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강가에서의 일이 있고 금왕은 꽤 걱정이 됐던지 언덕으로 돌아와서도 내 허리에 감은 꼬리를 풀지 않았다. 그게 고맙기도 하고, 또 조금 미안한 기분도 들어서 나는 얌전히 그에 잡혀 있었다. 덕분에 금왕에게서 멀어질 수 없게 되었으니, 이왕 이렇게 된 거 마음껏 즐기자는 생각에 아예 작정하고 금왕의 등에 올라타 뒹굴거렸다.
나름대로 반성하는 차원에서 손으로 조물거리지는 않았다. 다만 금왕의 드넓은 등을 데굴데굴 굴러다녔다. 그러다가 둥글게 말린 뒷다리를 타고 미끄러져 톡, 바닥으로 떨어졌을 때였다. 문득 머리 위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삐익―.
고개를 들자, 저 멀리 허공에 점과 같은 것이 보였다. 혹시 저번에 보았던 그 독수리인가 싶었는데, 그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빨랐다. 따라서 순식간에 불어난 그것의 정체를 곧 확인할 수 있게 되었는데, 매였다. 지난번의 그 독수리보다 훨씬 작고 매끄럽게 생긴 매가 바람을 가르며 눈 깜빡할 새 내려와 근처의 나뭇가지 위로 올라앉……지 못하고 넘어진다?
푸더덕! 균형을 잡지 못하고 미끄러진 매가 다급한 날갯짓을 하며 겨우 바닥에 착지했다.
“아이고, 또 깜빡했네…….”
매가 나뭇가지에 부딪힌 머리를 날개로 쓰다듬고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우울하게 떨군 고개가 날렵한 생김과 용맹하게 날아오던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어쩐지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깜찍함에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찬찬히 살펴보자 녀석은 보통의 매보다 훨씬 작았다. 그래서인지 털도 완전한 깃털이 아니라 보송보송한 솜털이 엿보여 더욱 귀여웠다. 만약 금왕의 꼬리가 내 허리에 감겨 있지 않았다면 그대로 달려가 품에 안아 버렸을 만큼.
“아 참. 오, 오랜만에 뵙습니다. 금왕.”
우울해하던 매가 화들짝 놀라더니 서둘러 금왕에게 인사했다.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꾸벅 숙이는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침을 꿀꺽 삼키며 바라보자 시선을 느낀 매가 움찔 놀라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곧 뭔가 생각났는지 진정하고 금왕에게 다가왔다. 걸음이 뒤뚱뒤뚱 이상하다 싶었는데 한쪽 발에 무언가를 꽉 움켜쥔 채 다가오고 있었다. 아마 이것 때문에 착지에 실패한 모양이었다. 이전의 독수리는 들고 있던 두루마리를 먼저 재빨리 금왕 앞에 놓아두고 나무에 올랐는데, 매는 아직 그런 노련함이 부족한 것 같았다.
“설왕의 전갈인가.”
“네.”
금왕의 물음에 매가 쥐고 있던 것을 그의 앞에 내려놓았다.
“여전히 간결하군.”
설왕의 전갈은 비왕 때처럼 고급스러운 두루마리가 아니라 그냥 대충 둥글게 말린 종이 형태였다. 덕분에 매가 움켜쥔 것을 풀자 그대로 스르르 펼쳐졌다. 금왕이 내용을 확인하는 동안 매는 앞에서 얌전히 기다렸다.
둥글고 큰 눈과 갈고리처럼 멋스럽게 휜 단단한 부리가 퍽 용맹해 보이는 얼굴인데도 잔뜩 긴장해서인지 왠지 모르게 어설퍼 보였다.
‘아, 귀엽다. 한 번 만져 봐도 될까?’
가만히 바라보고 있노라니 나도 모르게 슬금슬금 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 작은 머리만 딱 한 번 만져 보면 안 될까……. 이, 일단 조금 더 가까이 가서 보자.’
결국 참지 못하고 매에게 다가가고자 결심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허리에 감긴 금왕의 꼬리를 풀어야 했는데, 그를 붙잡은 순간 금왕이 꽉 힘을 주며 벌떡 몸을 일으키는 바람에 그럴 수가 없었다. 덕분에 허공으로 몸이 붕 떠올라 놀란 시선을 던지자 금왕도 나를 마주 봤다.
“아무래도 설왕에게 가 봐야 할 것 같군.”
“네?”
“설왕과 함께 지내고 있는 북극여우가 아프다고 하는군.”
금왕이 바닥에 떨어진 설왕의 전갈을 힐끗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아…… 앗!”
처음에는 아프다, 는 말에 집중해서 안타까운 신음을 흘리다가 곧 비명 같은 탄성을 토해 냈다.
‘북극여우라면! 그, 그 엄청나게 작고 귀여운 흰여우를 말하는 건가?! 내가 여우 중에서 제일 좋아하는…… 사막 여우보다 더 좋아하는 그 하얀 여우……!’
“그리고 녀석들이 구한 새끼 황제펭귄도 한 번 살피고, 흰고래가 새끼를 낳았다고 하니 그것도 축하해 줘야 할 것 같군.”
‘새, 새끼 황제펭귄? 그, 그 솜털이 보송보송 나 있는 그 새끼 펭귄? 우, 우와아아앗! 게다가 그 희귀하다는 흰고래! 벨루가! 그것도 무려 새끼!’
온몸이 기대로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심장이 쿵쾅쿵쾅 터질 듯이 뛰어 대고, 온몸이 부르르 떨려 오는 흥분에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겨우 버텼다.
“인간, 어쩔 테냐. 같이 갈 테냐?”
“갈래요!”
생각할 것도 없는 질문에 즉답을 날렸다. 금왕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왠지 기분 좋아 보이는 눈빛을 하더니 나를 바닥에 내려 두고 허리에 감은 꼬리를 스르르 풀었다. 그리고 여전히 긴장한 얼굴로 기다리고 있던 매의 머리를 꼬리로 톡톡 두드렸다.
“수고했다.”
금왕의 칭찬에 순간 눈이 커졌던 매가 잔뜩 행복한 얼굴로 꾸벅 고개를 숙이더니 재빨리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착지는 비록 어설펐지만, 날개를 퍼덕이며 빠르게 날아오르는 모습은 처음 수직으로 하강할 때처럼 용맹했다.
순식간에 사라지는 매를 보며, 뒤늦게 그 머리를 만지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안타까워하는데 무언가가 내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보드라운 감촉이 보나 마나 금왕의 꼬리였다. 왜 그러나 싶어 바라보자 금왕이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하지만 진지한 눈빛으로 말을 건넸다.
“내 아이들을 좋아해 주는 건 기쁘지만, 조금은 조심하고 또 봐주면서 해라. 특히 이번에 만날 아이들은 아프거나 아주 어린 새끼니까 내게 한 것처럼 그냥 무조건 달려들면 안 된다.”
“아…….”
정곡을 찌른 당부에, 내가 너무 티를 냈나? 민망해하며 얼굴을 쓸었다. 그때 갑자기 금왕이 꼬리를 이용해 나를 자신의 등에 태웠다.
“인간, 꽉 붙잡아라.”
준비 자세처럼 몸을 낮춘 금왕이 내가 제 털을 꽉 쥐는 걸 확인하더니, 처음 아프리카에 왔을 때처럼 어마어마한 속도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
빠르게 공기를 가르는 금왕 덕분에 살갗을 스치는 날카로운 바람을 피해 그의 등에 납작 엎드렸다. 한데 어느 순간이 지나고부터는 내 살갗을 스치는 바람이 날카롭다 못해 살을 에듯 따갑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니, 차가웠다. 금왕의 털을 움켜쥔 손끝이 덜덜 떨릴 정도로 매서운 한기가 내 몸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나는 최대한 온기를 지닌 금왕의 등에 몸을 갖다 붙이고, 추위에 곱아 오는 손을 번갈아 쥐락펴락하며 겨우 견뎠다. 그러다 이제 정말 견디기 힘들다는 생각을 떠올릴 무렵, 다행히 금왕이 점점 속도를 늦추더니 이내 멈춰 섰다.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한 건가. 반가운 마음에 고개를 들었다가 처음 아프리카를 본 그때처럼 입이 떡 벌어졌다.
“와아아!”
우리가 도착한 곳은 끝이 안 보일 만큼 드넓게 펼쳐진 설원이었다. 소복이 쌓인 흰 눈이 세상을 온통 뒤덮고 있어, 아찔한 눈부심이 주위에 가득했다. 나는 추위마저 잊고 주위를 살폈다. 금왕이 멈춰 선, 넓은 길 좌우로 쭉 늘어선 침엽수림에는 하얀 눈옷이 두껍게 입혀져 있었고, 뒤를 돌아보자 보얗게 뒤덮인 설원에 오직 금왕의 발자국만이 넓은 간격으로 콩콩 찍혀 있어 어린 날의 동심을 떠올리게 했다.
쏴아아―.
갑자기 어디선가 시린 바람이 불어와 주위의 눈을 흩날렸다. 나는 부르르 몸을 떨며 다시 금왕에게 달라붙었다. 그러자 금왕이 꼬리로 내 허리를 감싸 들더니 뒷다리를 접고 앉았다.
왜 그러지?
의아해서 바라보자 꼬리를 휘익, 움직여 나를 앞으로 데려오더니 앞발을 들어 눈처럼 뽀얀 털이 보송보송한 목과 어깨 언저리에다가 나를 묻었다. 매끈하게 깎인 등보다 두 배가량 긴 목털이 온몸을 따뜻하게 덮었다. 그 배려에 고마운 눈길을 보내자 금왕이 더 꼭 붙잡으라는 듯 나를 앞발로 톡, 가벼이 두드려 주고는 다시 몸을 세웠다.
“이제 얼마 안 남았으니, 조금만 더 힘내라.”
‘암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따듯하고 보드라운 털에 감싸인 황홀감에 이미 헤, 얼굴이 풀려 버린 나는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안정적으로 올라탈 수 있어서 비교적 매달리기 쉬웠던 등과 달리, 옮겨 간 자리에서는 쉼 없이 움직이는 금왕의 어깨 때문에 제법 힘이 들었다.
하지만 금왕이 나를 배려해 이전보다 속도를 한껏 늦췄고, 또 추위를 날려 보내는 포근함과 온몸을 휘감는 털의 감촉이 무척 좋아 눈까지 질끈 감고 열심히 버텼더니, 어느새 금왕이 목적지에 도착했다며 나를 앞발에 태워 내려 주었다. 대체 여기가 어딜까 궁금해하며 주위를 살피다가 그대로 굳어졌다.
“오셨습니까, 금왕. 오랜만에 뵙습니다.”
내 바로 앞에 온몸이 하얀 털로 덮인 북극 늑대가 서 있었다. 아니, 막 금왕에게 숙였던 고개를 들고 있었다.
늑대 특유의 날카로운 생김에 눈처럼 새하얀 털이 만나 자아내는 그 신성하면서 고결한 분위기도 아주 매력적이었지만, 북극 늑대는 다른 이유로 더 사랑받았다. 본래도 용맹하면서 가정적이라고 소문난 늑대들 가운데 특히 더 가족 간의 유대가 깊고 평화로운 성격이라는 점 때문이었다.
그로 인해 나 또한 북극 늑대에게 무한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북극여우만 생각하고 왔다가 이 생각지도 못한 선물에 반짝반짝 눈을 빛내던 나는 문득 그 옆에 자리한 하얀 신발에 고개를 들었다.
‘우와…….’
감탄이 터져 나왔다. 처음에는 허리께까지 내려오는 상대의 긴 백발에 놀라서, 다음으로는 너무 아름다워서. 창백한 피부를 감싼 얇은 백의의 가슴팍이 판판한 걸 보아 분명 아마 남자일 거라 추측되는데도, 절로 그 표현이 떠올랐다. 예쁘장한 게 아니라, 아름다웠다.
그건 그의 백옥처럼 매끄러운 피부 때문도, 창백하지만 선이 고운 입술 때문도 아니었다. 왠지 위압감을 풍기는, 얇고 길게 찢어진 눈매 속에서 유리구슬처럼 투명하게 빛나는 눈동자 때문이었다.
마치 설원을 덮은 눈처럼, 수만 가지의 맑은 빛으로 반짝이면서도 정확한 색이 무언지 짐작할 수 없게 만드는 묘한 눈동자. 시리면서도 아름답고, 냉정하지만 눈부신 그 눈과 마주하자 얼음 속에 갇힌 것처럼 멍하니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시선을 돌리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절대 내가 먼저 그에게서 눈을 뗄 수 없으리라는 걸 느꼈다.
순간, 왜인지 피부 위로 오싹한 소름이 돋아나려는데, 그가 살며시 눈을 내리깔아 고개를 돌리며 나를 속박에서 풀어 주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설왕(雪王).”
금왕의 인사에 사내, 아니, 설왕도 고개를 숙이며 예를 갖췄다. 아까는 그의 눈에만 시선을 빼앗겼지만, 그 얼굴 또한 입이 턱 벌어질 정도의 미인이었다. 지금껏 살면서 보아 온 그 누구보다, TV 속 연예인을 포함해도 이렇게 아름답게 생긴 이는 본 적 없었다.
아니, 생김새뿐만 아니라 온몸에서 풍기는 분위기부터가 신비롭고 기묘한 매력이 느껴졌다. 반짝반짝 눈부시게 빛나는 아름다운 눈의 결정과도 같은 느낌이랄까.
