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4장 애원(哀怨) (17/40)

제4장 애원(哀怨)

계속 유가 곁에 서 있던 고금성은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거센 바람에 유가의 두포가 흔들리며 꽉 쥐고 있는 주먹이 보이다 사라졌다 했다. 다시금 바람이 불자, 은은한 피비린내가 풍겨왔다. 유가는 지금…… 치열해 보였다.

고금성은 사람들에게 축하 인사를 받고 있는 송기연을 바라봤다. 확실히 자신이 사람을 잘 고른 것 같았다. 전생이든 현생이든 송기연은 유가에 대적할 만큼 막강했다. 저자와의 합작이 성공할 날이 아무래도 머지않은 것 같았다.

다만, 정말 유가를 저자에게 맡겨도 되는 걸까. 전생처럼 고문을 받다 죽게 될까.

송기연이 유가의 오만과 존엄을 짓밟는다면 저 의기양양하던 모습이 사라질까. 오른손에 한기가 느껴지자 고금성의 정신이 돌아왔다. 손에 막대기를 꽉 쥐자 표정은 다시 평온해졌다. 유가는 이 막대기로 자신의 부모를 죽였고, 부모를 죽일 때 사용한 무기를 자신에게 주고 수백 년을 사용하게 했다. 다 자업자득이었다.

“대인.”

아구가 무슨 말을 하려다가 유가의 표정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송기연의 뒷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던 유가가 입을 꾹 다문 채 발을 뗐다. 그는 순식간에 송기연의 앞으로 이동했다.

“녀석, 명이 정말 길구나? 간신히 살아 돌아오자마자 바로 본존과 전쟁을 하겠다?”

유가가 가슴팍에 팔짱을 낀 채 백유리를 아래위로 훑어보고 비열하게 웃었다.

“본존을 좋아하는 것 아니었나? 경창파의 장문인 자리를 위해 본존을 가지고 놀다가 버리고 이 계집애를 선택한 것인가?”

유가의 아리송한 말에 선계 사람들은 모두 어안이 벙벙했다. 정상 일행은 그가 송기연을 조롱한다는 걸 알았다. 엽망지를 향한 송기연의 마음을 산산 조각내 밟아버린 것이다.

“이 악마 정말 뻔뻔하잖아! 기연이 언제 당신을 가지고 놀았다는 거야?!”

유가의 말에 불만이 생긴 백유리가 수려한 눈썹을 치켜 올렸다. 백유리에게 유가는 살인을 즐겨하고 사생활이 문란한 변태였다. 지금 그녀는 기회를 틈타 송기연과 혼인을 약속했는데, 이 좋은 일을 망칠 수 없었다.

유가는 백유리는 신경도 쓰지 않고 송기연에게 계속 말했다.

“대답하지 않는 것인가?”

자신이 왜 이러는지 유가 자신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원하던 일 아니었던가?

송기연이 자신에게 마음을 접고 백유리와 혼인하여 경창파 장문인 자리에 올라 새로운 삶을 사는 것.

유가는 자신과 상관없다는 듯 비웃으며 사실 자신이 가장 묻고 싶은 질문을 했다.

하지만 송기연이 그의 두 눈을 차분히 바라보며 유가에게 받은 말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유가, 너무 자신을 과대평가하지 마라.”

유가의 눈동자가 잠시 멈추었다 곧 웃음을 터뜨렸다.

“보아하니 두 사람의 정이 깊은 것 같군, 그럼 본존이 이쯤에서 빠져주지.”

그리곤 정색하며 말했다.

“송기연, 똑똑히 보아라, 만일 네가 경창파의 장문인 자리에 올라 본존과 마족에게 대항한다고 해도, 넌 본존을 꺾을 수 없다. 한두 번 요행으로 살아남았겠지만 그런 운이 세 번이나 오진 않지. 정말 네 한 사람의 원한으로 모든 선계가 목숨을 걸어야하는 것인지 잘 생각해 봐라.”

유가는 정말 전쟁은 원하지 않았다. 전쟁이 나면 모든 게 폐허가 될 것이고 다 잃게 된다. 이런 결과와 죄업을 감당하고 싶지 않았다.

“유가, 겁먹은 것인가?”

송기연은 유가를 귀찮아 한다는 듯 반문했다. 그는 유가의 예기(銳氣- 날카롭고 굳세며 적극적인 기세)를 눌러버리고 싶었다.

이때 마족들이 유가의 뒤에 정렬했고, 고금성과 왕다국, 그리도 다른 역주들이 그의 곁에 섰다. 송기연과 경창파 사제들 그리고 완십주들과 대치했다. 양측의 기세가 대단했다. 두 사람이 한 마디만 하면 바로 이 고요함은 깨지고 전투가 벌어질 것 같았다.

“겁이라? 본존이 뭘 두려워하겠는가?”

유가가 비웃었다.

“본존은 그저 언제 연회를 열 것인지 물으려던 것이다. 축하주 정도는 나눠 마셔야 하지 않겠느냐.”

그가 백유리를 힐끗 보고 웃었다.

“정말 싸운다면 이 계집애가 살아남을 수 있을지도 걱정이구나, 어찌 생각하느냐, 백 장문인의 새 사위를?”

유가는 송기연 따위 신경 쓰지 않는 듯 손을 휘휘 저으며 왕다국에게 말했다.

“됐다, 그만하지. 이미 저 녀석에게 비기면 보내주기로 약조했다. 본존은 꺼낸 말을 지키지 않는 소인도 아니니 그만 가자.”

주위의 마족 고수들을 돌아보며 손을 높이 들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리 마족은 직접 찾아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 어떻겠나? 저 선계의 폐물들이 과연 뭘 할 수 있는지 지켜보지.”

“하하하. 존주 말씀이 맞습니다! 소인 저 폐물들이 어떤 소란을 부릴지 한번 지켜봐야겠습니다!”

“과연 어떻게 날뛸지 궁금합니다! 고작 도겁기인 어린애 하나가 존주의 머리 꼭대기까지 기어오르는 것 정말 눈꼴시네요!”

유가의 말을 들은 마족들은 제각기 한마디씩 했고, 분위기도 엄청 시끌벅적했다.

중립을 지키고 있는 신수 가문들이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한 선계와 마계는 절대 여기서 전쟁을 벌이지 않을 것이었다. 유가는 모두의 뜻에 따라 자리를 벗어났고 선계 고수들은 모두 얼굴을 찡그렸다.

돌아선 유가가 마족의 고수들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그 순간 송기연이 말했다.

“연회는 초봄으로 정하지.”

예상치 못한 말에 유가도 발걸음이 멈췄지만, 다시 송기연을 바라보진 않았다.

그는 송기연의 말을 똑똑히 들었다.

송기연이 자신에게 한 말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그 말을 듣자마자 심장이 내려앉은 건 부정할 수 없었다.

초봄 2월은 딱 3개월 뒤다.

저자의 말을 믿고 경창파에 발을 들이는 순간 자신을 가두려 하는 걸까.

정말 좋은 계략이지만 절대 속을 일은 없을 것이다.

* * *

1월 초, 마궁 대전.

“금성! 대인 봤어?!”

신수집회가 가까워지자 능광은 서둘러 돌아오라는 최후통첩을 날렸다. 하지만 아구는 그 압박에 저항하여 마궁 안만 빙빙 돌았다.

