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
목에서 느껴지는 어마어마한 통증에 앓는 소리를 내며 눈을 떴다. 뿌연 시야에 검은 형체가 흐릿하게 비쳤지만 그 정체를 파악할 경황이 없었다. 왜 내가 이렇게 아픈지, 왜 눈을 감고 있었는지에 대한 기억 또한 없었다. 그저 목이 너무 아프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마치 무언가에 물어뜯긴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나는 기억의 편린을 떠올렸다. 아프리카 여행을 딱 일주일 앞두고 체력이나 다질 겸 저녁 늦게 뒷산에 올랐다가, 해가 지며 어둑해진 숲에서 작게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혹시 다람쥐인가 싶어 그곳을 파고든 순간― 무언가가 엄청나게 재빠른 동작으로 내게 달려들었던 것 같은…….
하지만 끝부분이 흐릿하고 불확실한 기억에 다 꿈이었나? 의문을 품는데, 점차 눈에 초점이 모이고 시야가 선명해졌다.
“……!”
나는 그제야 조금 전부터 눈앞에서 얼쩡거리던 검은색의 정체를 확인하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순간 너무 놀라 고통조차 잊었다. 그 검은 것은 바로, 앞발만으로도 내 상체를 다 덮을 정도로 거대한 짐승이었다. 난생처음 보는, 검은 바탕에 은빛으로 빛나는 아름다운 줄무늬를 지닌 짐승.
고개를 길게 빼어 숙인 채 나를 들여다보는 짐승의 크고 날카로운 눈은 가을 하늘처럼 푸르고 맑았으나, 또한 북극의 청해(淸海)처럼 차갑고 시렸다. 그를 마주하자 두려움을 깨닫기 이전에 몸이 먼저 얼어붙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그리고 말로 형언하기 힘든 기묘한 압박감이 온몸을 짓누르는 것 같았다. 조용하면서도 지긋하게. 그렇게 굳어 있는 동안 나는 자연스럽게 내 목을 물어뜯은 것이 눈앞의 이 짐승이라고 짐작했다.
하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 정신을 차리자 다시 선명해지는 통증과 함께 문득 이 짐승이 물어뜯기에 내 목은 너무 작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짐승의 앞발은 내 가슴을 뒤덮고도 남았고, 눈앞에 훤히 들여다보이는 눈동자는 내 주먹보다 더 컸다. 당연히 입은 그보다 훨씬 클 것이다.
그 입으로 내 목을 물어뜯었다면, 살갗이 뜯기는 정도가 아니라 그대로 끊어졌어야 옳았다. 그렇다고 발톱으로 할퀴었다고 보기에는 더욱 무리가 있었다. 왠지 나를 처음 공격한 짐승은 이 거대한 흑호가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금왕, 약초를 가져왔습니다.”
한참을 내게 고정하고 있던 푸른 눈동자가 휘익, 빠르게 뒤쪽으로 움직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느라 그보다 늦게 시선을 움직인 나는 이전과는 또 다른 의미로 굳었다.
“아, 깨어나셨습니까?”
말을 하느라 바닥에 내려 두었던 푸른 풀떼기를 다시 입에 물려다 말고 ‘그것’이 내게 물었다. 그것― 흰색의 커다란 호랑이가 말이다.
허. 믿기 힘든 광경에 내가 입을 벌린 채 굳어 있는 동안 백호는 약초를 물고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거대하고 커다란 검은 짐승, 흑호의 발치에 그를 내려놓았다.
멍청한 눈으로 그 모습을 좇던 나는 문득 흑호의 발아래 깔린 손을 들어 볼을 꼬집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애초에, 눈앞의 거대한 흑호를 봤을 때부터 좀 의심스럽기는 했는데, 목의 통증이 너무 강렬해서 잠깐 잊었다. 그런데 이젠 새삼 다시 의심해 볼 필요가 있었다. 그게 아니면 눈앞의 이 거대한 짐승이나, 이 선명한 목소리는 도저히 설명되질 않았다.
꿈이라는 확신이 들자 왠지 용기가 생겼다. 나는 흑호에게 깔린 팔을 낑낑대며 빼내서 내 볼을 꼬집었다. 아니, 꼬집으려 한 그때였다.
할짝.
내가 손을 대기도 전에 눈앞에 있던 커다란 짐승이 내 볼을 핥았다. 사실은 볼이 아니라 목을 핥으려 한 것 같은데 워낙 혀가 커서 저 위까지 다 닦아 내 버린 것이었지만 아무튼 그랬다. 그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라 굳어져 있는 동안, 눈앞의 흑호가 다시 한번 내 목을 핥고는 백호가 가져온 약초를 이빨로 찧듯이 집어 내 목에다 붙였다.
“금왕, 인간을 물어뜯었던 삵을 데려왔습니다.”
낯선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둥그런 귀를 작게 까닥인 흑호가 소리가 들린 쪽으로 눈동자를 옮겼다. 왠지 모를 기시감에 나도 설마 하고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무척 날렵한 인상의 재규어와 주저앉아 두 앞발과 바닥 사이에 고개를 끼우고 잔뜩 겁먹은 듯 덜덜 떨고 있는 삵, 혹은 살쾡이로도 불리는 동물이 눈에 들어왔다.
“마침 인간도 깨어났군요.”
눈을 부릅뜨니 재규어가 나를 힐끗거리며 말했다. 상황이 여기까지 오자, 나는 다시 눈을 감고 잠들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고 나서 다시 눈뜨면 ‘아, 좋은 꿈이었다.’라는 상황이 펼쳐지지 않을까 싶었다.
