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권-제1장 심마(心魔) (6/40)

제1장 심마(心魔)

요수삼림은 경창파와 그리 멀지 않았기에 유가는 반나절도 안돼서 주작의 영지(領地)에 도착했다.

유가는 아까 왕다국의 말을 듣고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오는 동안 많이 차분해졌다. 스스로도 이 세계에 동화되어 점점 막무가내가 되어 간다고 속으로 비웃었다.

사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주작족의 고귀한 지위인 아구가 자신의 곁에 있으면서 갖은 고생은 다하면서도 불평 한번 크게 없었다. 10대 신수 가문을 대표하는 4대 신수 중 하나인 아구가 거만한 것은 당연한 데도 말이다.

사실 유가는 이렇게 화날 필요가 없었다. 상대방이 아구를 데리고 간 지 1년 만에 이렇게 영지로 찾아가는 건, 도리나 이치상 말할 필요도 없고 아구조차 좋아하지 않을지도 몰랐다.

이렇게 생각하자 조금은 안정이 되었다. 삼림 속 한 곳에 조심스럽게 착지하여 걸어가다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오른손을 얼굴 앞으로 가지고 가 오랫동안 덮고 있던 가면을 벗고 자신의 원래 모습을 드러냈다.

유가는 손에 든 가면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생각 같아서는 향후 신분이 노출될 수도 있는 이 가면을 부숴버리고 싶었지만, 머릿속에 갑자기 그날 송기연이 가면 위에 입 맞추던 장면이 떠올랐다.

유가는 한숨을 내쉬고 가면을 반지 속에 넣었다. 그리고 반지 위에 장안법을 씌워 오른손 엄지에서 서서히 사라지게 했다.

유가와 송기연의 관계는 이것으로 완전히 끊어졌다. 앞으로 그는 자신의 앞길만을 걸어가며 송기연의 어떤 일에도 관여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이번에 아구를 데려오면 수진대륙에서 재밌게 한탕 놀고, 설요족의 공주를 찾아가서 그곳의 사위가 될 것이다. 먹고 마시며 송기연이 찾을 수 없는 곳에 숨어서 지내면 얼마나 행복할까?

“후. 존주, 드디어 따라잡았네요.”

생각에 잠겨 있던 유가를 깨운 건 뒤에서 들려오는 숨 가쁜 목소리였다. 고개를 돌려보니 창백한 얼굴의 왕다국이 이마의 땀을 닦으며 비열하게 웃고 있었다.

“싸우러 가시면서 어찌 저를 데려가지 않으신 겁니까? 손이 근질근질한 참이었는데, 한바탕 큰일인가요?”

유가가 그를 어처구니가 없는 듯 흘겨보았다.

이 세계에서 지내면서 만났던 사람들 중에 자신의 작품 속에 묘사된 성격과 가장 유사한 사람은 왕다국이었다. 잘 먹고 잘 놀고 주색을 즐기고 싸움을 좋아하며 살인을 하는, 이 다섯 가지 면을 다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게 바로 자신이 그의 곁에 있을 때 안심할 수 있는 이유였다.

유가가 자신을 보는 모습을 보고 왕다국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급히 뒤로 두 걸음 물러나서 찡그린 얼굴로 말했다.

“뭘 하시는 겁니까? 그 눈빛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전 제 막청에게만 몸을 바칠 겁니다!”

유가가 어이가 없어 웃었다.

“너 이 녀석, 주색에 빠져 방탕한 생활을 하며 남자를 찾아다닐 땐 어찌 막청에게만 몸을 바칠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이냐? 지금 또 이걸로 본존에게서 어물쩍 넘어가려고 하는구나.”

유가는 옷소매를 흔들며 숲으로 걸어 들어갔다.

“네 그 꼴을 보고 본존이 정말 널 마음에 둘 것이라 생각한 것이냐?”

왕다국도 존주가 어떤 마음 없이 그저 놀리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도 안도의 한숨을 한번 내쉬며 쫓아가 시시덕거렸다.

“저도 막청이 절 좋아할 줄은 몰랐어요. 당연히 절 진즉에 잊고 있을 줄 알았다고요! 게다가 제가 그렇게 많이 색사를 한 건 제 몸의 요구를 해결하고 기술도 연마하려던 거였어요. 그게 아니었다면 어떻게 막청을 만족시켰겠어요?”

왕다국은 정말 창피한 걸 모르는 사람이었다. 조금도 얼굴을 붉히지 않고 이런 소릴 늘어놓자 오히려 유가가 난감해했다. 왕다국의 음담패설은 무시하고 빨리 주작족에게 가고 싶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당사자는 조금의 부끄럼도 없이 계속 유가를 희롱했다.

“대인 역시 가면을 쓰지 않으시니 훨씬 보기 좋습니다. 제가 감히 말씀드리는데 만약 송기연이 대인의 모습을 봤다면 반드시…….”

유가는 갑자기 멈춰 서서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럼 반드시 본존을 죽였겠지.”

왕다국은 자신이 실언한 걸 깨달았다.

입만 열면 자꾸 헛소리를 해대는데, 이번엔 또 그 아이 얘기를 꺼내고 말았다. 그는 사실 어렴풋이 유가가 송기연을 놓지 못한다는 걸 알아차린 상태였다.

2년 동안 그도 눈여겨보고 있었다. 유가가 송기연을 언급할 때의 눈빛과 말투에 그는 계속 걱정스러웠다. 그가 유가와 같이 송가를 멸했을 때, 부친의 시체 앞에 엎드려 통곡하고 있던 아이가 유가를 바라보던 눈빛은 여전히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그래서 후에 그는 유가에게 그 아이를 빨리 죽이라고 했다. 하지만 지금 유가가 하는 행동은 자신이 바라던 것과 완전히 정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존주께서 이렇게 큰 후환을 남겨 두었지만, 정작 본인은 모르고 있었다.

멀어지는 유가의 뒷모습을 보고 왕다국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에 송기연과 실로 검을 겨루게 될 때, 마존 대인이 그럴 수 있을지 모르겠다.

반 시진이나 걸어갔지만 유가는 주작족의 기운을 느낄 수 없었다. 걷다가 지쳐 나무를 붙잡고 있는 왕다국을 보고 나서야 뭔가 잘못됐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리고 자조했다. 기세 넘치는 마존이 한참 전에 이곳에 왔다는 걸 주작족의 늙은이는 진즉에 알아 차렸을 것이다. 자신에게 이런 판을 깔아 놓은 건 고의였다.

상대방의 태도가 이렇게 분명한 이상 유가도 굳이 숨길 이유가 없었다. 잘 얘기해보려던 마음은 반 시진 전에 이미 다 사라졌고, 폭발하지 않으면 도저히 해결이 나지 않을 것 같았다.

그의 주변의 진기가 움직이자 천지 사이의 공기도 요동치기 시작했다. 유가가 두 손을 가슴 앞으로 올리고 가볍게 세 번 두드리니, 두 사람 주변의 숲에서 큰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저 멀리 있는 새들이 놀라 푸드덕 날아갔다.

쩍- 쩌걱- 쩌억-!

왕다국이 놀라 고개를 드니 두 사람 주위에 투명한 가림막이 나타났다. 이 가림막은 빠른 속도로 산산조각이 났다. 위쪽부터 금이 가기 시작하더니 곧 완전히 붕괴되어 공기 속으로 사라졌다. 바깥에 보이는 광경은 두 사람이 처음 떨어진 곳이었다.

놀랍게도 반 시진 동안 두 사람은 계속 제자리를 맴돌고 있었다.

그래, 이건 분명히 주작족에게 농락당한 것이다. 만약 유가가 빨리 발견하지 못했다면 두 사람은 밤새도록 제자리만 맴돌 뿐 근거지엔 발도 들이지 못 할 뻔했다.

“늙은 주작! 당장 나와라! 이렇게 오랫동안 장난을 쳤으면서 어찌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는 것이냐?”

유가가 하늘로 올라가서 진기를 움직이자 목소리가 온 숲에 울려 퍼졌다.

왕다국도 얼이 빠져서는, 아무래도 요즘 대인께서 화가 많이 나신 것 같다고 생각하며 간이 쪼그라들었다.

“하하! 이 악마가 참 건방지구나!”

낮은 웃음소리가 저 멀리서 들려왔다. 금홍색 빛과 함께 유가가 전생에서 봤던 아구보다 배는 더 커 보이는 주작이 빠르게 다가왔다. 곧 그는 붉은 두루마기를 입은 이상한 청년으로 변신했고, 이마 한가운데 있는 화염 문양이 하얀 피부에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눈앞에 청년을 바라보던 유가는 속으로 놀랐다. 신수의 변신은 인간의 대승기보다 더 난이도가 높았다. 수련 경지도 충분해야 하지만 하늘의 뇌겁, 징벌을 받아야 했다. 그래서 대륙 전체에서 지난 수천 년간 변신을 할 수 있던 신수는 두 손에 꼽을 정도였다.

