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베일에 싸인 사존
“대인, 송기연이 떨어졌습니다.”
속으로 송기연을 위해 기도하고 있던 그때, 귓가에 들리는 아구 목소리에 바로 현실로 돌아왔다.
“그래……”
아구 이 녀석이 갑자기 무슨 의도로 이 말을 한 걸까. 송기연이 떨어진 건 나도 알고 있었다. 안 그래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었는데, 네놈 말 때문에 더 찔리잖아!
“구하러 가실 거죠? 저번에 그 자식 머리를 쓰다듬으실 때 그 자식을 아끼신다고 느꼈어요.”
난 순간 멈칫했다. 아구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송기연에게 원한이 깊은 줄 알았는데, 지금 내게 구하러 가라니?
아구는 마치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얘기를 했다.
“대인께선 지금 제 태도가 이해가 안 가시겠죠. 그 자식이 좋아서 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대인께서 그 자식을 죽이고 싶지 않으신다는 걸 알아요. 제가 윤회과를 찾아 돌아왔을 때 대인께서 온화해지신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예전 대인도 지금 대인도 다 같은 분이시잖아요. 그러니 너무 참지 마시고 하고 싶으신 대로 하세요. 아구는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는 대인이 좋아요. “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는 대인이 뭔데? 칭찬이야 욕이야? 내가 뒤처진 건가? 아니면 내 이해력 문제인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는 게 언제부터 칭찬이 된 거지?
아구의 말에 기분이 많이 좋아졌지만, 여전히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더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다만 아구 덕분에 마음은 편안해졌다.
“대인, 말 좀 해보세요! 감동하셨죠? 어렵사리 이렇게 뜻깊은 말을 한 보람이 있네요. 대인? 대인~!”
내가 아무런 반응이 없자, 당황했는지 애교 섞인 목소리로 날 부르는 아구가 엄청 귀여웠다. 아무리 생각해도 말주변이 없어 이 감동을 장황하게 표현하지 못할 것 같아 그냥 한 마디로 대답했다.
“고마워 아구.”
“휴, 드디어 대답해 주셨네요. 놀랐잖아요. 제가 말실수라도 한 줄 알고.”
아구의 표정을 보지는 못했지만,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건 느낄 수 있었다. 내가 화가 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계속 질문했다.
“그러니까 구하러 가시겠다는 거죠? 저들이 교전을 벌이는 사이, 저희는 구하러 가는 거예요?”
주위를 둘러보자 나 혼자만 혼전에 뛰어들지 않고 있었다. 평온한 이곳과는 완전 정반대의 상황이 펼쳐지고 있어서, 완전히 다른 세상 같았다. 내가 저 안으로 뛰어들면 한쪽이 우세해지니 모든 선계 인사들도 날 건드리려고 하지 않았다. 유일하게 날 노리는 완십주는 고금성이 철저하게 막고 있었다.
아, 고수의 외로움이란.
날 공격하진 않고 동향을 관찰만 하는데, 반응할 새도 없이 내 손에 베여 죽는 그런 재수 없는 놈이 되고 싶진 않은 모양이었다.
“아구, 저렇게 많은 눈이 주시하고 있으니, 우선 저자들을 본존이 다 처리하고 난 뒤 구하러 가자.”
“대인께서 직접 나서신다고요? 아구가 도와줄까요?”
“네 꼴을 보고 본존이 널 어찌 말리겠느냐? 그래, 그러자꾸나.”
내 허락을 받은 아구가 크게 소리치자 그 진동에 맞은편 요수(妖獸)의 탈 것들과 불 날개 달린 쌍두사자가 덜덜 떨면서 더 멀리 날아갔다.
아구의 등에서 뛰어내린 나는 멋대로 고금성과 완십주의 결투에 뛰어들었다. 장풍 하나를 날려 완십주의 장검을 공격했다.
제일 좋은 건 저자가 쓰러진 뒤 잠시 동안 깨어나지 못해서 다른 사람이 들쳐업고 가는 거였다. 경창파에 들어가 장로까지 오른 자라 실력이 만만치 않을 게 뻔했다. 가만히 고금성에게 맡겨 둔다면, 어떻게 해도 저자를 꺾을 수는 없었다.
손동작에 속도를 더하며 유가의 전투 수법을 떠올렸다. 유가의 천성적인 마체도 버그, 먼치킨이지만 그가 수련한 공법은 더욱 먼치킨이었다. 손에 흐르는 진기는 실로 난폭했고, 엄청난 부식성(腐蝕性)이 있었다. 내가 전력을 다해 공법을 재촉하자 완십주 수중의 병기(兵器)들이 매서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그 병기가 내는 소리에 귀가 얼얼할 지경이었다.
고금성이 내 의도를 이해했는지 장곤(長棍-긴 막대기 모양의 병기)을 점점 더 세차게 휘둘렀다. 우리 두 사람이 한 명을 공격하는 장면이 꼭 데자뷔처럼……. 보고 있자니 정말 치사해 보였다. 하지만 원래 무자비했던 유가가 이런 일을 하는 것도 별로 이상할 게 없었다.
“유가, 이 나쁜 자식아!”
멀리 있던 정원(程遠)이 나에게 욕을 퍼붓기 시작했다. 두 손으로 맞은 편에 있는 자를 상대하느라, 나까지 상대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맞다. 내가 바로 나쁜 자식이지.”
반박하기 귀찮아서 대충 인정했다. 어쨌든 난 지금 그렇게 말할 만한 실력이 있었다.
저쪽에 정원과 막상의 화를 돋운 나는, 앞에 서 있는 왜소한 완십주를 바라봤다. 적어도 저자가 조급하고 두려운 티를 낼 거로 생각했는데, 지원병의 도움조차 기다리고 있지 않았다. 완십주는 전혀 두려워하지 않은 채 당당하게 말했다.
“제 발로 찾아와서 내 면전에서 아이를 죽이다니. 이 원한은 똑똑히 기억하마. 오늘 나 완십주가 죽지 않는다면 후에 반드시 너를 죽여주마!”
“……”
님아, 님 지능 뭔 일이래요? 솔직히 진짜 유가가 여기 있었는데, 저 말을 듣고도 널 죽이지 않잖아? 그게 더 이상해. 한마디 한마디가 날 죽이겠다는 말인데 내가 널 살려둬야겠니?
그래, 널 살려 둬야지. 운 좋게도 네가 송기연의 두 번째 사존이니까. 널 죽이면 누가 송기연을 가르칠 것이며, 어떻게 아이가 경창파에 들어갈 수 있겠어?
모든 건 송기연을 위한 거였다.
이렇게 생각을 하며 결심을 하고 한 손으로 완십주의 검을 부러뜨렸다. 다른 손으로는 그의 가슴을 단단히 내려찍고 힘을 절반 정도 불어 넣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완십주가 날라갔다.
꼭 가을바람에 휘날리는 낙엽처럼 너무 가볍게 나가떨어졌다. 입에서 뿜은 붉은 피로 피칠갑을 하고서, 그 모습이 너무 참담했다.
젠장! 나 뭐한 거지?
온몸이 얼어붙었다. 완십주가 이렇게 약할 줄 몰랐다.
옆에서 내 모든 행동을 바라보던 고금성이 흥분하며 다시금 한대 휘두르려고 했다. 눈치 빠르게 고금성의 의도를 파악한 나는 급하게 손을 내밀어 그의 장곤을 막았다. 그리고 고개를 내저으며 오랫동안 생각해 둔 대사를 쳤다.
“금성, 우선 그를 보내줘라. 이번엔 위력을 보여주려는 것뿐이지, 아직 선계와 전투를 벌일 때가 아니다.”
내가 막아서자 고금성도 물러섰고, 정원은 완십주를 끌고 반대편으로 돌아갔다.
정원이 백옥 약병에서 빠르게 약을 꺼내 완십주에게 한 알 먹였다. 멀리서 보면 왜소한 완십주의 창백한 얼굴과 정원의 어두운 얼굴이 확실하게 대비되었다. 정원이 소리쳤다.
“어찌 이리 남을 업신여기는 것인가. 유가!”
완십주의 참상에 조금 뜨끔했지만, 호흡을 보니 조금 쉬면 금방 회복할 게 뻔해 당황하지는 않았다. 다만 지금 정원의 말을 듣고, 갑자기 흥미로워졌다.
저 자식 바보 아냐? 엎치락뒤치락하며 욕도 못 내뱉으면서 이렇게 파생적인 말만 해대는 꼴이라니.
나는 거리낌 없이 웃으며 대답했다.
“정원 가주, 당신 말이 맞다. 본존은 사람을 괴롭히길 즐기지. 이렇게 남의 일에 발 벗고 나서주는 ‘마음씨 좋은 사람’을 괴롭히는 걸 좋아한다.”
난 계속 차가운 얼굴에 냉소적인 말투로 다른 화제를 꺼냈다.
“정원, 너의 사람을 데리고 당장 본존의 지역에서 꺼져라. 본존은 송가를 멸했고, 정가도 얼마든지 멸할 수 있다는 걸 잊지 말라. 오늘 또다시 말썽을 부린다면, 그 뒷감당을 해야 할 것이다.”
허세를 부리듯 옷소매를 만지작거리며 어느새 싸움을 멈추고 바라보고 있는 관중들을 향해 계속 말했다.
“너희에게 딱 일각(一刻)을 주겠다. 본존 눈앞에서 사라져라. 남아 있는 사람들은 본존이 오늘 천하(河)의 요괴에게 미끼로 전부 넘겨줄 테니.”
뒤 문장을 이죽거리며 썩은 미소로 말해 주자 상황은 성공적으로 제압되었다.
사람들은 갈피를 못 잡고 두리번거리다가 숙덕거렸고, 이윽고 곧 그 많은 문파들이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내 말은 정원의 마음속 원한의 뿌리를 건드렸는지 정원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게 변했다. 잘생긴 얼굴도 소용없었다.
