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권-제1장 취영보고 (10/40)

제1장 취영보고

요수의 포효도 함께 들려오는 위급 상황이었다.

이 소리를 듣자마자 유가의 눈이 반짝였다.

완전 구세주잖아!

유가는 급히 송기연을 밀치고 밖을 가리키며 사람을 구해야 한다고 ‘말’을 했다. 그리곤 곧바로 헐레벌떡 동굴 밖으로 뛰쳐나갔다.

송기연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늘 또다시 질문을 한다 해도 얻는 건 없을 것 같았다. 어차피 급한 일도 아니다. 사존이 사람을 구하려고 한다면 그가 따라가야 마땅했으니.

나무 두세 그루를 뛰어넘자 두 사람이 요수의 공격을 당하고 있었다. 온몸에 상처를 입은 남자가 이를 악물고 검을 휘둘렀으나, 요수의 공격을 막아내는 게 힘겨워 보였다. 그의 뒤에 서 있던 대략 열여섯 정도 돼 보이는 어린 소녀는 유가를 보고 빨개진 두 눈에 희망이 샘솟았다. 급히 유가를 향해 두 사람을 구해달라고 울부짖었다.

허공에서 아기 울음소리를 내는 거대한 새를 보고 유가는 머리가 아파왔다. 이 두 사람도 유가에겐 재앙인 셈이었다. 도겁기 수련에 가까워진 고조(蛊雕)를 불러내다니. 고조는 사슴의 뿔에, 표범의 꼬리, 매의 머리를 가진, 사람을 즐겨 먹고 성질이 사나운, 무주지에서 건드리면 안 되는 요수들 중 하나였다.

유가가 저 요수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고민하던 중, 송기연이 그의 옆에 와서 섰다. 지금 유가가 난감한 건 자신의 수련 경지였다. 원영기인 송기연은 고조의 수련을 가늠할 수 없었지만, 저 요수가 엄청나다는 건 느낄 수 있었다. 유가가 저 두 사람을 구한다면 송기연의 의심이 무조건 커질 것이다.

“두 분 제발 저와 사숙 좀 구해 주세요! 제발 살려주세요!”

소녀가 바닥에 꿇어앉아 애원하자 보고 있던 유가의 마음이 흔들렸다.

이를 보고도 지나칠 수는 없었다. 유가는 송기연을 향해 여인을 가리켜 여인을 구하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자신은 고조를 가리켜, 자신이 처리하겠다고 표현한 뒤 검을 빼 들고 뛰어들었다.

송기연은 불만스런 표정으로 여인에게 눈을 흘겼다.

유가가 아리따운 여인을 구하라는 몸짓에 송기연의 기분이 퍽 상했다. 그렇게 다급헤가 구할 것은 없었는데. 심통이 난 송기연은 저도 모르게 눈동자가 차가워졌다.

그래도 그는 사존의 말이라면 당연히 복종할 것이다. 그리고 뜻밖에도 여인의 얼굴이 어딘가 낯이 익었다. 아무래도 ‘전생’의 기억인 것 같은데, 나중에 자신과 어떤 관계가 있는 모양이다.

사실 유가는 검을 잘 쓰지 못했다. 하지만 대승기의 실력으로 검을 휘두르니 선계 문파의 고급 검법없이도 고조 정도는 물리칠 수 있었다. 거기에 남자도 연합하여 공격하니 고조는 점점 뒤로 밀려났다. 곧 고조가 길게 울부짖었고 날카로운 눈으로 주위를 한번 훑어보았다. 특히 그 여인을 더욱 매섭게 바라보고는 어쩔 수 없이 물러갔다.

고조가 도망가는 걸 보고 남자는 한시름 놓았다. 남자는 고마움을 가득 담은 눈빛으로 유가를 바라보며 주먹을 쥐고 예를 올렸다.

“살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소인 귀(歸)가의 삼대 호법 장로 중 하나인 귀우초(歸於楚)입니다.”

남자는 자신에게 안겨들어 울고 있는 소녀를 떼어 놓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분은 저희 귀가의 2소저(小姐-아가씨를 이르는 말) 귀여의(歸茹依)입니다.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성함을 여쭈어도 될까요?”

유가는 한순간 벼락이라도 맞은 듯 그 자리에 굳어 경악스러운 눈빛으로 귀여의를 바라보았다.

귀여의. 일파삼문육대가(一派三门六大家) 중 귀가의 여인이자, 현재 선계에서 손꼽히는 절세미인 중 하나였다. 작고 아담하고 고른 눈썹에 살짝 쳐진 눈꼬리, 포동한 아기 같은 얼굴에 큰 눈은 보기만 해도 사랑스러웠다. 유가가 만든 여주인공 중에 독자에게 제일 인기가 많은 여자캐릭터이기도 했다. 게다가…… 유가는 옆에 있던 송기연을 힐끗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유가는 딱히 티내지 않았다. 귀우초와 귀여의를 향해 예를 표하고 자신의 목을 가리키며 말을 할 수 없다고 표현했다.

송기연은 속으로 너무 웃겼다.

사존이 흉내를 어찌나 잘 내시는지, 지금까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송기연은 유가의 앞으로 걸어가 귀우초를 향해 예를 갖추었다.

“귀가의 장로셨군요. 존함은 익히 들었습니다. 소인 송가 가주(家主) 송기연입니다. 제 뒤에 계신 분은 제 부친의 오랜 벗입니다. 존함은…….”

송기연이 고개를 돌려 의미심장한 웃음을 흘렸다. 유가는 그만 온몸에 털이 쭈뼛 섰다.

“저도 모릅니다. 선생께서 제게 존함을 알려주시지 않았습니다.”

유가는 깜짝 놀라 심장이 멎을 뻔했다. 송기연이 자신이 엽망지인 것을 알아차린 것처럼 보지 않는가! 존함을 말할 때도 한참을 망설이다가 알 수 없는 웃음을 보였다.

보아하니 순전히 자신을 놀리고 있다. 어린 녀석이 벌써 이렇게 나쁜 마음을 먹어서야 커서 어떤 사람이 될는지. 뗴잉!

귀여의가 귀우초를 사숙이라고 불렀지만, 그는 삼십 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외모였다. 백옥같은 피부에 검은색 두루마기를 걸치고 행동도 점잖았다. 좀 전에 고조와 싸울 때도 한계에 도달했지만 태연하게 대처했다. 그런 사람도 지금 송기연의 말을 듣고놀라 두 눈이 커져 급히 물었다.

“당신이 송기연입니까? 아직 살아계셨군요!”

답지않게 사숙이 놀라자, 귀여의가 입을 삐죽이며 청년의 옷자락을 잡아당겨 속삭였다.

“사숙, 대단하신 분인가요?”

“초장로, 그 말씀은 좀 실례되는 말인 것 같습니다. 보시다시피 이렇게 잘살고 있습니다.”

송기연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자는 성격이 고집적이고 강직한 것 같았다. 예전에 자신이었다면 이런 무례한 태도에……. 아니, 잠깐……!

송기연은 머리를 한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예전에 자신이라니? 그자가 남긴 게 기억이 다가 아닌 거야?

귀우초는 귀여의에게 대답하지 않고 유가를 보다가 송기연에게 사과했다.

“소인이 무례했습니다. 송 가주의 곁에 이렇게 수련의 경지가 높으신 분이 계시는데 어찌 이곳에서 부상을 당하시겠습니까.”

“사숙, 저 사람이 그 멸문한 송가의 외아들이에요? 그 송가는 완전히 멸한 거 아니었어요? 근데 무슨 가주가 있어요?”

귀여의의 목소리가 작아도 이곳이 이 들은 당연히 다 들었다. 귀우초는 어색한 입꼬리를 감추지 못하고 소녀의 머리에 꿀밤을 먹였다.

귀여의가 본격적으로 혼나기 전에 송기연이 끼어들었다.

“아가씨의 말씀은 틀렸습니다. 제가 송가입니다. 제가 있으니 송가는 강산이 변하기 전에 반드시 선계의 명문가로 다시 일어설 겁니다.”

준수한 소년이 이 광활하고 푸른 무주지에서 그렇게 꼿꼿하게 말했다. 부서지는 햇빛 같은 눈동자를 빛내며 호선을 그리며 웃었다. 눈가엔 다정한 웃음기가 가득했고 말은 선명한 칼날이 번뜩이듯 예리했다. 누구든 대적하려는 호기가, 그런 소년에게서 눈을 뗄 수 없는 건 당연했다.

유가도 그중 하나였다. 한참을 넋 놓고 바라보다가, 자신이 너무 눈을 뺏겼다는 걸 깨닫고 급히 고개를 돌렸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어떡하지! 주인공이 너무 잘생겼잖아!

내 주인공이 너무 잘나서 못 참겠다.

유가는 세삼 자신이 이 녀석의 팬이 된 것 같았다.

“그런 번지르르한 말은 누구든 할 수 있어요. 당신이 그 말을 지킬 수 있는지 어찌 알겠어요? 그런 터무니없는 말 말아요!”

귀여의는 눈을 흘기며 송기연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 얼굴엔 비웃는 표정이 가득했다.

‘설마 저 여인이 진짜 송기연의 후궁인 거야? 내가 쓴 그 선량하고 따뜻한 귀여의가 맞아?’

송기연도 눈을 흘기다 ‘전생’에서 귀여의와 어떤 사이인지 떠올랐다. 귀여의는 몇 안 되는 친구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이 소녀의 성격은 선계의 청년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선량하지 않았고 오히려 결단력이 있었다. 게다가 이 여인이 좋아하는 사람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

“내 말이 허풍인지 아닌지는 십 년 후에 보면 압니다. 당신 같은 어린 소녀가 함부로 할 말은 아닙니다.”

귀여의의 성격을 아는 송기연은 가감 없이 솔직하게 내뱉었다.

“다, 다당신! 당신 지금 내게 어린 소녀라고 했어요? 송가 녀석이라면 나보다 세 살은 어릴 텐데! 당장 누님이라고 불러요!”

귀여인은 사숙 앞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어린애 취급하는 걸 제일 싫어했다. 지금 저 녀석이 실수한 것이다. 하지만 송기연은 시선을 다른 데 돌리고 입을 맘대로 놀렸다.

“어린 소녀, 어린 소녀, 어린 소…….”

하지만 머리 위로 올라온 손에 생각이 끊겼다.

유가가 자신의 머리에 손을 올리자 정말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유가는 익숙하게 머리를 쓰다듬으며 눈웃음을 지었다. 이 녀석도 아직 이렇게 어린아이 같은 면이 남아 있었다. 오랜만에 이런 변덕스러운 아이를 보니 괜히 눈이 즐거웠다.

“짝!”

“아야! 사숙 뭐 하는 거예요!”

귀여의가 비명을 지르고 머리를 감싸 안았다. 근엄한 표정의 귀우초를 바라보는데, 너무 억울했다.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다고, 왜 맞은 거지!

“이곳에 오기 전에 제가 말조심하라고 그렇게 당부하지 않았습니까? 어찌 또 사고를 치십니까!”

“제가 언제 또 말조심을 안 했어요! 저자가 먼저 허풍을 떨잖아요! 저 별 얘기 안 했다고요!”

“저분들께선 우리 목숨을 살려주신 분입니다. 그분들께 이게 무슨 태도입니까, 대체?”

“와! 그렇네요!”

귀여의는 정말 몰랐다는 듯 자신의 허벅지를 내려치며 말했다.

미녀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완전 바보 같았다.

“송아우, 살려 준 은혜 감사드립니다. 제가 틀렸습니다. 당신의 말은 반드시 실현될 것이니, 자신감을 가지세요.”

귀여의는 태도를 싹 바꿔 격려하듯 송기연의 어깨를 두드렸다. 송기연히 불쾌한 듯 피해도 아랑곳하지 않고 귀우초의 옆으로 돌아가 눈을 깜빡거렸다.

“사숙, 사숙! 이번엔 괜찮았죠?”

그 순간 모든 사람이 말문이 막혔다. 귀우초는 어쩔 줄을 몰랐다. 속으로는 이 녀석이 정말 못 하는 말이 없다고 생각했다.

귀우초는 헛기침을 하고 다시 꿀밤을 한 대 치며 유가에게 사과했다.

“저희 아가씨께서 이리 말이 거침이 없으십니다. 두 분께 대신 사죄드립니다. 오늘 저희 목숨을 구해주신 은혜는 귀가에서 반드시 갚겠습니다.”

그리곤 몸속 공간에서 ‘초’ 자가 새겨진 영패를 내밀었다.

“이건 제가 가지고 다니는 영패(令牌)입니다. 귀가(家) 사람이 이 영패를 본다면 저를 만난 것과 진배없습니다. 후에 저희 귀가의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언제든 귀운성(歸雲城)에서 절 찾아주십시오.”

“사숙, 어떻게 영패를 저들에게 주실 수가 있어요?”

귀여의가 낮은 목소리로 항의했지만 사숙의 단호한 태도에 곧 포기했다.

유가는 귀우초에게 호감이 생겼다. 저자의 행동이 정통 명문파다웠고 사람을 대하는 태도도 마음에 들었다. 그를 보고 웃으며 영패를 받으려 했다. 하지만 송기연의 행동이 좀 더 재빨랐다. 귀우초의 영패를 빼앗고 유가를 뒤로 밀치며 거짓 웃음을 지었다.

“그럼 초장로께 감사드립니다.”

송기연은 사존이 다른 사람과 얽히는 게 싫었다. 좀 전에 귀우초가 사존에게 은연중 관심을 표한 것도 거슬렸다. 사존의 실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해도 만나는 건 한 번이면 족했다. 앞으로 귀가를 만나는 건 자신이 직접 나설 생각이었다.

귀우초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사실 그는 송기연을 무시하고 있었다. 어쨌든 그는 어린 녀석일 뿐이었기에, 그가 한 말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렸다. 그에 반해 말을 못 한다는 이는 성격도 좋고 실력도 막강하니 사귀어 두면 귀가에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영패가 송기연의 수중에 들어갔지만, 그도 별말 없이 웃기만 했다. 옆에 있던 귀여의를 잡아끌고 두 사람에게 예를 올렸다.

“그럼 소인과 아가씨는 그만 여기서 인사드리겠습니다. 다음에 인연이 된다면 다시 봅시다.”

“초장로, 잠시만요.”

그거 떠나려는 순간 송기연이 그를 불러 세웠다.

유가는 의심의 눈초리로 송기연을 흘겨보았다. 이 녀석이 무슨 말을 할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송기연은 귀여의 곁으로 돌아가서 그의 주변을 반 바퀴 돌고, 한 번 훑어보고, 귀우초에게 질문했다.

“초장로, 고조가 도대체 왜 두 분을 쫓은 겁니까?”

그의 질문에 유가도 어리둥절했다. 귀우초도 검자루를 더 세게 움켜쥐는 게 아닌가. 놀란 유가는 급히 송기연을 끌어 자신의 몸 뒤로 보호하고 귀우초와 대치했다.

송기연의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유가의 옷자락을 슬며시 잡으며 입꼬리가 자신도 모르게 올라갔다. 사존께서 역시나 자신을 이렇게 보호해 주셨다.

귀우초는 유가의 예민함에 살짝 놀랐다. 상대의 실력을 알기에 손에 힘을 빼고 난감하게 웃었다.

“뭐 하시는 겁니까?”

유가의 뒤에서 나온 송기연이 차갑게 대꾸했다.

“초장로, 그냥 물었을 뿐인데, 어찌 이리 긴장하십니까?”

귀여의는 더 참지 않고 귀우초를 대신해 소리쳤다.

“고조가 왜 우리를 쫓아왔는지 사숙께서 답해야 할 이유가 있나요? 수선의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에게 사적인 일을 물으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을 텐데, 당신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사존께 까불어서 중상을 입고 싶은 거예요?”

유가도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그 경지가 예사롭지 않던 고조는 분명히 어떤 보물을 지키던 요수였을 터다. 그리고 그 보물이 귀우초의 수중에 들어갔고, 그걸 알아차린 송기연이 질문을 한 것이다. 두 사람의 태도를 보니 확실히 그 보물이 그들의 수중에 있었다.