지금 눈앞에 서 있는 이 주작도 젊은 얼굴과 달리 몇 천 살은 되었을 것이었다. 아마도 주작족에서 변신이 가능한 두 주작 중 한 명으로, 결코 얕보아서는 안 될 능력의 소유자일 터였다.

유가는 차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귀한 손님을 진법(陣法)에 가두고 바보같이 놀리는 게 당신 주작족이 손님을 맞이하는 방식입니까?

“어?”

청년이 입꼬리를 올리고 불유쾌한 표정으로 유가를 흘겨봤다.

“당신이 귀한 손님이라 여기는 건가? 자네가 나보다 얼마나 어린지는 모르겠으나, 날 마땅히 사형이라고 불러야지. 게다가 사제인 당신이 좀 전에 숲속에서 당당하게 내게 나오라고 소리쳤지.”

청년이 유가에게 바짝 다가가서 웃었다.

“이 빚을 또 어떻게 계산해야 하나?”

두 사람은 공중에서 대치했고 왕다국은 끼려고 해도 낄 수가 없었다. 그의 수련 경지는 두 사람보다 확실히 약해서 유가의 기세에 방해만 될 뿐이다. 그는 하는 수 없이 아래에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유가는 전혀 밀리지 않았다. 말투도 강경하고 기세도 조금도 약해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우리 둘이 한번 겨뤄보는 거 어떻겠소, 당신이 패배한다면 아구를 내놓고 내가 패배한다면…….”

“자네가 패배한다면 내 조건 하나 들어주시오.”

유가의 말을 들은 청년이 유가의 패배를 예상했는지 여유작작하게 말했다.

“약속하겠소.”

유가는 마음을 가다듬으며 눈앞의 청년을 바라보았다. 시선은 상대의 이마에 화염 문양위에 고정하고, 자신이 작품 속에서 이 인물에 대해 무슨 서술을 했었는지 기억해내려 애썼다. 결국 생각이 났다.

젠장! 대단한 녀석을 만났네!

이자는 유가가 아구를 데리고 신수 집회에 갔을 때 나왔었다. 주작족의 조상 격으로 천 년을 넘게 살았다. 허공을 부수고 신계에 오를 수 이었으나, 신이 되고 싶지 않아 계속 대승기에 머무르고 있는 자로 실력이 대단했다. 수진대륙에선 그를 공경했고, 누구든 이자를 만나면 이렇게 불렀다.

“능광신군(陵光神君).”

쌍욕이 목에서 걸려 내려가지도 올라오지도 않았다. 유가는 괴로웠다. 방금 가득했던 자신감이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하지만 이미 일이 벌어졌으니 뻔뻔해질 수밖에 없다. 어쩌면 자신의 우세한 마족 신체로 승리할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유가는 한 가지 문제를 간과하고 있었다. 그는 마족이었고 종족이 우세하지만, 주작은 신수인데 이런 종족 우세가 과연 그보다 셀까?

유가가 심념을 움직이자 두 손에 순식간의 흑금장갑이 씌워졌다. 100%의 내력으로 능광에게 달려들었다. 이자를 상대하려면 반드시 전력을 쏟아 부어야 했다.

능광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손목을 뒤집자 부채 하나가 나타났다. 망설임 없이 휘두르자 진화(真火) 두 줄이 나타났고 곧장 유가의 면전으로 향했다. 아래에 서서 보고 있던 왕다국은 넋이 나갔다.

보았느냐. 부채를 사용하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지. 제 부채는 정말 부끄러울 정도였다.

유가가 미간을 찌푸리며 진기로 몸을 덮어 보호했다. 주작의 진화와 진기가 부딪치며 요란한 소리를 내뿜었다.

유가는 근거리 공격에 강했는데, 저 자식은 원거리 공격에 강했다. 만약 저 자식에게 다가갈 방법을 생각해내지 못한다면 낭패를 보는 건 자신이다. 능광에게 밀려 진기를 다 써버리면 질 수밖에 없었다.

저 멀리 서 있는 능광이 끊임없이 부채를 휘둘렀다. 진화 속에 숨긴 극도로 예리한 주작의 날개가 화염과 뒤섞여 유가를 덮쳐왔다. 하마터면 속임수에 걸려들 뻔했다.

날개를 부순 유가는 분노를 참지 못했다. 자신은 이미 천하전투에서 뻔뻔하게 고금성과 함께 한 명을 공격한 전적이 있었다. 당시엔 마계만이 그렇게 뻔뻔하게 굴 수 있다고 여겼는데, 지금 주작의 조상을 만나니 더한 사람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자신이 얼마나 많은 ‘암전(暗箭-숨어서 날아오는 화살)’을 깨부쉈는지 알 수도 없었다.

이런 능광을 난 직접 당문의 고수라고 써재낀 건가! 만약 유가의 신식이 주위 환경을 통찰할 만큼 강하지 않았다면, 사방팔방에서 날아오는 암기(暗器)에 이미 크게 한 방 먹었을 게 분명했다.

“정말 실력이 대단하군.”

유가가 입꼬리를 올리며 계속 말했다,

“그렇다면 본존도 굳이 봐줄 필요가 없겠어.”

유가의 기억 속에는 야수를 봉인하는 술법들이 많았다. 그는 예전에 궁기에게도이런 초식을 사용했다. 전투를 벌이면서도 능광의 약점은 건드리지 않겠다고 자중하고 있었건만, 지금은 정말 참기가 힘들어다. 또다시 반격하지 못하면 날개에 꿰어 벌집이 되고 말 것이니까.

유가가 두 손으로 빠르게 법진을 치며 술법을 읊조리자 푸른 빛이 피어올랐다. 흐르는 푸른빛은 공중에서 청색 사슬로 응집하더니 순식간에 능광을 덮쳤다.

그는 청색 사슬을 피하고자 주작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왔다. 온몸으로 주작의 진화를 내뿜어 숲속의 나무가 고온에 바싹 타오르며 끊임없이 타닥타닥 타는 소리가 났다.

유가가 두 눈에 빛을 반짝이며 진기를 내보냈다. 대승기인 두 사람이 전력으로 능력을 발휘하자 천지 사이의 공기가 모두 팽팽해졌다. 재빠르게 청색 사슬로 공기를 가르며 능광의 반쪽 날개를 감았다. 그리고 완전히 휘감으려 했다.

하지만 능광이 그리 쉽게 당할 리 없었다. 사슬에 묶인 반쪽 날개의 화염이 크게 솟아오르고 곧 사슬은 불에 끊어졌다. 그리고 곧바로 부리를 벌려 유가를 향해 본명진화(本命真火)를 내뿜었다.

본명진화는 주작의 일반적인 진화보다 몇 배는 두려운 존재였다. 그 이치를 알고 있던 유가는 절대 긴장을 풀지 않고 빠르게 몸을 뒤로 피했다. 진기와 결인을 사슬처럼 촘촘하게 몸 앞에 두고 진화를 막았다. 그리고 능광의 뒤로 향하며 찰나에 두 개의 진을 새로 쳤다.

두 개의 진은 흑청색이었고 그 위를 덮고 있는 건 유가가 가진 부식성의 진기였다. 두 개의 진이 능광을 사이에 두고 앞뒤로 둘러 싼 채, 순식간에 무수한 흑청색의 사슬이 꿰뚫을 기세로 사정없이 뻗어나갔다.

능광도 심상치 않다는 걸 느꼈다. 자신이 이 어린 유가 자식에게 당하다니, 안타깝게도 이번엔 어찌하든 둘 다 피해를 볼 수밖에 없었다.

승산을 잡은 유가가 잠시 숨을 돌리려다 별안간 욕지거릴 내뱉었다.

“젠장!”

사슬에 갇혔던 능광은 불식간에 흩어져서는 무수한 불꽃같은 작은 주작들이 되었다. 그리곤 유가의 앞에서 제 형체를 갖추고 순식간에 장풍을 쏘아댔다.

좀 전에 전력을 다해 힘이 빠진 유가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했다. 그 장풍을 직통으로 맞고 피를 토해냈다. 하얀 얼굴이 더 희게 창백해졌다.

능광이 부채로 다시 유가를 공격하려 했으나 자세를 잃고 허공에서 비틀대며 떨어졌다. 겨우 추락은 면했으나, 한번 더 공격할 기회를 놓친 사이 왕다국은 이미 유가를 데리고 내려갔다.

유가는 입에 흐르는 피를 닦고 왕다국을 밀치더니 공중에 떠 있는 능광을 향해 호기롭게 웃었다.

“아직 더 싸우시겠소?”

