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사제(師弟)
“어이, 얘기 들었어? 마존께서 실종되신 지 벌써 2년이 넘었다는군!”
“그걸 누가 몰라? 그동안 고 대호법(大護法)께서 전대륙으로 찾아다니셨잖아! 수진계로 들어간 벗 하나가 하는 말이 수진에선 이 일이 다르게 알려졌다더군!”
“어떻게 다른데? 말 좀 해 보지?”
술을 마시는 중 내 뒷자리에서 내 소문에 대해 얘기를 나누는 두 사람의 대화가 흥미진진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다가가 불쑥 물었다.
내 질문을 받은 이는 날 바라보다 웃으며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두 눈으로 주위를 한번 살피고 자신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
“여기 동생께서 마존 대인 소문에 이렇게 관심이 많으실 줄이야. 내게 이 질문을 하는 거라면 사람 잘 찾아오셨소. 다른 이에게 물었다면 아마 감히 말하지 못했을 것이요.”
하마터면 웃음이 터질 뻔했다. 몇백 살인지도 모르는 이 늙은 요괴에게 ‘동생’이라니? 무의식적으로 2년 동안 차고 다녔던 가면을 어루만졌다. 이자가 만약 내가 그 2년 동안 사라진 마존이란 걸 알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오, 형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다른 사람이라면 감히 말하지 못하다니?”
자연스럽게 두 사람 옆에 앉아 그자의 말을 받았다.
그자가 목소리를 낮추었다.
“마존 대인에 대한 소문이 점점 난잡해져서 고 대호법께서 이미 사람을 보내 사람들을 벌하셨다고 하더군!”
그는 낯빛을 한층 어둡게하고 말을 이었다.
“더 두려운 건 망책역 역주께 들은 건데, 그 벌이 그냥 벌이 아니라 아예 머리를 베어 버렸다지 않나!”
깜짝 놀랐다. 머릿속에 자동으로 왕다국이 부채로 사람들의 머리를 수백 번 자르는 모습이 떠올랐다. 침을 꿀꺽 삼키고 난감한 듯 웃었다.
“상당히 경악스럽네요…….”
내가 놀란 것을 보고 사내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만족스러운 눈빛으로 계속 말했다.
“그러니 당신, 오늘 여기서 들은 말은 절대 입 밖으로 꺼내지 마시오. 꺼내는 순간 당신을 지키지 못할 테니!”
“알겠으니 걱정 마세요. 절대 말 안 할 겁니다!”
내게 이리 말하는 이 사내에게 흥미가 생겼다. 그렇게 경고를 하면서 자신은 소문을 퍼뜨리며 좋아하다니, 화를 자초하는데 재능이 있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면……,”
사내가 목을 가다듬었다.
“수진계 그쪽에선, 우리 마존께서 천하전투에서 중상을 입으셨고, 그래서 어딘가에 숨어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계시다고 알려졌다더군. 우리 마계에 지도자가 계속 이렇게 없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들이 우리를 일망타진 할 수 있다던데, 특히 그 경창파(擎苍派)에 완십주라는 미친 자가……!”
“완십주는 뭐라고 했습니까?”
완십주의 이름을 듣는 순간 더 흥미로워졌다. 한 달 정도 후에 송기연을 직접 경창파에 데리고 가서 완십주에게 넘겨줄 요량이었던 지라 기뻤다.
사내는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그자는 반드시 마존을 잡아서 천하에 물고기 먹이로 던져 버리고는……, 어…….”
“그리고 뭐요? 왜 말을 하다가 마시오?”
흥미롭게 듣고 있는데 사내가 꼭 귀신이라도 본 양 안색이 안 좋아졌다. 그러더니 나무 걸상에서 내려와 돌 바닥에 무릎을 꿇고 내 뒤쪽으로 덜덜 떨며 머리를 조아렸다.
“역주, 살려 주십시오!”
그의 외침에 깜짝 놀란 술집 1층 사람들 십여 개의 눈이 집중됐다. 다들 부랴부랴 절을 올리며 공손하게 말했다.
“역주를 뵈옵니다.”
하. 김 다 샜다.
허무감에 이마를 문지르곤, 금방이라도 그들을 죽이려 강한 바람을 일으키는 왕다국을 진정시켰다. 손에 든 술잔을 돌리며 심드렁히 한탄했다.
“넌 어찌 항상 본존의 흥미를 방해하는 것이냐? 됐다. 와서 술 상대나 하라.”
내 목소리가 크진 않았지만, 고요한 방안에 천둥이라도 친 듯 모두가 일제히 표정이 바뀌더니 무릎을 꿇고 외쳤다.
“마존을 뵈옵니다!”
발 옆에 사내가 파르르 떠는 것 같은데, 너무 놀라서 바보가 됐나?
왕다국이 아무렇지도 않게 나와 정면으로 마주 보고 앉았다.
힐끗 보니 콧수염이 깔끔하게 면도가 되었고, 수수한 옷을 걸치고 있어 전보다 훨씬 보기 좋았다. 아마도 막청이 그를 용서하고 다시 한방을 쓰는 것 같았다.
한 달 전쯤 이자는 콧수염을 휘날리며 조급하게 날 찾아와 술을 마셨다. 술에 취해 막청을 끊임없이 부르며 딱딱해진 하반신을 연신 내 옷에 비벼대던 장면이 떠오르자, 갑자기 온몸이 떨리면서 오한이 들었다.
내 말엔 대꾸도 없이 왕다국이 손을 흔들며 친절하게 말했다.
“여봐라, 차 좀 내오거라!”
그제야 날 보고 얼굴을 긁적였다.
“대인, 송구합니다. 막청 때문에 술은 못 마십니다.”
이마에 핏줄이 섰다. 이 공처가를 어떡하지!
내가 사라진 지 1년째 되던 해, 날 찾아다니던 왕다국에 그만 잡히고 말았다. 이자는 기억력이 비상해, 일전에 시골역 객잔에서 날 마주쳤던 일에 대해 떠올리곤 날 찾아냈다. 그리고 어쩌다보니 난 그와 막청 사이의 자질구레한 일들까지 모두 알게 되었고, 나도 머리가 어떻게 되었는지 이자를 믿고 송기연을 구했던 일을 다 알려 주었다.
한참을 멍해 있던 왕다국은 결국 아구와 같은 입장에 서기로 결정했다. 그 말인 즉, 내가 무얼 하든 다 지지한다는 뜻이었다.
작품 속 왕다국은 애증을 취향으로 삼는 자였지만, 뱉은 말은 지키는 사람이었다. 그가 충심을 표했을 때 감동하지 않았다고 말한 건 거짓말이다. 그 후로 우리 둘은 자주 술잔을 기울였고, 서로 굉장히 잘 맞아 오늘까지 거의 형제처럼 지내왔다.
술잔을 내려놓고 아직 바닥에 꿇어앉아 계속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사내를 보고 웃었다.
“고개를 들고 계속 말하라. 그래서 완십주는 뭐라고 욕을 했느냐?”
“송구합니다. 소인 감히 말 못 합니다. 마존, 살려주십시오! 역주! 목숨만은 살려주십시오!”
재미가 없어 한숨을 내쉬었다. 듣고 싶은 소문을 못 듣자 눈웃음을 짓고 차를 따르는 왕다국을 바라보았다. 화풀이할 대상이 없으니 스스로 참 재수가 없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본존이 네 목숨을 쓸 데가 어디 있겠느냐? 다들 물러가라, 다만…….”
내가 화제를 돌리자 1층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너희는 똑똑히 기억하라. 본존은 잘 지내고 있다. 수진계에 그 개같은 자식들이 찾아온다면 절대 살아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응, 기세도 좋고 말투도 만점이다.
한참이 지나서야 분위기가 풀어졌고, 다들 한목소리로 외쳤다.
“위대하신 마존!”
세 번을 외치고서야 다들 일어나서 물러갔다. 다만 걸어 나갈 때 힐끗 날 훔쳐보는 눈빛엔 다들 경이로움이 담겨 있었다.
얼굴은 굳었지만, 속으론 한참을 웃고 있었다. 이런 허세가 통하는 게 기분 나쁠 리가 없잖아!
왕다국이 나를 바라보며 찻잔 뚜껑으로 찻잎을 걸러내며 조롱했다.
“존주, 이번엔 정말 흥이 나셨습니다.”
“본존은 너처럼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사람을 죽이는 살인자가 아니다. 소문은 몇 사람 죽인다고 끝나지도 않는다. 본존이 직접 나서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이다.”
왕다국이 비웃었다. 아마도 내가 그를 살인자라고 경멸한 것에 불만이 있는 모양이었다. 사실 전에 유가도 그와 같이 살인을 저지르고 방화를 하던 극악무도한 자였는데, 지금 나는 깨끗하다는 듯 말하고 있었으니까.
“이번엔 저와 생각이 같으십니다. 하지만 존주께서 마계를 너무 오래 비워두시면 마계에 좋지 않습니다. 무리에 우두머리가 없어선 안 됩니다. 그 자리엔 반드시 존주께서 계셔야 합니다.”
왕다국이 잠시 말을 멈추고 차를 마셨다. 그러다 찻잔을 매섭게 탁자 위에 올려놓자 도자기 깨지는 소리가 울렸다.
“고금성은 그 자리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왕다국이 준 술 주전자 2개를 들고 귀곡으로 돌아가는 길. 술기운으로 머리는 어지러웠지만, 발아래 솜뭉치를 밟는 듯한 살랑거리는 느낌은 오히려 편안했다.
지난 2년 동안, 난 평범한 사람들처럼 하루에 세 끼를 챙겨 먹고 술도 즐기고 길거리에 퍼지는 소문을 들으며 즐겁게 지냈다. 그중 술 마시는 걸 제일 좋아했는데, 오후만 되면 술이 당겨 송기연을 속이고 몰래 나와 마시곤 했다.
오늘은 왕다국이 와서 마계의 일을 상의하곤 좋은 술을 전해 주고 갔다. 본인은 술을 마실 수도 없으면서, 늘 나를 신경 쓰고 있었다. 좀 전엔 술집에서 끊임없이 술을 내게 권했고, 향을 맡은 나는 더 저항할 수 없이…… 그래서 취해버렸다.
