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2장 경창파(擎蒼派) (7/40)

제2장 경창파(擎蒼派)

“……전에 대인께서 마계의 병사를 간소화하라고 하셔서, 소인 망책역에서부터 감축하기 시작했습니다. 특별히 우수한 부대를 선발하였고 지금의 정세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대인께서 말씀하셨던 구역 주성내의 안정과 수진자들과의 다툼을 줄이라고 하신 건…….”

왕다국이 잠시 멈칫하다가 고개를 들어 상석의 유가를 바라봤다. 자신의 얘기를 듣고 있지 않고 유가의 두 눈은 딴 곳을 보고 있었다. 오른손 검지로 가볍게 의자의 팔걸이를 두드리며 왕다국이 쓴웃음을 지었다.

“존주, 듣고 계세요?”

왕다국의 높은 목소리가 귓가에 꽂히자, 딴 데 팔려있던 유가의 정신이 다시 돌아왔다.

정신을 차리고 꼿꼿하게 다시 앉아 눈앞에 서 있는 왕다국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본존이 듣고 있으니, 계속 말하라.”

벌써 마궁으로 돌아온 지 반년이 지났다. 바깥 날씨도 제법 추워져서 송기연을 구했을 때처럼 늦가을이 되었다. 유가는 아직도 송기연을 떠올렸고, 귀곡심연에서 두 사람이 함께 지냈던 시간을 떠올렸다. 애완동물을 2~3년 동안 키워도 정이 들고 잃어버리면 마음이 아픈데 하물며 사람이다.

유가가 제일 그리운 건 송기연이 구워준 토끼고기였다. 부드럽고 바삭한 껍질, 촉촉한 육질, 정말 세상에서 맛보기 힘든 진미였다. 그동안 유가는 계속 주방장을 찾아다녔다. 전에 ‘인간 세상의 음식’을 먹지 않던 마존이 오곡을 먹는 ‘세속적인 사람’이 되어있자 고금성은 어리둥절했다.

마족들은 요리에 그렇게 소질들이 없는지 주방장이 만든 음식이 송기연의 것과 큰 차이가 나면 유가는 그렇게 우울해졌다.

마계로 돌아오던 날, 그의 손바닥의 흑석각인에서 한동안 열이 나고서 유가의 기억이 일부 돌아왔다. 하지만 그날 이후 지금까지 유가가 아무리 만져 봐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유가의 기억으로 이 세계에 대해 알아보고자 했던 마음이 모두 산산조각이 났다. 그래서 그는 직접 마계에 대해 익힐 수밖에 없었다. 이번 기회에 그는 아구를 데리고 마계를 한 바퀴 돌았다. 그동안 적지 않은 치안 문제를 발견했고 왕다국에게 조치를 취하도록 했었다.

지금이 바로 왕다국이 조치 결과를 보고할 시간이었다.

“……최근에 시골역의 투쟁이 점점 극렬해지고 있습니다. 대인의 요구에 따라 제가 시골역에 역주의 이름을 올렸지만, 선임 마존께서 마계 구역은 반드시 구역별로 업무를 맡아야하며 한 사람이 겸직해선 안 된다고 하셨었습니다. 그러니 대인, 시골역 역주 쟁탈을 가만히 두고만 보시면 안 됩니다.”

유가가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이 《선마겁》에서 유가 전에 선임 마존에 대해 썼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이 책은 유가가 송가를 멸하고 방화하면서 시작되었다. 게다가 그 선마대전은 이 꾸며낸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한 표현방식일 뿐이었다. 그러니 유가가 송가를 멸하기 전에 스토리에 대해서 그가 아는 건 없었다.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있다가 그가 천천히 입을 뗐다.

“그럼 마계에 시골역 역주 자리에 앉힐만한 인물이 있느냐?”

유가가 왕다국에게 직접적으로 던진 이 물음에, 그가 난처해했다. 왕다국 그는 최근 몇 년 동안 유유자적하며 사는 것에 익숙해져, 마계 일에 조금의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는 교활했지만, 권력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니 당연히 인재를 모집해서 자신의 제자로 둘 일도 없었다. 한참을 뜸을 들이던 왕다국이 대답했다.

“대인, 이 일은 고금성에게 물으셔야 하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그때 대인께서 고금성의 병권을 뺏으셨지만, 그 대신 그에게 보상으로 행려각(行厲閣)을 세워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인재들을 모집해 양성하라고 하셨잖아요? 그러니 지금 이 일도 그에게 맡기시는 게 적합합니다.”

왕다국의 말에 유가는 순간 깨우쳤다. 그때 그는 줄곧 고금성을 의심했고 그래서 그에게서 병권을 뺏었다. 하지만 그 일이 있고 고금성이 자신을 진심으로 신뢰하고 자신을 대신해 많은 번거로운 일을 해결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사람은 좀 치근대지만 확실히 충성심이 가득했다. 마궁 대신 그가 인재를 기르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이 생겨났다.

유가의 마궁 안 밀실에는 수많은 전적과 공법이 있었다. 문파의 제자를 가르치기에 충분했고, 그리 크지 않은 행려각(行厲閣)에게 주는 것도 당연히 충분했다. 그리곤 고금성에게 종일 행려각에서 양성하는 이들을 지켜보게 했고, 그게 지금까지 이어졌다.

행려각에선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마족의 소년들 뿐 아니라, 마계에서 마궁에 들어오고 싶어 하는 능력 있고 뜻있는 인사들도 대거 모집했다. 반년이라면 어느 정도 성과가 있을 것이었고, 현재 시골역의 역주자리가 비어있으니 그 중에 역주를 뽑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마계의 구대역과 마궁의 관계는 미묘했다. 구역은 서로 제각각 다스렸고, 각 역주들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군대를 양성하여 서로 다른 파벌을 가지고 있었다. 마궁은 이 구역들 위에 있었지만, 유가의 실력이 횡포하여 구역을 억지로 단합했을 뿐이었다. 사실 그들을 부려 먹기 위해서였고. 만약 유가가 죽는다면 이 마궁은 몇 명의 역주들이 함께 무너뜨릴 수도 있었다.

지금 왕다국이 성심성의껏 유가에게 충성하고 있으므로 망책역은 이미 마궁의 편이었다. 전에 강귀의 죽음으로 시골역의 역주 자리가 비었는데, 지금 만약 마궁에 속한 행려각에서 역주의 자리를 차지한다면 구역에서 두 개의 역이 이미 마궁의 편이 되는 것이었다. 그럼 유가의 말에 무게가 더 실릴 테니 당연히 좋은 일이었다.

생각을 하면 할수록 합리적이자 유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오늘 본존이 이 일은 그자에게 맡기겠다.”

그가 잠시 멈칫하고 무언가 생각한 끝에 다시 말을 이었다.

“하나 직접 행려각의 사람을 역주의 자리에 앉힌다면 다른 일곱 역의 사람들이 반드시 불평을 하고 시기를 할 것이다.”

“그 일은 해결할 수 있습니다. 대인께서 직접 이렇게 말씀하시면 돼요. ‘시골역의 역주 자리는 실력이 가장 우수한 자의 것이다.’ 라고요. 그리곤 시골역 성 밖에 무대를 설치하시고 시합을 겨루시면 돼요. 그때가 되면 다른 칠역의 역주들도 모두 와서 관전을 할 테니, 행려각의 사람으로 역주의 자리가 정해져도 뭐라고 왈가왈부하지 못할 겁니다.”

왕다국이 웃으며 한마디 덧붙였다.

“요즘 재밌는 일이 없었는데, 소인 좋은 구경거리를 볼 수 있겠군요.”

그의 말은 이치에 맞았다. 최근에 아구가 아무도 놀아주질 않는다며, 뒷산의 소호요(小狐妖)가 2년 동안 도대체 어디로 간 건지 모르겠다며 불평했었다. 게다가 유가 자신도 오랫동안 마궁 안에 갇혀있어 사실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이번 기회에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겨루는지 볼 수 있으니 잔뜩 눈독 들이고 있었다.

아구 얘기를 꺼내니 능광신군이 변신초 찾는 일을 맡긴 게 떠올랐다. 반년이 넘게 찾아다녔지만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그 소호요가 변신을 하고 초를 가지고 도망을 간 게 아닌가 하고 생각했지만, 아구는 그렇게 약한 소호요가 어떻게 뇌겁 징벌을 받았겠냐고 했다.

하지만 유가가 이 세계에 온 이후 여기선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유가는 이 일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혹시라도 남은 4년 반이라는 시간 동안 우연히 그 여우를 맞닥뜨린다면 아구가 변신을 할 수도 있으니까.

“존주, 소인 아직 아뢸 일이 있습니다.”

왕다국의 목소리가 유가의 생각을 방해했다.

그가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

“무엇이냐?”

“그동안 환해역(幻海域)의 해수가 무슨 원인인지는 모르겠지만 줄곧 만조 상태였습니다. 수위가 그리 높아지진 않았지만, 아무래도 좀 수상합니다.”

유가가 잠깐 멈칫하더니 웃으며 대답했다.

“별일 아닐 테니. 너무 신경 쓰지 말아라.”

왕다국은 마궁에서 걸어 나오면서도 그 미심쩍은 웃음과 상관없다는 태도가 아무래도 수상했다. 이치대로라면 만조가 결코 사소한 일은 아니었다. 재해가 닥칠 수도 있는 것인데 어째서 마존에게만 별일이 아니게 된 거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왕다국을 보내고 유가는 침전으로 돌아가지 않고 그대로 서재로 향했다. 수북하게 쌓인 마계의 대소사 보고서 속에서, 엄청 두꺼운 평범한 남색 책자 하나를 찾았다. 책자를 펼치고 술법을 써서 먹을 벼루에 갈았다. 탁자 위 붓에 먹물을 묻혀 빈 종이 위에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이 서재는 그의 명령 없이 아무도 들어올 수 없어 이 책자를 여기에 놔둔다고 해도 누가 와서 펼쳐볼 리 없었다. 그래서 유가는 거리낌 없이 《선마겁》의 스토리를 이 책자에 적어 두었다. 사실 그도 기억나는 게 그리 많지는 않았지만, 생각나는 건 다 적어 놓으려고 했다. 기억이 뒤죽박죽이라 말이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도 있었지만, 할 일도 없으니 겸사겸사.

방금 왕다국이 한 환해역의 만조 얘기에 유가는 문득 깨달았다. 환해역은 나중에 송기연이 남자주인공으로서의 기백을 맘껏 펼치는 곳이었다. 게다가 환해역 해저의 환상 법진에선 송기연과 귀여의(歸茹依)는 뜨거운 베드신을 선보이기도 했다.

귀여의에 대해 말하자면 유가는 이 여인에 대한 인상이 좋았다. 자신의 글 속에서 귀여의는 경창파의 장문인 백려(白厲)의 여식 백유리(白琉璃)보다 선기(仙氣)가 훨씬 많은 선녀였다. 성격도 온순하고 연약한 귀여운 아가씨였다. 육대가의 젊은 세대의 인재로 귀가의 자랑이었다. 귀여의와 송기연의 베드신이 웹하드에서 업로드 됐을 때 모든 댓글 창은 함성과 귀여의에 대한 고백으로 가득했었다.

하지만 독자에게 던져줄 떡밥을 만들어야 할 때가 많았다. 그래서 귀여의와 송기연간의 로맨스를 재촉하려 두 사람의 감정을 빠르게 불 지폈고, 환해역의 역주 요자(姚孜)도 귀여의를 좋아하게 만들어 기회를 틈타 그녀를 환해역으로 납치하게 했다.

지금의 ‘송기연’이라면 하지 않았겠지만, 그때 송기연은 기세도 실력도 대단하여 대장부처럼 직접 창결검을 들고 환해역으로 그녀를 찾으러 갔었다.

그가 환해역으로 가고 있을 때, 해수가 만조하더니 옛날에 남겨졌던 환상의 법진이 다시 해면 위에 나타났고 역주가 그것을 쓸 수 있었다. 요자는 그에게 중상을 입힌 뒤 법진을 꺼내 송기연을 그 안에 평생 가둘 생각이었다. 하지만 먼치킨을 가지고 있던 남주 송기연은 그 사이에 자신의 기연을 얻게 되었고, 이 때문에 능력이 크게 향상되어 진전이 없던 《천진결》을 돌파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건 그와 귀여의가 사랑을 나눈 후 얻은 것이었다. 두 사람이 사랑을 나눈 후 송기연은 마침 환상역의 진귀품 백년술을 뺏으려고 요자를 찾아온 유가와 딱 맞닥뜨렸다.

원수를 마주치자 눈이 붉어진 송기연이 바로 창결검을 빼 들고 덤비려고 했었다. 당시 송기연의 실력은 막강했지만 유가에겐 한참 미치지 못했고, 때문에 유가의 손에 참패를 당했다. 유가는 그가 도망가는 것을 보고도 쫓지 않았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술을 손에 넣으려 바로 요자를 찾아갔다.

독자들은 유가가 왜 아무런 이유도 없이 송기연을 놓아줬는지 이해할 수 없었는데 작가인 ‘나’는 허세를 부리며 대답했다.

마존은 당시 그 아이가 자신이 죽인 그 집안의 아이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의 기억 속 송기연은 천하(天河) 전투에서 그가 이미 죽여 버렸다. 게다가 원래 제멋대로인 유가는 환해역에 술을 마시며 먹고 놀려고 온 것이었으니, 굳이 피를 볼 필요가 없었다. 당연히 후에 얘기를 들은 요자는 화가 나서 백년술을 전부 물로 바꿔버렸었다.

독자는 그의 허점을 찾고 싶어 했지만, 글 속에는 확실히 송기연이 집안 복수를 할 때 자신을 ‘기연’이라고 말했고, 자신이 유가에게 멸문을 당한 송가의 유일한 생존자라고 말하지 않았었다. 그래서 마지막엔 이를 갈며 어쩔 수 없이 작가의 이 동떨어진 해석을 따라야만 했다.

그때의 ‘나’는 그것에 굉장히 만족했었는데, 회귀를 하고 보니 여기의 모든 일은 모두 인과관계가 있었다. 게다가 송기연은 얼굴이 망가지지도 않았기에, 그가 송기연을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그래서 그때 도대체 왜 그런 걸까. 유가는 왜 또 송기연을 놓아준 걸까.

생각이 뒤엉켜 유가는 글을 쓰던 손을 멈추었다. 시간이 흐르자 방금 글을 썼던 종이 위에 먹물 자국이 번지기 시작했다. 유가가 정신을 차리고 급히 붓을 들자, 백지 위에는 경창파에서 반년에 한 번 열리는 제자순위전이 적혀있었다.

방금 그는 한 번에 두 가지 일을 했다. 머릿속으로는 환해역의 일을 생각하면서 손으로는 최근에 발생한 일을 쓰고 있었다. 지금 이 순위전을 보자 그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 구경거리를 보러 가고 싶은 충동이 참을 수 없었다.

시골역 역주 경기는 소설(小雪 - 24절기의 스무 번째. 입동과 대설 사이)로 정하면 됐고, 경창파의 제자 순위전은 늦가을이었다. 그가 만약 몰래 가서 보고 돌아온다면 시골역 경기에 딱 맞게 도착할 수 있었다. 두 가지 구경거리도 볼 수 있고 이 기회에 송기연이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도 확인할 수 있었다.

유가는 법풍(法風)으로 종이 위 먹물을 말린 뒤 책자를 덮어 반지 속에 집어넣었다. 그는 아무래도 이 <선마겁>을 자신이 지니고 있는 게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만약 어느 날 이걸 누가 본다면 자신의 정체가 탄로 날 테니까.

“대인, 대인, 대인!저 돌아왔어요!”

정리하자마자 서재 문을 긁는 소리가 들렸다.

“대인, 저 들어가도 돼요? 들어갈게요?”

애교를 부리듯 연달아 질문을 했다.

유가는 이마를 짚고 웃었다.

“또다시 문을 긁으면 본존이 서재 문을 다시 바꿔야 한다. 어서 들어와라.”

‘끼익’나무문이 열리더니 아구가 그대로 유가의 품으로 돌진하고는 알랑거렸다.

“대인, 아구 아까 엄청 배고팠어요!”

갑자기 밑도 끝도 없는 말을 하는데, 유가는 뭔가 좀 이상했다.

“아까 엄청 배가 고팠다고? 지금도 배가 고픈 것이냐? 본존이 주방에 시켜 음식을 좀 준비하지.”