일각은 15분이다. 사실 나도 이렇게 있어 보이게 말했지만, 시간은 대충 어림잡을 뿐이었다. 누가 15분이 언제인지 정확히 알고 있겠어? 시계도 없는데! 내 쪽 구역의 장로(長老)들은 다들 대단한 기세로 턱을 치켜들며 선계에 대한 도발과 멸시를 표현하고 싶어 했다.
잠깐의 침묵이 지나고 완십주는 아직 깨어나지 않았지만, 다시 안정을 되찾은 얼굴의 정원이 입술 사이로 단 네 글자를 뱉었다.
“우린 간다.”
말을 마치고 이렇게 가버리는 게 너무 부끄러운 듯 몸을 돌려 나에게 한마디 더 했다.
“오늘의 설욕은 반드시 기억해두겠다.”
네가 기억을 하든 말든 우리가 앞으로 또 만날까? 그리고 널 다시 상대하겠니?
앞장서던 완십주도 없고 이미 마음이 동요된 사람들이 설상가상 정원마저 물러간다고 하자, 다들 거기에 계속 있을 명분이 사라졌다. 다들 여기는 기껏해야 체면 때문에 온 거였다. 송가가 멸문을 당한 게 선계에선 다른 의미로 체면을 깎이는 일이었지만, 여기에서 목숨을 걸고 나와 겨룰 정도의 의미가 있는 건 아니었다.
목숨은 체면보다 더욱 중요하다.
15분이 지났는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맞은 편 사람들이 모두 흩어졌다.
아구가 자신의 등에 타라는 듯 내 곁으로 다가오자 난 주위를 한번 둘러보았다. 강귀와 바보 같은 눈웃음을 짓고 있는 왕다국을 바라보며 말했다.
“역주들은 본존이 저들을 놓아준 게 옳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잘못했다고 생각하는가?”
“존주께서 그리하신 거면 다 뜻이 있으시다고 생각됩니다.”
내 말에 처음으로 대답한 사람은 놀랍게도 왕다국이 아니라 종일 말도, 인상도 없던 자였다. 너무 평범하게 생겨서 무리에 섞여 있으면 절대 눈에 띄지 않을 얼굴. 표정도 담담했다. 사실 저자가 말을 하지 않았다면 난 역주인지도 몰랐을 터다.
그는 이 화려한 진영 속에서 파도 무늬의 두루마기를 걸친 채 흰 갈매기를 타고 있었다. 한참을 생각한 끝에 그자가 환해역(幻海域)의 역주 요자(姚孜)라는 게 떠올랐다.
이 역주가 등장하는 부분은 몇 문장에 불과했다. 내가 양콩팥요리-요자를 좋아해서 지은 이름이다. 발음이 좀 이상하긴 하지만, 꽤 고상해 보여서 괜찮다고 생각했다. 등장하는 부분이 적다는 건 내가 저자에 대해 잘 모른다는 뜻이다. 근데 지금 내 말에 왜 충성스럽게 대답했을까?
저자가 말을 하자 주위 사람들도 일제히 입을 열고 나에게 찬성표를 날렸다. 그리고 내 수법들이 영명했다고 칭찬을 쏟아냈다. 저자의 두 눈을 바라봤다. 또 무슨 얘기를 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아부를 멈추고는 무리 속으로 섞여 들어가 입을 다물었다.
내가 오버했구나.
대충 말에 장단을 맞춘 뒤, 강귀와 왕다국에게 마궁에서 머물고 가라는 뜻을 내비쳤다. 눈치 빠른 왕다국은 역시나 자신도 내 곁에서 지내고 싶다고 표현하며 옹졸한 웃음을 짓는데, 꼴 보기 싫었다.
하지만 강귀는 좀 별나 보였다. 완전 산송장 같은 모습이나 눈빛엔 살짝 생기가 돌았고 내 요구에 딱히 이의를 제기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과분한 대우에 놀란 표정이었다.
속으로 무슨 꿍꿍이가 있다면 이렇게 담담하지 않겠지만, 지금은 그래 보였다. 겉모습만 보면 ‘대박, 존주께서 이렇게나 나를 생각하셨다니!’ 하는 표정이었다. 나머지 역주들은 모두 돌려보내고 나중에 왕다국에게 저 자식은 어떤 사람이냐고 물을 생각이었다.
긴 시간이 흐른 듯했으나, 사실 1시간이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발생한 일이고 송기연이 떨어진 뒤로 얼마 지나지 않았다.
잠깐만. 얼마 지나지 않았다?
뭔 헛소리야! 평범한 사람은 물에 빠지고 4분에서 6분이면 호흡이 멈추는데!
만약 제때 인공호흡을 하지 않으면 그대로 죽게 된다고!
난 고금성에게 강귀와 왕다국을 모시라고 한 뒤 아구의 등에 앉아 거드름을 피우는 척하며 천하 변계를 돌았다. 실상은 다급히 기억 속 베일에 싸인 사존이 송기연을 구한 지점으로 향했다.
속으로 ‘여긴 수진계다. 여긴 수진계야. 여긴 수진계다…….’ 라고 중얼대며 눈으로는 아래쪽을 샅샅이 훑었다. 곧 천하(天下)와 숲 사이 풀숲에 엎드려 있는 송기연이 보였다.
《선마겁》의 스토리는 송기연에게 먼치킨을 넉넉하게 주었다. 천하로 떨어질 때도 각종 행운으로 살아났다. 깊은 물에 거센 물살도 그를 덮치지 못했고, 선심을 써 그를 이렇게 비밀스러운 강기슭으로 올려 보내기까지 했다.
생각해 보니 작품 속에서 송기연의 사존이 그를 발견한 부분을 생략했다. 송기연이 천하에 떨어지고 나서 바로 나온 스토리는, 송기연이 부상을 회복한 후 자신의 생명이 이렇게 질기다는 걸 알아채는 부분이었다. 지금은 베일에 싸인 사존이 곧 여기로 와서 송기연을 데려가는 것만 남았다.
우선 송기연의 상황을 보러 가기로 했다. 그런 다음 몰래 숨어 기다릴 예정이었다. 만약 운이 좋다면 몰래 그 사존에게 윤회과도 넘길 수도 있었다.
내 마음의 무거운 짐을 없앨 수 있다면, 난 할 수 있는 건 다 해볼 생각이다. 만약 이 세계에 자신만의 운행 법칙이 있다면, 난 불운해지지 않기 위해, 그걸 깨뜨리려 했다.
“아구, 저 아이와 조금 떨어진 곳에 내려 주어라, 조용히 움직일수록 좋다.”
“알겠어요.”
내 착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아구가 한 말이 꼭 콧방귀를 끼고 있는 것 같았다. 아구 머리의 털을 쓰다듬으며 달래 주었다.
우리는 송기연과 약 60장(丈) 떨어진 곳에 멈추었고, 작아진 아구는 내 어깨에 올라섰다. 원래 그냥 이렇게 걸어가려고 했는데, 갑자기 문제 하나가 떠올랐다. 송기연 이 아이는 눈은 멀었지만, 멀쩡한 코와 귀가 있었다. 각종 감각이 더 예민해져서 내가 성급하게 다가갔다가 괜히 불필요한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었다.
내가 쓴 법술에 따라 주변 공기를 살짝 바꿔 아구에게 소리를 내지 말라고 눈치를 준 뒤, 조심스럽게 아이가 엎드려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송기연과 불과 20척(尺) 정도를 남겨두고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움직였다.
아이가 움직이잖아. 대박! 어떻게??
저렇게 높은 곳에서 떨어진 뒤 물속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있었는지도 모르겠는데, 어떻게 아직까지 숨결이 붙어있는 거지?
아무래도 엎드려 흙이 입으로 들어오는 게 불편했는지 송기연이 힘겹게 몸을 뒤척였다. 아이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기침을 몇 번 하더니 눈을 떴다. 그러더니 재빠르게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파도를 타고 물가로 떠밀려 온 아이가 지금 몸을 뒤집어 내 쪽을 마주 보고 있었다. 순간 독사에 쫓겨 도망갈 곳이 없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강가에 누워있는 온몸이 젖은 소년, 검은 머리카락이 뒤덮은 상처 가득한 얼굴, 사실 엄청 애처로운 모습이었는데 갑자기 분위기가 날카롭게 바뀌고 말투도 차가웠다.
“누구냐?”
물음은 간단명료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저 아이가 내가 유가라는 걸 못 알아채서 다행이지, 알았다면 오랫동안 전개된 스토리가 모두 물거품이 될 뻔했다. 난 목을 가다듬고 몸을 숙여 살며시 그의 이마를 어루만졌다. 한숨을 쉬고 억지로 목소리를 바꿔 말했다.
“지나가는 길에 가엾은 아이를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는 행인이다.”
내가 이 말을 하자마자, 어깨 위 아구가 하마터면 웃음소리를 낼 뻔했다. 내 어깨에 꼿꼿이 서 있지만, 꼭 숨이 넘어갈 것 같은 모습이었다. 나는 태연하게 이 새를 가볍게 무시하고 몸속 부드러운 진기를 천천히 송기연의 이마를 통해 전해주었다. 치료 효과는 없겠지만, 물에 젖은 그의 몸을 데워줄 순 있었다.
뜻밖에 송기연은 발버둥 치지 않고 묵묵히 모르는 사람의 도움을 받아들였다. 물에 잠겨 붉어진 눈은 아무래도 시린 모양인지 내가 진기를 보내고 있는데도 무방비하게 감고 있었다. 아무래도 안심한 것 같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그의 꽁꽁 얼어붙었던 이마가 따뜻해졌다. 임무를 마치고 손을 거두려는 그때 바닥에 누워있던 사람이 갑자기 내뱉은 세 글자에 난 그만 그대로 굳어지고 말았다.
