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혼례식
유가는 바로 아구의 일을 물었고, 안전하다는 얘길 듣고 안심했다.
야밤에 침대에 누워 잠이 오지 않는 유가는 신식을 내보내 지붕 위에 있는 열여덟 명을 찬찬히 탐색했다.
참 가소로웠다.
두 번의 환생을 겪으며 이 세계에 왔고 그는 잠이 오지 않으면 천장에 누워있는 고금성을 탐색했다. 그땐 기억이 없어 고금성이 변태인 줄만 알았다.
지금은 고금성에게 살의를 느끼게 될까 두려웠다. 천장엔 이렇게 열여덟의 사람이 있는데, 설마 저 사내들이 유성이 떨어지길 기다리며 한담이나 나눌까.
슈슉-!
저 멀리서 희미하게 움직이는 소리가 전해졌고 유가는 내보낸 신식으로 정확히 느꼈다. 움직임은 천장에서 시작됐다. 유가는 벌떡 일어나 장풍을 날려 창문을 열고 그대로 뛰어 내려오는 행려각 고수를 맞췄다.
그자가 멈칫하는 사이 유가는 이미 그자의 앞에 다가가 손에 든 물건을 빼앗았다. 무표정하게 그자에게 주먹을 휘두르니 그자가 뒤로 휘청거리며 물러났다. 유가는 힘을 줘 특수하게 만든 청색 벌새를 산산조각냈다. 머릿속에서 갑자기 왕다국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한 마디 한 마디 마계의 상황을 보고했다.
유가는 천장의 서 있는 십여 명의 사람들을 올려다보며 고금성을 향해 말했다.
“금성, 네가 후회할 짓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유가는 고금성의 대답은 듣지 않고 다시 침실로 들어갔다.
왕다국이 전한 소식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다. 망책역이 시골역의 습격을 받았지만 그의 오랜 부하가 아직 남아 있어 이번에 망책역을 이끌고 시골역을 공격할 것이라 했다.
마궁과 혈침역, 시골역, 환해역, 천지역, 인진역은 이미 고금성의 편으로 돌아섰지만 남은 왕다국의 망책역과 육호의 용염역, 이결명의 생도역 그리고 양성의 황천역은 여전히 유가의 편이었다.
그 말인 즉 이번 반란을 뒤집을 기회가 있다는 것이다. 그는 고립무원이 아닌 뒤엔 아직 그를 신임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에게 충성하는 자들이 있었다. 결코 쉽게 패배하진 않을 것이다.
고금성이 이러는 이상 그의 목숨을 노려야하는데, 그건 유가의 몫이었다. 하지만 고금성도 그리 쉽게 내주진 않을 게 분명했다.
* * *
“송 가주, 지금 하신 말이 사실입니까?!”
태극문의 문주가 경창파 창운전에 앉아 송기연을 보고 진지하게 말했다. 백려 등 사람들도 함께였다.
“이런 일은 농담으로 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지금 경창파의 창운전은 선계 가문들의 문주와 가주로 가득 차 있었다. 모두의 시선은 서 있는 송기연을 향해 있었고, 그가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할 지만 지켜보고 있었다.
서둘러 주작족을 떠난 송기연은 경창파로 돌아오자마자 이 일을 상의하기 위해 제자들을 시켜 각 문파와 가문의 사람들을 모셔왔다. 모두가 모이자 그가 말을 했고 다들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고금성의 반란으로 마족이 어지러워졌다고 말했다.
고금성이지 않은가! 얼마나 많은 선계의 고수들이 그의 손에 목숨을 잃었으며, 유가의 곁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그의 모든 요구에 부응하며 불만도 제기하지 않던 자였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반란을 저지를 수 있을까. 확실히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농담하는 것 아닙니다.”
송기연은 안색 하나 바뀌지 않고 단호하게 말했다. 모든 걸 꿰뚫어 보고 있는 것처럼.
“마궁과 구(九)역 중 오(五)역이 이미 반란에 참여하였습니다. 만약 제 말을 믿지 못하시겠다면 직접 사람을 보내 마족의 상황을 조사해 보셔도 됩니다. 다만 유가는 완전히 속여 여전히 제 피로연에 오기만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송기연이 말을 멈추고 놀란 기색이 역력한 사람들을 한번 훑어보았다.
“이번에 여러분을 모신 건 고금성이 반란을 했다는 얘기만 전해 드리려는 건 아닙니다. 것보다 경창파도 이미 고금성과 연합했습니다. 오늘 비밀리에 마계로 이동해 고금성과 협조할 겁니다. 마족의 다른 사(四)역에 대항하여 마존의 자리를 쟁취하도록 도울 겁니다. 그리고 연회에서 유가를 선계에 묶어둘 것이고요.”
사흘 뒤에 유가가 자신의 수중에 잡힌다고 생각하니, 송기연은 벅차도록 설렜지만 겉으로 티를 내지 않았다. 이번 연회는 백유리를 위한 게 아니라 그가 유가를 위해 준비한 것이다.
장금문이 수놓은 혼례복은 사실상 세 벌이다. 그중 하나, 주작 도안이 새겨진 붉은 옷은 그가 어두운 곳에 숨겨 두었다.
2월 초열흘, 그날 송기연은 유가의 날개를 꺾고 그의 신분을 파괴할 것이다.
그날이 유가에게 붉은 혼례복을 입히고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 날이었다.
“내가 언제 경창파가 고금성에게 협조하라고 허락했느냐?”
백려가 탁자를 치며 일어났다. 그는 분노가 가득한 목소리로 송기연에게 소리쳤다.
“아직은 내가 경창파의 장문인이다. 문파 내의 일을 네 혼자 단독적으로 처리할 수 없느니라!”
그동안 백려는 화를 억누르고 있었다. 신묘도에서 자신이 영문도 모른 채 장문인의 자리를 잃게 되었고, 자신이 가장 아끼는 여식을 저 마음에도 안 드는 자식에게 시집보내야 했다.
아직 자신이 장문인의 자리에서 내려오지도 않았는데, 경창파의 일을 송기연이 마음대로 처리하다니. 고금성에 협조를 해? 속임수일 거라는 생각은 없는 것인가!
크는 걸 직접 다 지켜본 경창파의 제자들이 혹시나 마계로 들어갔다가 돌아 나오지 못한다면? 설마 송기연의 말 한 마디에 저 어린 제자들을 사지로 몰아넣어야 한단 말인가?
백려의 말을 들은 경창파의 두 사조가 안색이 변하여 냉정하게 말했다.
“백려, 입 다물게, 저분이 누구인지 안……!”
그때 송기연이 멈추라는 신호를 보냈다. 두 사조가 송기연을 보았고 송기연은 벌떡 일어나 백려의 앞으로 갔다.
“백 장문인께선 제 명령에 이견이 있으신가 봅니다.”
송기연은 고개를 돌려 아래쪽에 앉아있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말했다.
“백 장문인과 다들 같은 생각이십니까? 제가 나이가 어려 결과는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입바른 말에 넘어가 선계를 불의에 빠뜨린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럼 당신들이 생각하는 안전이라는 건 뭡니까? 아무것도 잃지 않는 계획 같은 건 존재하지 않습니다. 선계가 다시 일어나고 싶다면 도박을 해야만 합니다!
적절한 시기에 유가는 각종 견제에 시달리고 마계는 지금 어지러운 상황입니다. 이런 도박은 실패할 리가 없는데 어찌 그런 작은 손실을 두려워하는 겁니까?! 게다가……!”
스릉-!
금속성 소리가 울렸고 송기연의 창결검이 나와 검광을 반짝였다. 송기연은 자신의 진기를 최대로 끌어올렸다. 도겁기 절정의 실력이 드러나며 엄청난 위압이 대전을 뒤덮기 시작했다. 실력이 낮은 사람들은 숨쉬기조차 힘들어졌다.
송기연은 검을 백려의 목에 겨누고 말했다.
“제가 유가에게 질 거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일순간 대전 안은 고요해졌다. 방금까지 송기연에게 험한 말을 쏟아내던 백려는 온몸이 굳어졌다. 송기연의 살기가 자신을 향해 있다는 걸 감지할 수 있었다. 등골이 오싹해지며 식은땀이 흘렀다.
“다들 천 년 전 선마대전에서 천마를 죽였던 그 위풍당당하던 대능(大能)을 기억하십니까?”
경창파의 사조 한 명이 침묵을 깨고 일어나 말했다.
“송기연이 바로 그 분의 환생입니다.”
순간 대전 안의 공기가 바뀌었다.
“그분은 일찍이 돌아가신 것 아니었어?”
“말도 안 돼, 그 살신(殺神)이 아직도 살아오셨다고?”
“송기연이 어떻게 그분일 수가 있어!”
한바탕 파란이 일었고 여기저기서 경탄이 터졌다. 선계인들은 황당함을 멈추지 못했고, 나중엔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눈으로 송기연을 바라봤다.
그들 중에 그 사람을 실제로 본 자는 없었지만, 그자의 소문을 익히 들어 잘 알고 있다.
천 년 전 대전(大戰). 십만의 천하(天河)를 만든 무시무시한 전쟁.
그때 선마 두 사람의 수련 경지는 이미 대승기를 초월해 신의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선계 대능의 수법이 천마에 뒤지지 않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경창파의 사조는 그 대전을 직접 겪은 사람들이었다. 그러니 그들의 말이 틀릴 리가 없다. 어쩐지 송기연을 감싸고 돌더니,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 살신의 말을 거스를 담력이 있는 사람도 없었다.
“송 장문인의 말씀은 당연히 믿음이 가니, 저희 장금문도 고금성에 협조해 마계를 공격하겠습니다.”
빙장조는 처음으로 ‘송 가주’를 ‘송 장문인’이라고 바꿔서 불렀다. 그는 신수집회에서 송기연의 계획을 알게 되었다. 게다가 지금 이렇게 저자의 신분이 밝혀졌으니 그를 믿기로 했다.
“알겠습니다. 더는 송 장문인의 결정에 간섭하지 않겠습니다.”