신묘도에서 돌아온 후 아구는 계속 조심스럽게 유가의 곁을 지켰다. 송기연과 유가의 관계가 이 지경이 됐으니, 유가가 겉으로 괜찮다고 해도 속은 얼마나 썩어 문드러지는지 그는 알고 있었다.

아구가 얼마 전 요수삼림으로 돌아가는 길에 경창파를 지났었는데, 산 아래엔 온통 붉은 등이 걸려있었다. 송기연과 백유리의 혼사가 임박했고, 송기연은 곧 경창파의 장문인 자리에 앉게 될 것이었다. 그럼 선마 양계의 전쟁이 머지않았다는 얘기다.

그는 지금 유가가 사 년 전처럼 또다시 변장 해서 경창파에 잠입할까 봐 두렵고 초조했다. 송기연이 경창파에 그물이라도 쳐놓고 그를 가둔다면 유가는 사라져 보이지 않을 것이고, 그때 자신은 어쩔 줄 모를 게 분명했다.

“아구, 걱정 마.”

눈빛이 변한 고금성이 위로했다.

“존주께선 다 생각이 있으실 테니, 무슨 일이 생기지 않을 거야.”

“안 돼! 선계에 다시 가 봐야겠어!”

아구는 말을 하면 하는 애였다. 유가가 정말 송기연을 찾아갈까 걱정이 된 아구는 급히 마궁을 나와 천하 방향으로 향했다.

하지만 지금 유가는 그의 생각처럼 선계로 가지 않았다. 그저 귀곡심연의 봉황나무 아래에서 한잔 또 한잔 술잔을 기울였다.

그는 봉황나무 아래에 숨겨둔 좋은 술을 꺼내어 밤낮으로 마셨다. 법술을 사용하여 술기운을 날리지 않고 취하면 자고 깨면 마시고를 반복했다. 이렇게 아무 의미 없는 생활은 그가 자신의 신분을 잊게 해주었고, 자신이 짊어진 목숨들을 잊게 했다. 지었던 죄들은 모두 술기운에 용서를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의 일생은 짧다면 짧고 길면 긴 시간인데 그동안 살인을 저지르고 방화를 했다. 여자와 남자를 데리고 놀았던 때처럼 통쾌하게 일생을 보냈어야 했다. 하지만 천 년 전 전쟁으로 그의 혼은 반으로 나뉘어졌고, 현대의 그 평안한 생활이 익숙해진 지금 지난 일을 떠올리면 죄책감이 밀려왔다.

신묘도에서 마궁으로 돌아온 이후로 그는 꿈에 자신이 죽인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온몸에 피를 뒤집어쓰고 저 멀리서 걸어온 시체들이 자신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그 한 가운데에 서 있는 고금성이 물었다. 왜 자신의 부모를 죽였냐고, 왜 자신을 이용했냐고. 정말 끔찍한 악몽이었다. 꿈에서 깨어날 때마다 식은땀에 온몸이 젖어 있었다.

만약 정말 가능하다면 그는 지난 일을 기억하지 않도록 선택하고 싶었다. 자신은 ‘유가’가 아니고 그저 한낱 나약한 현대인에 불과하다고, 그자들을 죽인 사람은 내가 아니라고.

귀곡의 사계절은 봄처럼 따뜻했다. 봉황나무 아래엔 화정석이 쌓여있고, 1월이지만 봉황꽃은 여전히 찬란하게 피어있었다. 그중 꽃잎 하나가 유가의 백옥 같은 손위로 떨어졌다.

잔에 담긴 술이 또 떨어지자 유가는 뺨을 탁자에 대고 엎드렸다. 느릿하게 손을 뻗어 주전자를 잡으려 했지만, 취해서 그런지 시선이 흐려져 아무리 잡으려고 해도 닿지 않았다. 그가 아이처럼 눈썹을 찡그리며 다시 손을 뻗었지만 헛수고였다.

그러나 앞에 서 있는 사람이 긴 손가락으로 술 주전자를 들어 주둥이를 기울였다. 향기로운 술을 유가 앞에 놓인 잔에 따랐다. 유가가 일어나 그를 보곤 조금도 놀라지 않고 웃었다.

“네 녀석은 또 어찌 왔느냐?”

그는 한참 동안 술 주전자가 잡히지 않았던 이유를 이제야 알아차렸다. 유가는 바보같이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아무래도 자신이 취해 꿈을 꾸는 것 같다.

귀곡심연은 송기연과 이 년이나 같이 지낸 곳이라, 유가는 여기에 와서 술에 취하면 늘 송기연 꿈을 꿨다. 아이의 모습이거나 소년의 모습인 송기연이 봉황나무 아래에서 자신이 선물한 장검을 휘둘러 장작을 팼다.

“하하하하하하!”

유가는 앞에 앉아 자신을 뚫어지라 바라보는 송기연을 보고 탁자를 치며 웃었다.

붉은 옷을 입은 아름다운 마존이 이렇게 체통 없이 구는, 참 납득하기 어려운 그림이었다. 그 모습을 보던 송기연은 멍해졌다. 이런 유가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가 왜 저렇게 탁자를 치며 박장대소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백유리와의 약혼으로 경창파 장문인 자리에 앉는 게 선계를 통일하는 첫걸음이었다. 한데 그날 신묘도 상공에서 유가 때문에 망설였다. 그때 만약 유가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면, 그는 그렇게 단번에 혼인을 약속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유가의 시큰둥한 눈빛을 보고 그는 가슴이 아픈 것보다 화가 났다. 유가가 자신의 선택에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걸 알아도, 일부러 들으라는 듯 큰소리로 백유리와의 혼인을 선포했다.

백유리와의 혼인이 가까워질수록 그는 유가와 지낸 기억이 더욱 떠올랐다. 계속해서 머릿속에 맴돌며 떠나질 않았다. 그는 폐관수련을 한다는 핑계로 뛰쳐나와 귀곡심연에 숨어들었다. 찬란하게 핀 봉황꽃을 보며 그자가 짓밟은 감정을 깊이 숨겼다.

하지만 유가가 술을 마시는 것을 보고 송기연은 깜짝 놀랐다.

왜 유가가 이곳에 온 것인가. 그가 창결검을 쥐고 유가에게 다가갔다.

유가가 곧바로 알아차려 곧 피할 수 없는 싸움이 일어날 거로 생각했다. 하지만 유가는 여전히 술만 마셨고, 자신이 다가가도 아무 인기척도 느끼지 못했다. 정말 잔뜩 취한 것 같았다.

유가의 수련 경지라면 아무도 그를 취하게 할 수 없다. 자신이 취하고 싶을 때만 빼고.

설마 아직 자신에 대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 걸까?

그렇게 반복해서 실망하고도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그럼에도 또 심장은 철렁했다. 하마터면 손에 든 창결검을 떨어뜨릴 뻔했다.

유가 앞에 있는 주전자를 들고 오 년 전 사존에게 그랬듯, 유가의 잔에 술을 따랐다. 술 주전자를 내려놓는 순간 취해서 초점 없는 유가의 눈과 마주쳤다.

‘네 녀석’ 이라고 불렀다.

숨겨지지 않고 묻어나오는 다정한 목소리에 그는…… 역시 멍청한 어린 애처럼 어쩔 줄 몰랐다.

손에 덮여온 한기에 송기연이 정신을 차렸다. 자신의 손을 잡은 유가의 손에 눈을 크게 떴다. 마음이 저렸다. 굳이 손을 빼지 않았다.

