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
주위에 일순 침묵이 감돌았다. 하나 잠시 후,
“뭐?”
“뭐라고?”
“그게 무슨 말이야?!”
“잠깐……!”
맹수들이 저마다 경악한 얼굴로 비명 같은 소리를 내질렀다. 설마 내가 그 말을 꺼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는 그들의 모습에 그동안 내가 너무 욕심쟁이였나, 하는 생각이 들어 조금 민망했다. 게다가 염왕이 아니었다면 계속 아무것도 모른 채 여기에 쭉 머물며 민폐를 끼쳤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더욱.
“……역시, 그거냐.”
혼란스러워하는 맹수들을 지켜보던 염왕이 나섰다. 그 말이 마치 어차피 이럴 거 왜 진작 안 갔느냐는 책망처럼 느껴져서 쓴웃음이 지어졌다. 혀끝에 맴도는 씁쓸함을 삼키며 나는 다시 맹수들을 둘러봤다.
“다들, 그동안 정말 감사했습니다. 어린 삵을 구한 것치고는 너무 과분한 보상을 받았어요. 제가 평생을 꿈꿔 온 소원을 이뤘고, 또 그보다 더 행복한 일을 셀 수 없이 경험했습니다. 사실 이렇게까지 보답받을 일이 아니었는데…….”
“아니, 잠깐만! 그저 그 일의 대가일 뿐이었던 게……!”
“그만.”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설표가 끼어들었지만 금왕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제지했다.
“금왕님!”
“인간이 스스로 결정한 이상……, 다른 말은 하지 마라.”
금왕의 단호한 대답에 설표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다만 그럼에도 무언가 할 말이 잔뜩 남은 눈으로 금왕을 바라보고, 또 나를 바라봤다.
대체 뭐 때문에 그러지? 고개를 갸웃거릴 때였다.
“인간, 계속해라.”
금왕의 재촉에 나는 곧 의문을 지웠다.
“지난 며칠간, 평생 잊을 수 없는 행복한 일들을 경험하게 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금왕님. 그리고 죄송합니다. 좋은 마음으로 저를 위해 주셨는데, 제가 눈치 없이 폐를 끼쳤습니다.”
“…….”
저를 향한 내 인사를 금왕은 그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감정을 읽을 수 없이 짙게 가라앉은 푸른 눈동자가 묘하게 슬픈 기색을 띠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가벼운 한숨과 함께 눈을 감았다 다시 떴을 때는 여느 때와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아니, 내가 미안하지. 더…… 데리고 있어 주지 못해서.”
“아니요, 아닙니다! 이미 충분히, 정말 넘치도록 행복했는걸요! 너무 행복해서, 폐가 될 거라는 생각을 미처 못 하고 쭉 버티고 있었을 만큼이요.”
“그…….”
순간 금왕이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다만 또 짙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모습에 조금 의아해지는 찰나.
“그래서, 지금 바로 떠나겠다는 거냐?”
고소를 띤 얼굴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염왕이 불쑥 물었다. 냉담한 목소리가 찌를 듯이 날카로워 순간 멍해졌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며 고개를 끄덕이려는데, 금왕이 선수를 쳤다.
“그건 너무 급합니다, 염왕. 그래도 제 아이를 구해 준 은인인데 이리 급히 보내면 마치 쫓아내는 것 같아 제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어?
“못해도 하루 정도는 더 머무르게 해서 내일 보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인간에게도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 정도는 줘야지 않겠습니까. 며칠간 봐 온 동물들과 인사도 나누고.”
“뭐…….”
금왕의 말에 염왕이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 너도 그 편이 낫겠지?”
“아……. 그, 그래도 될까요?”
생각지 못하게 염왕을 만류하는 금왕의 모습에 조금 놀라서 얼떨떨한 채로 대답했다.
“물론.”
금왕이 즉답했다. 한데 어쩐지 목소리가 미묘하게 낮았고 눈빛이 복잡해 보였다. 그에 또 내가 인사치레인 말에 눈치 없이 구는 건가, 조금 걱정이 들었다.
“아, 혹시 폐가 된다면…….”
“아니, 아니다. 폐는 무슨. 겨우 하루 정도 가지고…….”
단호하게 반박한 금왕의 눈빛이 어쩐지 더욱 심란해졌다.
내게서 원하는 대답을 들은 염왕은 이내 여우의 모습으로 돌아가더니 처음 나타났을 때처럼 울먹이는 미어캣을 꼬리에 달고 서둘러 돌아갔다. 그를 배웅하고 나자 언덕에는 미묘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왠지 묘하게 무거운 분위기에 나 역시 손가락만 꼼지락거리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침묵을 깼다.
“저어……, 동물들에게 인사를 해도 될까요?”
분위기를 바꿀 겸 부러 가벼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에 저마다 생각에 잠겼던 이들이 나를 주목했다. 내가 인사를 하겠다는 상대는 눈앞의 동물 대표들이 아니라, 그냥 일반 금수들이었다.
그러니 다가가려면 이들 중 누군가와 함께하거나, 혹은 금왕이 손을 핥아 주어야 했다. 허락을 구하듯 조심스러운 눈길을 던지자 푸른 눈으로 가만 나를 내려다보던 금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데려다주지.”
그렇게 금왕의 도움으로 언덕 아래로 내려온 나는 태워 주겠다는 금왕의 제안을 거절하고 내 발로 초원을 걸어 다녔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왠지 그러고 싶었다. 한 걸음, 한 걸음 직접 걸어 초원 곳곳에서 살고 있는 동물들을 찾아가 인사했다.
며칠간 지켜보아도 사냥할 때와 식사할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뒹굴거리기만 하던 사자 무리와 나무 위에서 쉬고 있던 표범, 사냥에 성공해 어린 사슴을 먹어 치울 준비 중이던 재규어를 차례로 만났다. 대표들이 아니라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눈빛에서 나와의 이별을 아쉬워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위로가 됐다.
개중 인사를 받은 재규어가 갑자기 자신의 먹이를 내밀어 무척 당황했는데, 작별 선물로 주려는 것이라는 금왕의 설명에 더욱 놀랐다. 날카로운 이빨과 매서운 발톱을 지녀 흔히 무서운 사냥꾼이라고 일컬어지는 맹수들이지만, 실제 그들이 사냥에 성공할 확률은 매우 낮았다. 백수의 왕이라는 사자조차도 30%도 채 안 되는 사냥 성공률을 자랑했다.
게다가 재규어는 배가 고파져야지만 사냥에 나서기 때문에 내게 사슴을 내민 순간 꽤 허기를 느끼고 있었을 터였다. 그런데도 힘들게 잡은 먹이를 내어 주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울컥해서 재규어의 목덜미를 끌어안았다. 마음만으로 너무 감동적이었고, 또 내가 그 사슴을 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마지막까지 선물하려던 재규어를 금왕에게 설득해 달라고 부탁해 마음만 받았다.
그 후로도 초원을 살아가는 많은 동물들과 인사를 나눴다. 꼭 맹수뿐만이 아니라, 얼룩말 무리나, 기린, 코끼리, 하마, 물소, 영양들과도.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하나같이 서운한 눈빛을 보내와서 마음이 먹먹해졌다. 그래서 더는 인사를 하지 못하고 다시 언덕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을 때였다.
종일 정신없이 걷다 보니 어느새 초원 너머의 갈대밭 비슷한 곳에 도착했는데, 어디선가 삑삑거리는 자그마한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새끼 고양이의 울음 같기도 한 소리였다. 간헐적이고 미약해서 처음에는 잘못 들었나 생각했지만 옆에 있던 금왕이 귀를 까딱이며 갈대숲 어딘가를 응시하는 모습에 착각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뭐지? ……우왓!”
