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경창 삼걸
“양성, 널 한 대 쳤더니 화가 풀렸구나. 너도 날 그리 욕했지만 아직 이렇게 목숨이 붙어있지 않느냐, 아마 나간다면 체면을 한껏 세워줄 것이다.”
유가는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호위대’처럼 왕다국과 송기연을 옆에 세워두고 말했다.
“그러니, 말해보라. 네가 알고 있는 것을 모두 말하라. 그럼 널 용서하고 죽이지 않겠다.”
양성이 그를 보고는 찢어진 입술로 웃으며 말했다.
“유가, 갑자기 당신이 참 불쌍하게 느껴지는군.
그때 신전 후에 당신은 몸도 작아졌고 수련 경지도 작아졌지. 게다가 아마 중요한 것도 잃었을 거야? 기억 같은?”
유가는 눈을 반짝였지만 표정은 변하지 않은 채 말했다.
“아, 축하하네. 당신 말이 맞아. 확실히 기억이 안 나니 지금 당신의 힘을 빌리려는 것 아니겠는가? 내가 잊은 것을 당신이 알려 주기만 하면 된다.”
그가 작아진 일도 아는 거라면 양성은 신전의 상황에 대해 명명백백히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유가는 조바심에 그럴 닦달하기보다 상투적인 말을 하는 게 옳은 선택이었다.
“그래서 당신은 송기연이 원수의 환생이라는 것도 잊은 것인가? 아니지, 몰랐다면 송가를 멸하지도 않았겠지. 그럼, 당신은 송기연이 당신의 원수라는 걸 알고 있다.”
양성이 살짝 머뭇거리더니 말했다.
“천마가 철천지원수를 마음에 품었구나! 정말 가소롭군.”
긴장하며 듣고 있던 송기연은 창결검을 더욱 꽉 쥐고 말했다.
“닥쳐라! 사존, 듣지 마세…….”
“하암.”
유가가 지루하다는 듯 하품을 하며 손을 내저었다.
“본론을 말하라. 이렇게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하고. 말로 날 화나게 할 순 없을 것이다. 게다가 우리 두 사람의 일은 이미 다 알고 있는데, 내가 그까짓 걸 신경이나 쓰겠느냐?”
그가 다리를 풀고 왕다국의 손에 들린 부채를 빼앗아 양성의 턱을 쳐들었다.
“넌 지금부터 내가 이곳에 온 이유와, 신전(神戰)이 어떻게 발발하였는지에 대해서만 똑똑히 말하면 되는 것이다. 알겠느냐?”
턱이 들린 양성은 밝은 유가의 얼굴을 마주 보고는 이를 악물고 고개를 돌렸다.
“당신 같은 사람은 존재해서는 안 됐다.
천 년 전 천하(天河)가 나타나기 전엔 하나의 대륙만 있었다. 마족도 그때는 힘과 자질이 인간에 비해 조금 높을 뿐, 그렇게 위세를 떨치지도 않았고 일파삼문육대가와도 사이가 좋았다.
하나 당신이 허공을 돌파하고 여기에 온 후로 마족의 실력은 갑자기 강해졌고, 자질은 인간에 비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지. 수십 년 동안 수십의 사람이 질곡(桎梏-속박, 수련의 경지)를 돌파하여 대승기에 접어들었고, 누구도 따라올 수 없을 지경이 됐다.
마족은 당신을 천마이자 존주로 떠받들었다. 당신이 마족에 재앙을 가져올 화근이라는 걸 아무도 알지 못했어!”
양성은 송기연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수십 년의 형세가 이자가 나타나면서 하루아침에 사라져 버렸지. 게다가 마족을 멸할 수 있는 천벌을 가져왔다.
나는 아직도 하늘을 뒤덮었던 수만 수천의 뇌겁을 잊지 못한다. 구름에 숨어 있다가 끊임없이 마족의 강자를 향해 내리쳤다. 송기연은 인간 고수를 데려와 당신의 목숨을 노렸고, 당신 주변에 있는 마족을 전부 죽였다.
천 년 전 신전은 학살이었고, 천도가 당신과 온 마족에게 행한 학살이었다. 온 대륙이 피와 시체로 뒤덮여 완전 지옥과도 같았다.
그 오랜 세월 동안 난 늘 생각했었다. 만약 당신이 이 대륙에 오지 않았더라면 그 학살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고, 인간과 마족에겐 두 번째 신전은 없지 않았을까 하고!
결국 당신은 재앙일 뿐이고 이 대륙의 사람이 아니다. 만약 가능하다면 당신이 하루빨리 마계와 이곳에서 나가 당신이 가야 할 곳으로 가길 바랄 뿐이다!”
“양성, 예의를 지켜라!”
가만히 듣고 있을 수가 없던 왕다국은 그의 말을 막았다.
짝짝짝짝!
하지만 유가가 박수를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배은망덕하구나.”
그가 자세를 바꿔 두 다리를 더 편하고 꼬고 앉았다.
“네 말대로 내가 이곳에 오기 전 너희 마족은 인간과 함께 어울리며 평안한 생활을 즐겼다. 내가 온 후로 혈통의 영향인지 다른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너희의 힘과 수련 경지가 강해졌고, 수많은 고수를 배출했다. 심지어 선계의 일부를 압도하며 마족은 날 존경하기 시작했지.
수십 년 후 저 녀석과 천벌이 내게 끝장을 보려 찾아왔을 때 마족을 일망타진 하려했고, 그래서 넌 그 무시무시한 학살을 직접 겪은 후로 모든 책임을 내게 전가한 것이다.
양성, 내가 질문하나 하지. 신전을 볼 때 당신은 몇 살이었나?”
갑자기 양성의 나이를 묻자, 그가 당황하며 대답했다.
“그때 나는 아버지를 따라 도망쳤었고, 고작 열다섯도 안 되는 나이였다.”
“하하하하하, 알겠군.”
현대로 치면 중2 정도 되는 나이였고, 유가는 간신히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그 당시 당신은 어린아이였고, 고작 눈으로 보이는 것만 보고 내게 책임을 떠넘겼군. 그러고 세월이 지나며 원한이 점점 누적되었으니 그 얼마나 유치한가.”
양성이 말한 앞부분은 분명히 어디선가 들은 것일 테고, 그 아이가 진짜 본 것은 신전의 일부일 뿐일 것이다.
