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볼을 스치는 바람이, 아니, 바람이 불어온 것이 아니었다. 단지 스칠 뿐인 공기가, 내달리는 금왕의 엄청난 속도 때문에 마치 칼날같이 느껴졌다. 흡사 시공을 초월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어마어마한 속도였다. 주위 구경은커녕 눈도 뜰 수 없을 지경이었다. 간신히 몇 번 눈을 떴을 때조차도,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이 순식간에 휙휙 지나가는 무언가를 느낀 것이 다였다.
어디를 가는지 궁금해할 틈도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금왕의 거대한 등에 납작 달라붙어, 내 몸이 폭 파묻힐 정도로 길고 풍성한 금왕의 그 탐스러운 털을 꼭 부여잡고 그에게서 떨어지지 않도록 애쓰는 것밖에 없었다.
혹여 자칫 잘못 손을 놓기라도 한다면, 눈도 뜨기 힘들 정도로 엄청난 속도로 내달리는 금왕에게서 튕겨 나가는 건 당연지사. 그 후에 어떤 참혹상을 겪게 될지 상상만으로도 아찔했다.
“……어?”
문득 탄성이 흘러나왔다. 털을 움켜잡은 주먹뿐만 아니라 긴장으로 온몸에 힘을 주며 금왕의 등에 바싹 달라붙어 있기를 한참, 갑자기 나를 짓누르던 공기의 압박이 사라졌다. 어마어마한 속도로 거침없이 내달리던 금왕이 순식간에 속력을 줄이더니, 그저 가볍게 달리는 정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에 여유를 찾은 나는 납작 엎드리고 있던 고개를 슬금슬금 들어 올렸다. 하지만 기다란 털에 시야가 가려 상체마저 세우고 앉았다.
“우…… 우와아아아…….”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 나도 모르게 입이 떡 벌어졌다. 금왕의 등에 매달려 어마어마한 속도로 시공을 초월한 듯 달린 끝에 나는…….
“사자다…….”
아프리카에 도착해 있었다.
사진이나 영상으로만 수백, 수천 번 보아 왔던 익숙한 풍경이 내 앞에 펼쳐졌다. 세상에서 가장 역동적인 땅 세렝게티. 아프리카의 그 유명한 초원이 내 앞에 존재했다. 듬성듬성 서 있는 아카시아 나무와 푸른 풀로만 가득 채워져 드넓게 펼쳐진 광활한 땅, 그리고 그곳을 가득 메운 수많은 동물이 보였다.
뿔을 맞대고 싸우는 수컷들이 눈에 띄는 톰슨가젤 무리와 평원을 까맣게 뒤덮은 거대한 버펄로 무리, 강물 속의 악어를 피해 펄쩍펄쩍 뛰어 이동하는 누 무리, 순한 얼굴을 한 임팔라, 동그란 귀를 까닥이며 주위를 경계하면서도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는 얼룩말, 그리고 그와 조금 떨어진 곳에 높이 자란 아카시아 나무의 잎을 뜯고 있는 기린이 보였다.
또 그 반대편에는 밤 사냥 전에 푸른 초원 위에 벌러덩 누워 뒹굴뒹굴 한가로운 시간을 만끽하는 사자와 이동 중인 영양을 노리는 치타가 보였고, 저 하늘에는 정확한 이름을 알 수 없는 새들이 떼를 지어 날아다니고 있었다. 아마 내 눈이 보지 못하는 저 먼 곳에 더 많은 동물이 있을 터였다.
끝을 살필 수 없이 드넓은 평원조차 좁아 보일 정도로 수많은 동물로 가득 찬, 이 생명력 넘치는 땅을 이렇게 갑자기 만나게 되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기에 나는 한동안 얼이 빠져 있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가슴이 두근두근 뛰어 댈 만큼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장관(壯觀)이었다.
그동안 내가 영상이나 사진에서 보아 온 아프리카도 충분히 멋있었지만, 실제로 보니…… 영상이나 사진으로는 절대 담아낼 수 없는 경이로움이 느껴졌다. 몸이 부들부들 떨릴 것 같은 거대한 감동이 나를 뒤덮었다. 나는 흑호의 검은 털을 꼭 움켜쥔 채, 그 감동에서 한동안 헤어 나올 수 없었다.
내가 가슴 벅찬 두근거림에 허우적거리는 동안 흑호의 걸음이 더욱 느려졌다. 평화로운 초원의 풍경에 어울리는 느긋한 걸음이었다. 모두가 여유를 만끽하고 있는 덕분에, 동물들 가운데도 격동적인 움직임을 보이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그래서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은 시시각각 변하는 영상이라기보다 마치 포토 슬라이드를 보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흑호가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이동할 때에 맞춰 조금씩 눈에 보이는 풍경이 바뀌었다.
“아…….”
아무리 오래도록 들여다보아도 여전히 아름답고 감동적인 주위 풍경이었지만, 그래도 조금씩 익숙해져 가던 나는 다시 멍하니 탄성을 흘렸다. 정신없이 동물들을 구경하다가 문득 뻐근해지는 목을 깨닫고 고개를 꺾어 올린 순간, 보았다. 하늘이 깨어지는 것을…….
어릴 적에, 아파트가 아닌 주택에 살 때 나는 날씨가 좋았던 날이면 곧잘 옥상에 올라가 해 지는 모습을 구경하고는 했다.
해 질 녘의 하늘은 대개 본연의 색을 잃고 붉게 물들며 층층이 나뉘었다. 그 빛은 또 하늘에 걸린 구름에 걸려 조각났다. 그렇게 불규칙적이고 단언할 수 없는 형태로 나뉜 색들이 눈앞을 가득 채우고 있는 걸 볼 때마다 하늘이 깨어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조각난 자리마다 하늘의 마음이 담겨 있다고 생각했다. 아직 아무 색에도 물들지 않고 여전히 푸르게 빛나는 하늘에는 쾌청했던 하루 동안의 행복한 마음이 느껴졌다. 하지만 해가 사라질 준비를 하면 하늘은 동요하기 시작해 사람의 혼을 빨아들일 듯 매혹적인 보랏빛 멍이 들었다. 한나절을 함께하다 사라져 버리려는 해에 화들짝 놀라 어딘가에 부딪히기라도 한 듯이.
그 뒤에 내보이는 엷은 주황빛에는 오늘도 어김없이 저를 남겨 두고 사라진 해에 대한 아쉬움이 느껴졌고, 하얀 구름에 덧칠된 자홍색 빛에는 아쉬운 한편으로 그리움이, 새빨갛게 물들어 핏빛을 내비치는 조각에는 슬픔이 담겨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총천연색 하늘이 이런 거구나 하면서.
하지만 아파트로 이사한 뒤부터는 석양 구경을 잘 하지 않게 됐다. 그러면서 차차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도 잊었다. 이렇게 석양이 물드는 하늘을 보는 것은 무척 오랜만이었다. 그래서인지 어렸을 적 꽤 오랫동안 마음에 품고 있던 생각인데도 왠지 생경하고 낯간지럽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 생각은 곧 사라졌다. 내 입에서 튀어나온 한 마디 감탄과 함께.
“우와.”
하늘의 색이 변하는 것에 정신이 팔렸다가, 흑호가 멈춰 선 것을 느끼고 고개를 내린 나는 입을 헤 벌렸다.
“크다…….”
어느새 눈앞에 시뻘겋게 불타오르는 태양이 자리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본 적 없는 크기의, 내 두 눈으로는 담아내기가 벅찰 정도로 크나큰, 마치 나를 집어 삼킬 것처럼 거대한 붉은 태양이 광활한 대지 끝에서, 저 멀리 지평선을 바다 삼아 천천히 침잠하고 있었다. 그리고 주위로 조금씩 제 핏빛을 흘려 보냈다. 그 덕분에 새빨갛게 물든 하늘 아래 세상엔 벌써 어둠이 한껏 내리깔려 있었다.
그 어둠 속에서 동물들은 자신들의 머리 위에 수놓인 찬연히 빛나는 노을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빛이 사라진 대지에서 마치 그림자처럼 검게 물들어서 나와 같이 하늘의 소리 없는 깨어짐을, 그리고 그 틈을 메우며 자라나는 밤의 검은 속살을 지켜보고 있었다.
마침내 태양이 완전히 사라졌다. 검푸른 하늘과 새까만 대지 사이에 자신이 머물렀다는 표시로 붉은 잔영을 띠처럼 남긴 채 자취를 감췄다. 그 붉은 띠 위에 검게 채색된 동물들의 형상이 그려져 있었다. 그들은 사라진 해를 뒤따르듯 더디게 걸음을 옮겼다.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나도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아니, 저 풍경 어딘가에 그렇게 등을 보이며 집을 향해 걸어가는 누군가가 있을 것만 같았다. 사냥으로 고단해진 몸을 이끌고 드넓은 자연 속 자신들의 보금자리를 찾아가는 이들이…….
“……우왓!”
석양의 잔흔조차 사라지고 오직 새까만 어둠으로 하늘이 물들어 갈 때쯤, 흑호는 대지 가운데 작게 솟아오른 언덕에 멈춰 섰다. 그리고 긴 꼬리로 나를 감싸 바닥으로 내려 주었다. 반짝이는 별과 은은하게 빛나는 달로 채워진 밤하늘을 구경하다가 갑자기 당한 일이라 깜짝 놀랐다.
땅 위에 내려선 나는 잠시 멍하니 금왕을 올려다봤다. 그는 내 눈길에 개의치 않고 뒷다리를 굽히고 앉았다. 앞다리를 곧게 뻗고 가슴을 내민 당당한 자세에는 결연한 우아함이, 높이 빼어 든 고개에는 위엄이 가득했다. 먼 곳을 바라보는 푸른 눈동자가 어둠에 물들어 여느 때보다 한층 깊어 보였다.
나를 감쌌던 꼬리가 허공으로 치솟아 의미 없는 선을 그렸다가 조용히 땅 위에 내려앉았다. 그리고 고요가 찾아왔다. 마치 세상의 끝을 바라보듯 먼 곳을 응시하는 흑호와 나 사이에는 아무런 말도 오가지 않았다. 우리는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인간.”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겨우 금왕이 입을 열었다. 고개를 들고 바라봤지만 눈을 마주칠 수는 없었다. 금왕은 여전히 내가 아닌 정면을 응시한 채 말을 이었다.
“네게는 좀 시끄러울 거다.”
그 말을 이해하기도 전에, 갑자기 금왕의 꼬리가 내 얼굴을 둘러쌌다. 정확히 귀 높이에 맞추는 게 귀를 막아 주려는 듯했다. 뭐지? 영문을 몰라 의아해하고 있을 때였다.
크와아아아아앙!
금왕이 울부짖었다. 시끄러운 걸 넘어서 귀가 아릴 정도로 거대한 울림에 주위의 공기가 불안정하게 흔들렸고 주변의 풀과 나무도 푸스스 떨렸다. 마치 공기가 폭발한 것 같은 엄청난 포효였다.
금왕의 포효는 동물들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소리를 들은 초원의 동물들이 하나둘 우리가 있는 언덕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어둠에 물들어 정확한 형체는 알 수 없었지만, 그들의 샛노란 눈만은 형형히 빛나 알아볼 수 있었다.
어슬렁어슬렁 다가온 동물들은 언덕 아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좁혀진 거리에 밝은 달빛 아래 구분이 되기 시작한 동물들은 혼자이거나 또는 저마다 수가 다른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이상으로 각양각색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같이 우리에게, 아니, 금왕에게 다가왔다. 검은 어둠 속에서 거뭇한 그림자들이 빛나던 눈을 감고 모두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그 정중한 인사는 제일 앞줄에 도착한 짐승부터 순서대로, 뒤쪽까지 이어졌다. 마치 연습이라도 한 것처럼 절도 있게. 그리고 끝도 없이.
이 초원에 사는 동물은 물론, 옆 동네에서까지 달려온 건지 정말 엄청난 수의 짐승이 모여들었다. 끝이 안 보일 정도였다. 그들이 순서 맞춰 인사를 하는 것만으로도 밤을 지새울 것 같았다.
덕분에 처음에는 깜짝 놀라 동물들을 바라보던 나는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꾸벅꾸벅 졸게 되었다. 그러면서 몸에 힘이 빠져 비틀비틀 넘어질 뻔했는지, 갑자기 금왕이 꼬리로 내 허리를 휙 잡아챘다. 그에 화들짝 놀라 정신을 차렸다가 두 눈을 부릅뜬 그대로 얼어붙었다.
어느새 동이 트고 있었다.
태초의 세상이 이런 모습을 하고 있지 않았을까. 파르스름하게 밝아 오는 여명 속에서 평원을 가득 채운 채 고개 숙인 모든 짐승의 모습은…… 과히 장관이었다.
절로 입이 떡 벌어졌다. 그를 다물 생각도 못 하고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 심장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간격을 두고 작게 발길질을 했지만 이내 다급하고 격렬해졌다. 정말 심장이 아플 정도로 벅찬 감동이 나를 뒤덮었다.
그때, 갑자기 아직도 나를 감싸고 있던 금왕의 꼬리가 풀어졌다. 그리고 지난밤 그랬던 것처럼 내 귀를 막듯 얼굴을 감쌌다. 순간 어떤 짐작을 떠올리기도 전에, 금왕이 다시 포효했다.
크와아아아아앙!
공기를 찢어발기는 것처럼 거대하고 사나운 포효가 새벽녘의 차가운 공기를 뒤흔들었다. 시린 밤을 지나며 아직도 얼어붙어 있던 풀과 나무들이 푸스스, 떨리며 잠에서 깨어났다. 금왕에게 고개를 숙이고 있던 동물들 또한 든 적도 없는 잠에서 깨어난 듯 고개를 들었다.
고개를 숙였던 때와는 달리 이곳저곳에서 두서없이 고개를 드는 동물들 위로, 어스름한 여명이 아닌 환한 빛이 뿌려졌다. 목덜미로 와 닿는 온기에 고개를 돌리자 눈부시게 빛나는 환희의 구체가 대지 위로 떠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금왕의 거대한 포효와 함께…… 아침이 찾아왔다.
“멋진 모습이지요.”
아침과 함께 또 다른 손님도 방문했다. 언제 왔는지, 인간의 모습을 하고 등 뒤에 서 있던 백호가 소리 없이 웃으며 말을 건넸다. 눈앞에 펼쳐진 장관에 넋이 나가 있던 나는 멍청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그런 내 앞에 또 다른 이들도 속속 도착했다.
“진짜, 몇 번을 보는 건데도 멋있어.”
이제 막 도착해 아직 짐승의 모습을 하고 있는 설표가 감탄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바로 뒤를 쫓아 도착함과 동시에 인간의 모습으로 변신한 사자가 뿌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련할까. 다른 이도 아니고 금왕의 행차신데.”
“하긴.”
“그렇지.”
등 뒤에서 어슬렁거리며 나타난 퓨마가 두 짐승과 나란히 서며 말을 거들었다. 재규어 또한 기척 없이 나타나 그들 곁으로 다가서더니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전 사자가 언급했던 ‘금왕의 행차’라는 건 단지 금왕이 이곳에 온 것 자체만을 뜻하는 게 아니었다. 그것은 금수 세계에서 통용되는 규율의 일종으로, 금왕이 나타나 울면 반드시 일정 범위 내의 모든 동물이 찾아와 인사를 올려야 하는, 내가 아침에 목격한 그 광경까지도 포함했다.
인사를 받은 금왕은 그에 할애된 긴 시간이 안타까울 정도로 빠르게 동물들을 물렸다. 그저 그들을 한 번 찬찬히 살펴본 후, 말 한마디조차 없이 고갯짓만으로. 하나 당사자인 동물들은 그에 일말의 아쉬움도 없이 몸을 돌려 자신들이 걸어온 길을 되돌아갔다.
그 와중에 우리 곁에 있던 각 동물 대표도 자신과 같은 동물 무리에 섞여 함께 길을 떠났다. 애초에 그들은 나를 문 삵에 대한 회의 때문에 모였던 터라, 그 일이 일단락된 이상 더 모여 있을 필요가 없다고 했다.
