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천하신묘
송기연이 완십주를 따라 천하의 주둔지로 돌아가던 길에, 그는 계속 딴생각에 빠져 있었다. 화제의 인물인 송기연에게 많은 이들이 말을 걸었지만 그가 별 대꾸가 없어 다음 기회를 노렸다.
그는 좀 전에 유가가 비녀를 뽑혔을 때에 그 텅 빈 눈이 계속 떠올랐다. 그는 항상 허세나 부리던 유가가 왜 그런 표정을 지었는지 알 수 없었다. 또 자신이 목숨을 걸고 받아낸 유가의 주먹에 움직이지 못할 부상을 각오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그 주먹은 예상보다 강하지 않았다.
송기연이 손바닥을 펼치자 백옥비녀가 드러났다. 한참을 보다가 손에 힘을 줘 비녀를 두 동강 냈다. 그때 그자가 사존께서 주신 검을 부러뜨린 것처럼 절단했다.
발아래 천하의 파도가 넘실거렸고 송기연이 손만 살짝 뒤집으면 조각들은 순식간에 사라질 수 있었다.
“무슨 생각 하느냐, 기연?”
완십주가 갑자기 멈춰선 송기연을 불렀다.
정신을 차린 송기연은 재빨리 반 토막 난 옥비녀를 급히 몸속 공간 속에 넣고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걱정 마십시오.”
그리고 그를 곧장 따라갔다.
비녀일 뿐이다. 버리든 말든 중요하지 않았다. 이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좀 놓여 편했다. 무주지에서 사존이 없이 지낸 지난 삼 개월 동안 그는 하마터면 사람과 교류하는 법을 까먹을 뻔했다. 간신히 이 대륙으로 다시 돌아왔으니, 모든 게 좋은 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유가를 죽여 원한을 갚은 뒤 정정당당하게 사존을 찾아갈 것이다. 억지로 고집을 피우고 떼를 써서 사존께 자신을 받아달라고 할 것이다. 날이 길어지면 사존께선 분명히 마음이 약해지실 것이다.
일 년이 안 되면 십 년을 쪼르고, 십 년이 부족하면 이십 년, 삼십 년, 오십 년, 백 년을 지속하다 보면 언젠간 성공할 것이다. 그는 그런 사람이니까. 사존과의 훈훈한 미래에 살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완십주는 그런 그를 이상하게 바라봤다. 이 제자는 무주지에 들어가기 전까지 웃은 적이 없었다. 삼 년이 넘게 끔찍한 무주지에서 쓸쓸하게 지냈을 텐데 어떻게 이렇게 밝아진 걸까. 정말 이상했다.
송기연 일행이 천하에 당도하자 강변엔 이미 수많은 선계 수진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이 돌아온 것을 보고 다들 표정이 밝아졌다. 그들은 경창파의 모풍이 천하 중앙으로 가는 것을 보고 큰일이 났다고 생각했으나 지금 이렇게 안전하게 돌아왔다.
“송기연? 송기연 맞죠!”
유쾌한 목소리가 사람들 사이에서 퍼져 나왔다. 한 청년이 바람을 가르며 허공으로 날아올라 외쳤다. 가늘게 뜬 눈이 꼭 여우같은 것이, 확실히 정상(程相)이었다.
정상이 송기연 앞에 서서 자신보다 키가 더 커진 송기연을 한참 바라봤다. 눈빛이 반짝이고 송기연을 와락 끌어안으려 했다. 하지만 송기연은 살짝 움직여 가볍게 피했다.
“정상, 우리가 이리 친근했습니까? 혼자 오해하지 마십시오.”
포옹에 실패하자 정상이 손을 떼고 정가의 가주(家主) 정원을 보며 얼굴을 붉혔다.
정원이 뭔가 느낀 듯 송기연 쪽을 바라보자 놀란 정상이 급히 시선을 거두었다. 그리고 허세를 부리듯 송기연의 어깨를 두드렸다.
“송기연, 당신이 없던 삼 년 동안 많이 그리웠습니다. 이리 무정하신 줄 몰랐습니다. 포옹 한번 허락해 주지 않으시다니요.”
“어? 정말 그렇게 생각합니까?”
정상을 만난 송기연도 속으로는 엄청 기뻤다. 전생의 기억 속에서도 정상은 자신의 친구였다. 그가 경창파에 있던 시간이 길지는 않았지만, 정상은 확실히 그에게 잘 대해줬었다. 평소엔 불성실해도 진정성이 있었다. 좀 전에 정상이 정가 가주를 이상한 눈빛으로 보더니 얼굴까지 붉어진 것을 보고 이 일이 간단하진 않겠다고 느꼈다.
“하하하. 그 얘긴 그만하고 다른 얘기 합시다!”
정상이 이 질문을 피하려 웃어넘겼다. 정원을 향한 그의 마음은 영원히 대답할 수 없을 것이다. 이 감정은 계속 마음속에 숨겨두고 아무에게도 꺼내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는 기꺼이 그자의 마음속에서 평생의 소호요(小狐妖)가 될 것이다.
송기연은 더 질문하지 않았다. 자신이 없던 삼 년 동안 경창파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으면서 그를 따라 땅으로 내려갔다.
“사조께서 당신이 떠난 그날 모든 제자께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당신이 살아서 돌아온다면 당신을 경창파의 유일한 수석제자로 앉히시겠다고요. 우리는 모두 당신을 사형이라고 부를 겁니다. 당신의 실력이 모든 제자보다 월등히 강하니깐요.”
역시 사조의 예감이 틀리지 않았다. 이 녀석의 지금 실력은 확실히 자신보다 훨씬 강했다.
“당시에 모두 당신이 살아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믿었습니다. 모두 당신이 거드름을 피운 것뿐 무주지에서 목숨을 잃을 거라고 여겼습니다. 당신께서 돌아온 건 기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당신의 위치는 당연히 제자들보다 높은 장로 바로 아래 수석제자가 적합합니다. 이 일엔 감히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습니다.
게다가 선계의 제자들이 당신에게 엄청 공손하게 굴던데, 아무래도 스스로 무주지를 나온 것에 그들이 엄청 놀랐나 봐요? 그 강변에서 일과 당신의 성격 때문에 기세가 급변했고, 제자들이 탄복했을 겁니다.”
정상의 분석을 들은 송기연은 속으로 좀 놀랐다. 이자의 통찰력이 대단했다. 역시 후에 선계 대전에서 자신을 도와 계책을 꾸밀 자였다. 다행히도 정상은 아군이다. 아니었다면 꽤나 골치 아픈 인물이었다.
“송기연, 제가 생각한 게 맞습니까? 제가 너무 정확히 맞춰서 놀랐죠? 자자, 어서 칭찬해봐요! 난 뭐든 다 좋으니까!”
정상은 득의양양했고, 입꼬리가 하늘로 승천하려고 했다.
“쓸데없는 소리 좀 그만하십시오.”
송기연이 다가온 정상을 밀치고는 주둔지의 대영으로 걸어갔지만 얼굴엔 웃음이 가득했다. 친구가 있는 느낌이 썩 나쁘지 않았다.
송기연이 막사로 돌아왔을 때 모풍은 막 천하 이상에 대해 얘기하려던 참이었다. 그가 들어오는 걸 보고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꽂혔다.
그가 육대가(六大家)의 가운데로 걸어가 사람들을 향해 예를 올렸다.
“소인 송기연, 오늘은 송가 가주의 신분으로 천하 이상에 대해 논하러 왔습니다. 부디 제 나이에 대해선 신경 쓰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기연 괜한 얘기를 하는구나. 우리 정가는 예로부터 송가와 사이가 좋았고, 송가에 자네 같은 젊은 천재가 있다면 부흥이 멀지 않았다. 송가 가주의 신분으로 온 것이라면 나 정원은 괜찮네.”
정원의 말을 시작으로 곧 고수들이 모두 괜찮다고 표현했다. 전에 천하에서 송기연의 행동을 모두 제대로 보았고, 이자의 뒤엔 든든한 경창파가 있으니 나이가 무슨 상관이랴?
모풍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때 송기연이 그때 ‘그 대인’이라는 걸 단정 지었다. 천부적인 솜씨나 수단이나 기질적으로 너무나 비슷했다. 그는 송기연에게 시간을 좀 주면 그가 반드시 이 선계를 다시금 부흥시키리라 믿었다.
“사형들께서 이리 말씀해주시니 그럼 저 기연 그만 자리에 앉겠습니다.”
이 말을 하고 송기연은 자연스럽게 자리에 앉았다.
토론은 얼마 가지 않았다. 내용인 즉, 천하신묘가 열리려고 천지에 이상이 생겼다면 아마도 얼마 지나지 않아 신묘가 곧 수면 위로 떠오른 다는 것이다. 그동안 그들은 마계와 ‘생사는 논하지 않는다는’ 협상을 할 것이었다. 이번 기회에 선계 각 문파의 우수한 제자들을 장로들이 데리고 신묘에 들어가, 마족의 실전 기술을 익히고 단련하기 위함이었다.
송기연은 확실히 선계 제자가 수련 경지를 높이려면 많은 단련이 필요하며, 만약 문파 안에 숨어 세상 물정을 모른다면 실제 전투를 익히지 못해 생사 싸움이 빈번한 마족에게 당할 수밖에 없을 거라고 입장을 밝혔다.
송기연이 막사를 나오자 굳은 표정으로 나무에 기대 자신을 바라보는 정상이 보였다. 하지만 가냘픈 그림자가 먼저 곧바로 그에게 달려왔다.
“저기, 당신 좀 대단하시던데? 전에 무주지에선 그 정도인 줄 몰랐어요! 그때 그 말은 잊어 주세요!”
귀여의가 미안한 눈빛으로 송기연에게 다가가자, 정상은 재빨리 거리를 벌렸다.
“그 일은 저도 신경 쓰지 않으니, 사과할 필요 없습니다.”
송기연은 별로 귀여의를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이 여인의 성격이 마음에 안 들었고, 지금은 더욱 상대하기 힘들 것 같아 자리를 피하려 했다.
“엥? 왜 그렇게 박해요? 표정 좀 풀죠?”
귀여의가 송기연의 앞을 막고 웃었다.
“자, 우리 친구 해요!”
송기연이 미간을 찌푸리며 쌀쌀맞게 굴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몸을 피해 자리를 뜨자 뒤쪽에서 여인의 버럭하는 소리가 들렸다.
“흥! 분명히 당신에 그 더러운 성질머리 때문에 당신 곁에 있던 그 고수도 당신을 떠난 거예요! 당신의 그 성격 받아주는 사람은 아마……!”
말을 다 마치기 전에 귀여의의 목에 단검이 겨누어졌다. 자신에게 경고하는 송기연의 눈에서 붉은빛이 반짝였다.
송기연이 음산한 눈으로 독에 담금질한 단검을 거두고 돌아섰다.
“말이 너무 많군.”
* * *
시월의 날씨는 덥지도 춥지도 않았고 햇볕도 강하지 않았다.
머리 네 개, 꼬리 하나 달린 백마가 예쁜 마차를 끌고 재빠른 속도로 하늘을 날았다. 남들 눈에 띄지 않게 장안법으로 가려 둔 마차는 준수한 외모의 흰옷을 입은 청년이 끌고 있었다. 청년은 채찍 없이 입으로 작지만 기묘한 소리를 내며, 머리 네 개 달린 백마에게 지시했다. 소리를 내지 않을 때는 살짝 젖혀진 마차의 휘장 사이로 내부를 한번씩 확인했다.
마차 안에는 아름다워 눈을 뗼 수 없는 소녀가 있었다. 긴 의자 위에 광채를 품은 은색의 장발을 늘어트리고 눈처럼 새하얀 피부, 길고 촘촘한 속눈썹으로 달게 자고 있었다. 미간에 새겨진 은각은 그녀에게 영기를 더해줬다.
