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혼돈진형도
“존주, 송기연은…….”
“괜찮다.”
고금성을 향해 활짝 웃어 보인 유가가 비수를 거두며 말했다.
“그 자식이 도망가며 이 난관을 남겨두고 갔구나. 정말 인정머리도 없지.”
유가는 천지(天地) 주위로 가서 주먹으로 벽을 한번 내려쳤다. 쾅하는 소리와 함께 벽이 부서지고 어두운 통로가 나타났다.
“가자. 이 비경이 어떻게 변했는지 보러 가자꾸나.”
열두 마사는 서로 바라보기 바빴다.
“존주께 무슨 일이지? 송기연은 또 어떻게 된 거야?”
옆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소십(小十)이 머리를 긁적였다.
“모르겠어, 근데 존주께서 좀 이상한데. 송기연이 이렇게 사라졌는데, 존주께서 아무 말씀도 안 하시니 오히려 더 무서워.”
소칠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디선가 본 것 같은 모습인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너희는 영혼이 아직 불안정하니 그만 진형도 위로 올라가거라.”
고금성이 미간을 찌푸리며 마사들을 진형도에 올라가게 했다. 그리곤 식해에 넣어두고 그대로 유가를 뒤따라갔다.
고금성은 사실 의문이었다. 왜 자신을 제외한 다른 마사들은 모두 기억을 되찾지 못한 건지 알 수 없었다. 혼돈진형도 때문일 것 같다고 추측은 했다. 이 진형도는 그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강한 것 같았다.
송기연이 갑자기 사라진 이유도 그는 대충 짐작했다.
전에 역사를 바꾼 책임을 져야 한다고 했다. 지금 갑자기 천년의 시간을 뛰어넘었고, 그는 조금 영향을 받은 것 뿐이나 송기연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이건 뭔가 말이 되질 않았다.
고금성은 송기연이 싫었지만 존주가 진심으로 그자를 좋아하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 유가가 무엇을 감내한 것이지 알고 있기에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앞장서서 걸어가던 유가의 얼굴엔 애초에 미소가 사라졌다. 송기연이 사라진 후 그도 냉정함을 되찾았다. 자신이 비경에 들어온 후 보고 느낀 모든 걸 떠올리려 애쓰고 있었다.
두 사람의 빠른 걸음에 얼마 지나지 않아 출구가 나타났다. 은은한 푸른빛이 감도는 대전에, 거대한 석검이 눈앞에 펼쳐졌다. 열두 개의 문이 줄지어 있는 곳은, 당초 송기연과 그가 왔던 비경의 모습과 똑같았다.
“존주, 여긴 어딥니까?”
“쉿.”
유가가 손가락으로 조용히 할 것을 표했다.
똑- 똑- 똑- 똑-
잘 들리지 않는 미세한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꼭 물이 항아리 속으로 떨어지는 은은한 소리였다. 유가가 그 소리를 집중해서 들었다. 자신이 환청을 들은 게 아니라는 게 확실해지자 입꼬리가 활짝 올라갔다.
“금성, 내가 아무래도 이 비경의 비밀을 알게 된 것 같다.”
유가가 거대한 석검 아래 서서 두 손으로 빠르게 결인을 치자 혼돈 대진이 발아래에 모습을 드러냈다. 금색의 진형도에서 짙은 혼돈의 힘이 뿜어져 나왔고 대진의 공기가 순식간에 팽팽해졌다.
“금성, 마사들을 부르고 너도 네 자리에 가서 서라.”
십여 명의 사람들이 그의 지시에 따라 만반의 준비를 했다. 그들의 얼굴엔 의심과 긴장감이 가득했다.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진다고 해도 모두 마음을 다잡아라. 내가 반드시 구해줄 것이다.”
“알겠습니다. 존주.”
“존주, 저희 조심할 테니 걱정 마세요.”
확실한 대답을 듣고 나서 유가는 대진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잠시 후, 금색의 밧줄이 다시금 그들의 다리를 속박했고, 금색의 시곗바늘이 나타났다. 유가가 비수를 꺼내어 송기연 때문에 여러 번 다쳤던 어깨를 그었다. 선명한 핏방울이 떨어지며 혼돈진형도의 금빛이 다시 거대해졌다.
모두의 귓가에 ‘쿵쿵’ 하는 소리가 점점 선명해졌고 마치 귓가에 있는 것처럼 확실히 이상했다.
유가가 몸을 숙여 한 손으로 시곗바늘을 원하는 방향으로 살짝 움직였다.
쾅——!
그의 행동에 주위 환경이 갑자기 급변했다!
이렇게 유가는 다시 천 년 후로, 현세 ‘유가’와 ‘송기연’의 시간으로 돌아왔다!
영혼은 어느 정도 충격을 받았지만 심각하지 않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회복된 마사들도 놀란 듯 눈앞에 펼쳐진 장면을 바라보았다.
”존주, 다시 돌아온 겁니까?”
소오의 눈이 커졌다.
“윽, 또 시체야.”
보고 싶지 않던 소십이는 다시 소십의 품으로 숨었다.
“존주, 보아하니 혼돈진형도가 정말 시간을 통제할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렇다면, 송기연도 충분히…….”
“확실치 않다.”
고금성의 말을 끊은 유가는 속으로 앞으로 어떻게 할지 생각했다.
“금성, 아무래도 이 비경에 숨겨진 비밀은 바로 여러 시간의 단층이 섞였다는 것 같구나. 이 비경과 전에 기연과 갔었던 비경이 연결되어 있다. 다만 하나는 앞면 하나는 뒷면이지.
우리가 들어온 입구 호수가 정면, 나와 기연이 예전에 봤던 입구는 뒷면이었다. 이 대전의 한 가지 통로는 정면, 우리가 봤던 열두 가지 통로가 뒷면이지.
단층이고 시공간의 분할은 약하기 때문에 뒷면에 있던 대전에서 우리가 물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들어갔던 천지(天地)에서 전복된 공간을 봤었던 것처럼 여기 비경엔 두 가지 시간을 넘나들 수 있는 곳이 존재한다. 하나는 대전, 다른 하나는 그 천지.”
천연문 사람이 한 곳의 천지에서만 튀어나왔던 이유이기도 했다.
고금성이 생각을 정리한 후 비로소 물었다.
“존주. 그렇다면 저희가 이 약한 두 곳의 시공간 단층을 이용해서 시간을 뛰어넘는다면, 송기연은 사라지지 않는 걸까요? “
유가가 눈썹을 치켜 올리며 물었다.
“넌 그 녀석을 싫어하지 않느냐? 왜 갑자기 그 녀석에게 관심을 주는 것이냐?”
사실 유가는 고금성이 마음의 응어리를 풀길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한 사람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자신의 유능하고 귀한 수하였다. 두 사람이 계속 대립하는 건 좋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고금성의 모습을 보니 괜히 놀리고 싶었다.
“그 자식이 있어야 존주께서 기뻐하시니깐요.”
유가가 눈을 깜빡이며 얼굴을 어루만졌다.
“내가 그리도 티 나게 얼굴이 굳었단 말이냐?”
완전히요.
“그가 사라진 건 필연적인 것이다.”
유가는 고금성이 좀 전에 했던 질문에 답을 했다.
“방금 우리가 천 년 후로 돌아왔을 때, 소십이를 제외한 너와 다른 마사들이 존재할 수 없다는 걸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너희는 아무 일도 없었다.
역사를 바꾼 책임은 모두 그 녀석 혼자 지고 있다. 그가 모두의 인과를 책임졌다.”
유가는 마음이 조금 편치 않았지만 금방 다시 마음을 다잡고 말했다.
“우리가 비경에 온 목적은 내가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으러 온 것이다. 이제 찾았으니 그만 돌아가야겠다.”
“존주, 그 녀석을 못 찾으셨잖아요?”
고금성은 유가가 왜 송기연을 포기하는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찾을 것이다. 반드시.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유가가 의식적으로 옥비녀를 만지작거렸다.
“가자. 그 꼬마 녀석이 아직 야야의 연회에 나와 가려고 기다리고 있을 테니.”
* * *
유가는 다시 돌아왔다고 생각했다. 세상은 분명 이미 바뀌어 있었다.
천 년 전, 송기연의 전생을 보려고 들어간 회세정은, 훨씬 많은 시간을 지나 ‘안소선’의 처음 시작으로 유가를 데려갔다. 그리고 어린 안소선이 겨우 300살 남짓이 되었고, 1000년 후 신전(神戰)이 일어났을 시대를 지나, 다시 1000년 ‘유가’가 있고 ‘송기연’ 이 태어난 현재로 돌아왔다.
천 년, 또 천 년. 이천 년을 뛰어넘었다.
이런 아득한 역사를 바꾼 후 맞닥뜨려야 하는 인과가 얼마나 될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유가는 이미 마음의 준비를 잘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눈앞의 광경은 예상을 완전히 벗어났다.
“존주,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죠?”
고금성의 목소리가 식해 속에서 전해졌다.
유가는 정신을 차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시간을 건널 때 열두 마사를 식해에 담아 놓아서 다행이었다. 이런 변고에 간신히 찾은 열두 마사가 다시 상처를 입었다면, 스스로가 미워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나도 모르겠구나.”
유가는 부드러운 이불 위에 애벌레처럼 꽁꽁 묶여서 대답했다.
혼돈의 힘으로 이 밧줄을 끊어보려 했지만, 시간을 건너면서 너무 많은 힘을 소진했다. 아무리 용을 써도 밧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이 재질만 봐도 상금 법기인 게 틀림없었다. 아무래도 자신을 묶은 사람의 씀씀이가 컸다.
유가는 한숨을 푹 내쉬고 애벌레같은 자세에서 돌려 누워 꼭대기에 그려진 문양을 바라봤다.
엎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그가 실력을 회복하고 나면 누구도 그를 묶어둘 수 없을 것이다.
“깨어났어?”
문밖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가 호위에게 물은 듯했다.
“장문인께 아룁니다. 제자, 방금 말소리를 들었습니다. 깨어난 것 같습니다.”
응? 이렇게 속삭인 소리를 다 들었다고?
그리고 물어온 목소리가 너무 익숙했다.
끼익-
문이 열리고 유가가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눈꼬리를 세우며 방문자를 힐끗 쳐다봤다. 하지만 그를 보자마자 눈을 번쩍 뜨고 소리를 질렀다.
“송기연?!”
그는 은관을 깔끔하게 쓰고, 먼지 한 톨 묻지 않은 백색 장포를 입고, 허리엔 은색 구름 문양이 새겨진 띠를 두른 채 들어왔다.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는 하얀 신발에 유가는 격세지감을 느꼈다.
만약 지금 또 자신이 그 더러운 수옥에서 벽에 묶인 채 이렇게 그를 맞닦트렸다면, 죽기 전으로 돌아간 줄 알았을 것이다.
뒤로 역광을 흩뿌리며 들어온 송기연의 얼굴엔 옅은 흉터가 남아 있었다.
유가는 꼭 한 마디를 하고 싶었다.
“좋다.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보아라.“
무슨 ‘내 가문을 멸하고, 내 경맥을 끊고, 손발을 자르고 어쩌고…….’ 맘껏 읊어 보아라. 유가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송기연은 햇빛이 내리쬐듯 활짝 웃으며 유가의 곁으로 한달음에 달려왔다. 그리고 침상 옆에 앉으며 말했다.
“사랑하는 사람 드디어 깨어났군요?”
어?
이 자식 다른 책 주인공인가.
‘존주, 이게 뭡니까?’
‘나도 모르겠구나.’
유가가 눈을 깜빡이며 다시 소리를 쳤다.
“송기연?!”
“응?”
“내가 누군지 아느냐?”
“알죠. 제가 사랑하는 분이죠.”
“내 이름은 아느냐?”
“모릅니다. 하지만 이제 깨어나셨으니 직접 알려주시면 됩니다.”
“내 이름도 모르면서 어째서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이냐? 게다가……,”
유가가 등 뒤로 묶인 두 손을 끙끙 보여 주며 물었다.
“날 왜 묶어둔 거지?”