그처럼 투명하게 아름다우면서도, 또 그는 조금 차가운 인상을 풍겼다. 그런 가운데 시종 무표정하니 예의상의 웃음조차도 떠올리지 않은 그 얼굴은 무심하다 못해 냉담해 보이기까지 했다.
호랑이의 얼굴이라 잘 알 수 없지만 금왕도 썩 그렇게 살가운 표정을 짓는 편은 아니었다. 특히 처음에는 꽤 쌀쌀맞아 냉랭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비록 아직 둘밖에 보지 못했지만, 본래 자연의 왕이라는 존재들은 다 이렇게 무뚝뚝한가 싶은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아니, 금왕은 제쳐 놓고라도 이쪽은 설왕이라서 그럴지도 모르지. 눈의 왕이니까.’
괜히 혼자 납득하고 있는데 금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우는 어떻습니까?”
설왕은 대답 대신 몸을 돌렸다.
“이쪽입니다, 금왕. 이리로.”
말없이 돌아선 설왕을 대신해 늑대가 대답하더니 안내하듯 앞장서 나아갔다. 그제야 나는 주위를 잠시 둘러볼 수 있었다.
어느새 우리는 거대한 건물 내부에 들어와 있었는데, 사방이 온통 새하얬다. 하마터면 여기가 아까 그 눈밭이라고 착각하게 될 만큼. 물론 눈밭이라고 해도 믿을 것처럼 흰빛으로 뒤덮인 넓은 공간이었지만, 이곳은 엄연히 딱딱한 바닥이 있고 사방이 틀어막힌 공간이었다. 딱히 화려하게 지어졌다거나 꾸밈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중학교 때인지, 고등학교 때인지 불확실하지만 아무튼 학교 교과서에서 몇 번 본 기억이 있는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처럼 굵은 기둥이 일정한 간격으로 듬성듬성 박혀 있는 것이 전부였다. 여기가 로비라서 단순한 구조로 지어졌나 하고, 다른 모습을 기대해 봤지만 끝없는 기둥의 행렬만 이어질 뿐이었다.
“여깁니다.”
한참을 걸어가던 북극 늑대가 문득 어느 기둥 앞에 멈춰 서더니 금왕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대체 북극여우가 어디 있다는 걸까. 나는 바로 곁에 있는 기둥을 살피다가, 그보다 조금 더 앞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
나는 눈을 부릅떴다. 잔뜩 보고 싶어 했던, 탐스러울 정도로 뽀얀 털을 지닌 북극여우를 비로소 발견했는데, 그 장소가 역시 새하얀 털을 지닌 북극곰의 폭신한 배 위였다. 등 뒤의 굵은 기둥에 비스듬히 몸을 기대고 앉은 북극곰은 자신의 배 위에서 몸을 둥글게 만 여우를 그 크고 넓은 손으로 살살 조심스럽게 어루만져 주고 있었다.
북극여우가 북극곰이 남긴 음식을 먹는 일이 잦아 자연에서도 종종 함께하는 모습을 보여 주지만, 그래도 설마 이런 다정한 모습을 하고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었기에 깜짝 놀랐다. 그러나 나와 달리 우리를 안내한 늑대는 물론 설왕과 금왕 누구 하나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괜히 멋쩍어져 뺨을 매만질 때였다.
“녀석들, 여전히 사이가 좋군.”
“좋다 뿐입니까. 아주 죽고 못 살지요. 여우가 아프다는 소식을 들은 뒤로는 곰도 같이 끙끙 앓으면서 식사도 않고 있습니다.”
금왕이 무척 익숙한 광경이라는 듯 한마디를 던지자 늑대가 눈꼴 시리다는 듯이 투덜거렸다. 그에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신의 품에 안긴 여우를 들여다보던 곰이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어, 언제 오셨습니까, 금왕.”
북극곰이 깜짝 놀라 당황한 얼굴로, 하지만 품에 안은 여우가 흔들리지 않게 단단히 끌어안으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래도 그 움직임을 느끼지 못할 리는 없었기에 몸을 둥글게 말고 꼬리에 얼굴을 묻고 있던 여우가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
얼굴을 보지 못한 앞서도 이미 충분히 두근거리는 귀여움을 내뿜었고, 한눈에도 보드라워 보이는 눈처럼 새하얀 털만으로도 더없이 매력적인 북극여우였지만, 고개를 들자 그 미모는 가히 내가 상상한 것 이상이었다.
특히, 하얀 털로 덮인 작고 둥근 귀를 까닥이며 일자로 감겨 있던 눈을 동그랗게 뜬 여우는 정말 인형 같았다. 흰 털과 대조되는 선명한 눈매 속에 자리 잡은 새까만 눈이나 자그만 코, 정말 딱 앙증맞을 정도의 길지도 짧지도 않은 주둥이, 코와 턱 주변에 송송 나 있는 가늘고 긴 수염까지. 원래도 미모가 뛰어난 북극여우지만, 그중에서도 손꼽힐 것 같은 미(美) 여우였다.
‘아, 아…….’
정말 숨이 막힐 것처럼 깜찍한 모습에 나도 모르게 침이 꿀꺽 넘어가며 손끝이 움찔거렸다. 하지만 오기 전 금왕이 당부했던 바가 없지 않았던 데다가.
“금왕, 죄송합니다, 오랜만에 뵙는데…… 제가 감히 이리 무례한 모습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우의 잔뜩 지친 목소리와 자꾸만 가물가물 감기는 눈이 한눈에도 안쓰러워 나는 당장 여우에게 달려들고 싶은 마음을 필사적으로 억눌렀다. 하지만, 비록 저 앙증맞은 몸을 조물거리지는 못해도 저 뽀얀 꼬리털만큼은 꼭 한번 쓰다듬고 싶다는 욕심이 자꾸 고개를 쳐들었다. 그를 참아 내기 위해 질끈 이를 깨물었다. 그리고 살금살금 뒤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건 신경 쓰지 마라. 그보다 어디가 문제인지 한번 보…… 윽.”
여우를 살펴보고자 몸을 낮추던 금왕이 움찔, 꼬리에 잔뜩 힘을 주며 나를 돌아봤다. 그 모습에 나도 깜짝 놀라 손을 팟, 놓았다가 저 앞에 북극여우를 보고는 또다시 금왕의 꼬리를 붙잡았다. 저 도톰한 북극여우의 꼬리로 달려들고 싶은 마음을 달래기 위한 대체재였다.
침을 흘릴 것 같은 눈으로 여우를 바라보는 내 모습에서 속내를 읽었는지 금왕은 얌전히 꼬리를 내어 줬다. 그리고 다시 여우를 살폈다. 나는 또다시 금왕의 진료를 방해하지 않도록 최대한 애를 쓰며 여우를 힐끗거렸다. 그때였다.
“앗, 이 녀석! 거기 서! 서라니까!”
갑자기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렸더니 그곳에는, 목소리의 주인보다 먼저 뒤뚱뒤뚱 달려오는…… 새끼 황제펭귄이 있었다!
작은 다리를 뒤뚱거리며 달려오는 새끼 황제펭귄은 부화한 지 얼마 안 된 듯 상당히 작았다. 그를 보고 있노라니 다시 얼굴이 풀어졌다.
원래 펭귄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지만 예전에 남극 관련 동물 프로그램에서 펭귄들이 뒤뚱뒤뚱 줄지어 걷다가 갑자기 고 오동통한 배로 얼음판 위에 슬라이딩하는 모습을 보고는 흥미가 생겼다.
나는 여러 펭귄 중에서도 특히 황제펭귄을 제일 좋아한다. 펭귄 중 가장 덩치가 커 오동통해 보이는 몸매와 매끄러운 생김, 천적이 없이 지내다 보니 크게 겁이 없는 온순한 성격 등도 다 좋았지만, 무엇보다도 내가 황제펭귄을 좋아하게 된 이유는 바로 갓 부화한 새끼 펭귄이 정말 침이 흐를 것처럼 귀여웠기 때문이다!
황제펭귄의 성체는 등과 배가 흑백으로 완전히 대조되는 모습을 지녔지만, 그와 달리 새끼는 뒷머리와 눈두덩 위에 갈매기 모양으로, 그리고 코와 부리 아래까지만 일자로 까만 털이 나 있었다. 남은 얼굴은 하얀색, 또 남은 몸통은 옅은 회색의 솜털로 덮여 있었다. 정말이지 보송보송해 보이는 솜털로.
그 모습으로 뒤뚱뒤뚱 걷다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오동통한 몸 아래 두 발을 가지런히 모으고, 짤막한 날개를 몸 옆으로 늘어뜨리더니 고개를 갸웃거리며 까만 눈으로 올려다보는데…… 너무 귀여워서 코피가 쏟아질 것 같았다. 새끼라 그런지 부리도 길지 않아 더 귀여웠다. 넌 진짜 뭘 믿고 그렇게 귀여운 거냐고 따지고 싶을 정도였다.
“요 녀석, 같이 가자니까!”
새끼 펭귄에게 온통 정신을 빼앗겨 있는데 갑자기 뻗어 나온 손길이 녀석을 덥석 들어 올렸다. 앞서 펭귄을 부른 것으로 보이는 사내였다.
“여긴 네가 살던 남극이 아니라고. 거기야 너한테 무서울 게 별로 없지만 여기에는 엄청 무서운 곰 아저씨랑 늑대 아저씨, 여우도 있…… 앗, 금왕 왔네? 오랜만!”
새끼 펭귄의 옆구리를 꼭 움켜쥐고 시선을 맞추며 꾸짖던 사내가 그 너머로 엿보이는 금왕을 발견하고는 인사했다.
“안 그래도 북극곰이 너 엄청 기다…… 어랏?”
사내가 반가워하다 말고 금왕의 옆에 선 나를 보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사람이네?”
바로 내 정체를 간파하는 모습에 어쩐지 긴장이 되어 금왕의 꼬리를 꼭 움켜쥐었다가 움찔거림을 깨닫고 서둘러 힘을 풀었다. 그동안 사내가 나를 향해 다가왔다. 나보다 한 뼘이나 키가 컸던 설왕과 달리 새로 등장한 이 사내는 아주 조금 눈높이가 높은 정도였다.
“와, 이게 얼마 만에 보는 사람이야! 반가워!”
한 손으로 펭귄을 품에 안은 사내가 무척 반가운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게다가 나랑 같은 동양인…… 어?”
“우왓!”
말을 거는 상대를 바라봐야 한다는 걸 알지만, 나도 모르게 그의 품에서 파닥거리는 펭귄에 정신이 팔려 있는데, 갑자기 그가 내 바로 앞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혹시…… 한국인이야?”
눈이 휘둥그레진 나를 계속해서 유심히 살펴보던 사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아, 네…….”
생각지 못한 물음에 내가 되레 더 당황했다가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사내의 얼굴이 환해졌다.
“와아, 진짜 반갑다! 나도 한국 사람…….”
사내가 안고 있던 펭귄을 한쪽 옆구리로 옮기고 나를 끌어안으려 할 때였다. 어느새 옆으로 다가선 설왕이 그의 어깨를 붙잡아 제지했다.
“응? 왜?”
의문을 보이는 사내에게 설왕은 가만 고개를 흔들었다.
“아, 맞다! 나 이제 진짜 사람한테는 함부로 닿으면 안 되지. 사람을 만난 게 너무 오랜만이라 까먹고 있었어.”
“……?”
뜻 모를 말을 하는 모습에 의아한 시선을 던지자 사내는 상큼하게도 웃었다.
“내가 석 달 전에 설왕의 반려가 되었거든! 그 영향으로 내게서 보통 인간은 견디기 힘든 한기가 나오게 됐대. 그래서 여기 있는 것처럼 추위에 적응된 극지방 동물이 아닌 상대를 만지면 얼어 버린대. 반려가 된 이후 처음 사람을 만나서 깜빡했네. 미안.”
참으로…… 상큼한 미소였다.
“그래도 걱정 마, 언다고 다 죽는 건 아니야. 설신께 말씀드리면 또 잘 해동시켜 주시니까!”
“아…….”
하하. 그 해맑은 설명에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어색한 미소만 짓고 있으려니 사내가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오랜만에 사람을 만난 기념으로 얘기 좀 하고 싶은데, 괜찮아?”
사내는 나뿐만 아니라 자신의 곁에 선 설왕과 내 등 뒤의 금왕에게도 시선을 보냈다. 둘 다 별다른 이견이 없다는 듯 나를 바라보며 내 대답을 기다렸다. 딱히 거절할 이유가 없었던 데다, 나를 바라보는 사내의 얼굴이 너무 기대에 차 있어서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괜찮아요.”
“좋았어! 그럼, 가자!”
활짝 웃어 보인 사내가 신난 목소리로 외치더니 몸을 휙 돌려 앞장서기 시작했다. 그 거침없는 걸음에 얼떨떨한 기분으로 뒤를 쫓았다.
“아 참!”
사내가 갑자기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갑자기 딱 멈춰 섰다.
“자.”
돌아선 사내가 안고 있던 새끼 펭귄을 내 앞으로 내밀었다. 그리고 펭귄의 짤막하니 귀여운 날개 한쪽을 손으로 들어 보였다. 솜털이 보송보송 난 몽땅한 날개를 보자 절로 침이 꿀꺽 삼켜졌다. 잠시 황홀한 얼굴로 그를 응시하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는 사내를 보았다. 왜 갑자기 이런 행동을 하는지 의도를 알 수 없었던 탓이다.
“우리 인사도 제대로 못 한 것 같아서, 악수라도 좀 하자고. 근데 내가 직접 만지면 안 되니까, 악수 대타.”