잔혹한 종족 학살이 그에겐 강한 트라우마를 남겨주었고, 급히 이 원한을 떠넘길 대상이 필요했다. 그래서 외지인인 유가에게 대립각을 세우며 원망하고 욕을 해대고 나서야 자신이 수련한 심성을 동요시키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백 년이라는 시간 동안 도겁기에 머물러 있었고, 조금도 나아가질 못했는데, 이것만 봐도 이 일이 그에게 꽤나 영향을 미친 것 같다.
“내가 유치하다니? 난 사실을 말했을 뿐이다! 당신이 없었다면 신전도 없었고 그럼 그렇게 많은 마족이 죽지도 않았을 테니 다 당신의 잘못이다!”
현재, 수련의 경지가 봉쇄된 채, 속박당하여 묶여 있는 품위 있고 교양 넘치던 황천역 역주의 얼굴엔 멍과 상처 가득한 분노가 서려 있었다.
“됐다!”
유가가 갑자기 호통을 치더니 눈빛이 한순간에 돌변했다.
“네 말대로 내가 마족에 재앙을 몰고 왔다면 마족은 뼛속까지 날 원망해야 옳다. 하나 그때 내가 수하들에게 도망치라고 했을 때, 그들이 어떻게 했는지 너도 똑똑히 알고 있지 않은가?”
방금 양성의 말을 듣고, 그의 의식엔 머릿속에 부서진 장면 여러 개가 스쳐 지나갔다.
수많은 마족이 무릎을 꿇고 그에게 맹세했었다.
‘존주께 목숨을 걸고 충성을 다하겠다는’ 소리가 온 하늘에 울려 퍼졌었다.
그때 열두 마사를 제외하고도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뒤에 서 있었다. 그런 일을 잊는다고 잊히겠는가.
유가가 입을 악물고 그 장면들을 합치려 노력했다.
”마족은 기개가 있고 더욱이 충성심이 있다! 네 말처럼 나 때문에 수난을 겪어 내게 앙심을 품고 원한과 증오 속에서 죽었다는 말인가?
양성, 신전의 생존자로서 너는 날조된 사실 속에서 살며 내게 원한을 품은 채 살아왔고, 심지어는 나에 대한 마족의 충심까지 더럽혀 배반까지 했다.
이 아둔한 것아!”
유가의 호통을 마지막으로 장내가 조용해졌다.
송기연은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눌 때 편하지만은 않았다. 어쨌든 재앙은 자신이 가져온 것이었으니 주의를 끌지 않는 게 좋았다.
유가의 이 말을 듣고 송기연은 그 장면이 떠올랐다. 모두를 심복하게 했던 마존이 천벌을 마주하고도 안색 하나 변하지 않은 채, 여전히 호기 넘치는 자태로 서 있던 모습이었다.
모두가 놀랐었다.
양성에게 호통을 다 치고 유가는 멍하니 서 있는 세 사람을 둘러보았다. 기분이 많이 풀린 기색이었다.
큰소리치는 게 이렇게 유용할 줄은 몰랐는데?
지금 양성은 여전히 천 년 전 그 중2 소년의 생각에 갇혀 있었고, 누군가 깨우쳐주는 사람이 필요했다. 유가는 양성의 조롱에서 자신이 예전에 홀로 고군분투하지 않았다는 게 떠올랐고, 마족도 그의 실력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열두 마사 외에 그는 여전히 수하가 있었고, 친구와 동료도 있었다.
이건 모든 책임과 과오를 자신이 떠맡고 모든 사람들의 공포의 대상이었던 유가에게는 좋은 일이었다.
“당신 말이 맞아, 내가 틀렸다.”
양성이 고개를 숙이는데,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얼굴을 가렸다.
“난 시종일관 당신을 원망했지만, 아버지가 떠나실 때 얼굴엔 조금의 두려움도 없으셨다는 기억을 떠올리지 못했다.
그때 마족은 당신으로 인해 흩어진 모래가 단단한 돌로 변한 형상이었고, 그래서 천도가 천벌을 내릴 때도 아무도 도망가지 않고 당신과 함께 생사를 같이 했다.
하지만, 어째서…… 당신 같은 사람이 있을 수 있는 거지?”
목젖을 젖히며 양성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마족이었고, 유가의 말에 그는 깨우쳤다. 마족이라면 당연히 기개가 있었고, 천 년이라는 세월 동안 사라지지 않은 충성심과 오만함이 있었다.
그의 가문이 신전(神戰)에서 패한 뒤 그는 비통함에 모든 책임을 유가에게 전가했고, 고심한 끝에 고금성과 결탁하여 저자를 모함했다. 심지어는 선계 문파를 마계로 끌어들여 저자를 죽이려고까지 했었다.
첫걸음이 잘못되자 줄줄이 잘못되었고, 처음부터 사람을 잘못 미워했다. 그가 미워해야 할 사람은 천벌을 내린 천도였지, 눈앞에 있는 완벽한 천마가 아니었다.
“왜 나 같은 사람이 있냐고?”
유가가 웃으며 말했다.
“네 질문은 참 희한하구나. 네 어머니가 널 왜 낳았냐고 묻는 것과 같은 질문이다.
모든 사람은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가 있지. 너희가 날 어찌 보느냐는 너희의 일이다. 내가 할 일은 스스로 잘 살며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다.
지금 천도가 날 말살하려던 걸 알게 되었으니, 난 역천(逆天)을 할 것이다.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되더라도 상관없다. 난 반드시 그 천도에게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다.”
눈빛도 좋고 말투도 좋았다. 중2에겐 큰소리치는 방법이 필요했다.
유가는 제멋대로 자신의 패기를 뽐냈고, 부드럽게 말을 하며 오랫동안 높은 위치에 있었던 자의 매력을 힘껏 보여줬다.
하지만 천도에게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고 한 말은 진심이다. 송기연을 이용해 열두 마사를 죽이고, 마족에게 천벌을 내리는 이런 일은 말로 끝낼 수 없었다. 천도가 어떤 자식이든 감히 그를 건드렸으면 대가는 치러야 했다.
양성이 고개를 들고 유가를 한참을 바라보다가 비로소 말했다.
“천 년 전 마족이 왜 당신과 생사를 함께 했는지 알고 있다.”
온 얼굴에 멍이 가득한 사람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왜냐하면 당신은 유가니까. 하늘도 땅도 두려워하지 않던 유가니까. 당신 곁에 서 있다면 죽음이 뭐가 두렵겠는가?”
“잠깐.”
순간 송기연이 얼굴을 굳히고 나와 유가의 앞을 막아섰다. 양성의 말을 가로채며 말했다.
“뭐라? 충성심을 표현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럴 필요 없다. 사존께서 원치 않으실 테니.”
유가는 속으로 몰래 웃고 있었다.