침상 옆에 앉아 있던 이는 분명히 웃고 있으나 얼굴을 새까맣게 굳혔다 다시 웃었다.
“잊으셨습니까? 제게 직접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알려 주셨잖아요. 그러더니 갑자기 사라지셔서 오랜 시간이 흘러서야 나타나셨습니다. 이러는 것도 당연한 겁니다.”
“송가는 아직 있느냐?”
유가가 송기연의 눈에 번쩍이던 음침함을 놓치지 않고 질문했다.
“송가? 송가라뇨?”
음? 송가가 없으면 넌 어디서 태어난 거냐? 유가가 살짝 눈을 깜빡이며 계속 질문했다.
“그럼 송기연이라는 이름은 누가 지어 준 것이냐?”
“당신께서 지어 주셨잖아요.”
청년이 귀엽게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이천 년 전에 능운파 앞에서 절 송기연이라고 부르셨습니다. 게다가 제가 장문인을 죽였다는 누명을 벗겨 주신다며 무주지로 가셨죠. 그런데 그대로 아무 말도 없이 사라지시지 않았습니까. 그리곤 이제야 이천 년 만에 나타나셨습니다.”
송기연의 목소리는 당연한 듯 차분했다. 하지만 유가는 마음속에 폭풍이라도 부는 듯 파도가 일었다.
이렇게나 변했다고!
유가와 열두 마사는 무주지 비경에서 천 년 후, 그리고 또 천 년 후 현재로 넘어왔다. 아무래도 그 이천 년간의 역사가 이렇게 사라진 것 같았다. 가야 할 신계도 가지 않고, 일어나야 할 신전(神戰)도 없었고, 죽지 않았으니 송기연도 환생하지 않았고, 송가도 멸하지 않았다.
모든 게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와 아구, 왕다국, 야야. 능광, 청요 같은 사람들과의 관계는 이렇게 끊어지고 만 걸까?
야야의 연회에 참여한다는 말도 지금은 다 헛소리가 되고 말았다.
깊은 생각에 빠져있던 유가는 앞에 있는 사람의 표정 변화를 감지하지 못했다.
송기연이 유가의 턱을 잡고 억지로 고개를 돌리자, 그제야 송기연과 시선을 마주쳤다. 그리고 조금 전 그 대화에서 뭔가 세세한 부분을 놓쳤다는 걸 깨달았다.
“이천 년 동안 어딜 갔다가 온 겁니까?”
위선의 가면을 벗어던진 청년의 검은 눈동자가 붉게 변했다.
유가는 멈칫했다. 싸늘하게 변한 태도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유가는 이렇게 누군가에게 통제되는 상태를 싫어했고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혼돈의 힘으로 손목의 밧줄을 감싸고 천천히 상품(上品) 법기를 부식시키기 시작했다.
유가는 자신의 실력과 혼돈의 힘에 자부심이 있다. 그래서 지금 이 곤경만 빠져나가고, 회복만 한다면 다시 이 녀석의 우위에 오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자보다 나이도 많았고, 오랜 세월 송기연과는 늘 대치하던 관계였다. 그 때문에 그는 지금 한 가지 문제를 간과하고 있었다.
만약 송기연의 실력이 유가보다 높다면, 유가는 지금까지처럼 송기연을 휘두르며 자유로이 행동할 수 있을까? 정답은 송기연에게 예전 사존을 공경했던 기억이 있다면 가능했다. 하지만 지금 위험한 건 송기연이 기억을 못한다는 거다.
이천 년 전 송기연은 이미 대승기의 수련 경지였는데, 이천 년 후인 지금 그의 수련은 어느 경지일까? 삼백 년 동안 대승기를 수련한 데다 더하면, 그럼 도합이 이천삼백 년인가?
“소용없습니다.”
송기연이 침착하게 말했다.
“박신삭(縛神索)은 창결검만큼 유명한 신기입니다. 창결검을 부러뜨릴 힘을 가진 게 아니라면 이 밧줄은 영원히 풀 수 없습니다.”
청년은 유가의 턱을 잡고 있던 손을 떼고 그대로 유가의 가슴팍에 손을 올렸다. 별 힘을 주지 않았지만, 순간 옷이 찢기는 소리가 나며 걸치고 있던 옷이 산산조각 났다. 팔랑거리는 옷감 아래 유가의 새하얀 피부와 탄탄하고 매끄러운 가슴과 분홍색으로 예쁘게 색이 오른 붉은 앵두 두 개가 모습을 드러냈다.
“!!!”
유가의 경악하는 표정에 만족한 듯 송기연이 웃으며 물었다.
“이천 년 동안 어디 계셨습니까?”
“어, 어디 안 갔다.”
이 말은 정말! 진짜였다. 그는 시간을 뛰어넘어 그대로 이천 년을 건너왔고, 곧바로 왔단 말이다. 아는 사람을 정말 유가를 탓할 수 없었다.
하지만 청년이 눈을 흘겼고, 손바닥을 다시 올리자 또다시 옷이 파지직 찢겨나갔다. 유가의 단단하지만 고운 어깨선과 잘 다져졌으면서도 낭창한 허리선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
‘존주! 제가 저 자식을 죽이겠습니다!’
유가의 속에서 고금성이 분노했다. 그가 송기연을 혼내 주려 나오려 했으나, 귀신같이 빠르게 봉인 당해 그대로 그 안에 갇히고 말았다.
유가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네가 뭘 알겠느냐. 이건 사랑하는 두 사람만의 취향이다. 소리 내지 말고 가만히 있어라.”
고금성의 실력으로는 송기연을 이길 수 없다. 만일 그가 튀어나와 이 녀석을 건드린다면 그의 혼마저 위험할 것이다.
이 지경이 되니 그는 확실히 알게 되었다. 송기연은 이미 그때의 그 녀석이 아니다. 이천 년 동안의 수련으로 이자의 수련 경지는 이미 무서운 지경에 이르렀다.
다만 지금 이 자의 진짜 실력을 가늠할 수 없었으나, 절대로 확실히 심상치 않았다.
후방에서 든든하게 지원하던 사람이 상대편이 되니 유가는 골치가 아팠다.
“넌 왜 올라가지 않은 것이냐?”
그는 괜히 다른 말로 화제를 돌렸다.
송기연의 수련 경지라면 이곳에 머물 수 없고 진작에 신계로 올라가야 했다.
천도는 실력이 충분한 자들이 허공을 깨고 신계로 올라오게 했고, 특수 상황이 아닌 이상 하계해서는 안 된다는 규칙을 세워서 신계를 일제히 관리했다.
송기연은 이미 요건이 충족되었을 것이고, 가기 싫어도 가야 했을 텐데 어째서 아직도 이곳에 있는 것일까?
설마 이것도 역사가 바뀐 결과인가? 천도 쪽에도 어떤 변고가 발생한 건가?
“신계에 갔었지만, 보름 만에 다시 돌아왔습니다.”
송기연은 꼭 신계가 아무 때나 갈 수 있다는 듯 간단하게 말했다.
“어떻게?”
마음이 복잡해진 유가가 바로 반박했다.
천도의 규칙마저 깨뜨렸다면, 송기연은 이미 천도를 능가할 실력을 가진 걸까?
“당신께선 ‘어떻게’가 아니라 ‘왜 보름 만에 내려온 것이냐’라고 질문하셨어야 합니다.”
청년이 웃으며 그의 질문을 바로잡았다. 그 웃음이 너무도 해맑고 즐거워 보여 유가는 어쩐지 소름이 돋았다.
“왜?”
유가는 민첩하게 몸을 움직여 이불 안쪽으로 숨으려 했다. 하지만 송기연이 그럴 틈도 없이 이불을 들춰버리고, 그를 일으켜 벽으로 몰아붙였다.
두 사람의 이마와 눈빛과 코가 거의 맞닿고 서로의 호흡이 교차했다. 송기연은 유가의 콧등을 간질이듯 한 번 닿았다가, 이내 한숨을 푹 쉬고 답했다.
“신계에 당신이 없었거든요.”
!!
시각과 청각이 봉쇄된 열두 마사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아무것도 들을 수 없었다. 식구들의 감각을 봉쇄한 유가가 난감한 듯 웃었다.
“그리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구나.”
이제야 두 사람의 이야기를 꺼내고 터놓았다. 그러고 보니 유가 자신이 너무 비인간적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전의 삼백 년, 지금의 이천 년. 자신에겐 그저 시간을 건너뛰는 시간여행일 뿐이었지만 송기연에겐 착실히 살아온 세월이다.
두 사람이 서로를 알게 된 이후 이 녀석은 늘 수동적인 위치에 있었다. 늘 유가가 자신을 찾기를, 돌아오길, 진실을 말해 주길 기다렸고, 자신이 약속을 지키기만 기다렸다.
잠깐만!
유가가 갑자기 고개를 들고 송기연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이천 년 동안 다른 사람을 좋아하지는 않았느냐?”
전에 송기연이 감정이 없었을 때는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천 년 전에 자신이 직접 송기연에게 감정을 넣어 주었고 이만큼이나 지났다. 이자가 금욕을 하지 않는 이상 어떻게 새로운 사람이 없었을까?!
질문을 들은 송기연은 멈칫했다. 음침하고 어두운 낯빛이 점점 옅어지더니 곧 웃음을 터뜨렸다. 송기연은 벽 앞에 있는 사람을 한숨에 끌어안고, 머리를 그자의 어깨에 파묻었다. 체취를 들이켜듯 한번 크게 들이마셨다가 어깨에 뺨을 부비면서 말했다.
“없었습니다. 오직 당신밖에 없습니다.”
“당신이라고 하지 말고 사존이라고 하라.”
유가가 그의 호칭을 바로잡았다.
“알겠습니다.”
마음이 편안해진 송기연이 다시 말했다.
“사존 말고 다른 사람을 좋아했던 적은 없습니다.”
이 말을 들은 유가는 우습게도 마음이 한결 나아졌고, 바로 명령했다.
“알겠다. 이제 할 말이 다 끝났으니 그만 이 속박을 풀어라.”
“싫습니다.”
“!!”
“아직 하고픈 말이 남았습니다.”
어깨에 기대있는 사람이 계속 말을 했다.
“그날 당신이 간 후로 한 달 동안 아무런 소식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능운파의 제자들은 많은 수진자와 결탁하여 제 거처를 포위한 채, 도의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절 사지로 몰아넣었습니다.”
송기연은 담담하게 그때의 일을 털어놓았다.
“제가 어떻게 했을지 아십니까?”
유가가 미간을 찌푸리며 예상해 봤다.
“그들을 죽였느냐?”
“아니요.”
그가 부정하자 유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전에 사존께서 제게 사람을 죽이지 말라고 하신 말씀이 기억이 나서 참았습니다.
그들에게 사존께서 내가 무고하다는 증거를 가지고 반드시 돌아올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괜히 찔린 유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절 가두고 사존께서 돌아오시면 풀어 주라고 했습니다.”
“그리 말했단 말이냐?!”`
“네, 그리 했습니다.”
송기연이 유가의 귀밑머리를 어루만졌다.
“왜냐면 그땐 사존께서 돌아오실 거라고 믿었거든요.”
마음이 아파오자 유가는 이 얘기를 어떻게 계속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송기연에게 포박을 당해 분노했던 기분이 이미 다 누그러졌고, 오히려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당신을 기다리지 못했습니다.”
얘기가 계속될수록 분위기가 다소 무거워졌다.
“시간이 길어지자 그들은 절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래도 대승기 수진자를 멸하긴 쉽지 않았죠. 수련 경지가 저보다 강한 자도 몇 없었고요. 그래서 사존, 이후에 제가 어찌 되었는지 아십니까?”
질문하는 말투는 담담했지만 질문을 당한 사람은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벼락을 맞고 메마른 나무처럼 목구멍이 답답했다.
유가는 처음으로 이자 앞에서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마음속 죄책감에 숨도 가팠고 슬픔이 금방이라도 넘어오려 했다.
한참이 지나도 대답이 없었으나 송기연은 화내지 않고 그대로 말을 이어나갔다.