백려는 순식간에 열 살은 늙은 듯 얼굴엔 피곤한 기색이 가득했다. 송기연의 신분을 알게 됐으니 그도 더 이상 반대할 명분이 없어졌다.
“태극문도 송 장문인의 지시에 따르겠습니다.”
“사우문도 따르겠습니다.”
“저희 가문도 따르겠습니다.”
여기저기서 대답이 터져 나왔다.
송기연은 백려의 목에 겨눈 창결검을 거두고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뭔가 이상했다. 옛날에 자신이었다는 그자에 의구심이 들었다. 그는 좀 전까지 의심하던 사람들이, 자신이 천 년 전 그 사람이었다는 얘길 듣고 이렇게 태세전환 하는 게 우스웠다.
그 사람 ‘대능’이 사라지기 전 자신에게 했던 기억을 잃었다는 말도 마음속에 돌처럼 박혀 답답했다.
그는 추측과 소문을 통해 그때 천마가 유가라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유가가 왜 그때 그 사람과 치열하게 싸웠고, 송가 전체를 멸할 정도로 원한이 맺힌 일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스릉.
창결검을 검집에 넣었다. 송기연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는 죽어도 입을 열지 않는 유가가 너무 원망스러웠다.
* * *
탁, 탁, 탁.
유가가 손가락으로 탁자를 치며 지난 며칠 동안 왕다국이 전해준 소식을 곱씹었다. 머릿속에선 마계 전체 지역도가 떠올랐다. 천하(天河)에서 제일 가까운 곳은 이결명의 생도역으로, 천하에 주둔하는 건 마궁의 사람이었다. 지금 마궁은 모두 고금성에게 복종하니 이결명이 마궁의 군대를 대적해야 했다.
요자의 환해역과 육호의 용염역은 마계 내부에서 서로 통제하고 있었다. 왕다국의 망책역은 방택의 시골역에 견제를 받고 있다. 그들은 전부 일대일로 상대하는 상황이라 적어도 어느 정도는 버티고 있을 수 있었다.
지금 제일 위험한 곳은 양성의 황천역이었다. 천지역, 인진역, 혈침역 세 곳에 둘러싸여 고립되어 있어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 이 네 구역의 지리 환경은 너무나 열악하여 끝없이 싸우는 건 불가능했고, 반드시 휴식시간이 있어야 했다.
두드림을 멈추고 유가는 자신의 잔에 물을 따르고 한잔 마셨다. 잔을 내려둔 후 두 손으로 법술을 부려, 왕다국이 전해 준 것과 똑같이 생긴 파란색 벌새를 만들었다. 그 벌새를 탁자 위에 놓고 주변에 방음벽을 쳤다.
“왕다국, 본존이 네게 반나절을 줄 테니 방택을 포기하고 필요하다면 시골역도 포기하라. 그 후 너의 사람들을 데리고 황천역, 천지역, 혈침역의 역주를 암살하고 양성과 협조하여 곤경에서 벗어나게 하라. 혈침역의 염부인과 염공은 독을 쓰는데 용이하니 조심하라. 그런 후 양성과 함께 방택을 대적하라. 만약 필요하다면…… 방택을 죽여도 좋다.”
유가는 멈칫했지만 최대한 냉정을 찾으며 말했다.
“우선 용염역은 상관하지 않아도 좋다. 요자는 기회주의자니 육호를 그리 심하게 밀어붙이진 않을 것이다. 그 후, 넌 양성과 함께 생도역의 이결명을 찾아 함께 마궁 군대에 대적하라.
마지막으로…… 본존이 돌아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유가는 마치 모든 힘을 쏟아붓 듯 숨을 불어넣었고, 벌새의 몸에 정신을 주입하자 눈에 생기가 돌며 문으로 날아갔다.
유가가 일어나 방문을 열자 밖에 있던 고금성 일행과 눈이 마주쳤다. 천천히 수를 세는데, 없어진 사람이 없자 웃으며 벌새를 날려 보냈다. 그대로 문에 기대서서 고금성에게 말했다.
“본존은 감히 누가 막는지 봐야겠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존주? 소인 감히 어찌 존주의 물건에 손을 댄단 말입니까.”
고금성이 유가를 향해 예의를 차렸고, 담담한 표정으로 덤덤하게 말했다.
문에 기댄 유가는 고금성의 저 가식적인 얼굴을 지켜보며 말했다.
“이제 와서 본존에게 무슨 겸손을 떠는 것이냐? 본존의 것에 손을 대지 않았느냐?”
고금성이 미간을 찌푸렸지만, 별말 없었다. 행려각의 고수들은 꼭 유가가 살생을 하는 맹수인 양 고 대인을 찢지 못하게 보호하려는 듯 그를 포위하고 섰다.
2월. 따뜻해진 바람이 온화하게 얼굴에 불어왔다. 유가는 눈을 감고 그 따뜻한 봄바람을 느끼면서 벌새가 지금쯤 멀리 간 것 같아 그만 눈을 떴다. 촘촘하게 방어 태세를 취하고 있는 십여 명을 바라보며 한번 웃고, 그대로 방으로 들어갔다.
* * *
파란 벌새는 이미 선계를 떠나 천하(天河)를 건너 마계에 진입했다. 전쟁의 불길이 가득한 망책역의 주성을 지나 왕다국의 손에 멈췄을 땐 이미 하룻밤이 지난 후였다.
망책역 주변엔 다량의 결계가 쳐져 있었고 모든 수진자들이 전력으로 진기를 움직여 망책역의 진공을 막아내고 있었다. 성 밖에선 방택이 이끄는 시골역의 고수들이 각종 술법으로 결계를 파괴하려고 시도하며 파열음이 심심치 않게 들렸다. 결계는 얼마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벌새를 깨뜨린 왕다국은 유가가 하달한 명령을 정리하는데, 눈빛은 수없이 변했다. 자신 주위의 오랜 부하들을 지켜보며 그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마음속에 새겼다.
“이택(李泽), 망책역은 네게 맡기겠다.
왕다국이 제일 곁에 있는 청년의 어깨를 두드리며 계속 말했다.
“존주께서 명령을 내리셨다. 우선 천지역, 혈침역, 임진역의 역주를 암살하고 양성이 곤경에서 벗어날 수 있게 협조하라시더군. 필요하면 망책역도 포기하라고 하셨다. 하지만 난 망책역을 포기할 수 없구나. 그러니 네가 남아라. 난 혼자 명령을 행하러 가야겠다.”
놀란 청년이 결계를 지탱하던 동작을 멈추고 급히 말했다.
“역주 어찌 혼자 가시려고 하십니까! 역주들의 수련 경지가 당신보다 약하지도 않을 뿐더러, 그들을 죽이려면 모든 이목을 따돌려야 하는데 그걸 어찌 혼자 하신다는 말씀이십니까? 설마 목숨을 내놓으시는 겁니까? 가시려거든 저희도 따라가겠습니다!”
“너희가 같이 가겠다? 그럼 이곳은 누가 지킨단 말인가?! 내가 없어도 너희가 충분히 지탱할 수 있지 않느냐. 내가 암살에 성공한다면 방택이 더는 망책역에 집중하지 않을 테니 그럼 모두의 목숨을 살릴 수 있다!
한데 만약 너희가 같이 간다면 이 결계는 지탱할 수 없을 것이다. 고금성이 어떤 사람인지 마계인이라면 다 알고 있지 않은가. 그가 반란을 마음먹었다면 유가의 사람을 한 명도 살려두지 않을 것이다!”
왕다국이 정색했다.
“선계를 떠나기 전에, 존주께 성민들이 다치지 않게 하겠다고 약속드렸으니, 반드시 지킬 것이다!”
왕다국은 표정을 풀고 활짝 웃으며 다시금 청년의 어깨를 두드렸다.
“게다가 이택 너는 내가 이 자리에 어찌 올랐는지 똑똑히 알고 있지 않은가. 수법을 써서 음모를 꾸미는 일은 누구보다 내가 잘 한다. 그러니 괜한 신경 쓰지 말고 나 대신 이 주성과 모든 성민을 잘 지켜주게. 돌아와서 술 한잔하지!”
이택은 여전히 웃고 있는 왕다국을 보고 입술을 꽉 깨물고 한쪽 무릎을 꿇었다.
“저 이택 반드시 망책역을 지키겠습니다! 성이 있어야 제가 살고, 성이 죽으면 저도 죽는 겁니다!”
“널 믿는다.”
일을 지체해서도, 시간을 지연시켜도 안 됐다. 왕다국은 이미 혼자 빠져나가기로 결정했으니, 더는 망책역에 머물지 않고 저녁에 몰래 성을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뒤에서 생각지도 못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시려고요?”
막청의 목소리에 왕다국이 그만 발걸음을 멈추었으나, 끝내 돌아보지 못했다.
“혼자 죽으러 가는 겁니까? 당신의 충성으로 목숨을 내놓으려고 가시는 겁니까? 유가가 당신에게 대체 뭐 길래 이렇게까지 복종하는 겁니까?”
막청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불만이 은은하게 드러났다.
“고금성의 이번 반란은 오래전부터 준비해둔 것일 텐데, 당신이 빠져나갈 기회를 주겠습니까?”
왕다국은 늘 막청이 하라는 대로 했고 그와 논쟁을 한 적도 없다. 하지만 이번엔 한참 동안 침묵하다가 마침내 돌아서서 막청을 진지하게 바라보고 말했다.
“막청, 존주께선 내 목숨을 살려 주셨어. 그리고 내게 믿음도 주셨어. 그분은 내가 굉장히 중요한 사람이고 생각하게 해 주셨어. 신하로서 나는 그분에게 충성하는 게 최고의 보답이야.”
희미한 달빛이 왕다국의 몸에 드리우자 그의 결연한 눈빛이 똑똑히 보였다. 막청은 갑자기 예전 일이 떠올랐다. 웬 더러운 아이 하나가 자신의 손을 잡고 두 눈을 반짝이며 말했었다.