능광이 미간을 찌푸렸다. 방금 그의 초식 ‘금선탈각(金蟬脫殼)’은 간단한 것 같지만 사실 몸에 상당히 무리가 가는 방법이었다. 막다른 골목에 몰릴 때가 아니면 사용할 수 없었다. 유가에게 무슨 원한이 있던 건 아니지만, 방금 그 초식을 쓴 건 그에게 져서 창피를 당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지금은 도리어 자신이 진퇴양난에 빠진 셈이다. 순간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렸다.

“지금 뭣들 하시는 거예요?!”

그때, 저 멀리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금빛이 번쩍이고 많이 큰 아구가 공중에서 나타났다. 동그랗게 뜨고 있는 붉은 눈이 유달리 귀여웠다.

자기 할아버지와 유가를 번갈아 보던 아구의 눈에 기쁨이 차올랐다. 순식간에 몸을 작게 만들고 유가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그리고 품안에 온몸을 이리저리 비비며 애교를 부렸다.

“대인! 절 찾아오셨네요! 아구는 대인 기다리다가 목 빠지는 줄 알았습니다!”

눈앞에 광경을 본 능광의 낯빛이 한순간에 변했다. 마지막엔 분노의 피를 토하며 아구를 가리켰다.

“아구, 너! 당장 이리 오지 못 할까!”

제 조부가 화가 난 걸 보고 아구는 조금 죄송해졌다. 아쉬워하며 유가의 품에서 벗어나 날개를 퍼덕이며 능광의 곁으로 갔다. 하지만 소곤소곤 원망을 늘어놓았다.

“만약 할아버지께서 결계로 대인을 곤경에 빠뜨리지 않으셨다면 대인께서도 할아버지께 이렇게 하지 않으셨을 겁니다.”

아구가 고개를 돌리고 유가를 숭배하듯 바라보며 확인 사살을 했다.

“대인께선 그렇게 경우가 없으신 분이 아니신데, 분명히 할아버지께서 먼저 실례를 하셨겠죠…….”

앞에서 짹짹대는 아구를 바라보는 능광은 가슴이 찢어졌다. 마음이 아파 가슴을 움켜쥐고 화를 냈다.

“너 이 자식, 어찌 팔이 밖으로 도는 것이냐? 지난 몇 백 년 동안 내가 널 얼마나 아꼈는데!”

아구가 부리를 삐죽 내밀었다.

“절 아끼신다면 장장 1년 동안 결계 속에 절 가두지 마셨어야죠! 오늘 할아버지께서 대인을 공격하려고 나가셨기에 결계 방어가 약해진 거지, 아니었다면 제가 대인을 못 뵀을 수도 있었다고요!”

옆에서 두 사람의 피 튀기는 설전을 듣고 있던 유가는 아구의 귀여움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반면, 저 연세에 아구와 싸우는 능광은 좀 전에 침착하고 매서웠던 ‘능광신군’과는 거리가 먼, 웬 ‘늙은’ 장난꾸러기가 되어있었다.

유가는 두 사람이 다 싸우기를 기다렸다가, 틈을 봐서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능광신군.”

능광이 이 호칭을 듣고 잠깐 멈칫하며 의심스럽게 유가를 바라봤다. 좀 전까지 자신에게 칼을 겨룬 자가 왜 갑자기 자신에게 존칭을 쓰는지 비웃으며 되물었다.

“좀 전엔 나를 함부로 대하더니 갑자기 왜 격식을 차리는 것인가?”

“할아버지!”

“끼어들지 말거라. 네가 얘기했던 ‘대인’이 내 앞에서 어떤 묘략을 펼치는지 똑똑히 봐야겠다!”

능광이 차가운 표정으로 아구의 애교를 무시한 채 유가를 흘겨봤다.

원작에서 유가는 어떤 일이든 강경하게 대응했지만, 자신은 그렇게 대하고 싶지 않았다. 말로 잘 풀면 되잖아? 머리를 굴리지 못하면 능력이 아무리 좋아도 끝장날 수밖에 없다. 유가가 보아하니 능광은 정말 아구를 아끼고 있었다.

유가, 제가 졌다고 해도 체면 때문에 풀어주었을 텐데, 좀 전에 자신이 예의없이 행동한 덕분에 지금 교착상태에 빠진 것이다.

그래서 유가는 ‘아부’를 하기로 했다.

유가는 손을 공손히 모아 공수하고 예의를 차렸다.

“신군 별말씀을 다 하시는 군요. 좀 전에 소인이 오만방자하게 굴었습니다. 신군의 넓은 아량으로 용서해주십시오.”

능광은 유가의 말이 십중팔구 거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기분이 좀 풀렸다.

“사제(師弟)가 그렇게 말한다면, 사형(師兄)으로서 나도 더는 추궁하지 않겠네. 좀 전에 그건 우리끼리 연마한 것으로 삼지.”

그는 버둥거리는 아구의 몸부림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를 품에 가둔 채 떠나려 했다.

“오늘 이 일은 없던 일로 하지. 자네는 마궁으로 돌아가고 난 아구를 데리고 돌아갈 테니, 다신 찾아오지 말게.”

능광이 이렇게 뻔뻔할 줄이야. 유가는 이를 악물고 다시 손을 모으며 간청했다.

“신군 잠시만요! 소인 정말 아구가 필요합니다! 신군께서 아구를 제게 보내주신다면, 반드시 아구를 지키겠습니다!”

고개를 들고 날카롭게 능광을 바라보며 강조했다

“그리고 좀 전에 ‘대결’은 소인이 이겼습니다.”

능광의 미간이 한껏 찌푸려졌다. 능광 자신이 고집을 부린다는 걸 꼬집으니 더더욱 면목이 없어졌다. 속으로 체념한 줄 알았던 유가가 이렇게 완고하게 나올 줄 몰랐다. 말솜씨를 빌어 가지 않겠다고 말하고, 자신의 품에 갇혀있는 아구가 계속 발버둥치는 걸 보니 아무래도 정말 유가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

이리저리 생각 할수록 능광은 속으로 갈팡질팡했다. 아구를 보내주는 게 맞는 건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가 동요하는 것 같아 유가는 속으로 기뻐하며 급히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만일 신군께서 제가 아구와 함께 돌아갈 수 있게 해 주신다면, 한 가지든 열 가지든 원하시는 조건은 모두 말씀하셔도 됩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조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옆에 서 있는 왕다국은 식은땀이 줄줄 났다. 그는 그동안 유가가 이렇게 애원하는 모습을 볼 일이 있었겠는가. 오늘 새로운 구경을 하게 됐다.

유가와 아구를 번갈아 바라보던 능광은 머리가 아파 이마를 어루만졌다.

“그래, 내가 졌다. 졌어! 유가, 자네와 교전을 벌이기 전 만약 자네가 진다면 내 조건에 대답하라고 했었지. 그 조건은 다름이 아닌 아구의 변신에 관한 거였네.”

유가가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고개를 휙 들었다. 이 세계에서 아구가 변신을 할 수 있었다니! 작품 속에서 아구의 변신에 대해서 한번도 언급을 한 적이 없는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만약 당신이 아구의 변신을 도와준다고 약속하면 아구를 보내주겠네.”

유가는 마음속에 가득한 의혹을 억누르며 물었다.

“신군 말씀이 좀 이해가 되질 않는 군요. 신수 변신은 적어도 수련이 천 년 이상이 되거나 혹은 대승기에 접어들었을 때 가능하다고 알고 있는데, 아구는 이제 삼백 살이 좀 넘었습니다. 한데 어떻게 변신을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신군께서 알려주십시오. 제가 아구를 어찌 도와야 합니까?”

“변신초라고 아는가?”

“…….”

젠장, 이름을 진짜 멋대로 지어놓았군! 변신을 돕는 걸 변신초라고 한다. 이름만 들어도 이건 내 작품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이렇게 알려주는데도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변신초는 하늘을 거스르는 것으로 극히 소수에 불과했다. 후기 선계의 집단수련으로 열린 공간 속 밀실에서 하나가 숨겨져 있었다고 언급했던 것 같다.

생각에 잠겨있는 유가를 보고 능광이 말했다.

“그동안 변신초가 이미 자취를 감췄다고 생각했었는데, 얼마 전 어떤 요수가 변신을 위해 천뇌겁(天雷劫)을 맞았다는 걸 느꼈다. 한데 그 요수의 수련의 경지는 변신을 할 수준이 아니었지. 그래서 직접 조사를 해 보았네. 길고 긴 여정을 거쳐, 도착했을 땐 이미 그 요수가 종적을 감춘 후였고, 뜯긴 변신초 뿌리만이 남아있었지.