“스승을 배반한 죄로 그들은 제 수련 경지를 폐했습니다. 그리고 절 능운파 산문에 삼 일간 매달아 놓고 가시나무 채찍으로 서른여섯 번 채찍질을 했습니다.”
청년이 품 안에 사람을 꼭 끌어안고 말했다.
“사존, 그거 아세요? 가시나무 채찍 서른여섯 번은 엄청 아프답니다.”
“후에, 그 후에 넌 어찌 되었느냐?”
송기연의 어깨에 턱을 올린 유가의 눈에서 눈물이 툭툭 떨어졌다.
그는 송기연이 어떻게 버텼는지 상상 하지 못했다. 자신이 약속을 지키지 않아 문파 제자들에게 그렇게 무정하고 냉혹하게 모욕을 당했다. 그 충격이 계속 중첩되었을 텐데, 만약 자신이 이 아이였다면 아마 이미 정신을 놓았을 것이다.
“아버지께서 절 구해 주셨습니다.”
송기연이 계속 말했다.
“제가 어렸을 때 하인 하나가 안 왕부 후원 진흙 속에서 윤회과를 주웠었어요. 후에 아버지께서 계속 그걸 보관해 두셨고요. 그때 제 상처에 사용하셨습니다.”
윤회과? 자신이 버렸던 그거?
“생각해보니 참 운이 좋았습니다. 그런 고문에도 죽지 않다니.”
청년이 웃었다.
“그때 제가 이렇게 살아나, 사존을 다시 만난다면 어째서 약속을 지키지 않으신 건지 꼭 묻고 싶었습니다. 그 집념 때문에 그만 심마가 생기고 말았죠.”
검붉은 눈동자에 빛이 반짝였다. 깜짝 놀란 유가는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저는 심마로 다시 입도하였습니다. 집념이 강할수록 실력이 강해졌죠. 불과 이백 년 만에 다시 예전 실력을 되찾았습니다. 실력이 회복되고 제가 맨 처음 한 일은 복수가 아니라 사존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전 제가 갈 수 있는 모든 곳을 가서 사존을 찾았지만 찾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사존께서 이미 신계에 오르지 않았나, 하고 생각했었죠. 그래서 사존을 찾으려 신계로 갔습니다만, 여전히 찾을 수 없었어요. 마지막엔 그저 이곳에서 사존께서 나타나길 기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청년의 말투가 한순간에 돌변했다.
“오늘에서야 사존을 찾을 수 있었는데, 지난 이천 년 동안의 행적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으시네요.”
송기연은 끌어안았던 유가를 가볍게 놓아 주었고 그의 머리에 있는 옥비녀을 살짝 잡아당겼다. 검은 머리가 촤르륵 풀리며 눈물 젖은 눈으로 힘도 풀린 유가를 살짝 밀자, 미인은 풀썩 이불 위로 쓰러졌다.
순식간에 머리카락이 흐트러지고 상체가 훤히 드러난 유가의 몸이 송기연 앞에 눕혔다. 처연한 애욕이 한껏 풍겨왔다.
“사존, 이천 년의 기다림을 헛되이 할 수 없습니다. 영원히 납득하지 못할 것이고, 이 빚은 영원히 청산하지 못할 겁니다.”
맞다. 그가 이 녀석을 스쳐 지나간 건 순간이었지만, 이자는 이천 년, 이만사천 개월, 칠만삼천 일을 꼬박 기다린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니까 길어도 너무 길잖아!
“심마로 다시 입도했다고?”
유가는 지금 두 사람의 자세가 많이 위험하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해야 할 질문을 그냥 넘길 수 없었다.
그는 대담한 생각을 하는 중이다.
송기연이 수련 경지가 폐했었다면 그 말인즉, 다시 《천진결》의 통제를 받지 않았다는 말이다. 게다가 심마로 입도를 했다면 그는 이미 자신만의 수련 방법을 찾았다는 의미였다. 심마와 강력한 집념은 분명히 복병이 되겠지만, 어쨌든 천도의 통제에선 벗어날 수 있었다.
게다가 지금 송기연은 이미 천도를 능가하는 실력을 가졌다.
설마 이게 역사를 바꾼 후 천도가 자신에게 심어둔 화근일까?
“지금 그런 얘길 하고 있을 때라고 생각하십니까?”
청년이 양손으로 유가의 두 어깨를 감싸더니 몸을 숙여 그의 얼굴에 입을 맞추었다.
“사존께선 절 이천 년이나 기다리게 한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그렇다. 당연히 그래야지.”
남은 질문들을 포기한 유가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분위기가 순식간에 어색해졌다.
몸 아래 누워있는 사람이 겁이나 반항심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진지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송기연은 그만 웃음이 터져 나왔다. 기분 좋게 웃음을 터트린 그는 그대로 유가의 몸 위로 쓰러져, 그의 어깨에 고개를 파묻고 끅끅거리며 웃었다.
“네 벌이 날 눌러 죽이는 것이냐?”
유가가 그를 놀렸다.
“당연히 아닙니다.”
충분히 웃은 송기연은 고개를 돌려 유가의 귓불을 깨물고 핥기 시작했다.
“사존, 당신과 사랑을 나누고 싶습니다.”
“네가 할 것이냐, 아니면 내가 이끌어야 하느냐?”
유가가 그를 따라 웃었다.
송기연이 한 말의 뜻을 알아들었지만, 그래도 그와 더 얘기를 하고 싶었다.
그는 사실 지금 이 분위기가 너무 좋았다. 그저 서로 오해만 있을 뿐 아무런 원한관계는 없는, 연인 사이의 흔한 투닥거림. 묶인 손목도 취향으로 셈할 수 있었다.
생각해보니 꽤 낭만적이었다.
“두 사람이 함께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송기연의 예상과 다르게 유가가 먼저 다가왔다. 몸이 묶인 부자유스런 자세였지만 먼저 송기연의 입술을 맞추고 웃으며 말했다.
“이런 것 말이냐?”
짤막했지만 강한 입맞춤에 상대는 그대로 정신이 나갔다. 잘생긴 얼굴이 눈만 깜빡거렸다. 그리고 마음속에 꾹꾹 눌러 담아 어쩔 줄 모르던 감정이 유가의 입맞춤에 그만 고삐가 풀리고 말았다.
검붉은 눈동자에 빛이 반짝였다. 송기연이 천천히 몸을 들어 진지하게 유가를 바라보더니 다시 그대로 진하게 입을 맞춰 왔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는 더 많은 걸 원했고,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욕구에 그의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그는 이 사람을 깊이 사랑했다.
예전 기억이 없어 그가 왜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는지, 왜 이 사람에게 이렇게 집착하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자를 향한 자신의 마음은 이미 걷잡을 수 없을 만큼 강해졌다.
아마도 그가 살아있는 건 이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인 것 같다. 이천 년이라는 시간을 기다릴만한 사람.
유가는 눈을 감고 혀를 움직여 송기연에게 응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여기에 오기까지 참 쉽지 않은 시간이었다.
송가, 신전, 마족, 천도, 열두 마사가 두 사람 사이에 가로 놓여, 두 사람은 꼭 살얼음을 걷는 관계였고, 두 사람의 마음속엔 넘을 수 없는 그 고개가 늘 자리했다. 이제 그 모든 걸 겪고 결말을 맺었다. 두 사람 사이에 가로 놓였던 그 수많은 사람과 일은 더 이상 성립되지 않았다.
몸과 마음이 그동안 옥죄어온 옥쇄에서 벗어난 듯 처음으로 홀가분해졌다.
송기연은 거침없이 입을 맞대오며 몸 아래 사람의 혀를 가지고 놀았다. 미친 듯 안을 쓸고 물고 빨면서도 섬세하게 유가의 입안을 간질이고 그의 혀 밑을 어루만졌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서로의 혀가 어우러졌다. 투명한 침이 신음과 열기와 함께 입가를 타고 흐르며 음탕한 흔적을 남겼다.
유가가 손을 움직이려 했으나 여전히 손목이 고정당해 있었다. 그는 입맞춤 와중에 고개를 돌려 입술을 떼버리고 말했다.
“손목에 밧줄을 풀어라.”
“싫습니다.”
항의를 해도 소용이 없었다.
송기연은 그의 말을 들어주지 않고 급하게 그의 얼굴과 머리를 감싸며 입 안을 압박해왔다. 혀끝을 공격적으로 들이밀며 정신없이 안을 휘저었고, 그의 입안 공기마저 아까운 듯 휘감았다가 다시 밀어 넣었다. 눈뜰 틈도 주지 않는 입맞춤에 유가는 정신이 몽롱했고 희뿌연 눈앞에 안개가 피어올랐다.
“읍! 이러면, 내가, 으음!”
항의하는 소리가 다시 입 사이로 먹혔고, 송기연은 그를 풀어 주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만큼 단호했다. 두 사람의 호흡에 침실의 온도도 열꽃이 핀 듯 달아올랐다. 청년은 요령 좋게 침상의 휘장을 내려버리고 더욱 유가를 꼼짝없이 제 품에 가두었다.
남자의 크고 마디가 굵은 손이 유가의 드러난 가슴을 거칠고도 섬세하게 쓰다듬었다. 뜨거운 체온이 미끄러지듯 유가의 목과 어깨 가슴을 만져대자 몸이 움찔거렸지만, 훈련으로 거칠어진 손바닥은 묘한 아찔함을 전했다. 커다란 손이 그렇게 피부를 끈적하게 만져댔고 이윽고 돌출된 오른쪽 유두를 꾹 찍어 눌렀다.
“흐응!”
유가는 눈을 질끈 감으며 허리를 비틀었다. 하지만 송기연의 손이 끊임없이 분홍빛 꼭지를 잡았다가 비틀고 원을 그리기를 반복했다, 거침없는 손놀림에 유가는 겁이 났다. 집요하게 괴롭히는 그 손짓에 온몸을 간질이는 쾌감이 무서웠다.
유가의 드러난 상체는 탄탄하고 근육이 도드라졌으며 흰 피부는 매끄럽고 탄력이 있었다. 송기연은 손을 떼지 않은 채 그대로 허리선을 타고 내려가 남아 있는 천을 모조리 조각냈다. 이제 그의 아래 누운 사람은 그를 가릴 천 조각 하나도 남기지 못하고 그 나신을 드러내야 했다.
송기연은 만족스러운 듯 웃으며 다시 입을 맞추고 턱과 목젖, 쇄골, 새하얀 어깨로 따라 내려갔다.
“기연, 풀어 다오, 네가 날 이렇게 묶고 있으면 내가 어찌 너에게 응하겠느냐?”
호흡이 안정되지 않은 이는 계속 벗어날 기회만 찾았다.
“조급해 마십시오.”
청년은 하얀 어깨에 입술을 파묻고 눈만 살짝 들어 보였다. 그리곤 입술을 비틀다 아래로 내려가 이미 붉어진 작은 젖꼭지를 살짝 깨물었다.
“아흥!”
민감한 곳이 물리자 어깨가 말리고 발가락이 움츠러들었다. 얼굴도 순간 확 타올랐다. 따뜻하고 촉촉한 혀가 젖꼭지를 감쌌고 그 주위를 빙빙 맴돌았다. 손가락과는 다른 촉감과 습기에 한결 더 뱃속이 뜨거웠다. 유가가 아랫입술을 깨물고 소리를 참으려 했으나 앓는 듯한 소리가 목구멍에서 계속 새어 나왔다.
“사존, 참지 마십시오, 당신의 소리를 듣고 싶습니다.”
청년은 밉살스럽게도 가슴을 거의 잡아먹을 듯 빨아대며 손을 아래고 가저가 다리 사이에서 이미 단단해진 분신을 잡아 쥐었다.
“하윽-!
크고 뜨거운 손이었다. 몸을 쓰다듬을 때부터 알았던. 완전한 사내의 손이 그렇게 유가를 잡고 아래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으, 하……으! 응!“
뒤로 손이 묶인 유가는 직접적으로 가해지는 쾌감에 온몸을 움츠렸고, 남자의 분신에서는 사랑을 나누기 위한 애액이 먼저 나와 송기연의 손바닥에 묻어났다. 애액 덕분에 송기연이 더 수월하게 딱딱한 제 사존의 분신을 몰아붙이자 찌걱찌걱하는 질척한 소리가 더 음탕하게 울려 퍼졌다.