웃음을 멈춘 유가가 취기 가득한 눈을 깜빡거리며 물끄러미 송기연을 바라보았다. 그리곤 그의 손을 몇 번이고 어루만졌다.

“꿈이 꼭 진짜 같군, 피부 촉감까지도 이렇게 느껴지다니.”

유가가 송기연의 손을 쥔 채 몸을 일으키고 앞으로 숙여 송기연의 코앞까지 얼굴을 내밀었다.

두 눈이 집요하게 마주보다 유가가 살짝 웃었다. 손을 움직여 앞사람의 뺨과 턱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착하지, 사존이라고 한번 불러 보아라.”

봉황꽃이 실린 바람이 유가의 등 뒤에서 불어왔다. 그의 길고 검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려 송기연의 귓가를 간질였다. 그가 내뿜는 숨결이 부드럽게 송기연의 얼굴을 덮었다. 진한 술기운에 송기연마저 어질했다.

송기연은 단단히 홀린 눈으로 움직였다. 고개를 숙여 술기운에 더 붉게 물든 유가의 부드러운 입술에 가까이 다가가며, 떨리는 목소리로 희미한 소리를 토해냈다.

“사존.”

송기연이 손을 뻗어 유가의 뒷머리를 조심스럽게 받치자, 두 사람의 입술은 완전히 포개졌다. 하지만 겨우 입술만 맞추고 유가의 체온을 가만히 느꼈다.

수천 수백 번을 바라왔던 현실이 실제로 일어나자 송기연은 따뜻해지다 못해 울컥해 눈물이 차올랐다. 입술을 떼고 유가의 하얀 이마를 맞대자, 서로의 숨결이 그대로 느껴지며 뒤섞였다. 뒷머리를 받쳤던 손으로 유가의 두 뺨을 감싸자 시선은 점점 희미해졌다.

왜 하필 이 사람일까.

왜 하필 이 사람이 유가인 걸까.

도대체 왜…… 일이 이렇게 된 걸까.

“하하……!”

술이 거나하게 취한 유가는 꿈에서 이런 결례를 당한다 해도 크게 반응하지 않았다. 하지만 송기연이 부드럽게 얼굴을 어루만지는 건 역시나 가슴이 간지러워 뒤로 피했다.

송기연을 밀치고 다시 탁자에 턱을 받치고 앉아, 손가락으로 술상을 탁탁 두드리며 웃었다.

“착하구나, 정말 듣기 좋다. 계속 불러 보아라.”

송기연은 유가에게 밀쳐지고서야 정신이 돌아왔다. 정신을 차렸지만 입을 움찔거렸다. 유가와 싸우고 싶은 생각은 없어 순순히 말했다.

“사존.”

이 간결한 두 글자에 너무 많은 감정이 담겨 있다.

감사함과 깊은 원한 그리고, 미련까지.

귀곡심연에서 이 년, 무주지에서 삼 년, 두 사람은 오 년이라는 시간을 꼭 붙어 있었다. 그가 살아있을 수 있었던 건 유가에 대한 원한이 아니라, 사존을 향한 경애의 마음이었다.

송가가 멸문을 당하고, 유가에게 손발이 끊기고, 눈을 잃을 채 감옥에 갇혀 있었다. 어두컴컴한 날들 속에서 그가 미치지 않은 이유는 단 하나, 유가에 대한 원한이었다. 그게 그의 온 세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날을 잊지 못한다. 창살 사이로 손을 뻗어 자신의 더러운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가 했던 말을.

‘넌 곧 여길 떠날 것이고, 조만간 모든 걸 얻게 될 것이다. 네가 강해질 때까지 기다리마.’

그때 그는 새로운 희망이 생겨났다. 지지 않고 자신의 모든 걸 되찾아 오겠다는.

유가는 그때 왜 내게 그런 말을 했을까? 왜 자신을 구해줬다는 사실을 인정하진 않는 걸까? 신묘도에서 했던 말과 모진 행동들은 다 내가 단념하길 바라서 한 걸까?

“사존, 절 좋아하세요?”

송기연도 자신이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었다.

원한과 사랑 거기에 의구심까지, 입에 맴도는 말은 많았지만 딱 한마디 내뱉었다.

날 좋아한 적…… 있어요?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건지 아닌지 여전히 어리둥절하던 유가는 송기연의 질문을 듣고 생각이 멈추고 말았다.

송기연이 ‘사존’이라고 부르던 소리에 행복감에 젖어 헤실헤실 웃던 그가 갑자기 상심한 표정으로 한참 말이 없었다. 턱을 괴고 있던 손을 떼고 이마를 짚었다. 흘러내린 머리카락에 표정이 가려졌다. 잠시 후 한숨을 내쉬었다.

“본존이 어찌 널 좋아할 수 있겠는가.”

담담한 말이 공중에 흩어졌고, 분위기가 한순간에 얼어붙었다.

“왜 날 좋아할 수 없는 건데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송기연이 참지 못하고 악을 썼다.

“우리 둘 사이의 원한 때문인가요?! 그렇다면, 대체 왜 송가에게 그런 짓을 저질렀는지 말해 봐요! 난 들을 준비가 다 되어 있으니!”

그가 탁자를 돌아 유가의 앞에 다가갔다. 두 손으로 유가의 어깨를 꽉 잡고 다그쳤다.

“그때 신묘도에서 말한 이유 아니잖아요! 분명히 다른 이유가 있다고!

사존, 전 사존께서 모두가 말하는 것처럼 그런 무정한 사람이 아니란 걸 알고 있어요. 상냥하신 분이잖아요. 우리가 함께한 오 년이라는 시간동안 남을 해친 적도 없으시잖아요.

다 알고 있어요. 신묘에서 하신 말씀 다 거짓이잖아요? 송가를 해친 건 분명히 또 다른 고충이 있으셨던 거죠?”

감정이 북받쳐 오른 송기연이 거의 울부짖었다.

“사존, 빨리 말해 주세요. 진짜 이유가 뭔지, 제발요……!”

고작 열일곱의 아이인 송기연은 어깨에 짊어진 짐이 너무 무거웠다.

열 살에 행운아에서 심연으로 곤두박질쳤다. 지난 7년 동안 복수와 사존에 집착한 게 그의 생활의 전부였다. 그가 유일하게 기댈 수 있던 사람은 사존이었는데, 그가 자신의 철천지원수였라는 사실을 알았다.

진상을 알게 되고 선계 사람들 앞에서는 여전히 굳건한 척 유가와 대치하는 척했지만, 사실은 이자와의 끈질긴 감정을 놓을 수가 없었다.

송기연은 이미 자신의 복수는 자포자기한 채 진짜 이유를 알고 싶었다. 어떤 사정이든 설득이 되면 좋아질 게 분명했다. 설득이 되고 싶었다. 정말 그러고 싶었다.

하지만 상황이 잘못 흘러갔다.

힘이 잔뜩 들어간 송기연의 악력과 흥분한 말투가 낱낱이 유가의 진심에 꽂혔다. 그리고 유가는 정신을 차렸다.

고개를 숙이자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얼굴을 가렸다. 그에 숨어 살짝 미소를 짓는데, 눈엔 눈물이 글썽였다.

꿈이 아니었어. 저 녀석이 정말 왔다. 방금 전 그 입맞춤도…… 진짜였다.

‘상냥하신 분이잖아요,’

‘남을 해친 적도 없으시잖아요.’

상냥하다고?