맹수를 좋아하다 보니 평소 이렇게 꿈에 나오면 잔뜩 행복했다가 깨고 나서는 무척 아쉬워하곤 했는데, 오늘은 다를 것 같았다. 그러니 얼른 이 모든 게 꿈이라는 걸 깨달으며 깨어나기 위해 눈을 감으려 할 때였다.
“약초를 발랐으니 상처는 곧 아물겠지요.”
앞서 등장했던 백호가 삵의 앞으로 나섰다.
“그럼, 더 미룰 것 없이 바로 재판을 시작할까요?”
그 순간, 나는 이 비현실적인 상황 가운데 가장 비현실적인 장면을 목격했다. 말을 마친 백호가 갑자기 파아앗, 눈부시게 뿜어지는 하얀 빛무리에 감싸이더니…….
“인간, 지금부터 모든 상황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은발의 사내는 벌떡 일어나 앉아 경악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내게 그리 말했다. 조금 전까지 추호도 의심할 필요 없이 완벽한 백호였던 그가.
“다만 설명에 앞서, 한 가지 설화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일반적인 남성의 커트보다는 조금 긴, 마치 호랑이 모습에서 얼굴과 뺨을 뒤덮은 털을 그대로 옮겨 온 것 같은 길이의 은발과 날렵한 눈매가 잘 어울리는 사내가 침착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금수의 왕, 금왕은 금수의 신, 금신의 손톱에서 태어났다. 정확히는 실수로 부러진 금신의 손톱 조각에 금신의 숨결이 닿아 탄생했다. 그리고 금왕은 이계에 있는 금신을 대신해 세상의 모든 금수를 다스리게 되었다. 금왕의 본체를 본 이는 아무도 없지만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검은색의 집채만 한 몸체에 은빛으로 빛나는 아름다운 줄무늬를 가진 흑호(黑虎)라고 한다. 이것이 바로 작자 미상인 고대금왕설화의 내용입니다.”
왜 난데없이 설화를 이야기해 준 걸까, 의문을 품던 나는 서둘러 시선을 돌렸다. 조금 전까지 내 가슴을 짓누르고 있다가 백호가 사람으로 변한 시점에 내게서 앞발을 거두고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자리 잡은 흑호가 눈에 들어왔다.
두 앞발을 포개고 그 위에 느긋하게 고개를 올린 채 엎드리고 있음에도 왠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위압감이 새어 나오는, 어마어마한 존재감을 지닌 거대한 짐승. 정말 집채만 하다, 라고 표현할 수 있는 모습. 거기에 밤하늘처럼 새까맣게 반짝이는 털과 그 사이사이 들어간 은빛의 줄무늬.
모든 것이 딱 들어맞았다. 순간 입이 허, 벌어졌다.
“아, 그거 작자 미상 아니야.”
새로운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말을 내뱉은 상대는 조금 전 설화를 말해 준 백호도, 앞서 보았던 재규어도 아니고―그도 어느새 무척 날카로운 인상의 남자로 변신했으니 이미 앞서 본 모습과는 다르지만 아무튼―, 어슬렁거리며 천천히 다가온 커다란 수사자였다.
“흔히들 작자 미상이라고 알고 있지만, 사실 그 이야기는 내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보다 조금 더 윗대의 선조께서 요약한 이야기지.”
수사자가 돌연 뒷다리를 굽혀 앉더니 쭉 펼치고 있던 앞다리 중 하나를 들어 저 위 허공을 가리키며 말했다. 가슴이 쫙 펼쳐지다 못해 으쓱거리는 모양새에는 자부심이 가득했다.
“그분께서는 정말 무척 훌륭한 분이셨지. 아마 너희도 한 번씩 다 들어 봤을…….”
“선조는 그리 훌륭하셨는데, 후손은 왜 이런가 몰라.”
뿌듯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던 사자의 목소리가 잘렸다. 그리고 무척 가벼운 걸음으로 타다닷, 뛰듯이 지면을 밟고 표범 한 마리가 사자의 뒤쪽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냥 보통의 표범이 아닌, 설표였다. 눈표범, 혹은 회색 표범이라고 불리는 설표는 일반 표범과 달리 황색이 아닌 황갈색이 섞인 회백색 바탕 털에 암갈색 얼룩무늬를 가지고 있었다.
눈표범이라는 명칭답게 추운 고산 지대에서 서식하며, 멸종 위기의 희귀종이어서 동물원에서도 잘 만나기 힘들었다. 나도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었다. 몸체는 일반적인 표범보다 더 작은데 발은 오히려 더 도톰하고, 꼬리는 길며 두꺼워서 전체적으로 좀 더 동그랗고 귀여운 느낌이었다.
“설표 너 이 자식! 내 이놈 자식을 그냥!”
어깨 너머로 시선을 던져 설표를 발견한 사자가 다시 네 발로 서더니, 금방이라도 덤벼들 것 같은 자세를 잡았다.
예상대로 사자는 웅크렸던 앞다리를 힘껏 펼치며 풀쩍 뛰어올랐다. 하나 사자가 달려들었을 때 설표는 그 자리에 없었다. 그는 무척 날렵한 몸짓으로 바로 곁에 있는 나무를 타고 이미 저 높은 곳으로 올라간 뒤였다.
“이 자식이 치사하게. 너 당장 안 내려와?!”
사자가 나무 기둥을 붙잡고 일어선 채로, 앞발로 껍질을 긁으며 자신도 위로 올라가려고 애썼다. 나무 위의 설표는 무척이나 느긋한 얼굴로 사자를 내려다보았다. 굵은 가지 위에 두 앞발을 곱게 포개고 엎드려 자리까지 잡고 굵고 긴 꼬리를 가지 밖으로 내어 여유롭게 살랑살랑 흔들면서.