의아한 기분에 갈대숲을 헤치고 들어갔다가 비명 같은 환호성을 내질렀다. 등에 하얗고 긴 털이 망토처럼 나 있는 새끼 치타가 갈대밭 사이에서 나를 보고 깜짝 놀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곁에 금왕이 있어서인지, 아니면 내 손에 남은 그의 체취 때문인지 도망을 치지는 않았다. 내가 조심조심 다가가자 까만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작은 목소리로 울었다. 본래 머리가 작은 치타지만 새끼의 머리는 정말 앙증맞을 정도로 작았다.
하지만 그 작은 얼굴에도 눈물 길 같은 까만 줄무늬가 선명했고, 그보다 더 새까만 눈동자와 코, 얼굴 전체를 뒤덮은 뽀송뽀송해 보이는 털과 머리와 등에 송송 나 있는 긴 솜털, 바닥을 디디고 선 올망졸망 자그마한 발, 그리고 아직 몸이 늘씬하게 자라기 전이라 유독 도드라지는 오동통한 배…….
‘아아…….’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내 팔뚝보다도 작아 보이는 그 새끼 치타는 심장이 저려 올 것처럼 귀여웠다. 갑자기 주변 풍경이 사라지고 그 새끼 치타만이 보이기 시작했다. 두 눈 가득 그 모습을 담자 손끝이 절로 움찔거리고 쿵쾅쿵쾅, 거칠어진 심장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동시에 온몸의 피가 뜨겁게 들끓었다. 멍하니 넋이 나간 내 모습에 새끼 치타가 알 수 없는 소리로 울더니 고 작은 머리를 갸웃거렸다.
“귀여워!”
치솟는 충동을 가누지 못하고 마침내 그 새끼 치타에게 달려들었다.
“아아, 진짜 귀엽다. 미칠 것처럼 귀여워!”
새끼 치타를 꼭 끌어안고 솜털이 부드러운 머리와 등, 오동통한 배, 작고 동글동글한 발끝에다 쪽쪽 입을 맞췄다. 아직 너무 작아서 왠지 손으로 마구 쓰다듬어서는 안 될 것 같았는데 넘치는 애정을 주체할 수 없어 그렇게라도 표현했다.
“인간.”
내가 막 새끼 치타의 조그만 입에다가도 입을 맞추려는데, 옆에서 가만 지켜보던 금왕이 나를 불렀다. 그에 우뚝 동작을 멈추고 시선을 던지자 금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새끼 치타는 조그마해서 귀엽더니 금왕은 또 왕 커서 귀여웠다.
“그건 뭘 하는 거지?”
“네? 어…… 뽀뽀요?”
홀린 듯 금왕을 바라보다가 뒤늦게 질문을 이해하고 반문했다.
“뽀뽀? 그렇게 입 맞추는 걸 인간들은 그리 부르나?”
“네, 맞아요. 이건 인간들의 애정 표현이에요.”
“애정 표현?”
“네. 금왕님의 목을 핥는 거랑 비슷한 거랄까요? 근데, 동물들도 가끔 입맞춤을 하던데. 아닌가요?”
“그럴지도.”
금왕이 무뚝뚝한 얼굴로 애매하게 중얼거렸다. 그 모습에 설령 동물들이 애정 표현으로 입을 맞춘다고 해도 그는 경험이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납득하고는 다시 새끼 치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내가 금왕과 대화하는 모습을 까만 눈으로 올려다보며 귀를 까딱거리는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다시 반사적으로 입을 맞추려던 때였다. 금왕의 도톰한 꼬리가 나와 새끼 치타 사이에 끼어들었다.
“어?”
“어린애를 자꾸 희롱하면 안 된다.”
금왕이 내게 시선도 주지 않고 다른 곳을 바라보며 무심히 말했다. 아, 또 내가 너무 생각 없이 행동했나. 뒤늦게 반성하다가 문득 아직 눈앞에서 살랑거리는 금왕의 탐스러운 꼬리에 눈이 고정됐다. 한눈에도 복슬복슬 도톰한 꼬리가 춤을 추듯 부드럽게 살랑살랑…….
‘아아!’
나는 새끼 치타를 보았을 때보다 더욱 뜨겁게 들끓는 충동에 눈앞의 꼬리를 붙잡아 쪽, 입 맞췄다. 그러자 금왕이 깜짝 놀라 움찔! 꼬리를 세웠다. 손안에서 경직되는 꼬리가 귀여워 다시 쪽, 입을 맞추자 이번에는 금왕이 흠칫, 꼬리뿐만 아니라 온몸을 크게 굳히며 털을 세웠다. 그 반응이 귀여운 데다 입가를 간질이는 털의 감촉이 너무 좋아서 두어 번 더 입을 맞추자 금왕의 몸에서 힘이 빠졌다.
“하아아…….”
어쩐지 금왕이 무척이나 길고 낮은 한숨을 내뱉었다.
‘아. 역시 못 말린다고 생각했을까.’
잔뜩 눈치를 살피면서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눈앞의 꼬리에 입 맞추었다. 금왕의 입에서는 더욱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아가야. 네 엄마는 언제쯤 돌아오실까?”
나는 걱정 어린 얼굴로 품에 안긴 새끼 치타를 내려다봤다.
새끼 치타를 처음 만났을 때가 늦은 오후이긴 했지만, 그래도 아직 하늘이 환했을 무렵이었다. 어느새 그런 하늘이 깨어지며 다채로운 색상으로 노을이 지고 있는데 어미 치타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렇게 어린 새끼를 둔 어미는 사냥할 때를 제외하면 언제나 곁에서 지켜 주는 것이 보통인데 이리 오래 자리를 비우는 것은 좀 이상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섣불리 안 좋은 생각을 떠올리고 싶지는 않아서 나는 금왕과 함께 조금 더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나 결국 아름다운 하늘이 까만 어둠으로 물들 때까지도 어미 치타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아무래도……, 무슨 일이 있나 보군.”
어미 치타가 올까 싶어 연신 주위를 살피는 내게 금왕이 말했다.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깜짝 놀라서 고개를 들자 금왕이 어쩔 수 없다는 눈빛을 보내왔다.
“인간, 너도 언제까지 이곳에 있을 수만은 없으니 그만 새끼 치타를 내려 주어라.”
눈에는 분명 안타까움이 담겨 있었지만 목소리는 냉정했다. 그리고 그는 굽혔던 뒷다리를 펴고 일어나 걸음을 옮길 준비를 했다. 그 모습에 왠지 다급한 마음이 들어 그의 꼬리를 붙잡았다.
“윽. 인간?”
힘 조절을 잘못해서 생각보다 꽉 쥐었는지 금왕이 신음하며 나를 돌아봤다.
“아, 저기…… 혹시 어미가 어떻게 된 거라면…… 우리가, 아니, 금왕님께서…….”
우리라고 표현하기에는 내가 이곳에 머무를 시간이 너무 짧다는 생각에 서둘러 정정했다. 하지만 어쩐지 다음 말을 잇기가 조심스러워서 잠시 머뭇거리다가 간신히 덧붙였다.
“그, 금왕님께서 이 새끼 치타를 데려가 주시면 안 되나요? 여기 이렇게 두면 분명…….”
“인간.”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금왕이 말을 잘랐다. 어쩐지 묵직한 음성에 흠칫, 입을 다물고 쳐다보자 그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내 아이들을 무척 아끼고 사랑하지만, 그 말은 들어줄 수 없다.”
“……네?”
“왕은 만백성이 잘 살 수 있게는 해 주어야 하지만, 백성 하나하나를 다 보살펴 줄 수는 없다. 애초에 무리이기도 하거니와, 형평성이라는 자연의 이치에 어긋나니까.”
아…….
