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4장 신계 진입 (28/40)

제4장 신계 진입

맹장의 말이 아구의 마음에는 쏙 들었지만, 유가는 어리둥절했다.

아구의 저 기대 가득한 눈을 보고 유가는 어떤 거절의 말도 내뱉을 수 없었다.

유가는 이번에 신계에 갈 때 열두 마사도 데리고 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는 천도가 신계 전체를 움직여 자신과 대적할 거라는 생각에 실패가 두려웠다. 자신이 보호하고 싶은 사람이 다치는 것보단 송기연과 둘이서 천도를 대적하는 게 나을 거로 생각했다. 이긴다면 큰 기쁨일 것이고 진다면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죽으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맹장의 말에 그는 그만 현실을 깨닫고 말았다.

수가 많으면 힘도 세지는 법이다. 자신을 도와주겠다는 사람들을 스스로 거절하면 그냥 자포자기 하는 것과 다를 게 없었다. 실패할 확률이 분명히 적어질 텐데, 고집을 부려 송기연과만 간다는 건 경솔한 자와 다를 게 없었다.

게다가 만일 실패하여 다시 아구의 세상 속에서 자신이 사라져 버린다면, 그건 이 녀석에게 너무 잔인한 일이었다.

마음속으로 정답을 정해 놓은 그가 송기연을 향해 질문했다.

“기연, 네 생각은 어떠한가?”

“전 사존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청년이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들이 따라가길 원하신다면, 저는 반대하지 않겠습니다. 만약 사존께서 그들과 함께 가길 원치 않으신다면, 저희가 신계에서 돌아올 때까지 저들은 적절한 곳에 가두어 두겠습니다.”

“송기연 저 자식이!”

아구가 화를 냈다.

“…….”

유가는 약간 입을 다물었다. 저 녀석의 수법이 너무 극단적이라고 생각했다. 아구가 저 녀석과 맞지 않는 것도 당연했다.

“그럼 함께 가자꾸나. 맹장의 말이 맞다. 인원이 많을수록 힘도 세지지. 그럼 우리도 조금은 부담을 덜 수 있을 터.”

유가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머릿속에 환하게 웃는 작은 얼굴이 떠올랐다. 유가는 입꼬리를 활짝 올리며 말했다.

“이왕 너희와 같이 가기로 했으니 한 사람은 꼭 데려가야겠다.”

* * *

며칠 뒤 유가가 송기연과 함께 왕다국을 찾았을 때, 마궁은 이미 엉망이었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존주의 이상한 행동에 토론을 펼치고 있었다. 아침에 일어난 왕다국은 뜬금없이 마궁 사람들을 모아 자신은 존주의 자리에 어울리지 않으니 하고 싶은 사람이 맡으라고 말했다.

한 사람을 붙잡고 유가는 왕다국은 지금 어디서 무얼 하는지 물었다. 그 하인이 말하길, 왕다국이 지금 침실에서 짐을 챙기고 있으며 정말 떠날 생각인 것 같다고 했다.

유가는 도통 이해가 되질 않아 그 하인에게 위치를 물어 직접 찾아갔다. 문을 쾅- 하고 여는 순간, 그는 침상 밑에서 서책을 꺼내 몸속 공간 속에 넣는 사람을 봤다.

유가를 본 왕다국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마치 자신을 잡아먹으러 온 야수 보듯 유가를 바라봤다.

“존주, 뭐 하시는 겁니까?”

유가는 미간을 찌푸리긴 했지만 아직 공손한 말투로 물어봤다.

“진짜 존주! 존주께서 절 그리 부르시니, 곧 죽을 목숨인 것 같습니다!”

왕다국이 난처한 얼굴로 유가에게 가련하게 투덜거렸다.

왕다국은 유가와 자신의 관계가 생각났다.

자신은 수하였고, 눈앞에 있는 사람이 진짜 존주였다. 저번에 장금문에서 봤을 때 유가가 자신을 몇 번이고 존주라고 칭했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얼마나 얼굴이 화끈하고 실례였는지 모르겠다.

“기억이 돌아왔느냐? 얼마나 돌아온 것이냐?”

유가가 활짝 웃으며 그를 놀렸다.

“막청과 너의 일도 다 떠오른 것이냐?”

“아, 그, 그건……!”

왕다국이 얼굴을 긁적이며 부끄러워했다.

“존주, 놀리지 마십시오…….”

“이상하군, 네가 부끄러워하기도 하는구나.”

유가는 송기연을 이끌고 왕다국에게 가까이 가 엉망이 된 침상를 살폈다. 그러다 왕다국이 급히 꺼낸 물건이 떠올랐다.

그가 손을 뻗어 서책을 손에 들었고, 왕다국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존주! 꺼내지 마세요!”

왕다국이 달려들려고 하자, 눈치 빠른 송기연이 그 앞을 막아섰다.

유가가 미간을 찌푸리며 그 공책을 펼쳐보자, 순간 표정이 다채로워졌다.

몇 장을 읽은 그의 이마엔 핏줄이 슬금슬금 솟아올라, 그가 웃으며 욕을 했다.

“너도 참 취향 한번 변하질 않는구나! 막청이 네가 매일 밤 자신과 이런 상상을 한걸 알았다면, 넌 이미 막청의 채찍에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뭘 보신 거예요, 사존?”

송기연이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왕다국을 제치고 유가의 곁으로 다가갔다. 펼쳐진 서책을 살짝 훑어보려는데, 제대로 보기도 전에 유가가 탁-하고 공책을 덮어 버렸다.

“흠흠! 이런 건 보지 마라. 아직 너에겐 이르다.”

“…….”

이천 살이 넘은 송기연의 얼굴이 멍해졌다.

“자, 이 물건은 잘 간수해라. 다른 사람이 보지 않도록. 난 이번에 네게 할 말이 있어 찾아왔다.”

유가가 서책을 왕다국에게 돌려주고 침상에 앉아 왕다국을 보며 하얀 이를 드러냈다.

“전에 내게 했던 약속 기억하느냐?”

“……제가 무슨 약속을 하였습니까?”

왕다국이 당황했다. 자신이 유가에게 한 약속은 셀 수도 없이 많았고, 어떤 약속인지 정말 생각이 나지 않아 바로 되물었다.

유가는 자신의 앞에서 강자와 약자 이치를 늘어놓으며,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하던 왕다국이 떠올라 마음이 훈훈했다.

“황천역에서 너는 나와 한배를 탔으니 감히 도망갈 생각 마라. 네가 한 약속을 이행해다오. 앞길이 아무리 험난하다고 해도, 넌 내 곁에서 도움을 주며 내가 등을 내어 주고 의지할 수 있는 친구가 되어 주었으면 좋겠구나.”

“기억합니다.”

한쪽 무릎을 꿇은 왕다국이 진중하게 대답했다.

“존주를 향한 제 충심은 존주께서 자리를 비우신 시간 동안 절대 변하지 않았습니다. 과거든 현재든 전 언제나 목숨을 걸고 존주를 따르겠습니다.”

“됐다. 어서 일어나라. 그저 장난을 쳤을 뿐이다.”

유가가 그를 일으켰고, 약간 허둥지둥 일어난 왕다국이 한숨을 돌리는 틈에 유가는 다시 악랄하게 말했다.

“네가 잊었다면 널 때려서라도 다시 기억을 찾아 주려 했다.”

“…….”

그 주먹으로. 아.

다리가 덜덜 떨려 왕다국은 하마터면 못 일어날 뻔했다.

* * *

유가는 마사를 고금성에게 맡기고, 폐관수련을 했다. 한 달 뒤 다시 나왔을 땐 실력이 꽤나 회복되었고, 전처럼 허약한 체질도 아니었다. 먼저 아구와 맹장에게도 새로운 수련 방법을 알려주며 그동안 스스로 깨달음을 얻게 했는데, 이 기간 동안 영감도 얻었다.

모두 실력이 일취월장하여, 허공을 부수고 신계로 올라갈 시간도 점점 가까워졌다. 송기연과 왕다국이 허공을 깬다는 소식은 이미 알려질 대로 알려졌다. 이 두 사람은 수진계의 양대 산맥이라, 이번에 이렇게 간다면 파동이 일어날 게 뻔했고 잠잠한 대륙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송기연의 실력은 모든 사람의 마음에 큰 짐을 지웠다. 수단이 악랄한 경창파 장문인은 한때 많은 수진자들의 정신적 장애가 되기도 했다. 지금 그자가 떠난다고 하니, 모두들 안도의 한숨을 돌렸고 마음이 평온해진 사람들은 심지어 환송회까지 열어주고 싶어 했다.

사람들이 송기연에게 환송회를 열어주고 싶어 한다는 얘길 들은 유가는 침상 위에서 배를 잡고 굴렀다. 정말 환송회를 받고도 싶었으나 송기연의 어두운 표정을 보고 유가는 대신 거절했다.

두 사람은 최근 수련에 몰두하며 수시로 왕다국과 아구 등을 지도하였고, 아구와 함께 당근과 채찍을 적절히 쓰며 능광과 청요를 설득했다. 주작족에서 유가는 놀랍게도 아구의 부모를 뵙게 되었는데, 모두 따뜻한 분들이셨다.

생각해 보니, 그가 역사를 바꾼 후로 이 대륙엔 네 마리 흉수가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서 아구의 부모는 지금껏 살아 아구의 곁에 있을 수 있었다.