그 모습에 더 열 받은 사자가 몇 번이고 날카로운 발톱을 세워 나무를 타고 올라가려고 애썼지만, 조금 올라갔다가도 그 커다란 체구를 견디지 못하고 계속해 미끄러지며 제자리걸음을 했다.
“저 녀석들 또 시작이군. 만나기만 하면 매일 싸운다니까.”
사자와 설표가 실랑이하는 동안, 검은색의 미끈하게 잘빠진 퓨마가 등장했다. 내가 등지고 있던 숲 쪽에서 불쑥 모습을 드러내더니 어슬렁거리며 흑호에게 다가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앞서 백호가 그랬듯 갑자기 흰빛에 둘러싸여 일순 자취를 감췄다가 검은 장발의 청년이 되어 나타났다. 퓨마 본연의 모습일 때 보여 주던 탐스러운 털빛을 닮은 검은색 일색의 가운 차림을 하고서.
“정숙해 주십시오. 모두 모였습니까?”
퓨마의 변신이 끝나자 한동안 침묵했던 백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치타 대표는 아직 안 왔는데?”
나무 위에 있던 설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잠시 퓨마에게 시선을 빼앗긴 사이 설표도 벌써 사람 모습으로 변신한 상태였다. 다른 맹수들에 비해 작은 체구와 앳되어 보이는 얼굴이, 완벽한 성인 남자의 모습을 한 다른 이들에 비해 소년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치타는 다른 임무로 이번 소집에서 제외됩니다.”
“그래? 아쉽네. 오랜만에 보나 싶었는데. 으차!”
백호의 대답에 잠시 서운한 표정을 짓던 설표가 가벼운 몸놀림으로 나무에서 뛰어내렸다.
“발이 빠르니 늘 바쁘지 뭐.”
어깨까지 길게 늘어진 적갈색의 머리칼이 갈기처럼 사납게 흩날리는 큰 체격의 사내가 설표 곁으로 다가서며 말을 거들었다. 그 큰 몸집과 머리칼을 보아 아마도 사자인 듯했는데, 짐승이었을 때와 달리 무척 위엄이 넘치는 모습이 신기해서 멍하니 쳐다볼 때였다.
“설표, 이 자식! 어린놈의 자식이 툭하면 까불어!”
설표의 머리에 사정없이 주먹을 날리는 모양새는 이전과 똑같아서 그럼 그렇지 싶었다.
“이 노인네가!”
설표도 지지 않고 주먹을 휘두른 덕분에, 두 짐승은 금세 뒤엉켜 바닥을 뒹굴었다.
“정숙해 주십시오! 금왕께서 보고 계십니다!”
백호가 엄하게 경고하자 한참 불이 붙어 싸우던 두 짐승이 움직임을 멈췄다. 그래도 여전히 멱살을 틀어쥔 손을 풀지는 않았다가 힐끗 흑호의 눈치를 살피더니, 그 거대한 청색 눈동자에서 풍기는 지엄한 기운에 슬금슬금 손을 놓았다. 그 후 사자는 괜히 헛기침을 해 보였고, 설표는 옆의 나무를 건드리며 딴청을 피웠다.
그 모습에 가까이 있던 퓨마가 가볍게 웃었다. 멀찍이 떨어져 흑호의 곁을 지키며 그 모습을 바라보던 재규어는 좌우로 고개를 저었고, 백호는 가볍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다시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인간, 설명을 마저 해 드리겠습니다.”
‘인간…….’
나도 모르게 백호의 말을 되뇌었다. 정중한 말투와는 왠지 어울리지 않는, 또 웬만하면 호칭으로 접하기 힘든 단어라 어쩐지 이질적인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나도 이들을 모두 백호, 재규어, 사자, 설표, 퓨마라고 부르고 있었다.
“앞서 말씀드린 설화는 사자 대표의 말처럼 실제의 이야기를 요약한 것으로, 그 내용대로 금왕께서는 모든 금수를 다스리십니다. 그래서 이번 문제도 금왕께서 관여하시게 되었습니다.”
백호의 설명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문제라면……?”
“저 멍청이가 당신 목을 물어뜯은 일 말이오. 아, 그러고 보니 삵 대표는 안 오나? 자기네들 일인데.”
백호 대신 사자가 대답했다. 그는 아직도 저 구석에서 바싹 엎드린 채 오들오들 떨고 있는 삵 너머 주위를 살폈다.
“미수에 그친 사건이기 때문에, 삵 대표는 판정이 끝나면 부를 생각입니다.”
“아하.”
백호의 말에 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맹수가 대화를 나누는 동안 나는 조심히 목을 만져 봤다. 분명 눈을 떴을 때는 목이 끊어진 것처럼 아팠는데, 이제는 통증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게다가 손끝에 닿는 살갗은 상처의 흔적조차 없이 매끈했다. 몇 분도 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에 일어난 믿기지 않는 변화에 나도 모르게 몇 번이고 목을 매만졌다.
“소독 능력과 상처 치료 능력이 뛰어난 금왕의 침에다 명약으로 불리는 약초까지 바른 덕분에 상처는 벌써 다 나았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내가 목을 살피는 것을 눈치챈 백호가 설명했다.
“그리고 얘기를 계속하자면, 본래 짐승은 인간을 공격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이는 아주 오래전부터 금수들의 신, 금신께서 인간들을 보살피는 신과 정한 약속으로 모든 금수들에게 공표된 사실입니다. 위반 시에는 당연히 벌을 받으며, 혹여 상대 인간이 죽기라도 하면 그 짐승은 삶이 끝나는 순간 영혼이 소멸해 윤회의 자격을 잃게 되는 극형에까지 처해 집니다. 이 점을 본능적으로 인지하고 있는지라 대부분의 짐승들은 인간을 공격하지 않습니다.”
“……!”
거기까지만 듣고도 나는 다음에 이어질 말을 대충 짐작했다.