눈앞에 양성이 자신의 큰소리에 탄복하여 그의 수하가 되려 하는데, 송기연의 황당한 말에 한순간에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송기연, 비켜라.”
“사존, 싫습니다.”
좀 전에 왕다국의 충성심이 송기연의 성질머리를 자극했는지, 그는 목을 뻣뻣이 세운 채 움직이지 않았다.
“천도와 맞서는 건 원래 사존과 저의 일이었습니다. 하나 좀 전에 형님을 끌어들이셨어도 전 참았습니다. 근데 지금 양성까지 끌어들이신다면 전 감히 양보할 수 없습니다.”
키가 더 큰 송기연이 양손을 뻗어 널찍한 소매를 펼치자 유가와 양성 사이가 완벽하게 가로막혔다. 사람 하나가 벽처럼 서 있자 유가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때 양성이 송기연의 싸늘한 얼굴을 보며 비웃었다.
“송기연, 지금 그 모습은 정말 역겹군.
넌 존주와의 원한이 정말 풀릴 수 있을 것이라 여기는 것인가? 천도의 꼭두각시였다는 말 한마디로 네가 저지른 모든 일이 다 사라질 수 있을 것 같은가?
또한, 네가 이미 스스로를 꼭두각시라고 말했으니 그럼 후에 넌 존주와 다시 맞서야만 한다. 난 존주와 천도가 맞설 때 등 뒤에서 칼이 꽂히는 걸 보고 싶진 않구나.”
양성은 유가에 대한 원망이 사그라졌지만 송기연을 좋게 대할 수는 없었다. 어쨌든 그때 저자가 천도를 도와 마족의 수많은 사람을 학살했다.
“존주를 떠나야 하는 사람은 너다. 내가 아니……,”
“닥쳐라!”
검광이 반짝거렸다. 양성이 말을 다 끝마치기도 전에 창결검이 그의 입을 겨누었다. 그가 한마디만 더 내뱉는다면 그 순간 검체는 입과 머리를 관통할 것이다.
검을 잡지 않은 왼손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는 양성의 말에 유가가 동요될까 두려웠다. 그는 유가와 자신의 관계가 살얼음판 위에 있어 한 걸음만 내딛어도 산산조각이 날 거란 걸 알았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어렵게 얻은 유가 곁에 있을 수 있는 자리를, 양성 때문에 잃고 싶지 않았다.
송기연은 표정이 완전히 굳은 채 눈에선 살기가 가득했다. 그는 검에 힘을 주어 양성을 정말 사지로 몰고자 했다. 하지만 갑자기 손목을 잡은 손 때문에 움직일 수 없었다.
고개를 돌려 유가의 두 눈과 마주쳤고, 익숙한 눈빛에 자조감이 들었다.
그는 유가의 이 눈빛을 기억했다. 이건 자신의 수하, 고금성, 왕다국 그리고 모든 마족을 보호하겠다는 뜻이었다.
자신은 시종일관 유가를 이길 수 없었고, 심지어 늘 그를 배반했던 양성조차 이기지 못할 지경이 되었다.
“내가 네게 명령을 하였느냐!”
유가가 송기연 손에 창결검을 빼앗아 다시 검집에 넣고 말했다.
“내 사람이면 내 말에 복종하라. 내 명령 없이 함부로 손쓰지 마라. 알겠느냐?”
내 사람이면 내 말에 복종하라.
내 사람.
내 사람.
눈 속에 가득했던 살기가 순식간에 눈 녹듯 사라졌고, 송기연은 왕다국의 경멸 섞인 눈초리를 받으며 발갛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양성의 성격은 솔직히 말해서 괴팍하고 중2 같은 게 송기연보다 별로 나은 건 없다. 그가 유가에게 충성하겠다는 마음을 내비쳤지만, 송기연의 불만 가득한 얼굴에 유가는 양성을 거두어 이용하겠다는 생각을 잠시 넣어두었다.
양성의 마음이 아직 변덕스러운 걸 생각하니 유가는 그를 황천역으로 쉽게 돌려보내진 못할 것 같았다. 우선 왕다국에게 속박을 풀어주고 용염역으로 데리고 가라고 명령했다.
혈침역과 천지역의 역주는 벌써 줄행랑을 쳤을 테니 찾으려면 시간이 꽤나 걸릴 것이다. 그는 우선 송기연과 선계로 가서 경창파의 두 사조에게 송기연의 진짜 신분에 대해 아는지 묻기로 결정했다.
전에 모풍이 자폭을 한 것도 이 녀석을 구하기 위함이었는데, 유가는 이해가 되지 않았었다. 생각해 보니 그 세 사람이 뭔가를 알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유가와 송기연이 황천역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뭔가에 깜짝 놀란 쌍두사자가 놀라면서 그만 공중에서 떨어질 뻔했다.
“송기연! 당장 나와라!”
밖에서 누군가의 외침이 들렸고 유가는 어쩔 수 없이 옆에 있는 커다란 송기연을 데리고 마차를 탈출했다. 그리고 앞에 서 있는 두 사람과 그들이 데려온 ‘큰 부대’에 어리둥절했다.
아구와 맹장, 그리고 각자 데려온 열 명의 도겁기에 진입한 신수족들이 위풍당당하게 그들의 마차 앞을 막고 서 있었다. 신수가 이렇게 많이 나타나자 혈맥에서 압도당한 당한 쌍두사자는 고개를 두 발사이에 쳐박고 벌벌 떨고 있었다.
유가는 사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자리를 떠나도 된다는 뜻을 내비쳤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위풍당당한 아구를 보며 달랬다.
“아구, 만나자마자 그리 큰소리를 치다니, 내가 반갑지 않은 것인가?”
신수의 성장은 느린데도 불구하고, 십오 년이라는 세월 동안 귀여운 소년이 제법 자랐고 이제는 키가 유가의 어깨 정도는 됐다.
그가 송기연을 노려보고는 유가에게 다가와 화를 냈다.
“대인, 왜 아직도 저 녀석을 쫓아내지 않으신 건가요? 그자가 당신께 그리 심한 짓을 했는데도 여전히 당신 곁에 있게 놔두신다면 그자만 이득이잖아요!”
오늘 아구의 머리는 맹장이 정리해 준 것이다. 연홍색의 리본으로 말총머리를 묶은 뒤 잔머리는 내버려 두었다. 말을 할 때 반짝이는 두 눈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말총머리에 영기가 넘쳐흘렀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유가는 습관처럼 아구의 말총머리를 쓰다듬었다.
하지만 손을 뻗자마자 순식간에 날카로운 눈총을 받을 줄 누가 알았을까.
