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장금문
다시 잠을 청하고 난 후, 유가는 정신도 맑아졌고 피로도 싹 풀렸다. 아구의 상황을 보러가려 했지만, 그만 맹장에게 가로막히고 말았다.
문밖에서 막힌 유가가 코를 긁적거리자 송기연이 문을 부숴버리려 했다. 유가는 한숨을 푹 내쉬며 두 어린애 사이를 막았다.
“충동적으로 그러지 마라. 아구가 아직 안 깨어났다. 어쨌든 맹장이 경창파에 남아준 건 내 설명을 들을 생각이 있는 것이니, 내 체면을 세워준 것이다. 그 관계를 괜히 망치지 마라.”
“제가 사는 곳에 왔으면, 당연히 제…… 사존의 말을 들어야죠. 고작 팔백 살인 녀석이 날뛰고 있지 않습니까.”
청년이 미간을 찌푸리고 한껏 맘에 들지 않는 듯 투덜거렸지만 뒤로 몸을 물렸다.
“하하, 언제 나이로 서열 따지는 법을 배웠느냐?”
유가는 제 사존의 말을 들어야 한다는 말이 우스워 송기연의 반듯한 이마를 손가락으로 톡톡 쳤다.
“사존께서 늘 나이로 저를 꼼짝 못 하게 하시며 이 녀석이라고 부르지 않으셨습니까.”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기억대로 자연스럽게 말하자, 말을 한 사람과 들은 사람 모두 순간 아득해졌다. 부드러운 눈빛으로 송기연을 눈에 담은 유가가 둥실 몸을 띄워 위로 올라갔다.
“아구가 아직 자고 있으니, 우리는 그 사이에 왕다국을 보러 가자꾸나. 이렇게 크게 변했는데, 아직 막청과 어떨지 궁금하구나.”
“알겠습니다.”
송기연도 그를 따라 몸을 띄우고 함께 멀리 날아갔다.
* * *
역사가 변해 신전이 일어나지 않았으니 당연히 천하도 생기지 않았다.
명확한 구분선이 없어져 유가는 당연히 길을 잃고 말았다.
“사존, 정말 길 아시는 거 맞으세요?”
뒤에 있던 송기연이 웃음을 참았다.
“이곳이 이리도 바뀌어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선마 양계의 확실한 구분선이 없어졌으니 길을 잃는 건 당연한 것 아니냐?”
좀 전에 자신만만하게 앞서가던 사람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네가 진작에 여기가 바뀌었다는 얘기를 해줬더라면 이런 일이 없었을 것 아니겠냐?”
“네네, 다 제 탓입니다.”
송기연이 긴 눈꼬리를 곱게 접으며 그의 말을 달랬다.
“그럼 지금 다 말해 드릴게요. 들으시고 다시 출발할까요?”
“그렇게 아이 달래듯 말하지 마라…….”
“오, 송 장문인 아니신가? 자네도 빙 문주의 연회에 가는 것인가?”
진기를 감싼 탁한 목소리가 들려와 유가의 말이 끊겼다.
두 사람이 고개를 돌리자, 체격 좋은 스님이 저 멀리서 그들을 향해 인사하며 굵은 팔을 힘 있게 휘둘렀다.
“누구냐?”
유가가 송기연에게 물었다.
“아.”
송기연이 고뇌했다.
“사우문(寺宇門)의 스님입니다. 저와 몇 번 만났었죠.”
그 사이 위통을 벗은 스님이 이미 두 사람의 앞까지 와 있었다. 목에는 큼지막한 검은색 염주를 걸고 있었고, 손에는 금속 재질의 긴 봉을 들고 있었다.
스님의 시선이 유가에게 꽂히며, 무척 놀란 듯 물었다.
“송 장문인, 이분은?”
“유가라고 하오.”
험상궂게 생긴 스님이 선하게 웃었다.
“아 빈승 미생, 유 시주를 뵈옵니다.”
스님의 얼굴이 붉어지자 송기연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저 스님의 옷차림에 호기심이 생겼던 유가는 사우문의 스님이라는 얘길 듣고 모든 걸 이해했다.
사우문의 스님은 진기와 체질을 함께 수련하는데, 굵직한 육체는 보통의 수진자와는 차원이 달랐다. 어떤 의미에서는 자신의 신체로 입도하여 천도법칙과 다른 수련 방법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게다가 그들은 여색을 기피하지 않아 전통적인 스님과는 다르며, 체격적으로 일반인과 많이 달라 다른 문파 사람들은 그들을 우악스러운 수진자라고 인식했다.
“빈승, 송 장문인께서 빙 문주의 초청을 받은 것으로 기억하는데, 함께 동행하시겠습니까?”
“초청?”
유가가 눈동자를 굴렸다. 저 스님이 처음에 한 인사말이 떠올라 옆 사람에게 물었다.
“초대를 받았느냐?”
“아, 네 받았습니다.”
“어찌 내게 일언반구도 없어. 이런 좋은 구경거리를 놓친다면 얼마나 아쉬울 뻔했느냐.”
유가가 스님을 향해 웃었다.
“함께 동행하겠습니다. 스님께서 앞장서 주십시오.”
“아. 네, 네.”
스님은 급히 고개를 끄덕이고 바로 앞장섰다.
“사존, 왕다국을 찾으러 간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갑자기 빙장조의 연회엔 왜 참석하겠다고 하시는 겁니까?”
사실 송기연은 그렇게 시끌벅적한 곳에 가고 싶지 않았다. 사람도 많고 눈도 많은데, 사존의 미모는 또 이렇게나 뛰어나니 시간이 길어질수록 질투심이 올라올 게 분명했다.
“어린 녀석이 왜 이리 고집불통인 것이야?”
유가가 고개를 내저으며 낮게 속삭였다.
“장금문의 단약 제조 기술은 수준이 높다. 단약을 제조하는 건 신계에서도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이번에 장금문에 간다면, 산해진미도 맛보고 기회를 틈타 단약고도 약탈할 수 있다. 그 많은 사람들 중 누가 가져갔는지 그들도 특정할 수 없을 테니, 얼마나 좋은 기회이냐.”
“장금문의 단약을 원하시는 거라면 그리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들을 가두고 고문하여 단약만 제조하게 시키면 되는 겁니다. 그럼 얼마나 편하게 단약을 얻을 수 있습니까?”
송기연은 사존께서 왜 이리도 번거로운 일을 하려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
궤변에 유가는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딱-!
머리를 한대 쥐어박힌 청년이 억울하다는 듯 사존을 바라봤다.
“원하는 모든 걸 그렇게 무력으로 강탈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재미를 위한다면 훔치는 게 평화와 정의를 위하는 것이다 알겠느냐?”
장황하게 설교를 늘어놓는 사람도 ‘도둑질’이 정의롭지 못한 일이라는 건 깨닫지 못했다.
“알겠습니다.”
송기연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사존의 설교를 받아들였다. 자신이 한 잘못에서 다른 잘못으로 뛰어들고 있다는 건 깨닫지 못했다. 크기가 조름 다를 뿐인 것을.
스님의 길 안내를 따라 세 사람은 순식간에 장송산 아래에 도착했다. 초청장을 내밀자 면포를 쓴 여제자가 길을 안내했다.
장금문은 수백 년 전에 설립되었고 창립자는 장금문이었다. 이 사람은 무슨 이상한 취향이 있는지 본인은 남자면서 제자는 여성만 모았다. 매일 고금(古琴)을 연습하고, 꽃을 기르고, 새를 돌보고, 단약을 지으며 편안하게 보냈다.
유가는 여기에 여 제자를 희롱하는 취미 하나를 더 보태는 추악한 생각을 했다.
그래서 여 제자만 모집하는 게 아닐까. 유가는 그렇지 않으리라 믿지 않았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빙장조도 꽤나 순진한 남성이다. 매일 그렇게 아름다운 여성들 틈에 뒤섞여 있는데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니.
대문을 지나 장금문이 손님을 맞는 곳으로 들어가자 산해진미가 가득 펼쳐져 있었다. 갑자기 할 일이 생각난 유가가 팔꿈치로 옆 사람을 찔렀다.
“축하 선물은 가져왔느냐?”
“아니요.”
송 장문인은 당당했다.
“…….”
“사존, 걱정 마십시오. 제게 받으려고 하지도 않을 겁니다.”
유가는 저 차분한 얼굴에 정말 주먹을 한 대 날리고 싶었다. 이렇게 안 키웠는데.
빙장조 연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다들 실력이 대단한 자들뿐이었다. 비록 그들의 실력이 자신과 송기연에겐 별것 아니었지만. 지금 경창파는 이곳에서 제일가는 문파이며, 그곳에 장문인이 송기연이다. 유가는 이미 경창파를 자신의 자산으로 여겼다.
그런데 그 당당한 경창파 장문인이 이렇게 빈손으로 왔으니, 얼마나 체면이 깎이겠는가.
유가는 장문인의 체면을 위해 자신의 반지 속을 한참 뒤졌다. 그러다 엄청난 물건 하나를 내놓았는데, 각종 채찍과 구속구, 성기모양의 장난감이 담긴 상자였다.
축하 선물을 받은 여제자의 손이 덜덜 떨리고, 붉어진 얼굴이 면포로 가려지지 않았다.
“저……, 송 장문인…… 이게, ……뭔가요?”
그녀의 떨리는 목소리에 이목이 집중되었다. 그중엔 손님을 맞고 있던 빙장조도 있었다. 빙장조가 다가오는 걸 본 유가가 그에게 SM도구 상자에 대해 설명했다.
“빙 문주, 이건 송 장문인께서 보낸 축하 선물입니다. 경연 선녀와 천년만년 행복하십시오.”
입가에 경련이 일은 빙장조가 상자 속 채찍과, 거대한 옥남근, 사슬 등을 보며 억지로 입을 비틀며 말했다.
“송 장문인께서 마음을 쓰셨군요.”
“하하, 당연하죠. 송 장문인은…….”
“사존께서 이런 것에 흥미가 있으신 줄은 몰랐습니다.”
송기연이 사이에 끼어들었다.
“제가 사존의 요구를 과소평가했습니다. 이번에 돌아가면 당신 안에 이 도구들을 한번 사용해 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유가의 얼굴이 순간 굳었고, 눈앞에 순간 그림자가 지나갔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땐 여 제자의 손에 있던 SM도구 상자가 이미 사라진 뒤였다.
“빙 문주께 준비한 선물은 이겁니다. 받으십시오.”
송기연이 유가의 어깨를 잡으며 말했고, 유가는 어느새 제 손에 들린 옥상자를 열어 보았다.
밝았던 실내가 순식간에 어두워지더니 옥상자 속 돌이 화려한 빛을 내뿜었다. 빛이 천장에 투시되며 찬란한 하늘을 만들어내자, 그 화려함에 다들 입을 내둘렀다.
“어둠의 장막석이군!”
“정말 백문이 불여일견이야.”
눈앞에 아름다움에 넋을 잃은 군중들이 약속한 듯 방금의 난처한 상황을 다 잊어버렸다.
달칵.
유가가 상자를 닫고 축하 선물을 여제자에게 건넨 후. 송기연의 곁으로 물러났다.
“변변치 못한 선물이지만 부디 부인께서 좋아하시길 바랍니다.”