언덕 위에 덩그러니 둘만 남게 된 금왕과 나는 별다른 말도 없이 그저 언덕 아래를 내려다봤다. 나는 들뜨는 마음을 억누르며 가까운 곳을 스쳐 지나가는 맹수들을 주로 관찰했고 금왕은 왕으로서, 냉정하면서도 자애로운 눈으로 모든 동물을 두루 살폈다.
“저…….”
‘따로, 또 같이’라는 묘한 콘셉트로 금왕과 나란히 앉아 있던 나는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 오직 저 아래의 평원만을 살피던 금왕의 푸른 눈이 나를 향했다. 별다른 말은 없었지만 가만히 나를 바라보는 모습이 용건을 말해 보라는 것 같았다.
“……아, 아래에 내려가 봐도 될까요?”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레 용건을 꺼내자 금왕이 의아한 눈빛을 보였다.
“아래?”
“네. 좀 더 가깝게…….”
나는 말끝을 흐리며 금왕과 내가 올라 있는 언덕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한 무리의 사자들이 나무 그늘에 몸을 맡기고 쉬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 새끼 사자 세 마리가 뒤엉켜 노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작은 몸으로 저들끼리 엎치락뒤치락 장난을 치기도 하고, 또 귀찮은 듯 꼬리만 움직여 무심하게 놀아 주는 어른 사자에게 용감히 달려들며 꼬리를 사냥하는 몸짓이 앙증맞기 짝이 없었다.
그리고 꼭 무엇을 하지 않아도. 그 조막만 한 몸을 움직여 토닥토닥 바닥을 걷는 것만으로도,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저 먼 곳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두근두근 뛰어 댈 만큼 귀여웠다. 그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노라니 왠지 손이 근질거려서 참을 수가 없었다. 조금 더 가까운 곳에서 보고 싶었고, 가능하다면―.
“또…… 만지려고?”
한참이나 나를 바라보던 금왕이 묘한 표정으로 물었다. 단숨에 의도를 간파당한 것에 어깨를 움찔 떨자, 금왕이 더욱 묘한 눈길을 보였다.
“저어……, 안 되나요?”
“안 된다기보다…….”
금왕은 말을 하다 말고 입을 꾹 다문 채 물끄러미 나를 응시했다. 짧은 침묵이 흐르는 동안 바닥에 길게 늘어져 있던 꼬리를 휘익, 들어 올렸다가 다시 찰싹, 바닥에 내리치기를 반복했다. 그것이 흡사 생각에 잠긴 사람들이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는 것과 비슷해 보여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금왕은 나 때문에 진지하게 고민 중인 듯한데 웃는 것은 실례일 것 같아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음을 삼켰다.
“어?”
휘익, 소리를 내며 떠오른 금왕의 꼬리가 이번에는 바닥을 내리치지 않고 갑자기 내 손목을 감아 왔다.
“우왓……!”
할짝, 하는 선명한 소리와 함께 내 손이 축축하게 젖었다.
“……?!”
금수들의 근엄한 왕답지 않게 강아지처럼 내 손을 핥아 대는 모습에 당황한 눈길을 던지자 금왕이 붙잡은 손목을 놓아줬다.
“나도 있고, 사자 대표도 있으니 별일은 없겠지만. 만일의 상황을 대비해서다.”
‘만일의…… 상황?’
“내 타액이 묻은 그 손으로라면 어떤 금수를 만져도 절대 공격당하지 않을 거다.”
“……!”
의문을 떠올리던 나는 눈이 휘둥그레진 채 금왕을 바라보았다.
“아, 어…… 가, 감사합니다!”
혼란스러웠던 머릿속이 진정되고, 금왕의 말뜻을 이해한 나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힐끗, 시선을 내려 내 인사를 확인한 금왕은 무심하게 고개를 돌렸다.
“인사는 필요 없다. 어디까지나 내 아이들을 위해서니까.”
금왕이 철썩, 꼬리로 땅을 내리치며 저 멀리 평원의 동물들을 바라보았다. 삵에게서 목숨을 구해 주어 고맙다고 인사했을 때처럼 여전히 냉정한 말투였다. 한데 어째서일까. 그 목소리가 어제처럼 차갑게 느껴지지 않았다.
손에 묻은 금왕의 타액에는 인간인 나는 맡을 수 없는, 후각이 예민한 동물들만이 맡을 수 있는 금왕의 체취가 담겨 있어서 나를 보호했다(―고 무리 속에 섞여 있던 사자 대표에게 들었다).
덕분에 나는 처음 목표로 했던 사자 무리뿐만 아니라, 그들을 피해 멀리 떨어진 나무 위에 올라 있던 표범과 더 먼 곳에 떨어져 있던 치타 모자, 이동하며 우연히 발견한 야생 고양이도 만질 수 있었다. 그리고 먹이를 구하기 위해 동료들이 떠난 사이 보호자로 남은 몇 마리의 하이에나와 그들 사이를 열심히 뛰노는 중인 새끼 하이에나와도 잠시 놀 수 있었다.
그 외에도 셀 수도 없이 많은 맹수를 만나고 쓰다듬었다. 그러다 보니 이 초원에는 더 이상 만질 맹수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전에 만났던 맹수들을 다시 괴롭히기는 미안하고, 무엇보다 동물들을 새로 만날 때마다 금왕에게 손바닥을 핥아지는 게 좀 그래서 결국 다시 언덕으로 돌아와 아래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웠다. 사진이나 영상보다 더 멀어 잘 보이지 않는데도, 그들과 같은 공간에서 숨을 쉰다는 것만으로도 사진이나 영상과는 비교할 수 없는 기쁨이 느껴졌다.
그 행복감에 휩싸여 있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니 어느새 다시 깜깜한 밤이었다. 하지만 나는 잠들 수 없었다. 초식 동물들의 눈이 어두워지는 밤이 되자 야행성인 맹수들은 더욱 활발히 움직였다. 비록 가로등 하나 없는 쌩 야생이다 보니 그들이 움직이는 소리와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샛노란 눈의 궤적만 감지할 수 있을 뿐이었지만, 아래 평원을 바라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어딘가에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맹수들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그저 어두컴컴할 뿐인 땅을 내려다보는 일조차도 즐거웠다. 정말 이 이상은 있을 수 없겠다 싶을 만큼 가슴이 벅차올랐다. 한데 그렇게 생각한 순간, 불현듯 가슴속에서 이 충만한 기쁨을 어지럽히는 의심이 슬쩍 고개를 쳐들었다.
“설마……, 꿈은 아니겠지?”
현실이라기에는, 믿기지 않는 걸 넘어 너무 행복했다. 아무리 꿈이라 해도 이렇게 완벽한 전개가 펼쳐지기는 쉽지 않은데. 그렇게 생각하자 갑자기 심장이 철렁 내려앉으며 눈물이 날 것처럼 불안해졌다.
“……아야!”
떨리는 손을 들어 볼을 꽉 꼬집어 본 뒤에야 나는 그 불안에서 벗어났다. 꿈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볼의 통증이 지독히 선명했다. 그제야 다시 안심하고 볼을 문지르는데 문득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자 내 곁에 앉아 역시 어둠이 가득한 땅을 내려다보고 있던 금왕의 크고 푸른 눈이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왠지 머쓱해 볼을 문지르던 손을 내리자, 금왕이 시선을 거뒀다. 그에 나도 고개를 바로 하려는데,
톡톡.
머리를 두드리는 가벼운 감촉에 멈칫해서 시선을 들었다. 금왕의 꼬리가 내 머리를 가볍게 두드리는 중이었다. 마치, 눈물 흘리며 사죄하는 삵을 위로했던 때처럼. 그 순간 나는, 왠지 코끝이 찡해지는 기분과 함께 이 이상은 없으리라 생각했던 행복보다 조금 더 높은 곳을 잠깐 엿본 기분이 들었다.
‘㉦’
깜빡 잠이 든 모양이다. 익숙한 나른함에 잠겨 눈을 감은 나는 포근하고 부드러운 무언가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 감촉이 너무 좋아서 그 무언가에 파고들려는 찰나, 갑자기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설마……. 설마, 그게 다 꿈이었던……!’
순간 너무 놀라서 번쩍 눈을 뜸과 동시에 몸까지 벌떡 일으켰다. 그리고 다급히 주위를 살폈으나 눈부신 빛이 나를 방해했다.
“……깼나.”
눈살을 찌푸리며 눈을 감고 있으려니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새 빛에 적응했는지 순간 눈부심도 줄어들어 나는 서둘러 눈을 떴다.
“아…….”
익숙한 흑호의 얼굴을 마주하자 잔뜩 힘이 들어가 있던 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가는 걸 느꼈다. 그리고 털썩, 다시 바닥에 몸을 늘어뜨렸다.
‘어…… 바닥?’
힘없이 뒤로 넘어갔는데 등 뒤에 와 닿는 감촉이 이상했다. 비록 풀로 덮인 초원이라고 해도 이 감촉은 너무 부드럽고 푹신…….
“앗.”
나도 모르게 탄성을 토해 냈다. 내가 몸을 누인 곳은 다름 아닌, 큰 몸을 둥글게 만 흑호, 금왕의 품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얼떨떨했는데 위쪽을 올려다보고는 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금왕의 두껍고 긴 꼬리가 내 머리 위 허공에 머물며 그늘을 드리워 주고 있었다. 앞서 빛에 빨리 적응한 게 그 덕분인 듯했다.
휘익.
내가 쳐다보자 쑥스러웠는지, 아니면 애초에 길게 해 줄 생각은 없었는지 금왕의 꼬리가 머리 위에서 사라졌다. 그 순간 왜인지 나도 몸을 일으켜 세워야 할 것만 같아서 다시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가, 감사합니다.”
꾸벅 고개를 숙이던 나는 문득 금왕의 대답이 궁금해졌다. 벌써 두 번이나 그에게 감사 인사를 했는데 그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아이를 위해서라고. 그런데 이번에는 그 대답을 쓸 수 없는 상황이었다.
과연 어떤 대답을 할까 호기심 섞인 시선을 던졌다. 하지만 금왕은 아무런 대답 없이 둥글게 만 몸을 펴 자리에서 일어날 뿐이었다. 그리고 뭉친 근육을 풀려는 듯 앞다리를 길게 쭉 뻗으며 몸을 낮춰 기지개를 켰다. 한데 어째서인지 전혀 실망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기뻤다. 비록 아무 대답도 없었지만, 드디어 그가 내 인사를 제대로 받아 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금왕은 곧 언덕 아래에 있는 강줄기로 물을 마시러 갔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나는 돌연 한 가지 기억을 떠올렸다. TV의 한 동물 프로그램에서 본 내용이었는데, 수 마리의 호랑이와 함께 사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 사람은 호랑이와 함께 살 뿐만 아니라 잠잘 때도 함께였다. 종일 호랑이들 틈에서 끌어안고 장난치며 함께 뒹굴거리다가 같이 잠들기까지 했다. 그야말로 내가 바라던 가장 이상적인 삶의 주인공이었다.
그렇게까지는 아니라도, 하다못해 딱 한 번만이라도 호랑이들 틈에 폭 둘러싸여 잠들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생각하며 부러움에 침을 꼴깍꼴깍 삼켰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제발 꿈에서라도 호랑이들과 함께 잘 수 있기를 바라고 또 바랐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 눈을 뜨니 갑자기 그 소원이 이루어져 있었다. 그 영상에서처럼 수 마리의 호랑이에게 둘러싸인 건 아니었지만, 보통의 호랑이 수 마리를 합해도 비교가 안 될 만큼 거대한 호랑이인 금왕이, 몸을 둥글게 말아 나를 폭 감싸 주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문득 머리 한구석에서 빛과 같은 깨달음이 터졌다.
“아!”
나는 그제야 금왕 또한 내가 그토록 좋아하는 맹수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그가 흑호의 모습이라는 건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지만…… 처음 보았을 때부터 그 거대한 크기에 압도당해, 그리고 금수들의 왕이라는 위엄에 눌려 자연스레 망각했다. 다른 요소를 모두 빼놓고 그저 생김으로만 따진다면 금왕은 내가 무척 사랑해 마지않는 요소들을 몽땅 지니고 있다는 걸.
몸이 큰 것에 비례해 금왕의 네 발은 다른 금수들의 조그만 발―어디까지나 금왕과 비교해―과는 차원이 다른 두께와 동글함을 지니고 있었다. 걸을 때마다 그 커다란 발이 바닥을 사뿐사뿐 딛는 게 너무도 잘 보여서 다른 일반 금수들보다 훨씬 귀여웠다.
게다가 길고 넓어 보기에도 몽실몽실, 두 손에 쥐면 더없이 폭신할 것 같은 꼬리는 정말 꼭 붙잡아 볼에 한 번 부비고 싶었고, 내가 올라탔던 등의 새까만 털과 대조되는 배의 새하얀 털은 찰싹 붙어 코를 박고 싶었다.
또 날카로운 눈빛이 내뿜는 위엄을 지우고 살펴보면 호랑이를 닮은 금왕의 얼굴에도 귀여움이 가득했다. 호랑이들이 다른 호랑이를 만나면 흔히 그러듯 그 이마에 내 얼굴을 묻고 마구 부비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토록 크고 위압적인 금왕이 어울리지 않게 날카로운 눈을 일자로 길게 늘이며 기분 좋은 듯 가릉거리면 어떨까, 하고 상상했더니 정말 아찔할 정도로 귀여웠다. 그 상상만으로 벌써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
‘아, 아…….’
나는 혼자 생각에 홀딱 빠져서 잔뜩 흥분했다. 당장에라도 달려들어 그 둥글고 납작한 발을, 몽실몽실한 꼬리를, 폭신한 이마를, 동그란 귀를 조물조물 만지고, 긴 털로 덮인 목덜미에 코를 박고 매달리고 싶어졌다. 금왕의 털에 닿고 싶어 안달이 난 손으로 허공에다 마구 피아노를 쳐 댔다.
“인간?”
어느새 물을 마시고 돌아온 금왕이 안절부절못하는 나를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나를 온전히 머금고도 남을 것처럼 커다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고개를 아래로 쭉 빼 살피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꿀꺽 침이 삼켜졌다. 그 순간 어째선지 금왕이 내게서 슬금 물러났다.
“……인간?”
한 걸음, 하지만 그 큰 몸집 때문에 꽤 먼 거리를 물러선 금왕이 불안한 눈길로 나를 살폈다. 조금 긴장한 듯 몸을 낮춘 채 고개를 갸웃거리는 모습이 더없이 귀여웠다. 어제까지만 해도, 아니, 방금까지만 해도 무척 용맹하고 날렵해 보이던 얼굴이 순식간에 귀여움 덩어리로 변했다.
아니, 얼굴뿐만 아니라 그 몸체 전부가 사랑스러웠다. 한번 인식이 바뀌고 나자 나 자신도 주체할 수 없는 애정이 들끓기 시작했다. 이성이 마비될 것처럼.
“인간, 왜 그러나?”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내가 이상했는지 금왕이 다시 조심스레 다가왔다. 사뿐, 발끝에서부터 천천히 지면을 눌러 내리는 도톰한 앞발―.
“으악!”
나는 순간 이성을 잃고 비명 같은 한마디와 함께 금왕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목표했던 것처럼 그를 끌어안지는 못했다.
“이, 이봐!”
내 갑작스러운 행동에 금왕이 흠칫 놀라며 내 머리를 앞발로 토옥, 건드린 덕분이었다. 본인은 최대한 힘을 뺀 듯했지만 아무래도 무게가 있다 보니 압박감이 느껴졌다.
“앗…….”
갑자기 정수리를 꾹 누르는 감촉에 이성을 되찾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선 채로 꿈이라도 꾼 거냐, 인간?”
금왕이 톡, 자신이 짚었던 자리를 아주 살짝 두드리며 앞발을 거두어들였다.
“어, 어…….”