하나는 송기연 다른 하나는 맹장의 것이었다.
두 사람 다 질투의 대인(大人)이었는데, 똑같이 화가나 말 한 마디 없이 그저 아구와 유가를 노려보기만 했다.
유가는 두 사람의 질투 어린 눈빛은 여봐란 듯 무시한 채 아구의 말총머리를 가지고 놀며 대답했다.
“그럼 이득이고 말고.”
“그러니깐요.”
아구가 바로 맞장구를 쳤다.
송기연은 가슴이 철렁했다.
“하나, 난 이제 존주가 아니고 날 시중드는 이도 없으니 지내는 게 많이 불편해졌다. 송기연은 허드렛일도 하고 밥도 하고 청소도 하고 정원 정리도 해 주지. 심심할 땐 그 녀석을 몇 대 때리면 재밌기도 해.”
송기연의 얼굴에 순간 희색이 돌았다.
유가는 그의 표정 변화를 단번에 알아챘고, 그 역시 입꼬리를 슬그머니 올리며 계속 말했다.
“그러니, 내 곁에 있어도…….”
“대인.”
아구가 그의 말을 끊고 정색했다.
“만약 당신께서 마계의 존주가 아니라 고생을 하신다면 안 되지 않습니까. 이번에 아구가 온 것도 바로 당신께 다시 마계를 탈환해 드리려 온 겁니다!”
붉은 옷을 입은 소년의 표정이 순간 날카로워졌다. 앳된 눈빛도 사라지고 어느 군주(君主)의 결연함까지 보였다. 말총머리에서 아직 손을 떼지 못한 누군가는 멍해졌다.
유가가 없던 십오 년 사이 아구는 이미 많이 성장해 있었다.
예전에 그를 향해 애교를 부리던 어린 아구는 이미 대승기를 돌파하고 주작족의 모든 일을 관할하기 시작했다. 일 년 전엔 청룡족과 연합하여 요수삼림을 통일하기도 했다. 그때 그는 강제로 요수삼림에 잡혀 내부 문제를 모조리 해결해야 했다.
지금 모든 일을 해결하고선 수하들을 이끌고 유가 앞에 나타나 그를 도와 다시 마존의 자리를 탈환할 생각이었다!
아구는 이번엔 굳게 결심했다.
“사존! 사존께서 존주 자리를 다시 되찾고 싶으시다면 저도 기꺼이 돕겠습니다!”
아구룰 말리진 못할망정 송기연이 끼어들어 더 나댔다.
“하하하!”
딱!
유가가 웃으며 아구의 이마를 한 대 때리고는 전처럼 아구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너희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이냐? 난 마존의 자리에 욕심이 없다. 높은 자리는 쓸쓸하기만 허다. 난 지금 이 생활이 참 좋은데 무얼 탈환한단 말이야. 앉고 싶은 자가 앉으라 하여라.”
말을 하곤 송기연을 가리켰다.
“넌 무슨 맞장구를 치는 것이냐, 전에 용염역에서 내가 한 말을 듣지 않았느냐? 작은 바람에도 갈대처럼 흔들리다니, 천 년을 넘게 살아도 아직도 이리 어린아이 같구나.”
유가는 소생한 후로 잔소리 심한 보호자가 되었고, 저 녀석은 십오 년이 흘렀지만 아직도 어린아이 같았다. 아구 역시 십오 년이 지나도 그의 일엔 쉽게 흥분하는 게 여전했다.
주작족 족장이라는 자가 요수삼림의 중립 입장은 생각도 하지 않고 자신과 함께 마계를 소탕한다고 했다.
유가는 혼쭐을 냈다. 아구는 맹장과 함께 돌아가라고 명령했지만, 그는 굳이 송기연과 함께 유가의 마차에 올라탔다.
사실 마차를 한 대 더 준비하는 건 손바닥 뒤집듯 쉬운 일이지만, 문제는 송기연과 유가가 한 마차에 탔다는 것이었다. 아구는 자신의 대인과 이야기하고 싶어했고, 맹장은 아구 혼자 보낼 수가 없어 각자 양보해 같은 마차에 타게 되었다.
마차 내부는 널찍해서 여러 명이 앉아도 자리가 남아서 서로가 불편한 상황이 생기지는 않았다.
밀폐된 공간에서 아구가 먼저 입을 뗐다.
“대인, 최근에 송기연이 대인께 혹 허튼짓한 건 아니겠죠? 그랬다면, 저 녀석의 손발을 잘라버리겠습니다!”
유가 맞은 편에 맹장과 나란히 앉은 송기연이 냉소하며 한마디했다.
“맨날 말만 그리해대면서 진짜 나를 이긴 적이 있긴 한가?”
사실 두 사람은 지난 십오 년 동안 여러 차례 겨뤄봤지만 아구가 이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 일은 아구의 치명적인 약점이 됐는데, 송기연은 그의 아픈 곳을 건드리는 걸 좋아해서 만날 때마다 서로 으르렁거렸다. 그는 사존과 단둘만 있고 싶은 마음에 이 쭉정이들의 신경을 건드려 화가 나 가 버리게 하려 애썼다.
“너무 일찍 으스대지 마라. 지난 몇 달 간 내 수련 경지는 눈에 띄게 성장했고, 맹장도 더는 내 적수가 되지 못한다. 이제 너와 내가 겨룬다면 승패는 확신할 수 없다!”
“맹장을 이겼는가?”
송기연이 옆 사람을 힐끗 보고는 아구를 조롱했다.
“이자가 네가 기뻐하길 바라 져준 것인지 어찌 아는가?”
“너!”
말문이 막힌 아구는 맹장을 향해 물었다.
“맹장, 당신이 말해 봐, 일부러 져 준 거야?”
“네가 스스로 벌써 말하지 않았는가. 맹장이 저번 시합에서 널 위해 져주었다고. 정말 가소롭군. 위풍당당한 주작족 족장과 ‘사람’의 대결에서 ‘사람’이 양보를 해야 이길 수 있다니.”
“송기연 허튼소리 하지 마! 오늘 널 죽여 버리겠어!”
그는 입만 열면 아구를 깎아내렸고, 아픈 곳을 건드렸다. 화가 난 아구는 벌떡 일어나 그와 목숨을 걸고 싸우려고 했다.
유가는 급히 아구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둘 다 그만할 수는 없느냐?”
맹장은 송기연에게 은혜를 입었기에 이자를 만날 때마다 항상 머리를 낮추었고, 전에 아구와 송기연이 싸움을 할 때도 그는 아구가 도망칠 길만 만들어 둔 뒤 전혀 개입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분노해 얼굴이 불그락거리자 그는 도저히 두고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화제를 돌렸다.