송기연이 말을 덧붙이며 분위기를 풀었다.
“하하. 경연이 분명히 좋아할 겁니다. 대신 감사 인사드립니다.”
모든 사람이 방금 전에 일어난 일은 모두 까맣게 잊어버렸고, 두 사람을 자리로 안내했다.
달아나려 시도하는 유가를 송기연이 꽉 잡은 채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사존, 선물을 바꿔치기한다고 없던 일이 되진 않습니다.”
“하하, 잘못 꺼냈을 뿐이다.”
유가가 안절부절못했다. 분명 송기연을 놀리려는 의도가 있었지만, 그걸 보고 송기연이 위험한 생각을 가질 줄 몰랐다. 삼일 연속으로 잠도 못자고 울고불며 기절을 반복했던 일이 떠오르자 지금도 등골이 서늘했다. 그런데 거기에 도구까지 더해진다면…….
하하하하하. 얼굴이 달아오르다 못해 터지겠다.
“잘못 꺼내요?”
송기연의 따뜻한 숨결이 끈적하게 목 뒤를 덮었다.
“그런 걸 좋아하시는 거겠죠. 아니라면 그런 게 왜 공간 속에 있습니까? 좋아하시면서 왜 저와는 하려 하지 않으십니까? 흥분해서 우는 게 두려우십니까?”
“됐다. 그만해라! 꺼져!”
유가가 송기연을 밀치고 일어나 옆자리로 옮겨 거리를 벌렸다.
“하하.”
청년이 눈만 둥글게 휘며 어색하게 웃자 모습이 엄청 위험해 보였다.
제 꾀에 제가 넘어간 유가는 상심하여 제 앞의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그러다 익숙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응? 요자?”
유가가 눈을 비비고 중년 남성을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송기연을 끌어당기며 물었다.
“마족이 어찌 빙장조의 연회에 참석할 수 있단 말이냐?”
“오? 누구 말입니까?”
송기연은 사존이 밀착해 오자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저 사람 말이다. 환해역 역주.”
유가가 그 사람을 가리켰다.
“설마 이것도 역사를 바꾼 결과인 건가?”
“사존 긴장하실 필요 없습니다. 지금 마족과 인족(人族)의 관계는, 사존의 기억 속 처럼 그리 나쁜 관계가 아닙니다. 아마 천 년 동안 당신께서 나타나지 않아서인지 마족의 혈통과 수련 재능은 사람을 뛰어넘지 못했고, 양측은 서로 위협적이지 않아 잘 지냅니다. 장금문은 선마계 양계에 다 명성이 있어 마족도 연회에 참석한 겁니다.”
“그건 잘된 일이구나.”
유가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이 상황은 참 만족스러웠다. 그러다 갑자기 뭔가 떠오른 듯 물었다.
“그럼 왕다국이 올 수도 있느냐?”
“그건 저도 모릅니다.”
“잠깐.”
유가가 눈썹을 추켜세웠다.
“왕다국을 아느냐? 만약 그자가 여전히 마계에서 역주를 맡고 있다면 네가 모를 리가 없겠구나.”
“아, 사존 알아채셨습니까? 확실히 그자를 알고 있습니다.”
송기연의 표정은 차분했다.
“왜 내게 말하지 않은 것이냐. 알면서도 내게 길을 안내하게 했느냐? 내가 길을 잃는 것을 보고 얼마나 우스웠느냐? 어? 날 가지고 노니 재밌더냐?”
돌이켜 보자 자신이 우스워진 유가가 폭발했고, 송기연에게 완전히 속은 걸 깨달았다.
“안 물어보셨잖아요? 그러니 제 탓이 아닙니다.”
“…….”
흑금장갑이 어디 있더라. 갑자기 이녀석을 엄청 때리고 싶어졌다.
사존의 손 위에 진기가 모이자 송기연은 또 맞을까 겁이 났다. 급히 유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왕다국에 대해 듣고 싶지 않으세요? 제가 다 말해 드릴게요. 왕다국은 지금…….”
“마족 존주께서 직접 오시다니?”
“그 왕다국?”
“조용히 해. 그자는 누가 이름 말하는 거 질색하니까!”
송기연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문 앞이 소란스러워졌다. 방금 송기연이 왔을 때와 차원이 다른 소란함이었다.
수군거림을 들은 유가가 경악한 표정으로 옆 사람에게 물었다.
“지금 마족의 존주가 왕다국이냐?”
“네, 그 자식 엄청 대단합니다. 근데 저와 비교해보면 아직…… 응? 사존? 그리 서두르지 마시고 같이 가요.”
걱정스러워진 송기연이 급히 뒤따라갔다.
그는 사존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걸 알아도 잠재적인 연적에 대해서 아직 안심하지 못했다. 소유욕이 강한 송기연은 왕다국에게 적대심을 가지고 있었다.
“빙 문주, 미인의 사랑을 얻으셨군요. 축하드립니다.”
길쭉하고 늘씬한 청년이 부채를 흔들며 선물을 여제자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 여유로운 웃음을 지으며 빙장조에게 인사했다.
“경연 선녀의 미모는 모두가 익히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일로 많은 사람이 마음을 다쳤습니다.”
“마존도 그 사람 속에 포함된 겁니까?”
빙장조가 웃으며 맞받아쳤다.
“하하하. 농담도 잘하시는군요. 본존이 어찌…….”
부채질을 멈춘 왕다국이 말을 하다가 다시 삼켰다.
의아한 사람들이 그의 시선을 따라 송기연과 유가를 바라봤다.
“존주의 명성에 대해서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으나 실제로 보니 더욱 기품이 넘치십니다.”
유가가 왕다국에게 다가가며 그의 멀쩡한 오른팔을 보았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유가는 마음 놓고 웃었다.
“소인 유가, 존주와 벗이 되고 싶습니다.”
왕다국은 순간 머리가 터질 것 같아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눈앞에 유가의 넋을 놓을 듯한 얼굴을 바라보다 입을 뗐다.
“어디서 본 적이 있지 않은가요?”
“네, 아주아주 옛날에 본 적이 있습니다.”
유가는 그의 인사치레에 괜스레 웃음이 났다. 편안하고 온유하게 웃는 미인의 얼굴에 주위의 이목들도 하나같이 숨을 삼켰다.
왕다국이 얼굴을 붉혔다.
“역시, 당신 같은 미인을 만났었던 일을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그가 부채를 거두고 예를 차리며 말했다.
“소인 왕다국, 기꺼이 당신의 벗이 되어드리겠습니다.”
오만방자했던 태도를 완전히 내려놓은 마존이 마음속에서 친밀함을 느꼈다.
하지만 송기연은 비상으로 경보 신호를 울리며 한 팔로 유가를 품에 안은 채 눈을 반짝였다.
“막청도 있으시면서, 욕심이 많으시군요.”
순간 송기연과 왕다국, 유가까지 모든 이가 멈칫했다.
전에 송기연이 왕다국에게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완전히 똑같은 말을 했었다.
“왕다국, 부채 돌려줘요!”
호통 소리가 침묵을 깼고, 날카롭게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날아왔다. 왕다국이 재빠르게 부채를 펼쳐 채찍을 막아서곤 익숙하게 잡아당겨 저 앞에 있는 끌어당겼다. 청년은 그대로 끌어당겨져 왕다국의 품에 갇히고, 왕다국이 문 쪽으로 물러나 웃었다.
“막청, 또다시 날 습격해 온다면 날 정말 좋아한다고 생각하겠어.”
“쓸데없는 소리 마요!”
막청은 사납게 쏘아붙였지만 주위 분위기를 생각해 남은 울분을 속으로 삼켰다. 그리곤 병기를 거두고 선물을 여제자에게 건네준 뒤 빙장조를 향해 인사를 건넸다.
“실례를 범해, 빙 문주께 우스운 꼴을 보였습니다. 부디 잊어주십시오.”
“하하, 괜찮습니다.”
빙 장문이 상관없다며 손을 휘저었다.
이 난동으로 오히려 분위기가 풀어졌다. 사람들은 다시 제자리에 앉아 유가, 송기연, 왕다국, 막청을 힐끗힐끗 훔쳐보며 네 사람을 화젯거리 삼아 수다를 떨었다.
사람도 선물도 가득 찼다. 혼례 시간이 되자 경연 선녀가 하늘하늘 문을 들어섰다.
이 예식에선 신부가 붉은 면사포를 쓰지 않아 모두 신부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경연은 예전부터 유가와 우열을 가리기 힘든 미모를 자랑했는데, 지금은 아름답게 화장하고 화려한 장신구까지 더해 눈이 밝아지도록 아름다웠다.
많은 사람이 술잔을 내려놓고 경연의 발걸음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유가는 자신의 잔에 술을 따르고 한 번에 털어 마셨다.
예전, 천 년 전 보다 더 이전, 송기연이 시간을 돌리기 전.
송기연과 백유리가 진짜 혼례를 올렸던 때가 생각났다. 그때 자신은 몰래 장금문 궁전 안에 들어와 그들의 예복을 입어 봤었다. 그러곤 너무 부끄러워 얼굴을 가리고 한참을 울었고, 혼례 날엔 연거푸 술을 퍼마시고 천하(天河)에서 사흘 밤낮을 잠만 잤다.
“무슨 생각하세요, 사존?”
“예복이 정말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본심이 불쑥 튀어나와 유가는 급히 술을 들이켰다.
송기연은 그의 술잔을 빼앗아 탁자에 올려놓고 질문했다.
“예복이 아름답다고 하시는 걸 보니 저와 혼례를 올리고 싶으신 겁니까?”
훅 들어온 한마디에 유가는 그만 멈칫하고 미소를 지었다.
“내게 시집오고 싶은 것이냐?”
송기연이 그의 손을 잡고 진지하게 대답했다.
“사존께서 장가를 오신다면 전 시집을 가겠습니다.”
가슴이 철렁한 유가가 송기연을 바라보며 물었다.
“진심이냐?”
“이보다 더 진심일 수 없습니다.”
“그럼 됐다. 모든 일을 해결한 후 식을 올리자꾸나.”
담백하게 말했지만 하고보니 부끄러워 죽을 것 같은 헛기침을 했다.
“내가 장가가는 것이고 넌 시집오는 것이다. 이건 절대 뒤바뀔 수 없다. 괜찮겠느냐?”
“약속하겠습니다.”
청년의 미소는 주위를 환하게 밝혔다.
사람들은 오늘따라 경창파 장문인이 실성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저 붉은 옷을 입은 사람의 옆에서 종일 입꼬리가 내려올 줄을 몰랐다. 수천 년 만에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부부 맞절!”
우렁찬 목소리가 대전에서 흘러나왔다. 늘씬한 경연과 붉은 옷에 금관을 쓴 빙장조가 서로를 바라보고 맞절을 했다. 그렇게 혼례가 끝났다.
누가 생각이나 했을까. 안타깝게도 절을 하는 사람은 빙장조 한 명 뿐이었다.
“응? 어떻게 된 거지?”
“경연 선녀, 왜 그래?”
이해가 되지 않는 하객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어……, 부부 맞절.”
사회자가 난처한 듯 급히 목소리를 높여 다시 한번 말했다.
빙장조가 미간을 찌푸리고 다시 몸을 굽혔으나, 역시나 경연은 멀뚱히 서있었다.