“윽, 하윽! 으, 앗, 아!”
유가의 눈이 붉어지며 더는 신음을 참지 못하고 사내에 손에 몸을 맡겼다. 허리를 비틀고 무릎이 튀었다. 속으로 송기연이 더 빨리 해주길 바라고 있었지만 지금 묶여서 차마 입을 떼지 못해 수치 때문에 몸만 더 붉어졌다. 마치 흐드러지게 핀 봉황꽃같아 송기연은 아찔함에 작게 숨을 삼켰다.
하지만 유가의 신음에 만족하지 않은 송기연이 유두에서 입을 떼고 모로 누워 유가를 등 뒤에서 안았다. 한 손으론 유가의 분신을 계속 자극하며 다른 손으론 유가의 입을 벌리고 축축한 혀를 눌러댔다.
“아! 으, 기, 기여, 아아!”
송기연의 품에 꼼짝 못 하게 갇혀 저 아래 노골적인 자극과 이렇게 혀를 누르자 유가의 몸이 한층 튀었다. 기연의 손가락이 축축하게 젖었고 턱과 이불로 침이 전부 질질 흘렀다. 그럼에도 송기연은 자비가 없었고, 유가는 이런 게 정말 처음이라 정말 벗어나고 싶었다.
“흑, 허엉, 흐, 기, 기여……!”
“절 왜 부르십니까?”
송기연이 그의 목덜미에 입술을 대고 붉은 자국이 생기도록 빨았다.
“제가 더 빨리하길 바라십니까.”
송기연이 낮은 짐승 소리처럼 속삭이며 유가의 애액이 잔뜩 묻은 끈적이는 손을 움직였다. 좀 더 유가의 나신을 끌어안으며 커다란 손이 살집 있는 엉덩이를 벌리고 다물린 주름 사이를 매만졌다. 그리고 긴장해서 수축한 주름에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윽! 아니, 자까만……!”
정신이 번쩍 든 유가가 몸을 한차례 떨었다.
봉황나무 아래에서 송기연에게 참혹하게 범해졌던 아픔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는 수천 년을 살며 수없이 다쳐보고 피도 흘려봤지만, 단 한 번 겪어본 몸이 관통당하는 느낌은 맨정신으로 견디기 힘들었다.
“괜찮습니다.”
송기연이 부드럽게 말했다. 그리고 그의 하얀 등을 따라 차례로 입을 맞추어 유가를 진정시켰다. 하지만 그의 손은 멈추지 않고 부드럽게 안을 눌러가며 미끄러운 애액을 타고 더 깊이 들어갔다.
“흐으……!”
송기연은 조심스럽게 손을 놀려가며 좁아서 너무 뜨겁고 함부로 움직일 수 없는 여린 살들을 눌러댔다. 손가락 하나만으로 빠듯해 보이는 주름을 가르며 긴 손가락이 나왔다 들어갔다 했고, 손가락 하나가 다 들어가자 큰 손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안 깊은 곳을 더듬었다.
송기연의 곧고 마디가 굵은 손에 여린 내벽이 닿는 대로 경련했고 유가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더는 말이 없었다. 그러던 중 손가락이 유가의 안쪽 어딘가 탄탄한 곳을 누르자 유가가 눈을 번쩍 뜨며 허리를 튕겼다. 단 한 번의 자극만으로 발가락까지 경련이 일며 몸을 덜덜 떨었다.
“사존, 편해지셨죠?”
송기연은 만족스러운 듯 활짝 웃으며 유가의 귓가에 다가갔다. 야릇한 목소리로 귓바퀴를 더욱 쓸었다.
“하아, 하아. ……닥쳐라.”
정신이 돌아온 유가가 욕을 한 마디 퍼부었다.
경험이 절대 적다고 할 수 없는 유가는 당연히 송기연이 자신의 성감대를 찾았다는 걸 알아차렸다.
“후후.”
욕을 얻어먹어도 송기연은 여전히 웃었고, 가장 긴 중지를 그곳까지 찔러넣었다가 빙글 돌려 그 옆까지를 집중적으로 자극했다.
“으아!”
손가락은 그곳만을 찔러댔다. 조심스럽던 아까와는 달리 속도를 높이며 공격적으로 유가의 감각을 괴롭혔고, 손가락 개수를 늘려 안을 넓혀 갔다. 이물질이 점점 거북해졌지만, 통증이 올 만하면 다시 성감대를 찌르고 꾹꾹 눌러대고 또 손가락 하나가 더 늘어나는 통에 정신이 없었다.
뱃속에서 흐르는 전류가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것 같았다. 그것도 빠르고 컸다가 부드러웠다가 살살달래고 또 번뜩여 유가의 의식을 마비시켜갔다.
“하아, 하, 으으윽, 으응!”
손목이 결박된 탓에 신음을 막을 수 없었고 긴 머리카락은 처연히도 흐드러졌다. 송기연은 손가락만으로 유가의 몸을 이토록이나 달아오르게 했다. 축축하게 젖은 눈과 쾌감에 잠식당한 몸에 도화꽃 향기가 피어올랐고 붉은 꽃잎들이 몸 곳곳에 활짝 피었다. 송기연 역시 미향에라도 취한 것처럼 눈앞이 어질했다. 후각과 시각이, 청각과 이성마저 마비될 듯 숨이 거칠어졌다.
유가의 아래 구멍은 붉은 속살이 송기연의 손가락 세 개를 집어삼키고 열리며 마치 꿀을 가득 품은 꽃송이처럼 개화했다. 곧 그 꿀을 모조리 강탈당할 꽃처럼.
길고 단단한 손가락이 주륵 빠져나오자, 단단하게 다물렸던 구멍에서 끈적한 애액이 길게 늘어지고 끊어졌다. 새빨갛게 오므린 내벽이 간헐적으로 움찔거렸고 송기연은 만족스러운 듯 웃으며 제 옷을 거칠게 모조리 벗어 던졌다.
장성한 사내의 단단하고 미끄러운 근육들이 휘장 아래 은은하게 빛나며, 송기연은 유가의 땀으로 젖은 하얀 등을 끌어안았다. 그가 사존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사존, 넣어도 될까요?”
이미 송기연의 손길에, 쾌감에, 그의 아찔한 육체에 이성이 마비된 유가는 귓속까지 자극하는 그의 목소리에 아무 생각 없이 나오는 대로 대답했다.
“마음대로.”
맘껏 이리저리 찔러지고 이미 수축한 구멍은 허전함을 느끼기 전에 다시 묵직한 무게감이 와 닿았다. 분홍빛 여린 입구가 부드럽게 열리기도 전에 유가는 동공이 수축하며 그만 실성할 듯 소리를 지를 뻔했다.
“흐아……학!”
꽤 오랫동안 전희를 공들였으나, 손가락과는 차원이 다른 질량과 단단함이 민감한 살을 무자비하게 뚫고 들어왔다. 머리를 살짝 집어넣는 것만으로 벌써 몸의 적응이 따라가지 못했고, 좁은 구멍이 팽팽하게 벌어졌다. 하지만 그대로 찔러 올려 몸을 뚫어버릴 것 같은 거대한 것은 너무 딱딱했다. 큼직한 것이 꿰뚫다 못해 또 참혹하게 안을 찢어 버릴까 과거의 공포감이 밀려왔다.
그때 비친 피는 너무 아팠다.
“하아, 하, 아으…… 으으!”
창백하게 질린 고운 이마에 땀방울이 맺히고, 뒤로 결박된 두 손이 교차된 손목을 손톱으로 파고들었다. 예전 일을 기억하는 몸은 이다음 이어진 그 거칠고 무자비했던 침범을 기억하고 겁을 먹었다. 상처가 벌어지고 매정해서 더 아팠던 기억에 유가가 눈을 질끈 감고 온몸을 떨었다.
갑자기 더 꽉 조여드는 뻑뻑함에 송기연도 당황했다. 아래가 여간 힘든 게 아니었으나, 그럼에도 자신이 더 사나워질까 모든 이성으로 흉포함을 억누르고 극도로 아래에 터질 것 같은 짐승을 자제시켰다. 금방이라도 마음대로 뚫고 들어가 그의 피와 눈물을 모조리 맛봐 버리고 싶을 것 같았다.
송기연이 거친 숨을 진정시키며 고개를 숙여 유가의 잘게 떠는 등에 목과 척추를 따라 하나하나 입 맞췄다.
“사존, 힘 푸세요. 다치게 하지 않겠습니다.”
봉황나무 그날, 그 소년과는 다르게 이번의 송기연이 말했다.
정염과 정복욕이 가득 묻어난 목소리였지만, 이마에 핏줄까지 세우며 낮게 쉰 목소리는 지금 그의 입맞춤만큼이나 다정했다. 폭력적으로 움직이고 몰아붙이지도, 일부러 아픈 잔혹한 말로 아프게 후벼 파지도 않았다. 자신을 감싼 든든한 품과 등에서 느껴지는 그의 심장박동이 진솔하게 전해졌다. 그의 조심스러운 손길과 부드러운 태도에 유가도 몸에 힘을 풀고 호흡을 천천히 내뱉으며, 이미 안을 가득 채우며 침범하고 있는 그것을 받아들이려 노력했다.
좁다란 길을 뚫고 생각지 못한 질량이 내벽을 확장하며 들이닥쳤다. 절대 들어오지 못할 것 같은 단단한 생명이 한계까지 안을 벌리며 뱃속 깊은 곳까지 안착했다.
“헉, 허어……, 흐! 학!”
“하아, 하. 하아…….”
비록 몸속을 지져 버릴 것 같은 뜨거움이었으나, 유가는 눈썹을 파르르 떨며 제 안에 완전히 들어 온 송기연을 느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송기연 역시 다치지 않은 유가를 보며 안심했다.
“사존, 움직여도 될까요?”
아까보다 더 거칠게 쉰 목소리로 송기연은 더욱 아래를 밀착시키며 일부러 물었다.
“하, 하아……. 마, 마음대로 해라. 뭘, 그리 묻는……으아!”
갑작스럽게 거대한 기둥이 뱃속을 찔러오자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더는 말을 내뱉지 못했다. 그의 다정함도 끝이었다.
“악! 어흑! 아! 앗, 아아! 아흐윽! 아앙!”
오랫동안 참았던 송기연은 유가의 허락이 떨어지자 이전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좁다랗고 뜨겁고 미약에라도 빠진 것 같은 그의 안에서 더는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쫀득한 내벽은 머리카락 한 올의 틈도 없이 송기연을 샅샅이 감싸왔고, 용암처럼 박동했으며, 가학심이 솟구치도록 여리디여렸다. 짐승의 속박이 완전히 풀리고 말았다.
단단하게 갈라진 하반신이 세차게 유가의 엉덩이를 들이박았고, 검붉은 대물이 하얗고 둥근 살집 사이를 쉴 새 없이 드나들었다. 붉은 내벽은 속도를 따라잡지 못해 거칠게 드나드는 주먹 만한 기둥에 끊임없이 열리고 딸려나왔다가 다시 안을 젖혀지며 처박혔다.
유가의 길게 뻗은 허벅지가 쉴 틈 경련했다. 유가 또한 수련자로서 근육이 보기 좋게 잡혔으나, 송기연의 우람하고 쩍 갈라진 허벅지에 비할 게 아니었다. 말의 그것을 연상시키는 송기연의 하체는, 대물 역시 말을 연상시키며 힘차게 유가의 안을 박아나갔다.
유가의 안이 놓아주지 않으려는 듯 팽행하게 분신을 흡착했고, 구멍에서 나올 때마다 만류하는 것처럼 꿈틀거리자 송기연도 두 눈이 붉게 물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흐아! 너, 너무 빨라! 아, 아윽! 으, 앙! 아아! 처, 천천히잇! 응!”