청년이 넋을 놓고 바라보는데 마차 안 소녀가 아무런 예고도 없이 갑자기 눈을 번쩍 떴다. 맑은 검은 눈동자가 자신을 보고 싱글벙글 웃고 있자 소녀는 분홍색 입술을 떼고 조롱했다.
“낙지(洛止) 오라버니, 또 정신 못 차리네.”
청년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급히 고개를 돌리며 변명했다.
“공, 공주! 소, 소인 불쾌하게 해드릴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말을 더듬었는데, 긴장할 때는 더욱 심해졌다. 무슨 말인지 모를 말을 내뱉고 부끄러워 얼굴엔 난처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하. 낙지 오라버니, 변명 안 해도 돼. 나 신경 안 써!” 야야가 휘장을 걷어 올리고 청년의 옆에 앉았다. 가늘고 흰 발가락이 허공에서 즐겁게 까딱거렸다. 여인의 발에서 나는 은방울의 딸랑거리는 소리와 바람이 어우러졌다.
“오라버니, 지금 어디쯤이야?”
두 사람이 너무 꼭 붙어있어 난감해진 청년이 몸을 살짝 뒤로 빼며 더듬거렸다.
“고, 공주께 아룁니다. 곧, 생도, 역(生途域) 입니다.”
생도역이라는 지명을 듣자마자 야야는 두 눈을 반짝였다. 막 안정을 찾은 청년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생도역을 지나면 바로 천하 변경인 거지?”
낙지도 눈을 떼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네’라고 대답했다.
“다행이다! 이번에 그 송가 공자에게 그분을 어디에 숨겨뒀는지 꼭 묻고 말 거야!”
야야가 데릴사위를 구한 지도 한참이 지났지만, 그분은 아직도 찾아오지 않았다. 그녀의 빙련을 가져가 놓고 이렇게 말 한마디 없이 사라지다니, 어떻게 이런 일을 두고 볼 수가 있을까.
송기연이 천하에 나타나서 유가와 싸움을 벌였다는 건 이미 소문이 다 퍼졌고, 송기연의 경험과 가문 역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있었다. 야야는 송기연이 그때 그 눈이 멀었던 아이일 가능성이 크다는 걸 알아챘다. 설요족의 반생빙련은 눈을 치료하는데 효과가 좋아 한 뿌리만 있어도 충분히 치료할 수 있다.
그래서 이번에 야야는 낙지와 몰래 도망 나왔다.
송기연을 반드시 찾아내 그분의 행방을 묻겠어! 흥! 그 녀석이 그분을 막고 있어서 나를 못 찾아왔을 수도 있잖아!
낙지는 옆에 앉은 소녀가 꺼내는 약혼자 얘기를 듣고 살짝 질투가 났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야야와 죽마고우인 자신이 또 뭘 어쩔 수 있을까? 그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늘 공주의 곁을 지킨 호위무사일 뿐이니, 공주는 영원히 자신을 좋아할 리 없었다.
이틀을 꼬박 더 이동한 후에 두 사람은 마족이 지키는 천하 변경에 도착했다. 청년이 백마를 멈추자 허공에 떠 있던 마차가 땅으로 내려갔다.
“설요족의 말? 설요족 사람이시오?”
주둔 병사들이 마차와 마차를 끄는 새하얀 백마를 보고는 바로 알아채고, 예의를 차리며 말했다.
청년이 고개를 끄덕이고, 야야를 대할 때와는 다르게 긴장한 기색도 없이 간단명료하게 말했다.
“지나가겠소.”
설요족은 예로부터 중립을 고수하고 있고 선마계 일에 간섭하지도 않았다. 때문에 마계에선 굳이 막을 이유가 없었다.
병사가 난감해하며 말했다.
“죄송하지만, 저희가 길을 막으려는 건 아닙니다. 다만 존주께서 최근에 이곳의 통행 심문을 강화하라고 명하셨습니다. 하여 존함을 기록하여 마궁에 보고를 해야 합니다. 그러니 마차 안에 계시는 분의 존함을 알려주시겠습니까?”
“안 됩니다.”
낙지는 야야가 몰래 도망 나왔고 지금쯤 설요족도 그 사실을 알아챘을 거라는 걸 알았다. 만약 이름을 얘기한다면 이곳에서 막혀 마계도 건너지 못할 테니 선계엔 발도 들일 수 없을 것이다.
이 청년의 태도가 맘에 들지 않아 병사는 한순간에 얼굴을 굳혔다. 그가 눈짓하자 순식간에 병사들이 패검을 뽑고 마차를 포위했다.
“존주의 명령은 그 누구도 불복할 수 없습니다. 순순히 저희를 따라주십시오.”
낙지는 미간을 찌푸렸다. 도대체 마족은 왜 이렇게 거칠고 교양이 없는지 정말 혐오스러웠다. 심념을 움직여 주위의 진기를 움직이자 병사들은 순간 공기가 차가워진 걸 느꼈다. 낙지의 미간에 금이 간 듯한 은각이 떠오르더니 눈빛이 차가워졌다.
“어어? 지금 뭐 하는 건가? 왜 이렇게 소란스러워?” 냉소적인 목소리가 저 멀리서 들려오자 낙지와 병사들은 순간 멈칫했다. 동작을 멈추고 돌아보니 웃으며 부채를 휘두르고 있는 왕다국이 보였다.
현장의 병사들은 모두 저자가 마존의 최측근이라는 걸 알고 있다. 때때로 주둔지에 와서 살펴보고 돌아가니, 저자에게 극도로 예를 갖춰야 했다. 그가 다가오자 다들 예를 올렸다.
“소인, 왕 역주를 뵙습니다.”
평온하게 걸어온 왕다국이 부채를 거두고는 낙지를 바라봤다. 그를 가볍게 무시하고는 곧장 마차로 향해 안에 누가 타고 있는지 보려 했다.
“멈추시오.”
왕다국의 몸 앞에 갑자기 얼음벽이 생겨났다. 돌아서니 이미 분노한 낙지가 자신이 한 걸음만 더 나아간다면 자신의 목숨을 노릴 것 같았다.
흥미로워진 왕다국은 눈썹을 치켜 올웠다. 심심하던 찰나에 좋은 구경거리가 생겼다. 호전적인 그는 부채를 흔들며 청년과 한판 붙으려고 했다.
피웅-!
갑자기 허공을 가르는 소리에 왕다국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두 손가락으로 자신을 향해 날아온 작은 종이를 잡아챘다. 그가 부채를 넣고 종이를 펼치자 그만 웃음이 터졌다. 그 마차 안에 있는 소녀에 대한 호기심이 더욱 커졌다.
낙지와 병사들은 그의 웃음에 얼떨떨했다. 왕다국이 손을 내저으며 병사들에게 말했다.
“지나가게 두어라.”
그리곤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앞으로 마족들은 모두 예를 차리고 싸우려 들지 말고 이유 없이 입씨름도 하지 말라.”
좀 전에 부채를 들고 싸우려고 하던 그 사람은 누구였죠.
마차가 허공으로 사라지는 걸 보고 왕다국은 천하변경의 빽빽한 밀림으로 들어갔다. 고개를 드니 큰 나무 위, 나뭇가지에 누워있는 유가가 보였다. 겹겹이 쌓인 나뭇잎 사이로 햇볕이 스며들었다.
“존주, 마차 안에 계신 분이 설요족 공주라는 걸 어찌 아셨습니까?”
왕다국의 질문을 예상한 유가는 미리 대답도 생각해 두었다.
“본존은 똑똑하니까.”
“하하하. 존주 정말 하하하!”
왕다국은 유가가 이렇게 받을 줄 몰랐다. 자연스러운 표정에 그만 믿을 뻔했다.
유가가 그를 흘겨보자 왕다국이 헛기침을 하고 부채질하며 알랑거렸다.
“존주 말씀이 맞습니다. 네 맞고 말고요.”
가식적인 그의 모습에 유가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는 이마에 은각 때문에 그 사람이 야야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사실 오늘 휴식을 취하려 했으나, 이마에 이상한 느낌이 나서 만져봤다. 이곳만 이상하게 차가운 게 아무래도 은각 안에 무언가 움직이는 것 같았다.
은각의 이상에 곧바로 야야가 떠올랐다. 아무래도 은각은 서로의 존재를 감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심장이 철렁한 유가는 바로 도망가려고 했지만, 천하 쪽에 진기가 요동칠 조짐이 보여 아무래도 야야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았다.
갈 수도, 안 갈 수도 없는 상황에 그는 천하 변경 쪽으로 가서 힐끗 살피자 야야와 왕다국과 청년이 보였다. 곧장 몇 글자를 적어 날려 공연한 싸움을 막았다.
사실 속으로 야야가 마차에서 나와 저를 붙잡진 않을까 조마조마했지만, 다행히 우려했던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마차는 시원스럽게 자리를 떠났고,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설요족 공주께서 선계에 가신 일은 모두 함구하라. 공주께서 모습도 드러내지 않으시고 소수의 일행으로 움직이시는 거면 분명히 이목을 피하시는 것이니, 우리 마족은 공주께 괜한 불편을 드리지 말라.”
왕다국이 눈알을 굴리며 웃었다.
“존주, 공주의 데릴사위 조건을 이미 말씀드렸잖아요. 준수한 외모라면 기회가 있지만 존주께선 유일하게 기회가 없는 분이시라고요. 존주께서 이렇게 발 벗고 나서신다고 하더라도 공주께선 신경도 쓰지 않으실 겁니다. 한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으십니까?”
왕다국이 만약 야야가 그렇게 오래 찾아다니던 그 혼인 상대가 자신이라는 것을 안다면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까?
“왕다국, 본존의 나이가 몇인 줄 아느냐?”
유가를 놀릴 생각에 빠져있던 왕다국은 이 질문을 듣고 곰곰이 생각했다. 하지만 머리가 잘 돌아가질 않았다. 사실 그는 유가의 나이를 모르고 있다. 다만 기억나는 건 그가 어렸을 때 유가는 이미 선계를 호령하는 마존이었다는 것이다. 그 당시 그는 유가를 자신이 넘어야 할 목표라고 여겼었다.
“본존의 나이는 야야와 백 배는 차이가 난다. 이번엔 천하 변경에서 소란이 일어나는 걸 원치 않아 두 사람을 보냈을 뿐이다. 저 여인이 아무리 아름답다고 해도 본존 눈에는 그저 어린 소녀일 뿐이다. 본존은 그런 쪽엔 흥미가 없구나.”
“그럼 송기연은요? 그는 이제 열일곱일 뿐입니다.”
왕다국은 바로 후회했다. 조심스럽게 유가의 표정을 살폈으나 유가는 침착하고 태연하게 말했다.
“그자와 본존은 아무 일도 없었다. 더는 그 이름을 입에 올리지 마라.”
왕다국은 토 달지 않고 예를 올렸다.
“소인 알겠습니다.”
“알았으면 그만 가 보아라.”
바람이 강하게 불며 유가 위에 나뭇잎이 떨어졌다. 햇빛이 부서지며 눈동자로 쏟아져 유가는 손을 들고 빛을 가렸다.
“소인 물러가겠습니다.”
왕다국이 한숨을 내쉬고는 예를 올린 뒤 돌아서 숲을 빠져나갔다.
저 입을 그냥. 꼭 아픈 곳만 콕콕 찌른다니까.
“아아아악! 낙지 오라버니! 나 방금 그분의 기운을 느낀 것 같아! 왜 선계로 가면 갈수록 그분과 멀어지는 느낌이 들지?!”
야야가 급히 마차에서 나와 주위를 둘러보자 이미 천하 중간 지점을 지나고 있었고 주위엔 강물만 흘렀다. 좀 전에 약하게나마 느꼈던 기운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와! 어쩜 이렇게 재수가 없지?”