아구는 유가의 어깨에 날아올라 트림을 한 뒤 작게 속삭였다.

“히히, 지금은 괜찮습니다. 음……. 대인의 마수는 아무래도 다시 들여와야 할 것 같아요.”

이 말을 듣고 나서야 유가는 이 녀석이 왜 이렇게 알랑거렸는지 알아챘다. 밖을 돌아다니다가 돌아오자마자 한 일이 마수의 철장을 부수고 쳐들어간 거라니, 아구라면 그럴 만 했다. 유가는 그 마수들에게 별다른 감정이 없어서 아구가 먹은 건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배불리 먹었다면 됐다. 앞으로 본존이 그 동굴 안에 네가 좋아하는 요수들로 채워둘 테니, 식량처럼 즐기면 어떻겠느냐?”

“와! 대인 정말 최고예요!”

아구가 기쁜 듯 두 눈을 반짝이며 유가의 뺨에 입을 맞췄고, 그만 유가의 얼굴이 빨개지고 말았다.

그가 손을 휘저었다.

“그만하여라. 본존이 너와 상의할 일이 있다.”

“응? 무슨 일인데요? 만일 공적인 일이라면 아구는 못 해요. 금성이 곧 돌아올 테니, 그 녀석을 시키세요.”

이번에 아구는 행려각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유가는 아구에게 자신 대신 고금성을 잘 지켜보다가 그가 마궁으로 돌아오면 자신에게 알려달라고 시켰었다.

유가가 웃었다.

“그런 일 아니다. 본존과 구경을 나가자고 하려 했다.”

“구경이라뇨? 어딘데요, 어디를 구경가요?”

나들이를 가자는 말에 아구가 바로 흥분했다. 역시 어린아이였다. 얼마 전에 유가랑 밖에서 한바탕 놀고 와서 마궁에서 하루도 견디질 못하더니, 이렇게까지 좋아했다.

“본존과 경창파에 송기연을 보러 가자꾸나.”

이 말을 듣자마자 아구의 안색이 새까매지더니 불량스런 표정으로 입을 삐죽였다.

“대인, 그 꼬마 녀석이 보고 싶으면 그냥 말씀하시면 되지, 무슨 구경거리를 보러 가자는 핑계를 대서 괜히 절 흥분하게 만드셨습니까.”

유가는 순간 어쩔 줄을 몰랐다. 생각을 해보니 경창파에 송기연을 보러 가는 건 아구에겐 확실히 즐거운 일이 아니었다. 난감한 듯 얼굴을 긁적이며 달랬다.

“누가 구경거리가 없다고 하더냐? 선계에 놀고먹을 곳이 많다는 말을 들었다. 경창파의 제자 순위전이 끝나면 바로 널 데리고 구경을 갈 것이다.”

아구가 이 말을 듣고 눈을 다시 반짝였다.

“대인 실언하시면 안 돼요!”

“알겠다, 본존이 언제 널 속인 적이 있었느냐.”

“흥, 그럼 됐어요!”

아구를 잘 달랜 것 같아 유가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복실한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 녀석이 사람으로 변신을 하면 더욱 귀여워질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똑똑——

노크 소리에 유가의 정신이 돌아왔다. 미간을 찌푸리며 한 손으로 이마를 문지르며 말했다.

“금성, 일찍 왔구나.”

고금성이 공손하게 들어와 예를 올리며 말했다.

“왕 역주가 존주께서 절 찾으신다고 하여 급히 왔습니다. 존주.”

유가가 그를 아래위로 몇 번 훑어보자, 확실히 서두르려고 한 듯 고생한 기색이 역력했다. 유가는 만족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본존은 늘 널 신뢰하고 있고, 너도 본존을 실망시킨 적 없다. 마궁의 일을 처리하거나 행려각 인재 양성에 늘 온 힘과 정성을 다했지.”

유가가 잠시 멈추고 진지한 고금성에게 물었다.

“본존이 네게 몇 가지 일을 맡기고 싶은데, 괜찮겠느냐?”

고금성은 속으로 너무 기뻤다. 유가가 오늘 자신에게 이렇게 예를 차리다니, 이건 분명히 ‘자신에게 과분한 대우를 할 거라는’ 뜻 아닌가? 그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로 공손하게 대답했다.

“존주께서 이런 말을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이건 소인이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분부만 내려주십시오. 반드시 최선을 다해 처리하겠습니다.”

유가는 항상 고금성에게 번거로움을 주는 것 같아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태도를 보고 마음이 많이 놓여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시골역이 많이 혼란스럽다는 얘기를 너도 들었을 것이다. 아무래도 역주 자리를 너무 오래 비워 둔 것 같구나. 마계 구역은 하루라도 주인을 비워 두어서는 안 된다. 너도 알다시피 마족은 항상 강한 자가 존경을 받았다.

본존은 10월 초닷새 소설(小雪)에 시골역에 경연장을 설치하고 여덟 역주들에게 경연을 관람하도록 초대하고 싶구나. 경연장에서 제일 실력이 강한 자를 역주 자리에 앉히는 것이다.”

유가가 힐끗 고금성의 눈치를 살피자 그는 어울리지 않게 얼이 빠진 모습이었다. 부러 헛기침으로 고금성의 정신을 돌렸다.

“본존은 네가 경연에서 역주 자리를 얻을 만한 제일 우수한 인재를 행려각에서 선출했으면 좋겠는데, 가능하겠느냐?”

고금성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고, 눈엔 은은하게 차가운 빛이 비쳤다. 급히 유가에게 예를 올리고 고개를 숙여 자신의 표정을 숨긴 채 정색했다.

“존주 안심하십시오. 시골역의 역주는 행려각 제자가 제격입니다.”

요수들은 직감이 엄청 예민하다. 방금 아구는 순간적으로 등골이 서늘한 걸 느꼈다. 의심스러운 눈으로 아래 서 있는 고금성을 바라보다가, 유가의 품에 파고 들어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으로 말이 없는 유가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오해일 수도 있었다.

“네 말이 그렇다면 본존은 마음을 놓겠다.”

아구의 이상행동을 알아차리지 못한 유가는 고금성에게 상징적으로 만족했다는 표현을 하고 다시 말을 이었다.

“그동안 본존과 아구는 잠시 길을 나서야겠다. 아마도 초겨울쯤엔 돌아올 것이다. 이 마계는 잠시 네게 맡기도록 하지. 저번에 천하 강변에서의 일이 다시 일어나선 안 된다.”

“존주, 걱정 마십시오. 소인 절대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고금성을 내보낸 후 유가는 송기연 앞에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야 할 지 고민했다.

또다시 그 화려한 가면을 쓸 순 없었다. 그러면서도 경창파 제자들의 순찰과 산속에 늙은 괴물들을 피해서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 했다. 절대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아구와 이것에 대해 물었지만 아구는 흥미가 없었다. 이유를 물어도 아구는 대답 없이 그냥 그의 품에 안겨 잠이 들었고, 유가는 그 이유를 알 방법이 없었다. 후에 유가는 아이가 사춘기라 그런 것이라는 핑계로 자신의 상처받은 마음을 달랬다.

고금성에 일을 다 맡기고 유가와 아구는 발걸음 가볍게 길을 떠났다. 이번에 두 사람은 사자차도 타지 않았는데, 그 사자가 너무 느린 까닭이다. 원래 아구는 유가를 자신에 등에 태우려고 했으나, 유가가 털이 수북한 머리를 쓰다듬으며 거절했다. 유가는 장안법을 써서 직접 천하까지 날아갔고, 한번 쉬는 것도 없이 곧장 경창파로 갔다.

이번 일정은 조금 빠듯했다. 만약 서두르지 않는다면 경창파에 도착도 하기 전에 제자순위전이 끝나고 아무것도 보지 못할 수 있었다.

유가는 채 사흘이 되기도 전에 경창파의 산 아래 도착했다. 이번에 그는 서둘러 산에 오르지 않았다. 그도 알고 있었다. 그때 경창파는 제자를 모집하고 있어서 산 밖에 어떠한 결계진법도 쳐두지 않았지만, 입문 시험이 끝난 지 반년이 지난 지금은 분명히 산 밖에 결계가 세워져 있을 것이다. 성급하게 산에 오르다간 자신의 정체가 탄로 날 수 있었다.

잘못 기억한 게 아니라면 이 시간쯤에 경창파의 제자들이 산을 순찰하러 나왔다. 유가는 자신의 모습을 감추고 산 아래 숨어들었다. 대략 반 시진이 지나자, 역시 산 위에서 네 명의 백의 제자들이 하하 호호 웃으며 산 아래로 내려왔다.

산을 순찰하는 제자가 네 명이나 되자 유가는 머리가 아팠다. 그중 하나를 쓰러뜨려 그 사람으로 분장하고, 명패를 얻어 자신의 진기를 숨긴 채 경창파로 숨어들 생각이었다. 지금 저 네 제자가 뭉쳐있는 것을 보자 속수무책이었다.

“대인, 조금 움직여서 저들을 놀래켜 흩어지게 하세요.”

유가가 뭘 걱정하는지 아는 아구는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대인과 제가 사방으로 움직이면 저들이 아마 뿔뿔이 흩어질 거예요!”

유가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방법이 그렇게 믿음직스럽진 않았지만, 해 볼 만했다.

“그래. 그럼 넌 서북으로, 본존은 동남쪽으로 가지.”

“네.”

아구가 과장되게 명령을 받잡는 모습을 하여 유가를 웃게 했다. 보들보들한 머리의 털을 쓰다듬었다.

“이 녀석, 드디어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구나.”

아구가 입을 씰룩였다.

“대인, 그 전엔 제가 괜히 생각이 많았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하지만 털을 쓰다듬는 유가의 손길에선 벗어났다.

“하도 쓰다듬으셔서 이러다 첫 번째 대머리 주작이 되겠어요!”

유가가 손을 떼고 진지하게 말했다.

“시작하자.”

그 순간 그 제자들 주위 동서남북 네 방향에서 갑자기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더니 덤불이 일렁이는 파동 소리와 함께 어떤 사람과 요수가 저 멀리에서 튀어나왔다. 네 사람의 마음이 철렁했다. 모두 등과 등을 기대고는 동시에 허리춤에 찬 보검을 손에 쥐었다. 긴장감이 가득했다.

“누구냐!”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소리가 계속 울려 퍼지자 서로 어리둥절했다. 네 사람 중 지위가 비교적 높은 사람이 입을 열었다.

“내가 예상컨대 아무래도 요수가 사람을 놀라게 하려고 하는 짓 같군. 다들 당황하지 말고 여기서 기다려라. 내가 가서 정황을 살펴보고 오지.”

응? 이 말에 유가의 마음에 웃음꽃이 피었다. 그들이 흩어지진 않았지만, 다행히도 한 사람이 따로 떨어져 나왔다. 그들의 계획이 성공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그 제자는 유가를 향해 오고 있었다. 유가는 몰래 그의 뒤로 가서 세 사람과 어느 정도 거리가 벌어졌을 때 일순간 목덜미를 가격했다. 그리곤 반지 속에서 며칠을 재울 수 있는 단약을 꺼내 그의 입속에 넣었다.

잽싸게 옷을 벗기고 허리에서 이름이 새겨진 영기가 충만한 요패도 빼앗았다. 또한 반지 속에서 자신이 직접 찾은 인피면구를 꺼내 이 제자의 모습으로 맞추는 법술을 걸었다. 얼굴에 쓰니 바닥에 누워있는 사람과 완전히 똑같아졌다.

유가는 이 제자를 안 보이는 곳에 숨겨두고 그의 몸에 장안법을 걸었다. 혹시라도 산속에 요수가 이자를 먹어버리면 안 되니까.

“대인! 어떡하죠?”

아구는 많이 달라진 유가와 자신을 번갈아 보며 난처해했다.

유가가 아구를 아래위로 훑어보며 그의 털을 장난스레 다 쓸어 세우곤 웃음을 터뜨렸다.

“본존에게 다 방법이 있단다.”

한참 뒤에, 세 사람이 다시 사형을 만났을 때, 사형의 손엔 상처 입은 작은 영작이 들려있는데, 사랑스럽고 안쓰러웠다.

“알고 보니 상처 입은 영작 하나가 사방으로 날갯짓을 하고 있었더라. 너희들은 계속 여기서 순찰해라. 난 이 영작을 데리고 가서 치료해줘야겠다.”

일리 있는 말에 세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고, 사형이 조심스럽게 새끼 영작을 들고 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의외로 오늘 사형 엄청 상냥했다.

멀리 떨어지자 유가는 죽은 척하는 아구를 손으로 찌르며 웃었다.

“연기를 꽤나 잘하는구나.”

아구가 조심스레 고개를 들고 유가를 한번 보더니 다시 축 처졌다.

“이건 대인께서 생각해내신 잔꾀였잖아요? 절 작은 새로 만드시더니, 연기를 하느라 초주검이에요. 언제까지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고요.”

유가가 그의 머리를 찌르며 속삭였다.

“좀 이따 문을 지키는 제자들을 지나칠 때까지 조금만 더 참아라. 네가 본존을 연기하고 싶다고 해도 할 수 없지 않느냐.”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종달새였던 모습을 송기연이 본 적이 있다. 경창파에 도착한다면 너와 본존은 확실하게 숨어서 몰래 봐야 한다. 문제를 일으킨다면 다시 돌아갈 수 없다.”

유가는 손바닥 위에서 몸을 둥글게 만 채 대꾸도 하지 않는 아구를 보고 가볍게 딱밤을 때리며 물었다.

“알아듣겠느냐?”

“아휴, 알겠다고요. 그만 좀 괴롭히시고 빨리 가요!”

마치 아구가 오히려 유가를 봐주며 달래는 말투였다. 유가는 아구를 괴롭히던 습관을 고쳐야 하지 않을까 하고 반성했다.

한 사람과 한 주작은 숨도 참고, 수련 경지도 억제했고, 제자의 요패로 명분도 그럴듯해서 쉽게 경창파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누구도 대악마 유가가 홀로 수련자의 중심지에 죽음을 무릅쓰고 왔다는 건 상상할 수 없었다.

일단 들어오자 유가는 넓은 소매 속에 아구를 숨겼고, 제자들을 따라서 경기장으로 걸어갔다.

그가 계산한 시간과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오늘은 때마침 경창파의 순위전이 있는 날이라 이미 오전 내내 시합이 벌어지고 있었다. 지금은 점심 휴식 시간 후에 후반전이었고, 수많은 제자가 흥분된 모습으로 경기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걸어가면서 입으로는 오전 시합에 대해 떠들었다.

“어, 사형, 산 순찰 가신 것 아니셨어요? 어찌 이리 일찍 돌아오셨습니까?”

혼자 있는 유가를 본 백의 제자가 다가와 한 질문에 유가가 멈칫했다.

하지만 곧 핑계거리를 찾아 목소리를 낮추고 웃어 보였다.

“사제, 목소리를 낮추게, 시합을 보려고 급히 온 것 아니겠는가? 산 아래에서 순찰을 도는 제자들에게는 나중에 내가 감사 표시로 술을 대접하면 되지.”

제자가 눈을 반짝이며 엄청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역시 사형께서도 정상과 초운의 경기를 보러오셨군요?”

뭐? 정상과 초운?

잘못된 거 아니야? 난 분명히 송기연을 보러 온 거였는데?

정확히 말하면 남주의 먼치킨이 반짝이는 걸 보러 온 건데.

그 제자는 유가의 변덕스러운 표정을 알아채지 못한 채 혼자 구시렁거렸다.

“저 두 사람 오후에 다시 시합을 합니다. 진짜 부럽습니다. 저렇게 어린데 그렇게 높은 수련의 경지를 가지고 있으니 앞날이 창창하겠어요.”

뎅- 뎅- 뎅-!

멀지 않은 경기장에서 갑자기 묵직한 타종 소리가 들려와 순식간에 모든 경창파에 울려 퍼졌다.

“사형 어서 가시죠. 늑장 부리다 시합 놓치겠습니다.”

종소리에 정신을 차린 제자가 경기장으로 유가의 팔을 끌고 가려했고 유가는 자연스레 몸을 피했다.

제자가 난처하게 웃으며 말했다.

“실례했습니다. 그럼 사형 전 먼저 갈 테니 사형도 서둘러오세요.”