엽망지(葉妄之).
아이가 엽망지라고 불렀다.
송기연의 말에 순간적으로 마음이 철렁했다. 엽망지가 누군지 어찌 모를 수가 있을까. 계속 베일에 싸인 사존, 베일에 싸인 사존이라고 부르는 게 익숙해져서 이름이 잠시 낯설었다.
엽망지는 송기연의 스승, 즉 사존(師尊)으로 사람이 겸손해서 흔적을 남기지 않아 이름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그저 송기연의 인생이 나락으로 떨어졌을 때 그의 곁에 묵묵히 있어 주던 ‘좋은 사람’이었다.
성격이 차갑고 옳고 그름이 확실해서 처음 송기연을 구할 때도 누군가의 부탁을 거절하기 어려워 구한 것이었다. 막 송기연을 거두었을 때는 이 아이가 적지 않은 골칫거리라고 여겼다. 사람은 감정의 동물이라 시간이 흐르면서 엽망지와 송기연의 감정도 점점 깊어졌고, 후에 송기연을 경창파로 보낸 뒤 오랫동안 적적해했다.
결론적으로 작품 속에서 엽망지는 신분은 불분명하고 태도도 불확실했고 감정은 드러내지 않는 종잡을 수 없는 인물이었다. 내가 만든 건 엽망지와 송기연의 만남뿐이었고 그 후에 분량은 극히 적었다.
송기연은 큰 원한을 품은 채 엽망지와 오랜 시간을 함께 지내면서, 가문이 멸한 뒤 유일하게 자신에게 잘해준 그를 의지하고 신뢰했다. 하지만 나중에 엽망지는 그와 오랜 세월 지내면서도 마음과 다르게 차갑게 대하는 버릇을 고치지 못했다.
예를 들어 엽망지가 송기연의 몸이 괜찮은지 묻고 싶다면? 차가운 얼굴로 한마디 할 뿐이었다.
“회복은 어떠한가?“
- 얼굴이 안 좋구나, 약을 제때 잘 챙겨 먹은 것이냐? 영과를 다시 구해다 주어야 할까?
송기연은 대답했다.
“많이 좋아졌어요. 사존, 감사합니다.”
- 사존께서 엄청 무뚝뚝하시지만, 이 말은 분명 날 걱정하신 거야!
송기연이 에둘러 엽망지에게 여러 번 이름을 물었지만, 엽망지는 말하지 않았었다. 이유는 나도 모른다. 이렇게 설정을 하는 게 좀 더 신비감이 있을 것 같았다. 어쨌든 모든 인물의 출신을 쓰다 보면 너무 많은 뇌세포를 쓸 수밖에 없으니까.
두 사람은 이렇게 대사로 암시만 할 뿐 직접 말한 적은 없었다. 송기연이 경창파 입문 시험을 보느라 엽망지와 이별할 때가 되어서야 참지 못하고 사존의 이름을 직접 물어보았다. 그때서야 엽망지도 잠시 입을 다물다 속으로라도 기억해 주길 바라며 이름을 말해 주었다.
두 사람이 함께 지낸 지 1년 만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송기연이 사존이 아닌 엽망지의 이름을 부른 순간이었다.
그럼 지금의 송기연은 엽망지의 이름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무슨 이유로, 어떤 경로로 엽망지의 이름을 알게 된 걸까? 설마 이 녀석도 환생한 거야?
젠장! 아니야! 난 급히 이 소름 끼치는 상상을 집어치우고 이 성능 나쁜 머리를 굴려 며칠 전 만났던 송기연을 떠올렸다. 그의 태도나 행동 모두 전생에서 봤던 송기연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그럼 분명히 환생은 아닌데…….
이 세계에는 분명히 내가 묘사한 것과 다른 게 있을 거로 추측했다. 큰 틀은 내가 잡아 주었지만, 그 안을 채우는 건 이 세계 스스로가 제어했다. 설마 송기연의 돌아가신 아버지가 알려준 걸까?
“콜록!“
굉장히 연약한 아이의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두 눈을 꽉 감은 채 붉게 달아오른 얼굴, 잔뜩 찌푸린 미간으로 고통에 시달리는 얼굴이 보였다. 아이의 이마를 손으로 짚으니, 몸이 이미 정상체온을 벗어나 뜨거워 손을 대기 힘들 정도였다.
“아이야? 얘, 아이야?”
가볍게 아이를 흔들며 여러 번 불렀지만, 아이는 눈을 뜨지 못했고 살짝 벌어진 입에선 열기만 새어 나왔다. 이따금 기침하며 엽망지 세 글자만 반복할 뿐 달리 말하지 않았다.
“대인, 안 구하실 거예요?”
아구도 지금 자신의 목소리가 기절한 사람에게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내 어깨에서 내려와 송기연 옆으로 내려섰다. 날개로 아이의 체온을 재고 살짝 의아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았다.
아구가 뭘 의아해하는지 알고 있었다. 급하게 송기연을 찾던 내가 찾은 지금은 구하지 않고 이렇게 멀뚱히 앉아만 있으니, 이게 뭐지 싶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 엽망지가 안 왔는데 괜히 내가 데리고 갔다가 스토리가 엉망이라도 되면 어떡해?
“진짜 이 자식 생명 끈질기네요, 천하(天河)에 빠지고도 아직까지 숨이 붙어있다니.”
아구는 그럴싸하게 송기연 주변을 두 바퀴 돌더니 물었다.
“근데 대인, 지금 이 자식을 구하지 않으면 오늘 밤은 못 넘길 거 같은데요. 이 열기면 뭐든 구워 먹을 수 있는데, 더 뜨거워지면 구하러 와도 바보가 될 거예요.”
아구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내 마음을 후벼 팠다. 지금 송기연에게 시간은 생명과도 같았다. 지체했다가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예상할 수 없었다.
천하 변계엔 사람도, 보는 눈도 많아서 여기서는 떳떳하게 치료해줄 수 없었다. 지금은 그를 데리고 다른 곳에 숨어 천천히 치료해야 했다. 이건 당연히 엽망지가 할 일이지 내 일이 아니었다. 난 그저 숨어서 아구와 지켜보며 즐길 생각이었지만, 지금 아이는 내 발 아래 누워있고, 목숨은 하늘의 소관이라 해도, 이렇게 마음 약한 성격인 내가 또다시 죽음을 보고 구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반 시진만 더 기다려보고 그를 데려가자.”
이를 악물고 조금만 더 기다려 보기로 했다. 지금 송기연의 몸 상태로는 반 시진 안에 누군가 구하러 오지 않으면 분명히 사달이 났다.
얼떨떨한 표정의 아구가 나를 따라 숨은 뒤 숨을 죽이고 조용히 기다렸다.
난 저 멀리 송기연을 바라보며 엽망지가 빨리 와서 나 대신 이 아이를 데려가 달라고 끊임없이 기도했다.
반 시진은 1시간이다. 난 굵직한 나무줄기에 기대 두 다리를 평평하게 나뭇가지 위에 뻗은 뒤 빽빽한 나뭇잎 사이로 몸을 숨긴 채 고개를 숙여 이따금 송기연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시력이 좋아서 이렇게 내려다보아도 송기연의 찡그린 미간과 붉은 두 뺨이 똑똑히 보였다.
내 바로 옆 가지에 앉은 아구는 나와 아래의 아이를 번갈아 바라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대인, 대체 왜 이러고 계시는 거예요? 저 아이를 데려가려던 거 아니었어요? 얼마나 큰일이길래 이렇게 죽상을 하시고 한참을 기다리고 계신 거예요? 대인의 이런 표정 본 게 간만이라 적응이 안 돼요.”
아구의 말에 곧바로 얼굴을 만져보았지만, 내 표정을 볼 수는 없었다. 이걸 인식한 순간부터 이유 없이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착각인지 모르겠지만, 송기연의 얼굴은 좀 더 붉어졌고 뿜어내는 열기가 마치 공기를 타고 나에게 전해지는 듯했다. 그러자 내 예민한 심장이 습관적으로 또 뛰기 시작했다.
난 내면이 예민하고 여린 편이었다. 대학에 가기 전엔 사교적인 편이라고 생각했으나, 대학생이 된 후 집돌이가 되었고 매일 종일 게임을 하고 글을 쓰며 자신의 허구세계에 푹 빠져 헤어나오지 못했다. 또한 심장병 때문에 각종 운동도 거의 할 수가 없었고 유일하게 하는 사회생활은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는 거였다.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아 한가할 때는 항상 사색에 잠겨 있었다. 게임과 글을 쓰는 것 말고도 자신의 암울한 미래나, 앞으로 남은 짧은 인생에 또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같은 것들을 사색했다. 길을 걸을 때도 사람들과 일을 보면서 늘 감상적이었다.
성격이 강해 약한 면을 좀처럼 보이지 않던 강인한 우리 엄마는 의사 선생님께 내가 심장병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대성통곡을 하셨다. 평소에 신을 믿지 않던 엄마가 내 몸이 망가진 후부터 무엇에 씐 듯 매일 부처님께 불공을 드렸다.
엄마는 나의 귓가에 대고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집에 너무 박혀 있지 말라고 잔소리를 자주 했다. 오랫동안 누구를 보든 도와주라는 가르침을 받고, 정해진 시간에 엄마에게 보고를 했다. 엄마를 웃게 해주고 싶었다.
생각이 많았는지 코끝이 시큰해지더니 곧 눈시울까지 붉어졌다. 그 세계에 나는 지금 어떤 상황인지 알 수 없지만, 무사히 돌아가고 싶었다. 마음 약한 엄마가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슬픔을 느끼게 하고 싶진 않았다.
이 세계는 내 가정을 박살 냈고, 난 손에 든 펜으로 송기연의 가정을 박살 냈다. 어쨌든 모두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 없었다.