‘기다려, 내가 언젠간 꼭 네게 장가갈 테니까.’
막청이 갑자기 표정을 풀고는 웃었다.
“막을 생각 없었습니다. 함께 가요.”
“응? 그게 무슨 소리야?”
왕다국은 갑자기 표정을 가볍게 바꾸고 미소를 지으며 막청에게 달려가 말했다.
“안 돼요. 막청. 망책역에서 날 기다려. 금방 돌아올 테니, 정말이야. 약속할게요.”
왕다국이 막청을 부드럽게 품에 안으며 한 손을 조용히 들어올렸다.
철썩-!
하지만 막청이 그 손을 먼저 쳐냈다. 목덜미를 노리던 왕다국에게 눈을 부드럽게 접으며 웃었다.
“왜요? 힘을 쓰시려고요? 날 기절시켜 성안에 데려다 놓고 몰래 빠져나가려고 하시는 거죠? 그런 작은 수법에 제가 속아 넘어갈 거라 생각하십니까. 절 데려가지 않는다면…….”
막청이 입꼬리를 올리고 바짝 몸을 왕다국에게 붙여 귓가에 속삭였다.
“앞으로 더는 내 침대에 올라올 수 없을 겁니다.”
그리곤 희고 작은 송곳니로 왕다국의 귀를 앙 깨물었다. 그의 도발에 왕다국 다리 사이, 세 번째 다리가 꼿꼿하게 섰다. 당연히 커다란 중량감이 막청에게도 닿았다.
“하하! 알겠어요. 가요, 왕다국. 크게 한판 하고 가요!”
막청이 환하게 웃으며 풀숲으로 걸어 들어갔고, 왕다국이 한참 뒤에야 얼굴을 붉히며 그 뒤를 따라 들어갔다.
* * *
2월 초열흘. 혼례식.
경창파 창운전엔 등불이 가득 켜지고 즐거운 분위기가 가득했다. 대문과 대청엔 붉은 휘장이 걸리며, 내부 피로연을 위한 탁자 위엔 붉은 식탁보가 깔렸다. 각종 술과 음식들도 즐비했다. 청운전에서 이어진 붉은 융단이 경창산 산문까지 깔려 있었고, 유가의 눈에도 그 모습이 비쳤다.
경창파의 두 제자가 꼼짝도 하지 못했다. 눈앞에 서 있는 유가를 보고 경거망동할 수 있을 이도 없다.
그들은 송기연이 유가를 초대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이자가 정말 경창산을 오를 줄은 생각도 못 했다.
붉은 옷을 입은 유가의 모습은 멀리서 살짝 엿봤을 때보다 훨씬 멋있었고, 혼례복을 입은 여인보다도, 아니 그 누구보다 아름다웠다. 하지만 누구라도 이 마존에게 엄한 생각을 떠올릴 엄두를 내지 못했다.
유가가 눈을 감고 북받쳐 오르는 복잡한 기분을 간신히 억눌렀다. 반지 속에서 송기연이 건네준 청첩장을 꺼내 두 제자에게 보였다.
“본존이 지나가도 되겠는가?”
“아, 마존 들어가십시오.”
어린 제자는 유가가 이렇게 규율을 지켜 방문의 예를 다할 줄 몰랐다. 안도의 한숨을 쉬고 길을 가리키며 정중히 유가와 고금성 일행을 들어가게 했다. 그들이 완전히 사라지고서야 제자는 긴장을 풀었다. 속으로는 유가에 대한 생각이 좀 달라졌다. 직접 만나 본 유가는 소문처럼 그렇게 악랄한 느낌은 아니었다.
경창산은 높지 않았고 창운전 역시 눈 깜짝할 사이에 도착했다. 유가는 한발 한발 정갈한 발걸음으로 계단을 올랐다. 그는 아직 송기연과 함께 경창산에 도착해 길게 줄을 서고 시험을 봤던 일을 기억하고 있다. 그때 송기연은 막 열두 살이었는데, 키는 열다섯 살의 소년처럼 컸다. 그때 시험을 보는 사람이 왜 이렇게 크냐고 질문을 하니 그 녀석은 이렇게 대답했었다.
‘잘 먹어서요.’
지금 생각해봐도 우습지만 그때 송기연은 그렇게 솔직했다.
하지만 그때 본인은 그저 짐을 덜고 싶었을 뿐이다. 그래서 산 아래에서 아이에게 산 정상에서 기다리겠다고 거짓으로 말하고, 그대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 버렸었다.
그 한 번으로 진짜 상처를 받았을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다시 무주지에서 송기연을 만났을 때 그는 이미 계산적으로 변했고, 독해져 마음을 읽을 수가 없었다. 생각해 보니, 마치 어떤 구원처럼 송기연에게 보살핌과 희망을 주었다가 더욱 절망만 안겨준 셈이었다.
어느새 유가는 마지막 계단에 올랐고 경창파 산문 앞에 도착했다.
우뚝 솟은 산문의 왼쪽엔 짙은 영기가 담긴 감천석이 세워져 있었고 그 위엔 기세가 대단한 세글자 ‘경창파’가 새겨져 있었다. 날카로운 검기를 내뿜었다.
거대한 돌 옆엔 한 사람이 서 있었다. 금색의 용문이 새겨진 붉은 혼례복을 입고 산 정상의 바람을 맞고 있었다. 긴 머리는 붉은 관으로 고정시켜 올리고, 등과 가슴으로 흘러내리게 두었다. 준수한 눈매와 오똑한 콧날, 얇고 단정한 입술.
창운전에서 손님을 맞이하며 흥을 돋우고 있어야 하는 송기연이었다.
그는 조용히 산문 앞에 도착한 유가를 바라보았다.
“왔군요.”
잠시 시선을 뺏겼던 유가가 송기연 앞으로 걸어가 적당한 거리를 유지했다.
“그래, 본존이 축하해 주러 왔다.”
웃고 싶었지만 웃음이 나질 않아 포기하고, 앞에 있는 사람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송 장문인 백 낭자와의 혼인을 축하하네, 본존에게 술 한잔 권할 생각은 없는 것인가?”
“축하 선물은 가져오셨습니까?”
“축하 선물?”
이런 질문은 예상 못 해서 유가는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안 가져온 겁니까?”
송기연이 애처럼 불만 가득한 표정을 지었지만, 순간 간사함이 스쳐 지나갔다.
“마존께서 제 선물을 고르지 못하신 듯하여 제가 스스로 골랐습니다.”
유가가 말뜻을 이해하기 전에 송기연은 유가의 머리 위로 빠르게 손짓하더니 꽂혀 있던 백옥비녀를 빼내 버렸다. 관이 풀리자 검고 긴 머리카락이 비단실이 넘실거리듯 바람에 흩날렸다. 요사스럽기도 청초하기도 한 유가의 하얀 피부, 붉은 옷 검은 머리가 바람에 어우러졌다.
“전 이거면 됩니다.”
송기연이 그 백옥비녀을 내보이더니, 이내 제 손 안에 꼭 쥐고서 보석이라도 받은 아이처럼 웃었다.
“송 장문인께서 그렇게 좋아한다면 드리겠소.”
유가는 옥비녀을 뺏지 않고 미소를 지으며 그대로 송기연을 지나치려 했다.
탁-!
하지만 유가가 그를 스쳐 지날 때, 송기연이 그의 손을 잡아챘다.
“마존, 오는 정이 있으면 가는 정이 있다는 말을 아시죠. 당신께서 제게 선물을 주셨으니 저도 뭔가를 드려야겠죠.”
송기연이 뻔뻔하게 내뱉은 말에 유가는 순간 멍해졌다. 누구의 혼례에 축하 선물을 보내고 답례를 받는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송기연 또 뭘 하려는 건가.
“공교롭군요? 저도 옥비녀 하나를 준비했거든요.”
송기연은 유가의 머리에서 빼낸 옥비녀를 조심스럽게 가슴팍에 집어넣고 손에 정교한 나무 상자 하나를 들었다. 그가 상자를 열어 보이자 옥비녀 하나가 보였다.
가운데엔 누군가 부러트린 적 있다는 듯한 미세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아시나요? 그때 천하 위에서 빼앗았던 당신의 옥비녀, 돌아가는 길에 그만 부러져 버렸죠. 원래는 천하에 버릴 생각이었으나 귀신에 홀린 듯 챙겨 넣었습니다.
지금은 그때 버리지 않아 다행일 따름입니다. 그때 사존께 받아 온 물건을 어찌 버릴 수 있을까요?”
송기연은 옥비녀을 꺼낸 뒤 유가의 긴 머리카락을 쓰다듬듯 보듬고 감싸 자연스럽게 틀어 올렸다. 옥비녀로 정교하게 고정하고는 손을 거두고 웃었다.
“사존, 정말 멋지십니다.”
유가는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악몽처럼 덮쳐오는 익숙한 그 시절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는 것이었다.
송기연이 점점 더 다가와 익숙한 숨결이 더 가까워지자 금방이라도 질식할 것 같았다. 약한 심장을 누군가 손으로 터트릴 듯 쥐어짜는 듯해 견디기 힘들었다.
오늘 송기연은 너무 이상했다. 자신과 이렇게 가까이하다 선계인들의 지탄을 받는 게 두렵지 않은가. 본래 창운전에서 손님에게 술을 권해야 할 신랑이 어째서 이곳에 혼자 서서 자신을 맞이해 주는가.
유가는 뒤로 몇 걸음 물러나 송기연과 거리를 벌렸다. 순간 기척이 수상하여 뒤를 돌아보자, 고금성과 행려각 고수들이 이미 자신을 포위하고 있었다.
아니야, 틀렸어. 이건 자신이 상상한 모습이 아니다.
고금성이 바보가 아니라면 여기에서 자신을 척지지 않을 것이다. 선계의 심장부에서 마족 내부의 내란을 선계가 알게 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
“유가, 무슨 생각 합니까?”
송기연이 한발 앞으로 나와 말했다.
“축하주를 마시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가시죠.”