“그런데 당신은 공격을 당했지요. 저 삵에게…….”
나는 백호가 말을 꺼내기 전에 이미 삵을 바라보고 있었다. 삵은 자신의 얘기가 나오자 천천히 고개를 들어 조심히 눈치를 살폈는데 완전히 겁에 질린 얼굴이었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울먹이는 표정에 마음이 짠해져 멍하니 쳐다보는데, 백호가 다시 말을 이었다.
“비록 본래 살던 먼 곳의 깊은 산에서 더 이상 먹이를 구할 수 없어 이곳까지 달려오며 몇 날 며칠을 굶어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고는 해도 인간을 공격한 것은 분명한 잘못입니다.”
백호의 말투는 단호했다. 그리고 그 말투보다 더 날카로운 시선을 던지는 통에 삵은 더욱 두려움에 질렸다. 마치 눈으로 벌을 주듯 지그시 삵을 노려보던 백호가 내게 고개를 돌렸다.
“특히나…… 그때 마침 금왕께서 삵 대표의 보고로 본래의 터전에서 사라진 삵을 찾으러 오지 않았다면, 그 즉시 목숨을 잃었을 만큼 치명상이었습니다. 날카로운 송곳니로 단숨에 목을 물어뜯겼거든요.”
백호의 말투는 무척 정중했는데 또 한편으로는 무척 엄격하고 서늘했다. 나는 다시 한번 목을 매만졌다. 역시나 손끝에 닿는 건 상처 하나 없이 말끔한 피부였다. 후유증은커녕, 미약한 통증 하나도 남지 않아 내가 정말 그렇게 위험했었나 싶을 정도로.
“당신이 지금 아무렇지 않게 저와 대화할 수 있는 것은 모두 금왕의 덕분이지요. 금왕이 계시지 않았다면 당신은 절대 이렇게 살아 있을 수 없었습니다.”
백호가 마치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절묘하게 말했다. 나는 멀찍이 떨어져 있는 흑호를 바라보았다.
“저기…….”
처음에 고개만 돌렸던 나는 이내 흑호를 향해 일어섰다. 그리고 깊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제 목숨을 구해 주신 은인인 줄도 모르…….”
“인사는 됐다.”
사정도 모르고 처음에는 오히려 그가 나를 공격한 게 아닌가, 의심했다니. 미안한 기분에 더욱 깊이 몸을 굽히는데, 차가운 목소리가 말을 잘랐다.
“머리 검은 짐승의 인사를 받으려고 한 것이 아니라, 내 아이를 구하려던 것뿐이니까.”
“……?”
말을 선뜻 이해하지 못한 나는 의아한 눈으로 흑호를 보았다.
“네가 죽었으면 저 아이가 소멸될 터였으니까. 그래서 살린 것뿐이다.”
힐끗, 저 멀리의 삵을 바라보며 냉랭한 음성으로 말을 마무리한 흑호는 내 목숨 따위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 무심히 고개를 돌렸다.
“그…… 네.”
그래도 감사하다고 다시 한번 인사하려다가, 왠지 모르게 적대감이 느껴지는 흑호의 태도에 그냥 입을 다물었다. 어쩐지 맥이 풀리며 어깨가 축 늘어졌다. 괜히 어색한 웃음만 짓고 있는데 백호가 말을 이었다.
“덧붙여 말씀드리면, 모든 동물이 저희처럼 인간으로 둔갑하거나 인간의 말을 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금왕의 곁에 머무르는 금수들은 각 개체 중 단 한 마리로 특별히 선택받은 이들입니다. 이들은 자신이 속한 집단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고하고, 또 금왕의 뜻을 전하는 대표 역할을 하게 됩니다.”
“……!”
그런 거였어? 난 또 ‘인간들은 모르는 동물들의 비밀 능력’이라는 설정인가 했더니. 이상한 데서 현실적이네…….
“그리고 오늘처럼 금수들 가운데 문제가 생기면 회의를 열기도 하지요. 이번에 문제를 일으킨 것이 식육목 고양잇과이기 때문에 지금은 고양잇과 대표 동물 6종, 아니, 5종만 모였지만, 사건에 따라 모이는 이들은 달라집니다.”
“아…….”
나는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그 순간 내 머릿속에는 또 다른 의심이 피어나고 있었다.
‘이거, 꿈 아니었나?’
당연히 이 믿기 힘든 상황들이 모두 꿈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내가 만든 꿈치고는 과하게 창의적이고 구체적이었다. 그동안 맹수를 좋아해 맹수가 나오는 꿈은 많이 꿨지만, 맹수들과 교감하는 꿈도 수차례 꿨지만 이건 정말 너무…… 참신하지 않은가. 게다가 이렇게 개연성까지 딱딱 맞아떨어지다니!
아무리 봐도…… 내가 창작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닌 것 같은데?
나는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내가 털퍼덕 주저앉아 있는 곳은 이솝 우화에 자주 등장할 법한, 숲속의 드넓은 공터였다. 집채만 한 흑호가 한쪽에 자리를 잡고 누워도 전혀 좁게 느껴지지 않는 넉넉한 공간.
공터는 신기할 만큼, 잡초도 없이 매끄러운 흙바닥이었는데 가장자리 쪽 어느 굵직한 나무에 등을 기대앉은 내 발끝 부근부터는 잔디가 뒤덮여 있었다. 그리고 그 잔디밭이 시작되는 지점부터 듬성듬성 나무가 자라나 조금만 시선을 멀리 던져도 커다란 나무들이 빽빽하게 우거진 숲이 보였다. 그런데 그 나무들이 하나같이…… 어디서 많이 본 듯하면서도, 묘하게 낯설었다. 여긴 확실히 내가 가끔 들르던 뒷산이라고는 보기 힘든 곳이었다.