“대인, 다음 계획은 무엇입니까? 아무래도 이 마차가 천하 쪽으로 향하는 것 같은데, 혹 선계에 가시려는 겁니까?”
아구가 유가를 대인이라고 부르는 것을 보고 맹장도 자연스럽게 유가를 ‘대인’이라고 칭했다.
유가는 아구를 누른 채 송기연을 힐끗 바라보며 그에게 대답했다.
“난 경창파로 가서 두 원로에게 송기연의 전생에 대해 아는지 물을 생각이다.”
“경창파는 지난 십오 년 동안 두 사조를 제외하고도 백려와 다른 두 장로가 대승기를 돌파하여 실력이 막강해졌습니다. 대인께서 이번에 가신다면 저와 아구도 함께 갈 수 있게 허락해 주십시오.”
그는 일부러 송기연의 전생에 대한 얘기를 무시했다. 말하지 말아야 하는 일은 언급하지 않는 게 좋았다. 괜히 언급했다가 아구의 심기만 불편하게 만들 수도 있었다.
“맹장 말이 맞습니다.”
아구가 유가를 봤다.
“대인, 전 대인께서 홀로 경창파에 가시는 걸 두고 볼 수 없습니다. 그곳에 있는 자들은 계략이 복잡해 뭔 짓을 할지 모릅니다. 저희도 같이 동행하여 그들이 함부로 손을 쓸 수 없게 하십시오.”
아구의 언행은 많이 진정이 된 모양새였고, 이렇게까지 말하니 유가도 거절할 이유가 없어 고개를 끄덕였다.
유가가 허락하자 아구는 마음이 놓였다. 유가를 찾아오는 길에 들었던 기쁜 일이 떠올라 물었다.
“대인, 설요족 공주 야야 기억하십니까?”
유가가 멈칫했다.
“당연히 기억한다. 무슨 일 있느냐?”
“그녀가 삼 년 전 항상 곁에 두던 호위무사 낙지와 혼인을 하여 세 달 전에 쌍둥이 남아를 출산했습니다. 열흘 후 백일잔치를 연다고 이곳저곳에 초대장을 돌리는 모양입니다.”
말을 하곤 유가를 희롱했다.
“말씀해 보십시오, 대인께서도 초대장을 받으셨습니까?
어쨌든 칠 년 동안 약혼을 하신 분 아니십니까. 거기에 얼굴이 좀 예뻤습니까…….”
그는 일부로 ‘칠 년 동안 약혼’이라는 말에 힘을 실어 송기연을 자극했다.
콰앙—!
차체가 갑자기 흔들렸고, 쌍두사자가 다시 놀랐다. 유가가 미간을 찌푸리며 휘장을 젖히자, 직경 1촌(寸) 정도 되는 투명한 연꽃이 날리며 따뜻한 기운이 차 안을 감돌았다. 안정이 된 쌍두사자는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연꽃이 나타나자 유가 이마에 있는 은각이 모습을 드러냈다. 연꽃은 마치 영혼이 있는 것 같았다. 사람을 맞게 찾은 것 같은지, 천천히 유가의 눈앞에서 멈춰서 흩어졌다.
십여 장의 꽃잎이 뭉쳐져 동그라미를 만들었고, 그 가운데에서 야야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소녀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고 평범하지 않았던 미모도 여전했다. 마치 거울처럼 보이는 동그라미 속에서 야야가 유가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멋진 유가, 드디어 깨어났네요! 내가 그동안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알아요? 열흘 후에 내 두 아들의 백일잔치에요. 꼭 와야 해요! 극한의 땅에서 기다릴게요!”
맑고 깨끗한 여인 목소리가 이상하리만큼 조용한 차내에 울려 퍼졌고, 특유의 애교와 장난에 송기연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야야의 말이 끝이 나자 연꽃잎은 녹아내려 영패가 되었다. 그리고 그대로 유가의 손에 떨어졌고, 그 위엔 백일잔치의 시간과 설요족 표식이 새겨져 있었다. 이건 누가 봐도 야야가 유가에게 보낸 초청장이었다.
“야야도 양반은 못 되는군.”
차 벽에 기대앉은 아구가 한바탕 웃다가 송기연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아가씨는 결혼한 지 삼 년이 지나도 저렇게 아름다운데, 넌 못 본 몇 년 사이에 얼굴엔 이상한 상처가 생겼군. 어찌 그런 얼굴로 대인 곁에 계속 남아있는 건지?
난 오랜 세월을 대인 곁에서 지내며 대인께서는 남녀 불문하고 미모가 뛰어난 사람을 좋아하신다는 걸 잘 알고 있다. 넌 지금 네 그 꼴을 하고도 대인의 눈에 들 수 있을 거로 생각하는가?”
송기연은 멈칫했다. 방금 야야의 말에 어두워졌던 안색은 아구의 말에 완전히 굳어 버렸다. 더 이상 그에게 말대꾸도 하지 않았다.
“됐다. 아구, 그만하라.”
유가가 아구의 머리를 툭툭 두드렸다.
“이번에 야야가 날 초대했으니, 나도 딱히 가지 않을 이유는 없구나. 그전에 그 아가씨에게 적지 않은 도움을 받았으니, 이번 잔치에 참석하여 감사 인사라도 해야겠구나.
그리고 설요족 공주의 아이 백일잔치니 확실히 시끌벅적할 것인데, 아구 같이 가지 않겠느냐?”
“당연히 가야죠!”
아구가 눈을 반짝였다.
“이번에 대인과 함께 경창파에 갔다가 마계로 돌아가면 시간이 딱 맞을 것 같으니 그때 반드시……!”
차 안에는 유가와 아구의 신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건너편에 앉아있던 맹장은 어두운 표정의 송기연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옆에 있는 이 사람에 비해 자신은 정말 운이 좋았다.
지금 마계엔 주인이 없지만 적지 않은 고수가 있었고, 선마 양계는 서로를 견제하고 있었다. 다만 전에 고금성이 있었을 때 양측이 휴전 협정을 맺어 놓은 상태로, 덕분에 유가의 마차가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은 채 천하를 건너 선계에 진입할 수 있었다.
거기에 청룡 족장인 맹장 마부가 직접 끄는 마차를 감히 누가 막아 세울 수 있을까?
마차 안에 있다가 아구에게 쫓겨나 마부가 된 누군가가 쌍두사자 등의 털을 만지작거리며 다시금 한숨을 내쉬었다.