송기연은 아무것도 눈치 채지 못한 듯 유가의 손을 정중히 잡아 끌고 청운전으로 들어갔다.
유가는 불안한 예감을 간신히 억누르고 담담한 척하며 고금성을 향해 말했다.
“금성, 본존과 함께 가자꾸나.”
유가는 고금성과 행려각 고수 일행이 도겁기의 실력이라는 걸 알고 있었고, 그들이 있어서 두려움 없이 이곳에 올 수 있었다. 그의 원래 계획은 표면상으로 평화로운 모습을 송기연과 모든 선계에 보여 그들이 마족 내부의 반란을 눈치 채지 못 하게 하는 것이다. 그건 고금성과의 호흡이 중요했다. 다만 지금 그의 명령에 고금성은 조금의 반응도 없다.
“송기연, 연극은 이만하면 충분하겠지?”
고금성이 송기연을 바라보고 손을 흔들자 행려각의 고수들이 동시에 각자 무기를 꺼내 들며 강렬한 살기가 순간 유가의 온몸을 압박했다.
“언제까지 좋은 제자인 척하고 있을 것인가?
고금성의 비아냥에 유가의 눈이 커졌다.
짝! 짝!
송기연이 가볍게 박수를 두 번 치자 경창파 산문 내부에서 수십 수백의 금속음이 들려왔다. 눈 깜짝할 사이, 각 가문과 문파의 선계 고수들이 유가의 앞에서 검을 겨누며 그를 포위했다. 그 안엔 익숙한 얼굴도 여럿 있었다.
태극문의 문주가 비웃었다.
“그 유명하신 마존 아니신가? 진짜 올 줄은 몰랐는데.”
“유가, 난 네게 정말 동정심이 있었단다. 제일 충성하던 수하가 배반한 건 어떤 기분인가?”
정원이 한 말이었다.
“정 가주는 정말 남의 아픈 곳을 건드리는군요. 어찌 마존 대인의 상처 위에 소금을 뿌린단 말입니까?”
전에 천하에서 찍소리도 내지 못했던 막상이 지금 이렇게 조롱했다.
유가는 이 광경에 그는 전생의 기억이 떠올랐다.
자신이 처음으로 넘어와 수옥에서 끌려 나오던 그 장면. 그때 수옥 바깥엔 온통 일파산문육대가의 사람이 서 있었고, 그때도 자신을 우스운 동물처럼 바라보며 죽으라고 저주를 퍼부었다. 그들은 흥미진진한 듯 발악하는 아구를 바라보고, 열반한 아구의 알을 끌어안고 폐물처럼 통곡하는 걸 지켜봤다.
지금 또 반복하여 그때처럼 모두의 표적이 되었다.
다행인 건 이번엔 아구가 없다. 유가는 애써 하늘을 한번 올려다 보고 고금성에게 담담히 물었다.
“두 사람 연합한 것인가?”
“그래.”
“언제부터?”
“신묘도.”
유가가 너무 담담하자 고금성은 오히려 이상했다. 유가의 물음에 착실히 대답하며 두 사람의 분위기는 묘하게 변했다.
“네가 왜 날 배반했는지 알고 있다. 하나 내가 널 죽이지 않는 건, 네게 미안해서다!”
유가는 눈 깜짝할 사이에 고금성의 앞으로 와 고금성의 멱살을 잡아 쥐었다.
“네가 선계와 손을 잡았을 줄은 상상도 못 했구나!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는가? 넌 지금 마계 전체를 위험에 빠뜨린 것이다! 외부인이 가족을 죽이게 내버려 둔 꼴이라고! 이 개자식아!”
유가는 본존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지 않았다. 분노에 휩싸여 이성까지 마비되었다.
고금성이 손을 들어 행려각 고수들에게 경거망동하지 말라고 표현했다. 그의 차가운 얼굴이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유가의 얼굴을 보는 고금성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졌다.
“유가, 당신도 이렇게 이성을 잃을 때가 있군. 내게 미안하다? 미안하다는 한 마디로 끝날 줄 알았는가! 그 한 마디에 돌아가신 내 부모가 다시 살아 돌아오실 수 있단 말인가!
네가 내 인생을 망쳤어! 난 그동안 널 가장 신뢰하고 평생 충성을 다할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지. 근데 넌 나와 철천지원수였어! 먼저 배반한 사람은 너야! 당신도 같은 고통을 겪게 할 수만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다!”
고금성은 악을 쓰며 소리쳤다. 그것만으로 온몸의 힘을 다 써버린 듯 숨을 헐떡였고 눈엔 핏줄이 가득 섰다. 한과 분노가 가득했다. 이 말을 하기까지 너무 오래 걸렸다.
“이게 네 진심이었군.”
유가는 낙담한 듯 고금성에게서 손을 떼고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그가 무슨 자격으로 고금성을 비난할 수 있을까. 인과응보다.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한 대가를 치를 때였다.
갑자기 무언가 떠오른 듯 유가는 벼락을 맞은 듯 눈을 떨며 고금성에게 물었다.
“너와 송기연이 연합하여 선계에서 마계로 군사를 보냈다면 왕다국은! 왕다국을 어떻게 한 것이냐!”
엄청난 불안이 밀려들었다. 유가는 머릿속이 뒤엉켰지만 억지로 냉정해지려 애썼다. 그는 자신이 왕다국에게 양성과 협조하라고 했다. 천하(天河) 변계의 생도역 역주 이결명과도 협조하여 함께 천하에 주둔하는 마계 군사를 대적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송기연과 고금성이 연합했다면 제일 먼저 공격하는 건 선계와 가장 가까운 생도역이었다!
“왕다국?”
송기연의 목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자 혼례복을 입은 송기연이 우울한 표정으로 싸늘한 눈빛을 비쳤다.
“사존, 지금 이 상황에도 왕다국을 생각하시는 겁니까?”
“송기연! 만약 그자를 건드렸다면 널 가만히 두지 않을 거다!”
하지만 송기연은 그새 얼굴을 바꿔 웃었고 유가는 공황에 빠졌다. 두 주먹에 흑금장갑을 씌우고 온몸의 기세를 전부 끌어올렸다. 짙은 살기가 가득 내뿜어졌다.
왕다국을 신경 쓰는 유가는 송기연에게 너무 아픈 일이었다. 그는 입가에 맴돌던 말을 전하는 대신, 입꼬리를 비틀며 활짝 웃었다.
“왕다국은 내가 죽였다.”
송기연은 어젯밤 왕다국의 놀라고 절망한 표정이 떠올랐다. 신묘도에서 자신이 그자에게 죽을 뻔했던 그때의 표정과 똑같았다.
“마, 말도 안 돼……. 그럴 리 없어!”
유가는 고개를 내젓다가 송기연에게 달려들어 그의 팔을 제압하고 부러뜨릴 듯 힘을 주었다.
“기연, 거짓말하는 거지? 네가 사존를 놀리는 걸 좋아한다는 거 알고 있다. 분명히 왕다국은 죽지 않았어. 맞지? 빨리 그가 살아 있다고 말해!”
왕다국은 늘 유가의 편이었고 유가의 희로애락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매번 그와 함께 어려움을 하나하나 헤쳐 나갔다. 유가는 왕다국이 없이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 싶었다.
늘 건들거리며 그에게 장난치는 준수한 남자, 뻔뻔하게 그에게 의지하는 양아치. 대전(大戰)이 임박하여 막다른 골목에 몰렸을 때 자신에게 큰 힘이 되었던 왕다국이. 어떻게 죽을 수가 있지? 유가의 큰 눈 속엔 두려움과 간절함이 가득했고, 커다란 눈동자에 투명한 눈물이 가득 올라왔다.
유가의 눈이 투명하게 빛나자 송기연은 마음이 아팠다. 다른 손을 들어 유가의 하얀 뺨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사존, 당신이 틀렸습니다. 거짓말을 좋아하던 사람은 당신입니다. 전 누굴 속인 적이 없습니다.”
송기연이 뒤를 힐끔 보자 경창파 제자 하나가 앞으로 나와 커다란 나무상자 하나를 내밀었다. 그리고 뚜껑을 열자 안엔 피로 뒤덮인 팔 하나가 있었다.
송기연이 유가를 옆으로 밀치고 상자에 가서 그 팔을 집었다. 그리고 손가락 하나를 비틀어 손에 쥐어져 있던 부채를 빼 들고 유가에게 가져왔다. 악마같이 웃으며 말했다.
“사존, 이게 누구의 부채인지는 잘 아시겠죠? 왕다국은 늘 이 부채를 들고 다녔으니까요. 일부러 사존께 보여 드리려 이 팔을 잘라 왔습니다.”
부채를 본 유가는 제자리에서 굳어졌다. 어떻게 왕다국의 부채를 못 알아볼까. 그리고 그 팔에 입혀진 옷.
그 녀석이 전에 자신에게 자랑했다. 막청이 자신을 위해 골라준 옷이라고. 좁은 소맷자락에 수놓아진 구름을 보고 왕다국은 몇 번이고 실실 웃었다.
“으아아아악-!”
유가가 미친 듯이 소리를 내질렀다. 주위의 기운이 극도로 불안정해졌고, 대승기 후기의 실력을 모두 방출했다. 수련 경지가 부족한 자들은 견디지 못하고 뒤로 물러났다.
“본존은 믿을 수 없다! 본존 돌아가야겠다!”
두 눈이 붉어진 유가가 급히 진기를 움직여 상공으로 솟구쳤다. 하지만 빛 한 줄기가 되기 전 청색 대진에 그만 길을 가로막혔다.
“결계를 쳐라!”
송기연의 차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모든 선계의 고수들이 하나둘 공중으로 떠올랐다. 곧 유가의 주위엔 일곱 여덟 개의 대진이 쳐졌고, 수십의 도겁기 고수와 수백의 합체기 고수가 진법을 결성했다.
지금 승산이 없었다. 하지만 유가는 왕다국을 찾아가야겠다는 일념뿐이었다. 그는 왕다국이 죽은 걸 믿을 수 없었다. 절대로!