유가가 입도 한번 다물지 못하고 애원했다. 뱃속이 자비 없이 꿰뚫리고 있었고 연속으로 치닫는 묵직함에 숨도 제대로 쉬기 힘들었다. 눈앞이 어질해 눈도 못 뜨고 뒤에서 범해지는 유가의 몸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푹신한 침상에 갇히듯 내리눌리며 아까부터 애액을 흘리던 분신이 축축한 이불에 닿으며 마찰했다. 뒤로는 묵직한 쾌감이 때려 맞듯 내려쳤고 앞은 질척한 움직임에 비벼지며 앞뒤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성감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아아아응!! 으응, 아앙! 아! 앙, 하아!”
유가는 송기연이 처음부터 이렇게 밀어붙일 줄 예상 못했다. 눈물이 나도록 다정했으나, 지금은 정말 눈물이 쏙 빠질 듯 몰아붙였다. 머리까지 하얗게 만드는 쾌감은 이미 유가의 수용 범위를 벗어난지 오래였다.
“사, 살……아아아! 아! 악, 앙! 아흥! 아, 으하!”
제대로 말도 나오지 않았으나, 제발 그가 간절한 요청을 들어주길 바랐다. 조금만 천천히, 조금만 너무 깊이 들어오지 않길 바랐다. 하지만 이미 벌게진 눈으로 재미를 봐버린 청년이 그의 뜻을 따라줄 리가 없었다.
얼마나 비명을 지르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유가의 하얀 엉덩이는 계속된 마찰에 붉게 부어오르고, 큼지막한 손자국까지 더해져 얼룩덜룩했다. 그 사이를 이젠 정말 자신의 원래 검집이었던 양 드나드는 거대한 검의 흉포함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어찌나 드나들었는지 유가의 하얀 속살과 붉은 내벽이 안쓰러울 정도로 부어올랐다. 그들의 윤활제 역할을 했던 애액들은 전부 밀려나와 유가의 엉덩이와 허벅지도, 송기연의 대물도 그 아래 이불도 모조리 축축하게 젖어 번들거렸다.
“으아앙! 아앙! 아아! 아, 아하! 하아앙!!!”
유가의 교성은 이제 애원도 하지 못하고 사내가 선사하는 극한의 쾌감에 치달아 울부짖었다. 이성도 시선도, 체면도 모두 날아간 채 침을 잔뜩 흘리며 허리가 부러질 듯 고개를 잔뜩 젖히고 자지러졌다.
“큭-, 크흑!”
송기연도 눈을 가늘게 뜨고 미간을 찌푸리며 이를 악물고 속도에 박차를 가했다. 유가의 엉덩이가 거의 부서질 듯, 유가의 몸을 으스러트릴 듯 끌어안으며 유가의 극점만을 잔혹하게 찧어댔다.
그리고 곧 뱃속을 뚫고 나올 듯 집승이 안을 찧어 올리자, 한순간에 유가의 척추를 관통하여 눈앞을 하얗게 만드는 괘감이 내리꽂혔다.
“으아아아아아!!”
유가가 동공을 수축하며 반사적인 눈물이 줄줄 흘렀고 벌어진 턱을 다물지 못하고 벌벌 떨었다. 극렬하게 경련하던 유가의 전신이 유가가 눈을 파르르 감으며 점차 가라앉았고, 그의 가슴팍에 절정의 정액이 가득 튄 채로 아직 간헐적으로 몸이 튀어 올랐다.
“하아, 하아……하, 흑…….“
극심한 절정의 여운에 잠식당한 유가를 송기연이 조심스럽게 이불 위에 눕혔고, 자신도 그의 위에 올라가 눈물 젖은 유가와 마주했다.
파르르 떨리는 긴 속눈썹, 절정에서 어쩌질 못하는 붉은 눈가, 찌푸린 미간, 퉁퉁 부어 엉엉 울고 애원하는 붉은 입술. 아직 진정시키지 못한 하얀 목덜미와 가슴.
나의 아름다운 사존.
‘경국지색은 어떤 얼굴입니까?‘
‘보자마자 눈을 뗄 수 없는 얼굴이다.’
마치 어제 나눈 대화인 듯 생생한 기억이 떠올라 송기연은 사랑스러워 어쩔 줄 모르는 눈빛으로 미소 지었다. 그리고 지쳐서 색색 숨만 내뱉고 있는 가녀린 입술에 조심스럽게 입술을 포갰다.
사랑하는 사람.
이천 년을 기다려 온 사람.
평생을 사랑하고픈 사람.
“사존, 사랑해요.”
송기연도 입을 맞추며 절정으로 경련하는 유가의 안에 희뿌연 정을 잔뜩 파정했다. 그리고 그를 어떤 틈도 없이 포개 끌어안았다. 그의 귓가에 늘 해왔던 것 같은 오랜 고백 한 마디를 속삭이며.
전율처럼 휘몰아친 쾌감에 이어 따뜻한 파도처럼 밀려든 감동에 유가도 다시 눈물을 흘리며 주체하지 못했다.
송기연의 귓가에 맞닿은 유가의 붉은 입술은 아주 오래전에 소리 내 하지 못했던 그 말을 속삭였다. 억겁의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 듯, 그렇게 새어 나왔다.
“사랑한다.”
* * *
경창파 제자가 높은 침전문 앞에서, 이 무시무시한 운명의 문을 두드릴지 말지 고민하고 있었다.
장문인의 성격은 변덕스러워, 그의 심기를 잘못 건드린다면 죽음보다 못한 말로를 겪을 수도 있다.
이천 년 전 송기연의 심기를 건드렸던 능운파 장문인 노인갑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경창파의 금지 구역에 갇혀 매일 엄청난 형벌을 받아야 했다. 한마디로 죽지 못해 살고 있다.
그래서 경창파가 세워진 후로 십여 명의 장로부터 막 입문한 제자까지, 전해지는 단 한 가지 도리가 있었다. 절대 장문인의 심기를 건드리지 마라.
대가가 너무 커서 감당할 수가 없다.
미간을 한껏 찌푸린 제자가 감히 문을 두드리지 못하고 서 있었다.
그도 자신의 운이 왜 이리도 사나운지 알 수 없다. 오늘 딱 당직을 서고 있는데, 주작족과 청룡족의 족장이 장문인을 찾아온 게 아닌가. 그리고 하필 재수 없게 정 장로가 그에게 장문인을 모셔오라고 시키고 말았다.
장문인은 사흘 전에 침전에 들어간 후로 아직 나오지 않고 있었다. 방 안에 그 엄청난 절색의 미인이 있었는데…….
한창 사춘기인 제자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는 도저히 문을 두드릴 수 없어 손을 내렸다. 진심으로 장문인의 일을 방해했다간 목이 날아날 것이다.
“됐……다. 그마, 안…….”
손의 결박이 풀리자 길고 하얀 손이 흰 이불을 겨우 움켜쥐고 몸을 일으키려 했다. 조금이라도 빨리 침상을 벗어나 어디 구석에라도 몸을 숨기려 했으나, 뒤에 있던 남자가 어림도 없이 커다란 손으로 낭창한 허리를 휘어잡았다. 그리고 가뿐하게 몸을 끌고 와 다시 자신의 품 안으로 가차 없이 끌어당겼다.
잇자국과 순흔자국, 손자국이 가득한 둔부가 다시 검붉은 거대한 기둥에 내려앉으며, 철퍽철퍽 향유와 애액을 튀겨갔다. 어린아이의 팔뚝만한 기둥은 하늘을 향해 한 치의 흔들림 없이 꼿꼿이 서 있었으며, 거대한 표면에 울퉁불퉁 튀어나온 핏줄은 그것을 삼켜야 하는 둔부의 주인에게는 가히 공포스러울 것이었다.
그 엉덩이가 삼킬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흉물은, 이미 둔부를 한계까지 벌리고 마음대로 유가의 몸을 들었다 놨다 하며 뱃속을 뚫을 듯 꽂히고 있었다.
“아아! 아! 악……, 앗, 아!”
정말 뜨거운 쇠기둥이라도 박아 넣는 것처럼, 송기연의 기둥은 너무 버겁고 딱딱했고 유가는 이젠 더 이상 제 구멍이 닫히지 않을 것 같았다. 그 정도로 송기연은 원래 유가의 뱃속이 제 자리인 것처럼 이토록 집요하게 안을 후벼 팠다. 억울하고 서러운 유가와는 달리, 이미 혹독하게 시달리고 시달린 유가의 체내는 그 거대한 크기에 적응하며 맞춰갔고, 유가의 안이 더 익숙한 송기연의 대물이 극점의 돌출된 곳을 거리낌 없이 찾았다.
“아으으응!!! 아, 아하! 앙! 앗아아!!!”
유가가 새빨갛게 눈이 붉어지고 통제를 벗어난 몸이 제멋대로 덜덜 떨렸다. 도저히 분노를 더는 참지 못한 유가는 고개를 홱 돌리고 송기연을 쏘아 봤다.
“그만 해라! 적당히 좀 해!”
진짜 미친놈인가! 지가 말(馬)인가!
삼 일이야! 삼 일이라고!!!!
한 번을 쉬지를 않잖아! 계속, 계속 한다고!
유가는 정말 돌아버릴 것만 같았다.
아무리 자기가 방탕하게 놀았었다고 해도 이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 녀석 욕구는 무슨 수련 경지만큼 신의 수준인 건가!
유가의 본래 수련 경지라면 빠르게 체력을 회복할 수 있지만, 아직은 제대로 회복을 시작도 못 했고, 이렇게 매일 낮밤 시달리고 시달리기만 해서 그럴 틈도 없었다.
거기에다가 주먹 만한 것이 뱃속을 콱콱 치달아 오니 이러다가는 망가지지 않을 리가 없었다.
“사존, 아무래도 밖에 사람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때 송기연이 눈을 가늘게 뜨고 음흉한 목소리고 속삭였다.
“들어오라고 할까요?”
“!!!”
송기연은 유가의 허리를 더 희롱하듯 쓰다듬으며 붉어진 유가의 귓바퀴를 깨물었다
“사존, 이렇게 긴장하시면…….”
송기연이 대단히 불손한 웃음을 지으며 필시 일부러 더 끈적하게 말했다.
“이렇게 아래를 세게 물어 버리시면 제자가 참기 힘듭니다.”
“너! 윽, 하지 마라! 그만, 됐다, 하읏……!”
잠시 멈추었던 기둥이 한순간에 안을 쳐올리자 유가의 몸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것도 잠시 봐주지 않고 그대로 유가의 손목을 단단히 고쳐 잡더니, 뒤에서 송기연이 세차게 허릿짓을 쳐올려 유가의 엉덩이를 팡팡팡 들이박았다.
유가는 욕을 퍼붓고 싶었지만 밖에 소리가 들릴까 입술을 필사적으로 다물었다.
“음! 으응! 으으응!!”
두 손이 송기연의 손목을 각각 파고들며, 그의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고통을 긁어댔다. 얼굴은 거의 침상 이불에 파묻혔고, 이불을 입에 질끈 물면서 원통하게 제 뒤를 박아대는 남자를 한껏 노려봤다. 금방 눈을 질끈 감으며 눈물을 뚝뚝 흘리긴 했지만.
‘송기연, 이 개자식아!’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전에 침상 위의 분야라면 자신이 절대 어디서도 밀리지 않았거늘.
어쩌다 이 애송이 녀석 아래에서 이런 꼴을 당하고 있는 걸까?
이를 악 물며 회한의 눈물을 흐리는데, 갑자기 송기연이 자세를 고쳐 잡더니 그대로 유가의 상반신을 확 젖히고 그의 몸을 들어, 송기연이 침상 아래에 일어나 섰다.
“히익!”
유가의 온 무게가 송기연의 물건 하나에만 꽂혀서 공중에 달랑 들려있었다.
“이, 이게! 무슨!”