나는 스스로가 생각해도 비정상적이었던 조금 전의 상황을 되새기며 금왕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금왕에게로 쭉 내뻗은 손을 내려다보고, 다시 금왕을 쳐다보기를 반복했다. 예전에도 몇 번, 주로 새끼 맹수들을 볼 때 조금 전과 비슷한 상태로 달려든 적 있었다.
하나 그때는 그 대상이 TV나 책, 모니터, 또는 휴대폰 액정이었기 때문에 중간에 제지당한 적이 없었고, 그로 인해 상대방이 당혹스러운 눈으로 나를 볼 일도 없었다. 그래서 나 또한 이 상황이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어, 그게, 그러니까…….”
금왕을 향한 손을 그냥 두지도 내리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허우적거리며 나는 말을 더듬었다.
“인간, 설마…… 나를 만지고 싶었던 건 아니겠지?”
“흐익!”
정곡을 찔린 덕분에 나도 모르게 괴상한 비명을 내질렀다. 그리고 뻗었던 손을 순식간에 거두며 차렷 자세를 했다.
설마, 나까지……. 내 반응에서 답을 알아차린 금왕이 기가 막힌 듯 중얼거렸다.
“……인간.”
한동안 침묵하던 금왕이 문득 입을 열었다. 이어서 턱 끝에서 살랑거리는 보드라운 감촉. 금왕이 자신의 꼬리로 내 턱을 밀어 올린 것이었다. 아직 당혹스러움이 남아 여전히 딱딱한 자세로 애꿎은 정면만 노려보던 나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이었다.
할짝.
선명한 소리와 함께 축축하고 뜨거운 것이 얼굴을 뒤덮었다. 순간 반사적으로 눈을 꼭 감았다가 그것이 다 지나간 다음 슬그머니 떴다.
“아직 잠이 덜 깼나 보군. 정신 차려라.”
금왕이 안타까운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며 혀를 찼다. 그제야 조금 전의 말캉한 감촉이 그의 혀라는 것을 깨달았다. 축축한 혀가 얼굴을 뒤덮는 것은 그리 반가운 일이 아니었지만 물을 먹고 와서인지 끈적거리지 않고 매끈하게 얼굴을 핥아 낸 터라 나쁘지 않았다. 아니, 뺨을 스치는 감촉이 너무 보드라워서 오히려 조금 기분 좋았다.
“……어?”
멍하니 얼굴을 쓸어내리던 나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금왕을 올려다봤다.
“인간?”
“혀가…….”
“혀?”
금왕이 미간을 좁히며 반문했지만 나는 멍하니 시선만 던졌다. 금왕의 살짝 벌어진 입 속에 담겨 있는 분홍빛 혀를 향해.
‘혀가…… 진짜, 부드러웠어.’
미처 내뱉지 못한 대답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본래 고양잇과 맹수들의 혀는 털을 핥아야 하는 데다 뼈에 붙은 고기를 효과적으로 떼 먹을 수 있도록 돌기가 발달해 있어서 무척 거칠었다. 그런데 방금 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간 금왕의 혀는 마치 새끼 강아지의 것처럼 부드러웠다. 지금뿐만 아니라 어제 동물들을 만지기 전 손을 핥아 줄 때도, 처음 삵에게 물린 목을 핥아 줄 때도 그랬다. 그때는 경황이 없어서 지금에야 깨달았다.
그와 동시에, 예전에 손을 물리면서도 그 감촉이 너무 좋아서 하품하는 새끼 강아지의 입 안에 손가락을 콕, 콕 찍어 그 혀를 만져 봤던 기억이 떠올랐다. 손끝이 사르르 녹아내릴 것처럼 따스하고 보드랍던 감촉. 그러나 손끝만 겨우 넣어도 다 찰 정도로 작아서 아쉬운 감이 없잖아 있었는데…… 눈앞에 초대형 새끼 강아지의 혀가…….
“아…….”
다시 가슴이 뛰어 대기 시작했다. 확인할 수는 없지만 내 눈이 빛나는 것이 느껴졌다. 좀 지나치게 반짝이는 것 같았지만 나 자신도 제어가 안 됐다.
“이, 인간?”
주춤 물러나는 금왕의 모습이 내 짐작을 확신으로 바꾸었다.
“금왕……님.”
가슴이 벅차도록 뛰어 대는 심장에 떨리는 목소리로 운을 뗐다. 금왕이 더욱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앞서처럼 의아한 목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잔뜩 숨죽인 모습이 무척 긴장한 듯 보였다. 내 입에서 떨어질 말이 두려운 듯 걱정스럽게 주시하는 푸른 눈이…… 귀엽다 못해서 사랑이 퐁퐁 샘솟게 했다. 넘치는 애정에 또다시 머릿속에서 이성이 사라져 갔다. 하지만 나는 간신히 이성의 끄트머리를 부여잡으며 말을 이었다.
“예전에 어디선가 들은 우스갯소리인데요. 어떤 사람이 호랑이를 두고, 이 녀석이 내 고양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말했대요. 그러자 곁에 있던 사람들이 그럼 그루밍 한 번에 피부과 가야 하고 꾹꾹이 한 방에 골절이겠네. 쥐돌이로 놀아 주다가 잘못 깔리면 그대로 사망이고 말이지, 하고 말했대요. 웃기죠?”
“뭐?”
“어, 그리고 이건 또 다른 우스갯소리인데요. 그 호랑이보다 훨씬 더, 훨씬 더 커서 집채만 한 호랑이가 있어요. 그 호랑이를 상대로 꼬리를 조물조물하고, 귀를 문질문질하고, 이마를 부비고, 배를 만지작거리고, 혀를 꾹꾹 눌러 대면, 어떻게 될까요?”
“……설마, 인간!”
금왕이 당황해서 눈을 부릅뜬 순간, 나는 이미 그를 향해 점프하고 있었다.
‘㉦’
‘윽.’
지금 금왕의 얼굴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딱 그것이었다. 무척 거북스럽고 싫은 상황에 처한 이들이 내는 비명 같은 신음.
물론, 실제 금왕은 입을 딱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무척 싫은 얼굴로, 하지만 얌전히 꼬리를 내어 주고 있을 뿐이었다. 벌써 폭신한 앞발과 털이 복슬복슬한 목, 도톰한 이마, 둥그런 입가, 봉긋한 귀, 뽀얗고 말랑한 배를 차례로 공략당한 후인지라 처음의 경악한 얼굴은 사라졌다. 그다음에 보여 주던 식은땀을 흘리며 당혹스러워하던 모습도 이제는 없었다. 그저 체념한 모습이었다.
대신 내게 한참 시달리느라 지쳤는지 금왕은 몸을 낮추었다. 바닥에 엎드려 곱게 포갠 두 발 위에 고개를 올리고 나를 외면하면서 소심하게 불만을 표출하는 듯했다. 그 뒤통수조차 내 눈에는 무척 귀여워 보였지만 그 반응은 분명 내 손길이 내키지 않는다는 의미일 터였다. 꼬리가 부자유하다는 걸 알면서도 살랑살랑 흔들며 꿈틀대는 모습에서도 내 손길이 상당히 귀찮고 싫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무척 미안했지만, 나는 도저히 손안의 행복을 놓을 수가 없었다. 내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두 손안에 착 감기는 느낌이 좋았다. 촉감과 양감 모두. 그래서 꼭 내가 싫다고 하는 상대를 희롱하는 못된 악한이 된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금왕의 꼬리를 놓아주고 올라탄 등에서 내려올 수가 없었다.
그때,
“으하하하!”
갑자기 등 뒤에서 무척이나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감히 맹수 대표들을 희롱한 인간이 있다고 해서 궁금해서 달려왔더니, 이거 금왕께서도 희롱당하고 계시는 겁니까? 하하하.”
고개를 돌리자 푸른빛과 잿빛이 섞인 멋스러운 털을 지닌 늑대가 다가오는 게 보였다. 본래도 용맹하고 날렵한 생김인데 한쪽 눈 위에 길게 그어진 상처가 나 더 강하고 늠름해 보였다. 하지만 잔뜩 웃고 있어서인지 무섭다는 생각보다는 그저 멋있구나, 싶었다.
“와우, 이거 정말 생각지도 못한 엄청난 광경인데.”
늑대의 곁에는 적갈색 털로 덮인 매끈한 몸체를 지닌 여우도 함께였다. 매혹적인 곡선으로 그려진 눈매를 곱게 접어 웃는 모습이 무척 귀여웠다. 늘씬한 몸체와 달리 풍성한 털로 덮인 두툼한 꼬리 또한 매력적이었다.
“그러게. 정말 이런 모습을 보게 될 줄이야.”
근처로 다가온 늑대와 여우 뒤로, 작은 머리에 매끄러운 몸체와 모델처럼 긴 다리를 뽐내는 치타도 모습을 드러냈다. 어느새 고개를 들며 자리에서 일어난 금왕이 자신을 놀리는 말을 쳐 내듯 귀를 까딱였다. 그 모습이 귀여워 멍하니 바라보던 나는 이내 비명을 내질렀다.
“우와악!”
자리에서 일어난 금왕이 꼬리를 크게 휘둘러 빼내더니 내 허리를 감싸 나를 땅 위에 내려놓았다.
“아…….”
땅을 딛고 선 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금왕이 꼬리를 내어 준다고 생각은 했지만, 그렇게 쉽게 빠져나갈 수 있었다는 것에 조금 놀라서였다. 하긴, 아무리 내가 갑자기 달려들었다고 해도 금왕이 정말로 거부했다면 그를 괴롭히는 건 불가능했다. 그저 가볍게 몸을 털기만 해도 나를 휙 날려 보낼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금왕은 나를 배려해서 굳이 싫은 것을 참아 준 것이었다. 그 사실에 왠지 모르게 가슴 안쪽이 찡해질 때였다.
삐익―!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저 높은 하늘에서 점 같은 것이 우리를 향해 날아왔다. 쏜살같이 바람을 가르고 수직 하강하며 점은 점점 커졌다. 그리고 종내는, 강인한 눈이 위엄 있어 보이는 왕관 독수리의 형체를 갖췄다.
독수리는 바닥에 있는 사냥감을 낚아채기라도 하려는 듯 쐐액,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눈앞의 땅을 찍었다. 그리고 타앗, 제 발에 꼭 움켜쥐고 있던 것을 금왕의 앞에 내려놓더니, 근처에 있던 이름 모를 나무 위로 풀썩 날아올랐다.
독수리의 커다란 몸체가 내려앉자 나뭇가지는 크게 휘청거렸지만, 이내 잠잠해졌다. 그 모든 일은 정말 순식간에, 그리고 너무 갑작스럽게 일어났기에 나는 그때까지도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휘둥그레진 눈으로 독수리를 쳐다봤다.
“금왕, 오랜만에 뵙습니다.”
독수리가 금왕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시선을 들었다. 그가 앉은 나무는 다소 키가 작은 반면, 금왕의 덩치는 무척 커서 나무에 올라앉아서도 금왕보다 눈높이가 낮았다.
“비왕(飛王)의 전갈이냐.”
막 독수리가 발치에 떨어뜨린 것을 살피던 금왕이 나지막이 물었다. 독수리가 부리부리한 눈을 내리깔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취향이 고풍스럽군.”
금왕이 꼬리를 이용해 발치에 떨어져 있던 것을 집어 들며 말했다. 독수리가 가져온 것은 사극에서나 볼 법한 두루마리였다. 금박이 둘러진 바깥 가죽과 가운데를 봉한 태슬에 매달린 옥은 내가 보기에도 무척 고풍스럽고, 또 고급스러워 보이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실 그 두루마리에는 크게 관심이 가지 않았다. 그보다는 네 발이 다 무척이나 크고 둥글어 섬세하게 움직일 수 있는 것이라고는 꼬리뿐인 금왕이 대체 어떻게 저 두루마리를 풀까, 하는 의문이 더 컸다. 혹시, 금왕도 다른 동물들처럼 사람으로 변하는 게 아닐까 짐작하면서. 하지만 내 예상은 완전히 어긋났다.
파라락.
금왕은 꼬리로 말아 쥐었던 두루마리를 허공에 내던졌다. 그러자 그것이 저절로 스르륵 열리며 넓게 펼쳐졌다. 오래지 않아 다시 가라앉았지만, 금왕은 호랑이답게 뛰어난 동체 시력으로 단숨에 다 읽은 듯 바닥에 떨어진 두루마리를 두 번 줍지 않았다.
“비왕이 날짐승을 좀 더 늘려 달라더냐?”
“네. 조만간 하늘에서 연회가 벌어질 터인데, 그때 일손이 많이 부족할 듯싶습니다.”
“그렇기는 하지.”
독수리와 금왕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나는 잠자코 지켜보았다. 잘 이해는 되지 않지만, 중요한 일 같아서 방해하지 않으려고 얌전히 기다렸다. 그 후로 독수리와 금왕은 어떤 날짐승을 비왕에게 보낼 것인가에 대해 이런저런 의견을 주고받았다.
“우리 금수들을 다스리는 것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왕들이 불편하지 않도록 보조할 금수를 보내는 것도 금왕의 중요한 임무지요.”
갑자기 누군가 내게 말을 걸었다. 고개를 돌리자 독수리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깜빡 잊고 있던 늑대가 어슬렁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앞서처럼 여우도 함께였다.
“하늘을 다스리는 비왕(飛王)께는 주로 날짐승을, 바다를 다스리는 용왕(龍王)께는 주로 바다짐승을, 저 눈 덮인 극지방을 다스리는 설왕(雪王)께는 극지방의 짐승을, 뜨거운 사막을 다스리는 염왕(炎王)께는 사막의 짐승을. 각각의 특성에 맞춰 보내 주지. 그러면!”
마치 리듬을 타듯 경쾌하게 말을 이으며 사뿐사뿐 걸음을 옮기던 여우가 갑자기 허공으로 점프했다. 그리고 제 꼬리를 잡아챌 것처럼 우아하고 유연하게 몸을 말며 돌았다. 순간 눈부신 빛에 감싸였던 여우는 오래지 않아 탓, 가벼운 발길로 바닥에 착지했다.
“그러면 그 각각의 왕들께서는 또 우리 금수들이 살기 좋은 환경을 제공해 주는 거지!”
바닥에 내려서 말을 마무리하는 여우는 이제 어엿한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긴 적갈색 머리칼에 호리호리한 체구를 지닌 청년이었다.
“아, 오랜만에 사람 모습으로 둔갑하니 좀 어색……한가?”
제 몸을 이리저리 살펴보던 여우가 곁에 있던 늑대에게 빙긋 웃으며 물었다. 짐승의 모습을 하고 웃었을 때와 다름없이 가늘게 접혀 웃는 눈이 여전히 귀여웠다.
“완벽해, 걱정 마.”
늑대가 단호히 대답하더니 휘익 자신도 공중제비를 돌았다. 역시나 눈부신 빛을 뿌리던 그는 곧 사람의 형상으로 내려섰다. 늑대의 모습이었을 때처럼 눈가에 깊게 팬 상처를 가진, 잿빛과 푸른빛이 보기 좋게 뒤섞인 짧은 머리카락을 지닌 무척 강인해 보이는 사내였다. 늑대일 때의 그 근육이 그대로 따라온 건지, 청색과 회색이 뒤섞인 도복 너머 단단해 보이는 근육질의 몸이 그대로 드러났다.
“둘 다 무슨 바람이야?”
갑작스러운 변신 쇼를 멍하니 감상하고 있노라니 누군가가 내 어깨를 감싸 당겼다. 놀라서 고개를 돌리자 낯선 얼굴의 남자가 서 있었다. 하지만 유독 자그마한 얼굴과 긴 팔다리를 지닌 그 모델 같은 체형에 대번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치타 너야말로 평소엔 죽어라고 본체만 고집하면서 웬일이냐.”
“그거야 평소엔 바쁘니까. 이 모습으론 빨리 달릴 수가 없잖아.”
“하긴.”
치타의 대답에 물음을 던진 늑대가 아닌 여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더니 힐끗 나를 바라보았다.