“경연, 왜 그러시오?”
“전 경연 선녀가 아닙니다.”
예장을 몸에 걸친 사람이 머리 장식, 귀걸이, 관(冠)을 푸르더니 공간 속에서 붉은색 머리띠를 꺼냈다. 그리고 긴 머리를 묶어 올리자 가녀린 아름다움은 사라지고 늠름함만 가득해 완전히 다른 분위기를 자아냈다.
“저는 곡가의 둘째 공자, 곡연입니다.”
그 말을 듣고 순식간에 장내가 고요해졌고, 많은 사람이 자신의 술잔을 엎었다.
“여장남자?”
참지 못한 유가가 그만 속마음을 말해 버렸다.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송기연, 넌 저 사람이 남성인 것 알고 있었느냐?”
송 장문인도 급히 고개를 내저으며 자신은 이 일이 이렇게 커질 줄 몰랐다는 뜻을 내비쳤다.
“말도 안 돼, 넌 날 속였다.”
경악한 빙장조의 목소리가 떨렸다.
“곡가의 둘째 공자는 오래전에 실종됐는데, 당신이 어찌 그분이란 말입니까? 당신은 경연입니다. 내 여인이고요. 남자일 리가 없습니다!”
“제가 남자인 것을 알고 나니 역겹습니까?”
곡연이 한껏 인상을 쓰며 물었다.
“빙장조, 당신이 좋아하는 사람은 여인이어야만 합니까. 장금문이 설립된 후로 여제자만 모집하고 모든 남자를 접근하지 못 하게 한 건 당신의 그 극단적인 사상 때문입니다. 성별이 그리도 중요합니까.”
곡연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말을 이었다.
“당신을 오랫동안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경연의 신분으로 당신을 속여 왔습니다. 전 이런 여인의 복장으로 당신에게 시집 들기 싫습니다. 이 신분은 이제 그만 이용하고 싶어요.”
눈이 시큰해진 곡연의 목소리가 한층 더 커졌다.
“전 곡연입니다. 곡가의 둘째 공자이자 늠름한 사내입니다.”
“어, 언제부터 날, 날 좋아한 것이오?”
빙장조가 식겁했다. 갑작스러운 고백에 성별까지 뒤바뀌자. 그는 사고 능력이 완전히 멈춰 버렸다.
“언제부터. 하……!”
곡연이 고개를 들자 눈물이 그대로 흘러내렸다.
“오래됐습니다. 당신이 절 몰랐을 때부터 당신을…… 좋아했습니다.”
곡연은 처연히 말하고 어쩔 줄 몰라 했다. 빙장조의 경악스러운 얼굴에선 이 사실을 부정하는 눈빛이 가득했다.
가슴에 묵직한 통증이 전해지자 곡연이 자조했다.
“제 진짜 신분을 받아들이지 못하니, 일찍 말한 게 다행이었군요. 아직 맞절을 하지 않았으니 부부라고 할 수 없습니다. 지금이라도 관두고 싶으면 관두세요.”
곡연은 심념을 움직여 칠현 고금을 품에 안았다. 그리고 빙장조에게 던졌다.
“당신이 제게 준 물건 모두 돌려드릴게요. 지금부터 저는 곡가의 둘째 공자로 돌아가고 당신은 장금문주로 남으세요. 그럼 여기서 이별을 고할게요. 저희는 청산이 변하지 않는 한, 다시 만나는 일이 없을 겁니다.”
곡연은 그대로 돌아서서 공중을 날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이 모든 걸 지켜본 유가가 입을 동그랗게 벌리고 한참을 다물지 못했다. 곡연의 기운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송기연이 말렸지만 유가는 고금을 끌어안고 있는 빙장조 앞으로 걸어갔다. 흑금장갑을 빠르게 씌우곤 빙장조의 얼굴을 한대 갈기고 욕을 했다.
“뭘 멍하니 서 있는 거야! 당장 쫓아가지 못해!”
빙장조는 한순간에 몰골이 처참해졌지만, 다행히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그리고 고금을 갈무리하고 곧장 곡연을 뒤따라갔다.
“하하하, 정말 시원시원하십니다.”
좋은 구경을 한 왕다국이 부채질을 하며 일어났다.
“빙문주의 혼례가 이런 식으로 파한다면 좋지 않은 기억으로 남을 듯한데, 혹시 왕부로 가서 한잔 더 하실 생각 있으십니까?”
왕다국은 은연중 유가의 이름을 직접 부르는 게 큰 실례인 느낌이라, 그의 이름을 직접 부르지 않았다.
유가는 한숨을 한번 내쉬고 왕다국에게 적대감을 드러내는 송기연을 밀치며 웃었다.
“좋습니다.”
기분이 좋아진 왕다국이 급히 대답했다.
“체면 살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못 봐주겠으니, 그 가식적인 모습 좀 어떻게 해 주시죠.”
송기연이 질투심을 한껏 드러내며 마치 어미 새처럼 유가를 몸 뒤로 숨겼다. 유가는 이 상황이 유치하기 짝이 없었다.
“혼례에 신부는 도망갔고, 신랑도 없으니 더 있을 필요가 없겠군요. 그만 당신께서 준비해 두신 좋은 술을 맛보러 갈까요.”
유가가 환하게 웃으며 왕다국에게 대답했고, 송기연은 뱃속이 꿀렁거렸다.
“그럽시다.”
기쁘게 동의한 왕다국이 막 발걸음을 떼려는데, 뒤에서 한기가 느껴졌다. 돌아서자 채찍이 사납게 날아왔고, 왕다국이 유가에게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아무래도 잠시 기다려 주셔야겠네요. 아직 해결할 일이 좀 남아서요.”
“알겠습니다. 천천히 하세요.”
유가는 상관없다는 듯 손을 내저었고 송기연의 뒤에 숨어 구경거리를 즐겼다.
“왕다국, 부채 내놔요. 그건 내 둘째 형님께서 주신 생일 선물입니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왕다국과 유가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보자 막청은 속에서 천불이 났다. 정신을 차려보니 자신이 채찍을 휘두르고 있었다.
“다신 나를 자극하지 마세요.”
“둘째 형님이 보낸 선물?”
왕다국이 눈썹을 추켜세웠다.
“어느 둘째 형님? 귀가 공자, 정가 공자, 아니면 탕가 공자?”
그가 계속 말했다.
“당신은 만나는 사람은 죄다 형님이라고 부르지 않소, 여기도 형님, 저기도 형님, 아주 귀에 딱지가 앉겠어.”
“허튼소리 하지 마세요. 내 둘째 형님은 막가의 둘째 공자 막문예밖에 없다고요!”
막청이 미간을 찌푸리며 얼굴에 분노가 가득했다.
“아, 그런가?”
유가는 왕다국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을 똑똑히 봤다. 왕다국은 재빨리 다시 장난기 가득한 모습을 회복하고 막청에게 다가가 진심 반 장난 반으로 물었다.
“만약 네가 내게 형님이라고 부르면 바로 돌려줄게 어때, 원해?”
유가도 송기연도 말을 잃었다.
“아무래도 저자가 너보다 더 매가 필요한 것 같구나.”
“음? 사존 농담이시죠. 이렇게 말을 잘 듣는 저를 저 자식과 비교하시다뇨.”
송기연이 왕다국과 정확히 선을 그었다.
한참을 말이 없던 유가가 대답했다.
“……너희 둘 막상막하다.”
왕다국에겐 대답 대신 채찍질이 돌아왔다.
눈이 돌아간 막가네 셋째 공자가 지금 장소를 신경 쓸 틈이 있을까. 모든 실력을 쏟아부으니 금세 대전 전체가 망가졌다.
귀빈들은 어느새 대전 밖으로 모두 도망나와 두 사람의 공중전을 보며 눈이 휘둥그레졌다.
장금문의 여제자는 허둥지둥 댔지만 딱히 별수 없었다. 문주는 자리를 비웠고, 왕다국 존주를 감히 설교할 수도 없으니.
두 사람을 지켜본 유가는 왕다국이 꽁무니를 빼는 모습을 보고 생각보다 한참 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몰래 송기연을 끌고 혼란스러운 군중 사이를 돌아 모퉁이로 데려갔다.
유가가 여우같은 웃음을 지으며 속삭였다.
“기연, 우리는 그만 가서 도둑질을 하자꾸나.”
* * *
유가는 장금문의 단약방을 털 생각이다. 지금 빙장조는 자신의 부인을 쫓아갔고, 왕다국과 막청의 싸움에 이목이 집중되었다.
지금 모든 조건이 부합하는데, 기회 아닌가?
“사존, 장금문 단약방의 길을 어찌 아십니까?”
송기연은 그동안 원하는 건 직접 손으로 얻었지, 지금처럼 도둑질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곁에 자신만만하게 앞서가는 사람의 신난 표정이 너무 신기했다.
“전에 가 보았다.”
유가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첫 번째 생에서 존주였을 때 장금문을 자주 찾았고, 공간 속엔 단약이 떨어진 적이 없었다.
“전에 오셨을 때 저와 함께였습니까?”
“당연히 아니었다.”
유가가 그를 끌어 여제자들을 피하고 눈으로 숲속 밖을 응시했다.
“그때 넌 태어나지도 않았다.”
“송기연으로 태어나기 전이었습니까?”
“그래.”
“제가 놓친 게 참 많은 것 같아요. 정말 아쉽습니다.”
송기연이 한숨을 쉬며 진실로 안타까워했다.
“그런 쓸데없는 건 그만 신경 쓰고, 어서 가자.”
유가가 그의 넓은 소매를 잡아당기며 멀리 떨어진 문으로 향했다. 곧 한 건물 앞에 멈춰 섰고, 삼층 높이 건물의 1장(丈) 위에 두 글자 ‘단루(丹樓)’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다.
유가는 송기연을 잠시 막아서고, 앞으로 몇 걸음 걸어 나가 건물에서 1장(丈) 정도 떨어진 지점에 멈추어 섰다. 그리고 두 손으로 금색의 파해인(破解印-주술을 깨는 진)을 치고 날려 보냈다. 파해인이 건물의 벽에 닿자 곧 사람이 통과할 수 있는 입구가 열렸다.
“들어가서 좋은 물건을 골라 오자구나.”
유가가 손을 놓고 상쾌한 기분으로 들어갔다. 눈을 빛내며 송기연을 바라보자, 그도 한껏 들뜬 얼굴로 급히 뒤쫓아 왔다. 뺏는 것보다 훔치는 게 더 재밌다고 생각한 게 틀림없었다.
단약방을 도둑맞은 장본인은 사정을 까맣게 모르고 도망친 부인의 뒤꽁무니만 쫓았다. 저 멀리 곡연의 모습이 보이자 빙장조가 속도를 극도로 올려 순식간에 곡연의 앞을 막아섰다.
“경연, 아니 곡연, 가지 마. 아직 얘기가 다 안 끝났잖소.”
어릴 적 경험으로 빙장조는 남자간의 사랑을 모순이라고 생각해왔다. 아무 예고 없이 곡연이 갑작스럽게 이렇게 신분을 밝히니 그도 당연히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일이 이 지경이 되었지만 그는 이 사람에 대한 감정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남자든 여자든 여전히 이 사람이 좋았다.
“아직 할 말이 남았습니까?”
눈시울이 붉어진 곡연이 낙담한 표정을 했다.