유가는 내심 뿌듯하면서도 자신과 송기연이 과거로 다녀온 후, 도대체 얼마나 많은 게 변했을까 생각해봤다. 그는 아직 ‘경창 삼걸’이라고 불린, 모풍, 석개, 임관을 만나지 못했다. 아예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인 것 같았다. 그는 일부 사람들의 생명을 되살렸지만 다른 집단의 존재는 아예 말살해 버렸다.

이런 걸로 죄책감을 느낄 유가는 아니었다. 그는 자신과, 자신의 마음속 사람을 위해 다시 한번 살아가고 있었다. 자신과 상관없는 사람들에게 날을 세울 필요는 없었다.

역사가 스스로 돌아가는 와중에 송기연과 아구 등 사람들을 자신의 곁으로 보내줬으니 그것만으로도 행복했다. 구태여 본인에게 도덕적 쇠사슬을 채울 필요가 있을까?

이번 생에 유가는 진짜 자신으로 살 수 있다. 그는 착하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었고, 다시는 자신을 사지로 내몰지 않을 생각이다. 그는 강했고, 강하다는 걸 자각하기에 전처럼 권세만으로 남을 함부로 깔보지도 않을 것이다. 그는 허세를 떨지만, 악랄한 존주자리를 벗어버리자, 그저 한가롭게 음담패설이나 즐기는 한량일 뿐이었다.

이런 유가에게 송기연은 점점 더 빠져들었고, 종일 사존만 쫓아다니며 기회만 틈타 입을 맞추고 포옹을 하기 바빴다. 하지만 송기연을 고민하게도 만들었다. 전에 늘 수줍어하던 묵묵씨에서 지금 사존은 언제든 손을 그의 엉덩이에 올린 뒤 주무르고 꼬집었다. 확실히 난감했다.

송기연은 전에 사존께 자신이 아래에서 할 수 있다고 약속까지 했다. 하지만 역시 후회할 때도 있었다. 그는 이전에 유가가 경국지색의 미모로 이불 위에 누워, 달아오른 쾌감에 떨며 애원하는 모습만 상상했었다. 거대한 자신이 아래에 누워 그처럼 참지 못하고 운다고 생각하니 도저히 상상히 가지 않았다.

때문에 이미 오랫동안 두 사람은 침상에서 입을 맞추며 한참 뒹굴다가 곧 육탄전이 벌어지기 일쑤였다. 육탄전은 침실을 부수고 공중으로까지 옮겨갔고, 하늘색까지 어두워지며 청광 금광이 번쩍였다. 찢어진 공간에 난기류와 폭풍이 경창파 하늘을 가득 덮었다.

마지막엔 경창파 제자들이 미쳐 날뛰는 두 사람을 잠재우기 위해, 평소엔 쓰지 않던 호산대진까지 사용해야 했다.

이마를 짚은 올린 정상은 공중에서 열렬하게 싸우는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왕다국을 쳐다봤다. 부서진 침전 탁자에 앉아 여유롭게 차를 마시며 구경하는 그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저 두 분은 왜 가만히 있지를 못할까요?”

정상은 체면따위 생각하지 않고 높은 바위에 걸터앉아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설마 전생에 원수였습니까?”

“축하하오, 정답이오.”

왕다국이 차를 마시며 말했다.

“전생에 원수였지.”

“…….”

정상의 눈이 동그래졌다.

“마존 대인, 지금 농담하시는 거죠?”

“마존이라고 부르지 마시오. 난 감당할 수 없는 자리요.”

왕다국이 손사래를 치며, 난기류 사이로 열심히 싸우는 두 사람을 향해 웃었다.

“저 두 분 저런 모습이 사랑스럽진 않습니까?”

“……”

정상은 정말 하늘 위 절색의 미인 ‘사존’ 주변 사람들은 다 정상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통쾌하군!”

유가가 시큼한 손목을 어루만지며 송기연을 바라봤다.

“이 녀석, 실력이 확실히 늘었구나. 제대로 붙어도 널 이길 수 있을지 모르겠다.”

“사존께서 봐주시는 거죠.”

송기연은 창결검을 몸에 비스듬히 세우고 유가의 움직임을 긴장한 채 주시했다.

“내가 널 이기면, 너와 한번 할 수 있는 것이냐?”

눈에 능글능글함이 가득한 유가가 붉은 혀로 아랫입술을 한 번 핥으며 환하게 웃었다. 송기연이 아찔해 하자 손에 든 창결검도 떨렸다.

송기연은 며칠 전 사존을 꾀려 새로 정한 규칙이 생각났다. 만약 사존이 이긴다면 그는 약속한 대로 사존이 위에서 자신을 범하는 걸 허락해야 했다.

그는 원래 자신만만했으나, 유가의 실력이 이렇게 빠른 시간 내에 일취월장할 줄 몰랐다. 아직 자신을 이길 수준은 안 되지만, 이 정도 속도라면 자신을 꺾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머리를 굴리던 송기연은 갑자기 묘책 하나가 떠올라 유가에게 물었다.

“사존, 이 약속은 너무 사존께만 이익인데 이기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

유가의 눈에 물음표가 가득했다.

“절차탁마한지 이리 오래인데, 사존께서 지시면 아무런 벌칙도 받지 않으시고 이기면 상을 받으신다니요.”

송기연이 정말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제겐 너무 불공평합니다.”

머리를 한번 굴려본 유가가 그를 봤다.

“그럼 어찌하고 싶은 것이냐?”

“승리할 때 보상이 따른다면, 질 때도 벌칙이 따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송기연이 유가의 곁으로 다가가며 검은 눈동자에 어두운 빛이 반짝였다. 왼손을 뻗어 유가의 귀밑머리를 부드럽게 그의 뒤로 넘겨주고 손으로 귀를 쓸며 말했다.

“진다면 밤 동안 제 말을 들으셔야 합니다. 어떠십니까?”

“네 말을 들어라? 네 속셈을 모를 줄 아느냐? 싫다.”

유가가 송기연을 밀치며 거절했다.

“오해십니다. ‘제 말을 들으시’라는 건 그 범위가 너무 광대하죠. 제가 당신을 안고 자거나, 제 얼굴에 입을 맞춰달라고 할 수도 있죠. 꼭 마지막까지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가 진지한 눈으로 유도했다.

“전 사존께서 하기 싫으신 일을 강요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유가가 미심쩍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속으로도 믿지 않았다. 하지만 송기연의 말처럼 이 도박판은 송기연에겐 좀 불공평했다.

마지막을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면 뭐, 상관없었다. 송기연도 강요하진 않으니 그도 한참을 생각한 끝에 안심하고 말했다.

“일단 약속하지.”

말이 끝나자마자 재빨리 힘을 끌어 지척에 있는 송기연에게 날려보냈으나, 그도 확실히 교묘했다. 이미 당연히 대비한 송기연이 창결검으로 막아섰고, 그대로 몇 장(丈)을 밀려났지만 얼굴에 웃음은 감춰지지 않았다.

오늘 밤은 졌다. 송기연의 말을 들어 줄 차례다.

송기연이 강요하진 않겠다고 했지만, 어쨌든 대비는 하고 있어야 했다.

* * *

송기연이 무엇을 부탁했나.

국화주를 마시고 싶다고 말했다.

유가는 생각 없이 그러마-하고 말했고

꼼짝없이 신묘한 금제에 걸리고 말았다.

유가의 몸이 침상 위에 빳빳하게 굳어 있었다.

송기연은 히죽거리며 입구가 좁고 길다란 작은 술병을 가져왔고, 순식간에 발가벗긴 유가의 다리를 벌리고 엉덩이를 벌리더니 작고 탐스런 그의 국화에 하얀 자기 병을 꽂아 버렸다.

이것이 국화주란 것이었다.

말도 못하게 억울한 유가가 얼굴이 새빨개졌지만 높게 들린 엉덩이로 술병의 술은 착실히 콸콸 들어오고 있었다. 빠듯하게 안을 찰랑거리는 술이 채우자, 송기연은 유가도 익숙한 상자 하나를 공간 속에서 꺼냈다.

전에 유가가 장난친 ‘장난감’ 상자를 보고서 유가는 제 혀를 깨물어 버리고 싶었다. 송기연은 술병을 퐁- 하고 뽑더니 상자에 있던 크지 않은 옥남근을 혀로 적시고 국화주가 찰랑한 유가의 국화 입구를 막아 버렸다.

“흐아-!”

유가의 몸이 튀었으나, 송기연은 그의 다리와 허리를 내리고 자신의 뜨거운 혀로는 유가의 앞을 한입에 집어삼켜 맛있는 당과라도 되듯 쬽쬽빨고 입 안에서 굴리며 뒤에 들어찬 장난감을 자극했다.

송기연이 유가의 백색액을 꿀떡 삼켰을 땐, 이미 유가는 몸이 달아오르고 정염에 붉어진 채로 가녀린 숨을 색색 대고 있었다.

유가가 ‘빼 줘.’ 라고 말했고, 송기연은 ‘넣어 줘-라고 말하시면요.’ 라고 음흉하게 말했다. 모든 게 송기연의 계획대로였다.

침상은 향기로운 국화주가 가득 적셨고,

“아, 응! 앗, 아항! 아! 앙아!”

“사, 살려줘……! 히, 힘들어! 망가져!”

울음소리가 밤새 가득했고,

“이, 이렇게 일어서서는 싫어!”

“그럼 밖으로 갈까요? 지붕 위에서 달을 보면서 할까요? 달을 보는 거 좋아하시잖아요.”