무방비 상태에서 받은 엄청난 자극에 전신에 마비가 올 듯 온 신경이 덜덜 떨렸다. 송기연 하나에만 의지한 채 달랑 들린 심리적 충격에 유가는 정말 정신을 놓아버릴 것 같았다. 두 발끝이 곱아든 채 어디도 어떻게도 하지 못했고, 유가가 숨을 헐떡이며 충격 받은 두 눈에서 두려운 눈물이 줄줄 흘렀다.
유가가 어깨를 한껏 움츠리고 눈에 띄게 경련하자, 송기연이 제 넓은 가슴에 더 편하게 유가를 기대게 하며 그의 가련한 뒷덜미에 하나씩 하나씩 입을 맞추었다.
힘껏 빨아 붉은 순흔을 하나 더 했다.
“쉬- 괜찮아요. 떨어지지 않습니다. 사존, 어찌 딴생각을 하십니까? 제가 하는 게 만족스럽지 않으십니까?”
담담한 질문에 공황이 조금 풀린 유가는, 오히려 서러움이 밀려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한껏 눈물이 차오른 눈을 치켜뜨며 소리쳤다.
“충분하다! 좋아! 그러니 이제 그만 해라!”
유가는 서러워도 딴생각 따위 한 적 없다고 변명하며, 인생 처음으로 남의 권위에 굴복했다. 제 제자인 송기연에게. 그렇지 않다면 정말 차마 눈 뜨고 볼 수도 없는 꼴로 기절해서, 이 녀석이 안까지 샅샅이 훑으며 자신을 돌보느라 기뻐 어쩔 줄 모를 것이다. 그러면 정말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그렇습니까?”
“그래!”
유가가 이렇게 굴복했으나 송기연은 눈을 가늘게 뜨고 침상 위에 그대로 앉았다. 그리고 허벅지의 손이 유가의 허리와 가슴을 지나 그의 붉은 입속으로 들어가더니 말캉한 혀를 헤집고 가지고 놀았다.
“사존의 이 입은 거짓말을 하고 있네요. 제가 생각 좀……,”
똑똑-!
마침내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 밖에서 긴장한 제자는 덜덜 떨며 침을 삼켰다.
품에 있던 사람이 급격하게 몸을 굳히고 또 다르게 몸을 떨자, 송기연은 눈썹을 치켜세우며 문을 향해 물었다.
“무슨 일이냐?”
“윽, 그, 그만 하자……. 나, 좀 풀어다오……!”
유가가 흐느끼며 낮게 속삭였다. 정말 눈물이 절로 흘렀다.
유가는 체면을 지키고 싶었다. 지금 문을 열면 정말 정면으로 송기연에게 몸 한가운데를 꿰뚫려 다리를 벌리고 있는 게 보일 것이다. 이런 모습을 누군가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유가의 간절한 청을 무시하듯 송기연은 바둥거리는 유가의 팔을 꽉 잡았다. 그리고 아래의 허리를 은근하게 움직여 가득 들어차 있는 안을 뭉툭히 자극했다. 또 빠르지 않아서 더 저항하기 힘든 쾌감이 밀려오자 유가는 허리를 비틀며 송기연의 어깨에 머리를 젖혔다.
“장문인께 아룁니다. 주작족 족장 능구신군과 청룡족 족장 맹장신군께서 창운전에서 뵙기를 청합니다.”
아구와 맹장!
유가가 눈을 크게 떴다.
유가는 숨을 몰아쉬며 머리 한구석에서 날려 버렸던 혼돈의 힘을 손으로 끌어 모았다. 더 이상 엉덩이에 배를 가득 채우는 마개를 꽂아놓고 멋대로 흔드는 건 사양이었다. 정말 이자의 통제에서 벗어나려 했다.
유가는 이제 정말 세계가 어떻게 변했는지 알아야 했다. 아구는 여전히 자신을 기억하는지, 건너 뛴 이천 년엔 어떤 연쇄반응이 일어났는지.
잊혀두었던 할 일들이 떠올라 마음이 조급해졌다.
정염에 가득 녹아들었던 유가의 눈이 다시 반짝이자, 송기연은 한숨을 내쉬고 문밖 제자에게 말했다.
“우선 돌아가서 손님께 곧 가겠다고 전하라.”
제자가 떠났고 송기연은 아쉬운 듯 아직 들어찬 유가의 배를 만지작거리며 목덜미에 입술을 묻고 투덜거렸다.
“이번만 하고 같이 가요.”
송기연은 사존이 이 사람이 두 사람의 이름을 듣자마자 이렇게 반응을 하는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하지만 사존이 더는 애욕에 흥미가 떨어졌다면 그도 더는 강압적으로 하고 싶지 않았다.
“주작족과 청룡족 족장과 아는 사이십니까? 왜 두 사람의 이름을 듣자마자 이리 흥분하시는 겁니까?”
“그래, 알고 있다.”
표정이 좋지 않은 유가가 계속 말했다.
“하나 그들이 날 아직 기억하고 있을지는 나도 모르겠구나.”
품에 안고 있는 사람의 표정이 너무 적적해 보여, 송기연은 맞닿은 심장이 같이 아파 왔다. 뒤에서 고개를 숙여 유가의 땀에 젖은 볼에 살짝 입을 맞추고 말했다.
“기억할 겁니다. 분명히 사존을 기억할 거예요.”
단 한 번 만난 사랑하는 사람을 천 년이나 힘들게 기다린 것처럼.
그는 사존과 인연을 맺은 사람은 절대 그를 잊지 못할 것이라 믿었다.
* * *
낮은 탁자 위에 놓인 찻잔을 들고 뜨거운 차를 한 모금 맹장은 눈앞에 사람을 따라 눈을 왼쪽으로 한번, 오른쪽으로 한번 돌려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찻잔을 내린 채 입을 뗐다.
“아구. 조급해해도 소용없다. 송기연의 성격을 모르는 것도 아니잖아. 그렇게 변덕스러운 자가 우릴 보러오겠다고 해도 만나는 게 쉽지는 않을 테니까.”
그는 오늘 아구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다. 갑자기 평소 요수삼림과 서로 절대 발을 들이지 않는 경창파에 송기연을 만나야겠다며 이렇게 찾아왔다.
정말 이상했다.
송기연은 이 대륙에서 지위가 대단했다. 신계로 올라가 스스로 그곳을 박차고 나온 무시무시한 실력의 소유자였다. 맹장은 모든 청룡족과 주작족이 한꺼번에 그에게 덤벼도 절대 그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고 예상했다.
그래서 맹장은 경계태세를 늦추지 않았다. 오기 전에 이미 청룡족 고수에게 근처에 숨어 있으라고 명령을 해두었다. 그래야 만일 아구가 그자와 교전을 벌인다고 해도 그가 도울 수 있다.
“맹장, 지금 이 기분을 네게 설명한다고 해도 넌 이해 못 할 거야.”
아구는 자신의 자리에 앉아 머리를 붙잡고 고뇌했다.
“아무래도 경창파에 내게 중요한 사람이 있는 것 같아. 하지만 누군지 도저히 감이 안 와. 송기연에게 직접 물어봐야겠어. 그 사람을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너무 강해서 며칠 잠도 못 잤단 말이야. 계속 이러다가 곧 미쳐버릴 것 같아!”
“중요한 사람? 만나고 싶단 생각에 잠도 못 잤다고?”
맹장이 눈을 찡그리자 왼쪽 눈 주변의 주작족 문양이 움찔했다.
“근데 난 왜 네가 알고 있다는 그 사람이 누군지 기억을 못 하는 건데?”
“너 말투가 왜 그래?”
아구가 눈을 흘기며 말했다.
“내가 누굴 알든 너랑 무슨 상관인데.”
“내가 신경 쓰여.”
맹장이 찻잔을 잡고 있는 손에 힘을 주며 말했다.
“아구, 내가 널 좋아한다는 것 알잖아. 그래서 네가 중시하는 사람은 다 질투가 나.”
“또 저런다.”
아구가 이마를 짚으며 의자에 앉았고 이내 탁자에 엎드렸다.
맹장은 하루에도 몇 번씩 그에게 사랑을 고백했다. 아무래도 무슨 일이든 그에겐 그저 고백을 하는 수단이 되는 것 같다. 이렇게 계속 지내다 어느 날 이자에게 완전히 세뇌를 당할까 겁이 났다.
“장문인께서 곧 오신다고 합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상석 한쪽에 자리 잡은 정상이 환하게 웃었다.
“알겠습니다.”
그에게 대답을 한 아구가 작게 속삭였다.
“이 여우를 믿었다니.”
정상은 안색 하나 변하지 않은 채 상석 오른쪽에 앉아있는 초운에게 눈짓했다. 송기연이 무얼 하고 있나 살펴보고 오란 뜻이었다.
초운이 막 일어서려는 그 순간 문이 천천히 열렸다.
문 밖엔 빛을 등지고 건장한 체격의 경창파 장문인 송기연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얀 차림으로 서 있었다. 장문인은 빙그레 웃더니 뒤에 선 붉은 옷의 사내에게 손을 내밀어 그를 부축하려 했다. 하지만 얼굴이 살짝 멍하고 발그레한 유가가 그 손을 뿌리치고 홀로 꼿꼿이 서서 들어갔다. 그러려 노력했다.
결국 녀석이 끝장을 보고서야 침전을 나섰다. 안에 잔뜩 싸놓은 것도 긁어낸다고 온 소란을 다 부렸다. 그럼 마지막엔 안에 안 해도 됐잖아!
“큼!”
“송기연! 대체 우릴 얼마나 기다리게……!”
한껏 독이 오른 아구가 꽥 소리를 지르려 했으나 유가의 얼굴을 보자마자 그 자리에 벼락을 맞은 듯 굳어 버렸다.
“다, 당신…… 누구야?”
갑자기 부족한 줄도 몰랐던 마음이 텅 빈 것 같았고, 거기에 원래 있었어야 했던 것 같은 감정들이 몰아쳐 들어왔다. 성난 파도처럼 닥쳐온 감정이 극에 달하자 아구의 커다란 두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뚝- 뚝- 떨어졌다.
맹장이 다급히 일어나 아구를 감싸며 부축했고, 유가를 바라보며 물었다.
“실례가 안 된다면 누구십니까? 경창파의 제자입니까? 아니면…….”
유가의 수련 경지를 탐색하려던 신식이 무형의 힘에 튕겨져 나왔다.
“……신수(神修)입니까?”
“맹장신군, 눈빛이 너무 방자하군요.”
송기연은 사존의 수련 경지를 탐색하려는 시도에 언짢아져 앞을 막아섰다.
“난 유가라고 하네.”
조금 쉬어서 낮게 잠긴 목소리가 울렸다.
잔잔한 호수에 돌맹이가 떨어진 듯 한차례 더 물보라가 일었다. 아구는 갑자기 무수히 조각난 화면들이 온 머릿속을 휘젓는 느낌이었다.
“주작, 당신의 이름은 뭔가? 이렇게 작은데 이렇게 오만하다니, 아무래도 본존과 잘 맞을 듯 싶네만. 본존의 탈것이 될 생각이 있느냐?”
“나, 난 위풍당당한 주작족 능광신군의 손자인데 어찌 탈것이 된단 말입니까!”
“오? 네가 그 늙은이의 손주 녀석인가? 어찌 이리 약해? 작은 요수조차도 상대하지 못할 듯하니 정말 체면이 말이 아니구나.”
“난 고작 이백 살이라고요! 아직 성년이 안 되었어요!”
“나이가 네가 약한 이유는 아닌 것 같구나.”
기억 속 붉은 옷을 입은 남자가 그를 향해 웃었다.
‘나와 함께 간다면 널 강하게 만들어주마.’
‘정말 강해질 수 있나요?’
‘정말이다.’
‘그럼 같이 갈래요! 전 아구예요. 당신은요?’
‘나? 난 유가다.’
분명히 겪은 적 없는 일들이다.
하지만 의식 한구석에 깊이 박혀있었던 듯, 아구는 그 이름을 듣자마자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흑! 유가…… 대인……!”
혼란스러운 기억에 머리가 아픈 아구가 머리를 움켜쥐었다.
“아구, 왜 그래? 아구? 아구!”
“아구!”