유가는 마음속이 복잡해졌다. 이 시기라면 송기연이 경창파에서 이미 두각을 드러내야 하는데, 지금 이건 무슨 상황일까? 경창파 사람이 기대를 한다면, 송기연과 정상의 시합을 기대해야 하는 거잖아? 이때 꼬마 초운은 아직 정상과 송기연 사이에 낄 실력이 되지 못했었다.

하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는 직접 보면 알 수 있다. 그는 엄청 도도한 표정으로 경기장을 향해 걸어갔다. 지금 또다시 사람과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경창파의 경기장은 매우 넓었고 설치된 무대도 상당히 기세가 있었다. 무대의 높이는 3척(尺)정도였고 주변엔 9척의 옥석 기둥이 세워져 있었다. 그 위에 조각된 용무늬는 영기가 있는 것처럼 보였고, 멀리서 바라보자 꼭 백룡이 경기장을 감싸고 있는 것처럼 보여 흥분되었다.

속으로 경창파의 스케일에 칭찬을 퍼부었다. 유가는 비교적 사람이 적은 구석으로 숨어 들어가 자리를 찾아 단정하게 앉았다. 그리고 쉴 새 없이 눈을 굴렸다.

사람들 속에서 송기연을 찾고 있었다. 위풍당당했던 주인공이 이렇게 작은 경창파에서 두각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걸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끝없는 군중들 사이에서 송기연의 키가 9척을 넘지 않는 한 그 아이를 찾는 건 불가능했다. 그저 경기장 동쪽에 높은 곳에 앉아 있는 장로들과 경창파의 장문인 백려(白厲)를 바라볼 수밖에.

시선을 돌리다가 놀라 눈이 번쩍 떠지고 말았다. 한참을 찾아 헤맨 송기연이 저기에, 그것도 두 볼이 불그스름한 완십주 옆에 앉아 있었다. 게다가 진심을 다해 완십주에게 술을 따라주고 있었다.

진짜 짜증나는 광경이었다.

유가는 살짝 기분이 언짢았다. 당초 이 아이가 무뚝뚝하게 굴지 않고 완십주를 사존으로 삼아서 다음 스토리대로 흐르길 바랐지만, 지금 송기연이 완십주에게 이렇게 잘하는 모습을 직접 보니 왠지 씁쓸해졌다.

그때 송기연은 자신의 말을 잘 들었고 모든 집안일에 정통했었다. 이건 자신에게 배운 대로 완십주를 공경하는 것 아닌가?

자신의 생각이 지나치다는 걸 알면서도 이유 없이 화가 나서 당황스러웠다. 유가의 불안정한 기분을 눈치 챈 아구는 머리를 내밀고 대인을 송기연을 번갈아 보았다.

“대인, 이 꼬마 녀석 생각보다 여기에 잘 어울려서 지내고 있는데요! 경창파의 장로와 한자리에 앉아 있잖아요.”

이 말은 유가의 무언가를 건드렸다.

잇새에서 한 글자 한 글자가 새어 나와 한 문장을 만드는데 그 소리가 그렇게 스산할 수 없었다.

“그.래. 정.말. 재.능.이. 있.구.나.”

유가의 시선이 너무 강렬했는지 저 멀리 있는 송기연이 유가가 있는 곳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수많은 사람을 뚫고 송기연과 눈이 마주치자 유가는 급히 고개를 숙였다. 호흡을 깊이 느리게 숨겨 자신의 존재감을 최대한 감추려고 했다.

송기연은 손에 든 술 주전자를 놓는 것도 잊은 채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이상함을 느낀 완십주가 기침을 하고 물었다.

“기연, 좋은 구경거리라도 있는 것이냐? 어찌 이리 정신을 빼놓고 보는 것이냐.”

술잔을 내려놓은 송기연이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머리를 가로저었다.

“햇빛에 눈이 부셔 잠시 멈칫한 것뿐입니다. 지금은 괜찮아졌으니 장로께서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말을 하곤 경기에 집중하는 송기연의 모습에 완십주는 하려던 질문을 단념했다.

완십주는 그가 송 동생의 외아들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당초 천하전투 직후 이 아이가 이미 죽었다고 생각했다. 분노와 유가에게 받은 상처가 극심해 그는 반년을 앓았고, 꿈속에서도 항상 자신의 무능함을 질책했다.

반년 전, 입문한 제자의 사존이 될 때 그는 한눈에 송기연을 알아 보았다. 아이가 아직 살아있었다는 것에 그는 너무나도 기뻤지만, 이 일을 절대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만약 이 일을 유가가 알게 된다면 송기연의 앞날은 더욱 고생스러워질 게 뻔했다.

다만 마음이 아픈 건, 아이의 성격이 열 살 때였던 그때와 달리 차가워진 것이다. 게다가 그는 완십주가 자기 부친의 친우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사존으로 모시지 않으려 했고, 누가 권해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두꺼운 낯짝으로 백려에게 인정을 호소하며 겨우 이 아이를 붙잡아 둘 수 있었다.

누가 구해줬냐고 물었더니 이 아이는 바로 사존 엽망지라고 답하며 다른 건 아무것도 모른다고 했다.

얘기를 듣자마자 어안이 벙벙했다. 그와 송가의 가주가 사적으로 친분이 있는데, 엽망지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그는 송기연 몸의 상처를 치료해줄 만큼 솜씨도 좋은 사람이었는데도.

어젯밤에는 늙은 주정뱅이에게 살갑게 굴던 아이가 오늘은 전날보다 훨씬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완십주는 송기연에게서 눈을 떼고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이 아이를 종잡을 수가 없었다.

송기연은 완십주의 시선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완십주가 자신에게 도움이 되어 예를 차리는 것뿐이었다. 송기연은 몸 안의 ‘송기연’처럼 이 장로와 격없이 지낼 수 없었다. 지금 송기연은 성격이 지나치게 냉정하고 도저히 마음을 열지 않았다.

경창파에 들어온 이후로 그는 단약을 끓이는 제자가 되었지만, 그를 귀찮게 하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줄을 세우면 주선거(酒仙居)에서 창운전(蒼雲殿)까지 세울 수 있었다. 대부분 ‘사제’와 싸움이 붙으면, ‘사형’이 뛰쳐나와 그와 힘을 겨루는 유형이었다.

서열에 따라 당연히 존중해야 하는 사람이므로 그는 되도록 참고자 했으나, 이런 겸손은 모욕과 경멸을 더욱 거세지게 만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 그의 앞에서 베일에 싸인 그의 ‘사존’을 욕했고…….

그날 그는 문파의 사형을 구타하고 일주일 동안 갇혀있었다.

사람에겐 모두 건드리면 안 되는 부분이 있는데, 송기연에겐 그게 사존이었다.

2년을 같이 지내며 사존에 대한 모든 말과 행동들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좀 전에 자신과 눈이 마주친 사람이 사존과 꼭 닮았었다. 지금 송기연의 표정은 새까맣게 어두웠고 속도 뒤집어졌다.

그 사람의 외모는 사존과 완전히 달랐고, 사형 중 한 명인 것 같았다. 그가 전에 문파 안을 돌아다닐 때 분명히 봤던 얼굴인데, 기억을 해보니 그렇게 자주 지나쳤지만 그동안 이 사형이 이런 눈빛이 있는지는 몰랐었다.

설마 사존이 자신을 보러 오신 건가?

헛된 희망에 심장이 미친 듯이 날뛰더니 숨쉬기까지 힘들어졌다.

“자 다음은 정상과 초운!”

장내에 장로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진기를 감싸고 도는 목소리에 송기연은 정신을 차렸다. 그가 고개를 들고 초운을 바라보았다. 반년 전, 저 녀석이 자신에게 전해준 사존의 말이 떠올랐다. 눈빛이 어두워졌으나 아까처럼 흥분되지는 않았다.

사존께서 그렇게 단호하게 말씀하신 이상, 자신이 복수를 한 후에야 나타나실 게 분명했다. 한데 지금 자신이 본 사람이 어떻게 사존일 수 있겠는가.

마음속이 순간적으로 공허해졌다. 송기연은 앞을 바라보고 또다시 익숙한 눈빛을 찾으려 했다. 하지만 그자가 이미 저 수많은 사람 속에 숨었다는 걸 깨달았다.

유가는 믿을 수 없었다. 순간적으로 자신이 가짜 초운을 마주쳤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니라면 지금 초운이 어떻게 정상과 맞먹을 수 있는 실력이 되었단 말인가? 설마 주인공의 ‘먼치킨’이 그의 수하에게도 있는 걸까? 농담이지?

하지만 사실 그의 예상이 맞았다. 초운은 확실히 그렇게 강하지 않았다. 경창파의 제자들은 순위전을 치뤘다. 문파 내 십여 명의 장로들과 장문인 백려 수하의 27대 제자들은 자신의 사존과 먼저 겨룬 뒤 이름을 제출했다. 그중 승리한 사람끼리 또다시 겨루었고 마지막에 ‘준결승전’과 ‘결승전’을 통해 순위가 정해진다. 초운은 운이 좋게도 자신의 상대들을 쓰러뜨렸을 뿐이었다.

정상과 초운, 두 사람은 서로 아는 사이였다. 한 명은 송기연을 따라다니길 좋아했고, 다른 한 명은 유가의 일 때문에 송기연과 엮일 뻔했다. 그래서 성격은 많이 달랐지만 두 사람은 의외로 잘 맞았다.

초운은 키가 5척도 되지 않아, 6척에 가까운 정상 옆에 서자 우스워 보였다. 유가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가 주위 사람들의 의심 가득한 눈길을 받고 급히 입을 닫았다.

두 사람은 맞절을 하고 열 보 뒤로 물러나서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장로가 시작을 외치자 인사치레의 미소를 거두고 주위의 진기를 내보내 대치하기 시작했다. 분위기가 바로 긴박해졌다.

초운은 성격이 급하고 싸움을 잘했다. 그는 자신의 수련 경지가 정상만 못하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결코 쉽게 승복하지지 않는 사람이었다. 손에 든 장검은 반년 전 유가가 그를 만났을 때 들고 있던 그 검이었다. 지금 그가 그때보다 얼마나 더 강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축기 절정인 진기로 감싼 검 표면은 차가운 빛이 가득하여 보기만 해도 기세등등했다.

그가 발 아래로 경창파에서 배운 보법을 펼치자, 공격 방향이 변화무쌍하여 마치 무수한 검광이 각 방향에서 정상을 향해 돌진하는 것 같았다.

최근에 정상의 수련 경지는 두드러지게 향상하진 않았지만, 지금의 금단 중기는 반년 전보다는 훨씬 나아졌다. 게다가 그는 신수였으니 오감이 일반 수진자보다 훨씬 뛰어났다. 그래서 진작에 초운의 공세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정상은 속으로는 득의양양했지만 초운을 얕잡아보지 않았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사소한 실수로 실패를 맛볼 수는 없었다.

심념을 움직이자 수중에 은색 채찍이 나타났다. 위쪽엔 백색 융모가 달려있어 굉장히 멋있었다. 하지만 여기 앉아있는 사람들은 며칠 동안 이미 저 채찍의 위력을 보아서 잘 알고 있었다. 위쪽에 붙은 백색의 융모는 부드러워 보이지만, 사실 검처럼 날카롭고 단단해서 사람을 때리면 바로 가죽이 벗겨졌다.

전날 초급 시합 때 채찍을 잘못 휘둘러 사람을 다치게 한 후로, 그는 그 뒤에 이어진 시합에서 채찍을 꺼내지 않았다. 한데 초운과의 대결에서 이 채찍을 꺼낸 걸 보니 흥미진진한 장면이 펼쳐질 것 같았다.

지금 여기에 앉아있는 사람들은 모두 즐기러 온 것이다. 평소에 모두 수련으로 긴장을 놓을 수 없으니, 지금 이 기회에 긴장을 풀고 재밌는 경기를 보기 위해 모두 경기장에 집중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검광과 채찍의 그림자가 교차할 때마다 사람들은 낮은 함성을 자아냈다. 여제자들도 눈을 반짝이는 것이 아무래도 정상을 동경하는 듯했다.

“대인, 저 아무래도 경기장에 저 사람 아는 것 같아요.”

재미있게 보고 있던 유가가 아구의 말을 듣고 잠깐 생각하다가 질문했다.

“초운을 말하는 것이냐? 그 아이라면 넌 당연히 알고 있지. 반년 전에 만난 적이 있다.”

아구가 말한 사람은 초운이 아니었다. 이 녀석이 영작의 모습으로 유가의 다리에 뛰어올라 유가를 향해 고개를 내저었다.

“초운 말고요. 저기 저자요. 아무래도 항상 뒷산에서 저와 놀던 소호요같아요.”

이 말을 듣자마자 유가의 마음이 철렁했다.

머릿속에 순간적으로 마궁 주변에 변신을 한 요수가 다른 변신초를 가져갔다는 능광신군의 말이 떠올랐다. 지금 뒷산에 요수를 논해보면, 분명히 그 소호요는 제일 총명했고 사람의 말에도 능통했다. 반년 전, 아구가 마계에서 그 소호요를 찾았을 때 그가 모습을 보이지 않았었는데, 지금 정상의 숨결에서 그 소호요가 느껴진다는 건…….

설마 정말 그 소호요일까?

변신한 요수는 실력이 유가 정도 수준이라고 해도 알아챌 수 없었다. 같은 요수거나 수련의 경지가 그들보다 높아야만 식별이 가능했다. 그래서 아구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운이 좋을 줄이야. 처음에 《선마겁》에산 정상의 출신에 대해 쓴 적이 없었다. 이 세계는 자체적으로 ‘정상’은 ‘요수가 변신한 사람’이라는 괜찮은 설정이 추가했다.

유가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소매를 활짝 열고 눈을 반짝이며 작게 말했다.

“본존은 아무래도 곧 네가 변신한 모습을 볼 수 있을 것 같구나. 우선은 소매 안에 들어가 있어라. 경기가 끝나면 본존이 그 아이를 막고 너 대신 변신초를 달라고 할 방법을 생각해 보겠다!”

아구도 엄청 흥분이 되었다. 그때 자신과 놀던 키가 2척도 되지 않던 소호요가 지금은 놀랍게도 인간의 모습으로 변신을 했다니, 부러울 따름이었다. 좀 이따가 저 녀석이랑 얘기 좀 해봐야 했다.

아구가 소매 속으로 들어가자 유가도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 교전을 벌이는 정상에게 시선을 향했다. 그는 정상이 왜 경창파로 왔는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리고 그의 입장에서 보면 소호요와 아구는 사사로운 정이 깊었다. 한데 후에 말도 안 되게 선마대전에서 마족 대군에게 중상을 입히고, 마계를 패배하게 만든 후 아구를 붙잡았다.

게다가 처음 경창파에 왔던 그때, 송기연과 산 아래에 있을 때 정상은 그를 뭔가 수상하다는 듯 바라 봤었다.

지금 저자가 적인지 아군인지 확실치 않으니 좀 이따 마주할 때 좀 더 조심해야 했다.

경기장의 전황은 순식간에 급변했다. 초운은 점점 체력이 떨어졌다. 확실히 아직 수련이 정상에 미치지 못했고, 수십 번의 교전을 버티기도 쉽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정상이 수중의 채찍을 한번 휘두르자 강력한 기세가 초운의 손에 쥔 검을 떨어뜨렸다. 채찍은 이윽고 초운의 목을 휘감았고, 그렇게 승패가 결정되었다.

초운은 승부 따위는 개의치 않는 듯 정상을 향해 예를 차리며 웃었다.

“제가 졌습니다. 항복하겠습니다.”

정상은 채찍을 들고 눈웃음을 지으며 공손하게 말했다.

“양보에 감사하오.”

정상과 초운의 대결은 사실 27대 제자의 1등과 2등을 겨루는 것이었다. 두 사람의 대결이 끝나면 순위전도 끝이 났다. 경기장 위에 장로도 정상의 승리를 선포하면서 경기를 종료하려 했다.

하지만 누군가 끼어들었다.

“아직 시합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연약한 목소리에서 소녀의 풋풋함이 느껴졌다. 유가가 고개를 들고 목소리의 주인을 찾았다가 씰룩대던 입꼬리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장문인 백려 옆에 16살 정도 되어 보이는 소녀가 서 있었다. 그녀는 부드럽고 건강한 맵시를 자랑했고 뽀얀 얼굴에 생기 가득한 큰 눈이 반짝였다. 긴 검은 머리를 예쁘게 틀어 올리고 순백의 옷으로 도드라진 그녀의 순수함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 소녀의 눈빛이 완십주 옆에 앉아있는 송기연을 향했다. 더도 덜도 없이 송기연에게 흥미를 느낀 눈빛이었다.