경창산 아래 도착하자 마차에서 내려 순찰을 돌고 있는 경창파 제자들에게 걸어갔다.
유가는 도포를 입은 젊은 제자를 향해 예의를 갖추어 말했다.
“나 대신 말 좀 전해줄 수 있겠소? ‘경창 삼걸(三傑)’의 옛 벗인 유가가 인사를 하러 왔다고 좀 전해 주시오.”
유가가 어떤 사람이었던가? 지금 경창파에서 유가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 리가?
그가 직접 자신의 정체를 밝혔고, 그의 뒤엔 경창파 출신의 송기연과 신수 가문의 두 족장이 있는데, 이 사람들이 볼일이 있어서 왔다고 하면 과연 누가 믿어줄까?
“우리 경창파에 찾아온 목적이 무엇입니까?!”
산 아래를 순찰하던 제자는 고작 축기기의 수련 경지였다. 그들의 눈에 유가의 웃음은 확실히 호의적으로 보이지 않았고, 곧 자신들의 목숨을 빼앗을 것만 같아 말문이 막힐 지경이었다.
“두려워할 필요 없네, 내가 정말 당신을 죽이려고 했다면 아직까지 살아있었겠는가?”
유가가 산길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니 쓸데없는 소리 말고 말을 전해달라고 했으면 어서 가시게, 내 말을 조금도 바꾸지 말고 그대로 전해야 한다. 알겠느냐?”
유가는 기세 자체가 원래 무서운 사람인데, 방금 이렇게 예를 갖추지 않고 말하자 제자들은 아연실색하여 식은땀을 흘리며 급히 고개를 끄덕이고 산 위로 향했다.
사실 유가가 이렇게 한 건 다 이유가 있다.
그는 오는 길에 계속 생각을 해봤는데, 그는 비록 경창파에서 고통을 겪었다고 하지만, 지금 양계는 평화로웠다. 게다가 마계에서 그는 모든 일이든 깔끔하게 처리했다.
한 주먹에 역주궁을 폐허로 만들고, 양성을 공격한 일도 별로 큰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선계에서 그는 경창파 사람에게 손을 쓸 수 없었다. 자신의 행동으로 양계의 관계를 망치고 싶지는 않았다.
더욱이 아구와 맹장이 속한 요수삼림을 끌어들이고 싶지도 않았다.
사실 입장을 바꿔 보면, 매일 싸우느니 오히려 앉아서 대화를 하는 게 훨씬 편안했다.
그는 그 두 장로가 그의 뜻을 모를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역시나 얼마 지나지 않아 수염이 난 두 노인들이 장로들을 거느리고 위풍당당하게 하산했다.
송기연은 손에 든 검을 더욱 꽉 잡고, 몇몇 익숙한 얼굴들이 보이자 고개를 돌려버렸다,
사람이 목석이 아닌 이상 어떻게 감정이란 게 없을 수 있을까?
완십주는 그의 반쪽짜리 사존이었고, 정상과 초운은 그의 친구였고, 백유리는 그에게 깊은 감정이 있던 사람이었다.
그때 그의 마음속엔 오직 유가뿐이어서 사랑이든 미움이든 상관없이 유가만 쫓으며 주위 사람들을 소홀히 했다.
문파를 이용하고, 친구를 배반하고, 백유리 평생의 행복을 망치기까지 했다.
유가는 송기연이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고는 바로 그 이유를 알아차렸다.
제일 앞에 두 사람은 장로, 그 뒤엔 백려와 완십주, 정상과 초운 그리고 백유리가 있었다. 이자들은 모두 완십주와 같은 도포를 입고 있었고, 그 얘기인 즉 모두 이미 경창파의 장로가 된 것이었다. 이전과는 신분과 수련 경지가 모두 달라졌다는 말이다.
송기연은 지금 오랜만에 고향에 돌아와 마음이 싱숭생숭한 상태였다.
옛사람들을 다시 만났지만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때 송기연은 어린 나이라 패기가 대단했고 흑화도 되었기에 규범에 어긋나는 일을 저질렀다. 그래서 십오 년 동안 선계의 적이 되었으니 고개를 못 드는 것도 당연했다.
“크흠.”
유가가 헛기침을 해 송기연에게 향하던 시선을 자신에게로 돌렸다.
”석개(石開), 임관(林關), 모풍(暮風) 세 분이 그 당시에 ‘경창 삼걸’이라고 불렸고 선마계에서 내로라하던 분들이셨죠. 오늘 내가 오랜 친구를 만나러 왔는데, 어찌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겁니까? 설마 두 분께선 내가 반갑지 않은 겁니까?”
그는 한참을 생각한 끝에 두 사람의 이름이 떠올랐다. 전에 뒤에서 남몰래 노인네라고 칭했었는데, 갑자기 이름을 부르려니 하마터면 혀를 깨물 뻔했다.
턱수염이 긴 사조가 석개, 성질이 대단하고 화를 잘 냈다.
모풍이 유가의 손에 죽임을 당해 원한이 깊었고, 다시 모습을 드러내고 앞에서 웃고 있자 그는 그만 완전히 폭발해 버렸다. 등에 지고 있던 장검이 윙윙 소리를 내며 검집에서 꺼내 앞에 선 사람을 죽이려 했다.
임관은 진중했다.
그가 석개의 어깨를 누르며 고개를 가로저은 뒤 유가의 앞으로 다가와 대답했다.
“마존께서 오셨군요. 더욱이 뒤엔 저희 문파의 전 장문인과 신수 가문의 두 족장도 함께 하시다니 우리 문파의 영광인데, 어찌 반기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가 오른손을 앞으로 내밀며 들어가자는 자세를 취하며 웃었다.
“모두 안으로 드시지요.”
임관이 말도 예쁘게 하고 표정도 웃고 있었지만, 눈빛은 유가를 속일 수 없다. 그 속에 든 원한과 살기는 석개보다 결코 적지 않았고 오히려 더 깊다고 할 수 있었다.
그 두 사람과 모풍은 수백 년을 의형제로 지내왔고, 그만큼 감정도 깊었다. 모풍이 죽은 지 이미 십오 년이나 지났지만, 유가에 대한 원한은 조금도 흐려지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번엔 차를 마시며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유가는 너무 빨리 모풍을 죽여버린 것 같아 후회가 됐다. 그러지 않았다면 지금 경창파와 이 지경이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모두 허공으로 날아올라 바로 산문 앞에 도착했다. 글자가 쓰여있는 거대한 돌을 보자 유가의 마음속에 지난 일이 떠올라 그는 그만 멈칫하고 말았다.