술을 깨고 싶긴 한데 사실 이런 느낌도 좀 즐기고 싶었다. 그래서 그냥 느릿느릿 걸어가기로 했다. 다만 송기연에게 한 소리 들을 것 같은데?
내가 사는 곳은 협곡 아래였다. 낮은 산 하나를 넘어갈 때 평소라면 그냥 날아갔겠지만 지금은 그냥 산을 올랐다.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냥 몸을 단련하고 즐긴다고 여기면 되니까. 그래서 한 손엔 술을 들고 다른 손으론 술집에서 산 고기를 들고 비틀비틀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 생각보다 취기가 더 올랐는지 발을 뗄수록 눈꺼풀도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손발이 나른해지고 너무 잠이 쏟아져 그냥 이렇게 산허리에 누워 자고 싶었다.
순간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왕다국이 내게 웃으며 술을 권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이 술 일반적인 술이 아닌 거지!
속으로 좌절했다. 법결로 술기운을 날려버리려 했지만, 갑자기 온몸에 힘이 빠지더니 그대로 땅에 고꾸라졌다. 술주전자가 떨어지며 바위 위에서 산산조각이 났다. 순식간에 퍼져나간 술 냄새가 주위에 진동을 했다.
머리를 이리저리 굴려보다가 드디어 작품 속에 영과 하나가 떠올랐다. 냄새는 십 리 밖에서도 맡아질 정도로 향긋해서 술로 만들면 애주가들은 모두 군침을 흘렸다. 다만 술기운이 너무 세서 일반적인 수련 경지인 사람이라도 보름은 내리 잠만 자고 평범한 사람이라면 죽을 수도 있었다. 정말 말 그대로 취생몽사(醉生夢死-취한 상태로 태어나 꿈꾸듯이 죽음)였다.
수련의 경지가 높다고 해도 이미 몇 주전자나 마셨고, 처음에 술기운을 빼내지도 않았으니, 한마디로 망한 거였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워 온갖 생각들이 떠올랐다. 입을 벌리고 아구를 부르다가 문득 이 녀석이 1년 전 주작족으로 돌아갔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신수족의 백 년 집회가 곧 시작해서, 아구는 주작족의 젊은 세대의 인재답게 반드시 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이렇게 1년이 넘게 걸릴 줄은 예상 못 했다.
날이 어두워지고 안개도 점점 짙어졌다. 바닥에 누워 하늘의 별이 점점 먹구름에 가려지는 걸 보는데, 왠지 모르게 외로워졌다. 술이 증발하면서 술 냄새가 점점 더 진해졌고 술기운이 더 오르는 것 같았다. 견디지 못하고 눈을 감고 쓴웃음을 지었다.
나 아무래도 집이 그리운가 봐.
“여기서 주무시고 계셨군요. 사존. 한참 찾았습니다.”
흐리멍덩한 상태에서도 누군가의 숨결이 느껴졌다. 몸 아래로 손이 들어오더니 당황스럽게 ‘공주님 안기’로 날 안아 올렸다.
사존이라고 부르는 소리에 송기연이 왔다는 걸 이미 알아차리고 살짝 감동이 밀려오던 참이었는데, 이 자세가 뭐란 말인가. 송기연이라면 나 대신 술기운을 깨게 할 수도 있는데 제 스승을 이렇게 안는다고? 부끄러워서 얼굴이 없어지겠어!
속으로 한참을 중얼거렸지만 힘을 쓸 수가 없었다. 눈꺼풀은 천근만근이라 눈을 뜰 수도 없었고 그냥 이 아이에게 안긴 채 걸어가야 했다.
맞다. 이 자식 아무렇지 않은 듯 엄청 여유롭게 걸어간다. 내가 가르쳐 준 술법을 헛배운 것이다. 《천진결》을 연습하긴 한 거야? 곧 금단기(金丹期)가 되는 실력은 다 밥 말아 먹은 건가.
지난 2년 동안 아이의 몸은 빠르게 성장했다. 처음엔 내 허리춤 정도 왔던 아이가 이제는 내 어깨에 닿았다. 잘 먹고 잘 자고 몸도 탄탄하니 나를 안아 올리는 것 정도는 식은 죽 먹기였다. 그냥 지금 내가 너무 어색해서 그랬다. 그의 가슴팍에 기댄 머리에 안정적이고 힘 있는 심장 박동이 느껴지자 너무 이상했다.
이렇게 반수면 상태로 그의 품에 안겨 나무집에 도착했다. 송기연이 날 내 침대에 눕히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술기운은 긴장한 탓에 좀 사그라들었다.
날 침대에 내려준 뒤 송기연은 떠나지 않고 한바탕 바스락거렸다. 보아하니 걸상을 가지고 내 곁에 앉는 것 같았다. 숨결이 덮쳐오고 은은한 나무 향이 훌쩍 다가왔다. 내 곁에 바짝 다가와 앉은 것 같다. 터무니없이 긴장감이 감도는데, 무의식적으로 호흡을 진정시켰다.
“사존, 2년이 됐습니다.”
송기연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울려 퍼졌다. 아직 자라고 있는 소년의 목소리였다.
“또 도망가실 거예요?”
“…….”
뭐, 뭘 또 도망을 가? 얘 지금 뭐라는 거지. 침대에 시체처럼 널브러져 있던 내 얼굴이 어이를 잃었다.
“이번엔 또 도망가시게 가만히 보고만 있진 않을 겁니다.”
소년은 말을 멈추고 내 손을 끌어당겨 감쌌다. 손등에 닿은 매끄러운 느낌에 심장이 철렁했다. 송기연의 뺨이었다.
“이 세계에서 제게 잘해주는 사람은 사존이 유일합니다. 또다시 사존을 잃게 되면 제게 남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소년의 말을 듣고 온몸에 닭살이 돋았다. 얘 오늘 약을 잘못 먹었나. 왜 자꾸 변태 같은 말만 하는 거지? ‘또’ 도망을 간다니? 내가 언제 도망을 갔었다고?
송기연이 내 손등에 더 얼굴을 파묻으며, 완전히 달라진 말투로 말했다.
“다만 대낮엔 마음대로 못하는 게 진짜 번거로워요.”
말을 하고 아이가 잠깐 머뭇거리다 내 가면 위로 손을 올렸다. 순간 또 심장이 철렁했다. 진기로 빨리 술기운을 내보내고 싶었다. 다행히 아이의 손은 다음 동작을 하진 않았다.
“정말 사존의 가면을 벗겨 설요족 공주가 좋아하는 얼굴이, 진짜 사존께서 말씀하셨던 그 흉터가 있는 얼굴이 맞는지 보고 싶어요.”
갑자기 내 귓가에 대고 물었다.
“사존, 도대체 가면 아래 뭘 숨기고 계시는 거예요?”
너무 놀라 심장이 목구멍으로 튀어나올 뻔했다. 가면의 이마 위치에 갑자기 가볍게 누르는 듯한 느낌이 느껴졌다. 복잡했던 머릿속이 한순간에 또렷해졌다.
아이의 한 손은 내 가슴팍에 있고 다른 손은 내 머리에 있는데, 그럼 이 느낌은…….
이 자식 내 이마에 뽀뽀했어!
그 느낌은 찰나, 아주 벼락같이 내리꽂혔다 사라졌고 귓가엔 아이의 목소리가 다시금 들려왔다,
“나중에 제가 꼭 이 은각(銀刻) 제거할 거예요.”
송기연의 발소리가 점점 멀어지는 걸 듣고서 긴장이 풀리기 시작했지만, 이 기분은 도저히 진정되질 않았다.
생각보다, 더, 상당히 오늘 밤 송기연이 한 이 일에 식겁하고 말았다. 그가 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에 소름이 돋았다.
왕다국과 막청의 관계는 잘 알고 있었다. 글 속에서 유가도 역시 양성애자였기에 동성애자에 별다른 거부감은 없었다. 하지만 난 영락없는 이성애자라서, 남자에겐 조금의 흥미도 생기지 않았다.
글 속에 송기연도 나와 똑같았다. 성적 취향이 번개에 맞아도 부러지지 않는 소나무처럼 꼿꼿하고 한결같았다. 내가 쓴 송기연의 여인들은 모두 청순하거나 차갑거나, 혹은 성숙하고 긴 머리를 휘날리는 아리따운 여인이었다.
관성대로라면 그는 절대 남자를 좋아할 리 없었고 더욱이 제 사존은 아니었다. 송기연은 사존을 존경하고 정도를 아는 아이였고, 알면서도 이런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할 아이가 아니었다.
생각할수록 이치에 안 맞았다. 오늘 그는 아무래도 귀신에 홀린 것 같다.
아이가 내게 가지는 감정은…… 이건 가족 간의 정이겠지? 어쨌든 내 입술에 키스하진 않았으니까. 이마에 뽀뽀한 거면, 굿나잇 키스 같은 거겠지?
‘정말 사존의 가면을 벗겨 설요족 공주가 좋아하는 얼굴이 진짜 사존께서 말씀하셨던 그 흉터가 있는 얼굴이 맞는지 보고 싶어요.’
아직 정리가 되지 않은 머리에 이 말이 스쳐 지나갔다.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그때 내가 너무 무책임했던 것 같다. 괜히 흉터가 있다는 핑계를 대서 자기 무덤을 스스로 판 꼴이 되었다.
송기연의 성격이라면 2년 전부터 이미 내 가면을 신경 쓰고 있었을 텐데. 그럼에도 내 가면을 억지로 벗기지 않았고, 만약 벗겼더라면 우리 둘은 지금 이렇게 있지 못했겠지.
‘대낮엔 마음대로 못한다는’ 말은 무슨 소린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설마 이 아이 다중 인격인 건 아니겠지.
미친, 큰일 났네.
놀란 가슴이 진정이 되지도 않았는데 술기운에 못 이겨 그만 잠에 들고 말았다.
낮에 생각한 게 밤에 꿈으로 나온다는 말이 있다. 난 지금 내가 꿈을 꾸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지만 꿈 내용은 등골이 서늘한 것이었다.