풀이 죽은 채로 자리에 앉은 야야는 너무 울적했다. 낙지 오라버니가 자신에게 마차에서 나오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고, 자신도 혹시나 신분이 노출될까 봐 시키는 대로 했는데, 지금은 아무래도 그분을 찾을 기회를 완전히 놓쳐버린 것 같다!
“공주, 아, 아니면, 다시, 돌아갈, 까요?”
야야의 말을 들은 낙지는 깜짝 놀랐다. 얼굴엔 죄책감이 가득했고, 말에게 돌아가라고 말하려고 했다.
“됐어, 오라버니 탓하지 않아. 선계에 가서 송 공자에게 직접 물어보면 돼. 아마 지금 느껴지지 않는 건 아직 만날 인연이 아니라서 그런 거겠지. 시간은 많으니까 앞으로 기회가 있을 거야.”
낙지의 죄책감을 알아챈 그녀는 급히 변명했다.
“아, 알겠습니다.”
낙지가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지만 죄책감은 조금도 나아지질 않았다.
머리가 네 개 달린 백마는 모두 준마였다. 반나절을 더 가서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선계에 도착했으나 천하변경의 수비에게 가로막혔다. 오늘은 하필 경창파의 제자들이 변경을 경비하고 있었고, 마차가 내려오자 모두의 이목을 끌었다.
백의 제자는 백마를 보고 낙지가 설요족이라는 걸 바로 알아챘다. 하지만 이 시기에 설요족이 왜 이 선계에 온 것인지 궁금해졌다.
“누구십니까?”
차 휘장이 젖히더니 방울 소리가 울렸다. 검은 옷을 입은 은발의 소녀가 뛰어내렸다. 뽀얀 두 발이 땅에 닿지도 않았는데, 지나간 곳은 꼭 흰 눈을 밟은 것처럼 깨끗했다. 여인이 장난스레 웃었다.
“설요족의 공주, 야야예요.”
뒤쪽에 낙지를 가리키며 계속 말했다.
“이분은 제 오라버니, 낙지시고요.”
여인이 오른손을 내미는데, 투명한 한기를 감싸고 있는 영패가 손 위에 나타났다.
“이건 설요족의 빙영패(冰靈牌)예요. 모두 알고 있죠?”
야야의 얼굴만 넋을 놓고 바라보던 제자는 야야가 기침을 하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얼굴이 빨개진 그가 급히 예를 올리며 난처한 듯 말했다.
“설요족 공주셨군요. 좀 전에 소인 주제넘게 행동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넋을 잃은 사람은 한 명이 아니었다. 혈기왕성한 경창파의 젊은 제자들에게 마음속 여신이라면 백유리뿐이었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백유리와는 차원이 다른 여인이 있으니 정신을 못 차리는 것도 당연했다.
“하하, 괜찮아요. 익숙해요, 그런 거.”
야야가 상관없다며 손을 휘저었다.
“근데 송기연은 어디 있어요? 그 사람을 만나러 왔는데.”
“송 사형은 무슨 일로 찾으십니까?”
송기연이 무주지에서 살아 돌아온 뒤 그는 경창파 제자들의 사형이 되었고, 지금은 모두가 그를 사형이라고 불렀다. 최근에 송기연은 이름을 떨치며 크게 부각이 되어 모든 제자는 그를 부러워했다. 게다가 지금 또 이렇게 예쁜 여인이 와서 그를 찾으니 다들 속이 쓰렸다.
“오해 말아요. 그저 묻고 싶은 게 있어서 왔을 뿐, 다른 뜻은 없으니까.”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야야가 어찌 모를까. 다 이해한다는 듯 웃으며 일부러 해명했다.
“절 찾아오셨다고?”
냉담한 목소리가 그 제자의 뒤에서 들려왔다. 야야가 그 사람을 바라보자 눈이 번쩍 뜨였다. 믿을 수 없어 손으로 닦아보다가 한참 후에야 간신히 물었다.
“당신이 송기연?”
방금 야야가 그를 찾자 경창파 제자가 송기연을 불러왔다. 하지만 송기연은 아무리 생각해도 설요족에서 누가 자신을 찾아온 건지 도통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야야의 얼굴을 제대로 보고는 송기연은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야야의 질문을 받고 그는 냉담하게 대답했다.
“그런데요?”
“무엄하다!”
송기연의 예의 없는 태도를 본 낙지가 화가 치밀었지만 옆에서 나온 손이 그의 앞을 막았다.
야야가 고개를 내저었다. 눈이 반짝이는 게 조금도 화가 나지 않은 모양이다. 그녀는 앞으로 몇 걸음 걸어가 그를 자세히 보고 말했다.
“생각도 못 했는데, 그 어린 장님이 이렇게 훌륭하게 컸을 줄이야.”
여인이 손을 펴고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쉽게도 내 눈엔 네 외모는 사존보다 부족하구나. 또한 그보다 성격도 날카롭네. 너무 날카로워 오래 보고 있으면…….”
여인이 일부러 말끝을 흐리며 웃었다.
“그냥 한 대 쥐어박고 싶구나.”
“쿡!”
그들 주위엔 온통 경창파 제자들이다. 교양있는 공주의 입에서 송기연을 조롱하는 말이 튀어나오자 모두 웃음이 터져 참느라 킥킥댔다.
송기연이 미간을 찌푸렸다. 칠 년 전 사존은 자신의 눈을 치료해주며 설요족 공주와 약혼을 맺었다. 그녀를 다시는 마주치지 않길 바랐는데, 이 여인이 자신을 다시 찾아왔다. 분명 사존을 찾아온 것이리라. 정말 끈질겼다. 그가 검에 손을 올리고 무표정하게 말했다.
“한판 붙고 싶다면 상대해주겠다.”
송기연의 행동을 보고 낙지는 초조하여 입이 근질거렸지만 공주께 먹칠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별말 없이 송기연과 한판 붙으려 했다.
“낙지 오라버니, 초조해 하지 마, 우린 싸움이 안 돼.”
야야가 낙지의 어깨를 살짝 두드리자 그가 뒤로 물러섰다. 야야가 송기연의 앞으로 걸어가 웃었다.
“거기 장님, 난 당신이랑 안 싸워. 그저 당신 사존이 어디에 계시는지 물으러 온 것뿐이야. 엽망지 그 사람, 지금 어디 있어?”
엽망지라는 세 글자를 듣고 송기연이 아련해졌다. 정말 오랜만에 듣는 사존의 이름이었다. 그는 줄곧 그를 ‘사존’ 아니면 ‘묵묵씨’라고 불렀다.
그는 항상 의문이었다. 수련 경지가 그렇게 깊은 사존의 소식이 왜 이 대륙에서는 전해지지 않는 걸까? 게다가 기억 속 사존은 귀곡심연에 있을 때 항상 검붉은색의 가면을 쓰고 있었고, 진짜 얼굴을 보여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엽망지’라는 이름이 실제로 존재하긴 하는 걸까? 도대체 자신에게 뭘 숨기고 계신 걸까?
야야는 아무래도 자신이 송기연의 말문을 막히게 한 것 같아 상심했다.
“보아하니 당신도 엽망지의 행방을 모르는 것 같네. 일찍 알았다면 마계 주둔지에서 넘어오지 않았을 텐데. 그쪽에서 은각의 기운을 좀 느꼈거든.”
“지금 사존의 기운을 느꼈다고 하셨어요? 마계에서?”
굳건했던 송기연도 사존의 일을 듣자마자 바로 냉정함을 잃어버렸다. 그는 야야가 사존에게 은각을 심었던 일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 은각으로 그분의 기운을 느낄 줄은 몰랐다!
야야가 살짝 뒤로 물러나며 흥분한 송기연과 거리를 벌렸다.
“설요족이 은각은 30장(仗)밖에서도 상대의 기운을 느낄 수 있어. 방금 마계 천하 변경을 지날 때 내가 모습을 드러낼 수 없었는데, 아니었다면 벌써 엽망지를 찾았을 거야! 너한테 물으러 오는 게 아니었는데!
됐다, 됐어. 이미 온 걸 어떡하겠어. 듣자 하니 천하신묘가 떠오른다니 그런 큰일에 엽망지가 나타날 확률은 높지. 우선은 선계에 머물렀다가 그때 너와 함께 그 섬으로 가야겠다. 거기서 무조건 엽망지의 기운을 느낄 거야. 괜히 헛걸음하면 안 되잖아!”
걸음을 재촉했던 야야는 선계에 도착한 후로 계속 피곤했다. 기지개를 켜며 옆에 경창파 제자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 혹시 처소를 좀 알아봐 줄 수 있을까요?”
그 제자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야야와 송기연이 대화를 하고 있을 때 제자 하나가 설요족 공주가 선계에 왔다는 소식을 장로에게 전했고, 장로는 제자에게 공주를 극진히 모시라고 했다. 그 말을 들은 그들은 대접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저도 사존을 찾고 있어요.”
송기연의 목소리에 야야가 가던 길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송기연이 상심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냉담했던 아까와 다르게 무척이나 야야를 존중하면서 조심스럽게, 간절하게 말했다.
“신묘에 함께 가신다면 꼭 사존을 찾아주셨으면 합니다.”
그는 누구에게 부탁을 한 적이 없었다. 사존에게만 저를 낮추던 자존심 강한 송기연이 사존을 찾는 일 때문에 야야에게 애원했다. 하지만 그는 사존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었다. 그저 소식이라도 듣고 싶었다. 자신이 직접 사방팔방 찾아다녔지만 아무런 단서도 없었다. 지금은 야야의 은각이 마지막 기댈 곳이었다.
야야는 미간을 찌푸렸다. 좀 재미는 없었지만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그녀가 엽망지를 찾는 일이라면 송기연과 함께 하는 게 수월할 터였다.
좀 전까지 그렇게 방자하게 굴던 아이가 그분에 대해 듣자마자 머리를 숙이는게 사실 좀 거북하기도 했다.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알겠다. 그때 나와 함께 가자.”
송기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예의 있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공주.”
“그런 말을 들으니 어색하구나.”
야야가 입을 삐죽이며 낙지를 봤다.
“낙지 오라버니. 그만 가자.”
경창파의 제자들이 공주에게 길을 안내할 때 다들 속으로 대체 엽망지라는 사람이 누구이기에 설요족 공주가 좋아하고 송기연이 머리를 조아리는지 궁금해졌다. 안타깝게도 하늘이 무너져도 그들은 엽망지가 유가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
* * *
“으아아악! 할아버지 진짜 너무하세요! 청룡족에 초대장을 보내라니요!”
화가 잔뜩 난 아구가 능광을 흘겨보며 소리쳤다.
“저랑 청룡족이랑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거 할아버지도 뻔히 아시잖아요. 전에 그 잡종 손에 패하여 청룡족에 비웃음 당한 일로 지금까지도 답답해 미치겠단 말이에요!”
그는 며칠 전 능광의 손에 이끌려 요수삼림으로 끌려왔다. 곧 신수집회가 시작되는데, 이번에는 주작족이 개최하는 순서였다. 아구는 실력이 출중한 젊은 세대였기에 능광의 빼놓을 수 없는 자랑거리다. 항상 아구를 데리고 다녔고, 이번엔 더욱 욕심을 부려 청룡족에게 초대장을 보내 직접 다른 가문에 자랑하려 했다,
“우리 아구, 지금 젊은 세대에서 사람으로 변신할 수 있는 주작은 너뿐이니 네 자랑을 해야 하지 않겠니? 그럼 얼마나 체면이 서겠니? 왜 아직도 예전에 그 사소한 일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야?”
능광은 꼭 어린아이를 유괴하는 아저씨처럼 음흉하게 웃어 보였다.
“아직도 속이 상한다면 이번엔 청룡족에게 제대로 체면이 설 기회 아니냐? 얼마나 좋으니?”