“게다가 사자나 다른 녀석들 말이, 만질 때는 꼭 본체여야 한다고 했다는 걸 보아 이 모습이면 딱히 소문처럼 희롱당할 일도 없겠고 말이야.”
여우가 특유의 일자 눈을 하고 웃었다. 옆에 있던 치타와 늑대도 동조하듯 웃음을 터뜨렸다.
‘대, 대체 뭐라고 소문이 났기에…….’
그 내용이 무척 궁금했지만, 차마 물어볼 수는 없었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늑대의 그 푹신한 목덜미, 여우의 그 탐스럽고 도톰하던 꼬리, 그리고 치타의 유연한 등을 만지지 못한 게 아쉬워져서…… 스스로도 내가 참 대단하다 여겨졌다.
근데, 다른 건 몰라도 여우의 꼬리에는 세상 누구라도 그렇지 않을까. 완전 복슬복슬해서 만지면 정말 부드러울 것 같았는데…….
“……!”
생각에 잠겨 나도 모르게 눈을 번뜩인 모양이다. 늑대와 무언가 이야기하고 있던 여우가 움찔 놀라 물러서더니, 식은땀을 흘리며 나를 쳐다봤다. 그에 정신을 차리고 걱정 말라며 안심시키려 하는데 여우가 갑자기 고개를 번쩍 들었다. 옆에 있던 늑대도, 치타도 거의 비슷하게 움직였다.
“독수리와의 이야기는 끝나셨습니까, 금왕.”
덩달아 나도 고개를 들었을 때 늑대가 물었다. 어느새 우리에게 고개를 돌린 금왕이 질문에 답하듯 커다란 눈을 깜빡여 보였다.
“그럼, 저희도 보고할까요?”
치타의 물음에 금왕이 꼬리로 철썩, 땅을 내려치며 말 대신 대답했을 때였다.
꼬르르르륵!
엄청난 기세로 내 배 속이 울어 댔다. 순간 당황해서 배를 감싸 쥔 나를 모두가 주시하는 가운데,
“꺅! 정말이네, 진짜 인간이 있잖아!”
“어머, 그 소문이 사실이었어!”
잔뜩 호들갑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민망한 상황을 어떻게 벗어날까 고민하던 나는 기회다 싶어 냉큼 고개를 돌렸다.
“어……?”
“야아, 오랜만이다. 미어캣.”
주위로 고개를 돌렸는데도 아무도 없어 깜짝 놀랐던 나는 늑대의 인사말을 듣고서야 빠르게 시선을 내렸다 그제야 은빛이 도는 갈색 털이 탐스러운 미어캣이 시야에 들어왔다.
미어캣은 도도돗, 네 발로 빠르게 뛰어와 검은 줄무늬가 난 등이 보이지 않도록 벌떡 일어서서 우릴 올려다봤다. 하얀 얼굴에 검은색 테두리가 선명한 눈은 일견 판다를 연상케 했지만, 생김은 족제비에 가까웠다. 사막의 파수꾼이라고 불리며 동물의 왕국 오프닝에서 언제나 사막을 분주하게 오가다 벌떡 서서 망을 보던 그 미어캣이 바로 눈앞에 나타나자 나는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맹수 과는 아니지만―오히려 맹수는 미어캣의 천적이지만―, 두 발로 벌떡 일어서서 까만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올려다보는 모습이 더없이 깜찍했다. 바닥에 끌려 동그랗게 말린 긴 꼬리도 무척 귀여웠다. 그러다 문득, 조금 전 내가 들었던 목소리가 두 마리 분이었다는 걸 기억해 내고 다른 동물은 어디 있지? 두리번거리며 찾을 때였다.
“……백문조도 안녕.”
잠시 끊겼던 늑대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 순간, 다 일어서도 내 무릎에 닿을락 말락 작던 미어캣의 키가 조금 더 커졌다. 방금까지 보이지 않던 하얀색의 자그만 문조가 미어캣의 등을 토돗토돗, 뛰어 머리 위로 올라온 것이었다. 미어캣의 얼굴에 고정되었던 시선이 금세 문조를 향해 옮겨 갔다.
“아, 이게…….”
‘바로 그 문조구나.’ 하고 나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내 시선은 이제 미어캣의 머리 위에 놓인 그 작은 새에 고정되어 움직일 줄을 몰랐다.
내 친구 중에 반려동물로 문조를 키우는 녀석이 있는데, 만날 때마다 늘 뽀송뽀송한 털로 덮인 가슴과 배가 얼마나 쫀득한지 모른다며 문조의 사랑스러움에 대해 이야기했었다. 평소 조류는 썩 좋아하지 않는 편이었기에―그나마 좀 호감을 가지고 있는 게 매와 독수리같이 크고 강한 맹금류였다―그 말에 그다지 동의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충분히 동의하고도 남았다.
두근두근―.
또 심장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눈앞에 보이는 문조의 뽀얗고 오동통한 가슴은 나를 설레게 하기에 충분했고, 강렬한 충동으로 손끝에 안달이 꽃핀 나는 잠시 안절부절못할 수밖에 없었다. 금왕에게 달려들었던 그때처럼 머릿속이 멍해지며 위험 신호가 울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미어캣의 작은 머리 위와 어깨, 등을 쉴 새 없이 뛰어다니느라 바쁜 문조의 움직임이 내 신경을 빼앗으며 이성을 붙잡을 수 있게 해 주었다.
“너희 어울리지 않게 요새도 붙어 다니는 거냐.”
문조의 배를 만지고 싶어 절로 움찔대는 손가락을 힘겹게 억누르는 동안, 여우가 핀잔 섞인 말을 건넸다.
“신경 끄시지.”
“우리가 붙어 다니든 말든.”
미어캣과 문조가 동시에 톡 쏘아붙였다. 그 새침한 반응에 잠깐 놀랐던 나는 그제야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두 동물의 목소리가 지금껏 들어 본 적 없는 미성이라는 점이었다.
‘혹시?’
나는 지금껏 만난 금수 대표들이 하나같이 다 수컷이라 미처 생각지 못했던 의심을 하나 떠올렸다.
“어머나, 금왕님.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정말 오랜만이에요!”
내가 미심쩍은 눈길을 던지는 사이 문조와 미어캣이 금왕을 향해 인사했다. 금왕도 눈을 깜빡이며 응답했다. 그러자 미어캣은 두 앞발로 볼을 감싼 채 슬며시 고개를 숙였고, 그 머리 위의 문조는 뽀로롱- 어여쁜 소리로 울며 살짝 허공으로 떠올라 정신없이 날개를 파닥였다.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는 둘을 보고 있노라니 문득, 가슴 떨리는 첫사랑을 마주한 소녀가 떠올랐다.
‘아. 이 녀석들은 역시 여자, 아니, 암컷인…….’
내가 막 앞서의 짐작에 확신을 더하고 있을 때였다.
꼬르륵.
다시금 커다란 뱃고동이 울리며 미어캣과 문조의 등장에 놀라 잊고 있던 배고픔을 상기시켰다.
“일단 밥부터 먹지.”
금왕이 그 큰 앞발로 내 머리를 토옥,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여기 있습니다!”
금왕의 명령을 들은 치타가 먼 곳의 원숭이들에게서 과일을 잔뜩 받아 왔다.
“감사합니다.”
꾸벅 고개를 숙인 나는 아까보다 더 바쁘게 울려 대는 뱃고동을 없애고자 서둘러 과일을 먹기 시작했다.
내가 처음 집어 든 것은, 이름은 잘 모르겠지만 노란 껍질에 달콤하면서도 향긋한 향내를 풍기고, 말랑말랑한 과실이 입 안에서 절로 녹아드는 과일이었다. 그를 한 입 베어 물자 배 속에서만 소란을 피우던 허기가 머리까지 침투해 돌연 엄청난 굶주림이 느껴졌다. 나는 손에 들고 있던 과일을 껍질 한 겹만 남을 정도로 정신없이 핥아 먹고, 곧바로 새 과일을 들어 허겁지겁 씹었다.
내 주먹만 한 과일 세 개를 순식간에 먹어 치우고 나서야 겨우 이성을 되찾았다. 그래도 완전히 배가 부르다는 느낌은 들지 않아 또 새로운 과일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러면서 대체 왜 이렇게 갑자기 배가 고픈가, 의아해하다가 이 아프리카에 온 이후 지금까지 식사를 한 기억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나마 먹은 거라고는 들판을 뛰어다니다가 목이 말라 근처에서 가장 맑은 강물을 조금 마신 정도였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방금 뱃고동이 울리기 전까지는 배고픔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행복하면 배가 고픈 줄도 모른다더니. 진짜 내가 행복하긴 무지 행복했었나 보다. 그렇다고 이제 와 배가 고파진 것이 행복이 가셔서라는 소리는 절대 아니었다. 동물들에게 둘러싸인 지금의 나는 여전히 무척 행복했다.
“자, 이거 먹어.”
내 바로 곁에 앉은 미어캣이 조금 전 금왕이 그 날카로운 발톱으로 쪼개 준 멜론 조각을 제 머리 위의 문조에게 내밀었다.
“고마워.”
문조가 짧고 굵은 부리로 멜론의 달콤한 부분을 쪼아 먹고는 미어캣의 머리에 제 머리를 비비며 인사했다. 살며시 감겨 일자가 된 눈이 무척 행복해 보였다. 보고 있는 나조차도 기분이 좋아질 만큼. 그 모습을 흐뭇한 얼굴로 잠시 바라보다가 나 또한 멜론 조각 하나를 집어 먹으며 금왕에게 고개를 돌렸다.
내가 미어캣과 문조와 함께 과일을 나눠 먹는 동안, 금왕은 저 멀리서 치타와 늑대, 여우와 모여 앉아 회의 중이었다. 본체의 모습으로 돌아가 거대한 금왕의 앞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맹수들의 모습에 당장 달려가고픈 기분이 들었지만, 심각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그들을 방해할 수는 없어 그저 손에 든 과일만 오물오물 씹어 먹었다.
“……어?”
열심히 과일을 씹다 말고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지난 이틀간 금왕 또한 무언가를 먹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는 사실이 떠올라서였다. 나와 함께 있을 때는 물론이고 내가 언덕 아래로 놀러 갔을 때도 늘 언덕 위 그 자리를 지키며 모든 동물을 내려다보기만 할 뿐, 딱히 식사하는 모습은 본 적 없었다.
본래 맹수들은 인간과 달리 규칙적인 식사를 하는 게 아니라 배가 고파져야만 사냥을 하고 먹으니 며칠 정도는 예사로 굶기도 한다는데. 그래서인가?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면 좀 의아한 것이…… 금왕은 대체 무엇을 먹고 살까 하는 것이었다. 비록 호랑이의 모습을 하고 있으나 그는 모든 금수들의 왕이었다. 그러니 그가 초식 동물을 잡아먹으면 그건 왕으로서 못 할 짓이 아닌가? 모든 동물을 두루 보살피는 것이 임무라는 금왕이 과연 그래도 될까.
게다가 저 엄청난 덩치를 유지하려면 한두 마리 갖고는 어림도 없을 것 같은데. 그렇다고 설마, 어울리지 않게 초식을 할까 싶기도 하고. 돌연 떠오른 의문에 내가 손에 들린 과일과 금왕을 번갈아 살필 때였다.
“금왕께서는 물론이고 저희 금수 대표들은 보통의 먹이가 아닌 금신의 샘물을 마시며 살아간답니다.”
“어…….”
불쑥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사람의 모습을 한 백호가 내 앞에 서 있었다. 전혀 기척을 느낄 수 없던 접근에 놀란 얼굴로 바라보는데, 그가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제야 정신이 들어 조금 전 그가 한 말을 떠올린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금신의…… 샘물이요?”
“네, 금신의 은혜로 내려오는 그 신비한 샘물을 한번 마시면 적어도 한 달은 힘들게 먹이를 찾아 헤매거나 수고로이 사냥을 하지 않아도 되지요.”
‘으음?’
설명을 듣고도 잘 연상이 되지 않아 미간을 모으자 백호가 설명을 이었다.
“마시면 그 양에 따라 일정 기간 아프지도 않고, 배고프지도 않고, 지치지도 않게 하는 특별한 샘물입니다. 본래 아무나 마셔서도 안 되지만, 또 아무나 마신다고 해서 같은 효과를 내지도 못합니다. 금신께서 허락한 존재들이 마실 때만 힘을 내는 신비로운 물이거든요. 또한 그 물을 얼마 이상 마시게 되면 치유 능력이나 회복 능력 등을 가지게도 됩니다. 그때 금왕께서 하신 것처럼.”
백호가 손끝으로 내 목을 가리켜 보였다. 그에 금왕이 삵에게 물린 상처를 핥아 치유해 준 기억이 떠올랐다. 그 혀가 가진 치유력의 근원이 바로 저 금신의 샘물이라는 거구나. 비로소 납득하는데 옆에 있던 문조가 먼저 뽀로롱, 기분 좋은 목소리로 울며 말했다.
“금신의 샘물은 또 엄청 맛있어. 여기 있는 어느 과일보다 더 맛있지. 아, 아직 열흘이나 남았는데 벌써 마시고 싶어져.”
“응. 진짜 맛있어. 그게 아니었다면 난 견디지 못하고 벌써 전갈 사냥에 들어갔을 테니까.”
문조의 호들갑스러운 목소리에 이어 미어캣이 옳다구나 동조했다. 참 사이가 좋은 동물들이었다.
“각 동물의 대표가 되면 대표 간의 균형을 위해 더 이상의 먹이 사냥을 금해. 안 그랬으면 이 미어캣과 문조가 지금 내 앞에서 이리 여유롭게 과일을 먹고 있는 건 절대 무리지?”
미어캣과 문조를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노라니 백호만큼이나 기척 없이 다가온 설표의 목소리가 들렸다. 역시나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그 장난꾸러기 소년 같은 얼굴과 목소리가 참 잘 어울렸다.
“당연하지, 일단 너부터 딱 한입에!”
설표의 옆으로 다가온 사자가 능글맞게 대꾸했다. 사람의 모습으로 본체일 때처럼 두 손으로 설표를 움켜쥘 듯한 모양을 만들어 보였다.
“웃기시네. 그 둔한 몸으로 어지간히도 그러겠다.”
설표가 흥, 코웃음을 쳤다.
“이 자식!”
사자가 욱해서 덤벼드는 바람에 둘은 순식간에 동물의 모습으로 변해 뒤엉키며 바닥을 뒹굴었다.
동물 대표가 되면 지위가 동등해지는 걸 넘어서서 하극상의 조짐도 생기는가 보다. 본래 자연에서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인데, 설표는 조금도 밀리지 않고 사자에게 맞섰다. 아니, 사자가 봐주고 있는 건지는 몰라도 설표보다 훨씬 덩치가 큰데도 얻어맞는 게 배는 많았다.
“이 녀석들은 정말 만나기만 하면 싸운다니까.”
사자와 설표의 싸움에 정신이 팔린 사이, 이번에는 퓨마가 등장했다. 역시 사람으로 둔갑하여 등장한 그는 카릉크릉, 아직도 으르렁대며 투닥거리는 두 맹수의 모습에 검은색 머리칼을 찰랑이며 고개를 흔들었다.
“근데, 슬슬 말려야지 않나.”
본래 맹수치고 온순한 편인 퓨마는 백호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에 고개를 끄덕여 동조한 백호가 일갈하듯 소리쳤다.
“그만두십시오! 멀지 않은 곳에 금왕이 계십니다!”
단호한 꾸짖음에 한쪽 앞발로 서로를 겨누고 나머지 발로 펀치를 날리던 두 맹수의 동작이 딱 멎었다.
“에이, 이번엔 진짜 보낼 수 있었는데.”
사자의 위쪽에서 아래쪽으로 펀치를 날리고 있던 설표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그리고 뒤로 공중제비를 돌아 일어섬과 동시에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이노무 자식, 보내긴 어딜 보내! 봐줬더니 정말 끝없이 기어오른다니까. 이 겁 없는 꼬맹이가!”