전생에 내가 갇혀 있던 경창파의 수옥이다. 하지만 이 감옥은 물 없이 깨끗했고 난 방관자처럼 옆에 서 있었다. 앞에는 나와 똑같은 모습의 사람이 쇠사슬에 매달려 있었다. 그 사람 얼굴에 있는 검붉은 가면은 깨져서 틈으로 창백한 피부가 드러났는데, 상처는 없었다.
감옥 문 쪽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온 사람은 성인 송기연이다.
송기연이 ‘내’ 옆으로 걸어와 기쁨과 자신감에 찬 표정으로 가면 위에 손을 올렸다.
“사존, 제가 당신을 찾느라 얼마나 고생한 줄 아십니까?”
말을 하자마자 송기연의 커다란 손이 가면을 벗겨 버렸다.
“드디어 가면 아래 얼굴을…… 유가?!”
송기연의 기쁜 표정이 순식간에 경악으로 바뀌고 가면은 석회 바닥 위에서 산산조각이 났다. 이 얼어붙은 분위기 속에서 날카로운 파열음이 더욱 또렷하게 들렸다.
“마, 말도 안 돼……. 아니야, 이건 아니야! 아니라고……, 안 돼……!”
송기연은 큰 충격을 받은 듯 입으로 계속 부정하고 있었다. 정신을 놓은 사람처럼 머리를 붙잡고 뒷걸음치다, 더 물러설 곳도 없는 문까지 닿았다
송기연이 충격받는 모습에 되려 내 마음이 아팠고 점점 더 극심해졌다. 마치 현대에서 심장병이 도진 것만큼이나 고통스러웠다.
명치를 손으로 잡고 주저앉자 오른손 손바닥이 뜨거웠다. 손바닥엔 흑석각인이 은은하게 빛나고 머릿속에선 뭔가가 산산조각나며 휘몰아쳤다.
“사존, 왜 항상 가면을 쓰시는 거예요?”
“넌 알 필요 없다.”
“전 경창파에 가고 싶지 않아요! 항상 사존을 따르겠어요.”
“너와 내 인연은 이미 끝이 났다. 경창파가 바로 네가 가야 할 길이란다.”
눈을 번쩍 떴다. 방안을 가득 비추는 햇살, 해는 이미 중천에 떠 있었다. 늦잠을 잤다는 걸 알아채고 지끈거리는 머리를 어루만졌다. 좀 전에 머릿속에 맴돌던 말을 떠올리려고 했지만, 하나도 기억나는 게 없었다.
그저 꿈속에서 모든 진상을 알게 된 송기연이, 그 상심한 눈빛이 떠올라 씁쓸해졌다.
지금 난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도 절대로 내 신분을 밝히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일어나 두 다리를 땅에 댔다. 아무래도 체내의 진기가 더 원활하게 움직이는 것 같았다. 내면을 보니 2년 동안 거의 다 나았던 부상이 그 술 덕분에 완쾌되었다.
생각도 못 했는데, 왕다국 정말 정이 깊은 사람이었다. 막청도 분명히 그의 이런 성격이 좋아 그에게 넘어갔을 것이다.
맨발로 문 앞으로 걸어가 손으로 문을 여는 순간 무의식적으로 눈을 감았다. 검광의 밝기에 적응하고 나서야 눈앞의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흰옷을 입은 길쭉한 소년이 손에 장검을 들고 차가운 빛을 반짝이며 봄날의 찬란한 햇살 아래서 검화를 그려나가고 있었다. 날카로운 칼날은 공기를 가르더니 그대로 눈앞에 있던 나무 기둥을 베어버렸다.
쿵.
원기둥 모양의 나무 기둥이 두 조각으로 갈라졌다.
송기연이 진기를 움직이며 손을 휘젓자 두 조각으로 갈라진 나무가 부뚜막 앞에 작은 산 모양으로 쌓였다.
검에서 나무 조각들을 털어내고 뒤로 던지자 경쾌한 소리와 함께 검이 완벽하게 검 자루에 들어갔다. 얼굴이 혈색 좋게 붉어진 아이가 나를 보고는 부끄러운 듯 웃었다.
“사존, 일어나셨어요? 제가 지금 가서 물을 가져올게요!”
소년은 금방이라도 뛰쳐나가려 했다.
“아니다. 내가 직접 가겠다. 너는……,”
화덕을 바라보자 갑자기 며칠 전 이 아이가 내게 만들어 준 굉장히 시원했던 흰목이버섯연밥탕이 생각났다. 생각할수록 입에 침이 고였다.
“그래, 흰목이버섯연밥탕을 해주련.”
내가 말려도 절대로 뛰어나갈 것 같던 송기연이 그대로 굳어졌다. 갑자기 불안해하는 얼굴이었다. 처음 듣는 요구를 들은 것처럼 어리둥절해 보였다. 한참 뒤에야 대답이 돌아왔다.
“네. 사존 잠시만 기다리세요! 제가 지금 가서 만들어 올게요!”
혼이 빠진 그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아마도 어젯밤에 자신이 한 일이 떠올라 지금 이렇게 불편해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래, 그래야 송기연이지. 다만, 아이가 전처럼 내게 솔직하지 않은 모습은 조금 의아했다.
난 지금 그가 이중인격이 확실하다고 생각 중이었다. 낮엔 수줍음도 많고 사존을 존경하는 어린 백화(白花)가 밤만 되면 말투부터 변하는데, 두 사람을 같은 사람으로 연결 짓기 힘들었다.
예전에 송기연이었다면, 만약 내게 불경스러운 일을 했어도 낮에 분명히 사과를 했을 것이다. 별로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송기연이 사과 한마디 없자 정말 기분이 상하려했다.
이 자식! 정말 내가 자고 있었다고 생각하는 거냐!
이제 와서 화를 내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알고 있다. 술에 취해 밖에 널브러졌던 일은 나도 창피해서 입에 올리기 싫었다. 술을 마셨다는 생각이 떠올라 손을 들고 옷소매의 냄새를 맡았다. 역시 술 냄새가 진동을 했다.
좀 씻어야겠다.
나와 송기연이 살고 있는 나무집 앞에는 굉장히 큰 호수가 하나 있는데, 호수 안에는 바위틈에서 나온 깨끗한 샘물이 가득했다. 난 한쪽에 돌을 쌓아 작은 온천을 하나 만들었고, 일이 없으면 그곳에서 목욕을 하며 긴장을 풀었다. 매번 송기연을 부를 때마다 송기연은 혼자 찬물 목욕을 할지언정 나와 함께 씻지는 않겠다고 거절을 했다.
이 일을 생각해보니 뭔가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설마 그 어린 녀석이 그때부터 날 마음에 두고 있었던 건가.
하, 더는 못 들어주겠다. 나르시시즘도 이런 나르시시즘이 없네.
그때는 고작 열 살짜리 아이였고 이차성징도 일어나지 않았었는데, 그렇고 그런 걸 알 리가 없잖아!
괜한 잡다한 생각을 접고 옷을 벗어 온천 안에나 들어갔다. 긴 숨을 내쉬는자 온몸이 편안해졌다.
팔을 벌리고 큰 바위에 몸을 기댔다. 갑자기 처음 이 세계에 넘어왔던 순간이 생각났다. 그때도 욕실이었다. 그때 백옥의 욕조에 비친 얼굴을 보고 나도 꽤 놀랐던 기억이 있다. 혹시나 여자는 아닌가 싶어 철렁하기도 했다. 매일 이 가면을 쓰고 다니느라 지난 2년 동안 나도 내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주위를 둘러보아도 송기연이 보이지 않아 슬며시 가면을 벗고 고개를 숙였다. 수면에 그때 봤던 그 얼굴이 보였다. 투명하리만치 하얀 피부에 빚어놓은 듯한 이목구비, 검은 눈썹과 검은 눈동자를 한층 요염하게 하는 눈꼬리. 남자 구미호가 따로 없네.
다만 지금은 전과 다르게 미간 사이에 은색의 연화 꽃잎이 세 조각 더 생겼다. 예전에 야야가 불시에 남기고 간 것이다. 궁전 암투 드라마에서 본 여인들이 자주 하고 나온 것이었는데, 새삼 미간 사이 꽃 도안이 사람을 더 요염하게 만들었다.
‘나중에 제가 꼭 이 은각 제거할 거예요!‘
머릿속에 송기연의 말이 떠오르자 갑자기 몸서리가 쳐졌다. 나중에 가면을 벗는다면 이 은각이 탄로 날 게 아닌가? 급히 손으로 연꽃잎에 장안법을 써서 보이지 않게 했다.
매끈매끈한 얼굴 한참 물에 비추다 다시 가면을 쓰고 뭍으로 올라가 옷을 입으려 했다. 하지만 뭍으로 올라와서 반지를 방 안에 두고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연못가에 쌓여있는 옷은 술 냄새가 진동을 해서 입을 수가 없었다. 난 습관적으로 나무집을 향해 소리쳤다.
“기연, 방안에 놓인 내 반지를 가져와라.”
이런 습관이 제일 해로운 법이었다. 송기연이 왔을 때 난 옷을 호수에서 세탁하려고 옷을 돌돌 말고 있었다. 하지만 소년의 비명(?)이 귀에 꽂혀 옷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사, 사존! 왜, 왜 옷을 벗고 계세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다. 저 아이가 어젯밤에 저지른 일을 알면서도 이런 모습을 보이다니! 고개를 숙이고 실오라기 하나 없는 내 상태를 봤다가, 다시 얼굴이 새빨개져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송기연을 보고는 당황스러워 머리를 긁적였다. 손을 휘저어 반지 속에서 빨리 외투 한 벌을 찾으며 말했다.
“옷을 가져오는 걸 잊었을 뿐이다.”
옷을 입곤 소년의 앞으로 다가가 더러워진 옷을 아이에게 주었다.
“씻어 두거라.”
“네……. 아, 사존.”
“왜?”
억지로 자연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송기연을 돌아보았다.
“흰목이버섯연밥탕을 탁자 위에 준비해 두었습니다.”
송기연은 귀까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따뜻할 때 드세요.”
“알겠다.”
“사존!”
다시금 송기연이 부르자 얼굴이 부자연스럽다 못해 갈라질 것 같았다.