아구는 담홍색 광이 나는 옥간(玉簡- 종이 대신 사용하던 옥조각 묶음)을 움켜쥐고 능광의 말을 곱씹었다. 그의 말도 일리가 있는 듯하여 침묵했다.
생각에 빠진 아구를 보고 능광은 자신의 말이 먹혔다는 걸 알고 급히 한 마디 덧붙였다.
“게다가 네가 그토록 찾고 있던 그 잡종을 만날지도 모르지. 어쨌든 신수집회엔 많은 젊은이들이 요수삼림으로 돌아오니 이번 기회에 잘 찾아보렴.”
마음이 돌아선 아구가 옥간을 집어넣으며 입을 삐죽였다.
“알겠어요. 할아버지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직접 청룡족을 보러 가죠.”
요수삼림은 엄청 광활한데, 주작족은 동쪽에 자리했고 청룡족은 서쪽에 자리했다. 게다가 아구는 걸음까지 느려서 청룡족에 도착하는 데 꼬박 사흘이나 걸렸다.
주작족은 불을 다스리지만 청룡족은 물을 다스리고 습한 걸 좋아했다. 청룡족의 국경엔 물안개가 가득했다. 자욱한 안개가 온 삼림을 뒤덮고 있었다.
아구가 코를 훌쩍이며 청룡족이 만들어낸 날씨가 정말 마음에 안 들었다. 미간을 찌푸리고 앞으로 향하자 곧 저 앞에 희미한 용의 모습이 보였다. 북적거리는 모습이 무슨 일인지 호기심이 생겨 다가갔다.
“잡종 주제에 깔끔하게 밖에서 죽지 않고, 무슨 낯짝으로 돌아온 거지?”
“널 보니까 기분이 엿 같잖아! 백 년 전 신수집회에서 이겼다고 우린 안중에도 없더니! 그런 성품으로 이번 집회에 참가 자격 같은 건 꿈도 꾸면 안 되는 것 아냐?”
“하하하. 이렇게 심한 상처는 누구도 도와줄 수 없지. 용맥이 이렇게 망가졌으니. 이자는 평생 화신기밖에 오르지 못하겠군!”
세 사람의 조롱하는 말이 아구의 귓가에 들렸다. 들으면 들을수록 경악스러웠다. 청룡족은 혈통을 극히 중요시한다는 걸 알고 있었는데, 혈통이 불순하다는 이유로 청룡 내부에서 이렇게 괴롭힘을 당할 줄이야. 아구는 더는 가만히 듣고 있을 수 없었다.
아구가 안개를 헤치고 모습을 드러내 그 상처가 심한 청룡 앞에 서서 세 청룡을 마주했다.
“세분 참 교양이 넘치시네. 나이는 수백 살이나 쳐 드셔놓고 어린아이처럼 상처 입어 연약한 동족이나 괴롭히다니. 외부인으로서 도저히 뭐라 할 말이 없네요.”
말을 하곤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소년의 모습으로 일부로 늙은 티를 내며 세상일을 다 겪은 듯 굴자 앞에 세 청룡은 어리둥절했다.
세 청룡 중 우두머리는 아연실색했다. 아구의 말은 좀 전에 자신들 언행을 다 들은 것이었다. 그런데 자신들이 아구의 존재도 느끼지 못했다는 건 아구가 자신들보다 수련 경지가 높다는 것이었다.
아구를 세심히 살펴보자, 붉은 옷을 입었고 이마엔 주작족 능광신군과 대동소이한 화염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갑자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라 물었다.
“설마 주작족의 아구?!”
그의 말에 옆에 있던 둘도 경악했다. 사 년 전, 아구가 변신을 했다는 사실은 이미 모든 신수족이 알고 있다. 아구가 젊은 층의 걸출 난 천재이며 혈통도 순수 혈통이라 모두의 질투 대상이었다.
지금 거창하게 알려졌던 주작족이 변신한 모습을 보자, 아직 젖비린내 나는 어린 소년의 모습이자 다들 속으로는 좀 비웃었다.
“하하. 내 이름이 이리 유명할 줄이야?”
아구가 고개를 내저었다. 어른 흉내를 내던 게 순식간에 초라하게 느껴졌다.
우두머리 청룡이 그의 모습을 보고 눈알을 굴리며 아구 뒤에 청룡을 가리켰다.
“아구, 지금 네가 지키는 게 누군지는 아는 거야?”
아구가 그의 말을 듣고 고개를 돌리자 그 순간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뒤에서 세 청룡의 비웃음이 들려왔다.
“정말 생각도 못 했군. 눈썰미도 없지 뭐야. 자신에게 치욕을 준 자를 직접 나서서 보호해 주다니?”
“하하! 설마 백 년 전 저 녀석이 신수족들 앞에서 네게 한 짓을 잊은 것인가?”
세 청룡은 모두 저번 신수집회에서 오만방자한 아구가 지금 보호하고 있는 저 청룡에게 패배하던 모습을 직접 목격했다. 모두의 앞에서 가차 없이 주작족의 체면을 깎았다. 그런데 지금 그가 원수를 보호하고 있는 꼴을 보니 다들 우스워 죽으려 했다.
백 년이라는 시간은 수명이 긴 신수에게는 마치 어제 일처럼 느껴질 정도로 짧은 시간이다. 뒤에 서 있는 청룡 맹장의 얼굴을 보고 아구는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아구는 그때 저자가 자신에게 나약한 주작족 폐물이라며, 주작족의 우수 인재가 고작 이 정도라면 주작족은 영원히 청룡족을 이길 수 없다고 한 말들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맹장은 그때 그 오만방자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초라하게 웅크린 채 질척한 땅바닥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온몸은 상처투성이고, 자신을 보고 경계하며 두려워했다. 아구가 신식으로 그자를 탐색해 보다가 그자의 혈통이 무언가에 타서 약해졌고, 지금의 수련 경지를 유지하기도 쉽지 않으며 앞으로 더는 수련을 하지 못한다는 걸 알아챘다.
아구는 갑자기 마음이 좋지 않았다. 자신은 전에 이자를 잡종이라고 부르며 반드시 이자를 쓰러뜨려 신수일족 중 과연 누가 최고인지 꼭 보여줄 거라고 했다. 지금 그 청뱀이 이 꼴이 되었지만, 그는 도저히 웃을 수가 없었다. 조금도 기쁘지 않았고 오히려 허탈했다.
그가 다시 그 세 청룡을 돌아봤을 때 그의 손엔 이미 본명진화가 타오르고 있었다. 극도로 뜨거운 화염이 순식간에 주위의 수증기를 말려버렸다. 아구가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
“나 아구는 하고 싶은 건 꼭 해야만 하지. 너희 더러운 뱀들에겐 간섭할 필요도 없겠구나. 너희는 입으로만 떠들 줄 알지 뭘 할 줄 아느냐? 나와 대적하기 싫다면 지금 당장 꺼져라! 늑장 부리면 바로 너희를 맛있게 구워 먹어줄 테니!”
아구가 한 발짝 발을 내딛었다.
“멈추시오! 갈게요! 지금 갑니다!”
아구가 손을 쓴다면 세 청룡은 당해낼 재간이 없다. 청룡들은 눈치 있게 급히 이를 악물고 대답하며 그 길로 도망쳤다.
그들이 사라지자 아구는 진화를 넣었다. 돌아서서 맹장을 바라보았지만 뭐라고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아구가 나타난 후로 맹장은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사 년 전 뇌겁을 맞아 자신은 지금 이 꼴이 되었다. 그때 능광에게 들켜 어쩔 수 없이 죽을힘을 다해 도망치느라 아구가 변신한 모습을 보지 못했다.
지금 보니 사람의 모습을 한 아구는 자신이 상상한 것만큼 예쁘고 귀여웠다. 반짝이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 눈이, 꼭 오래전 청룡 지하 감옥 난간 사이로 봤던 밤하늘의 별 같았다.
“왜 이렇게 된 거야?”
아구가 맹장의 곁에 쭈그려 앉아 복잡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는 대체 누가 청룡을 이렇게 만들었단 말인가. 분명히 백 년 전만 해도 맹장이 자신보다 실력이 월등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좀 전에 맹장은 남을 속이려고 일부러 경계하는 척 두려운 척했다. 혈맥이 망가졌으나 의기소침하지 않았다. 사 년 동안 정기를 기르고 예기를 축적한 덕에 그는 실력을 어느 정도 회복할 수 있었다. 신수집회까지는 아직 1년이라는 시간이 남았고, 그는 다 계획이 있었다.
그는 궁기의 혈을 훔쳐 용맥을 회복하여 혈맥의 힘을 보완할 생각이었다!
이번에 청룡족에 돌아온 것도 장로들이 이제 자신을 단념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지금 폐물이 된 자신은 이용 가치가 없으니 버려지는 게 당연했다. 가문의 병기, 장로의 향로(爐鼎), 오백 년 동안 자신을 옭아맸던 악몽을 드디어 끝낼 수 있었다.
그는 살짝 ‘겁을 내며’ 아구를 바라봤다. 더욱 고개를 움츠리며 말했다.
“왜 내게 관심을 가지는 거지? 이게 네가 원하던 모습 아니었나?”
아구는 순간 넋을 잃었다. 좋은 마음을 가지고 한 말이었고, 전에 자신을 모욕한 일도 따져 묻지 않았는데, 이 더러운 뱀은 왜 아직도 자신을 모욕하는 거지?
“맹장, 전에 나는 널 매달아 놓고 패 죽이고 싶었다. 그건 인정한다. 하지만 지금 네 모습을 보니 나도 화가 나는구나.”
아구는 원래 생각나는 대로 뱉는 아이였다. 속이는 게 없었다. 그는 입을 삐죽이며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
“왜 널 이렇게 만든 사람이 내가 아닌 거냐? 내가 널 때려죽이기 전에 이 꼴이 되어 있으면 어쩌라는 거야!”
아구가 맹장에게 더욱 가까이 붙었다. 그의 큼지막한 금색의 눈을 똑똑히 바라보며 이를 악물었다.
“그러니 어서 말해. 누가 널 이 지경으로 만든 거야? 내가 지금 가서 그 자식을 죽여 버릴 거야!”
맹장은 아구의 이런 진지한 표정은 처음 봤다. 그의 눈에 서려 있는 분노를 보니 아무래도 정말 복수해 주려는 것 같았다. 맹장은 갑자기 웃음이 터졌다. 왠지 이렇게 다친 보람이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아구 이 녀석 아직도 단순해서 속이기 쉬웠다.
그는 두 사람이 처음 만났던 때가 아직도 생생했다. 능광과 청룡족에 놀러 온 아구가 그만 자신의 출입금지 구역에 잘못 들어왔다. 그는 감옥 창살을 통해 붉은 어린 주작이 초조하게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걸 지켜봤다. 뭔가를 찾고 있었다. 찬란한 햇볕이 아구의 몸에 비추자 온몸이 금빛으로 빛났다. 아름다운 바깥세상 그 자체처럼.
지하 감옥에 갇혀 지내던 잡종 청룡인 자신이 제일 부러워했던 존재였다.
“어이! 어린 주작! 뭘 찾는 거야?”
그는 자신의 쉰 목소리가 지하 감옥 천장에 울려 퍼지는 걸 들었다.
아구가 고개를 숙이자 아래 쇠창살로 가로막힌 사이로 왜소한 모습의 청색 맹장이 보였다. 그는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할아버지께서 할머니께 드리려는 비녀를 찾고 있어! 못 찾으면 아마 난 죽을 거야!”
맹장이 눈을 돌리다가 아구가 보지 사각에서 자신의 용 비늘을 하나 뽑았다. 그리고 장안법으로 비녀 모양으로 만들어 들어보였다.
“혹시 이거야?”
그리곤 아구가 자세히 보지 못하게 급히 숨겼다.
“와! 거기에 흘렸었구나!”
아구는 비녀처럼 보이는 걸 보고는 아무 의심 없이 간청했다.
