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5장 회세정 (24/40)

제5장 회세정

그때, 막 향로에 들어간 유가는 당황스러웠다.

외관상 그는 경운전 관중들 앞에서 빛으로 변신해 향로 안으로 들어갔지만, 사실 그는 들어오자마자 털썩하고 바닥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땅에 부딪힌 허리에서는 통증이 밀려왔고, 앞엔 먼지가 한바탕 일었다.

유가가 급히 일어나 법결을 사용해 먼지를 털어내려했다. 하지만 체내의 진기가 꼼짝도 하질 않았고, 그가 아무리 재촉해도 움직일 생각을 안 했다.

심장이 철렁한 유가는 신식을 이용해 주변을 탐색해보려고 했으나, 신식 역시 진기처럼 몸속에 갇힌 채 움직이질 않았다.

유가는 자신이 진짜 갇혔다는 걸 깨달았다. 공중을 날 수도 없고, 진기를 사용할 수도 없었다. 고작 몸싸움을 할 수 있는 몸뿐인데, 지금 상황은 일반인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가 떨어진 곳은 사막 한가운데였다. 공기는 건조했고 눈에 보이는 거라고는 모래들 뿐, 생명체나 변경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회세정. 이름처럼 향로 안에 들어온 사람은 자신이 겪었던 인생의 큰일을 다시 걸어야 했다. 송기연이 유가보다 먼저 들어왔으니, 지금 회세정은 송기연의 전생으로 돌아가 있는 상태다. 즉 지금 유가는 송기연의 전생 기억을 보고 있는 것이다.

몸에 묻은 모래를 털어내며 유가는 속으로 송기연의 욕을 한바탕 쏟아부었다.

이 향로는 참 신비로웠다.

대승기의 수련자를 평범한 사람으로 봉쇄해 두었다. 아마 경창파 이전엔 절대 존재하지 않았을 물건이라는데 감히 손목을 걸어본다.

임관이 문 아래 제자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회세정은 아무래도 며칠 전에 그가 유가와 대적하려 새로 얻은 물건일 가능성이 컸다.

그럼 문제는 임관이 어떻게 자신이 경창파로 찾아올 걸 예상하고 있었냐는 것이다. 게다가 자신이 멍청하게 이 안으로 들어갈 거라는 건 또 어찌 알았던 걸까?

주위에 가득한 모래들을 둘러보며 유가는 어쩔 도리가 없어 머리를 긁적였고, 모래를 한 줌 집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그는 정말 바보처럼 송기연을 따라 이 안으로 뛰어들었다.

양성과 송기연의 말을 통해 그는 천도가 자신을 사지로 내몰았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천도는 형태도, 형체도 없고, 흔적도 없으니 정말 머리가 깨질 것 같다.

이건 딱 적군은 숨어 있고 자신은 밝은 곳에 서 있는 형상이었다. 그는 언제든 등장해 사람들을 조정하여 자신을 내몰 수 있는데, 자신은 늘 대처만 할 수 있었다. 대처도 하지 못할 땐 그저 죽음만 기다리는 꼴이다. 이번에 임관도 아마 천도의 조정을 받아 자신을 속여 회세정에 들어가게 한 걸 수도 있다.

하지만 말을 할수록 뭔가 이상했다. 만약 천도가 그렇게 대단하다면 직접 나서서 자신의 수련 경지를 봉쇄해 버릴 수도 있을 텐데, 어째서 직접 나서지 않는 걸까? 몇 번의 전생도 송기연의 손을 빌려 그를 죽음으로 내몰기만 했을 뿐, 천도는 모습을 드러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리고 유가 스스로도 죽은 적은 없던 것 같다.

순간 유가의 머릿속엔 대담한 생각이 지나갔다. 설마 천도는 자신을 아예 죽이지 못하는 것 아닐까?

아니면 이 세계엔 그를 진짜 소멸시킬 수 있는 존재가 없는 건가?

만약 정말 그런 거라면, 진짜 대단한 건 자신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 머리 위 하늘색은 갑자기 변했고, 천둥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맑았던 하늘엔 겹겹이 먹구름이 몰려왔고, 한가운데가 열리더니 사람 키 반만 한 상자 하나가 땅으로 떨어졌다. 다행히 두터운 모래 위로 떨어지며 큰 소린 나진 않았다.

하늘색은 다시 원상 복귀가 되었고, 천둥 소리도 잦아들었다. 유가는 저 앞에 떨어진 상자만 멍하니 보면서 그저 황당하기만 했다.

만약 자신이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저 상자 속에 있는 건 어린아이겠지?

유가가 성큼성큼 다가가 허리를 숙여 안을 들여다보니 역시나 아기가 갇혀 있었다. 붉은 입술에 눈을 꼭 감은 아기는 긴 속눈썹에 눈가엔 그늘이 져 있었다. 새근새근 숨을 쉬는데, 귀엽기 그지없었다.

설마 이 아기가 송기연?

순간 화가 치밀어 오른 유가가 그 투명한 상자를 열어젖힌 뒤 손을 뻗어 아이의 보드라운 뺨을 만지려 했다. 하지만 그대로 통과하였다.

손이 아이 얼굴에 닿으려고 하면 만져지지 않고 지나가 버려, 당황한 유가가 몇 번이나 시도해보지만 역시나 똑같았다. 아이의 얼굴을 만질 수가 없었다.

“제길? 이게 뭐지?”

자신의 뜻대로 되는 게 없자 유가는 화가 더 치밀어 올랐다.

송기연의 전생에서 이 시간은 아직 유가가 나오기 전이었고, 그래서 이 시간대에 그는 존재하지 않으니 이 아이를 만질 수 없는 것이다. 그래야 이 기억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으니까.

지금 유가는 그저 구경꾼이 되어 송기연의 기억 속 자신이 나올 때까지 얌전히 기다려야 했다.

기다리는 시간은 너무 지루했다. 유가는 송기연을 제외한 다른 건 만질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아기가 자고 있는 틈에 그 투명한 상자 속을 샅샅이 뒤졌다.

그는 그곳에서 익숙한 물건 하나를 찾았다. 전에 송기연이 목에 걸고 다니던 그 녹색 돌. 아기의 곁에 놓여 있는데, 따뜻한 게 굉장히 편안했다.

송기연은 지금까지 유가에게 이 돌이 자신의 심장이라는 얘기를 한 적이 없었고, 그래서 지금 유가는 이 돌이 뭔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왠지 자신이 처음에 가졌던 그 직감이 틀리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망책역에 그 가게에 들어섰을 때 그 노인과 가게의 물건들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할멈, 천천히 가요. 뭘 그리 급히 뛰어갑니까. 기다려요!”

숨이 찬 소리가 허공에서 들려오자 유가가 고개를 들었고, 수수한 옷차림의 부인이 허공 위를 걸어가고 있었다. 그 뒤엔 그녀와 비슷한 연배의 남자가 뒤따르고 있었다.

지금 유가는 그저 일반인일 뿐으로, 저렇게 수련 경지가 범상치 않은 사람들이 자신을 향해 오자 급히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주위를 둘러봐도 숨을 곳은 없었고, 어쩔 수 없이 앞에 선 그 부인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부인은 자신에겐 눈길도 주지 않고, 그 상자 속 아기를 보고 뒤에서 따라오던 남자의 손을 잡아끌며 말했다.

“영감! 봐요. 제 말이 맞죠. 여기에 아기가 있잖아요!”

“어? 진짜요? 좀 봅시다.”

소리를 따라 부인의 뒤를 바라보던 유가는 그만 눈이 동그래졌다. 뒷사람의 얼굴을 확인한 그는 그만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 이 사람은 그 가게 주인?!

두 사람은 유가를 보지 못했고, 그저 저 이불에 싸인 송기연만 바라봤다.

송기연을 바라본 그 가게 주인은 눈을 떼지 못했다. 그 남자가 오른손을 뻗어 한참 동안 뭔가 셈을 하더니 안색이 돌변했다.

“할멈, 이 아이 보통 아이가 아닌 것 같소. 우리 괜히 엮이지 맙시다.”

남자이 부인을 잡아끌었고, 아무래도 송기연이 이 모래 위에서 죽든 말든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이 어린아이가 구륜염양지(九轮艳阳地-아홉 개의 태양이 뜨는 곳)에 버려져 있는데, 우리가 구하지 않는다면 이 아이가 어떻게 살아남겠어요?”

부인이 남편의 이마를 손으로 툭툭 찌르며 화를 냈다.

“종일 계산만 해댈 줄 알죠. 무슨 일이든 계산부터 해대도 사람의 생명을 계산합니까? 이 아이가 어떤 내력을 갖고 있든지 난 상관 안 해요. 뭐 나중에 세상을 놀라게 할 일을 저지른다고 해도 일단 내가 이 아이를 만났다는 것 자체가 인연인 거예요. 당신 동의 따위 필요 없어요. 이 아이는 내가 거둘 거니까!”

구륜염양지?

가슴이 철렁한 유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쩐지 사막이 엄청 뜨겁다 했어!

전에도 언급했지만 수진대륙의 지형은 독특했다. 북쪽엔 얼음으로 뒤덮인 극한의 땅이, 남쪽엔 극도로 깊은 귀곡심연이, 동쪽엔 불처럼 뜨거운 구륜염양지가, 서쪽엔 신비로운 요수삼림이 있었다.

그중 구륜염양지는 비유일 뿐이지 정말 태양이 아홉 개가 뜨는 곳은 아니다. 지형도 독특하고 기온도 굉장히 높았고, 사막과 화산이 병존했다. 아직 활화산이라 달마다 분화하여 생존하는 생물도 극히 적었고, 사람도 거의 없었다.

다만 극소수의 영과와 요수들은 이 정도 기온에서 살 수 있었는데, 전에 그 윤회과도 아구가 이곳에서 찾아온 거였다.

그렇다면 송기연은 전생에 여기에서 살았던 걸까?

“구하기 싫다는 게 아니라 이 아이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요! 그 아이를 구한다면 후에 저 아이의 손에 죽게 될 거예요!”

화가 난 남편은 미간을 한껏 찌푸렸다. 자신의 부인이 이 아이를 포기하게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여인의 천성은 어쩔 수 없이 선량했다. 그녀를 절대 막을 수 없었다. 이 핏덩이 같은 아기를 눈앞에 두고 고작 죽음이 두려워 방치할 수가 있을까?

“허튼소리 하지 말아요! 당신이 싫다면 나 혼자 키우겠어요!”

부인은 송기연을 안고 그 투명한 상자를 들고 그대로 허공을 날아갔다.

그 광경을 본 남편은 지금 어떤 말을 해도 소용이 없다는 걸 깨닫고 급히 뒤따랐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며 송기연을 잘 거두자는 말을 하고서야 부인을 달랠 수 있었다.

이 일은 곧 신묘한 계책을 세우게 했다.

재난을 피하고 평안하길 바라던 ‘절반 신선’은 하나의 이치를 깨달았다.

겪어야 될 일은 절대 피할 수 없다는 것.

부인이 송기연을 데려가는 걸 지켜보던 유가는 갑자기 자신이 뭔가 잊은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고, 그 순간 손바닥에서 따뜻한 촉감이 느껴졌다. 손바닥을 펴보다가 그만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그래! 이 녹색 돌을 제자리에 돌려놓는다는 걸 까먹었잖아!

유가는 당황스러웠다. 이 녹색 돌이 아이의 옆에 놓여있었다는 건 아이에게 굉장히 중요한 물건이라는 건데, 그게 자신의 잘못으로 자신에게 왔으니 이제 아이는 어떻게 되는 걸까? 설마 무슨 일이 생기는 걸까?

따라가야 해! 빨리!

유가는 급히 두 사람이 간 방향으로 쫓아갔다. 하지만 그의 수련 경지가 봉쇄되어 아무리 뛴다고 해도 어떻게 하늘을 나는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잠깐 사이에 저 앞으로 멀어져갔고, 순식간에 흔적조차 보이질 않았다.

“후우—후우-!”

온몸이 땀에 젖은 유가는 그냥 땅바닥에 주저앉고 얼굴에 땀을 닦으며 숨을 골랐다.

“이게 뭐야.”

그는 그대로 바닥에 드러누웠다. 하지만 태양이 너무 강렬하여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 순간 보석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그와 2리(里) 정도 떨어진 거리에 붉은색 식물이 덩그러니 자라 있었고, 위쪽엔 동그랗고 옹골진 열매가 맺혀 있었다. 짙은 영기도 뿜어냈다.

유가는 물고기가 튀어 오르듯 벌떡 일어나 그대로 달려갔다. 자신의 두 눈을 비벼보자, 확실히 눈앞에 이 열매는 전설 속 백골에도 살을 붙여준다는 윤회과였다.

어떻게 이 회세정 안에서는 생각하면 다 눈앞에 나타나지? 게다가 전부 다 익숙한 것들이잖아!

시간을 셈해보면 지금은 천 년 전이다.

윤회과는 몇백 년에 한 번씩 피어나 딱 한 번 결실을 맺는데, 이 윤회과가 자신이 천 년 후 송기연을 살리는 데 사용한 그 윤회과 일지도 몰랐다.

그런 생각이 들자 그는 열매 두 개를 혹시나 후에 사용하지 못할까 봐 뿌리까지 뽑아냈다.

지금 그는 수련 경지가 봉쇄되어 반지 속 공간을 열 수 없어 그저 품에 소중히 품었다. 머리는 엉망인 남자가 가슴팍엔 볼록한 물건을 품고 있다. 이 모습을 왕다국이 봤다면 얼마나 비웃을지 눈에 선했다.