“어린 소녀께선 오해입니다. 그저 궁금했을 뿐, 대답을 들으려고 한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 이리 격렬히 반응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괜히 기분이 상하시면 좋지 않으니깐요.”

송기연은 그저 얼마나 좋은 것인지 보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지금 귀우초의 태도를 보니 이번엔 기회가 없었다. 밀어붙일 생각은 아니었다. 만약 그랬다가 싸움이 일어나 사존께서 다치시기라도 하면 안 되니까. 그래서 여기서 멈추었다.

“당신들을 막을 뜻은 없었습니다.”

그는 손으로 앞쪽의 길을 가리키며 말했다.

“두 분 편히 가십시오.”

송기연의 평온한 얼굴을 본 귀우초는 확실히 그가 자신을 곤란하게 하려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우선은 맘을 내려놓기로 했다. 그는 자신이 귀여의와 함께 고조에게서 빼앗아온 물건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이런 귀중한 물건을 가지고 대륙으로 간다면 분명히 수많은 문파가 강탈하려고 할 것이고, 실력이 좋은 수선들이 노릴 게 분명했다. 그와 귀여의는 무주지에서 세력도 약한데 귀가의 비호도 받지 못하고 있어 남의 이목에 띄지 않게 조심해야 했다.

“사숙, 이 결신과(結神果)는 정말 전설처럼 신식을 재창조해서 생명이 하나 더 생기는 거 맞아요?”

귀여의는 자신의 공간 속에 넣어둔 물건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했다. 전설 속에서만 존재하던 영과를 자신들 귀가에서 얻을 줄도 몰랐다. 하지만 사숙은 이 결신과를 특별히 아꼈고, 중상을 입고도 송기연에게 보여주지 않았다.

귀여의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귀우초가 말했다.

“당연합니다. 이 결신과는 엄청 특이하죠. 원영기의 수련자가 먹으면 최단 시간 내에 신식이 만들어져 화신기로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게다가 화신기인 자가 먹는다면 또 다른 신식 하나를 더 만들어 냅니다.

후에 엄청난 재난을 겪게 된다면 결신과로 하나의 신식을 파괴하고 또 다른 신식으로 도망을 칠 수 있습니다. 그럼 이목을 속여 목숨을 건질 수 있어요. 확실히 걱정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그러니 제발 그 두 알을 잘 보관하세요. 가문으로 돌아간다면 하나는 대공자님께 드리고, 남은 하나는 아가씨께서 잘 가지고 계시다가 화신기를 돌파한 후에 드세요. 그럼 귀가가 만약 송가처럼 멸족의 위험에 처한다고 해도 두 분께서 혈통을 이을 수 있으십니다.”

귀여의는 입을 삐죽였다. 귀우초의 걱정스러운 표정이 낯설어 그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사숙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귀가가 송가처럼 될 리 없어요. 저희 귀운성은 경창산 바로 옆에 있고, 일파삼문육대가와 힘을 합치면 유가 그 악마가 온다고 해도 절대 살아서 돌아갈 수 없어요!”

“아가씨께서 뭘 아시겠어요? 순망치한이라 했습니다.”

전에 유가가 경창파에서 소란을 피웠을 때, 몇몇 문파의 사람들이 주작족 능광신군에게 완전히 가로막혀 경창파를 돕고 싶어도 도울 수 없었다. 경창파의 손실이 크지 않아서 다행이지, 아니었다면 선계 원기의 손상이 대단했을 것이다. 만약 그 틈에 마족이 쳐들어오기라도 했다면 엄청난 피비린내가 진동했을 것이다.

이번에 귀가 가주가 그와 귀여의를 무주지에 보낸 것도 결신과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그럼 후에 대륙에 분란이 일어난다고 해도 귀가는 혈통을 지킬 수 있다. 이번 경험을 통해 귀여의는 놀기 좋아하던 성격을 죽이고 심성을 단련했다.

결국, 선마계의 평화는 얼마 남지 않았다.

두 사람이 멀어진 걸 본 송기연은 유가를 물끄러미 보았지만, 아무것도 묻지 않고 곧장 동굴로 올라갔다.

유가도 저 녀석이 자신의 실력에 대해 묻지 않는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좀 전에 귀우초 앞에서 자신을 다른 신분으로 소개한 것을 봐도 자신의 존재를 받아들인 것 같다. 유가는 머리를 긁적이다 따라서 동굴로 들어갔다. 그리곤 동굴의 한쪽에 기대서 기연을 몰래 바라보았다.

송기연은 그의 시선을 무시한 채 아무렇지 않은 척 몸속 공간에서 7척 정도 되는 나무 상자를 꺼내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 안에서 부러진 검 하나와 흰 면포를 꺼내더니 정성으로 닦아냈다.

검은 이미 영기를 잃어 빛이 사라졌다. 하지만 송기연이 잘 관리했는지 오랜 시간이 지났어도 아직 녹슬지 않았다. 소년은 손에 든 검을 세심하게 들여다보며, 꼭 금은보화라도 닦는 듯 꼼꼼하게 닦았다.

유가는 좀 난감해졌다. 이 검에 대해 당연히 잘 알고 있다. 이 검은 자신이 이 년 전 송기연에게 직접 건네준 것이자, 일전에 아이 앞에서 친히 절단한 그 검이었다.

그는 그때 아이가 하늘이 무너질 듯 가엽게 울던 모습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도 오랫동안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지금 이 검을 다시 보니 또다시 마음이 안 좋아졌다. 그는 송기연이 이 쓸모없는 검을 이렇게나 아끼는 줄 몰랐다. 아직까지 몸에 지니고 다니며 수시로 꺼내어 광이 나도록 닦을 줄을 누가 알겠는가.

부러진 검을 다 닦은 송기연은 다시 나무 상자에 넣고 유가를 보며 웃었다.

“그거 아세요? 이 검, 사존께서 제게 주신 겁니다. 한데 제가 너무 무능하여 원수 손에 그만 검이 망가지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사존께서 걱정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후에 반드시 제 검으로 원수의 목숨을 끊고 말 겁니다.”

그가 유가의 눈을 빤히 바라봤다.

“다시 사존을 뵙게 되었을 때, 사존께서 절 용서해 주셨으면 좋겠네요.”

유가는 급히 송기연의 눈을 피했다. 복잡했다. 나이가 어린 송기연이 마치 그의 내면 깊숙한 곳을 꿰뚫어 보고 있어, 이 아이의 시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느낌이었다.

겉으로는 사존에게 말하는 듯하면서도 사실 그가 엽망지라는 것을 알아챈 것 같았다. 송기연의 까만 두 눈에 담긴 제 모습이 겁이 났다. 게다가 자신이 유가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떻게 될지 유가는 생각도 하기 싫었다.

“왜 그래요?”

송기연은 속으로 웃음이 터졌다. 자신의 말 몇 마디에 사존이 이렇게까지 놀라다니.

왜 갑자기 사존께서 제 말에 더 반응하시는 것 같지?

여전히 그는 급하게 사존의 정체를 밝히려 하지 않았다. 사존께서 정말 화가 나시면 또다시 자신을 버리고 완전히 숨어버릴 게 분명했다. 그는 지금 자신이 무주지에 온 걸 다행이라고 여겼다. 역시 사존께서는 자신이 위험할 때 곁에 찾아오셨다.

유가는 고개를 휙휙 가로저었다.

“별일 아니면 다행이고요.”

송기연이 부러진 검의 다른 쪽을 들고 닦느라 유가의 멍한 표정을 발견하지 못했다.

* * *

수련하는 날이 빠르게 지나갔다. 송기연이 영보(靈寶)를 얻어 폐관수련을 하는 데만 수 개월이 걸렸고, 순식간에 삼 년이 지나갔다.

유가는 그 기간 동안 다시 나갈 생각을 하지 못했다. 아구를 만날 때도 반나절이면 무조건 돌아왔다. 송기연이 화입마에 한 번 들어갔을 때 식겁한 후로, 만약 자신 때문에 녀석이 영향을 받는다면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다시 말하면, 유가는 지난 삼 년 동안 말을 못 했다! 장장 삼 년 동안!

그는 송기연이 폐관에 들어가고 나서 그간 쌓은 울분을 토해냈는데, 자신도 그제야 제가 말을 할 수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렇게 까지 철저한 메소드연기가 어디있냐고!

삼 년 동안 유가도 한가하지 않았다. 흑석각인 덕분에 적지 않은 신법과 권법이 떠올랐다. 가끔은 원래 유가의 기억 속 훈련 과정이 식해에서 떠올라, 터득하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았다. 만약 지금 또다시 경창파로 간다면 이번엔 제 힘만으로도 충분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다만 송기연은.

유가는 인피면구를 벗고 강물을 퍼서 얼굴을 마구 문질렀다.

송기연을 떠올리자 유가는 갑자기 마음속에 신물이 올라왔다. 저 아이가 삼 년 동안 도대체 무얼 먹는 것인지 키가 자라는 속도도 굉장했다. 유가의 키도 작지 않았는데 송기연은 그 보다 손 한 뼘은 더 컸다. 그가 곁에 서 있으면 햇볕도 가릴 지경이었다.

송기연은 키도 쑥쑥 자랐고 수련도 멈추지 않아 몸도 탄탄했다. 정확히는 우뚝 솟은 소나무처럼 곧고 길쭉했다. 게다가 아이는 키가 큰 후로 유가와 붙어있는 걸 좋아했다. 제 키가 유가를 넘어섰다는 걸 꼬박꼬박 확인하는 게 마음이 편한 것 같았다. 그리고 속이 구린 여우처럼 웃었다. 도대체 뭐가 즐거운 건지.

유가는 세수를 하고 인피면구를 다시 얼굴에 쓰고, 완벽하게 위장을 점검한 후 돌아갔다.

아마도 이번에 폐관수련을 하면 송기연은 순조롭게 원영기 정상을 돌파할 것으로 보였다. 이 아이의 수련 속도는 정말 하늘을 거스를 정도였다. 게다가 이번 폐관수련에는 송기연이 청능과(青菱果)의 약효를 빌려 직접 화신기로 돌파했고 신식까지 만들었다. 그럼에도 조급해하지도 않고 원영 정상에서 수련을 통제하여, 더 진기를 숙련되게 응집하려 했다.

유가는 나무 아래에서 금제를 풀고 두 사람이 삼 년 동안 지냈던 동굴을 바라보았다. 새삼 집으로 돌아온 듯한 묘한 기분에 안심했다.

“묵묵씨, 눈을 떴는데 안 보여서 얼마나 놀랐는지 아십니까. 또 몰래 도망가신 줄 알았습니다.”

묵묵부답이라고 묵묵씨. 소년은 그렇게 불렀다.

흰옷을 입은 길쭉한 소년이 빛을 맞으며 동굴 입구에 서 있었다. 허리엔 패검을 차고 머리는 느슨하게 땋아 아직 소공자티가 났다. 길게 뻗은 속눈썹은 정교하면서도 시원했고, 목소리는 변성기 특유의 허스키한 목소리였지만, 듣기 싫은 소리는 아니었다. 오히려 경쾌한 말투로 애교스럽게 느껴졌다.

듣고 있던 유가는 등골이 서늘했다. 온몸에서 1급 경보를 울렸다. 그는 송기연이 이런 말투로 자신에게 말을 걸 때 제일 두려웠다. 그가 이렇게 느물거릴 때는 온통 나쁜 행동뿐이었다. 지금 또 어떻게 자신을 희롱할지 알 수 없었다.

송기연이 나뭇가지를 타고 빠르게 아래로 내려와 유가의 앞에 섰다. 거대한 녀석의 그림자에 햇볕이 완전히 막혔다. 그늘이 졌다. 살며시 송기연이 고개를 숙이며 단정한 코를 들이대자, 두 사람 거리가 애틋한 것 같았다.

유가는 확실히 마음이 불편했고 한발 물러나려 했지만, 결국 송기연 품에 푹 안겨 버렸다.

송기연은 유가의 목과 어깨에 코를 묻으며 꼭 강아지가 뼈다귀 냄새를 맡는 듯 킁킁거렸다. 부드러운 살결의 냄새를 맡으며 그는 여기에 입술을 맞추고 싶다는 생각을 간신히 억눌렀다.

“물기가 있는데, 강에 갔다 온 거예요?”

유가는 뻣뻣하고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목에 온통 송기연이 내뿜는 열기가 가득했다. 귀가 새빨갛게 뜨거워졌다. 그는 송기연이 언제부터 이런 나쁜 버릇이 생겼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툭하면 그를 안아 버렸다. 유가가 남과 가까이하지 않는 버릇을 고쳐주려는 것 같기도 했다.

난감한 자세로 안겨 있던 유가가 송기연을 밀어버리려는데, 송기연이 낮게 속삭였다.

“묵묵씨. 앞으로는 제가 눈을 떴을 때 제일 먼저 보이는 게 당신이었으면 좋겠어요.”

송기연이 갑자기 유가에게 떨어졌다. 유가는 아직 어떤 표정도 갈무리 하지 못했는데, 송기연이 얼굴을 잔뜩 일그러트리고 말했다.

“감히 누가 어둠 속에 숨어 있는 것이냐!”

유가가 정신을 번쩍 차렸다. 확실히 송기연보다 누군가 숨어 있다는 사실을 늦게 알아챘다. 자신이 부주의했다.

절벽 아래엔 숲이 있었다. 이 여름날 나무엔 잎이 무성했고 매미가 수시로 울어댔다. 누군가 기운을 숨기고 숲속에 숨어든다면 발견하기 어려웠다.

다만 유가가 이해가 안 되는 건, 그들이 오래 숨어있기만 하고 손을 쓰지 않은 것이다. 설마 사람을 죽이고 보물을 약탈하는 게 목적이 아닌 건가?

한참 동안 아무런 움직임이 없자 송기연은 검을 빼 들었다. 직접 덮칠 생각이었다.

“잠깐! 잠시 멈추십시오. 지금 나갑니다. 말로 좋게 풀면 되지 뭐하러 무공을 쓰십니까?”

사람의 모습보다 목소리가 먼저 들렸다. 그리고 40장(丈)앞 풀숲에서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남자 하나, 여자 하나. 서른 살 정도 돼 보였다.

평복을 입은 키가 큰 남자가 조신하게 여인의 옆에 서서 딱 붙어 있었다. 여인은 삼베옷을 입고 있었고 외모도 평범했다. 자신의 옷에 묻은 풀을 털어내다가 송기연의 안색이 좋지 않자 급히 미소를 지었다.

“좀 전에 두 분께서 친밀하게 붙어 계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방해를 할 수가 있어야지요. 다른 뜻은 없었어요. 우연히 마주친 것뿐인 걸요?”

송기연의 안색은 변하지 않았지만 유가는 얼굴이 붉게 타올랐다. 그와 송기연의 모습이 다른 사람 눈엔 저렇게 보인단 말인가? 아무래도 앞으로 이 녀석을 좀 피해야겠다. 다른 사람 눈에 부정한 관계처럼 보이고 싶진 않았다.

송기연은 이 두 사람이 왠지 낯이 익었다. ‘전생’이 남겨둔 기억은 인상이 깊고 아니고 차이가 컸는데, 그는 확실히 이 부부에 대해선 인상 깊었다. 중요한 인물인 게 틀림없다. 다만 이 두 사람이 적인지 아군인지 확실치 않았다.

송기연이 검을 거두고 물었다.

“두 부부께서 저희 두 사람을 몰래 지켜보고, 통성명도 안 한다면 그것도 예의가 아니지 않습니까?”

얼굴에서 앳된 티가 사라질 만큼, 그의 얼굴에 어둠이 드리웠고 말도 차갑기 그지 없었다.

“아니라면 다른 꿍꿍이속이 있는 겁니까?”

여인은 속으로 놀랐다. 화신기 절정인 자신이 원영기에 불과한 소년인 송기연을 겁낼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방금 이자와 눈이 마주쳤을 때, 그녀는 뭔가 벼랑 끝으로 내몰린 듯한 착각이 들었다. 다만 송기연 곁에 서 있는 유가에게선 아무런 위험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런 상황의 이유는 두 가지다. 이자의 실력이 부부보다 월등하거나, 일부러 실력을 숨겨서 수련 경지가 엄청 높은 척하지만 실제로는 약하디약한 햇병아리인 것.