나는 조금 멍한 채로 눈을 깜빡였다. 금왕의 말인즉슨 그가 내 부탁으로 이 새끼 치타만을 구해 준다면, 마찬가지로 부모를 잃고 어려움을 겪는 다른 새끼 동물들과의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뜻이었다. 언뜻 매정하게 들릴 수 있는 말이었지만 이해는 갔다. 자연에서 이런 상황에 처한 동물이 한두 마리도 아닐 텐데, 그들 모두를 다 구할 수는 없을 터였다.
안타깝고 불쌍해도 그냥 두고 떠나는 것, 만백성을 공평하게 대해야 하는 왕인 그에게는 그게 순리였다. 하지만 나는, 나는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벌써 몇 시간이고 함께하며 정이 들었던 데다가…….
-진짜 귀엽지? 요 녀석이 어떻게 온 건지 혼자 설왕의 성에 흘러들어 왔더라고. 그래서 부모에게 데려다주려고 찾아보니 가엾게도 이미 죽고 없었어. 조금만 더 컸다면 무리의 다른 어른들이 두루 키워 줄 텐데 아쉽게도 그러기엔 조금 작아서 내가 키우기로 했지.
“저, 그치만 설왕의 반려께서는 부모 잃은 새끼 펭귄을…….”
나는 설왕의 반려가 펭귄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내게 들려준 이야기를 떠올리며 조심스럽게 반박했다.
“그건 경우가 다르다.”
금왕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끊었다.
“비록 정확한 속내는 알 수 없지만, 그는 단지 사적으로 그 펭귄을 구하고자 옆에 둔 것이 아니다. 설국의 새로운 주민이 된 자신을 도울 새로운 동물이 필요하니 더 보충해야겠다는 명목을 통해 곁에 두게 된 것이다.”
“……!”
“뭐, 아직 어리지만 눈 깜짝할 새에 자랄 거고, 자신을 보조할 수 있는 동물은 그 펭귄밖에 없다는 부분은 조금 억지가 있었지만, 어쨌든 나름 공적인 이유가 있었다. 설왕의 반려로서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요구였지. 하지만 넌…….”
금왕이 순간 말끝을 흐렸다. 그러나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나는…… 그냥 인간일 뿐. 형식적인 명목이더라도, 그런 공식적인 요구를 할 자격이 전혀 없었다.
그러니 자연의 이치에 맞게 나는 새끼 치타를 두고 그 갈대밭을 떠나와야 했다.
돌아오는 내도록 무거운 돌이 얹힌 듯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내가……, 내가 만약 금왕의 반려였다면…….’
복잡한 심정을 어떻게든 해결해 보고자 이런저런 가능성을 찾다 보니 결국 생각이 거기까지 뻗어 갔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혼자 두고 온 새끼 치타가 안쓰럽다고 해도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금왕에게 실례였다. 금왕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금수에게도 실례였다. 금왕의 반려는 그와 함께 수많은 금수를 다스릴 또 하나의 주군이었다. 이런 가벼운 동정심에 선택할 자리가 아니었다.
“하아…….”
체념의 한숨과 함께 어지럽던 머릿속을 비워 냈다. 그런 내 모습을 모두 지켜보고 있었던지 금왕이 꼬리로 톡톡, 내 머리를 가볍게 두드려 위로했다.
벌써 밤이 깊어 돌아온 언덕은 고요했다. 하지만 저 아래는 달랐다. 어둠이 가득한 사위 가운데도 틈틈이 노란 눈을 빛내며 맹수들이 숨어 있었다. 비록 지금은 얌전한 척 숨죽이고 있지만, 야행성인 그들은 곧 본격적으로 사냥에 나서서 초원을 누비며 소란을 피워 댈 터였다.
예상대로 오래지 않아 초식 동물의 비명과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샛노란 빛이 빠르게 움직이며 정신없어진 아래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밤이 깊었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불현듯 처음 이곳에 와서 보냈던 밤이 떠올랐다. 모든 금수가 금왕의 행차에 고개 숙이며 인사했던 그 밤. 그리고 너무 행복한 기분에 도저히 잠이 안 와서 오늘처럼 어둠 속에서 초원을 누비는 맹수들을 하염없이 내려다보았던 두 번째 밤과, 금왕의 품에 안겨 잠든 또 다른 행복했던 밤들이 머릿속을 차례로 스쳐 갔다. 느낌으로는 바로 어제 이 아프리카에 온 것만 같은데 날을 꼽아 보자 벌써 닷새째였다.
“또 맹수들만 찾아보는 거냐.”
생각에 잠겨 멍해 있는데 불쑥 금왕이 물었다.
“그리 편애하는 걸 보아…… 아무래도 내 반려가 되기는 힘들겠군. 내 반려라면 마땅히 모든 금수를 사랑해야 하니까.”
금왕답지 않은 농담에 나는 하하, 어색한 웃음을 흘려 보냈다. 다른 이들에게 수도 없이 반려라는 말을 들어 왔지만, 금왕 본인의 입으로 듣는 것은 또 기묘한 느낌이었다.
“그래서 나도 예전에는 편애라는 걸 이해하지 못했지만…….”
“네?”
혼잣말을 중얼거린 금왕이 내 반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꼬리를 크게 철썩였다.
“오늘 줄곧 걸어 피곤했을 텐데 그만 쉬어라.”
금왕이 어둠 속에서도 정확히 내 허리를 꼬리로 감싸 당겼다. 그리고 자신의 배 가운데쯤에 올리더니 몸을 둥글게 말았다. 나는 온몸을 뒤덮는 보드라운 감촉에 일순 정신을 빼앗겼다.
“이 녀석. 마지막 밤이라 아쉽기는 하겠지만 곧 날이 밝아 떠나려면 좀 쉬어야지…….”
“아.”
금왕에게 한껏 몸을 비벼 대다가 귀를 파고드는 목소리에 우뚝 동작을 멈췄다.
마지막…… 밤…….
잠시나마 잊고 있던 사실이 떠올라 마음을 어지럽혔다.
‘하아…….’
입 밖으로 새어 나오려던 한숨을 이를 꾹 다물어 삼켰다. 행복한 두근거림으로 잠들지 못했던 이전과 달리, 이번에는 씁쓸한 술렁거림이 밤새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금왕의 말까지 듣고 나자 갑자기 가슴 속에서 무언가가 울컥 치솟으며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그를 감추기 위해 금왕의 보드라운 털에 얼굴을 묻으며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러자 등 뒤로 톡톡, 다정한 토닥거림이 다가왔다. 처음에는 오히려 그 때문에 더 눈물이 나려 했지만 계속해 등을 쓸어 주는 꼬리에서 느껴지는 다정함에 심란하던 마음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언제부터였을까. 처음에는 그토록 쌀쌀맞았던 금왕이 이토록 다정해진 건. 그리고 또 언제부터였을까. 금왕의 품이 이토록 편안하다고 느끼게 된 건…….
사실 그 두 가지 모두 겨우 며칠밖에 안 된 일인데도, 마치 무척 오래전부터 그랬던 것만 같아 이상했다. 앞으로도 계속될 것만 같은 기분 때문에 더욱.
‘모순……이네.’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간 닷새였는데, 이 품에 안겨 있는 순간이 마치 영원하기라도 할 것 같다고 느끼니…….
‘이미 떠나기로 해 놓고…….’
이제 와 이렇게 떠나기 싫어진다니.
‘안 돼, 이러면.’
나는 마음속에 싹트는 못된 욕심을 잘라 내듯 눈을 감았다. 그러자 순식간에, 잠들지 못했던 깊은 밤이 사라졌다.
‘㉦’
어렴풋이 다시 정신이 들었을 때는 눈을 감은 채로도 주위가 밝아졌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설마…… 정말 이대로…….”
일어나야지, 생각하면서도 나른함에 선뜻 눈을 뜨지 못하고 있는데 희미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하지 않습니까?”
크지 않은 음성이라 드문드문 끊어지며 들려왔다. 왠지 귀에 익은 목소리라 누구였지? 의문을 품었을 때였다.