사내가 유쾌한 미소와 함께 쥐고 있던 펭귄의 날개를 가볍게 흔들어 보였다. 마치 파닥거리는 것 같은 그 모습이, 정말 너무 귀여워 나는 다시 한번 침을 삼켜야 했다. 그리고 사내의 설명대로 조심스럽게 펭귄의 날개를 붙잡았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몽실몽실 보드라운 감촉에 일순 이성이 날아갈 듯 아찔해졌다.
하지만 겨우 제정신을 부여잡고 새끼 펭귄에게 달려들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대신 붙잡은 날개를 살며시 조물거렸더니 귀찮았는지 펭귄이 날개를 파닥거렸다.
“앗, 요 녀석. 가만있어.”
펭귄이 움직이는 바람에 손이 미끄러진 사내가 서둘러 자세를 다잡으며 움직임을 제지했다. 때문에 내가 손을 놓아주자 펭귄은 바로 얌전해졌다. 그저 품에 안겨서는 까만 눈을 들어 사내를 올려다봤다. 그게 귀여웠는지 사내가 솜털이 보송보송한 펭귄의 머리에 턱을 문질렀다.
“아, 진짜 귀엽다니까. 그치?”
펭귄의 뒤통수에 쪽 입까지 맞춘 사내가 물었다. 사내의 행동에 까만 눈을 깜빡이며 버둥거리는 펭귄에 반쯤 홀려 버린 나는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가 기분 좋은 얼굴로 다시 펭귄의 머리에 턱을 괴었다. 머리 위에 올려진 무게가 싫었는지 날개를 파닥이는 새끼 펭귄의 모습은 정말 심장이 녹을 것처럼 귀여웠다.
“저도 좀 그렇게 귀여워해 보시죠.”
어느새 다가온 건지, 북극 늑대가 어슬렁거리며 나타나서는 퉁명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게다가 표정은 꼭 삐지기라도 한 것처럼 뾰로통했다.
‘으악! 뾰로통한 얼굴의 북극 늑대라니!’
눈앞의 북극 늑대가 너무 귀여워 혼자 안달이 나서 비명을 삼킬 때였다.
“넌 안 귀여운데 어떻게 귀여워하냐? 그치?”
동의를 구하는 사내의 물음에 나는 차마 고개를 저을 수도, 그렇다고 거짓말로 대답할 수도 없어서 하하,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와우. 너보다 이 친구가 훨씬 더 귀엽다, 야.”
내 어설픈 웃음에서 대체 뭘 본 건지, 사내가 나를 향해 빙긋 웃어 보이더니 더욱 동의할 수 없는 말을 내뱉었다. 그에 내가 고개를 흔들기도 전에 늑대가 답답한 표정으로 후 한숨을 내쉬었다.
“이래서 머리 검은 짐승은…….”
“뭐 인마?”
“예전에 제가 목숨을 구해 드렸던 거 벌써 잊으셨습니까?”
다그치는 듯한 사내의 물음에 늑대가 도리어 더 눈을 부릅떴다. 그에 사내가 아, 가벼운 탄성을 내뱉으며 주춤했다. 하지만 이내 표정이 다시 심드렁해졌다.
“야, 그건 설왕이 명령해서 한 거잖아. 그것도 자기가 나를 만지면 얼어 버릴 테니까 너한테 시킨 거지, 아니었음 직접 했을걸? 우리 설왕이 좀 착해?”
“윽.”
의기양양한 사내의 태도에 늑대가 미간을 좁혔다. 그리고 갑자기 급한 일이 생각났다는 듯 휙 몸을 돌려 멀어져 갔지만 사내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다만 그는 휘익, 주위를 둘러보더니 나를 향해 물었다.
“그럼, 이쯤 자리 잡을까?”
“아, 네…….”
반사적으로, 사내가 그랬던 것처럼 주위를 둘러본 나는 조금 얼떨떨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멈춰 선 곳은 내가 이 건물에 들어와 봤던 그대로, 듬성듬성 기둥이 놓인 넓은 건물 안이었다. 그래서 자리를 잡는다는 말에, 그냥 여기에 주저앉자는 말인가? 의문을 떠올리는데 갑자기 사내가 내게서 등을 돌리고 섰다. 왜 그러나 싶어서 가만 바라보자 사내가 후웁, 힘껏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쏴아아―.
사내의 어깨 너머로 작게 눈보라가 쳤다. 갑자기 회오리처럼 둥글게 회전하는 눈보라의 출현에 깜짝 놀라 바라보자, 후우- 길게 숨을 내뿜는 소리가 들려왔다.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설마, 하는데 사내의 어깨 너머에 보이던 눈보라가 멎었다. 그리고 사내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더니 빙긋 웃었다.
“자, 앉자!”
그러면서 사내가 가리켜 보인 곳에는 방금까지만 해도 없었던, 마치 눈을 뭉쳐 만든 것 같은 하얀 소파가 자리하고 있었다.
“……!”
“배운 지 얼마 안 된 거라서 아직 좀 어설퍼. 그래서 별로 푹신하지는 않을지도 몰라.”
놀란 얼굴을 감추지 못하고 바라보자 사내가 멋쩍게 웃었다.
“그래도 차갑지는 않으니까, 안심하고 앉아.”
사내가 먼저 자리를 잡고 앉으며 옆자리를 톡톡 두드렸다. 그 순간 뽀도독, 귀여운 소리가 나며 소파에 그의 손 모양이 선명하게 찍혔다. 이건 눈으로 만들어진 것 같은 게 아니라―.
“혹시……, 정말 눈이에요?”
“응. 설왕의 반려가 되고 나서 얻은 능력 중 하나야.”
내 물음에 사내가 쑥스러운 한편으로 또 조금 자랑스러운 기색을 내비쳤다.
“능력……이요?”
“응. 보통 왕의 반려가 되면 그 상대의 능력을 다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전수받거든. 근데 우리 설왕은 주로 눈을 다스려. 눈뿐만 아니라 비도 관리하지만, 어쨌든 그런데…… 눈을 다스린다는 건 단지 눈이나 비가 오게 하는 것뿐만 아니라 다른 수많은 일에도 응용할 수 있다는 소리거든. 방금 내가 한 것처럼 눈을 뭉쳐서 이런 의자를 만들 수도 있고.”
“아…….”
“금왕의 반려라면 아마, 금수를 다스리는 법을 배우겠지?”
“네? 그……, 그렇겠죠.”
갑작스러운 화제 전환에 다소 의아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래도 동조해 고개를 끄덕이자 사내가 씩 입가를 말아 올렸다.
“근데, 안 앉아?”
그제야 내가 아직도 멀뚱히 서 있다는 걸 깨닫고 서둘러 그가 만든 눈 소파로 다가갔다. 비록 사내가 편안히 몸을 얹는 모습을 보았지만, 그래도 눈이라는 생각에 혹시 푹 꺼져 버리는 게 아닌가 걱정하며 살며시 몸을 내렸다. 하지만 걱정과 달리 보통 소파와 거의 다르지 않은 편안한 쿠션감만 전해졌다.
앉으며 팔걸이에 자연스럽게 팔을 얹었다가 뒤늦게 아차, 놀라서 손을 뗐다. 눈이라 차가울 거라 짐작해서였다. 그러나 어쩐지 냉기가 느껴지지 않았던 손바닥을 깨닫고 다시 손을 내렸다. 정말로 전혀 차갑지 않았다. 앞서 사내가 안심하라고 했던 말까지 떠올린 나는 온몸에 들어가 있던 긴장을 풀고 한결 편안히 소파에 기대앉았다.
“와, 정말 눈인데도 전혀 차갑지 않고 편안하네요. 대단해요.”
“고마워.”
내 칭찬에 사내가 환히 웃었다. 그즈음, 답답함을 느꼈는지 그의 품에서 안겨 있던 새끼 펭귄이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사내가 달래듯 살살 펭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도 계속해 버둥거리던 펭귄은 오래지 않아 기분 좋은 얼굴로 눈을 감았다. 마치 가릉거리는 고양이 같은 그 모습을 보자 또 침이 꿀꺽 삼켜지는데, 문득 사내가 나를 돌아봤다.
“근데 금왕이랑은 어떻게 만나게 된 거야?”
괜히 혼자 찔려서는 입가를 닦고 있는데 사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그게 그러니까…….”
갑작스러운 질문에 잠시 더듬거리며 기억을 되짚었다. 사흘 전 아프리카 여행을 준비하며 체력 훈련 겸 뒷산에 올랐다가 삵에게 물려 쓰러진 일부터 이곳에 오기까지.
“아하. 그렇구나. 그래서 금왕이 그렇게…….”
내가 설명하는 내도록 별다른 맞장구도 없이 묵묵히 듣고 있던 사내가, 삵의 처분으로 내가 요구한 내용을 듣고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네?”
뒷말이 알아들을 수 없을 만큼 작아서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사내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손을 흔들었다. 그러고는 얼른 이야기를 계속 하라며 부추겼다. 그 뒤의 이야기는 간단했다. 삵부터 시작해 다른 여러 맹수 및 금왕에 대한 희롱 아닌 희롱을, 애정이 가득 담긴 스킨십으로 각색하느라 짧게 끊어야 했기 때문이다.
대신 소원하던 아프리카에 가게 된 일과 맹수에 대한 내 오래된 애정에 주로 초점을 맞추어 설명했다. 특히 어릴 때부터 무척 맹수를 좋아해서 제발 한 번이라도 만져 보는 게 소원이었다고 말하자 사내가 눈을 초롱초롱 빛내기 시작했다.
“우와! 진짜 비슷하다!”
“네?”
“나도 우리 설왕 만난 게 어릴 때 꿈 때문이었거든. 어릴 때부터 빙수를 진짜 좋아해서, 눈으로 빙수를 만들어 먹어 보는 게 내 소원이었어.”
……아아. 잠시 놀란 얼굴을 했던 나는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 어떤 만화에서 눈 오는 날 그릇을 밖에 두어 눈을 받은 다음 빙수를 만들어 먹는 내용을 본 적 있는데, 그걸 보고 나도 비슷한 상상을 했던 적이 있었다. 비록 실행하지는 못했지만 대신 눈이 내리는 날 입을 벌리고서 그를 받아먹은 적은 몇 번 있었다.
“그것도 나는 좀 특이하게, 그릇에 눈을 담아서 빙수를 만드는 게 아니라 넓은 눈밭에서 눈 위에 팥이랑 이것저것 얹어서 그냥 고개 묻고 먹는 걸 꿈꿨거든. 그러면 왠지 빙수를 진짜 배 터지게 엄청 많이 먹을 수 있겠다 싶어서. 근데 부모님들은 보통 눈이 더럽다고 그러지 못하게 하잖아? 그래서 어느 날 몰래 팥빙수 도구 챙겨서 산에 올라갔다가……!”
사내가 점점 목소리를 고조시키더니 절정 부분에서 잠시 말을 끊었다. 그리고 한껏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는 나를 보며 씩 웃더니 이내 어깨를 으쓱거렸다.
“조난됐지.”
“……네?”
“덕분에 거의 죽을 뻔했던 걸, 우리 설왕이 구해 주면서 우리의 운명적인 만남이 시작됐거든.”
“아…… 그럼, 어릴 때 처음 만나신 거예요?”
“응. 근데 그리고 바로 헤어졌어. 게다가 난 그게 꿈인 줄로만 착각하기도 했고…….”
사내는 그때를 회상하듯 잠시 높은 허공을 올려다봤다.
“그게, 설왕과 처음 만났을 때는 몸이 완전히 얼어붙어서 의식도 반쯤 나가 있었거든. 그래서 기억이 어렴풋했고, 또 정신을 차려 보니까 벌써 집인데 날 봤다는 어른들 말이 웬 허연 늑대가 날 물고 왔다는 거야.”
아. 순간 나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동시에 머릿속에 한 가지 기억이 떠올랐다.
-예전에 제가 목숨을 구해 드렸던 거 벌써 잊으셨습니까?
아마도 아까 북극 늑대가 한 말이 저 일을 말하는 건가 보았다.
“그래서 쭉 잊고 살다가…… 어쩌다 보니 내가 아직 창창한 나이에 살짝 죽을 결심을 하게 됐거든.”
“……!”
잠시 딴생각에 잠겼던 나는 깜짝 놀라 사내를 쳐다봤다. 죽을 결심이라니? 그 말은 설마……?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이야기에 당혹스러운 시선을 던지자 사내가 걱정할 필요 없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뭐 다 예전 이야기고. 지금은 전혀 그런 생각 안 해. 그냥 그때 잠깐 그런 결심을 했는데…… 그래서 준비까지 다 했다가 문득, 그날이 생각이 난 거야. 예전에 그 일이 정말 꿈이었나? 하고 갑자기 너무 궁금해지데. 그래서 정말 혹시나 싶은 생각에. 그게 만약 꿈이 아니었다면? 그렇다면 죽기 전에 한번 확인이나 해 보고 죽자 싶어서 확인하러 왔다가 이렇게 된 거지.”
“…….”
상큼하게 웃어 보이는 사내에게 나는 대체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그런 내 반응에 사내가 아이고, 조금 난감한 신음을 흘리며 볼을 긁적였다.
“정말로 그땐 상황이 너무 힘들어서 어린 날에 잠깐 멍청하고 잘못된 판단을 내린 거야. 진짜 신경 쓰지 마. 살면서 그때만 딱 그랬고, 그 전에도 후에도 죽겠다는 생각 같은 건 한 번도 해 본 적 없으니까.”