“나에게 돌려줄래?”
“그럼 내 말동무해 줘! 그럼 나도 이거 돌려줄게!”
“음, 알겠어! 한 말 꼭 지켜!”
아구는 요구 조건이 나쁘지 않자 바로 승낙했다. 날개를 접고 풀숲에 동그랗게 앉았다.
“무슨 얘기하고 싶은 건데?”
맹장은 가슴이 뜨거워졌다. 아구가 자신의 말을 들어줄 줄 몰랐다. 감격으로 흥분했는지 목이 졸린 오리 같은 듣기 싫은 목소리가 나왔다.
“이름이 뭐야?”
“아구.”
“몇 살이야?”
“올해 딱 여든 됐어.”
“너희 주작족은 시끌벅적해?”
“엄청 시끌벅적하지! 진짜 재밌어!”
그날은 맹장의 기억 속 제일 즐거웠던 날이었다. 그때의 흥분이 오랫동안 이어졌지만 그날 이후로 백 년 뒤 신수 집회에서 보기 전까지 아구를 마주친 적은 없었다. 아구를 다시 만났을 때 그는 자신을 기억하지 못했다.
“아구, 난 계속 이런 모습으로 있지 않을 거야. 반드시 널 뛰어넘어 너의 도전을 기다리마.”
맹장이 일어나 날아올랐다. 눈에 서려 있던 두려움과 경계심은 사라진 지 오래였고 백 년 전처럼 오만방자하게 굴었다.
그는 아구의 동정 따위 필요 없었다. 그저 아구와 같은 위치에 서고 싶었다. 그는 아구가 영원히 자신을 기억하게 하고 싶었다.
“그래! 포부가 대단하군! 내가 상대해 주지. 그때 네게 받았던 치욕을 다 되갚아 주마!”
아구는 왠지 모르게 맹장이 충분히 완쾌하여 자신과 실력으로 겨룰 것 같았다. 그냥 직감이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직감.
맹장에게 소리치는데, 가슴이 뜨거워졌다. 온몸의 전의가 맹장 때문에 들끓기 시작했다.
이게 할아버지께서 늘 말씀하시던 ‘숙적’이라는 건가
* * *
“모풍, 그 말은 도겁기 이상의 사람은 신묘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인가?”
유가가 마차에 앉아 두 다리를 허공에서 까딱거렸다. 옆에는 고금성이, 뒤에는 쌍두사자와 검은 표범을 타고 있는 마족 고수들이 있었다.
앞쪽엔 모풍을 선두로 선계 인사들이 그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기풍 있는 모습으로 서 있었다. 위세로 마족의 위풍을 압도하려는 것 같았다.
“그래.”
모풍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은 채 계속 말했다.
“유가. 수련 경지가 도겁기인 자가 손을 쓴다면 어떤 결과가 초래되는지 당신도 잘 알고 있겠지. 조심하지 않으면 신묘도가 다시 강 아래로 가라앉을 것이고, 그 손실은 선마계가 감당 못 할 수준이네.”
유가는 속으로 우스웠다. 저 노인네의 말은 그럴듯했으나, 저들은 정말 자신이 바보인 줄 아는 건가. 이 노인네가 수련 경지를 억누르고 신묘도에 들어가 마족을 다 죽이고 있을 때, 자신은 바보처럼 마궁에서 한가롭게 쩝쩝대고 있다가 마존의 고수들이 다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라는 건가?
그는 신묘도에 송기연이 아닌 마족을 위해서도 들어가야 했다. 게다가 자신의 심복인 왕다국과 방택도 들어가야 했는데, 왕다국은 호전적인 성격이라 무슨 말썽을 일으킬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사람이 세로로 들어가서 가로로 나오는 걸 원치 않았다.
“모풍, 당신의 의견은 어느 정도 이치에 맞다.”
유가가 입꼬리를 올리며 모풍을 향해 미소 지었다.
“그럼 당신의 말대로 도겁기인 사람은 신묘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만약 위반하는 자는 죽이는 것 어떠한가?”
담백한 말투로 ‘죽음’이라는 글자를 언급하자 피비린내가 물씬 풍겼다.
모풍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원래 경창파의 장로들과 신묘에 몰래 들어가 조용히 마족의 고수들을 죽여 마족의 원기를 꺾으려 했다. 정말 유가를 바보 취급한 게 아니기 때문에 유가도 그들과 같은 목적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저자가 이렇게 단호하게 말하고 장난이 아닌 것 같아 오히려 혼란스러워졌다,
모풍은 진담 반, 농담 반으로 얘기했다.
“유가, 이렇게 단호하게 말할 줄은 몰랐군.”
유가는 농담에 대꾸 하지 않고 심도 있게 물었다.
“모풍, 당신이 말한 규율 중 도겁기엔 당신 뒤에 저 장로들도 포함되는 거겠지?”
그가 웃으며 계속 말했다.
“만약 저들이 규율을 위반하여 신묘에 들어간다면, 본존은 저자들의 목숨을 보장할 수가 없네.”
유가의 말을 이해한 모풍은 안색이 어두워졌고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이건 유가가 자신의 목적을 예상하고 도겁기 고수들과 신묘에 들어가려던 계획을 단념하라는 말이다.
진정한 균형은 진입하는 사람의 수련 경지를 제한해서는 이뤄질 수 없다. 그와 유가가 동시에 신묘에 들어가서 피차 균형을 이뤄야만 서로 다툼없이 끝낼 수 있었다.
간단히 말해서, 두 사람이 들어간다고 해도 누구도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다. 누군가 손을 쓴다면 그건 양측 다 손해를 볼 것이다. 이 대가를 모풍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모풍이 조금도 물러설 기미가 없는 듯 유가 곁의 고금성과 도겁기 마족 고수들을 보며 말했다.
“선계의 도겁기 고수들이 신묘에 들어가지 않게 막겠네. 하나 명심하게. 만약 마족이 규율을 위반한다면 똑같은 결말을 보게 될 걸세!”
짝짝짝!
유가가 눈을 가늘게 뜰고 눈꼬리를 둥글게 접으며 백옥 같은 손으로 가볍게 박수쳤다.
“좋다. 그럼 당신의 규율대로 하지. 신묘가 열리는 날 당신과 나는 각자 선계와 마계에서 고수들을 검사하고, 도겁기 이상의 수진자는 신묘 밖으로 격리시키도록 하지. 당신과 본존의 신식 검사를 빠져나가는 자는 없을 테니?”
“그 말에 동의하네, 당신과 내가 검사를 한다면 그럴 일은 없을 거야. 다만 당신이 우리 선계에 아무런 수작도 부리지 않길 바라네.”
유가는 기분이 상했다. 본인이 하지도 않은 잘못을 다 뒤집어쓴 기분이다. 그가 코웃음을 쳤다.
“노인네, 그런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게. 본존도 당신과 같은 생각이니.”
선계의 제자들이 손을 쓰진 않았지만 고상한 모풍을 유가 같은 악마와 비교한다는 것에 속닥거리기 시작했다.
고금성이 고개를 돌리고 뒤쪽에 있는 마족 고수들에게 눈짓했다.
스릉-!
금속 마찰음이 차례로 울렸다. 유가 뒤에 행려각 고수들이 모두 허리춤에 패검을 꺼내 든 것이다. 차가운 눈빛이 주위의 살기와 융합하여 온 하늘을 뒤덮은 기세가 선계를 압박했다. 선계 제자들이 입을 다물자 양측의 기세도 다시 고요해졌다.
유가는 팔을 들어 그들에게 조급하게 굴지 말라고 표현했다. 그저 천하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미 많이 드러난 흙빛의 섬을 바라보고 말했다.
“보름 뒤, 신묘가 열리고 진입하면 생사는 논하지 않는다. 어떠한가?”
모풍이 알겠다고 대답하자 유가도 별말 없이 손을 뻗어 쌍두사자의 튼튼한 등을 쓰다듬었다.
“그만 가자.”
유가가 제멋대로 천하를 떠났다. 마족의 고수들도 하나둘 흩어졌고 금세 천하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보름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는데, 유가의 기분이 내내 좋지 않았다. 그는 매일 밤 꿈을 꾸었으나, 꿈의 내용들이 모두 산산조각이 나서 희미한 단편만 남아있었다. 일어나면 항상 같은 느낌을 주었다. 슬프고 처량하다가 마지막엔 절망하는.
꿈에서 깨고 나면 심장이 계속 두근거렸다. 아무래도 누군가 일부러 갈기갈기 찢어 놓은 것 같았다.
“존주 괜찮으십니까?”
고금성의 목소리리에 유가의 정신이 돌아왔다. 공기 중 익숙한 훈향을 맡으며 기분을 가라앉혔다. 고금성을 보고 미소 지었다.
“본존은 괜찮다.”
보름 연속 잠을 제대로 못 잤더니 유가는 좀 초췌했다. 묶지 않은 머리를 침대 위에 마구 풀어 헤쳐 놓았고 흰 중의를 입고 있어 피부는 더욱 하얘 보였다. 이렇게 억지로 웃으니 허약해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고금성은 멍하니 ‘전생’을 떠올렸다. 그때도 언제부터인가 이런 기색을 보일 때마다 자신이 질문해도 항상 ‘괜찮다’고 대답했다.
유가는 수많은 비밀을 숨기고 있는 것 같으나, 본인이 말하지 않으면 누구든 영원히 알 도리가 없었다.
“존주, 신묘도에 가셔야 합니다.”
고금성이 공손하게 이곳에 온 목적을 말했다.
유가의 계산은 정확했다. 신묘도는 보름 뒤 정확하게 떠올랐지만 형태가 불안정했다. 수십 리에 다다르는 섬이 수면 위로 떠오르자 금세 앞이 보이지 않는 짙은 안개가 피어올랐다. 그리고 오늘은 선마계가 모두 신묘도에 들어가는 날이다.
“알겠다.”
담담하게 대답한 유가는 고금성에게 물러가라고 명한 뒤 선홍색의 장포를 몸에 걸쳤다. 옥비녀로 머리도 틀어 올렸다. 널찍한 옷소매가 아래로 늘어지자 새하얀 팔이 붉은 옷 덕분에 더욱 도드라졌다.
유가가 곁눈질로 구리거울을 힐끗 바라보다가 손동작을 멈추었다.
이 몸에 가장 잘 어울리는 색은 붉은색이다. 마치 본래 ‘유가’의 성격처럼 강렬했다. 이런 강렬함 속에 옥석구분(玉石俱焚-선인과 악인이 함께 재앙을 당함)에 대한 집념이 있었다.
유가는 거울 속에서 수옥에서 매달려 고문을 당했던 잔상이 보여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닫았다. 손에 흑석각인이 또다시 뜨거워졌다. 유가가 구리거울을 쓰다듬자 ‘유가’가 송기연을 향해 웃는 모습이 보였다. 웃다가 눈시울이 붉어졌으나 머리카락으로 그 모습을 가려 송기연은 보지 못했다.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하는데 거울 속 장면이 금세 사라졌다. 유가가 땅에 주저앉아 오른손으로 가슴을 움켜쥐었다. 한참을 심호흡하자 좀 진정이 됐다.
무주지에 있을 때도 이렇게 괴로웠다. 원래 유가의 감정이 자신에게 조금씩 전해지며 마음속에 스며들었다. 왜 이렇게까지 감정이 전이될까. 설마 원래 유가가 아직 자신의 몸속에 살아있나? 이 흑석각인은 원래 유가의 잔존하는 영혼인가? 만약 그자가 깨어나면 자신은 어떻게 되는 거지?
‘유가’가 자신을 죽일까?
‘내’가 이곳으로 넘어와 이 몸을 차지했다면 지금 이 몸은 자신의 것이다. 자신은 이 몸을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도록 보고만 있진 않을 생각이었다.