“당신은 남성과 혼례를 치를 수 없고, 전 제가 한 말을 주워 담을 수 없습니다. 전 이제 경연이 아니고 곡연일 뿐입니다. 저희는 청산이 변한다고 해도…….”
곡연이 갑작스러운 포옹에 뒷말을 삼켰다. 빙장조가 품에 안은 사람을 더 꽉 끌어안았다.
“네가 곡연인 것 안다. 내 앞에 있는 사람이 곡가의 둘째 공자인 것도 알고 있고, 나 때문에 백 년이나 되는 시간이나 정체를 숨긴 바보라는 것도 알고 있다.
혼례를 올리기 전 너에게 좋아한다고 말했었지. 지금 그 말에 한마디 더 덧붙이고 싶구나. 널 좋아한다. 네가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다. 그냥 너라는 사람이 좋다.”
빙장조가 공간 속에서 칠현 고금을 꺼내 곡연에게 돌려주며 물었다.
“그럼 곡가 공자님, 이제 내가 주는 선물을 받아줄 겁니까?”
빙장조의 애틋한 고백을 들은 곡연은 가슴속에 행복의 샘물이 솟아오르는 것 같았다. 조금 전까지 가장 불행했던 얼굴이 가장 행복한 얼굴로 환해졌다. 곡연은 눈에 남은 눈물을 겨우 닦아내며 억지로 입을 오므렸지만, 우물쭈물하던 입이 끝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고금을 받은 그가 활짝 웃었다.
“좋아요. 받을게요.”
* * *
“네게 말했던 집행자 아직 기억하느냐?”
앞으로 걸어간 유가가 일층에 놓인 단약 화로를 만지작거리며 뚜껑을 열고 그 안을 들여다보았다.
“사존께 그 혼돈진형도를 준 영감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래, 그 사람. 어제 내 꿈에 또 나타나서, 천도를 죽여야만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다고 말해 주더구나. 한데 좀 이상하지.”
단약이 없는 것을 확인한 유가는 뚜껑을 닫고 다른 화로로 건너갔다.
“천도가 지금 어떤 상황인지 물었으나 제대로 대답도 해주지 않더니, 또 너와 천도가 연관이 되어 있다며 꼭 천도를 죽여야 한다는 말만 하더구나. 내가 마치 천도에게 대항하는 도구가 된 것 같다고 하자 바로 사라졌다.”
“그럼 사존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데요?”
송기연이 그를 따라 주위 단약 화로를 살펴보았다.
“내 생각은…….”
유가가 화로에 기대어 고심했다.
“천도가 하는 일이 부도덕하고 우리를 좌지우지하고 있지만, 그게 그리 큰 죄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천도법칙은 이 세상에 없어서는 안 될 것이고, 수진자들의 수련 기초지 않느냐. 만약 그가 사라진다면 모든 질서가 무너질 것이다.”
“역시 사존답습니다.”
송기연이 웃으며 유가를 따뜻한 눈으로 바라봤다.
“사존께서 그렇게 선량하게 바라보시니, 언젠가는 그자를 용서할 이유도 찾으실 수 있을 겁니다.”
아주아주 오래전 자신이 이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갔지만, 지금은 이렇게 용서한 것처럼. 그가 사존을 사랑하게 된 건 정말 큰 행운이었다.
“네 말을 들으니 내가 정말 선량한 사람 같구나.”
유가가 턱을 어루만지며 잔혹했던 자신의 과거를 애써 외면했다. 부러 뻔뻔하게도 송기연의 말에 동조했다.
“하지만 지금은 천도를 죽이는 것보다, 더 신경이 쓰이는 일이 있다.”
“무슨 일입니까?”
“너와 내가 역사를 바꾸는 동안, 그 집행자는 내게 실력이 나보다 못해 천도를 막을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게 아닌 것 같구나.”
유가가 계속 말했다.
“그자는 사람의 꿈속에 나타날 수도 있고, 어떤 모습으로든 변할 수 있다. 전에 그가 아무 힘도 들이지 않고 변하는 걸 직접 봤다. 게다가 그 혼돈진형도도 처음에 그자가 내 몸에 넣은 것이지. 덕분에 온전한 영혼을 가질 수 있었고, 무주지의 특수한 위치에서 대진과 결합하여 정확한 시간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것만 봐도, 그의 실력은 일찍이 나를 능가하였을 게 뻔하다.”
“사존의 말씀은 그자가 지금 우리를 속이고 있다는 말씀이시죠?”
“그래, 그 말이다.”
고개를 숙인 유가가 화로에 새겨진 꽃무늬를 바라봤다.
“아무래도 내가 천도를 넘어설 능력을 가질 때까지 계속 내가 강해질 수 있도록 도와주었던 것 같다. 그리곤, 대신 천도를 죽이는 거지. “
“천도를 죽인다.”
이 말을 따라하자 갑자기 송기연의 가슴에서 극심한 통증이 일었고, 그의 준수한 얼굴이 뻣뻣하게 굳었다. 심장 쪽을 움켜 쥐면서 고통을 호흡하며 가라앉히려 했다. 갑자기 왜 이런 반응이 나타나는 지 몰랐지만, 이 통증은 제법 강했다.
사존의 말처럼 그는 천도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 것 같다.
“왜 그러느냐?”
그의 이상 행동을 눈치 챈 유가가 다가와 물었다.
“안색이 좋지 않구나, 예전 일이 떠오른 것이냐?”
“아닙니다. 걱정 마세요.”
송기연이 손에 힘을 풀고 웃었다.
“우선 집행자와 천도 얘기는 나중에 신계에 올라가면 그때 다시 하시죠. 지금 여기에 무언가를 훔치러 오신 것 아닌가요? 시간이 없습니다.”
“……그래. 순간 깜빡했구나.”
유가은 걱정스러웠지만 송기연의 소매를 가만히 잡았다. 그리고 천천히 이층으로 향했다.
“일층엔 물건이 없구나. 진짜 상급 물건은 이층이나 삼층에 있다. 지난 세월 동안 빙장조의 단약 숨기는 능력이 발전했는지 궁금하긴 하나, 내가 없던 천 년 동안 그의 단약을 훔친 자도 없었겠지…….”
유가는 일부러 화제를 돌리며 천도와 집행자 얘기를 더 꺼내지 않았다.
송기연과 다시 생활할 수 있는 기회를 어렵사리 얻었다. 이런 소중한 시간을 그런 복잡한 일로 더 골치 아프긴 싫었다.
송기연의 말이 맞다. 이 일은 신계로 가서 해결하면 된다. 어쨌든 지금 그와 송기연의 실력은 비등하니, 이겨낼 수 없는 변고는 없을 것이다.
앞 사람에게 소매가 잡힌 송기연은 곧 안정을 되찾았고, 심장의 통증도 점점 사그라들었다. 그는 손목을 살짝 비틀어 제 소매를 잡은 손을 꽉 쥐는 데 성공했다. 유가가 살짝 멈칫하고 뒤로 고개를 돌려 송기연을 바라보자, 그 도화꽃같은 눈에 웃음기가 가득했다. 유가도 송기연의 손을 더욱 꽉 잡았다.
“사존, 이거 가져가실 거예요?”
송기연이 작은 옥병 하나를 들고 병들 사이에 파묻혀있는 자에게 말했다.
“순원단(純元丹)? 그래!”
유가가 고개를 들고 한번 보더니 다시 고개를 숙였다.
“이건요?
“융령단(融靈丹)? 그래!”
“이건요?
“익신산(益神散)? 그래!”
“이건요?
“……다 챙겨라!”
두 사람은 이층과 삼층을 샅샅이 훑었다. 송기연은 좌측의 선반에서, 유가는 우측의 선반에서 마음에 드는 단약을 골랐다.
“사존께서 이렇게 욕심이 과하신 줄은 몰랐습니다.”
송기연이 병을 내려놓고 유가 곁으로 다가와서는 단약에 정신이 팔려있는 사람에게 말했다.
“네가 모르는 것이 참 많구나.”
유가가 그를 힐끗 쳐다보고 그를 찰싹찰싹 밀치며 재촉했다.
“어서 취영단(聚靈丹)을 찾아라. 여긴 없으니 네 쪽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송기연은 밀쳐지는 대신, 들뜬 유가를 돌려 자신의 품에 안았다. 유가보다 반뼘쯤 큰 청년이 그의 귓볼을 깨물며 은밀하게 물었다.
“사존, 장금문의 단약 중에 최음제는 없습니까?”
“!”
유가가 급히 말했다.
“그, 그런 게 있을 리가! 절대 없다!”
“없다면 왜 이리 긴장을 하십니까?”
송기연이 사악하게 웃으며 유가 쪽 선반을 훑어 보았다.
“사존께서 혼례식 때 빙장조에게 건네시려던 그 상자 안에 이상한 단약이 있던 것을 봤습니다. 설마 그것도 전에 여기서 훔치신 겁니까?”
“그럴 리가 있느냐?”
유가가 급히 부인했다.
“여긴 네가 그런 짓을 할 곳이 아니다. 그리고 그 취영단은 필요 없는 것 같구나! 이미 챙길 건 다 챙겼으니 그만 가자! 괜히 여기 더 머물렀다 들키면 번거로워진다.”
유가는 계속 모르는 척 말했다.
“어서 날 놓아라. 빨리 나가자!”
“찾았습니다.”
하지만 단 한마디에 유가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송기연이 손에 들린 작은 병을 살짝 흔들었고, 그 위엔 또렷한 세 글자가 적혀 있었다. 소혼산(銷魂散).
깜짝 놀란 유가가 급히 손을 뻗어 낚아채려 했지만, 송기연이 뒤로 물러나 가볍게 피했다. 유가는 두 눈을 가늘게 뜨고 보법을 사용해 다가가 장풍을 송기연 얼굴로 날렸다. 곧 그 공기 덩어리는 휙 방향을 꺾어 자기병으로 돌진했다.
그것마저 알아챈 송기연이 몸을 돌려 피했고, 다른 손으로 유가의 몸을 막아서며 약병을 보란 듯 짤랑였다. 공간 속에 넣지 않아도 유가가 가져가지 못할 것 같자 맘껏 그를 놀렸다.
“사존, 이 단약 이름이 참 재미집니다.”
송기연이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유가를 약올렸다.
“소혼산, 이걸 쓰면 정말 혼을 쏙 빼놓을지 모르겠습니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어서 내놓아라! 이건 내가 가져가려던 계획에 없던 약이니.”
두 사람은 진기와 혼돈의 힘을 사용하지 않고 투닥투닥 몸싸움을 벌였다.
유가는 본래 주먹으로 황천역 역주궁을 부순 엄청난 사람이고, 그가 진짜 힘을 쓴다면 이 약병은 금방 산산조각이 날 것이었다.
“사존의 계획엔 없더라도 제 계획엔 있었습니다.”
하지만 송기연 또한 가볍게 한 손으로 사존을 상대하며 사악하게 웃었다.
“이걸 잘 사용해서 사존을 꼭 만족시켜 드릴게요.”
빈틈이다!
유가는 눈을 반짝이며 여유작작하고 있는 송기연의 틈으로 장풍을 쏘았다. 송기연도 아차하며 진기를 움직여 약병을 보호하려 했으나, 그만 두 개의 힘이 맞부딪혀 버렸다.