가짜 가슴을 한 채 사막을 걷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유가는 자신이 길을 잃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건 그의 탓이 아니다. 누구든 이 넓은 사막에서 아무런 이정표도 없이 걷는다면 길을 잃을 수밖에 없다.

하늘색이 점점 어두워지자 유가는 하는 수 없이 제자리에서 이제 어떻게 할지 고민했다. 비록 지금 자신이 수련 경지를 쓸 수 없지만, 몸은 여전히 튼튼해서 물과 음식이 없어도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사막에는 온통 먼지뿐이었고, 한참을 걸어 다닌 유가의 옷과 신발엔 온통 모래 먼지가 가득했다. 얼굴은 땀과 모래가 뒤섞여 완전히 엉망이었다.

아무래도 이대로 가다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몸에서 나는 악취에 죽을 것 같았다.

송기연의 전생은 몇 백 년은 될 것이고, 회세정도 몇백 년의 기억을 모조리 보여줄 순 없을 테니 분명히 시간을 건너뛸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냥 이 모래 위에 앉아서 기다리기로 했다.

아니나 다를까 유가가 이곳에서 수련 경지를 어떻게 회복할까 고민하기 시작한 지 이틀이 채 지나지 않아 그의 눈앞에 광경이 바뀌기 시작했다. 모래와 뜨거운 열기는 사라졌고 곧 새로운 광경이 펼쳐졌다. 유가가 엉덩이를 대고 앉아있던 푹신한 모래는 딱딱한 돌로 바뀌었고, 주위는 시끌벅적한 시장터로 변했다.

그가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기도 전에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비켜.”

“나?”

유가가 무심결에 대답하고 고개를 돌리자, 그건 자신에게 한 말이 아니었다.

키가 사 척 남짓한 어린아이가 무표정한 얼굴로 손에 검을 쥐고 있었다. 유가가 아닌 자신 앞에 있는 저보다 훨씬 키가 큰 소년을 향해 말했다.

“길을 막고 있잖아.”

“안소선(安少宣), 적당히 해. 어디 길에서 주워 온 잡종 자식 주제에 우쭐대는 거야!”

“그러니깐. 저런 표정 짓고 저러고 있으면 누가 겁먹을 줄 알고!”

몇몇 소년들이 아이의 검을 빼앗아 땅에 던진 뒤 짓밟으며 말했다.

“너 같은 자식이 감히 능운검파(凌雲劍派)에서 검을 수련하겠다고? 꿈도 야무지군!”

아이가 일방적으로 괴롭힘을 당했고, 유가는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안소선?

능운검파?

그가 땅에 떨어진 낡은 검을 보자,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설마 저게 창결검?

헐! 큰일 났네.

송기연 전생의 정보량이 너무 방대하여 유가는 잠깐 자신의 머리가 돌이 된 느낌이었다. 회세정은 그를 송기연의 기억 속으로 이끌었다. 눈앞에 저 어린아이의 모습도 확실히 송기연의 어릴 적 모습과 똑같았다.

그렇다면 지금 안소선이 송기연이고 오래된 검이 창결검이다.

그럼 능운검파는?

……됐다. 우선 좀 더 지켜보자.

송기연은 저 녀석들의 비웃음은 아랑곳 않고 쭈그리고 앉아 저 검을 주우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소년 하나가 또 짓밟아 주울 수가 없었다. 소년은 고개를 들었고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치워.”

“네가 치우라면 내가 치워야 해? 계속 밟을 건데 어쩔래!”

송기연은 더는 말을 하지 않고 소년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얼마나 지났을까 소년이 갑자기 발을 떼고는 뒤로 물러나며 욕을 퍼부었다.

“이 괴물아!”

그대로 도망갔다.

다른 소년들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없었지만, 친구의 표정을 보고는 자신들도 더 오래 있고 싶지 않았다.

송기연이 뭔가 이상해도, 애써 감추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이번엔 운 좋은 줄 알아.”

그러더니 똑같이 가 버렸다.

구경하고 있던 행인들도 구경거리가 사라지자 모두 흩어졌는데, 송기연의 앞에 서 있던 유가만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가 생각하기에 지금 이 녀석은 많이 이상했다. 아무래도 사람들에게 그의 몸에서 뭔가 빠져나간 듯한 인상을 주는 것 같다.

유가가 고심하고 있는 사이 송기연은 이미 검을 주워 소매로 깨끗하게 닦았고, 품에 껴안은 채 저 앞에 가게로 향했다.

두 사람의 어깨가 스쳐 지나가는 순간 송기연이 걸음을 멈추었다. 뭔가를 느낀 듯 주위를 둘러보다가 아무도 없자 다시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깨가 스친 순간 유가는 이 녀석이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아. 송기연은 종일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고 있다.

모욕을 당한 분노, 괴롭힘을 당한 억울함, 조롱당한 굴욕감. 보통의 사람이라면 드러내야 하는 감정을 그는 전혀 드러내지 않았다!

무서워.

이건 비과학적이다.

어린아이가 이런 일을 겪었는데, 조금의 감정도 드러내지 않는다니, 송기연의 이런 모습은 확실히 문제가 있었다. 유가는 목욕하고 싶었던 기분은 날려 버리고, 무서워 도망간 소년들에게 공감하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이를 따라 그 가게로 들어갔다.

송기연이 들어간 곳은 법기 가게였다. 안에는 널찍한 방이 두 개나 있었고, 밖에는 하품의 법기가, 실내엔 중품 법기가 보물처럼 놓여있었다. 모든 사람이 유가처럼 상품 법기를 구하기는 쉽지 않다. 이런 소도시 가게에 중품 법기가 있는 것도 이미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린아이는 너무 작아서 까치발을 하고서야 간신히 주인 앞 궤짝 위에 손이 닿았고, 손에 든 검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고쳐 줘.”

그러곤 잠시 멈칫하더니 주머니에서 상품 정석 몇 개를 꺼내 궤짝 위에 올리며 말했다.

“여기 사례금.”

그 말을 듣고 있던 유가는 고개를 내저었다. 저 녀석의 말을 듣고 있자니 누구든 한 대 쥐어박고 싶어질 게 뻔했다.

그가 이런 생각을 하는 만큼 저 가게 주인도 같은 생각을 했을 터다. 하지만 상품 정석들을 보고는 주인은 화를 삼켰다.

가게 주인이 그 낡은 검을 들고 송기연을 바라보는 눈빛은 꼭 머리가 모자란 놈을 보는 눈이었다.

“공자님, 이 검은 완전히 폐물이에요. 아무런 영기도 느껴지지 않잖아요. 이 화정석으로 이 검을 수리하느니 이 정석들로 하품 보검을 구매하는 게 더 낫겠어요.”

송기연을 거둔 사람은 ‘절반 신선’ 안필화(安必和)였다.

이 작은 도시는 그 댁에서 지은 것이라 여기 있는 사람들은 송기연을 싫어했지만, 겉으로는 ‘안 공자’라고 불렀다.

“고쳐 줘.”

송기연은 가게 주인의 의견은 안중에도 없는 듯 다시금 같은 말을 반복했다.

“알겠어요. 그럼 삼일 뒤 정오에 찾으러 오세요.”

가게 주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쨌든 본인에겐 남는 장사니 송기연이 원하는 대로 해 주면 그만이다.

아이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막 가게를 나서려다가, 시선을 끄는 물건 하나를 발견했다.

이상함을 느낀 유가가 아이의 시선을 따라가자, 그 순간 눈이 붉어졌다.

벽에 걸린 하품 법기들 중 검붉은색에 눈에 띄는 물건이 하나 있었다.

역시 십오 년 전 유가가 친히 박살 낸 붉은 가면이었다.

송기연은 자박자박 걸어가서 그 가면을 써보려 했다. 하지만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손이 닿지 않는지 그 모습이 우스꽝스러웠다.

주인이 더는 두고 볼 수 없어 도와주려던 찰나에 그 가면이 스스로 떨어졌고, 송기연이 정확히 두 손으로 받아 품에 넣었다.

“나 이거.”

어린아이가 주머니에서 정석 몇 개를 더 꺼내어 주인에게 주었다.

“이 가면 내 거야.”

주인은 그 순간 그 가면이 스스로 떨어진 게 아무래도 이상했다. 찜찜한 표정으로 정석을 받아들고 몇 개를 주냐고 물어보려는 순간, 송기연은 이미 그 가면을 품에 안고 가게 문을 나서고 있었다.

착한 일을 한 유가는 아이를 뒤에서 따르며 녀석이 안 왕부의 대문 안으로 들어가는 걸 지켜보았다. 그리고 또 녀석이 방문을 닫고 가면을 끌어안고 멍하니 있는 모습을 지켜봤다.

잠시 후 하인이 와서 식사를 알리자, 송기연이 자리에서 일어나 베개 옆에 가면을 내려놓고 문을 나섰다.

유가가 달려가 그 익숙한 가면을 바라보았고, 형용할 수 없는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정말 그 말 대로였다.

인연(因緣).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

녹색 돌과 가면의 역사가 이렇게나 유구했다니.

송기연의 전생까지 거슬러 올라왔다.

그는 지금 더욱 궁금해졌다. 송기연이 무슨 일을 겪고 그를 죽이려한 것인지. 천도는 또 어떻게 그를 조종한 것인지. 그리고 그 능운검파라는 건 도대체 또 뭔지?

경창파는 언제 나오는 거지? 《천진결》은 어떤 형태로 나타날까?

끝이 없는 생각만 반복됐고, 유가는 정말 정말 목욕을 하고 싶었다.

* * *

안필화는 나이가 있었지만 풍류를 아는 노인이었다. 왕부의 정자와 누각은 고상하게 설계되었고, 뒷산엔 온천탕을 파놓아 초봄의 날씨에도 열기가 피어올랐다.

유가는 눈을 반짝이며 옷을 벗어 던지고 그대로 탕 안으로 들어가 숨을 골랐다.

휴식을 즐기고 나서야 그는 납득이 되질 않았다. 이 회세정은 도대체 뭘 하는 거지? 단순히 송기연의 기억을 보는 것이라면 이 안에 그의 눈앞에 있는 모든 것은 환상일 뿐이며 모든 걸 만지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지금 유가는 송기연을 제외한 모든 걸 만질 수 있었다.

윤회과나 녹색 돌, 검붉은 가면, 그리고 가지려고 하면 얼마든지 가질 수 있었다.

수련 경지가 봉쇄된 것 빼고는 마치 시공을 뛰어넘어 정말로 천 년 전으로 돌아가서 실제 송기연의 전생을 겪고 있는 것 같다.

게다가 자신과 같이 이곳으로 들어온 송기연의 모습은 보이지도 않았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자신은 줄곧 저 무표정한 안소선만 바라보고 있었다.

뚜벅뚜벅.

점점 가까워지는 발자국 소리에 유가의 사고가 멈추었다. 그는 급히 옷을 근처 풀숲으로 던져 버리고 자신은 욕조 안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역시 아무도 그를 보지 못했고 굳이 숨을 필요가 없었다.

그렇게 길지 않은 그림자가 가까워지자, 역시나 어린 송기연이었다.

그도 오늘, 길에서 한바탕 뒹굴었기에 밥을 먹자마자 씻으러 온 것이다.

조금도 피할 생각이 없던 유가는 멍하니 그가 옷을 벗는 걸 지켜보았다. 송기연이 어린 형제를 밖으로 노출한 순간 그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누구냐?”

송기연이 막 탕에 발을 들이던 순간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자신과 멀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자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아무도 없었다.

유가는 웃다가 옆구리가 쑤실 지경이었다. 원래 남의 것을 보고 이렇게 비웃으면 안 되는 것인데, 저 건은 너무 귀여웠다. 전에 자신의 앞에 있던 누군가의 것과 비교도 안 되게 귀여워서 한 번쯤은 꼭 놀려주고 싶었다.

지금은 우선 생각에서 멈추었다. 지금 두 사람은 서로 닿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고, 송기연을 놀리고 싶지만 다른 방법도 없었다.

한참 동안 아무도 대답이 없자 송기연은 별생각 않고 그대로 탕 안으로 들어가 목욕을 했다.

유가는 지금 이 어리고 꼴이 말이 아닌 송기연을 보고 속으로 감탄했다. 처음 천하 강변에서 송기연을 구한 뒤 그가 성장하는 걸 쭉 지켜보았고, 자신에게 한 모든 바보 같은 짓 하나하나가 잊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렬했었다.

좋아하는 감정은 후에 혈연보다 깊은 정으로 변했고, 떼어낼 수도, 잊을 수도 없이 늘 따라다니는 감정이었다.

그가 손을 뻗어 송기연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한숨을 내쉬었다.

“누구야!”

송기연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직감이 근처에 사람이 있다고 알려 주었다. 따뜻한 숨결이 느껴졌지만 아무것도 보이질 않았고, 그의 눈엔 그저 뻥 뚫린 산과 온천만 보였다.

송기연은 눈을 찌푸리며 손을 뻗어 제 주위의 물을 휘휘 저었다. 아이의 손은 그대로 유가의 몸을 통과했고, 투명한 물이 출렁였다.

유가는 그가 뭘 하는지 모르겠지만 기분은 이상했다. 누군가 눈앞에서 자신의 몸을 통과하는 게 그렇게 좋지만은 않아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그가 움직인 순간 송기연도 멈칫하더니 손동작을 멈추고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잠시 뒤 자신의 왼쪽 심장을 움켜쥐더니, 아이는 호흡이 거칠어지며 고통스러워했다.

“가지 마, 가지 마……”

유가는 손을 쓸 수 없었다. 지금 그는 송기연을 만질 수 없었고, 도와줄 방법이 이 없어 안절부절못했다.

