음을 삼켰다. 한 뼘 거리에 서 있던 금왕이 다시 달려들어 내 아랫입술을 꾹 깨물어 버린 탓이었다. 통증에 눈가를 찌푸릴 새도 없이 깨문 입술을 쪽쪽 빨아 당기더니 이내 혀로 핥았다. 너무 놀라 그대로 얼어붙었다가 뒤늦게 화들짝 정신을 차리며 금왕을 밀어냈다.

“무, 무, 무슨 짓을……!”

금왕이 생각보다 쉽게 물러나지 않아서, 고개까지 젖혀 피했다. 하지만 목덜미와 턱이 금왕에게 꽉 붙들려 여의치 않았다. 힘껏 고개를 틀어도 겨우 손가락 한 마디만큼의 틈이 생겼을 뿐이었다. 그를 조금이라도 더 벌려 보려고 잔뜩 힘을 주어 금왕의 얼굴을 밀어내며 힘껏 버둥거렸다.

“……왜 그러지?”

내게 얼굴을 떠밀린 금왕이 의아한 목소리를 냈다. 내가 왜 이러는지 전혀 모르겠다는 듯이. 그 태연한 물음에 순간 울컥해서 그를 쳐다봤지만 곧 고개를 내렸다. 바로 눈앞에서 나를 들여다보는 그 얼굴을 보고, 아니, 촉촉이 젖어 있는 그의 입술을 보고 반사적으로 나온 행동이었다.

다시금 심장이 쿵쾅쿵쾅 뛰어 대기 시작했다. 금왕의 얼굴을 붙잡은 손이 화상이라도 입을 것 같아서 화들짝 그에게서 손을 떼어 냈다.

“내 선물이 마음에 안 드나? 좋아할 줄 알았는데…….”

“……네?”

금왕의 실망 섞인 음성에 다시 고개를 들었다. 선물? 설마 작별 선물로 키스를 한 건가? 얼빠진 얼굴로 바라보고 있노라니 금왕이 아, 낮은 탄성을 내뱉었다.

“넌 모르겠군.”

뭘?

“방금 그걸로 넌 내가 없이도 금수들을 다룰 수 있게 된 거다. 네 혀에 내 타액을 흡수시켜 놓았기 때문에 이제 네 말은 내 포효와 같은 효과를 지니니까. 물론, 영원히는 아니고 당분간일 뿐이지만.”

“……!”

그, 그러니까…… 방금 그…… 키, 스가…….

눈을 끔뻑이며 더듬더듬 상황을 파악해 나가던 나는 이내 화르륵 얼굴이 불타오르는 걸 느꼈다. 조금 전 금왕과 나누었던 입맞춤이 떠오른 덕분이었다.

아, 근데 그게 단순한 키스가 아니라 타액을 흡수시켜 주려…… 윽.

나도 모르게 혀를 씹었다. 내게 타액을 전수하고자 금왕이 혀를 집요하게 맞댔던 그 감촉과…… 내 입 안을 가득 헤집던 움직임이 선명하게 기억났기 때문이었다. 그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다시 쿵쾅쿵쾅 요동치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서둘러 머리를 흔들었다. 하지만 불현듯, 입 안을 헤집고 멀어졌던 금왕이 다시 달려들어 아랫입술을 쪽쪽 빨아 당긴 기억이 되살아났다.

‘아니, 혀는 그렇다 쳐도 입 안의 다른 곳이랑 입술은 또 왜……!’

억울한 기분에 금왕에게 항변하려다가 다시 입을 딱 다물었다.

“인간? 그렇게 싫었나?”

아직도 내 목덜미와 턱을 붙잡고 있던 금왕이 나를 살피려 가까이 다가왔다. 닿을 듯한 거리에서 그를 본 것만으로도 또 얼굴에 열이 몰렸다. 머릿속까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항의는커녕 거의 반쯤 패닉 상태에 빠져서 그게 아니라며 고개를 젓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억울함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키스나 다름없기도 했고, 무엇보다…….

나, 난 첫 키스였단 말이에요, 금왕님!

차마 내뱉지 못한 항변이 입 안을 맴돌았다. 답답함에 나는 괜히 애꿎은 내 가슴만 내려다봤다.

아우, 심장아. 너도 이제는 그만 좀 뛰어라.

첫 키스의 충격이 너무 컸던 탓인지, 아직도 심장이 벌렁거렸다. 내가 충격에 허우적거리는 동안 금왕은 어느새 거대한 흑호의 모습으로 돌아갔는데도 그랬다. 그래서 평소라면 금왕의 등에 오르자마자 잔뜩 신이 나서 그 뽀송뽀송한 털에 온몸을 비벼 댔을 텐데 이번에는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

“왜 그러지?”