“또 왜?”
“사존 옷…….”
송기연은 날 가리키면서 머뭇거리며 말했다.
“거꾸로 입으셨어요.”
으아아아아악! 아이씨, 쪽팔려!
* * *
“그때 자네에게 맡긴 일은 어찌 되었나?”
앞에 놓인 찻잔에 차를 따르고 다시 왕다국의 잔에도 따라주며 그의 대답을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술 대신 차를 마시는 나를 보고 왕다국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별다른 질문은 없었지만, 내게 묻는다고 해도 대답할 생각도 없었다. 술에 취해서 한 창피한 짓은 말 안 하는 게 상책이었다.
“다 처리했습니다. 그날 여기에 있던 사람들은 마존께서 살아 계시다는 소문만 퍼뜨릴 뿐, 마존께서 가면을 쓰고 계시다는 말은 절대 하지 못할 것입니다.”
보고를 마친 왕다국은 찻잔을 한 손에 들고 다른 손으로 찻잔 바닥을 받치며 향을 즐겼다. 꼭 노인이 말년을 즐기는 모습이었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왕다국이 저렇게 말했다면 이 일의 위기 상황은 정리된 셈이었다. 내가 마계 사람들에게 가면을 쓴 일에 대해 입막음한 것은 후에 송기연이 그 소문을 들을까 봐 걱정이 되어서다. 그 아이가 제 유가를 생각하며, 시간 장소를 떠올리다가 그게 사존이라는 것을 알아차린다면 그럼 끝장나는 것 아닌가?
“금성은 움직임이 있느냐?”
고금성의 집착은 나도 잘 알고 있었다. 내가 떠나온 지 벌써 2년이 지났다. 평소에는 귀곡심연에서 자주 나가지 않으며, 그를 피한지도 600일이 되었다. 이번 소문이 용염역에서 나왔으니 고금성은 내가 여기 있다는 걸 분명히 알고 있을 것이고, 그자의 성격이라면 곧 여길 찾아올 게 분명했다.
고금성이라는 이름을 듣고 왕다국이 눈썹을 찡그리며 말했다.
“존주께서 이곳에 송기연을 숨겨 두신 것 알고 있습니다. 고금성 그자는 여기에 절대 올 수 없습니다. 그날 저녁 마궁에 가서 고금성을 막고 존주께서 한 달 뒤 돌아와 대국(大局)을 주관하실 거라고 전했습니다.”
뭔가 이상해서 눈썹을 치켜세웠다.
“고금성이 네 말을 듣던?”
“처음엔 당연히 안 믿었습니다.”
왕다국이 찻잔을 내려놓고 겁먹은 척 자신의 가슴팍을 두드리며 말했다.
“아니 글쎄 칠 척이 넘고 백 근이 넘는 진용장곤(鎮龍長棍)을 제 목에 겨누지 않습니까. 그때 그 무표정한 얼굴이 정말 소름 끼쳤다니깐요! 놀라 황천길 건너는 줄 알았습니다!”
난 고개를 내저으며 능청스러운 왕다국을 힐끗 바라보고 웃었다.
“아직 살아있으면 된 것 아니냐?”
“저 아직 얘기 다 안 끝났는데요? 진짜 저를 때려죽이려고 하지는 않고 음침하게 말하더라고요.”
왕다국이 고금성의 안면 마비 얼굴을 따라 했다.
“만약 한 달 뒤에 존주께서 돌아오시지 않으면 당신의 살가죽을 다 벗겨 버리겠다.”
말을 마치고 왕다국은 차를 마시며 두 눈으로 날 안쓰럽다는 듯 바라봤다.
“존주께서 이렇게 오래 자리를 비우시니 고금성이 그렇게 설치는 거 아니겠습니까. 감히 망책역 역주의 머리 위에 올라서서 왈가왈부하다니요. 존주께서 직접 처리해주십시오!”
고금성이 왕다국에게 그렇게 말했을 줄은 몰랐다. 하지만 보아하니 고금성이 그의 말을 절반은 믿은 모양이다. 아니라면 얌전히 한 달을 내리 기다리고만 있지 않았을 테니까.
내가 자리를 비웠던 시간 동안 마계는 전적으로 고금성에게 맡겼다. 며칠 후에 아이를 선계에 데려다주면 경창파에서 선물을 훔쳐 그자에게 줄 생각이었다.
“흠, 존주. 제가 고금성에게 그렇게 당했는데 뭐가 그리 즐거우시어 웃고 계시는 겁니까!”
왕다국이 자신의 목을 쓰다듬으며 화를 냈다.
“이것 좀 보십시오. 여기 아직도 자국이 남아있지 않습니까.”
직접 보니 진짜 왕다국의 하얀 목 위에 붉은 자국이 나 있었다.
“그 자국으로 막청에게 얻는 게 많지 않느냐?”
부러 더 당당하던 왕다국이 내 말을 듣고 기세가 약해지더니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하하, 확실히 적진 않습니다.”
“그럼 됐다.”
술을 마시듯 차를 들이켜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차를 아무리 마셔봤자 술처럼 취하지는 않고 오히려 정신이 더 또렷해졌다. 정말 별로였다.
“왕다국.”
“네, 존주.”
왕다국은 살짝 멈칫했다가 대답했다.
“무슨 분부가 있으십니까?”
“나 대신 주작족의 아구를 찾아가 언제 돌아올 수 있는지 좀 물어다오.”
아구가 떠난 지 1년이 지났지만, 아무런 소식도 들리지 않았다. 아구가 너무 보고 싶고 짹짹거리는 소리도 그리웠다. 있을 땐 좀 시끄러웠지만, 정말 집에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왕다국은 망설이다가 말했다.
“일은 간단하지만, 아마 반년 정도 시간이 걸릴 겁니다.”
4대 신수 가문이 있는 곳은 요수삼림(妖獸森林)으로 대륙의 최서단에 있었다. 선계의 중심지로 용염역과 거리가 상당했다. 왕다국도 가게 된다면 고생스러울 게 뻔했고 반년 정도는 가뿐히 걸릴 만했다.
“그럼 보름 뒤 경창파 산문 앞에서 기다려라. 본존이 송기연을 경창파에 보내고 너와 동행하겠다. 잘 숨어 있어라. 괜히 번거로운 일 만들지 말고.”
“알겠습니다.”
유가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송기연은 밥을 하고 있었다. 주방에서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오르고 은은한 밥 냄새가 공기 중에 퍼졌다. 송기연은 직접 정원에 작은 화로를 만들어 막대기에 토끼고기를 꿰어 놓고 진기를 이용해 숯의 화력을 조절했다. 손에 솔을 들고 때때로 고기에 기름칠을 하며 토끼고기가 금색이 될 때까지 구웠다. 진한 고기 냄새가 퍼져 입맛을 돋우었다.
열심히 고기를 굽던 송기연이 유가가 온 것을 보고 마지막 기름칠을 하고 일어나 담담하게 물었다.
“사존 또 술 드시러 갔다 오십니까?"
벌써 초저녁이었다. 유가가 돌아오는 길에 해는 이미 산을 넘어갔고 지금은 살짝 여광이 남아 완전히 어두워지기 전이었다. 유가는 이미 송기연이 대낮의 그 부끄러움 많은 아이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오늘 경창파로 가는 일을 얘기해 주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아직 목구멍이 바짝바짝 타기만 할 뿐 말이 나오질 않았다.
별다른 이상을 발견하지 못했을 땐 아이를 편안하게 대했는데, 지금은 일반적인 대화에서조차 신중해야만 하는 게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아니, 아니다.”
송기연은 수려한 눈썹을 찡그리며 유가에게 몇 걸음 다가가 멈추었다. 그리곤 유가 가슴팍에 코를 킁킁 대면서 이리저리 킁킁댔다.
“술을 드시지 않으셨네요. 사존께서 며칠 동안 아침에 나가셨다가 밤에 돌아오셨죠. 그저께는 두 주전자의 술을 드시고 밖에서 취해 넘어지셨고요.”
송기연은 정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전에 극한지경에서 만난 자신을 좋아해야 할 야야가 사존을 마음에 두더니, 사존은 무슨 십 년의 약혼이란 걸 맺기까지 했다.
인생을 다시 살면서 알고 싶은 게 많았다. 송기연은 사실 소년기 때, 이미 엽망지에게 다른 감정이 생겼다는 걸 알고 있었다. 자신이 가장 약했을 때 자신이 일어설 수 있게 도와준 사람, 차가운 겉모습과 달리 진심으로 자신을 아껴주었던 사존. 그가 바로 자신이 가장 흠모하는 사람이었다.
송기연은 경창파에 들어가는 12살 그날, 사존과 헤어진 후 끊임없이 엽망지를 찾아다녔지만 성과가 없었다. 엽망지는 꼭 증발한 것처럼 그의 세계 속에서 아무런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가족도 없고 사랑하는 사람도 없는데 유가가 죽은 뒤엔 복수를 할 사람도 없었다. 맨몸에 수련의 경지만 가진 그는 더욱 초라해 보였다. 지금 그가 천명을 거스른 지금, 송가를 구하지는 못했지만 다행히 엽망지와는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이 세계에선 그는 절대 그 손을 놓을 수 없었다.
송기연이 눈을 흘기며 몇 번을 참다가 날카로운 말투로 말했다.
“누구 만나러 가셨던 거예요?”
유가의 마음속에 경보음이 울렸다. 급히 두 걸음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
“그냥 산책을 갔다 온 것뿐이니 더는 묻지 말아라.”
유가는 아쉬운 듯 잘 구워진 토끼고기를 바라보고 침을 삼키며 손을 휘저었다.
“오늘 난 저녁은 됐으니 너 혼자 먹어라.”
사존은 송기연에게 확실히 만류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말을 마치곤 곧장 시야에서 벗어났다.
저 어린 자식이 눈빛이 왜 이리 무서운지, 이럴 땐 삼십육계 줄행랑이 상책이었다. 아, 토끼고기! 얼마나 맛있는 건데! 눈앞에서 날아가 버렸잖아!
송기연아, 송기연! 왜 대낮엔 안 구운 건데!