고통스러워하던 송기연의 이마엔 초봄의 쌀쌀한 날씨임에도 식은땀이 가득 흘렀다. 작은 온몸도 덜덜 떨었다. 반각 정도가 흐른 뒤 그는 송기연은 점점 안정을 되찾았고, 온천의 돌벽을 짚고는 숨을 골랐다.

유가는 아이가 옷을 입고 비틀거리며 방을 돌아가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좋지 않아 쫓아가려고 했다. 한데 그 순간 중요한 문제가 떠올랐다.

목욕하러 오기 전에 갈아입을 옷을 훔쳐 놓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옷으로 중요 부위만 가린 채 하인 숙소로 향했다. 수수한 옷더미 속에서 옷을 고른 뒤 그대로 송기연을 찾아갔다.

송기연의 그런 모습에 확실히 마음이 놓이질 않았다. 전에 그가 딱 심장병이 도졌을 때 모습이었다. 설마 저 녀석 무슨 병이라도 있는 건가?

그의 머릿속이 뒤죽박죽되다가 갑자기 신묘도에서 소십이를 마주쳤을 때 그 아이가 해줬던 말이 떠올랐다. 그때 그 녀석이 유가, 자신의 심장을 가리키며 무언가 부족하다는 말을 했다. 그땐 전생에 대해 아무런 기억이 없을 때였다.

설마 지금의 송기연은 그때 자신과 같은 상태인 건가? 일부 기억을 잃은 거야? 아니면 중요한 걸 잊은 건가?

유가의 단편 기억 속, 전생의 송기연은 늘 표정이 차가워 누구도 가까이하지 않았고, 사람을 죽일 때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일반적인 사람이 어떻게 저럴까?

자신을 예로 들어보면, 혼이 두 개로 나뉘어, 하나는 현대의 약골 집돌이였고 다른 하나는 잔혹한 마존이었다. 두 개가 합쳐져야만 완전해지는 것이다.

그는 천도가 어떻게 사람을 조종하는지 모른다.

만약 《천진결》로 그의 기억을 조종하는 거라면 감정은? 감정은 제일 조정하기 어려운 것이다. 평범한 사람이 저렇게 모든 것에 아무런 감정이 없을 수가 없으니, 그냥 송기연은 천생이 감정이 없는 것이었다.

천생이 감정이 없는 거라고?

그때 유가가 녹에 쥐고 있는 녹색 돌이 은은한 빛을 띠며 따뜻해지 시작했다. 마치 뭔가를 알려 주려는 것 같았다.

유가가 손바닥 위의 돌을 물끄러미 보다가, 갑자기 송기연이 이 녹색 돌의 행방에 대해 자신에게 말해준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전에 그의 목에 이 물건이 없던 걸 신경 쓰지 않았으나, 지금 생각해 보니 이상했다. 송기연은 자신이 준 물건을 귀중하게 여거 잃어버렸을 가능성은 전혀 없었고, 그렇다면 그 돌은 어디로 간 것일까.

너무 많은 생각을 했다. 유가는 오늘은 그만 생각하기로 했다.

송기연의 방문 앞에 도착한 유가가 마치 바람 때문에 저절로 열린 것처럼 창문을 열었다. 그러고는 송기연이 창문을 닫으러 오는 그 틈에 뛰어올라 방 안으로 들어갔다. 꼭 좀도둑 같은 모습이었다.

수련 경지가 없으니 방법이 없었다. 모든 일을 이런 식으로 해결할 수밖에.

가만히 서 있는 유가가 창백한 송기연의 얼굴을 보고 참지 못하고 물었다.

“좀 전에 왜 그런 것이냐?”

하지만 송기연은 예상한 듯, 예상치 못한 듯 그의 소리를 듣지 못하고 창문을 닫고서 침대로 돌아가 앉았다. 그리고 그 붉은 색 가면을 넋을 놓고 바라보기 시작했다.

“어이! 꼬마야! 내 말이 들리니?”

송기연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말도 안 돼.

좀 전에 온천에서 내가 웃는 소리를 듣지 않았었나?

근데 지금 이 큰소리에는 왜 아무런 반응이 없는 거지?

이 회세정 대체 뭐 하자는 거야?

기가 막힌 유가가 책상 쪽으로 걸어가 붓과 종이를 집어 쓱쓱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안소선, 넌 네가 송기연이라는 걸 알고 있느냐? 좀 전에 왜 그런 것이냐? 어디가 아픈 것인가?’

하지만 그가 그 종이를 아이의 앞에 가지고 갔을 땐 놀랍게도 글자가 지워지기 시작했고, ‘송기연’ 세 글자는 완전히 깨끗하게 사라져 버렸다.

깜짝 놀란 유가가 붓을 들고 다시 글씨를 썼다.

‘난 유가다, 널 찾아왔다.’

하지만 종이 위 글자는 또 사라졌다.

‘유가’ 이 두 글자는 방금 ‘송기연’과 똑같이 완전히 지워졌다.

믿을 수 없던 유가는 계속 글을 쓰기 시작했고, 곧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일들도 적기 시작했다. 하지만 종이 위엔 아무 글자도 남질 않았고, 쓰는 족족 전부 사라지자, 유가는 소름이 끼치고 말았다.

하지만 여기서 그치지 않았는데, 그가 글을 쓸 때마다 자신도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하더니 마지막엔 손끝이 투명해졌다.

책상 위 움직임은 송기연도 자연스럽게 알아챘다. 그가 책상 앞으로 걸어갔고, 종이와 붓이 제멋대로 움직이는 것을 보고 입을 열었다.

”누구야? 왜 날 따라다니는 거야?”

붓놀림을 멈춘 유가가 송기연의 검은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갑자기 화가 치밀었다.

아무래도 자신과 송기연이 이 회세정에 완전히 속은 것 같다!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송기연이 맞고, 이 연극을 꾸민 자는 자신이 송기연에게 어떤 정보도 알려 주지 못하게 자신을 농락하고 있는 것 같았다.

송기연이 붓이 움직이는 걸 지켜보자, 그 순간 종이 위에 글자가 나타났다.

‘이 개자식아, 빨리 깨어나!’

탁—!

붓이 책상에서 떨어졌고, 더 이상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사흘 후 안 왕부의 하인 하나가 정원 진흙 속에서 윤회과를 발견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며 온 성이 발칵 뒤집혔다. 그래서 안필화는 어쩔 수 없이 집을 떠나 이 성을 멀리 떠나야 했다.

* * *

송기연의 눈앞에서 사라진 유가는 온몸이 사방에서 갈갈이 찢기는 듯한 극심한 고통을 영혼까지 느껴야 했다.

그 극심한 고통이 지나간 후 눈앞의 광경이 또다시 바뀌었다. 그가 있는 곳은 전에 꿈에서 봤던 그 망망대해였다.

유가의 영혼이 소멸했을 때, 자신은 죽지 않고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다. 꿈속에서 마치 어머니 품속처럼 따뜻하게 느껴졌던 흰 안개가 늘 자신에게 한가지 질문을 하는 소리가 들려왔었다.

‘혼돈이 시작된 후 천지가 나타났다. 무엇이 천도인가? 무엇이 법칙인가? 유가, 너는 알고 있느냐?’

무슨 말일까 생각하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 하지만 이번엔 목소리 뿐 아니라 사람의 모습도 보였다.

“누구냐?”

널찍한 흰 장포를 두른 입은 노인, 얼굴은 온화하고 눈썹과 수염은 비교적 길고, 몸은 왜소하여 필적하고 싶은 압박감은 전혀 생기지 않았다. 유가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당신이 날 여기로 데려온 것이오?”

“맞다. 내가 널 데려왔다.”

그의 앞에 서 있던 노인은 신발도 신지 않은 발로 언제든 사라질 수 있듯 안개를 밟았다.

“왜 날 여기로 데려온 것이오? 설마 당신이 회세정으로 날 농락한 천도란 말이오?“

유가가 몸의 힘을 끌어올렸다. 그가 천도가 맞다면 한판 제대로 붙으려 했다.

“아니, 당연히 아니다.”

노인이 누명을 벗으려는 듯 손을 크게 내저었다.

“나는 혼돈 속에서 태어난 천지 집행자다. 따져 보면 우린 형제 관계라고 할 수 있지.”

“응?”

방금까지 불타오르던 살기가 한순간에 누그러졌고, 완전히 사라졌다.

“영감, 농담하시는 거죠? 다른 건 따질 필요도 없고, 생긴 걸 보십시오. 이렇게 하나도 안 닮았는데 형제라니요?”

“어떻게 외모만으로 그리 생각하는가?”

유가에게 면박을 당했지만 영감은 승복하지 않았다. 영감이 순식간에 두 손으로 결계를 치자 그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일흔은 넘어 보이던 왜소한 노인이 유가 못지않은 준수한 청년으로 변신했다.

“외모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노인이 다시 결계를 치자 완전히 유가와 똑같은 모습으로 변신했다.

“만물에 구애받지 않는 집행자로서, 모든 모습으로 변신할 수 있지.”

“……”

유가는 자신의 대승기 수련 경지로서 저 노인과 한판 겨룰 수 있다고 여겼으나, 그의 경지를 보니 손을 쓰는 게 좋은 선택은 아닌 게 확실했다.

“알겠습니다. 그만 본론을 말하시죠.”

노인은 다시 처음 모습으로 돌아온 후 얼떨떨한 표정의 유가에게 대답해 주었다.

“당신이 보시다시피, 난 처리할 수 있는 일이 굉장히 많네. 그래서 대단해 보이겠지. 하나, 아무 일에나 관여할 수 있는 건 아니네. 단 한 사람 나조차 어쩔 수 없는 사람이 있지. 당신이 좀 전에 말했던 천도.”

노인은 말을 이었다.

“혼돈이 시작된 후 천지가 나타났다. 이 말의 뜻은 공간이 생기려면 먼저 혼돈이 있어야 한다. 혼돈은 천지 만물의 근본이지, 그래야 하늘과 땅이 있을 수 있어.”

“그게 나와 무슨 상관입니까?”

유가는 어이가 없었다.

“당연히 관련이 있다. 우선 내 말을 들어보시게.”

노인이 계속 말했다.

“사람이 수련을 할 수 있는 건 천지가 제공하는 영기를 떠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대승기에 도달하여 허공을 돌파하여 신이 되고 싶다면, 더더욱 천도법칙을 깨우쳐야만 하지. 하나 이 법칙을 누가 규정한 건지는 잘 알겠지? 그럼 이 법칙들은 반드시 정확할까?”

유가가 미간을 찌푸리며 고심하는 것을 보고 노인이 계속 말했다.

“이 법칙은 천도가 사사로운 욕심에 수진자들의 행동을 제한하는 도구로 사용하려 만든 것이네. 수진자들이 천도법칙에 따라 수련을 진행한다면, 천도는 그 사람들의 행동을 장악할 수 있고, 그들의 인생에 관여할 수 있지.

송기연이 그의 성공 사례다. 천도의 조정을 받아 당신과 대적하는 꼭두각시.”

송기연이라는 이름을 듣자 머릿속에서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일들이 전부 겹쳐지며, 유가는 가슴이 쓰렸다.

“사실 천도는 늘 성실했다. 하지만 당신이 나타난 후로 극도로 위기감을 느꼈지. 그는 모든 수단을 사용하여, 내 도움 없이도 당신을 사지로 밀어 넣겠지.”

“미친 것 아니오? 그가 대체 나와 무슨 관계가 있길래, 좀 거슬린다고 이렇게까지 하는 겁니까?”

유가는 아무래도 그 천도가 괜한 어리석은 짓을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누구에게 미움을 산 적이 없는데, 어찌 천도는 그를 해치려 한단 말인가?

“방금 말하지 않았나. 당신과 나는 형제 관계라고. 그게 문제의 관건일세.”

노인은 진지하게 그에게 말했다.

“혼돈이 시작된 후 천지가 나타났다. 그리고 당신은 혼돈에서 탄생했고, 천지보다 앞선 유일한 생명체지. 당신은 천지를 초월할 잠재력이 있으니, 언젠간 천지 위에 설 수 있을 거야. 그때 스스로 일파를 만들어 천도법칙에 갇힌 수진자들을 질곡에서 벗어나게 한다면 진정한 수행의 길을 얻을 수 있을 걸세!”

“잠깐, 우선은 그런 말씀은 하지 마십시오.”

유가는 조금 이해가 가질 않았다.

“당신께선 좀 전에 저와 형제 관계라고 하셨는데, 어째서 혼돈 후 그리고 천지가 나오기 전에 탄생한 사람이 유일하게 저 혼자라고 하십니까?”

“나?”

노인이 쓴웃음을 지었다.

“난 혼돈의 말미에 태어나, 힘에 제한이 있다. 수준 높은 능력을 사용할 순 있지만, 실체는 없네. 지금은 이렇게 네 꿈속에 나타나 공간을 넘나들 수 있으나, 수많은 지면과 수진자들을 휘두르는 천도에 대항하고 싶지만 할 수 없네.”

“그렇군요.”

유가가 미간을 찌푸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당신을 어떻게 믿죠?”

“이렇게까지 말했는데 아직도 날 못 믿겠단 말인가?”

노인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말의 앞뒤가 이토록 딱딱 맞아떨어지는데, 당신이 하는 말이 진실이라는 걸 제가 어찌 알겠습니까?”

유가가 입꼬리를 올렸다.

“제게 실력을 보여주시죠. 송기연을 제 눈앞으로 데려다주십시오.”

“그건 내가 정말 할 수 없는 걸세.”