“시, 싫어! 다, 다 볼 거야, 아!”

“네, 그럼 안 할게요. 사존께서 싫으신 건 안 해요.”

“여기 꽁꽁 숨겨둘게요. 아무도 못 보게. 사존, 여긴 저밖에 없어요.”

이런 한참 쉬어버린 속삭임이 가득했고,

“사존, 뭘 원해요? 네? 원하시는 대로 해 드릴게요.”

“누, 누워서……. 치, 침상으로 가……, 윽!”

“네, 가요. 사존.”

그렇게 제자는 사존의 말을 잘 들었다.

그런 밤이었다.

“기연, 이 나쁜 자식아!”

해가 중천에 떴고, 막 수리를 끝낸 침전 안에서 분노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곧이어 경창파의 장문인이 옷도 제대로 갖춰 입지 못하고 침전 지붕으로 쫓겨났다. 제자들은 그 꼴을 보고 말았다.

쿵! 하는 거대한 소리와 함께 송씨가 단단한 지붕을 뚫고 나온 뒤 유리기와에 데구르르 굴렀다. 그리고 중력에 따라 자연스럽게 아래로 미끄러지며 진흙 위로 떨어졌다.

왕다국이 다가가자 부어오른 송기연의 얼굴이 딱 보였다. 얻어맞고 진흙에 처박히면서도 손가락이 절묘하게 안을 긁어내는 모양으로 악랄하게 웃고 있었다.

왕다국이 진저리를 치며 살짝 뒤로 물러났다.

“정말 네게 탄복한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리 교활하다니. 널 보고 많이 배우겠다.”

“날 보고 배울 필요 없네, 이건 다 전에 당신을 보고 배운 것이니.”

송기연이 바보처럼 웃으며 일어서서 차가운 눈빛으로 주위를 훑었다. 제자들이 알아서 잘 흩어졌다.

“어이구, 그런가?”

왕다국이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하다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런 일이 있었던 것도 같군. 아무래도 전에 우리가 친분이 꽤 있었나 보군요? 송 장문인.”

송기연이 왕다국의 온전한 두 팔을 바라보며 아득해졌다가 살짝 미소 지었다.

“네, 우리 관계는 꽤나 좋았습니다.”

송기연은 더러워진 옷을 정리하고 침전 문을 두드리며 안에 계신 대인께 말했다.

“사존, 목욕하실래요? 제가 사존께서 좋아하는 음식과 옷을 준비하겠습니다. 괜찮습니까?”

온몸에 소름이 돋은 왕다국은 느낌적으로 문 앞에서 벗어났다.

그의 직감은 역시나 맞았다. 곧 엄청난 주먹이 침전문을 부수고 나왔고, 송기연을 그대로 치고 정원 가운데 도화나무까지 날려버렸다.

콰앙——!

왕다국이 부채를 펼치고 팔랑이며 남루한 차림의 송 장문인 앞으로 다가가 말했다.

“정말 꼴 좋습니다.”

“하하하하하!! 송기연, 당신도 이런 날이 있군! 하하하!! 아휴, 맹장, 나 배 아파, 웃겨 죽겠네!”

문을 들어서자마자 송기연이 날아가자 아구는 그대로 땅을 뒹굴며 웃음을 멈추질 못했다. 맹장이 다가와 아구의 배를 어루만지며 물었다.

“좀 괜찮아졌어?”

“돼, 됐어!”

아구는 맹장의 이런 다정한 모습에 익숙하지 않아 그의 손을 어색하게 피했다. 그리고 송기연 앞으로 가서 쭈그리고 앉아 실실 웃으며 말했다.

“매일 그렇게 장난만 치니 매를 벌지. 계속 그런 식이면 곧 존주께 차일 것 같구나!”

“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도화나무 하나를 부러트려놓고 누워있던 송씨는 머리카락을 정돈하며 아구를 향해 웃었다.

“이런 말 못 들어봤느냐? 때리고 욕을 하는 건 사랑해서다. 오늘 사존께서 날 때리고 욕하셨으니 날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겠지.”

“어쩜 이렇게 뻔뻔해!”

아구가 놀랐다.

“사랑엔 뻔뻔함이 필요해.”

송씨가 자랑스러워했다.

“너!”

송기연의 말에 화가 난 아구는 이가 갈렸다. 하지만 별다른 수도 없었다. 그는 말싸움을 해서 이긴 기억이 없다.

앞에 있는 사람과 짐승들을 보며 부채질하던 왕다국은 왠지 모르게 막청이 떠올랐다. 그는 이번에 막청과 함께 갈 생각도 없었지만, 막청에게 그가 왜 신계로 올라가고 언제 돌아올 것인지 말을 하지 않았다. 이번 생에 막청은 아무래도 자신을 좋아하는 것 같지 않다. 그가 몇 번이고 암시를 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계속 그렇게 지내다 보니 이제는 좀 지쳤다. 최근에 폐관수련을 하며 그 틈에 그 사람과 관계를 끊고, 모른 척 꽁무니를 따라다니지도 않았다. 그는 자신의 성격상 금방 막청을 잊을 줄 알았는데, 지금 또 이렇게 떠올리고 말았다.

그리움은 풀기도 어렵지만 그 고통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장문인, 막청 공자께서 뵙기를 청하여 지금 창운전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익숙한 이름에 정신을 차린 왕다국이 송기연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그대로 창운전으로 향했다.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송기연은 제자에게 명령했다.

“창운전을 지키는 제자들을 모두 물려, 저들을 방해하지 못하게 하라.”

“네, 장문인.”

제자가 명령을 전하러 떠났다.

아구가 송기연을 흘겨보며 말했다.

“그렇게 섬세할 줄은 몰랐는데?”

“칭찬 감사합니다.”

송기연이 웃었다.

* * *

왕다국이 창운전에 도착했을 때 이미 제자들은 모두 떠났고, 막청과 단 둘뿐이었다.

막청의 얼굴엔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었다. 왕다국이 걸어오는 모습을 보고도 놀라지 않은 게 아무래도 예상하고 있던 것 같다.

왕다국이 걸어와 탁자 앞에 앉았지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아직 정하지 못했다. 제자가 아뢰는 말을 듣고 그는 직감적으로 막청이 자신을 찾아왔다는 걸 알았다. 흥분되고 기뻤으나, 지금 이자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슬퍼진 그도…… 말문이 막혔다.

자신이 혼자 설레발을 친 걸까 봐 난감했다. 막청이 만나러 온 사람이 자신이 아닐 수 있었다.

“당신이 허공을 깨고 신계로 간다는 얘길 들었습니다.”

막청이 먼저 조용한 분위기를 깨고 말했다.

“응, 실력이 충분해져서, 신계에 가 보려고 하네.”

왕다국이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은 채 거짓말을 했다.

“이곳은 고수도 많지 않고, 정상에 앉아있는 것도 이젠 지루하네. 신계가 그렇게 크다고 하니, 분명히 실력이 막강한 자들이 많을 테고 그럼 나도…….”

“당신을 보러 가겠습니다.”

막청이 그의 말을 끊었다. 그리고 왕다국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도 곧 신계에 올라 당신이 말한 강자 대열에 합류하겠습니다. 그러니 나와 겨룰 그날을 기다리십시오. 그때 제가 이긴다면 부채를 돌려주세요.”

왕다국이 아연해졌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고, 바보처럼 눈만 깜빡거렸다. 막청이 하는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뭐라고?”

막청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지만 목소리는 여전히 강건했다.

“신계에 가서 당신을 이기면 부채를 돌려 달라고요.”

왕다국이 활짝 웃었다.

마신이시여! 그동안 막청이 자신에게 아무런 마음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완전히 아니었다!

왕다국은 어제 송기연이 유가에게 썼던 방법이 생각나, 긴 눈을 가늘게 접으며 웃었다.

“좋네. 만약 당신이 이긴다면 부채를 돌려주지. 하나 당신이 진다면 내 사람이 되어주시오. 어떠한가?”

“…….”

막청이 아무런 말도 없었으나, 얼굴은 더욱 붉어졌다.

“도박을 했으면 결과에 상관없이 승복해야지? 막가 공자, 어떻소?”

왕다국이 막청을 자극했다.

“……알겠습니다.”

“오!”

왕다국이 갑자기 다가와 막청의 입술을 포개더니 급히 뒤로 물러섰다.

“그럼 일평생 날 이길 생각은 접어두시오.”

* * *

경창산 위쪽엔 검은 구름이 가득했고, 번개가 치며 거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수많은 수진자들은 경창산 근처에 모여 송 장문인 일행이 승천하는 광경을 지켜봤다. 역사상 다섯 명이 한 번에 승천하는 건 볼 수도 없었고, 다섯 사람이 가는 건 그 영향도 대단했다. 게다가 저 다섯 사람은 모두 비범한 사람들로, 주작족과 청룡족의 차기 족장, 마존, 경창파 장문인과 그의 사존이라는 겁이 날 정도의 조합이었다.

먹구름이 몰려오고 구중 번개가 줄줄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경창산 밖에 구경하던 사람들은 모두 오금이 저렸지만, 산 정상에 있던 장본인들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유가는 비스듬히 기울어진 나무에 기대, 송 장문인이 썰어준 열매를 받아 한입 베어 물었다. 송기연이 친 더 강력해진 청색 호산대진을 통해 왕다국이 느긋하게 밖에서 번개 하나를 파괴했다. 그리고 유가가 외쳤다.