머리에 꽂힌 옥비녀을 만지작거리다가 그가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안으로 이동했다.
이 옥비녀은 돌고 돌아 송기연이 주운 것이었다.
꼭 그들의 관계처럼 완전히 끊어지지 않는 운명 같았다.
유가는 경창파 산문을 넘은 이후부터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경창파의 제자는 삼천이 넘는데 지금 그의 눈엔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자신을 맞이하러 온 이자들 말고는 다른 사람은 털끝 하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신식을 내보내 탐색을 하기도 전에 문제의 답을 찾았다.
삼천 명이나 되는 백의의 경창파 제자들이 손님을 맞이하려 창운전 문 앞에 집결해 있었고, 다들 정갈하게 서서 검을 들고 숙연하게 서 있었다.
유가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물었다.
“임관, 이건 무슨 뜻이오? 경창파에서는 이렇게 손님을 반겨주는 겁니까?”
임관이 미간을 찌푸리며 소리쳤다.
“모두 물러가라! 내가 한 말을 모두 잊은 것이냐?”
그 말을 들은 제자들이 모두 이를 악물며 검을 거두고 뒤로 물러나 문을 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임관이 비켜서며 유가에게 말했다.
“모두 들어가 앉으십시오.”
유가는 별말 없이 안으로 들어가 창운전 안에 놓인 탁자 앞에 앉았다. 송기연은 그의 곁에 앉았고, 아구와 맹장은 두 사람 곁에 있는 탁자에 자리했다.
임관과 석개는 상석에 앉고, 백려와 완십주 그리고 몇몇 장로들은 각자의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백유리와 초운은 송기연의 맞은 편에 앉았고, 계속 눈길을 주고받는 탓에 송기연은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그들은 신경도 쓰지 않고 잠깐 동안 유가는 도대체 임관이 경창파 제자들에게 한 말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봤다.
‘그가 한 말을 잊지 말라고?’
설마 그는 이미 자신이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건가? 임관과 석개는 자신을 증오했고, 문밖 저 많은 제자 역시 자신을 미워했다. 만약 좀 전에 산 아래에서 충분히 제압할 수 없던 상황이라고 한다고 해도, 경창파의 깊은 곳에 위치해 함정을 설치해둘 수 있는 창운전 앞까지 오는 동안 어째서 손을 쓰지 않은 거지?
임관 저자는 절대 만만한 자가 아니며 뒤에 어떤 상황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걸 직감이 알려주고 있다.
이런 생각이 미치자 유가는 열두 명분의 경계를 하며, 안 되면 무력으로 돌파하기로 했다.
“마존께서 오늘 이리 오신 건 아무래도 회포를 풀러 오신 건 아니실 텐데?”
임관이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유가도 숨기지 않고 털어놓았다.
“그렇습니다. 이번에 온 건 송기연의 전생에 대해 물으러 왔습니다.
만약 제 추측이 틀리지 않았다면, 그때 당신들께선 온 마음을 다해 저자를 보호하였습니다. 게다가 저자를 경창파 장문인으로 추대했는데, 그것도 전생의 신분과 연관이 있을 테지요?”
그는 임관과 석개의 안색이 변한 건 신경도 쓰지 않고 계속 말했다.
“당신들께선 저자가 전생에 천부적인 재능에, 실력이 대단했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사실을 알려 주지 않고 잘못인 줄 알면서도 묵과하며 칼끝을 유가 한 사람에게 겨누도록 했죠. 그리고 그 틈에 선계가 대륙을 통일하려는 목적을 달성하려 하셨고요.”
여기까지 말하고 그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계속 말했다.
“제 말이 틀립니까, 두 분?”
그 말에 임관, 석개 두 사람을 제외하고 모든 사람이 어리둥절했다.
그들의 기억 속에 송기연은 멸문을 당하고 유일하게 살아남은 존재일 뿐이었고, 유가가 말한 신분이라는 걸 알지 못했다.
그때 두 사조가 밀어붙여 송기연이 경창파 장문인이 된 것은 그저 두 사람이 그를 편애하여 그렇게 한 것으로 생각했다. 하나, 지금 보니 속사정이 있는 듯했다.
안색이 변한 임관이 한참이 지나서야 말했다.
“유가, 모두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왜 굳이 물으러 온 겁니까?”
유가는 눈을 크게 뜨며 일부러 놀란 척했다.
“누가 다 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가 왕다국에게 빼앗은 부채를 꺼내 부채질을 했다.
“전 그저 제멋대로 추측을 한 것뿐입니다! 하나, 보아하니 두 분께서 송기연의 전생에 대해 아시는 모양입니다?”
그가 일어서서 창운전의 한가운데로 걸어 나가 사람들을 훑어보다가 아구와 맹장을 향해 정중하게 말했다.
“맹장신군, 능구신군, 두 분께서도 들으셨습니까?”
“네, 두 사조께서 송기연의 전생에 대해 안다고 하신 말씀을 똑똑히 들었습니다.”
아구는 웃음을 참느라 이 한마디를 간신히 내뱉고는 입을 닫았고, 옆에 있는 맹장을 꼬집었다.
맹장이 재빨리 말을 받았다.
“본신군 역시 들었습니다.”
유가가 부채를 거두고 상석에 앉아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다면, 두 분께 송기연의 전생에 대해 말씀해 주시길 긴히 간청드립니다.”
임관은 안색이 굳어졌지만, 화난 기색을 드러내진 않았다.
어젯밤 꿈을 떠올리니 마음이 좀 가라앉았다.
손을 뻗어 작은 향로를 잡고 살짝 비틀자 주둥이에서 법결 한 더미가 나왔다. 그리곤 그 향로가 날더니 창운전 밖으로 나가, 사람 키의 두 배는 되는 거대한 향로로 변했다. 우뚝 서고 묵직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저 향로는 회세정(回世鼎)으로 그 안에 들어가면 그 사람의 전생을 볼 수 있소. 향로 밖에서의 하루가 향로 안에서는 일 년이오. 하지만 몇 시진이면 당신이 원하는 건 다 볼 수 있을 겁니다. 유가, 송기연의 전생을 알고 싶다고 하셨소? 그럼 이 향로 안에 들어가시오. 그럼 다 알게 될 터이니.”
임관이 상석에서 내려와 유가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아마 그 속에 들어간다면, 당신의 진짜 신분도 알게 될 테지.”
유가가 저 노인네와 거리를 벌리며 이미 서 있는 송기연을 바라보고 웃었다.
“임관, 당신이 사람을 모함하는 수법은 너무 얄팍하군. 만약 내가 저 향로 안에 들어간다면, 당신은 날 영원히 저 안에 가둬 둘 것 아니오?