“꺼져!”
유가가 주먹을 휘둘러 대진을 격파하자 대진의 모서리가 부서졌다. 수십, 수백의 힘으로 만들어진 대진이 점점 분열됐다. 하지만 곧 다음 대진이 다가오며 유가가 빠져나갈 구멍을 틈이 없었다. 유가의 눈빛이 더욱 맹렬해 졌고 그는 한 곳만 죽어라 공격했다. 최단 시간에 길을 터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이렇게 자학에 가까운 공격은 자신의 몸에 적지 않은 상처를 입혔지만, 그는 목숨을 걸면 걸수록 용감해졌다. 마음속엔 단 하나의 일념만 있었다.
돌아가야 해!
쨍-!
창결검이 뽑혔다. 강렬한 검기가 하늘로 치솟았다. 송기연이 검을 들고 대진 밖으로 날아올랐다. 고전하고 있는 유가를 보고 말했다.
“사존, 아직도 모르겠습니까? 마계는 당신 것이 아니고 이제 당신은 마존이 아닙니다. 고금성이 배반했고 왕다국이 죽었고, 마계엔 이제 당신이 지킬 사람이 없습니다. 당신의 곁엔 오직 나만 있습니다. 그러니 패배를 인정하고 저와 돌아가요. 저와 평생 함께 있는 거예요. 어때요?”
송기연의 눈에서 계속 붉은 빛이 반짝였다. 손을 뻗어 허공의 투명한 대진에 손을 올리고 진심으로 간청했다.
“저와 가요. 다른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가요. 당신과 저만 있는 곳. 아무도 우리에게 간섭하지 않는 곳으로. 모든 걸 내려놓고 떠나요 우리.”
그는 진짜 유가를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나서지 않고 대진이 유가를 멈추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유가는 포기할 기미도 보이지 않고 그의 몸엔 무수한 상처가 늘어났다. 송기연은 조바심이 났다. 유가가 자신에게 대답만 해준다면, 자신과 가겠다고 한다면 그는 바로 모든 걸 멈추려 했다.
송기연은 유가가 왜 이렇게 왕다국에게 집착하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유가의 마음속에 자신보단 왕다국이 차지하는 비중이 더욱 큰 것 같았다. 그는 감히 더 생각하지 못했다. 생각을 더할 수록 숨을 쉴 수 없었다.
유가의 오른팔을 자르고 그의 지위를 빼앗아 이제 유가에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도 왜 이 사람은 자신의 곁으로 오려 하지 않는 걸까?
“사존이라고 하지 마라!”
분노한 유가의 목소리가 대진 속에서 일갈했다.
“송기연! 난 너 같은 제자를 둔 적이 없다!”
급격히 유가에게 돌진한 대진에 등을 당한 그가 피를 토했다. 새까만 안색으로 주위의 대진이 끊임없이 부딪히며 압박하는 와중, 빠르게 진을 쳤다. 잠시 후 하늘엔 검은 대진이 유가의 주위에서 피어나 펼쳐지더니, 그를 감싼 청색의 대진을 밀어내려 했다. 유가의 눈에 광기가 번뜩이고 딱 한마디 내뱉었다.
“폭발하라.”
퍼억-!
고막이 터질 듯한 거대한 폭발음이 경창파를 뒤덮었다. 거대한 충격이 산의 나무들을 뒤흔들었고 하늘에 모래바람이 가득 덮여 사람들의 시선을 가렸다. 모든 사람이 힘을 합쳐 산문 앞을 막아서지 않는다면 ‘경창파’라고 쓰인 감천석이 버티지 못할 터였다.
“사존!”
심장이 철렁한 송기연이 폭풍을 헤치고 하늘로 날아올라 유가의 흔적을 찾았다.
쾅-!
공기가 깨지는 소리에 송기연이 집중하자 유가의 기운이 느껴졌다. 유가는 그를 쫓는 사람들을 따돌렸고 송기연은 안 좋은 예감이 미친 듯이 몰려왔다. 그는 유가가 영영 돌아오지 않을까 겁이 났다. 대승기인 사람이 숨겠다고 마음먹으면 절대 찾을 수가 없으니까.
모두가 술법을 펼치자 온 하늘을 뒤덮은 모래바람이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고금성은 유가가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천하 방향으로 쫓아갔다. 그는 지금 자신의 이 기분을 정확히 이해할 수 없었다. 유가에게 모든 걸 밝힌 후 계속 차분한 상태였지만 유가의 광기 어린 모습을 본 후론 마음이 복잡하고 쓰렸다.
이 기분이 이해되진 않았다.
* * *
“콜록! 콜록!”
유가는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울 정도로 빠른 속도로 이동하고 있었다. 그가 방금 사용한 진법은 금술(禁术)이었고, 대량의 정력을 사용했다. 게다가 시간을 벌기 위해 진을 칠 때 충격을 받은 탓에, 그는 지금 완전히 힘이 빠진 상태다. 만약 누군가 자신을 잡는다면 더는 도망갈 방법이 없었다. 최대한 사력을 다해 빨리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왕다국이 죽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송기연이 자신을 단념시키려 거짓말을 한 게 분명했다.
그 바보 같은 왕다국은 절대 죽을 리 없었다.
유가는 잠시도 쉬지 않고 날았고 송기연이 따라붙어 어느 정도 거리 뒤에서 그를 쫓았다. 유가와 함께 천하를 건너 전화(戰火)가 만연한 생도역의 광경을 직접 목격하였다.
생도역 상공에선 선마계의 사람이 처절하게 싸우고 있었다. 좀 더 확실하게 말하지만 고금성의 사람과 경창파의 제자가 생도역의 성민들을 도살하고, 유가에게 충성한 마족을 학살하고 있었다.
성안에는 불길이 타올랐고, 유가는 수련을 하지 않은 일반 사람들의 처절한 비명과 울음소리를 들었다.
그들은 무고한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이 유가에게 믿음을 주었지만 자신은 이런 끔찍한 말로를 선물하고 말았다. 이번 전쟁은 자신 때문에 발발한 것이다. 자신이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면 고금성이 배반하지도, 송기연이 그와 연합을 하여 이런 비극을 만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유가는 생도역에서 학살을 당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다가 누군가를 발견하고 급히 그쪽을 향해 소리쳤다.
“막청!”
이미 온몸에 피를 뒤집어쓴 막청의 흰 피부에도 수많은 상처가 나 있었다. 그는 살기 가득한 눈으로 적군을 향해 무자비하게 채찍을 휘둘렀다.
막청이 고개를 돌리고 유가를 발견하자 놀란 듯 핏줄 선 눈은 더욱 커졌다. 그는 유가에게 달려들어 유가의 멱살을 잡고 소리쳤다.
“당신 때문이야! 전부 다 당신 때문이라고! 당신을 위해 왕다국이 죽었어! 왕다국을 돌려내! 돌려내라고!”
막청이 소리를 지를수록 눈엔 눈물이 가득 맺혔다. 목소리는 점점 갈라졌다. 피와 눈물이 가득한 얼굴로 유가를 흔들었다.
“왕다국을 돌려내라고, 돌려내, 제발……!”
흔들리는 유가의 눈엔 이미 초점이 없었다. 그저 텅 비어었다. 귓가에선 그 바보 녀석이 떠나기 전 자신에게 했던 말만 맴돌았다.
‘혼자 도망가라고 하신다면, 그 말 들을 수 없습니다! 존주!
조실부모하고 힘들게 이 자리에 오르면서 마음속에 남아있는 사람은 몇 없습니다. 하나 존주께선 그 중 한 분이십니다. 존주께서 저를 벗이자 중요한 사람으로 여겼다고 해 주셨고, 저 왕다국도 똑같습니다. 게다가 본존께선 제 목숨까지 살려주신 분입니다.
그때 전 분명히 맹세했습니다. 평생 당신께 충성하겠다고. 지금 고금성이 배반했지만 전 목숨을 걸고서라도 그자에게 맞설 겁니다. 죽는 게 뭐가 두렵습니까. 전 그보다 당신을 배반했다는 고통 속에 사는 게 더 두렵습니다!’
그렇게 결연하고, 그렇게 충성스럽고, 그렇게 믿음직스러웠는데.
그런 사람이 자신 때문에 죽었다. 이렇게……죽었다고.
“하하하……”
유가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막청을 밀치고 뒤로 물러서 천하(天河) 쪽으로 걸어갔다. 돌아서서 이미 천하를 건너온 송기연과 고금성을 보고 더욱 크게 웃었다. 웃음소리는 점점 커지며 오만해졌다. 그 소리를 들은 막청은 아연해졌다. 붉어진 눈으로 송기연을 공격하러 가야 한다는 것도 잊어버렸다.
“하하하! 커흑, 하하하!”
유가는 온 힘을 다해 공격했고 부상도 심했다. 발작적으로 기침하며 피를 토했지만 개의치 않는 듯 닦아 버리고 송기연을 향해 말했다.
“송기연, 정말 악랄하구나.”
“사존. 소란 피우지 마시고 저와 돌아가세요. 그럼 바로 모든 걸 멈추겠습니다.”
유가 입가의 피를 보고 송기연의 심장은 점점 더 옥죄여왔다. 이건 그가 보고 싶었던 장면이 아니고, 생각한 장면도 아니다. 그는 그저 유가와 함께 떠나려 했다.
“저와 함께 가요. 다시는 선마계에 전쟁이 발발하지 않도록 하는 거예요. 당신은 마존이 아니고, 저도 경창파의 장문인이 아닙니다.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가요. 우리.”
송기연은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몰려와 더 초조하고 불안했다. 어서 빨리 유가를 달래 돌아가고자 간절히 애원했다. 지금 유가는 이빨 빠진 호랑이로 더는 도망갈 구석이 없다. 하지만 그는 두려웠다. 온 마음이 두려움으로 가득했다.
바람이 불어오자 유가의 붉은 장포가 익숙한 꽃처럼 흩날렸다. 검은 긴 머리, 창백한 얼굴, 초점 없는 눈, 유독 붉은 입술이 처절하게 아름다웠다.