“그게 무슨 말입니까? 아직 통성명할 틈이 없었던 것뿐이라고요! 전 염쌍아(閻雙兒)입니다.”

여인은 알랑거리며 웃더니 남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제 남편은 집안에서 셋째로, 다들 염삼아(閻三兒)라고 불러요. 아우께서는 우리를 쌍아와 삼아라고 부르면 돼요!”

송기연은 의구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뭔가 수상했다.

‘전생’의 신식을 삼켰기 때문에 지금 원영기라도 저 부부의 수련 경지를 알아챌 수 있었다. 저 여인은 화신기 정상이었고, 남자는 더 높아 합체기 중기의 수련이었다. 대륙에서도 고수에 속하는 수진인들이 지금 원영기인 자신에게 이렇게 예를 갖추었다.

“두 분께서 이리 예를 갖추시니 저도 방금 저 무례한 언행에 대해 사과드리겠습니다. 전 기연이라고 합니다.”

송기연은 자연스럽게 유가의 어깨를 감싸며 말했다.

“이자는 제 벗입니다. 저희가 두 분보다 나이가 많이 어리니 두 분을 누님과 삼형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유가가 바보 같은 눈빛으로 송기연을 바라보았다.

지금 이 녀석 대체 무슨 속셈이지? 도대체 어디서 배워온 인사치레란 말인가.

유가는 어이없이 시선을 여인에게로 돌렸다. 한눈에 봐도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고 기운을 느껴보면 마족이 분명했다. 선마 전투 이후로 두 종족의 충돌은 끊이질 않았고, 만나기만 하면 상황이 안 좋았다. 이 부부가 송기연에게 얼버무리는 건, 분명 어떤 속셈이 있었고 아직 드러내지만 않았을 뿐이다.

유가가 남자에게로 시선을 옮기자, 큰 키에 건장했지만 등을 굽히고 고개를 숙여 여인의 말을 자세히 들었다. 딱 순종하는 모습이었다. 저 남자는 어떻게 평범하게 생긴 여인에게 저렇게 푹 빠졌을까.

“아휴 뭘 그리 예를 차리세요. 그럼 저도 편하게 기연 아우라고 부를게요.”

염쌍아는 한껏 눈웃음을 짓더니 자신의 옷자락을 꼬며 말했다.

“기연 아우는 비경에 대해 알아요?”

송기연이 살짝 멈칫하더니 속으로 비웃었다. 이 여인이 드디어 주제를 끄집어냈다. 삼 년 전 자신을 해칠 뻔했던 남자가 죽기 직전 그 비경으로 자신을 위협했다. 그때 그자는 자신 없이는 찾을 수 없다고 말했었는데, 후에 송기연이 여기를 기억해냈다. 그 비경이 있는 곳은 자신의 마음에 간직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 실력이 충분해지면 찾아가려 했다.

곧 비경이 열릴 시간이었다. 무주지의 비경의 위치는 줄곧 수수께끼였고, 알고 있는 자들도 그저 조금의 실마리 뿐이었다. 저 여인은 지금 저 말로 자신을 떠보려는 것 같다.

그는 이참에 이 여인의 진짜 목적이 뭔지 알아내려고 했다.

“비경이요? 확실하지는 않지만 삼 년 전에 들은 건 있어요. 아마도 무우산(無憂山) 근처라고 들었던 것 같아요.”

염쌍아는 듣고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역시 아우도 무우산에 있다는 것을 아는군요! 며칠 전 나와 남편도 확실한 정보를 들었어요. 무우산 안에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리고…….”말을 하다가 염쌍아가 염삼아를 팔로 찌르자, 알아들었다는 듯 염삼아가 품속에서 양피 두루마기를 꺼냈다. 펼쳐보니 뭔가 그려져 있는데, 꼭 보물지도 같은 지도였다. “우리가 그 전설 속 비경으로 가는 지도를 얻었어요.”

염쌍아는 지도를 다시 잘 말아 자신의 품속에 넣고 정색했다.

“자, 비경엔 기관(機關) 암선(暗線)이 가득하다고 하니, 아우도 이 지도의 중요성을 아시겠죠. 그럼 기연 아우께서는 우리와 함께 동행할 생각이 있나요? “

송기연이 조금 흥미로워 눈썹을 추켜세웠다. 염쌍아가 자신과 동행을 하자고. 저 지도의 진위 여부를 떠나 자신과 사존 앞에서 당당하게 펼친 것만으로도 용기가 대단한 것이다. 무주지에서 사람을 죽이고 보물을 약탈하는 건 부지기수니까다.

아무래도 여인은 정말 송기연과 결탁하고 싶은 것 같다. 그 이유에 대해선 몰랐지만, 그는 옆에서 침묵을 지키는 유가를 보고 눈빛이 어두워졌다.

설마 사존이 보기에 말도 잘하고 선한 사람 같은가?

“당신의 얘기는 우리가 함께 동행하여 양측이 합작하자는 거군요. 비경에 모여든 수많은 수진인들을 제치고 한 자리를 차지하여 그 많은 보물을 얻을 수 있으니.“

송기연의 눈빛이 더욱 차가워졌다.

“만약 정말 보물을 얻는다고 하면, 그럼 어떻게 분배할 생각이십니까?”

송기연은 또 조건과 협상을 나누었다.

유가는 저 여인 옆의 남자와 똑같은 표정으로, 멀뚱히 서 있었다.

유가는 이 무주지에 확실히 비경이 숨겨져 있다는 게 생각났다. 송기연이 이 비경에서 《천진결》의 하반부를 얻어 완전한 《천진결》의 수련을 완성했다. 그리고 대륙의 최정상에 서게 된다.

다만 이 과정에 우여곡절이 많았다. 그는 아마 비경에서 나쁜 놈에 의해 위험에 빠지고 죽을 뻔한 뒤 밀실에 빠지게 되었다. 다시 살길이 없을 줄 알았을 때 뜻밖에 《천진결》 하반부를 얻었다. 게다가 밀실에서 오랜 시간 동안 폐관수련을 하며 화신기를 돌파해 신식을 결성했다. 재난이 복이 된 셈이었다. 그 나쁜 놈이 누구였는지 유가는 잘 기억이 나질 않았다.

“기연 아우가 좋아하는 건 당연히 당신 겁니다. 당신들이 원하지 않는 건 우리가 가져가는 건 어떻습니까?” 이 말은 엄청 미묘했다. 굉장히 너그럽게 송기연보고 먼저 선택했다. 송기연의 뻔뻔함을 시험해보는 것인데, 만약 말도 못하게 뻔뻔하다면 모든 물건을 혼자 차지하겠지?

송기연이 웃었다.

“누님의 말씀이 참 듣기 좋습니다. 이렇게 하시죠. 저와 제 벗은 하나씩만 선택할 테니 남은 건 두 분이서 가지십시오. 어떻습니까?”

자신이 비경에서 겪게 될 일을 송기연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이 말도 입에 발린 소리다. 두 사람을 믿을 수 없으니 보물 분배에 관한 말도 그냥 물어본 것이고, 대답도 믿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손에 지도가 있다는 것이다. 저 여인에게 유일하게 유용한 건 비경의 지도였다. 저 지도만 있다면 많은 번거로움을 덜 수 있었다.

“제가 역시 사람을 잘 봤습니다. 기연 아우 정말 훌륭하네요! 그럼 더는 지체하지 말고, 지금 바로 무우산으로 떠나 비경이 열리길 기다립시다!”

염쌍아는 속으로 음흉한 생각을 하며 송기연 옆에 있는 유가를 힐끗 바라보았다. 살짝 심장이 흔들렸지만 곧 긴장을 풀었다. 그녀가 송기연이 마음에 든 건 유가와도 관련 있었다.

유가는 줄곧 침묵했고 주위의 기운도 평온했다. 그녀가 송기연과 입씨름을 하는 와중에도 이는 조금의 미동이 없었다. 그것만 봐도 이자의 성격이 결연하다는 걸 알 수 있다. 딱 봐도 부부보다 수련이 훨씬 강한 자이니, 이런 사람이 곁에 있다면 비경 안에 수진자들을 겁주기엔 충분했다.

송기연의 접촉으로 내내 멍해서 정신을 못 차렸던 것을, 염쌍아가 멋대로 엄청 신중한 자라고 오해한 걸 안다면 유가는 아마 웃겨 죽었을 것이다.

무우산의 정확한 위치를 알지 못해 모든 여정을 앞에 저 부부를 따랐다. 무주지에서는 날 수 없어 네 사람의 속도는 전혀 빠르지 않았고, 중간에 쉬어야 해서 이미 사흘이나 흘러버렸다.

송기연은 이 시간을 즐기는 듯 보였다. 쉴 때마다 유가의 손을 이끌고 그늘진 곳으로 가서 앉아 유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유가가 머리를 밀면 그는 유가를 끌어안고 큰소리로 외쳤다.

“아, 묵묵씨, 좀 기대게 해줘요.”

엄청 낯짝이 두꺼운 듯 한사코 놓아주지 않았다.

유가가 항의하지 않은 게 아니라 매번 실패로 끝이 난 거다. 오랫동안 이어진 송기연에 접촉에 익숙해져 버리면서도,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다가 희미해졌다. 하지만 지금 여인의 눈빛을 보니 자신이 더 잘못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다시 송기연을 밀쳐내고 송기연과 거리를 넓혔다. 유가는 송기연의 이 이상한 습관을 고쳐보겠노라 마음먹었다.

송기연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최근에 그는 사존과 더욱 붙어있고 싶다는 생각이 강렬해졌다. 꿈도 대부분 사존과 관련된 꿈만 꾸었다.

두 사람이 함께 지내며 사존에게 온 마음을 다하면, 시간이 지나 사존도 완전히 자신을 받아들일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상황이 자신의 생각만큼 쉽게 흘러가진 않았다.

유가가 자신을 피하기 시작했다. 송기연은 아쉬워도 다가가지 않고 거리를 두고 걸었다. 잠시 동안만 그 습관을 넣어두기로 했다.

“기연 아우, 앞으로 이십 리는 더 가야 무우산입니다. 이 노정은 좀 좋지 않은 것 같네요.”

염쌍아가 주위를 둘러보다가 잠시 멈추어 서자, 몇 갈래 길에서 실력이 강력한 기운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모두 무우산으로 향하는 길인 것 같았다.

무주지는 위험하지만, 그와 반대로 셀 수 없이 많은 기회와 보물이 있기에 수련의 경지가 높은 망명자들을 끌어들이기엔 충분했다. 게다가 비경이 열리는 건 이 망명자들에겐 더욱더 치명적인 유혹이다.

염쌍아가 송기연을 찾아온 것도 보물을 뺏지 못하고 누군가의 손에 죽을까 봐 였다. 이제 네 사람은 서로 얼굴을 붉히지 않는 상황에선 협력할 수 있었다.

염쌍아가 이 길이 좋지 않다고 한 건 도중에 수련 경지가 깊은 도적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알겠습니다. 걱정 마세요. 조심할게요.”

유가는 염쌍아의 말을 이해했다. 《선마겁》에서 송기연은 도중에 여러 번 기습을 당했다. 마지막에 송기연을 기습한 자도 그의 검 아래에서 처참한 말로를 맞았다.

하지만 이번에 송기연이 5년이나 앞서서 열세 살에 무주지로 들어왔다. 수련은 《선마겁》의 21살이었던 송기연보다 훨씬 약했다.

유가는 송기연에게 좀 붙어 서서, 어떤 사고가 나도 바로 이 녀석을 보호할 수 있게 했다.

유가가 다가오자 송기연의 눈엔 웃음기가 돌았다. 사존의 쉽게 마음 약해지는 성격은 정말 귀여우면서도 애를 먹이고 싶었다. 지금 그는 누군가 자신들을 급습해 오길 바랐다. 더욱이 자신이 부상을 당해 아픈 척을 하면 사존께 다가갈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하지만 그들의 수련 경지가 확실히 높아서, 이십 리나 되는 여정 동안 누구도 번거롭게 하지 않았다. 그들은 평안하고 무사하게 도착했다.

무우산은 사실 무우산맥이라고 부르는 게 더 잘 어울렸다. 도착해보니 겹겹이 산들이 맞닿아 있었다. 게다가 산맥의 산세가 한쪽 방향으로 쭉 뻗어 나가는 게 아니라 높은 산 주변을 켜켜이 감싸며 직경 3-40리의 분지를 형성했다.

일행은 높은 산에 서서 광활한 산 아래를 보며 비경이 열리길 기다렸다.

유가는 너무 신기했다. 송기연이 5년이나 앞서 무주지로 왔지만 스토리가 원래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비경이 열려야 할 때 열렸고, 귀여의와 자신의 출현을 제외하고 다른 변화는 없었다.

다만 저 부부가 어떤 인물인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당초 송기연이 비경에 들어갈 때는 다른 사람 없이 홀로 들어갔었다. 갑자기 나타난 저 두 사람이 좋은 건지 아닌 건지도 감이 오질 않았다.

유가가 곰곰이 생각하는 중에 갑자기 손이 따뜻해졌다. 고개를 숙여보니 앞에 서 있던 송기연이 어느샌가 제 손을 잡고 있었다.

몇 번 빼내려고 했지만, 이 녀석이 너무 꽉 잡고 있었다. 유가는 비교적 빠르게 한숨을 내쉬고 포기했다.

“묵묵씨, 곧 비경이 열리면 절 바짝 따라오세요. 당신을 잃기 싫습니다.”

송기연이 유가에게 바짝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유가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속에서 느껴지는 이상한 감정을 억누르며 유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특별히 수진인이 적은 산을 택했다. 이곳엔 그들 외에도 비경을 기다리는 무리들이 여럿 있었다. 그들은 서로 말을 하거나 움직이지 않고 조용히 비경이 열리길 기다리고 있었다.

염쌍아는 염삼아를 끌고 송기연과 유가에게 다가와 속삭였다.

“기연 아우, 곧 비경이 열리면 우선 조급하게 움직이지 마세요. 저기 입구에 묘한 이치의 법술이 숨어 있어서 자칫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어요.”

“네,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송기연은 비경에 대한 기억이 확실치 않아 이 부부의 지도에 의존해야 했다. 정신을 바짝 차린 송기연이 슬며시 유가의 앞으로 가 그를 막아섰다. 다음에 벌어질 상황에 바로 대비하려는 것이었다.

“비경! 비경이 열렸다!”

누군가 지른 소리에 사람들이 산 아래 분지를 내려다봤다. 3~40리 정도 돼 보이는 분지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곧 땅이 움직이고 산이 흔들리더니 거대한 붕괴음과 함께 하늘의 흰 구름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조심하지 않아 휘청거리는 유가를 옆에 있던 송기연이 꽉 잡았다. 움직임이 잦아들자 사람들이 분지를 내려다보았다. 그 넓고 평탄한 대지 위에 거대한 구멍이 생겨났다. 안은 너무 깊어 끝이 보이지 않았고, 저 멀리 앞을 내다보니 온몸에 한기가 깃드는 것 같았다.

“빨리! 빨리 가봅시다!

“하하! 보물은 선착순입니다!”

산 정상에 서 있던 사람들이 그 깊은 구멍을 바라보며 너도나도 흥분했다. 모두 앞다투어 신법을 써 산 아래로 향했고, 곧 산 정상엔 송기연 일행만 남아 그 장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염쌍아가 그 구멍으로 향하는 사람들을 보며 비웃었다.

“정말 죽음을 자초하는군!”

가슴이 철렁한 유가가 그 깊은 구멍을 바라보았다. 그가 기억하는 비경의 입구는 그렇게 위험한 곳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여인의 태도는, 그것도 아닌 것 같다

쿠아앙!

하늘을 뚫을 듯한 고함이 울려 퍼지자 구멍 근처에 있던 수진자들이 그만 몸이 굳혔다. 곧바로 깊은 구멍에서 들리는 비명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혼비백산했다. 그리고 깊은 구멍에서 튀어나온 세 마리 흉수 허영을 보고 말았다.