역시나 일어섬과 동시에 사람 모습으로 변한 사자가 설표의 머리를 주먹으로 꽝 내려쳤다.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그 날쌘 설표도 미처 피하지 못하고 정통으로 얻어맞았다.
“으악!”
설표가 바로 머리를 부여잡고 펄쩍펄쩍 뛰자 지켜보고 있던 미어캣과 문조 콤비가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어머, 그런데…… 그렇게 겁 없는 설표도 인간은 무서웠나 봐?”
미어캣이 웃음기 머금은 얼굴로 새침하게 말했다. 그에 동조하듯 문조가 뽀로롱, 뽀롱 예쁜 목소리로 울었다.
“응?”
벌써 아픔이 가셨는지 설표가 어느새 멀쩡해진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다들…… 평소에는 바쁘게 움직이는 데 방해된다고 잘 하지도 않는 인간 모습을 전부 하고 있는 걸 보니까 말이야. 여기 와서 변신한 것도 아니고 꽤 멀리서부터 그 모습으로 뛰어온 것 같은데.”
미어캣은 이곳에 모인 맹수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그러자 정곡을 찔린 것처럼 제각각 어깨를 움찔거린 그들이 왜인지 나를 향해 슬그머니 시선을 던졌다.
‘왜들 그러…… 헉, 설마…….’
불현듯 어떤 의심을 떠올릴 때였다.
“맹수들뿐일까, 금왕께서도 희롱당하신 마당에.”
어느새 회의를 마치고 다가온 늑대가 끌끌 웃으며 끼어들었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짐승의 모습이었는데, 지금은 다른 맹수와 마찬가지로 사람의 형체를 하고 있었다.
“뭐, 뭐얏! 그런 소문은 아직 못 들었는데……, 감히 우리 금왕님께도 그랬단 말이야?!”
방금까지만 해도 미어캣과 사이좋게 웃고 있던 문조가 갑자기 사납게 우짖었다. 하얀 날개 또한 거칠게 퍼덕이면서.
“꺅! 어쩐지 머리 검은 짐승답지 않은 소문이다 싶었는데! 이래서 소문은 믿을 게 못 돼!”
미어캣 또한 고 작은 손으로 주먹을 쥐고 호들갑스럽게 흔들면서 광분했다. 그리고 약 십여 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이야기가 끝난 여우를 배웅하는 금왕을, 마치 드넓은 바다를 사이에 둔 연인을 바라보듯 애절한 얼굴로 바라보며 둘이서 한목소리로 외쳤다.
“아아, 금왕니이이이임!”
이쪽에서 제법 소란이 일었지만, 여우와 치타의 말에 집중하느라 관심을 주지 않던 금왕이 순간 귀를 까딱이더니 고개를 돌렸다. 금왕의 시선이 자신들을 향하자 미어캣은 엄청난 속도로 그에게 달려갔다. 문조를 등에 업은 채 작은 몸을 엎드려 도도돗, 네 발로 빠르게도 내달렸다.
그러고는 금왕의 발치에 멈춰 서서 뜨거운 눈빛을 보내더니 갑자기 바닥에 엎드려―문조는 미어캣의 등에 엎드려―꺼이꺼이 울기 시작했다. 그 갑작스러운 상황에 금왕은 물론, 곁에 있던 치타까지 함께 당혹스러워하는 걸 나는 멍하니 지켜보았다.
“금왕께서 좀…… 인기가 많으십니다.”
나와 마찬가지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던 백호가 상황을 수습하듯 말했다. 굳이 그 설명이 없었더라도, 충분히 상황을 파악한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내심 걱정했다. 혹시 내가 잔뜩 흥분해 금왕에게 달려들 때도 저런가 하고. 만에 하나 그렇다고 한다면, 맹수들이 나를 보며 움찔대는 것도 왠지 이해가 될 것 같았다.
“저기…….”
금왕이 꼬리로 톡톡 머리를 두드려 주자 통곡을 딱 멈추고 얼굴을 붉히며 서로 머리를 맞대는 미어캣과 문조를 바라보던 나는 옆에 있는 백호에게 말을 걸었다. 나와 마찬가지로 황당한 표정으로 두 동물을 바라보던 그가 나를 돌아봤다. 하지만 나는 섣불리 말을 잇지 못하고 망설이다가 겨우 용기를 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저에 대한 소문이라는 건 대체…….”
“걱정하실 만한 소문은 아닙니다.”
백호가 설핏, 희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다소 냉정해 보이는 인상에 얹어진 옅은 미소가 눈부셨다.
“응. 오히려 엄청 좋은 소문이지.”
“한 머리 검은 짐승이 답지 않게 착한 짓을 해서 가여운 어린 삵을 구해 줬다는 이야기가 쫙 퍼진 거니까.”
“그리고 그 인간이 소원으로 너흴 희롱한 것까지 다 퍼졌지.”
“이제 좀 있으면 금왕이 희롱당했다는 소식도 퍼질 거고.”
환하게 웃는 설표의 소년 같은 얼굴도, 뭔가 재밌다는 표정을 떠올린 사자의 듬직한 얼굴도, 칠흑 같은 머리칼이 인상적인 퓨마의 무덤덤한 얼굴도, 늑대의 용맹한 얼굴도 모두 눈부셨다.
이제야 깨달은 사실이지만 인간형으로 변신한 동물들은 하나같이 준수한 외모를 자랑했다. 이들을 빼고도 지금까지 내가 보아 온 모두가 그랬다. 저마다의 개성이 다 다른데도 불구하고 모두 말끔하니 잘생긴 얼굴이라는 공통점이 존재했다. 그동안은 워낙에 동물 모습에만 정신이 팔려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뒤늦게 깨달은 사실에 눈길을 빼앗겨 나는 금수들의 대답을 그저 흘려 넘겼다.
“……한마디로, 머리 검은 짐승이 우리 맹수 대표들을 차례로 거치더니 이제는 금왕까지 희롱한다는 소문이 아주 쫙 퍼지게 된 거라고 할 수 있지.”
그래서 내가 제대로 들은 대답은 그것이 전부였다.
‘매, 맹수 대표를 차례로 희롱……?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문이…….’
내가 억울한 표정으로 항의해 보았지만, 맹수들은 전혀 내 뜻을 읽어 내지 못했다. 오히려 왜 또 그렇게 지그시 쳐다보느냐고 불안해하며 뒤로 한 걸음씩 물러났다. 그리고 자신들의 몸을 살피며 제 몸 어딘가에 혹시 동물 모습이 남아 있을까 봐 걱정했다.
‘에이, 설마. 아무리 나라도 변신이 덜 돼서 삐죽 튀어나온 꼬리나 귀 같은 거에…… 좀 끌리는데. 오, 완전 귀여울 것 같다. 상상하니까 진짜 귀여워! 맹수 본연의 모습보다야 좀 덜하겠지만 아마 엄청 귀여울…….’
나도 모르게 또 이런저런 망상의 나래를 펼치기 시작했다. 덕분에 순간 눈을 빛냈는지 맹수들이 또 한 걸음 물러났다. 그에 이번에는 한 번 심각하게 고민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래도 내가 지난번에 너무 심했었나. 그럼, 앞으론…… 조금 덜 조물거려야겠다.’
차마 안 만지겠다는 장담은 못 하겠어서 적당한 타협안을 찾아내며 나를 경계하는 맹수들을 피해 금왕에게 다가갔다.
“꺅! 어딜 와?!”
“위험해요, 금왕님. 피하세요!”
내가 다가가자 한껏 얼굴을 붉히며 몸을 비비 꼬던 미어캣과 문조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문조는 나를 거부하듯 열심히 날개를 퍼덕였고, 미어캣은 미어캣대로 두 팔을 쫙 펼치며 금왕의 앞을 막아섰다.
이거 너무 무뢰한 취급이 아닌가 싶어 조금 억울했지만 마냥 억울할 일만도 아니었다. 금왕에게 다가서자마자, 나를 막아선 미어캣의 바로 뒤에 있는 금왕의 고 도톰한 발부터 시작해서 둥그런 입매, 복슬복슬한 목, 봉긋한 귀를 바라보자 절로 손가락이 꿈틀거렸다.
미어캣과 문조의 과민 반응에 당혹스러워하던 금왕도 내가 눈을 떼지 못하자 땅에 대고 있던 앞발을 움찔, 반사적으로 들어 올렸다. 허공에 살짝 굽혀진 채 들려진 앞발조차 귀여웠다. 펄쩍 뛰어올라 그 앞발에 매달려 뺨을 비벼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만큼. 분명 조금 전에 실컷 만졌는데, 어째선지 그 느낌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다시 한번 만져 보면 바로 되살아날 것도 같은데…….
‘꿀꺽.’
어떤 느낌이었는지는 기억도 안 나는데, 그게 무척 기분 좋았던 것만은 확실히 떠올라서 침이 꼴깍 넘어갔다. 그런 내 모습에 금왕이 긴장한 듯 한껏 몸을 낮췄다. 그리고 숨죽인 채 가만히 나를 지켜봤다.
“……이번에는 안 달려드나?”
나를 경계하던 금왕이 조심스레 물었다. 괜히 제 발이 저려서인지 그의 심란한 푸른색 눈이 마치 ‘네 표정은 벌써 달려들어 나를 주물거리고 있는데.’라고 말하는 것 같아 내심 찔렸다. 난 나름대로 애정을 보였을 뿐인데 이렇게 싫어하는 걸 보니 좀 미안하기도 하고, 걱정도 됐다. 혹시, 미움받게 되는 건 아닌가 싶어서.
예전에, 동물과 말이 통하면 좋겠다고 소원하면서도 만약 그렇게 되면 행복한 한편으로 힘들지 않을까 생각한 적 있었다. 동물들이라고 모든 인간을, 특히, 나를 좋아할 리는 없을 테니까. 차라리 말이 안 통하면 모르고 넘어가겠지만 만약 말이 통해 그쪽에서 내가 싫다고 하면 무척 슬플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문득 금왕과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내게 꽤 쌀쌀맞게 굴던 그가. 그러다 이제 겨우 조금 가까워졌나 싶었는데 다시 그렇게 되면…….
“인간?”
생각에 잠겨 멀뚱히 바라보기만 하자 금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이렇게 심란한 와중에도 그 모습은 어쩜 이리 귀여운지. 이러니 손가락이 절로 움찔거릴 수밖에. 차라리 몰랐으면 괜찮았겠는데, 이미 그 감촉을 알고 있는데 참으려니 더 힘들었다. 게다가 이렇게 바로 눈앞에 보이는데, 그냥 살짝만…… 아냐, 정신 차리자! 더 바라봤다가는 또 이성을 잃고 달려들 것 같아서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크흑, 슬프지만 참자!’
나는 주먹으로 이마를 두드리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굳이 싫어하는 걸 주물거리지 않아도, 바라보기만 해도 아주 즐겁지 않은가. 이것만으로도 내게는 엄청난 행운인데, 그동안 너무 과한 행복에 욕심을 부렸다. 그저 지켜보기만 해도, 나는―.
“인간?”
의아한 목소리와 함께 이마와 턱에 살랑살랑 보드라운 감촉이 와 닿았다. 주먹에 머리를 기대고 침묵하는 내가 걱정스러웠는지 금왕이 꼬리로 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아아, 겨우 진정되어 가던 머릿속에 위험 신호와 함께 혼란이 찾아왔다.
“괜찮나?”
금왕이 염려스러운 얼굴을 했다. 나는 턱에 닿는 감촉에 온 신경을 쏟은 채로 멍청히 고개만 끄덕였다. 벌써 위험 신호는 주황색을 지나 붉은색으로 넘어가는 중이었다. 그래도 나는 안간힘을 쓰며 참았다. 욕심쟁이가 되면 안 된다고. 이미 충분히 행복한 상황이라고. 그런데 그 순간―.
“그렇다면 다행이고. 걱정시키지 마라, 인간.”
금왕이 토옥, 자신의 큰 앞발로 내 머리를 살며시 누르며 내 모든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아흑! 역시 못 참겠어요!”
나는 결국 내 머리 위에 얹힌 금왕의 앞발을 손으로 꼭 붙잡아 마구 볼을 비볐다.
‘아, 이 좋은 느낌. 절대 포기 못 하겠어!’
다시 내 머릿속에서 이성이 날아갔다.
‘으아아아! 너무 좋아! 완전 최고! 대박 부드러워!’
내가 막 금왕의 도톰한 목털을 만지기 위해 앞발을 타고 올라 털이 풍성한 목에 매달릴 때쯤이었다(아까와 달리 금왕이 서 있었기 때문에 목을 만지려면 높이 올라가야 했다. 그래서 난 정말 그냥 다리를 타고 기어 올라갈 생각이었는데, 친절한 금왕이 내가 떨어질까 봐 걱정됐는지 나를 동그란 발 위에 태워 올려 주었다).
“꺄아아악! 어딜 만지는 거야!”
한동안 경악한 얼굴로 굳어 있던 미어캣과 문조가 뒤늦게 한목소리로 외쳤다. 금왕의 길고 부드러운 털에 마구 얼굴을 비비며 행복에 젖어 그들의 존재를 잊고 있던 나는 난데없는 비명에 놀라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이 건방진 인간, 당장 내려오지 못해?! 그냥 희롱도 아니고 감히 모, 목을……!”
“어쩜 이렇게 무례할 수가!”
“어…….”
호들갑을 넘어 분노와 충격을 내보이는 두 동물의 모습에 나는 당황한 눈길로 금왕을 쳐다보았다. 내키지 않는다는 듯 떨떠름한 표정이기는 하지만 별다른 말 없이 얌전히 목을 내어 주고 있어서 몰랐는데, 내가 뭔가 엄청난 실례를 한 건가?
“아무리 무지한 인간이라도 감히 반려도 아니면서 금왕님의 목을 핥다니!”
걱정에 잠긴 사이 어느새 높은 곳까지 날아온 문조가 내 머리를 쪼며 쐐기를 박았다.
‘엉? 핥다니? 난 그냥 얼굴을 비볐을 뿐인데…… 게다가 반려라는 건 또…….’
의아해하던 나는 이어지는 문조의 말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냥 희롱 정도가 아니라, 사랑 고백을 한 거였다니!”
……아하하.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요…….
“이, 이!”
콕. 콕. 콕콕.
문조는 씩씩거리는 얼굴로 연신 내 머리를 쪼았다. 때문에 멍해진 내가 팔에 힘이 빠져 비틀거리자 금왕이 나를 앞발에 태워 땅에 내려놓았다.
“이 나쁜 인간!”
땅에 내려오자, 미어캣까지 내게 달려와 고 자그마한 손으로 내 다리를 토닥토닥 두드렸다. 딴에는 힘껏 때리는 것 같은데, 사실 그리 아프지는 않았다. 하지만 문조에게 머리를 쪼이고 다리를 공격당하니 정신이 없는 건 사실이었다. 덕분에 두 동물의 합동 공격에 비틀거리다 넘어져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만들 해라.”
내가 바닥에 넘어지고도 문조와 미어캣이 공격을 멈추지 않자 금왕이 앞발을 들어 내 앞을 막았다. 순간 정말 거짓말처럼 동작을 딱 멈춘 미어캣과 문조가 억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에 금왕이 고개를 내저으며 다시 한번 하지 말란 뜻을 전했다. 그러자 흑, 비련의 주인공처럼 각각 손과 날개로 얼굴을 가리며 고개를 돌리는 모습이 마치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다.
“몰라서 그랬겠지. 설마 알고 그랬을까.”
문조와 미어캣의 열렬한 반응에 금왕이 앞발을 거두며 달래듯 말했다.
“정말이야?”
“진짜?”
“어……?”
“그랬겠지. 안 그럼 안 되지, 인간은 그저께 내 목도 사정없이 쓰다듬었으니.”
갑자기 내게 달려드는 문조와 미어캣에 당황해서 말문이 막혔는데 곁에 있던 사자가 대신 대답했다.
“내 목도.”
“나도.”
“저도 당했습니다.”