크큭, 내 손에 희생된 생명이 아직도 적은 건가?

자신은 죄인이기에, 진 빚은 곧 갚아야했다.

하지만 이 녀석은 달랐다. 그는 독립된 개체다. 그는 천 년 전 그 살신이 아니었고, 시체와 피비린내가 가득한 기억도 없었다. 그는 그런 죄책감 없이 지낼 수 있었다.

유가는 송기연이 자신처럼 살길 원치 않았다. 모든 죄책감은 자신이 짊어지더라도 아이가 자신에게 미안한 감정을 갖게 하기 싫었다.

송기연은 자유다.

고개를 든 유가가 빨개진 눈으로 송기연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하지만 눈은 웃지 않았다.

“기연, 묻지 마라.”

유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송기연의 얼굴을 부서질까 어루만지며 미소 지으려 애썼다.

“사존이 애원하마. 제발 묻지 마라.”

유가는 마존으로서 지금 비웃는 태도를 취한 뒤 가장 잔인한 말로 송기연을 공격해야 했다.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엽망지로 분장한 것은 단지 놀이를 즐긴 것뿐이라 송기연을 희롱한 뒤 ‘죽어라’고 말한 것처럼. 하지만 지금 술이 다 깼어도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두 사람의 아름다운 기억이 가득한 이곳에서 잔인한 마존이 되기 싫었다.

그는 녀석의 사존이었다. 송기연에게 검을 던져주고 연마하라고 하던, 종일 밥을 달라고 재촉하던 엽망지.

그는 계속 취한 척하며 깨고 싶지 않았다. 이기적이더라도 엽망지의 신분으로 계속 송기연 곁에 머물고 싶었다. 잠깐이라도. 잠깐이면 충분했다.

송기연은 그의 애원을 들었다. 뺨에 닿은 그 손의 온도도 느껴졌지만, 눈물이 가득 차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유가의 어깨를 압박하던 손을 놓고 뒷걸음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존, 도대체 뭘 숨기고 계신 겁니까? 사존에 대해 많이 알고 있는 줄 알았습니다. 한데, 지금 보니 사존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빨개진 눈엔 고통이 가득 서렸다.

“대체 왜 안 알려 주시려는 건데요! 대체 왜!”

그는 ‘전생’의 기억을 어렴풋이 가지고 있다. 수옥에 유가를 가두고 각종 모진 고문을 가했다. 하지만 유가는 그저 악랄하게 웃을 뿐 입을 열지 않았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에겐 속수무책이었다.

송기연의 고통은 유가에게도 고통스러웠다.

다시 탁자 앞에 앉아 술 주전자를 들고 그대로 입에 털어 넣었다. 이 상황을 마주하기 싫은 그는 그저 취하는 것만이 방법이었다. 커다란 주전자 안엔 적지 않은 술이 들어 있었고, 유가가 그냥 입으로 털어 넣자 많은 술이 턱으로 넘쳐 그의 앞섬을 다 적셨다.

“도대체 뭘 피하시는 건데요!”

송기연이 거칠게 유가의 주전자를 낚아채곤 주전자를 깨뜨려 버리려 했다.

“착하지. 와서 사존과 한잔 하자. 한 달 후면 혼인을 올리니 오늘 미리 사존과 축하주를 나누자꾸나.”

유가는 뺨이 살짝 붉어지고 눈이 풀렸지만, 정신은 또렷했다. 그는 이 상황을 깨 버리고도 어색해지고도 싶지 않아 최선을 다해 화제를 돌렸다. 자신이 화제를 돌릴수록 송기연이 화가 난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송기연의 붉은 두 눈엔 분노가 가득했고, 진기도 불안정해지기 시작했다.

“좋습니다. 사존께서 이렇게 원하시니, 제가 사존께 한잔 올리겠습니다!”

송기연은 눈을 독하게 뜨고 방금 뺏은 주전자의 술을 입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 그대로 유가에게 입을 맞췄다. 거칠게 뒷목을 잡아 당겨 억지로 유가가 입을 벌리게 한 뒤, 술의 절반을 유가에 입에 넘겼다.

그의 거침없는 행동에 놀란 유가는 미처 저항하지 못하고 송기연이 넘겨주는 술을 그대로 받아 마셨다. 입안에 향긋한 술 냄새가 가득 퍼지지고 붉은 열기가 한껏 얼굴에 피어났다.

송기연은 더욱 유가를 끌어안아 밀착한 뒤 벌어진 입 사이로 혀를 집어넣었다. 머금은 술이 입가로 흐르는 것도 상관 않고 더 집중해서 집요하게 유가의 혀를 얽었다. 빨고 물며 도망치지 못하게 압박하고 숨쉴 틈도 주지 않았다. 말캉하고 부드러운 혀는 더 뜨거워져 갔고 아래에서 위로, 위에서 아래로 입안 곳곳을 훑으며 호흡도 점점 거칠어졌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유가는 이미 귀까지 새빨개졌다. 몽롱하고 터져버릴 듯한 이상한 기분이 온 몸에 퍼졌다.

갑자기 두 사람이 처음 입을 맞춘 순간이 떠올랐다.

그때 처음으로 송기연에 대한 감정을 알아차렸고, 그대로 송기연을 밀어버렸다. 두 번째는 신묘도에서 ‘묵묵씨’가 엽망지의 신분으로 사제 관계를 끊어냈을 때였다. 세 번째는 선마 양계의 고수들 앞에서 저 녀석이 분노하여 자신의 입술을 깨물었다. 네 번째는 좀 전에 자신이 취해 송기연을 꼬여내 한 입맞춤이었다. 두 입술이 닿은 느낌은 오랫동안 느껴보지 못한 온기였다. 그리고 다섯 번째는…….

유가는 가만히 눈을 감고 혀를 움직여 송기연의 입맞춤에 응하기 시작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송기연을 좋아한다는 것을. 그것도 아주 많이.

아마도 궁기 동굴에서 송기연이 누구도 자신을 다치게 하지 못하게 보호하겠다고 맹세한 그 순간부터, 대체할 수 없는 특별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무주지에서 송기연이 자신을 구하려다 목숨을 잃을 뻔했을 때, 처음으로 두려움이라는 걸 느꼈다. 심지어 소칠(小七)과 인사를 나눌 겨를도 없었다.

신묘도에서 소십이(小十二)를 잃고 기억이 떠올랐다. 송기연과 자신 사이의 원한이. 하지만 그는 여전히 송기연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다. 이 녀석은 이미 자신의 가슴에 콕 박혀 빼낼 수도, 잊을 수도, 망가트릴 수도 없다. 그저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유가는 취했다. 지금 남은 건 엽망지다. 저 녀석을 사랑하는 엽망지.

송기연의 눈동자에 당황이 어렸다. 유가가 이렇게 응해올 줄은 생각 못 했다. 꿈인가. 그렇게 바라고 바라서 되풀이 하던 꿈. 황당하기 그지없는 꿈. 송기연은 눈을 파르르 떨며 감고, 유가의 몸을 으스러져라 가두며 더 깊이 그를 탐했다.

이 꿈에서 그는 기꺼이 타락하고 싶었다.

“사존.”

송기연의 다정한 목소리가 유가의 귓가를 스쳤다. 유가는 붉은 옷소매를 들어 제 두 눈을 가렸다. 화려하기 그지없는 유가의 붉은 옷이 두 사람과 얽히고 눌려 있었다. 유가의 검은 머리카락이 그 위에 덧없이 흐드러지고, 희고 빛나는 그의 피부가, 눈을 가린 소매사이로 보이는 하얀 손목이 더 백옥처럼 처연했다.