“그렇다 해도, 어쩔 수 없지. 인간이…….”
아, 이건 금왕 목소리다. 그 특유의 묵직한 중저음은 잠결에도 바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나저나 인간이라면, 나를 말하는 건가? 나는 왜…….
인간이라는 단어에 신경을 쓰는 사이 뒷말을 놓쳤다. 그래서 의아해하는데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그 이야긴 이제 됐다.”
미련이 담긴 중얼거림을 금왕이 단호히 잘라 냈다.
“인간, 잘 잤나?”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 했을까 조금 궁금해하고 있는데, 돌연 나를 향한 인사에 깜짝 놀라 눈을 떴다.
“아, 안녕히 주무셨어요.”
눈을 뜨자마자 금왕을 마주한 나는 몸을 일으키며 어색하게 인사했다. 딱히 그러려던 건 아닌데, 괜히 자는 척하며 대화를 몰래 엿들은 것 같은 느낌이어서 민망했다. 그래서 후다닥 금왕의 품에서 빠져나오다가 잠시 멈춰 섰다.
“어……?”
“네게 인사를 하겠다며 다들 찾아왔구나.”
놀라 휘둥그레진 눈으로 주위를 살피는 내게 금왕이 설명했다. 그제야 나는 금왕의 앞에 백호, 재규어, 설표, 사자, 퓨마, 치타, 늑대, 여우를 비롯한 각종 맹수 대표들이 모여 있는 이유를 이해했다. 그와 동시에 밀려드는 감동에 잠시 그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다가…….
“대박 귀여워!”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
마지막이라고 작별 선물을 주는 것인지 다들 인간이 아닌 본체의 모습 그대로 내게 다가와 인사하며 한 번씩 쓰다듬게 해 주었다. 어제 일반 동물들에게 인사했을 때에는 어미를 잃은 새끼 치타와 선물을 준 재규어를 빼고는 쿨한 이별을 한답시고 말로만 인사를 나눴었다. 그래서 나름 아쉬움이 있었는데 이렇게 생각지도 못한 기회를 얻게 되자 더는 자제하고 싶지 않았다. 오늘이 아니면 또 언제 이런 기회가 있을까 싶어 맹수들을 힘껏 끌어안았다.
이미 몇 번 만져 본 적 있는 맹수들은 물론이고, 지난번에 만지지 못한 늑대의 강인한 몸과 여우의 풍성한 꼬리를 유독 집요하게 조물거렸더니 둘 다 연신 흠칫흠칫, 대체 언제 끝이 날까 하고 계속해 내 눈치를 살폈다. 그만둘까 하다가도 그 모습이 귀여워서 더 손을 떼지 못한다는 걸 모르고서.
“와하하! ……윽.”
이미 순서가 지난 터라 내가 늑대와 여우를 양손으로 조물거리는 모습을 보며 신나게 웃어 대던 설표가 신음을 쏟았다. 둥근 입을 살짝 벌린 채 웃는 모습이 너무 귀여워 내가 그에게 덤벼든 탓이었다. 설마 두 번이나 만질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지 완전히 방심하고 있던 설표는 잔뜩 당황했지만, 얌전히 자신을 내어 주었다. 그런 그가 더 귀여워서 거의 온몸으로 끌어안았을 때였다.
삐익―.
이전에 한 번 들어 본 적 있는 날카로운 소리가 드높은 허공에서부터 들려왔다. 설표의 목을 끌어안은 그대로 고개를 꺾어 올리자, 아니나 다를까 어마어마한 속도로 지상을 향해 하강 중인 매의 모습이 보였다.
팔락―.
매는 지난번의 실수를 교훈 삼아 먼저 종이를 땅에 떨어뜨린 다음에 다시 휘익 날아올라 근처의 나무로 가 앉았다. 나무에 무사히 안착하고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는 매의 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이윽고 내 앞에 떨어진 종이를 확인했다. 지난번에 가져온 것과 같은 재질과 크기로 이루어진 종이였다. 그래서 당연히 이번에도 설왕이 금왕에게 보낸 전갈이겠구나 싶어 주워서 전해 주려던 때였다.
“……어?”
종이를 집어 들며 자연스레 그 위에 적힌 글자를 보게 된 나는 우뚝 동작을 멈췄다. 분명 그건 지난번과 같은 종이였지만 그 안의 내용은 좀 달랐다. 지난번에는 정갈하고 반듯한 글씨체가 크지 않은 사이즈로 여러 가지 내용을 전달했던 데 반해, 이번에는 큼지막하게 대충 휘갈긴 글씨로 한 내용만을 담고 있었다.
「이 바보!!!」
뒤에 느낌표까지 꽝꽝 찍어 놓은 모습을 보자, 나는 누가 말해 주지 않아도 이게 설왕이 쓴 전갈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설왕의 반려가 떠올랐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금왕. 설왕의 반려께서 저 인간께 드리라고 한 전갈입니다.”
역시나. 금왕에게 인사한 매가 밝힌 전갈의 발신자와 수신자는 내가 예상한 그대로였다. 하지만 대체 왜 설왕의 반려가 내게 이런 전갈을 보냈는지 알 수 없었다. 조금 어리둥절해하던 나는 이윽고 그 큼지막한 글씨 아래에 튀지 않게 무척 작은 글씨로 희미하게 쓰인 내용을 발견했다.
「내가 금왕이 엄청 잘생겼다고 했잖아. 그거 안 보고 그냥 가려고? 아깝게. 그러지 말고 꼭 봐! 안 보고 가면 평생 후회할걸!」
“아하……하…….”
전혀 예상치 못한 엉뚱한 내용에 절로 어색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으음, 인간형의 금왕이라. 확실히 조금 궁금하기는 했다. 딱히 잘생겼다는 말 때문이 아니라 그냥 순수하게 인간형일 때의 그는 어떤 모습인지가 보고 싶었다.
“아하! 그러고 보니! 인간은 아직 금왕님의 또 다른 모습을 못 봤군?!”
내 어깨 너머로 설왕의 반려가 준 쪽지를 함께 살펴보던 설표가 어쩐지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고개를 끄덕이며 자연스레 금왕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지금까지 쭉 저 거대한 흑호 모습만 봐서일까. 인간이 된 그가 잘 상상이 되지 않았다. 다른 맹수들이 본연의 특징을 가지고 인간화 하는 걸 보아 어느 정도는 연상이 됐지만, 저 커다란 몸체로 사람이 된다니. 비록 형태는 사람이 될 수 있더라도 어쩌면 상당한 거인이 되는 게 아닐까?
“아이고, 그럼 안 되지. 우리 금왕님의 인간 모습이 얼마나 멋있는데!”
혼자 상상에 잠겨 있는데 돌연 사자가 소리쳤다.
“어어, 그래요?”
설왕의 반려에 이어 사자까지 장담을 하는 모습에 나는 더욱 궁금한 눈으로 금왕을 보았다.
“당연하지. 이유가 있어서 요즘에는 잘 안 하시지만, 예전에는 자주 인간 모습으로 계시고는 하셨는데 얼마나 멋있다고!”
이유? 치타의 맞장구에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데 이번에는 재규어가 끼어들었다.
“맞아. 그래서 최근에는 잘 변신 안 하셨지만, 이번에는 그러니까 오히려 더…….”
“그러게. 그러고 보니 왜 진작 이 생각을 못 했는지…….”
백호도 새삼 무언가 깨달은 것 같은 얼굴로 말을 보탰다. 그들이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어서 멀뚱멀뚱 바라만 보고 있노라니 사자가 결론을 내려 주었다.
“인간. 어쨌든 금왕님의 인간형이 보고 싶은 거지?”
“아……. 네.”