얌전을 떠는 내가 이상했던지 금왕이 고개를 꺾었다. 평소에는 귀엽다고만 생각했던 그 크고 둥그런 눈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손으로 가슴을 꾹 눌러 내리며 애써 태연한 척 대답했다. 그리고 소리 없이 심호흡을 하며 두근대는 심장에게 제발 그만 좀 뛰라고 애원했다. 사람의 얼굴도 아니고, 저 귀여운 호랑이의 얼굴에까지 이렇게 심장이 뛰다니. 키스의 여운이 길어도 너무 길었다.

“……그럼, 출발할 테니 꽉 붙잡아라.”

조금 미심쩍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금왕은 이내 출발할 듯 자세를 다잡았다. 시키는 대로 한껏 몸을 낮춰 등의 보드라운 털을 꽉 붙잡다 말고 다시 고개를 쳐들었다.

“저…… 그, 금왕님!”

한껏 다리에 힘을 주며 출발 직전이었던 금왕이 멈칫해서 나를 돌아봤다. 청해를 머금은 투명한 눈동자에 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제야 나는 내가 흑호인 금왕을 상대로도 왜 이렇게 동요하는지 알 수 있었다. 눈앞의 푸른 눈은 비록 사람일 때와 크기와 모양이 전혀 달랐지만, 그 눈빛만은 변함이 없었다. 언제든 맑고 투명하며 위엄이 서린……, 그럼에도 묘하게 다정한 눈동자. 보고 있노라면 요동치는 심장 한구석에 왜인지 뭉클한 느낌이 피어오를 것처럼. 그래서 잠깐 목이 메었던 나는 곧 꿀꺽 침을 삼키며 목구멍을 틔웠다.

“아까…… 그거요.”

“음?”

“그러니까, 그…… 선물이요.”

의아한 얼굴을 하던 금왕이 아아, 알겠다는 듯 신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일은 왜냐고 묻는 듯 바라보는 시선에 또 심장이 제멋대로 두근거린다.

아, 정말. 그저 의아해하는 것뿐인데 너 왜 이러냐. 진정 좀 해.

나는 주먹으로 가볍게 가슴을 두드리며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금왕을 마주 봤다.

“금왕님께서는 선물을 주기 위해 그러셨지만…… 사실, 그렇게 입을 맞대고 혀를 비비는 건 키스라고, 인간 세상에서는 연인 사이의 애정 표현이거든요…….”

“그래? 그냥 입만 맞추는 게 아니었나?”

금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제 내가 새끼 치타를 만났을 때 해 준 설명을 떠올린 모양이었다.

“아, 그게…… 입술을 맞대는 건 뽀뽀라고, 그건 연인 사이가 아니어도 그냥 친애의 의미로도 많이들 하구요. 그 키스라는 건 연인하고만 해요. 아, 어떤 사람들은 연인 사이가 아니어도 할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보통은 그래요.”

내 설명에 금왕의 눈이 조금 커졌다.

“아…… 그래서 내 선물에 그리 놀란 건가?”

금왕이 뒤늦게 당황한 얼굴로 건넨 물음에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몰라서 미안하다. 연인도 아닌데 그래서 많이 불쾌했겠군.”

“아니, 아니요!”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기분 나쁘지는 않았어요!”

“……기분이 안 나빴다고?”

“네, 전혀요.”

어쩐지 믿기 힘든 표정을 짓는 금왕에게 나는 단호히 고개를 끄덕였다. 설왕의 반려와 만난 이후로 성별과 종에 대한 경계가 무너져서일까. 깜짝 놀라 금왕을 마구 밀어내기는 했지만, 신기할 만큼 불쾌감은 없었다.

“네. 근데…… 정말 놀라기는 엄청 놀랐거든요.”

아직도 이렇게 심장이 뛸 정도로요. 뒷말을 삼킨 채 나는 한껏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혹시라도, 제가 아닌 사람에게 또 그 선물을 주고 싶어질지도 모르니까 말씀드리…… 앗! 혹시 벌써 저 말고 그런 선물을 주신 적 있는 건 아니죠?”

번뜩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에 서둘러 물었다. 순간 마음 한구석이 이상하게 저릿해져서 미간을 모으는데 금왕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없다. 네가 처음이었다.”

“아, 다행이다. 저도 키스는 처음…… 아. 이, 이게 아니고…….”

왠지 마음이 풀어져 엉뚱한 소리를 늘어놓다가 서둘러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민망함에 달아오르는 얼굴에 가볍게 손부채질을 했다.

“아, 아무튼 그러니까 만약 혹시라도 저 아닌 다른 사람에게 하게 되실 때는 조심하시라구요. 만약 필요하다면 예고나 설명을 하시고……. 근데, 그래도 분명 그 사람은 저처럼 심장이 터져 버릴 것처럼 괴로울 테니 안 하는 게 좋을 것 같……지만 결정은 금왕님이 하시는 거니까요.”