유가는 천천히 손을 들어 옥비녀을 빼냈고 검은 머리가 하얗게 질린 얼굴을 쓸쓸히 쓰다듬었다. 손에 들린 옥비녀를 공허한 눈으로 바라보며 유가는 말했다.
“기연, 그거 아느냐? 어떤 물건은 부러지면 끝이다. 어떻게든 다시 붙인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균열이 남아 있지. 이건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니…….”
뚝-!
옥비녀가 유가의 손에서 두 동강나고, 그가 그대로 손을 놓았다. 옥비녀는 송기연의 눈앞에서 아래로 떨어졌고 천하(天河)에 빠져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부러진 건 부러진 채로 놔두어라.”
더 없이 덧없는 목소리가 천하(天河)에 파묻히려 했다.
“내 실력이 강력하여 모두들 날 두려워하지. 선마계 모두가 날 눈엣가시로 여기며 매일 날 어떻게 제거할지 궁리만 하고 있지.
그동안 많은 잘못을 저질렀다는 건 나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지금 모두에게 사죄하려 한다.”
그가 송기연을 보며 말했다.
“기연, 네 가문을 멸한 것 미안하구나.”
고금성을 보고 말했다.
“금성, 네 인생을 제멋대로 좌지우지하여 미안하다.”
거듭된 사과 후 한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난 천마다. 혼돈 속에서 태어나 부모 가족도 없어 평생을 살아도 마음속에 담아둔 이가 몇 없구나. 죽은 열두 마사 말곤, 왕다국, 아구…….”
유가는 천천히 붉은 옷자락을 들어 송기연을 가리켰다.
“그리고 너.”
순간 누군가 심장을 잡아 뜯는 것 같았지만 송기연은 유가에게서 한시도 눈을 뗴지 않았다.
“하나 네가 왕다국을 죽였지.”
열두 마사도 네 손에 죽었다.
유가가 눈을 깜빡이자 모두 그가 눈물을 흘릴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작게 웃더니 반지 속에서 검붉은 가면 하나를 꺼냈다.
“송기연, 난 널 좋아하고 싶지 않다.”
널 용서할 수가 없구나.
유가는 가면을 쥔 손에 힘을 주었고 송기연이 눈빛을 흔들며 소리쳤다.
“안 돼요!”
콰직-!
오래토록 머물렀던 가면이 가루가 되어 바람을 따라 흩어졌다.
흩날리는 붉은 가루를 보고 유가는 지난 기억들이 머릿속을 괴롭혔다.
그는 원래 영원히 거리낌 없이 행동하고 자유롭게 살아야 했다. 하지만 놀이 하나 때문에 손해를 보고 원수에게 마음을 쏟았다.
환생 후 그는 오만하던 태도를 버리고, 사람을 겨누던 칼끝을 거누고, 조심스럽게 주위의 모든 걸 저울질하며 모든 사람을 보호하려 했다. 하지만 모함에 빠져 제일 신뢰하던 사람을 잃었다.
유가야, 넌 처음부터 다 잘못되었다.
“사는 게 너무 지치는구나. 전생부터 현생까지 너무 지쳤다.”
까만 눈이 쓸쓸하게 허공을 헤맸다.
“믿었던 자가 날 배반하고 사랑하는 자가 날 옥죄어오고, 내게 충성한 자들은 죽고 다쳤다.”
유가가 긴 한숨을 내쉬고는 송기연과 거리를 벌리고 쓴웃음을 지었다.
“난 잘못 살았다.”
송기연은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걸 느꼈다. 급히 유가를 쫓으려 했지만 유가가 손짓으로 막았다.
“내 말마저 듣거라.”
유가가 담담하게 웃으며 손가락을 이마에 얹었다. 그리고 자신의 신식 소인을 꺼내 손바닥 위에 올리고 말했다.
“기연, 내가 네게 부탁할 일이 있다. 네가 동의만 해준다면 너와 함께 가겠다.”
“좋습니다. 사존, 뭐든지 해 드릴게요!”
송기연은 불안감을 애써 무시하며 곧 다가올 환희에 기뻐하기로 했다.
유가는 전쟁의 불길이 가득 타오르는 생도역을 바라보며 살짝 한숨을 내쉬고 금빛을 반짝이는 신식 소인을 힘차게 날려버렸다. 순간 머릿속에 극심한 고통이 닥쳐오고 의식이 점점 희미해졌다.
금빛이 유가의 주위를 감싸더니 공중에 금색 꽃이 피어났다. 너무도 찬란하고 눈이 부셔 누구도 눈을 뗄 수 없었다.
유가는 말했다.
“영원히 전쟁을 멈추어라.”
그리고 그는 추락했다.
통제할 수 없는 몸이 천하로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귓가엔 바람 소리가 사납게 울렸다. 유가는 마지막 힘을 다해 간신히 눈꺼풀을 들어올리고 제게 필사적으로 따라붙으려는 송기연의 얼굴을 똑똑히 새겨두었다.
모든 게 자신 때문에 일어났으니 그가 끝내야 한다.
갚아야 할 것을 다 갚았으니 더는 이렇게 힘들게 살아갈 필요가 없다.
다행이었다.
“사존-!!!“
송기연은 유가가 무슨 행동을 한 건지 알아채지 못했다. 다만 유가가 정신을 잃고 급속도로 떨어지자 필사적으로 달려들었고, 겨우 그를 자신의 품에 껴안았다.
“사존?”
송기연이 유가를 품에 안고 그의 창백한 얼굴을 어루만졌다. 한참이 지나도 대답이 없었다. 품에 안긴 사람은 조용이 눈을 감고 있었다. 유가의 붉은 옷 가슴 위로 귀를 댔는데, 심장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아무 움직임이 없었다.
금빛……. 그 금광은 뭐였지!
뭔가가 번뜩인 송기연의 두 눈이 흔들렸다. 떨리는 손으로 유가의 이마를 짚고 의식을 주입했으나, 유가의 신식이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당황한 그가 주위를 두리번거렸으나 그 금빛의 흔적은 조금도 남지 않았다.
신식은 한 사람의 영혼과 의식의 융합체다. 만약 신식이 망가지면 영혼이 망가졌고, 다시 되돌릴 수 없다. 유가가 이러는 것은 다시 환생할 기회를 완전히 깨뜨린 것이고 조금의 여지도 남겨 두질 않은 것이다.
“기연, 뭘 하는 건가?”
이미 선계의 고수들이 모두 뒤를 쫓아왔고, 고금성 일행은 서 있었다. 송기연이 유가를 끌어안고 있자, 완십주가 물었다.
“유가가 죽은 것인가?”
송기연의 눈이 완전히 빛을 잃었다가 순간 안광을 빛내며 고개를 돌리고 소리쳤다.
“사존는 죽지 않았습니다!”
송기연은 허공에 무릎을 꿇고 유가를 자신의 어깨에 기대게 한 후 그의 얼굴과 허리를 끌어 감쌌다. 부서질까 두려워하며 부서질 듯 품에 안았다. 눈을 감은 유가의 눈꺼풀 위로 입술을 맞대며 속삭였다. 점점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사존! 왕다국은 죽지 않았습니다, 제가 당신을 속인 겁니다!
그는 팔만 잘린 채 지하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당신도 아시겠지만 신묘도에서 그가 절 정말 죽이려 했고 그래서 전 그를 죽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사존께서 화낼 게 두려워 죽이지 않고 살길을 남겨 두었습니다. 이 일은 다 제가 베푼 덕입니다.
당신이 그자에게 그렇게 잘해 주시고, 웃으시는 걸 질투했어요. 그래서 그저 당신께 화를 내고 싶었을 뿐입니다. 당신의 눈 속엔 저만 있길 바랐어요.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당신을 속였습니다. 사죄드릴게요. 그만 화 푸시고 눈 좀 뜨세요!”
송기연은 떨리는 입술을 그의 이마에 묻었다가, 아직 따뜻한 유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송기연은 유가의 남아있는 영혼 조각을 찾으려 자신의 모든 신식을 내보내 천하 주위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창결검은 검집에서 나와 공중을 빙빙 돌았다.
“왕다국은 죽지 않았다고요! 사존! 듣고 계세요? 왕다국은 죽지 않았어요! 살아 있다고요! 아직 살아 있어요……!”
송기연의 목소리가 더욱 커지고 갈라지고 목이 멨다. 하지만 도저히 품 안에 사람을 흔들어 깨우지 못했다.
고금성은 담담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조금 당황스럽지만 그렇게 강렬하진 않았다. 유가가 하는 말은 모두 다 들었고, 자신의 목적도 달성했다. 그자는 너무 고통스러워했고,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해 자결하며 자신의 생을 끝냈다. 그는 복수의 쾌감을 맛봤다. 좀 전에 그는 엄청 통쾌했고 흥분했다. 하지만 그런 흥분이 가라앉은 후 지금은 어찌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이제 뭘 해야 할까? 복수를 끝낸 다음에, 이제 뭘 해야 할까?
“송기연 굳이 사람을 죽여 놓고 초상을 치러줄 필요가 있느냐? 유가는 죽었다. 복수를 했으니 기쁘지 않은가?”
고금성은 참지 못하고 송기연 앞으로 가 넋을 놓은 그자를 담담하게 조롱했다.
송기연이 고개를 들고 고금성을 바라봤다. 온 눈엔 붉은빛이 가득했다. 그는 화풀이 대상을 찾은 듯 소리쳤다.
“난 복수를 하고 싶지 않았어! 내 목적은 복수가 아니었다고! 나는, 나는 그저 사존를 원했다고. 사존와 함께 있고 싶었을 뿐이야!”
송기연이 유가를 뺏기지 않으려는 짐승처럼 꽉 끌어안고 말했다.
“그리고 사존는 죽지 않았어! 잠시 잠이 드신 것뿐이야. 곧 깨어나실 거야. 내가, 내가 왕다국을 죽이지 않았다는 걸 아셨으니 곧 일어나실 거라고. 내가 전쟁을……!”