양의 몸에 사람의 얼굴, 호랑이 이빨에 사람 발을 가진 한 마리는 방금 떨어진 수진자들을 씹어 먹고 피비린내가 진동 했다. 다른 한 마리는 호랑이 몸에 사람 얼굴, 꼬리가 엄청 길고 멧돼지 이빨을 가졌다. 나머지 한 마리는 황낭(黄囊)처럼 생겼고 다리 여섯에 날개 네 개를 가졌는데,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저 세 마리 요수에 유가는 까무러칠 뻔했다.

도철(饕餮), 도올(梼杌), 혼돈(混沌) 세 마리 흉수였다! 이건 말도 안 되었다!

그의 작품 속에선 쭉 궁기만 언급될 뿐, 다른 세 마리 흉수가 나온 적이 없었다. 이 상황은 그의 예상을 완전히 벗어났다.

유가의 호흡이 거칠어지자 송기연이 그의 손을 꽉 잡으며 가까이 다가와 놀렸다.

“묵묵씨, 설마 겁먹은 겁니까?”

송기연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유가가 반박하려는데, 그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겁내지 마십시오, 제가 지켜드리겠습니다.”

송기연은 자신의 수련이 사존보다 낮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도 궁기 동굴에서의 일을 반복할 생각따위 없었다. 제자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 사존을 지킬 생각이었다.

커다란 손에 잡힌 손바닥에서 점점 열기가 피어올랐다. 아이의 말만큼이나 심장까지 뜨거워졌다. 유가는 송기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바보처럼 웃었다. 이 세계에 온 후로 항상 누군가를 보호하던 역할만 맡다 보니, 누군가가 이렇게 지켜준다는 날이 올지 몰랐다.

분지는 이미 한바탕 혼란스러웠다. 구멍에 가까이 간 수진자들은 되돌아가려고 해도 이미 때를 놓쳐 버렸다. 무리해서라도 삼대 흉수를 공격해 비경을 뚫고 들어가려해도, 멀리 떨어진 수진인들은 도움을 망설이고 있었다.

삼대 흉수는 잔영만 남아 있어도 힘은 보통이 아니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한눈을 팔면 그들의 입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달리 생각해보면 앞쪽에 사람들이 흉수에게 제거되면 그다음 차례는 자신들이었다. 비경엔 영원히 발도 못 들일 것 같았다.

“허영일 뿐이니 다들 두려워 마십시오! 다 같이 공격한다면 흉수를 제거하고 비경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 안에 얼마나 많은 보물이 있겠습니까!”

구멍 근처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모두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그가 수중에 검을 휘두르며 외쳤다,

“다들 공격합시다!”

그러더니 죽음이 두렵지 않은 듯 곧장 달려들어 도올과 뒤엉켰다.

사람들이 이를 악물었다. 이 일은 지체되면 그르치게 되었다. 이 사람의 말은 일리가 있다. 잠시 후 모두 자신의 무기를 꺼내 들고 한 번에 해치우려 삼대 흉수를 향해 달려들었다. 쪽수로 밀어붙여 흉수를 제거하고 재빨리 비경으로 들어가 보물을 찾을 생각이었다.

이곳에 오는 자들은 대부분 고수들이었고 설령 날지 못하는 무주지라도 그들의 수법은 뛰어났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긴장을 놓으면 이 흉수들의 입에 들어가 처참하게 씹혔다.

이 세계에 와서 이렇게 대규모의 혈전을 처음 본 유가는 가슴이 아렸다. 한 걸음을 내딛자 돕고 싶다는 생각이 생겼다.

송기연은 알고 있었다. 만약 그를 말린다면 그가 계속 마음을 쓴다는 걸. 염쌍아에게 다가가 말했다.

“누님, 삼형, 저와 제 벗도 가서 싸우려 합니다. 어쨌든 비경에 들어가려면 흉수는 죽여야 하니, 미리 돕는 게 더 좋은 일 아니겠습니까.”

염쌍아는 놀란 표정으로 송기연을 아래위로 훑어봤다. 그녀가 살펴본 바로는 이 소년은 어리지만 이상하리만치 냉정했다. 지금 이 아이의 정상적인 반응은 분명 좋은 구경을 하는 것일 뿐, 실력을 소모하며 상관없는 사람을 구하는 게 아니었다.

여인이 두 눈을 가늘게 뜨고 송기연 옆에서 계속 아무 말이 없던 유가를 흘겨봤다. 유가는 수시로 미간을 찌푸리며 비경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이 사람을 위해서? 염쌍아의 마음이 갑자기 맑아지더니 송기연에 대한 평가가 낮아졌다. 수진자가 자신의 허점을 대놓고 드러내는 건 현명한 선택이 아니었다.

“기연 아우께서 그리 조급하시면 가십시오, 나와 삼형은 여기서 기다릴 테니.”

염쌍아가 옆 남자를 끌어당기고 웃으며 송기연에게 지나가라고 길을 내어줬다. 이번 기회에 두 사람의 진짜 실력을 엿볼 생각이었다.

“그럼 저희 두 사람은 아래에서 두 분을 기다리겠습니다.”

송기연은 유가를 끌고 곧장 아래로 향했다.

좀 전에 유가는 어떻게 입을 떼야 할까 망설이고 있으나, 송기연의 말 한마디에 상황이 해결되었다. 이 녀석은 꼭 자신의 뱃속에 회충처럼 제 생각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산 아래로 내려간 두 사람은 곧 흉수와 뒤엉킨 수백 명의 사람들 앞에 도착했다. 유가는 송기연의 손을 놓고 몇 년 동안 허세용으로만 있던 검을 빼 들었다. 그리고 수진자 한 명을 물고 있는 도철에 향해 휘둘렀다. 대승기의 실력인 그는 모든 무기를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다. 지금 휘두르는 이 검도 다루지 못할 게 없다.

유가가 검날을 잔영에 휘두르자 도철이 거대한 몸을 한바탕 덜덜 떨며 수진자를 뱉어냈다. 빠르게 물러난 그 사람은 유가를 향해 감사 인사를 하는 듯 미소를 지었다.

사람들은 방금 막 진영으로 뛰어든 유가를 바라보며, 오직 검에 이런 힘이 있다는 것에 경악했다. 이자는 검법이 훌륭한 게 아니라 수련 자체가 강한 것이다. 좀 이따가 비경에 들어가서 이자를 만난다고 해도, 충돌하지 않는 게 당연히 좋았다. 수진자들은 성실히 이 얼굴을 머릿속에 기억해 두었다.

송기연도 패검을 빼 들고 유가와 합류하여 우선 도철부터 상대했다. 실력이 막강한 유가가 지원군으로 들어오자, 계속 지켜보고 있던 수많은 고수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뛰어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허영이 점점 흩어지고 형태가 사라지며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이미 승부는 판가름이 났다. 유가의 실력을 만족스럽게 확인한 염쌍아는 곁에 있던 남편을 끌고 빠르게 산을 내려갔다. 송기연과 합류하여 몇 수 쓰는 척도 했다. 많은 사람이 힘을 모아 세 흉수의 허영을 쓰러뜨리자 가려져 있던 비경 입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유가 덕분에 목숨을 건진 수진자들이 그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한순간에 분위기가 고요해졌다. 모두들 한뜻으로 그 깊은 구멍을 향해 달려들지 않았고 앞서가려는 의욕을 잃은 채 신중해졌다.

“하하, 다들 엄두를 못 내시니 이 여편네가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크게 웃음을 터뜨린 염쌍아는 송기연에게 눈짓하고 옆에 키가 큰 남자를 끌고 비경으로 들어갔다. 송기연도 고개를 끄덕이고 유가의 손을 더욱 꽉 잡고는, 몸을 날려 비경으로 들어갔다.

남아 있던 사람들은 유가가 내려가는 것을 보고 마음이 움직였다. 안에서 위험한 소리도 들리지 않자 앞다투어 비경으로 뛰어들었다.

유가가 막 비경에 들어왔을 땐 앞이 온통 깜깜했다. 한참을 내려간 뒤에 땅을 밟자 빛이 환하게 안을 밝히고 있었다.

빛을 따라 살펴보니 그들은 원형 대전 중앙에 서 있었다. 사방엔 열두 개의 통로가 있었고, 통로 옆엔 석대(石台)가 있었다. 석대 위에서 파란 빛이 타오르고 있었다. 게다가 그들의 옆에는 족히 5~6척은 돼 보이는 거대한 석재 검 조각이 있었다. 진짜 신검은 아니었지만, 기세가 대단했다. 검 끝은 청석에 꽂혀 있었고, 검자루는 천장에 맞닿아 있어 보기만 해도 대전을 받치고 있다는 느낌이 물씬 들었다.

염쌍아는 몸속 공간에서 양피를 한 장 꺼내어 자세하게 살펴보더니 열두 통로 중 동북쪽의 통로를 가리켰다.

“기연 아우, 우리는 저쪽으로 갑니다. 지체한다면 다른 자들이 뒤따를 거예요.”

송기연도 선착순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여기 비경에서는 무조건 누님의 말을 따르겠습니다.”

염쌍아는 웃으며 빠르게 지도를 말아 품에 넣고는 선택한 쪽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송기연도 곧장 뒤를 따랐다.

동굴은 대전처럼 밝진 않았지만, 다들 수련의 경지가 높아 어둠 속에서도 식별이 가능했고 별로 문제되지 않았다. 평평하지 않은 통로에서 유가는 송기연에게 끌려가며, 속으로 처음에 이 길을 열두 갈래로 설정한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생각하고 있었다. 좀 전에 주위를 둘러봤을 때 자신도 당황스러웠다. 각각의 통로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이렇게 보니 앞쪽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게 위험해 보였다.

얼마나 걸어갔는지 갑자기 바람이 불어와 네 사람이 걸음을 멈추었다. 유가는 가슴이 철렁했다. 조금 전까지 고요했던 통로에서 갑자기 바람이 불어오다니, 분명 또 무언가가 나타났다.

바람이 있다는 건 다른 출구나 갈림길이 있다는 뜻이었고, 그 말인 즉 그들이 보물과 더 가까워졌다는 말이었다. 가슴이 벅차오른 염쌍아는 계속 나아가려던 염삼아의 팔을 붙잡았다. 갑자기 주변 벽에서 십여 개의 빛줄기가 번쩍이더니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염삼아와 송기연은 옆 사람을 대신해 검을 휘둘러 갑자기 돌진해오는 검날을 막았다.

유가도 정신을 차리고 송기연을 밀어내고 뒤에서 덮쳐오는 검을 막았다. 그와 등을 맞대고 서서 주위의 동태를 경계하듯 살펴보았다. 좀 전에 송기연이 그를 품에 안고 막아섰을 때 유가는 그만 화가 폭발할 뻔했다. 자존심도 부릴 때 부려야지! 누가 누굴 지키고 센 척한단 말인가! 욕을 한바탕 쏟아 붓고 싶었다.

자신의 능력이 이 녀석보다 월등하니 방금 전에도 자신이 이 녀석을 지켜주는 게 맞았다. 검의 힘이 충분하지 않아서 다행이었지, 아니었다면 이 녀석은 꼼짝없이 다쳤다. 그럼 또 엄청나게 욕을 퍼부었을 것이다.

“묵묵씨, 제가 좀 더 안고 있으면 살점이라도 떨어져 나갑니까? 왜 이렇게 빨리 피하는 거예요?”

송기연은 속으로 기뻐했다. 사실 그는 다치고 싶었다. 그럼 사존께 기댈 수 있는 명분이 생겼다.

유가는 화가 치밀어 올라 들고 있던 검자루로 송기연의 허리를 힘껏 찔렀다. 송기연이 미처 예상 못한 일격에 숨을 들이키자 만족한 듯 미소 지었다.

“기연 아우, 모두 괜찮아요?”

방금 그 장면을 본 염쌍아도 어안이 벙벙했다. 누가 어떤 기관을 눌렀는지 몰라 검을 빼 들었다.

“누님, 저희 괜찮습니다.”

염쌍아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빛이 나오는 구슬을 꺼내어 지도를 비추며 자세히 살펴보았다.

“이 지도에선 이 길이 생로(生路)라고 하는군요. 기관은 거의 없지만 위험에 대한 설명도 정확하진 않아요. 우리가 직접 조심스럽게 움직여 봐요.”

송기연은 속으로 비웃었다. 사실 이 지도는 별 소용 없었다. 이런 상황을 마주했을 땐 직접 해결해야 했다.

송기연은 그저 유가의 뒤에 바짝 붙어 주위의 움직임을 살폈다. 반각(半刻)이 흐르고 통로에 갑자기 비명이 들려왔다가 곧바로 잠잠해졌다. 아무래도 누군가 속임수에 당해 심장이 찔린 것 같았다.

“기연 아우, 아무래도 이번 함정은 이미 지나친 것 같네요. 신중하게 나아간다면 앞으로 아무 일도 없을 거예요.”

염쌍아는 남편과 서로 등을 맞댄 자세로 계속 앞으로 이동하며 송기연과 유가에게 시범을 보였다.

유가는 저 자세가 너무 우스웠다. 그는 자신의 실력에 자신이 있으므로, 반쯤 몸을 돌려 송기연의 어깨와 맞댄 채 앞으로 나아갔다. 두 사람의 양쪽 뺨이 더욱 가까워진 건 어쩔 수 없었다. 유가의 오른쪽 몸이 송기연의 왼쪽과 맞닿아 있어서 상대의 심장 소리가 귓가에 더 크게 들렸다.

콩닥콩닥 빠르게 뛰는 게 충분히 활기찼다. 송기연은 이 자세가 너무 좋았다. 은밀하게 좀더 유가에게 무게를 두며 더욱 몸을 밀착시켰다. 아슬아슬하게 유가의 화를 돋우지 않는 선까지 기댔다.

바람이 더 세게 불며 크지 않은 통로에 윙 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침내 찾아낸 바람구멍은 두 갈래로 나누어지는 갈림길이었다. 바람은 그중 한 곳에서 나와서 큰 통로로 통했다.

염쌍아가 그 갈림길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럼 우린 바람이 불어오는 쪽으로 가보죠. 만약 위험에 빠진다고 해도 바람을 따라 도망 나오면 되잖아요.”

“좋아요, 그렇게 하죠.”

일행은 진지한 표정으로 어두운 통로로 들어섰다. 대략 반 시진 정도를 계속 걸어가다가 유가가 막 짜증이 밀려오는 순간 앞서가던 염쌍아가 발걸음을 멈추었다. 호기심이 생긴 유가가 염쌍아 너머를 바라보다가 눈이 동그래졌다.

통로의 끝은 주위와 똑같은 벽이었고 길은 없어 보였다. 상식에 맞지 않았다. 발원지가 없는데 바람은 어디에서 불어오는 거지?

갈림길에 들어선 염쌍아는 속으로 지도를 떠올렸다. 여기가 막다른 길일 리는 없었다. 이 끝 벽에 분명히 술법이 숨어있을 것이다.

앞에 벽에 손을 대려는 순간 옆에 있던 염삼아가 손을 끌었다. 남자는 앞으로 걸어가더니 허리춤에 찬 검을 빼 들었다. 진기를 감싼 검으로 세차게 벽을 찌르니, 검의 대부분이 벽 속으로 꽂혀 들어갔다. 그 단단하던 벽이 틈을 따라 균열하며 가루가 되어 땅으로 떨어졌다. 순식간에 벽에 거대한 틈이 생겼다.

틈에서 빛이 새어 나오며 어두웠던 통로가 밝아졌다. 그곳에서 더 거센 바람이 불어왔고 확실히 통로의 바람은 여기에서 나온 거였다. 구멍에서 불어오는 그 바람에서 예사롭지 않은 달콤한 향이 느껴졌다.

달콤한 향?!

유가의 곧바로 송기연에게 이 바람이 이상하다는 걸 알려 주려했다. 하지만 기연의 안색은 조금도 변화가 없었다. 기분이 이상하여 부부를 바라보자, 이 부부도 공기의 변화는 신경 쓰지 않았다. 유가는 더욱 의아해하며 공기 중의 달콤한 향을 집중하여 맡아보았다. 자신이 너무 지나치게 걱정한 것인가.

아무래도 어떤 독향이 아니라 꽃향인 것 같았다. 달콤한 꽃향기.

독이었다면 지금 다들 이렇게 멀쩡하게 서 있을 순 없었다. 다행히 몸은 이상하지 않았다.

“하하하, 역시 그랬군!”