그리고,
쨍그랑-!
병이 산산조각나 분말이 자욱하게 두 사람을 뒤덮었다.
유가가 서둘러 입과 코를 가렸지만 이미 어느 정도는 들이켜 버린 게 확실했다. 송기연은 그보다 상황이 더 안 좋았다. 하필 그 분말이 터진 곳이 송기연의 입과 코 주위였고, 숨을 한 번만 들이켜도 그 향을 모조리 마셨을 게 뻔했다.
그래서, 이 생각지도 못한 변고에 두 사람이 빠졌다. 모든 동작이 멈췄고, 두 사람은 서로만 멀뚱히 바라보고 있었다.
“하하, 하하……, 이렇게 다 엎어졌네. 어, 어서 치우고 돌아가자.”
유가가 어색하게 웃으며 어떻게든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했지만, 그만 잘못 내디딘 뒷걸음질 아래 기름이 있었다. 바로 미끄덩 넘어지는 순간, 반사적으로 앞사람의 소매를 잡아당겼고, 앞사람도 미처 버티지 못하고 넘어지며 선반과 함께 모두 와장창 무너졌다. 선반의 잔해, 뒤엎어진 화구, 병들이 전부 바닥에 널브러졌다.
“아야야…….”
엉덩이과 머리의 아픔을 느끼며 유가가 눈을 뜨자, 코앞의 송기연의 굶주린 늑대 같은 눈과 딱 마주쳐 버리고 말았다. 유가는 침을 꼴딱 삼키며 제 위에 있는 사람의 가슴팍을 밀쳤다.
“……송기연, 어서 진기로 약기운을 깨끗이 없애라. 그래야 나아질 것이다. 넌 늘 나를 이리 놀려대는 구나. 별일 아니다.”
“사존께서 저지른 사고면서, 이렇게 발을 빼시려 하십니까?”
청년은 입꼬리를 비릿하게 올리면서 제 가슴팍의 유가의 손을 잡아 쥐고, 반듯한 이마를 그의 이마에 댔다. 송기연의 호흡이 더 거칠어지며 맞닿은 이마가 점점 뜨거워졌다.
“아, 아니다. 나 혼자만의 책임이 아니지!”
유가는 소혼진의 위력이 자신이 생각 보다 더 대단한 것 같아 말을 더듬었다. 어떻게 해도 이 녀석이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 같아, 아니 안 그러려할 것 같아 심장이 급격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체온도 급속도로 올라갔다. 상황이 난처했다.
“사존께서 저를 데리고 도둑질하러 오셔서는, 본인이 원하는 것만 챙기셨잖아요. 전 그저 이 소혼산을 원한다고 했을 뿐인데, 그걸 또 뺏으려 하셨고요. 이렇게 사고를 치고도 모든 책임을 제게 넘기시려 하시네요.”
송기연의 뜨거운 입술이 유가의 매끄러운 콧날에 살짝 입맞추고, 그가 웃었다.
“사존, 정말 말 안 되는 것 아시죠?”
젠장! 이 자식 왜 이리 똑똑한 거야. 말을 왜 이렇게 잘하지!
“그, 그럼 뭘 하고 싶은 것이냐? 여기서 하자고? 여긴 장금문의 단루지 경창파의 침전이 아니다. 만약 누군가 보기라도 한다면 네 체면만 깎이는 것이다.”
일이 이 지경이 되었으니, 유가는 송기연의 수치심을 유발하기로 작정했다.
유가는 이전에 이런 일로 당황스러웠던 적이 없었다. 하지만 송기연을 만난 후로는 늘 이렇게 당황스러웠고 휘말렸고 도리를 모르는 수치에 시달린 것 같다.
“안 될 건 또 뭡니까?”
송기연이 나른하게 눈을 깔며 유가의 하얀 뒷목을 휘어잡았다. 오소소 소름이 돋은 유가가 어쩌기 전에 송기연이 급하게 입술을 갖다 박았고 격렬하게 유가의 혀를 끌어내고 빨아올리며 잡아먹을 듯 굴었다. 그러다 잠시 입을 떼고 말했다.
“하아. 그들이 쓸데없는 얘길 한다면 죽이면 그만입니다. 죽은 자는 말이 없습니다.”
“너, 넌 어찌 걸핏하면 살인을 하겠다고 하는 것이냐!”
“아, 사존께서 싫어하는 걸 잊고 있었습니다.”
청년의 눈은 음산하게 반짝였다.
“그럼 두 눈을 뽑고 혀를 베어 목숨만 살려두면 됩니다.”
유가는 아무래도 송기연 이 자식의 성격에 여전히 어두운 구석이 많이 남을 걸 알았다. 자신이 없는 시간 동안 그가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도, 전에 자신과 비교가 안 될것도 같았다.
송기연은 한다면 했다. 유가는 많은 수진자의 목숨을 위해서라도 힘을 주어 송기연을 밀쳐 버렸다.
“지금 그리 조급하다면 당장 경창파로 돌아가자구나. 왕다국 쪽은 후에 다시 약속을 잡으면 된다.”
“사존, 도망가시려고요?”
송기연은 안색이 좋지 않았다. 빨갰고 까맸고 차가웠고 뜨거웠다. 소혼산의 약효가 그의 온몸을 휘감고 있었다.
그 이글거리는 눈빛을 마주한 유가는 자신이 정말 재수가 없다고 느꼈다. 유가는 재빨리 신법을 써서 부리나케 입구로 향했으나, 그만 송기연이 따라잡고 말았다. 덮치려는 자와 덮쳐지지 않으려는 자가 문앞에서 아웅다웅하며 몸싸움을 벌였다. 유가는 기가 찼다.
송기연이 이젠 컸다고 말을 하나도 듣지 않아 유가는 울고 싶은 지경이다.
몸싸움에 많은 게 떨어지고 깨지고 뒤엎였고, 마지막에 송기연은 유가를 벽으로 밀어붙였다.
탁!
“내 말을 듣지……!”
유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송기연의 커다란 손의 앞사람의 옷을 우악스럽게 벌리고 매끄러운 피부를 더듬으며 조급히 허리띠를 풀러갔다. 저를 누른 송기연의 호흡과 그 손이 너무 뜨거워 경악할 정도였다.
“사존, 가지 마세요…….”
순간 귓가에 울린 아련한 목소리에 그가 발버둥을 멈췄다. 유가는 가쁜 숨을 진정시키며 송기연의 검붉어진 눈빛을 보고 물었다.
“또 심마가 나온 건가?”
이 녀석이 왜 이렇게 말을 안 듣나 했더니, 또다시 재수 없는 그 심마가 나온 것이다.
유가에 대한 집념으로 송기연은 입도했고, 그가 심마의 거의 모든 능력을 장악했지만 여전히 복병은 있었다. 마치 지금처럼 유가의 비협조에 소혼산의 약효까지 더해지자 송기연은 불안감이 또 도진 거였다.
송기연은 붉어진 눈빛으로 간절하게 숨을 헐떡이며 자신을 밀치려는 유가의 손을 잡아 내렸다. 그리고 파르르 입술을 떨며 두려운 듯 조심스럽게, 조급하게 상대에게 입을 맞추었다.
더 이상 송기연을 밀어내지 못하는 유가가 손 둘 곳을 찾지 못해 뒤쪽 벽을 더듬다가, 송기연의 혀가 순간 제 혀 아래를 쓸어올리자 훗-! 소리가 새나가며 손에 힘을 줬다.
철컥-!
그리고 벽의 그 한 부분이 쑥 눌려버렸다.
미쳐 소리의 정체를 알 틈도 없이, 갑자기 선반이 드르륵 움직이더니 곧 한 사람이 지나갈 수 있는 통로와 계단이 드러났다. 예상치 못한 변고에 살짝 제정신을 차린 송기연이 자신이 옭아매 압박하고 있는 유가를 바라보았다. 사존은 좀 전에 심마의 몽환에서 본 것처럼 도망간 게 아니었고, 제 가슴팍에, 팔 안에 딱 밀착하여 있었다.
송기연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자 눈동자 색이 한층 옅어졌다. 그는 자신의 욕구를 억누르며 품에 안았던 사람을 풀어주었다. 그리곤 살짝 이마만 맞대고 통로를 눈짓하며 말했다,
“사존, 보세요. 우리가 저 안으로 숨는다면 아무도 볼 사람이 없겠죠?”
장금문 단루에 이런 통로가 있다는 사실에 놀란 유가는, 송기연의 말을 듣고 한 번더 놀라 그대로 굳어지고 말았다.
단루 삼층에 비밀 장치는 두꺼운 선반으로 가려져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주위 벽도 이음새 없이 평평하고 틈도 없어 유가조차 발견하지 못했다.
유가가 벽과 통로를 번갈아 보다가 송기연의 정염이 가득한 눈을 마주하고 애써 목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살짝 옆으로 피하며 말했다.
“진정해라 송기연. 이 통로가 뭔지도 모르고 안에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도 가늠이 되지 않는다. 안 들어가는 게 좋겠구나.”
“정말 그리 생각하십니까? 전 생각이 다릅니다.”
송기연이 한 발을 척 앞으로 내디디며 유가의 길을 막았다.
“빙장조가 이곳에 이런 기관을 설치해 두었다면, 저 안엔 더 좋은 단약을 숨겨 두었을 겁니다. 저기 들어가 보면 더 풍족한 단약을 구할 수 있을 겁니다.”
송기연이 빙그레 한껏 눈을 접고 웃었다.
유가가 미심쩍게 그의 눈빛을 살피자, 그래도 확실히 안정이 된 게 심마에게서 벗어난 것 같았다. 유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들어가고 싶다면 혼자 갔다 오너라. 난 여기 있을 테니.”
“……정말 그리 결정하실 겁니까?”
입이 살짝 뾰루퉁해진 송기연이 유가의 몸을 슬쩍 훑자, 상대의 딱딱해진 형체가 옷 위로 존재감을 확실히 하고 있었다. 송기연은 흐음- 만족스러운 비음을 흘리며 말했다.
“반응이 오긴 했군요. 좀 더 버티고 계십시오.”
송기연은 자신은 여유로운척 유가를 놀리더니, 단숨에 그의 허리를 끌어안고 그대로 통로 안으로 뛰어들었다.
귓가에 쌩쌩 부는 바람을 느끼며 유가는 얼굴이 새빨개지도록 화가 났다.
저 음흉한 자식!
이렇게 끌려 들어가면 피할 길이 없었다. 유가는 삼일 내내 갖은 희롱과 감당 못 할 침입에 시달리던, 겨우 휴식을 취하고 있던 자신의 작은 구멍에게 묵념을 보냈다. 이러다 제 국화가 다 닳거나 다물리지 못할 게…… 잠깐, 아니지, 왜 내가 계속 아래에 눌린 거지!
“송기연, 나와 하고 싶다면 나도 좋다.”
유가가 송기연을 확 끌어당기고 귓가에 유혹하듯 말했다.
“하나, 이번엔 내가 위에 올라가겠다.”
두 사람은 엄청 빠른 속도로 계단을 날아서 내려갔고, 유가의 말이 끝나자마자 지면에 발이 닿았다.