아구는 점점 소리가 멀어지더니 시선이 어두워지며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유가가 급히 아구의 상태를 살피려 했으나, 맹장의 경계하는 눈빛에 뒤로 물러났다.
“당신 도대체 누구야!”
아구를 품에 안은 맹장이 대적하는 태세를 취했다.
“어쩌시려고요? 설마 맹장신군께서 경창파에서 손을 쓰기라도 하려는 겁니까?”
송기연은 이미 창결검을 손에 들었다. 그 또한 유가라는 두 글자를 들었을 때 마음속에 생겨난 초조함을 억누르지 못하고 차갑게 돌변했다.
“맹장, 난 아무런 악의가 없네.”
유가가 두 사람 사이에 서서 말했다.
“아구와 나의 관계는 많은 게 얽혀있지. 나도 아구가 저리 반응하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네. 우선은 아구를 데리고 가 쉬게. 깨어나면 내가 모든 걸 설명하겠네.”
“그, 그래요. 됐습니다. 모두 이리 날을 세우지 마십시오.”
드디어 끼어들 틈을 본 정상이 웃으며 사람들 앞으로 걸어왔다. 그리고 맹장에게 예의를 차렸다.
“맹장신군, 우선 객방으로 모시겠습니다. 여기 이분 말씀대로 능구신군이 깨어난 후 다시 얘기해도 늦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의 일리 있는 말에 현장 분위기가 사그라들었다.
살기를 잠재운 맹장은 아구를 안아 들었다. 하지만 곧장 나가지 않고 금색의 눈동자로 두 사람을 차갑게 번갈아 본 후에야 떠났다.
만남의 끝이 좋지 않았다. 창운전 안에 있던 유가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어쩔 줄 몰라 했다. 그중엔 송기연도 있었다.
“사존, 대체 당신은 누구십니까?”
오는 내내 말이 없던 송기연이 침전에 들어서자마자 입을 뗐다.
“전 당신에게 가진 이 감정 말고는 당신에 대해 아는 게 없습니다.
방금 ‘유가’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머릿속이 순간 뭔가 번쩍이는 것 같았어요. 뭔가, 뭔가 우리 두 사람은 생각보다 더 오랫동안 알고 지냈어요. 그 시간 동안 아름답고 아픈 추억이 많지만 제가 떠올리지 못하는 느낌이에요.
근데 제가 태어난 후, 지난 이천 년이란 시간 동안 기억하는 건 고작 두 번의 만남 뿐이에요. 한 번은 능운파 밀실에서, 다른 한 번은 능운파 산문 앞에서. 그 후로는 끝없는 기다림만 있었죠.”
어지럽고 풀이 죽은 얼굴에 유가가 그를 꼭 안았다. 송기연은 자신보다 작은 몸에 안겨 몸을 더 웅크리고 그를 끌어안았다.
“그 오랜 세월 저도 왜 포기를 안 한 건지는 모르겠어요. 그냥 오실 거라 믿고 있었어요. 가끔은, 심지어 마음속에 심마가 만들어낸 허구가 아닐까라는 생각까지 했…….”
“아니다.”
유가가 한숨을 내쉬며 그의 말을 끊었다. 그리고 송기연의 팔을 꼬집으며 말했다.
“아프냐?”
“네, 아파요.”
송기연은 고개를 들며 그의 말에 순순히 대답했다.
“아프면 됐다.”
유가는 침상으로 송기연을 끌고 가 그를 앉히고, 지곤한 자신도 그의 가슴팍에 등을 편히 기댔다.
“기연, 네 말이 맞다. 우린 아주 오래전부터 알던 사이지. 네 기억 속 이천 년 동안 만난 게 아니고, 우리가 역사를 바꿔 완전히 잃어버린 다른 천 년 속에서 알고 지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사존?”
“네가 믿을 진 모르겠지만, 우린 원래 철천지원수였다.”
“원수요?”
믿을 수 없던 송기연은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
“당신께서 저보고 사존이라고 부르라고 하신 건, 저희가 사제지간이었다는 뜻이잖아요. 한 번 사존이 되면 평생 아버지처럼 존경하고 공경하여, 그 은혜가 산보다 높을 것인데, 어찌 원수지간이 된단 말입니까?”
“믿지 않을 줄 알았다.”
유가가 웃었다.
“우리 사이의 일은 말하려면 끝도 없다. 네가 듣고 싶다면 천천히 말해 주마.”
“사존께서 말씀해 주신다면, 전 듣고 싶어요.”
조금은 지친 목소리가 방안에 조근조근 울려 퍼지며 두 사람의 얘기가 펼쳐졌다.
“우리 관계를 정의 내리자면, 네가 태어나고부터 평생 엮여야만 하는 관계라고 할 수 있구나…….”
진중하게 그의 얘기를 귀담아 듣는 이는, 자신에게 기댄 남자가 좀 더 편하도록 수시로 자세를 바꿔주었다. 남자가 말하다 지칠 때쯤엔 손바닥을 주무르며 나즈막히 질문을 던졌고, 두 사람은 지금 매우 평안하고 온화한 분위기가 좋았다.
사실 유가는 지금 상황이 너무 만족스러웠다. 이미 열두 마사를 되살렸고, 자신을 그리워하는 송기연을 찾았고, 활기가 가득한 아구를 만났다. 그리고 송기연과 아구의 반응을 보면 역사가 바뀐 후에 그들이 함께 겪은 일은 사라졌지만, 의식 깊은 곳에 감정은 여전히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감정이라는 건 너무 복잡해서 이미 누군가 통제할 수 있는 범위를 한참 벗어났다. 사랑, 애정, 우정은 낡은 규칙을 깨고 모든 것을 능가할 수 있기에 충분했다.
그와 송기연은 이미 보이지 않는 실에 단단히 묶여 있었다.
수천 년을 뛰어넘고, 몇 번의 생사를 겪고, 수많은 장애를 만나도 마지막엔 함께 하게 된다.
반드시, 함께 한다.
* * *
“사존, 많이 사랑합니다.”
송기연이 유가의 뺨을 어루만졌다. 따뜻한 체온에서 안도감이 느껴졌다.
“절 찾아 주시고, 절 용서해 주신 것 감사합니다.”
“거기에 초점을 두는 것이냐?”
얼굴이 붉어진 유가가 앞 사람을 괜히 한번 밀쳤다.
“너에게 묻고 싶구나. 신계에 올라갔을 때 천도를 보았느냐? 아니면, 일부러 널 힘들게 한 사람은 없었느냐?”
“없었습니다.”
송기연은 품 안에 있던 사람을 침상에 눕히고 그의 다리 위에 올라 앉아 온몸으로 내리누르며 말했다.
“사존의 말씀대로 역사는 이미 바뀌었습니다. 전 이제 천도의 꼭두각시도 아닐뿐더러 수련 경지는 이미 그 사람을 훨씬 넘어선 수준이죠. 그래서 그자가 절 함부로 못 건드리는 것 같습니다.”
“그 추측도 일리는 있구나.”
유가가 눈썹을 추켜세웠다. 두 사람의 자세에 지난 삼일 내내 시달리고 겪어야 했던 일이 떠오르자, 유가가 발버둥치며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아직 제대로 시도하기도 전에 아래에 단단하게 솟아오른 게 닿았다.
“……삼일이 부족했던 것이냐?”
유가가 눈을 흘기며 말했다.
“진지한 얘기를 할 때는 좀 정숙할 수 없는 것이냐?”
“걱정 마십시오, 사존께서 말씀하시는 동안 잘 간수하겠습니다.”
송기연이 그의 귓가에 대고 웃으며 나른하게 말했다.
미친. 이러면 뭐라고 대꾸를 해.
살짝 거들먹거리기는 했지만, 송기연도 분수를 알고 있다. 그래서 손발도 얌전히 두었고 표정도 태연하게 있었다. 유가는 탄복하며 아예 신경 쓰지 않고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누워서 물었다.
“심마를 통해 입도를 했다고 하였는데, 혹시 문제는 없었느냐?”
“문제요?”
곰곰이 생각하던 송기연이 웃었다.
“말하자면, 확실히 문제가 있죠.”
“돌려 말하지 말고 제대로 말하라.”
장난스런 송기연의 말투에 유가는 꿀밤을 때리고 싶었다.
“문제라면 지나치게 흥분한다는 거죠.”
역시나 청년이 활짝 웃으며 능글맞게 말했다.
“전 당신이 저와 다르게 말하는 것,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 것, 제 곁을 떠나는 걸 못 견디겠습니다.”
“이 녀석아. 네가 그런다고 네가 하고 싶은 대로 둘 것으로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손을 치우거라!”
유가는 그새 허리를 매만지던 손이 옷 속으로 들어와 아래를 향하는 걸 깨달았다. 차갑게 그 손을 막으며 도끼눈을 떴다.
“감언이설 집어치우고 제대로 말하라.”
“알겠습니다. 바로 말할게요.”
송기연이 손을 치우며 계속 말했다.
“근데, 방금 한 말도 완전히 사존을 놀리려고만 한 말은 아니에요. 사존에 대한 집념 때문에 심마가 생겼어요. 예전부터 지금까지. 다시 사존께 버림을 받는다면 제 자신이 어떻게 될지 상상도 못 하겠어요.”
그가 몸에 힘을 탁 빼고 제 온몸으로 유가의 온몸을 덮었다. 어깨에 그리운 부드러운 머리카락에 뺨을 비비며 말했다.
“만약 그런 날이 온다면, 전 미쳐 버릴 것 같아요.”
송기연은 정말 미쳐버릴 것 같다고 말하는 것 말고 다르게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눈앞에 사람에게 왜 이렇게 어쩌지 못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몇 번이고 버림 받고 오랫동안 기다렸어도 이 사람을 상처 줄 수 없었다.
며칠 전 무주지에서 이자를 찾았다. 찾기만 하면 그를 기필코 사로잡아 제 눈이 닿는 곳에만 가두고, 가장 깊은 지하 감옥에 숨겨두리라 생각했다. 왜 나를 찾아오지 않았냐고, 왜 나를 버렸냐고, 그를 고문하고 강제로 범하고 울고 빌게하여 제 흔적을 온몸에 가득 새기고, 천 년이라는 세월을 기다린 자신의 고통을 알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자의 눈동자를 마주하자마자 마음속에 가득했던 분노는 눈 녹듯 사라지고 끝을 알 수 없는 온유함과 행복만 남아 있었다.
정말, 귀신에 홀린 것 같았다.
‘저 송기연 맹세합니다. 다시는 누구도 사존을 건드리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어두컴컴한 궁기 동굴, 선홍색의 수혈지 옆에서 꾀죄죄한 소년이 큰 소리로 외쳤다.
기억의 조각이 머릿속에서 떠오르자 송기연은 눈을 감고 말했다.
“사존, 제가 당신을 이렇게나 사랑합니다. 그러니 다신 절 버리지 말아 주세요, 아셨죠?”
“걸핏하면 애교를 부리는구나!”
유가가 넓은 송기연의 등을 찰싹찰싹 때리면서 말했다.
“이천삼백 살이나 먹었으면 좀 진중해질 수 없는 것이냐?”
“안 됩니다. 사존 앞에선 불가능합니다.”
웃음기 있는 목소리였지만, 자신을 끌어안은 힘이 너무 셌고, 너무 미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유가는 뻣뻣하게 굳었다. 정말 이 사람이 진짜 안정감이 없으며, 자신이 그에게 너무 이론적인 것만 따졌다는 것을 알았다. 겉으로는 과할정도로 웃고 있는 송기연이 사실 그에게 버려질까, 배반당할까 두려운 아이처럼 계속 그를 떠보고 있었다.
“녀석. 잘 들어라. 이제부터 무슨 일이 벌어진다고 해도 내가 널 혼자 남겨두는 일은 없을 것이다. 앞으로 무슨 일이든 늘 너와 평등한 관계에서 상의할 것이며 홀로 결정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 너도 이제는 매일 내게 버려질까 걱정하지 마라.”
유가가 돌아서서 그와 눈을 맞추었다.