송기연이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두 눈을 가린 유가의 팔을 당겼다. 그의 손목을 제 커다란 손으로 끌어당겨 그의 손바닥에 쪽 입을 맞추다가 핥았다. 축축하고 따뜻한 촉감이 손바닥을 타고 신경에 전달되자, 유가는 참지 못하고 손바닥을 움켜쥐었다.

“간지러워.”

송기연은 아랑곳 않고 계속 손바닥을 핥다가 점점 그의 손목, 팔을 타고 올라가 붉은 옷을 헤치고 하얀 어깨를 드러내게 했다. 그리고 그 둥글고 보드라운 어깨에 소중하게 입술을 묻다, 연한 흉터를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자신이 낸 상처였다. 새로운 상처가 흉터 위에 겹겹이 쌓이고 더욱 흉측해졌다. 새하얀 어깨에선 더 도드라져보였다.

조심스럽게 그 흉터에 입을 맞추다, 어린 짐승이 상처를 보듬듯 그렇게 그곳을 계속 핥았다.

유가는 간지러웠다. 지금 송기연은 꼭 몸만 큰 커다란 강아지 같았다. 주인을 못 움직이게 누른 채로 핥으며 애정 표현하는.

유가는 자신이 잊었던 많이 일들이 기억났고 그 중엔 잠자리에 대한 것도 있었다. 자신이 망가트린 상대들도 많았고, 지금 그 기억이 생각나 등골이 시렸다. 유가는 항상 주도하는 쪽이었으나, 지금 송기연의 몸 아래 깔려 있어도 불편하진 않았다.

두 사람의 원한을 모른 척 접어두자 마음은 편했다. 그러니 쓸데없는 생각도 나기 시작했다.

유가의 어깨를 핥던 송기연이 그의 귓가를 핥으며 툴툴거렸다.

“사존, 딴생각하시네요.”

송기연은 유가의 작은 귓불을 살짝 깨물고 가장자리를 따라 핥으며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희게 비치는 유가의 목에 애틋한 붉은 점을 남기고, 살짝 깨물다가 혀로 목덜미를 끈적하게 핥아 올리기 시작했다.

“하하!”

유가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송기연이 어떻게 사랑을 나누는지 모르는 걸 알고 있다. 아이는 다 컸지만 자신을 제외하곤 다른 사람과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없을 테니까. 송기연은 참 순정(純正)한 녀석이다. 입을 맞추고 깨물 줄만 알지 조금 더 깊어지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눈빛이 어두워진 유가가 가볍게 송기연의 머리를 잡아 자신을 보게 한 뒤, 송기연의 입가로 바짝 다가가 입술을 핥았다.

“자, 사존이 신방에서 어떻게 하는 건지 가르쳐 주마.”

유가는 그대로 몸을 뒤집어 송기연을 아래에 깔아 눕혔다. 그리고 하얀 손가락에 진기를 옮겨 송기연의 목에서부터 가슴, 배까지 흰옷을 따라 그려갔다. 몸을 숙여 송기연의 입술에 한 번 더 짧게 입 맞추더니, 흰옷 사이로 드러난 중의와 속옷을 진기로 가르고 그의 탄탄한 복근과 그 아래 중심을 드러나게 했다.

아래가 시원하게 드러난 송기연을 향해 웃으며, 유가가 이미 단단해진 거대한 분신을 하얀 손으로 감쌌다.

“혼자 해 본 적 있느냐.”

시선과 신체가 모두 자극받은 송기연은 미처 반응하지 못했고, 눈앞의 사람에게 모든 감각을 빼앗겼다. 유가가 뜨겁고 거대한 것을 다 감싸지 못하고 아래위로 문지르자 송기연의 모든 혈기가 그 곳으로 향했다. 분신은 더욱 딱딱해졌다.

“꽤 크구나.”

이미 다 커진 것이라 생각했던 대물이 거기서 더 부풀어 꼿꼿이 서자 유가는 저도 모르게 당황하며 감탄했다. 그리고 고민하듯 미간을 찌푸렸다.

이걸 넣는 건 진짜 아프겠지. 분명히 엄청 아플 텐데.

가장 민감한 부위를 유가의 길고 나긋한 손으로 재주껏 어루만지고, 이따금 귀두의 구멍을 희롱하듯 문지르자 송기연의 호흡이 점점 더 가파졌다. 자신이 아래에 깔려, 위에서 사존이 여유롭게 구는 것도 송기연은 불만스러웠다. 안색을 굳힌 송기연은 자신의 분신을 잡은 유가의 손을 그대로 덮어 쥐고, 다시 몸을 일으켜 그를 아래로 눕혔다.

“사존, 전 몇 번이고 당신의 얼굴을 생각하면서 이런 일을 해왔습니다. 전에도 말씀드렸을 텐데요.”

송기연은 똑같이 유가의 아래 속옷을 벗겨버렸다. 그리고 역시나 단단해진 중심을 한손으로 잡으며 웃었다.

“스스로 터득한다는 게 어떤 건줄 아십니까?”

준수한 얼굴은 아찔하게 미소 짓더니 고개를 숙여 하얀 쇄골을 따라 내려갔다. 공기 중에 노출 된 분홍색 유두에 닿자 혀를 뾰족하게 만들어 쿡 찌르고 빙빙 돌리다 한입에 빨아 버렸다.

“흑!”

작은 유두를 괴롭히다 입을 떼자 침으로 반들거리는 젖꼭지가 붉게 물들었다. 잘 익은 앵두 같았다.

송기연은 가슴을 괴롭히는 동시에 손을 빠르게 움직여 엄지손가락으로 유가의 요도 구멍을 막고 문질렀다. 다른 손가락으론 그를 쥐어짜듯 거치게 움직이다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아래 음낭까지 큰 손으로 덮어 유가를 자극했다. 유가의 몸도 그의 자극이 이끄는 대로 흠칫흠칫 점점 떨려왔다.

“흣!”

급작스런 쾌감에 유가는 신음하며 생각보다 거친 녀석의 손놀림에 놀라 떨었다. 짜릿한 느낌이 밀려오고 거칠게 몰아쳤고 송기연은 자비가 없었다.

“으! 아! 하아……!”

몸 아래 사람은 흰 피부를 붉게 물들이며 거칠어지는 호흡을 숨기지 못하고 착실히 느끼고 있었다. 새까만 눈을 적시고 도화꽃처럼 발그레 눈가를 찡그리며 새빨간 입술로 신음했다. 그런 유가를 보며 송기연의 눈 또한 붉어졌다. 고조되는 욕망에 괜히 점점 조급해져 눈을 가늘게 뜨고 화를 내며 비아냥거렸다.

“마존이 그렇게 대단하시다던데, 이렇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보내셨습니까?”

가시 돋친 말은 꼭 찬물 한 바가지를 유가의 머리에 끼얹듯, 욕망이 한풀 꺾었다. 설마 술에서 깬 걸 알아챈 건가.

“아!”

생각이 더 이어지기 전에 송기연이 연약한 분신을 세게 쥐자 유가는 쾌감과 동반한 통증에 몸을 움츠렸다.