공간 속에서 야광주를 꺼내 불을 밝힌 송기연이 힘으로 그걸 벽에 반쯤 고정시켰다. 컴컴한 주위가 새어나오는 불빛에 환해졌다.
별로 크지 않은 지하실의 중앙엔 거대한 화로 하나가 놓여 있었고, 외부 1층에 화로와는 다르게 이 화로는 네모나고 큰 모양이었다.
유가가 그 ‘화로’의 모양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란 듯 말했다.
“회세정(回世鼎)?!”
“회세정? 사존께서 말씀하신 그 임관이 꺼낸 회세정이요?”
발이 닿자마자 유가의 발칙한 속삭임에 대답하며 그를 제 위에 태우고 놀리려던 송기연이 말했다. 그는 사존의 표정이 좋지 않자 그 욕망을 억누르고 정색했다.
“맞다. 너와 나를 과거로 되돌아오게 했던 그 회세정. 천도가 설치한 올가미.”
유가가 화로 앞으로 다가가 흑금장갑을 씌운 주먹으로 뚜껑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회세정이 왜 장금문에 있는 거지? 설마 천도가 또 무슨 짓을 꾸민 건가?”
슥-!
“읏!”
갑자기 유가의 왼손이 베이더니 작은 상처에서 선홍빛 핏방울이 나와 화로 안으로 떨어졌다. 유가가 미간을 찌푸린 채 회세정 가운데에서 반짝이는 무언가를 바라보았다.
화로 앞에 서 있는 유가를 보고 안 좋은 예감이 든 송기연이 급히 그를 품에 안고 뒤로 물러났다.
그들이 막 뒤로 물러난 순간, 회세정에서 갑자기 거대한 빛줄기가 솟아올라 단루를 뚫고 하늘로 솟아올랐다!
두 사람이 있던 곳이 무너지기 시작했고, 무거운 돌과 머리가 머리 위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정신을 차린 유가가 송기연을 밀고 진기로 두 사람 곁에 보호막을 쳤다. 그리고 주먹으로 진기를 쏘아올려 모든 장애물을 부숴버린 후, 두 사람은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빛줄기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고, 하늘과 지하의 회세정을 거대한 줄기로 연결했다.
유가는 약 기운 때문에 살짝 얼굴이 달아올라 휘청였지만, 마음은 더 불안했다.
“사존, 괜찮으세요?”
송기연이 너무 놀라서 허둥지둥 사존을 살폈다. 아직도 진정이 되지 않았다. 그가 조금만 늦었더라면 그 빛줄기가 사존을 덮치고, 예전처럼 다시 눈앞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걱정 마라. 괜찮다.”
표정이 굳은 유가가 흑금장갑을 치우고 이미 치유되기 시작한 손가락을 보며 말했다.
“갑자기 손이 저절로 베이더니 핏방울이 회세정에 떨어졌다. 지금 이 사달이 아무래도 그 핏방울 때문인 것 같다.”
“그 말은 회세정의 변고가 사존과 관련이 있다는 거예요?”
“그래, 적지 않은 것 같다. 전에 네 기억을 떠올리게 하려고 핏방울을 녹색 돌에 떨어뜨렸을 때 효과를 보았지. 근데 지금 이 회세정도…….”
유가가 순간 멈칫하더니 손바닥을 펴보았다. 그리고 그 위에 나타난 각인을 보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곳은 전에 흑석각인이 있던 곳이다. 하지만 지금 작은 검은색 화로 모양의 도안이 위에 또렷하게 새겨졌다.
유가는 당황스럽고, 어이없고, 놀라울 뿐이었다.
자신이 회세정과 혈맹관계일 줄이야. 신기하기도 했지만 허튼소리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확실히 본인과 회세정이 연관되어 있는 건 느꼈다. 자신이 뜻한다면 회세정을 춤추게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만 이 수상쩍은 빛줄기가 도대체 뭘 하는 건지 이해 되지 않았다.
“사존, 왜 그러세요?”
송기연이 사존의 손을 잡아끌며 물었다.
“이게 무슨 일일까요? 왜 사존의 손에 회세정의 각인이 나타나는 거죠?”
“음, 나도 모르겠다. 하나……,”
유가가 손을 휘젓자 회세정이 유가의 손에 들어왔다. 빛줄기도 회세정 안으로 다시 들어가더니 주먹만 한 크기로 작아져 그대로 유가의 손에 잡혔다.
“이걸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
회세정의 움직임이 너무 큰 탓에 큰 구멍이 뚫렸고, 반쯤 무너진 단루 상공엔 많은 하객들과 장금문 제자들이 모여들었다. 새까맣게 가득 몰려든 게 장관이었다.
막 곡연을 데리고 와 다시 부부 맞절을 하려던 빙장조는 돌아오자마자 자신의 혼례식장이 폐허가 된 것을 보게 되었다. 한데,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거대한 소리를 듣고 전광석화처럼 빠르게 달려와 보니, 단루까지 폐허가 된 게 아닌가!
가장 먼저 도착한 그는 자연스럽게 유가가 회세정을 손안에 넣는 동작을 보았다. 화가 치밀어 올라, 곁에 있는 사람이 경창파 장문인 송기연이라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그대로 달려가 회세정을 빼앗으려 했다.
창결검이 튀어나와 유가의 앞을 막아섰다. 분노에 휩싸인 빙장조를 본 송기연의 안색도 좋지 않았다.
“빙 문주 이게 무슨 짓입니까?”
빙장조가 칠현 고금을 꺼내어 현을 잡아당기며 차갑게 말했다.
“내가 할 소리! 지금 이 단루에서 뭘 하는 것이오!?”
그가 유가 손안에 회세정을 바라봤다.
“지금 두 사람이 내가 제일 아끼는 단약 화로를 훔쳐 가려고 하는데, 이 장금문주를 대놓고 무시하는 겁니까?”
이미 반쯤 부서진 단루에 발을 내디딘 빙장조는 속에서 피눈물이 났고 당연히 표정도 좋지 않았다.
“나와 곡연의 혼례에 참석하신 분이라 정성을 다해 대접했거늘, 이렇게 단루를 부수고 내 화로까지 약탈하려 하다니요! 송 장문인께서는 명명백백히 설명해야 할 겁니다.”
송기연이 눈을 가늘게 떴다. 아직 몸에서 약 기운이 다 빠져나가지 않았고 마음껏 풀 수도 없어 기분이 나쁜데, 빙장조가 이렇게 시비까지 거니 정말 불쾌했다.
사존의 말씀만 없었다면 진작 이자가 이렇게 날뛰게 가만히 두고 보진 않았다.
창결검이 윙- 공명하고, 송기연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에 공기가 살짝 얼어붙었다.
“빙 문주, 오해입니다. 단루는 우리가 망가뜨린 게 아닙니다.”
흑금장갑을 주먹에 씌운 유가가 창결검의 날을 잡고 아래로 눌렀다. 그리고 두 사람 사이를 막아섰다. 그가 거짓말을 하기 시작했다.
“당신이 떠나자마자 존주 왕다국과 막청이 싸우기 시작해서 금성전을 망가뜨리고 우리의 술자리를 망쳤습니다.”
애석함과 원망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나 송 장문인은 그 두 사람과 얽히고 싶지 않아 나를 데리고 장금문을 돌아본 것입니다.”
화제를 바꾸자 송기연도 얼떨떨하게 유가를 바라봤다.
“우리 두 사람이 막 단루 앞을 지나갈 때 갑자기 엄청난 빛줄기가 단루의 천장을 뚫고 나오지 않겠습니까. 하늘로 치솟는 빛줄기에 정말 놀랐습니다. 장문인이 한번 보러 가자 하여, 도착해서 화로를 살펴보고 있는 와중에 당신이 온 것입니다.”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은 유가가 회세정을 손바닥에 올려 빙장조에게 내밀었다.
“보십시오. 우린 이 화로를 은닉할 생각이 없으니, 빙 문주께선 부디 오해 마십시오.”
이미 단루가 폐허가 되었으니 단약을 훔친 건 알 수 없다. 유가는 그럴 듯한 거짓말로 태세를 손쉽게 전환했다. 뭐든 무력으로 잠재우는 건 예전에 그가 하던 짓이다. 때문에 이젠 ‘이치’로 설득하려 했다. 이 이치가 말이 되는지는 그닥 고려하지 않았다.
이미 살기가 사라진 송기연이 눈을 깜빡이며 멀뚱히 사존을 바라보았다. 이 사람의 ‘이치’에 어안이 벙벙했다. 그는 유가가 이렇게 단 시간에 이런 말을 지어낼 줄은 상상도 못했다. 그의 말은 확실히 일리 있었고, 표정과 말투까지 완벽했다.
그가 빙장조였다면 분명히 속아 넘어갔을 것이다.
역시, 빙장조도 들고 있던 고금을 치우고 회세정을 받아 들었다.
“그런 거군요. 제가 실례를 범했습니다.”
‘됐다!’
‘…….’
빙장조가 회세정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한동안 아무런 움직임이 없던 화로가 왜 오늘 갑자기 빛줄기를 내뿜은 거지?”
유가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는 건 이 화로가 확실히 비범한 물건이기 때문이다. 어디서 온 건지도 정확하지 않지만, 만들어내는 단약은 뛰어난 효과가 있었다. 이런 기이한 현상도 이상하지 않았다.
게다가 자신도 하늘까지 빛줄기가 솟아오르는 걸 직접 목격했으니, 유가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증명하는 셈이었다.
“잠깐.”
빙장조가 유가를 보고 물었다.
“어째서 이 화로가 이렇게 작아진 겁니까?”
속으로 웃고 있던 유가는 순간 멈칫했다. 머리를 재빨리 굴려, 한숨을 내쉬곤 손바닥을 들어 빙장조에게 보여주었다.
“이걸 보십시오.”
“이게 어떻게 가능합니까? 저도 못 한 걸…….”
그 각인을 본 빙장조는 경악했고 자신이 본 것을 믿을 수 없었다. 그가 이 화로를 손에 넣은 후, 그저 단약을 만들 때 사용하기만 했을 뿐 아무리 통제해 보려 해도 성공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 지금 유가 손바닥에 있는 각인을 보자 속에서 어떤 추측이 떠올랐다.
아무래도 이자가 이 화로의 진짜 주인인 것 같았다.
“이 화로를 어떻게 통제했는지 알려 주실 수 있으십니까?”
회세정을 들고 있는 빙장조가 놀라움 가득한 눈빛으로 유가를 바라봤다.
그는 오늘 처음으로 유가를 만났다. 비록 유가의 외모가 인상 깊기는 했지만 송기연이 신경 쓰고 있는 제자라고만 여기고 마음에 두지 않았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자신도 통제하지 못한 화로를 이 제자가 해내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저도 모르겠습니다.”
유가가 미소를 지으며 진중하게 말했다.
그는 속으로 빙장조에게 대놓고 이 회세정을 달라고 말을 할까 말까 고민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송기연이 말했다.
“빙 문주께서도 보셨다시피 이 회세정은 제 사존을 선택하였고, 아무래도 제 사존과 인연인 것 같습니다.”
그는 유가의 신분을 밝히지 않고 그냥 자신의 사존이라고만 밝혔다.
“빙 문주께서 받아들이실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저희 경창파의 보물과 이걸 교환하고 싶습니다.”