“너도 알겠지만, 네가 날 좋아하는 만큼 나도 널 많이 좋아한다. 네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그때 능운파 산문 앞에서 송기연이 유가의 손을 잡고 했던 말처럼 유가도 드디어 속마음을 전부 털어놓았다.
그는 전에 자신이 했던 행동이 이 녀석에게 영향을 주었다는 걸 안다. 때문에 적어도 지금부터는 송기연에게 안정감을 주기로 마음먹었다.
두 사람은 코가 맞닿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송기연은 눈을 깜빡거리며 입을 오므리고 한참 만에 눈물을 참으며 간신히 입을 뗐다.
“사존, 정말.”
남은 말은 입맞춤에 그만 끊겨버렸다. 살짝 입을 맞춘 유가가 입을 떼고는 뒤로 물러나 눈을 감고 간신히 웃음을 참았다.
“됐다. 피곤하다. 자야겠다.”
사존은 정말 그렇게 잠이 들고 말았다.
송기연은 갑작스러운 사존의 고백에 이어 강제 입맞춤을 당해 너무 기뻤지만, 고대로 잠들어 버린 사람 때문에 너무 억울하고 화가 났다.
하지만 피곤하다는 사람을 개인적인 욕구로 깨울 수도 없었다.
한숨을 내쉰 송기연은 품에 그를 안은 채 자신의 나쁜 생각을 간신히 뿌리치며 잠에 들었다.
* * *
“왜 매번 만날 때마다 그리 얼굴을 굳히고 있는 것이오. 좀 웃으면 안 되는 건가?”
백발의 집행자가 손을 펴 유가의 눈앞에서 흔들었다.
하지만 삼일 내내 잠도 못자고 시달리다가 간신히 잠을 청했는데, 꿈속에서 이 노인을 보자 도저히 웃음이 나오질 않았다.
“할 말 있으면 어서 하고 가시오. 남의 잠 방해 마시고.”
노인은 그만 장난을 멈추고 물었다.
“유가, 실력을 회복한 후 송기연과 함께 신계로 올라 천도를 찾아 상대할 계획인가?”
“그렇다면?”
유가가 눈썹을 추켜 올리며 모호한 태도를 취했다.
“사실 당신에게 너무 서두르지 말라고 말하고 싶네.”
“서두르지 말라고? 영감, 당신도 나와 송기연의 실력을 합하면 소위 천도라는 자를 넘길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 어찌 서두르지 말라고 하는 것이오? 설마 그가 다시 와서 날 설계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이오?”
“그런 뜻이 아니네. 자네가 역사를 바꾼 후 천도를 견제할 때 이상한 걸 발견했네.”
“무슨 일이오?”
“그게…… 아무래도 가장 무거운 인과 천벌을 받는 자가 천도인 것 같네.”
멍해진 유가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물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자네는 천도법칙을 초월하고, 역사의 존재를 뛰어넘는 자지. 나도 집행자로서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지만 다른 사람은 그렇지 않다네. 아구, 송기연 그리고 전에 자네와 연관이 있었던 사람들은 지금 당신의 존재를 인식하지만 완전히 기억하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릴 테지.
그들은 역사를 바꾼 것에 대해 자신들과 엮인 인과선 만큼 책임을 지게 될 것이고 이 모든 근원은 천도가 설계한 걸세. 그래서 역사를 바꾼 것에 대해 가장 중한 책임을 지게 되는 건 천도라네. ”
“확실히 그런 것 같군요.”
유가가 그의 말에 동의하며 웃었다.
“하지만 그 사람은 그래도 쌉니다.”
그의 표정을 살펴보던 노인이 갑자기 질문했다.
“유가, 송기연이 어디서 왔는지 생각해 본 적 있는가? 구륜염양지에 있던 그 상자는 또 누가 던진 것인지?”
“응?”
유가가 처음 송기연을 본 것은 구륜염양지가 확실했다. 그를 키워준 사람은 안필화 부부였고 확실히 그의 진짜 부모가 누군지는 알지 못했다.
노인이 한숨을 쉬며 계속 말했다.
“지금은 그저 추측일 뿐 아무런 증거가 없네. 하나 전에 송기연이 신계에 다녀온 일은 천도가 눈감아 주었네. 아마도 역사가 바뀌어 그들의 인과선이 단단히 연결되었을지 모르겠군,”
“말도 안 돼?!”
유가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들이 어찌 연결이 되어 있단 말입니까?”
“조급해 말게. 그저 추측일 뿐이니. 하나 이 가능성을 배제하지는 말게. 그러니 내 조사가 끝날 때까지 이곳에서 좀 더 기다리는…….”
“됐습니다.”
유가가 그의 말을 끊었다.
“서둘러 신계로 올라가 직접 조사해 봐야겠군요.”
유가는 혼란스러웠다. 저 노인의 말을 믿을 순 없었지만 확실히 송기연의 출신에 대해서 아는 게 없었다.
역천하는 재능, 그에게 맞춰진 수련 《천진결》, 자신에 대한 살의, 녹색 돌에 숨겨진 감정, 이 모든 게 확실히 그가 천도와 끈끈하게 엮여 있다는 걸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유가는 지금 송기연은 그 녀석일 뿐이며, 독립된 인격을 가진 존재라고 믿고 있다.
휴, 역사를 바꾸면 모든 게 순조롭게 해결될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오히려 더욱 혼란만 가중되고 있었다.
“왜 내가 하는 말을 안 듣는 것이오?”
안개가 가득한 공간 속에서 노인이 청년의 모습으로 변신한 후 유가의 곁에 앉았다.
“이 일은 너무 서두르지 말게. 어쨌든 언제든 혼돈의 힘을 사용할 수 있어 천도와 실력이 비등하니. 신계로 가는 시간을 조금 미룬다고 해서 달라지는 게 있겠는가?”
유가는 곁에 엉덩이가 다가오자 역겨워 집행자를 피했다. 미간을 한껏 찌푸리며 봉인해 두었던 열두 마사를 해제했다.
“존주! 괜찮으세요! 그 송기연이……!”
소십이 소십이의 입을 막고 유가에게 예를 올렸다.
다른 마사들도 따라 예를 올렸다.
송기연과 유가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대충 눈치 챈 고금성은 더는 유가에게 어떤 것도 묻지 않았다. 하지만 안색이 어두웠다.
“하하, 이들이 이리 무사한 것을 보니 역사를 바꾼 것도 어느 정도 수확은 있는 것 같군.”
갑자기 이렇게 많은 사람에게 둘러싸이자 집행자는 약간 공허한 기분이 들었다.
“영감, 전에 당신이 내게 준 음양양역진은 대체 무엇입니까?”
유가가 손에 결인을 치고 혼돈진형도를 집행자 앞에 내보였다.
“당신도 알다시피 그때 내 영혼을 온전하게 하려다 이 진형도에서 내 마사들을 모두 죽일 뻔했습니다!”
그가 얼굴을 한껏 일그러트리며 힘을 실어 말했다.
“설마 혼돈의 힘을 통달하려면 내 마사가 필요한 겁니까?”
가늘고 긴 다섯 손가락이 거칠게 집행자의 멱살을 잡고 매서운 눈빛으로 노려봤다.
“당신은 믿음이 가질 않아. 처음부터 당신이 내게 한 말은 전부 거짓이었어. 내 실력을 절정으로 만들려고 내 마사를 죽이려 했어. 그러더니 지금은 또 송기연과 천도가 연관이 되어있다고 말하네. 도대체 당신 목적이 뭐야?”
“내 목적?”
청년 모습의 집행자가 사람 좋은 웃음을 거두더니, 감정 없는 눈으로 말했다.
“내 목적은 천하의 수진자들이 모두 천도의 질곡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수련을 깨닫는 것이다. 한데 이걸 할 수 있는 자는 오직 너뿐이다. 그러니 난 네가 강해질수록 좋을 밖에. 자네 말고 다른 자들은 어떻게 되든 내 고려 대상이 아니네.”
“날 천도에 대항하는 도구로 사용하려 한 거야?”
유가가 두 눈을 치켜뜨며 말했다.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내게 그런 짓을 해?”
“자네는 지금 날 죽일 수 없지. 난 실체가 없어 무엇으로든 변할 수 있고, 아무 의식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집행자가 계속 말했다.
“다만 난 자네가 날 도와 천도를 죽여 모든 걸 해결해 주길 바라네. 아무도 자네를 조종하고 설계하지 않을 걸세. 나도 자네에게 고마워할 테고.”
“천도를 죽여? 천도가 존재합니까?”
고금성이 마음속 미심쩍었던 질문을 꺼냈다.
“그렇기도, 아니기도 하다.”
집행자의 눈 속에 조롱 섞인 눈빛이 스쳤다.
“왜 그를 죽이려 하는 거요?”
유가가 그의 멱살을 놓고 이해가 되지 않는 듯 물었다.
“천도의 야심은 알고 있지만, 반드시 그를 죽여야겠다는 생각은 없었어요. 난 완전히 다른 세력을 갈라서 천도와 겨룰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천도법칙이 없으면 안 됩니다. 수련자들이 자신만의 수련 방법을 가질 순 있지만 천도법칙을 터득해야만 합니다.
내가 천도법칙을 터득한 후로 수련법을 깨달았듯 송기연도 그걸 깨고 심마로 다시 입도했습니다. 하지만 천도는 제일 원시적인 자연 규칙을 대표하며 집행자인 당신은 그의 죄가 죽음엔 이르지 못한다는 걸 제일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유가가 는 제 심장 위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게다가 당신은 방금 그가 제일 중한 인과 처벌을 받을 것이라 직접 말해놓고, 어째서 날 꼬드겨 그를 죽이라 하는 겁니까? 앞뒤가 맞지 않는군요.”
“난 집행자로서 당연히 명성에 걸맞게 공평하게 처리할 뿐이네.”
사라졌던 웃음이 다시 얼굴에 돌아왔고, 청년은 다시 노인의 모습으로 변했다. 그러곤 순식간에 결계를 치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안개처럼 사라졌다.
“유가, 내 말 꼭 기억하게. 천도를 죽여야만 자네가 진정 빠져나올 수 있네.”
그가 마지막 말과 함께 혼돈 속으로 사라지고, 유가의 꿈속은 완전히 어두워졌다.
급히 눈을 뜬 유가는 한참 어리둥절하다가 마침내 정신을 차렸다.
“사존, 안 주무세요?”
나른하고 사랑스러운 눈으로 눈을 반쯤 뜨고 있는 청년이 말했다. 목소리가 낮게 잠긴 보니 유가처럼 좀 전에 깬 것 같았다.
유가는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평정심을 되찾으려 애썼다.
“넌 네가 어디서 태어났는지 생각해본 적 있느냐? 너의 진짜 부모가 누구인지 같은. 아니면 너도 열두 마사처럼 천도가 창조한 존재인가 하는 그런 생각 말이다.”
유가는 긴장한 채 송기연의 대답을 기다렸다.
“해 봤습니다.”
송기연이 말했다. 그는 눈앞 사람의 난처한 표정을 보고 위로하듯 그의 뺨에 따뜻한 입술을 맞추었다.
“제가 천도가 창조한 존재라고 해도 제 기억 속에 그 사람은 없습니다. 감정 또한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제 인생은 늘 그 사람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난 것 같아, 그게 제일 힘들었습니다.
후에 우리가 그를 대적하는 날, 저는 무조건 최선을 다할 겁니다. 그건 그 사람이 감당할 몫입니다.”
“그래.”
유가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지만, 마음속 응어리는 풀리지 않았다.
그 집행자는 아무래도 너무 이상했다.
누구의 집행자인가? 누구를 대신한 집행자인가? 그리고 누가 정한 법칙인가?
어째서 늘 자신보다 약하다는 집행자는 어떤 모습으로든 변신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의 꿈속에도 나타날 수 있단 말인가. 혼돈의 힘을 장악한 자신은 왜 못하는 거지?
“사존, 더 주무세요.”
송기연의 부드러운 속삭임에 잔념이 끊겼다.
유가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그래, 다시 자자.”
이 일들은 신계에 가서 생각하도록 하고, 우선은 여기 일부터 해결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