노인이 계속 쓴웃음을 지었다.

“당신도 이미 알아차렸을 걸세. 이 회세정엔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이건 사실 시공을 넘나드는 입구이지만, 법칙에 위배되는 존재일세.

역사는 바꿀 수 없고, 인간도 과거로 돌아갈 수 없지. 만약 운이 좋게 과거로 돌아갔다고 해도 예상치 못한 일들이 발생할 수도 있네.”

그가 정색하고 계속 말했다.

“사실 그건 당신과 송기연 그리고 고금성이 가장 잘 알겠지.”

“왜 우리가 가장 잘 알 거로 생각하는 거죠?”

“당신이 처음 넘어왔을 때를 기억하는가? 당신 절반의 영혼이 망가져 강제로 이 세계로 소환되어 송기연에게 살해당했지. 사실 그때 모든 게 끝났어야 했네. 천도도 원하는 대로 당신을 멸할 수 있었지.

하지만 예상치 못하게 송기연이 엽망지의 시간을 돌려놓기 위해 법칙을 파괴했고, 역사엔 적지 않은 변화가 일어났네.

지금 천도가 독단적으로 회세정을 매개로 두 사람을 다시금 시공을 건너게 한다면, 자네들이 겪었던 숱한 과거는 또 사라지고, 지금의 송기연은 저 천도의 통제를 받고 있는 어린아이가 대체할 걸세.

천도는 이번 기회를 이용해서 당신의 존재를 철저하게 말살하거나, 송기연이 후에 당신에게 생길 수 있는 감정을 완전히 없애 버릴 거야.”

노인이 묘한 표정으로 유가에게 물었다.

“당신이 손에 쥐고 있는 그 녹색 돌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가?”

유가가 미간을 찌푸리며 따뜻한 녹색 돌을 꽉 쥐었다. 그리고 의아한 표정으로 노인을 보았다.

“그건 송기연의 심장이자, 그의 감정이지.”

“뭐?!”

유가는 심장이 철렁했다. 어쩐지 전에 송기연의 모습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감정이 없었던 거라니! 뭔가가 떠오른 듯 그가 급하게 물었다.

“설마, 전에 송기연이 천도에게 이용당한 게 《천진결》 말고도, 그가 감정이 없는 것도 연관이 있는 것이오?”

감정이 없는 삶은 어떤 느낌일까?

희로애락이 없고 심지어 자신이 왜 사는지도 모른 채 다른 사람에게 이용당했다. 원래 송기연은 이런 삶은 살아왔던 것인가?

“그래, 그의 인생엔 선택이란 게 없었지. 아마, 환생한 후로 감정이 생겼고, 당신을 좋아한 게 그가 유일하게 한 선택일 거야.”

아무래도 노인은 송기연을 동정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천도는 그를 다시 과거로 돌려보내 당신을 향한 감정을 박살 낸 뒤, 자신의 꼭두각시로 이용하려 하고 있지.

난 집행자로서, 역사를 어지럽힐 수도, 송기연을 당신 눈앞에 데리고 올 수도 없네. 하지만 당신은 다르지. 당신은 송기연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사람이며 천도를 초월할 잠재력이 있네.

이 시간 동안 당신은 천도가 당신을 향한 송기연의 마음을 박탈하지 못하게 막으며, 천도법칙을 이해해야 하네. 천도법칙의 제한을 받지 않는 수련 방법을 만들어야만 속박당하지 않고 천도의 통제에서 벗어날 수 있네. 이건 당신과 당신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뿐 아니라 수천수만의 수진자들을 위한 걸세.”

짝짝짝!

유가는 체면을 세워주려는 듯 박수를 치며 웃었다.

“당신을 믿겠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목적이 무엇이든, 나를 이용하여 천도와 맞서려는 것이건 아니면 다른 것이든 상관없습니다. 하나 명심하십시오. 그 수진자들이나, 무슨 세계를 구할 대의 같은 건 나랑은 무관한 겁니다.

난 그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구하려는 것일 뿐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그를 다치게 한다면, 그게 천도라고 해도 가만히 두고 보진 않을 겁니다!”

“내가 집행자로만 존재할 수 있고 왜 영원히 당신과 같은 힘을 가질 수 없는지 그 이유를 얼추 알 것 같네.”

노인은 가슴에 무언가 느끼는 바가 있어 움찔했다.

“난 당신 같은 집념이 부족했군. 인간의 감정은 제일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며 모든 고정불변의 법칙 위에 존재하지. 당신은 아무래도 송기연에 대한 집념 때문에 천도에게 발목이 잡힌 것 같지만, 천도도 마지막에 당신 감정을 희롱하는 데는 실패할 것이란 걸 예상 못 하겠지.”

노인의 모습이 점점 희미해지자 손 위로 결인을 쳤고, 두 사람 사이의 짙은 안개가 빠르게 응집하기 시작했다. 곧 그가 그리는 궤도에 따라 거대한 진형도가 완성되었다. 그는 유가의 몸속에 진형도를 넣으며 말했다.

“이 음양양역진(陰陽兩逆陣)이 후에 당신이 난관을 겪을 때 도와줄 것이다. 내가 주는 도움일세. 난 당신이 천도를 이겨 수천수만의 수진자들이 진짜 수련의 길을 걷기를 바라네.

그럼 난 신계로 가서 천도를 견제해야 하니, 이만 이별을 고하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는 유가의 앞에서 완전히 사라져 흔적도 없었다.

안개가 사라지자 유가의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왔고, 귓가엔 이명과 함께 희미하게 소란스러운 소리와 병기가 날카롭게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안소선, 그만해! 멈춰!”

“그냥 알아보려는 것뿐인데, 소선 넌 뭐 하는 거야?!”

“아, 또 안소선이군. 매번 장문인이 지지해 주시니, 저렇게 시합 때마다 날뛰는 것 아니겠어!”

“맞아, 저 눈빛 봐, 저 눈이 평범한 사람 눈이냐고. 눈 마주치고 있으면 얼마나 소름이 끼치는데……!”

안소선? 송기연인가.

유가는 아직도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눈앞에 광경이 서서히 선명해지길 기다렸다. 주위를 둘러보니, 어느 문파에서 무술 시합을 벌이는 경기장이었다.

무대 위는 굉장히 혼란스러워 보였다.

열 다 여섯 정도의 소년은 무표정하게 자신의 앞에서 다쳐 부축 받는 제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소년은 상대의 허리 쪽에 긴 상처와 자신이 들고 있는 피로 물든 장검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내 검을 더럽혔군.”

술렁.

그의 말 한마디에 장내가 소란스러워졌고, 곧 모든 이들이 말을 보탰다.

‘짐승’,’괴물’ 등 무대 위 소년을 향해 욕이 쏟아졌다. 아무래도 방금 전 그 말이 사람들의 심기를 건드린 것 같다.

녹색 돌이 뜨거워졌다. 천 년 전에 열두 마사를 죽일 때도 저 표정이었다. 소름 끼칠 정도로 냉정하고 무표정한 얼굴.

“수련하러 가지 않고 다들 여기 모여서 뭐 하는 거야? 이런 부상은 피할 수 없는 것이고 소선도 고의는 아니었을 텐데, 지금 다 같이 몰아붙이는 것인가? 됐다. 모두 그만 물러가거라. 혹여나 대장로께서 이 장면을 목격하시면 불호령이 떨어지실 테니.”

대전 밖에서 걸어 들어온 중년이 무대 위 제자를 꾸짖으며 쫓아냈다. 그리곤 더는 신경 쓰지 검에 묻은 핏자국을 닦고 있는 송기연에게 말했다.

“소선, 날 따라오라.”

소년이 고개를 끄덕인 뒤, 다 닦은 창결검은 검자루에 넣고 무대 아래 중년을 뒤따라갔다. 유가의 곁을 지나는 그 순간 송기연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무표정한 얼굴로 순간 몸을 잘게 떨었다.

“사존?”

잔잔한 호수에 던진 돌멩이처럼 파란이 일었다. 유가가 손을 뻗어 앞에 있는 사람의 팔을 잡아 보려 했지만, 여전히 전처럼 그대로 통과되었다.

“갑자기 장문인을 왜 부르는 것이냐? 네 사존께선 내일은 돼야 돌아오신다. 그때 그분께서 네가 한 짓을 아신다고 한들 널 어쩌시겠느냐.”

중년은 송기연이 부른 사존이 능운파의 장문인이라고 오해했다.

“됐다. 따라오라. 여기에 계속 있다가는 곧 사제들에게 공격을 받을 테니.”

정신을 차린 송기연은 다시 평정심을 유지한 채 순순히 중년을 뒤따랐다.

주먹을 꽉 쥔 유가는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그 영감의 말이 맞다면 이 아이는 송기연이었다. 천도에 의해 강제로 과거로 되돌아온 송기연.

지금 천도 쪽엔 견제하는 집행자가 있다. 그가 지금 생각해야 할 것은 어떻게 송기연의 주의를 끌어 그에게 진실을 알려 주고, 그 녹색 돌을 그에게 넣어주어 진짜 감정을 되찾아 주냐는 것이었다.

전제는 그런 능력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미간을 찌푸리며 송기연의 뒤를 따라가는 유가는 역으로 생각해 보았다. 그는 계속 천도에게 놀아날 수 없다. 그 영감이 지금 이 상황을 벗어나려면 반드시 자신만의 수련의 길을 깨우쳐야 한다고 했다. 만약 천도법칙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그럼 이 시공 속에서 자신의 수련 경지로도 송기연의 일에 영향을 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걸리는 게 있다.

천도는 송기연의 손을 빌려 역사 공간 속에서 자신을 제거하려 했다. 만약 지금 송기연이 모든 걸 다 기억한다면, 그럼 열두 마사를 살해하고, 신전(神戰)을 벌이고, 송가를 멸하고, 수옥에서 죽은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럼…… 자신과 송기연 사이에 있던 원한도 풀리는 것인가?

천하(天河), 신전(神戰), 죽음이 있지 않다면 모든 게 원만할 수 있다.

가슴이 뜨거워졌다.

이런 가능성을 생각하니 갑자기 마구 흥분되기 시작했다.

“소선, 내가 네 그 말투 좀 바꾸라고 말하지 않았느냐? 계속 그런 식으로 간다면 후엔 모든 이들의 반감을 살 것이다.”

그 중년이 송기연과 함께 걸으며 얘길 했다.

“아무리 재능이 있다고 해도, 사람들에게 악감정만 준다면 이 세계에서 높은 자리에 오르지 못한다. 네 천부적인 수련 재능은 이미 모든 제자들을 뛰어넘는다. 하나 그렇게 날카롭게 군다면 후에 고독한 최후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알아듣겠니?”

남자가 뒤돌아서 송기연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묵묵히 뒤를 따라오는 아이를 보자 정말 말을 알아들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휴, 넌 어쩜 매일 그렇게 과묵하게 있는 것이냐. 너와 말 섞기가 어쩜 이리도 힘든 것인지.”

남자는 좀 짜증이 났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 저 녀석의 본성이 나쁘진 않았는데, 그저 너무 무뚝뚝하고 마음속에 원칙이란 게 전혀 없는 것 같다. 인간관계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거나 아예 다른 사람을 신경 쓰지 않는 것 같다는 의심이 들었다. 하지만 장문인이 왜 이 녀석을 그렇게 챙기는지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남자는 송기연을 데리고 능운파의 장보전(藏寶殿)으로 가서 깊숙한 곳에 있는 밀실로 들어갔다.

“장문인께서 이번에 비경에 가셨고, 다른 장로를 시켜 물건을 가져오셨다. 네가 원하는 걸 골라 가져가게 하라 하셨구나. 잘 고르거라. 능운파 안에서 물건을 고를 수 있는 자격을 가진 행운의 제자는 너 하나일 테니.”

송기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평소에 안 하던 말을 했다.

“감사합니다, 장로.”

남자는 더 머무르지 않고 장보전 안에 송기연만 남겨둔 채 자리를 떴다.

재빨리 밀실로 들어간 유가는 두 눈으로 즐비해 있는 각종 상품 법기들과, 귀중한 영과와 심오한 공법이 가득한 장보전을 훑어보며 속으로 이 능운파의 내력에 감탄했다.

밀실 한가운데 서 있던 송기연이 미간을 찌푸리고 평소와 같은 차가운 표정으로 유가가 서 있는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누구십니까?”

무언가 떠오른 듯 갑자기 말을 했다.

“혹시 십 년 전 저를 욕하셨던 그분이십니까?”

“마, 맞다. 내가 그 사람이다!”

유가는 잠시 멈칫했지만 재빨리 흥분해서 대답했다. 하지만 송기연은 이번에도 듣지 못했고 여전히 부동자세로 그가 서 있는 곳을 바라봤다.

“내가 어떻게 그 일을 잊겠습니까.”

괴로운 유가가 머리를 움켜쥐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밀실에 뭔지 모를 물이 한 병 보이자, 바로 바닥에 쏟은 뒤 손가락으로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맞다. 내가 그 사람이다.’

왠지 모르게 송기연은 그 글씨체가 어딘가 익숙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기분도 이상했다. 그는 그 사람에 대해 더 알고 싶었고, 누군가에게 이렇게 질문을 하고 싶었던 적이 없었다.

“왜 내게 개자식이라고 욕하신 겁니까?”

“응?”

유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 녀석이 참 이상한 포인트를 궁금해했다. 게다가 무해한 얼굴에 저 호기심 가득한 표정이 드러나자 너무 귀여웠다.

유가는 속으로 우스워하며 계속 글씨를 적었다.