유가가 송기연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자신의 속을 훤히 꿰뚫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 녀석의 말 때문에 제자인 척 하던 자신의 신분이 그만 탄로가 날 위기에 처했다.
“사존이라고요?!”
역시, 빙장조는 곧바로 화제를 돌렸고, 놀란 눈으로 유가를 바라봤다.
송기연의 막강한 실력은 이미 온 대륙에 인정을 받고 있었고, 이자와 관련된 사건은 여전히 수진자 사이에서 제일 화젯거리였다.
삼백 년 만에 대승기에 접어들었지만, 능운파 장문인을 죽여 수련 경지가 망가진 채 쫓겨났다. 모두 이자가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 거라고 여겼던 이백 년이라는 시간 후, 그는 다시 모두의 머리 꼭대기 위에 올라섰고, 능운파를 멸하고 경창파를 세워 허공을 부수고 신계로 떠났었다.
수많은 수진자들이 이자를 보냈다는 기쁨에 취해 있었지만, 고작 보름만에 이자는 다시 귀환했다. 더욱 포악해진 성미에 그동안 수진계는 모두 벌벌 떨고 있었다.
경창파 제자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이 이자의 성질을 건드릴까 모두 피해 다녔다.
그런데 이자의 사존은 도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거지? 본 적이 없는데? 게다가 이렇게 막강한 실력의 제자를 둔 사존의 수련은 도대체 어느 경지에 도달했을까?
송기연의 옆에서 선한 웃음을 짓고 있는 유가를 보며 빙장조의 마음에 한기가 들었다.
좀 전에 이자에게 덤비려 했었 건만, 사과를 하기엔 늦은 건가.
“이 화로를 손에 넣은 지 한참이지만 아직 통제조차 못 하고 있었습니다. 한데 지금 이 대인께서 이리도 쉽게 이 화로를 통제하시는 걸 보니, 아무래도 이것과 인연이 있으신 것 같습니다. 선물로 드릴 테니 부디 받아주십시오.”
빙장조가 유가에게 회세정을 건넸다.
그가 한순간에 태세를 바꾸자 유가는 얼떨떨했다. 회세정을 다시 받아는 들었지만 조금 미안해졌다.
“문주, 그리 예의 차리지 마십시오. 어쨌든 이 화로는 당신의 것이니 저도 빈손으로 받지는 않겠습니다.”
그가 공간 속에 있는 물건들을 골똘히 떠올려 보았다. 그에게 있는 물건들은 고급 법기들 뿐이었지만, 빙장조 역시 장금문주이니 없을 리가 없었다.
단약을 훔치고, 단루를 폐허로 만들고 진귀한 회세정까지 가져간다면…….
강도나 다름없었다.
“이리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문주. 앞으로 도움이 필요하시면 말씀하십시오. 성심성의껏 도와드리겠습니다.”
유가가 고심하는 걸 본 송기연이 창결검을 거두고 진심으로 빙장조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유가는 그런 송기연에게 마음속으로 ‘좋아요’를 날렸다. 이 녀석 왜 이렇게 감성지수가 높아졌지. 이전에 고금성보다 훨씬 마음에 들었다.
유가와 송기연은 여기에 있는 자들을 모두 상대하기에 충분한 실력을 가진 자들이다. 지금 송기연이 이렇게 말한다는 건 앞으로 장금문을 신경 쓴다는 얘기였고, 장금문의 체면을 엄청 세워 준 것이었다.
“하하하, 좋습니다.”
빙장조는 당연히 기뻐하며 받아들였고, 단루가 망가져 우울했던 마음이 많이 사라졌다.
“빙문주, 여기 계셨군요. 당신께 사과드리고 싶습니다.”
저 멀리서 왕다국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녀석은 여전히 부채를 든 채 유유히 공중으로 날아와, 이제 막 표정이 핀 빙장조에게 말했다.
“방금 내가 실수로 금성전을 망가뜨렸소. 미안합니다. 하나, 사흘 안에 다시 원상복귀 시켜놓겠소. 그러니 부디 용서해 주시오.”
그의 뒤에서 막청이 이상하다는 듯 표정을 지었다.
금성전을 한순간에 충동적으로 망가뜨린 건 본인이었다. 왕다국이 나서서 그를 옹호하며 홀로 책임을 지니 이상했다.
왕다국이 뒤로 물러나 막청과 나란히 서자 막청이 말했다.
“뭐야? 내게 호감이라도 생긴 건가?”
왕다국은 부채로 얼굴을 가린 채 웃었다.
“이 부채는 내게 다오, 널 감싸준 답례라고 생각하고.”
“그런 거 원한 적 없다.”
막청은 낮게 투덜거렸지만, 그를 흘겨보기만 할 뿐 눈앞에 있는 부채를 뺏으려고 하진 않았다.
막청은 왕다국이 왜 자신에게 집착하는지 이해되진 않았지만, 계속 이런 일을 겪다 보니 이 사람의 무례함에 이미 익숙해지고 있었다. 자세히 보면. ……그도 그렇게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았다.
“존주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저도 더는 따지지 않겠습니다.”
왕다국에게 대답한 빙장조가 저 멀리 곡연을 끌고왔다. 그리고 구경하고 있던 수진자에게 말했다.
“오늘 혼례에 뜻하지 않은 일이 벌어져 여러분께 대접이 변변치 못한 점 양해해 주십시오.”
이미 남자 옷을 입고 있는 곡연을 붙잡고 그가 진중하게 말했다.
“오늘부로 장금문엔 경연 선녀는 없습니다. 제가 혼례를 올린 사람은 곡가 둘째 공자 곡연입니다. 모두 오해 없으시길 바랍니다.”
지금껏 남자와 남자가 대놓고 혼례를 올린 적은 없었다.
오늘 빙장조가 그 선례가 된 것이다.
유가가 회세정을 거두었고 빙장조에 대한 이미지가 많이 달라졌다. 보아하니 그는 정말 곡연을 많이 사랑했고, 성별과 상관없이 좋으면 그저 좋은 거였다.
유가가 목청을 가다듬고 첫 번째로 덕담을 건넸다.
“빙문주와 곡공자의 혼례를 축하드립니다.”
그의 목소리는 진기를 감싸고 있어 모든 수진자들이 들을 수 있었다.
그 후로 송기연, 왕다국, 막청도 덕담을 건네기 시작했고 다른 하객들도 차례로 축하를 건넸다.
빙장조가 환하게 웃으며 감사 인사를 전했고, 다음에 정식으로 피로연을 열어 곡연과 그의 혼례를 올리기로 했다.
한쪽으로 물러나 있던 유가가 말했다.
“두 사람이 부럽군.”
“빙장조가 한 말이 부러우신 겁니까?”
송기연이 유가의 곁으로 다가와 말했다. 슬며시 넓은 소매 아래로 길고 고운 손을 붙잡았다.
“만약 사존께서 원하신다면 저도 모두에게 외칠 수 있습니다. 나 송기연은 한평생 사존만을 사랑한다고. 하나 사존께서 낯짝이 두껍지 못하여 제가 이리 말하는 걸 싫어하시잖아요.”
“잘 알고 있구나.”
유가가 웃었다.
“당연하죠. 사존의 생각은 제가 훤히 알고 있습니다.”
송기연이 하늘 무서운 줄 몰랐다.
“그럼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느냐?”
그들은 이미 사람들 틈을 빠져나와,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여우처럼 눈꼬리를 붉게 웃고 있는 사존의 얼굴을 보며 송기연은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대답을 듣기 전에 입술이 순간 뜨거워지더니, 유가의 얼굴이 가까워졌다가 다시 멀어졌다.
유가가 자신의 질문에 스스로 대답했다.
“널 갖고 싶다.”
송기연은 눈이 휘둥그레졌고, 간신히 억눌러놓은 약 기운이 다시 솟구치기 시작했다. 그가 긴 팔로 유가를 와락 자신의 품에 껴안고 귓가에 대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사존, 저 정말…… 정말 여기서 당신을 갖고 싶어요!”
유가가 눈썹을 추켜세우곤 손가락으로 송기연의 이마를 꾹꾹 밀치며 물었다.
“네가 감히?”
송기연은 그가 일부러 묻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사존은 자신이 못 할 거라는 걸 알고 그를 자극하는 것이다.
그가 얼마나 힘든지 하늘은 알고 있을 것이다. 그의 육체든 마음이든, 이 사람의 말 한 마디 동작 하나에 시시때때로 흥분되어 자신을 통제할 수 없었다. 상대는 저토록 태연한 데 반해 그는 막 감정이 물들어 발을 동동 구르는 애송이 같았다.
정말, 이천 년을 헛살았다.
“못 합니다. 사존께서 거절하시면, 못 합니다.”
송기연이 고통스러운 얼굴로 짠뜩 눈썹을 찌푸리곤, 유가의 손을 잡아끌어 끝에 입을 맞추었다. 손끝, 마디, 손등까지 닿고도 가질 수가 없어 아쉬워 미치겠는 듯 향을 들이키며, 검은 눈동자엔 아련함이 가득했다.
하지만 유가는 속지 않는다. 그 애틋한 검은 눈동자 안엔 드글드글 거리는 흉포한 욕망이 숨겨져 있었다. 그 눈빛을 보고 말았다. 유가가 그의 가련한 애틋함에 승낙한다면 며칠 동안 본인이 잠도 못자고 엉엉 울어댈 게 뻔했다. 목이 다 쉬고 뱃속은 흉포한 흉기가 휘젓고, 배가 터질 것 같은 안엔 질척한 욕정을 가득 채운 채 빼 주지도 않을 것이다. 울고 불며 제발 빌어대며 죽을 듯 메달리면 그제야 잠시 멈추고 쪽쪽 입이나 맞춰 주겠지. 흥.
“내가 하고 싶다는 건 네가 날 범하란 뜻이 아니다.”
유가가 청년의 얼굴에 다가가 분홍빛 입술을 닿을 듯 말 듯한 거리에서 말했다.
“네가 옷을 다 벗고 침상 위에 누워 있으면 내가 너를 올라타 주마. 내가 너의 널찍한 가슴을 만지고 너의 뒤를 부드럽게 한 뒤 너의 몸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네게 극진한 쾌감을 주고 내 이름을 미친 듯이 외치게 하고 싶다.”
유가는 말을 할 때마다 온몸의 열감이 얼굴로 향했고, 곧 얼굴이 붉게 타올랐다. 하지만 솔직히 욕망을 입으로 꺼내자 그는 마침내 주도권을 잡았다는 홀가분한 쾌감이 느껴졌다. 정말 원하는 바를 표현한 것이다.
유가는 원래 누구도 가질 수 없는 남자였다. 송기연을 알기 전엔 원하는 사람은 누구든 가졌으나, 이자를 만난 후론 그의 감정, 신체적 욕구가 모두 이 청년에 손에 꽉 잡혀 있었다. 그도 이 남자를 가지고 싶었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송기연을 정복하고 싶었다. 송기연이 잠시 멈칫하더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좋습니다.”
송기연은 아까보다 훨씬 부드럽게 웃으며 유가의 손을 자신의 가슴팍에 가져와 댔다. 그리고 제 심장 박동을 들려주며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존께서 절 원하시면 제 몸 기꺼이 드리겠습니다.”
어이쿠!