이 기회를 놓치면 다시 볼 기회가 없을 것을 알아서,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모습이실지 궁금하네요.”
“미남.”
내가 혼잣말처럼 덧붙이자 사자가 단호한 목소리로 즉답했다.
“무서운 미남.”
여태껏 침묵하던 여우도 한마디 거들었다. 뿐만이 아니었다.
“무서우면서 위압감 느껴지는 미남.”
“무섭고 위압감 느껴지면서도 엄청나게 야성미 넘치는 미남.”
“무섭고 위압감 느껴지면서도 엄청나게 야성미 넘치고, 또 섹시한 미남.”
“무섭고 위압감 느껴지면서도 엄청나게 야성미 넘치고, 또 섹시하면서도……!”
“이 녀석들, 그만해라.”
맹수들이 한마디씩 보태어 점점 수식어를 부풀리는 모습을 보다 못한 금왕이 끼어들었다. 하지만 다들 짜기라도 한 것처럼 장난스레 늘려 가던 수식어의 리듬에 이미 익숙해져 버린 나는 여전히 그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무섭고 위압감 느껴지면서도 엄청나게 야성미 넘치고, 또 섹시하면서도…… 믿음직한 미남.
고개를 들어 눈앞의 흑호를 바라보며 나도 모르게 설표를 대신해 그 말을 완성했다. 사실 눈앞의 거대한 흑호는 내 눈에 무척이나 귀여워 보였지만, 그 귀여움을 걷어 내고 냉정한 눈으로 본다면 아주 용맹하고 강인한 생김이었다. 날카로운 눈매에서는 그가 굳이 그러려고 하는 게 아닐 텐데도 왕으로서의 위엄과 타인을 짓누르는 위압감이 흘러나왔다.
그렇지만 그는 무척이나 자애롭고 자상한 왕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특히 며칠간 그와 함께 지내며 맛본, 포근히 나를 감싸 주는 온기에서는 이상한 안정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니 그렇게 완성하면 되지 않을까.
다른 금수들이 동물일 때의 특징을 가지고 인간으로 변한다는 점을 고려하고, 저런 특징들을 조합해서 상상을 해 보면…… 아니, 그런 이야길 들었더니 더 상상이 안 되잖아?!
머릿속에서 아까보다 더 뒤엉켜 버린 금왕의 얼굴에 미간을 좁힐 때였다.
“인간.”
금왕이 문득 나를 불렀다.
“내가 변신한 모습을 보고 싶다고?”
“네!”
고민할 필요도 없는 질문에 냉큼 대답했다. 그리고 기대를 가득 담아 눈을 반짝이며 바라보았다.
“음…….”
다른 짐승들처럼 바로 휙 공중제비를 돌아 변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금왕은 조금 심각한 얼굴로 고민에 잠겼다. 그제야 이유가 있어서 그가 요즘에는 인간화를 잘 하지 않는다던 말이 떠올랐다.
“아. 저기, 싫으시면 꼭 억지로는…….”
또 내가 눈치 없는 요구를 한 건가 싶어서 서둘러 덧붙이자 금왕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싫어서가 아니다.”
그럼? 의아한 내 눈빛에 금왕은 대답 대신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잠시 눈을 감아라.”
금왕이 돌연 자신의 두툼한 꼬리로 내 눈꺼풀 위를 덮었다. 응? 왜 그러는지 의아해하면서도 시키는 대로 얌전히 눈을 감자, 감은 눈 너머로도 눈이 부실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밝은 빛이 느껴졌다. 만약 눈을 뜨고 있었다면 그대로 눈이 멀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환한 빛이었다. 그래서 팔을 들어 막자 금왕의 꼬리가 스르르 멀어졌다.
“이제 눈을 떠도 된다.”
눈꺼풀 너머로도 한껏 맹렬하게 느껴지던 빛이 사그라졌는지 주위가 조금 어두워졌다고 느낄 즈음 금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사람의 손과 같은 것이 다가와 내가 얼굴을 가린 팔을 붙잡아 내렸다. 그에 이끌려 팔을 완전히 내린 후에야 비로소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어떤가.”
익숙한 목소리로, 하지만 전혀 낯선 모습을 하고 쑥스러운 듯 질문을 던지는 그를 보며 내가 느낀 감상은 단 하나였다.
‘아. 진짜…… 미남이구나.’
예전에 친구가 길을 가다가 정말 우연히 모 유명 영화배우를 봤는데, 여자도 아닌 남자였는데도 너무 잘생겨서 눈이 마주친 순간 자신도 모르게 코피를 쏟을 뻔했다고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 나는 오버하지 말라고 웃으며 믿지 않았다. 아무리 빼어난 얼굴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여자도 아닌 남자의 미모에 그렇게 반응할 일이 설마 있으랴, 그리 생각했다.
오산이었다. 인간으로 변한 금왕을 처음 본 순간 철렁, 심장이 내려앉더니 그대로 얼굴에 열이 몰리다 못해 코피가 쏟아질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다행히 진짜 코피를 쏟지는 않았지만, 나는 잔뜩 열이 몰려 멍해진 머리로 멍하니 금왕을 올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앞서 걱정했던 것처럼 거인은 아니었지만, 인간화된 금왕은 무척 키가 컸다. 내가 고개를 꺾어야 얼굴을 마주할 수 있을 만큼. 나와 한 뼘 가까이 차이가 났던 설왕보다도 조금 더 커 보였다.
하지만 설왕의 백발과는 대조적으로 흑단처럼 검고 탐스러운 머리칼을 허리께까지 늘이고 있었다. 흑호의 털처럼 보드라울 것만 같은 결 좋은 머리칼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에는 크게 신경 쓸 수가 없었다. 내 시선은 오로지 금왕의 얼굴에 꽂혀 있을 뿐이었다.
-미남.
머릿속에 조금 전 사자의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나는 멍청한 얼굴로 눈을 깜빡이며 그 말을 실감했다. 아까 그 말을 들었을 때는 조금쯤 장난이 섞인 대답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절대 그렇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인간의 모습을 한 금왕은 정말 미남이었다. 아니, 그저 잘생겼다는 말로도 부족했다.
“인간?”
갑자기 우뚝 굳어진 내가 이상했는지 금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걱정을 가득 담은 아름다운 물빛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분명 나를 걱정해 주는 다정한 눈빛이었음에도 나는 흠칫 놀라며 물러나야 했다. 그 순간, 머릿속에 또 다른 이의 목소리가 울렸다.
-무서운 미남.
나는 무의식중에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금왕을 보았다.
“……인간?”
자신을 피하는 내 모습에 금왕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 미심쩍은 듯 가만 나를 들여다보는 그의 눈은 선이 굵으면서도 눈매가 날카롭게 찢어져 강인한 느낌을 주었다. 흑호일 때는 눈초리가 날카로운 한편으로도 무척 크고 둥글어 깜찍한 느낌도 없지 않았는데, 이제 더는 귀엽다고 말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사내답고, 또 매력적인 눈이었다.
그리고 그 시선에 담기는 것만으로도 왜인지 움찔 놀라게 될 만큼 강렬했다. 다정한 눈빛인데도, 어쩐지 쉬이 대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무서우면서 위압감 느껴지는 미남.
머릿속에서 또 새로운 목소리가 말했다. 나는 마음속으로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금왕의 저 다정한 눈동자가 이토록 묵직하게 다가오는 것은 아마도 날카로운 눈매보다도 그에게서 뿜어지는 강렬한 존재감 때문이리라.
비록 흑호일 때보다는 훨씬 작아졌지만, 인간의 기준으로 금왕은 무척 큰 체구를 지니고 있었다. 길게 뻗은 팔다리 때문에 굵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검은색과 은빛이 뒤섞인 가운 너머로도 무척이나 탄탄해 보이는 몸은 형언할 수 없이 강한 위압감을 내뿜고 있었다. 마치 흑호일 적 그의 내부에 감돌던 거대한 기운을 그 작은 몸에 억지로 응집해 놓은 것처럼 진하고 강렬했다.