아, 대박. 송기연의 후궁 백유리잖아!

백유리는 《선마겁》에서 송기연에 가장 애정을 기울였던 여인이자 송기연의 첫사랑이었다. 작품 속에서 야야가 먼저 송기연과 약혼을 하지만, 그건 엽망지가 대신 대답한 것이었다. 게다가 그 당시 송기연은 장애를 가진 열 살 아이였고, 감정이 뭔지도 몰랐던 때라 야야에 대한 마음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

백유리는 좋은 것은 절대 뺏기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송기연보다 네다섯 살 연상이었고 백려의 여식이자 우수한 송기연과 시도 때도 없이 맞닥뜨렸다. 소녀가 사랑에 눈을 떠 송기연을 마음에 둘 때부터, 사형이라는 이름으로 송기연에게 끊임없이 접근했고, 대놓고 그를 도와주었다. 경창파 내부에선 장문인의 여식이 송기연을 좋아한다는 사실이 공공연히 알려질 정도였다.

여인은 열렬히 좋아하며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애정결핍이었던 송기연도 아름다운 여주인공의 구애에 굳이 거절하지 않았고 후에 두 사람의 불꽃이 뜨겁게 튀었다. 나중에 더 많은 여인이 등장하지만 그 누구도 그의 마음속 백유리를 넘어설 수 없었다.

송기연의 설정은 전형적인 로맨스 소설의 남자주인공으로 감정의 빚이 셀 수 없이 많았다. 유가가 글을 썼을 때 자세한 속사정은 생각도 하지 않고, 원하면 그냥 여인을 붙여 주었다. 무슨 진심이니, 어떻게 이렇게 많은 사람을 좋아하는지 같은 건 고려도 하지 않았다.

이렇게 많은 걸 고려하지 않았던 유가는 그의 눈동자 안에 백유리의 모습이 비치자 참지 못하고 마음속에서 스캔들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그의 《선마겁》안에 이 장면은 없었다. 자신이 쓴 스토리상에선 송기연이 훌륭하게 우승을 한 후 경창파 여인의 마음을 차지했고, 백유리도 이때 그를 마음에 두기 시작했다.

지금 송기연은 상석에 앉아있었으나 겸손했고 순위전에도 참여하지 않았는데, 백유리가 그를 좋아할 이유가 없지 않나? 이 아이가 경창파에서 지내던 반년 동안 도대체 무엇을 했단 말인가.

백유리는 백려의 여식으로 수련도 수준급이었다. 그래서 경창파 사람들은 그녀를 사형이라고 불렀다. 그런 그녀가 소리를 높이자 장내의 사람들은 다들 영문을 모른 채 조용해졌다.

“유리, 뭐하는 짓이냐? 여기가 어디라고 목소리를 내!”

중년 남성인 백려는 처가 일찍 세상을 하직하자, 유일한 여식인 백유리를 끔찍이 아꼈다. 딸아이 역시 분발하여 그의 체면을 깎는 일을 한 적이 없었고 교양도 있었다. 지금 이렇게 장로의 말을 예의 없이 끊은 자가 자신의 여식이라는 사실을 그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백유리는 그의 말은 듣지 않고 길고 고운 손가락을 뻗어 송기연을 가리켰다.

“아버지, 기연 사제는 27대 제자가 아닌가요?”

그녀의 말에 모두가 송기연을 바라보고 탄식했다. 그들의 온화한 백 사형이 왜 갑자기 송기연을 언급하는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게다가 송기연 옆에 있던 완십주는 침착하게 웃으며 수중의 술을 입에 털어 넣고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백유리의 손끝을 따라 냉정하게 앉아있는 송기연을 본 백려는 표정이 변했다. 그리고 탄식하며 대답했다.

“저 아이는 완 장로를 제 사존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하나 경창파에서 지난 반년 동안 지냈고 너도 저 아이를 사제라고 칭하니 경창파의 제자가 맞구나.”

백유리의 얼굴에 희색이 돌았다. 가늘고 긴 눈썹을 살짝 치켜세우고 계속 질문을 이어갔다.

“그럼 기연 사제도 27대 제자인데 어째서 시합에 출전하는 건 불허하시는 겁니까?”

그리고 다시 말을 이었다.

“만약 저 아이가 참가하지 않는다면 1등을 차지한 정상 사제도 속으로는 찝찝하지 않겠습니까? 어찌 생각하느냐, 정 사제?”

경기장 위에서 좋은 구경을 하고 있던 정상을 바라보고 백유리가 눈짓을 했다.

정상은 바로 백려를 향해 예를 올리고 공손하게 말했다.

“장문인, 제자도 백 사형의 말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유가의 의식은 백려의 그 말에 멈춰 있었다.

‘저 아이는 완 장로를 제 사존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속에서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기분이 샘솟았다. 방금 송기연과 완십주의 사이가 좋아 보여 유가는 진작에 송기연이 그를 사존으로 모신 줄로만 알았다. 지금 백려의 말을 듣고 어처구니 없게도 감동과 기쁨이 밀려왔다. 갑자기 자신의 성격이 대중도 없다고 느꼈다. 전에는 송기연이 경창파에서 퉁명스럽게 굴지 않길 바랐는데, 지금은 그가 그랬다고 하니 오히려 기뻤다. 이게 무슨 짓이지?

이해가 되지 않으면 그냥 생각을 하지 않았다. 유가는 기쁨을 억누르며 계속 지켜보기로 했다.

유가는 방금 정상과 백유리가 결탁한 것을 똑똑히 보았다. 송기연에게 나설 기회를 주기 위해 백려를 압박하고 있었다. 돌고 돌아 이 세계는 자신의 스토리대로 흘러가고 있다. 중요한 사건이 발생해야 한다면 일어났다.

송기연도 정상과 백유리가 왜 이러는 건지 잘 알고 있었다. 이 모든 건 몸 안에 ‘그 사람’이 꾸민 짓이었다. 반년 전 자신이 사존을 모시는 걸 거절한 후로 지금까지 그자는 밤마다 그가 하고자 하는 모든 일을 잘 설계해 두었다. 그도 그자를 완전히 바꿀 순 없었고, 그자도 그를 완전히 바꿀 수 없었다. 그래서 자신은 이 이상한 상황이 경창파 사람들에게 드러나지 않도록 상황에 따라 일을 잘 처리해야 했다.

지금의 국면이 그는 귀찮았지만, 백유리와 정상이 깔아 놓은 길을 따르기로 했다. 그가 자세를 고쳐 잡고 백려의 말을 기다렸다.

정상까지 이렇게 말했다. 사실 백려는 송기연을 그렇게 눈여겨보지 않았지만, 이 아이의 실력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자신의 여식이 이렇게까지 그를 찬양하니, 그도 백유리의 부탁을 들어주는 척하며 이번 기회에 송기연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볼 수 있었다.

백려는 어쩔 수 없이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너희들이 그렇게까지 말하니 나도 어쩔 수 없구나. 너희를 막아봤자 소용이 없을 테니 마음대로 하여라.”

그리고 경기장 위 장로를 바라보고 말했다.

“진 장로, 한 경기를 더하도록 하라.”

백려의 이 말에 스위치라도 누른 듯 장내의 제자들이 일순간에 고요해졌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완십주 옆에 있는 송기연을 기이하게 바라보았다.

많은 사람들은 송기연과 함께 지냈지만, 장문인이 계속 송기연을 탐탁지 않게 여겨, 남몰래 기뻐하고 있었다. 하지만 백유리가 나서 장문인도 그를 제자로 인정하자 , 속으로 은근히 송기연이 정상에게 지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송기연이 유가 쪽을 한번 바라보는데, 착각한 건지 모르겠지만 그 전에 느낌이 또다시 들었다. 자세히 훑어봐도 다 같은 복장의 경창파 제자들이라 그 눈빛을 다시 찾지 못해서 아쉽게 포기했다.

송기연이 날아서 경기장으로 오른 뒤 장로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담담한 모습이었다. 진 장로는 평소에 송기연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고, 송기연에게 부상을 당한 그 제자도 자신의 문하생이었다. 그때 완십주가 저 아이를 보호하지 않았더라면 송기연에게 그렇게 간단한 벌을 내리진 않았을 거였다.

눈을 가늘게 뜬 진 장로는 마음속으로 송기연을 혼쭐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사람의 경기를 틈타 그는 약간 솜씨를 부려 송기연에게 덫을 놓을 생각이었다. 이 경기 흐름에 지장을 주지 않는 선에서 저 아이에게 고통을 준다면 경기장 아래 수많은 장로들과 장문인도 별말 하지 않을 터였다. 게다가 경기장 아래 제자들은 그의 이런 작은 움직임을 눈치챌 수 없었다.

진장로는 싱글벙글 웃으며 길지 않은 수염을 어루만졌다.

“시작하라!”

별 다른 움직임이 없는 두 사람, 정상은 송기연에게 웃으며 말했다.

“우리 두 사람이 드디어 제대로 붙게 되었군. 전에 네가 시원스럽게 사람을 때리는 걸 보고 한번 겨뤄보고 싶었지. 그동안 내게 손을 대지 않았지만, 지금은 백 사형의 신세 좀 져야겠다.”

정상의 이 말은 의미가 뻔했다. 이 시합에 최선을 다할 것이며, 송기연이 엄청 강하다는 걸 폭로한 것이다. 거기에 자신과 백유리가 내탁했다는 혐의를 변명한 것인데, 한마디로 갖은 노력을 다한 것이었다.

송기연이 입꼬리를 올려 웃고 싶었으나 한참이 지나도 웃지 못했다. 그동안 정상은 확실히 자신을 많이 도와줬고, 몸속에 다른 ‘그’도 정상과 함께하는 걸 좋아했다. 속으론 정상과 친구가 될 수 있다고 여겼지만, 지금 이 얼굴로는 사근사근 대할 수 없어 공손히 예를 차렸다.

“잘 가르쳐 주시오.”

송기연이 바로 자세를 잡았다.

정상은 이미 그의 태도에 익숙해진 상태라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송기연은 차가운 눈빛으로, 두 다리는 굽힌 채 손에는 검을 들지 않았다.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순수한 진기가 그의 머리 꼭대기 위에서 흉수의 모양으로 응집하여 기세가 대단했다.

먼저 몸을 푸는 것 같았다. 정상은 웃음기를 거두고 혀로 입술을 핥았다. 은채찍도 꺼내 들지 않고 송기연처럼 두 무릎에 무게를 실었다. 발톱으로 변한 두 손을 앞으로 내밀어 육탄전을 벌일 자세를 잡았다. 그는 이 변신한 여우가 저 환상의 야수와 겨룰 수 있는지 재보았다.

장내의 모든 사람은 두 사람의 이상한 자세에 의심이 들었다. 무기가 길수록 더욱 우세가 좋은 법이다. 게다가 경창파는 몸을 단련해 명성을 얻기 시작한 거친 문파인 태극문도 아닌데 저런 고상하지 않은 육탄전을 벌일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다음 장면을 보고 그만 숨을 삼키고 말았다.

송기연이 선공을 했다. 진기를 감싼 주먹이 공기를 가르며 그대로 정상의 가슴팍에 꽂혔다. 정상은 발톱으로 송기연의 주먹과 맞섰다. 두 사람이 각자 반보씩 뒤로 물러나며 그 순간 돌바닥이 미세하게 진동했다.

떨어진 지 채 반 초도 지나지 않아 송기연의 주먹이 다시 날아오자 정상도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맞받아쳤다. 삼십초가 되기도 전에 두 사람은 이미 서로 백 번은 맞받아치며 경기장엔 먼지바람이 일었다.

대부분 검을 쓰는 경창파 제자들이 언제 이런 피 튀기는 전투를 볼 수 있었을까. 일부는 이 전투를 보고 육탄전에 대한 편견이 사라졌다. 두 사람 덕에 온몸의 피가 끓어오르자 작은 목소리로 갈채를 보냈다. 그 갈채는 순식간에 공감을 얻어 모든 경기장에 거친 함성이 울려 퍼졌다. 외부에 예의로 알려진 경창파와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이 모든 광경을 눈으로 본 유가는 송기연에게 탄복했다. 역시 자신의 손끝에서 나온 주인공은 이렇게 멋진 인물이다. 전에는 그렇게 호감을 얻지 못하는 사람이었다고 해도, 그에겐 국면을 바꿀 능력이 있었다. 그가 원하면 못 하는 게 없었다. 오늘 이 전투는 인심(人心)을 이긴 것이었다.

그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찰나에 장내 두 사람의 열기는 이미 하늘을 찔렀다. 송기연은 마침내 틈을 발견하고 정상을 사지로 몰아넣었고, 왼쪽 옆구리를 강타했다. 정상은 피를 토하고 웃어 보였다. 분명히 고의적인 것이었다. 송기연에게 다가갈 기회를 잡고 발톱으로 송기연의 가슴팍을 갈랐는데, 송기연은 세 갈래의 진기로 막았음에도 그 중 두 갈래에 정통으로 당했다. 가슴팍의 옷이 순식간에 찢어지며 깊은 상처가 드러났다. 확실히 두 사람은 악랄하고 잔인했다.

자신의 가슴에 난 피를 본 송기연의 눈에 차가운 빛이 스쳐 가더니 순간 붉은빛이 번쩍였다. 심념을 움직이자 허리춤에 장검이 그의 손에 쥐어졌다. 검 위쪽에 진기를 감싼 채 정상에게 돌진했다.

정상이 입가의 피를 닦았다. 자신의 갈비뼈가 적어도 두 개는 부러졌다는 걸 알면서도 개의치 않았고 오히려 더욱 흥분했다. 송기연의 검을 보고 그 역시 은채찍을 꺼내어 휘둘렀고 날카롭게 장검과 부딪히는 소리가 순식간에 온 경기장에 울려 퍼졌다.

수백의 초식을 거치고 두 사람의 눈엔 핏기가 서렸다. 너무나도 잔인한 수법이었다. 송기연의 몸에 톱니 모양의 채찍 자국과 정상의 몸에 자상은 보기만 해도 끔찍했다. 유가는 마음이 아팠다. 두 사람이 걱정이 되어 손에 땀이 났다

그 순간 송기연이 자신의 정신을 검에 모으고 휘둘렀다. 엄청난 기세가 은채찍과 부딪히자 거대한 힘에 채찍이 마침내 정상의 손에서 떨어졌고, 날카로운 검이 정상의 목을 겨누었다.

그때 진 장로가 심념을 움직여 몰래 아무런 형체가 없는 진기를 송기연의 등에 겨누었다.

모든 사람이 송기연에게 집중하고 있어 아무도 진 장로의 움직임을 파악하지 못했다. 하지만 유가만은 똑똑히 보았다. 유가는 얼굴을 찌푸리고 곧바로 힘을 휘둘러 진장로의 진기를 막아섰다. 그리고 송기연의 등 뒤 1장(丈) 뒤에서 같이 사라지게 했다. 감쪽같이 사라지게 했다.

거의 동시에 송기연의 검끝이 정상의 목 바로 앞에서 멈추었다. 그 순간 그의 눈에 핏빛이 사라졌다.

“당신이 졌다.”

송기연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경기장에 있는 사람들은 빠짐 없이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승부가 판가름 나자 쥐죽은 듯 고요했던 관객석에서 열렬한 박수가 터져 나왔다. 모든 제자도 평소 거만하던 이 소년의 놀라운 능력과 기세에 굴복했다.

시끌벅적하던 순간 상석에 백려가 일갈(一喝)했다.

“장로들은 진을 쳐라!”

장문인의 명령에 상석 13명의 장로들이 백려와 함께 경기장으로 날아갔다. 거기에 완 장로까지 총 15명이 경기장에서 빠르게 자신의 위치를 찾아 섰다. 그러자 경기장 공기 중의 원소들이 점점 요동치기 시작했다.

유가는 후회막심했다. 좀 전에 손을 썼을 때 백려 이 늙은 여우가 수상한 걸 눈치챈 것이다. 자신이 진기를 내보낼 때 신식이 요동쳤고, 그 순간 백려가 기운을 잡아냈을 것이다. 지금 호산대진(護山大陣)까지 쳤다는 건 분명히 자신을 강적으로 여긴다는 것인데 이번에 잠행은 완전히 실패였다.