꽤 예민해진 심정은 도통 진정이 되질 않았다. 숲속은 고요했고 엽망지처럼 보이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심지어 주위 30장(丈) 반경 안에는 어떤 움직임도 느껴지지 않았다.
“콜록콜록……!”
또다시 아이의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이를 악물고 나뭇가지에서 뛰어내려 송기연 앞으로 갔다. 조심스럽게, 하지만 단단히 송기연을 품에 안고 내 어깨에 앉아 나를 보며 웃고 있는 아구에게 물었다.
“시간이 됐다. 이 목숨은 내가 책임진다.”
지금 내 심정을 뭐라고 표현할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양심의 가책과 약해진 마음이 이 아이를 데리고 가는 걸지도 몰랐다. 하지만, 내가 확신하는 건 내가 아이를 데려간다고 해도 엽망지가 해주던 모든 걸 다 해 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 아이가 나중에 유가를 미워하고 죽이고 싶어 한다고 해도, 난 책임지고 영원히 정체를 밝히지 않을 결심이 있었다.
유가를 죽이는 게 이 아이의 유일한 삶의 목적일 테니까. 만약 자신의 원수가 자신에게 은인으로서 잘해 주었다는 것을 알면 미치지 않는 게 이상할 테니까.
* * *
유가의 저택은 한 군데만 있는 게 아니었다. 천성적인 마체의 재벌 2세는 수많은 부동산을 소유했다. 다시 말하면 그렇게 많은 방이 없었다면 어떻게 그렇게 많은 미녀 미남들을 남몰래 키울 수 있었겠나.
아구는 마궁 근처에 있는 비밀 정원으로 날 데리고 갔다. 전에 유가가 제일 아끼는 남자를 키우던 곳이었는데, 나중에 들으니 유가가 질려해서 고금성이 처리했다고 했다.
아구의 등에 앉아, 수다스럽게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 녀석의 목소리를 들으며 송기연을 내 무릎에 눕혔다. 손에 낀 비취색 반지에서 꺼낸 거추장스럽지 않은 긴 외투로 송기연을 덮어 주었다. 길게 숨을 내쉬고 다시 한번 내 강렬한 진기를 조금씩 나누어 부드럽고 천천히 이 어린 몸에 전해 주었다. 그러면서도 혹시나 실수로 이 약한 경맥을 끊을까 봐 몹시 두려웠다.
다행히 일각도 안 되어 저택에 도착했다. 의외로 이 저택은 굉장히 고급스러웠고 대나무 숲 안에 있어 엄청 한적했다. 늦가을 바람에 흩날린 대나무 잎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작은 길 하나가 저택의 문까지 이어졌다.
여기가 마궁보다 좋은데 어떡하지?
아구가 부드럽게 착지하자 난 송기연을 안은 채 직접 문을 열어 안으로 들어갔다. 열쇠는 필요없었다. 유가의 집에 열쇠가 필요하겠는가. 감히 누가 유가의 집에 들이닥칠 생각을 하겠어.
말은 이렇게 했지만, 사실 나는 문을 열 때 바로 알아차렸다. 이 문엔 표식이 걸려있었다. 되도록 빠르게 그 표식을 제거했으나 고금성은 이미 여기에 사람이 왔다는 걸 눈치챌 수도 있었다.
고금성은 유가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었고 내 행동반경도 아마 그의 손바닥 위일 터였다. 고금성은 정말 골치 아픈 녀석이다. 한 시진 전에 고금성은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상관하지도 않고,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은 채, 송기연을 직접 강 속에 던져버렸는데, 난 그게 좀 거슬렸다.
됐다, 그만 생각할래. 어쨌든 이야기 흐름에 필요했던 거니까, 나중에 다시 얘기합시다.
이 정원은 우아한 색상으로 꾸며져 있었고 앞마당엔 응접실, 후원엔 거처가 있었다. 문을 막 열었는데, 먼지도 없고 실내는 깨끗하게 정돈된 상태였다. 탁자가 가지런하게 놓여있고, 침상 위에는 제법 잘 어울리는 이불이 놓여 있었다.
송기연을 침상에 내려놓고 아구에겐 문을 지키라고 내보낸 후, 나무 의자를 끌고 바짝 다가가 송기연 옆에 앉았다. 반지에서 윤회과를 찾아서 꺼내고 손바닥 위에 올려서바라보는데, 순간 심각한 문제를 깨달았다.
어떻게 먹여주지? 지금 송기연 몸의 수용 능력으로 이렇게 큰 열매를 먹어도 경맥이 버틸 수 있을까?
“유가…….”
불현듯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와 고개를 숙이자 초점 없는 두 눈과 마주쳤다. 텅빈 두 눈을 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라 심장이 덜컹했다. 저 자식은 보지도 못하는데, 난 왜 겁먹은 거지?
당황환 나와는 별개로 아이는 정신을 차린 것 같았지만, 멍한 얼굴로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여기로 넘어온 이후로, 이 자식이 웃는 걸 본 적이 없었다. 항상 원한이 깊은 얼굴이거나, 불쌍하고 연약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살짝 입꼬리가 올라가고 기대감 가득한 목소리가 물었다.
“누구십니까?”
나는 책에서 엽망지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그에게 대답했다.
“나는 네 부친의 부탁을 받고 너를 살렸다. 이제부터 사존이라 부르거라.”
“……사존.”
이 말을 듣자마자 난데없이 가슴이 떨려왔다. 분명히 내가 그렇게 부르라고 한 것인데도 조금 당황스러웠다. 왠지 모르겠지만, 사존이라고 부르는 이 목소리가 익숙하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전에 누군가가 날 이렇게 불렀던 거 같은데, 도통 누군지 생각이 나질 않았다.
“사존, 존함을 여쭈어도 될까요?”
내 복잡한 머릿속을 멈춘 건 송기연의 이상한 질문이었다.
원래 마지막에 이름을 묻지 않았었나? 저 꼬맹이가 왜 벌써 물어보는 거지? 스토리대로 가주면 안 되겠니? 굳이 잔머리 굴려야겠냐!
그래도 난 상황에 맞춰 연기를 해 줘야 했다. 지금 송기연의 상황은 예민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막 구조가 되어 아직 의심과 당혹감이 만연할 게 분명했다. 이때 첫 번째로 만난 사람이 자신에게 잘 대해준다면 잠깐 동안 원한에서 벗어날 수도 있을 것이었다.
“……대답, 안 해주셔도 됩니다. 그냥…… 그냥, 묻고 싶었어요.”
송기연의 맥빠진 목소리가 내 귓가에 들려왔다. 이미 묵묵히 고개를 한쪽으로 돌리고 입술을 꽉 깨물고 있는 송기연의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아팠다.
난 마음의 스승이 되겠다는 태도로 어쩔 수 없이 한숨을 내쉬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엽망지다. 이름 없는 하찮은 나그네일 뿐이니 잊어도 좋다.”
내 말소리를 듣고 송기연이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눈이 안 보인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완전히 정확하게 내 방향을 바라보자 살짝 얼떨떨했다. 송기연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가볍게 웃어 보였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송기연이 말을 마치자마자 눈썹을 찌푸리고 식은땀이 얼굴을 타고 떨어졌다. 입을 꾹 다물며 참는 듯하더니 더는 못 버티고 그만 검붉은 피를 왈칵 토해냈다.
난 그때서야 송기연의 상처가 얼마나 깊은지 알아차리고 급히 손을 뻗어 아이의 맥문(脈門)을 틀어막았다. 확실히 경맥이 더 많이 상해있었다. 아이의 체내를 들여다보자 아이가 고공에서 떨어졌을 때 거대한 수압에 오장육부가 엉망으로 일그러진 것 같았다. 뭔가 명치 쪽이 아프고 뱃속이 뒤엉키는 기분이었다.
난 급히 공간 속에서 금색 작은 솥 하나를 꺼냈다. 안에는 구륜염양지(아홉 개의 태양이 뜨는 곳)의 온도와 똑같이 만들어 놨었다. 윤회과를 가지에서 따온 후 열흘 내에 반드시 복용해야 하는데, 그걸 보존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상태가 온전하게 유지됐다. 전에는 아구의 체내 공간 속에 저장하여 약한 열로 보호해도 괜찮았지만, 이 특별한 작은 솥을 찾은 후에는 보온은 물론 윤회과의 영기까지 보존할 수 있어서 늘 몸에 지니고 다녔다.
뚜껑을 열자, 표층에 화염무늬가 감도는 윤회과에서 나오는 영기가 저번보다는 조금 약해져 있었다. 밖에서 문을 지키던 아구가 화가 난 듯 문을 두드리며 안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역시!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대인 진짜 너무하시네요! 제가 어렵게 구해 온 열매를 저 자식에게 먹이시다니! 으아아악! 짜증나!!”
양심에 찔린 나는 아구에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아구는 이렇게 불평, 불만만 하지 큰일을 저지르진 않았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검지와 중지를 모아 날카로운 진기류를 내보냈다. 진기류에 평소 과일을 깎으며 단련한 기술을 합쳐 윤회과를 여러 번 자르자, 윤회과가 아주 미세한 실처럼 나누어졌다. 이걸 다시 작은 솥에 펼쳐 넣었지만 고온에도 증발하지 않는 게 엄청 신기했다.
“송기연 잘 들어라. 난 지금 이 방법으로 널 살릴 것이다. 윤회과의 효과는 매우 격렬하여 아마 많이 고통스러울 것이다. 내가 여기서 널 지킬 테니, 꼭 견뎌내라.”
아이는 미간을 미세하게 움직이며 간신히 입을 벌렸다. 피가 아래로 막 흐르는 와중에 입을 벌린 채 날 보고 웃었다.
“걱정 마세요. 사존, 할 수 있습니다.”
갑자기 이 아이가 꽤 의젓하다는 느낌이 드는 건 왜지? 정말 예뻐죽겠네. 입가에 피가 맺힌 저 끔찍한 모습이 왠지 낯익었다.