말하다 보니 괜한 오지랖인가 싶어져 점점 말소리가 줄어들었다. 그때 문득 금왕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애초에…… 다른 사람에게 할 생각 따윈 없다.”

“네?”

고개를 들어 바라보자 금왕이 타박하듯 내 이마에 톡, 고 동그란 입매를 부딪쳤다.

‘어, 이건 뽀뽀라니까…….’

하고 생각했지만 이마에 닿는 보드라운 감촉이 좋아서 이번 건 그냥 묵인했다.

‘㉦’

“인간, 다 왔다.”

아프리카에 갈 때는 시간이 꽤 걸렸던 것 같은데, 돌아올 때는 순식간이었다. 금왕의 등에 매달린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익숙한 공터에 도착해 있었다. 금왕은 바로 내가 등에서 내릴 수 있도록 천천히 몸을 낮춰 엎드렸다. 그 순간 이제 정말 이별이구나, 라는 새삼스러운 실감이 나를 덮쳐 왔다.

“……인간?”

완전히 엎드렸는데도 내가 움직임이 없자 금왕이 의아한 목소리를 냈다.

“어, 저기…… 아! 그러고 보니, 제가 아직 제 이름 말씀 안 드렸죠?”

조금이라도 이별을 미루고 싶은 본능이 작동한 건지, 나도 모르게 입이 움직였다. 하지만 말하고 보니 새삼 잘 말했다 싶었다. 금왕이 내 이름도 모른 채 이별한다고 생각하니 무척 아쉬웠다. 비록 금수들 세상에선 이름이 중요하지 않다고 하지만, 아무리 나를 나 개인으로 기억해 준다고 해도, 이름이 없으면 무수히 많은 인간 중 한 사람으로만 남아 버릴 것 같았다. 어쩐지 그건 싫었다.

“이름? 아. 그래, 인간들은 개인마다 부르는 말이 따로 있다고 하지.”

잠시 의아해하던 금왕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러니…….”

“그래서, 네 이름은 뭐지?”

제 이름을 말씀드려도 될까요? 질문을 꺼내기도 전에 금왕이 먼저 물었다. 이름을 특별하게 생각지 않는 금왕이었기에 먼저 궁금해할 줄은 몰라서 순간 당황했다가 곧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아, 제 이름은 호연이에요, 이호연!”

“호연?”

금왕이 확인하듯 읊조렸다.

“……!”

나도 모르게 눈이 휘둥그레졌다. 살면서 셀 수도 없이 들어온 내 이름인데, 이 순간 금왕의 입을 통해 나오자 낯설게 느껴졌다. 아니, 낯설기보다 묘하게…… 두근거렸다. 내 이름을 듣고 두근거리다니. 이건 20년을 넘게 살면서 한 번도 없었던 일인데. 목소리가 근사해서 그런가…….

‘아, 그러고 보니 금왕님은 목소리도 좋네.’

지금에서야 새삼 금왕의 목소리가 울림이 좋은 근사한 저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동안 그의 귀여움에 빠져서 다른 부분은 제대로 인지할 새가 없었다.

“인간, 아니, 호연?”

……이제는 목소리에까지 홀린 걸까. 나를 부르는 금왕의 목소리에 심장 박동이 격해질 뿐만 아니라 머릿속이 멍해졌다. 지금 나를 보고 있는 그의 얼굴이 호랑이가 아니라 인간의 모습이라면, 아마 숨이 막혀 버리지 않았을까. 게다가 또 입 맞추기라도 하면…….

‘우왓!’

몽롱한 머릿속으로 인간형 금왕을 떠올리다가 깜짝 놀라서 정신을 차렸다.

‘내가 대체 무슨 생각을……!’

잠시 머리를 두드리며 떠올린 생각들을 지웠다. 그러다 의아한 듯 나를 바라보는 금왕을 깨닫고 서둘러 입을 열었다.

“아, 저기…… 그 호연이라는 건, 저희 할아버지가 지어 주신 이름인데요. 한자로, 그러니까 뜻을 풀이해 보자면 ‘호랑이가 맺어 준 인연’이라는 뜻이래요. 할아버지가 제 태몽, 아니, 저 태어나기 전에 파란 호랑이 꿈을 꾸셨…….”

말을 하다 말고 멈칫했다. 흑호의 모습을 한 금왕에게 태몽이 호랑이라고 하려니 왠지 쑥스러워져서였다.

“파란…… 호랑이?”

하지만 어쩐지 흥미를 보이는 것 같은 금왕의 모습에 계속 말을 이었다.