하지만 유가는 두렵지 았았다. 오히려 조금 흥분이 오르는 것 같았다. 처음으로 직접 이런 전투를 보게 된 것이다.

저 앞을 내다보니 15명의 주위에 진기가 흔들리고 있었다. 팔을 위로 들고 진기를 대진에 진입시켜 공중에서 천천히 모양을 잡았다. 그 안에 담긴 힘은 절대 무시 못 할 것이라 조금이라도 방심한다면 경창산을 평평한 평지로 만들 수도 있었다.

경창파의 호산대진은 《선마겁》에서 제일 유명한 것으로, 경창파가 이길 수 없는 강적을 만났을 때만 사용하는 수단이었고 그 힘은 누구라도 감탄할 정도였다. 진법을 창조한 사람의 뜻은 매우 분명했다. 만약 이 진법으로 경창파를 보호할 수 없다면 힘을 밖으로 표출해 모든 산을 파괴하는 것. 경창의 공법 서적을 모두 먼지로 만들어 외부에 노출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사실 백려의 지금 법진은 꽤 충동적이었다. 상대방이 누군지도 모르면서 이렇게 행동하는 건 백려의 모습이 아닐 텐데. 잠깐만, 설마. 식의 파동으로 이미 날 알아차린 건가!

유가의 예상이 맞았다. 백려는 확실히 그라는 것을 알아차렸고 이미 이를 갈고 있었다. 유가를 갈기갈기 찢어 놓고 싶은 심정이었다! 천하전투에서 그가 문파를 우선하지만 않았어도 완십주와 함께 목숨을 내걸고 저 악마와 싸웠을 것이었다.

대진이 완성되자 공기 중에 스산한 기운이 퍼져 나갔다.

백려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아직 상황파악을 못 한 정상과 송기연을 향해 말했다.

“너희 둘은 우리 뒤에 서서 유리를 보호하라. 가능한 장내의 제자들에게 가까이 붙지 말아라!”

정상이 공손히 대답했다.

“네.”

송기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제자들을 한번 훑어보고는 백려의 두 눈을 똑똑히 바라보고 차갑게 대꾸했다.

“장문인,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백려는 그의 태도를 나무라지 않고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곧 알게 될 것이다.”

송기연은 대꾸하지 않았지만, 마음속의 의혹은 더욱 커졌다. 방금 정상과 겨룰 때 그의 뒤에서 두 개의 진기가 부딪히며 낸 파동을 알고 있었다. 다만 그가 자신을 헤치려는 자를 색출해내기 전에 경창파의 형세가 지금이 되어 버렸다.

살짝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정상, 백유리와 함께 장로 대진의 뒤쪽으로 간 송기연은 백려의 말을 듣고 그만 온몸이 굳어졌다.

“유가 악마! 경창파 제자들 틈에 숨어 무슨 짓을 꾸미는가? 당장 나와 한판 붙자!”

유가는 퍽이나 우스웠다. 아무래도 이번엔 자신이많은 욕을 얻어먹을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공공의 적이 된 악당 설정은 정말 짜릿하잖아!

“아구, 잠시 후 본존이 명령하면 바로 떠나라.”

아구도 지금 상황이 위급하다는 걸 알았지만, 대인의 말을 들을 생각은 없었다. 어떤 상황이 발생하든 대인의 곁에 있겠다고 약속했으니 절대 번복이란 없었으니까. 머리를 내저으며 아구가 결연하게 말했다.

“대인, 저 혼자는 못 갑니다. 대인이 계시는 곳에 저도 있겠어요!”

유가는 아구가 고집을 부릴 줄 알고 있었다. 눈동자를 한번 굴리곤 아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아구, 지금 본존과 너의 수련 경지로 저항한다면 상황이 별로 좋지 않을 것 같구나. 까딱하다간 목숨도 잃을 수 있다. 하나 네가 나갈 수만 있다면, 요수삼림이 여기에서 멀지 않으니 가서 네 할아버지를 모셔오렴. 직접 본존을 도와 나서주지 않더라도 여기에 나 대신 서 계시기만 하면 된다.”

“진짜 그거면 돼요?”

유가의 말은 일리 있었다. 능광신군이 여기에 온다면 유가의 죽음으로 아구가 상처를 받는 걸 보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그러니 경창파가 능광신군을 막아도, 유가가 도주하는 건 훨씬 수월해질 터였다.

제자들은 하나같이 어수선했다. 백려가 지목한 방향에, 그 악마가 변장해서 제자들 사이에 숨어 있다는 게 분명했다. 그들은 드러나 있고 적군은 숨어 있으니 등골이 오싹했다. 그 잔인한 유가가 제자들 사이에서 손을 쓴다면 그들은 다 죽는 게 아닌가?

일부 제자들은 이미 패검을 뽑아 언제든 맞설 준비를 끝냈고, 분위기가 일순간에 급박해졌다.

유가는 미소를 띤 채 아구의 머리털을 유유히 쓰다듬었다.

“아구, 본존의 명을 네 손에 맡기겠다. 이따가 본존이 가라고 하면 바로 가야 한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제가 돌아올 때까지 꼭 버티고 계세요. 대인!”

“그래.”

유가는 물 흐르듯 유려하게 자신의 옷을 한번 정리하더니 신식의 봉인을 풀고 진기를 방출했다. 제자들이 경악하는 소리를 뒤로 하고 공중으로 날아 올라 백려를 향해 예를 차렸다. 그리고 미소 지었다.

“본존은 객으로 온 것인데 백 장문인께서 이렇게 모욕을 주시는 게 옳습니까?”

유가는 뻔뻔한 걸로도 유명했다. 지금도 그는 목숨을 걸고 싸울 생각이 없었다. 지금 상황에 아구가 다치지 않으리란 법이 없기에, 여유로운 척 시간을 버는 동안 아구가 퇴로를 확보하는 게 중요했다.

그의 계획은 좋았지만 맞은편에 서 있는 백려는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화가 나 피를 토할 듯 소리를 질렀다.

”대체 왜 내 제자로 분장을 한 것이냐! 내 제자는 어찌한 것이야!”

유가는 순간 멈칫했다. 이 부분은 정확이 짚고 넘어가려 했으나 백려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 서서설마 죽인 것이냐?”

한순간에 모든 제자들의 표정이 경계에서 분노로 변했다. 어떤 여제자는 울음을 터트렸고 장내의 민심은 완전히 격노로 뒤바뀌었다. 모든 사람이 패검을 꺼내 사형의 복수를 하겠다며 소란을 피웠다. 백려가 명령만 하면 실력에 상관없이 모두 한번에 유가에게 달려들 기세였다.

음.

유가는 당황스러웠다. 이자로 분장을 하려면 꼭 이자를 죽여야 하는 게 아닌데. 하나 지금 상황으로 보면 그가 진실을 말한다고 해도 믿을 분위기가 아니었다. 정말 억울했다.

유가는 그냥 한숨을 내쉬고 오해한 채로 놔두기로 했다. 손을 올려 인피면구를 떼어 내고 허공에서 부순 뒤 웃음을 터뜨렸다.

“백 장문인, 본존의 성격을 잘 알면서 왜 굳이 묻는 것이냐?”

인피면구를 벗은 유가가 웃기까지 하니, 경창파의 백의 제자들은 모두 사기(邪氣)에 전율했다. 대악마라는 칭호가 역시 괜히 생긴 게 아니었다.

경창파에서 백려와 장로들, 그리고 송기연을 제외한 제자들은 유가를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지금 그의 얼굴을 처음 보고 다들 하나같이 숨을 들이켰다. 그렇게 잔인하기로 악명이 자자한 대악마가 이런 절세의 미인일 줄 몰랐다.

유가의 미모는 익히 소문이 나 있었어도, 실제로 본 적이 없으니 과연 누가 진짜 믿을 수 있겠는가? 모두 천하일색이라 말했다. 경창파 제자들은 오늘에서야 진정한 천하일색이 뭔지 보았다.

이때 유가의 소매가 움직이더니 아구가 참지 못하고 나왔다. 그리고 2장에 달하는 진짜 주작의 모습으로 현신했다. 원래도 아름다웠던 털이 햇빛을 받아 눈을 떼지 못하게 찬란했다. 이 녀석은 아래에 있는 제자들을 향해 소리쳤다.

“보긴 뭘 봐! 다시 쳐다보면 너희들 눈을 다 뽑아버리겠다!”

유가의 얼굴을 직접 본 송기연은 온몸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떨었다. 손으로 주먹을 하도 세게 쥐어 손톱이 피부를 파고들었지만 인식하지도 못했다.

바로 이 사람이 하룻밤 사이에 송가를 폐허로 만들었다. 이자가 부친의 목을 잔인하게 비틀어 끊은 그 표정을 영원히 잊을 수 없다. 마궁에서 받았던 고통도 다 이자가 준 것이었다. 오늘까지 그는 마수에게 포위되었던 그 암담했던 날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유가. 이 개자식!

송기연의 눈에 다시금 붉은 빛이 차올랐다. 그가 온몸에서 진기를 방출하며 검을 빼 들고 유가를 향해 빠르게 달려 나갔다. 하지만 갑자기 몸 앞으로 튀어나온 팔에 가로막혔다.

“기연! 아직 때가 아니다. 지금 네 수련 경지는 그에게 많이 못 미친다. 무턱대고 덤비면 죽음뿐이다. 게다가 네 신분을 노출하겠지. 유가가 네 신분을 안다면 널 그냥 풀어 주겠느냐?”

완십주에게 가로막힌 송기연이 조금 흥분을 가라앉혔다. 검 자루를 세게 움켜쥔 손등에 핏줄이 불거졌다. 소년은 이를 악물고 검을 다시 검 자루에 집어넣고 더는 맞서지 않았다.

“대인, 저 녀석이 안면몰수하는데요. 방금 대인을 볼 때 이를 악물고 있었잖아요.” 그들의 작은 움직임조차 유가와 아구는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아구가 속삭이자 유가는 속이 조금 답답했다.

유가는 사고를 쳐 놓고 위풍당당한 아구가 곱게 보이지 않아 화를 냈다.

“넌 어찌 이리 빨리 본존의 말을 잊은 것이냐? 누가 네 멋대로 나오랬느냐!”

“대인 화내지 마세요. 저들이 대인을 보는 눈빛이 거슬려서 그랬어요. 게다가 아구는 대인의 말씀을 절대 잊지 않아요. 앞으론 말 잘 들을게요!”

유가가 한숨을 쉬며 송기연을 바라보았다. 무언가 입을 열려 했으나 갑자기 백려의 기운이 덮쳐와 가볍게 날려 버렸다. 차가운 눈빛으로 유가가 웃었다.

“위엄 넘치는 경창파 장문인이 이렇게 급습해 오다니, 본존에게 좋은 구경을 시켜주는군.”

“악마주제에 격식을 따지겠느냐? 설마 경창파의 대진이 두려워 용서를 구하려는 것이냐?”

완십주는 원래 직설적이고 말투도 거칠었다. 천하전투에서 그에게 삿대질을 하며 욕을 한 것부터 선계의 괴짜라는 걸 알 수 있다. 그는 큰 목소리로 계속 욕을 퍼부었다.

“지금 네가 무릎을 꿇고 날 조부로 모시며 절을 세 번 올린다면, 이 너그러운 할아버지가 네 목숨만은 살려줄 수 있지 않겠느냐!”

굉장히 무례한 말이었지만 장내 사람들은 제 마음을 대변한 것 같았다. 제자들이 하나같이 유가에게 용서를 구하라고 소리를 치며 호기를 부렸다. 눈앞에 이 사람이 혼자서 송가를 멸한 마계의 존주라는 사실은 잊은 듯 그를 무시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아구는 입을 벌리고 아래로 진화를 쏘았다. 작열하는 고온이 대기마저 태워버릴 듯 쏟아졌다.

표정이 굳은 백려가 장로들에게 눈짓하자, 허공에 있던 호산대진을 급히 끌어와 진화의 앞을 막았다. 부딪힌 화염은 조금의 균열도 만들지 못하고 깨끗하게 사라져버렸고, 그걸 보던 아구는 넋을 잃었다.

아구가 날개를 펴고 분노하여 본명진화를 쓰려했지만 유가가 가로막았다.

유가는 두 주먹을 쥐고 흑금장갑을 꼈다. 그 위에 형체화된 검은 진기가 감돌자 공기를 부식시키며 치지직 소리를 냈다. 그는 조금 기가 죽은 아구를 보고 말했다.

“가라.”

“대인, 저는…….”

“어서 가!”

유가는 말을 끝내기도 전에 대진 속으로 들어갔다. 맨주먹이 진법과 뒤엉켰고, 날카로운 권풍과 청색의 대진이 서로 부딪히며 하늘에 금이 가는 소리가 났다. 대진에 미세한 균열이 생겼다. 과연 주작의 진화보다 훨씬 무서운 힘이었다.

아구는 자기 뜻대로 행동할 수 없었다. 그는 반드시 탈출해서 할아버지께 대인을 도와달라고 청해야 했다.

제자들은 아구가 떠나는 걸 보고 급히 검진(劍陣)을 펼쳤다. 아구의 몸을 벌집으로 만들려는 듯 순식간에 수천 개의 보검이 그를 뒤쫓았다. 유가는 그런 제자들과 전력으로 대진을 통제하는 백려와 장로들의 모습을 보면서 경멸의 미소를 지었다.

“너희 경창파는 습격을 좋아하고, 다수로 소수를 괴롭히길 즐기는구나, 정말 재미있군.”

“유가, 천하전투 때 자네가 다수로 소수를 공격하던 일은 잊은 것인가? 지금 대체 무슨 낯짝으로 우리 경창파를 들먹이는 것이냐? 정말 가소롭다. 순순히 죽음이나 기다려라!”

완십주였다. 당시에 유가와 고금성이 앞뒤에서 그를 공격했을 때를 똑똑히 기억하고 지금 되갚아 주려했다.

“그래, 본존은 다수로 소수를 괴롭히길 좋아한다. 고상한 척하며 뒤로 더러운 짓을 하는 저속한 너희 수진인들과는 다르지.”

그는 표면상 완십주와 입씨름을 하고 있었지만, 사실 눈은 아구를 쫓는 수천 개의 보검에 꽂혀 있었다. 아구가 멀리 날아가는 데도 그 검들이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입꼬리를 올리며 냉소하던 유가가 호산대진을 막던 동작을 거두고 급히 검진을 쫓았다. 손에는 빠르게 법진을 치고 장풍을 쏘아 그 기세등등한 검진에 맞섰다.

무언가가 터지는 듯 거대한 소리와 함께 수천 개의 보검이 뿔뿔이 흩어졌고, 일부의 검들은 그 자리에서 산산조각났다. 모든 제자가 단 한 번의 공격에 얼굴이 하얗게 질려 뒤로 물러났다.

유가가 속으로 안도하는 사이, 신식이 갑자기 위기를 느꼈다. 낯빛이 변한 그는다시 주먹을 쥐고 질주하는 대진의 일각과 부딪혔다. 거대한 충격으로 몸이 반보 물러났고, 목구멍에선 피비린내가 느껴졌다. 호산대진은 7장이 넘는 균열이 생겼다.

아구가 떠나자 유가도 거리낌 없었다. 몸속의 피가 은근하게 끓어올랐고, 목구멍에 걸린 피는 꿀꺽 삼켰다. 그리곤 일부러 더 도발했다.

“선계의 최대 문파가 고작 이 정도인 건가?”

백려와 수많은 장로들 뒤에 서서 구경하던 정상은 고개를 돌리다가 저 앞에서 안색이 어두운 초운이 눈에 들어왔다. 송기연의 표정도 안 좋았지만 그에겐 차마 묻지 못하고 초운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초운, 표정이 왜 그래? 놀랐어?”

정상은 다독이듯 초운의 어깨를 두드렸다.

“걱정마라. 내가 있는 한, 넌 안전하니까.”

초운은 정상과 말씨름하지 않고 어깨에 올려진 정상의 손을 슬쩍 피했다.

“난 괜찮으니 그만 물어.”