“서둘러, 아직 아구가 기다리고 있다!”

왕다국이 머리를 긁적이며 손은 멈추지 않은 채 대답했다.

“존주. 제가 느리고 싶어서 느린 게 아니라, 번개가 늦게 떨어지는 거잖아요? 아홉 번을 다 부숴야만 내려갈 수 있잖아요?”

“그럼 힘내라.”

유가는 절반을 먹은 열매를 송기연에게 던지며 곁에 있던 아구에게 말했다.

“왕다국을 잘 보아라, 곧 최대의 능력을 끌어내어 번개를 부술 텐데, 천도가 내린 이런 장난쯤은 별것 아니다.”

아구가 고개를 끄덕였다.

곧 왕다국이 내려오면 아구가 들어가고, 아구가 완성하면 맹장의 차례다. 밖에 있는 수진자들은 구름이 걷히는 걸 보지 못했고, 거대한 소리만 계속 들릴 뿐이었다.

모든 순서가 다 끝나자 먹구름이 물러났고, 하늘에 거대한 구멍이 뚫리더니 그 안에서 다른 공간이 드러났다. 구름층 위에 화려한 궁전이 나타났고, 적지 않은 수진자들이 그 사이를 지나며 한가로이 있었다.

경창산 밖에선 경악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유가는 마침내 일어서서 열두 마사를 자신의 식해 속에 넣은 뒤 일행을 향해 말했다.

“가자.”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공간을 날아 올라가 선계로 향했다.

그들이 진입하자 구멍이 점점 닫히기 시작했고, 멍하니 있던 사람들은 모두 정신을 차렸다, 이 황홀한 광경에 저 위쪽 세계에 대한 동경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 * *

“멈추시오. 등록하시오.”

다섯 사람이 신계에 발을 들인 뒤 얼마 가지 않아, 작은 궁전 하나가 앞에 나타났다. 신계의 입구는 막혀 있었다.

엄중한 얼굴의 호위들은 검은색 옷을 입고, 은색의 탑 문양이 새겨진 겉옷을 입고, 손엔 일곱 장(丈)이 넘는 장검을 들고 있었다. 두려울 정도로 차가운 표정이었다.

일행을 훑어보던 호위가 송기연을 보더니 그대로 시선을 머문 채 말했다.

“아래 세계에서 오신 분들은 저를 따라 등록을 하시고, 능력을 시험을 보고, 관문을 통과해야만 신계로 진입할 수 있습니다. 통과하지 못한다면 그대로 신계에서 쫓겨나 적막의 땅으로 추방되었다가 실력이 충분해진 뒤 다시 돌아올 수 있습니다.”

호위가 비웃었고, 그 엄숙한 표정이 이상하리만큼 부자연스러웠다.

“하나, 적막의 땅에 간 사람 중에 살아 돌아온 이는 없습니다.”

유가가 그 사람을 아래위로 훑어보자, 그중에 눈에 띄는 탑 문양을 한참 바라보았다. 그리고 허리에 차고 있는 허리띠를 보며 곰곰이 생각하다가 이 사내가 천연문(天緣門)의 수하라는 걸 깨달았다.

적막의 땅이라는 곳을 왜 처음 듣지? 최근에 막 생긴 건가, 천도 대체 무슨 수작을 부리는 거야.

능력 시험은 또 뭔 소리지. 설마 신계 인구가 너무 많아 더는 사람을 받지 않고 오히려 불량품을 걸러내겠다는 건가.

머릿속에 물음은 가득한데 답은 알 수 없으니 너무 답답했다.

“사존, 저자를 따라가실 겁니까?”

송기연이 조용히 유가에게 물었다. 손을 검 자루 위에 올리고 유가가 따라가지 않겠다고 하면 바로 덤비겠다는 심산이었다.

송기연이 살기를 억누르고 있었지만, 실력이 막강한 사내는 한 번에 그의 속셈을 알아차렸다.

순간 저 사내가 자신의 허리띠를 잡고 진기를 주입하는 게 보였다. 허리띠가 반짝이자, 잠시 후 주위에서 같은 복장의 대승기 수진자 십여 명이 그들 앞에 나타났다. 유가와 송기연, 아구와 맹장을 둘러싸고 긴장감이 감돌았다.

유가가 싸울 태세를 취하는 송기연을 말리며 미간을 찌푸리고 그 사내에게 물었다.

“각하, 이게 무슨 뜻입니까?”

“만약 방해하는 자가 있다면, 마땅히 처벌을 받아야 합니다.”

“저희가 뭘 했다고 이러십니까? 가만히 서서 욕 한마디 하지 않았는데, 각하께서 혼자 말씀하시다가 갑자기 저희와 겨루시겠다는 겁니까?”

“맞습니다! 저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이게 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상황입니까? 신계는 모두 당신 같은 야만인만 있는 겁니까?”

아구가 불만스러운 듯 맞장구쳤다.

“존주, 아무래도 더 이상 말을 섞어봤자 아무 소용없을 것 같습니다. 어쨌든 저희가 온 목적도 이런 것이니, 이참에 본때를 보여주죠!”

왕다국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신계에 오자마자 이런 무리를 만나는데, 마음이 편할 리가. 그도 가만히 두고 보는 사람이 아니기에 이 사람들과 한판 붙을 태세였다.

“좋다 붙자!”

유가가 고개를 끄덕이고 속으로 뭔가를 생각하더니 말했다.

“하나 우리는 질 것이다.”

마지막 말은 주위 일행들에게만 전한 뒤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송기연을 제외한 모든 사람의 표정이 일순간 굳어졌다.

“존주, 그게 무슨 뜻입니까?”

“대인 설마 아구와 제가 못 이길 거로 생각하시는 겁니까?”

“대인! 농담이시죠!”

“사존 말은 다 옳습니다. 사존 말씀대로 하면 다 옳았습니다.”

“모두 실력을 아껴라. 우리는 하는 척만 할 것이다.”

유가가 미간을 찌푸렸다.

“신계와 이렇게 빨리 얼굴을 붉히고 싶지 않다. 게다가 난 저 적막의 땅이 어딘지 한번 보고 싶구나.”

왕다국이 난감한 듯 웃으며 손을 들었다. 존주의 요구에 동의한다고 표했다.

“저들을 잡아라!”

호위 사내가 명령하자 열두 사람이 일제히 일행에게 달려들었고, 소란스러운 싸움이 시작되었다.

반 시진 후.

“아이고, 못 합니다. 저희가 졌습니다.”

유가가 팔이 잡힌 채 슬픔 가득한 얼굴로 패배를 인정했다. 호위 사내를 보며 말했다.

“형님, 저희가 졌습니다. 좀 전에 무례를 부디 용서하십시오.”

“이미 늦었다.”

호위는 비웃으며, 그 사과를 무시했다.

일행은 등과 팔이 눌려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로 유가의 연기를 감상했다.

“형님, 저희를 풀어 주십시오. 처음 와서 아무것도 몰라 그랬습니다. 부디 적막의 땅에만 보내지 말아 주십시오.”

유가가 애절하게 간청하는데, 눈에서 눈물이 떨어질 뻔했다.

“적막의 땅에 가기 싫다? 이제 와서? 우리의 심기를 건드렸으니 그곳에서 평생 썩어 보아라!”

송기연을 누르고 있던 사람이 그 호위 사내의 비웃음을 따라하며 우두머리 사내에게 말했다.

“형님, 그만 말 섞고 어서 처리하러 가시죠. 돌아와서 천연루(天缘楼) 법칙을 깨달으러 가야 합니다. 늦으면 자리가 없어요.”

천연루라는 단어를 들은 유가의 눈이 반짝거렸다. 하지만 그것도 찰나였고, 다시 호위 사내에게 말했다.

“제발요. 형님. 이렇게 사죄드립니다. 부디 적막의 땅으로 보내지 말아 주십시오.”

말을 하곤 그자를 향해 가련하게 눈을 깜빡였다.

“정말 역겹군! 사내자식이 눈을 그리 뜨다니!”

유가의 ‘미혹’을 본 호위가 기겁하고는 수하에게 말했다.

“빨리, 적막의 땅을 열고 저들을 처넣어라!”

“……”

호위들은 모두 자신이 차고 있던 허리띠를 세차게 끌어당겼다. 열두 사람이 열두 개의 요패에 진기를 불어넣고 서로 호응하자, 잠시 후 유가 일행의 발아래 구름층이 깨끗이 사라졌다. 먹구름과 번개 가득한 지옥의 경계가 나타나고, 엄청난 바람에 옷자락이 펄럭였다.

“대인, 저들의 요패가 왜 딱 열두 개일까요?”

유가의 의식 속에서 지켜보던 열두 마사는 그들의 요패의 숫자와 작용을 보고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유가도 좀 이상했다. 마사, 천연루의 층수, 혼돈진형도의 시공, 그리고 지금 적막의 땅을 열 수 있는 숫자가 공교롭게도 모두 열둘이었다.

“그들을 떨어뜨려라.”

우두머리 사내가 말하자 수하들이 곧 유가 일행의 등을 떠밀었다. 그대로 적막의 땅으로 떨어뜨리려 했다.

하지만 그들의 동작보다 일행의 동작이 더 재빨랐다. 눈빛을 주고받은 송기연과 왕다국이 제일 먼저 억압에서 벗어난 뒤 차례로 아구, 맹장을 도왔다. 그리고 차례로 적막의 땅으로 뛰어내렸다.