그 변신초가 자라는 곳은 자네 마궁 근처였다. 그래서 자네가 이 일을 조사하길 바라네. 만약 변신초를 뜯어간 자가 누군지 알아낸다면, 아구에게 쓸 한 포기를 부탁할 수 있을 테니.”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유가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하늘을 거스르는 변신초를 천지의 영수가 보호하고 있지 않다고? 게다가 초는 없고 뿌리만 남아있는데, 어떻게 뽑아간 자에게 부탁할까?

능광은 유가의 표정만 봐도 뭘 의아해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아구를 품에서 풀어주고 유가의 어깨로 날아가는 아구를 내버려 둔 채 계속 말을 이었다.

“그 변신초는 사실 생긴 것도 볼품없는데, 영기도 느껴지지 않아 인연이 있는 자만 얻을 수 있다네. 변신초는 원래 두 포기여서 부탁할 수 있는 것이지. 만약 두 포기를 한 번에 먹는다면 견디지 못하고 죽게 된다. 그 당시 갔을 때 시체를 보지 못했으니 그 말은 그 요수가 아직 살아있다는 뜻이네. 게다가 아직 남아있는 변신초를 가지고 있을 테고.”

능광이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그 요수를 찾을 수 있는 확률은 극히 적지만, 난 아구가 이 기연으로 가능한 빨리 변신을 하길 바라네. 변신은 그의 수련의 경지가 성장하는 데에 엄청난 도움을 줄 테니까. 그게 가능하면 오 년 뒤에 있을 집회에서 그 늙은이의 얼굴을 제대로 때려줄 수 있을 거야!”

유가는 순간 제가 더 부끄러웠다. 말하는 게 당신은 늙지 않았다는 것 같다.

유가는 생각을 떨치고 더욱 예를 차려 몸을 굽히고 진중하게 말했다.

“신군 걱정 마십시오. 제가 반드시 아구의 변신을 돕겠습니다!”

능광이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며 몇 마디 더 하려 입을 열었다. 하지만 저 멀리서 들려오는 맑은 고함에 안색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능광! 대체 어디를 갔던 거야!!!!

“그, 그럼 아구를 잘 부탁하네. 난 일이 있어 먼저 가보겠네.”

능광은 대답도 듣지 않고 이미 저 멀리 사라졌다. 유가는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질 않아 아구에게 물었다.

“아구, 대체 누구시길래 기세등등하던 할아버님이 저렇게 겁을 먹으신 거니?”

이 녀석은 능광이 멀리 간 것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대답했다.

“할아버지께 저럴 수 있는 사람은 당연히 할머니시겠죠!”

“네 할머니?”

넋이 나간 유가가 그만 몸서리를 쳤다. 귀에 이상이 있지 않는 한 방금 그 목소리는 남자였는데.

* * *

돌아가는 길, 왕다국은 그 싸움에서 자신이 도울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게다가 아구까지 돌아왔으니, 아무래도 자신이 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아구에게 막청을 보러 가겠다고 말하곤 재빨리 사라져 버렸다.

유가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좀 전에 능광과의 대결에서 부상을 당했지만, 심각한 건 아니었다. 지금 자신의 사자차는 아직 경창파 쪽에 세워져 있다. 차에 타기만 하면 당연히 선계의 저 수많은 수진인들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게다가 차 안에서 며칠만 지내면 마계에 닿을 수 있으니 왕다국이 굳이 있을 필요가 없었다. 바늘방석에 앉은 듯 차 안에 앉아 왕다국을 상대하느니 차라리 보내는 게 나았다.

유가는 고개를 숙였다가 자신의 앞섬에 피가 묻은 걸 발견했다. 수수한 옷차림에 선명한 피가 눈에 띄자, 미간을 찌푸리곤 아구에게 닿지 않도록 했다.

반지에서 수수한 장포 하나를 꺼내서 갈아입으려다가 갑자기 멈칫했다. 그는 순간 원작 속 유가는 원래 색이 진한 옷, 특히 붉은색이나 보라색 옷을 좋아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가 엽망지일 때는 본인이 입고 싶은 대로 입었지만, 다시 유가로 돌아온 지금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입을 수 없었다.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수수한 옷을 집어넣고, 확실히 눈에 띄는 붉은색 옷을 꺼내 이를 악물고 입었다. 옷을 보니 아무래도 너무 화려하게 입은 것 같아 난감하여 아구에게 괜찮은지 물었다.

유가의 옷차림을 본 녀석의 눈이 갑자기 반짝였다. 등골이 서늘해진 유가는 급히 경창파 방향으로 향하며 말했다.

“아구, 서둘러 따라와라. 우린 빨리 돌아가야 한다. 늑장 부린다면 금성이 정말 왕다국의 목을 벨 수도 있어.”

“대인! 이 모습도 멋있는데요! 빨간색이 잘 어울리세요! 너무 아름다우셔서 넋을 놓고 봤습니다!”

아구는 급히 유가를 따라가 그의 어깨에 앉아서 한바탕 칭찬을 늘어놨다.

유가는 아구의 부리를 톡 누르고는 웃으며 말했다.

“아름답다는 말은 여자한테나 쓰는 말이지. 본존을 칭찬하려면 멋있다고 하라. 알겠느냐?”

“멋있다고요? 그게 무슨 뜻이에요?”

아구는 현대에 살지 않으니 멋있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유가의 말을 듣고 호기심이 생겼는지 두 눈을 반짝이며 대답을 기다렸다.

“……아, 그냥 앞으로 날 칭찬할 땐 멋있다고 말을 해야 한다는 것만 기억해 두어라. 어차피 말해도 넌 못 알아들을 테니.”

유가의 취급에 아구는 뺨을 볼록하게 부풀리며 어린아이처럼 성질을 냈다. 어깨 위에서 몸을 웅크리고 그의 목에 기대 울적함을 토로했다.

“흥! 대인은 매번 절 어린아이 달래듯 하시네요. 언젠가 대인 같은 어른으로 변신하게 되면 반드시 절 어린아이처럼 대하지 못하실 거예요!”

유가는 웃으며 대답하지 않고 유유자적 걸어갔다. 체내에 남아있는 진기는 계속 부상 정도를 조절하고 있었다. 진기가 소모되면 여차할 때 허세를 부릴 수 없어, 그저 자신의 두 다리를 믿고 편안하게 걸어갔다.

자신을 못 본 송기연의 상태는 어떤지, 경창파에선 잘 지내는지, 사존을 청하는 일은 잘 해결했는지 아는 게 없었다.

그날, 송기연이 문밖에 꿇어앉아 두 번째 사존을 모시지 않겠다고 죽을 듯이 맹세하던 그 모습이 생각났다. 그래서, 혹여라도 아이가 고생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걱정스러웠다.

* * *

“기연 형제! 말 좀 해보세요! 그런 얼굴만 하고 있으면 걱정되잖아요!”

정상은 걱정되어 죽을 것 같았다. 두 사람은 함께 내문제자(內門弟子)가 되었는데, 공교롭게도 숙소까지 한 방으로 배정받았다. 정상은 처음부터 인연이라고 생각했고, 송기연에게 호기심까지 생긴 마당에 이런 배정을 받으니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자신이 묻는 말에 이 아이는 한마디 대꾸도 없었다. 두 사람은 방 안에 가만히 마주 앉아만 있어서, 난감해 미칠 지경이었다.

일반적으로 이 나이 때의 소년은 다들 꽤나 시끄럽지 않은가. 밝고 쾌활하고 말주변도 좋을 것 같은데? 설마 이 동거인이 그렇게 싫은가? 지금은 어쨌든 여우랑 ‘벙어리’가 이렇게 잠들 때까지 마주앉아 있어야 했다.

“하하하하…….”

무료하여 침상에 앉아 다리만 흔들고 있던 정상은, 갑작스러운 웃음소리에 간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송기연의 얼굴엔 희색이 만연했다. 좀 전에 그 굳었던 얼굴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정상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웃으십니까?”

송기연은 양손으로 침상에 기대며 고개를 까딱 기울이고 앞사람을 향해 웃었다.

“정상, 당신은 역시 많은 일을 하는군요.”

꼭 오래전부터 정상을 알고 있었다는 듯한 말투에 정상은 꺼름칙한 소름이 돋았다.

송기연은 고개를 들고 귀곡의 나무집과 같은 색의 천장을 바라보며 어두운 낯빛으로 말했다.

“사존이 계셨더라면, 당신과 많은 얘기를 나눴을 텐데 사존께서 약속을 어기셨습니다. 그래서 지금 기분이 매우 안 좋으니 웬만하면 건들지 마십시오.”

전생의 기억을 모두 가지고 있는 ‘송기연’은 앞으로 정상이 자신에게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을 귀찮게 하는 그의 성격은 확실히 받아주기 힘들었다.

송기연의 말에 정상은 멈칫했다. 마음속에선 은근한 두려움이 점점 커졌다. 고작 열두 살인 아이에게 마음속에서 우러나온 두려움을 느꼈다. 자신도 모르게 그의 말을 따르고 있었다.