‘네 행동이 욕먹을 만하니 한 것이다. 거기에 넌 중요한 모든 걸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지.’

그는 차마 할 수 없는 말은 하지 않은 채 송기연과 이렇게 소통했다.

“제가 뭘 잊었습니까?”

‘넌 네가 죽을 만큼 사랑했던 사람이 나라는 걸 잊었다!’

뻔뻔스럽게 이 말을 쓰고 유가도 얼굴을 붉혔다.

“내가 사랑했던 사람? 전 누군갈 사랑했던 적이 없습니다.”

송기연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십오 년을 살면서 누군갈 좋아해 본 적이 없는데, 도대체 누구란 말이지?

‘봐라,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지 않은가.’

바닥에 쭈그리고 앉은 유가가 손가락을 움직이며 불평을 쏟아냈다.

‘그러니 욕먹을 만하다는 것이다. 개자식이란 말이 조금도 심하지 않는구나.’

“그렇습니까? 그럼 제가 왜 당신을 좋아한 겁니까?

‘내가 경국지색이니까.’

“……그건 어떤 얼굴입니까?”

‘보자마자 눈을 뗄 수 없는 얼굴이다.’

어린아이를 놀리는 유가는 점점 더 뻔뻔스러워졌다.

“그렇습니까?”

아무것도 비치지 않던 아이의 얼굴에 미미한 온기가 오르며 입꼬리가 살짝 휘었다. 공허한 눈에 잔물결이 스치고 아이는 가슴 한구석이 전보다 따뜻해진 느낌이었다.

“정말 직접 보고 싶군요.”

땅에 글자를 끄적이던 유가의 손이 그대로 멈췄다.

웃었다. 아이가 웃었다. 그것만으로 유가의 심장도 따라 뛰었다. 어느샌가 유가도 그를 따라 똑같이 웃고 있었다. 손을 다시 움직이며 땅에 글자를 쓰기 시작했다.

‘그래, 후에 실컷 보여 주마.’

바닥에 쓰여진 글자는 점점 말라갔다. 송기연은 그 희미해진 흔적이 아까워, 왠지 모를 괴로움이 솟구쳤다. 아무래도 정말 이 사람이 제가 아는 사람인 것 같았다. 그리고 왠지 그 기억을 절대 잊어버리면 안 될 것 같은 직감이 들었다. 영혼에라도 새겨야 할 것 같은, 그런.

“그럼 제가 왜 당신을 잊은 걸까요?”

흔들리는 송기연의 표정을 보고 유가가 급히 계속 적었다.

‘너와 나의 공통된 적 때문이다. 모든 근원은 그자에게 있다. 만약 우리가 그 사람을 해치우고 통제에서 벗어난다면, 우린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지.’

“해치워요?”

‘아, 그를 이기면 된다는 말이다.’

유가가 머리를 긁적이며 설명했다.

“당신 말은 재미가 있어요.”

송기연은 마음이 따뜻해졌다.

“이름을 아직 안 가르쳐 주셨네요. 이름이 뭐예요?”

‘내 이름은…….’

글씨를 적던 손이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유가는 자신의 몸이 다시금 투명해지는 걸 느꼈다. 저번처럼 밀실 속에서 점점 사라져가고 있었다.

왜지. 그에 대한 얘기를 해서 그런가.

그는 사라지고 싶지 않았다. 아직 저 녀석과 할 얘기가 많았다.

《천진결》을 수련하지 말고, 자신과 함께했던 사소한 것들을 알려 주고, 열두 마사에게 손을 대지 말라고 알려주고 싶었다.

그를 미워하고 싶지 않다고도 알려 주고 싶었다.

녹색 돌이 손에서 떨어졌다. 정신이 돌아온 유가는 마지막으로 땅에 글씨를 썼다.

‘이건 내가 주는 선물이다. 꼭 품에 품고 있어라. 절대 잃어 버리지 말고. 다시 찾아오겠다.’

“잠시만요, 아직 이름을 알려 주지 않으셨잖아요!”

녹색 돌이 덩그러니 밀실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익숙한 숨결이 더는 느껴지지 않아 송기연은 그대로 굳어졌다. 보아하니 그 사람 또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난 것 같다. 다음엔 또 언제 나타날는지.

송기연은 바닥에 녹색 돌을 집어 들었다. 그 사람의 말이 맴돌았다. 소년은 공간 속에서 줄 하나를 꺼내 녹색 돌에 구멍을 내고 줄을 걸었다.

그 순간 이 느낌이 너무 익숙했다. 전에도 누군가와 이 동작을 똑같이 한 것 같았다.

같은 동작, 같은 돌.

‘기연, 오늘 9번이나 이 돌을 꺼낸 것 알고 있느냐? 이 돌이 왜 그리 좋은 것이냐?’

‘그야 사존께서 주신 선물이니깐요.’

“으윽!”

영혼이 찢기는 듯한 통증이 덮쳐왔다. 송기연은 그만 바닥에 주저 앉았으나 손에 든 돌을 더욱 꽉 쥐었다. 반듯한 이마에 온통 식은땀이 가득했고 고통은 좀처럼 가라앚지 않았다.

한참 후 고통이 슬슬 옅어지자 송기연도 점점 정신을 차렸다. 그때 갑자기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가지런히 정리된 공법들 사이에서 책이 한 권 떨어져 있었다. 바닥에 구멍이 났지만 아무런 움직임은 없었다.

녹색 돌을 목에 걸고 그쪽으로 걸어갔다. 그 공법 위엔 세 글자가 적혀 있었다.

‘천진결’

* * *

유가는 우울했다. 엄청 우울했다.

이 일 때문에, 그는 앞으로 가야 할 길이 더욱 힘들어질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 집행자가 그들은 시공을 건너온 것이라고 했다. 아마도 천도가 손을 썼을 뿐 아니라 역사 자체도 그가 송기연의 일을 방해하는 걸 허용하지 않을 거라고 했다.

전에 송기연이 시간을 역행한 한 후, 그는 현대에서 절반의 영혼이 넘어오며 기억이 없었어도 후에 벌어진 일을 하나하나 해냈다. 송기연이 경창파로 갔고, 무주지에도 갔고, 신묘도에서 창결검을 얻기도 했고, 마지막엔 자신과 겨루기도 했다.

일어나야 하는 일은 앞당겨서든 혹은 조금 늦춰지든 어쨌든 모두 일어났다.

어떻게 이러지? 설마 유가는 재수 없도록 타고난 것인가?

그건 너무 하잖아.

그가 턱을 어루만지며 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고심에 빠졌다. 저 멀리서 누군가 걸어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존주, 뭘 하고 계시는 겁니까?”

익숙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오자 깜짝 놀란 유가가 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놀라 펄쩍 뛰고 말았다.

“고금성!”

유가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너 살아있었구나?”

“고금성? 그게 누굽니까?”

청년이 미간을 찌푸리며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절 계속 소일(小一)이라고 부르지 않으셨습니까? 오늘 왜 그런 이름으로 부르시는 겁니까. 소인에게 주시는 새로운 이름인 건가요?”

“존주, 형님. 뭐 하고 계십니까? 오 형님께서 식사 준비가 다 끝났으니, 형님과 존주를 모시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검은 옷에 큼직한 두포를 쓴 소년이 막 따온 화초를 손에 들고 걸어왔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모습이 퍽 귀여웠다.

그 소년의 얼굴을 본 유가는 심장이 철렁하여 뒤로 반보 물러났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눈앞에 사람을 바라보았다. 신묘도에서 홀로 사라졌던 망자 소칠(小七)이였다.

한참 만에 겨우 입을 떼며, 눈은 이미 붉어졌다.

“아니다. 그만 밥 먹으러 가자.”

유가는 이 시공 속에서 열두 마사를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는 원래 전생을 보러 온 것뿐, 어쩌다 정말 시공을 넘어 오긴 했지만 송기연 근처에만 머물고 가는 줄 알았다. 근데 이번엔 정반대로 자신의 전생으로 가 있었다.

‘아마 그 속에 들어갔다면, 당신의 진짜 신분도 알게 될걸세…….”

머릿속에 당초 경창파 늙은이 임관이 했던 말이 떠오르자, 유가는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존주, 어찌 그리 멍하니 계십니까?”

고금성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오자 유가가 돌아섰다. 하지만 순간 고금서이 자신의 바로 코앞에 가까이 서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유가는 살짝 몸을 떨며 난처한 듯 거리를 벌렸다.

사실 유가는 고금성을 조금 원망했다. 비록 저자가 마지막엔 자신의 목숨을 걸고 본인을 소생시켜 주었지만, 그는 확실히 자신을 배반했었고 온갖 계략으로 자신을 사지로 몰아넣었다.

그가 속이 얼마나 깊은지는 유가조차 가늠이 되질 않았다. 게다가 지금 고금성은 자신에게 어떤 감정일까?

충심? 진심으로 충성하는 걸까?

안색이 어두워진 고금성이 더는 유가에게 다가가지 않은 채 말했다.

“존주께서 소인이 다가가는 게 불편하시면, 앞으로는 일정 거리를 유지하겠습니다. 이번 무례는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형님, 뭔 소릴 하는 거예요? 존주께서 왜 형을 싫어하시겠어요?”

소칠은 눈을 반짝거리더니 두포를 벗고 화초를 집어넣었다. 그리고 한 손으로 유가의 손을 잡고, 다른 손으로 고금성의 손을 잡으며 궁전으로 이끌었다.

“존주께선 저희를 제일 아끼십니다. 한데 어찌 그런 사소한 일로 서로 소원해지려 하십니까?”

그가 웃으며 유가에게 물었다.

“제 말이 맞죠?? 존주?”

“……그래, 소칠이 말이 맞다.”

고금성에 대한 의심을 접은 유가는 잠시 다른 생각을 하지 않기로 했다.

널찍한 궁전에서 몇 개의 건물을 지나자 식사하는 곳이 나왔고, 그들이 왔을 땐 이미 열 명의 사람이 식탁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유가를 본 열 명이 예를 차리며 외쳤다.

“존주.”

유가가 열두 마사를 쭉 훑어봤다. 깔끔한 말총머리의 고금성에서부터 은발의 소십이(小十二)까지, 다들 너무나 익숙한 얼굴들이었다.

탁자 위 음식들은 아직 따뜻하게 김이 났고, 실내엔 사람 온도가 가득했다. 전에 고독하게 혼자 마궁에서 지낼 때보다 훨씬 포근했다.

밥이 참 꿀맛이었다. 유가는 사람들과 담소를 하나씩 나누었고 영원히 이 순간에 남고 싶었다. 모든 일이 발생하기 전인 지금.

밤에 침전에 누운 유가는 저 높은 천장을 바라보며, 열두 마사 입에서 나온 소식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는 영혼 일부가 부족했기에 많은 기억이 단편적이었고, 더욱이 이 세계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었다. 슬쩍 변죽을 올리며 마사들에게 질문해서 궁금했던 생각들을 정리할 수 있었다.

지금 그는 확실히 송기연과는 다른 곳에 있었다.

그의 기억엔 맨 처름 유가와 송기연은 신계에서 만났었다.

그럼 신계에 올라가기 전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자신은 왜 전에 살육을 즐기는 폭력적인 성격을 가지게 된 것일까?

이곳의 상황을 알게 된다면 유가는 아무래도 원인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 이곳은 그가 탄생한 혼돈이었다. 그는 당초 이곳에 최초로 나타난 생물이었고, 강력한 힘을 가졌으며, 혼돈의 잔류한 힘과 자신의 영혼을 융합하여 자의식을 가진 열두 마사를 창조했다.

하지만 혼돈이 사라지고 천지가 나눠진 후로, 이곳엔 엄청 많은 지혜와 잔혹함을 가진 괴물이 나타났고, 그들은 유가를 무차별적으로 공격했다. 마치 그들은 모든 것에서 벗어난 존재를 완전히 말살하려는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해 보니, 천도 그 자식은 이때부터 자신에게 수작을 부린 것이다.

송기연을 꼭두각시로 키웠지만 알고 보니 예비 선수였고, 선두였던 괴물이 자신을 죽이지 못했을 때 그가 등장한 것이었다.

이렇게 생각하다 보니 모든 게 술술 풀렸다.

유가가 몸을 뒤척이고는 다시 송기연 생각을 했다.

지금 그 녀석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그 녹색 돌은 목에 걸긴 했는지. 갑자기 자신이 사라져 버려 힘든 건 아닌지. 그 무표정한 얼굴에서 자신을 보고 싶어 하는 표정이 나타날지. 또 그렇게 사르르 녹듯 웃어 줄지.

* * *

고요한 침전 안, 침대에 동그랗게 몸을 말고 있는 누군가가 몸을 뒤척이고 또 뒤척였다. 한참이 흐른 뒤 화가나 눈을 번쩍 떴다.

정말 잠이 오질 않았다. 머릿속에 수만 가지 일이 떠올라 잠에 들 수가 없었다.

차라리 유가는 앉아서 체내의 진기를 이용해 수련을 시작하려 했으나, 역시나 전처럼 어떠한 힘에 눌린 수련 경지가 전혀 움직이질 않았다.

그는 자신의 형제라고 했던 그 노인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만약 천도의 통제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먼저 자신만의 수련의 길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

그는 혼돈의 기류와 자신의 영혼을 결합하여 열두 마사를 창조한 이상 이미 사람을 만들 수 있는 정도에 오른 것이고, 그러기에 천도가 자신을 겨냥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열두 마사를 어떻게 창조했는지 기억이 나질 않아 아는 게 없다. 기억을 되찾으려면 진짜 혼돈의 경계를 찾아서 천도법칙을 능가하는 무언가를 느껴야만 했다.