실제로 상황 설명을 하며 백호는 이곳이 내가 살던 곳과는 사뭇 다른 세계라고 말했다. 그렇다고 완전히 다른 세상으로 이동한 것도 아니었다. 이곳은 불과 몇 시간 전 내가 걸어 올라온 그 뒷산이면서도 뒷산이 아닌 곳. 금왕이 뒷산에 새로 창조한, 미묘하게 어긋난 차원의 어딘가―라고, 조금 이해하기 어려운 설명이었다. 그때의 말을 다시 곱씹어 보다가 곧 고개를 흔들었다. 왠지 생각할수록 머리가 아파 오는 기분이었다.
“얼마나 먹을 게 없었으면 여기까지 와서, 또 얼마나 배고팠으면 인간을 공격했겠어?”
생각에서 벗어나자, 조금 전까지 전혀 들리지 않았던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원래 삵은 인간을 잘 공격하지 않나?”
“좀 그런 편이긴 하지.”
“어쨌든 이건 좀 감안해 줘야 돼. 안 그래도 요새는 환경 파괴 때문에 다들 먹이가 부족한데, 여기 한국 뒷산은 정말 눈 씻고 찾아봐도 먹을 게 없다고.”
“그치, 정당방위지. 시골도 아니고 이런 도시에서는 진짜 먹이 찾기가 하늘의 별 따기라니까. 그렇다고 삵이 고양이들처럼 쓰레기통을 뒤질 수도 없고.”
“비둘기랑 까치, 참새는 넘쳐흐르던데.”
“에이, 요새 비둘기 잘못 먹으면 병나. 걔들이 얼마나 지저분…….”
“회의 내용에 집중하십시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다섯 마리의 맹수들이 인간의 모습을 하고 빙그르르 둘러앉아서 삵의 처분에 대해 논의 중이었다. 그중 사자와 설표가 가장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놓았고, 퓨마는 중간에 한마디씩 거들었으며 백호는 간혹 가다 주제에서 벗어나는 이야기를 중재시켰다. 그리고 재규어는 말없이 날카로운 눈을 빛내며 모든 대화를 냉철하게 분석하는 중이었다.
각각의 태도는 달랐지만 그야말로 열심히 회의하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이 신기하기도 하고, 또 묘하게 잘 어울린다는 생각에 멍하니 지켜보았다.
좀처럼 결론이 나지 않는지 회의는 꽤 오래도록 이어졌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하품을 하다가 문득 저 토론의 주인공인 삵은 뭘 하고 있나 싶어져 고개를 돌렸다.
흑호의 발치에 고개를 숙이고 있는 삵이 눈에 들어왔다. 녀석은 자신이 금수들의 세상에 물의를 일으킨 것에, 그로 인해 금왕에게 염려를 끼친 것에 대해 눈물을 흘리며 사죄하고 있었다.
그런 삵의 작은 머리를 금왕은 길고 도톰한 꼬리로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마치 위로해 주듯 다정하게. 별일 없으리라는 듯이. 그러면서도 몸통과 머리는 삵과 반대쪽에 두고 무심한 체하고 있었다.
아…….
목구멍에서 신음 같은 탄성이 터졌다. 조금 전 금왕이 내게 보인 무척이나 차갑던 태도가 떠오른 탓이었다. 그에 화가 나거나 기분이 나빴다기보다, 묘하게 실망스러웠다. 왠지 모르게 아쉽기도 했고.
그래서 물끄러미 시선을 던지는데 갑자기 휘익, 고개를 돌린 흑호와 눈이 마주쳤다. 순간 숨이 멎을 것 같은, 짧지만 선명한 정적이 느껴졌다. 이윽고 철썩, 금왕이 삵을 위로하던 꼬리를 높이 치켜들더니 커다란 마찰음이 나도록 바닥을 내리쳤다. 그 소리에 열심히 토론 중이던 이들이 일제히 눈길을 던졌다.
철썩. 모두의 주목 속에서 흑호가 다시 한번 꼬리로 바닥을 내리치고는 입을 열었다.
“인간, 너는 어떻게 하기를 원하나?”
정말로, 어떻게 그럴까 싶을 정도로 냉랭한 목소리였다. 온기라고는 한 점도 느껴지지 않아 시리게 느껴질 정도의. 본래 그런 것인지, 그 대상이 나여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조금 서글픈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그 말을 이해하는 게 다소 더뎠다.
“……네?”
뒤늦게 말뜻은 이해했지만 저의를 알 수 없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흑호가 힐끗, 제 발끝에 자리한 삵을 눈짓했다.
“너를 공격한 이 녀석 말이다. 너는 어찌했으면 좋겠나?”
흑호의 그 한마디에 모두의 시선이 내게 집중되었다. 흑호의 위로에 조금 진정되었던 삵도 다시 겁에 질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헉.’
나는 숨을 들이켰다. 삵에게는 좀 미안하지만…… 슈렉에 나오는 장화 신은 고양이를 닮은 눈으로 불안한 듯 날 올려다보는 얼굴이 무척이나 귀여웠다. 그래서 내 대답이 어떨지 몰라 두려워하는 삵의 마음을 알면서도 선뜻 답하지 못하고 잠시 홀린 듯 그 모습을 바라봐야 했다. 하지만 곧 정신을 차렸다. 만약 흑호가 다시 꼬리로 바닥을 내리치지 않았다면 아마도 더 시간이 걸렸겠지만 말이다.
철썩, 흑호의 거대한 꼬리가 땅을 내리치는 소리에 정신을 차린 나는 이윽고 목을 더듬었다. 이미 다 사라져 상처의 흔적조차 남지 않은 살결. 처음에는 죽을 것처럼 아팠지만, 이제는 내가 정말 그렇게 아팠나 싶을 정도로 희미해진 통증. 그리고 애초부터 나는―.