그건 들을 수도 볼 수도 없었지만, 그럼에도 그가 뿜어내는 기운이 피부 위로 직접 스쳐 가는 느낌이 들 정도로 선명했다. 그에 압도당해 굳어 있는 한편으로도 나는 여전히 홀린 듯 그를 바라보는 걸 멈출 수 없었다.
-무서우면서 위압감 느껴지면서도 엄청나게 야성미 넘치는 미남.
머릿속에 또 새로운 목소리가 들려올 때쯤, 금왕은 이제 아무 말도 없이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기만 했다. 걱정스러운 기색도 거두고 의미를 알 수 없는 무심한 눈동자로, 눈꺼풀을 살짝 내리깐 그 모습에 묘한 나른함이 풍겨 나와서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눈동자에 가려진 부분이 많아지자 왠지 모르게 눈빛이 깊어지며 신비로운 것이, 퇴폐적이랄까…….
-무서우면서 위압감 느껴지면서도 엄청나게 야성미 넘치고, 또 섹시한 미남.
‘……아니, 섹시함!’
나는 머릿속에 들려오는 목소리에 금왕에 대한 평가를 바꾸었다. 왠지 퇴폐적이라는 말은 조금 거북한 어감이어서. 하지만 금왕에게는 단지 섹시하다고만 평가하기에는 부족한, 사람을 사로잡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치 못 박힌 듯 옭아매지는 느낌.
-무서우면서 위압감 느껴지면서도 엄청나게 야성미 넘치고, 또 섹시하면서도…….
이전과 다른 목소리가 또 내 머릿속에서 말을 건넸다. 앞서는 중간에 끊어진 그 말에 내 멋대로 믿음직하다는 표현을 붙였지만, 인간형인 그를 마주 보자 설표가 하려던 말은 그게 아닐 것 같았다. 아마도 그건.
‘……마성(魔性)의 미남.’
태어나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이런 표현을 써 본 적이 없는데도 이 순간에는 그 말이 절로 떠올랐다.
두근. 두근두근.
금왕을 바라보는 내도록 심장이 진정되지 않았다. 그를 처음 본 순간 일제히 얼굴로 모두 몰렸던 열이 이제는 몸 전체로 퍼졌다.
쿵, 쿵쿵.
열이 퍼지며 심장이 더욱 바빠지기 시작했다. 아니, 그저 바쁜 정도가 아니라 터질 것처럼 빠르게 뛰었다. 귓가에 내 심장이 뛰는 소리가 쿵쾅쿵쾅, 울리는 기분이었다.
‘아, 그만…….’
나는 미친 듯이 뛰어 대는 심장을 진정시키고자 가슴을 움켜쥐었다. 너무 뛰어 심장이 아픈 걸 떠나 무서웠다. 이렇게까지 빠르게 뛰는 심장은 한 번도 경험해 본 적이 없었다. 세상 최고로 귀여운 아기 맹수들을 보고서 흥분해도 이렇게까지 심장이 뛴 적은 없었는데……. 이러다 혹시 잘못되는 건 아닌가 덜컥 불안해졌다. 더 뛰게 두면 안 될 것 같아서 필사적으로, 숨까지 참아 가며 진정하려고 노력했다.
“인간, 어디 아픈 거냐?”
아프도록 뛰어 대던 심장이 겨우 진정될 무렵, 금왕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게 다가왔다. 그의 얼굴이 코앞으로 다가온 순간, 나는 깜짝 놀라서 뒤로 물러나며 손을 내저었다.
“아, 저기…… 자, 잠깐만요!”
“인간?”
내 반응에 금왕이 더욱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더니 다시 다가오려 했다. 나는 다급하게 소리치며 그를 제지했다.
“거, 거기에 멈추세요!”
금왕이 바싹 다가온 것만으로 심장이 또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했다. 요동치는 심장에, 금왕의 얼굴을 쳐다보는 것도 힘겨워져 나는 눈을 피했다. 이미 뜨겁던 온몸에서 갑자기 더 열이 치솟더니, 이제는 심장이 아픈 정도가 아니라 견디기 괴로울 정도로 뛰었다.
‘뭐, 뭐야. 왜 이러지?’
“이 모습이 마음에 안 드나…….”
다시 가슴을 부여잡는데, 금왕이 씁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에 깜짝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휙, 눈을 피했다. 안타까운 듯 나를 내려다보는 금왕의 눈을 보자 또다시 견디기 힘든 자극이 심장에서 느껴졌다.
“하아…….”
금왕이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나 그가 오해할까 봐 나는 서둘러 고개를 흔들었다.
“아, 아니요. 그게 아니라…….”
“변명하지 않아도 괜찮다. 예전부터 인간들은 내 이 모습을 썩 좋아하지 않는 것 같더군. 다들 보기만 하면 피해서…….”
금왕이 잔뜩 오해하며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결론을 냈다. 저 말을 듣자 나도 모르게 번쩍 시선을 들 수밖에 없었다.
“그, 그럴 리가! ……요.”
이렇게 잘생겼는데, 무슨 그런 말씀을! 뒷말이 남았지만 나는 기세 좋던 외침을 바람 빠진 풍선처럼 어색하게 마무리하며 다시 고개를 숙였다. 또 심장이 터질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그런 내 행동에 금왕이 혹시 또 엉뚱한 착각을 할까 봐 나는 필사적으로 반박했다.
“절대 그럴 리가 없어요. 절대!”
“그럼, 왜 그렇게 눈을 피하지?”
“그야……!”
즉답을 날리다 말고 주춤했다. 당신을 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너무 뛰어서요! 라고 말하려니 왜인지 좀 민망하게 느껴져서였다.
“그, 그게, 그러니까…….”
새빨개진 얼굴로 잔뜩 더듬거리며 발끝을 내려다보는데 문득 내 발 옆에 사자의 도톰한 앞발이 다가왔다. 고개를 들자 사자가 내 곁으로 바싹 다가서더니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역시 인간 모습의 금왕은 인간들에게 너무 자극적이야?”
“네……?”
“인간이 돼도 원래 가지고 있던 흑호의 기운은 사라지지 않거든. 한데 몸의 그릇은 작아지니 그 기운을 최대한 압축하는 수밖에 없지. 그러다 보니 기운이 더 진해져…… 본체일 때보다 수십 배 강한 야성을 뿜어내게 돼. 그래도 야성에 익숙한 우리 같은 동물은 좀 견딜 만하지만, 인간들은 아무래도 좀 힘들다고 하더군.”
의아한 얼굴로 사자를 바라보는데 뒤이어 다가온 설표가 대신 대답했다. 그 뒤에 사자가 ‘금왕의 야성에는 본능을 건드리는 페로몬도 실려 있으니까 더욱.’ 하며 말을 거들었지만 귀를 스칠 뿐 뇌까지는 닿지 못했다. 그보다 나는 앞서 어떤 이유가 있어서 금왕이 인간의 모습을 잘 하지 않는다던 치타의 말을 기억해 냈다.
‘아, 그래서 그런 거구나…….’
인간형인 금왕을 보자마자 미친 듯이 뛰기 시작한 심장을 겨우 납득했다.
“그런데, 금왕께서는 그 사실을 잘 모르셔. 진하든 연하든 다 자신의 기운이니, 아무래도 그냥 똑같다 싶은가 봐. 하지만 사정이 다른 인간들은 그 야성을 견디지 못하고 보는 족족 피해 버리니, 금왕께서는 진심으로 인간들이 자신의 저 모습을 싫어해서 피한다고 생각하셔.”
“…….”