유가 또한 혼돈의 힘을 감싼 주먹을 호위의 몸에 날렸고, 호위 수중에 요패를 빼앗았다. 멍하니 서 있는 그자에게 웃으며 유가 또한 적막의 땅으로 몸을 날렸다.

”선물 고맙네.”

적막의 땅이 점점 닫혔지만 호위들은 유가 일행의 실력이 자신들보다 위라는 걸 알았다. 자신들은 감히 적막의 땅에 발을 들일 수 없어 일행을 쫓아오지 않았다. 그 보라색 번개는 너무 두려워서, 구중 번개를 겪고 신계에 올라온 사람들조차 버틸 수 없었다.

호위는 입을 꾹 다물고 얼굴은 한층 더 엄숙해졌다. 사실 그들은 이렇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을 처음 보았다.

실력을 숨기면서까지 자신들을 격노하게 해 굳이 목숨을 잃는 곳으로 제 발로 들어갔다.

“형님, 이 일을 보고해야 하지 않을까요?”

요패를 빼앗긴 호위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도대체 제 요패는 왜 가지고 간 걸까요? 설마 요패 하나만 있으면 적막의 땅에서 신계로 갈 수 있는 입구를 열거라는, 그런 순진한 생각을 하는 건 아니겠죠?”

“정말 우습군. 진짜 입구를 열고 싶은 거라면 요패 열두 개가 전부 필요한데, 대체 하나를 가지고 무얼 하겠다는 건지.”

다른 호위가 조롱하는 투로 바로 말을 이었다.

“저 다섯은 대체 어디서 온 거지? 알 수 있느냐?”

우두머리 사내가 그들의 질문엔 대답하지 않고 다른 질문을 내놓았다.

“저들은…… 형님, 잠시만요. 제가 알아볼게요.”

그중 한 사람이 공간 속에서 옥간을 하나 꺼내 공중에 펼쳤다. 눈으로 그 위에서 계속 변하는 정보를 걸러내다가 마지막에 왼쪽에 한 줄을 읽고 사내에게 대답했다.

“저들은 번호 8403 세계에서 왔습니다. 이곳이라면 천 년 전 한 사내가 신계에 왔다가 얼마 후 규칙을 깨고 내려가는 바람에 천연문에 많은 피해를 주었던 그곳입니다.”

“그자가 어떻게 생겼느냐?”

우두머리 사내가 놀라 다그쳤다.

“천 년 전이라 아직 기록이 남아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정말 힘든 일을 시키시는군요.”

호위가 원망 어린 표정으로 다시 옥간을 바라보고, 한참을 들여다보고서야 찾아냈다. 호위가 가리킨 곳에 한 사내의 모습이 보였다. 눈에 띄는 외모였다.

“이자라니!”

호위가 경악했다.

“누구요? 왜 그러세요?”

다른 사람들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점점 모여들어 모두 경악하고 말았다.

호위가 옥간을 모두에게 펼쳐서 보여 주었다. 그 속엔 흰옷을 입은 청년, 송기연의 모습이 보였다.

이자가 천 년 전 천연문을 어지럽힌 장본인이라는 걸 알게 된 호위들은 늦장 부리지 않고 곧장 천연문으로 달려가 송기연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전했다.

널찍한 대청은 텅 비어있었고, 방에는 들보를 받치는 기둥을 제외하고는 오직 방석 하나만 중간에 놓여 있었다. 그 위에 앉아 있는 사내는 눈을 감은 채 제자가 전하는 신계 입구 변고에 대한 보고를 가만히 들었다.

자초지종을 들은 문주라고 불린 사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웃었다.

“빨리 왔군.”

그가 손을 뻗어 바닥에 동그라미를 그리고 그 위에 선을 그리며 중얼거렸다.

“적막의 땅, 유가야. 네가 역시나 그곳에 갔구나.”

* * *

세 번째 번개에 제대로 맞아 까맣게 그을린 아구가 입에서 검은 연기를 뿜었다. 그리고 빨갛고 반짝이는 눈으로 유가를 흘겨봤다.

“대인. 정말 이해가 안 돼요. 도대체 이런 거지 같은 곳은 왜 오신 거예요?”

그의 수련 경지는 높은 편이 아니었고, 신급이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 신수이기 때문에 동급인 사람보다는 강했지만 이런 엄청난 번개엔 별다른 수가 없었다.

“사존께서 그리하신 건 다 뜻이 있으실 것이다.”

송기연이 창결검을 휘둘러 아구 대신에 떨어지는 번개를 막으며, 진법을 써서 번개의 위력을 버텼다. 그리고 한껏 눈엣가시인 아구를 조롱했다.

“본인 실력이 부족해서 이런 번개도 못 막는 걸, 괜히 왜 사존께 화풀이를 하는 것이냐.”

“너!”

“내가 뭘? 난 사실만 말했을 뿐이다.”

“됐다. 시끄럽다.”

유가가 두 사람의 말을 막고 저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곳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저기에 성이 있는 걸까?”

저 멀리 보이는 검은 점은 꽤나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유가의 시력으로 볼 수 있을 정도의 크기는 됐다.

적막의 땅에 온 이후로 그들의 눈에 보이는 건 끝없는 사막뿐이었고, 살아있는 생물은커녕 건축물 하나 보이지 않았다.

유가는 그 호위 사내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는 적막의 땅으로 추방된 사람들이 정말 모두 황천길을 건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어.”

저 멀리 내다보던 왕다국이 유가의 말에 동조했다.

“진짜 성인 것 같은데요.”

“우리가 찾았다는 건가요?”

아구가 눈을 반짝이며 환호했다.

“그럼 어서 가 봐요!”

“조심해.”

청룡 맹장이 아구 대신 번개를 막아서며 말했다.

“너무 무모하잖아.”

“기뻐서 그랬어. 헤헤.”

맹장이 계속 도와주자 아구는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청룡과 맹장이 돕는 것을 본 송기연은 유가와 함께 걷고 싶었다. 오른손으로 창결검을 휘둘러 번개를 막아서며, 왼손으로는 유가의 손을 잡았다.

“가요. 사존.”

“…….”

유가는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지만, 그의 손을 뿌리치지는 않았다. 유가 의식 속에 있던 열두 마사가 한순간에 소란스러워졌다.

혼자인 왕다국은 코를 비비고는 부채를 편 채 홀로 슬퍼했다.

다섯 사람의 발걸음은 빨랐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검은 점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유가의 예상이 맞았다. 이곳엔 확실히 거대한 성과 도시가 있었고, 그 크기가 보통이 아니었다.

그가 성 아래에 서자, 아랫부분이 검은 구름에 감싸여 있어 꼭 구름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그가 놀란 것은, 이 성이 구름층 가까이에 있지만 번개 하나 떨어지지 않은 것이다. 아무래도 누군가 새로운 진법으로 이 성과 도시를 보호하고 있는 것 같았다.

진법을 생각하자 그는 진법에 능한 사람이 한 명 떠올랐으나, 지금 그자가 신계에서 잘 지내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이리저리 고민하는 중 30장(仗)쯤 되는 석재 철문이 천천히 열리더니 안에서 얼굴 하나가 삐죽 튀어나왔다.

삼십 대 정도로 보이는 청년이 그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새로 추방되신 분들이시죠? 여길 찾기 힘드셨을 텐데, 어서 들어오세요.”

“네네. 감사합니다.”

감사 인사를 잊지 않은 유가가 네 사람에게 따라오라고 하며 그 안으로 들어갔다.

도시는 번화한 편이었지만 또 그렇게 번화하지도 않았다. 어쨌든 이 황량한 적막의 땅에서 그들을 제외하고는 먼저 추방된 신계 인사들 외 다른 생명체는 없었다. 만약 그들이 먹지 않아도 죽지 않는 게 아니었다면 그들은 이미 아사했을 것이다. 거리엔 점포 몇 개와 찻집만 있을 뿐, 살 물건도 거의 없었고 몇몇이 모여 얘기를 나누고 있을 뿐이었다.

유가 일행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다들 힐끔거리며 훔쳐보기 바빴다. 유가의 생김새와 옷을 본 사람들이 눈을 빛내며 계속 유가를 쳐다보는 탓에 송기연은 화가 치밀었다. 유가가 손을 내밀어 송기연의 손을 잡아 광견병이 활개 치는 걸 미연에 방지했다.

“이곳에 오신 분들은 성주 왕부에 가서 성주께 인사를 드리려야 합니다. 그리고 각자 맡은 임무를 수행하여 이 성지가 계속 운영될 수 있도록 해 주셔야 합니다.”

청년이 걸으며 일행에게 설명했다.

“성주께선 이곳에 진법을 창조하신 위대한 분이시며, 적막의 땅에 갇힌 저희의 유일한 희망이신 분입니다.”

그의 말에 호기심이 생긴 유가는 그 성주란 사람을 만나기만 기대했다.

성주 왕부는 도시 제일 중앙에 있으며 규모도 엄청났다. 청년이 안내하지 않더라도, 길을 따라 걷다 보면 발견하지 못하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

그곳은 회색 돌로 지어진 성과는 완전히 대조되었는데, 성 외벽엔 알 수 없는 연료로 그려진 꽃이 가득했고, 2장(丈) 정도 되는 꼭대기엔 직경 1장 하고 반 정도 되는 소형 진법이 쳐져 있었다. 복잡한 진형도는 마치 어떤 문자 같았고, 다양한 법칙이 담겨 있어 적지 않은 압박감을 주었다.