그 말에도 나는 섣불리 굳어진 표정을 풀 수가 없었다. 그에 사내가 음, 잠깐 생각하는 듯하다가 이내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즈음에 부모님이 두 분 다 돌아가시고 혼자 됐거든. 진짜 갑자기, 사고로 한순간에 그런 일이 일어나서 너무 막막하고 우울한 거야. 그래서 좀 안 좋은 생각을 했었어. 한심했지. 목숨 귀중한 줄 모르고. 어떤 사람에겐 너무도 간절한 하루하루인데, 멍청한 짓을 하려고 한 건지. 나중에 엄청 반성했어.”
이 바보, 하며 사내가 자책하듯 제 머리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래도 당시에는 진짜 괴로웠어. 마땅한 친척도 없었고, 형제도 없는 대신 부모님하고 사이가 엄청 좋았거든. 거의 셋이 하나라는 느낌으로 살아갔어. 근데 그 두 분이 없어지니까, 도저히 살고 싶다고…… 아니, 내가 살아 있는지도 모르겠는 거야. 두 분이 가고 나 혼자가 되었다가 아니라, 내 몸의 커다란 일부가 떨어져 나간 느낌이랄까. 그래서 슬픈 걸 넘어서 정말 꼭 죽을 것처럼 아팠어.”
어느새 표정이 어두워진 사내가 품에 안긴 귀여운 새끼 펭귄을 잠시 내려다봤다. 그게 제법 위로가 되었던지 그는 한결 가벼워진 얼굴로 나를 마주 봤다.
“어쩌면 그래서 더 설왕을 확인하고 싶었는지 몰라. 그 옛날, 시리도록 차가운 눈밭에 묻혀서 아플 만큼 선명한 한기에 몸이 얼어 가면서, 나는 이제 이렇게 고통스럽게 죽는구나 했을 때 날 구해 준 게 설왕이었거든. 그래서, 별로 비슷한 상황이 아니었는데도 왠지 모를 기대 같은 게 품어졌다고 할까. ……뭐, 어쨌든 결과적으론 잘된 거지.”
사내가 씩 웃어 보였다. 지금의 미소는 물론, 그가 늘여 놓은 이 긴 개인사는 아마도 불편한 내 마음을 풀어 주기 위해서였을 텐데, 나는 더욱더 얼굴이 굳어 가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그건 사내의 이야기가 가진 무게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아.”
나도 모르게 신음을 토했다. 가슴속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 치밀어 오르는 걸 느꼈다. 그리고 눈가가 따가워졌다. 눈가로 몰리는 열을 의식하며 눈물을 흘리지 않기 위해 눈을 감고 손가락으로 눈꺼풀 위를 꾹 눌러 내렸다.
“어라? 왜 그래, 내 이야기가 너무 감동적이었어?”
사내가 장난스럽게 물음을 던졌다. 가벼운 농담으로 나를 위로하려 한다는 걸 알았지만 나는 그에 응할 수가 없었다. 말을 내뱉으면 울음도 함께 터질 것만 같아서 말없이 고개만 저었다.
“아니면, 너무 슬펐나?”
“아뇨, 그게 아니라…….”
곤란해하는 사내의 모습에 나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러자 결국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혹시, 동정해 주는 거야?”
멍하니 눈물을 흘리는 내 모습을 가만 바라보던 사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딱히 불쾌한 기색은 아니었고 진심으로 이유가 궁금한 표정이었다. 그래도 혹시 그에게 실례되는 오해를 사게 될까 봐 나는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동정 같은 게 아니에요. 동정이라니…… 제가 무슨 자격으로 그런…….”
자꾸만 목소리가 떨려서 말이 자꾸 끊겼다. 그래서 잠시 숨을 고르며 눈가를 닦아 내는데 사내가 아, 가벼운 탄성을 내뱉었다. 그리고 의미를 알 수 없는 묘한 눈빛으로 나를 보다가 잠시 뒤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너도 고아야?”
정곡을 딱 찌른 물음에 눈가를 쓸어 내던 손이 움찔, 멈췄다.
“와아, 진짜……. 웬일이야. 같은 한국 사람인 것도 신기한데 그것도 같다고?”
내 반응만으로 답을 알아차린 사내가 뜻 모를 중얼거림을 흘렸다. 의아한 듯 바라보자 그는 대답 대신 화제를 바꿨다.
“그래서, 내가 부모님을 잃어 괴로웠다고 하니 너도 옛날에 느꼈던 그 슬펐던 마음이 생각나서 운 거야?”
또다시 정곡을 찔린 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 말대로였다. 생각지 못한 사내의 고백에 가슴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슬픔이 폭풍처럼 일어났다. 그가 느꼈던 것과 비슷한, 몸이 부서지는 것 같은 상실감과 고독이 순식간에 나를 뒤덮었다. 벌써 꽤 오래전 일인데도 어제 일처럼 오싹할 만큼 선명하게 떠올랐다.
바로 몇 시간 전에 보고, 이야기하고, 끌어안은 이들이었는데. 갑자기. 정말 아무 예고도 없이 아무리 외쳐도 대답이 들려오지 않게 되고,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게 되고, 아무리 만지려 해도 만질 수 없어졌다. 내가 가장 믿고 의지했던 이들이 어느 한순간에 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리는 것. 느낄 수도 없게 되는 것. 그건 단지 슬프고 괴로운 걸 넘어서서 공포였다. 며칠째 엉엉 울어 대도 사라지지 않는, 영원히 지울 수 없는 두려움으로 각인되었다.
이대로 영영 혼자 남아서 나는 죽어 버리는 걸까. 혼자 남아, 내가…… 내가 아닌, 아무것도 아니게 되는 것. 그 끔찍한 기분…….
사내는 이제 아무렇지도 않다고 가볍게 말했지만, 그렇게 쉽게 가벼워질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얼굴은 웃어도 심장은 절대 웃지 못할 것이었다. 그리 생각하자 더 가슴이 아팠다. 환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내를 보자 어쩐지 더욱 눈물이 차올라서 입술을 꼭 깨물었다. 하지만 사내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내가 괜히 쓸데없는 이야기로 안 좋은 기억을 떠올리게 했네. 미안해. 울지 마.”
사내가 사과와 함께 품에 안긴 새끼 펭귄을 내밀어 고 짤막한 날개를 이용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게 왠지 더 가슴 아파서 눈물을 흘리자 그는 별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쉬며 다시 펭귄을 거두어들였다.
“부모님, 언제 돌아가셨어?”
아무리 달래도 진정되지 않으니 차라리 정면 돌파를 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는지 사내가 물었다.
“어……, 열세 살 때요.”
답을 떠올리느라 잠깐 생각에 잠기자 그나마 조금은 눈물이 멎는 것도 같았다. 예상보다 대답 속 나이가 어렸는지 사내의 눈이 조금 커졌다.
“그럼 지금까지 어떻게 살았어?”
꽤 현실적인 질문이라, 한참 감성에 뒤덮여 허우적거리던 이성이 조금 돌아왔다.
“저는 친척들이 많아서요. 다들 돌아가면서 잘 보살펴 줬어요.”
“그렇구나.”
거의 멎어 가는 눈물에 눈가에 맺힌 물기를 닦아 내며 대답하자 사내가 다행이라는 듯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마치 자신의 일처럼 진심으로 걱정해 주는 모습에 마음에 온기가 돌며 한결 편안해졌다. 그때 문득, 혼잣말 같은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너도……, ……게 적어서, 다행…….”
“네?”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아서 반문하자 사내가 멈칫하더니 이내 아무것도 아니라며 웃었다.
“너 이렇게 우는 것 보니까, 아직 부모님 생각이 많이 나나 보다. 여전히 많이 슬프고 힘들어?”
“네? 그게…….”
나는 조금 당황한 눈길을 사내에게 던졌다. 이렇게 당연한 질문을 왜 하나 싶었다. 본인도 분명 여전히 슬플 텐데……. 내가 질문을 제대로 파악 못 했나? 잠시 혼란스러워하고 있노라니 사내가 민망한 웃음을 흘렸다.
“아하하. 그게…….”
흠흠, 사내가 갑자기 헛기침을 하더니 약간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부모님한테는 좀 죄송하지만…….”
면목이 없다는 듯 말끝을 흐렸던 사내는 곧 여느 때처럼 활짝 웃었다.
“난 이제 별로 안 슬퍼. 새로운 가족이 생겼으니까.”
슬프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정말, 무척이나 행복해 보였다. 완전히 잘못 생각했다는 사실에 괜히 열없어졌다.
“게다가 우리 설왕이 또 좀 괜찮은 남자야?”
뿌듯한 얼굴로 자랑까지 곁들이는 그의 모습에 나는 아, 얼빠진 신음만 흘렸다. 그리고 조금 전 그가 한 말을 가만히 곱씹었다가 멈칫했다.
“어? 남자…….”
“앗. 혹시, 우리 설왕이 여잔 줄 안 거야?”
내 중얼거림을 들었는지 사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물론 우리 설왕이 진짜 미인이긴 해도 또 완전 남자다운데.”
“아니요, 그게 아니라…… 저기, 반려님도 남자인……?”
아니, 혹시 남자가 아니었나? 누가 봐도 남자처럼 보이지만 착각일지도……라는 생각에 말끝을 흐리자 사내가 하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맞아. 나도 남자지. 근데 어차피 상대가 인간도 아닌 마당에, 성별이 무슨 상관이야.”
물론, 상대가 인간도 아닌 마당이기는 하지만…… 그게 그렇게 아무 상관도 없는 거였나? 조금 혼란에 빠져 있는데 사내가 쐐기를 박았다.
“애초에 난 인간일 때도 성별은 별로 상관없었던 것 같고 말이야.”
“네?”
“딱히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사랑한다면 성별 따위, 라고 생각했다고 할까. 좀 적당주의였거든. 도덕관념 같은 것도 별로 뛰어나진 않았고. 그래서 상대가 인간이었더라도, 정말 좋아하기만 했다면 이성이든 동성이든 크게 구분 안 했을걸.”
“아…….”
너무도 개방적인 대답에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저 조금 멍해졌다. 내가 수용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 내용이었다. 하지만 사내의 수용량은 내 예상보다 훨씬 방대했다.
“어쩌면 그 모든 게, 무의식중에 어린 시절 봤던 설왕에 대한 기억이 남아서였을지도 몰라. 보다시피 엄청 미인이잖아. 그래서 거기에 홀려서 진작부터 성의 경계에 무뎌졌던 걸지도 모르지. 또 원래 우리 인간 세상에서 동성애가 터부시되는 건 종족 번성이 되지 않아서잖아? 근데 이쪽 왕들은 마음만 먹으면 애도 낳을 수 있다더라고. 뭐, 분위기를 봐서는 내가 낳아야 될 것 같지만.”
엄청 아플 것 같아서 걱정되기는 하는데, 죽진 않겠지? 혼잣말을 하는 사내의 모습은 정말이지 내가 수용할 수 있는 수준을 벗어났기에 나는 멍청한 얼굴로 굳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근데 그거 알아? 금왕도 인간형일 땐 아주 끝내주게 미남이다? 초대박.”
사내가 갑자기 화제를 바꾸더니 엄지를 척 세워 보였다. 금왕의 인간형? 생각지 못한 이야기에 잠시 흐름을 쫓아가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리자 사내가 아차, 하며 덧붙였다.
“뭐, 그래도 내 눈에는 우리 설왕이 최고지만.”
그가 보고 있기라도 한 듯 서둘러 손가락을 접은 사내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입가를 길게 늘였다. 그를 보자 문득, 더 이상 머리 아프게 고민할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단순하게 생각하면 아주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이야기였다. 사내가 지금껏 길게 해 온 이야기는 결국―.
“잘은 모르겠지만, 저…… 행복해 보이세요.”
“어. 진짜 행복해.”
내 말에 이미 밝던 사내의 얼굴이 더욱 환해졌다. 비록 무척 길고 복잡하게 돌아왔지만, 사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결국 지금의 자신이 무척 행복하다는 것이리라. 보는 나도 기분 좋아질 것 같은 사내의 해맑은 웃음에 덩달아 웃으며 결론 내렸다.
“있지, 알아?”
잠시 마주 보며 웃음을 나누던 와중에 사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왕의 반려가 되면 진짜 좋다? 이건 설왕의 반려인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왕의 반려도 다 포함되는 건데, 반려가 되면 기본적으로 상대와 마찬가지로 영겁의 세월을 살게 되거든. 게다가 아까 말했듯이 상대의 능력도 얻게 되고, 또 상대가 모시는 신하고 친해지면 이것저것 사바사바해서 할 수 있는 일이 더 많아져. 진짜 안 되는 거 빼고 다 된다? 왕의 반려라는 거, 진짜 좋아.”
“아, 네…….”
또 종잡을 수 없어진 주제에 조금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사내가 갑자기 엄지와 검지로 미간을 붙잡고 고민에 잠겼다.
“근데 생각해 보면 무조건 좋기만 한 건 아니긴 해. 좀 포기해야 하는 부분이 없지 않아 있거든. 나만 해도 보통 사람하고 쉽게 접촉하지 못하잖아. 뭐, 정 하고 싶으면 설신한테 빙기를 갈무리해 달라고 하면 되긴 하는데, 그래도 이 삶을 살기로 한 이상 이제 예전처럼 평범한 인간은 될 수 없으니까. 처음부터 그걸 각오하고서 반려가 되기로 한 거니까 딱히 불만은 없지만.”
어깨를 으쓱인 사내가 어느새 심각하던 얼굴을 풀고 고개를 들었다.