마음속에서 떠오르는 잡다한 생각을 억누르며 손으로 송기연의 등을 어루만졌다. 그리고 아이에게 침대 위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두 손을 가볍게 무릎에 올려두라고 명했다.
“입을 벌려라.”
그가 순순히 말을 듣는 것을 보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 부분을 쓸 때 판타지 장르의 상투적인 표현으로 썼었다. 주인공이 윤회과를 먹고 엄청난 고통을 느끼는 부분을 - 짙은 영기가 그의 몸속에서 끊임없이 충돌하자 그의 가냘픔 몸이 버티지 못할 지경이었다 - 이렇게 쓴 거 같은데…….
침을 한번 삼킨 나는 조심스럽게 실처럼 얇아진 윤회과를 꺼내어 조금씩 그의 입에 흘려 넣었다. 대략 열 방울 정도를 넣곤 바로 멈추고 조심스럽게 그의 반응을 살폈다.
얇아진 윤회과가 입에 들어가자마자 아이가 바로 입을 다물었다. 얼굴이 붉어지는 게 아무래도 몸 안이 난리가 난 것 같았다. 아이를 부축하려 고개를 숙이다가 핏줄이 솟은 아이의 두 눈과 마주쳤다. 굳게 다문 입 사이로 간신히 몇 마디 말을 했다.
“걱정 마세요. 저 안 죽습니다.”
어리둥절하다가 귀신에 홀린 듯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내가 어찌 널 죽게 놔두겠느냐?”
아이가 고개를 끄덕이고 정신을 모은 채 두 눈을 감고 등을 곧게 펴고 버티는데, 작은 몸이 마치 무궁한 힘을 가지고 있는 듯 보였다.
그래, 이 아이가 바로 내가 만들어낸 주인공이었다. 강하고 강인하고 절대 굴복하지 않으며 모든 어려움을 헤쳐 나가는 아이. 영원히 등을 곧게 펴고 자신을 버티면 모든 사람의 버팀목이 되는 아이.
고난은 사람을 강인하게 만들었고, 송기연도 반드시 강인해질 것이었다. 10살 이후로 인생에 가족도, 사랑도 없고, 있는 것이라곤 사존과 친구 그리고 그를 사랑하는 여인뿐이었다. 나중에 그가 좋아하는 여인을 유가에게 뺏기고 정말 애통해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사람이 마지막엔 이 세계의 꼭대기에 올라섰다. 그의 자부심과 짓밟을 수 없는 존엄성에 걸맞은 실력도 갖추게 된다. 이런 실력을 갖추려면 뒤에서 어떤 고통을 감내하는지 아무도 모르겠지만, 스토리 창조자인 나만은 알고 있었다.
이 아이와 철장 안에서 본 송기연은 조금 느낌이 달랐다. 아직 어리고 사랑스러운 분위기였지만, 반나절 사이에 성숙해졌다. 빨리 철이 든 모습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이처럼 투정을 부리는 게 더 어울렸다.
철장 안에 갇혀있던 송기연은 가끔 약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는데, 지금의 송기연은 그런 나약함은 없고 더욱 침착했다.
뭘 이렇게 자세히도 봤냐 싶지만, 가만히 있으면서 할 것도 없지 않나.
아이는 처음으로 고난을 겪고 있었다. 난 눈을 부릅뜨고 붉게 상기된 아이의 얼굴에 차오르는 식은땀을 바라보며 마음이 아픈 나머지 아이의 강한 인내심에 탄식했다. 시작부터 지금까지 아이는 비명 한번 지르지 않았고 고요한 방안엔 아이의 거친 숨소리와 내 심장박동 소리만 들렸다.
잠시 후 송기연의 안색이 점점 돌아왔다. 아이에게 다가가서 맥문을 살펴보자, 장기 치료도 잘되고 있었다. 이미 아까 전 그 엉망진창의 상태는 아니었다.
“기연, 의식이 있느냐?”
부르는 소리에 아이가 눈을 떴다. 초점은 없었지만, 전보다 정신이 또렷했다. 아이가 웃으며 말했다.
“사존, 걱정 마세요. 저 깨어 있어요.”
지금 그의 몸 상태와 심리 상태를 보면, 윤회과의 효력을 꽤 많이 수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중에 두고두고 후회하게 만든 말을 내뱉었다.
“그럼 계속하자. 윤회과의 효력이 제일 잘 보존될 때 흡수력도 제일 좋다. 아마도 유가가 끊어 놓은 손발도 대부분 회복할 수 있을 거다.”
본인의 이름을 직접 입으로 말하는 건 꽤 당혹스러웠다. 아이도 유가라는 두 글자를 말할 때 몸이 굳었고, 곧 아무 말 없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가 다시 입을 벌리고, 나는 이번엔 대범하게 25방울이나 집어넣었다. 그리곤 멈췄다. 25방울이 입에 들어가자 아이가 몸을 격렬하게 떨기 시작하더니 손쓸 새도 없이 침대로 고꾸라졌다.
안 돼!
상황이 이렇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역시 너무 조급했다. 아이의 상처를 과소평가했고 반대로 신체 수용 능력은 과대평가해 버렸다.
다가가 그의 손목을 잡자, 몸은 뜨거웠지만 다행히 호흡은 일정했고 신체 기능도 제대로 작동하는 게 돌이킬 수 없는 큰일은 아니었다. 순간 날 식겁하게 했던 모습은 그냥 잠이 든 거였다. 응. 그거였다. 호흡으로 보면 잠든 게 확실했다. 얼마나 깊이 잠들었는지 온몸이 완전히 풀어져 버렸다. 억지로 깨우는 건 그의 몸에 좋지 않았다.
자고 난 뒤 몸이 편안해지면 아이가 약을 흡수하는 데 더욱 도움이 될 테니 잠이 든 것도 아이에겐 기연(機緣)인 셈이었다. 수면중엔 고통도 느끼지 않고 골수 관절의 가려움도 느끼지 않을 테니 훨씬 편안하겠지.
지금은 이 아이가 언제 깨어날지 가늠을 할 수 없어 곤란할 뿐이었다. 다음에 이어질 스토리는 이 아이를 데리고 극한지경(極寒之境)으로 가서 그의 눈을 치료해 줄 반생빙련(伴生冰蓮)을 찾고, 그의 첫 번째 후궁인 야야(若若)라는 이름의 설요(雪妖)를 만나게 하는 거였다.
야야는 톡톡 튀는 성격의 아가씨로, 선량하고 순수했다. 깨끗하고 투명한 마음을 가졌으며, 설요족의 작은 공주라는 칭호를 가졌다.
설요족은 속세와 단절된 채 북방에 빙하 두께가100장(丈)이나 되는 극한지경에 살았다. 서양 판타지 소설의 정령족쯤 되는 존재로 외부 세계 분쟁에 관련없이 스스로 세력을 키웠고, 마족이나 인간의 범위에도 속하지 않는 요수족 외의 다른 종족이었다.
설요족은 모두 반생빙련을 하나씩 가지고 태어났다. 정확하게는 빙련 안에 잉태가 되어 꽃피는 날이 곧 출생일이었다. 출생 후 남은 빙련은 눈을 치료하는데 엄청난 효과가 있었다.
맞다. 이게 바로 이것의 설정이었다. 표면적으로 엽망지가 송기연에게 눈을 치료하는 특효 신약을 주는 것 같지만, 사실 이 기회를 틈타 주인공이 비슷한 또래의 공주 야야와 감정이 생기게 되는 거였다.
“들어와, 아구.”
송기연을 똑바로 눕히고 이불을 덮어 준 뒤, 밖에서 문을 지키고 있는 아구가 생각이나 급히 들어오라고 불렀다. 역시나 아구는 축 처진 얼굴로 콧방귀를 끼며 날 흘겨봤다. 이불을 덮고 편안하게 자는 송기연한테 윤회과가 아까운 눈치였다.
“그 좋은 열매를 저 자식 혼자 다 먹었네요. 더 묻고 싶지는 않지만, 진짜 이해가 안 되는 게, 그렇게 괴롭혀서 저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 왜 이렇게 구해 주려고 하시는 거예요?”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내 꼴을 보곤 아구가 눈을 깜빡이며 말을 이었다.
“됐어요. 저도 안 물을게요. 제가 열매를 찾으러 간 동안 대인께서 또 말할 수 없는 고질병이 도지셨는지 어떻게 알겠어요.”
“……”
저 새 새끼. 독을 품었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아구, 이곳에 암실이 있다는 거 알고 있지?”
송기연이 이곳에 있는 건 안전하지 않았다. 마궁 쪽에 아직 처리하지 못한 일도 수두룩했고, 고금성이 언제 날 찾아올지도 모르니 사람을 숨길 수 있을 만한 곳에 아이를 숨기고 밖에 금제를 한층 더 쳐놔야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어깨에 오른 아구가 한참을 서서 생각하더니 난감한 표정을 짓고 말했다.
“아, 대인 그 켁켁하는 거기 잊으셨어요?”
그가 날 이상하게 바라보는데, 이 세계는 너무 크고, 난 유가의 모든 생활을 속속들이 기억하지 못했다.
“응, 일이 너무 많아 기억이 안 나는구나.”
아구가 내 표정을 보고 내가 진짜 까먹었다고 믿는 눈치였다. 날개를 퍼덕이며 공중으로 날아올라 내게 뒤통수를 보이며 밖으로 날아가는데 말소리가 들렸다,
“대인, 그 아이를 데리고 오세요, 길은 제가 안내할게요.”
난 아구가 왜 갑자기 부끄러운 듯 말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곧 송기연의 작은 몸을 따뜻한 이불로 감싸 들고는 아구를 따라 암실로 향했다.
암실은 후원의 낡은 창고 안에 있었다. 난 아구가 평평한 땅을 왔다갔다하며 몇 번 뛰는 모습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잠시 후 땅에서 진동이 느껴지더니 7척 정도 되어 보이는 터널 입구가 나타났다.