* * *
유가가 천하(天河)로 왔을 때 이미 모풍은 선계의 고수들과 함께 그곳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흰옷에 청색 장포를 걸친 경창파 제자들이 있었다. 상의를 벗고 거대한 염주를 목에 건 스님들과 항상 아름다운 장금문의 고금, 그 외 각 가문의 청년 고수들도 함께 있었다.
유가의 뒤쪽엔 왕다국, 방택, 요언, 연달을 선두로 한 마족의 고수들이 있었다. 모두 신묘에 들어갈 자들이었다.
짙은 안개가 낀 신묘도 상공위에 서 있는건 은근히 흥분을 고조시켰다.
모풍이 활짝 웃으며 유가에게 말했다.
“유가, 다 모였으니 그만 시작하지.”
모풍 뒤 송기연을 바라보던 유가는 그의 차가운 눈빛에 마음이 아팠지만 내색하지 않고 시선을 돌렸다. 모풍에게 대답을 하려다가 그만 입이 얼었다. 송기연 뒤에 서 있는 소녀를 보고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소녀가 유가를 보자 두 눈이 동그래졌다. 다시 은각으로 위치를 감지하다가 너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여인의 이상 행동을 포착한 송기연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야야가 흰 손가락으로 정확히 유가를 가리키며 입을 떼려는데 유가의 간절한 표정이 말했다.
‘안 돼!’
야야는 저도 모르게 애원하는 유가를 보고 급히 말을 돌렸다.
“저…… 사람 너무 잘생겼잖아!”
신묘도 상공에 있는 모든 사람이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야야 뒤에 서 있던 낙지는 자신도 눈을 감아버렸다.
공주가 어릴 때부터 미남을 좋아했다는 걸 알고 있다. 예전에 그녀가 가슴에 품고 있는 그분과 마음대로 혼인을 결정한 것도 그분의 외모 때문이라고 했다. 근데 지금 공주께서 말한 사람은 유가다. 음침하고 살인을 일삼는 그 유가.
앞으로 몇 걸음 걸어간 낙지는 야야의 앞을 막아섰다. 온몸의 진기를 움직여 유가가 야야를 공격할 것에 대비했다.
야야는 이 말을 끝으로 입을 닫았다. 그녀는 자신의 앞을 막은 낙지를 그냥 놔두었다. 하지만 저를 태울 듯 추궁하는 송기연의 눈빛에 그만 심장이 철렁했다. 다행히 송기연이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설마설마 마음속 그분이 마계의 존주일 줄이야! 하필이면 악명 높은 바람둥이라니! 이건 정말 너무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악명높은 그 마존이 방금 왜 자신에게 그렇게 애원한 거지?
야야가 유가를 봤다가 송기연을 힐끗 바라보았다. 두 사람이 관계에 대해선 도저히 정의가 내려지지 않았다.
설마, 유가가 이 아이를 위해 그렇게까지 한 거라고?
야야는 지금 다시 유가를 만났지만 칠 년 전처럼 막 좋지는 않았다. 그녀는 잘생긴 사람을 좋아했으나, 나이를 먹으니 유가를 좋아한다기 보다 집착에 가까웠다.
어렴풋이 그렇다고 생각했으나 지금 유가를 본 후 더욱 확실해졌다. 어린 시절 생긴 감정은 사라졌다는 걸. 아마 그때 자신도 송기연의 눈을 치료해 주고 싶었던 것 같다. 좋은 마음으로 이 두 사람을 돕고 싶었던 것뿐이었나?
“하하하, 이렇게 대놓고 본존의 외모를 칭찬해준 자는 처음이다. 저 녀석 참 귀엽구나.”
유가는 겉으로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지만, 심장은 정말 터져 버릴 듯 쿵쾅거렸다. 아니 정말 사실 간은 살짝 떨어진 것 같다.
이마에 이 쓸데없는 반짝이는 양쪽이 서로 기척을 느껴야 하는 거 아냐? 왜 나는 아무것도 못느끼고 야야만 느낀 건데! 망했어! 야야가 숨겨줘서 다행이지 아니었다면 완전 엉망진창 제삿날이 될 뻔했다!
유가도 야야를 보다 슬쩍 송기연 훔쳐보고 굳어진 얼굴로 시선을 급히 숨겼다.
녀석의 눈빛이 이상해 보이는데, 설마 뭘 눈치챈 건 아니겠지.
“유가, 허튼수작 부릴 생각 마라. 이분은 설요족의 유일한 공주시다. 오늘 나를 따라 선계에 오셨으니 네가 함부로 해선 안 된다.”
모풍은 유가에게 단단히 경고했다. 유가는 그저 여인이 귀엽다고 칭찬을 했을 뿐인데, 모풍이 싸울 듯이 달려들었다. 야야가 이번에 선계에서 지내니 적어도 신묘에 들어가기 전까지 모풍은 야야를 안전하게 보살펴야 했다.
“모풍, 그렇게 말할 필요 없네, 본존은 저 여인에게 어떤 흥미도 없으니.”
유가가 발아래 안개가 자욱한 신묘도를 보며 계속 말했다.
“쓸데없는 말 그만하고, 저 신묘도에 들어가긴 할 건가?”
다행히 야야의 말은 잠깐의 웃음거리였다. 신묘도에 들어가려 모인 사람들은 정신을 차렸다.
“당연히 들어가야지.”
모풍도 손으로 신묘도의 서쪽을 가리켰다.
“우리 선계는 서쪽에서 진입할 테니 자네가 검사하게.”
손을 거두고 다시 말했다.
“마계는 내가 검사할 테니, 동쪽에서 진입하는 건 어떻겠나?”
“그렇게 하지.”
유가가 고개를 끄덕이며 진심을 내보였다.
“괜히 번거로운 일을 만들지 않길 바라네.”
“하하하. 나도 같은 생각이네. 어찌 한 입으로 두말을 하겠는가?”
유가는 모풍의 얼굴에 코웃음을 치고 고개를 끄덕였다. 뒤로 몇 걸음 물러나 왕다국에게 가서 속삭였다.
“조심해야 한다. 좀 이따 저 노인네가 분명히 신묘에 몰래 들어갈 게 뻔하다. 그때 혹시나 번거로운 일이 생겨도 강경하게 대응하지 말라.”
왕다국이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보름 전 천하에서 모풍과 유가가 대치하는 걸 보고 그는 속으로 이런 상황이 일어날 걸 미리 예상했었다. 그는 호전적이었지만 자신의 목숨을 걸고 무모하게 달려들진 않았다. 모풍이 만약 마계를 공격한다면 자신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건 도망치는 것뿐이다. 강경하게 대응하다간 막청을 못 볼 텐데, 절대 그럴 순 없다.
유가와 모풍은 각자 동서 양쪽으로 가 질서정연하게 서로의 제자들을 검사했다. 유가가 신식을 내보내 선계 수진자 모두를 덮는 동시에 눈으로는 이자들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확실히 합체기 이상의 수련자는 없었다. 유가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차례로 들여보내며 송기연은 쳐다도 보지 않았다.
그가 송기연을 보지 않아도 송기연이 그를 보는 걸 막을 수 없었다.
송기연은 야야를 난처하게 할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제일 마지막으로 가서 줄을 서며 사람들이 신묘도에 진입하는 걸 지켜봤다. 경창파는 그와 함께 들어가고 싶어 했지만 그가 단호하게 거절했다. 마지막에 송기연 옆에 남은 자는 야야와 낙지, 정상, 초운 그리고 흑색 두포를 쓴 소년 한 명이었다.
초운은 며칠 전 경창파에서 천하로 왔고 그 전엔 세상과 단절하고 정진했었다. 열다섯의 나이로 화신기 수련 경지에 진입하여 경창파 제자 중 제일 뛰어났기 때문에, 그가 오고 싶다고 했을 때 백려는 반대하지 않았다.
또다시 송기연과 유가가 마주 보고 서 있었다.
초운은 불안했다. 한 사람은 자신의 좋은 벗이고, 다른 한 사람은 자신을 구해주고 잡아준 은인이었다. 그는 지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정상은 주위의 사람이 거의 다 들어갔는데, 자신의 곁에 있는 소년이 움직이지 않고 검을 꼭 쥔 채 가만히 있자 이상하여 그자의 옆으로 갔다.
“누구시오? 신묘가 열렸는데 왜 안 들어가는 거요?”
그 소년은 두포를 써 얼굴을 완전히 가리고 있어 잘 보이진 않았지만, 수련 경지가 낮진 않은 것 같았다. ‘소년’의 어깨가 살짝 떨리는 게 뭔가 참는 듯하더니, 곧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정 사제, 참 눈썰미가 없군? 나를 못 알아보다니?”
소년이 두포를 벗고 정상의 머리를 두드리며 송기연을 향해 웃었다.
“송 사제, 수천 리를 아버지를 속이고 몰래 널 보러 왔다. 이렇게 만났는데 사형에게 인사도 하지 않는 건가?”
소년은 흰 피부에 아름다운 외모였다. 긴 머리는 남자처럼 틀어 올리고 미간엔 부드럽지만 영기가 가득했다. 경창파 장문인 백려의 여식 백유리였다.
송기연이 살짝 멈칫했다. 한참 뒤에 백유리라는 사형이 있었다는 게 생각났다. 잘 아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이 여인이 백려의 여식이라는 게 떠올랐다. 송기연은 후에 자신에게 도움이 될 것 같아 예의를 차리며 웃었다.
“백 사형, 오랜만입니다.”
그의 형식적인 인사에 백유리는 좀 불쾌해졌다. 그녀는 일찍이 송기연을 자신의 배필로 점찍어 두었고, 송기연이 천하에서 두각을 드러냈다는 얘기를 듣고 만족스러웠다. 그래서 백려에게 처벌을 받을 각오를 하고 그를 만나러 왔다. 하지만 이런 인사치레뿐이라니. 이건 그녀가 상상한 그림과 많이 달랐다.
그녀는 시선을 송기연 뒤의 야야에게 옮겼다. 미간을 찌푸리며 무슨 말을 하려다가 정상에게 가로막혔다. 정상이 활짝 웃는 얼굴로 두 사람 사이에 서서 혀를 찼다.
“사형의 옷차림이 늠름하고 시원스럽네요. 평소보다 더 보기 좋아 제가 못 알아봤네요.”
백유리가 웃음을 터뜨리며 정상의 팔을 비틀었다.
“그 말은 평소에 내 모습이 별로였단 말이냐?”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사형께선 항상 아름다우셨습니다.“
정상은 갈등 해결에 능했다. 그는 송기연의 집중력이 곁에 있는 사람에게 있지 않다는 걸 알아차렸다. 만약 백유리가 이렇게 소란을 피운다면 일이 번거로워질 수 있다. 정상은 ‘자신’을 희생하여 송기연에게 생각을 더 할 시간을 마련해 주었다.
선계의 마지막 수진자가 신묘로 들어가고, 유가는 조금 골치 아프다는 듯 송기연 쪽을 바라봤다. 솔직히 지금 송기연 곁에 서 있는 저자들을 보니 소름이 끼쳤다. 자신의 신분을 알고 있는 야야와 초운 말고도 정상이 요주의 인물이었다. 자신이 만약 제대로 속이지 못한다면 바로 탄로 날 게 뻔했다.
송기연이 주변 사람들을 보고 말했다.
“먼저 신묘에 들어가서 서쪽에서 일 리(里) 떨어진 지점에서 기다려주세요. 곧 따라가겠습니다.”
정상은 고개를 끄덕였고, 초운도 상관없다고 표현했다. 다만 송기연과 함께 있을 기회가 있을 줄 알았던 백유리만 입을 삐죽이는데, 별다른 말을 하진 않았다. 야야는 미간을 찌푸리며 송기연을 보다가 한숨을 내쉬곤 낙지를 끌고 신묘로 들어갔다.