“게다가 왕의 반려는 언제나 왕과 함께 있어야 하기 때문에 나처럼 사람이었던 경우는 본래 세계의 관계를 유지하기 힘들어. 난 딱히 가족이 없는 처지라서 그나마 형편이 나았지. 버려야 할 게 적었으니까. 친구들은 아주 가끔 설신한테 부탁해서 보러 가면 되고.”
“그렇군요.”
얼떨결에 맞장구치면서도 나는 조금 의아해졌다. 대체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잘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사내의 표정이 어쩐지 무척 진지해서 차마 끊지는 못했다.
“그리고 반려가 되면 우리가 인간 세상에서 쓰던 이름도 거의 쓸 일이 없어. 자연의 법칙이 가장 중시되는 왕들의 세상에서는 이름이 별로 필요가 없거든. 원래 사람들이 이름을 부르기 시작한 게 편의를 위해서, 수많은 사람 중 그 한 사람을 더욱 쉽게 구분하기 위해서잖아. 근데 이 세상에서는 이름으로 부를 것도 없이 한 사람을 온전히 그 개인으로만 보는 걸 중시하거든. 이름이라는 대표 매개를 가지지 않고, 그냥 그 자체로.”
“아…….”
“하지만 아예 없지는 않아. 금수로 치면 사자나 호랑이같이 종을 구분하는 데에는 아무래도 이름을 쓰게 되고, 특히나 금왕이나 설왕처럼 지위에서 파생된 이름은 건재하니까. 그래서 나도 설왕한테는 내 이름을 부르게 하지만. 일단 가진 거고, 또 부모님이 고민해서 지어 주신 건데 안 쓰면 아까우니까 그냥 쓰는 게 좋을 것 같지?”
“네, 뭐…….”
여전히 저의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어쨌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이십 년이 훨씬 넘게 써 온 이름을 한순간에 못 쓰게 된다는 건 아까웠고, 그것이 부모님이 손수 지어 주신 소중한 이름이라면 더욱 그랬다. 내 동의에 사내가 활짝, 유쾌한 웃음을 머금었다.
“그럴 줄 알았어. 아, 게다가 우리 설왕은 목소리도 좋거든. 그래서 더 이름을…….”
이번에는 미처 동의해 줄 수가 없었다. 그 말에 반대해서가 아니라, 진위를 알 수 없어서였다. 나는 아직 설왕의 목소리를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했으니까. 내가 이곳에 온 이후로, 그는 줄곧 냉담한 얼굴로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아 목소리도 꽤 차가울 것 같은데 목소리가 좋다고 하니 대체 어떤 목소리인지 궁금해할 때였다.
“아직…….”
갑자기 들려온 낯선 목소리에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무척이나 매끄럽고 청아한 목소리는 정말 귀를 의심케 하는 아름다운 미성이었다. 마치 투명한 눈의 결정을 울리면 낼 것 같은 소리였다. 그럼에도 목소리 본연에서 묻어나는 냉랭함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굳이 확인할 것도 없이 단숨에 그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차렸다.
아니나 다를까, 백발을 허리께까지 길게 늘인 설왕이 내 곁을 스쳐 사내에게로 다가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소파에 앉아 자신을 올려다보는 사내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할 이야기가 더 남았나?”
그 순간 설왕의 입에서는 목소리뿐만 아니라 미약한 눈보라가 새어 나왔다.
“앗, 눈이다.”
사내는 대답 대신 가볍게 입을 벌려 설왕이 만든 눈보라를 덥석 물었다. 순간 깜짝 놀란 나와 달리, 설왕은 익숙한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 한숨을 따라 또 설왕의 창백한 입술에서 눈보라가 새어 나왔다. 사내는 또 입을 벌려 그것을 받아먹었다.
“이젠 너도 눈을 부리게 되었으면서도 대체 왜 그렇게 매번 열광하는 거냐.”
결국 설왕이 가벼운 핀잔을 던졌다.
“그치만, 네게서 나오는 눈은 달단 말이야. 내 건 안 그런데.”
“그럴 리가. 눈에 맛이…….”
말도 안 된다는 듯이 반박하던 설왕이 돌연 입을 딱 다물었다.
“다르다니까.”
툴툴거리며 제 허리를 꽉 끌어안는 사내의 손길에 멈칫했던 설왕이 이내 허리를 굽혀 그를 마주 안았다. 그들이 내뿜는 다정한 연인들만의 공기를 피해서, 슬며시 소파에서 일어나 뒤돌아서던 찰나.
“북풍 냉해도 울고 갈 차가운 심정을 지녔다던 천하의 설왕(雪王)께서 저리 닭살을 떠실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언제부터 와 있었는지, 머잖은 곳에 뒷다리를 굽히고 앉아 있던 북극 늑대가 설왕 커플을 보며 혀를 끌끌 찼다.
“하기야, 애초에 그 설왕께서 반려를 맞을 거라고 하셨던 데 비하면야 그리 놀랄 일은 아니긴 합니다만.”
무척 지쳐 보이는 북극 늑대의 모습에 무어라 위로라도 한마디 해 주려는데 뒤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자 북극여우를 꼭 끌어안고 다가오는 북극곰이 보였다. 금왕의 도움으로 아픈 몸을 회복했는지 북극곰의 품에 안긴 여우는 앞서 봤을 때보다 훨씬 생기 있는 모습이었다.
그래도 아직 완전히 회복한 건 아닌지 북극곰의 넓은 팔 위에 몸을 둥글게 말고 그의 품을 파고들었다. 그리고 북극곰은 그런 북극여우의 앙증맞은 머리통에 뽀뽀를…… 응?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에 눈이 휘둥그레져 있는데, 옆에서 에휴우우우, 하고 무척 긴 한숨이 들려왔다.
“……제가 이렇게 삽니다.”
좌우에서 한껏 애정을 과시하는 두 커플을 번갈아 살핀 늑대가 하소연했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덥석, 그를 안아 버리려는 찰나.
“이야기는 잘했나, 인간.”
금왕의 도톰한 꼬리가 내 허리를 감싸 왔다. 내 뒤에 앉은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도톰한 꼬리를 가볍게 조물거리자 어째서인지 다시금 늑대의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비록 금왕과 나는 커플이 아니었지만, 주위 커플들의 애정 행각에 시달리다 보니…… 이제는 그냥 누군가 둘이 같이 있는 것만도 꽤 부러운 모양이었다.
“수고했다.”
“감사합니다, 금왕.”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북극여우의 치료를 마친 금왕과 내가 떠날 준비를 마치자―사실 내가 금왕의 털이 복슬복슬한 목에 매달린 것이 다였지만―설왕과 북극여우, 북극곰이 차례로 금왕에게 인사했다. 앓아누웠던 북극여우를 회복시켜 준 데에 대한 감사였다.
북극여우는 다행히 큰 병은 아니었고, 조금 심한 감기였는데 금왕의 입김이 닿자 금세 나았다고 했다. 그렇지만 만난 김에 설국에 기거하는 금수들에 대한 소식을 보고하느라 조금 시간이 걸렸다고.
또 금왕과 설왕 두 왕끼리도 나눌 이야기가 있어 우리가 긴 이야기를 마칠 때쯤에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고 한다.
“안녕히 가십시오, 금왕. 조만간 또 뵙기를.”
마지막으로 북극 늑대가 금왕에게 인사했다. 좌에는 서로 허리를 꼭 끌어안은 설왕과 그 반려를, 우에는 북극여우를 품에 꼭 안은 북극곰을 두고 홀로 선 채로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 무척 피로해 보였다. 북극 늑대도 어디 짝이 없으려나……. 안타까워하고 있을 때였다.
“잘 가. 다음에 또 놀러 오고!”
설왕의 품에 안겨 있던 사내가 손을 흔들더니, 품에 안은 펭귄의 짤막한 날개를 흔들며 인사를 보탰다. 작게 파닥거리는 새끼 펭귄의 날개에 홀려 당장 달려가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겨우 이성을 부여잡고 금왕의 털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시선을 내려 북극여우를 살폈다. 그 탐스러운 꼬리털을 보자 다시 손끝이 간지러워졌지만 금왕의 털을 더 꽉 움켜쥐는 것으로 충동을 억눌렀다.
이 설국에 오기 전에 그렇게나 기대했던 새끼 펭귄과 북극여우를 만났는데 한 번도 쓰다듬지도 못했다는 사실이 무척 아쉬웠지만, 지금은 저렇게나 여우를 아끼고 사랑하는 연인(북극곰)이 곁에 있는데 다른 사람이 함부로 만지는 것도 실례일 것 같았다. 새끼 펭귄도 마구 끌어안기는 너무 작았고.
그래도 아쉬움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지만,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었다. 아직 내게는…… 흰고래가 남아 있었으니까!
‘㉦’
쐐애액―.
배웅을 받고서 곧장 설왕의 궁을 떠난 금왕은 처음 설국에 왔을 때처럼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때처럼 오래 달리지는 않았다. 그의 목을 꽉 움켜쥔 팔이 아주 조금 뻐근하다고 느꼈을 무렵. 그는 벌써 속도를 늦추고 있었다. 하지만 설왕의 궁을 벗어나 밖으로 나오자 날씨가 무척 추워서 나는 금왕의 목에 몸을 묻고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
“인간, 이번에는 정말 무작정 덤벼들면 안 된다. 자칫 잘못했다간 바다에 빠질 수도 있으니까.”
걸음에 가까운 느린 속도로 이동 중이던 금왕이 문득 앞발을 들어 내 등을 가볍게 두드리고는 염려스러운 듯 덧붙였다. 나는 걱정 말라는 듯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앞을 봐라.”
‘앞?’
설마 벌써 도착했나?!
“우와아아앗!”
깜짝 놀라서 앞을 보자마자 놀라 한껏 벌어진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뀨우―.
왜 조금 전 금왕이 내게 당부했는지 알 것 같았다. 저 아래, 빙하가 끊기고 나타난 바다에서 깜찍한 소리로 울며 뛰노는 흰고래 모자를 보자 마자, 금왕의 당부만 아니었다면 당장 저 얼음 가득한 바다로 뛰어들고 싶었다.
예전에 돌고래에 아주 푸욱, 빠졌던 적이 있었다. 돌고래가 주인공인 영화를 보고서였는데, 영화 속에서 본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수도 없이 수족관을 찾고, 사진을 모으고, 영상을 찾아 헤매며 제발 한 번이라도 안고 싶다고. 돌고래 조련사의 꿈까지도 가졌었다. 한데, 흰고래의 귀여움은 절대 그 못지않았다.
눈은 돌고래와 거의 비슷하면서 돌고래보다 입이 훨씬 짧고 전체적으로 동그랗게 생겨서 오히려 오밀조밀 더 깜찍한 맛이 있었다. 물론 돌고래의 날렵한 생김 또한 저만의 매력이 있으니 뭐가 더 낫다고 비교할 건 아니지만.
뀨, 뀨우―.
헤엄을 치며 엄마에게 장난을 거는 새끼도 결코 작은 크기는 아닐 텐데 배는 더 큰 엄마 고래 옆에 있으니 유독 앙증맞아 보였다. 아직 탈피를 거치지 않아 완전한 흰색이 아닌 밤회색이었는데, 순백의 빙하 앞에서 은은히 제 빛깔을 뽐내는 매끄러운 피부가 정말 예뻤다. 게다가 기분 좋은 듯한 소리를 내며 벌린 입 안에 앙증맞게 도도도 나 있는 쪼끄만 이빨과 눈을 일자로 만들어 웃는 모습이 무척이나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엄마 고래 역시 귀여우면서도, 어딘지 자애롭고 다정해 보였는데 이제 막 헤엄의 재미를 알았다는 듯 열심히 물장구를 치며 수시로 물 밖으로 고개를 내미는 새끼는 그저 귀엽고 귀여웠다. 정말 못 견디게. 당장 물 안에 뛰어 들어가 꼭 끌어안고 싶어 미칠 것 같이. 엄마 옆을 맴돌며 무언가 알아들을 수 없는 고음을 내며 우는 모습을 보자 더욱.
“아, 아…….”
눈앞이 아찔하도록 치솟는 충동에 금왕의 목에 매달린 채로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 내가 불안했던지 금왕이 앞발을 들어 나를 단단히 붙들었다.
“이 녀석, 진정해라.”
“마, 만져 봐도 돼요?”
금왕의 발에 의지할 수 있게 되자 그에게 매달려 있던 손을 떼어 벌써 아래로 뻗을 준비를 하며 물었다. 그리고 애원하듯 열렬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앞서 북극여우를 못 만졌으니 제발 저 흰고래만이라도! 하고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랐다. 하지만 금왕의 대답은 내 기대와 달랐다.
“아직 너무 어리니, 손은 대지 않는 게 좋을 것 같구나.”
“어? 앗, 아, 네…….”
기대로 한껏 가슴이 부풀었는데 거절을 당하자 순간 당황했다가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무룩한 기분에 절로 어깨가 축 늘어졌다.
“인간.”
금왕이 조금 미안한 듯 나를 불렀지만, 나는 예의로라도 괜찮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말없이 한참 풀 죽어 있다가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다시 번쩍 고개를 들었다.
“저, 금왕님.”
금왕이 무슨 일이냐는 듯 푸른 눈을 아래로 굴러 나를 내려다봤다. 그런 그에게 나는 귓속말을 속삭였다. 금왕이 처음에는 움찔, 몸을 굳혔다가 이윽고 자신의 두툼한 꼬리를 휘익 내 앞으로 내밀었다.
뀨―.