그는 지금 앞에 있는 사람에게 말도 못 붙인 채, 홀로 침상에 등을 보이고 누워 이불을 물고 있었다. 흑흑흑, 앞으로 어떡하지?

송기연은 쉽사리 잠에 들지 못했다. 마음도 너무 아팠고 머릿속엔 사존이 산 아래에서 자신에게 한 약속이 끝없이 메아리 치고 있었다.

여기에서 날 기다리신다더니. 어디에 계신 겁니까?

생각할수록 송기연은 마음이 조급해지는 것 같았다. 가슴속에서 화가 치밀어 올라 두 눈까지 붉어졌다. 극도의 분노와 슬픔에 온몸의 진기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체내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붉은색의 사기(邪氣-사악한 기운)가 천천히 그를 감쌌다.

송기연이 머리 한 구석에서 안 된다고 외쳤지만, 이건 심마(心魔)가 탄생하는 징조였다.

자는 척하던 정상도 심상찮은 기척에 눈을 돌리다 깜짝 놀라 튕기듯 일어났다.

“갑자기 이게 무슨 일입니까?”

송기연은 다른 경창파 사람의 눈에 띄지 않게 최대한 빨리 이 일을 처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후에 경창파에서 자신의 입지에 큰 악영향이 있을 게 분명했다. 심마는 수진인들이 제일 기피하는 대상이었다.

“괜찮습니다. 가서 문 좀 지키십시오. 절대 소문내지 마시고 저 혼자 처리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정상은 확실히 맞는 말이라는 생각에 조용히 문을 지키러 갔다.

송기연의 체내엔 화가 미친 듯이 타오르는 듯했고 이성까지 끊어질 것 같았다. 머릿속엔 사존에 대한 원망과 분노만 가득한 게 확실히 심상치 않았다.

그는 서둘러 가부좌를 틀고 앉아 포원수일(抱元守一)을 했다. 온몸의 진기를 급히 순환시키고, 천지 사이의 영기가 자신의 몸에 통하도록 했다. 그리하여 심마가 덮쳐올 때 축기기를 돌파해서 금단을 결성할 생각이었다.

이건 순전히 자신의 계획이었다. 이 심마는 방해가 되기도 했지만 사실 추진과 수련의 경지를 성장시키는 동력이었다. 또렷한 정신을 유지하며 심마의 힘을 자신의 진기로 전환하기만, 하면 반년 동안 갇혀있던 축기기를 뚫고 바로 금단기에 진입할 수 있었다.

또렷한 정신을 유지하는 게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으나, 그 순간 머릿속에 사존이 자신에게 했던 거짓말이 떠올랐다. 산문 앞에서 사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을 때 그 실망과 원한, 그리고 사존에 대한 은밀한 생각들이 그의 이성을 조금씩 무너뜨렸다.

‘네가 혼자 경창파에 가기 싫다면 내가 함께 가겠느니라. 경창파에 나와 함께 지내는 건 어떻겠느냐?’

‘내가 반드시 너보다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으마.’

‘기다리마.’

“으아아악!!!!”

절정에 달한 고통에 송기연이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심마는 그의 생각보다 훨씬 강했다. 머릿속을 찢어 놓으려는 소리가 울렸다. 통제가 안 되는 이성이 끊어지려던 그때, 가슴팍의 녹색 돌이 갑자기 은은한 빛을 내뿜었다. 그리고 온유한 기운으로 그 심마를 제압하고 있었다.

‘사존이 네게 주는 선물이라 생각하라.’

사존의 목소리, 사존의 말, 사존의 웃는 얼굴. 그의 몸짓, 그의 손길.

그가 마치 눈앞에 있는 것 같았다.

눈시울이 붉어지던 송기연이 다시 평정을 되찾고 정신을 차렸다. 그는 계속 진기를 빠르게 움직였고, 마지막엔 단전 내에서 회전하는 금색 진기류를 점차 응집시켰다. 그리고 결국 비둘기 알만한 금단선회(金丹盘旋)를 그 안에 형성했다. 다만 금단 위에 혈색의 검은 무늬가 있는 게 조금 미심쩍을 뿐이었다.

송기연이 눈을 뜨고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 녹색 돌을 손으로 어루만지며 고개를 숙이고 웃었다.

“사형, 안녕하세요!”

정상의 목소리가 문밖에서 들려왔다. 방금 금단기를 결성하고 앉아서 쉬고 있는 송기연에게 알려주려고 낸 소리였다.

송기연이 눈을 뜨자 동공에 살짝 붉은 빛이 깜빡였다가 사라지며 금방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돌아왔다. 자신의 동작이 빨라서 다행이었지, 아니면 경창파 내부 사람에게 자신이 마도(魔道)에 닿은 모습을 들킬 뻔했다. 만약 들켰다면 어떤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볼지, 번거로운 것이 훤했다.

“내 기억이 맞다면, 이름이 정상이었지? 기연은 아직 방 안에 있는 건가?”

“사형께서 제 이름을 기억하시다니, 근데 기연을 찾아오신 거예요? 안에 있습니다.”

금단이 처음 결집할 때 이상한 현상이 일어났다. 지붕 위에 대량의 영기가 모이는 걸 본 정상은 송기연이 지금 이미 축기기를 깨버렸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래서 사형이 찾아와도 별걱정을 하지 않았고, 손으로 문을 가리키며 예의 바르게 안으로 모셨다.

송기연은 인기척을 듣고 표정을 가다듬으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밖에서 들어오는 흰옷을 입은 내문제자를 바라보고 급히 손을 들어 예를 차렸다.

“사형.”

이 내문제자는 전에 산문 앞에서 그들을 이끌고 경창파로 온 사람이었다. 그의 거처는 송기연과 제일 가까운 방이었고, 그래서 제일 먼저 기운으로 송기연과 정상의 방을 찾을 수 있었다.

그는 이번 제자 중 두 명의 천재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나는 열네 살의 금단 중기(中期)인 정상이고, 또 다른 하나는 지금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열두 살의 축기 절정인, 아니 이미 금단 초기에 진입한 송기연이었다.

“그렇게 예의 차릴 필요 없다.”

사형 제자가 송기연에게 다가가 부드럽게 말했다.

“기연 사제 진짜 대단하네, 열두 살에 벌써 금단이라니. 지금까지 경창파에서 못 봤던 천재라고!"

그는 속으로 확실히 알고 있었다. 열두 살 나이에 외력 없이 혼자서 금단기를 깼다는 건 절대 얕볼 수 없는 실력의 소유자라는 걸. 나중에 분명히 큰 인물이 될 테니 지금 비위를 잘 맞추어야 했다.

그가 심념을 움직이자 손 위에 정교한 작은 옥상자가 나타났다. 반짝반짝 빛이 나는 상자에서 은은하게 영기가 뿜어져 나왔다. 제자는 다정하게 송기연의 손을 잡고 그 상자를 그의 손에 쥐여 주며 호방한 척했다.

“기연 사제, 이 상자 속엔 완 장로께서 직접 제작하신 고원단(固元丹)이 들어있다. 방금 금단기에 진입해서 수련의 경지도 온전하지 않을 테니 호흡을 가다듬어야 안정이 될 거야. 이 고원단이 네게 잘 맞을 것 같아 사형이 가져왔다. 인사 선물이다.”

송기연은 속으로 비웃었다. 인사 선물이 너무 늦은 거 아닌가?

전엔 왜 경창파에 이렇게 아부하는 사람이 많은 줄 몰랐을까? 새로운 경험이었다. 그는 전생에 완십주 그 늙은이가 연마한 단약을 간식으로 먹을 수 있었는데, 저렇게 작은 고원단이라니?

송기연은 속으로 하찮았지만, 겉으로는 몸 둘 바를 몰라 하며 급히 거절했다.

“이렇게 귀중한 걸 제가 어찌 받을 수 있겠습니까? 어서 넣어두세요. 사형.”

사형 제자는 일부러 정색하곤 그 단약을 기연에 손에 억지로 쥐여 주었다.

“사제가 오늘 이 약을 안 받는다면, 그건 이 사형을 무시하는 거네!”

송기연은 받는 시늉을 하며 거절하지 않았다. 손엔 옥상자를 들고 온 얼굴엔 감동한 표정으로 공손하게 말했다.

“사형께 감사드립니다. 후에 제가 도와드릴 일이 있으면 언제든 최선을 다해 도울 것입니다.”

백의 제자가 원했던 말이 바로 이 말이었다. 기연은 정말 사리에 밝은 아이였다. 더 힘쓸 필요 없이 벌써 자신이 원하는 걸 얻어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서 말 한마디 없는 정상을 보고 웃었다.

“그럼 우선 쉬어라. 정상, 기연을 잘 부탁하마. 내일 사존을 뵈러 갈 것이다.”