“그래서 언젠가부터는 변신도 잘 하지 않게 되셨지. 아무래도 좀 상처가 되었나봐. 그렇다고 사실대로 당신이 너무 야성적이라서 거기에 홀딱 넘어가서 그렇다고 말하기도 좀 뭣하잖아.”
설표가 어느새 동물이 아닌 인간의 모습으로 변해 내게 다가오더니 귓속말을 건넸다.
호, 홀딱 넘어가? 어쩐지 미묘한 표현이라는 생각에 당황한 눈길을 던졌지만 설표는 개의치 않고 제 할 말을 마저 이었다.
“그러니까 인간 너라도 가능하면 피하지 말고, 좀 힘들더라도 잘해 드리라는 거지.”
“아, 네…….”
그건 충분히 납득이 가는 결론이라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을 그리 비밀스럽게 나누는 거냐.”
옆에서 조금 딱딱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걸 눈치챘는지 금왕이 귓속말을 하는 나와 설표를 어쩐지 굳은 얼굴로 보고 있었다. 살짝 미간을 찡그린 모습조차 너무 멋있어서 심장이 두근거렸다. 반사적으로 시선을 피할 뻔했지만 조금 전 설표가 해 준 이야기를 떠올리며 필사적으로 버텼다.
“어, 저기…….”
멀뚱멀뚱 쳐다만 보고 있기가 뭣해서, 그리고 딱딱한 표정을 짓고 있는 금왕의 주의도 돌릴 겸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금왕이 찌푸린 미간을 펴고 나를 봤다. 반듯한 이마가 곱다 못해 빛이 나는 것 같다. 사람의 이마를 이렇게까지 예쁘다고 느낄 수 있다는 걸, 처음 깨달았다. 그리고…… 내가 맹수의 뽀송뽀송한 털이 난 이마가 아닌 사람의―실제 사람은 아니지만 아무튼―이마만 보고도 두근거릴 수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왜 그러지? 역시 내 모습이 거슬리나?”
“아니요, 그럴 리가요!”
금왕이 또 엉뚱한 오해를 하기 전에 나는 서둘러 고개를 흔들었다.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정말 미남이신걸요. 금왕님, 진짜 멋있으세요. 정말, 엄청나게…….”
금왕을 안심시키고자 두서없이 말을 잇다가 내가 너무 열을 내는 것 같다는 생각에 흠흠, 헛기침을 하며 잠시 말을 끊었다.
“아무튼, 진짜 멋있으시다구요.”
“……그런가.”
조금 쑥스러운 마음에 시선을 내리깔며 작게 덧붙이자 금왕이 어쩐지 기분 좋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자, 희미하게 웃고 있는 입매가 보였다. 모양 좋게 생긴 입술 끝이 가볍게 말려 올라가서는 날카로운 턱선의 냉정함을 희석시켰다. 나를 보는 눈에도 희미한 기쁨이 배어 눈매와 콧날의 날카로움을 흩어 놓았다. 마치 줄 맞춰 제작한 조각처럼 잘생긴 얼굴이 희미한 곡선으로 흐려지자 정말…….
‘……눈부셔.’
나는 앞서 금왕이 인간으로 변했을 때처럼 강렬한 빛을 느꼈다. 심장이 다시 쿵쿵, 뛰었다. 하지만 앞서 그에게서 뿜어지던 야성 때문에 미쳐 날뛰던 때처럼 고통스럽지 않았다. 무척 기분 좋은 두근거림이었다. 그리고 어떻게 된 일인지 나는 그 이후부터 그를 보는 것이 무척 편안해졌다.
“그렇게 만지고서도…….”
내가 너무 조물거렸는지, 혹은 정말 바쁜 일이 있는지 나를 배웅하러 온 맹수들이 하나둘 자리를 떴다.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키던 백호조차 막 떠났다.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방금까지 그를 매만지던 손으로 안타까이 허공을 휘젓자 옆에서 금왕이 가볍게 혀를 찼다. 괜히 찔리는 기분에 손을 내리며 슬쩍 눈치를 살폈다.
아직도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이제는 금왕을 마주 보아도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지 않았다. 다만, 여전히 조금 두근거리는 했다. 아니, 정확히 표현하자면 두―근, 이라는 느낌이랄까. 평소처럼 부드럽고 가벼운 느낌이 아니라 뛸 때마다 묵직하게 내려앉는 충격이 있었다.
그래도 처음 인간으로 변신한 금왕을 보았을 때와 비교하면 상당히 견딜 만했다. 그 사실이 왠지 기뻐서 혼자 즐거워하는데 금왕이 살짝 미간을 좁혔다.
“그렇게 만지고서도 질리지 않는 건가…….”
“그, 그럴 리가요! 만지면 만질수록, 더 행복해지는걸요!”
왠지 본인이 되레 질렸다는 것 같아서 뜨끔했지만 나는 모르는 척 당당하게 소리쳤다. 그리고 방금까지 백호를 만진 감촉이 남아 있는 손을 고이 말아서 가슴팍에 소중히 모았다.
“진짜 평생을 이렇게 살라고 해도 살 수 있을 거예요.”
“……그건 내 반려가 되어야만 가능한 일이군.”
혼잣말처럼 흘려 보낸 말에 금왕이 무심하게 대꾸했다.
“그렇게 맹수를 좋아하면서도 내 반려가 되고 싶지 않은 건, 역시 내가 싫어서인가?”
네? 흠칫 놀라서 금왕을 쳐다봤다. 너무 말도 안 되는 소리라 차마 반박조차 못 하고 있는데 금왕은 오해를 한 모양이었다.
“……그렇군. 하긴, 싫지 않다고 해도 있을 수 없는 일이지. 겨우 며칠 전에 만난 사이일 뿐인데, 설왕의 반려처럼 인간 네가 나 때문에 모든 걸 버린다는 건 말도 안 되지. 비록 전례가 있다고 해도, 그쪽이 아주 특별한 것이었는데 다들 그걸 모르고 너무 쉽게만 생각한다니까…….”
금왕이 씁쓸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흐린 말끝에 자조 섞인 미소도 살짝 따라붙었다. 그리고 그늘이 드리우는 그의 얼굴에 나도 모르게 덥석, 그의 손을 꼭 붙잡았다.
“……인간?”
금왕이 꼬리를 잡혔을 때처럼 흠칫, 손끝을 떨고는 나를 보았다. 놀란 듯 조금 커진 그의 눈에도 희미한 떨림이 엿보였다. 나는 진정하라는 의미로 그의 손을 더욱 힘주어 잡았다.
“그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금왕님. 제가 금왕님 반려가 되지 않겠다고 한 건 절대로 금왕님이 싫어서가 아니에요. 만난 지 얼마 안 돼서 정이 얕아서 그런 것도 아니구요. 게다가 제가 금왕님 반려가 되었다면 전 모든 걸 버리는 게 아니라, 어릴 때부터 그토록 이루고 싶었던 최고의 꿈을 이루고, 그로 인해 무한한 행복 속에서 평생 살 수 있게 되는 거예요.”
“…….”
내 위로가 시원치 않아서일까, 나를 보는 금왕의 눈빛이 더욱 흔들렸다.
“그럼, 왜……?”
이해할 수 없다는 금왕의 물음에 나는 조금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야…… 반려는 그런 이유로 정하는 게 아니잖아요. 설왕의 반려님께 들었어요. 왕이나 그 반려는 영겁의 시간을 산다면서요. 그렇게 긴 시간을 함께할 상대인데…… 제가 동물을 좋아해서 금왕님 반려로 맞이한다는 건 이상하잖아요. 반려를 겨우 그런 이유로 선택하면 안 되죠. 서로 반려가 되려면 적어도 사랑하는 사이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는. 그래야 평생 서로 행복하게 살 수 있잖아요.”
“……사랑?”