저 아래에서 더없이 깜찍한 소리를 내며 웃고 있는 새끼 흰고래의 모습에 침을 꿀꺽 삼킨 나는, 금왕의 도톰한 꼬리를 움켜쥐며 당장 저 빙해로 뛰어들어 흰 고개를 꼭 끌어안고픈 욕구를 참아 냈다. 꼭꼭. 조물조물. 고래를 향한 사랑스러운 마음을 손끝에 모두 모아 힘껏 발산했다.
“윽.”
내 손길이 여느 때보다도 훨씬 극적이었는지 금왕이 낭패 어린 신음을 내뱉었다. 그러나 나는 손안의 꼬리를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새끼 펭귄, 북극여우, 새끼 벨루가까지 다 만지는 데 실패했지만, 이 꼬리만큼은 제 것인 양 마음껏 음미하고야 말겠다는 집착 아닌 집착으로 한참이나 그를 조물거렸다.
‘㉦’
그만 고래 구경을 끝내고 아프리카로 돌아가자는 금왕에게 내가 몇 번이나 ‘조금만 더’를 외친 덕분에, 우리가 다시 아프리카로 돌아왔을 무렵에는 아름다운 노을이 하늘을 물들이는 중이었다.
아프리카에 도착하기 전까지 정신없이 내달리던 금왕은 노을을 감상하듯 걸음을 늦췄고, 설국의 추위를 견디느라 그의 털 아래에 폭 파묻혀 있던 나도 고개를 들었다. 그러다 아프리카의 높은 기온에 이제는 제법 덥다고 느껴지는 털에서 벗어나 엉금엉금 금왕의 등으로 기어오르려고 했다.
“아, 감사합니다.”
내 의도를 알아차린 금왕이 걸음을 멈추고 앉아 꼬리를 이용해 나를 올려 주었다.
‘우와.’
나도 모르게 탄성이 터져 나왔다. 금왕이 나를 올려 준 곳은 등이 아니라 그보다 조금 높은 곳에 있던 목덜미였다. 아직 금왕이 뒷다리를 접고 앉아 있었던 터라 여느 때보다 더 높은 위치에 오른 셈이어서 저 아래 풍경이 훨씬 드넓게 보였다. 게다가 넓은 등에 비해 폭이 좁고 또 경사도 있어서 자연스레 두 다리를 쫙 펼치고 앉자 마치 내가 거대한 흑호 조종사가 된 것 같은 엉뚱한 기분마저 느껴져 재미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곳은, 바로 눈앞에 솜털이 보송보송한 동그란 귀가 까딱이는 모습이 보인다는 점에서 최고의 명당자리였다. 두 귀에 시선을 고정한 나는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금왕이 눈치채지 못하게 살그머니 손을 뻗었다. 그리고 조심스레 손끝을 가져가자, 금왕이 예민하게도 바로 움찔 놀라며 귀를 까딱거렸다. 그에 덩달아 놀라 손을 뗐다.
“죄, 죄송해요.”
혹시 걷고 있는데 방해해서 화가 났을까 싶어서 서둘러 사과했다. 하지만 문득 금왕이 걸음을 멈추더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네가 사과할 일이 아니다.”
“네?”
이해할 수 없는 대답에 반문했지만, 금왕은 설명 대신 다시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
“인간.”
왜인지 미안한 기분이 들어 시무룩하니 그의 목덜미만 끌어안고 있자 금왕이 나를 불렀다.
“네.”
“귀를 만지고 싶으면 만져도 된다. 대신, 예고를 하고. 안 그러면…… 놀라니까.”
뒤늦게 화를 내는 게 않을까 긴장했지만 금왕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중간에 묘한 침묵이 있기는 했지만, 아무튼 다정한 그 말에 나는 씩씩하게 대답했다.
“네! 그럼, 조금만 만질게요!”
언제 축 처졌었냐는 듯 어깨를 번쩍 들어 올리며 손도 함께 들었다. 내 손의 목적지는 당연히 금왕의 동그랗고 뽀송뽀송한 귀였다.
우리가 지난 며칠 동안 머물던 언덕에 도착했을 때는 벌써 땅거미가 지고 하늘에도 어둠이 스멀스멀 밀려드는 중이었다.
“금왕님, 감사합니다. 덕분에 오늘도 정말 행복한 시간을 보냈어요.”
오늘 종일 신세를 진 금왕에게서 내려오자마자 꾸벅 고개를 숙였다.
“즐거웠다니 다행이군.”
금왕은 대수롭잖은 듯 대답했지만 나는 한 번 더 고개를 숙여 보였다. 온종일 나를 태우고 피곤했을 것을 생각하면―물론 금왕은 내 무게를 거의 느끼지 않았던 것 같지만―, 이리 고개만 숙여 인사한다는 게 미안할 정도라 진심으로, 깊은 감사의 마음을 담아서 꽤 오래도록.
“참. 이것.”
굽혔던 몸을 바로 세우는데 금왕이 난데없이 자신의 뒷다리를 내밀었다. 순간 눈앞에 나타난 둥글고 도톰한 발에 온통 시선을 빼앗겨 침을 꼴깍 삼키고 있자 금왕이 못 말린다는 듯 나지막한 한숨을 내뱉고는 조금 더 가까이 발을 내밀었다.
‘어, 뭐지?’
정신을 차리고 다시 살펴보았더니 금왕이 내민 뒷다리에 긴 끈으로 묶인 작은 가방이 있었다.
“이게, 뭐예요?”
곧바로 매여 있던 가방을 풀며 물었다.
“설왕의 반려가 주는 선물이다.”
“아?”
나는 손에 들린 가방을 잠시 내려다보았다. 금왕의 두꺼운 다리에 매여 있을 때는 작아 보이던 가방이 내 손에 들리자 제법 컸다. 입구 쪽에 끼워진 긴 줄로 천을 여닫는 단순한 구조의 가방이었는데, 줄을 힘껏 당겨 리본을 묶어 놓았는데도 입구가 조금 열릴 정도로 빵빵하니 채워져 있었다.
“……!”
내용물이 궁금해 서둘러 가방을 열었다가 잠시 눈이 휘둥그레졌다. 안에서 나온 것은 펭귄 인형이었다. 뽀얀 눈의 색과 질감을 가진 채 새끼 펭귄의 귀여운 생김을 그대로 본떠서 만들어진 것으로, 실제와는 또 다른 매력이 있었다.
게다가 앞서의 소파처럼 특수한 눈인지 전혀 차갑지 않았고, 손에 닿았음에도 녹지 않았다. 하긴, 평범한 눈이었다면 금왕이 아프리카에 도착하자마자 벌써 녹아내려 지금 내 손에 들려 있을 수도 없을 터였다.
팔랑―.
펭귄 인형에 정신이 팔려서 그만 쥐고 있던 가방을 놓쳤는데, 안에서 작은 종이 하나가 튀어나와 허공을 날다 바닥에 떨어졌다. 재빨리 주워 들자, 쪽지를 채운 간결한 메모를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 아가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아서. 선물! 내가 만든 거라 오래는 못 가고 하루 지나면 녹을 거야. 뭐, 펭귄도 사실은 금왕의 백성이니 인형이 필요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응?”
배려가 담긴 선물에 한껏 고마운 마음으로 쪽지를 읽어 내리다 말고 멈칫했다.
‘펭귄도 금왕의 백성이니? 음, 펭귄도 금수에 속하니까 이건 맞고. 그런데 그렇다고 왜 이 인형이 필요가 없어지는 거지?’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내용에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품에 안긴 눈 인형을 이리저리 흔들며 다시 살폈다. 하지만 역시 알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혹시 금왕은 알까 싶어서 고개를 드는데, 아니, 고개를 들 것도 없이 옆으로 돌리자 그가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내가 본 쪽지를 함께 들여다보고 있었다.
“금왕님은 이게 무슨 뜻인지 아시겠어요?”
금왕의 진지한 표정에 뭔가 있겠구나 싶어 물음을 던졌는데, 그는 대답 대신 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금왕님?”
대체 왜 그러나, 의아해하는데 금왕이 갑자기 후우, 긴 한숨을 내쉬었다.
“다들…… 너무 쉽게 생각하는군.”
금왕이 대답 대신 뜻 모를 중얼거림을 흘리고는 휙 고개를 돌렸다. 덕분에 더욱 의문에 휩싸였지만 어쩐지 무거워 보이는 그의 뒤통수에 차마 더는 물어볼 수가 없었다.
‘㉦’
설국에서의 경험이 꽤 인상적이었는지 그날 밤 꿈에 설왕의 반려가 나왔다. 실제와 다름없이 환히 웃고 있는 얼굴의 그가 현실에서와 다르게 내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
‘아직도 부모님 생각에 슬픈 건, 그 슬픔을 덮어 줄 다른 가족이 없기 때문이야. 그 가족을 찾아!’
그는 진심 어린 목소리로 그리 호소했고, 나는 그런 그를 멀뚱히 쳐다보기만 했다.
‘아니, 벌써 찾았나? 이렇게 옆에 있으니까!’
그는 어느새 내게서 멀어져 언제 나타났는지 알 수 없는 설왕과 서로 꼭 끌어안고 있었다. 서로 허리를 감싸 안은 채 눈을 마주한 두 사람은 더없이 행복해 보였다. 괜히 흐뭇한 미소를 짓는데 문득, 그가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방금까지만 해도 선명하게 눈에 들어오던 그의 얼굴이 갑자기 보이지 않았다. 까만 안개가 낀 듯 어렴풋하고 멀었다.
‘하지만, ……한다면.’
들려오는 목소리도 무척 아득해졌다. 그리고 이전의 명랑한 목소리와 다르게 왠지 무겁고 심각했다. 그게 꼭 눈앞의 까만 안개 때문인 것만 같아 손으로 안개를 물리치는데 설왕과 그 반려가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대신 불안한 어둠만이 회오리치듯 내 주변을 감싸며 피어올랐다.
‘그래서 충고해 주자면, 만약 네가 진심으로 이쪽 세계로 올 게 아니라면 얼른 접고 가 버리는 게 좋아. 꿈이 달콤하면 달콤할수록 깨어났을 때 더 슬프거든. 그 달콤함에 빠져서 헤어나길 미루고 미루다 보면, 결국 더 큰 괴로움을 만들고 말아.’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는데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꿈이 달콤하면 달콤할수록 깨어났을 때 더 슬프거든. 그 달콤함에 빠져서 헤어나길 미루고 미루다 보면, 결국 더 큰 괴로움을 만들고 말아.’
‘그 달콤함에 빠져서 헤어나길 미루고 미루다 보면, 결국 더 큰 괴로움을 만들고 말아.’
‘결국 더 큰 괴로움을 만들고 말아……!’
목소리가 어딘지 모를 벽에 부딪쳐 계속해 메아리쳤다. 그러면서 마치 나를 옥죄어 오는 것만 같은 느낌에 심장이 쿵쿵, 불안하게 뛰었다. 불안은 이내 형체 없는 공포가 되어 나를 엄습했다. 그에 붙잡히지 않으려 한껏 허우적거리며, 나는 깨어났다.
“헉!”
비명과 함께 번쩍, 눈을 뜨자 예전에 본 적 있는 두툼한 꼬리 그늘이 눈가에 드리워져 있었다. 하지만 처음에는 강렬한 역광에 그저 검은 형체가 눈앞에 떠 있는 것만 같아서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보지 못했다. 잠시 시간이 흘러서야 그것이 검은색과 은빛 줄무늬가 뒤섞인, 두껍고 긴 막대 형태로 상당히 익숙한 생김이라는 걸 깨달았다.
“안 그래도 깨울까 하던 참인데, 잘 일어났다. 악몽이라도 꾼 건가?”
후우, 나도 모르게 안도의 숨을 내뱉는 찰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자 걱정이 가득한 금왕의 눈동자가 보였다.
“괴로워하더군. 식은땀까지 흘리고.”
금왕이 그늘을 드리워 주던 꼬리를 내려 내 이마를 톡톡 두드렸다.
“아, 괜찮아요. 제가 할게요.”
금왕의 뽀송뽀송한 꼬리가 내 땀으로 더러워질까 봐 서둘러 그를 말리고는 손으로 이마를 훔쳤다. 내 생각보다 더 많은 물기가 손끝에 묻어났다.
‘진짜, 악몽을…… 꿨나.’
멍하니 눈을 깜빡이며 깨기 전 꾸었던 꿈을 떠올려 봤다. 무언가 굉장히 두려웠던 것은 기억이 나는데, 그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정체를 알 수 없는 공포 속에서 헤맨 무서운 느낌만이 손끝에 남아 있을 뿐이었다. 왠지 손끝이 굳어 가는 기분에 가볍게 주먹을 말아 쥐었다.
그러다 여전히 걱정스레 나를 바라보는 금왕을 깨달았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잠기운이 남아서 그렇다고 대답하고는 서둘러 금왕의 몸에서 내려와―물론 어제도 나는 그의 품 안에서 잠들었었다―아래의 강가로 내려갔다. 지난번 표범과의 일이 있은 후라, 금왕도 함께였다.
첨벙.
호수에 도착해 세수하려고 물에 손을 집어넣다 말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직도 부모님 생각에 슬픈 건, 그 슬픔을 덮어 줄 다른 가족이 없기 때문이야. 그 가족을 찾아!
전혀 기억나지 않았던 꿈의 일부가 순간 갑자기 떠올랐다. 누가 말한 건지, 어느 맥락의 이야기인지는 불분명했다. 하지만 꿈에서 들었던 이야기라는 기시감만은 명확했다.
‘가족을……, 찾으라고?’