그가 갑자기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뒤쪽 선계 사람들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전쟁을 멈춰라! 전쟁을 멈춰! 어서 전부 멈춰라!!”
그리고 다시 유가를 보며, 그를 살짝 흔들며 말했다.
“사존, 잘 들으셨죠? 제가 전쟁을 멈추라 했습니다. 더는 전쟁을 일으키지 않을 겁니다. 앞으로 선계와 마족이 싸우지 않게 하겠다고 약속드릴게요. 눈 좀 떠보세요.
제가 이 약속을 지키면 저와 함께 간다고 하셨잖아요. 제가 싸우지 말라 했습니다. 보십시오. 다들 멈추었습니다. 정말입니다. 어서 눈 좀 떠보시라니까요?”
엄청난 공황이 그의 마음을 짓눌렀다. 그가 더 유가를 안으려는데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떨리는 손으로 유가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계속 애원했다.
“제발 부탁입니다. 눈 좀 떠보세요. 제발요…….”
고금성이 비웃었다.
“송기연, 유가는 죽었다. 너와 내가 연합을 해서 죽인 거야. 내가 유가 곁에 오래 있어서 잘 알고 있다. 그자가 자신의 자행을 끊어버린 이상 어떤 여지도 없다.”
고금성 그도 자신이 왜 이렇게 담담한지 알 수 없었다. 스스로 이상하다고 느낄 정도다. 그는 계속 잔인하게 송기연에게 사실을 알려 주었는데, 그건 자신에게도 하는 말이었다.
“내가 신식으로 계속 찾아보았지만 어떤 생명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다. 그를 품에 안고 있으니 그자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잘 알고 있겠지. 자신을 속일 필요가 있겠는가. 그자가 죽었으면 죽은 것이다. 이제 원수는 사라진 것이다. 이제부터 내가 마존이고 너는 경창파의 장문인이다. 이 얼마나 좋은가?”
“꺼져.”
유가의 머리를 감싸 안은 송기연은 마치 야수가 포효하듯 소리쳤다.
“꺼져!”
그 순간 고금성이 머릿속에 뭔가 끊어진 듯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유가가 왜 너 같은 자식을 좋아했는지 알다가도 모르겠구나! 두 번의 생! 난 그의 두 번의 생을 함께했다! 지난 천 년!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나를 자신을 위해 목숨도 바칠 수 있는 수하로 생각했겠지.
난 그가 싫다. 그가 내 부모를 죽였고 내 인생을 좌지우지했어. 하나!”
그가 손으로 가슴팍을 두드리며 소리를 질렀다.
“그가 날 좋아하지 않아 화가 났다! 이번 생에 난 확실히 알게 되었어! 그동안 그가 했던 모든 행동은 다 너 때문이었다는 것을! 너를 위해 숨기고, 널 위해 상처를 입고, 심지어 널 위해 존엄까지도 포기했지! 송기연! 네까짓 게 뭔데? 네까짓 게 뭔데!”
고금성은 지금 자신이 왜 이렇게 외치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지금껏 기분을 잘 다스렸고 유가가 죽어서 기쁘다고 생각했다. 그저 마음이 좀 공허했지만, 별건 아니었었다. 하지만 송기연이 애틋한 모습으로 당당하게 유가를 품에 안고 있자 갑자기 울분이 달아올랐다.
그는 시간을 역행한 게 무엇 때문이었는지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전생의 송기연이 시간을 돌렸다. 송기연이었다! 이것도 저것도 모조리 죄다 송기연이었다.
노력한다고 해도 무슨 소용이 있었을까. 전생이든 현생이든 유가의 눈엔 오직 송기연 뿐이고 그는 장님이 아니었다!
그의 몸에 흔적을 남긴 사람이 누구인지 누구보다 똑똑히 알고 있었다! 그렇게 거만한 사람이 그렇게 제 몸을 기꺼이 내주다니! 송기연이 대체 뭔데? 대체 뭐기에 유가를 이 지경으로 만든 걸까!
그는 이제 분간이 되질 않았다. 유가가 자신의 부모를 죽여 미운 것인지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을 봐주지 않아 미운 것인지.
“죽어서 다행이군! 죽으면 누구도 품지 못하니까! 유가 같은 자가 순순히 널 따라갈 거라고 생각한 것인가? 유가가 어떻게 독 안에 든 쥐가 될 수 있었겠는가?”
고금성이 입꼬리를 올리며 송기연을 조롱했다.
“송기연, 아무도 유가를 가질 수 없다. 너도 예외는 아니야! 전생에도 갖지 못했고, 현생에도 갖지 못했다!”
주위를 샅샅이 뒤진 송기연의 신식은 어떤 금색 신식도 발견하지 못했다. 유가의 몸에 남아있던 온기도 점점 식어갔다.
고금성의 말이 그의 귓가를 두드리고 그의 고막을 때리고 그의 의식 속에서 폭발했다.
송기연 눈의 붉은 빛이 점점 더 짙어졌고 머릿속은 계속 망치에 맞은 것처럼 이명이 가득 울렸다. 심장이 없어진 기분이다. 누군가 쥐어뜯던 심장은, 그 유가가 사라지면서 같이 뜯겨나갔다. 어느새 다 자란 청년이, 그를 한 품에 품을 수 있는 청년은 길을 잃은 아이처럼 떨었다. 모든 걸 잃었던 소년처럼 온몸을 떨어댔다.
사존이 죽었다.
사존이 죽어 버렸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품속에 유가를 더욱 꼭 끌어안았다.
쿨럭-!
정신이 혼미해지며 송기연이 피를 토했다.
머릿속에 갑자기 잔상이 마구 쏟아져 나오고 휘몰아쳤다. 복잡한 기억 속에서 눈앞이 캄캄해지더니 그대로 의식이 멈춰버렸다.
‘천마, 이 마사들을 가장 좋아하던 것 아니었나? 내가 그들을 하나하나 죽여 주면 넌 나와 싸울 텐가?’
그는 자신과 똑같이 생긴 청년을 바라보았다. 그자가 창결검을 든 채 유가의 앞에 무표정하게 서 있었다.
유가는 품에 피를 뒤집어쓴 백발의 남자아이 하나를 끌어안고 있었다. 원한 가득한 눈으로 그 청년을 노려보며 이를 갈고 외쳤다.
‘본존이 꼭 피로 복수해 주마!’
‘기억은 완전히 사라질 수 없다. 네 영혼은 이미 완전하구나. 그럼 예전 기억이 곧 생각나겠지. 다시 수련을 통해 신이 되고 싶다면 과연 자신이 잊은 게 무엇인지 잘 생각해 보아라!’
흉수 도철이 떠나기 전 자신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송기연은 또다시 피를 토해냈다.
유가에게 더러운 피가 튈까 봐 당황하여 급히 얼굴을 닦았으나, 마구 닦다 보니 얼굴이 온통 붉어졌다.
눈을 감고 창백해진 유가의 얼굴을 바라보며 송기연의 눈에선 하염없이 눈물이 떨어졌다. 눈물 방울방울이 유가의 얼굴 위로 떨어졌고, 당연하게도 유가의 속눈썹은 움직이지 않았다.
송기연은 유가를 껴안고 억지로 고개를 숙여 유가의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 어색한 모양새가 꼭 유가의 품에 안겨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가 통곡을 했다. 바보처럼 그저 울며 부르기를 반복했다.
우는 소리가 온 천하를 뒤덮었다.
송기연은 생각났다. 자신이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는지 모든 게 생각이 나고 말았다. 그는 천마의 열두 마사를 살해했다. 그래서 환생한 유가가 송가를 멸한 거였다. 처음부터 자신의 잘못이다. 유가는 잘못한 게 없다.
유가는 송기연 자신이 죄책감을 느끼거나 유가에게 미안해하지 않게 했다. 그래서 그에게 유가를 미워할 이유를 주며 모든 걸 혼자 감당했다.
모든 게 다 자신의 과오였다.
천 년 전 기억까지 모조리 되살아난 송기연은 마치 말하지 못하는 갓난아이처럼 유가를 끌어안고 하염없이 울었다.
천하(天河)에서 사존을 얻었고, 천하에서 사존을 잃었다.
얼마나 지났는지 송기연의 울음소리가 잦아들었다. 목소리가 완전히 잠겼고 목에선 피가 나 입가로 흘렀다.
고금성이 고개를 들고 어두워진 하늘을 바라보았다. 강가의 바람도 제법 쌀쌀해지고 곧 가랑비가 내렸다. 빗방울이 뚝- 그의 눈으로 들어갔다. 마치 눈물처럼 눈꼬리에 맺혀 흘러 턱 끝에서 천하로 떨어져 내렸다.
그건 그자의 눈물이 아니다. 그는 송기연에게 악을 쓴 후로 기분이 좀 나아졌다. 다만 그 허무한 감정은 이미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극심해졌다.
고금성은 고개를 숙이고 송기연의 품에 안겨있는 평온한 유가를 바라봤다. 붉은 옷이 비에 젖어 핏빛보다 짙어졌다. 머리카락이 가닥가닥이 얼굴에 붙어 더욱 창백했다.
유가는 이러면 안 되었다.
그자는 영원히 제멋대로 굴며 웃고 있어야 했다. 마치 아직 철들지 않은 아이처럼.
‘본존은 하고 싶은 대로 할 것이니 너희는 참견마라.‘
‘금성, 본존은 왜 네가 욕구도 없고 욕심도 없다고 느껴지는가? 설마 말할 수 없는 집안의 여인을 마음에 둔 것인가? 자, 말해보라, 쑥스러워 말고?’
‘금성, 계속 그리 정색하고 있지 말고 본존에게 웃어보라’
‘금성, 본존에게 이 옷이 잘 어울리는가.’
‘금성, 본존에 곁엔 너뿐이다.’
금성, 금성, 금성…….