송기연은 빠르게 자신을 떠나 나무집 문 뒤로 사라지는 유가를 보고 미간을 더욱 찡그렸다. 사존이 취했던 그날 이후로 계속 자신에게 소원했다.
설마 뭘 알고 계신 건가?
가능성 있는 생각에 송기연은 갑자기 긴장되었다. 날짜로 따져보면 사흘 뒤 사존은 자신을 경창파에 보내고 영영 자신의 세계에서 사라져 버린다.
펑!
송기연이 뒤로 손을 흔들자 화로 위의 숯불과 막대기만 놔둔 채 토끼고기는 순식간에 깨끗하게 사라졌다. 보아하니 이미 진기를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 높은 수준에 도달한 것 같았다.
“원래 사존께 드리려고 준비한 건데, 사존께서 안 드신다면 남겨 둘 필요가 없지.”
송기연이 가슴팍에 손을 올리고 차갑게 말했다.
“송기연, 잘 들어. 또 너를 속이지 마. 너와 나는 한 사람이라고.”
갑자기 멈칫하더니 다섯 손가락으로 더 세게 옷자락을 잡았다.
“넌 내 생각을 절대 읽을 수 없어. 하지만 내가 했던 말과 한 일은 너도 분명히 기억할 거야. 제발 사존이 떠나지 못하게 붙잡아 줘. 만약 사존께서 떠나신다면, 넌 다신 사존을 찾지 못해.”
송기연의 말이 공중에서 저녁 바람에 순식간에 흩어졌다. 훤칠한 소년이 그렇게 처량해 보였다.
* * *
유가는 밤새 한숨도 못 자고 뜬눈으로 밤을 지샜다. 첫 번째 이유는 송기연에 놀란 거고, 두 번째는 그 토끼고기가 아른거려서였다. 한밤중에 식욕이 돋아 몰래 방문을 열고 나가 보았지만, 토끼고기는 이미 사라지고 앙상한 나무막대기와 재료 변한 숯만 그곳에 쌓여 있어 보고 마음이 아팠다.
두 사람이 협곡에서 지낸 2년 동안 유가는 항상 밥을 얻어먹기만 했다. 막 왔을 때는 밥을 해보려고도 했는데 완전히 실패였다. 그는 밥을 먹지 않아도 되었지만, 송기연은 먹여야 했기에 매일 용염역으로 나가 식사 거리를 사 왔었다. 매일 적어도 세 번은 가야 했다.
송기연은 그를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아 직접 요리를 배우기 시작했다. 나중엔 그럴듯하게 해놓기도 했다. 특히 저녁밥은 상당히 맛있었고 천천히 유가의 위를 길들였다. 그래서 유가는 밖에서 술을 마실 때도 절대 식사는 하지 않고 고기 조금을 안주로 삼을 뿐이었다.
그날 술에 취한 후로 유가는 이미 며칠 동안 제대로 저녁을 먹은 적이 없었다. 비록 배가 고프진 않았지만, 배고픈 것보다 식탐이 더 힘들었다. 그래서 그의 예민한 코가 익숙한 고기 굽는 향을 맡았을 때, 침대에서 아이처럼 뒹굴거리는 걸 멈추고 곧장 일어나 문 밖으로 나섰다.
문을 열자 고기 냄새가 순식간에 유가를 감쌌다. 둘러보니 어제 고기를 구웠던 그 화로에 또다시 토끼고기가 있었다. 화로 옆에 앉아 기름칠을 하는 사람은 당연히 송기연이었다.
그를 본 송기연은 하던 일을 멈추고 유가를 향해 환하게 웃어 보였다.
“사존께서 이 고기를 제일 좋아하시지요. 어제 드시지 않으셔서 오늘 아침에 제가 산에 가서 또 잡아 왔습니다.”
소년은 고개를 숙이고 잘 구워진 금빛 토끼고기를 바라봤다.
“고기가 거의 다 익었습니다. 사존께서 저쪽에 가 계시면 금방 가져다 드릴게요.”
유가는 멍한 채로 자신 앞에 공손한 송기연을 바라봤다. 그는 더없이 친절했다. 확실히 지금 송기연과는 함께 살기에 좋은데, 밤에 송기연은 왜 전생의 그 두려운 송기연과 자꾸 연결이 되는지 모르겠다. 꼭 속이 까만 여우 같았다.
“그래.”
담담하게 대답한 유가는 봉황 나무 아래 탁자에 가서 앉았다. 고개를 들고 3장(丈)넘게 자란 봉황 나무를 바라보는데, 옅은 녹색 나뭇잎 사이로 작은 꽃봉오리가 보였다. 유가는 심념을 움직여 반지에서 화정석(火晶石) 하나를 꺼내어 나무 아래 흙으로 옮기고 진기를 바닥으로 뿌렸다.
순식간에 거대한 열량이 봉황나무 전체를 감싸더니 나무가 급속도로 자라나기 시작했다. 옅은 녹색의 나뭇잎이 바로 청록색으로 변하고, 더 크고 풍성해진 꽃봉오리는 바로 꽃을 피웠다. 수많은 붉은 꽃잎이 녹색 잎들을 밀어내자 나무가 불이 난 듯 무성하고 화려해졌다. 아침 햇살이 나무를 향해 내리쬐고, 사이사이 빛나는 모습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었다.
손을 내밀어 떨어지는 봉황꽃을 잡은 유가는 왠지 모르게 슬퍼졌다. 처음에 아구가 이 나무를 심자고 했었는데 결국 그는 이 불처럼 타오르는 봉황꽃을 보러 오지 않았다.
송기연이 쟁반을 들고 제자리에 서서 나무 아래 사람에 시선이 꽂힌 채 눈을 떼지 못했다.
붉게 타오르는 나무, 수수한 옷차림의 사람, 소년의 심장은 더 빠르게 뛰었다. 아마도 이 모습이 설요족 공주가 그렇게 사존에게 시집을 오고 싶어 하는 이유일 거라는 생각이 갑자기 떠올랐다.
‘사존께서 떠나시지 못하게 꼭 붙잡아 둬.’
“네가 말 안 해도 다 알고 있어.”
송기연이 미간을 찌푸렸다. 왜 자신에 몸에 또 다른 영혼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사존을 향한 마음은 그 영혼도 자신과 똑같았고 그가 한 말이 아예 일리가 없진 않았다. 송기연은 사존 없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사존, 움직이지 마세요.”
송기연이 접시를 탁자 위에 놓고 유가의 머리 위에 떨어진 봉황꽃을 가볍게 잡았다. 그리곤 사존이 눈치채지 못하게 순식간에 소매 속에 넣었다.
“왜 그러니?”
유가는 아무것도 모르고 물었다.
“사존의 머리 위에 꽃잎이 있어서요.”
송기연이 다른 쪽에 앉으며 웃었다.
“지금은 없습니다.”
“그럼 됐다.”
유가는 접시가 탁자에 올려진 후로 쭉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대답은 그 정도로만 한 후, 체면 차리지 않고 바로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송기연은 토끼고기를 세심하게 조각낸 뒤 직접 만든 향신료를 그 위에 뿌렸다. 유가가 고기를 입에 넣자 그 향이 가득 퍼졌다. 먹는데 정신이 팔린 유가는 자신을 바라보는 소년의 눈빛이 한층 가라앉은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유가는 만족스럽게 고기를 먹고 나서야 고개를 들고서 깜짝 놀랐다. 송기연이 더없이 환하게 웃으며 자신을 쭉 보고 있는 것이었다. 자연스럽게 불편한 감정이 몰려왔다. 하마터면 아이의 면전에서 습관적으로 얼굴을 긁적일 뻔했다.
정신을 차린 유가는 아직 본론을 말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표정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기연, 이미 춘삼월이다. 선계에서 제일 난 경창파가 제자를 모집하는 시기지. 난 네 부친의 뜻에 따라 너를 네 부친의 벗인 완십주에게 보내 그를 너의 사존으로 삼게 할 생각이다.”
청천벽력. 송기연은 바로 얼굴을 굳혔다.
그리고 어젯밤 제 안의 다른 자신이 한 말이 제일 먼저 떠올랐다.
설마 사존께서 진짜 나를 떠나시려는 건가?
송기연은 갑자기 마음이 더할 나위 없이 시큰해졌다. 바로 유가를 향해 무릎을 꿇고 절을 올리며 간절하게 거절했다.
“사존, 한번 사존을 모시면 평생 아버지와 같이 모셔야 한다고 했습니다. 제 평생 사존은 오직 사존 뿐입니다. 다른 사람을 사존으로 모시고 싶지 않습니다!”
“이게 무슨 짓이냐?”
유가는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원작에서는 이런 게 없었는데? 엽망지는 순조롭게 송기연을 경창파로 보내곤 스토리에서 완전히 사라졌는데?
송기연이 이렇게 입문하기를 거부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어떤 말로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나는 네게 술법을 전수해 주기엔 한계가 있고 경창파의 장서각(藏書閣)에 비할 수 없을 게다. 게다가 완십주는 경창파에 몇 대 장로 중 하나이니 나보다 훨씬 강할 테지. 아직 복수도 하지 않은 네가 내 곁에 있다면 영원히 강해지지 못할 것이고, 네 부모의 원수에게 복수도 하지 못한다.”
유가가 헛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자신도 무슨 말을 해야 송기연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지’ 몰라 생각나는 대로 일단 뱉고 보았다. 노파심에 타이를 뿐이었다.
하지만 당사자가 받아들이질 않았다.
송기연이 고개를 숙이고 두 손을 앞으로 내밀고 다시 절을 올렸다. 제자가 내뱉는 말 하나하나마다 유가의 머리 위에선 연기가 피어올랐다.
“사존께서 뜻을 꺾지 않으신다면 저도 여기서 무릎을 꿇고 있겠습니다.”
대낮에 그렇게 말을 잘 듣던 송기연이 왜 이렇게 갑자기 고집불통이 됐는지 유가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좌절감이 느껴지자 유가는 일어서 소매를 한번 털며 차갑게 말했다.
“그러고 싶으면 그렇게 해라. 하지만 경창파는 반드시 가야 한다. 네가 원치 않으면 꿇고 있다가 쓰러진 너를 내가 데리고 가면 그만이다!”