연녹색 빛이 둘러싸인 화려한 부적 그림이 수놓아진 담벼락은 확실히 기이해 보였다.

유가가 미간을 찌푸리며 옆에 있던 왕다국에게 속삭였다.

“저 녹색 대진 꼭 모자처럼 생기지 않았느냐?”

“크큭…….”

왕다국이 급히 부채로 얼굴을 가린 채 말했다.

“확실히 그래 보이네요. 게다가 이 벽은 음…… 확실히 독특한 게, 성주 취향이 꽤나 이상한 것 같은데요.”

두 사람이 또 둘이서 속삭이자 송기연은 별말 없이 인상을 쓰며 유가의 손을 꽉 잡았다.

이곳에 온 후로 그는 온몸으로 이상함을 느꼈다. 하지만 뭔가 말할 수 없는 느낌이었다. 여기는 뭔가 사악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성주 왕부도 위험하다고 느껴졌다.

성주 왕부에 가까워질수록 그 느낌이 더욱 확실해졌고, 더는 무시할 수 없었다.

성 안에 들어온 후로 번개는 진법 때문에 내려치지 않아, 유가가 열두 마사를 다 꺼냈다. 함께 걸어가자 적지 않은 대열이 되었다.

인솔하는 청년이 놀라긴 했지만, 별달리 묻지 않았고 그들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유가의 식해 속에 한참 있으면서 폐관 수련을 하고, 다른 마사들에게 혼돈진형도를 깨우쳐 준 고금성은 진형도에 포함된 시공간 법칙에 대해 아는 게 많았다. 그래서 이곳에 발을 들이자마자 바로 주위를 살펴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가 유가에게 소리를 전했다.

“존주, 아무래도 이 적막의 땅에 시간 운행이 조금 이상한 것 같습니다.”

“이상하다니?”

유가가 다시 물었다.

“그게…….”

고금성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생각 끝에 말했다.

“역사를 바꾸기 전 세계엔 시간 운행의 한 방식이 있었습니다. 역사를 바꾼 후로 혼돈진형도를 이용하여 송기연이 있는 세계로 오셨을 때, 세계의 시간 운행은 또 다른 방식이었습니다.”

유가가 끄덕이자 그는 계속 말을 이었다.

“여기 적막의 땅에 시간 운행 방식은 역사를 바꾸기 전 존주께서 계셨던 곳에 운행 방식과 동일합니다. 송기연이 있던 곳과 신계, 그리고 다른 곳과는 다르게 적막한 땅은 아무래도 역사를 바꾼 영향을 조금도 받지 않는 곳인 것 같습니다.”

“그게 가능한가?”

유가의 안색이 변했다.

적막의 땅은 천연문에서 신급 수진자를 추방하는 황량한 곳으로, 당연히 천연문의 문주가 찾은 곳이며 그는 그 문주를 천도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그 집행자도 유가가 역사를 바꾸고 그를 넘어설 수 있는 능력을 얻어 천도가 이미 무력해졌다고 분명히 말했다.

그럼 그자는 대체 어떻게 역사의 영향을 받지 않는 곳을 찾아낼 능력이 있는 거지? 그럼 이곳은 언제 만든 거야? 도대체 뭘 하려고 여길 만든 거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목적이 뭘까?

생각할수록 머리가 아팠다.

지금 유가의 머릿속은 어지러웠다. 그는 지금 천도가 큰 패를 둔 것이고 본인은 그 바둑판 위에 검은 돌이라고 생각했다. 이미 상대인 백 돌을 먹을 만큼 충분히 강해졌지만, 그의 행동을 막을 두 손가락이 늘 그의 몸을 누르고 있다는 건 생각하지 못했다.

새로 맞닥트린 집사는 지금 성주께서 벗과 진법에 대한 얘기를 나누는 중이라며, 안내한 청년을 내보내고 일행을 데리고 의사당으로 왔다.

의사당의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살짝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그가 말했다.

“들어오라.”

문밖에 있던 유가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사존, 왜 그러세요?”

송기연이 묻는 그 순간 방문이 열렸고 안에 있던 사람이 나왔다. 십여 명의 사람이 그 안에 서 있었으며 앞엔 작은 진형도가 떠다녔다. 그건 누군가 주입하는 진기에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었다.

한가운데 서 있는 사람은 어지러운 문양이 가득한 보라색 장포를 입고 있었는데, 왕부 담벼락 무늬와 같은 문양이었다. 그대로 얼굴을 확인하고는 경악했다. 미인을 많이 본 왕다국조차 환호성을 지를 뻔했다.

남자의 오뚝한 콧날, 또렷한 눈매, 특수한 수법으로 예쁘게 치장한 오른쪽 눈에 진한 흉터, 붉은 입술. 매혹적인 분위기가 가득했다.

“위명하(魏冥河).”

유가가 주먹을 움켜쥐고, 알 수 없는 이 감정을 애써 숨겼다. 하지만 반복되는 목소리에 너무 많은 게 담겨 있어 아랫입술을 깨물며 한숨을 내쉬고 웃었다.

“위명하였군.”

그는 진작 알아차렸다. 이런 진법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은 하늘 아래 위명하 단 한 사람뿐이라는 걸.

이 성의 성주와는 어찌 안다고만 할 수 있을까. 둘에 관계는 제법 깊었다. 그가 종횡무진 신계를 누비던 그때, 그를 죽이겠다고 꽁무니를 쫓아다니던 송기연을 제외하곤 제일 돈독한 관계에 있었던 자가 바로 위명하다.

이자는 신계에서 유가가 모든 걸 털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친구로, 그땐 송기연이 신계에 올라오기 전이었다.

두 사람은 노는 것, 시끌벅적한 것, 미인을 좋아했다는 취향까지 똑같았다. 나중에 같이 작은 문파를 하나 설립했다. 원래는 그 문파를 제대로 키워 천연문에 대적하려 했었지만, 문파를 제대로 키우기도 전에 송기연이 열두 마사를 죽이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그를 쫓아 신계를 떠났었다.

그 후론 계속 송기연과 얽히는 바람에 위명하를 볼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 옛 벗을 보자 그는 여러 감정이 뒤섞였다.

위명하에 대한 감정이 복잡했다. 어떻게 말해야 할까. 사랑과 우정 사이. 그사이 모호한 어딘 가였다.

만약 송기연이 없었다면 지금 그의 곁에 있는 사람도 아마 위명하겠지.

유가는 일부러 송기연의 손을 뿌리치고 앞으로 걸어가 침묵을 깨고 먼저 인사를 했다.

“성주가 당신이었군. 오랜만일세.”

실내를 돌고 있던 진법이 쾅 하는 소리와 함께 흩어지며 공기가 흔들렸다. 위명하가 유가를 바라보자, 그 눈빛 속엔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정이 솟구치고 있었다.

한차례 바람이 불고, 다른 이가 무슨 반응을 하기도 전에 그자가 이미 유가 앞으로 나와 그를 꽉 끌어안았다. 위명하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유가, 다신 못 볼 줄 알았네.”

유가의 등을 꽉 껴안고 머리를 그의 어깨에 파묻은 채, 곧 눈물이 쏟아질 듯한 눈빛으로 계속 말했다.

“여기에 갇혀있던 천 년 동안, 늘 이곳을 빠져나가 당신을 만나고 싶단 생각뿐이었어. 정말 보고 싶었어. 그리움에 마음이 다 뭉개지고, 밤엔 잠도 못 이루…….”

“그만해.”

듣고 있다가 온몸에 소름이 돋은 유가가 그의 말을 막았다.

“싫어.”

위명하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고 여전히 그를 껴안은 채 말했다.

“얼마 만에 만나는 건데. 그동안에 감정을 쏟아내지도 못하게 하는 건가?”

“…….”

“송기연, 연적이 생겼군.”

아구가 유가의 뒤, 그리고 송기연의 옆에 바짝 붙어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남자 외모도 남다른데, 대인께서 저렇게 얌전히 안겨 계시다니. 아무래도 보통 사이가 아닌가 보군. 대인께 곧 차이겠어.”

송기연은 웬일인지 아구의 말에 아무런 반박도 하지 않고 유가가 뿌리친 손바닥을 살살 쥐었다. 마음이 쑤셨다.

송기연이 고개를 들어 위명하의 얼굴을 보며 자신의 불온전한 기억을 뒤졌다. 아주아주 옛날에 유가의 곁에 이렇게 생긴 사람이 서 있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났다. 열두 마사, 왕다국과는 다르게 유가에 대한 이자의 감정은 상하 관계가 아니라 진정한 평등 관계이자 모호한 관계였다.

송기연이 유가와 전장을 벌이던 그때, 이자가 유가의 어깨를 아무렇지 않게 감싸고 허리에 손을 올리는 모습을 무수히 많이 봤다. 게다가 유가가 술에 취했을 때, 이자의 품에 안겨 편안하게 잠을 자던 모습도 몇 번이고 봤었다.

위명하는 송기연에게 진짜 위기감을 느끼게 했다.

“송기연, 괜찮아?”

아무리 기다려도 송기연이 아무 반응이 없자, 정말 이상하다고 느낀 아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내 말이 맞는 건 아니겠지, 대인께서는 아직…….”

맹장이 재빨리 그의 입을 막고 그를 끌어당겨 뒷말을 못 하게 했다.

살짝 목을 가다듬은 왕다국이 부채로 입을 가린 채 송기연을 위로했다.