초운은 허공에 떠 있는 유가를 보며 마음이 많이 복잡했다. 반년 전, 경창산 아래에서 저자를 보았다. 반 각 정도밖에 되지 않는 짧은 순간이었지만, 이자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지금 그가 수진인이라면 이를 가는 마존 유가라는 걸 시인했지만, 두 사람이 동일 인물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지난 반 년 동안 기연과 함께 지내면서 그는 기연이 사존을 얼마나 생각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자신의 사존이 이 수진계 사람들이 치를 떠는 악마라는 걸 영원히 생각하지 못하겠지?

그날 유가가 검붉은 가면을 쓰고 말했던 목소리나, 그 웃음을 그는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경창파로 가서 ‘기연’이라는 제자를 찾아라. 그리고 그 제자에게 검붉은 가면을 쓴 사람이 이 말을 전했다고 알려주어라.’

‘네가 유가를 죽인 후, 사존이 널 다시 찾아가겠다.’

순간 초운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게 생각보다 너무 굉장하다는 걸 느끼고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는 송기연에게 모든 걸 알려주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이를 악물고 제자리에 멈췄다. 유가는 자신의 은인이었고, 그의 신분을 밝히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니 실언할 수 없었다.

주먹을 꽉 쥐었다가 펴는 초운의 눈에 결연함이 가득했다. 초운은 그와 한 약속을 평생 어기지 않을 거라 다짐했다.

정상은 평소와 많이 다른 초운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이 물어봐도 대답해주지 않을 걸 알았으니, 스스로 재미없는 일을 자초한 것이다. 정상은 입을 삐죽이며 팔짱을 낀 채 한쪽으로 가서 계속 구경했다.

“악마가 자신만만하군. 지금도 함부로 지껄이다니. 진 장로는 동쪽을 장악했고, 완 장로는 네가 있는 서남쪽을……!”

백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가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백려 똑똑히 알려 주지. 경창파의 진 장로를 너무 믿지 마라.”

“진 장로를 욕보이지 마라!”

“그래, 악마 주제에 어디 진 장로를 욕보이느냐!?”

한숨 돌리던 제자들이 먼저 폭발해서 여기저기서 아우성이 터졌다. 현장은 또 한순간에 엉망이었다.

“본존은 절대 허튼소리를 하지 않는다. 너희가 직접 경애하는 진 장로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물어보라. 과연 대답을 할 수 있을 진 모르겠구나!”

유가가 이렇게 여유로운 척 좋은 구경이나 하겠다는 태도를 보이는 건 완 장로가 어떤 반응을 보일 지 지켜 보기 위함이었다. 동시에 능광신군이 올 때까지 시간도 끌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생각지도 못한 건, 진 장로가 자신 보다 더 뻔뻔하다는 거였다.

진장로는 송기연을 한번 보고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말했다.

“노인이 앉아서 똑똑히 보았는데,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이냐!”

그리고 백려에게 말했다.

“장문인. 방금 기연과 정상이 겨루었을 때, 노인이 경기장의 상황을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두 제자가 승부를 가리려는 데 기연의 등에 사악한 기운이 꽂히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여 노인이 급히 손으로 막고 나서야 저희 문파의 우수한 제자가 악마의 손에 넘어가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이 악마가 이렇게 뻔뻔하게 말을 꺼내는 것을 보니 이토록이나 악질일 줄은 몰랐습니다.”

풉!

유가는 정말 침을 뿜을 뻔했다. 허튼소리를 정말 잘 지껄이는군!

저 늙은이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이렇게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하다니. 그리고 뭐 악질이라고? 너무한 거 아니야? 말이 심하잖아? 속으로 아주 욕이 나왔다.

너무 어이없는 나머지 입가에 경련이 일어나 할 말도 잊었다. 이 상황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얘기 한담.

백려와 다른 제자들은 진 장로의 말을 굳게 믿고, 유가도 별말이 없자 이건 변명이 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그들의 얼굴엔 유가에 대한 혐오와 경멸이 더욱 짙어졌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아무 이유도 없이 자신을 노려보자, 유가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지끈거리는 이마를 문지르며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그래! 진 장로의 말이 다 맞다!”

여기까지 말하고 유가는 공수를 하고 비꼬았다.

“본존이 탄복했다!”

“허튼소리 집어치워! 목숨이나 내놓아라! 제자들은 검진을 결성하라!”

백려의 외침에 모든 장로들이 함께 거대한 호산대진을 유가에게 겨누었다. 경기장의 경창파 제자들도 다시금 패검에 진기를 주입하여 검을 허공으로 띄워 법진을 쳤다. 각 진들이 공중에 있는 유가를 사방팔방에서 에워쌌다. 호산대진이 덮쳐올 수 있는 하나의 틈만 남겨두고, 사방은 바람도 샐 수 없을 만큼 빽빽했다.

유가가 웃던 얼굴을 거두고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이건 질질 끌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다. 끌 수 없다면 버틸 수밖에 없다. 그는 자신이 여기에서 죽을 거로 생각지 않았다. 이 악마가 송기연의 손아귀에 죽지 않는다면 이 책은 더 이상 진행해 나갈 수가 없잖아?

마음을 다잡으며 유가는 흑금장갑을 양 주먹에 끼웠다. 자신의 부주의로 흘린 입가의 핏자국을 닦았다. 신식을 풀어 이미 공격해 오는 청색 대진에 맞섰다.

쾅! 쾅! 쾅!

굉음과 함께 금속이 부딪히며 나는 거대한 소리가 온 경기장에 가득 찼다.

유가는 질주해오는 대진을 진기를 씌운 주먹으로 치고, 몸을 돌려 힘차게 뒤쪽 검진을 쳐냈다. 하지만 이건 두 곳의 공격을 처리했을 뿐, 아직 무수히 많은 공격이 사방에서 쏟아지고 있었다.

유가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격렬하게 반격하는 가운데 도리어 마음은 가라앉았다. 심신이 점점 극의 경지에 다다르고 천지의 기운에 통달하자, 모든 공격의 허점이 그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구사일생의 도겁기(渡劫期)를 겪고, 천지법의 깨달음을 얻어야 대승기에 진입할 수 있다. 유가는 이미 대승 중기(中期)에 도달해, 일부 천도(天道)를 이미 수중에 쥐었다. 궁기와 능광신군과의 교전에서는 아직 몸이 익숙하지 않아 원작에서 유가가 가진 능력을 거의 쓰질 못했다. 하지만 생사의 기로에 놓인 지금, 이 일부 도리가 깨우쳐 갔다.

손바닥의 흑석각인이 또다시 발열했다. 유가는 불편한 듯 미간을 찌푸렸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지금 전신에서 운용하는 힘을 분명히 알 수 있었고 자신을 덮쳐오는 공격의 허점 눈에 훤했다.

검진과 호산대진을 넘나들며 전력으로 공격하자 청색의 대진 위에 균열이 생겼다. 비록 잠시 후 원상복귀되었지만, 이렇게 간다면 백려와 장로들이 많은 진기를 소비하여 패배할 터였다.

백려는 이 이치를 알고 있었다. 도겁기인 그들의 진기는 유가의 대승기에 미치지 못했다. 또한 그들이 대진을 유지하며 소비하는 진기가, 유가가 공격으로 소모하는 진기보다 훨씬 많아 장기전에 적합하지 않았다.

백려는 완십주를 향해 눈짓하고 경기장 위 장로들에게 말을 전했다. 명령을 받은 십여 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움직임에 유가는 뭔가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역시, 완십주가 선두로 공중으로 날아오르자 7명의 장로들이 그 뒤를 따랐다. 유가를 둘러싸고 동서남북, 동남, 동북, 서남, 서북 여덟 방향에 모두 자리를 잡더니 곧 빠르게 법진을 완성했다. 새로운 호산대진이 빠르게 쳐졌고, 유가가 그대로 그 안에 갇혔다.

유가는 즉시 진기를 뿜어 이 구속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아래에는 백려와 또 다른 대진을 가진 장로 7명이 있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솟아오른 대진은 유가의 머리 위를 덮치고 강력한 힘으로 압력을 가했다.

그때 손바닥의 흑석각인이 뜨거워졌다. 유가는 화상 같은 열기에 움찔하며 몸을 굳혔다. 열기는 혈맥을 타고 심장까지 전해지며 머릿속으로 수많은 잔상들을 일으켰다.

젠장, 이 순간에 정신이 딴 데 팔리다니!

유가는 이렇게 대진을 빠져나갈 수 있는 기회를 날려버렸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지경이라 속이 쓰렸다.

재수가 없으려니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네!

그는 뒤늦게나마 정신을 집중하여, 육안으론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로 빠르게 법진을 쳤다. 그의 손짓에 따라 공기 중 원소들이 움직여 법진으로 신속하게 결집했다. 유가는 지금 본인이 친 진법이 방금 머릿속에서 떠오른 수많은 사념들에서 나온 도감이라는 걸 깨닫지 못했다.

완성된 결계는 바로 호산대진과 충돌하며 폭발했다. 그 충격에 경기장 전체 상공 공간이 일순 일그러졌다. 진기의 폭풍은 제자들의 검진을 무너트리고 내상을 입혀 제자들은 하나같이 붉은 피를 토해냈다.

폭풍이 일으킨 모래바람이 경기장 전체를 덮쳐 아무것도 보이지 않다가 한참이 지나 먼지가 가라앉고 공중의 형세가 서서히 드러났다. 각 방위의 완십주와 여덟 장로들의 얼굴은 창백했다. 경련이 이는 몸을 겨우겨우 심법으로 가누며 간신히 공중에 떠 있었다. 경기장의 백려와 장로들이 받은 충격은 완십주와 공중의 장로들이 받은 것보다 작았지만, 낯빛은 흙빛이었다.

그에 반해 유가는.

수많은 경창파 제자들이 보았다. 아수라장의 전장에서 홀로만 유일하게 공중에 흐트러짐 없이 서 있는 마존을. 새파란 하늘을 배경삼아 화려하게 피어난 봉황꽃처럼 마존은 요염한 미소를 여유롭게 흘리며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시리도록 하얀 피부와 그와 무섭도록 어울리는 피 같은 입술, 그리고 까맣게 반짝이는 눈.

유가는 그렇게 절대적인 마존의 모습으로 입꼬리를 바짝 올리며 말했다.

“보아하니 아직 본존이 한 수 위군.”

“유가, 몇 년 동안 못 봤는데도 아직도 방자하고 오만하구나.”

양쪽이 팽팽히 맞서고 있는 가운데, 경창산 깊은 곳에서 노인의 탄식이 들려왔다.

소리가 나는 곳을 보니 저 멀리 허공에 흰옷을 입은 세 노인이 서 있었다. 눈 깜짝할 새 그들은 코앞 3장 앞까지 다가왔다.

“사존, 사숙(師叔)를 뵙습니다!”

“사조(師祖)를 뵙습니다!”

백려가 제일 먼저 몸을 굽혀 그 노인에게 절을 올리자, 곧 따라서 경창파의 제자들이 모두 몸을 굽혀 예를 올렸다.

유가는 가슴이 철렁했다.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그는 자신의 몸 상태를 잘 알고 있었다. 기세가 좋아 쓰러뜨리지 못할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유가나 완십주나 상태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유가의 착각이 아니라면 그의 앞에 서 있는 저 세 사람이 바로 경창파 뒷산에 기거하는 늙은 괴물들이었다. 실력은 대략 대승 초기였다. 자신이 전성기라면 한판 붙을 수 있겠지만, 만약 지금 저들이 연합이라도 한다면 자신은 오늘 여기서 목숨을 잃을 판이었다.

오장육부가 한바탕 뒤틀려 유가의 목구멍에서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하지만 기어코 참을 수밖에 없다. 최선을 다해야 했다. 오늘 여기를 벗어나기 어렵다고 해도 경창파에 절대 약한 모습을 보일 순 없다.

“본존이 이런 것이 하루 이틀이던가. 너희 세 노인은 오랜만에 보는군. 굴 밖으로 나오자마자 남이 약해진 틈을 놓치지 않는구나.”

“유가. 입 좀 다물 거라!”

백려가 언성을 높였다가 세 노인을 의식하고 후회했다.

“제자가 실력이 부족해 오늘 이 악마에게 그만 패하였습니다. 사존, 두 사숙, 죄를 용서하십시오.”

흰옷의 노인들은 백려에게 일어나라고 손을 흔들었다. 담담한 말투에 수척한 자태가 어우러지자 도인의 풍격이 드러났다.

“그때 나와 네 사숙이 연합하고도 저자를 제압할 수 없었는데, 네 실력으로 유가를 상대하긴 힘든 일이다.”

노인이 다시금 유가를 보고 정색하며 말했다.

“유가, 백 년 전 우린 당신을 당해낼 수 없었다. 하지만 이미 백 년이나 지났고, 오늘 우리 셋은 다시금 당신의 실력을 가늠하고 싶네. 내 체면을 받아주겠는가?”

정말 조금이라도 이미지를 덜 관리하고 싶었다면 유가는 당장 저 노인들에게 험한 욕을 날리고 싶었다.

젠장! 어떻게 경창파에 있는 자들은 하나같이 다 이렇게 염치가 없는 거야!

백려가 문파 전체를 통틀어 자신 한 명을 대적한 것도 이미 참 염치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저 늙은이들은 이제 와서 저런 말을 저렇게 하고 있었다.

전에 세 사람이 연합하여 졌으면서 오늘 다시 대결을 청한다고? 너희들 눈이 멀지 않은 이상, 어떻게 이런 부상을 입은 나를 모를 수가 있지? 남의 위급한 상황을 틈타서 자신의 정의로움을 뽐내려고 하다니. 체면을 봐줘? 꺼져!

화가 잔뜩 오른 유가는 그만 기침을 토해내다 피를 보일까 급히 입을 막았다. 한참 후에 손을 내리며, 평소와 같이 여유롭게 웃으며 말했다.

“역시 그 사부에 그 제자군. 수진계의 당당한 세 걸인이 이렇게 염치가 없는 자들일 줄이야. 오늘 본존이 똑똑히 보았다. 역시 너희 선계가 마계보다 약한 이유가 있구나. 너희들이 같이 덤비고 싶다면, 덤벼라. 본존이 끝까지 상대해 주지!”

송기연이 저 멀리 허공 위에 서 있는 유가를 복잡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저자가 왜 저리 침착한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죽음이 코앞에 닥쳤는데 저렇게 평온하다니. 게다가 방금 그 혼란한 틈에 유가는 장문인과 장로들을 죽일 수 있었는데도 손을 쓰지 않았다. 그의 모든 행동은 수진자들보다 훨씬 정도(正道)가 넘쳐 꿰뚫어 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가 정말 이런 사람이었다면 왜 아무런 이유도 없이 송가를 멸했을까? 왜 좀 전에 대결에서 자신을 사지로 몰아넣으려고 했지?

송기연은 유가가 대체 사람의 목숨을 뭐라고 생각하는지 알고 싶었다.

“그럼 늙은이가 가르침을 청하겠네!”

세 노인이 각자 움직여 유가를 둘러싸고 자신의 보검을 꺼내 들었다. 세 사람은 모두 수진계에 이름난 사람들이다. 보검의 품계(品階)도 당연히 나쁘지 않았다.

세 개의 보검이 동시에 나타나자 그 예리한 살기에 온도가 갑자기 뚝 떨어진 것 같았다. 날카로운 검 끝이 햇빛을 반사하며 유가의 목숨을 노리고 곧장 급소를 찔렀다.

유가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이를 악물며 온몸의 진기를 내보내 맞섰다. 거센 주먹이 검의 공격을 막아내며 수백 번 충돌하자 체력 소모가 만만치 않았다.

그는 마족이기 때문에 육체의 힘이 평범한 수진계 사람들보다 몇 배 강했다. 하지만 지금 백려와의 전투로 이미 적지 않은 부상을 입은 상태에서 진기로 세 노인을 상대하니 오래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눈앞이 흐려지는 듯 집중이 흐트러지는 유가를 발견한 노인 하나가 그 허점을 파고들어 곧장 유가의 왼쪽 어깨를 찔렀다. 동맥이 파열되고 솟구친 피가 검 끝과 공중을 붉게 물들였다, 금세 닥쳐오는 극심한 통증에 순식간에 유가의 머리가 멈추었다.

다른 노인이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검을 휘둘러 유가의 가슴팍에 꽂으려 했다. 이 검의 기세가 대단하여 만약 유가가 찔린다면 반격할 수가 없었고, 그럼 이 경창파에 완전히 굴복 당하는 것이었다.