퓨마와 설표, 백호가 차례로 동조했다. 모두의 동의에 사자가 거 보라는 듯이 턱짓을 했고, 미어캣과 문조의 눈이 갑자기 초롱초롱 빛나기 시작했다. 슬픔이 차오르던 눈에 갑자기 엄청난 희망의 빛이 반짝거렸다.
“게다가 그날은 재규어 대표도 있었고. 또 이 아프리카에 와서도 얼마나 많은 짐승한테 달라붙었다고.”
미어캣과 문조의 부담스러운 눈빛 공격에 움찔, 한 걸음 물러나는데 설표가 말을 보탰다. 사자가 바로 고개를 주억거리며 수긍했다.
“그렇지. 게다가 방금은 금왕께도 그랬고……, 만약 알고 이 모든 동물을 다 건드렸다면 그건 천하의 난봉꾼이지.”
‘나, 난봉꾼?’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이미 나를 보고 있던 사자와 눈이 마주쳤다. 왠지 묘하게 음흉하면서도 짓궂은 눈빛이었다.
“아, 아니에요! 저는 전혀……!”
나는 괜한 오해를 살까 봐 서둘러 손을 내저었다.
“응? 뭐가 아닌데? 몰랐던 게 아니야?”
내 말을 잘못 이해한 설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에 잠깐 풀렸던 문조와 미어캣의 얼굴이 금세 살벌해졌다.
“뭐얏?!”
“그럼 알고 그랬단……!”
“아니요, 전혀, 전혀 몰랐어요!”
서둘러 정정했다. 하지만 문조와 미어캣은 여전히 내게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진짜야?”
“어떻게 모를 수가 있지?”
“그야 당연히…….”
동물들 간의 룰이니 인간인 내가 알 수 없지 않은가. 반박하려다 말고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 보니 금왕의 목을 핥는 것이―사실, 핥지도 않았지만 어쨌든―구애의 행동이라는 걸 알건 모르건 간에,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 이전에, 우리에게는 더욱 큰 문제가 있었다. 뒤늦게 그를 자각한 나는 미어캣과 문조를 내려다보았다.
“어, 저기…… 근데 저는…… 남자인데요?”
얼른 대답해 보라고 매서운 눈빛으로 재촉하는 두 금수의 모습에 조심히 입을 열었다.
“남자? 아, 수컷! 근데, 그게 뭐? 왜 갑자기 딴소리야!”
“이거 봐, 말을 돌리는 게 역시 수상하다니까!”
멈칫했던 두 금수가 이내 강렬하게 반발했다.
“……아?”
나는 조금 얼이 빠질 수밖에 없었다.
‘뭐지, 동물들 세계에도 동성애가 있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당연하다는 반응…… 아니, 어쩌면 혹시……!’
서둘러 고개를 젖혔다. 나를 지키듯 머리 위에서 앞발을 세우고 앉아 있는 금왕의 뽀얀 턱이 보였다. 이윽고 시선을 느낀 금왕이 고개를 내리자 그의 푸른 눈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 순간, 나는 머릿속에 떠오른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다.
“금왕님, 호, 혹시 여자, 아니, 암컷이신……?”
금왕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 용맹하고 위엄 넘치는 모습에 자연스레 수컷이리라고 생각해 버렸지만 아직 확인해 본 건 아니지 않은가. 게다가 본래 호랑이의 경우는 암컷도 수컷 못지않게 강인하게 생겼으니까 가능성이…….
“인간, 지금 또 무슨 엉뚱한 소릴 하는 거야.”
……없구나. 내 물음이 채 마무리되기도 전에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설표가 정신 차리라며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금왕이야 당연히 용맹한 수컷이시지. 뭐 그렇다고 암컷들을 무시하는 건 아니고, 암컷은 늘 사냥하며 새끼를 낳고 기르느라, 또 어떤 종족들은 무리를 이끄느라 바빠서 그 외의 일은 할 틈이 없다고. 그러니 금왕은 물론이시고 우리 금수 대표 중에도 암컷은 거의 없어.”
아무리 인간이라도 그쯤은 당연히 알아야지? 너무도 당연하단 설표의 대답에 내 추측이 그만큼 어이없었나, 싶어 애매한 얼굴로 굳어 있는데 앞쪽에서 사자의 큭큭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이젠 손이 아니라 말로도 희롱을 하네, 그려. 기술 좋은데, 인간?”
사자가 짙은 미소를 드리운 채 음흉하게 눈을 빛냈다. 윽, 생각지 못한 오해에 신음을 삼킬 때였다.
“어쩜 그런 말도 안 되는 무례한 생각을!”
“이 건방진……!”
미어캣과 문조의 성난 외침이 날카롭게 공기를 갈랐다. 그러자 불현듯 조금 전 설표가 해 준 이야기가 떠올랐다.
-……금왕은 물론 우리 금수 대표 중에도 암컷은 거의 없어.
나는 앙칼진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는 두 금수를 새삼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설표의 말에 따르면, 비록 사나운 억양이기는 하지만 한 귀에도 아름다운 미성과 금왕을 향한 무척 섬세한 감수성을 자랑하는 이 두 금수의 성별을 내가 잘못 추측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아닐 수도 있었다. 거의 없다가 전무(全無)를 뜻하는 건 아니니까.
“그럼, 혹시 두 분도 수컷인가요?”
“당연하지!”
“뭘 굳이 물어!”
두 금수가 즉답했다. 예상했던 대답이었기에 더욱, 나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같은 수컷인데도 금왕님을…….”
이토록 열렬히 사모한단 말인가. 의문을 채 완성하지 못하고 말끝을 흐렸다. 혹시 이 두 금수의 금왕에 대한 열렬한 애정이 자신들을 다스리는 왕에 대한 단순한 존경이나 동경이 아닌가 싶어져서였다.
“수컷이면 어때서? 우리 금왕님은 금신께 축복을 받아 상대의 성별에 관계없이, 어떤 반려를 맞아도 다 임신시킬 수 있으시다고!”
미어캣이 에헴, 우쭐한 얼굴로 헛기침을 했다. 그 머리 위에 올라앉아 있던 문조도 동조하듯 뽀로롱뽀로롱, 울었다. 반사적으로 그게 다는 아니지 않느냐고 반박하려던 말을 삼켰다. 생각해 보니, 동성애의 문제를 넘어 비록 같은 금수라고는 해도 이 작은 미어캣과 문조가 저 거대한 흑호를 사랑한다는 것부터가 전혀 일반적이지 않았다.
게다가, 동성애를 터부시하는 건 어디까지나 인간들의 풍습이었다. 일반적으로 금수들이 동성끼리 교미를 하지 않는 건 종족 번식 본능에 반하기 때문이지, 도덕의 문제는 아닐 테니까. 그런데 그 문제가 해결된다고 한다면, 금수들에게 있어 동성애는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
‘……아. 그러면, 내가 금왕의 목에 부비댄 것도 정말 고백 비슷하게 보이긴 했겠다.’
새삼 민망함을 느낄 때였다.
“금왕님, 아무리 저 인간이 삵을 구해 줬다고 해도 이건 너무 관대한 처사예요. 감히 금왕님을 희롱하는 인간이라니, 더 곁에 두어선 안 됩니다!”
“맞아요. 가뜩이나 업무도 바쁘신데. 게다가 감히 인간 주제에 우리 금왕님을 노리다니!”
미어캣과 문조가 금왕에게 반론을 제기했다. 딴에는 열정적으로 의견을 피력한 것이었겠지만, 거대한 금왕의 앞에 선 미어캣의 자그마한 뒷모습은 무척 앙증맞기 그지없었다. 그 머리 위에서 날개를 퍼덕이며 말을 거드는 문조의 뒤태도 무척 귀여웠다. 그에 정신이 팔려 홀린 듯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저 인간을 지금 당장 금왕님 곁에서 쫓아내야 합니다!”
째릿, 두 금수가 나를 노려보았다. 이번에는 차마 귀엽다고 할 수 없을 살벌한 눈빛이었다. 나도 모르게 주춤, 한 걸음 물러나게 될 만큼.
“이 녀석들. 너무 무례하게 구는구나. 귀한 손님이시다.”
금왕이 두 금수를 엄하게 꾸짖고는 내게 사과의 눈길을 보냈다. 그제야 얼음 상태에서 벗어난 나는 신경 쓰지 말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귀한 손님이라 봤자…….”
“겨우 어린 삵을 한 번 구해 준 것뿐이잖아요.”
“겨우라니!”
금왕이 다시 매섭게 꾸짖는 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두 금수는 억울한 표정이었다.
“우리는 너무 멍청해요. 인간에게 백번 잘하다 한 번 잘못하면 바로 버림받는 것이 금수들인데, 인간이 백번 잘못하다 한 번 잘해 주면 또 이렇게 기쁘다고 받아들여 좋아하잖아요!”
“맞아요. 그런 데 속아 넘어가면 안 돼요! 인간은 서로 위협받는 상황에서 저들은 우릴 공격해도 우린 공격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이기적인 생물이에요. 저들은 무서우니 자신을 지키겠다고 우릴 상처 입히면서, 우리가 두려움에 스스로를 지키려고 덤비면 죽이려고 들어요. 다치면 똑같이 아프고 무서운데 말이에요. 그런 못된 인간들이에요. 잊으시면 안 돼요!”
문조와 미어캣이 슬픔과 분노가 뒤섞인 눈으로 나를 보며 연달아 소리쳤다.
“…….”
잠시 무거운 침묵이 주위에 내려앉았다. 나는 누군가에게 뒤통수를 얻어맞기라도 한 것처럼 멍해져서 두 금수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 그들이 내뱉은 말 한마디, 한마디마다 진심이 그득 담겨 묵직하니 나를 짓눌러 왔다.
-우리는 너무 멍청해요. 인간에게 백번 잘하다 한 번 잘못하면 바로 버림받는 것이 금수들인데, 인간이 백번 잘못하다 한 번 잘해 주면 또 이렇게 기쁘다고 받아들여 좋아하잖아요!
-맞아요. 그런 데 속아 넘어가면 안돼요! 인간은 서로 위협받는 상황에서 저들은 우릴 공격해도 우린 공격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이기적인 생물이에요. 저들은 무서우니 자신을 지키겠다고 우릴 상처 입히면서, 우리가 두려움에 스스로를 지키려고 덤비면 죽이려고 들어요. 다치면 똑같이 아프고 무서운데 말이에요. 그런 못된 인간들이에요. 잊으시면 안 돼요!
문조와 미어캣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자연스럽게 오버랩되며 메아리쳤다.
-인사는 됐다. 머리 검은 짐승의 인사를 받으려고 한 것이 아니라, 내 아이를 구하려던 것뿐이니까.
돌연 금왕과의 첫 만남이 떠올랐다. 내게 무척 쌀쌀맞았던 그의 태도. 아마도 그건 ‘나’라는 대상에 한해서가 아닌, 인간 자체에 대한 불편함이 녹아 있어서였던 모양이다.
“인간은 나빠요!”
“맞아요, 인간은 나쁜 생물이에요!”
아까부터 울먹거리던 두 금수가 결국 으앙, 울음을 터뜨렸다. 그들을 내려다보던 금왕이 다시 내 눈치를 살폈다. 혹시 내가 상처입지 않았을까 걱정하는 눈빛이었다. 나는 괜찮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격앙된 채 소리치는 걸로 봐서, 아마 두 금수가 진지하게 생각해서 한 말은 아닐 터였다. 그렇다고 진심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겠지만. 비록 지금 이 순간 울컥해 내뱉었지만, 평소에 쌓이고 쌓인 울분과 설움이 담긴 말일 터였다. 그리고 미움과 분노 또한.
“이 녀석들…….”
자신의 말까지 자르고 제 할 말을 늘어놓은 두 금수를 엄히 꾸중하려던 금왕은 결국 아무런 말도 못 하고 다시 입을 다물었다. 한동안 침묵이 찾아왔다. 가까운 곳에 둥글게 모여 앉아 우리의 상황을 조용히 구경 중이던 백호와 설표, 사자, 늑대, 여우, 치타 주위로도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모두가 굳은 얼굴로 누구 하나 섣불리 입을 떼지 못했다.
나는 입뿐만 아니라 가슴도 뻐근하고 묵직하게 굳어진 느낌이었다. 요 이틀간 행복에 푹 빠져서, 금왕을 처음 만난 이후 다들 내게 호의적이기만 한 데에 익숙해져서 이렇게 갑작스럽게 미움을 받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충격에 답답함이 가슴에 들어찼다. 왠지 나도 두 금수를 따라 울고 싶어졌다. 그때, 문득 머리 위에 사뿐한 감촉이 닿아 왔다. 놀라 고개를 들자, 금왕이 보드라운 꼬리로 내 머리를 토닥여 주고 있었다.
“……어쩔 수 없다. 우리는 인간의 양심이니까.”
곧 금왕이 꼬리를 거두며 말했다. 순간 모두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양심?’
나 또한 의아한 눈길로 금왕을 바라보았다.
“우리에겐 인간들을 공격하면 안 된다는 규칙이 있지만, 인간들은 다르다. 우리를 공격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건 어디까지나 인간들의 선택. 전적으로 그 인간의 양심에 달린 일이지. 우리가 관여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억울한 일이지만, 금신께서 그리 정해 놓으셨으니 어쩔 수 없다. 게다가 이제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그 양심을 지키는 이들이 없어지니…….”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금왕이 바라본 것은 나였다. 아니, 나라는 존재를 통해 볼 수 있는 인간 모두일 것이었다. 씁쓸한 그의 눈빛이 그리 말하고 있었다. 또 한 번 누구 하나 쉬이 말을 꺼낼 수 없는 침묵이 찾아왔다. 암묵적인 동의였다. 나는 그에 동의할 수도 동의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예전에 어떤 책에서, 자연에게 가장 큰 해악은 인간이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동물들은 절대 환경에 반하지 않고 자신들에게 주어진 대로 사는데, 인간은 그것을 거스르고 역행하며 모든 고리를 제멋대로 끊어 버린다고. 그 한 예로 어떤 호랑이가 인간을 공격하면, 그 호랑이의 씨를 마르게 하려고 덤벼드는 것이 인간이라고. 본래 자연의 생태에서는 절대 이길 수 없는 천적 관계의 동물들을 과학을 이용해 만든 무기로 도리어 학살하며 역행한다고.
물론, 그 말에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는다. 일단 사람을 공격해 인육을 맛본 맹수가 있다면, 그 맹수는 또 사람을 공격할 확률이 높으니 죽이는 것이 맞지 않은가. ……그런데, 그 기준은 또 누가 정한 거지? 또 인간을 공격할 테니, 죽여야 한다는 건…… 정작 인간은 가죽을 벗기고 고기를 얻기 위해 맹수들을 수시로 죽이지 않는가.
그렇다면 금수들도 자신을 죽인 인간을 죽여야 하는 게 아닐까. 혹은 인간이 살기 위해 짐승을 죽여야 하는 게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한다면, 그게 자연의 이치 중의 하나라면, 맹수 또한 먹이로 인간을 죽이는 게 무슨 문제가 된다는 거지.
당연하게 생각해 왔던 사실이 흔들리며 혼란을 가져왔다. 미약한 두통도 함께. 그래서 나도 모르게 미간을 모으는데, 돌연 금왕의 눈빛이 변했다.
“그래도, 무척 오랜만에 그 양심을 지켜 주는 이를 만났다.”
금왕은 이제 나를 통한 인간이 아니라 나 자신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 인간은 양심을 지키는 걸 넘어서, 진심으로 애정을 보여 주기도 하더군. 내 아이들을 무척 아끼고 사랑해 주지. 나는 그것이 기쁘고, 또 고맙다. 단지 그 어린 삵을 구해 준 인간이라서가 아니라, 그래서 귀한 손님이라고 말했던 거다.”
금왕이 고 도톰한 앞발을 뻗어 톡, 내 머리를 가볍게 두드렸다. 마치 기특하다고 칭찬하듯. 순간 복잡하던 머릿속이 대번 정리되어 말끔해졌다. 나는 곧 고개를 숙여 쑥스러움에 달아오른 얼굴을 감췄다. 그리고 잠시 뒤, 어쩐지 고요한 느낌에 고개를 들자 금왕은 내가 아닌 두 금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잘…… 잘못했어요, 금왕님!”