순식간에 메아리치는 음성에 놀랐다가 고금성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송기연에게 담담하게 말했다
“송기연, 내가 일이 끝나면 유가는 네게 주겠다고 말했다. 네게서 뺏지 않을 테니 알아서 처리하라.”
그리고 결연하게 돌아서서 행려각 고수들을 향해 말했다.
“우린 돌아간다!”
고금성과 마족들이 떠나려는데 순간 등 뒤 송기연의 기세가 급변했다.
고금성과 사람들이 모두 놀라 송기연에게 집중하자, 송기연 주위의 진기가 미친 듯이 팽창하더니 천지 영기가 진동하며 치솟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어두운 하늘에 먹구름이 몰려들고 겹겹이 쌓인 먹구름에서 끝없이 뇌겁이 내리쳤다. 점점 강렬해지는 뇌겁 소리에 다들 기겁을 했다.
“이게 뭐야!”
“송기연이 뭘 하려는 거야!”
“설마, 구중 뇌겁?!”
“말도 안 돼, 갑자기 대승기에 돌파한다고? 몇 살인데!”
“도겁기 절정이었으니 지금 돌파하는 것도 불가능한 건 아니야!”
“지금도 두려운데?”
“역시 저 사람답군!”
천하 위에 사람들이 모두 경악하여 외쳤다.
도겁기 다음이 대승기였다.
송기연은 스무 살도 되지 않은 나이에 대승기에 오르고 말았다. 모든 수진계가 놀랄 소식이다.
고금성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송기연이 지금 저렇게 불안정한 상태로 구중 뇌겁을 맞는다면 죽는 것과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혹여나 유가의 시체가 그와 함께 완전히 사라져 버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금성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네가 도겁을 하려거든 유가를 돌려줘.”
“싫다.”
극도의 절망 속에서 단호하게 내뱉은 목소리는 거북할 정도였다. 그가 핏빛 눈을 들자 그 속엔 엄청난 악기와 광기가 물들어 있었다.
송기연이 유가를 껴안고 천하(天河) 허공에 무릎을 꿇었다. 먹구름이 가득한 하늘을 바라보며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목에 난 상처 때문에 그 웃음소리가 꼭 귀신의 곡성(哭聲)같았고 주위의 악기(惡氣)가 정점을 찍었다.
“덤벼라! 나를 죽여라! 천도 같은 건 다 개소리야! 몇 번의 인생을 살아도 이 몸에 수련 경지 말고 남은 게 무엇인가! 왜 아직도 난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거지! 대체 왜!”
그에게 대답해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하늘의 구름은 더 짙어졌고, 번개가 내리치는 시간도 점점 짧아졌다. 곧 송기연에게 떨어질 것 같았다.
송기연은 품안의 사존을 더 힘주어 안고, 고개를 숙여 유가의 뺨에 얼굴을 갖다 댔다. 살짝 얼굴을 비비다가 유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사존. 깨어나지 않으신다면 모든 대륙을 당신과 함께 순장하겠습니다. 천도가 내게 모질게 군다면 저도 세상에 불의하겠습니다.”
콰과쾅-!
송기연의 말이 끝나지도 전에 엄청난 뇌겁 소리가 그의 머리로 내리꽂혔다. 그의 온몸이 날카로운 뇌겁에 뒤덮였다. 첫 번째 뇌겁의 잔상이 사라지기도 전에 생각지도 못한 속도로 두 번째 뇌겁이, 세 번째,네 번째, 다섯 번째 뇌겁이 내리꽂혔다.
천도가 그의 불손에 분노한 양, 엄청난 위력의 뇌겁이 송기연에게 내리쳐 사지로 몰아넣었다. 천하의 사람들은 눈만 크게 뜬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들은 그렇게 위협적인 뇌겁을 본 적이 없다.
구중 뇌겁은 거듭될수록 더욱 매서워졌다. 하지만 그 사이사이에 도겁기 수련자에게 어느 정도 여유롭게 준비할 시간을 주었다. 하지만 지금 송기연에게 구중 뇌겁은 숨 돌릴 틈 한번 주지 않고 끊임없이 내리쳤다.
모두 두려웠다. 아무래도 송기연이 살아남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지금 그들 눈에 송기연은 그냥 미친놈이었다. 완전히 미친놈.
무시무시하던 구중 뇌겁이 드디어 끝이 났다.
강렬한 빛이 사라지며 그 속에서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곧 선명하게 보이자 모두 놀라 숨을 들이켰다. 절대 살아남을 수 없는 사람이 조금도 다치지 않은 채 서 있었다.
붉은 혼례복을 입은 송기연은 붉은 옷을 입은 유가를 안고 있었다. 그 둘은 꼭 화촉을 밝힌 한 쌍 같았고, 옷이 휘날리자 두 사람은 그저 한 사람처럼 보였다.
하지만 송기연의 검은 머리가 산발로 뻗고 광기 어린 눈빛이 이전의 유가보다 더 천마처럼 보였다. 경창파의 사조는 그 모습을 보고 뭔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
“후퇴하라! 결계를 쳐라!”
사람들이 상황을 이해하기도 전에 송기연은 유가를 조심히 받쳐 한 팔로 감싸들고, 창결검으로 주위를 훑어보았다.
“너희부터 시작하자.”
“입마했다!”
백려의 고함에 사람들이 정신을 차렸다.
송기연 주위의 악기와 살기를 본 사람들이 유가에게 사용했던 결계를 급히 치기 시작했다. 하지만《천진결》을 구중 수련한 송기연의 실력이 유가보다 결코 뒤지지 않는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그들이 진법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지금 모든 기억이 돌아온 송기연의 감정은 붕괴되기 직전이라 수법이 유가보다 악랄할 수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진 몇 개가 창결검에 부서졌고, 엄청난 힘에 적지 않은 사람이 내상을 입었다.
눈앞에 장애물을 제거한 송기연은 고금성을 바라보고 입꼬리를 올리며 창결검을 들고 돌진했다.
“네가 무슨 자격으로 내게 사존를 운운하는가! 넌 처음부터 그냥 사존의 옆에서 길러지는 개자식이었다!”
창결검과 막대기가 맞물린 채 송기연은 고금성에게 더 다가가 말했다.
“고금성, 정말 가여워.”
“유가는 죽었다.”
고금성은 격분하지 않고 한 마디만 말했다. 눈앞에 얼굴이 일그러진 송기연을 보고 눈썹을 치켜 올렸다.
“송기연 아직도 피하고 있군. 입마하여 유가를 잃은 슬픔을 온 대륙에 발설할 모양이야.
유가가 죽기 전에 남긴 말을 잊지 마라. 그자는 대륙의 평화를 원했다. 왜 그렇게 선량해졌는지 모르겠지만, 난 그자 대신 마계를 잘 다스릴 것이다.
내가 배반한 것은 복수 때문이었고, 그가 죽었으니 내 목적은 달성했다. 난 이제 그자 대신 이 마계를 보호할 것이다. 근데 너는 무얼 할 수 있는가?”
송기연의 창결검이 빗나가고 그의 몸도 굳었다.
내가 무얼 할 수 있냐고.
유가는 늘 그를 위해 헌신하고, 치료해 주고, 상처를 입었다. 그의 심마와 욕정을 위해 그의 아래 눌려 그 폭력적이고 가혹했던 능욕을 다 받아들였다.
그를 위해 나아갈 길을 알려 주었고, 끊임없이 도발하는 자신을 버렸고, 모두의 앞에서 체면을 잃었다.
술에 취했던 그 밤, 지독했던 욕정을 발설한 후에도 그는 먼저 몸을 일으켜 따뜻한 팔로 자신을 안아주었다. 정신을 잃고서도 그에게 또 구해졌다.
자신은 마치 제멋대로인 아이처럼 당연하다는 듯 그의 보살핌을 받고, 그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했다. 자신의 만족을 위해 그를 계속 압박하다가 지금 이 결과를 초래했다.
속이고, 핍박하고, 가두고, 이 세상을 멸할 명분을 세우기까지. 그는 유가에게 모질게 끊임없이 요구했지만, 그의 작은 부탁 하나 들어준 적이 없었다.
‘영원히 전쟁을 멈추어라.’
스릉-
창결검이 검집에 들어갔다.
송기연의 붉은 눈에선 눈물이 마르지 않고 흘러내렸다. 빗물과 뒤섞이며 준수한 얼굴이 엉망이 되었다. 그는 고통에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
“약속하겠습니다.”
입마(入魔)가 그 순간 붕괴되었다.
고금성은 송기연의 두 눈에서 악에 받친 기세가 사라지고, 남은 맑은 빛을 똑똑히 보았다. 그리고 놀라 얼굴을 굳히고 지켜 보았다.
송기연이 고개를 살짝 꺾어 제 어깨에 기대 눈을 감고 있는 유가에게 살짝 입을 맞추었다. 이마와, 눈꺼풀과, 콧날, 입술에 차례로 입을 맞추며 비가 갠 하늘처럼 웃었다.
“사존, 저와 함께 귀곡으로 돌아가실래요? 꽃이 예쁘게 피어있을 테니 가서 볼까요?
제가 사존께 생선을 구워드릴게요. 사존께서 제일 좋아하는 거잖아요. 이번엔 맘껏 드실 수 있도록 충분히 준비할게요.
그리고 흰목이버섯 연밥탕도 있어요. 맞아요. 거기엔 사존께서 좋아하시는 온천도 있고, 집도 정리해야 해요. 사존께선 깨끗한 걸 좋아하시니 먼지들을 참지 못하시겠죠…….”
송기연의 눈이 금빛으로, 혹은 푸른 잎으로 투명하게 반짝였다. 온몸엔 악기가 완전히 사라진 채 그는 그는 마계로 향하고 있었다.
호선을 그리는 입은 가만히 있지 않고 계속 조잘거렸고, 때때로 유가의 머리카락과 얼굴에 가볍게 입도 맞추었다.
갑자기 변한 그의 모습에 다들 경악했지만 감히 앞길을 막을 수 없었다.
다만 고금성은 확실히 알았다.
지금 송기연은 정말 미쳤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