앞쪽에 엎드려 안쪽을 살펴보던 염쌍아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흥분한 듯 남편의 손을 이끌고 말했다.

“빨리, 여길 다 뚫어야 해요!”

고개를 돌려 송기연과 유가를 보고 눈을 반짝였다.

“기연 아우도 어서 와서 도와줘요! 이 안이 비경의 대보고(大宝库-큰 보물 창고)예요!”

유가가 나서기도 전에 송기연이 막아서더니 검을 빼 들고 몇 차례 휘둘렀다. 그러자 그 벽에 큰 틈이 무너져 내렸다. 얼마 후, 송기연과 염삼아의 합작으로 벽에 사람이 지나갈 수 있는 큰 구멍이 생겼다. 곧 향기가 바람과 함께 불어와서 온 통로에 가득 퍼졌다.

구멍으로 발을 들이자 정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유가도 어안이 벙벙했다. 그 벽 안에는 또 다른 천지가 펼쳐져 있었다. 하늘과 해가 있고, 발아래는 부드러운 잔디가 있었다. 땅 위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영초(靈草)와 영목(靈木) 그리고 영과(靈果)가 있었다. 게다가 대부분 잘 여물어 공기 중엔 영기(靈氣)가 가득했다. 이런 광경을 대륙의 수진인들이 본다면 미치지 않는 게 이상했다. 영목과 영과 말고도 셀 수 없이 많은 꽃들이 있었는데, 이 달콤한 향기는 이 꽃에서 나는 거였다.

“기연 아우, 저와 남편이 여기에 온 목적은 바로 이 취영보고(聚灵宝库) 때문이에요. 여기에 저희가 원하는 게 많거든요.”

그녀가 옆에 있던 남자를 끌고 송기연에게 겸연쩍게 웃었다.

“우리가 먼저 골라도 될까요?”

송기연은 비경에 《천진결》 하반본을 얻으려고 온 것이라 영과니 영초니 이런 것들에 큰 관심이 없었다. 염쌍아의 요구를 딱히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다만…… 송기연은 여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교환을 원하는 것이라면 비경 지도를 보여 주시겠습니까? 여기에 들어온 지 한참이지만 아직 그 지도를 보지 못했습니다. 당신과 저는 이치에 밝은 사람이니 오고가는 정을 모르진 않으시겠죠?”

염쌍아가 안색이 급변하며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품에서 양피 지도를 꺼내 송기연의 손에 넘겨주곤 말했다.

“기연 아우 그게 무슨 말이에요? 이 지도를 가져가도 난 괜찮아요. 어차피 보기만 할 거잖아?”

“누님 감사합니다. 그럼 저와 벗은 여기에서 두 분이 고르고 나오시면 그때 고르겠습니다.”

송기연이 고개를 끄덕이고 더 염쌍아를 상대하지 않았다. 옆에 유가를 끌어 영목을 찾아 바닥에 앉았다. 앞에 지도를 펼치고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염쌍아는 얼굴에서 웃음기를 거두고 차가운 눈빛은 득의양양해 보였다. 지도상의 중요한 표식은 이미 자신이 다 지운 후였다. 송기연은 영원히 취영보고의 비밀을 알 수 없다. 똑똑하다지만 아직 아이일 뿐이다. 여인과 다투기엔 수준 차이가 났다.

그녀와 염삼아의 명성은 거저 나온 게 아니었다. 두 사람은 독이 침투하지 못하는 신체를 가졌을 뿐 아니라, 마계에서 독을 쓸 수 있는 고수였다. 세상 사람은 그들을 ‘마염라(魔阎罗)’라고 불렀다. 그들을 건드리면 염라국에 발을 들이는 셈으로 쥐도 새도 모르게 죽고 말았다. 이번에 무주지에 온 것도 부탁을 받은 것이고 취영보고에서 쓸만한 물건을 건져서 돌아가고 싶을 뿐이었다. 만약 해낸다면 혈침역의 역주 자리는 그녀의 것이었다.

하지만 여기에 진짜 식령초(蚀灵草)가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염삼아는 저쪽에 앉아있는 유가를 바라보았다. 왠지 모르게 그는 저자도 마족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유가가 너무 잘 속인 탓에 그는 아직도 자신의 직감이 맞는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저자가 엄청 위험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전에 그는 마존을 한번 마주친 적이 있었다. 멀리서 바라본 것 뿐이지만 그는 이미 그에게 굴복했었다. 천생 마체는 마족에서도 천년에 한번 볼까 말까 한 고귀한 체질이었고, 그건 혈맥을 따라 억압을 일으켰다. 그런데 지금 그는 저자의 몸에서 살짝 그런 억압감이 느껴졌다. 조금 신경이 쓰였다.

“삼아, 뭐 하는 거예요? 어서 따라와요.”

염쌍아가 자신을 부르자 정신이 든 그는 끄덕이며 곧장 따라갔다. 그녀가 해야 할 일을 그는 곁에서 도왔다. 게다가 두 사람의 생사는 둘의 운명에 달려있었다.

“찾았다.”

한참을 찾던 염쌍아가 드디어 잡초들 사이에서 눈에 띄지 않는 식령초를 찾아냈다. 검은색의 작은 식물로 잎은 가늘고 길며 단단했다. 물에 녹으면 무색무취에, 태우고 나면 은은한 향기가 퍼졌다. 장시간 흡입하면 사람의 진기를 조금씩 부식시켜 흡입자 진기의 움직임을 억제했다. 대결시에는 순식간에 성패가 결정되었다. 만약 진기를 쓰지 못한다면 그 뒷일은 생각도 하기 싫은 일이다.

“이게 정말 있을 줄이야.”

염쌍아가 식령초를 본 건 고서가 전부였다. 무주지에 왔지만, 그녀도 진짜 식령초를 찾을 줄은 몰랐다. 지금 찾고 나니 놀라울 뿐이다. 그녀는 네모난 옥상자를 꺼내어 열었다. 조심스럽게 식령초 몇 뿌리를 전부 상자 속에 넣고, 세어보니 모두 네 개였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젠 취영보고의 물건을 가지고 가는 일만 남았다.

지도 위엔 규칙이 정확히 써 있었다. 취영보고에선 다섯 개의 물건을 가질 수 있는데, 하나를 더 가진다면 죽음을 자초했다. 그녀가 송기연과 연합한 목적은 분명했다.

희생양. 두 사람이 영과를 가지러 간 틈에 염삼아와 이곳을 떠난다면 재난을 면할 수 있었다. 선계의 저 두 사람은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는데, 그럼 일석이조였다.

잠시 후 마음에 드는 영과 하나를 찾은 그녀는 염삼아를 끌고 송기연의 옆으로 다가와 웃었다.

“기연 아우, 우린 원하는 걸 다 가져왔습니다. 이제 당신이 갈 차례입니다.”

유가는 미간을 찌푸렸다. 두 사람을 쭉 지켜봤다. 두 사람이 한참이 걸려 나왔지만 사실 물건은 몇 개 가져오지 않았다. 이렇게 큰 취영보고에 약초와 영과가 무수히 많은데, 이렇게 조금 가지고 오는 건 납득이 되질 않았다.

송기연은 대답하고 일어나 지도를 자신의 공간 속에 넣었다. 유가를 끌고 그가 좋아하는 걸 찾으러 갈 생각만 했지, 염쌍아의 웃음 뒤에 숨겨진 찬 기운은 발견하지 못했다.

두 사람이 약초를 찾으러 가자, 염쌍아는 급히 남편을 끌고 방금 뚫어 놓은 입구로 빠르게 나갔다. 동시에 송기연은 붉은 꽃 한 송이를 꺾어 유가에게 전해 주려 했다.

콰과광-!

갑자기 거대한 굉음과 함께 땅이 미친 듯이 흔들렸다. 그리고 취영보고의 사면에 벽이 우뚝 솟으며, 좀 전에 직접 뚫었던 문이 봉쇄되었다.

유가는 가슴이 철렁했다. 그는 《선마겁》에서 취영보고에 대해 묘사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이곳에 대해 알지 못했고, 지금 이 상황은 완전히 예상 밖의 상황이었다.

“제길! 저 여자에게 속았어!”

염쌍아와 염삼아는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진 뒤였다. 상황을 보아하니 두 사람은 실정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급히 도망간 것이고 자신과 사존이 그들의 방패막이 된 것이다.

손에 있던 붉은 꽃이 순식간에 가루가 되어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송기연이 유가를 바라보고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유가의 뒤에서 토인(土人)이 그들을 공격해왔다. 동공이 수축한 그는 급히 검을 빼, 한 손으로는 유가를 끌어당기고 다른 손으로 검을 휘둘렀다. 토인은 두 조각이 되어 바닥에 쓰러졌다.

불길한 예감이 밀려들었다. 송기연이 주위의 벽을 바라보며 숨을 들이마셨다. 벽에서 석인(石人)이 하나둘 나오기 시작했다. 각양각색의 무기를 손에 들고 두 사람을 향해 오는데 수가 점점 많아졌다.

송기연이 반토막 낸 토인을 바라보던 유가가 빠르게 움직였다. 급히 송기연의 손을 뿌리치고 검을 휘둘러 다시 합쳐진 토인을 베어버렸다.

바닥에서 계속 꿈틀거리는 흙 조각을 보던 유가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이번엔 진짜 쉽지 않을 것 같다.

이제 와서 어떤 후회를 해도 소용이 없었다. 이제는 무리해서라도 해야 했다. 그가 급히 검을 휘둘러 연속으로 토인을 베어버렸다. 이번엔 힘으로 그 토인을 가루로도 만들었는데, 바람을 타고 공기 중에 흩어졌다.

이렇게 하면 토인이 다시 살아나지 못할 거로 생각했다. 하지만 주위의 진흙이 요동치더니 천천히 모양을 만들어 다시 두 사람을 공격해왔다.

“묵묵씨, 내가 그들을 잡고 있을 테니 신경 쓰지 말고 도망쳐요!”

그럴 수 있겠냐고!

유가는 진지한 표정으로 자신에게 도망가라는 송기연을 정말 때려주고 싶었다. 똑같은 상황이었다. 송기연은 자신을 위해서 나섰고 나는 계속 화가 치미는 게 반복됐다.

내가 널 어떻게 두고 가냐고. 무주지로 온 건 송기연 때문인데 이런 위험한 상황에서 그를 어떻게 방치하겠는가.

유가가 송기연에게 다가가 그의 손을 꼭 부여잡았다. 그리고 최대한 결연한 표정으로 천천히 한 자 한자 또렷이 말했다.

‘우. 린. 같. 이. 갈. 거. 야.’

말을 하고는 곧장 송기연의 손을 놓고 먼저 벽 앞으로 날아갔다. 토인보다 최소 백 배는 더 단단하게 느껴지는 석인을 무작정 베어넘겼다. 저도 모르게 볼이 살짝 붉어졌다.

이 말이 얼마나 오글거리는 말인가!

하지만 좀 전엔 자신도 모르게 그러고 말았다.

잠깐 멍해졌던 송기연도 바로 정신을 차리고 옆에서 튀어나오는 토인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입꼬리가 점점 올라가더니 곧 두 눈이 웃음에 파묻혔다. 삼 년 만에 사존이 처음으로 먼저 자신의 손을 잡은 것이다. 그가 전해준 차가운 온도가 자신의 손바닥에 남아있었다. 남아있다 못해 천천히 마음속에 녹아들었다.

왼손을 소중하게 잡은 송기연이 신법으로 빠르게 유가의 곁으로 다가갔다. 점점 더 많은 석인이 두 사람의 주위를 에워쌌다. 송기연은 유가를 힐끗 보다가 그의 뺨에 입을 쪽 맞추고 웃었다.

“묵묵씨, 당신 말이 맞아요. 우리 같이 나갑시다.”

말을 마친 송기연이 자신의 진기를 최대로 끌어올려 검을 공중으로 띄웠다. 그리고 손 위에 법진을 치자, 공중에 패검이 수백 개로 늘어났다. 하나하나 모든 검이 차가운 빛을 내뿜으며 엄청난 위력을 과시했다.

지금 그의 능력은 원영기 중엔 상대가 없었고, 화신기 고수들과도 겨룰 만했다.

순식간에 뺨의 순결을 뺏긴 유가는 멍해져서 그곳을 닦아버렸다.

마음속이 묘하게 울렁거리는데 싫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좋은 게 아니다! 아니!

이미 제정신이 아닌 걸 스스로 느낀 유가는 급히 생각을 고쳐먹고 모든 잡념을 억눌렀다. 그러다가 또 저쪽에서 전력을 다하는 송기연을 보고 웃음이 터졌다.

그는 이미 오랫동안 저 녀석을 봐왔다. 더러운 그 감옥의 녀석부터 계속, 계속 보아왔다. 어렴풋이 지나가는 감정의 이름을 잘 모르겠다. 어쨌든 이 녀석이 이렇게 진짜 행동으로 옮긴 건 처음이었다.

아이의 성장 속도가 정말 놀랍다. 역시나 나중에 선계를 통일할 사람이었다.

유가는 깊은 숨을 들이마시고 더는 꾸물거리지 않았다. 진기를 검으로 모으고 수천 개의 검을 만들어 석인에게 날려버렸다. 모든 검이 한 석인에게 정교하게 날아가서 산산조각을 내고 땅 위에 흩어졌다. 순식간에 포위망에 틈이 생겼다.

송기연 쪽에 수백 개의 보검은 더욱 흉악했다. 모든 검이 정확히 석인을 노리고 찍어 그들을 가루로 만들며, 그것들이 만들어지는 속도를 늦췄다.

벽은 계속해서 석인을 만들어냈다. 유가가 포위망을 뚫고 나갈 수 있는 첫 번째 조건은 입구를 막고 있는 벽을 부수는 것이다. 거의 가진 모든 힘을 쏟아부었다. 그때 완십주는 절반밖에 쓰지 않은 그의 힘을 막아내지 못했다. 지금 유가는 이 벽을 부술 수 있다고 자신했다.

하지만 곧바로 일어난 일에 유가는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의 검이 벽에 닿는 순간 순식간에 삼켜졌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게다가 그 벽에 간신히 냈던 균열조차 사라졌다.

유가는 경악했다. 그 사이 그 석인은 또다시 모습을 갖추었고 진흙도 계속해서 토인을 만들어냈다. 그는 우선 이 심란함을 넣어두고 공간 속에서 검을 하나 더 꺼내 주위에 있는 토인과 석인부터 베어버렸다.

도저히 이렇게는 안 되었다. 이건 소모전밖에 되질 않았고 궁지로 몰리는 건 시간문제였다.

공기 중에 달달한 향기는 더욱 짙어졌다. 유가는 송기연의 곁으로 물러났다. 막 검을 휘두르려는데 손에 힘이 빠져 하마터면 검자루를 놓칠 뻔했다. 급히 그는 체내의 진기를 움직여 보자, 극히 소량만 남았다는 걸 깨달았다.

송기연을 바라보는데, 송기연도 마찬가지로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뭔가 잘못되었다. 수백 개였던 검이 수십 개밖에 남지 않았다.

“꽃향에 독이 있어요!”

송기연이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묵묵씨, 코와 입을 막고 되도록이면 꽃향기 맡지 마세요!”

송기연은 옷을 두 장 찢어 유가 얼굴에 먼저 둘러주었다. 다른 한 장으론 서둘러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몸속 공간에서 독을 피할 수 있는 약초도 꺼내 하나는 유가에게, 자신도 하나를 삼켰다.

“묵묵씨, 빨리 그 약초 먹어요. 어떤 독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약초가 도움이 될 겁니다.”

그는 결연한 눈빛으로 검을 휘둘러 두 사람 주위의 석인을 처단했다. 그리곤 열심히 약초를 먹고 있는 유가를 와락 껴안았다.

“제가 죽기 전엔 저자들이 당신을 다치게 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는 돌아서서 유가의 앞을 막아섰다. 남아 있는 진기를 움직여 강력하게 신식을 움직였고 다시금 검진을 만들었다. 차가운 표정으로 저 감정 없는 석인들을 철저히 제거했다.