그녀가 떠나자 다른 사람들도 하나둘 출발했고 곧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이제 천하 위엔 송기연과 유가 두 사람만 남았다.
유가는 난처했지만 겉으로는 오만방자한 척하며 비웃었다.
”어린 녀석이 대담하군. 본존과 독대를 하다니. 본존이 널 죽여 물고기 밥으로 던져버릴 게 두렵진 않나?”
송기연이 유가의 앞으로 날아갔다. 두 사람은 고작 다섯 걸음 떨어진 자리에 서 있었다. 금방이라도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었다. 유가 정도의 실력이면 송기연은 알아채지도 못한 채 죽일 수도 있었다.
송기연이 검을 꽉 쥔 채 유가의 두 눈을 똑똑히 보며 평온하게 말했다.
“얼마든지 해 보아라.”
오히려 유가는 사실 어쩔 줄 몰라 소매 사이로 숨긴 손을 쥐었다 피기만 반복했다. 송기연이 이런 식으로 자신을 시험해볼 줄 몰랐다. 송기연을 대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이런 상황이 닥치니 여전히 곤란했다.
“왜요? 못 하겠습니까?”
송기연이 살짝 발을 떼고 유가에게 다가갔다. 따뜻한 숨결이 유가의 귓가에 스쳤다.
“사존?”
반사적으로 유가가 손을 내뻗어 송기연의 목을 졸랐다. 송기연은 숨을 쉴 수 없었다. 대승기의 위압이 온몸을 속박했다. 송기연이 차가운 흑금장갑을 따라 시선을 옮기자, 보는 것만으로도 얼어붙을 극도로 차가운 시선이 보였다.
사존께서 자신을 바라볼 때 그 따스함과는 조금도 겹치지 않았다.
붉은 옷에 극도로 차가운 표정, 딱 칠 년 전 송가를 멸했던 악마의 모습이다.
유가가 손에 힘을 주자 송기연은 더욱 숨이 막혀왔다. 유가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본존을 이렇게 희롱하는 자는 네가 처음이구나. 본존이 널 똑똑히 기억하마.”
유가는 송기연의 목을 틀어잡은 손에 힘을 빼고, 약하게 힘을 뺀 주먹으로 그를 쳐서 신묘도로 보내 버렸다.
송기연을 신묘도로 밀어버린 후 유가는 한참이나 넋을 잃었다가 정신을 차렸다. 연한 눈동자에 점점 정신이 돌아왔다.
나, 나 방금 뭐한 거지?
방금 송기연의 입에서 ‘사존’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발밑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송기연이 어떻게 자신의 신분을 알았단 말인가! 자신의 신분이 탄로 날까 겁이 났다. 송기연이 자신이 엽망지라는 걸 알게 할 순 없었다.
생각하기도 전에 유가는 송기연을 그렇게 밀어버렸다.
모든 행동은 머리에서 나온 반응이 아니었다. 방금 자신의 행동은 정말 원래 유가의 본능과 판박이였다.
흑금장갑을 천천히 사라지게 했다. 유가는 손바닥에 짙은 회색으로 변한 각인을 보았다. 불안한 예감이 무서웠다.
요즘 그는 계속 악몽을 꿨다. 꿈속에서 현대의 기억은 희미해졌고, 흑석각인은 지금처럼 이상하게 변했다. 게다가 좀 전에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송기연에게 그런 반응이 나왔으니, 이 둘을 연결 짓지 않을 순 없었다.
‘유가’가 정말 아직 살아있는 건가?
유가는 마음을 다잡고 그 회색 각인을 숨기려 손을 꽉 쥐었다.
만약 그자가 살아있다면 묻고 싶은 말이 많다.
대체 전에 송기연과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왜 《천진결》 잔본이 마궁 침실 천장에 나타난 건지, 왜 무주지 비경 석패 위에 그런 이해하기 힘든 글을 적어 놓은 건지.
왜, 왜 그리고 방금 송기연을 그렇게 약하게 친 건지.
방금 송기연과 대치했을 때 의식은 있어도 몸이 말을 듣질 않았다. 그는 자신의 주먹이 너무 셀까봐 걱정했는데 다행히 그렇게 힘을 쓰지 않았다. 고작 추진력 정도만 사용해서 송기연에겐 간지러웠을 것이다.
“제길!”
생각 하면 할수록 혼란스러워 유가는 급히 질문을 멈췄다. 안개가 더 짙어진 신묘도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반지 속에서 전에 ‘묵묵씨’로 분장할 때 썼던 면구를 꺼내 쓰고는 깊은 한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섬의 북쪽으로 돌아, 수수한 회색 옷으로 갈아입은 뒤 섬 위에 착지했다.
유가는 방금 자신의 주먹이 너무 약했던 것 때문에 송기연이 그를 엽망지라고 여기는 걸 단념하게 한 건지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아까 그 녀석과 대치했을 때 녀석이 계속 검을 꽉 쥐고 있던 걸로 봐선, 아직 자신에 대해 경계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까는 자신을 자극하여 시험해 보려고 한 것 같았다.
젠장! 그럼 아까 자신이 그렇게 크게 반응해서 오히려 의심만 산 거 아니야?
아니야, 좋은 쪽으로 생각하자!
유가는 신묘도 주변을 거닐며 현실을 도피하려 자신을 세뇌했다.
* * *
유가의 솜털 같은 주먹에 맞은 송기연은 안개 속에 잘 착지했다. 살짝 넋이 나가 자신의 목을 어루만졌다. 질식할 것만 같은 느낌이 아직 남아 있었다.
눈빛이 어두웠다. 송기연은 좀 전에 유가가 차갑게 비웃던 태도가 꼭 진심 같았다. 그자의 눈에 자신은 아마 가엾은 개미 정도로 보였을 것이다. 어금니를 드러내고 발톱을 휘둘러도 그자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할 게 뻔했다.
전에 경창파에서도 유가가 이런 표정으로 사존의 검을 부러뜨렸다.
‘사존’이라 부른 것이 유가한텐 어떤 의미였을지 모르겠다.
가소로웠을까. 아직 그를 상대할 실력도 없으면서 자신을 사존이라 떠보는 것이?
송기연은 목에 걸린 따뜻한 돌을 잡고 마음을 진정시켰다.
유가가 정말 사존이 맞는지는 자신이 좀 더 강해진 후에 그를 잡고 물으면 알 수 있었다. 만약 그가 그저 유가일 뿐이라면 죽이면 된다. 그럼 사존도 자신의 곁으로 돌아오실 테니까.
하지만 만약 그가 정말 사존이라면…….
송기연의 눈시울이 다시 붉어졌다. 호흡도 불안정해졌다. 눈을 손으로 가리고 나서야 좀 진정이 되었다.
하하, 말이 안 되잖아?
유가와 대치하던 상황에선 지금 벗어났으나, 유가가 사존이란 추측에선 아직 벗어나지 못했다. 나중에 자신의 부모를 죽인 원수 유가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늦가을의 신묘도는 또다시 자욱한 안개에 둘러싸였다. 햇볕이 내리쬐질 않아 더욱 음산해졌고, 일리 밖 사물은 식별할 수도 없었다.
갑자기 송기연 앞에 안개가 살짝 걷히더니 그 안에서 누군가 걸어 나왔다. 정상과 야야 그리고 초운이었다. 정상은 환하게 웃으며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기연, 이미 섬에 들어왔으면서 왜 안 오신 겁니까?”
정상을 본 송기연은 얼굴을 찌푸렸다. 섬 밖에서 자신이 그들을 찾아가겠다고 얘기를 했고 정상의 성격상 쉽게 움직이는 자가 아닌데, 그는 야야 일행을 데리고 자신을 찾아왔다.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가 다가오지 않아도 조급해하지 않고 정상은 계속 인사말을 건넸다.
“안 가시면 보물은 다 뺏길 겁니다.”
송기연이 미간을 더욱 찌푸리며 시선을 아래로 옮겨 사람들의 발아래를 바라보자 눈동자가 살짝 수축했다. 오른손으로 급하게 검을 뽑아 그들에게 휘둘렀다. 그들의 몸에 검을 휘둘렀으나 닿는 느낌이 전혀 안 들었다. 베지 못한다는 건 그들을 공격할 수 없다는 것이니 결코 좋은 소식도 아니었다.
그가 급히 뒤로 물러나 다시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저자들은 그림자도 없고 검을 뚫고 지나갈 수도 있었다. 분명히 살아있는 자가 아니다. 어쩌면 영체(靈體)거나 수진자의 잔존하는 영혼일 수 있었다.
이 천하(天河)는 전에 선마대전의 싸움터였고, 신묘도는 자연스레 추락한 자들의 묘지가 터다. 이런 상황도 가능했다.
“저 자식, 역시 젊으니 눈썰미도 좋군.”
정상 등 일행으로 변신했던 잔혼이 원래 모습을 드러냈다. 여자 둘에 남자 셋. 대충 30대 정도로 보였다. 송기연에 간파당했지만 공격해오지 않고 계속 말했다.
“우린 이곳에 갇힌 지 천 년이 지났다. 오늘 사제들의 몸을 빼앗아 다시 살아나고자 한다. 사형에게 몸을 내주는 건 영광스러운 일이다. 순순히 내어준다면 고통도 없을 것이다.”
송기연이 복잡한 표정으로 장검을 거두었다. 꼭 이자의 제안을 받아들일지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머릿속에 경창파 서재의 고서에서 본 봉혼진법(封魂陣法)이 떠올랐다.
‘죽은 자’에게 몸을 내어주는 게 영광스럽다고? 지금 세 살짜리 어린 애를 농락하는 건가?
“왜 대답이 없어?”
사실 그들도 속으로는 조마조마했다. 송기연이 자신들을 공격할 순 없지만 사실 그들도 송기연을 공격할 방법이 없다. 그들은 이미 천년이 넘는 시간 동안 물속에 갇혀 있었던 탓에 몸이 많이 약해져 있었고, 강바닥에 창결검 검기가 옥죄어와 날이 갈수록 고통스러웠다.
원래 정상 등 일행의 모습으로 나타나 저 녀석의 경계심이 무너지면 그 틈에 그의 몸에 파고들어 빼앗으려 했었다. 하지만 쉽게 발각되어 모든 계획이 수포가 되었다.
“아무래도 상대를 잘못 찾아오신 것 같은데? 제가 그리 쉽게 타협할 사람으로 보이십니까?”
송기연이 왼손에 진기를 모아 공중에 진형도를 그렸다. 옅은 금색의 진형도가 안개 속에서 적지 않은 빛을 발산하니 맞은 편 사람들의 안색이 변했다.
“안 돼! 어서 도망가! 저 녀석 봉혼진(封魂陣)을 할 줄 알아!”
견문이 넓은 우두머리가 한눈에 송기연의 진법을 알아봤다. 도망치라고 말을 하며 자신이 먼저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수천 년을 이곳에서 갇혀 지냈던 그자는 이런 어린아이의 손에 파괴되고 싶지 않았다. 저렇게 어린아이가 이 정도니 앞으로 앞길이 창창했다. 하지만 오늘 그가 신묘도에 온 건 이들에게 화가 되었다. 그들은 송기연의 상대가 되지 못했고, 저 ‘사람’의 손에서 도망칠 수 있다는 말도 아니었다.
남은 남자 둘 여자 둘은 그자가 도망가는 걸 보고 더는 머물지 못하고, 뿔뿔이 안개 속으로 흩어졌다.
송기연은 쫓아가진 않고, 진을 치던 왼손을 멈추었다. 그는 아직 신묘도에 대해 잘 알지 못해 최대한 아낄 수 있으면 실력을 아끼려 했다.
장검을 검자루에 넣은 송기연은 다시 미간을 찌푸리며 급히 앞쪽으로 달려갔다. 저들이 정상 일행의 모습을 안다는 건 이미 그들을 만났다는 얘기다. 그는 서둘러 일행이 있는 곳으로 가서 그들의 상황을 살펴보기로 했다.