진짜 혼돈의 경계는 어디지.

가슴이 따뜻해지자 유가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 영감이 자신의 체내에 넣은 음양양역진이 떠올랐다. 의식으로 진법의 존재를 느끼려고 시도하며 자신을 따뜻하게 하는 근원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그의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그때 그 노인과 꿈속에서 대화를 나누었고, 그곳은 안개가 자욱한 혼돈의 경계였다. 그곳에서 노인이 혼돈의 기류를 진법과 융합하여 자신의 체내에 넣었었다.

그게 계기일까.

심장이 약간 동요하더니, 음양양역진이 그의 가슴 부위에서 식해까지 날아올랐다. 신식 위를 천천히 회오리치다가, 유가와 똑같이 생긴 신식 소인에게 금빛을 비추었다.

가부좌를 틀고 앉은 유가가 눈을 감자 머릿속에 익숙한 장면들이 펼쳐졌다.

아무래도 이 양역진이 그의 남은 기억들을 모조리 소환하여 그에게 보여주려는 것 같았다. 장면이 계속 펼쳐졌다. 짧은 과거의 기억과 최근에 송기연과 사이에서 발생한 모든 일들이 펼쳐졌다.

그 화면 속엔 송기연 뿐 아니라 열두 마사, 아구, 왕다국. 그리고 그에게 충성했던 마계의 부하들, 그의 목숨을 원했던 괴물, 그를 모욕했던 선계 수진자들도 있었다.

이곳에서 열두 마사와 함께 잔혹한 괴물과 피 터지는 싸움을 벌였고, 신전에서 마족에게 번개를 받게 했고, 선마전(仙魔戰)에서 송기연을 핍박하여 무고한 사람들까지 끌어들였다.

혼돈에서 태어난 그는 계속된 싸움으로 인해 난폭한 성격이 형성되었다. 신계에 오른 후엔 흉악한 수단으로 시비를 가리지 않아 누구든 두려워했다. 송기연에게 바닥까지 쫓겨 그자에 대한 원망이 온 의식에 가득했다. 그리고 그에게 복수하고 그를 처절하게 학대하겠다고 맹세했다.

하지만 사소하게 생각했던 유희 하나에 전체 국면이 어지러워졌고, 그는 자신의 마음과 목숨까지 걸었다.

후회도 했고, 고통스러워도 했고, 눈물도 흘렸고, 자기 자신을 원망도 했지만, 그는 이 모든 감정들이 소중했다. 쉽게 가질 수 없는 감정들이다.

아구는 그에게 온정을 주었고, 왕다국은 그에게 충성을 주었다.

송기연은 사랑과 증오를 알려 주었고, 열두 마사는 그가 제일 고독했던 시간을 함께했다. 마족들은 그가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게 해 준 버팀목이었다.

다시 보니 유가는 참 풍족한 인생을 살았다.

이런 경험은 천도도 어찌할 수 없는 자신만의 것이다.

천도법칙은 천지 사이 자연규율 고정불변의 규정인데, 인간의 그 다양하고 복잡한 감정이 어떻게 그런 틀에 얽매일까?

그의 모든 행동은 다 자신의 감정대로 행한 것이다.

수련은 무엇을 위한 걸까? 처음엔 이 험난한 곳에서 자신을 보호하고 살아가기 위함이었다. 후엔 열두 마사와 마계를 구하기 위해 그는 스스로 대륙의 정상에 섰다. 그 뒤로는 자신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송기연에게 지지 않으려던 것이었다.

왜 강해지고 싶은 거지.

자신이 원하는 걸 얻기 위해서, 자신에게 중요한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서.

음양양역진이 움직이는 속도가 점점 더 빨라졌다. 유가의 표정이 편안해졌고, 마음속으로 뭔가를 깨달았다. 자신만의 수련의 길을 얻으려면 천도법칙에 얽매이지 않고 무언가를 알아차려야 한다.

주야(晝夜), 생로병사, 초목은 새싹에서 활짝 피었다가 다시 시들고, 인간은 아이에서 혈기 왕성한 청년이 되었다가 성숙한 중년이 되고 점차 늙어가게 되는 것. 이 모든 게 자연의 법칙이고 천도의 기본 법칙이었다.

수행을 걸으면 전통적인 생로병사를 타파하고 수진자는 일반인을 능가하게 된다. 하지만 이런 법칙들이 널리 알려지게 되면서 천도는 오히려 수진자에게 하나의 질곡이 되었다.

진법의 도움 아래 과거를 겪어본 유가는 이 자연법칙 속에 숨어있는 자신의 숙원에 대해 발견하게 되었다. 세상 만물은 감정에서 벗어날 수 없다. 감정이란 무엇인지 그는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천도는 잘못인 줄 알면서도 송기연과 자신의 감정을 조롱했다.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은 유가는 마음속으로 결인을 치고 같은 동작을 계속 반복했다. 복잡해질수록 속도는 점점 빨라졌다.

마지막 동작을 완성하자 식해 속의 음양양역진의 모습이 바뀌었다. 그 안에 도안은 더욱 복잡하게 바뀌었고, 묘하고 부드러운 금빛이 비쳐 따뜻한 느낌을 주었다.

쾅—!

유가의 의식이 떨리더니 수련 경지가 드디어 억압에서 벗어나 완전히 해방되었다! 충만한 힘이 온몸을 휘감았다. 그가 주먹을 쥐었다가 다시 피자 그의 손바닥 위에 새로운 진법의 축소판이 나타났다. 진안 중앙에서는 연한 백색의 혼돈 기류가 피어올랐다.

그가 손가락으로 살짝 두드렸고 그 희미했던 기류가 퍽 소리와 함께 침실 천장을 뚫었다. 밤하늘로 솟아오른 곳에 미세한 공간의 균열이 일어나며 엄청난 힘이 요동쳤다.

“유가 당장 나와!”

“콰앙—!”

“개자식 빨리 나와, 본 대인이 널 직접 봐야겠다!”

밖이 소란스러웠다. 병기가 날카롭게 부딪쳤고 괴물의 울부짖음과 귀에 거슬리는 도발 소리가 들려왔다.

유가가 미간을 찌푸리며 일어나 문을 열자 그를 향해 걸어오는 고금성이 보였다. 그때 궁전의 위쪽엔 엄청난 수의 괴물들이 응집해 있었고, 소십(小十) 등 일행이 한쪽에서 대치하고 있었다.

“존주!”

유가가 나온 것을 본 사람들이 기뻐했다. 갑작스럽게 적이 찾아 왔고 수적으로 불리하여 걱정스러웠던 터다. 하지만 유가의 담담한 태도를 보곤 마음이 가라앉았다. 존주가 있다면 그들에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존주, 소인이 결계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아 그 틈에 저 괴물들이 파고든 것 같습니다.”

“네 잘못이 아니다.”

유가는 고금성의 말을 끊고 앞으로 걸어 나가 말했다.

“소일, 너무 네 자신을 혹사시키지 마라.”

유가는 고금성을 격려하고 공중으로 뛰어올라 괴물들 앞에 마주 섰다. 두 주먹에 흑금장갑을 씌우자, 그 위에 혼돈 기류가 피어오르며 주위 공간이 순식간에 불안정 해졌다.

붉은색 옷자락이 밤하늘에 널리 휘날리며, 가볍게 여민 하얀 쇄골과 어깨가 드러났다. 아름다운 사람은 으드득 손을 풀며 웃었다.

“좋다. 이 대인이 친히 너희를 상대해 주마!”

그 괴물들은 대부분 외모는 흉측하고 무서웠지만, 다른 특징들은 대체로 인간과 비슷했다. 좀 전에 유가에게 큰 소리를 내던 그 자식은 두 팔은 굵직한 사람 팔뚝이지만 두꺼비 머리에 가늘고 긴 혀를 가졌고, 온 얼굴은 울퉁불퉁하고 악취를 내뿜는 탓에 역겨웠다.

유가가 코를 막고 불쾌한 얼굴을 했다.

“네 얼굴이 못생긴 건 그렇다고 쳐도, 위생적으로 살 생각은 없느냐?”

혼돈 기류가 감싸고 있는 멋있는 자신의 장갑을 안타깝게 바라보며 탄식했다.

“너와 싸우면, 내 손이 정말 더러워지겠군.”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는 순식간에 괴물 앞으로 다가가 주먹으로 그의 복부를 세게 강타했다. 그리고 그대로 그의 뒤로 이동하여 등을 냅다 걷어찼다. 쿵 소리와 함께 그 괴물이 떨어졌고 땅엔 거대한 구덩이가 생겼다.

붉은 옷을 입은 사내는 멈칫하는 다른 괴물들을 향해 귀엽게 손을 흔들고는 그대로 중력이 없는 것처럼 바닥으로 유성처럼 떨어졌고, 그의 아랫배에를 밟고 섰다.

“웩—!”

괴물의 입에서 한바탕 더러운 피가 터져 나왔다. 그대로 흰자를 드러내며 완전히 까무러쳤다.

유가가 고금성에게 저 괴물을 잘 묶어두라고 지시하고 다시 상공으로 올라갔다. 괴물들을 향해 어깨를 으쓱거리며 웃었다.

“다음 차례는 누구냐. 꾸물거리지 말고 나와라. 너희와 이렇게 노닥거릴 시간이 별로 없구나.”

지금 그는 자신의 실력이 굉장히 강해진 걸 느낄 수 있었다. 십오 년 전 대승기 후기였을 때보다도 강했다. 천도법칙은 그를 속박할 수 없다. 천도의 계획이 다 무너졌다. 지금 그 배후의 계략조차 그를 꺾지 못한다면 만천하에 그를 상대할 수 있는 자는 없었다.

그래서 그는 지금 이 오합지졸들을 상대하며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빨리 이곳을 떠나 송기연의 행보를 막고 싶었다.

“유가, 벌써부터 그리 기세등등 하지 마라!”

표범 머리에 뱀 꼬리인 괴물이 괜히 허세를 부리며 고함쳤다.

“형제들, 모두 함께 나갑시다. 본때를 보여 주자고요!”

그의 말에 주위 일행들의 마음속에 전의가 불타올랐고, 각자 병기를 들고 유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존주, 저희가 도울게요!”

유가의 곁에 선 열두 마사는 늘 그래왔던 것처럼, 평온한 얼굴로 전투태세를 갖추고 전의를 불태웠다.

유가는 마음이 따뜻해졌다. 마사들에게 대답하려 했으나, 갑자기 몸이 굳었다.

음양양역진에서 갑자기 직경 열 장(丈) 정도 되는 거대한 대진이 튀어나왔고, 그와 열두 마사 주위를 둘러쌌다. 그리고 법진 변경에서 나오는 혼돈 에너지가 그 괴물들을 저 멀리 밀어냈다.

잠시 후, 주위는 금빛으로 변했고, 유가는 진안에 서 있었다. 대진 속에 부드러운 힘이 열두 마사를 각자 제 위치로 밀어냈다. 동그란 진형도엔 마치 현대의 시계처럼 모든 사람의 발아래에 표식이 나타났다.

일(一), 이(二), 삼(三)…….

“존주, 이게 뭡니까?”

잇따라 질문이 쏟아졌다.

저게 무엇인지 유가라고 알겠는가. 하지만 직감적으로 이 진법이 그들의 안전을 위협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고 그들을 진정시켰다.

“모두 안심하라. 괜찮으니.”

그러나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발밑이 굳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아래를 숙여 보자 복잡한 대진 도안 속에서 갑자기 금색의 밧줄 두 줄이 나와 그의 두 발을 진안의 위치에 고정시켜 움직일 수 없었다.

“이게 뭐야?”

동시에 열두 마사도 그와 똑같은 일을 당하고 있었다. 모두 제자리에 발이 묶였다.

위잉-!

그리고 고막을 때리는 소리가 울리자 유가의 의식이 굳어졌다. 곧바로 깨져있던 기억들이 합쳐지고 그의 머릿속에 펼쳐지기 시작했다.

자신의 탄생, 몇 백 년의 고독, 열두 마사를 어떻게 창조했는지, 어떻게 신계에 올라갔는지, 신전은 또 어떻게 발생한 것인지, 모든 기억이 전부 되살아났다.

부족했던 영혼이 점점 채워지며 그를 곤란하게 했던 수수께끼가 풀려갔다.

금색의 대진이 열두 마사 영혼의 힘으로 그의 마음속 부족했던 곳을 채워 넣었다. 그들이 그를 완전하게 하여 처음에 혼돈이 만들어낸 그 완벽한 사람으로 되돌려 놓았다.

잠깐만!

전신을 채우는 온기를 느끼던 유가는 갑자기 정신이 돌아왔고, 진형도 안에 열두 마사를 살펴보았다. 갑자기 왠지 모를 불안함이 솟구쳤다.

그는 영혼 분열을 통해 열두 마사를 창조했다. 그런데 만약 지금 그들을 이용하여 자신의 영혼을 복원한다고 하면, 그럼 저들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이런 생각이 떠오르자 그는 진법을 멈추고 이 질곡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쳤다. 하지만 어떻게 해도 벗어나지지 않았다.

이 과정이에서 열두 마사는 딱히 고통이 없었고, 그래서 유가가 왜 발버둥을 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존주, 왜 그러십니까?”

단순한 소칠(小七)이는 아직 자신이 투명해졌다는 사실은 인지하지 못한 채 유가의 행동에 관심을 가졌다.

“안 돼! 절대 안 돼!”