그는 궁기 동굴에서 누구든 사존을 다치게 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전에 수조에선 이기적인 잘못을 저질렀지만, 생사가 걸려 있는 지금 자신의 맹세를 이행하려 했다. 그는 유가를 지켜낼 것이다. 만약 누구든지 사존을 공격하고 싶으면 먼저 자신의 시체를 밟고 가야 할 것이었다.

유가는 검자루를 쥔 손이 살짝 떨렸고, 마음이 무슨 갓 지어낸 빵처럼 따뜻했다. 그럴 때가 아닌데도, 그는 또다시 이 녀석에게 감동을 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육 년 전 그 왜소하고 병약하던 아이가 눈 깜짝할 사이 소년의 모습으로 자랐다. 그리고 더 자라고 있었다. 어느새 넓어 보이기 까지 하는 등짝이 의외로 믿음직스러웠다. 유가는 정신을 차리고 송기연과 등을 맞대었다. 오른손엔 검을 꽉 쥐고 왼손엔 흑금장갑을 씌우고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는 반드시 송기연을 데리고 도망친다. 고작 이 작은 취영보고가 자신을 막을 리가 없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두 사람은 남아있는 진기를 모조리 소모해 버렸다. 송기연은 검진도 만들지 못하고 손에 든 검으로 달려드는 석인을 필사적으로 상대했다. 유가의 상황은 더 안 좋았다. 그는 묵묵히 송기연을 대신해 대부분의 석인을 담당했다. 진기 소모는 훨씬 심했고 눈앞이 어지러울 정도였다.

좀 전에 응결한 석인이 큰 망치를 들고 유가의 머리를 내리치려는데 제때 돌아선 송기연이 그 광경을 봤다. 다행히 마지막 진기가 손에 든 검을 날려 그 석인을 정확히 둘로 쪼개버렸다.

송기연 앞에 석인은 그가 무기가 없는 틈에 큰 검을 휘둘러 그를 베려 했다. 송기연이 고개를 돌려 그 석인을 보자, 눈에서 붉은빛이 번득거리더니 등에서 궁기의 허영이 피어올랐다. 곧 주먹으로 석인의 가슴팍을 한번 했고 바로 산산조각이 났다.

유가가 정신을 차렸지만 체내가 공허함이 너무 선명했다. 진기가 완전히 텅 비어 버렸다. 송기연이 부상당하지 않은 건 다행이었지만 뭔가 이상했다. 그는 자신보다 중독이 안 된 것도 아니다. 이 약초는 독을 피하는 효능만 있고 해독을 할 수 없다. 그럼 송기연은 지금 자신처럼 진기가 없어야 하는데 갑자기 저 궁기의 허영은 어디서 튀어나온 거지?

하지만 지금은 유가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았고, 그는 무리해서 송기연의 뒤를 노리는 석인의 허리를 베어 버렸다. 그리고 송기연의 곁에 서려고 했는데, 그만 바닥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젠장! 이럴 때 실수를 하냐!

송기연은 이미 검을 버리고 《천진결》로 수련한 강인한 체질로 꼭두각시와 전투를 벌였다. 유가가 땅에 넘어지는 것을 보고 그는 더욱 맹렬하게 공격하기 시작했다. 몸에 피로함이 끊임없이 그의 의식을 갉아먹고 있었지만, 그는 자신이 절대 쓰러지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반드시 사존을 지킬 것이다.

유가는 어지러운 머리를 내저으며 옆에 떨어진 검을 줍고 간신히 일어났다. 옆에 이를 악물고 견디는 송기연을 보고 다시 전의가 불타올랐다. 절대 송기연에게 방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 자신을 경멸할 것 같았다.

끊임없이 몰려오는 꼭두각시를 대적하며 유가는 이 세계가 실재한다는 사실을 다시 실감했다. 작품 속 이야기가 아닌 실재하는 곳. 그는 이 세계에서 수많은 다른 일을 겪었고, 다른 감정을 느끼며 이 세계의 것을 좋아하게 됐다.

“묵묵씨! 만약 살아 돌아갈 수 있다면 제가 한 번만 안고 자도 될까요?”

송기연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울려 퍼졌다. 희미한 정신으로 겨우 석인과 대적하던 유가는 알아듣지 못했다. 송기연을 힘겹게 바라보자, 송기연은 자신을 덮쳐오는 석인을 처리하고 활짝 웃으며 다시 말을 반복했다. 목소리가 온 취영보고에 울려 퍼졌다.

“묵묵씨, 잘 들으세요! 만약 살아 돌아갈 수 있다면 제가 한 번만 안고 자도 되냐고요!”

모든 힘을 다 쏟아부은 소년의 목소리에 피로한 기색은 전혀 없었다. 자신감 넘치는 모습에 유가가 그만 멍해졌다.

너에게 안겨서 잠을 자다니!

온 얼굴이 일그러지는 느낌이었다. 이런 낯부끄러운 말을 이렇게 떠벌린단 말인가! 하지만 송기연의 위험 발언에도 유가는 확실히 예전 만큼 긴장하지 않았다. 만약 그가 말을 못하는 척하지 않았다면 지금 그에게 딱 한 마디 해주었을 것이다.

‘버텨만 준다면 나간 뒤엔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여라.’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또 버티며 유가는 잡은 꼭두각시를 발로 걷어찼다. 장검을 들어 땅에 쓰러진 꼭두각시를 산산조각을 내고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간신히 눈을 떴다. 벽과 땅이 더는 꼭두각시를 만들지 않았고, 그들을 향해 오던 꼭두각시도 제자리에 멈춰 섰다.

“묵묵씨, 조심해요!”

송기연은 이 상황을 보고 유가의 곁으로 되돌아가 한층 더 경계했다. 이변이 일어나면 꼭 이상한 일이 생다. 갑자기 조용해지면 그 뒤엔 더 큰 위험이 따랐다. 결코 방심할 수 없다.

체내의 진기가 움직이지 않았다. 궁기 혈맥의 힘으로 강인한 체질을 만들었지만, 지금까지 움직인 것도 극한이었다. 송기연은 긴 옷소매로 허리춤에 난 상처를 틀어막았다. 검을 땅에 박고 숨을 몰아쉬는 유가를 보며 이 상처를 완전히 지워버렸다.

이 상처를 사존이 알아서는 안 된다. 그럼 이 위험 속에서 자신은 걸림돌만 될 뿐이었다.

조금 더 지나도 꼭두각시들은 여전히 멈춰 서 있었고, 산산조각난 꼭두각시도 다시 살아나지 않았다. 거대한 취영보고 안에서 두 사람의 심장 박동과 바람 소리만 들리고 있었다.

유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그저 바닥에 아무렇게나 앉고 싶었다. 하지만 그 찰나꼭두각시들이 모조리 가루로 변해 무너지고 바람을 따라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유가가 믿을 수 없어 눈이 크게 떴다. 젠장. 이건 또 뭐야.

공기 중에 흩어졌던 돌가루와 모래가 거대한 소용돌이를 형성했다. 저 넓은 곳에서 천천히 속도를 늦추며 선회하더니 그것들은 곧 검은 장포의 모자를 뒤집어쓴 사람 모양으로 바뀌었다. 굳어지고 다시 균열하다 얼굴 부분에 균열이 생겼다. 점점 넓어지며 굳은 것들이 고치가 갈라지듯 쪼개졌다. 그리고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얼굴 위쪽은 검은 장포를 뒤집어쓰고 아래쪽에 날렵한 턱선과 얇은 입술을 드러낸 사람이었다. 그가 창백한 팔을 내밀어 제 모습을 몇 번이고 보는데 믿기지 않는 듯 보였다. 장포를 잡으려 해도 그대로 통과했고 그에 더 의기소침하여 가련해 보였다.

유가는 피곤한 머리에 더 눈앞 상황이 들어오지 않았다. 하지만 손바닥의 흑석각인이 또다시 나타나 붉게 뜨거워졌다.

송기연이 알아챌까 유가가 급히 주먹을 쥐었으나 몸이 덜덜 떨렸다. 머릿속에 깨진 화면들이 일부 떠올랐다. 검은 장포 입는 걸 즐기는 소년이 찬란하게 핀 꽃을 들고 자신을 향해 웃고었다.

‘존주, 이거 저 소칠(小七)이 직접 기른 겁니다. 이쁘지요?’

가슴에 통증이 생겼다가 온몸으로 퍼졌다.

유가는 가슴팍을 부여잡고 호흡이 가라앉은 사내를 보았다. 눈 속엔 죄책감과 안타까움이 있었다.

흑석각인에서 몇몇 기억을 전해주었고, 유가는 그 속에 존재하는 감정들을 여실히 느꼈다. 본래의 ‘유가’는 이 검은 옷을 입은 사내를 알고 있었고 친밀한 사이였던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심한 고통을 느낄 리가 없었다. 자신이 이전에 심장병을 앓을 때와 다르지 않았다.

송기연은 유가가 심상찮음을 느끼고 그의 앞으로 나아갔다. 유가를 뒤로 숨기고 경계하는 눈으로 사내에게 물었다.

“누구냐?”

사내는 그의 질문을 듣고 검은 장포-두포(斗篷)를 벗으려는 헛수고를 그만두었다. 두 사람을 알아차려 놀란 소리를 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당신들은 누구냐?”

사내가 송기연 옆에 유가를 바라보다가 의문이 생겼다. 이자의 기운은 존주의 기운과 거의 흡사했다. 하지만 생긴 건 완전히 다른 사람이다. 그가 존주라면 이렇게 약할 리도 없었다. 망령 상태인 자신의 수법에 당하다니.

근데 자신은 어째서 이렇게 적은 영혼만 남은 걸까? 존주께선 자신이 예전에 선계의 공격으로 혼이 흩어진 걸 기억하실까? 설마 존주께서 자신을 살려주신 걸까?

사내는 그는 이 거대한 취영 고에서 주변에 남아 있는 석고인들을 보며 눈이 시큰해졌다. 존주께선 이렇게나 자신에게 마음을 쓰셔서 이 많은 영식(灵植)을 심어 자신의 잔혼으로 원기를 회복해 주었다. 하지만 그 오랜시간 이 거대한 영기에도 이렇게 적은 영혼만을 겨우 모았다. 그는 이미 투명해진 자신의 손바닥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역시 오래 버티진 못할 것 같았다.

“여기서 어떻게 나가는지 아는가?”

송기연은 그가 적의를 가진 사람은 아닌 것 같아 일단 그에게 물었다.

사내가 송기연을 바라보다가 두포 속에 숨겨진 미간을 찌푸렸다.

좀 전에 자신은 왜 저 소년이 천 년 전, 그 선계의 개자식과 닮았단 걸 몰랐던 거지? 외모뿐만 아니라 몸의 기운조차 비슷했다. 설마 이자가 그의 환생인가. 그의 영혼이 아직도 안 죽은 건가.

사내는 갑자기 돌변하여 살기를 띠었다. 두포에서 드러난 창백한 팔뚝에 적색 무늬가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상대의 살기가 솟아오르는 걸 느낀 송기연은 가슴이 철렁했다. 급히 휴식하려고 응결한 진기를 움직여 바로 대응할 준비를 마쳤다.

“과연 《천진결》을 수련했군.”

사내의 차가운 목소리에 유가가 깜짝 놀랐다. 그가 어째서 《천진결》에 대해 이렇게 잘 안단 말인가.

《천진결》의 명성은 대륙에 자자했지만, 그 위력에 대해 아는 이는 극히 드물다. 후에 오직 송기연 한 명만이 수련했고, 지금 송기연은 대륙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인물이 아니다. 지금 영혼 상태인 저 검은 소년이 어떻게 보자마자 《천진결》인 걸 알아차렸지.

흑석각인이 또다시 뜨거워져서 유가의 머릿속에 순식간에 무수한 정보들이 쏟아졌다. 너무 복잡하여 그가 알아볼 수도 없었고 관자놀이만 아파왔다.

원래 유가에겐 도대체 무슨 숨겨진 이야기가 있어서 작가인 나도 몰라?

여기에서 자신이 간과한 얼마나 많은 인과가 이 세계를 바꾸고 있을까? 자신은 무엇 때문에 넘어온 거지?

송기연은 그 사내와 대치하다가 뒤에 서 있는 유가의 기운이 불안정해지는 걸 느끼고 급히 흔들리는 몸을 붙잡았다.

“묵묵씨, 왜 그래요?!”

흐드러진 초점 사이로 저를 걱정하며 초조하고 더러워진 송기연의 얼굴이 보였다. 쓸데없이 바보 같게도 그것만으로 기뻤다.

그래. 과거의 유가는 지금 신경 쓰지 말자.

이 세계에 와서 송기연과 아구만으로 만족했다. 원래 유가의 기억이 생각나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지금 자신이 경험한 기억으로도 충분했다.

유가는 머리를 내저으며 괜찮다고 표현했다.

“오늘 존주를 대신해 후환인 너를 제거하겠다!”

송기연이 그 선계의 개자식인 것을 알아차린 사내가 바닥의 진흙과 돌가루를 날카로운 뿔로 만들어 날려보냈다.

송기연은 유가의 앞을 막아서 중급 패검을 꺼내 강제로 진기를 움직였다. 유가를 반원 동선으로 에워싸고 매섭게 달려드는 뿔모양 석추(石锥)를 막았다. 유가도 복잡한 생각을 넣어두고 마음을 가라앉혔다. 한 손엔 주먹을 쥐고 다른 손으로는 다시 검을 휘두르며 송기연과 함께 석추를 없앴다.

사내가 미간을 한껏 찌푸렸다. 존주와 기운이 비슷한 저자가 다치는 건 원치 않았다. 하지만 계속 저 개자식과 같이 있어 손을 쓸 수 없었다. 고심하던 그의 시선이 우연히 만개한 화초에 꽂혔고, 그 순간 머릿속에 방법 하나가 떠올랐다.

그는 영혼 상태였고 이 취영보고는 오랫동안 그와 함께 공존해 왔다. 여기에 수많은 것들을 조종하는 건 일도 아니다. 그는 넝쿨들로 유가를 멀리 보내고 이 개자식을 죽여도 늦지 않다고 생각했다. 곧바로 일부 화초와 덩굴을 급속도로 성장시키곤 맹렬한 힘으로 유가를 감아 뒤로 끌어냈다.

유가는 발목을 감는 넝쿨을 족족 잘라냈지만 덩굴의 속도가 더 빨랐다. 힘도 점점 거세졌고 몸도 더 끌려갔다.

“묵묵씨!”

송기연은 이미 한계였다. 뒤에 유가도 갑작스러운 공격에 끌려갔다. 그의 눈에 또 붉은 빛이 반짝이며 날카로운 석추는 신경 쓰지 않고 최대로 빠르게 유가를 뒤쫓았다. 송기연은 유가를 뒤덮은 덩굴을 모조리 잘라버리고 벗어난 유가를 품에 안았다. 송기연이 아주 잠시 안도했다. 그 순간 얼굴이 굳어졌다.

그는 한층 탁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봐요. 날 떠나지 말라고 했죠.”

유가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손으로 송기연의 뒤를 더듬으려다 그에게 붙잡혔다. 송기연은 유가의 머리를 더 품에 숨기며 천천히 바닥으로 무릎을 꿇었다. 언제나 짙었던 검은 눈동자가 혼이 나가 있었다.

유가가 송기연의 품에 파묻힌 시선을 굴려 그들이 내려앉은 땅을 쳐다보았다.

그럴 줄 모르기도, 그럴 거라 예상한 것처럼 땅은 짙은 핏빛으로 물들며 넓게 넓게 퍼져 나갔다.

유가는 바닥에 꿇어앉아 몸부림치지 못했다. 송기연의 온몸의 무게가 고스란히 그에게 전해지고 있었다. 송기연이 잡은 손이 유가의 손을 놓치고서야 유가도 정신을 차렸다. 정신을 잃은 송기연의 등을 만져가며 유가는 빨리 지혈단을 꺼내 먹이고 그를 바닥에 옆으로 눕혔다.

유가는 싸늘한 눈으로 일어나 사내를 바라봤다.

하지만 저 검은 소년은 자신을 보며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가 소름끼치게 웃자 송기연의 등에 꽂힌 석추도 부스러져 사라졌다. 결국 피가 낭자한 상처만 남았다.

검은 소년은 자신의 손바닥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사내의 형체는 바람을 따라 점점 투명해져갔다.