보통 소설 속에서 주인공이 밖에서 꿇어앉아 있는 이런 장면이 나오면 열에 아홉은 날씨가 급변했다. 역시나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유가가 방 안으로 들어온 지 두 시진도 지나지 않아 맑은 봄 하늘에서 갑자기 세찬 빗줄기가 쏟아졌다.
우르르쾅쾅 쏟아지는 빗방울에 단단했던 나무집 지붕도 요란한 소리를 냈다. 가부좌를 틀고 침대 위에 앉은 유가는 명상으로 시간을 보내며 밖에 고집스럽게 무릎을 꿇고 있는 송기연을 억지로 무시했다.
이 거지 같은 하늘이 유가를 더 성가시게 굴었다. 그는 무슨 무릎을 꿇고 있던 송기연이 쓰러지면 데려가겠다는 둥 입으로는 강하게 말했지만, 결국 마음이 아팠던 거였다. 지금 여기에 앉아있어도 밖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송기연이 아픈 건 아닌지 온 신경이 쏠려 있었다.
송기연이 좀 전에 자신이 먹는 걸 바라보고만 있었는데, 혹시 아이는 밥을 안 먹은 걸까? 옛날에 어른들 말씀으로 봄에는 보온을 하고 겨울엔 추위에 대비해야 한다고 누누이 말씀하셨다. 만약 꽃샘추위를 겪으면 지병이 평생을 따라다닌다 했다.
그는 송기연의 집착이 어디를 향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완십주가 천하전투에서 그를 살려달라고 외쳤었는데, 그게 제일 진실한 마음이 아니었던가? 송기연은 그때 이 장면을 볼 수 없었지만 듣는 건 가능했잖아?
지금은 놀랍게도 진심으로 대해주던 완십주를 사존으로 삼고 싶어 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자신의 진짜 원수의 곁에서 떠나려 하지 않고 있었다.
빗줄기가 점점 굵어졌다. 과장하는 게 아니라 나무집 근처에 폭포 흐르는 소리와 맞먹을 정도였다. 참지 못한 유가가 일어나 문 앞으로 걸어가 살짝 문틈을 벌렸다. 예상대로 문밖에 송기연은 여전히 꿇어앉아서 진기로 몸을 보호하지도 않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빗물로 산발이 된 머리카락은 아이의 창백한 얼굴에 달라붙어 있었고 그걸 보던 유가는 막 천하에서 아이를 데려왔던 장면이 떠올랐다. 유난히 안쓰러워 보였다.
이게 고육지책인 건가? 어떤 움직임을 감지했는지 꿇어앉은 사람이 고개를 들어 유가와 눈을 마주쳤다. 손을 앞으로 내밀고 허리를 굽혀 유가에게 절을 다시 올리고 고개를 드는데, 창백한 입술에서 쉰 목소리가 단호하게도 뚫고 나왔다.
“사존께 간청드립니다.”
한없이 간절한 아이의 모습에 유가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지 않을 리가. 문을 닫고 문에 기대선 후 긴 한숨을 내쉬고서야 심장이 좀 진정되었다. 좀 전에 송기연이 자신을 바라보던 눈빛은 굉장히 낯선 것이었다. 그 눈빛 속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그가 몸을 숙여 절을 올릴 때, 유가의 마음이 모두 녹아내렸다.
비는 밤늦게까지 계속되었고 유가는 침대에 누워 조금도 졸리지 않았음에도 억지로 잠을 청했다. 점점 작아지는 빗소리 속에서 송기연의 기침 소리가 섞여 있었다. 아무래도 진기로 몸을 보호하지 않고 그대로 비를 맞아, 평소 건강하던 소년이 적지 않은 고생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대략 일각(一刻)이 지나고 비는 멈추었다. 하지만 송기연의 기침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조용한 밤에 더욱 선명하게 들리는 소리 하나하나가 유가의 귓가에 꽂혔다.
“젠장!”
몸을 일으킨 유가가 힘을 통제하지 못한 채 문을 치자 문이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문밖엔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기침을 하고 있는 송기연이 보였다.
급히 송기연의 곁으로 다가가 그를 내려다보며 있는 대로 화를 냈다.
“내가 네 목숨을 어떻게 구해 줬는데, 이리 망가뜨리는 것이냐! 오늘 네가 이럴 줄 알았다면 처음부터 널 구하지 않았을 것이다. 네 마음대로 하거라!”
지금은 한밤중이었고, 송기연 안의 송기연은 진작 주도권을 가져왔다. 그는 지금 남몰래 ‘자신’이 대낮에 쓴 수법에 기뻐하고 있었다. 지금 송기연, 본래의 몸주인은 나이는 어렸으나 ‘송기연’과 통하는 구석이 있었다. 사존의 약한 마음을 잘 이용할 줄 알았다.
하늘도 도와주고 있었다. 좀 전에 억지로 기침 소리를 내던 송기연이 천천히 고개를 들고 유가의 표정을 살피자, 여기도 조금만 더 불을 지피면 곧 해결될 것 같았다.
송기연은 다시 유가를 향해 고개를 숙였고, 허리를 숙일 때 일부로 몸을 살짝 떨어 꼭 병이 난 것처럼 꾸몄다. 몸을 천천히 일으킬 땐 진기를 이동해 입에 피가 고이게 해서 유가가 보는 앞에서 피를 토해냈다. 누가 봐도 놀랄 모습이었지만, 사실 본인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피를 토하고 송기연은 놀라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유가를 보며 아무렇지 않은 듯 입가의 피를 닦았다.
“사존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제 목숨을 다시 사존께 드리겠습니다.”
송기연은 몰래 유가의 안색을 살피고 다시 말했다.
“사존 곁에 남아 보은할 수 없다면 이 목숨이 다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그가 피를 토하는 걸 보는 순간 유가의 기가 꺾였다. 피를 토한 게 진짜인지 가짜인지 생각해 보지도 않고 바로 다급하게 송기연에게 손을 뻗었다.
“우선 일어나서 방으로 돌아가 몸을 살펴라. 네가 혼자 경창파에 가기 싫다면 내가 함께 가겠다. 경창파에서 나와 함께 지내는 건 어떻겠느냐?”
유가는 송기연이 경창파에 가는 게 필연적이고 그렇지 않으면 이 소설은 진행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세계의 법칙을 깨면 어떤 결과가 따를지 알고 싶지 않았다.
송기연이 이렇게까지 저항한다면 우선 아이를 좀 달래기로 했다. 어차피 한동안은 아이와 같이 지내고, 그때 다시 빠져나오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었다. 지금 아이의 몸을 해치는 것보단 나았다.
송기연은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사존께선 아직 날 아끼셨다. 이렇게 빨리 동의를 하실 줄이야. 뒤에 더 큰 고통의 장면들도 있었으나 필요 없어졌다.
지금 송기연은 예전의 기억이 남아 있었다. 경창파에서 더 강한 실력을 키울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 연기로 사존과 함께 경창파에 가고자 했다. 다시는 사존이 자신의 시야에서 사라지게 두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 후, 자신의 실력이 강해져서 복수를 하고 사존에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할 생각이었다. 만약 거절한다면…….
송기연은 고개를 들고 자신이 상처를 입은 듯 얼굴을 찌푸린 유가를 바라보았다. 송기연의 표정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거절한다면, 그렇다면 사존을 가둘 생각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분명히 감정이 생길 테니까.
“청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존.”
송기연이 힘없이 유가를 향해 절을 하고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순간 발밑이 아찔해져 그대로 고꾸라졌다. 유가가 급히 그를 부축하자 송기연은 여지없이 그의 품에 안겼다.
따뜻한 유가의 가슴팍에 기댄 송기연은 그만 입꼬리가 올라가고 말았다. 잠깐 동안 그 순간을 즐기고 정신을 차린 척하며 급히 몸을 일으켰다. 당황한 목소리로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사존. 그만 실례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유가가 멈칫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마음속으로 의구심이 들었다. 설마 그전에 내가 이 아이를 오해했던 걸까? 이 ‘한밤중’의 아이도 사존을 존중하고 도리를 지키는데.
이런 생각을 했지만, 그는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됐다. 어서 가서 쉬어라. 내일은 일찍 일어날 필요 없다. 몸이 다 낫거든 경창파로 출발하자.”
“네, 사존.”
송기연이 인사를 하고 방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너무 오래 꿇어앉아 있었는지 무릎이 아파 제대로 걸을 수가 없었고, 그걸 바라보던 유가는 한숨을 쉬었다.
경창파에 가면 어떻게 빠져나와야 할까? 그는 정말 거기서 기다릴 생각이 없었다. 경창파는 선계에서 제일 큰 문파이고 그는 누구나 비난하는 마존 유가이니 언젠간 다 탄로날 게 분명했다.
* * *
송기연은 아픈 곳이 없었지만, 사존의 의심을 사지 않으려 이틀을 꼬박 시체처럼 침대에 누워 있었다. 죄책감을 느낀 유가는 매일 방 안에서 송기연을 간호했다. 대낮엔 용염역에서 아이에게 줄 보양식과 아이가 좋아하는 음식을 사다 주며 아이를 많이 아꼈다.
송기연은 속으론 좋으면서 겉으론 아무 내색도 하지 않고 오히려 괴로운 얼굴로 때때로 앓는 소리를 내기도 했다.
계속 이렇게 유가의 보살핌을 받고 싶었지만, 경창파에 가는 일을 늦출 수 없다는 걸 송기연도 알고 있었다. 사흘째 되는 날. ‘병이나 누워 있던’ 송기연이 마침내 일어났다. 진지한 표정으로 유가에게 이제 다 나았다고 말을 했고 일행은 바로 짐을 정리하고 출발했다.
유가가 봐도 확실히 아이가 많이 좋아진 게 보였다. 열심히 보살핀 보람이 있었다. 이번에도 차를 끄는 건 불날개 달린 쌍두사자였다. 다만 사자차 위에 검은 봉황 표식은 유가가 이미 떼어 버렸다. 마궁 표식이 달린 마차가 선계로 들어가서 사람들 눈에 띄면 얼마나 귀찮아지겠는가.