“저희가, 저희가 너무 생각이 짧았어요!”
눈물이 가득 고인 눈으로 금왕을 바라보던 두 금수가 빠르게 반성했다. 금왕이 잘했다는 듯 도톰한 꼬리로 아주 조심스럽게 녀석들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 사과는 내가 아니라 인간에게 하는 게 맞지 않겠느냐.”
금왕의 말에, 그의 꼬리를 느끼며 훌쩍거리던 두 금수가 나를 쳐다봤다.
“미, 미안해, 인간.”
“진짜 미안.”
그렁그렁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던 미어캣이 먼저 절을 하듯이 머리를 깊이 숙였고, 그로 인해 그의 머리에서 미끄러져 내려온 문조 또한 바닥에 부리가 닿을 듯 기우뚱 몸을 숙였다.
“우, 우린 너무 화가 나서. 우리가 몇 년이나 사모한 금왕님을 감히 인간 따위, 아니, 인간이 넘보는 게 싫어서 무례를 저질렀어.”
“그치만 그 어린 삵을 구해 준 건 우리도 고맙게 생각해. 정말 고마워.”
‘헉!’
훌쩍훌쩍 눈물을 삼키며 사과하는 두 금수의 모습이 못 견디게 귀여워서 화가 나기는커녕 잠시 심호흡을 하며 가슴을 부여잡아야 했다. 자꾸 두 금수를 끌어안고 싶어 움찔대는 손끝을 겨우 억누르고 있을 때였다. 금왕이 잘했다는 듯 또 한 번 두 금수의 머리를 톡톡 두드려 주었다. 그러자 감정이 폭발했는지 녀석들이 으앙, 울음을 터뜨렸다.
“미안해, 인간. 진짜 미안해!”
“미안. 정말 미안해!”
엉엉 울면서도 계속 사과하는 모습에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두 금수에게 다가가 그들을 꼬옥 끌어안았다.
“저는 괜찮아요. 저기, 정말 괜찮으니까…… 아.”
내 품에 안기자 더욱 서럽게 우는 두 금수에 당황해서 어설프게 위로를 건네자, 이번에는 내 머리 위로 사뿐. 다정한 감각이 내려앉았다.
‘㉦’
한참이나 울먹이는 목소리로 내게 미안하다며 사과를 한 문조와 미어캣은 더 이상 이 자리에 있기가 민망했던지 꾸벅 인사를 하고는 물러갔다. 그들이 사라지자 한참 시끌벅적하던 언덕이 다시 고요해졌다. 그 가운데 나는 금왕을 조금 먼 곳에 두고 앉아 혼자만의 시간을 가졌다.
처음에는 두 금수가 했던, 인간이 나쁘다는 말을 잠시 곱씹었고. 두 번째는 금왕이 금수에게는 인간을 공격하면 안 된다는 규칙이 있지만 인간에게 금수의 생사는 양심의 영역이라는 말을 되새겼으며, 마지막으로는 그가 나를 칭찬해 준 순간을 떠올렸다. 앞의 두 가지 문제가 많은 것들을 생각게 했기에 머릿속이 복잡했는데, 마지막 일을 떠올리자 이내 마음이 편안해졌다.
나는 금왕에게 시선을 던졌다. 무슨 소동이 있었느냐는 듯 여느 때처럼 무심하게 언덕 아래를 내려다보는 그의 뒷모습. 지금껏 수도 없이 봐 온 모습인데도 어쩐지 달리 보였다.
-그래도, 무척 오랜만에 그 양심을 지켜 주는 이를 만났다. 그 인간은 양심을 지키는 걸 넘어서, 진심으로 애정을 보여 주기도 하더군. 내 아이들을 무척 아끼고 사랑해 주지. 나는 그것이 기쁘고, 또 고맙다. 단지 그 어린 삵을 구해 준 인간이라서가 아니라, 그래서 귀한 손님이라고 말했던 거다.
설마 금왕이 그렇게 진지하게 나를 반기고 있다고는 생각지 못했기에 왠지 기분이 묘했다. 게다가 그 말이 백성을 정말 사랑하는 왕으로서의 위엄과 애정을 담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다시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귀여워 손이 근질거리는 기분으로 바라보았던 금왕의 뒤태가 이제는 귀엽다는 느낌을 넘어, 왕으로서의 엄숙함을 느끼게 했다.
철썩―.
하고 꼬리로 땅을 내려치는 모습은, 음, 좀…… 귀엽지만. 그래도 이제 귀엽게 보지 말자. 와, 왕으로 존경하며 바라봐…….
할짝―.
어, 음. 그 곱고 보드라운 분홍빛 혀로 앞발을 핥는 모습도 참, 거시기, 숨넘어가게 귀엽지만, 그래도 멋진 왕이니까―. 애써 허공에서 꼼지락거리는 손을 억누르고 있는 찰나.
“침 떨어지겠습니다.”
“아.”
웃음기 섞인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백호가 미소 띤 얼굴로 내 앞에 서 있었다. 내 오른쪽에 자리를 잡고 앉는 그를 바라보는데 이번에는 왼쪽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만지고 싶으시면 가 보시지 그러십니까.”
어느새 털썩 자리를 잡고 앉은 사자가 능글맞은 미소를 띠었다.
“벌써 손은 만지고 싶어서 반쯤 날아가 있는데, 왜 안 가?”
설표도 말을 보태며 내 앞에 다리를 굽히고 앉았다. 치타와 늑대도 말없이 뒤쪽으로 다가와 섰다.
“아. 혹시 막 가려는 걸 우리가 막아서 그런가?”
“어, 아니. 그, 이제는 좀 자제하려구요…….”
갑자기 나타난 맹수들을 정신없이 둘러보다가 설표의 물음에 정신을 차리고는 대답했다. 설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제?”
“네.”
고개를 끄덕이자 이번에는 옆에 있던 백호가 나섰다.
“혹시, 문조랑 미어캣이 한 말 때문에 그러십니까?”
“그건 신경 쓸 필요가…….”
“맞아, 금왕님께서도 말씀하셨지만 그건…….”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사자와 설표가 끼어들었다. 나는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 말 때문이 아니라 그냥 제가…… 금왕님께서는 그렇게 진지하게 저를 생각해 주시는데 제가 너무 금왕님을 가볍게만 생각한 것 같아 죄송해서요.”
그래서 이제부터는 금왕님이 진정 금수의 왕이라는 자각을 좀 갖기로 했습죠, 라는 말은 어쩐지 민망해서 삼켰다. 내 말에 맹수들은 말없이 나를 주시했다. 그 시선이 묘하게 부담스러워서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아, 게다가 제가 너무 생각 없이 행동해서 실례를 범하기도 했구요.”
“실례?”
설표의 반문에 나는 손가락을 들어 내 목을 가리켰다.
“그, 고백한 거 말이에요.”
설표가 아하, 하며 눈을 빛냈다.
“아, 근데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전 그때 목을 핥지도 않았고, 또 진짜 알고서 한 건 아니었어요. 사실, 목을 핥는 게 왜 고백이라는 건지 잘 모르겠기도 하고…….”
“목은 생명과 직결되는 부위이니 아주 중요한 곳이잖습니까. 특히 맹수들은 상대의 목줄기에 이빨을 박아 숨통을 끊는 경우가 많지요.”
내 의문에 백호가 답을 주었다.
“그래서 웬만큼 신뢰하지 않는 한 절대 다른 이에게 목을 내어 주지 않지요. 제압당한 상대에게 억지로 눌리지 않는 한. 한데 모든 금수 가운데서도 가장 강한 금왕의 목을 만질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지 않느냐, 그 스스로 상대에게 목을 내어 주지 않으면 말이다, 라는 이야기가 와전되면서…… 그 목을 만질 수 있는 이는 금왕의 반려뿐일 것이다, 만약 누군가 그 목을 만진다면 그건 반려가 되고 싶다는 고백이다, 라는 전설까지 되고 만 것이지요.”
“뭐, 목 이전에 감히 금왕의 몸에 손대려고 생각한 존재도 없었지만. 우리 목을 마구 끌어안았을 때는 당황도 한 데다가 전부한테 다 그러니 고백이라고는 전혀 의심할 필요가 없었고.”
“그래도 너무 자연스럽게 목에 폭 파묻혀서 진짜 금왕께서 드디어 반려를 맞으시는 건가 했는데…….”
설표와 사자가 백호의 말을 받았다. 그러고는 잠시 침묵이 이어지는가 싶더니, 이번에는 뒤쪽에 있던 맹수들이 대화를 이어 나갔다.
“얼마 전에 설왕이 반려를 맞았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도 슬슬 준비해야지 않나 생각하던 참이기도 해서 더 그랬겠지.”
“그러니까. 뭐, 인간이라는 점은 예상치 못했지만…… 설왕의 반려도 인간이라고 들었으니, 그리 놀랄 일도 아니지.”
“어?”
깜짝 놀라 고개를 들자 아직 서 있는 치타와 늑대의 모습이 보였다.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던 둘이 내 시선을 느끼고 나를 내려다보았다.
“뭐, 하여튼. 고백이었든 고백이 아니었든, 금왕께서 소중한 목을 그렇게 순순히 내어 줄 정도면 믿고 신뢰한다는 의미이니 괜한 걱정 말고 만져도 괜찮을걸, 인간?”
“아, 그러고 보니까…… 인간, 오늘 아침에 금왕님 품에서 잠들지 않았었나? 나 심부름 가는 길에 잠깐 들렀다가 봤는데.”
“정말입니까?”
“진짜?”
“허?”
“그런 일이…….”
“와. 인간, 정말 여러모로 대단한데.”
갑자기 술렁거리는 주위의 반응에 조금 어리둥절해지는데 사자가 내 어깨를 턱 짚어 왔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눈을 반짝이는 모습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가 어느새 바싹 다가온 설표와 마주쳤다. 하지만 내가 돌아보자 휙, 뒤로 물러나 본래의 위치로 돌아가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런 엄청난 일을 겪고도 이렇게 심심한 반응이라니. 다른 금수였으면 지금쯤 지구 반 바퀴를 정열의 탭 댄스로 돌고 나머지 반은 난리 블루스로 돌았을걸.”
“어엉?”
“이거, 정말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는데…… 인간이라 저희만큼 체감을 못 하시나 봅니다.”
설표의 갑작스러운 유머에 적응하지 못하고 황당한 시선을 보내자 이번에는 백호가 말을 건넸다.
“인간.”
백호가 잘 들으라는 듯이 눈을 부릅떴다.
“지금껏 그 어느 금수도 금왕께 감히 손을 대지 못했지만…… 금왕께서 자신의 품에 다른 금수를 안고 재워 준 일 또한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설마 금왕을 희롱하는 인간이 있을 거라고도 전혀 생각지 못했지만, 금왕께서 자신의 품에 누군가를 안고 재워 줄 줄이야.”
“그랬다는 것 자체도 놀라울 텐데. 하물며 그 상대가 인간…….”
“인간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금왕께서, 유일한 애정 표현인 꼬리로 머리 토닥이기를 해 주는 것만으로도 놀랍다 싶었는데. 그건 놀랄 일도 아니었네.”
“그뿐이야? 업무가 바쁜 와중에도 벌써 며칠째 이리 곁에 두고 살펴 주는데.”
“어, 저기…….”
맹수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늘어놓는 모습에 나도 슬쩍 끼어들려 했지만, 사자가 선수를 쳤다.
“그럼, 이제 결정 난 거네. 인간, 참지 말고 그냥 금왕님께 가 버려!”
수용 용량 초과로 머릿속이 둔해져서인지, 나는 사자의 그 결정이 대체 어떻게 나온 건지 잘 이해할 수가 없었다.
“네?”
“자, 얼른 가서 마음껏 주물거리라니까.”
‘주물거려? 뭘? ……아.’
사자의 부추김에 겨우 정신을 차린 나는 어느새 금왕 쪽으로 반쯤 떠밀린 몸을 깨닫고 다리에 힘을 주며 버텼다.
“아뇨, 저기…… 전 앞으로…….”
금왕님의 위엄을 지켜 드리고 싶다니까요! 말을 마치기도 전에 설표가 냉큼 내 말을 잘랐다.
“에이, 금왕님께서 허락하셨는데 얼른 그 기회를 만끽해야지.”
“아뇨, 허락은 했지만 금왕님께서 싫어하시…….”
나는 다시 반박해 보려 했지만 이번에는 사자에게 제지당했다.
“그건 싫어하시는 게 아니라 지금껏 아무도 그런 식으로 주물거린 적이 없어 어색하셔서 그렇겠지.”
“하지만 차차 익숙해지시겠지.”
“그럼, 곧 익숙해지실 거야.”
“그러기 위해서 더 만져야지.”
“자, 어서 가십시오.”
사자에 이어 치타와 늑대, 설표, 그리고 백호까지 말을 보태며 하나같이 묘한 미소를 띤 얼굴로 내 등을 밀었다. 그런 그들을 보며 나는 묻고 싶었다.
‘내 손길에 잔뜩 당황해 땀을 뻘뻘 흘리던 금왕은 이제 곧 익숙해질 거라고 하면서, 당신들은 왜 그날 내게 만져진 이후 쭉 인간 모습을 고수하는 건가요……!’
맹수들에게 등 떠밀려 왔지만, 나는 결국 여느 때처럼 금왕에게 달려들지 못하고 그와 서너 걸음 떨어진 곳에 주저앉아 언덕 아래를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뒤에서 맹수들이 그게 뭐냐며 더 다가가라고 소리치다가 금왕의 귀가 까딱이는 걸 보고는 금세 입을 다물고 딴청을 부렸다. 금왕에게 직접적으로 자신들의 부추김을 들키기는 싫은 모양이었다.
그러다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금왕이 돌아보자 다들 무언가 급한 일이 생각났다며 허둥지둥 흩어졌다. 순식간에 동물 모습으로 돌아가 재빠르게도 달아났다.
언덕에는 또 금왕과 나 둘만이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 금왕은 여느 때처럼 언덕 아래 자신의 백성들을 두루 살폈고, 나는 그런 금왕을 살폈다. 시선을 느낀 금왕 또한 나를 힐끗 보았지만 이내 고개를 되돌렸다. 나는 그의 무심한 등을 자꾸만 힐끔거렸다.
둥글게 말려 바닥에 늘어진 도톰한 꼬리, 그리고 그와 이어진 뽀송뽀송하고 보드라워 보이는 검은색 털에 은빛 줄무늬가 멋스럽게 새겨진 등을 보고 있노라니 절로 시선이 고정됐다. 저 멀리 뉘엿뉘엿 해가 지는 하늘을 바라보며 관심을 분산시키려 했지만, 결국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금왕을 향해 슬금슬금 엉덩이를 붙인 채 다가갔다.
금왕을 고양이처럼 두 손으로 조물거리는 건 좀 그렇지만, 그 넓은 등에 살며시 기대는 정도는 괜찮겠지, 춥기도 하니까. 나름대로 핑곗거리를 찾으며 거리를 좁히던 순간 목가를 간지럽히는 감촉에 멈칫, 굳어졌다.
어느새 바닥에 늘어져 있던 금왕의 꼬리가 공중으로 번쩍 떠오르더니 내 목에 스르르 감겨 왔다. 깜짝 놀라 고개를 들자, 노을이 비쳐 붉게 물든 푸른 눈이 나를 바라보았다. 내 속셈을 눈치챈 건가, 낭패 어린 표정으로 뒤로 물러나려는데 내 목을 감싼 꼬리가 나를 밀어내기는커녕 가까이 끌어당겼다.
“어…….”
당황하면서도 반항하지 않고 다리를 굴려 다가가자 금왕의 그 널따란 등과 둥글고 매끈한 엉덩이 언저리에 콩, 이마가 부딪쳤다.
“밤이 되면 바람이 차다.”