계단을 따라 내려가자 머리 위 땅이 다시 천천히 닫혔다. 양쪽 벽에는 작은 등잔이 걸려 있었고 거기에서 약한 불빛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불길이 약했지만, 길을 비추기엔 충분했다.
아구는 별 말없이 날 데리고 앞으로 걸어갔다. 20장(丈) 정도 걸어가자 계단이 사라지며 내 앞에 나타난 건…….
여, 여여여긴 정말 성인용품점이나 SM마니아들이 감금할 때 쓰는 지하실 아니야?
눈이 닿는 곳은 전부 따뜻한 불빛이 감돌고 있었고, 벽에는 쇠사슬이 걸려있었다. 길이나 색으로 보면 아무래도 사람을 묶는 데 사용하는 것 같았다. 쇠사슬 옆에는 철제 선반이 있었는데 선반 위엔 옥딜도가 사이즈 별로 진열되어 있었다. 투명하고 깨끗한 백옥으로 만든 건데 그것의 용도를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선반 아래엔 무수한 병들이 두 줄로 진열되어 있었고, 백색 사기병 위엔 검은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실심산(失心散-정신을 잃게 만드는 약, 최음제의 일종)’ 세 글자가 순간적으로 눈이 부시게 반짝였다.
미친! 유가 이 변태 자식! SM마니아!
아구가 왜 그런 눈빛으로 날 바라봤는지 알아버렸다. 이건 아구의 잘못이 아니다. 누구든 정상적인 사람(새)이, 이런 곳이 있다는 것을 알면 부끄러워 입도 못 뗄걸? 그리고 아구는 아직 어린아이였고!
위를 보니 선반 위쪽에 고리가 하나 보였다. 고리엔 정교한 모양의 족히 5장(丈)은 되어 보이는 채찍이 걸려 있었다. 이걸 어디에 사용하는지 생각해 볼 필요도 없었다.
아구는 한쪽에 놓인 궤짝 위에 올라 벽을 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품에 안고 있던 송기연을 붉은색 침대에 잘 눕히고 귀신 들린 듯 걸어가서 손으로 궤짝문을 열자……. 아무래도 내가 신세계로 통하는 문을 연 것 같다.
눈앞엔 각종 의상이 펼쳐져 있었다. 대부분 빨간색 아니면 흰색이었고 노출이 많아 입든 안 입든 별 차이 없어 보였다. 고개를 돌려 송기연이 누워있는 빨간 침대를 보며 얇은 흰옷을 입은 미녀가 침대에 누워 내게 매력적인 눈빛을 보내는 모습을 상상했다.
헐, 미치겠네……!
“대인, 저기 대인 무슨 생각 하…….”
이미 궤짝에서 내려온 아구가 내 어깨 위에 다시 서 있었다. 내 시선이 어디로 향했는지 알기라도 한 듯 질문을 다 끝내지도 않고 소리를 쳤다.
“으아아악, 대인 지, 지, 진짜 나빠요!”
야한 생각에서 깨어난 내가 급히 목소리를 깔며 말했다.
“여긴 사람을 숨기기에 딱이군.”
말을 하자마자 뭔가 불길한 예감이 밀려왔다. 깊이 잠이든 송기연을 놔둔 채, 아구를 끌고 방금 내려온 계단을 올라갔다. 다시 평평한 창고에 서선 금제하는 방법을 생각하며 손의 기억에 따라 허공에 대고 이상한 도형을 그렸다. 공기 중에 무언가 응집됐다가 곧바로 다시 사라졌다.
고금성이 열심히 수색하지 않는 한 여기를 발견하지 못한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이걸 끝내고 나니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는데, 곧바로 이 저택 대문 앞에 내가 쳐 놓은 술법을 누군가 건드리는 느낌이 들었다.
“빨리 나가자, 아구.”
역시 내 예상대로 고금성의 속도는 엄청 빨랐다. 아구는 내가 송기연을 여기에 숨긴 일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별말 없이 우린 빠르게 저택 방으로 되돌아갔다.
돌아가는 길에 고금성을 딱 마주쳤다. 그는 자연스럽게 한쪽 무릎을 꿇고 절을 하며 날 올려다보았다. 담담한 목소리가 가을바람과 뒤섞여 정원에 울려 퍼지자 서늘해졌다.
“존주, 여기서 뭐 하십니까? 일전에 그 사내를 생각하신 겁니까? 설마 마궁 안에 막 데려온 막가 공자에게 이미 신물이라도 나신 겁니까? 아직도 죽은 사람을 그리워하시는 겁니까?”
그의 잇따른 질문에 나는 멍해졌다. 자세히 살펴보니 무릎 위에 손은 이미 주먹을 쥐고 있었고 팽팽한 핏줄이 어렴풋이 보였다.
지금 내게 질문을 하는 건가? 그리고 무슨 질문이 이렇게 난잡해. 무슨 뜬구름 잡는 소리만 늘어놓는 거지? 무슨 사내? 죽은 사람을 그리워한다니? 좀 제대로 알려주면 안 될까?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
잠깐 멈칫하다가 차갑게 말했다.
“고금성, 말이 지나치구나?”
유가라면 누군가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하는 걸 절대 두고 볼 리가 없었다. 원작의 캐릭터를 제대로 연기하려고 난 고금성에게 모질게 굴며 스스로 체면을 지켰다. 난 좀 전에 그의 말투와 표정에 기가 눌렸다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고금성이 살짝 얼이 빠진 듯 침묵하다가 뭔가 깨우친 듯 침울하게 말했다.
“소인이 지나쳤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고금성이 또 뭘 하려는 건지 모르겠지만, 고개를 숙인 모습을 보고 다시 무릎을 꿇게 할 생각은 없었다. 사실 크게 잘못한 일도 없었다.
“일어나라. 이리 급히 본존을 찾아오다니, 설마 마궁에 무슨 문제라도 생긴 것이냐?
고금성이 아무 일도 없이 날 찾아올 리가 없었다. 그는 다행히도 공사 구분이 확실했다. 지금 이렇게 급히 여기로 왔다는 건 분명히 무슨 급한 일이 생겼거나 혼자 처리할 수 없는 큰일이 생긴 거였다.
바닥에서 일어난 고금성이 나와 세 걸음 떨어진 거리에서 얼굴을 펴고 내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미간을 찌푸리고 진지한 말투로 말했다.
“존주의 예상이 맞았습니다. 그 강귀, 문제가 있었습니다.”
별안간 마음이 다급해져 급히 물었다.”
“강귀가 왜?”
“급사했습니다. 신식도 깨끗하게 사라져 버렸는데, 원인을 찾지 못했습니다. 아무래도 일이 수상쩍어 급히 존주를 찾아왔습니다.”
죽어? 내가 잘못 들은 거지? 강귀가 죽었다니? 농담하는 거지, 그치?
두 시진 전에 강귀를 봤을 때 약간 기운이 없던 것 말고는 아무 낌새도 느끼지 못했는데? 게다가 천하(河)에서 마궁으로 가라고 했을 때도 잔뜩 기대하는 표정이었지, 곧 죽을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고?
곰곰이 생각해보다가 중요한 문제 하나를 깨달았다. 시골역의 역주인 강귀가 마궁에서 원인도 모르는 채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면, 내가 현장에 있든 없든 마존인 내가 책임을 면하기 어려웠다.
무슨 일이 이렇게 줄줄이 생겨나냐? 쓸데없는 상상에 머리가 아파서 눈을 감고 최대한 편안하게 고금성에게 물었다.
“이 일이 혹여 알려진 것이냐? 너 말고 또 누가 알고 있지?”
이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면 다른 역주들이 알게 될 것이고, 그자들의 의심을 사게 되면 마족에서 내 위치에도 영향을 줄 수밖에 없었다. 지금 내겐 확실히 불리했다.
“제 밑에 두고 있는 수하 몇 명만 알고 있습니다. 그자들도 존주의 무사들이니 절대 함부로 입을 놀리지 않을 겁니다.” 고금성이 날 보며 계속 말했다.
“마존께서 불안하시다면 그자들을 제거하겠습니다.”
이 세계가 실재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내가 어떻게 내키는 대로 살인을 할 수 있겠어? 현대였다면 무조건 감옥행이었다.
단념하고 고금성의 담담한 표정을 바라보자 더 소름이 끼쳤다. 이자는 저 손으로 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인 거야? 이자에겐 사람의 목숨이 정말 아무런 가치가 없는 건가? 죽이라면 죽여?
“죽일 필요는 없다. 대신 입단속을 단단히 해 두어라. 이 일은 본존이 좀 더 조사하겠다. 그리고 만일 혹시라도 알려진다면, 강귀가 최근에 화입마(火入魔)하는 방법을 연마했고, 시골역 주성 상공의 그 검은 구름도 연관되었다고 각 역의 역주에게 말하여 잠시 그들의 입을 막아라.”
“알겠습니다.”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건 고작 이 정도였다. 이 일은 속일 수 있다면 속여야 했다. 사실 속일 수 없다면 거짓말로 얼버무려야 하는데, 일이 이미 벌어졌으니 지금은 이 마존의 자리를 유지할 수 있기만을 바랄 뿐이다. 이 세계에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끌어내려지면 너무 비극이잖아.
고금성은 돌아가지 않고 한참이나 그 자리에서 날 보더니 물었다.
“언제 마궁으로 돌아가실 생각이십니까?”
“…….”
좀 전에 한 말에 암시가 충분하지 않았니? 처리하라고 임무를 맡겼으면 빨리 가지 왜 내가 돌아가야 해? 여기 아래에 이 세계 주인공이 갇혀 있는데 내가 가면 누가 그를 돌보겠어?
“내일 밤.”