유가는 얼굴의 열감이 채 가시기도 전에 송기연의 말에 그만 온몸이 타올랐다. 송기연이 당연히 거절할 줄 알았다. 사내라면 모두 위에서 정복하는 것에 익숙하지 누가 아래에서 몸짓에 휘둘리길 원할까.
유가는 저도 모르게 송기연에게 감동을 받아 입꼬리가 한껏 올라갔다. 그는 손을 완전히 펼쳐 두 손으로 송기연의 등을 꽉 끌어안는 그의 귓가에 대고 웃었다.
“그럼 이왕 말이 나온 김에 바로 돌아갈까?”
유가가 입술을 귓가에 부비는 것과 동시에 일부러 아래를 밀착시켜 허벅지를 송기연의 다리 사이에 넣고 비볐다. 안 그래도 단단한 것이 정말 허벅지를 찌를 듯 크고 거대하게 꼿곳이 서 있었고, 유가의 숨소리는 아까 송기연 보다 더 급해 보였다.
얼굴이 새까맣게 변한 송기연이 극한의 인내심으로 유가를 잠시 밀쳤다가, 다시 부서트릴 듯 사존을 품에 안았다. 그리고 거의 초점이 나간 눈으로 왕다국들이 있던 쪽을 흘낏 쳐다보고 품안에 속삭였다.
“그럼 왕다국과의 약속은 어쩌시려고요?”
“미루면 된다. 급하지 않으니 후에 다시 만날 날이 있을 테지.”
“…….”
하지만 결과적으로 유가는 송기연을 올라타지 못했다. 두 사람이 막 왕다국에게 작별을 고하고 경창파에 도착했을 때, 어린 제자 하나가 부리나케 뛰어왔다. 그 제자는 꼭 잃어버린 어미라도 만난 것처럼 구원의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드디어 장문인을 찾았습니다! 능구신군께서 깨어나셨어요! 그분께서 저희 경창파를 멸하시겠다며 지금 창운전을 부수고 계세요!”
제자가 거의 울부짖었다.
“어떻게 된 거지?”
욕구를 만껏 발설하기 전에 불길이 꺼진 유가가 어두워진 얼굴로 물었다.
“아구가 왜 창운전을 부수는 것이냐?”
어린 제자가 유가를 보고, 또 장문인을 바라보다가 장문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급히 대답했다.
“능구신군께서 깨어나신 직후 장문인을…….”
“머뭇거리지 말고 어서 말하라.”
송기연이 명령했다.
“……개자식, 나쁜 놈, 은혜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놈이라고 했습니다.”
감히 송기연을 볼 자신이 없는 제자가 고개를 숙인 채 계속 말했다.
“그분께서 장문인과 한 하늘 아래 살 수 없다며, 요수삼림을 끌어들여 경창파와 대립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송기연은 화가 나진 않았지만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코를 긁적였다. 그리고 유가에게 물었다.
“사존, 어떻게 할까요?”
자신과 아구의 원한이 대부분 사존 때문이라고 짐작했다.
“그 녀석은 늘 그런 식이다.”
유가가 한숨을 내쉬고 곁에서 이렇게 가만히 있으면 안 되는 청년을 바라 보았다. 그리고 점점 점점 화가 치밀었다.
그동안 그가 얼마나 송기연의 위에 올라타고 싶었는데, 쉽지 않게 정복에 동의도 얻었는데, 아구 때문에 이렇게 다 망치고 말았다.
“가자. 오늘은 됐다. 우선 아구를 위로하는 게 먼저다.”
유가가 앞으로 먼저 걸어가다 슬쩍 뒤를 보니 송기연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는 게 아니겠나. 급격히 안색이 어두워진 유가가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말했다.
“오늘만 됐다는 것이지, 앞으로 날은 충분하다.”
“…….”
* * *
아구의 수련 경지로 창운전을 부수는 건 식은 죽 먹기였고, 맹장은 늘 아구의 뜻을 지지했다. 게다가 치밀한 맹장은 경창파 주위에 심복도 여럿 심어두었기에, 유가와 송기연이 돌아왔을 땐 산 정상 가장 높은 곳의 창운전은 절반이 이미 부서져 있었다.
정상은 좋은 말로 타이르며, 많은 제자들과 대진을 이루어 아구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다.
“아구!”
유가가 멀리서 소리를 지르며 다가왔고, 창운전이 부서진 모습을 보고 송기연 대신에 화가나 맹장에게 화를 냈다.
“아구가 미쳤다고 너도 같이 미친 것이냐!”
“대인! 대인!”
아구가 유가를 발견했다. 주작 소년은 순간 머리에 또 찢어질 듯 이명이 울리며, 눈시울을 붉히며 급히 유가 앞으로 날아왔다.
“대인! 대인의 죽음을 보았습니다. 혼이 사라져 대인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었어요……!”
붉은 옷을 입은 소년이 유가의 허리를 꽉 끌어안고 매달려 두려움을 하소연했다.
아구는 큰 공포심에 휩싸여 있었다. 꿈속에서 송기연과 수없이 대적하였고, 그저 이 사람을 보기 위해서였다. 자신이 의지하는 이 사람.
“괜찮다. 여기 있지않느냐? 울긴 왜 울어, 다 큰 자식이.”
유가는 원래 아구에게 창운전을 이만큼이나 망가뜨린 것에 대해 혼을 내려 했지만, 아이의 붉어진 눈을 보자 모든 분노가 사그라졌다. 습관적으로 아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너무 오래 떠나 있었구나. 미안하다.”
“괜찮습니다. 이렇게 돌아오셨잖아요.”
아구는 유가의 품에서 어리광을 피우니 마음이 한층 편안해졌다.
미간을 찌푸린 맹장이 주먹을 쥐었다 풀다가, 더는 못 참겠는지 바람을 일으켜 창운전의 다른 쪽을 부숴 버렸다.
“맹장신군 뭐 하는 겁니까?”
역시나 저쪽에서 끌어안고 있는 두 사람을 보고 심기가 불편했던 송기연은 맹장의 행동에 더욱 기분이 언짢아졌다.
“두 사람을 홀대하지 않았는데, 어찌 이리 소란을 피우는 겁니까?”
“와, 그래! 너한테 할 말이 있었어!”
유가의 품에서 고개를 빼꼼 빼 든 아구가 송기연에게 외쳤다.
“네가 아니었다면 대인께서 자결하셨을 리가 없어! 이 개자식……!”
유가가 급히 입을 막았으나 들릴 건 다 들렸다.
말을 하던 그의 입을 유가가 막아버리고는 말했다.
“또다시 그렇게 욕을 하면 내가 어찌하겠느냐?”
“?!?!”
아구는 당황스러웠다.
“저자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다. 네가 저자를 개자식이라고 욕하면 나는 무엇이 되겠느냐. 개자식의 애인이 되는 것이냐.”
유가가 부드러운 눈빛으로 자연스럽게 타일렀으나, 아구는 어리둥절했다.
“대인과 저자가요?”
아구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떻게? 왜 어째서 아직도 저 녀석을 좋아하시는 거예요? 저자가 대인을 죽였다고요!”
아구는 아직 기억이 온전치 않았고, 당연히 송기연과 유가가 화해한 일을 알지 못했다. 그러니 지금 유가의 말을 듣고 믿을 수 없었다.
“얘기하자면 길구나.”
엉망이 된 경창파와 일촉즉발인 청룡족과 경창파 제자들을 바라본 유가가 뒷덜미를 어루만지며 한숨을 쉬었다.
“조용한 곳으로 가서 이야기 하자구나.”
그리곤 저 앞에서 멍하니 있는 송기연에게 손짓했다.
“송기연 길을 안내하라. 실내로 가서 얘기하지.”
“네, 따라오십시오.”
정신을 차린 송기연이 정상에게 수습하라고 지시하고는 사람들을 데리고 편전으로 향했다.
가는 도중에 송기연은 계속 딴생각을 하는지 때때로 유가를 돌아보며 웃었다.
“어찌 그리 연정을 품은 소녀처럼 웃는 것이냐?”
유가는 송기연을 따라잡아 나란히 걸었지만, 그 웃음을 이해하긴 어려웠다.
“사존께서 좀 전에 하신 말씀 정말 좋았어요.”
“음, 어떤 말?”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하신 그 부분이요.”
“아니란 말이냐?”
송기연의 엉덩이를 툭 치며 유가가 말했다.
“우리 둘 관계를 숨길 필요가 있느냐?”
“…….”
송기연은 갑자기 기억 속 무주지에서 부끄러워 얼굴을 붉히던 ‘묵묵씨’가 겹쳐졌다 사라졌다. 지금 이렇게 거침없는데, 자신이 제대로 응하지 못하면 어떡하지?
* * *
“그런 거였어요? 어쩐지 분명히 그런 일을 겪은 기억이 없는데, 기억 속에서 대인과 어울린 장면이 있었어요.”
냉정해진 아구가 송기연을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탁자를 치며 말했다.
“송기연! 네가 대인과 함께하며 온갖 고생을 다 하게 했지만, 마지막에 모든 걸 만회했으니 그 공로를 인정하여 본신군이 널 용서하겠다!”
“허허, 신군의 아량에 감사드립니다.”
송기연이 입으로만 냉담하게 반응했다.
“그럼 대인 앞으로 어쩌실 거예요? 신계로 가실 건가요?”
유가와 아구의 관계가 자신이 생각한 관계가 아니자 맹장은 한숨을 돌렸다. 유가를 대하는 태도도 한층 유순해졌다.
“그래, 이번 달 안에 송기연과 허공을 부수고 신계로 올라갈 생각이다.”
전에 집행자가 꿈에 나타난 일이 계속 신경 쓰였던 유가는 신계의 일을 최대한 서두르기로 마음먹었다.
“저도 함께 가요 대인!”
아구가 급히 맞장구쳤다. 유가의 얘기를 듣고 그는 여기서 마음 놓고 있을 수가 없었다.
“너무 위험하다. 넌 안 된다.”
유가가 바로 반박하며 맹장에게 말했다.
“몰래 도망가지 않도록 잘 지켜봐라.”
“아아, 싫어요! 대인과 함께 갈래요!”
아구가 금붕어처럼 양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고 항의했다.
아구의 귀여운 모습을 한참 바라보던 맹장은 뜻밖에 유가의 예상을 벗어나는 대답을 내놓았다.
“저희와 함께 가시죠.”
“우와! 맹장 역시 잘 알고 있구나!”
아구가 눈을 반짝이며 흥분한 듯 맹장의 어깨를 두드렸다.
아구와의 친밀감을 잠시 만끽한 맹장이 이해가 되질 않는다는 유가를 보며 정중하게 말했다.
“제가 아구를 편드는 게 아닙니다. 아구의 안전은 제가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니까요. 다만 저는 대인의 입장에서 생각해 봤습니다. 만약 대인께서 말씀하신 대로라면 천도는 그 자체도 강할 뿐 아니라 모든 신계를 통제할 수 있습니다.
저와 아구의 수련 경지는 대승기이니 곧 신계에 오를 수 있고, 그럼 대인께 힘을 보탤 수 있어 대인께 도움을 드릴 수 있죠. 그럼 천도에 대비하는 게 좀 더 수월해질 겁니다.”
맹장이 유가를 바라보며, 아구 대신 말했다.
“저희는 대인의 뒤에서 대인의 버팀목이 되어 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