“안심해. 너와 존주의 애정은 누군지도 모를 저 사람이 뒤흔들 만큼 그리 얕지 않아. 그냥 친구 사이 같아 보이는데?”

살짝 눈빛이 변한 송기연이 말했다.

“두 분이 친구 사이란 건 알고 있어.”

“어? 아는 분이야?”

왕다국이 부채에 가려진 입을 동그랗게 만들었다.

“그래.”

담담하게, 그리고 결연하게 대답한 송기연이 앞으로 걸어가 유가를 자신의 품으로 잡아끌었다. 그리고 위명하를 향해 말했다.

“위 궁주, 다시 만나 뵙게 되었군요. 한 가지 아셔야 할 게 있습니다.”

탁- 소리와 함께 유가는 송기연의 품에 안겼다. 그리고 채 깨닫기도 전에 갑자기 뒤돌아져 그대로 송기연의 준수한 얼굴이 다가와 입술이 포개졌다.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붉은 입술이 감춰지며 반듯하고 조급한 입술이 그를 덮쳐왔다.

급하게 달려든 입맞춤에 유가는 질식할 것 같아 얼굴을 한껏 찌푸렸다. 유가의 길고 부르러운 속눈썹이 떨리고 속에선 천불이 났지만 눈앞에 이자를 밀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반쯤 뜬 눈으로 보이는 송기연의 짙고 검은 속눈썹이, 선명한 눈매가, 사내다운 눈썹이 더 파르르 떨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가의 뒷덜미를 감싼 송기연의 손에도 힘이 가득했으나 어쩔 줄 모르는 떨림을 숨길 순 없었다.

이 녀석 두려워하고 있다.

한참 있다 붉은 입술에서 촉촉한 입술을 뗀 청년은 도전적인 눈빛으로 위명하를 바라보고 말했다.

“유가는 제가 익애(溺愛-숨이 멎을 듯 흠뻑 빠져 사랑함)하는 사람이니, 언행에 주의하여 주십시오.”

그의 행동과 말에 장내가 술렁였다.

고금성이 고개를 숙이고 손마디를 꺾으며 우득우득 소리를 냈다. 눈이 동그래진 왕다국과 아구는 마치 귀신이라도 보듯 송기연을 바라봤다.

송기연이 이렇게나 대담한지 상상도 못 했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유가에게…… 죽음을 자초하는 짓을 하다니. 가엾은 것.

평소에 그는 늘 유가를 살폈고, 챙겼고, 존중했다.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한 채 사람들 앞에서 유가의 체면을 깎는 행동을 하지 않는 것으로 존경을 표했다.

그런데 지금은 대체 무슨 일이가. 체면은 말할 것도 없이 그냥 어린아이처럼 유치하게 유가의 얼굴을 대놓고 때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인상을 찌푸린 왕다국이 안타까운 듯 송기연을 바라봤다. 이 바보 같은 자식은 천 년을 헛살았는지 누군가 가장 싫어하는 짓을 그만 해 버린 것인데, 이성이라는 건 대체 어디다 가져다 버린 거지.

“크흠!”

침묵을 깬 건 유가의 기침소리였다. 그가 화를 간신히 참으며 자신의 어깨를 잡고 있는 송기연의 손을 치우고 말했다.

“약이라도 잘못 먹은 것이냐? 입이 참 가볍구나.”

언제나 사존이라고 불렀던 송기연이 ‘유가’라고 부르는 소리를 들을 때 그는 심장이 아파왔다.

예전에 둘이 피맺힌 원한을 품고 있을 때 그는 그렇게 유가의 이름을 불렀었다. 원망과 증오 그리고 도발이 섞여 있어, 한 번이라도 불린다면 늘 신경이 곤두섰다. 모든 원한을 다 푼 지금에도 역시 여전히 송기연에게 자신의 이름을 부르지 못 하게 하고, 사존이라고 부르게 했다.

기억의 수문이 한 번 열리자 잊지 못한 과거들이 걷잡을 수 없이 쏟아져 나왔다. 그는 지금 자신이 입을 다물어야 한다는 걸 느꼈다.

“제가 입이 가볍다고요? 제가 틀린 말 했습니까?”

송기연이 유가의 말에 순종하지 않은 채, 그에게 밀쳐진 손을 창결검 위에 올리고 물었다.

“제가 당신의 연인(戀人) 아닙니까? 뭘 피하시는 겁니까? 옛사람을 만났다고 저와 바로 거리를 두시려는 겁니까?”

창결검 위에 올라간 송기연의 손을 보고 유가의 눈빛이 한순간에 차가워졌다. 더 이상 이자가 억지 부리는 걸 들어줄 수 없는 유가는 주먹에 흑금장갑을 씌우고 말했다.

“송기연, 진정해라.”

그가 위명하의 앞을 막아서며 차분하게 말했다.

“명하는 내 오랜 벗이지 네 적이 아니다. 나와 친밀한 자에게 그렇게 날 세울 필요 없다. 난 예전이나 지금이나 네 소유물이 아니다. 널 좋아한다. 하나 연인(戀人)이라고 서로 개인의 범위까지 침범하는 건 원치 않는다. 네가 계속 그런 식으로 충동적으로 군다면, 나도 언젠가는 참지 못할 것 같구나.”

유가는 언제부턴가 두 사람의 관계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송기연은 소유욕이 굉장히 강했다. 성격은 전보다 훨씬 좋아졌지만, 자신을 향한 소유욕은 전보다 지나칠 정도로 강해졌다.

그는 늘 자신의 곁에 붙어서 조금이라도 떨어지려 하지 않았고, 유가가 경창파의 제자와 말이라도 한다면 그 제자에게 살기를 드러냈다. 자신이 돌아온 후로 이자의 삶의 중심이 자신으로 바뀐 것이다. 두 눈에서 늘 뿜어져 나오는 감정들은 너무 뜨거워 두려울 정도였다.

유가는 아무래도 이건 아닌 것 같았다. 그는 이런 관계를 개선하고 싶었다. 송기연이 더 이상 유가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는 악순환을 끊어내고 싶었다.

“그게 대답입니까?”

송기연이 검자루에서 손을 떼자, 눈동자에 살짝 붉은 빛이 감돌았다.

하지만 이번에 그는 통제력을 잃지 않았고, 두 눈은 그저 잠시 일렁이다가 곧 진정된 듯 웃으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사존. 제가 잘못했어요. 제가 너무 사존을 몰아세웠습니다. 사존께서 감당 못 하시는 것도 당연합니다.”

유가에 대한 집념으로 그는 다시 입도했고, 심마는 더욱 깊어졌다. 겉으로는 평온한 척했지만, 속에선 광기와 폭동이 미친 듯이 솟구쳤다. 심장에서 극심한 통증이 전해졌고, 미친 듯한 감정이 의식을 덮기 시작하여 진기가 끓어올라 공기마저 흔들렸다.

사존은 왜 그렇게 위명하를 두둔하실까.

왜 사존은 자신만을 좋아해 주시지 않는 걸까.

힘들게 이천 년을 기다려온 사람이, 오자마자 자신에게 언젠가 미워할 수도 있다는 말을 했다.

그의 마음속에 자신은 대체 뭘까. 역사를 바꾼들 무슨 소용이 있는 건데. 역사를 바꾼 후 송가는 역사 속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유가는 그의 열두 마사를 구한 뒤 이천 년의 시공을 뛰어넘었다. 그의 인생은 정말 즐거워 보였다.

그럼 본인은? 송가도 없고, 가족도 없다. 저자의 약속만 믿고 바보처럼 이천 년을 기다렸다.

자신의 수련 경지가 폐해지고 채찍에 살이 갈기갈기 찢길 때 유가는 어디 있었나.

만인에게 욕을 먹고 죽어갈 때 유가는 또 어디 있었나.

오랜 기다림 속에 너무 많은 게 뒤얽혀, 유가에 대한 감정조차 예전처럼 순수할 수 없었다. 전생엔 자신이 잘못을 저질렀지만, 역사의 궤적을 바꾼 후로 가장 고통스러운 것도 송기연이었다.

여러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려 퍼졌고, 눈앞에 있는 사람에 대한 원망과 마음속 깊숙이 숨겨 둔 상처가 끊임없이 솟구쳤다. 송기연은 왈칵 얼굴을 찌푸렸다.

“안소선 아닌가? 늘 널 추살(追殺)하려던…….”

위명하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들어보니, 자신이 없던 시간 동안 유가는 이미 다른 사람이 채간 것 같았다. 게다가 그 상대가 바로 늘 유가를 죽이겠다고 쫓던 사내였다.

지금 형세를 보니, 아무래도 자신에겐 기회가 없을 것 같았다. 적어도 저자에 대한 유가의 감정은 그대로였고, 오히려 자신 때문에 두 사람의 감정에 문제가 생긴 것 같았다.

그는 왕다국 곁에 있는 열두 마사를 보곤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모두 살아있었다. 소십이가 죽는 걸 직접 눈으로 봤었던 그였기에, 지금 이 장면이 믿기질 않았다.

아무 이유 없이 부활하는 건 불가능했다. 아무래도 그가 적막의 땅에 있던 시간 동안 외부에선 많은 일이 있어난 것 같았다. 그는 빠르게 제대로 알고 싶었다.

그가 다시 유가에게 물으려 했지만 송기연에게 기회를 뺏기고 말았다.

“사존 말씀이 맞습니다. 확실히 진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청년이 미간을 찌푸리며 마음속에서 일어난 폭동을 잠재우며 말했다.