“안녕히 가십시오.”

정상과 송기연이 예를 차려 인사를 하고 제자의 모습이 사라진 후에야 원래 표정으로 돌아왔다.

“이렇게 적당히 분위기도 맞출 줄 아는 분이셨습니까?”

방금 상황을 정상은 똑똑히 보았다. 송기연과 반나절밖에 지내지 않았지만, 이자의 성격에 대해 이미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다. 방금 그 대화도 분명히 그 멍청한 제자에게 대충 둘러대며 달랜 것이었다. 역시 인재였다.

그가 문을 지키러 가기 전에 송기연은 마음이 불안정하고 심마가 체내에 들어가 있던 모습이었다. 근데 반 시진이 지나고 그가 들어왔을 때 송기연은 이미 금단초기에 진입해 있었다. 진짜 수련 깨달음과 지혜가 굉장히 강한 사람이었다.

“그런 것이라면 전 당신의 반도 따라잡지 못합니다.”

송기연이 웃었다. 마음속 우울감은 심마에게 벗어난 후 많이 나아져 정상에게 농담까지 했다.

정상이 좋은 분위기에서 마무리 지으려 더는 묻지 않았다. 다만 송기연을 이해한 듯 공수하고 말했다.

“피차일반입니다.”

한밤중 송기연은 가슴에 녹색 돌을 문지르며 온기를 느꼈고, 마음이 많이 안정되었다. 다시 삶을 얻었으니, 이번엔 반드시 단시간 내 최대한 빨리 성장하여 가문의 복수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리고 사존을 찾아가 그를 한평생 가둘 생각이었다.

“폐물, 잘 들어라. 내일 완십주께 사존이 되어 달라고 할 거야. 이래야 최단 시간 내에 경창파를 장악하고 사존을 찾아갈 수 있어.”

* * *

아구는 놀고 싶은 마음이 컸다. 장장 1년이라는 시간 동안 할아버지에게 감금을 당해 바깥 구경을 하지 못했던 아구는 미친 듯이 이리저리 유가를 끌고 다니며 이러쿵저러쿵 멈추지 않고 재잘거렸다.

때문에 두 사람이 경창파 산 아래에 도착했을 땐 이미 이틀이나 지난 후였다.

경창산 아래는 그때 보았던 수백 명의 인파가 줄지어 있던 광경은 사라진 지 오래였고, 두 세 명의 제자들이 깨끗하게 청소 중이었다. 이때쯤엔 경창파에 수진인이 많아서 유가가 아구와 함께 이동해도 그다지 그들의 주의를 끌지 않았다.

“어이, 그 새로 온 기연이라는 제자는 성질이 왜 그렇게 더러운 거야?”

속으로 기연의 안부를 물어보고 싶었던 유가는 그 자리에 멈춰서 귀를 기울였다.

“그렇게 많은 장로들과 장문인이 그 아이를 마지막 제자로 삼으려 했는데, 그 아이는 아무도 인정하질 않았잖아. 이미 ‘엽망지’라는 사존이 있다며 두 번째 사존을 둘 수 없다더군. 그때 장문인의 놀란 표정을 네가 봤어야 하는데. 완장로께서 막으시고 단약을 끓이는 제자로 두겠다고 말하지 않으셨다면 이미 쫓겨났을 거야!”

이 말에 유가의 심장이 철렁했다. 이 녀석 생각보다 성질이 만만치 않았다.

“네가 말한 엽망지 그 사람은 뭐 하는 사람인데? 경창파뿐 아니라 다른 삼문육대가에서도 못 들어본 이름인데?”

다른 제자가 냉소했다.

“어디서 이상한 사람을 사존으로 들였다면 우리 경창파의 장문인보다 실력이 뛰어날 리도 없잖아? 기연 그 자식은 그런 호의도 받을 줄 모르는데, 천재면 뭘 하겠어? 사존도 원하지 않고 공법도 익히기 싫으면 영원히 단약이나 끓여야지!

“맞아. 계속 그러고 있으면 문파 내에서 그 녀석을 보는 시선도 곱지 않을 거야. 열두 살에 수련 경지가 금단기에 들어갔다는 걸 빌미로 그렇게 뻣뻣하게 굴면 누구든 적대시할 거고, 좀 지나면 아마 버티지 못하고 나가게 될 걸.”

유가는 더는 들을 수 없어 급히 자리를 떴다. 더 있다가는 참지 못하고 그 성질 더러운 녀석을 보기 위해 산에 오를 것 같았다. 지금 이 모습으로 올라간다면 분명히 그 늙은이들에게 들킬 것이고, 죽거나 가죽이 다 벗겨지거나 할 게 분명했다.

한참을 걸어간 뒤에 처음 쌍두사자와 약속한 곳에 도착했다. 이미 와서 대기 중이던 쌍두사자가 유가를 발견하고 천천히 다가와 낮게 포효했다. 아무래도 예상보다 이틀이나 늦어진 것에 불평하는 것 같았다.

유가는 쌍두사자의 목덜미를 쓰다듬고는 아구를 데리고 차에 올랐다. 하지만 표정은 썩 좋지 않아 보던 아구도 애만 태웠다.

“대인, 그 녀석을 걱정하시는 겁니까?”

“……그런 것 같구나.”

방금 그 두 제자의 대화를 듣고 유가와 아구는 기분이 안 좋아졌다. 사람은 감정의 동물이다. 그 아이가 산에 오르기 전 자신에게 했던 얘기들, 그 애원하던 목소리와 곧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은 잊으려 해도 잊히지 않았다.

아구는 유가의 목덜미에 다가가 제 털을 부비며 한숨을 내쉬었다.

“대인도 참, 자신의 몸을 혹사시키시네요. 어서 서둘러 마궁으로 돌아가요. 대인께서 몸에 상처도 입으셨는데, 지금 그 꼬마 녀석을 보러 갈 시간이 어디 있습니까.”

“그래, 알겠다.”

유가는 휘장을 올리고 쌍두사자에게 이 숲을 걸어 나가 하늘에 날아오르되, 되도록 눈에 띄지 않게 이동하라고 명령했다.

부드러운 융단이 깔린 차 내벽에 머리를 기대자 유가는 갑자기 피로가 몰려왔다. 이 세계로 넘어온 후로 송기연의 몸은 잘 치료해줬지만, 정작 그의 원한은 풀지 못했다. 오히려 송기연에게 멸문의 원한이 있다는 걸 더 일깨워줬다. 그리고 그가 강해지면…… 자신을 죽이라고도 했다.

아이는 대부분 말을 잘 들었고, 시킨 일은 절대 어기지 않았다. 윤회과를 먹을 때도, 수혈지에서 그렇게 큰 고통에도 소리 한 번 지르지 않았고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었다. 지금까지 자신에게 뭘 요구해본 적이 없던 송기연이, 이번에 딱 한 번 산 아래에서 그렇게 비굴하게 자신을 기다려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자신은 당연히 그를 속였다.

그와 송기연은, 처음부터 두 사람이 같이 지낼 순 없는 것이었다. 그는 송기연을 어떤 신분으로 마주해야 할 지 근본적으로 알지 못했다.

유가? 아니면 엽망지? 만약 어느 날 가면을 벗고 송기연이 진상을 알게 된다면, 그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 그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는 이 세계에 도대체 뭘 하려고 넘어온 걸까? 스토리가 끝이 나면 그도 여길 떠날 수 있을까?

전생에서 죽은 후 여기로 넘어왔다. 그 말인 즉 다시 한번 죽으면 현대로 돌아갈 수 있다는 걸까?

이런 대담한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가자, 유가는 심장이 좀 빨라진 것 같았다. 이 세계에 온 지 2년이 지났다. 그는 사실 많은 시간을 마음 졸이며 지냈다. 만약 여기를 떠날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면 그는 절대 놓치지 않을 생각이었다.

아구를 떠나긴 아쉽지만, 여긴 그의 세계가 아니다. 익숙한 사람도 없고 익숙한 일도 없다. 강력한 실력을 가졌다고 해도 이렇게 마음 졸이며 살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구도 잘 보호하는 동시에 깔끔하게 죽는 건 사실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다. 때가 되면 아구는 요수 삼림으로 돌려보내면 되지만, 정작 자신은…….

전생에서 본 송기연은 굉장히 두려운 성격이었으니, 그에게 걸린다면 갖은 괴롭힘을 당하다가 죽지 못해 살아갈 게 분명했다.

“강도다! 차 세워! 강도라고!!”

차 밖에서 소년이 일부러 굵직하게 소리 내는 고함이 들려왔다. 기개가 있긴 했지만, 꼭 굶은 듯 기력은 부족했다.