속으로 불만이 많았지만, 나는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여기는 아구에게 맡겨야 겠네. 저쪽 강귀의 죽음이 너무 급작스러워서 가만히 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작품 속 세계의 안정은 많은 인물과 사건들로 유지되는 것이었다. 강귀는 조연이었지만, 앞으로 전개에 어느 정도 분량이 있었는데 지금 이렇게 죽는 건 말이 안 됐다.
강귀의 죽음은 분명히 무언가를 암시하고 있었고, 이 세계는 내가 온 이후로 이미 변화하고 있었다.
고금성은 다른 질문은 없이 내 대답을 듣고 알겠다는 표현만 하곤 인사를 하고 가버렸다.
고금성은 유쾌하지 않은 듯 미간을 살짝 찌푸렸고 원래 차갑던 얼굴은 더 굳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대인, 강귀가 마궁에서 죽다니 정말 불길하네요. 처음부터 잡지 마시고 그냥 돌려보내셨어야죠.”
아구가 소곤소곤 불평을 하며 걱정해 주었다.
“본존이 일이 생길 걸 알았다면 붙잡지 않았겠지. 이미 일은 벌어졌으니, 상세히 조사한 뒤 다시 얘기하자.”
다시 창고로 향하며 말했다.
“하나, 우선 송기연이 잘 적응을 해야 본존이 마음이 놓이겠구나.”
다시 암실로 왔을 때, 송기연은 편안하게 잠을 자고 있었다. 단지 그가 누워있는 침대가 좀 거슬릴 뿐이었다. 붉은색이 어쩐지 어색했다.
이 SM도구가 가득한 방에 정상적인 의자를 가지고 와서 침대 곁에 앉아 처음으로 편안한 마음으로 아이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아이는 내 손으로 만든 주인공이다. 전에 나에게 무슨 짓을 했든 나중에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 상관없이, 지금만 보면 가엾은 아이이자 운명에 농락당한 아이였다.
손을 뻗어 아이의 얼굴을 어루만지는데 너무 거칠었다. 긴 눈꼬리에 짙은 속눈썹에 눈 아래엔 음영이 졌다. 콧날은 오뚝했고 입술은 얇은 게 보기 좋은 인물이었다. 머릿속에 저도 모르게 전생의 확대판 송기연의 모습이 떠올라 침을 꿀꺽 삼켰다. 정말 잘생긴 얼굴에 악랄함을 숨기고 있었다.
“유가…….”
“!!”
편안하게 자고 있던 아이의 입에서 갑자기 내 이름이 튀어나오자 깜짝 놀랐다.
“아휴, 대인, 이 자식은 어떻게 자면서도 대인의 성함을 부를까요?”
아무래도 송기연이 꿈속에서 내 욕을 했나 보다. 가슴이 두근대서 아구의 농담에 반응할 겨를도 없었다.
“……유가. ……죽기엔…… 너무……, 이르잖아…….”
잠꼬대는 정확하게 안 들리거나 무슨 소리인지 모르는 게 대부분이었다. 다행히도 날 죽이겠다거나 이런 말을 또 내뱉진 않았지만, 여기서 듣고 있자니 좀 난감했다.
시간이 빠르게 흘러, 아구는 이미 침대에서 대자로 뻗어 자고 있었고 난 한참을 망설이다가 침대로 올라갔다. 눕지는 않고 양반다리를 한 채 앉아서 명상을 시작했다.
유가 실력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지만, 오늘 완십주를 공격한 건 전적으로 강력하고 대단한 진기뿐이었다. 대승기 수련자가 가지고 있는 천지를 소통하는 힘의 초식이나 결계는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없는 게 아니라 못 하는 것이다.
눈을 감고 내면을 들여다보자, 놀랍게도 내 내면은 금색의 저장고 같았다. 금색의 진기가 경맥 주위를 감싼 채 흘렀고, 금빛이 흐르는 혈관은 단전으로 통했다. 그 안에 주먹 크기의 금색 선풍이 고속으로 회전하며 진기류를 흡수하고 이 기류를 다시 경맥으로 돌려보내며 이 몸에 충분한 진기를 유지했다.
즉, 단전의 선풍이 내 수련의 경지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었다. 게다가 내가 심념을 움직이자, 금색의 자그마한 ‘유가’가 미간에서 튀어나와 내 눈앞에 서 있었다. 이게 바로 내 신식이었고 원영(元嬰)의 진화판이었다.
이 두 개는 내게 엄청 중요한 것이었다. 단전이 망가진다면 난 평범한 사람이 되고, 신식이 없으면 난 이 세계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이 세계에서 살아남고 싶다면 하나라도 잃을 수 없다.
신식을 다시 넣고 눈을 감은 채 천지 사이의 자연의 힘을 느꼈다. 천지가 소통하는 힘을 예전 유가는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은 내 것으로 바뀌었다. 이런 이해하기 어려운 걸 내가 썼으니, 모방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잠시 동안 주위에 떠다니는 원소를 느껴 보는데, 이때는…… 응?
명상을 끊고 고개를 돌리자 내 옷자락을 잡고 있는 손이 보였다. 당연히 송기연, 아이의 손이었고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안정감이 많이 결핍됐는지 무의식중에 내 옷자락을 잡더니 내 쪽을 다가와서 내 다리를 끌어안았다.
헐. 주인공이 껴안은 이 다리를 어쩔꼬.
복잡한 머리를 긁적이며 주위를 한번 둘러보았다. 대자로 뻗어있는 아구를 보곤 곧장 아구를 잡아 송기연의 품에 안긴 뒤 내 다리를 빼냈다.
정신이 없는 아구는 눈을 깜빡이다가 다시 입맛을 다시며 잠에 빠졌고, 난 안도의 한숨을 쉬고 다시 수련을 시작했다. 이 몸의 능력을 익히는 게 목숨을 지키는 것이어서 더 서둘러야 했다. 누군가에게 안긴 다리의 느낌은 이상했다. 사실대로 말하면 아직 사람들과 스킨십이 어색했다.
수련이란 원래 잡념이 없어야 하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눈을 감자 또다시 유가 침궁 천장에 그 이상한 도안들이 떠올랐다. 벌써 열흘도 더 지난 일이었고 그동안 생각이 난 적도 없었는데, 수련을 하려니 갑자기 기억 속 어딘 가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그리곤 끊임없이 반복하며 존재감을 계속 드러냈다.
도안의 모양은 점점 더 또렷해졌다. 꼭 동작이 다양한 소인처럼 보이기도, 또 모양이 이상한 작은 글자로 보이기도 했다. 무겁고 아늑한 기운이 도안의 무늬를 따라 천천히 흐르고 있는데 꼭 무한한 대로가 그 안에 숨어있는 듯했다.
소설을 쓰던 직감에 따라 난 이걸 어떤 공법의 잔류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선마겁》에서 유가가 신비한 공법을 얻을 수 있다고 언급한 적이 없었는데? 이게 우연히 내 침궁 천장에 새겨진 것도 언급한 적은 없었다.
자세히 살펴봐도 이게 대체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고 도안 가장자리에 새겨진 ‘진(辰)’이라는 글자만 알아볼 뿐이었다.
그렇게 멍한 얼굴로 밤을 거의 보내면서 난 내가 쓴 스토리의 대부분을 회상했다. 유가가 맞닥뜨린 ‘진’이라는 글자의 공법을 다시 한번 떠올려 보았지만, 그 도안이 내게 준 느낌과는 많이 달랐다.
보아하니 정말 서둘러 돌아가야 할 것 같았다. 강귀의 일과 이 신비로운 도안이 정말 신경 쓰였다. 침전 천장에 있는 도안은 새겨진 것이니 아마 다른 곳에 이 도안의 남은 부분이 있을 수도 있었다. 미지의 물건이 나를 은근히 불안하지만, 흥분하게 하는데, 이 세계가 내게 주는 먼치킨 같은 건가?
다시 눈을 떴을 때 마침 허공에서 날개를 퍼덕이는 아구와 눈이 딱 마주쳤다. 당황스러워 얼굴을 긁적이며 말했다.
“일어났어, 아구?”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구는 큰바람을 일으키며 내 품으로 달려들어 사정없이 비벼댔다.
“대인 진짜 너무하세요! 저를 저 자식 품에 쑤셔 넣으시다니. 으아아악. 짜증나! 전 대인께서 밤새 안아 주신 줄 알았다고요!”
“아, 아구. 진정해, 진정. 그 아이에게 안겨서 밤새도록 잘 잤잖아? 게다가 앞으로 며칠 동안 나 없이 너희 둘만 있어야 해.”
아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천천히 설명해 주었다.
“이 아이는 나중에 청룡 찾는 걸 도와줄 테니, 우선 잘 돌봐 주어라. 후에 반드시 네 적수를 찾을 테니.”
“대인! 정말 혼자 가신다고요? 저 혼자 여기에 남겨 두고?”
아구가 놀란 표정으로 날 바라보는데 놀라서 동그래진 눈이 너무 귀여웠다.
손가락으로 깊은 잠에 빠져있는 송기연을 가리켰다.
“한 사람 더 있지 않느냐?”
“이러실 줄 알았습니다. 저 자식이 나타난 후부터 항상 피해를 보는 건 저였습니다. 대인은 편애만 하시고, 전 왜 이리 팔자가 사나운 건지!”
“대왕 뱀 여섯 마리.”
짧게 조건을 제시했다.
그러자 아구가 바로 잔소리를 멈추고 눈을 가늘게 뜨고 외쳤다.
“스무 마리요!”
“열 마리.”
“열다섯!”
“열둘.”
아구가 입을 삐죽거렸다.
“대인, 열세 마리로 합의 보시죠!”
난 정말 승복하여 손을 흔들었는데, 승낙한 셈이었다. 그러자 저 녀석은 만족한 듯 침대에 누워 뒹굴거렸다.