그 순간 송기연이 다시 몸을 숙이고 그의 입술을 막으며 혀를 거칠게 집어넣었다. 입으로 입을 범하듯 강제로 파고들고 빨아올렸다. 숨이 막힐 정도였다. 손의 동작도 더 빨라졌다. 쥐어짜내듯 아팠으나 너무 빠르게 밀려오는 쾌감 때문에 유가는 참지 못하고 연달아 신음을 질러댔다.

“읏, 으아!”

그리고 희뿌연 정액이 송기연의 손에서 튀었다.

“하아, 하아……!”

입 맞추던 입술은 다 얼얼했고 온 머리엔 혼몽한 쾌감밖에 없었다.

송기연은 유가의 입술을 한 번 더 깨물고 몸을 일으켰다. 그의 호흡도 가쁘긴 마찬가지에 눈이 더욱 빨갰다. 그는 악랄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위풍당당하던 마존이 내 몸 아래에서 이렇게 느끼시다니, 조금도 수치스럽지 않습니까?”

흥분한 송기연은 체내에서 진기가 끓어올랐다. 식해(識海) 중 붉은 신식 소인은 눈을 떴다. 소인의 눈빛이 이상했다.

송기연이 유가의 정액이 묻은 손가락을 그의 눈앞에 들이밀며 비꼬았다.

“이런 게 다 나오다니, 남자와 하는 쪽 취향이신가 봅니다.”

이런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터져 나와, 눈앞에 남자에게 계속 상처만 주었다.

절정을 느낀 유가는 온몸에 힘이 빠져 무력감에 널브러졌다. 무겁게 눈동자를 들어 제 위의 송기연을 바라보자 심장이 쿡쿡 쑤셨다.

다정하고 조심스러웠던 녀석이, 좋아해주던 녀석이 왜 저렇게 돌변했는지 이해가지 않았다. 제대로 취한 척 연기했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들킨 건가.

술기운에 넘어가 유린당한 척한 시도는 확실히 모욕당할 만했다.

유가는 씁쓸하게 웃더니, 붉은 옷을 챙겨 입고 급히 떠나려 했다.

여기서 송기연과 싸우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유가가 일어나서 옷을 입으려하자, 송기연이 또다시 그를 내리 눌러 제 몸으로 압박했다.

“윽……!”

그리고 아래서 불편한 통증이 느껴졌다. 유가의 얼굴이 파랗게 질리고 꼼짝하지 못했다.

송기연은 유가의 정액이 묻은 손가락을 그의 뒷구멍에 찔러 넣고 여린 주름 속을 휘저으며 민감한 내벽을 조심스럽지 못하게 쑤셔댔다.

“신방에서 어떻게 하는지 알려 주신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어찌 가려고 하십니까?”

송기연이 비열하게 웃으며 유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정말 야비하시군요, 이렇게 해주길 원하신 겁니까?”

그리곤 곧바로 손가락 두 손가락을 더 집어넣고 안에서 구멍을 벌렸다.

“흐악!”

좁은 구멍에 뻑뻑하게 들어찬 손가락들은 안에서 내벽을 확장하고 정액에 의지해 깊은 곳을 눌렀다가 찔러 올렸다. 뜨겁고 여린 살들을 문지르고 돌렸고 곧이어 속도를 높여 푹 찔렀다 모두 빼내었다가 다시 거세게 집어넣었다. 송기연의 몸이 유가를 단단하게 압박했고 손은 아래 구멍을 쳐올리듯 빠르게 드나들었다. 유가의 신음과 호흡이 더 거칠어졌다.

“허윽, 큭! 그, 그만!”

송기연에게 치욕적으로 당하며 그자의 조롱 섞인 눈빛을 받자 유가는 더 이상 이러고 싶지 않았다. 유가는 몸속의 이물감을 더 버티지 못하고 송기연의 어깨와 팔을 밀어냈다.

하지만 송기연이 유가의 팔을 잡아채 머리 위로 짓눌렀다. 그리고 구멍을 드나들던 오른손을 빼더니, 아까부터 딱딱하게 굳어있던 분신을 그의 구멍으로 가져다댔다. 보랏빛으로 질린 유가는 외면한 채, 송기연은 그 검붉은 대물을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구멍으로 안을 힘껏 밀어 넣었다.

“아윽!”

유가가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젖혔다.

조금 넓어졌어도 송기연의 그 거대한 대물은 손가락과 비교할 게 아니었다. 세 손가락으론 턱없이 다 풀리지 못한 여린 입구는 무지막지한 삽입에 결국 상처입고 말았다. 찢어진 곳에서 대물이 압박하고 있는 접합부에 피가 흘러내렸고 유가는 극렬한 통증에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온몸을 떨었다.

좁고 뜨겁고 팽팽한 구멍에서 쫀득하고 여린 살이 맥박하자 송기연은 만족을 느끼며 전신으로 편안한 쾌감이 전해졌다. 눈이 붉어진 송기연은 고통에 떠는 유가를 안아 보듬지 않고, 그대로 굵은 대물을 무자비하게 빼냈다가 다시 박아 넣었다.

“아악!”

유가가 비명을 질러도 송기연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속도를 높이며 더 격정적으로 움직였다. 예민한 살을 억지로 가르고 열며 감각에 적응할 틈도 주지 않고 가장 깊은 곳을 찔렀다가 거칠게 내벽을 긁으며 나왔다.

“아아아! 아흑!”

유가가 자지러져도 되레 희고 매끈한 종아리를 잡아 올리더니, 한껏 수월한 자세로 힘껏 허리를 부딪쳤다. 유가의 몸은 거친 격통에 불규칙적으로 경련했다.

“으하악……!”

너무 아팠다. 이건 너무했다.

유가의 질끈 감은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고, 분신은 부드럽게 몸 아래로 누그러졌다. 조금도 쾌감은 없었고 뼛속까지 전해지는 고통이 끊임없이 그를 괴롭혔다. 눈물 젖은 눈으로 바라본 송기연의 두 눈엔 참을 수 없는 욕망과 자신을 향한 비웃음이 뒤섞여 있었다.

역시 좀 전에 그 온정은 다 거짓이었던 건가.

지금 송기연은 신묘도에서 자신을 조롱하던 그때 그 모습과 똑같았다. 자업자득이었다. 전에 자신이 했던 짓들이 고스란히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이었다.

유가는 손으로 자신의 두 눈을 가리고 이를 악물었다, 아무런 소리도 내고 싶지 않았다. 송기연의 행동을 보면 자신이 취한 척하는 걸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자신은 마존이다. 조금이라도 남은 존엄을 지켜야 했다.

송기연이 눈을 가늘게 뜨고 유가의 손을 치우며 차갑게 말했다.

“똑똑히 보세요, 지금 누가 당신을 흥분하게 했는지.”

눈을 꼭 감고 피하는 유가를 보고 송기연은 화가 치밀었다. 송기연은 유가의 분신이 죽은 것을 보고 다시 손을 뻗어 완전히 덮어버리고 아래위로 움직였다. 엄지손가락으로 가장 민감한 요도입구를 문지르며, 격렬했던 하반신의 움직임을 천천히 움직였다.

사내는 쾌감에 쉽게 제압되는 동물이고, 유가는 송기연에게 애정도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분신이 송기연의 손길에 다시 일어났고, 본능적인 쾌감이 고통을 감싸며 머릿속을 자극했다. 뒷구멍도 아까보다 천천히 움직이는 탓이지 숨이 막히는 고통은 덜했다.