호기심이 생긴 유가는 휘장을 제치고 아구와 밖을 내다보았다. 송기연보다 키가 작은 낡은 옷차림의 소년이 길 중앙에서 차를 가로막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 거대한 사자를 겁주려는 듯 손에 든 검을 쌍두사자 앞에서 마구 휘둘렀다.

쌍두사자가 머리를 갸우뚱하며 눈앞에 소년을 바라봤다. 강도의 뜻을 모르는 듯 멍청한 표정으로 눈을 끔뻑였다. 이 말도 안 되는 장면을 보면서 유가는 좀 전까지 우울했던 마음이 사라졌다.

“네가 무슨 재간으로 수진인의 차를 강도질한단 말이냐?”

아구도 작은 머리를 치켜들고 말을 덧붙였다.

“어이 꼬마야, 너 어디 좀 모자라니? 감히 대인의 차를 막아?”

얼굴이 더러운 아이가 목을 빳빳하게 들었다. 조금도 겁먹지 않은 모습으로 자기보다 더 긴 검으로 유가를 가리켰다.

“허튼 소리 하지 마라. 먹을 것을 내놓으면 보내주지!”

“이 꼬마 녀석이 지금 대인께 뭐라는 거야? 살기 싫은 것이냐?”

아구가 포악하게 굴자 확실히 기개가 남달랐다. 유가가 급히 아구를 말렸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방금 기력이 부족했던 건 배가 고팠던 거구나? 저 녀석은 순식간에 자기가 죽을 줄 모르는가, 알면서도 큰소리를 치는 건가. 정말 사랑스럽군.

그는 차 안에서 떡을 좀 찾아서 아이의 곁으로 다가갔다. 자신을 겨누고 있는 장검은 신경도 쓰지 않고 아이에게 먹을 것을 전해 주었다.

“자, 먹을 걸 줄 테니 이름을 알려주겠니?”

아이에게 다가가자 뭔가 익숙한 얼굴이라 이름을 물어봤다. 머리를 굴려 봐도 어디서 본 아이인지 떠오르지 않았다.

아이는 잔뜩 경계하며 떡을 집더니, 멀리 몇 걸음 걸어가 허겁지겁 먹고 나서야 우물거리며 말했다.

“똑똑히 기억하라, 본 공자의 존함은 초운(肖云)이다!”

“…….”

제길! 저 아이가 그 초운이라니! 미래에 송기연 오른팔 초운! 그때 고금성이 저자로 분장을 하고 수옥에서 날 끌어냈다.

유가는 너무 공교로워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 저자를 만나게 될 줄이야.

몇 입 만에 떡을 다 먹은 초운이 트림을 하곤 멀뚱히 서 있는 유가를 보고 정색했다.

“본 공자가 좀 전에 어쩔 수 없이 네게 강도질을 하였다. 지금 네 음식을 먹었으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돕겠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말하라!”

유가는 미간을 찌푸리며 속으로 초운이 참 이상한 아이라고 생각했다. 한참을 눈동자를 굴리다, 반지에서 가면을 꺼내 얼굴에 쓰고 초운에게 미소 지었다.

“경창파로 가서 ‘기연’이라는 제자를 찾아라. 그리고 그 제자에게 검붉은 가면을 쓴 사람이 이 말을 전했다고 알려주어라.

“네가 유가를 죽인 후, 사존이 널 다시 찾아가겠다.”

“대인?”

유가의 말을 들은 아구는 온몸에 닭살이 돋았다.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유가가 손을 휘저어 가면을 거두고 초운을 향해 물었다.

“네가 할 수 있겠느냐?”

“할 수 있다. 유가는 누구인가?”

초운이 장검을 끌고 머리를 긁적였다.

“너! 네가 감히 우웁……!”

유가가 재빨리 아구의 부리를 막고 초운에게 말했다.

“알 필요 없다. 나 대신 말을 전해주기만 하면 된다.”

유가가 아구를 놓아주고는 초운에게 다가가 몸을 숙이고 제 얼굴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리고, 내 얼굴을 봤다는 사실을 영원히 발설하지 말거라.”

붉은색 장포가 유가의 하얀 두 뺨을 붉게 물들었다. 살짝 올라간 눈꼬리는 요염했고 옅은 색의 눈동자엔 초운의 더러운 얼굴이 비쳤다. 계속 신경을 곤두세우며 겉모습 따위를 신경 쓰지 않던 초운은 한순간에 부끄러워졌다.

얼굴을 붉히며 유가에게서 두 걸음 물러섰다. 헛기침을 여러 번 한 후에야 원래 목소리를 회복할 수 있었다.

“좋다! 이 일은 본 공자가 해 주지! 반드시 네 말을 전해 주겠다!”

유가가 그의 머리를 툭툭 치며 웃었다.

“네 이 강직한 성격을 앞으로도 계속 좋아하게 될 것 같구나.”

유가는 말을 마치고 아구와 함께 차에 올랐다.

초운은 옆쪽으로 걸어가 쌍두사자가 끄는 차가 상공으로 올라 저 멀리 검은 점이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았다. 그리고 든든하게 채운 배를 어루만지며 경창파로 향했다.

유가는 초운이 진짜 경창파에 들어갈 수 있을지는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좀 전에 아이를 마주쳤을 때 이미 아이의 수련 경지가 축기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지금은 이미 경창파의 제자 모집 기간이 끝났지만, 분명히 초운이라는 저 아이를 거절하진 못할 것이었다.

게다가 초운의 저 성질머리는 사랑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작품 속에서 초운은 겉과 속이 다른 정상보다 훨씬 더 많은 경창파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포근한 차 안쪽 벽에 기댄 유가는 길게 하품을 하고 눈을 감고 잠을 좀 자려고 했다.

아구는 말을 하려다가 멈췄다. 대인이 이렇게 피곤해하는 것을 보고 그 많은 질문을 속으로 삼키고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정말 대인을 아끼지만 대인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꼬마 녀석에게 그렇게 말을 전한 건, 진심으로 자신에게 원한을 갚으라는 것 아닌가? 근데 ‘유가를 죽이면 사존이 널 찾으러 가겠다’라니? 대인께서 돌아가시면 그 꼬마 녀석의 사존은 없어지는 것 아니었나?

아구는 왠지 모르게 유가를 대신해 마음이 저렸다. 작은 몸을 크게 만든 후, 유가에게 날개를 덮어주고 자신은 그의 어깨에 살짝 기대어 한숨을 내쉬었다.

대인,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아구는 언제든 당신 곁에 있겠습니다.

유가는 꿈도 꾸지 않고 편안하게 잠을 푹 자고 상쾌하게 깨어났다. 어깨는 침으로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유가는 어이가 없어 웃고는 곯아떨어진 아구를 한쪽으로 옮기고 지금 어디까지 왔는지 보려고 휘장을 올렸다.

천하와 점점 가까워오자, 유가는 미간을 찌푸리고 마차에 장안법을 썼다. 그리고는 혹시 모를 번거로움을 덜기 위해 쌍두 사자에게 더 높이 올라 천천히 날아가라고 명령했다. 그는 좋은 시력으로 차 안에서 저 앞을 내다보았다. 선계 쪽 해안가에는 그들이 처음 왔을 때보다 두 배나 많은 호위무사가 서 있었고, 훨씬 긴장감이 넘쳤다.

짧으면 짧은 며칠 사이에 왜 저렇게 호위무사가 많아진 거지? 설마 마계에 무슨 일이 생긴 건가? 말도 안 되지. 유가 자신도 없고, 대국을 주관할 자도 없는데 어떻게 큰일이 일어날 수가 있겠어?

쌍두사자가 천천히 이끄는 차가 선계에서 멀어지자, 유가는 왔던 길을 그대로 따라오라고 명하고 먼저 마차에서 내려 급히 마계로 날아갔다. 아무래도 마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확인해야 했다.

그의 속도는 당연히 쌍두사자보다 몇 배는 빨랐고, 해가 지기도 전에 마계 상공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미간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저 아래 빼곡하게 있는 마족 병사들이 몸을 꼿꼿하게 세운 채 곧 싸울 태세로 서 있었다.

유가가 아래로 내려와 병사들을 마주하고 입을 열려는 찰나, 그 병사들이 하나 같이 유가를 발견했다. 그 순간 병사들의 몸이 빳빳이 굳어지고 긴장감 넘치는 흥분이 적막으로 웅크렸다. 그리고 누군가 말했다.

“마존이시다! 마존께서 돌아오셨다!”

큰 외침이 고요함을 깨고 울려 퍼지자 여기저기서 연달아 답했다. 군대 전체가 흥분의 도가니였다.

“진짜 마존이시다! 마존께서 정말 돌아오셨어!!”

“호법께서 하신 말씀이 맞았어! 여기에 있으니 정말 마존이 오셨어!”

“마존 대인 드디어 돌아오셨네요!”

“…….”