얼굴에 닿는 보드라운 감촉에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자 금왕이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무심히 중얼거렸다.
“어, 저기…….”
“미어캣과 문조가 한 말은 신경 쓰지 마라. 그냥 평소처럼 행동하면 된다.”
마땅히 할 말이 없어 말을 고르고 있노라니, 금왕이 선수를 쳤다. 왠지 당혹스러운 기분에 눈알을 굴리는데 금왕의 그 폭신한 꼬리가 다시 나를 당겼다. 길고 유연한 꼬리가 살랑거리며 이번에는 허리에 감기더니 매끄럽고 탄력 있는 금왕의 등에다 나를 묻었다. 얼굴뿐만 아니라 전신에 와 닿는 보드라운 감촉에 정말 온몸이 녹아 버릴 것 같았다.
‘아, 이 미칠 것 같은 감촉이 또 한 번 내 이성을 날려 버리나요……. 아우, 정말! 근데 끝내주게 좋다. 폭신폭신하면서도 부드러운 데다 아래쪽 근육의 탄력까지! 진짜 못 견디겠어!’
결국 이성을 잃은 나는 금왕의 말대로 여느 때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나를 감싸고 남은 금왕의 꼬리를 두 팔로 꼭 끌어안고는 등에다가 얼굴을 마구 비볐다. 금왕의 꼬리며 등 근육이 움찔, 경직됐다. 그에 도리어 흠칫 놀라 굳어지자 금왕이 괜찮다는 듯 몸에서 힘을 빼고 순순히 자신을 맡겨 왔다. 하지만 내가 안고 있던 꼬리를 꽉 힘주어 잡으며 얼굴에 부비자 또 움찔 뒷머리를 떨며 굳었다가 다시 힘을 뺐다.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나는 다시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금왕이 또 움찔거렸다. 자신이 먼저 내게 꼬리를 내밀었지만 아무래도 내 손길이 어색한 것 같았다. 맹수들의 말에 의하면, 이리 만져지는 것조차 내가 처음이라 했으니 당연한 일일지 몰랐다. 왠지 그 사실이 묘하게 기쁘면서 자랑스럽기도 하고, 금왕의 반응이 재미있어 몇 번이나 반복했다.
“이 녀석.”
금왕이 적당히 하라는 듯 앞발로 내 머리를 토옥, 짚었다 뗐다.
‘……어라?’
시야를 가리던 앞발이 사라지고 눈앞에 나타난 금왕의 얼굴에 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원래 입꼬리가 저렇게 둥글었나? 왠지 웃고 있는 것 같은데…….’
평소보다 유달리 둥글게 말린 듯 보이는 금왕의 입매에 시선을 빼앗겨 있는데 그가 갑자기 두 앞발로 나를 덥석 붙잡아 왔다. 그리고 내 머리 위에 톡 자신의 턱을 얹었다. 부담스러울 정도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무게를 실어 와서 고 보송보송 부드러운 털이 난 턱이 폭신하게 느껴졌다.
게다가 귓가까지 내려오는 기다란 목털에 얼굴이 헤, 풀려 넋이 빠져 있는데 아쉽게도 금왕이 다시 머리를 들고 나를 붙잡은 앞발을 거뒀다. 대신 이번에는 내 주위로 몸을 말아 날 폭 감쌌다. 온몸에서 느껴지는 보드라운 감촉과 온기에 뇌가 풀리다 못해 흐물흐물 녹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아무 말도 못 하고 나른히 늘어져 있으려니, 금왕이 이제 그만 쉬라는 듯 톡톡, 꼬리로 머리까지 두드려 주었다.
맙소사!
그 순간 완전히 녹다운이 되어 이성뿐만 아니라 의식까지 날아가 버린 나는 아무런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무한한 행복 속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아으, 행복해애애애!”
얼빠진 목소리로 그 한마디를 외쳤을 뿐이다.
‘㉦’
“잘 잤나.”
언제 잠들었는지도 모르게 눈을 뜨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내게 인사했다. 아직 흐릿한 시야와 나른한 기분에 몸을 감싼 보드라운 감촉을 파고들다가 뒤늦게 화들짝 고개를 들었다. 몸을 둥글게 말아 나를 감싼 금왕이 앞발에 고개를 얹고 나를 바라보는 모습이 보였다.
“아…….”
나도 모르게 우뚝 굳었다. 금왕의 하늘빛 눈동자를 마주하자, 문득 머릿속에 어제저녁 광분했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그의 품에 안겨 행복의 비명을 지르며 온몸으로 발광하며 사지를 흔들던, 음, 그 미친…… 모습…….
“……아, 안녕히 주무셨어요.”
머릿속에 떠오르는 끔찍한 장면을 애써 지우며 어색하게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혹시 침이라도 흘린 건 아닌가 하고 입가를 더듬으며 힐끗, 금왕을 살펴봤다.
어제는 금왕의 품에서 깬 사실에 놀라서 미처 생각을 못 했는데, 혹시 어제도 지금처럼 내가 자는 모습을 보고 있었던 건가. 어, 그건 왠지 좀 쑥스러운데……. 머쓱한 얼굴을 쓸어 올리고 있을 때쯤, 금왕이 둥글게 만 몸을 풀고 기지개를 켰다.
앞발을 쭉 내밀고 머리를 숙인 채 찌뿌둥한 몸을 푸드드 떨며 기지개를 켜는 모습이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잠시 시선을 빼앗겼다가, 또 어제의 일이 생각나 고개를 내젓고는 언덕 아래의 강가로 내려갔다.
먼저 물을 한 모금 떠 마시고 그다음에 뜬 물로는 세수를 했다. 어푸어푸, 물로 연거푸 얼굴을 닦아 내며 아직 남은 잠기운과 머릿속의 상념들을 떨쳐 냈다. 그리고 옷을 끌어올려 젖은 얼굴을 닦다가 셔츠에 묻은 흙먼지 자국을 보고는 멈칫했다.
“이 옷 벌써 며칠째 입고 있는 거지? 냄새는 안 나나?”
턱을 닦던 옷을 당겨 킁킁 냄새를 맡았다. 그저께 동물들과 뒹굴거리며 이리저리 바쁘게 뛰어다닌 결과로 약간의 땀 냄새와 풀잎의 싸한 냄새와 흙먼지의 매캐한 냄새가 희미하게 묻어났지만 다행히 악취는 없었다.
하지만 내 코에는 별게 아니어도, 후각이 예민한 금왕에게는 냄새가 진동하는 수준이 아닐까. 문득 걱정스러워졌다. 특히 그렇게 가깝게, 품에 안고 자기까지 했는데 냄새가 났다면 밤새 엄청 고역이지 않았을까. 아, 혹시 그래서 잠들지 않고 나를 쳐다본 건가. 아니, 그래서였다면 그건 노려본 걸지도…….
혼자 엉뚱한 생각들을 늘어놓던 나는 돌연 떠오르는 생각에 금왕이 있는 언덕을 올려다봤다.
그러고 보니, 금왕에게서는 야생 짐승 특유의 비릿한 냄새가 안 난다. 그런 냄새는커녕 언제나 뽀송뽀송한 느낌의…… 막 샤워를 마친 새끼 고양이의 하얀 앞발을 연상케 하는 그런 느낌만 나는데……. 먹는 것도 남다르더니, 씻는 것도 남다른 건가? 아니면 그 보드라운 혀로 그루밍을 아주 열심히 해서? 그 혀는 너무 부드러워서 그루밍하려면 힘들 텐데…….
또 쓸데없는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크르릉…….”
등 뒤에서 갑자기 낮고 섬뜩한 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아차! 하는 생각에 재빨리 돌아섰다. 예상대로 이를 드러내며 나를 노려보는 표범 한 마리가 눈에 들어왔다. 사냥 전 도약할 기회를 엿보듯 표범은 한껏 몸을 낮춘 채였다. 나는 낭패감 섞인 기분으로 내 손을 매만졌다. 촉촉하게 젖은 손바닥이 서로 맞닿았으나, 이 액체는 그저께 금왕이 내게 묻혀 준 타액이 아니라 그저 강물에 불과했다.
금왕이 이틀 전 이런 상태로는 절대 언덕 아래로 내려가선 안 된다고 당부했는데. 막 자다 깨어 정신도 없어서 미처 신경 쓰지 못했다.
“크르르릉…….”
표범이 다시 거칠게 목구멍을 울렸다. 언제나 둥글고 귀엽기만 하던 얼굴이었는데 이 순간에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콧잔등에 주름이 잔뜩 잡히며 들려 올라간 입술 아래에 크고 날카로운 이빨이 보기만 해도 오싹했다. 물리면 당장에 살점이 뜯겨 나갈 듯이 위험스러워 보였다. 잔뜩 힘주어 땅을 짚은 발도 여느 때의 둥글고 도톰한 모습 대신 날카로운 발톱을 잔뜩 내보이고 있었다. 한 번 할퀴어지기라도 하면 그대로 살이 베여 뼈가 보일 것 같았다.
절로 온몸이 얼어붙었다. 금왕의 타액이 손에 묻어 있을 때는 무척 친근하게만 느껴졌던 녀석이 야성을 잔뜩 드러낸 모습은 무척이나 낯설고 두려웠다.
표범이 일순 으르렁대는 소리조차 끊고 숨을 골랐다. 내가 이 순간 자칫 눈이라도 피하면 당장 내게 달려들 것 같은 모습이었다. 공포에 질린 와중에도 이 위험에서 벗어나고자 빠르게 머리를 굴리는데, 어느 아프리카 동물 관련 책에서 읽은 내용이 순간 번쩍하고 떠올랐다.
큰 고양잇과 맹수 중에서 가장 강하고 센 사자와 호랑이는 일단 예외로 치고, 퓨마는 맹수치고는 뜻밖에 성격이 온순해 인간을 잘 공격하지 않으며 치타는 공격력이 약한 편이다 보니 덤벼드는 일이 드물었다. 반면에 재규어와 표범은 몸이 무척 날쌘 데다 다른 맹수들보다 훨씬 공격 본능이 강해서 인간도 잘 공격한다고 했다.
게다가 재규어는 호랑이나 사자처럼 배가 부르면 사냥을 하지 않는데, 표범은 음식을 나무 위에 저장할 수 있어서 어느 정도 배가 불러도 사냥을 하기 때문에 더욱 위험하다고. 그러니까 아프리카에서 표범을 마주치면 무조건 피해야 하는데, 혹시 피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보통 날아서 공격하니까 최대한 낮추고 무슨 막대기 같은 걸로 방어를…….
거기까지 생각해 냈을 무렵, 기회를 엿보던 표범이 내게 쏜살같이 달려들었다. 정말 순식간에 저 하늘 위로 펄쩍 날아올랐다.
“우왁!”
갑자기 사라지더니 어느새 코앞으로 다가온 표범을 발견하고는 반사적으로 눈을 감고 팔로 얼굴을 감쌌다. 갑자기 주마등처럼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맹수에게 물려 죽어도 좋으니 제발 한 번만 원 없이 만져 봤으면 하고 바랐던 것이 떠올랐다. 그리고 요 며칠 정말 원 없이 맹수들을 만졌던 기억도.
아, 물론 물려 죽어도 좋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정말로 그렇게 될 줄이야…… 이대로 내 삶이 끝나려나…….
몸을 잔뜩 웅크린 채, 두려운 한편으로 체념을 떠올릴 때였다.
“이 녀석! 인간을 공격하면 어쩌자는 거냐.”
돌연 금왕의 날카로운 일갈이 들려왔다. 그리고 갑자기 주변에 어둠이 찾아왔다. 그에 슬그머니 눈을 뜨며 팔을 내리자 내 위를 뒤덮은 커다란 그림자, 아니, 내 위를 뒤덮듯 서 있는 금왕의 뽀얀 배가 보였다.
“배가 고픈 건 알지만, 인간은 공격해선 안 된다. 알고 있지 않으냐.”
금왕이 엄한 목소리로 제 발 앞에 고개를 푹 숙인 표범을 꾸짖었다.
“특히 표범 너는 조심해야지. 안 그래도 요즘 너희가 인간을 공격하는 일이 잦아서 불안한데.”
표범이 아무 말도 못 하고 그저 죄송하다는 듯 낑낑거리자, 금왕이 조금 목소리를 누그러뜨렸다. 그에 표범이 땅바닥에 얼굴이 닿을 만큼 고개를 더욱 푹 수그렸다.
“이번에는 내가 인간을 제대로 살피지 않은 잘못이 있는 데다 공격도 미수에 그쳤으니, 한 번만 그냥 넘어가 주마.”
금왕이 위로하듯 표범의 머리를 발끝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그에 사과하듯 낑낑거린 표범이 나를 향해서도 미안한 눈길을 보냈다. 그러고는 재빨리 뒤돌며 달려갔다. 마치 아빠에게 혼나고 도망가는 아이처럼, 앞서 사납게 위협하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이 귀여운 뒤태를 조금 얼떨떨한 기분으로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금왕이 조금 뒤로 물러서더니 커다란 앞발로 내 머리를 터억, 눌러 왔다. 여느 때처럼 가벼이 얹는 게 아니라, 잔뜩 힘이 실려 있었다.
“아야.”
머리를 덮친 무게감에 나지막이 비명을 토하는데, 금왕이 잔뜩 엄한 표정을 지었다.
“인간, 너도 반성해라! 내가 그렇게 맨손으론 이 아래로 내려오면 안 된다고 당부했는데 대체 왜 그냥 온 거냐? 게다가 위험할 땐 나를 불렀어야지! 내가 오지 않았으면 어떻게 될 뻔했느냐. 이번에는 지난번처럼 운 좋게만 끝날 일이 아니었다. 한 번 당했으면 정신을 차려야지!”
‘윽.’
단지 혼내는 것이 아니라 걱정이 가득 실린 말에 나는 잠시 아무 말도 못 하고 멍하니 금왕을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앞발이 아니라 그 긴 꼬리로 내 머리를 툭, 두드렸다. 힘이 실려 있기는 했지만 앞발만큼은 아니라 전혀 아프지 않았다. 아마도 조금 전 내 반응을 신경 써 준 모양이었다.
“또 물리기라도 했으면 어쩔 거냐!”
다정한 행동과 달리 여전히 목소리는 엄격했다.
……그러면 또 나 때문에 금수 재판이 열려 표범이 벌을 받게 될 거고, 그럼 금왕은 완전 화났겠지. 차마 내뱉지 못한 대답을 삼키며 조금 우울해진 찰나였다.
“우왁.”
금왕이 갑자기 내 허리에 꼬리를 감아 나를 허공으로 들어 올렸다.
“듣고 있는 거냐? 네가 또 다치는 줄 알고 내가 얼마나…….”
“어?”
나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금왕을 바라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건, 설마……?’
내 눈길에 금왕이 말을 멈추더니 흠, 헛기침을 하고는 앞발과 가슴 사이에 나를 폭 가뒀다. 마치 끌어안듯이.
“아무리 좋다고는 해도 제발 조금쯤은 맹수를 겁내고 조심하란 말이다, 인간.”
‘역시, 지금 나를 걱정해 주는 거지?’
금왕의 폭신한 가슴에 꼭 안긴 채, 멍하니 생각하던 나는 볼가에 와 닿는 보드라운 감촉에 머릿속을 비웠다.
아무렴 어떠랴, 일단은 이 감촉부터 좀 음미하자!
나는 금왕의 가슴에 온 얼굴을 묻고 비볐다.
하, 진짜 기분 좋다니까! 언제 비벼도 금왕의 털은 진짜 보드랍고 뽀송뽀송해. 어떻게 이렇게 느낌이 좋지? 비법 좀 알고 싶을 정도야. 게다가 오늘은 내가 매달린 것도 아니고 무려 금왕이 직접 이리 꼭 끌어안아 주는 거라니!
그 생각만으로 괜히 실실 웃음이 나고 행복해졌다. 그리고 뺨을 묻은 가슴 너머에서 낮게 두근대는 심장에 동화되었는지 내 심장도 두근두근, 기분 좋게 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