유가가 어깨에 꽂힌 검을 뽑아 내팽겨치자 검을 쥔 노인이 뒤로 물러나며 피했다. 유가의 눈에 핏기가 감돌았다. 뒤에서 압박해오는 검 끝을 잡아 충격으로 그자를 뒤로 한참을 밀려나게 하고 또 다른 검을 겨루는 장로에 맞서려 했다.

그 순간 괴팍한 소리가 경기장 하늘에 울려 퍼졌다. 유가를 덮치던 보검이 괴성과 소리와 함께 달려든 본명진화(本命真火)에 완전 재가 되었다.

“내 함광검(含光劍)!”

패검이 타버린 것을 보고 노인은 이를 갈며 눈을 부라리다가 그 자리에 나타난 사람을 보고 낯빛이 그대로 굳어졌다. 노인은 감히 욕도 내뱉지 못했다.

“모풍(暮風) 오랜만이군. 이미 이렇게나 늙다니, 역시 흐르는 세월은 어쩔 수 없나 보군.”

얼굴이 굳어진 노인은 어쩔 수 없이 앞에 있는 이에게 예를 올리며 이를 악물고 말했다.

“능광신군께서 이런 누추한 경창파엔 어인 일로 오셨습니까?”

그렇다. 방금 그 본명진화는 능광의 것이었다.

그는 아구의 재촉에 머리가 아플 정도로 본래의 모습으로 유가를 구하러 가도록 압박당했다. 다행히 딱 중요한 순간에 도착한 모양이다. 자신이 조금만 늦었다면 유가는 죽진 않았더라도 생사의 갈림길을 오가고 있었을 것이다. 만약 그런 모습이었다면 아구가 얼마나 상심을 했을까.

능광은 부채를 꺼내어 거드름을 피우고 주위에 모래바람을 일으켰다.

“모풍, 너희 경기장이 이렇게 엉망진창인데 어째서 치우지 않는 것이냐?”

능광이 온 걸 본 유가는 마음을 누르던 큰 돌이 사라진 느낌이었다. 손에 진기를 움직여 자신의 상처 입은 어깨를 토닥이자 피부가 타는 냄새와 함께 새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고통에 얼굴이 점점 일그러졌지만, 이게 지혈에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곧바로 피가 쏟아지던 상처가 지혈이 되었다.

아무도 감히 유가의 앞을 막지 못했기에 유가는 능광에게 다가가 공수했다.

“능광신군, 감사합니다.”

방금 유가의 거친 지혈 방법을 똑똑히 본 능광은 속으로 유가의 기백에 감탄했으나 겉으론 티내지 않았다.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유가를 힐끗 보더니 세 사람 중 우두머리 모풍을 보고 온유하게 말했다.

“신군은 오늘 확실히 부탁할 일이 있어 온 것이다.”

능광은 고개를 돌려 경기장에 서 있는 정상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수중의 부채로 콕 찍어 가리켰다.

“신군은 저자가 가진 변신초를 원한다.”

이 말을 들은 정상의 머리털이 쭈뼛 섰다. 게다가 능광의 강력한 신식에 압도당해 뒤로 물러날 수도 없이 그대로 식은땀만 흘렸다.

모풍이 미간을 찌푸리고 앞으로 걸어 나와 정상을 압박하던 신식을 막았다.

“능광신군 농담하시는군요. 저희 제자가 어찌 그런 신물을 가지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압박에서 풀려났지만 정상의 표정은 조금도 풀어지지 않았다. 자신을 대신해 말해주는 모풍에게 감사했어도 능광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의 몸엔 확실히 변신초가 있었다. 만약 자신을 수색한다면 요괴의 신분이 탄로 날 것이고 그럼 계속 경창파에 있을 수도, 자신의 은인에게 보은할 기회도 사라지게 되었다.

다 된 밥에 코를 빠뜨릴 수 없다. 안 돼, 절대 안 돼!

그는 애원하는 표정으로 능광을 바라보며 변신초를 꺼냈다.

“혹시 신군께서 말씀하신 게 이 산초입니까? 이건 소인이 고향에서 어쩌다가 은은하게 영기가 흐르는 것을 보고 얻게 된 것인데, 오늘까지 가지고 있었습니다. 만약 신군께서 이걸 찾으시는 거면 바로 드리겠습니다.”

정상의 귀밑머리엔 자신도 모르게 땀이 흥건하게 흘렀다. 속으로는 제발 신군께서 자신의 신분을 알리지 말아 달라고 간청하고 있었다.

능광이 눈을 가늘게 뜨고 부채를 손바닥에 탁탁 부딪혔다. 그 소리 하나하나가 정상의 심장에 꽂히듯 온 경기장에 긴장감이 흘렀다.

갑자기 능광의 부채가 정상을 가리키더니 정상이 정신을 차렸을 땐 변신초가 이미 능광의 수중에 있었다. 능광은 입꼬리를 올리며 알 수 없는 미소를 띠었다.

“좋다. 저 아이 확실히 눈치가 있군.”

모풍은 별다른 말이 없었다, 능광이 이미 물건을 손에 넣은 것을 보고 예를 올리고 공손하게 말했다.

“신군께서 이미 원하시는 물건을 손에 넣으셨으니, 이제 저희 문파의 일에 관여하지 않으시겠죠?”

능광은 일부러 놀란 척하며 과장되게 입을 크게 벌리고 부채로 입을 가렸다.

“아? 내가 너희 문파 일에 간섭을 했느냐? 어찌 나는 모르는고?”

옆에 서 있던 유가가 그만 웃음이 터질 뻔했다. 참다가 그만 상처를 건드리는 바람에 이를 악물어야 했다.

능광은 유가를 흘겨보고 기침을 한번 하고서 말을 이었다.

“자네의 그 말, 신군은 좀 억울하군. 오래된 벗이니 자네들은 이 신군의 성격을 잘 알고 있을 터. 이 신군이 그리 사사로운 일에 관여하는 사람이었나?”

모풍의 입꼬리에 경련이 났다. 주름살 가득한 얼굴의 태연했던 표정도 곧 사라졌다. 능광신군이 이렇게 악마 유가의 편에 설 줄이야.

“할머니! 방금 저 자식이 절 괴롭혔어요! 제게 저 검을 겨누었다니깐요! 만약 대인께서 막아주시지 않았다면 할머니께서 더는 절 보지 못하셨을 거예요! 흑흑, 할머니 저 대신 화풀이 좀 해 주세요!”

양측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을 때 아구의 목소리가 저 멀리서 들려왔다. 유가의 시선에 흰옷을 입은 청년이 저 멀리서 다가오고 있었다. 그의 곁으로 날아온 아구의 붉은 털 때문에 청년의 장포가 붉게 물들었다. 그의 걸음이 그렇게 빠르지 않았음에도 순식간에 능광에게 이동했으니 수련의 경지가 엄청 깊다는 것이었다.

아구는 급히 유가에게 쪼르르 다가와 유가의 온몸에 난 상처를 살폈다. 그리곤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트렸다.

“대인, 흑, 대인, 아구가 잘못했어요. 아구가 너무 늦었습니다…….”

그동안 아구가 우는 것을 본 적이 없던 유가는, 갑자기 아구가 울자 어쩔 줄을 몰랐다. 급히 아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러 농담을 던졌다.

“잘못한 걸 알았으면 이제 앞으로 본존이 네 머리를 쓰다듬어도 되겠느냐?”

아구는 울면서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언제든 만지세요. 대인께서 기쁘시다면 아구에게 뭐든 하셔도 됩니다!”

유가가 긴 눈을 부드럽게 접으며 말했다.

“본존은 네가 울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네네, 아구 안 울어요!”

옆에 서서 보고있던 능광신군은 무언가 욱하는 심정에 욕을 하고 싶었으나, 유가가 한마디로 바로 이 아이를 달래는 것을 보고 자신보다 낫다고 생각해 버렸다.

정말 가문의 불행이군, 가문의 불행이야.

능광은 더 이상 아구와 유가에게 신경 쓰지 않고 곁에 다가온 청년을 다정하게 끌어안았다.

“청요(清瑤), 늦었구나. 보고 싶어 죽는 줄 알았다.”

청요가 날카롭게 눈을 흘기자 선기가 가득했던 이미지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청요는 아름다운 두 눈썹을 치켜 세우며 능광의 머리를 밀어버렸다.

“능광, 우리가 헤어진 지 채 일각도 안 되었으니 허튼수작 부리지 마시오.”

청요는 금색 눈동자에 살기를 가득 채우고 조금 전 아구가 말한 경창파 제자들을 노려봤다. 그리고 모풍, 백려 등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진기로 감싼 백색 분말을 땅에 뿌렸다.

“조, 조심해라! 이 가루에 독이 있다!”

청요의 솜씨는 남달라 분말이 사람들 사이를 계속 파고들었고, 모풍에 외침도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일전에 그렇게 큰 부상을 입지 않은 송기연은 동작이 빨랐다. 그래서 청요의 독 가루를 막을 수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런 운이 없었다. 경기장의 경창파 제자들이 다들 녹초가 되어 바닥에 널브러지고 장내가 혼란스러워졌다.

모풍은 이미 예를 차릴 겨를도 없이 청요에게 소리쳤다.

“신군 이게 무슨 짓입니까! 설마 공공연히 우리 경창파와 척을 지시려는 겁니까?!”

능광은 미간을 찌푸리곤 청요의 어깨에 두른 손을 풀고 모풍을 향해 두 걸음 나아갔다. 그리고 해맑게 웃어 보였다.

“자네도 들었다시피 신군의 손자 아구가 너희 제자에게 괴롭힘을 당했다는구나. 게다가 그 제자는 아구의 목숨까지 노렸다지. 청요는 아구가 고통스러워하는 걸 보지 못한다네. 지금 이것도 그들에게 고통만 줄 뿐이지, 생명엔 지장이 없다. 앞으로 몇 년 동안 수련을 하면 피를 토하게 되겠지만.”

“경창파가 존경하는 능광신군과 사형이신 청요신군께 어찌 실례를 할 수 있겠습니까. 두 분 저희를 그리 업신여기지 마십시오!”

모풍 얼굴의 주름이 부들부들 떨렸다. 도인의 기개는 사라지고 곧 숨이 넘어갈 것 같았다.

놀릴 만큼 놀리자 능광이 부채로 유가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렇게 하지. 신군도 그리 막무가내인 사람은 아니네. 유가를 신군의 왕부에서 지내게 해준다면, 이 신군도 청요에게 해독제를 주라고 하겠네. 어떠한가?”

돌고 돌아 원래 문제는 여기 있었다. 왕부에서 지내는 건 당연히 가짜고, 사실 유가를 놓아 달라는 게 능광의 진심이라는 걸 모풍이 마침내 깨달았다. 다른 방법이 없자 그가 목소리를 낮추었다,

“주작족이 마계 편에 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신군 잊지 마십시오. 요수삼림은 여기 선계에 있습니다. 공공연하게 선계와 척을 지신다면 앞으로 지내기 편치 않으실 겁니다.”

아구가 능광이 잠시 머뭇거리려 하자 그럴 틈도 없이 말했다.

“할아버지, 저 늙은이의 말에 넘어가지 마세요. 우리 주작족이 저자의 몇 마디에 놀란다면 앞으로 어찌 고개를 들 수 있겠어요! 분명히 청룡 족의 웃음거리가 되고 말 거예요!”

능광은 아구를 놀리려 지었던 미적한 표정을 거두고 부채로 모풍이 코끝을 가리키며 냉소했다.

“모풍, 똑똑히 듣거라. 신군은 평소에 위협을 제일 싫어한다. 신군이 원한다면 오늘 너희 경창파를 피로 물들일 것이며, 이 대륙에서 완전히 없애 버릴 수도 있다!

능광은 오랫동안 수진대륙에 얼굴을 드러낸 적이 없었지만, 그의 명성과 실력은 여전히 수진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모풍 일행도 당연히 잘 알고 있었다.

흉수 궁기가 세상에 내려왔을 때 능광, 청요는 몇 명의 대신수가문의 고수와 함께 궁기를 봉인하며 큰 공을 세웠었다. 그 당시 모풍 일행은 애송이 소년일 뿐이었다. 항렬과 자격으로 따지면 능광, 청요는 그들이 몇 바퀴나 돌아야 닿을 수 있을 정도니 수련의 경지는 말할 것도 없었다.

능광의 말에 모풍들은 마음속으로 경종을 울렸고, 이에 자중하는 수밖에 없었다. 모풍은 능광이 유가를 위해 경창파와 척을 지진 않을 거로 생각했으나, 그는 실책이었다.

부채가 코끝에 닿은 모풍은 경창파 제자들 앞에서 창피를 당했다. 주름이 가득한 얼굴에 경련이 일었고 그 나이에도 분노가 치밀었다. 그가 손으로 부채를 치우며 차갑게 능광을 바라보고 예의 없는 말투로 말했다.

“능광신군은 이렇게 예의가 없으신 분이 아니었는데, 오늘은 좀 충동적이시군요. 제 말이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제 말이 끝난 뒤 신군께서 경창파와 척을 질지 말지 선택하여도 늦지 않습니다.”

능광 곁에서 그 말을 들은 유가는 다시 한번 모풍을 경시했다. 그는 좀 전에 모든 선계와 연합하여 능광에 맞서려고 했던 주제, 지금은 한껏 겁을 먹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확실히 이 노인은 정세에 밝았다. 어쨌든 몇 백 년을 살았고, 경창파를 보호하기 위해선 굴복하라면 굴복할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체면을 버리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능광이 부채를 거두며 눈썹을 추켜세웠다.

“신군은 네게 기회를 줄 테니 말해보아라.”

굴욕적인 표정의 모풍이 고개를 숙이고 이를 꽉 깨물었다.

“유가를 놓아 드릴 테니 청요신군께 제 제자들의 해독을 간청드립니다!”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두 명의 다른 노인이 그의 옆에 서서 청요를 향해 예를 갖추었다.

“청요신군께 제 제자들의 해독을 간청드립니다!”

대(大)노인들의 간청에 경기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참지 못한 여린 제자들은 울음을 터뜨렸다. 사형이 저렇게 몰리는 것을 보고 자신이 무능하여 문파의 체면을 잃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백려 등도 부끄러웠지만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도겁기인 그들과 대승기는 한 단계 차이였지만 수준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어두운 표정으로 녹초가 된 경창파 제자들 사이에서, 송기연이 오른손으로 검 자루를 잡았다.

송가가 멸문한 건 실력이 유가보다 좋지 않아서였다.

그가 유가에게 당한 것도 역시 실력이 좋지 않아서였다.

경창파가 지금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실력이 좋지 않아서다!

이 세계는 강한 자만이 존경받는 세계였다. 강력한 실력이 있어야만 자신의 존엄을 지킬 수 있었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었다.

그의 눈 밑에는 붉은빛이 반짝였고, 체내의 진기는 끊임없이 요동쳤다. 궁기의 허상이 점점 등 뒤에서 형성되고 있었다.

송기연은 완십주의 만류를 무시한 채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스르릉-

장검을 뽑아 허공의 유가를 똑바로 가리켰다. 진기를 감싼 차가운 소리가 온 경기장에 퍼져나갔다.

“유가, 잘 들어라! 후에 내가 직접! 이 송기연의 손으로 네 목숨을 거두겠다!”

능광은 아무 말 없이 송기연을 흘겨보고 다시 유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의미심장한 웃음을 터뜨렸다. 좋은 구경 거리였다.

고요한 분위기가 깨졌다. 모든 사람이 놀란 듯 그 왜소한 소년을 바라보았다. 송기연이라는 이름을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다가, 생각이 떠오르자마자 그만 까무러치고 말았다.

일전에 천하전투에서 고금성이 천하에 버려 이미 시체도 찾을 수 없던 송가의 공자가 바로 송기연 아니었던가!

백려도 못지않게 놀랐다. 완십주가 그의 신분을 얘기하지도 않고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제자에게 잘해 주길래 이상하다고 생각했건만, 지금 이 아이의 이름을 듣자마자 바로 모든 게 이해가 됐다.

기 연, 기연. 송가의 성씨를 밝히지 않고 그들을 속였다!

관중들은 놀랐고 유가는 머리가 지끈했다.

젠장. 그가 두려워하던 순간이 바로 이 순간이었다.

송기연이 제 이름을 밝히며 유가에게 도전했다. 원작의 유가라면 화근을 뿌리째 뽑겠다며 그를 죽일 텐데, 지금 자신은 어떻게 손을 써야 할까?