생각 끝에 결단을 내리며 목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다. 대답을 기다리듯 나를 바라보는 푸른 눈동자를 마주하자 왜인지 긴장이 돼서 가볍게 주먹을 말아 쥐었다.
“저기…… 꼭, 어떻게 해야 해요?”
“……뭐?”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내뱉은 말에 흑호가 의아한 얼굴을 했다. 나를 주시하던 다른 다섯 맹수에게서도 비슷한 기운이 감지되었고, 두려움에 차 울먹이던 삵의 눈 또한 휘둥그레져 있었다.
“저는 굳이 어떻게 하고 싶다는 생각 같은 건 안 드는데…… 죽을 만큼 큰 상처였다고 하지만 사실 실감도 잘 안 나고, 흔적 하나 안 남을 정도로 멀쩡히 치료까지 됐으니 딱히 화가 나지도 않거든요. 또 설령 화가 났었다고 해도…….”
‘저렇게 귀여운 눈으로 보면, 무슨 잘못이든 다 용서해 주게 되잖아요!’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왠지 쑥스러워서 그건 삼켰다. 그랬는데도 어쩐지 얼굴이 화끈거려 시선을 돌리다가 더 당황해서 시선을 땅바닥에 내리꽂았다. 어째선지 다들 초점이 풀린 멍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탓이었다.
“……인간.”
한참 만에, 흑호가 겨우 입을 열었다.
“간과하지 마라. 비록 지금은 멀쩡하다고 해도 너는 정말로 죽을 뻔했다. 다시 생각할 기회를 주겠다.”
그 말에 주위를 가득 메운 정적이 파사삭, 갈라지며 다른 맹수들도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삵은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다. 내 대답에 놀란 얼굴을 했다가 희미하게 안도하던 녀석은 흑호의 냉정한 말에 다시 두려움을 내비쳤다. 그 모습이 안쓰러워 나는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진짜 괜찮습니다. 애초부터 배가 고파서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하고, 또…….”
잠시 말을 잇지 못하고 머뭇거리던 나는 곧 용기를 냈다.
“또 예전부터 언젠가 나는 맹수에게 목이 물어뜯겨 죽지 않을까 하고…… 그렇게 돼도 나쁘진 않겠다고 생각했었거든요.”
그래도 설마 우리 집 뒷산에서 이런 일을 겪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하긴 했다. 그저 아프리카 초원에서 소원하던 맹수 한 마리를 마음껏 끌어안고 장렬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면 좋겠다…… 망상을 해 본 거였지만…… 비슷하니까 뭐, 괜찮겠지. 그렇게 합리화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투둑, 하고 작은 마찰음이 울렸다.
“허.”
고개를 돌리자 얼빠진 표정으로,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마를 매만지고 있던 손을 바닥으로 축 늘어뜨린 사자의 모습이 보였다. 마치 무언가 무척 기막힌 광경을 목격한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리고 정도는 덜했지만 곁에 있던 다른 맹수들도 거의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뭐, 저런 인간이…….”
모두가 얼이 빠진 가운데 설표가 황당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 옆에 있던 사자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그리고 퓨마와 재규어, 백호까지 동조해 보였다. 혹시 흑호도 같은 반응일까 궁금해하며 돌아봤는데 안타깝게도 흑호는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가까운 허공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을 뿐이었다.
“그럼…….”
얼마 지나지 않아 흑호가 몸을 일으키더니 천천히 내게로 걸어왔다. 꽤 먼 거리였는데 워낙에 덩치가 커서 몇 걸음 걷지 않아 내 앞에 도착했다.
“그럼 이렇게 하지. 이 녀석을 벌하는 대신…….”
“으오옹!”
갑자기 삵이 놀라 비명을 질렀다. 흑호가 자신을 열심히 뒤쫓아 오고 있던 삵의 허리를 길고 커다란 꼬리로 감싸 단숨에 들어 옮긴 덕분이었다. 삵은 예고도 없이 허공으로 붕 떠올라 눈이 휘둥그레졌다가 땅에 착지하자 뒤늦게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게 안쓰럽기도 하고, 반쯤 울먹이는 얼굴이 귀엽기도 해서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삵이 무척이나 애틋한 눈으로…… 마치 감사하다고 말하는 것 같은 눈빛으로 나를 보더니 동그란 머리를 콩, 땅에 박으며 넙죽 절을 했다. 감사하다는 인사인지 알아듣지 못할 희미한 울음소리를 내면서.
그 모습이 정말…… 넋이 나갈 정도로 귀여웠다. 도저히 시선을 뗄 수 없을 만큼.
“네게 사죄의 의미로 소원을 들어주겠다.”
“소원요?”
흑호의 목소리에 겨우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내가 들어줄 수 있는 선에 한해서지만.”
“…….”
조금 갑작스럽기도 했고, 또 흑호가 들어줄 수 있는 선이라는 게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없어서 나는 잠시 고민하듯 그를 봤다. 그러다 계속해서 낑낑거리는 소리가 들려와 시선을 내리자 아직도 땅에 머리를 박고 우는 삵이 보였다. 자그마한 몸을 동그랗게 말고 있는 모습이 정말, 미치게 귀여웠다. 나도 모르게 꿀꺽 침을 삼키고는 곧 고개를 들었다.
“저기…….”
내가 할 말이 있다는 듯 운을 떼자 흑호가 말해 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 한 번만 만져 봐도 돼요?”
나는 기대를 감추지 못하며 서둘러 물었다. 두근거리는 마음에 목소리마저 조금 떨렸다. 하지만 흑호는 내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
“이 삵…… 한 번만 만져 봐도 될까요?”