빠른 속도로 금세 3리(里)를 이동했고, 자욱한 안개 속에서 정상 일행을 찾았다. 하지만 귀여의와 귀우초의 모습을 봤을 때 그의 안색은 더 우울해졌다.
저번에 귀여의에게 경고를 날린 이후로 며칠간 평온하게 지냈다. 그런데 신묘도에서 다시 저 여인을 마주치다니, 확실히 귀찮아졌다.
송기연을 바로 알아본 귀우초는 활짝 웃으며 급히 인사를 건넸다.
“공교롭네요, 송 가주께서도 오셨다니.”
송기연이 예의상 웃어 보였다.
“그러게요. 우연이네요. 제 벗들 곁에 초장로께서 계실 줄이야.”
그가 귀여의를 보며 비웃었다.
“두 분은 정말 바늘과 실이군요. 어디든 항상 같이 다니시다니.”
그는 직접적으로 귀여의와 동행하기 싫다고 표현한 것이다. 주둔지에 있을 때 눈썰미가 좋은 사람은 송기연과 귀여의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걸 알아차렸다. 송기연이 이렇게 대놓고 까지 얘기하니 귀우초가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했다.
“송기연, 사숙과 저는 당신에게 알려줄 게 있어서 온 것뿐이지 당신들과 동행할 생각은 없어요. 근데 지금 이렇게 호의를 악의로 받아들이다니 사리 분별은 할 줄 아셔야죠!”
귀여의는 화가 났다. 귀우초가 귀가를 위해 송기연과 잘 지내라고 했지만 이미 완전히 기분이 상해버렸다. 게다가 송기연이 자신들을 이렇게 괄시할 줄 몰랐다. 소녀는 자존심에 금이 가자 소리를 질렀다.
송기연이 여인의 눈을 보며 냉소했다.
“네, 저는 존엄한 부처인 당신을 담을 그릇이 못 되니, 가신다면 굳이 말리지 않겠습니다.”
“하핫콜록콜록!”
그 대화를 듣고 있던 정상이 웃음을 참지 못했고 급히 뒤에 기침소리를 덧붙였다.
“다, 당신 정말 어처구니가 없네요!”
송기연이 대놓고 내쫓자 귀여의의 흰 얼굴이 완전 새빨개졌다. 귀우초의 팔을 끌며 말했다.
“사숙, 저렇게 거절하는데 괜히 신경 쓰지 말자고요! 괜히 여길 와서 거절이나 당했네요!”
귀우초는 좀 난감했다. 두 사람 사이의 일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그가 귀여의의 손을 잡고 고개를 가로저으며 송기연에게 말했다.
“송 가주, 오해가 있으신 것 같군요.”
사실 귀우초가 이번에 송기연을 찾아온 건 동행을 하려던 의도도 있었으나, 그의 반응을 보니 불가능할 것 같았다. 하지만 송기연의 곁에 온 의도는 변하지 않았고, 계속 말했다.
“저와 아가씨는 당신과 동행할 뜻은 없습니다. 다만 당신께 알려드릴 게 있습니다. 얘기가 끝나면 바로 떠나겠습니다. 당신의 벗을 만났습니다.”
송기연이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
“제 벗이요? 누구 말입니까?”
“무주지에서 보았던 그분이요. 좀 전에 그분을 만났습니다.”
사존의 소식을 전해 들은 송기연이 급히 귀우초에게 다가가 급히 물었다.
“묵묵씨를 만나셨다고요?! 어디서요?!”
“그분께서 말씀을 못 하셔서 우리와 대화를 하지 못했던 거군요.”
귀우초가 뭔가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송 가주 진정하십시오. 저희도 그분과 인사만 했을 뿐, 어디로 가셨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막 정상을 만나 인사를 나누던 중에 가주께서 오셔서 그분이 이 신묘 안에 계신다는 걸 알려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렇습니까…….”
송기연이 좀 안정을 되찾고는 긴 한숨을 내쉬고 물었다.
“그럼 혹시 어떤 옷을 입고 있었는지 알려주실 수 있습니까?”
이 질문을 하면서도 송기연은 스스로가 우스웠다. 만약 유가가 정말 사존이라면 지금 이 신묘에서 또 어떻게 그 붉은 옷을 입고 있을까? 게다가 사존과 유가 두 사람은 기질이 그렇게 다른데 어떻게 같은 사람일 수 있겠는가. 이렇게 함부로 의심하는 건 정말 방해만 될 뿐이었다.
귀우초가 계속 말했다.
“그분께선 회색 옷을 입으셨고 허리춤에 장검을 두르시고 섬 중심부로 들어가셨어요.”
주둔지에 머물던 사람들은 송기연이 누굴 찾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그와 친밀한 사이라면 다 알고 있었고, 귀우초는 대충 그분일 거라고 짐작했다. 그가 그분의 소식을 송기연에게 전해 주려던 것도 신임을 얻으려는 것이다.
그 의도를 아는 송기연은 귀우초를 향해 예를 차렸다.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초장로. 꼭 기억하겠습니다.”
귀우초도 예를 차렸다. 그가 송기연보다 연배가 높았지만, 송기연은 송가의 가주니 예를 차리는 게 당연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송 가주. 그럼 볼일 끝났으니 이만 가 보겠습니다.”
“사숙, 그만 상대하고 가요.”
송기연을 째려보던 귀여의가 귀우초의 팔을 끌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안개 속으로 걸어갔다. 정말 저 재수 없는 자식을 두 번 다신 보고 싶지 않았다.
“초장로, 조심히 가십시오.”
귀우초를 향해 인사를 하고는 돌아서는데, 정상과 야야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묵묵씨가 누구예요?”
정상이 먼저 입을 열고 송기연에게 다가왔다. 그의 어깨를 잡고 웃었다.
“사존을 찾고 계시던 게 아니었습니까? 묵묵씨는 대체 누군데 또 이렇게 초조해하십니까?”
송기연은 그의 손을 밀쳐내지 않고 가늘게 뜬 눈으로 정상을 비웃었다.
“정상, 항상 이러고 있는 거 안 힘드십니까?”
사 년 전엔 정상과 송기연의 키가 비슷했지만, 사 년 후 지금은 송기연이 정상보다 더 컸다. 정상이 높은 그의 어깨를 꿋꿋이 쥐고 있는 모양새가 우스웠다. 야야가 처음으로 무너졌다.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백유리가 노파심에 타일렀다.
“정 사제, 내가 충고 한마디 하자면 그 팔 놓는 게 좋겠네요. 지금 그 동작은 썩 좋아 보이진 않는군요.”
낯짝이 두꺼운 정상도 사람들이 비웃으니 조금 난처해져서 급히 손을 거두었다.
“방금 섬에서 당신들의 모습으로 변신하여 제 몸을 뺏으려고 하던 잔혼을 만났습니다. 혹시 같은 일을 당하지 않으셨습니까?”
송기연은 사존의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지 않아 화제를 돌렸다.
“그 말을 들으니, 확실히 이상한 일을 겪긴 했어요.”
정상은 한 가지 일에 그렇게 얽매이는 사람은 아니었다. 좀 전에 그 난감함은 이미 잊어버린 채 계속 말했다.
“좀 전에 경창파의 제자들이 우리와 동행하려 했습니다. 한데 기억해보니 그자들은 우리보다 훨씬 일찍 이곳에 진입한 자들이었습니다. 시간을 따져보면 이미 훨씬 앞서갔을 텐데 다시 돌아와서 우리를 찾을 리가 없지요. 우리가 경계하니 욕 몇 마디를 하고 가버렸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아마 당신이 만난 그자들인 것 같군요.”
송기연이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그렇게 간단한 일은 아닌 것 같다. 그는 신묘에 온 후로 신식이 탐색할 수 있는 범위가 크게 축소되었고, 저 잔혼들이 신식으로는 감지할 수 없는 존재라는 걸 알아차렸다. 방금 그는 지나친 몇 사람의 발아래 그림자가 없는 것을 보고 그들이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확인했다.
“그 잔혼들이 어둠 속에 숨어서 우리의 대화를 엿듣고 다른 사람들을 현혹시켜 몸을 빼앗는 목적을 이루고 있는 것 같군요.”
정상이 말을 받았다.
“우리가 밝은 곳에 있고, 적들은 숨어 있으니, 우리에게 불리합니다.”
“맞아요.”
송기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잔혼들이 떠나기 전 몇 사람이 남의 불행을 즐기는 듯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봐서 이상하다고 느낀 게 떠올랐다. 갑자기 그가 추측했다.
“아무래도 신묘도에 그들과는 다른 차원으로 강한 존재가 있는 것 같아요.”
“그 말 제가 하려고 했는데, 뺏겼네요.”
정상이 하는 수 없이 웃었다.
“좀 전에 그자들은 우리가 거절해서 떠났지만, 우리의 수련 경지로 그들을 상대하지 못한다는 걸 알 수 있었어요. 게다가 여긴 섬의 가장자리일 뿐, 더 깊이 내부로 들어가면 어떤 일을 겪을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이곳은 선마계 천 년 전의 대묘지니깐요. 도겁기에서 대승기까지의 잔혼들이 살아있을 겁니다. 강바닥에 천년을 갇혀 있었으니, 미치지 않고 어떻게 버텼겠습니까? 생각하면 할수록 두렵네요. 아무래도 보물을 얻는 게 쉽진 않겠어요.”
그의 분석을 들은 백유리가 탄식했다. 그가 겁을 먹은 것 같아 비웃었다.
“정 사제, 이렇게 간이 작은 줄은 몰랐네?”
“하하, 제가 간이 작다뇨? 절 과소평가하지 마십시오”
정상이 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전 그저 기대가 될 뿐입니다. 경창파에 그렇게 오래 갇혀 있었는데, 이 일에 흥미가 안 생기는 게 말이 되겠습니까?”
“야야, 당신은요? 무섭다면 지금 떠나세요. 설요족의 ‘유일한’ 공주이신데, 혹시 당신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저희는 감당 못 합니다.”
야야는 기질뿐만 아니라 외모에서도 백유리를 압도했다. 여인의 직감으로 보면, 백유리는 계속 그녀를 적대시하고 있었다. 그녀를 성가시게 하는 방법도 여러 가지였다.
야야는 백유리가 송기연에게 어떤 마음을 품었는지 알고 있다. 다만 이 여인이 말하는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야야가 송기연 옆으로 걸어가자 발의 은방울이 청아하게 울렸다. 그가 일부러 송기연에게 딱 붙어 야릇한 표정을 지었다.
“이 녀석이 날 이리도 필요로 하는데, 내가 어찌 떠날 수 있겠어요?”
낙지는 마음이 아파 눈시울까지 붉어졌다. 야야가 백유리에게 보여주려고 한다는 걸 알지만 그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 말을 꺼냈다.
“공주께서, 계신다면, 저도, 있겠습니다.”
자신이 말을 더듬으니 일부러 선서하듯 사 어절로 나누어 말했다.
야야가 살짝 미소 지었다. 이제 보니 낙지가 사람을 감동시키기도 했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저런 강직한 성격은 바보 같지만 귀여웠다.
“사형, 전 야야가 필요합니다.”
송기연의 돌직구에 백유리는 마음에 상처를 입었다. 깜짝 놀란 정상도 입이 딱 벌어졌다. 송기연의 입에서 저런 말이 튀어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러니 우리 섬의 깊은 곳으로 자리를 옮길까요?”
여인들의 기 싸움은 거북하다. 그는 이곳에 창결검과 사존을 찾으려고 온 것이다. 기다릴 수 없었다. 묵묵씨의 신분을 밝힌다면 묻고 싶은 말도, 그에게 할 말도 많았다. 그는 사존이 ‘기연’이라고 부리는 소리를 다시 한번 듣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