“전 우선 성을 떠나 오 일 뒤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그동안 사존께서는 옛 벗과 좋은 시간을 보내십시오.”

송기연은 텅 빈 눈으로 그렇게 내뱉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왕부 위쪽으로 사라졌다.

“와, 송기연 이게 무슨 일이래?”

눈이 동그래진 아구가 송기연이 떠난 곳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존주, 따라가실 거예요?”

왕다국은 걱정되는 표정으로 부채를 거두고 유가에게 물었다.

“괜찮다. 저 녀석도 분수는 알고 있으니.”

하지만 유가가 움직이지 않고 깊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우선 다들 진정하지.”

고금성은 한쪽에 잠자코 서 있었다. 왠지 모르게 그는 갑자기 송기연에게 동질감이 느껴졌다.

* * *

보라색 번개가 들끓는 성 밖. 송기연은 성에서 멀리 떠나 번개 속을 한참을 헤맸고 황막한 석지(石地)로 들어갔다. 바닥에 웅크린 채 머리를 움켜쥐고 울리는 소리를 없애보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체내의 진기가 끊임없이 쏟아져 나와, 주위 몇 리의 모래와 자갈을 일으켜 소용돌이를 형성하고 있었다.

송기연의 검붉은 눈동자에 광기가 스쳐 지나갔다. 창결검을 뽑아 바로 주위에 휘두르자, 날카로운 검망에 찢어진 공간과 번개가 어우러지며 끊임없이 소리를 냈다. 모래와 자갈이 하늘로 솟구치며 주변이 완전 아수라장이 되었다.

“으아아아아아아악!!!”

청년이 마치 요수처럼 포효하는데, 강력한 힘에 모든 공간이 전율했다.

“도대체 나는 뭔데? 당신 마음속에 나는 도대체 뭐냐고!”

섬뜩한 붉은 빛 가득한 눈으로 울부짖는 그는, 완전 광기 그 자체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것이 가라앉고 주위 수십 리에 거대한 구멍이 생겨났다. 두 눈이 붉어진 송기연이 그 웅덩이 안에 드러누워 검은 구름 속 보랏빛 번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사존의 말이 맞다. 심마 입도는 확실히 폐해였다. 이런 통제 불능의 감정은 본인조차도 억제할 수 없었다.

좀 전에 그가 급히 그곳을 떠났던 건 그자의 말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했다. 자신이 이천 년 동안 쌓아온 그 사람에 대한 원망과 고통을 억제할 수 있을 줄 알았고, 그때의 외로움과 두려움을 생각하지 않고 그 사람이 원하는 대로 지낼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 보니 자신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왕다국이 처음에 자신이 이기적이라고 했는데, 확실히 이기적인 게 맞았다. 그렇게 오랫동안 돌고 돌며 그 사람과 몇 번의 생사 이별을 겪었으면서, 지금 아이처럼 그 사람이 싫어하는 일을 강요할 수 없었다.

그래서 자신을 통제할 수 없다면 그냥 떠나는 편이 나았다.

자신이 또다시 잘못을 저지르기 전에 떠나는 것.

“좀 더 강경해지면 안 되는 겁니까?”

거대한 웅덩이에서, 송기연 손에 있던 창결검이 청색 빛을 반짝였다. 그리고 전에 신묘도에서 보았던 그 사내로 변했다.

송기연 곁에 그렇게 오랜 세월 머물렀던 창결검은 볼꼴 못 볼꼴을 다 지켜보았다. 그는 어린 소년일 때부터 지금 이렇게 성인이 될 때까지 모습을 다 지켜봤고, 바보처럼 돌아오지 않는 사람을 오랜 세월 기다린 것도 다 지켜봤었다.

꽃이 피고 지고, 일 년 또 일 년이 지나도 수련만 할 뿐 상대는 찾지 못했다. 목에 걸고 있던 돌이 사라지기 전엔 늘 그 돌을 멍하니 보고 있다가, 돌이 사라진 후엔 붉은 가면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그냥 미친 사람 같았다.

그렇게 어렵사리 기다리던 사람을 만났는데, 불과 한 달이 채 되지 않아 이렇게 버림받으니 얼마나 안타까운가.

그는 오히려 송기연보다 더 안타까워했다.

“내가 당신이었다면 그렇게 도망가지 않았을 겁니다.”

창결검은 더러운 건 신경 쓰지 않고 송기연 앞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말했다.

“심마에 대해 유가에게 알리고 같이 해결 방법을 찾았어야죠. 계속 피하다간 나중에 한꺼번에 터져 나올 텐데, 그건 누가 감당할 수 있겠어요? 이제 그만 숨기시고, 조금이라도 일찍 털어놓으세요.”

“네가 뭘 알아?”

송기연이 계속 하늘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제가 뭘 모르겠습니까? 어찌 모를까요?”

화가 난 창결검은 송기연의 머리통을 한 대 갈기고 싶었다.

“당신은 제가 당신이 심마를 일으켜 저를 마구 휘두르길 원한다고 생각하세요? 신기는 체면도 없는 줄 아세요?”

창결이 입을 열자 마음속에서 원통이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이런 주인 곁에 있다 보니 그는 평소에 휴식 시간조차 가지질 못했다. 전에 송기연은 화가 나면 늘 유가를 생각하며 더욱 분노했고, 그를 들고 미친 듯이 휘두르고 다녔다.

신기로서 그도 자존심은 있다. 그렇게 마음대로 사용하는 건 그의 신기명을 더럽히는 것이었다!

“…….”

송기연이 그 청년을 바라보다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네 말도 조금 일리는 있구나.”

“조금이 아니라, 완전히 일리 있는 말이죠!”

창결이 자신의 머리를 풀어 헤치고는 자신만만한 태도로 송기연에게 어떤 계책을 내놓기 시작했다.

“이렇게 도망치셨으니, 유가를 그 위명하에게 직접 넘겨주고 온 것이나 다름없다고요. 두 사람의 관계가 확실히 일반적이지 않다는 걸 아시면서도 바보처럼 이렇게 도망쳐 나오시다니, 어디 모자라십니까?”

“…….“

송기연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휴, 모자라다는 말엔 또 기분 나빠하시네요.”

창결이 송기연의 공간 속에서 그 붉은 가면을 꺼냈다. 그리고 송기연의 얼굴에 씌운 뒤 한숨을 내쉬었다.

“그자를 향한 당신의 마음은 제가 제일 잘 알고 있어요. 그렇게 오랫동안 기다린 사람을 다른 사람에게 양보할 거예요? 늘 유가에게 당근과 채찍을 적절히 주라고 말씀드렸잖아요.”

“난 그를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곳에 평생 가둬 두고 싶지만 그런 대담함은 없구나. 사존은 그런 억압받는 관계를 원치 않으시고, 또 순순히 따라오실 분도 아니다. 내가 정말 그렇게 한다면 그 대가가 너무 커서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할 것 같구나.”

송기연이 가면을 벗고는 그 울퉁불퉁한 무늬를 정교히 쓰다듬었다. 답답했다.

“그렇게 약해지지 마시라고요. 전 당신이 이렇게 겁먹은 모습 보기 싫어요.”

창결이 눈동자를 굴리며 말했다.

“이렇게 쉽게 흥분하시고, 유가 일에는 더욱 진정하지 못하시잖아요. 그럼 상대에게 일방적으로 끌려가게 된다니깐요. 지금 이미 이렇게 도망쳤으니 이 기회에 두 사람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 보시고 유가를 말리세요.”

“말려?”

송기연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우선 오 일 동안 성 근처엔 가지 마세요.”

창결이 확실한 태도로 말했다.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지 모를 거라고 짐작하지 마세요. 몰래 돌아가 유가가 뭘 하는지 지켜보실 생각이잖아요. 떠난다고 결정해놓고 진짜 못 떠나시는 거죠?”

“…….”

송기연이 가면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사적인 공간을 원한다잖아요? 그럼 일단 줘보세요. 그리고 그 시간 동안 적막의 땅을 샅샅이 훑어보시면서 그자에 대한 생각을 절대 하지 마시고, 오 일 뒤에도 바로 다가가진 마세요. 그에게 좀 떨어져서, 말도 섞지 마시고 반응을 지켜보세요.”

창결은 연애 박사였다. 전에 송기연을 업고 기생집을 전전하며 깨달았던 것을 지금 다 꺼내 보이고 있었다.

그가 계속 말했다.

“한 사람을 떠난다고 살 수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니 그분에 대해 너무 중요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그렇게 오랜 세월…….”

“네 말은 틀렸다.”

청년이 말을 잘랐다. 그는 검붉은색 가면을 흙투성이 얼굴 위에 덧씌우며 도저히 닿지 않는 시선으로 허공을 헤맸다.

“난 그분이 없으면 정말 살 수 없다.”

창결은 목구멍에 뭔가 탁 걸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래서 벌떡 일어나 송기연의 허리를 뻥 걷어차고 검의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알겠어요. 알겠다고요. 정말 당신을 어쩔 수가 없네요. 제 말 꼭 기억하세요. 그대로 하시면 유가의 집중력이 당신에게로 돌아올 겁니다.”

“그러길 바란다.”

송기연이 자조적으로 웃으며 가면에 묻은 먼지를 털고 다시 공간 속으로 넣었다. 창결검을 챙긴 뒤 저 멀리 성을 바라보며 적막의 땅 깊은 곳으로 향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