“존주, 많이 그리웠습니다.”

담백한 한마디가 여운을 남기기 전에 유가의 심장이 또 격통을 일으켰다.

“소칠!”

사내가 사라지던 순간 유가는 사내의 잔영이라도 잡으려는 듯 손을 뻗었으나,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콰광—!!

사내가 사라진 게 마치 신호탄처럼 발 아래 땅이 격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하늘의 해가 떨어지고 빛이 사라졌고 취영보고는 한순간에 어두워졌다.

유가는 가슴의 통증을 생각할 겨를 없이 송기연의 곁으로 재빠르게 다가갔다. 우선 그를 데리고 취영보고 구석에 숨어있다가 상황이 잠잠해지면 길을 찾아 나갈 생각이었다.

송기연을 끌어 안은 순간 발 아래가 무너지며 그대로 깊은 아래로 떨어졌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송기연을 보호하며 자신의 등으로 땅에 부딪혔다.

“커헉!”

진기가 몸을 보호하지 않을 때는 넘어지면 안 된다는 걸 그는 이제서야 알았다.

두 사람이 떨어지자 벽에 걸린 등에서 은은한 빛이 타오르기 시작하며 주위를 환하게 밝혔다.

송기연에게 눌린 유가는 그의 약한 심장 박동을 듣고 놀랐던 가슴도 점점 안정되었다. 좀 전에 그는 이 녀석 때문에 심장이 떨어질 뻔했다.

송기연의 손이 미끄러져 떨어질 때 그는 울음을 터트릴 뻔했다. 다행히 출혈량이 많을 뿐이고, 이 정도 부상으론 목숨이 위험하지 않았다. 며칠 푹 쉰다면 다시 뛸 수 있었다.

유가가 알아채지 못한 건 사내가 존주를 염려하여 더 잔인한 수단을 사용하지 않았고 송기연의 목숨도 살려 두었다는 것이다.

그는 이 자세로 바닥에 누워 잠시 휴식을 취했다. 그동안 그는 자신의 반지 속에 몇 개 안 남아 있던 상처 단약을 모두 송기연에게 먹였다. 속으로 나중에 다시 장금문으로 가서 훔쳐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잠시 후, 그는 송기연을 바닥에 옆으로 눕히고, 그의 옷을 찢었다. 그를 뒤집고 피는 멈췄지만 아직 보기 흉한 상처를 바라보았다. 코를 훌쩍이며 빨개진 눈을 닦았다.

급히 반지 속에서 전에 빻아두었던 약초를 꺼내 그에게 바른 뒤 자신의 하얀 옷을 꺼내 찢었다. 그리고 송기연의 상처를 잘 동여맸다. 반지 속에서 옷 몇 벌을 더 꺼내서 잘 포갠 뒤엔 송기연의 머리 아래에 받쳐 주었다.

지난 삼 년 동안 유가는 송기연이 이렇게 다친 걸 본 적 없었다. 두 사람이 이 지경이 된 건 처음이었다. 이 녀석은 크면 클수록 더욱 걱정을 시킨다. 자신은 튼튼하여 크게 다치지 않는데 그는 애써 왜 자신 대신에 그 고생을 하려 할까?

송기연의 이마를 짚어 보아도 열은 없었다.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앞으론 더욱 조심하여 절대 이런 궁지에 몰리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그 부부를 다시 맞닥뜨린다면 결단코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다.

그는 주위 환경을 둘러보고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주위는 벽뿐이었고 아무것도 없었다. 게다가 좀 전에 두 사람이 떨어진 꼭대기 역시 완전히 봉인되었다. 두 사람은 밀폐된 공간에 갇혔고 나가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잠깐만. 밀폐된 공간!

벌떡 일어난 유가의 두 눈이 반짝거렸다.

《선마겁》에서 무주지 비경에 있는 유일한 밀폐된 공간이라면, 《천진결》의 소재지 아니었나? 두 사람이 우연히 숨겨진 《천진결》의 밀실로 들어온 거야?

담청색의 불빛이 벽에서 비추었지만 위쪽엔 어떤 글자도 보이지 않았다. 유가가 앞으로 걸어가며 벽을 손으로 더듬거렸다. 그러다 익숙한 느낌이 용솟음쳤다. 이 벽에 아무래도 자신과 근원이 같은 것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예전에 취영보고의 석벽이 패검을 석벽을 삼켜버렸을 때도 그는 익숙한 느낌을 받았었다. 다만 그때의 상황이 급박하여 무시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확실히 좀 이상했다. 원래 유가의 기억 속 그 흑의인(黑衣人)까지 떠올리자 이 비경은 확실히 뭔가 복잡하게 변하고 있었다.

급히 손을 떼고 더 만지지 않았다. 이렇게 뭔가 기연으로 보물을 발견하는 건 주인공의 몫이다. 유가는 상처입은 송기연에게 다가가 조심히 곁에 누우며 잠을 청했다.

취영보고에서의 고전은 확실히 너무 힘들었고 심장도 너무 요동친 탓에 잠을 설쳤다.이상한 꿈들을 잔뜩 꾸면서 그는 숨이 막히고 힘들었다. 급히 눈을 번쩍 뜨자 눈앞엔 살색과 하얀 천만 보였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자신이 이 앞 사람의 품에 꼭 안겨 있었다.

왜 그렇게 숨이 막혔는지 알았다. 이렇게 꼭 껴안고 있는데 숨이 쉬어지겠어?

송기연은 유가가 깨어나도 손을 풀지 않았다. 오히려 더 끌어안으면서 몸을 둥그렇게 말아 유가의 어깨에 애교부리듯 턱을 문질렀다.

“취영보고에서 나오면 당신과 껴안고 자게 해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송기연은 낮게, 온유하게 웃었다.

그를 확 밀치려 했던 유가는 잠시 손을 뗐다가 마땅히 놓을 데가 없었다. 그는 체념하고 녀석의 허리춤을 껴안았고, 얼굴이 새빨개졌다.

송기연은 그의 타협을 느끼고 붉어진 볼에 입을 맞추었다. 마음이 훈훈해졌다.

송기연은 일전에 경솔하게 석추를 막은 게 아니었다. 미리 궁기의 혈에 숨겨진 혈맥의 힘으로 자신의 장기를 감싸서 내장엔 손상이 없도록 막았다. 그가 죽으면 사존은 다른 자를 안고 자는 것 아니겠는가. 제일 보기 싫은 장면이었다.

두 사람은 원래 몸이 하나인 쌍둥이처럼 한참을 껴안고 있었고, 체온 때문인지 유가는 졸음이 쏟아졌다. 안겨 있는 것에 익숙해지는 건 이상한 게 아니라는 생각이 비몽 간에 들며 그는 몸에 긴장을 풀고 잠이 들었다.

부상 당한 송기연의 제일 좋은 치료 방법은 휴식이다. 그가 주위를 둘러보니 여기가 자신이 《천진결》을 얻은 곳이었다. 즉 위험하지 않은 곳이니 마음을 내려놓고 유가의 차분한 숨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시간이 많이 지난 후에도 송기연은 가끔 두 사람이 여기에서 정신없이 잠이 들었던 때를 떠올렸다.

유가가 눈을 떴을 때 송기연은 옆에서 이미 가부좌를 틀고 숨을 고르고 있었다. 인기척이 들리자 그는 바로 눈을 뜨고 웃었다.

“묵묵씨, 부상당한 저보다 더 잘 주무시네요.”

송기연은 더욱 환하게 웃으며 몸을 기울여 소매자락으로 유가의 입가를 닦았다.

“침을 다 흘리셨군요.”

몽롱한 유가는 가만히 송기연의 수발을 받고 있다가 수 초 후에야 지금 상황을 깨달았다. 급히 일어나 후다닥 몸을 물리고 송기연과 거리를 두었다. 얼굴이 붉게 타올랐다.

그의 반응을 보고 송기연이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귀곡심연에서 사존이 목욕 후 옷을 반대로 입은 걸 들켰을 때와 똑같은 표정이었다. 겉으론 이상하리만큼 저를 멀찍이 떨어트리려 하면서도 사실은 눈에 훤하게 순진했다.

침을 꿀꺽 삼킨 유가는 송기연과 멀리 떨어져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아무 일 아닌 듯, 없었던 듯 눈을 감고 진기를 고르며 얼굴의 온도가 떨어지길 기다렸다.

송기연은 더는 놀리지 않고 일어나 벽 앞으로 다가갔다. 고심하며 세 곳을 가볍게 두들기다 다른 쪽 벽으로 가서 똑같이 세 곳을 두들겼다. 이런 식으로 네 면의 벽을 모두 치자 열두 곳이 하나의 문양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이 문양은 금방 사라지고 아무것도 없던 벽에 갑자기 금색의 글자와 도안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과연 《천진결》의 하반부였다.

유가는 그가 이렇게 간단하게 기관을 연 걸 믿을 수 없었다. 이렇게까지 주인공은 주인공이란 말인가. 유가는 이를 그저 사소하게 넘기고 송기연에 옆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철저한 연기력으로 놀란 척하며 벽 위에 새겨진 금색 글자들을 바라봤다.

“묵묵씨, 저 드디어 찾았습니다.”

《천진결》을 보는 송기연의 눈에 흥분이 가득했다. 그는 전생의 기억을 통해 이 공법의 위대함을 알고 있었다. 하반부까지 찾았으니 이제 복수가 정말 멀지 않았다. 그가 고개를 돌려 유가를 바라보며 진심을 담아 말했다.

“곧 사존과의 약속을 지킬 수 있을 것 같아요.”

유가는 등골이 싸늘해졌다.

착각이겠지? 왜 꼭 이렇게 내 정체를 알고 말하는 것 같지.

송기연은 유가의 표정을 외면하는 척하며 다시금 주위의 벽을 돌아봤다. 보면 볼수록 신기했다. 그는 공간 속에서 유가가 자신에게 전해준 《천진결》을 꺼내어 바닥에 펼쳐 놓았다. 자신도 바닥에 주저앉아 손위에 결을 그려 책장을 넘기라고 지시했다. 머릿속에서 동작과 글자를 결합한 뒤 반복적으로 연구하며 많은 걸 터득했다.

전에 상반본만 있었을 때 그는 많은 수련 방법을 이해하지 못했었다. 지금 《천진결》의 완성본을 얻게 되자 모든 부분이 연결되었고, 처음에 이해하지 못했던 부분도 해결되었다. 하지만 이것도 그가 재능이 있기 때문이다. 송기연은 시종일관 수련의 기재였으며 예전 유가가 이 또래였을 시절보다 강했다.

유가는 《천진결》에 조금의 흥미도 없었다. 이건 송기연에게 딱 맞게 만들어진 것이라 다른 사람이 수련한다고 해도 그처럼 빠르게 발전할 수 없다. 그는 송기연의 옆에 가부좌를 튼 채 눈을 감고 진기를 회복했다. 덕분에 취영보고에서 꽃향기 독에 중독에서 벗어났다. 달달한 꽃향기의 속박이 없어지자 회복은 더욱 수월했다.

송기연은 《천진결》에 푹 빠져 거기에 써 있는 모든 공법과 초식 그리고 문자를 머릿속에서 계속 반복했다. 금색의 신식 소인이 식해에서 동작을 하나씩 해보며 익혀가고 있었다.

한동안 송기연은 책장을 더 넘기지 않고 눈을 감은 채 식해의 기억해둔 몇 개의 요령에 집중했다. 그는 지금 이 깨달음을 통해 직접 원영 정상을 돌파하고 화신기로 진입하려 했다.

아직 몸에 상처가 다 낫지 않은 상황에서 이건 말도 안 되는 상황이다. 하지만 ‘전생’의 기억이 가르쳐 주고 있다. 공법을 발견한 후 무주지에 오래 머물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최단 시각 내에 《천진결》을 다섯 차례 돌파해야 했다. 그래야 제련해서 나오는 성진지력으로 밀실의 통로를 열고 사존을 데리고 떠날 수 있는 걸 알았다.

그는 《천진결》을 네 번째 돌파했다. 돌파가 쉽지 않았다. 만약 시간을 좀 더 지체한다면 두 사람은 영원히 이 밀실에 갇힐 수 있다. 체내에 부족했던 진기가 점점 응결하더니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취영보고와 가까워서인지 이곳의 영기 농도는 상당했고, 송기연이 원영기를 돌파하는 과정에서 흡수해야 하는 영기의 양은 충분했다.

한참 뒤에 유가는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밀실 벽에 가득 새겨진 《천진결》을 몇 차례 만져 보았다. 송기연은 아직 눈을 뜨지 않았다.

금색 글자를 만져본 유가는 의구심이 더욱 생겨났다. 만질수록 이 기운이 자신과 뿌리가 같다는 생각이 강해졌다. 온 벽에 가득한 도안을 자신이 직접 새긴 것 같았다. 하지만 말이 안 되는 일이었으므로, 곧 그 생각은 사르라들었다.

그때, 갑자기 밀실의 모든 공기가 요동치고 영기들이 송기연을 향해 솟구쳤다. 놀란 유가가 뒤를 돌아보자, 송기연의 진기 농도가 이미 극에 달해 있었다. 마지막 한 방울로 댐이 무너지 듯, 그가 화신기로 들어갔다.

잠시 후 폭풍 같던 공기가 평온해졌다. 송기연도 긴 숨을 내쉬며 천천히 눈을 떴다. 검은 눈에 빛이 선명했다. 실력이 한 단계 높아졌다. 하지만 그가 자신의 체내를 살펴보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머릿속 원래 금색이었던 신식 소인이 혈색(血色)이 되어 있었고, 몸속 진기 역시 연한 금색에서 금홍색이 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이상했다. 설마 전에 그 심마가 다 제거가 되지 않은 건가? 삼 년 동안 아무런 변화가 없어서 당연히 그 복병이 사라진 줄 알았는데, 이젠 자신의 신식마저 악기에 물들다니.

송기연은 한숨을 쉬며 우선은 관여하지 않기로했다. 이제 그는 여기서 빠져나가는 걸 생각해야 했다. 송기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유가를 향해 웃으며 손짓했다.

“묵묵씨, 이리 와요. 우리 나갑시다.”

이 총애하는 후궁을 부르는 듯한 표정은 뭐지! 유가는 자신의 두 눈을 찌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송기연이 성인이 된 후 얼굴은 정말 멋있어졌지만, 자신을 향해 이렇게 웃으며 수치사할 것 같은 말을 할 때면 그에 대한 살상력이 101%가 되었다. 1%만 어떻게 하고 싶네!

유가가 굳은 표정으로 곁에 다가가자 송기연은 유가의 손을 꽉 잡았다. 그는 송기연이 왜 이렇게 그의 손을 잡는 걸 좋아하는지 알 수 없다. 정말 꼭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는 우선 송기연이 어린아이처럼 의존하는 것이라고 이해했다.

송기연은 벽 위에 《천진결》을 수십 개의 두루마리에 탁본한 뒤 몸속 공간에 넣었다. 유가의 손을 끌고 밀실의 서북쪽 구석으로 가서 좀 전에 응결한 성진지력을 자신의 손바닥으로 옮긴 뒤 벽 틈새에 불어넣었다.

철컥철컥-!

기관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며 벽의 모서리가 뒤쪽으로 열리기 시작했다. 위쪽 돌계단이 모습을 드러냈고, 들쭉날쭉하여 어디로 향하는 건지 모르게 보였다.

송기연이 유가의 손을 꽉 잡고 말했다.

“묵묵씨, 갑시다.”

유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 통로가 어디로 통하는지 알고 있다. 그들이 들어왔던 비경의 그 대전이었다. 하지만 그는 방심하지 않았다. 자신이 쓴 적 없는 세 마리 흉수가 출현했으니 그는 앞으로도 결코 간단하지 않다고 느꼈다.

밀실이 깊은 곳에 있는 건 아닌지 두 사람이 계단을 따라 반각(半刻) 만에 빛이 보였다. 그 빛은 벽의 틈새에서 새어 나온 것으로, 도착이 확실했다.