“……!”
순간 의아해하던 흑호의 눈에 당혹감이 떠올랐다. 그것이 거절의 의미인가 싶어서 조금 실망할 때였다.
“아…… 그런, 거라면 얼마든지.”
흑호가 조금 얼떨떨한 목소리로 대답하더니 기다란 꼬리를 이용해 제 앞에 있던 삵을 내 쪽으로 살며시 내밀었다. 자신의 이야기가 나온 시점에 이미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보던 삵은 몸을 떠미는 꼬리를 거부하지 않고 내게로 천천히 걸어왔다.
당장에라도 달려가 끌어안고 싶었지만, 나를 바라보며 조심조심 걸음을 옮기는 삵의 얼굴에 긴장이 서려 있어서 침착하게 기다렸다.
“안녕?”
손 뻗으면 닿을 정도로 삵이 가까워지자 나는 우선 몸을 낮춰 인사를 건넸다. 경계 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삵이 흠칫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잠시 뒤 조심스러운 눈길로 나를 살피고는 다시 물러선 걸음만큼 앞으로 다가왔다.
나는 무릎을 땅에 댄 다음, 바닥에 한쪽 팔을 짚고 천천히 삵에게로 상체를 옮겼다. 그리고 조심스레 손을 내밀었다. 긴장한 삵이 바닥에 납작 엎드리며 몸을 잔뜩 웅크렸다. 그 안쓰러운 모습에 나아가던 손을 멈췄다. 이렇게까지 겁을 먹은 녀석을 억지로 만지려니 왠지 미안했다. 하지만…… 그래서 더 포기할 수가 없었다.
삵은 본래, 작은 체구에도 불구하고 아주 날래고 공격성이 강해서 저보다 큰 짐승보다 더 무서운 맹수로 유명했다. 만약 내가 평소에 이처럼 귀엽다며 손을 뻗었다가는 대번 물어뜯겨 버릴 것이었다.
지금 같이 특수한 상황이 아니고서야 내가 손 하나 내밀었다고 삵이 겁을 먹고 몸을 웅크릴 일은 절대 없었다. 사납게 으르렁거리며 이빨과 발톱을 잔뜩 세우고 무섭게 덤벼들 것이었다. 그러니 이 기회를 날리면 나는 영영 맨손으로 삵을 쓰다듬어 볼 기회를 얻지 못할지도 몰랐다. 때문에 나는 미안한 마음을 억누르고 이기심의 자리를 조금 늘렸다.
“저기, 미안해. 조금만, 정말 아주 조금만…… 만질게.”
작은 중얼거림과 함께 천천히, 아주 천천히 삵의 머리 위에 손을 내렸다. 살포시 닿아 오는 보드라운 털에 마치 손끝이 녹아내리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손바닥을 다 내려 삵의 동그란 머리를 감싼 순간에는, 너무 행복해서 잠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손을 살며시 움직여 쓰다듬자, 불안한 듯 한껏 치떴던 삵의 눈이 원래대로 돌아갔다. 그리고 잔뜩 경직되어 있던 몸에서도 점점 힘이 빠졌다. 그에 용기를 내어 머리를 만지던 손을 조금 내려 등까지 훑었다.
갑자기 자리를 옮긴 손에 삵이 흠칫, 놀랐지만 이내 다시 힘을 풀었다. 몇 번 쓰다듬은 뒤에는 완전히 내 손길에 자신을 맡겼다. 나도 용기를 내, 상체를 길게 빼서만 거리를 좁히느라 삵과 멀찌감치 두었던 다리를 끌어왔다. 그리고 삵 바로 앞에 자리 잡고 앉아 본격적으로 만지기 시작했다.
삵을 한 번씩 쓰다듬을 때마다 내 가슴 속에서 따뜻한 무언가가 퐁퐁 터져 나왔다. 어릴 때부터 그토록 소원해 온 대로 야생의 맹수를 이렇게 직접 만질 수 있게 되다니. 정말 꿈만 같았고, 너무 행복했다. 그 먼 아프리카까지 가지 않아도, 아니, 그곳에 가서도 이룰 수 없었던 내 평생의 소원을 겨우 동네 뒷산에서 이루게 되리라고는 전혀 기대해 본 적 없었는데. 정말 생각지도 못한 꿈의 선물이었다.
“또 다른 건?”
처음에 말한 것과 달리, 조금이 아니라 꽤 오랜 시간 삵을 쓰다듬다 못해 품에 꼬옥 끌어안고 있는 내게 문득 흑호가 말했다. 내 손길이 썩 나쁘지 않았는지, 그 크고 동그란 눈을 가늘게 접으며 나른한 표정을 짓는 삵의 얼굴을 홀린 듯 바라보고 있던 나는 뒤늦게 고개를 들었다.
“네?”
“지금 건 목숨을 잃을 뻔한 대가치고 너무 가벼운 것 같군. 혹시 달리 더 바라는 건 없나?”
“아…….”
나도 모르게 탄성이 터져 나왔다. 삵을 쓰다듬는 것만으로 일생일대의 행복을 경험 중이던 내게 흑호의 그 말은 다소 당혹스러운 것이었다. 목숨을 잃을 뻔한 대가치고 가볍기는커녕 너무 행복해 숨이 막힐 정도로 무거웠다. 말도 안 된다며 반박하려던 나는 돌연 입을 합 다물었다. 앞서 삵에게만 집중하느라 잠시 잊고 있던 주위의 다른 존재들을 깨달은 덕분이었다.