유가가 미약하게 커지는 쾌감에 떨자, 송기연은 천천히 대물을 끝까지 빼냈다가 다시 단숨에 뿌리 끝까지 박아 넣었다.

“흐아!”

굵은 양물이 자비 없이 내벽 전체를 긁었고, 무심코 숨겨져 있던 유가의 민감한 부위를 건드리고 말았다. 유가는 눈을 크게 뜨며 갑자기 전신을 관통한 극도의 쾌감에 저항 없이 소리를 내질렀다.

“아아! 하아, 하아! 하아……!”

누가 들어도 달라진 목소리에 두 사람이 멈칫하며 숨을 몰아쉬었다. 송기연의 눈꼬리가 접히며 안색이 바뀌기 시작했다. 유가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좋으셨나 봅니다?”

송기연이 다시 몸을 물렸다가 퍽, 집어넣으며 좀 전에 건드린 곳을 힘차게 찔렀다. 유가의 온몸이 튀어 올랐고, 송기연이 더 움직일 것도 없이 유가의 분신에서 정액이 뿜어져 나왔다. 자신의 정액을 뒤집어쓰고 붉어진 몸을 간헐적으로 떠는 유가는 굉장히 음란해 보였다. 송기연은 만족스러운 듯 눈을 가늘게 뜨고 유가의 그곳을, 그곳만 집요하게 꾹꾹 눌러댔다.

“소리를 내십시오, 야비하신 분이 지킬 체면이 뭐가 있다고!”

“앗, 아응!……아아!

이때 송기연의 식해는 온통 붉게 변했다. 계속 본분을 지키던 심마(心魔)도 빠르게 요동쳤다. 그는 엽망지에 대한 정이 깊어질수록 유가에 대한 원한도 깊어졌다. 계속 속고 버림받는 아픔이 있었다. 진상을 알게 된 지금 분노와 원망이 완전히 폭발해 버렸다.

송기연의 심리가 불안정한 걸 느낀 유가가 눈을 뜨고 그 붉은 눈에 솟구치는 감정을 읽으려 했다. 쉴 새 없이 흔들리면서도 의문이 스쳤다. 지금 송기연의 심마가 폭발할 거라 예상하지 못했다. 심마는 부정적인 감정에서 생긴다. 부정적인 감정이 짙어질수록 심마도 강해졌다.

“……아흑! 아앙, 아아!”

유가는 몰아치는 쾌감에 터져 나오는 신음을 더 참지 않고 송기연이 움직이는 대로 교성을 질러댔다. 유가는 손을 뻗어 송기연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살짝 몸을 들어 송기연의 얼굴에 바짝 다가갔다. 잠시 송기연이 멈칫하자 지친 눈으로 머리를 쓰다듬으며 엷게 미소 지었다.

그는 송기연의 심마를 잠재울 방법을 알고 있다. 그에게 순종하며 다 쏟아내도록 해야 했다. 송기연에게 상처를 주는 것과 자신의 존엄을 버리는 것 중에서, 유가는 자신의 얼마 남지 않은 존엄을 버리기로 선택했다.

유가의 따뜻한 동작에 송기연의 호흡이 떨렸다. 순간 눈빛이 또렷해졌지만 여전히 비아냥거렸다.

“정말 음란하게 구는군, 유가. 당신도 아래에 깔려 있는 게 더 좋은가 보지?”

송기연은 유가의 두 다리를 더 깊이 내리눌러, 그를 거의 반으로 접고 제 양물이 더 깊이 들어가도록 무게를 실었다. 그리곤 유가에게 보이기라도 하는 듯 천천히 빠져나왔다 다시 격하게 삽입하며 가장 민감한 그곳만 찍어 눌렀다.

“앗, 앙아아! 아앗, 아!”

유가의 신음이 더 높이 울렸다.

바람이 불며 봉황꽃이 떨어졌다. 붉은 꽃잎이 흩날리는 안개 가득한 하늘이 흔들리는 유가의 눈동자에 비쳤다. 쾌감으로 발게진 눈가에선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와 송기연은 왜 이렇게 된 걸까. 유가는 더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드디어 송기연의 움직임이 멈췄고, 절정에 오른 유가가 몸을 튕기며 비명을 질렀다. 송기연도 꽉 죄는 그의 안에 마음껏 정을 토해냈다.

절정의 여운에 송기연의 눈은 순간 정신을 놓았다. 그 속에 붉은 기도 많이 사라졌다. 송기연이 시선을 내리자 검고 긴 머리가 흐드러지게 늘어트려져 있었다. 열락이 채 가시지 않은 붉은 얼굴에 땀과 눈물이 뒤섞인 사람이 보였다. 길고 처연한 눈망울이 붉고 미치도록 아름다웠다.

송기연은 넋을 놓고 한참이나 유가를 바라보았다. 미처 송기연이 그를 끌어안기 전에 유가의 손이 먼저 뻗어 송기연을 품에 안았다.

유가는 예전에 송기연이 자신을 안아줄 때처럼 머리를 그의 어깨에 파묻었다.

그리고 가늘게 떨리는 입을 천천히 열었다.

소리는 내지 않고서 입모양으로만 속삭였다.

‘사랑한다.’

* * *

송기연이 깨어났을 때 이미 하늘은 밝아진 후였다. 나무 창문으로 빛이 쏟아져 들어와 송기연의 눈에 비추었고, 너무 밝아 그만 잠에서 깨고 말았다.

예전 사존과 자신이 살던 나무 오두막 안에는 탁자와 의자 두 개, 그리고 침상만이 간소하게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는 침상에 누워있었다. 옷은 정갈하게 입고 있었고, 곁엔 아무도 없었다. 마치 어젯밤 일은 그저 꿈에 불과한 것 같았다.

송기연은 손을 가슴에 얹고 아침 햇살을 맞으며 옆에 널브러진 붉은 천을 바라봤다.

그는 기억하고 있었다. 어제의 일을 전부 생생하게 기억했다. 송기연과 유가는 밤새 사랑을 나눴다. 정원의 바닥, 봉황나무 아래, 탁자 앞, 온천 안, 그리고 마지막으론 이 침상 위에서. 그는 꼭 미친 것처럼 유가를 계속 안으며, 입으론 그를 상처 줄 날카로운 말만 내뱉었다. 아프다고 제발 그만해 달라고 애원하는 유가를 외면했다. 유가의 비명이 거칠어질수록, 울부짖고 힘에 겨워 빌수록 정체모를 가학심이 솟구쳤다.

송기연은 심마가 자신을 통제했다는 걸 느꼈지만, 사실 스스로도 그렇게 하고 싶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그저 이유를 원했다. 자신이 유가를 용서할 수 있는 이유. 그게 꾸며진 것이라도 이해하려 했다. 하지만 유가는 끝까지 입을 닫았고, 자신이 아무리 빌어도 절대 가르쳐 주지 않았다. 분명히 자신에게 마음이 있는데 왜 인정하지 않는 걸까.

만약 유가가 정말 그의 말대로 자신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다면. 어제는 왜 그토록 거칠게 구는 자신에게 순순히 안겼을까. 당신의 수련 경지로는 나에게 저항할 수 있지 않았나요? 왜 그렇게 날, 날 눈감아 준 건가요?

“하하하…….”