내 말이 조금 의외였던지 금왕이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네. 금왕님께서 평생을 함께하며, 일생 사랑할 수 있는 존재를 반려로 맞으셔야죠. 설왕님이랑 그 반려님처럼, 그렇게 금왕님께 어울리고 서로 평생 아낄 수 있는 상대요. 저처럼 동물이 좋아서 그 동물들하고 지내고 싶어서 반려가 되겠다는 건…… 설령 제가 하고 싶다고 해도 금왕님이 안 된다고 하셔야죠.”
“…….”
“그러니까, 제가 안 된다고 한 거예요. 반려라면 적어도, 설왕님과 그 반려처럼 사랑하는 사이여야 하니까…….”
침묵하는 모습에 혹시 내 말을 잘 이해하지 못했나 싶어 말을 덧붙이자, 금왕이 조금 멍한 얼굴로 나를 보다가 이내 앞머리를 사납게 쓸어 올렸다.
“하…….”
묵직한 한숨. 이유를 알기는 힘들었지만 어쩐지 그 모습이 무척 섹시하게 느껴져서 홀린 듯 바라보고 있노라니 금왕이 시선을 맞춰 왔다.
“인간, 나는…… 아니, 서로 사랑해야 한댔나…… 넌, 단지…….”
답답한 듯 무언가 말하려던 금왕이 뜻 모를 혼잣말을 중얼거리더니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그래, 그런 거겠지. 그 얘긴 그만하고 슬슬 출발하자. 어차피 가기로 한 것, 일찍 헤어지는 게 좋겠지.”
어쩐지 심란한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보던 금왕이 이내 마음을 정리한 듯 무심히 말했다. 어제 염왕에게 당장 떠나는 건 너무 이르다며 반박했던 그답지 않은 말이라 놀라서 쳐다보았지만, 금왕은 내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그저 우리가 나아갈 앞길만 내다봤다.
그게 왠지 아쉬워서 계속 쳐다봤지만 그는 묵묵히 먼 곳만 응시했다. 마치 이 순간 절대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을 것처럼 매정한 태도에 조금 서운해할 때였다.
“인간, 한 가지만 물어도 되나.”
금왕이 돌연 나를 돌아봤다. 갑자기 마주친 시선에 왠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아 눈이 휘둥그레졌다가 뒤늦게 그 말을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 머물렀던 시간이, 즐겁고 행복했나.”
“……네?”
“내가 너를 아프리카에 데려온 것이, 좋았느냐고 묻는 거다. 좋은 추억이 될 것 같은지.”
“그야, 당연히…….”
무척 좋았죠! 즉답을 날려야 했지만 순간 말문이 막혔다. 물끄러미 내 대답을 기다리는 금왕의 눈이 마치…….
“조, 좋았죠. 엄청!”
뒤늦게야 더듬거리며 겨우 대답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안심했다며 미소 짓는 금왕의 눈이 마치…… 울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슬픈 눈빛을 보자 순간 망치에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이 머릿속에 전해졌다.
왜……. 금왕이 대체 왜 저렇게 괴로운 눈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도 순간 미칠 것 같은 안타까움이 밀려들어서 나는 그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지난 며칠간은 나에게도 무척…… 좋은 추억이 될 거다.”
아니, 왜 그렇게 마지막처럼…… 아, 마지막 맞나…….
금왕의 의미심장한 말에 나도 모르게 섭섭한 기분을 느꼈다가, 이내 현실을 깨닫고는 망연해졌다.
뭐지, 이건. 이 기분은 대체…….
갑자기 끈 떨어진 풍선처럼 암담한 기분이 드는 나를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분명히 어제부터, 아침에 눈을 뜬 이후 방금까지도, 오늘 내가 집에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데. 새삼 왜 그 사실이 놀랍고 충격적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저 무뚝뚝한 금왕이 생각지 못하게 울먹이는 모습을 본 후유증인가. 왜 이렇게 마음이 이상하지.
떠난다, 떠난다 하면서도 정작 마음의 준비는 제대로 못 했던 건가. 도대체 왜…….
“인간, 그만 떠나자.”
가슴 속에 술렁이는 혼란을 뚫고 금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순간 입술 사이로 신음이 터져 나오려는 걸 손으로 틀어막았다. 심장 언저리에 서늘하고 날카로운 무언가가 스치고 지나갔다. 낯설지 않은 느낌이었다. 그건 마치…… 부모님을 잃은 그날처럼……. 아니, 그럴 리가 없다. 그럴 리가.
문득 머릿속에 떠오르는 섬뜩한 기억에 나는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내가 왜 지금 이런 느낌을 받는단 말인가. 착각이다. 이런 식의 이별을 한 적이 없어서……. 그래, 그래서야. 이런 식으로 누군가와 완벽히 헤어질 일이 그때 이후로 처음이라서, 좀 각오가 덜 되어 있어서…… 그래서 그랬을 뿐.
스스로가 이상해진 원인을 파악하자 비로소 진정할 수 있었다. 그래도 혹시 몰라 깊게 심호흡을 하며 한 번 더 마음을 가라앉히고 바로 금왕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인간?”
“감사합니다, 금왕님. 제가 여기서 겪은 일들은 단지 좋은 추억이 아니라, 평생 마음에 품고 갈 행복이에요.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그건 제가 평생의 소원으로 여기던 일들이었는데…… 설마 정말로 이루어질 거라고 기대하지는 못했어요. 근데 그걸 완벽히 이루다니 전 진짜 행운아예요. 이 모든 게 다 금왕님 덕분이에요. 정말 감사합니다.”
그렇게 행복했어서, 그래서 헤어짐이 더 괴롭게 느껴지는 것이리라. 그러니까 이 인사로 남은 아쉬움을 다 털어 버리고 미련 없이 떠나자, 생각하며 나는 더욱 깊이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너무 의욕이 넘쳐 바닥에 닿을 듯 몸이 굽혀진 탓인지 갑자기 얼굴에 열이 몰렸다. 서둘러 고개를 들었다.
“인간?”
고개를 든 나를 향해 금왕이 놀란 부름을 던졌다. 처음에는 그 이유를 몰랐다가 뒤늦게, 눈가에 흐르는 눈물을 깨닫고 멈칫했다. 뜨거워진 건 얼굴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 어, 내가 왜 이러지? 너무 행복하면 눈물이 난다던데, 그래서 그런가. 하하.”
괜히 금왕이 걱정하지 않도록 가볍게 웃으며 서둘러 눈물을 닦아 냈다. 아니, 닦아 내려 했는데 그보다 먼저 할짝, 익숙하고도 낯선 감각이 눈가를 훔쳤다.
이전에도 몇 번이나 손으로 느껴 본 그 뜨겁고 말캉한 감촉은 익숙했지만, 혀의 사이즈나 혀가 닿을 때 눈앞에 보이는 얼굴이 달라진 것이 낯설었다. 그 괴리에 적응하지 못해서, 나는 두 눈을 부릅뜬 채 우뚝 굳어졌다.
하, 핥았어?!
경악한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는 나를 아는지 모르는지, 금왕이 그 모양 좋은 입가를 늘이며 웃었다. 너무도 태연자약한 그 모습에 더욱 황망한 시선을 보냈지만 오래지 않아, 내 눈앞에 서 있는 그는 비록 정말 입이 떡 벌어질 정도의 미남이지만 사실은 흑호라는 것을, 짐승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러자 놀란 마음이 조금씩 진정됐다. 짐승이 혀로 눈가를 핥았다고 생각하니 그리 이상하게 생각되지 않았다.
“달군.”
손끝으로 제 입술을 매만지던 금왕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다, 달다니? 눈물이 달 리가…….’
-그치만, 네게서 나오는 눈은 달단 말이야. 내 건 안 그런데.
-그럴 리가. 눈에 맛이…….
말도 안 된다며 당황스러워하던 중에 불현듯 그저께 만난 설왕과 그 반려가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