쌍두사자는 수진 대륙에서 주로 사용되는 탈 것이라서 의심받을 일은 없었다.
유가는 마계 수위를 속이려 일부러 천하 변경에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강을 건너, 선계에는 저녁에 도착해 양측에 발견되지 않게 할 셈이었다.
엽망지는 이름이 알려진 자가 아니어서 선계엔 그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송기연은 이미 2년이 넘게 ‘죽은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다. 마계에서 숨어 지내다가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 게 분명했다. 이렇게 몰래 가는 게 그 많은 번거로운 일들을 덜 수 있었다. 게다가 유가는 이 일들을 설명할 마땅한 방법도 없었다,
유가가 답답한 건, 밝은 대낮엔 차 안에 잘만 앉아있던 녀석이 밤만 되면 꼭 ‘고질병이 돋은 듯’ 제대로 앉아 있지 못하고, 차가 휘청거리면 그도 따라 기우뚱거리다가 꼭 바람에 쓰러지는 것 같은 모습으로 자신에게 쓰러진다는 거였다. 유가도 그의 모습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식별할 수가 없기에 피할 수도 없어 송기연을 자신의 몸에 눕히고 자신의 다리를 베고 잠자게 했다.
사람을 지나치게 가까이하지 않는 유가는 꼭 바늘방석에 앉은 것 같았고 하루가 일 년 같이 느껴졌다. 선계에 도착한 후 꼬박 이틀을 더 가고서 경창산(擎蒼山) 아래에 도착했고 유가는 그제야 밤의 ‘송기연’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만물이 소생하는 춘삼월. 경창산에도 녹색이 푸르렀다. 안개가 덮여 있는 높이 솟은 산봉우리 아래에 서 있으면 선기(仙氣)가 얼굴로 덮쳐왔다. 유가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신선한 공기를 만끽하며 송기연과 함께 몇백 명의 뒤를 따랐다.
미친. 무슨 사람이 이렇게나 많아.
유가가 한숨을 쉬었지만, 사실 사람이 많다고 불평할 수도 없었다. 그가 쓴 《선마겁》에서 경창파가 제자를 모집하는 건 선계에서 제일 중요한 일이었다. 일파삼문육대가(一派三门六大家)에서 모두 제자를 선발하지만, 그중 선두주자인 경창파는 모든 이들이 가장 들어가고 싶어 하는 곳이었다. 그래서 3년마다 경창산 아래는 이렇게 붐볐다.
등록을 하는 사람이 거짓말 하나도 안 보태고 이 산을 두 바퀴나 돌 수 있을 정도였다. 유가 일행은 그나마 제일 붐빌 때를 피한 것이고 지난 며칠 동안은 사람이 더욱 많았었다.
한참을 기다린 끝에 송기연의 차례가 왔다. 의자에 앉아있던 경창파 제자는 17~18살 정도로, 구름무늬가 있는 흰옷을 입고 거만한 표정으로 송기연을 훑어보았다.
“나이.”
“열둘입니다.”
백의 제자가 멈칫하더니 조롱했다.
“그렇게 안 보이는데, 발육이 빠르군.”
송기연이 웃으며 부정하지 않았다.
“잘 먹었습니다.”
“풉.”
송기연이 말에 유가 뒤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송기연과 얼추 키가 비슷한 소년이 즐거운 듯 눈웃음을 짓고 있었다. 주위에 아무도 없는 걸 봐서는 혼자 온 것 같았다.
많은 사람이 자신을 바라보자 소년이 급히 손을 모으고 웃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그만 참지를 못했네요. 송구합니다.”
송기연은 신경 쓰지 않고 말했다.
“괜찮습니다.”
크흠-
백의 제자가 헛기침으로 송기연의 주의를 끌었다.
“경창파에선 열다섯 살 이하 제자만 모집한다. 문은 두 개로 나뉘어 있다.
연기(練氣-도가에서 호흡을 조절하는 것) 10급이 가장 낮은 기준이며 바깥문으로 들어가고, 축기기(築基期)는 안쪽 문으로 들어가면 된다.”
그러더니 탁자 위에 놓인 지름 1척(尺) 정도 되는 원형 정석(晶石)을 가리켰다.
“저 위에 손을 올리고 진기를 주입하면 수련 경지를 알 수 있다.”
송기연은 고개를 끄덕이고 손을 올려 시키는 대로 했다. 곧 돌에서 빛이 나는데 앞사람의 것보다 훨씬 눈이 부셨다. 뒤에 서 있던 사람들의 이목도 집중됐다.
백의 제자가 일어서서 놀란 듯 중얼거렸다.
“열두 살, 축기 후기 곧 금단(金丹)기가 되겠군.”
그 제자는 방금까지 거드름 피우던 표정을 거두고 송기연을 바라보았다.
“이름이 무엇인가?”
경창산 아래에서 몇날 며칠 제자를 모집한 그는 이미 싫증이 나서 송기연의 이름도 묻지 않았었다. 지금 송기연의 수련의 경지를 보니 말투까지 진중해졌다.
송기연은 오는 길에 유가가 자신에게 한 말이 생각이 났다.
송가의 송기연은 이미 죽은 것이었다. 만약 유가에게 자신이 살아있다는 걸 알리고 싶지 않다면 더는 이 이름을 쓰면 안 되었다.
“기연, 성은 기, 이름은 외자 연입니다.”
백의 제자는 뭔가 이상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이 나이에 이 정도의 수련의 경지가 가능하려면 명문가의 사람이어야 하는데 기씨 성의 수진세가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이상하긴 했지만 더 홀대할 수 없던 제자는 송기연 뒤에 서 있는 유가를 바라보다가 송기연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소형제께서 첫 요구사항을 만족하였으니, 다음은 직접 산속에 들어가 훈련해야 하하네. 하지만 소형제와 같이 오신 저 대인께선 함께 올라가실 수 없네.”
그가 유가를 대인이라고 칭한 이유는 좀 전에 자신의 금단기 수련 경지로 유가를 살펴보았지만, 그의 수련 경지가 간파할 수 없을 정도로 깊었기 때문이다. 유가가 큰 인물이란 걸 알았다면 그를 대할 때 조심해야 했다.
그 말을 들은 유가는 너무 기뻤다. 가능하다면 이 귀여운 백의 제자에게 ‘좋아요!’를 눌러 주고 싶었다. 모든 경창파에 ‘좋아요!’.
이 규칙은 진짜 합리적이잖아! 원래도 도망칠 생각이었는데, 지금이 바로 그 기회였다. 지금 도망치지 않으면 다시 언제 가능할지 알 수 없었다.
송기연은 꼭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표정으로 백의 제자에게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송기연은 유가를 한쪽으로 끌고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아직 소년의 말투며 눈빛이 그렇게 진지할 수가 없었다.
“사존, 산 정상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말을 하는 송기연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제발, 꼭 와주세요.”
송기연의 눈빛에 유가의 털이 곤두섰다. 붉어진 그의 눈을 보고 한동안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경창파에 남는다면 필연적으로 생길 여러 가지 번거로움이 떠올랐다. 유가는 습관적으로 송기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웃었다.
“가거라. 내가 반드시 너보다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으마.”
유가는 지금 이 거짓말이 후에 어떤 상황을 가져올지 알지 못했다. 만약 알았다면 이렇게 말하지 못했을 것이다.
“금단 중기(中期)! 당신 금단 중기잖아!”
유가가 송기연과 약속하자마자 방금 신입생을 모집하던 백의 제자가 훙분하여 소리를 질렀다. 줄을 서 있던 사람들의 이목도 모두 집중됐다.
정석이 곧 깨질 듯 눈부시게 빛을 발하는데, 그 위를 덮고 있는 손은 방금까지 송기연 뒤에 서 있던 소년의 것이었다.
소년은 손을 거두고 소매를 어루만지며 얼이 빠진 제자를 향해 웃으며 물었다.
“저 통과입니까?”
“토, 통과다. 통과! 나이와 이름을 알려다오.”
이 소년은 방금 제자가 묻기도 전에 손을 올려 두었기에, 이제야 이름을 말했다.
소년의 눈웃음 안엔 장난기가 가득했다.
“정상(程相), 2월에 열네 살이 되었습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유가가 깜짝 놀라 복잡한 마음으로 소년을 바라보았다.
그래, 중요한 인물이 또 나타났군.
십여 년 후 수진계에서 정상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다들 벌벌 떨게 된다.
경창파 장로이자 송기연의 오른팔, 그는 ‘웃는 얼굴의 여우’라고 불렸다.
송기연과 동문인 그는 형으로서 기개는 하나도 없이 누구에게든 우호적이었다. 특히 송기연과 성격이 잘 맞아 후에 술친구가 되었다.
그의 별명은 거저 얻은 게 아니었다. 이 선량한 웃음 뒤에 여우같이 교활한 심보가 숨겨져 있어, 후에 선마대전(仙魔大戰)에서 그는 송기연을 위해 마계를 공격하는 데 큰 힘을 보탰다. 이 선계의 군사들 때문에 마족은 적지 않은 고생을 했다.
눈웃음을 치고 있는 열네 살의 소년을 보며 유가는 머리가 삐죽 섰다. 앞으로 이 아이에게 무언가 들키지 않으려면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유가가 떠난다는 생각에 마음이 좋지 않았던 송기연은, 지금 사존이 범상치 않은 표정으로 다른 사람을 보고 있자 낯빛이 어두워졌다. 그리고 마음이 답답했다.
곧바로 유가와 거리를 좁혀 열 살 때 궁기 동굴에서처럼 그에게 안겨들었다. 주변 사람들의 이목은 신경도 쓰지 않고 그의 가슴팍에 파고들었다.
“사존, 기다릴게요.”
유가는 송기연이 자신의 품에서 떨어져 고개도 돌리지 않고 산문으로 들어갈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전처럼 그의 등을 토닥여주지 않았다.
“저기, 잠깐만, 나와 같이 가요.”
정상은 이해가 되질 않는다는 듯 유가를 스쳐보고 송기연에게 친한 척하며 따라갔다.