아무 손도 쓰지 않다가 소문이라도 나면, 마존 유가는 의심받고 지탄 받지 않겠는가.

젠장, 저 녀석은 얌전히 있을 것이지 괜히 일거리만 주는구나!

“대인, 저 녀석이 대인 욕해요.”

아구는 사람 아픈 곳을 이렇게 잘 찔렀다. 굳이 제대로 알려주니 유가는 협심증이라도 올 것 같았다.

“본존도 안다.”

“그럼 제가 대인 대신 가서 혼내주고 올까요?”

아구는 일찍부터 송기연을 혼내고 싶어 했으니, 지금 제대로 된 명분으로 당연히 송기연과 한판 붙고 싶어 했다.

“네가 나설 필요 없다.”

이미 상처가 많이 나은 유가가 차갑게 송기연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눈 깜짝할 새 송기연의 코앞에 나타나 차갑게 반짝이는 검 끝을 두 손가락으로 가볍게 잡았다.

백려, 모풍은 크게 놀랐다. 모풍이 바로 뛰어오려다 능광에게 가로막혔다.

“신군 왜 막으시는 겁니까! 정말 제가 손을 쓰길 원하시는 겁니까?”

“유가, 그 아이를 건드리지 마라!”

완십주가 소리를 터트리며 유가를 향해 장풍을 쏘려했다. 하지만 체내의 진기가 움직이지 않아 경기장에 한바탕 피를 토했다. 청요의 독이었다.

유가가 유가는 파리를 쫓듯 장풍을 없애 버리고 송기연의 검 끝을 힐끗 보며 웃었다. 송기연이 아무리 애를 써도 보검은 꿈쩍도 하지 못했다. 한껏 비꼬는 말투로 유가는 허리를 굽혀 송기연의 귓가에 다가가 말했다.

“네까짓 게 무엇이라, 이 정도 실력으로 본존을 죽일 수 있을 거로 생각한 것이냐?”

유가는 태연하게 다시 허리를 세우고 살기등등한 송기연의 눈을 바라 보았다. 그리고 정말 아주 살짝 손에 힘을 주었다.

쨍-! 그 차갑고도 처연한 소리와 함께 ‘내’가 송기연에게 주었던 보검이 정확히 두 동강났다.

“오늘 본존이 기분이 좋아, 널 죽이지는 않겠다. 다만 다음에 다시 널 마주친다면 그땐 이 검처럼 될 줄 알거라.”

유가가 두 동강이 난 검을 경기장에 아무렇게나 버렸고 ‘쨍그랑’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송기연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그대로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유가는 송기연의 말 따위 농담도 되지 않는 것처럼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그래서 당연히 등 뒤로, 그 경기장에 버려진 두 동강 난 검을 바라보며 새까맣게 빛을 잃어가는 소년의 눈을 보지 못했다.

망연자실한 송기연이 무릎을 꿇고 앉아 두 동강 난 보검을 어떻게든 끌어안았다. 그 잔해가 더 부서지기라도 할까 품에서 더 어쩌지도 못하고 입술만 깨물었다. 일그러지지 않은 얼굴에선 눈물만 부자연스럽게 뚝뚝 떨어졌다. 한참이 지나고서야 소년은 고개를 땅에 박고 아이처럼 울기 시작했다.

유가는 사실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송기연을 한번 크게 손봐주고 싶었다. ‘유가’의 원래 성격은 변덕이 심하다. 이렇게 송기연을 비꼬고 하찮은 조롱거리로 그의 목숨을 살려준다면 나중에 송기연에 대한 쓸데없는 유언비어는 떠돌지 않을 것이었다.

유가는 자신이 의도한 대로 송기연의 검을 부러트리고 능광의 옆에 섰는데, 경기장 위에 아이가 갑자기 부러진 검을 부여잡더니 울기 시작했다. 그 순간 그 검이 자신이 송기연에게 준 그 검이라는 걸 깨달았다.

유가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키고 안절부절못했다. 송기연에게 검을 줄 땐 반지 속에서 비교적 괜찮은 보검을 꺼내 장작을 팰 때 쓰라고 던져준 것뿐이었으니까.

하지만 이 아이는 엄청 고집스러웠다. 자신이 준 것을 귀중하게 여겼는지 2년 동안 손에서 놓지도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니 매일 밤 훈련이 끝나면 송기연은 꼭 보석처럼 검을 광이 나게 닦아 놓았다.

유가는 아이가 우는 걸 아무렇지 않게 볼 수 있는 성격이 아니었다. 심지어 송기연은 궁기의 동굴에서 운 이후로 이렇게 운 적이 없었다. 지금 그토록 고집스럽던 아이가 저렇게 그저 서러운 아이처럼 세상이 떠나가라 눈물을 흘렸다. 그 상심을 어떻게 헤아릴 것인가.

“대인, 저 아이 너무 서글프게 우는데요.”

“그래.”

아구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능광은 똑똑히 들었다. 하지만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는 유가를 보고, 이 일이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가는 몇 백 년 동안 수진대륙에서 부상한 마계의 천재였다. 짧다면 짧은 수백 년이라는 시간 만에 수련의 경지가 자신과 막상막하가 되었다. 그리고 만약 계속 수련을 했다면 천 년 전, 선마 대전에서의 그 천마가 될 수도 있었다.

돌이켜보면 지금 유가는 한없이 미적지근했다. 만약 그가 잔인한 성정이었다면 그와 청요가 여기 왔을 때, 이미 이 경창파의 경기장은 시체 밭이 되었을 것이고 평범한 제자들이 간단한 부상만 입고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그는 경기장 위에 저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아이를 죽이지 않고 검만 부러트렸다. 돌아서는 얼굴에는 후회가 가득한 게 이상했다. 사실 정말 이상했다.

똑똑히 봤지만 능광은 묻지 않았다. 오늘 그는 사사로운 일에 참견을 하여 경창파에 귀찮은 일을 당했다. 그는 앞으로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는 유가의 일에 더는 절대 관여하지 않기로 했다. 그저 아구만 보호하면 됐다.

능광이 손바닥에 부채를 내려치며 말했다.

“모풍 당신이 이렇게까지 말하니 이 신군이 당신의 체면을 세워 주겠네.”

그는 뒤로 물러나 청요의 어깨를 감싸 안고 말했다.

“청요, 그들을 해독해 주시오.”

청요는 언짢다는 듯 몇 번이고 어깨를 비틀다 그만 두었다. 한숨을 크게 내쉬더니 백색 약 가루를 뿌려 경창파 사람들의 입 속으로 들어가게 했다. 조절 능력이 엄청 정확했다.

“사흘 동안 움직이지 않으면 말끔히 제거될 것이다.”

“다들 잘 알아들었겠지. 유가 사제, 아구, 신군과 함께 돌아가지.”

능광은 저가 해독이라도 이룬 듯 뿌듯한 기쁨에 취해 뒤쪽에 아구와 유가에게 말했다. 신군답지도 않게 유독 건들건들했다.

유가는 마지막으로 몸을 돌려 경기장 위에 멍하니 앉아있는 송기연을 보았다. 작은 바늘이 심장을 연달아 찌르는 것 같았지만, 그렇게 심하진 않았다.

그는 송기연에게 미안한 마음을 되갚아줄 방법을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지금 한차례 소란은 끝났지만, 여러 해가 지나서도 경창파의 제자들은 소년 송기연의 망연자실한 모습을 잊지 못했다. 그에게 그 검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이해하는 사람은 없었다.

유가 일행이 떠나자 모풍 등 세 사람은 급히 경기장에서 내려왔다. 모풍은 다른 두 노인에게 백려와 장로들을 해독하라고 분부하고 자신은 급히 송기연 앞으로 갔다. 그리고 복잡한 표정으로 몸을 숙였다.

아무도 그가 송가의 그 아이였다는 걸 생각하지 못했단 말인가. 생각이 이어지던 모풍은 몸에 한기가 들어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아 미간을 찌푸려트렸다.

“기연, 좀 전에 유가에게 한 말은 다 농담이었느냐?”

진기가 섞인 그의 말이 송기연의 귓가에 꽂혔다. 텅 비었던 송기연의 눈은 심지에 불이 붙어버린 것처럼 환해졌다. 검은 눈동자가 점점 또렷해지더니 품에 영기를 잃은 검을 꽉 끌어 안고 냉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농담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정신을 차리는 것을 보고 모풍이 말했다.

“농담이 아니다-라. 하나 넌 지금 정말 네 실력으로 유가를 상대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느냐?”

손이 이미 조각난 검에 이리저리 베여 피가 났지만 소년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지금은 불가능합니다. 하나 앞으로 수련을 십 년, 이십 년, 삼십 년 한다면! 언젠가 반드시 그의 목숨을 제 손으로 거두는 날이 올 것입니다!”

모풍의 눈빛이 변했다. 다시 돌려 말하지 않고 직접 물어보았다.

“그럼 무주지에 가서 수련이 하고 싶으냐?”

송기연에게 다가오던 완십주가 가슴이 철렁하여 급히 끼어들었다.

”사존! 그건 안 됩니다! 기연은 아직 어린데 어찌 무주지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모풍은 완십주의 말은 신경 쓰지 않았다. 자신에겐 계획이 있었고 더욱이 눈앞의 사람에게 믿음이 있었다. 그는 송기연이 무주지에서 죽지 않을 거라고 믿었고, 이자가 해낼 수 없는 일은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십주, 끼어들지 말아라. 난 기연에게 물었다.”

완십주의 표정이 이상한 것을 본 송기연이 침착하게 물었다.

“무주지에 가면 제가 뭘 얻을 수 있습니까?”

“무주지엔 영기가 충만하다. 그곳에서 오랫동안 수련을 한다면 엄청난 발전이 있을 게다. 반면 무주지엔 잔인한 요수들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게다가 험난하고 위험한 비경도 많이 보이지.

수련자들이 아끼는 공법 전적을 비경 속에 놓아두었지만, 그곳에 들어갔다가 살아서 무주지를 나온 사람은 드물다. 만약 네가 이것들을 겁내지 않는다면 나와 다른 원로 사숙들이 손을 잡고 통로를 열어 너를 보내 주겠다.”

“기연! 흥분하지 마라! 몇 년 뒤에 간다고 해도 늦지 않아! 조바심 내지 말라고!”

송기연은 그의 절친한 친우의 외아들이었다. 지난 반년 동안 자신와 함께 지내며 자신을 사부로 인정하지 않았지만, 완십주는 일찍이 그를 자신의 제자로 여겼다.

절학(絶學-학문이나 지식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경지)한 사람이 아는 모든 걸 알려 주었는데, 지금 이 아이가 위험을 무릅쓰는 걸 두고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송기연은 일어나 부러진 검을 몸 옆에 두었다. 그리고 앉아있는 모풍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저 무주지에 가겠습니다. 오 년 뒤 제 실력으로 돌아오겠습니다.”

그리고 무릎을 꿇어 완십주에게 절을 올렸다,

“그동안 완 장로의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꼭 기억해 두었다가 후일에 다 갚겠습니다.”

“무주지요? 아버지 저도 갈래요!”

송기연이 무주지로 떠나려 하자, 대화를 엿듣던 백유리가 그만 조급해져 백려에게 애원했다.

“허튼소리 마라! 어린 여자애가 어딜 간다는 것이냐!”

백려가 그렇게 아끼는 딸을 어떻게 위험에 빠뜨릴 수 있을까. 그는 무주지가 어떤 곳인지 잘 알고 있었다. 목숨을 부지하기도 어려운 곳인데 5년이나 그곳에 있다면 무슨 고생을 한단 말인가.

“아버지, 전 저 사람과 같이 가야 해요. 저 사람 혼자 보낼 순 없어요!”

“안 된다면 안 되는 줄 알 거라! 또다시 소란을 피운다면 널 혼절시켜 일주일간 가두겠다!”

백유리는 화가나 발만 동동 굴렀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백려가 한번 안 된다고 말했다면 절대 갈 수 없다는 것을. 이게 가장 견디기 힘들었다. 그녀는 송기연에게 호감이 있는데 이자가 만약 무주지에서 5년이나 있는다면! 돌아온다고 해도 그만큼 고집이 세다는 것이니, 자신의 마음을 받아줄 리도 없었다.

“기연, 이건 내가 백 년이나 숨어서 만든 검법이다. 받아라. 무주지에 가서 한번 해보아라. 네 수련에 분명히 도움이 될 것이다.”

모풍이 얇은 책자 하나를 송기연에게 건네주었다. 송기연이 받자 모풍이 다른 두 노인에게 하더니 세 사람이 허공으로 날아 동시에 오른손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눈을 감고서 무주지의 위치를 찾는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세 사람이 눈을 번쩍 뜨자, 하늘에서 거대한 틈이 열리며 빛을 내뿜었다. 틈 사이에선 진한 영기가 새어 나와, 한번 들이키면 정신이 맑아졌다.

열린 곳에서 보인 울창한 숲의 청정하고 기묘한 광경은 꼭 어딘가에 있는 선계 같았다. 하지만 수련이 높은 사람들은 모두 저 아름다운 이상향 아래에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기연, 이 술호리병을 네게 주마. 막히는 일이 있을 땐 한잔하거라. 그럼 속은 편해질 것이다.”

완십주가 송기연에게 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는 송기연이 고집이 만만치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한번 확신이 선 일은 물불 가리지 않고 밀어 붙일 것이다. 그러니 지금 이 반쪽짜리 사존은 그저 이런 것만 해줄 수 있을 뿐이었다.

송기연이 호리병을 받고 말했다.

“완 장로의 말 깊이 새기겠습니다.”

송기연은 다시 한번 깊이 숨을 고르고 상공으로 올라 공간의 갈라진 틈으로 향했다. 막 틈 사이로 발을 디디려는데 뒤에서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정상이 익살스럽게 손을 흔들며 웃고 있었다.

“송기연, 알지? 너 절대 죽으면 안 된다! 네가 돌아와서 다시 겨루기만 기다리고 있을게!

입꼬리를 애써 올리며 송기연이 억지로 웃음을 짓고 말했다.

“걱정 마라. 죽지 않을 테니.”

송기연은 그렇게 다시는 돌아보지 않고 숲속으로 사라졌다.

“누군가가 무주지로 들어갔다.”

경창산에서 걸어 나오던 능광이 발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갑자기 꺼낸 말에 현장에 있던 다른 사람들 모두 어리둥절했다.

능광의 수련 경지는 매우 깊었고, 공간 파괴는 큰일이라서 당연히 그의 신식을 속일 수 없었다. 그래서 송기연이 무주지에 발을 들이자마자 그는 바로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관여할 생각 따위 없었다. 능광은 그저 곁에 무심한 청년을 껴안으며 웃었다.

“어차피 신군은 무슨 일이든 상관할 생각이 없으니, 그만 갑시다. 가서 밥이나 먹지.”

“대인, 왜 그러세요?”

유가의 표정이 심상찮아 걱정이 된 아구가 물었다.

이미 유가는 마음이 어지러웠다.

무주지. 무주지.

만약 누군가 무주지에 들어갔다면 그건 분명히 송기연이다. 하지만 그가 예전에 스토리를 썼을 땐, 지금 이 순간에 송기연이 무주지에 들어갈 수 없었다.

송기연이 무주지에 발을 들인 건 그가 열여덟 살이 되고 나서였다!

왜 이렇게 몇 년이나 앞당겨진 거지? 지금 그의 실력으로 무주지에 들어가면 분명히 죽음의 길이 될 텐데! 이 녀석 왜 이렇게 충동적인 거야!

좀 전에 부러진 검을 품에 안고 넋을 놓은 채 울던 송기연의 모습이 떠올랐다. 유가는 심장이 철렁했다.

설마 자신이 스토리를 바꾼 걸까. 자신이 송기연을 자극한 걸까.

자신이…… 내가 그를 해친 걸까.

“쿨럭쿨럭!”

유가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좀 전에 입은 상처도 다시 도졌는지 격한 기침이 올라와 손으로 입을 막았다. 하지만 울컥 목구멍에서 비릿한 쇠냄새가 퍼지더니 손가락 사이로 새빨간 피가 흘러내렸다. 불쾌한 혈항이 훅 끼치고 눈앞이 빨갰다가 까매졌다 점점 흐려졌다. 그리고 어두워지는 시야에서 아구의 비명을 마지막으로 그대로 고꾸라졌다.

아이가 우는 소리도 들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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