이번에 송기연은 검을 사용하지 않고 진기를 손바닥에 모아 주먹을 휘둘렀다. 두껍지 않은 벽이 산산조각나며 외부의 빛이 들어왔다. 하지만 이 동작이 아픈 곳을 건드렸는지 송기연은 유가의 곁에서 갑자기 시든 풀잎처럼 고통스럽게 말했다.

“묵묵씨, 나 아무래도 상처가 벌어진 것 같아요.”

유가는 급히 그를 부축하며 눈을 찡그렸다.

벽을 뚫고 나온 두 사람의 인기척이 작지 않았다. 밖은 대전으로, 그 거대한 석검이 꽂혀 있던 곳이며, 아직 사람들이 많았다. 송기연과 유가가 범상치 않게 나오는 것을 본 자들은 분명 두 사람이 좋은 것을 얻었다고 생각했다. 욕심이 생겨나 눈빛이 한순간에 매서워졌다.

하지만 유가의 실력에 모두 경솔하게 달려들지 않았다. 비경 밖에서 흉수의 허영과 싸우던 유가의 실력은 확실히 간담이 서늘해질 정도였다. 그들의 시선이 두 사람의 뒤쪽 비밀 통로로 옮겨갔다. 두 사람이 저곳에서 걸어 나왔으니 그 비밀 통로로 그들도 콩고물을 건질 수 있었다.

사람들의 마음을 꿰뚫어 본 유가는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는 《천진결》이 굳이 외부에 알려질 필요가 없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앞을 가로막게 된다면 지금 상황에서 성가신 일이 생길 터였다.

“묵묵씨, 무슨 고민 있어요?”

송기연이 유가의 안색을 살피며 유가의 손을 놓고 검을 집었다. 몸이 근질근질한 수진자들을 보며 웃었다.

“누군가 막고 있으면 죽일까요, 아님 참고 양보할까요?”

유가를 바라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당신께서 직접 나서기 싫으시면 제가 하겠습니다.”

순간 심장이 차갑게 굳었다. 소년이 전생의 송기연과 겹쳐졌다.

쩌억-! 쿠궁!

그러나 심상찮은 소리가 먼저였다. 생각하기 싫은 붕괴의 소리가 대전을 가득 채웠다. 거대한 석검 중간에서 나는 소리였고, 쩍 갈라진 중심은 곧 붕괴될 것 같았다.

송기연은 급히 유가를 끌고 멀리 도망쳤다. 기억이 맞다면 이 비경은 곧 붕괴될 것이고, 지금 막 시작되었다.

석검이 산산조각이 나면서 상단을 받치던 검자루도 바닥으로 떨어져 두 사람이 좀 전까지 있던 통로를 덮어버렸다. 지켜보던 유가는 눈을 크게 떴다. 깨진 석검 안에는 작은 석비(石碑-돌로 만든 비석)가 있었고, 석비 위에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내가 네게 준 위험은, 네 목숨 뿐 아니라 내 목숨도 앗아간다는 것이다.’

유가는 반보 뒤로 물러났다. 경악스러웠다.

저 필체는 자신의 것과 똑같았다. 어떻게 된 일이지!

“묵묵씨, 조심해요!”

송기연은 유가를 품으로 끌어 안은 채, 급히 뒤로 물러섰다. 다시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흉수의 허영에게 굳은 표정으로 검을 휘둘렀다.

대전은 이미 엉망진창이었다. 삼대 흉수의 허영이 다시 나타나며 모든 사람에게 악몽이 되었다. 실력이 좋지 않은 자들은 흉수의 공격에 처참한 최후를 맞이했고 비명이 난무했다.

콰광-!

재난은 연달아 이어졌다. 흉수가 나타나고 석검까지 쓰러지자 대전의 천장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눈앞에 비경이 곧 파괴될 것 같았다. 만약 그 아래 깔린다면 목숨을 건지긴 힘들었다.

마음을 다잡은 유가가 송기연과 눈빛을 교환했다. 두 사람은 검을 꽉 쥐고 다른 사람을 신경 쓰지 않고 흉수의 공격만 막아내며 곧장 출구로 향했다.

무주지에선 날 수 없어 두 사람은 검의 힘을 빌려 위로 향했고, 반각이 지난 후에 비로소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기뻐하며 빛으로 뛰어올라 그 위험한 비경에서 함께 탈출했다.

두 사람이 멀리 가지 못했을 때 또다시 땅이 격렬하게 흔들렸다. 그 어두컴컴한 깊은 동굴이 주위의 땅에 덮여, 곧 입구는 봉쇄되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 * *

돌아오는 내내 유가의 마음은 딴 곳에 가 있었다. 그는 아직 비석 위에 쓰여 있던 필체를 봤던 그 충격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이 세계로 온 후로 마궁의 일은 고금성이 처리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필체와 원래 유가의 것 같았어도 그닥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니 왜 자신이 그자와 필체가 똑같을까? 만약 석비 위에 글자를 ‘유가’가 썼다면 그는 왜 이 말을 썼을까? 게다가 그는 왜 원래 유가와 관련된 것들을 익숙하다고 느끼는 걸까? 그의 감정이 자신의 것이 되면 안 되는데.

유가가 손바닥을 들여다보았다. 그 위에 있던 흑석각인은 이미 깨끗하게 사라졌다. 흑석각인과 머릿속 그때의 기억이 스쳐 지나가 유가는 더욱 의문스러워졌다.

흑석 침상의 잔영이 자신의 몸에 파고들었던 그날, 자신이 침실 천정의 《천진결》을 탁본한 이후. 미처 생각하지 않은 것이 어리석을 정도로, 왜 《천진결》의 상반부가 마궁의 침실 천장에 있었냐는 것이다.

연이어 떠오르는 의문에 유가는 머리가 아파왔다. 생각하면 할수록 겁이 났다. 점점 발걸음을 멈추었다.

“묵묵씨, 갑자기 왜 멈추세요?”

앞서가던 송기연은 유가가 발걸음을 멈추자 같이 멈춰 섰지만, 고개를 갸웃했다.

“좀 전에 비경에 있을 때도 계속 딴생각을 하시던데. 무슨 고민 있으십니까?”

송기연을 한참 바라보던 유가는 갑자기 이상한 감정이 들었다.

자신이 송기연을 구한 게, 정말 자기가 이 책의 작가라서 주인공을 구한 것일까?

전에 자신은 스토리의 설정 때문에, 세계 규칙을 어지럽힐 수 없다는 이유를 들먹였다. 하지만 그가 송기연을 구한 것이야 말로, 오히려 설정이 파괴된 것 아닐까.

가슴이 뜨거워지며 익숙한 통증이 느껴졌다.

엽망지 이자는 원래도 없던 사람이 아닐까?

설마, 혹시나. 원작의 유가가 정말 엽망지가 아니었을까.

유가는, 원래 송기연을 좋아했던 건가.

유가는 견딜 수 없어 주저앉았다. 극심한 가슴 통증에 눈물이 맺히다 굵은 물방을이 떨어졌다. 그는 소리 없이 뚝뚝 그렇게 울기 시작했다. 가슴을 움켜쥐고 눈물을 멈추려 노력했지만 헛수고였다.

너무 아파. 정말 죽을 것 같아. 만약 그게 정말이면, 유가는 뭔데.

무슨 일을 저지른 거야. 그가 왜……. 너무…… 너무 가혹하잖아.

극에 달한 고통이 그의 온몸을 휘감고, 직접 겁화라도 겪는 듯 끔찍함에 사로잡혔다.

“묵묵씨 왜 그래요? 왜 울어요?!”

사존과 오 년이란 시간을 함께 지냈지만, 그가 우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이렇게나 비참한 모습이라니. 송기연은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급히 유가의 앞에 쭈그리고 앉아 유가를 끌어안고 등을 토닥였다.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었다. 한 명은 울고 한 명은 달래며 둘이 그렇게 껴안고 있었다.

기분 좋게 느껴지는 토닥임. 커다란 손의 온기. 전해지는 심장박동, 익숙한 체취.

다행히 곧 유가의 눈물은 잦아들었다.

울고 난 후 유가는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리고 뻘쭘함도 밀려왔다. 난처함을 감추려 일어나려 했지만 다리가 저렸다.

유가가 몸을 일으키다 뒤로 휘청하자 송기연도 본능적으로 그를 부축하려 했다. 하지만 그의 자신의 다리에도 쥐가 났고, 두 사람은 우스꽝스럽게 엉켜 같이 쓰러졌다.

유가의 몸 위로 송기연이 쓰러졌다. 눈을 뜨니 송기연의 눈동자가 바로 코앞이었다.

유가의 눈은 울어서 붉게 물들었고 눈꼬리는 가련하게 젖었다. 송기연의 새까만 눈동자도 더 새까매졌다. 얼굴을 굳힌 송기연이 두 손으로 유가의 어깨를 잡았다. 유가는 그가 일어나길 기다리고 있었으나, 갑자기 송기연이 더 가까워 졌다. 입술 위로 부드러운 감촉과 온기가 전해졌다. 조심스럽고 긴장한 그의 입술이 닿고 새겨졌다.

유가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커졌다. 상황을 이해하기도 전에 손이 먼저 그를 밀쳐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며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이 얼굴마저 화끈거렸다.

유가에게 밀린 송기연이 땅으로 고꾸라졌다. 정확히 바닥에 등이 부딪혀 억! 소리를 냈다. 송기연은 팔로 눈을 가린 채 슬며시 웃었다.

“묵묵씨, 왜 이렇게 힘을 써요. 너무 아프잖아!”

목소리가 흔들렸고 팔로 가린 얼굴은 온통 새빨갰다. 송기연은 자신조차 어떻게 그리 대담하게 입을 맞추었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그는 지금 유가의 얼굴에 혹시라도 저를 혐오하는 표정이 보일까 감히 쳐다볼 수 없었다.

유가는 급히 일어나 앉은 채 최대한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옷으로 입을 벅벅 닦았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저런 새파랗게 어린 녀석에서 입맞춤 당하다니! 제일 중요한 건 그는 조금도 밉지 않다는 거다!

송기연이 그에게 집적하던 건 새끼가 어미를 따르는 정도라고, 그렇게 의지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닌 것 같다.

어떡하지? 선협물 주인공이 게이면 어떡하지? 긴급상황이야!

유가는 좀 전에 머릿속을 가득 채우던 괴로움을 완전히 잊어버렸다. 지금은 자신이 송기연에게 써 주었던 그 수많은 후궁들을 어떻게 하지!- 라는 생각뿐이었다.

망했다. 완전 엉망진창이 됐다.

유가는 2년이 더 지나면 야야와 혼인이나 하려고 했는데 지금 모든 게 꼬여버렸다. 설마 원래 유가가 원래 동성애자기 때문에 자신이 싫지 않은 건가?

맞네, 맞아. 그거였네!

유가는 스스로 납득하며 곧 세뇌에 성공했다. 저리던 다리도 괜찮아졌고 벌떡 일어나서 바닥에 누워 흥흥거리는 송기연을 내려다보았다. 송기연이 손가락 틈 사이로 자신을 몰래 훔쳐보고 있는 게 너무 우스웠다.

송기연은 역시 아직 애였다. 나중에 자신이 그를 떠나면 주인공의 설정도 돌아올 터였다. 유가는 속으로 그렇다고 끄덕이며 송기연에게 손을 뻗었다. 안심하고 웃으며 일으켜주려 했다.

하지만 유가의 얼굴이 역광에 흐릿하게 번지자 송기연은 갑자기 유가가 사라져 버릴 것 같았다. 정체 모를 조급함에 송기연은 유가의 손을 확 끌어당겨 품속으로 숨기듯 가두었다.

“묵묵씨, 좋아합니다. 많이 좋아해요.”

진정된 심장이 또 놀랐다. 다시 송기연을 밀쳐내려 했으나 순가 손가락에 통증이 느껴졌다.

전에 아구와 나눠 묶었던 인연선이 나타났다가 한 치가 끊어졌다.

아구가 위험한 건가! 마궁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마음속에 불안함이 밀려와 각종 억측에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진짜 돌아가야 할 때였다.

어느새 송기연을 껴안은 유가의 마음이 좋지 않았다. 이번엔 미리 송기연과 인사를 하고 가야 했다. 그래야 아이를 위험에 빠뜨리지 않을 수 있다.

지금 아이의 수련은 이미 화신기에 도달했다. 전부 폭발한다면 화신기 후기에 도달할 수 있었고 그럼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 유가는 전처럼 송기연이 다칠까 안절부절못할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유가는 송기연이 무주지에서 자신과 너무 오래 지냈고, 오랜 시간 여인을 보지 못해 사춘기의 감정 변화가 자신에게 향한 것 같았다. 그와 좀 떨어져 있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이 숙소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저녁이었다. 송기연은 유달리 기분이 좋아서 잡아 온 생선과 한 마리 야생 토끼로 유가에게 그럴싸한 식사를 대접했다. 삼 년 동안 송기연은 수련에 엄청난 발전이 있었을 뿐 아니라 요리 실력도 많이 발전했다. 매번 고기를 구울 때마다 유가는 군침을 흘렸다.

송기연은 고기를 구우며 불빛에 의지해 유가를 몰래 바라보다가 미간이 찌푸려졌다. 사존은 평소처럼 군침을 흘리지 않았고, 불을 바라보며 딴생각에 잠겨 있었다. 송기연은 고기를 꿴 막대기를 유가 앞에서 휘휘 저으며 웃었다.

“묵묵씨, 오늘 왜 그러십니까? 입맛이 없어요?”

정신을 차린 유가가 송기연을 진지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손가락으로 동굴 밖을 가리키며 입을 뻐끔거렸다.

‘잠시 떠나야 한다. 혼자 잘 지내고 있으렴.’

송기연은 표정이 굳고 웃음이 사라졌다. 그냥 모든 게 굳었다. 현실감이 들지 않다가 막대기를 쥔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절 떠나시려는 겁니까? 오늘 제가 한 무례한 행동 때문에 제가 싫어지신 건가요?“

송기연이 고개를 숙이고 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오늘 한 행동에 기분이 상하신 거라면, 제가 앞으로 그러지 않겠습니다. 약속드릴게요. 그런데 어찌 이리 단호히 떠나려 하십니까?”

유가는 송기연이 오해했다는 걸 알았지만 굳이 해명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 이렇게 독하게 구는 게 송기연도 자신에게 더는 집착하지 않을 것이고, 자신에게 모든 걸 맞추지 않아도 되었다.

타닥-타닥-

토끼 고기의 기름이 불에 떨어지고, 나무 조각 하나가 터져 나와 저 멀리 튀었다.

송기연은 정신을 차리고 다시 부지런히 고기를 구웠다.

“묵묵씨, 우선 드시고 가세요. 붙잡지 않겠습니다.”

그는 알고 있다. 사존이 정말 가겠다고 한다면 자신이 잡을 수 없다는 걸. 제일 비참한 건 그는 사존을 만류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자신의 실력으로는 눈앞에 있는 사람을 잡지 못했다. 충분히 강해지기만 한다면 사존을 자신의 품 안에 가두고 어디도 못 떠나게 할 것이었다. 영원히.

송기연의 눈 밑에 어두운 붉은 빛이 스쳐 지나갔다. 머릿속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은 신식 소인의 몸에 혈색이 금빛을 삼키며 악기(惡氣)를 드러냈다.

두 사람은 더는 말이 없었다. 동굴은 숨 막힐 정도로 고요했다.

유가는 마음이 불안했다. 조마조마하기도 했다. 왠지 지금 저 조용한 아이가 더 이상하게 느껴지며 온몸에 털이 삐쭉 섰다.

얼마나 지났을까 야생 토끼가 드디어 알맞게 익었다. 온 동굴에 고기 냄새가 가득 퍼졌다. 유가는 송기연이 구워주는 고기 맛을 제일 잘 알고 있다. 늘 기대했다.

송기연이 유가의 앞에 막대기를 건네며 말했다.

“받아요.”

유가가 막대기를 받자마자 송기연은 벌떡 일어나 동굴 밖으로 나가버렸다.

사존이 떠나는 걸 지켜보느니 자신이 먼저 떠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유가도 그를 막지 않았다. 손에 막대기만 더 꽉 쥐었다.

습관적으로 향긋한 토끼 고기를 한입 베어 물었다. 그게 만들어 준 모든 음식에서 처음으로 고무 씹는 맛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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