지금 이곳에는 내 품에 안긴 작고 귀여운 맹수 이외에도 백호, 재규어, 사자, 설표, 퓨마, 이 다섯 동물이 좌르륵 늘어서 있었다. 처음 그들이 등장했을 때는 너무 놀라서, 그리고 후에는 삵에게 정신이 팔려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가만 생각해 보면 내 주변을 채운 이 동물들은 그야말로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대표 맹수들이었다.
언제 또 이렇게 마주 볼지 알 수 없는. 게다가 말이 통해서 나를 물어뜯을 염려도 없는!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저, 저기…….”
너무 흥분해 목소리도 마구 떨렸다. 그래서 말이 아닌 눈빛으로 내 뜻을 전달하기로 했다. 나는 한번 금왕을 지그시 바라보았다가 곧 조심스러운 눈길로 주위를 살폈다. 내 시선에 닿은 맹수들이 처음에는 뭐지? 하며 의아해하다가 이윽고 설마? 하는 얼굴을 했다. 그에 수줍게 미소를 지어 보인 나는 다시 흑호를 쳐다봤다.
“인간, 설마…….”
다섯 동물 모두가 하고 싶었던 말을 흑호가 대신 내뱉었다. 나는 결연한 표정으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둘러싼 다섯 맹수의 얼굴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하지만 나는 기대로 초롱초롱 빛나는 눈으로 단호하게 말했다.
“네, 만지게 해 주세요.”
‘㉦’
“히힛…….”
입에서 절로 실없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손끝에 착 감기는 부드러운 털에 도저히 벌어지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정말 꿈만 같은 경험이었다. 이 세상천지 어디에 나 같은 사람이 또 있을까. 대체 어느 누가, 백호의 털이 풍성한 목을 꼭 끌어안아 매달리고 사자의 갈기에 얼굴을 비비고 설표의 둥글넓적한 꼬리를 손으로 조물조물 만지고, 재규어의 앞발을 붙잡고 입 맞추고 퓨마의 매끈한 몸체를 제 마음껏 쓰다듬는 이 모든 일을 경험해 보았겠는가.
정말 정신이 아득할 정도로 행복했다. 그래서 오래도록 맹수들을 괴롭힌 것 같다는 생각에 이제 그만해야지, 그만해야지 하면서도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 조금만 더 이 행복을 맛보고 싶다는 욕심이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끄응.”
벌써 수십 번이나 내 손길에 시달린 설표가 앓는 소리를 내고 나서야 나는 겨우 폭주를 멈췄다. 내가 끝났다는 의미로 손을 번쩍 들어 보이자, 마치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 맹수들이 후다닥 뒤로 물러났다.
마치 도망이라도 가는 듯한 그들의 모습에 내가 너무 심했나, 반성하면서도 자못 아쉬운 마음이 들어 나는 그들을 쓰다듬었던 손을 가만 내려다보았다. 조금 전까지 계속 조물거렸던 터라 아직 그 감촉이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손에는 그들을 쓰다듬은 흔적으로 얇은 털들이 잔뜩 달라붙어 있어서 다시 행복이 퐁퐁 솟았다.
“인간, 동물을 꽤 좋아하나 보군.”
털들이 날아갈까 싶어 조심스레 주먹을 말아 쥐며 웃고 있노라니, 금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전히 차가운 목소리였는데도 불구하고 어쩐지, 처음 들었을 때의 냉랭함이 아주 조금은 가신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고개를 들어 바라본 흑호의 표정은 처음 보았을 때와 다름없이 무심했다. 괜히 혼자 내적 친밀도를 높인 것 같아 민망한 기분에 머쓱한 웃음이 지어졌다.
“어, 모든 동물을 좋아한다기보다…… 지금 여기 모인 분들이 유독 제가 좋아하는 분들이세요.”
내 대답에 금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 발짝 떨어진 곳에서 나를 바라보던 다른 맹수들도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을 한 번 쭉 훑어본 나는 흠흠, 잠시 목을 고른 뒤 내가 맹수를 무척 좋아한다는 사실과 어릴 적부터 품어 왔던 꿈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그리고 그렇게 좋아하는 맹수들을 보러 아프리카까지 갈 계획을 세웠는데, 그곳에서도 보기만 할 뿐 이렇게 손수 만지는 일은 절대 불가능할 거라 생각했다고. 하지만 오늘 이렇게 예상치 못하게 일생일대의 소원을 이루게 해 주어 정말 고맙다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허 참, 특이한 인간일세.”
내 인사에 제일 먼저 사자가 어이없다는 듯이 중얼거렸고 다른 동물들도 동조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들 모두의 표정에서 불쾌한 기색은 엿보이지 않았다. 그저 정말로 내가 특이하다 싶은 모양이었다. 다들 하나같이 신기한 눈길로 나를 살폈다. 맹수들보다 조금 앞쪽에, 나와 가까이 앉아 있던 삵조차 내게 비슷한 눈길을 보냈다. 하지만 금왕은 달랐다.
“아프리카라…….”
금왕은 나를 신기하게 바라보는 대신 혼잣말과 함께 잠시 생각에 잠겼다. 왠지 표정이 심각해 보이는 게 무슨 중요한 고민이라도 하는 것 같아서 방해하지 말자며 눈길을 거두던 참이었다.
“인간.”
머리 위에서 떨어진 목소리가 나를 붙잡았다. 반사적으로 시선을 드는 순간, 갑자기 몸이 붕 떠올랐다. 휘익, 소리를 내며 빠르게 다가온 금왕의 길고 검은 꼬리가 내 허리를 감싸며 나를 번쩍 들어 올린 것이었다. 그리고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나는 푹신한 털이 가득 덮인 금왕의 등 위에 올려졌다.
“꽉 붙잡아라.”
“어…… 우와아아아악!”
느닷없는 상황에 얼떨떨한 채로 눈앞의 검은색 털을 붙잡은 찰나, 금왕이 어마어마한 속력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