“아, 네! 맑은 하늘처럼 연한 파란색에 짙은 파란색 줄무늬를 지닌 호랑이였는데 아주 신성해 보였고, 또 산처럼 컸대요. 아마, 금왕님보다 더 컸을지도 몰라요.”

“하늘색에, 푸른 줄무늬…….”

그 모습을 떠올리기라도 하듯 금왕이 조금 멍해진 얼굴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사실 저희 어머니께서 몸이 무척 약해서 아무래도 임신은 어려울 거라는 말을 많이 들으셨대요. 그래도 워낙 아이를 좋아하셔서 계속 미련을 못 버렸는데 기적처럼 제가 생겼던 거죠. 그래서 할아버지가 아무래도 그냥 태몽이 아니라 그 호랑이가 절 물어다 준 것 같다고, 호랑이와의 인연을 고마워하는 의미에서 호연이라고 지으셨대요.”

말을 마친 나는 아, 하고 나지막한 탄성을 뱉어 냈다. 진지한 얼굴로 내 이야기를 듣고 있는 금왕을 보자 왠지 기분이 묘했다. 어릴 때 할아버지에게 귀가 따갑도록 들은 이야기라, 이름을 말할 때 태몽을 설명하는 건 습관 같은 일이었는데 흑호인 금왕을 상대로 하자 새삼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그와 나 사이에 묘한 인연의 끈이 이어진 것 같은.

“푸른, 호랑이가 물어다 준 인연이라…….”

금왕도 왠지 묘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말 없는 주시에 조금 쑥스러운 기분이 들어 슬그머니 고개를 숙일 때였다.

“……말해 줘서 고맙다.”

금왕의 울림 좋은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그런데 나는 가르쳐 줄 이름이 없어서 미안하군.”

“앗, 아니에요. 이름 없는 게 왜 미안할 일이에요.”

손을 내젓다가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멈칫 금왕을 보았다.

“그러고 보니, 세상에 금왕님은 한 분뿐이신 거죠?”

“그래.”

“그럼 금왕님은 이름이 전혀 필요가 없는 거네요! 금왕이라는 건 원래 지위를 가리키는 말이지만, 그 말을 쓸 수 있는 건 금왕님뿐이니 이름이나 마찬가지인 거잖아요.”

“그런가?”

“그렇죠!”

“……네 이름도 하나뿐인가?”

내 말에 수긍하는가 싶던 금왕이 돌연 질문을 던졌다.

“어, 그건 아닐 거예요. 아직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을 만나진 못했지만…… 음, 아마 어딘가에는 더 있을 거예요.”

“그러면 굳이 이름이 쓸모가 있나?”

금왕의 예상치 못한 물음에 나는 잠시 당황했다. 한 개인을 그저 그 개인 자체로 기억해 구별 짓는 금수들의 시각에서 이름이라는 건 어쩌면 쓸모없는 것일 수 있었다. 세상 개개인은 모두가 다 다르지만, 이름은 그렇지 못하니까.

물론 인간 세상에는 말과 글이 존재하기에 울음과 몸짓, 그 외 여러 감각으로만 소통하는 짐승들과는 다른 문화가 생길 수밖에 없다. 그러니 우리 세상에서는 꼭 필수적인 이름의 존재가 그들에게는 무의미하고 불필요하게 보이는 것도 당연한 차이로 받아들여야 했다. 하지만 왜인지 내 이름이 금왕에게 마냥 쓸모없이 여겨져 잊히는 건 싫을 것 같았다.

“어……. 아, 그래도 금왕님께서 알고 있는 이 가운데서는 호연이란 이름을 가진 이가 저뿐인 거잖아요! 금왕님이 저랑 이름이 같은 다른 사람을 알게 되기 전까지는, 그 이름을 사용할 수 있는 이도 저뿐이니까, 쓸모 있지 않을까요?”

말하고 나자 너무 궤변이 아닌가 걱정스러워졌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또 나름 그럴싸하지 않나 싶기도 했다. 인간 세상에는 많은 동명이인이 있겠지만 금수의 세상에서는 오직 하나뿐인 이름이었다. 이름을 가진 존재조차 거의 드물어, 그 자체로 특별한 것도 같았다.

그게 아니더라도, 금왕이 그렇게 생각해 주면 그걸로 괜찮지 않을까……. 힐끗 눈치를 살필 때였다. 금왕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호연. 이호연…….”

조용한 울림이 느껴지는 부름이 너무 근사해서 다시 가슴이 두근거렸다.

두근, 두근두근, 두근두근두근.

격렬하지는 않지만 끊임없이 이어지는 긴 두근거림은 마치…… 아까의 그 키스 다음으로, 마지막으로 선물을 하나 더 받은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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