-아니, 벌써 찾았나? 이렇게 옆에 있으니까!
꿈에서 들은 말을 가만 곱씹어 보는데 문득 또 다른 기억이 떠올랐다. 옆?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던 나는 아, 나지막이 탄성을 토해 냈다.
“왜 그러나?”
나와 함께 강가로 내려와 물을 마시던 금왕이 물가로 몸을 낮춘 그대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두 앞발을 가슴 앞에 앙증맞게 모으고 있는 모습이 너무 귀여워 빤히 바라보는데 다시 꿈에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한다면.
앞의 것과 달리 선명하지 않은 발음에 미간을 찌푸리는데 목소리가 계속됐다.
-그래서 충고해 주자면, 만약 네가 진심으로 이쪽 세계로 올 게 아니라면 얼른 접고 가 버리는 게 좋아. 꿈이 달콤하면 달콤할수록 깨어났을 때 더 슬프거든. 그 달콤함에 빠져서 헤어나길 미루고 미루다 보면…….
이제 더 이상 그 목소리를 들을 필요가 없어졌다.
‘……결국 더 큰 괴로움을 만들고 말아.’
벌써 모든 것을 기억해 낸 나는 목소리보다 먼저 다음 말을 이었다.
‘나…… 대체 왜 이런 꿈을 꾼 거지.’
조금 당혹스러운 기분에 스스로에게 물었다. 대학교 1학년 때 들은 한 교양 수업에서 꿈은 철저한 자기 내면의 반영이라서, 의식했든 의식하지 못했든 그 모든 것은 결국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바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배운 적이 있다.
이토록 당혹스러운 걸 보면, 분명 내가 의식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무의식중에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건가? 근데 새로운 가족을 찾는 이야기는 그렇다 쳐도, 그 꿈 이야기는 대체…….
“인간?”
무언가 답답하고 이질적인 느낌에 휩싸여 혼란스러워하고 있는데 금왕이 나를 불렀다. 화들짝, 정신을 차리자 이전보다 한껏 가까워진― 바로 코앞에서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응시하는 금왕이 보였다. 그 거리가 되자, 조금 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아마도 물을 마실 때 묻었는지 수염과 입 주변, 턱 아래쪽의 털이 젖어 물방울이 송송 매달린 것이 눈에 들어왔다.
콧잔등이나 볼, 이마와 같이 얼굴의 다른 부분은 보송보송한데 그 세 부위만 물에 뭉쳐 살짝 처져 있는 모습이 또 색다른 매력이 있었다. 게다가 그 얼굴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보는 금왕이라니……!
“우왓, 귀여워!”
순간 이성이 날아가며 금왕에게 달려드느라 의미를 알 수 없는 꿈에 대해서도 어느덧 잊어버렸다.
그날 오후, 금왕의 등에서 뒹굴며 꼬리를 조물거리고 있는데 백호를 비롯해 설표, 사자, 치타, 퓨마, 재규어들이 찾아왔다. 각자, 하지만 거의 비슷한 시간에 맞춰 모습을 드러낸 그들은 늘 그렇듯 우선 금왕에게 자신들이 맡은 임무의 결과나 자신이 속한 동물 무리의 소식을 전했다.
그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또 금왕의 체면을 더는 망칠 수 없었기 때문에 나는 서둘러 쥐고 있던 꼬리를 놓아주고 근처의 나무 그늘 밑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나무에 등을 기대고 앉아 금왕 앞에 옹기종기 모인 맹수들을 바라보며 열심히 눈 보신을 했다.
“인간님. 설국에 갔다 왔다면서?”
제일 먼저 보고를 마친 설표가 인간형의 모습으로 내게 다가왔다.
“네?”
“어? 간 거 아니야? 금왕께서 다녀왔다고 하던데.”
설표가 어깨 너머로 엄지를 내밀어 금왕을 가리켰다.
“아, 네. 그건 그런데…… 저기…… 인간, 님이라니요?”
나는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내 옆에 자리를 잡고 앉는 설표를 바라보았다.
그저께 봤을 때는 분명 인간이라고만 불렀는데 왜 갑자기…….
의아한 눈길을 보냈지만 설표는 대답 대신 물끄러미 나를 들여다보더니 이내 별것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뭐, 우리도 나름대로 마음의 준비 같은 게 필요하니까 말이야. 미리 조금씩 익숙해지도록 연습해 두는 거지.”
“네?”
준비? 연습? 여전히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설표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흐응, 하는 콧소리를 내며 의미심장한 미소만 지어 보일 뿐이었다.
“여, 인간님.”
얼마 지나지 않아 사자도 우리에게 다가왔다. 조금 전 설표에게서 들은 것과 같은 호칭에 내가 당혹스러운 기분을 느끼기도 전에 퓨마, 치타, 백호, 재규어가 차례로 그 뒤를 이으면서 금세 주위가 시끌시끌해졌다.
“설국에 갔다 오셨다면서?”
“설국에 가셨으면 설왕의 반려도 뵀겠군요?”
“설왕의 반려도 인간인 건 아십니까?”
“야, 그 설왕이 반려라니. 지금도 안 믿긴다.”
“하긴, 처음 그 얘기 들었을 때 진짜 깜짝 놀랐는데……. 근데 이제는 그것도 남의 일만은 아니라는 게 더 놀랍군.”
“그러게 말이야. 설왕도 설왕이지만 그보다는 우리 금왕의 일이 더…….”
처음에는 내게 질문을 던지더니 곧 저들끼리 대화를 이어 나갔다. 덕분에 대답할 타이밍을 놓쳐서 입을 다물고 정신없이 그들을 둘러보고 있는데 갑자기 비명 같은 고성이 들려왔다.
“꺅! 제발, 제발이요. 제발 이러지 마세요. 제발 가지 마세……!”
왠지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멀지 않은 언덕 너머에서 낯익은 미어캣이 점점 모습을 드러냈다. 한데 경사를 타고 오르는 미어캣의 앞에, 그보다 먼저 모습을 드러낸 이가 있었다. 울먹이는 얼굴로 애원하는 미어캣을 도톰한 꼬리에 매달고 질질 끌고 오다시피 하는, 팔랑거리는 큰 귀가 무척 귀여운 녀석은 정식 명칭 페넥 여우, 하지만 그보다 더 유명한 별칭인 사막 여우로 주로 불리는 동물이었다.
“와아.”
“윽.”
“이런.”
“엑.”
“헉.”
“큭.”
생각지 못한 사막 여우의 등장에 감탄을 토하는데 옆에서 무척 다채로운 신음이 쏟아졌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어째선지 맹수들이 다들 어두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별다른 신음이 없던 재규어조차 평소의 냉정하던 얼굴에 근심과 거북스러움이 가득했다. 그런 그를 비롯해 맹수들이 긴장한 눈으로 살피는 곳에는, 당연하게도 방금 모습을 드러낸 사막 여우가 있었다.
사막 여우에게 시선을 고정한 건 맹수 대표들만이 아니었다. 우리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여느 때처럼 언덕 아래를 내려다보던 금왕도 어느새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조금 놀란 얼굴을 하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 평소 보지 못했던 금왕의 당황한 모습에 정신이 팔려 나는 새로 나타난 사막 여우가 내 앞으로 다가오고 있음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그 소문의 주인공이 이 인간이냐?”
내 앞에 멈춰 선 사막 여우가 물었다. 의외로 깜찍한 외모와 어울리지 않는 노숙한 말투라고 생각했지만 사막 여우의 미모에 홀려 그 사실은 금세 잊었다. 내 무릎 높이도 안 되는 몸에 내 주먹보다도 훨씬 작은 얼굴, 정말 팔랑거리며 날 수도 있을 것 같이 큰 귀에 여우 특유의 도톰한 꼬리. 무엇보다 나를 가만 올려다보는 반짝반짝 빛이 나는 까맣고 촉촉한 눈동자…….
“아아, 귀여워!”
황홀감에 취해서 나도 모르게 손을 뻗은 순간이었다.
“인간, 잠……!”
금왕의 다급한 외침과 동시에 찰싹! 날카로운 소리가 공기를 울렸다.
“감히 어딜! 버릇없는 인간 같으니!”
앙증맞을 정도로 작은 발을 가지고 무척이나 매섭게 내 손을 쳐 낸 사막 여우가 잔뜩 불쾌한 목소리를 냈다.
‘어?’
“아아. 이런…….”
생각지 못한 상황에 조금 멍해져 있노라니, 여우의 꼬리에 매달려 온 미어캣이 가벼운 탄식과 함께 이마를 짚었다. 이윽고 내 옆으로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보지 않아도 그것이 금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염왕(炎王).”
집채만큼 거대한 금왕이 내 무릎 높이보다 작은 사막 여우를 향해 한껏 몸을 낮추며 예를 갖췄다. 절로 눈이 휘둥그레졌다.
‘여, 염왕? 이 여우가……?’
“무례한 것. 사과조차 않는군.”
여우가 그 크고 순진해 보이는 눈을 가늘게 좁히며 나를 노려봤다.
“아, 그…….”
이제라도 사과하려고 했지만 당황해서인지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인간이라 몰라서 그런 것이니 너그럽게 용서해 주십시오.”
더듬거리는 나를 대신해 금왕이 나서 주었다. 그에 여우는 흥, 코웃음 쳤다.
“하긴, 인간들이 좀 멍청해?”
비웃음을 띤 얼굴로 중얼거린 여우가 가볍게 발을 굴러 공중제비를 돌았다. 그러자 그 작은 몸체에서 환한 빛이 터져 나오더니 바닥에 착지할 때는 작은 아이의 형상이 되었다. 여우일 때의 털색과 같은 담황갈색 머리칼이 귓가에서 찰랑거리고, 뽀얀 피부와 큰 눈이 인상적인 8살 정도의 남자아이였다.
“인간의 몸 따위로 변신하고 싶지는 않지만, 이 편이 얘기하기는 편하겠지.”
여우가 제 몸을 이리저리 살피며 못마땅하다는 듯 투덜거렸다. 그러다 쯧, 혀를 차며 어쩔 수 없지 하고 체념한 여우가 나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얼굴도 멍청해 보이는군. 인간, 그 멍청한 머리로 네가 민폐인 건 아냐?”
무척이나 공격적인 말투에 싸한 바람이 내 주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염왕.”
“시끄러워.”
얼어붙은 내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금왕이 제지하고 나섰지만 염왕은 그조차 쌀쌀맞게 뿌리쳤다.
“이 인간의 존재가 네 일에도 영향을 미칠 정도라면서. 그게 민폐지 뭐야. 저는 민폐인 줄도 모르면 더 민폐고. 게다가 네가 이 인간을 봐 주는 게 네 아이 중 하나인 삵을 구해 준 보답이었다면서. 그 보답이면 벌써 다 한 거잖아? 그 정도쯤 금왕인 네가 하루만 할애해서 보살펴 줘도 충분히 보답하고도 남아. 뻔뻔하게 대체 그깟 걸로 며칠을 우려먹을 작정인 거야?”
빠르게 불만을 쏟아 낸 여우가 눈살을 찌푸렸다.
“저어…….”
벌써 몇 번이나 마주하게 된 그 싸늘한 시선에 겨우 적응한 나는 드디어 입을 열 수 있었다. 그런 나를 여우, 아니, 염왕이 어디 한번 말해 보라는 듯 날카롭게 훑었다. 소년은 분명 작은 키였고, 무척 귀여운 얼굴이었는데도 시선이 닿자 나도 모르게 흠칫 물러날 만큼 강한 위압감을 풍겼다.
“말할 거면 빨리 말해. 귀찮게 시간 끌지 말고. 그 전에 참고로 말해 주자면, 난 무척 인간을 싫어해.”
기껏 용기를 갖고 말을 꺼냈지만 노골적으로 적의를 드러내는 염왕의 모습에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어졌다. 그사이 염왕은 거침없이 말을 이어 나갔다.
“인간이 싫은 점은 수도 없이 많지만, 가장 싫은 건 이기심이야. 본래 자연은 필요한 만큼만 취하게 되어 있어. 모든 시스템이 그렇게 맞춰져 있지. 그를 따라 인간이 아닌 모든 생명체는 자신이 필요한 만큼만 취하며 살아가. 필요한 만큼만 사냥하고, 필요한 만큼만 먹어.”
“…….”
“근데, 너희 인간들은 필요도 없는데 사냥하고 버리지. 아나? 세상에서 배가 불러도 멈추지 않고 쓸데없이 음식을 먹어 없애는 건 너희 인간과 돼지뿐이라는 거. 돼지는 먹어 살찌우는 게 일이니 그렇다지만, 너희 인간들은 제 욕심에 그렇게 먹어 대고 살찌우고서 또 살을 빼겠다고 아등바등하니 더 우습지.”
염왕이 냉소를 머금었다. 하나 그의 시선은 더욱 차가워졌다.
“하긴, 그런 식의 이기심은 차라리 나아. 식욕은 어쩔 수 없는 욕구라고 쳐. 근데 너희 인간들은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다른 금수들을 아무 가책 없이 해치지. 알아? 저기 있는 백호도 희귀하다며 너희 인간들이 잡아가려 했었어. 필사의 노력으로 도망은 쳤지만 그때 입은 상처로 다 죽어 가는 걸 금왕이 겨우 구해서 금수 대표로 만든 거야.”