난 당신이 직접 얘기해주는 송기연의 과거가 듣고 싶소. 당신도 입이 있지 않소?”
그는 이미 예를 차리지 않은 채 날카롭게 말했다.
저 향로가 나타난 후로 유가는 마음속에 안 좋은 예감이 마구 솟구쳤다. 임관과 맞서는 게 두려운 게 아니라 이 향로가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비유를 해 보면 흑석 침상을 처음 봤을 때 느낌과 비슷했다. 뭔가를 굉장히 많이 숨기고 있는 것 같아 다가가기 꺼려지는 느낌이었다.
“겁이 나는 것이라면 들어가지 않아도 되네. 다만 위풍당당하던 마존이 이런 작은 향로에 겁을 먹다니 알려진다면 아마 놀림거리가 되겠지.”
그의 표정을 본 임관은 비웃었다.
“이 늙은이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이냐?!”
아구가 화가 난 얼굴로 일어났다. 맹장이 막지 않았다면 그는 진작에 임관에게 욕을 퍼부었을 것이다.
“사존, 제가 가겠습니다.”
송기연이 몇 사람의 말을 끊고 유가 앞으로 걸어가 진지하게 말했다.
“만약 향로 안에 들어가서 과거가 기억나고, 제 전생이 기억나서 사존과의 오해를 풀 수 있다면 조금도 주저하지 않겠습니다.”
말을 마치고 그는 유가의 대답은 듣지 않고, 한 줄기 빛으로 변해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향로 안으로 들어갔다.
“송기연!”
놀란 정상이 지른 소리에 멍하니 있던 유가가 정신을 차렸다.
“제길! 저 녀석 뭘 저렇게 급하게 간 거야!”
그가 크게 소리를 치다가 옆에 아구에게 급히 말했다.
“아구, 저자들이 무슨 수법을 쓰는지 똑똑히 봐 두어라. 내가 가서 저 녀석을 데리고 오겠다!”
전에는 어떤 일이든 유가는 이 사람들 앞에서 욕을 한 적이 없었다. 그저 마음속으로 욕을 하며 풀었다. 송기연이 자기 마음대로 굴자 그는 정말 조급해졌고, 향로가 뭔지는 신경도 쓰지 않고 그냥 녀석을 따라 그 속으로 들어갔다.
유가의 모습이 향로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고 임관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손바닥을 뒤집자 그의 소매 속에 숨어 있던 향로 뚜껑이 나타났다. 그는 정말 송기연과 유가를 영원히 그 속에 가두려 했다.
쿵—!
아구가 손바닥을 휘젓자 뚜껑이 공중에서 멈추었다.
“이 영감탱이가. 본신군이 여기에 있는 이상 당신은 회세정에 다가가진 못한다!”
붉은 옷을 입은 소년이 사람 키의 두 배는 되는 향로 앞에 단호한 태도로 서 있었다. 대승기의 수련 경지에 혈맥도 우세한 게 기세가 딱 예전 유가와 비슷했다.
아구의 뒤를 따라가던 맹장은 공간 속에서 청색의 용 비늘을 꺼내더니 힘을 주어 뭉개버렸고, 잠시 후 청룡족 사람 몇 명이 청운전 주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용울음 소리가 경창산 상공에 낮게 울려 퍼지며, 경창파 제자들이 겁을 먹기에 충분했다.
“본신군이 네게 권하겠다. 그저 가만히 있으라. 만약 대인께서 열흘 내에 회세정에서 나오시지 않는다면 난 요수삼림과 선계의 약정을 깨고 너희 경창파를 가만두지 않겠다!”
아구의 말에 멈칫한 임관이 안색이 새파래져 말했다.
“고작 어린아이 주제에 우리 경창파를 상대할 수 있겠느냐? 그때 모풍은 능광신군에게 체면을 세워주느라 제자들이 청요신군의 독에 중독되도록 두었던 것이다. 지금 너와 저 청룡이 함부로 입을 놀리는데, 혀가 뽑히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 모양이군!
모든 제자들은 명령에 따르라! 결계를 쳐라!”
“네!”
이구동성으로 대답이 울려 퍼졌다. 수천의 검집에서 검이 튀어나와 아구와 맹장 주위를 순식간에 감쌌다.
하지만 검으로 위력을 발산하기 전에 제자들이 갑자기 모두 피를 토하며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검을 진기로도 버티지 못한 채 모두 땅으로 떨어졌고, 금속 부딪히는 소리만 들렸다.
“청요, 네 독은 정말 대단하군.”
두 사람이 자리에 쓰러진 제자들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내며 위장한 술법을 벗어던졌다. 역시 경창파 제자로 분장한 청요와 능광이었다.
능광은 청요의 어깨를 감싸며 청요의 자랑을 늘어놓는데, 두 사람의 수단이 너무 비열하여 임관과 석개의 머리에선 연기가 피어오를 지경이었다.
“두 사람은 제발 사람들을 그리 업신여기지 마시오!”
화가 폭발한 석개는 이번에 직접 장검을 뽑아 저 사람들을 향해 검을 거두었고, 중독이 되지 않은 장로들은 점차 자신들의 법기로 진을 치기 시작했다.
석개의 검을 막아낸 능광은 거대한 향로를 상공으로 던지며 아구에게 말했다.
“지금 당장 저 향로를 가지고 여길 떠나라, 어서!”
아구가 고개를 끄덕이며 원래 모습으로 돌아간 뒤 하늘로 날아올라 그 향로를 받아 들었다.
“단념하라!”
임관은 거대한 향로를 들고 아무런 방어 태세도 갖추지 않은 아구를 공격하였다. 일격 후 주작이 찢어지는 비명을 질렀는데, 상처를 입은 게 분명했다.
회세정은 그의 법기 중 하나로 그의 통제를 받았다. 이곳을 떠나려면 임관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어내야 했다. 아구는 그것을 모르다 상처를 입었다.
“감히 아구를 상처 입힌 것인가!”
그 소리에 전투에 임하던 사람들이 모두 아연실색하여 안색이 굳은 맹장을 바라보았다.
평소에 유순하고 화도 잘 내지 않고, 늘 아구의 곁을 따르던 맹장신군이 소년으로 돌아간 아구를 받아 들고는 임관을 노려보았다.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기는 맹장은 용혈로 제련된 장검을 손에 들고는 그대로 맞은 편 사람을 베어버렸다.
석개의 검을 막아서고 있던 능광은 고개를 내저었다.
“저 사람 참 재수가 없었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