송기연이 갑자기 허탈하게 웃었다. 싸늘한 웃음소리가 조용한 방안에 울려 퍼졌다. 그가 붉은 천을 손에 잡고 두 눈을 가렸다. 시야가 전부 붉게 변했다. 깊게 숨을 들이마시자 남아있던 차가운 향이 덮쳐왔다. 송기연이 그렇게 중얼거렸다.

“유가. 넌 도망갈 수 없어.”

네가 그렇게 숨기고 있겠다면, 난 네 위치까지 올라가 네 날개를 꺾고 다 털어놓게 만들겠어.

* * *

유가가 급히 침전으로 날아왔다. 두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고 눈앞이 어지러웠다. 허리와 다리, 아래와 뱃속 통증이 대단했다. 입술은 창백해졌고, 눈 밑은 그림자처럼 어두웠다. 바람이 불어 쓰러지지 않으면 다행이다.

고금성은 유가가 마궁의 상공에서 날아올 때부터 주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의 안색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뭔가 이상했지만 묻지 않았다. 그저 예를 올리며 단정하게 말했다.

“소인, 존주를 뵙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유가는 앞으로 몇 걸음 걸어 나오다가 다리가 풀려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넘어지지 않게 휘청이다가 장포자락까지 밟고 말았다. 다행히 급히 문기둥을 붙잡고 그대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세게 닫히고 유가의 목소리가 말했다.

“본존은 쉴 테니, 찾지 마라.”

고금성이 주먹을 쥐며 얼굴빛이 완전히 어두워졌다. 유가의 목에 새겨진 붉은색 물린 자국을 봤다. 분명 정염을 나누고 생긴 흔적이었다. 심지어 유가는 불안정한 발걸음으로 휘청였고, 안색이 파랬다. 누가 봐도 다른 남자에게 아래에서 심하게 당한 모습이었다.

유가는 잠자리 상대가 많았지만, 다른 사람에게 이렇게 당한 적아 없었다. 과연 누가 그럴 수 있었을까. 게다가 저 성격에 어떻게 누군가에게 제압당했을까.

도대체 누구지. 갑자기 송기연의 얼굴이 떠올라 고금성의 눈이 어두워졌다. 손을 들자 옆에 순식간에 두포를 쓴 남자가 나타나 무릎을 꿇었다.

“대인, 무슨 분부라도 있으십니까?”

“최근에 천하를 통과한 사람 중 빠진 사람이 없는지 가서 살펴보아라.”

“소인 명을 받들겠습니다.”

남자가 말을 하곤 사라졌다. 남겨진 고금성은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송기연과 유가를 신묘에서 본 사람이라면 두 사람 사이의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관계가 있다는 걸 알았다. 절대 멸문의 원한 같은 그런 간단한 게 아니다. 송기연이 그와 작당할 때 제시한 조건이 다시 떠올랐다. 다른 건 필요 없으니 유가 하나만 갖겠다는.

고금성이 길게 한숨을 내쉬고 날카로운 눈빛을 거두었다. 시간을 내서 송기연을 만나야겠다고 결정했다. 어떤 일은 진상을 아는 게 가장 좋았다.

아구는 능광에게 잡혀 한동안 돌아올 수 없다. 신수집회는 명목일 뿐 진짜 목적은 아구를 유가의 곁에서 떼어낸 것이다. 선마 양계에 긴장감이 흐르는 이때 요수삼림은 반드시 중립을 지켜야했다.

능광은 유가를 마음에 들어 했지만 아구에게 무슨 일이 생기는 건 두고 볼 수 없다. 그를 자신의 곁에 두는 게 최선이었다.

“나가게 해 주세요! 능광! 빨리 날 풀어 줘요!”

아구는 폭발했다. 며칠 전에 능광에게 속아 돌아왔다. 유가를 찾는 일을 도와준다고 믿고 있었는데, 갑자기 자신을 가둬 버렸다.

이미 보름이란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그는 유가에 대한 소식을 하나도 듣지 못했다. 백유리와 송기연의 혼인 날짜가 가까워질수록 조급해서 앉아있을 수도 없어 끊임없이 진화를 태우다가 그만 화상을 입기까지 했다. 이젠 능광의 이름도 함부로 부르기 시작했다.

“능광! 듣고 있는 거 알아요! 빨리 내보내 달라고요,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고!”

계속 소리를 지르다 목소리가 다 갈라졌지만 멈추지 않았다. 계속 위협하고 애원하며 능광을 불렀다.

“아구, 도대체 유가가 왜 그리 좋은 것이냐? 이렇게 목숨을 내걸 가치가 있는 것이냐?”

능광이 마침내 결계 밖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자신의 바보 같은 손주를 마음 아파하며 바라봤다. 왜 그렇게 집착하는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드디어 능광이 나타난 것을 본 아구는 기쁜 표정이 가득했다, 능광의 질문을 듣고 생각도 않고 대답했다.

“할아버지, 대인은 제게 가족이에요. 할아버지와 할머니랑 똑같다고요. 할아버지께서 제가 고생하는 걸 못 보시는 것처럼 저도 대인께서 다치시는 걸 보기 싫어요.”

아구가 계속 말했다.

“전 부모님을 본 기억이 없어요,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키워주신 덕에 이기적이고 안하무인이었죠.

후에 놀러 나가서 대인을 만났죠. 그분께서 제게 정말 많은 걸 가르쳐주셨어요.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가르쳐주신 적 없던 것들이요. 그분은 제게 아버지 같은 존재예요. 평생 그분 곁에서 살고 싶어요.”

능광은 깜짝 놀랐다. 그동안 아구를 어린아이라고 여기며 보호하고 사랑만 줬었다. 이렇게 가둬두면 안정적으로 살아갈 거로 생각했다. 그의 의견 따윈 생각도 하지 않았다.

“보아하니, 유가가 정말 네게 많은 걸 가르친 모양이구나.”

능광이 쓴 웃음을 지으며 결계를 거두고 말했다.

“너도 가지 마라. 신수집회를 2월 초로 정했느니라. 마침 송기연과 백유리의 혼인 전이지. 유가가 혼자 선계에 숨어들길 원치 않는다 하지 않았느냐? 그럼 이번 기회에 우리는 정정당당한 이유를 들어 함께 오게 하자꾸나!”

능광이 결계를 풀자 곧바로 도망가려던 아구는 능광의 말을 듣고 이해가 되질 않아 물었다.

“대인께서 마족을 데리고 천하를 넘는다고 하면 선계에서 가만 둘까요?”

능광이 웃으며 심념을 움직이자 수중에 붉은빛이 감도는 옥간이 나타났다. 전에 아구가 청룡족에 보냈던 초대장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요수삼림은 지금까지 중립을 지켜왔다. 신수집회에 선마계의 고수들을 초대하여 참관하게 하는 것도 당연한 도리지. 유가에게 초대장을 보냈는데, 선계에서 감히 그를 막아 신수 가문의 체면을 깎는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하겠느냐?”

이번에 능광은 모든 걸 걸고 유가를 돕는 것이다. 만약 유가가 선계에서 문제를 일으키면 초대장을 보낸 주작족 역시 연루될 터였다. 하지만 그는 천년이라는 시간을 살았고, 만약 이런 일조차 처리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능광신군’이라는 칭호를 얻었겠는가.

“아! 할아버지 사랑해요!”

아구가 펄쩍펄쩍 뛰더니 능광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의 목에 입을 맞추며 환하게 웃었다.

능광이 손을 뻗어 아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웃었으면 된 거다. 아구만 즐겁다면 이 정도 일쯤은 해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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