유가는 똑똑히 보았다. 열두 마사의 형체가 이미 육안으로 보일 정도로 희미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완전히 눈앞에서 사라져 버릴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소칠, 소오, 소일 너희 빨리 그 밧줄에서 벗어나라! 그렇게 가만히 있다간 곧 다들 죽는다!”

그가 고함을 지르고, 엄청난 공포감에 사로잡히자 말이 아무렇게나 터져 나왔다.

“빨리 빠져나와라. 어서!”

머릿속에 문득 그 노인의 얼굴이 떠오르자 유가는 몸이 굳어졌다.

음양양역진! 빌어먹을 음양양역진! 도대체 왜 내 몸에 음양양역진을 넣은 거지?

자신을 이용해 천도와 싸운다고 해도, 천도와 맞설만한 충분한 힘도 없잖아! 설마 자신을 강하게 만들려고? 혼돈 초기 그때의 자신처럼?

젠장! 빌어먹을! 진짜 엿 같아!

“존주, 저희는 빠져나갈 수가 없어요!”

마사들이 겁에 질린 목소리를 냈다.

마사들은 순간순간이 다르게 더욱 투명해져 있었다. 마치 저 은은한 금색의 대진 속에 스며들 것 같았다.

눈시울이 붉어졌고, 목구멍에도 설움이 걸렸다. 유가는 그제서야 알아챘다. 이 대진은 덫이라는 사실을. 법진 질곡 속에서 그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강해진다거나, 대적할 자가 없다거나 그런 건 다 빈말이었고 허상이었다!

힘없이 주저앉아 울부짖고 절망이 몸부림쳤다.

“내가 너희를 위험에 빠뜨렸다. 미안하구나. 내가 너희를 다치게 했어. 다 내 잘못이다!”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법진 위에 하나씩 고인 눈물이 서서히 도안의 틈 속으로 스며들었다. 마치 주인도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없다고 하소연하고 있는 것 같았다.

왜 매번 이러는 걸까. 정말 어렵게 다시 만나게 되었는데, 이젠 자신의 손으로 목숨을 끊다니.

도저히 열두 마사를 볼 면목이 없었다. 유가는 주먹이 떨리도록 쥐고 이를 악물고 울부짖었다. 마치 짐승의 울음소리 같았다.

금빛이 서서히 사라지자 저 멀리서 괴물들의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유가는 그런 것이 들리지 않았다. 여전히 진안 위에서 흐느꼈으나, 순간 심장에 질식할 격통이 전해졌다.

누군가 다가와 그의 곁에 쭈그리고 앉았다. 유가가 눈물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고 그제야 그 사람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준수한 이목구비에 부드럽게 퍼지는 눈썹. 고금성이 손을 뻗어 유가의 뺨을 어루만지며 그의 눈물을 닦아냈다. 그리고는 눈앞의 사람을 천천히 안아주며 부드럽게 말했다.

“존주, 진정하세요. 저희 괜찮습니다.”

음양양역진은 비록 그 노인이 유가에게 쳐 놓은 덫이었지만 유가가 스스로 ‘개선’을 깨우친 후로, 그의 감정과 자의로 변화했다.

그래서 양역진은 유가가 보호하고 싶어 하는 사람을 다치게 할 수 없다. 열두 마사는 일부 영혼의 힘을 잃긴 했지만 이미 형성된 독립적인 의식이 사라지진 않았다.

하지만 본래의 힘을 잃은 탓에 몸이 투명해졌고 약해져 불안정해진 건 맞다.

고금성에게 안긴 유가는 눈을 끔뻑였다. 주위 사람들을 바라보다가 눈앞의 남자를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너무 힘을 줘 손가락이 창백해질 정도였다.

열두 마사는 그에게 정말 중요한 존재였다. 그의 유일한 가족이라고 할 수 있었다. 만약 그들이 자신 때문에 무슨 일을 당했다면, 유가는 도저히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었다.

고금성의 배반을 원망했지만, 동시에 그에게 늘 미안했다. 그는 늘 자신의 감으로 그의 생각을 추측할 뿐, 고금성을 제대로 이해해본 적이 없었다.

열두 마사의 우두머리인 고금성은 내향적이고, 일 처리가 신중했다. 늘 존주를 대신해 뒷처리를 하느라 굉장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건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자신이 피곤하다고 느끼면 이자는 자신보다 더 피곤했다.

유가는 고금성에 대한 원한을 완전히 버렸다. 그는 자신의 곁에서 천 년이나 머물렀던 이자를 용서하기로 했다.

“존주, 좋아합니다.”

부드러운 눈빛의 고금성이, 유가가 까무러칠 말을 내뱉었다. 이번에 그는 ‘소인’이라고 자신을 지칭하지도 않고 유가의 귓가에 대고 두 번이나 같은 말을 속삭였다.

“좋아합니다.”

그 고백에 놀란 유가가 멍하니 손에 힘이 빠졌다. 고금성이 끌어안고 있던 손을 놓아 주자, 유가는 하마터면 엉덩방아를 찧을 뻔했다. 얼굴엔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소일, 농담하는 거지? 그런 말은 함부로 뱉는 게 아니다.”

서둘러 일어난 유가는 고금성과 거리를 벌리고, 뒤에서 습격해오는 괴물을 발로 찼다.

그가 돌아서서 그 괴물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적당히 하고 다들 꺼져라. 반각(半刻) 뒤에도 너희가 여기서 이렇게 살아 있을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수 없으니.”

독설을 퍼붓는 건 유가의 주 종목이었고, 그는 지금 저 반인반수의 못생긴 괴물들이 진짜 꼴 보기 싫었다. 마사는 지금 불안정한 상태고, 고금성의 갑작스런 고백에 마음이 어수선한 유가가 말이 곱게 나올 리 없었다.

저 괴물들은 천도의 꼭두각시였다. 그들의 임무는 유가를 제거하는 거였다. 자의식이 있긴 했지만 유가의 독설에 겁을 먹지는 않았다.

“정말 우리가 널 두려워한다고 생각한 것인가? 죽어라!”

괴물 하나가 공격해왔다. 손에 든 큰 쇠사슬을 유가의 머리를 향해 정확히 휘둘렀다.

기분이 좋지 않던 누군가가 두 눈을 가늘게 뜨고 고금성의 뜨거운 눈빛을 애써 무시했다. 주먹에 흑금장갑을 씌운 뒤 자신을 향해 오는 쇠사슬을 잡아 팔에 감고 혼돈의 힘을 팔에서 터트렸다. 상품 법기보다도 단단한 쇠사슬이 두 동강 났다!

곧바로 그 괴물 앞으로 이동하여 복부를 주먹으로 강타하자 괴물은 그대로 날아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유가는 손에 남아 있던 쇠사슬을 괴물 무리로 던져버렸다. 재수 없이 맞은 몇몇 괴물이 그대로 땅으로 곤두박질치며 땅엔 거대한 구덩이가 여러 개 생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괴물들은 힘이 폭발한 유가에게 엄청 얻어 맞았고, 얼굴이 퉁퉁 붓고 온몸에 뼈가 으스러지자 전투력을 상실했다.

기분이 좀 나아진 유가가 깊은 한숨을 쉬고 손에 들고 있던 피범벅이 된 쇠사슬을 땅에 내팽개쳤다.

“존주께서 왜 저러실까요?”

소십이(小十二)가 침을 삼키고는 소십(小十)의 검은 옷을 꼭 쥐고 조용히 물었다.

“나도 모르겠구나.”

소십이(小十二)은 이상한 눈빛으로 유가를 바라보던 고금성의 모습과 좀 전에 그 장면을 떠올리며 물었다.

“설마 좀 전에 일형님이 한 행동 때문에 그러신 걸까요?”

두 사람의 대화는 유가의 귀를 피해 가지 못했고, 유가는 당황스러워 뭔가 설명하려 했다. 그런데 음양양역진이 또다시 그의 몸에서 나와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이번에 유가는 저 대진이 열두 마사를 해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 당황하진 않았다.

이번엔 금색의 복잡한 진형도가 그들의 상공을 가리고는 마사의 몸에 숫자를 나타냈다. 마지막 숫자가 소십이 몸에 나타난 뒤 진형도에서 갑자기 엄청난 금빛이 퍼져 나왔다.

잠시 후 빛이 사라지고 금색의 축소된 원반이 유가의 앞에 나타났다. 위쪽엔 작아진 마사들이 서 있었고, 발아래엔 숫자가 써져 있었다. 은은한 금빛 기둥이 나와 반투명한 몸에 투과되었다.

원반을 손에 받은 유가는 눈이 동그래졌다. 이 진법에 이런 기능이 있을 줄 생각도 못 했다.

왜 이 원반이 꼭 눈금판처럼 보이는 걸까? 그는 애초에 왜 마사의 수를 열두 명으로 정했을까? 이 어둠 속에 뭔가 암시가 있을까?

설마 이 진법이 시간축인 걸까?

문득 손가락이 간지러워 정신을 차리자, 작아진 고금성이 원반위에서 그의 손가락을 만지고 있었다. 몸이 그대로 굳어진 유가가 난처해하며 물었다.

“무슨 일이냐? 소일?”

유가는 애써 모른 척하며 이 진법에 대해 설명을 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걱정 마라, 이 진법이 너희를 의식을 안정시킬 것이다. 오랫동안 온양(温养)을 받으면 원래 상태로 되돌아갈 수 있다.”

“존주, 전 그게 궁금한 게 아닙니다.”

고금성은 꽤나 오래전부터 유가를 좋아해 왔지만, 신분 차이로 인해 표현할 길이 없었다. 그런데 방금 유가가 자신을 그토록 꽉 끌어안자 마음속에 억눌렸던 말이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그는 존주를 좋아한다. 그리고 이자에게 대답을 듣고 싶었다.

고금성을 제외한 다른 마사들은 일언반구도 없었다. 그들은 고금성이 그때 무슨 질문을 했는지 듣지 못했고, 지금 상황에 호기심이 생겨 눈을 반짝이며 유가만 바라봤다.

고금성의 진지한 눈빛과 마주치자 유가는 끝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네 마음을 받아줄 수 없구나.”

그의 대답은 간결했다. 고금성도 잠시 멈칫하더니 끝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평소 차가웠던 표정에 생기가 넘쳤다.

고금성은 원반을 잡고 있는 유가의 엄지손가락 옆으로 다가가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한쪽 무릎을 꿇고 유가의 앞에 목을 드러내며, 수없이 내보였던 충성심을 드러냈다.

“소인, 알겠습니다.”

어둠이 걷히고 하늘이 밝아졌다.

금색 원반 위에 무릎을 꿇고 있던 사람이 고개를 들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소인, 영원히 존주의 곁에서 어떠한 위험도 감수하겠습니다.”

멈칫하던 다른 마사들도 하나둘 따라 무릎을 꿇고 외쳤다.

“소인, 영원히 존주의 곁에서 어떠한 위험도 감수하겠습니다!”

고금성은 무릎을 덮고 있는 옷을 꽉 쥐며 목구멍에서 올라오는 울음소리를 애써 다시 삼켰다.

그자가 자신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는 이상 그는 영원히 그의 곁에서 충성을 다할 것이다.

“모두 고맙구나. 그만 일어나라.”

정말 고마워, 금성.

유가는 속으로 감동했다. 만약 자신이 송기연을 몰랐더라면 지금 분명히 고금성에게 마음을 주었을 것이다.

지난 천 년 동안 그는 당연하다는 듯 고금성의 보살핌을 받아왔다.

아무래도 그는 천생이 비굴한 팔자인 것 같다. 자신을 짝사랑하고 돌봐주는 사람은 모른 척하고, 어디 모자란 듯 송기연을 따라다니며 보살피고, 나중엔 자신의 모든 걸 내어준다.

“존주 고마워하지 마십시오. 저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소칠이가 부드럽게 웃으며 일어났다.

“맞습니다. 존주, 너무 마음 쓰지 마십시오.”

“…….”

마사가 서로 외쳐댔다. 유일하게 소사만 미간을 찌푸리며 고금성에게 다가가 작게 물었다.

“소일, 무슨 일입니까?”

소사는 평소에 고금성과 붙어 있길 좋아했고, 다른 마사들과는 다르게 고금성에게 형님이라고 하지 않고 꼬박꼬박 소일이라고 불렀다.

고금성에 행동은 평소와는 많이 달라 보여, 그래서 신경이 쓰였다.

“아니다, 아무것도.”

소사의 눈초리를 받던 고금성은 한숨을 내쉬며 평소 모습을 되찾았다.

“그저 거절당해, 기분이 별로구나.”

“거절?”

소사는 좀 전에 존주께서 하셨던 말이 떠올랐다. 분명히 소일의 마음을 받아줄 수 없다고 하셨었다. 설마 그가 존주를?

눈이 동그래진 그가 고금성의 어깨를 두드리며 그를 위로했다.

“그건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런 일은 강요할 수도 없지요. 게다가 신분 차이도 어쩔 수 없으니 어차피 거절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고금성은 소사가 자신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는 모습에 그만 웃음이 터져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말이 맞다. 내가 욕심을 부렸다. 앞으로 주의하마.”

그의 웃는 얼굴을 본 소사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억지로 웃지 마십시오. 썩 보기 좋진 않습니다.”

* * *

지금 열두 마사는 신식과 비슷한 상태로, 원반 위에 서서 안정을 취할 수도, 원래 크기로 변신해서 유가와 동행할 수도 있었다.

유가는 이미 저 괴물들을 평정하고 영혼도 완전해졌다. 그래서 열두 마사를 데리고 송기연을 찾으러 갈 생각이었다.