염왕이 내 뒤에 서 있는 백호를 눈짓했다. 백호는 머쓱한 얼굴로 흠, 헛기침을 삼키며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부정은 하지 않았다. 그런 그를 나도 모르게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염왕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 옆의 퓨마도, 사자도, 치타도 다들 인간들이 제멋대로의 이유로 사냥하려던 동물들이지. 먹이로 사냥하려 했다면 나도 그렇게 화가 나진 않았을 거다. 특히나 설표는 껍질이 벗겨지기 직전 가까스로 탈출했다. 또 녀석을 아는지 모르겠지만 늑대 대표는 인간에게 공격당해 한쪽 눈을 잃고 헤매던 걸 금왕이 치료해 대표로 만들었고.”
염왕의 말을 따라 시선을 옮기자 맹수 대표들이 차례로 내 시선을 피하거나 곤란한 듯 어색하게 웃었다.
“이외에도 금수의 대표라는 것들은 하나같이, 너희 인간들에게 죽을 뻔했거나 다쳤던 녀석들이다. 그랬기에 더욱 인간을 공격하지 말라고 제 무리를 가르치지. 자신들이 다쳐 봤기에 인간이 얼마나 무서운지 잘 아니까. 그런데도 저 녀석들은 쓸데없이 순진해서 그때의 일은 다 잊고, 혹은 넌 다를 거라 믿으며 친절을 베푸는 모양이다만, 난 믿지 않아. 난 금왕처럼 관대하지 않으니까. 내가 믿는 건 한 번의 양심이 아니라, 평생 양심을 지킬 녀석뿐이다.”
“염왕, 그만…….”
“난 정말 인간이 싫어. 그래서 내 땅 위에서 거의 몰아냈지. 여기도 한번 그래 봐? 나야 내 땅이 늘어나면 좋지.”
“염왕.”
금왕이 거듭 만류했지만 염왕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내가 인정한 인간은 오직 설왕의 반려가 된 그 아이뿐이야. 아니, 이제 인간도 아니군. 하지만 그래서 그 아이를 인정한 거다. 그 아이는, 설왕을 위해 자신의 모든 걸 버리고 그의 반려가 되기로 했으니까. 그런데 넌 뭐지? 너는 처음 삵을 구해 준 이후로 무얼 했지? 설마 그냥 인간 냄새나 폴폴 풍기며 금왕의 시간만 축내는 게 전부인 거냐? 반려도 아니면서 무슨 자격으로 그런 뻔뻔한 짓들을 벌이는 거지?”
“어…….”
갑자기 반려에 대한 이야기로 돌변한 주제를 따라가지 못하고 당황한 눈길을 보내는데, 염왕이 단호한 목소리로 쐐기를 박았다.
“하다못해 네가 금왕의 반려가 된다면, 그래서 그를 도우며 평생 양심을 지키며 살아간다면 나도 다시 생각해 볼 일이지만, 인간인 채로라면 넌 금왕에게 방해꾼이고 민폐 덩어리일 뿐이다. 그래도 염치가 있다면, 혹시라도 네가 금왕의 반려가 될 게 아니라면, 알아서 떠나야지. 당장 돌아가!”
나는 염왕이 오기 전처럼 나무 그늘 아래 멍하니 앉아 있었다. 하지만 이전과 달리 내 곁은 시끌벅적하지 않고 고요했다. 염왕의 뜻하지 않은 과거 누설에 곤란해하던 맹수들이 어색한 공기를 견디지 못하고 슬그머니 자리를 떠난 덕분이었다. 하지만 내 대답을 기다리는 듯 멀리 가지는 않았다.
나는 그들이 물러나 줘서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저것 혼자서 생각하고 싶은 게 많았으니까.
-이 인간의 존재가 네 일에도 영향을 미칠 정도라면서. 그게 민폐지 뭐야. 저는 민폐인 줄도 모르면 더 민폐고.
하지만 이 이야기는 도저히 답을 알 수가 없어서 맹수들이 떠나기 직전 붙잡고 물어봤다. 맹수 중 가장 진지하고 성실한 백호에게.
-아, 그게…….
백호는 여느 때답지 않게 머뭇거렸다. 하지만 내가 대답을 듣기 전에는 절대 놓아주지 않을 것처럼 옷을 꽉 움켜쥐자 별수 없이 말해 주었다. 내가 금왕과 함께 지내게 되면서 거의 매일같이 맹수 대표들의 방문을 본 것은 평범치 않은 일이라는 사실을.
본래는 그렇게 대표들이 금왕을 찾아와 보고하지 않고, 금왕이 직접 모든 금수를 두루 살피러 다녔다고 한다. 한데 내가 있어 그러지 못하니 금왕 대신 각 금수의 대표들이 주변을 살피러 다니며 그 내용을 보고하러 온 것이었다. 그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내가 얼마나 생각 없이 큰 폐를 끼쳤는지 알 수 있었다.
비록 백호는 전혀 힘들지 않은 일이었고, 평소 금왕이 워낙 잘 돌보아 주어 문제도 없었다며 위로했지만 나는 내 잘못을 스스로 인정해야만 했다.
염왕의 말은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내가 이기적이었고 욕심이 많았다. 애초에 내가 금왕의 곁에 머무를 수 있게 된 사건인 삵과의 만남은, 그 결과로 빌었던 소원은 맹수들을 원 없이 만지는 것에서 그쳐야 옳았다.
금왕이 먼저 내가 소원했던 아프리카로, 나를 이 꿈의 나라로 데려와 준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해도 염치가 있으면 며칠씩이나 이렇게 당연한 듯 머무르지 않고 돌아갔어야 했다. 그때 금왕의 또 다른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래도 염치가 있다면, 혹시라도 네가 금왕의 반려가 될 게 아니라면, 알아서 떠나야지. 당장 돌아가!
‘반려라…….’
그동안 여러 가지 상황과 의미로 반려, 라는 단어를 꽤 여러 번 들어왔다. 전에 미어캣과 문조를 처음 만났을 때 나와 그 단어가 간접적으로 연결될 뻔도 했다. 그러나 그게 내게 직접 겨누어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내가…… 금왕의 반려가 되다니, 그런 건…….’
전혀 생각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이전에 금왕과 짝지어질 때는 그저 나를 놀리는 우스갯소리 정도로 생각해 쉽게 넘겼는데, 이렇게 진지하게 그 말과 짝지어지자 무척 당혹스러웠다.
‘금왕의 반려, 금왕의…….’
나는 저 멀리에 앉아 마음이 복잡한 얼굴로 염왕과 토론 중인 금왕을 가만 바라보았다. 다리를 전부 굽혀 몸을 낮췄어도 앞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은 사내아이의 수십 배에 달하는 큰 흑호의 모습이 눈에 가득 찼다.
저기 있는 저 어린 소년, 아니, 염왕은 내게 저 흑호의 반려가 되라고 말한 것이다. 바로 저 집채만 한 호랑이, 그것도 나와 같은 수컷의 반려가 되라고…… 아니, 이미 설왕과 그의 반려를 만난 이상 금왕과 내가 종족이 다르고, 성별이 같은 건 문제가 되지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내가 인정한 인간은 오직 설왕의 반려가 된 그 아이뿐이야. 아니, 이제 인간도 아니군. 하지만 그래서 그 아이를 인정한 거다. 그 아이는, 설왕을 위해 자신의 모든 걸 버리고 그의 반려가 되기로 했으니까.
염왕은 분명 그렇게 말했었다.
‘모든 걸 버리고…….’
나는 어제 만난 설왕의 반려를 떠올렸다. 그는 활짝 웃는 얼굴로 설왕의 반려가 되어 좋은 점을 내게 설명했다. 그리고 부록이라는 듯 안 좋은 점도 없지는 않다고, 아주 가볍게 말했다. 그래도 자신은 포기할 게 적어서 괜찮았다고. 하지만 정말 그렇지는 않았으리라. 아무리 가진 게 없더라도, 아니, 인간이기를 포기한다는 것 자체가. 그가 가진 모든 것을 포기한 것과 다름없는 일이었다.
그랬으면서도 그는 아무렇지 않은 듯, 아니, 무척 행복하다고 웃었다. 한때는 죽음까지 생각했을 정도로 힘들었는데, 설왕과 함께하는 이제는 한 점의 그늘도 없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를 위해서 인간이 아니게 된 것 정도는 상관도 없다는 듯.
그의 눈부신 미소 끝에 나는 설왕과 함께하는 그의 모습도 머릿속에 그려 볼 수 있었다. 서로를 끌어안고 행복한 듯 웃고 있는…….
어라, 내가 실제 그런 모습을 본 적 있나? 아니, 멋대로 그려 낸 상상인가. 그것도 아니면…….
-아직도 부모님 생각에 슬픈 건, 그 슬픔을 덮어 줄 다른 가족이 없기 때문이야. 그 가족을 찾아!
의문 뒤로 익숙한 음성이 겹쳐졌다.
아, 그 꿈…….
-아니, 벌써 찾았나? 이렇게 옆에 있으니까!
무척 행복한 듯 웃고 있는 설왕 커플이 눈앞에 더욱 선명해졌다. 덤으로 북극곰과 북극여우도. 서로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각자 서로의 연인을 향해 더없이 사랑스럽고 애틋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그래, 그렇게.’
종족이나 성별 같은 조건들은 모두 차치하더라도, 최소한 반려라면 그런 식으로 서로 사랑해야 하는 게 아닐까. 적어도 누군가의 반려가 되려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버리고 말고를 떠나서 그 밑바탕에 사랑이 전제되어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나는…….
다시 고개를 들어 염왕과 이야기를 나누는 금왕을 보았다. 집채만큼 커다란 흑호. 보는 순간 가슴에서 애정이 퐁퐁 솟아나는 그 사랑스러운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래, 사랑스럽다. 무척 사랑스럽다. 정말로 사랑스럽지만.
나는 생각을 마치고 일어났다. 그때쯤 금왕 또한 염왕과의 대화가 끝났는지 몸을 일으켰다. 우리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나는 금왕을 향해 조용히 웃었다. 내가 가진 온 마음을 담아 감사했다.
“미, 미안해. 인간.”
금왕에게 다가가고 있는데, 문득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 돌아보자 울먹이는 미어캣이 보였다.
“어?”
대체 왜 사과를 하는지 알 수가 없어서 의아한 눈빛을 보내자 미어캣이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내, 내가 염왕님을 막지 못해서…… 내가 막았어야 하는데…….”
“네? 그게 무슨…….”
“내가, 내가 자랑했거든. 염왕님은 세상사에 관심 없어서 인간에 대해서 몰랐는데 내가 금왕님하고 있던 일을 자랑해서, 그래서…….”
두서없는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자 미어캣이 훌쩍훌쩍 눈물을 삼키며 말했다.
아아. 그제야 내가 알겠다는 탄성을 내뱉자 미어캣은 더욱 눈물을 흘렸다.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알 수 없어 멍하니 미어캣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저기, 그런데 문조는……?”
그러고 보니, 이전에는 한 세트처럼 꼭 붙어 있던 문조가 보이지 않았다. 비록 염왕과 또 둘이서 짝을 맞추기는 했지만, 그건 또 의미가 달라 보였다.
“염왕님의 행차를 막느라고 단식 투쟁하다 쓰러져서 쉬고 있어.”
“……!”
슬픈 기색이 역력한 미어캣의 목소리에 나는 헉, 숨을 들이켰다.
다, 단식 투쟁이라니…….
순간 머리에 하얀 띠를 두르고 근엄한 표정으로 자리를 보전하고 누운 문조의 모습이 떠올라 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다. 하지만 미어캣 앞에서 그러는 것이 실례라는 걸 알았기에 목구멍 아래로 조용히 삼켰다. 그리고 아픈 문조를 생각하느라 풀 죽은 미어캣의 작은 머리를 조심스럽게 쓸어 주었다. 미어캣이 다시 훌쩍이며 내 품으로 안겨 들었다.
“전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오히려 염왕께서 오셔서 다행이었으니까요.”
무릎을 굽히고 최대한 몸을 낮춰 미어캣을 안아 주며 토닥거렸다. 그러자 훌쩍임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그렇게 미어캣을 위로하고 나서 나는 다시 금왕에게 걸음을 옮겼다. 미어캣과 내 대화가 끝나기를 기다렸는지 그도 내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인간, 미안하다.”
내 앞에 멈춰 선 금왕은 제일 먼저 사과부터 했다.
“네?”
느닷없는 사과에 의아해하자 그가 덧붙였다.
“염왕께서 본래 좀 매섭게 말씀하신다. 신경 쓰지 마라.”
“아…… 아니에요. 신경 쓰지 마세요. 괜찮아요, 그건…….”
금왕을 안심시키듯 작게 웃었다. 그리고 우리는 염왕에게 다가갔다. 금왕이 마치 에스코트하듯 조금 앞쪽에서 걸었고 나는 느긋한 걸음으로 그 뒤를 따랐다.
“뭐야, 대답이 정해졌냐?”
내가 다가오는 걸 다 알고 있었으면서도 염왕이 짐짓 시치미를 떼다가 내가 바로 앞에 와 서서야 고개를 들었다. 그때쯤 멀찌감치 물러나서 상황을 지켜보던 다른 맹수 대표들도 우리에게 모여들었다.
그들이 적당히 주위에 자리를 잡고 설 때까지 염왕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잠시 미뤘다. 그동안 나는 그들 모두를, 백호와 재규어, 설표, 사자, 퓨마, 치타를 모두 한 번씩 둘러보고 다음으로 금왕을 조금 길게 본 뒤에 꾸벅 고개를 숙였다.
“모두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거의 바닥에 닿을 듯 깊이, 온 마음을 담아 인사하고 고개를 든 나는 뜸을 들일 것도 없이 바로 내 결정을 밝혔다.
“저, 이제 그만 돌아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