‘아, 부럽다 부러워. 나도 송기연처럼 생명의 은인을 껴안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두 사람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유가는 꼼짝하지 않다가, 한숨을 내쉬고 산문과 정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
날짜를 따져보니, 왕다국에게 부탁을 한 지도 벌써 보름이 지났다. 지금 왕다국도 그가 왔다는 걸 분명히 알고 있을 텐데, 어디에 숨어서 그를 비웃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스토리를 진행시키기 위해서라고 말했지만, 지금 진짜 송기연을 보내고 나니 유가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편치 않은 마음은 미세하고, 강하지도 않았지만, 거북했다.
그는 빠른 걸음으로 산을 빠져나와 외진 곳으로 향했다.
“왕다국, 좀 전에 신식으로 거리낌 없이 산문을 훑어보던데 경창파 안에 숨어 있던 장로들에게 들킬 것을 겁내지 않은 것이냐? 그때는 본존도 널 지켜주지 못한다.”
유가가 말을 마치자 왕다국이 큰 나무 위에서 뛰어내려 비열하게 웃었다.
“대인 설마 마음이 아프신 겁니까? 꼬마가 떠나기 전에 한탕 즐기지 못하셔서?”
유가가 그를 흘겨보며 차갑게 말했다.
“제발 입에 덕 좀 쌓거라. 만약 다시 한번 입을 놀린다면 본존이 널 지금 경창파로 보내 죽음의 맛을 느끼게 해주겠다.”
“아이참 그러지 마십시오! 제가 잘못했다니깐요? 막청이 지금 저와 선계를 유람할 기대에 가득 차 있는데, 그 흥을 경창파가 깨서는 안 됩니다!”
“아구 쪽에선 뭐래?”
왕다국은 그가 정말 추궁하지 않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좀 전에 유가의 표정은 공포 그 자체였고, 지난 2년 동안 이런 차가운 모습을 본 적이 없어 순간 낯설게 느껴졌다. 놀란 그는 더 장난치지 않고 급히 진지하게 아뢰었다.
“주작족에선 보내 주지 않았습니다. 위세 높은 주작 귀족이 오랜 세월 마존의 탈 것으로 지낸 것이 체면이 서질 않는다고 했습니다. 게다가 신수족은 중립을 유지하는데, 지금 마계의 편을 들다가 사람들의 비난을 받을까 두렵다고 합니다. ”
유가는 기분이 너무 상했다. 지금 이 소식을 듣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를 악물고 말을 했다.
“보아하니 신수 집회는 핑계였고, 진짜 목적은 아구를 데리고 가는 거였구나. 정말 머리를 잘 굴렸군!”
말을 마친 유가는 법결을 상공으로 날려 요수삼림을 향해 빠르게 나아갔다.
“존주, 다짜고짜 튀어가시다니요! 게다가 이렇게 빨리요?”
왕다국이 당황한 얼굴로 쫓아왔다. 역시 싸움하면 그가 빠질 수 없었다.
* * *
정상은 곧 송기연을 따라왔다. 송기연의 어깨에 손을 올리려했으나 송기연이 피했다. 그리고 달라붙는 거머리 같은 녀석을 따돌릴 생각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다만 정상은 자신을 거부할수록 더 신이 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송기연이 빨리 걸을 수록 정상도 더 빨리 뒤따라가며 쉴 새 없이 질문을 쏟아냈다.
“기연 형제, 좀 전에 그 사람은 누구요? 왜 그 사람을 안으려고 했던 겁니까? 응응? 어린 나이에 수련 경지가 이렇게 높은 걸 보니, 어느 가문의 공자님인 거요? 혹시 정가의 가주를 아시오? 이렇게 계속 질문하는데 대답 좀 해주시오!”
송기연은 서둘러 산에 올라 이 거지 같은 시험을 빨리 통과하고 사존을 보러 갈 생각에 조급했다. 한데 곁에 있는 자가 끊임없이 소란을 피우니 귀찮아 죽을 것 같아 주먹을 꽉 쥐고 멈추어 섰다.
송기연이 걸음을 멈추자 정상도 따라 멈추었다. 눈을 깜빡이며 대답을 기다렸다. 하지만 아는지 모르는지 송기연은 잔뜩 화가 나 있었다.
“또다시 질문을 하면, 더는 참지 않을 것이오.”
차가운 눈빛의 송기연이 순간적으로 진기를 방출했다. 우렁차지만 은은하게 들려오는 궁기의 포효 소리가 금단기 수련 경지의 사람보다 조금도 뒤처지지 않았다.
정상이 멈칫했다. 순간 영혼 깊은 곳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이건 혈맥의 위압이었다!
정상의 아름다운 눈빛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그는 변신한 호요(狐妖-여우 요괴)였다. 한데 기연의 진기가 자신의 혈맥에 위압을 일으키다니, 만만치 않은 녀석이었다. 점점 더 흥미를 느낀 정상은 자신의 눈앞에 있는 사람의 출신이 더더욱 궁금해졌다.
마음을 정한 그는 계속 뒤따르며 모든 의혹을 밝히겠다고 다짐하지만, 모진 말을 내뱉은 송기연은 이미 저 앞에 가고 있었다.
급히 쫓아갔지만 주위에 안개가 자욱이 깔리기 시작하더니, 점점 더 짙어졌고 곧 송기연은 모습을 감추었다.
이상해서 결을 모아 안개를 흩트리자, 갑자기 뒤쪽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정상이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누가 몰래 뒤를 밟는 거냐? 당장 나와라!”
안개 속에서 천천히 빠져나온 사람의 얼굴을 본 정상은 그 자리에서 굳어졌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소리를 냈다.
“은인.”
송기연도 같은 상황에 봉착했다. 짙은 안개가 걷히지 않아 눈이 닿는 곳은 모두 새하얬다. 다시 생각해보니 이게 아마 백의 제자가 말한 시험인 것 같았다. 급히 온 정신을 집중하여 주위 환경을 경계하며 손으로 허리춤에 찬 검을 잡았다.
그 순간 안개가 점점 사라지다가 30장(丈) 앞에 경창파의 웅장한 산문이 나타났다. 문 앞에는 각각 대략 수십 장(丈)은 되어보이는 기린 야수 조각상이 꿇어앉아 있었다. 산문 석벽엔 ‘경창검파’ 네 글자가 위엄있게 새겨져 있었다.
하지만 이런 것들로는 송기연의 주의를 끌 수 없었다. 송기연의 시선은 산문 석벽 아래 서 있는 한 사람에게 고정되었다. 흰옷을 입은 사람. 짙은 붉은색의 가면에서 반사되어 나오는 빛은 그리 눈부시지 않았다. 하지만 송기연의 눈은 순식간에 붉어졌다.
검 자루를 쥐고 있던 손을 떼고 달려가 한걸음에 유가의 앞에 다다랐다.
“사존, 진짜 절 기다리셨네요. 다행입니다. 진짜 오시다니…….”
유가가 입꼬리를 올리고 웃으며 송기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사존은 절대 식언을 하지 않는다.”
말을 마치자마자 놀랍게도 유가가 송기연에게 다가가 몸을 숙이고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입술의 따뜻한 촉감에 송기연이 그만 굳고 말았다.
사존께서……?
놀란 것보다 송기연은 이 입맞춤에 위화감이 있는 게 더 이상했다. 그토록 좋아하며 오랫동안 기다린 순간인데…….
“눈을 감아라.”
유가의 차가운 목소리가 송기연의 귓가에 똑똑히 꽂혔다. 그는 마치 저주에 걸린 듯 자연스럽게 눈을 감았다.
송기연이 눈을 감은 순간 주위의 모습이 급변했다. 경창파의 거대한 산문이 순식간에 사라지더니 주위엔 옅은 안개가 가득했다. 게다가 ‘유가’와 송기연이 서 있던 곳엔 덩굴이 길게 자라나 곧 두 사람의 머리 위로 뻗어나갔다. 꼭 두 사람을 그 안에 가두려는 것처럼.
눈 깜짝할 사이에 ‘유가’와 끌어안고 있던 송기연이 급히 눈을 떴다. 허리춤에 검을 뽑아내고 날카로운 검을 휘둘렀다. 덩굴들을 베고 다시 ‘유가’를 바라보자, 그는 이미 안개가 되어 공중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덩굴과 안개가 사라지자 주변의 광경은 점점 밝아왔지만, 송기연의 눈은 더 어두워졌다.
이 모든 게 환상이 아니었다면 좋았을 텐데.
“오? 기연 형제도 빠져나왔군요!”
환상에서 벗어난 정상이 송기연이 저 앞에 서 있는 것을 보고 허둥지둥 달려가서 송기연에게 방금 자신이 겪은 일을 말해주려고 했다. 하지만 당사자는 들을 생각이 없었다.
송기연은 빠르게 산문으로 향했다. 마음속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혹시나 사존이 정말 없을까 봐 두려웠다.
이 환상은 많은 사람을 막았다. 지금 경창파 산문 앞엔 소년들이 대략 20명 남짓 있었다. 그들은 묘한 표정이었지만, 결국 기뻐했다. 송기연의 어두운 표정은 그들 사이에서 확실히 도드라졌다.
사존은 없었다. 역시 날 속이신 거야. 처음부터 산에 오시지도 않았어!
경창파 산문에는 그들에게 길을 안내할 제자들이 서 있었다. 그 제자들은 하늘색이 점점 어두워지는 걸 보고 여기에 도착한 제자들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경창파 시험에 통과한 것을 축하한다. 이제부터 너희는 우리 경창파의 제27대 제자다. 지금 우리와 안으로 이동한 후 숙소를 분배하겠다. 스승은 내일 결정된다.”
“네!”
모두 일제히 대답했다.
송기연만이 얼굴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송기연은 그 자리에서 같은 자세로 미동조차 없었다. 주위 사람들이 모두 떠난 것을 본 정상이 팔꿈치로 그를 툭툭 쳤다.
“기연 형제 갑시다…….”
정상은 몇 년이 흐른 뒤에도 그때 송기연의 표정이 공포 그 자체였고 너무 놀라 소리도 나오지 않을 정도였다고 기억했다.
해질녘 얼굴을 일그러뜨린 소년이 곧 울음이 터질 것 같은 표정으로 웃기 시작했다.
듣기 싫은 웃음소리였다.
“넌 결국 사존을 잃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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