혼돈의 힘을 가진 그는 집행자와 똑같은 일을 처리할 수 있거나 그보다 더 강해졌을 수도 있다. 혼돈의 기류로 공간을 찢은 그는 파동을 느끼려 노력했다.

잠시 후, 진기와 혼돈 기류로 마사가 서 있는 원반을 제대로 감싼 뒤 탐색한 곳으로 향했다.

정확한 장소를 찾아서 주먹으로 치자 공간이 깨지더니 그곳의 광경이 나타났다. 즉시 유가는 제자리에 섰다.

그는 저번에 송기연의 눈앞에서 사라진 후 자신이 탄생한 시공으로 건너뛰었다. 그동안 몇 십 년 아니면 몇백 년이 흘렀는지 그는 알 수 없었다. 오랜 시간 동안 모든 게 바뀌기엔 충분했다.

지금 광경을 본 유가는 겁이 났다.

능운파 상공에 수많은 제자들이 응집해 있었고, 선두에 선 청년은 장검을 송기연에게 겨누며 말했다.

“장문인을 죽이고, 사형들을 괴롭혔다. 능운파에 너 같은 배은망덕한 놈이 나올 줄은 몰랐구나!”

유가는 우선 자신의 기운을 숨기고 한쪽에 서서 지금 국면을 관찰하기로 했다.

그는 지금 상황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하지만 저번에 송기연과 밀실에서 ‘대화’를 나누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 그는 완전히 냉혈한이 아니었고 자신 덕분에 많은 감정이 되살아났었다. 게다가 그때 그는 아이에게 이 녹색 돌을 꼭 착용하고 다니라고 했다. 이것만 봐도 유가는 송기연이 자신의 사존을 죽이는 그런 부도덕한 일을 하진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내가 한 짓이 아니다.”

이미 준수한 청년으로 자란 송기연이 긴 머리는 은관으로 잘 틀어 올리고 있었고 눈빛은 얼음장 같았다.

그는 검을 뽑지는 않았지만 기세가 뒤지지 않았다. 오히려 상대측 제자들이 압도당하는 쪽이었다.

저 멀리서 공간을 깨는 소리가 들렸고, 전에 유가가 구륜염양지에서 봤던 송기연을 데리고 간 노부부가 나왔다. 여전히 그 노인 안필화는 자기 부인 뒤를 쫓고 있었다. 곧 두 사람은 능운파와 송기연 가운데에 섰다.

“소선이 능운파 장문인을 죽였을 리가 없다! 너희 제자들의 말은 정말 터무니없구나!”

화난 얼굴의 노부인이 계속 말했다.

“무주지에서 벌어진 재앙은 누구도 예측 불가능한 것이었다! 너희는 어찌 소선이가 비경에서 살아 돌아왔다고 능운 장문인을 죽였다고 판단하는가?”

“예측 불가능하다? 하!”

선두에 서 있던 청년이 웃으며 노부인 뒤에 서 있는 안필화를 조롱했다.

“이 대륙에서 ‘절반 신선’인 안필화의 칭호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텐데? 그는 천기를 꿰뚫어 볼 수 있고, 신처럼 예측할 수 있는데, 어찌 살인자가 누구인지 예측할 수 없는 것인가? 지금 두 사람은 안소선을 감싸고 있는 것일 뿐!”

“맞다. 사형의 말이 맞아!”

“당신 부부는 지금 모두를 기만하고 있다!”

능운파 제자는 마치 송기연의 죄라고 단정 짓듯 부부를 책망했다.

“이 개자식들 무슨 헛소리를 나불대는 것이야!”

화가나 얼굴이 붉어진 노부인이 그들에게 욕을 퍼붓고 그대로 돌아서서 송기연에게 걸어가 말했다.

“소선아, 우리와 함께 가자. 더는 여기 있을 필요가 없다.”

사실 이 일은 송기연이 한 짓이 아니고, 안필화는 정말 무주지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이번에 능운파의 장문인과 장로들은 송기연과 함께 무주지에 보물을 찾으러 갔고, 다들 즐겁게 비경까지 도착했다. 하지만 누구도 예상치 못하게 그 안에서 그들의 실력으로 이길 수 없는 뭔가를 마주치게 되었다.

마지막에 운 좋게 송기연만 살아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능운파에 들어온 순간부터 지금까지 동문 제자들의 미움을 받고 있었다. 그들은 이 틈에 모든 죄를 송기연에게 덮어씌운 뒤 온 대륙의 비난을 받게 했다.

“가고 싶다면 그리 쉽게 보내줄 줄 아는가?”

그 청년이 냉소하더니 제자들과 함께 세 사람을 막아섰다.

“오늘 내가 장문인의 복수를 해 주마!”

그러곤 세 사람에게 검을 휘둘렀다, 말로 풀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

그는 능운파 수석 장로의 제자로서 수련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 하지만 송기연에게 눌렸고, 그래서 늘 질투심이 가득했고, 언젠가 송기연을 저 자리에서 끌어내려 자신의 발아래에 두기만 바라고 있었다.

지금 이렇게 좋은 기회를 그가 포기할 리가?

“저 자식 정말 말이 안 통하는군!”

안필화도 이번엔 화가 나서 자신의 법기를 꺼냈다. 이번에 저 버릇없는 녀석을 제대로 혼쭐낼 작정이었는데, 생각도 못 하게 송기연이 그의 앞을 막아섰다.

송기연이 창결검을 꺼내더니 일격에 바로 청년의 장검을 막았다.

그때 그 고철은 수백 년 동안의 온양을 거쳐 이제는 신광을 내뿜었다. 어느 상급 법기에도 뒤지지 않게 되었다.

은관으로 머리를 틀어 올린 청년이 검자루를 쥐고 무표정하게 말했다.

“죽여 주마.”

지금 송기연은 이미 대승기에 도달해 있다. 《천진결》도 이미 아홉 번 돌파하여 신계로 오를 날이 얼마 안 남은 것 같았다. 베일에 싸인 요수삼림을 제외하고 대륙에 그를 뛰어넘을 수 있는 자는 없었다.

십여 차례 공격을 주고받자 그 청년은 이미 버티지 못했고, 일격을 맞은 후 바로 얼굴이 창백해져 뒤에 제자들에게로 도망쳤다.

“모두 방금 저자가 한 얘길 들었겠지, 분명히 날 죽이겠다고 했다! 저 자식을 죽여라! 저런 배은망덕한 자는 죽어 마땅하다! 제자들이여, 나와 함께 저자를 제압하여 장문인의 위패 앞에서 사죄하게 합시다!”

“사형의 말씀이 맞습니다! 같이 싸웁시다!”

“맞습니다! 같이 싸웁시다!”

모두 각자 장검을 뽑은 뒤 일제히 송기연에게 검을 거두었다. 엄청난 살기에 주위 분위기가 한순간에 얼어붙었다.

앞에 있는 무표정한 얼굴의 송기연을 본 안필화는 뭔가 안 좋은 예감이 밀려들었다. 송기연이 사고가 날 게 아니라…….

그가 앞으로 나가 송기연을 막아서며 말했다.

“소선, 내가 처리할 테니 괜히 나서지 마라.”

지금 자신이 나서서 송기연을 막지 않는다면, 저 앞에 세상 물정 모르는 저 제자들은 오늘 여기서 목숨을 구제하긴 그른 것 같았다.

“됐습니다.”

청년이 고개를 내저으며 안필화를 지나쳤다. 엄청난 속도로 순식간에 그 제자들 앞에 나타났고, 성신지력을 가진 창결검으로 천도법칙을 움직여 매섭게 휘둘렀다.

쿵—!

콰과광-!

저 제자들이 쳐 놓은 검진이 순식간에 산산조각났다. 좋은 품질의 장검도 격렬하게 흔들리며 부러져 그만 바닥으로 곤두박질 칠 뻔했다.

창결검을 손에서 놓은 송기연이 두 손으로 빠르게 결인을 쳤다. 동작은 신비롭고 복잡했으며 머지않아 청색의 대진이 그들의 앞에 나타났다. 그는 그 엄청난 대진으로 잔뜩 겁먹은 제자들을 전부 감쌌다.

갑자기 정세가 급변하더니 먹구름이 대진 상공을 감쌌고, 미세한 번개가 구름 사이에서 번쩍이기 시작했다. 소름 끼치는 강풍 소리가 울렸다.

놀란 능운파 제자들이 대진에서 벗어나려 변경으로 향했으나 그 순간 창결검이 그들의 앞을 막아섰다. 몇 차례 전투 끝에 그 제자들은 부상을 당했고, 무슨 수를 쓰든 이 대진 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 청년도 그중 하나였다. 상처가 깊지 않아 아직 냉정한 편이었다. 그는 자신이 이자의 실력을 과소평가했다는 걸 알고 후회했다. 한숨을 내쉬며 송기연에게 소리쳤다.

“안소선, 우릴 여기에 가두어 뭘 하려는 거지? 네가 장문인을 죽인 게 아니라는 걸 증명하고 싶다면 이후로 우리 제자들에게 손을 쓰지 마라. 지금 온 대륙이 너를 의심하고 있는데, 네가 우리에게까지 손을 댄다면 영원히 그 죄목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내가 한 짓이 아니다.”

송기연은 간단하게 말하고 창결검을 소환하여 한 손으로 성결을 치고 말했다.

“그래서 너희를 죽이고 싶다.”

사실 송기연은 화가 난 것이 아니니다. 다만 이자들이 너무 시끄러워 그저 그들을 조용히 하는 방법은 죽이는 거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죽은 사람이 가장 조용한 법이었다.

쾅-!

번개가 구름층을 뚫고 맹렬하게 대진 속 제자들을 향해 떨어졌다!

“어서, 결계를 쳐라! 번개를 막아라!”

그 청년이 먼저 반응하여 제자들을 향해 소리를 쳤다. 곧 그들은 검진을 친 뒤 간신히 첫 번째 번개를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뒤이어 그들에게 진짜 지옥이 펼쳐졌다.

송기연의 동작에 따라 엄청난 번개가 끊임없이 떨어졌다. 갈수록 맹렬해졌고, 지금 이자는 저 제자들을 이 대진 안에서 말살시키려는 게 확실했다.

“소선, 그들의 말은 불손했지만 정말 널 해치진 않았다. 그러니 이렇게 하는 게……!”

노부인은 마음이 약했다. 제자들이 송기연에게 누명을 씌워 화가 나긴 했지만 죽이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싫습니다.”

송기연이 정색을 하고 노부인의 말을 귓등으로 흘렸다.

안필화가 노부인을 잡아끌며 한숨을 쉬었다. 그는 송기연을 데려올 때부터 이 순간을 예상했다. 저 아이는 태생적으로 감정이란 게 없다. 그들이 저 아이를 키웠지만 그 오랜 세월 단 한 번도 자신들의 말을 들었던 적도 없고, 늘 제멋대로 행동했다.

“윽—!”

“사람 살려—!”

“우리가 잘못했습니다! 제발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계속된 번개에 이미 많은 제자들이 버티지 못하고 피를 토했고, 얼굴은 백지장처럼 창백했다. 아무래도 곧 황천길을 건널 것 같았다.

그 순간 살려달라는 소리가 온 하늘을 에워쌌다.

저 멀리서 관망하던 유가는 주먹을 꽉 쥐었고 손바닥엔 땀이 가득했다.

그때 신전(神戰)에서도 저자는 저렇게 무표정했다. 수진자들의 죽음과 고통을 보면서도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었다.

이런 송기연의 모습에 그는 고통스러웠고, 마음이 아팠다.

“존주, 왜 그러십니까?”

유가의 표정이 좋지 않자 고금성이 미간을 찌푸렸다.

유가가 주먹을 풀고 아무 일도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우선 원반 위 마사들을 데리고 저 멀리 수림에 가서 숨으라고 지시했다.

곧 자신은 모습을 드러내고 송기연에게 걸어갔다.

기운을 숨기지 않자 유가의 모습이 사람들 앞에 드러났다.

강력한 기운이 다가오는 걸 느끼자 송기연은 결진을 친 오른손을 거두고 고개를 돌렸다. 그는 순간 몸이 굳은 채 눈을 뗄 수 없었다.

‘제가 왜 당신을 좋아한 겁니까?’

‘내가 경국지색이니까.’

‘……그건 어떤 얼굴입니까?’

‘보자마자 눈을 뗄 수 없는 얼굴이다.’

굳게 닫힌 밀실, 건조한 바닥, 점점 희미해지는 글씨. 왠지 모르게 송기연은 수백 년 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말하던 사람,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인생 속에서 사라진 그 사람이 떠올랐다.

“송…… 안소선, 언제까지 넋 놓고 있을 참인가?”

유가가 한번 기침하곤, 대진 속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고 어깨를 으쓱이며 물었다.

“내가 준 녹색 돌은 몸에 지니고 있느냐?”

유가는 자신이 이 앞에 나타나 천도의 음모에 대항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송기연 앞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다가 역사의 흐름에 방해를 주어 나비효과가 일어날까 걱정스러웠다.

그래서 조심하고 또 조심했는데, 지금은 참을 때가 아니었다.

“…….”

아직 얼이 빠져 있는 송기연은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옷 속에서 녹색 돌을 꺼내 유가에게 보여줬다.

유가가 나타난 이후 송기연의 가슴팍에 있던 녹색 돌은 계속 뜨겁게 열이 났다. 그리고 심장에 은은하게 따스한 기운이 스며들고 있었다. 그는 대진 속 제자들은 신경도 쓰지 않고 창결검을 집어넣고 유가에게 향했다.

한참이 지나서야 말을 했다.

“계속 기다렸습니다.”

삼백 년 동안 늘 기다렸습니다.

다음 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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