겉으론 무표정하게 있지만, 사실 유가는 속으로 엄청 어리둥절했다. 고금성이 어떻게 자신이 선계에서 돌아오는 걸 알고 있던 거지? 그리고 왜 이렇게 진을 치고 그가 돌아오길 기다린 거야? 근데 고금성은 어디를 간 거지?

저 멀리에서 공간이 깨지는 소리가 전해졌다. 유가가 힐끗 보니 저 멀리서 사람이 오고 있었다. 안면 마비가 온 것 같은 저 얼굴은 고금성이다.

검은색의 몸에 딱 붙는 옷을 두른 사람이 천천히 유가의 앞에 와서 한 쪽 무릎을 꿇었다.

“소인, 존주를 뵈옵니다.”

그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진기를 감싼 채 천하 지역에 울려 퍼졌다. 이 말이 신호탄처럼 천하 강변에 서 있던 마족 사병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고 공수했다.

“소인, 존주를 뵈옵니다!”

목소리가 천하 강변에 울려 퍼지자 어쩔 수 없는 전율이 돋았다. 이 광경에 처음으로 자신이 마존이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다는 걸 절실히 느꼈다.

그는 악마일 뿐 아니라 송기연의 원수였고, 마계를 이끄는 유가였다.

전에 마존이라는 위치를 버리고 어딘 가에 숨어 멋지게 인생을 살아볼까 했으나, 지금은 그 마음이 거의 사라졌다.

조용히 있던 손바닥의 흑석각인이 은은하게 달아오르더니, 잊힌 기억이 머릿속으로 들어왔다. 화면들이 줄줄이 나타나고, 그중엔 붉은 옷을 입은 청년이 살벌하고 의기양양하게 사람들 앞에서 제창했다. 오만하게 웃는 모습에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이 사람이 아마 과거의 유가겠지. 적수가 없던 유가, 송기연의 지하 감옥에 갇혔어도 안하무인 했던 유가,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던 유가.

처음에 자신이 ‘유가’라는 이름을 악당에게 썼을 때는, 자신이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던 일을 이자가 해주길 바랐던 거 아니었을까. 자신의 유약한 성격과는 상반된 성격의 유가. 그는 사실 ‘나’가 제일 심혈을 기울인 인물이었다. 유가는 사실 그가 되고 싶었던 사람이었다.

가슴속에서 갑자기 호기가 샘솟아 유가는 고금성을 바라보고 웃어 보였다. 고개를 돌려 무릎을 꿇고 있는 해안가의 병사들을 보고 말했다.

“맞다, 본존이 돌아왔다.”

유가가 돌아오자 천하 변계의 호위무사들은 고금성이 일부 돌려보냈다. 천하 반대편 선계도 한시름 놓았다. 밤새 마족이 습격할까 봐 두려워하지 않아도 됐다.

돌아가는 길에 유가는 고금성에게 왜 이런 짓을 했냐고 물었다. 그 순간 두 사람 사이엔 긴장감이 흘렀다. 고금성은 정색하고 이건 마존을 위해 준비한 자리이며, 이 병사들이 마존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퍼뜨리면 곧 그 유언비어들이 멈출 것이라고 했다.

유가는 미간을 찌푸리며 계속 물었다.

“너는 어찌 본존이 선계에서 돌아온다는 것을 알고 있던 것이냐? 본존의 기억이 맞다면, 본존은 왕다국에게 그런 말을 전한 적이 없다.”

안색 하나 변하지 않던 고금성의 입꼬리에 웃음기가 돌았다.

“마존께서 아구를 찾아가실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소인의 예상이 빗나가지 않는다면 한나절도 지나지 않아 아구가 올 거라고 예상했습니다. 좀 전에 일부러 아구가 돌아올 때까지 그곳을 지키고 있으라고 몇 사람을 해안가로 보냈었습니다.”

유가는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고금성이 더 빨랐다.

“소인은 얼마 전 우연히 능광신군을 마주친 뒤 그분과 한담을 나누고, 아구가 이미 마계를 떠났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게다가 존주께서 역주를 시켜 소인에게 한 달 정도 떠나신다고 알리셨는데, 돌아오지 않으셨습니다. 다시 연락을 취했을 때 소인은 마존께서 직접 선계에 가셨다는 걸 알아차렸습니다.”

“…….”

유가는 이치가 들어맞는 말에 할 말이 없어졌다. 고금성은 완전 레이더 같은 사람이었다. 생각도 너무 치밀하잖아? 고금성을 현대에 데려가면 분명히 심리학에 종사할 텐데!

속으론 난리 법석을 떨면서 유가는 이미 익혀 둔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입꼬리를 10도 정도 올리고 눈꼬리를 살짝 치켜세우고, 이미 자신도 다 이해했다는 듯 앞만 보고 걸어갔다. 뒤에 공손하게 쫓아오는 고금성에게 장난스럽게 말했다.

“네가 그리 말하니 본존은 널 믿겠다. 하나 기억해두어라. 마계도 마궁의 병사도 모두 본존의 것이다.”

그리곤 발걸음을 멈추고 뒷사람에게 차갑게 말했다.

“또다시 본존의 허락 없이 병사를 움직인다면 그땐 널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다.”

고금성이 급히 한쪽 무릎을 꿇고 예전 마수 동굴에서 자신에게 목덜미를 보이며 복종했던 것처럼 고개를 숙였다.

“존주,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소인 앞으로 절대 사사로이 병사를 움직이지 않겠습니다!”

유가의 눈빛이 살짝 어두워졌다. 이렇게 위에서 내려다보니 고금성의 표정이 보이지 않아 좀 불쾌했다. 하지만 지난 2년 동안 이자에게 마계를 넘겨 버리더니 돌아오자마자 그를 혼낸다는 게 뭔가 좀 막돼먹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네가 직접 깨달았다면 됐다. 지금 본존을 따라 주전으로 가자구나, 너에게 맡길 일이 있다.”

“네!”

왠지 모르게 고금성은 이번에 돌아온 유가가 많이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몸엔 자신이 모르는 것들이 많아졌다. 하지만 그는 신식으로 유가를 살펴볼 수 없었다. 이 사람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느낌이 정말 별로였다. 그는 유가의 발을 따라가며 속으로는 긴 시간 동안 유가가 무얼 하고 지냈는지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유가가 고금성에게 맡긴 일은 하늘이 이상했던 그 며칠 동안 마궁 근처에서 벌어진 요수 활동에 대해 조사하라는 거였다. 고금성에게 2년 동안 마계에 어떤 큰일이 있었고, 혹시 해결 못 한 문제가 있는지 물었다. 고금성의 대답은 왕다국이 유가에게 전해준 얘기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량이 넓어진 유가는 고금성에 대한 편견을 버렸다. 전에는 왕다국에게 옮아 고금성에게 많은 의심을 했다. 지금 보아하니 아무래도 자신이 좀 옹졸했던 것 같았다. 갑자기 자신은 마치 학생이고 고금성은 창가에 서서 자신을 감시하는 선생님 같다는 생각이 들자 좀 가소로웠다. 악의는 없었지만, 항상 고금성에게 피해망상이 있었던 것 같다.

유가는 긴장을 하는 편이 나았다. 긴장을 풀면 바로 허튼 생각을 하게 됐다. 저 아래에 꼿꼿이 서서 마계의 대소사를 구구절절 얘기하는 고금성을 보고 유가는 갑자기 장난치고 싶어졌다.

대전에 웅장한 의자 위에 앉아 팔걸이에 손을 올리고 있다가 갑자기 고금성의 말을 끊었다.

“금성, 마음이 가는 사람이 있느냐?”

《선마겁》에서 여인들은 모두 주인공만 좋아했고, 이런 조연들의 감정에 대해 쓴 적은 없었다. 마족은 수진계처럼 그렇게 고결하게 굴지 않아도 됐다. 유가의 곁에서 이렇게 오래 있었고 나이도 몇 백 살이 됐을 고금성이 좋아하는 사람이 없다는 건 확실히 이상했다.

이 질문을 받은 고금성은 놀란 눈치였다. 그렇게 변하지 않던 표정도 일순간에 흔들렸다.

“존주 왜 갑자기 그런 질문을 하십니까?”

“단지 호기심일 뿐이다.”

무슨 단지 호기심이야! 유가는 자신의 맘속 스캔들이 활활 타오르고 있다고 느꼈다. 그는 자신이 쓴 인물 중 주인공과 유가를 제외하고 나머지가 욕구를 억제하는 비구니이길 바라지 않았다. 인생에 파트너가 없다면 어떻게 완벽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고금성이 한숨을 내쉬고 자조하듯 대답했다.

“전엔 있었으나 지금은 없습니다.”

공허한 대전안에 고금성의 목소리만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갑자기 알 수 없는 냉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유가의 가슴이 철렁했다. 침을 꿀꺽 삼키고 다시 질문을 하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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