* * *
눈앞에 시체는 경악한 표정으로 누워서 눈도 감지 못하고 죽었다. 안색은 창백했고 온몸은 뻣뻣했다. 두 손은 판 위에 가지런히 놓여있는데, 다섯 손가락은 말라비틀어졌고 손톱 안에 혈액은 흐르질 못해 멍이 들어있었다. 그냥 딱 끔찍했다.
기류를 움직여 흰 천으로 강귀의 몸을 덮고 그의 얼굴까지 덮어버렸다. 옆으로 물러서다, 갑자기 문제 하나가 생각나 뒤에 가만히 서 있는 사람에게 물었다.
“금성, 시골역 주성에 사람을 보냈느냐?”
“소인 이미 사람을 보냈습니다. 아마 빠르면 이틀 후에 돌아올 겁니다.”
이틀이라. 시골역이 그리 가깝진 않으니 충분한 시간도 아니었다. 고금성은 강귀가 급사한 거라고 했다. 방금 그의 몸에서 아무런 상처도 보지 못했다. 그의 몸을 가득 채웠던 진기와 머릿속의 신식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시체의 체내는 완전히 비어있었다.
전에 왕다국이 시골역 주성 상공에 수상한 게 있다고 했었다. 그 흑금색의 진법 같은 것에 분명히 뭔가 숨겨져 있을 것이다. 아마 강귀가 급사한 간접적인 원인일 수도 있었다.
지금은 늦가을. 극한지경에 설요족은 입동이 되면 나타나 포설(布雪)의식을 거행했다. 이 의식은 극한지경에 얼음층을 한층 더 두껍게 하여 온도를 큰 폭으로 내리고, 설요족의 영지 주변에 방어진법을 더 강화하는 상당히 강력한 진법이었다. 그다음은 연막을 치는데, 유가의 수련 경지로도 그곳을 찾을 수 없었다.
만약 내가 지금 극한지경에 가서 송기연에게 줄 반생빙련을 찾지 않는다면 더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다음 기회가 돌아왔다. 설요족이 겨울에 이렇게 신중한 이유는 겨울이 그들의 발정기이기 때문이다.
발정기의 설요족은 힘이 불안정해서 강해지기도 약해지기도 했다. 마음에 드는 요족에게 이 시기에 반생빙련을 사랑의 증표로 주면 그다음은…… 흐흐흐.
엽망지가 송기연을 데리고 갔을 때, 야야가 송기연에게 첫눈에 반해 반생빙련을 그 소년을 위해 써서 모두가 눈이 휘둥그레졌었다. 송기연을 위해 정절을 지키는 것과 맞먹는 막장 러브스토리였지만, 나름대로 효과는 있었다. 남성 독자들의 호평이 쏟아졌었다.
마족 구대역(九大域)은 반환 형태로 마궁을 중심으로 나누어져 있었고, 시골역은 극한지경과 맞닿은 마역이었다. 시골역의 이유를 조사하러 간다는 핑계로 극한지경에 가서 송기연에게 줄 반생빙련을 물색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게다가 고금성의 ‘감시’를 피해 송기연을 데려가 치료할 수도 있었다.
후후훗, 나 진짜 똑똑해.
고개를 돌려 고금성을 바라보고 말했다.
“그가 아직 돌아오질 않았으니 본존이 직접 가보겠다.”
이 말을 하자마자 바로 후회했다. 유가는 직접 움직이는 걸 좋아하지 않는데, 내가 이런 말을 했으니 이상할 법도 했다. 침을 삼키고는 미소를 지었다.
“오랫동안 여행을 못 했는데 막가 공자와 함께라면 무료하진 않겠구나.”
말이 앞뒤가 맞지 않았지만, 대체로 마궁 안에 있는 게 진절머리가 나니 조사를 핑계로 놀고 오겠다는 의미 전달은 된 것 같았다. 이건 충분히 유가답잖아?
고금성 저 자식이 찌푸리던 미간을 누그러뜨리곤 하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존주, 또 마궁의 일을 소인에게 맡기려고 하십니까?”
난 막 변명을 하려다가 그가 계속 말을 하길래 이어 들었다.
“그럼 소인 그자에게 시골역에 며칠 더 머무르며 존주를 모신 뒤 다시 돌아오라 하겠습니다.”
고금성 진짜 세심하구나.
“그럼 본존은 우선 아구에게 가겠다. 넌 내일 출발할 수 있게 막가 공자를 준비시켜라.”
이렇게 번거로운 일을 한 번에 해결하니 기분이 여간 좋은 게 아니었다. 콧노래를 부르고 싶은 충동을 이성이 이겨 다행히 도도한 자세를 유지하며 ‘시체실’에서 나왔다.
* * *
“법진이 흩어졌는가?”
“대인께 아룁니다. 깨끗하게 흩어졌습니다.”
“알겠다. 그만 물러가라.”
고금성이 흰 천에 덮인 강귀의 시체를 보고 웃으며 탄식했다.
“네 명이 좋지 못한 것을 탓하여라.”
* * *
난 급히 내 침전으로 돌아왔다. 이번엔 꼭 천장의 도안을 제대로 살펴보고 가야지, 아니라면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았다!
고금성이 따라오지 않는 걸 몇 번이나 확인한 후에야 마음 편히 천장을 살펴보았다. 지금 천장은 무늬도 바뀌지 않았고 어떤 영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난 이게 어떤 장안법(障眼法-눈을 가리는 수법)이라는 걸 알고 그곳을 한참을 바라보았다. 내 눈이 시큰해질 때쯤 그곳에 변화가 일어났다. 위에 붙은 무늬가 물처럼 흐르더니 연한 금색의 글자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도안이 변화하면서 그 주변이 금색으로 물들기 시작했지만, 두드러지게 반짝이진 않았다.
위쪽은 확실히 내 머릿속에 맴돌던 내용과 별반 다르지 않았는데, 이번엔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전에 가장자리에서 본 ‘진’자가 그 옆에 글자와 연결이 되어 공법의 이름이 완성되었다.
천진결(天辰訣)
동공이 손 쓸 틈 없이 수축했고 난 순간 엄청 당황스러웠다. 이 공법은 여기에 나타나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유가와 조금도 연관성이 없는 송기연의 것이었다.
《천진결》은 천지 성진지력(星辰之力)을 받아들여 자신을 강화하는 것으로, 수련이 정상에 도달하면 천지의 질곡을 격파하고 성진을 연결하여 허공을 깨고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 전설 속에 신이 되는 공법이었다.
이 공법은 9중으로 나뉘는데, 송기연은 수련이 8중에 막 도달했을 때 유가에게 잡혀 왔었다. 그래서 이 《천진결》은 먼치킨의 두려운 점을 설명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이 물건은 분명히 엽망지가 송기연에게 주는 것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송기연이 엽망지가 제시한 공법 중에서 《천진결》의 훼손된 잔본(残本)을 선택하고 주인공의 예민한 직감으로 깊이 숨어있는 공법을 찾게 되는 것이었다.
전반본은 엽망지에게 받고, 후반본은 무주지(無主地)에서 주인공 스스로 발견함으로써 자신의 엄청난 실력의 기반이 되는 것이었다. 지금 상황은, 엽망지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이 잔본은 유가의 침전 천장에 나타났다. 이 세계 혹시 미친 건가?
은은한 금빛이 아래를 비추며 유가의 어두운 침전에 밝은 빛을 더했다. 난 한참 멍하니 그걸 바라보며 한숨만 내쉬었다. 아무래도 내가 여기로 넘어온 게 제일 큰 함정이고,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함정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겠다. 일단은 그때그때 생각하기로 했다. 난 손가락을 높이 들고 진기를 손끝에 모은 다음 천장 판의 모양을 따라 그어 금색 글자가 새겨진 천장을 떼어내어 공중에서 모은 다음 반지의 공간 속으로 집어넣었다.
그리곤 사악하게 웃으며 주먹을 쥐고 유가의 천장을 산산조각 냈다. 쿵! 하는 소리가 상당히 컸고 공기의 폭발음이 귓가에 울려 퍼지는 게, 뭔가 개운했다.
머리 위로 떨어지는 먼지는 보호막을 쳐서 피하고 있는데 고금성이 바로 왔다. 고금성이 고개를 들고 내가 깨놓은 침전의 지붕을 바라보기만 할 뿐, 뭔 생각을 하는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 햇볕은 좋고 하늘은 높고 구름은 옅었다. 천장이 없는 침전은 햇볕에 완전히 노출되어 유가의 검붉은 실내 분위기가 바뀌자 갑자기 마음속의 우울감이 사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고개를 돌리고 기분 좋게 고금성에게 웃어 보였다.
“금성, 이 천장은 본존 마음에 들지 않는구나. 바꿔라.”
내가 이름을 부르자 고금성은 잠시 날 넋이 나간 듯 바라보다 곧 고개를 숙이고 우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소인 명 받들겠습니다.”
난 예리하게 그의 귓가가 빨개진 걸 알아차렸다. 찬바람이라도 맞았나?
폐허처럼 만들어 놓은 침전을 나서는데 갑자기 마음속에서 파장이 울렸다. 점점 더 강렬해져 나도 모르게 그 검은 돌침상를 돌아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저게 지금 날 부른 건가?
나도 모르게 거대한 검은 돌로 몇 걸음 다가가 손을 그 위에 얹었는데, 그만 무엇이 경악이라는 건지 알게 되었다…….
그 검은 거대한 돌침상은 나와 고금성 그리고 많은 하인 앞에서 순식간에 사라졌다.
난 침을 삼키고 손바닥을 펼치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진짜 사라진 게 아니라 내 몸 안으로 스며들어 손바닥에 검은 각인을 남겨 두었다.
“뭘 멍하니 서 있느냐. 이틀 내에 여길 정리하라.”
고금성의 말에 다들 보수 재료를 찾으러 뿔뿔이 흩어졌다. 잠시 후 현장에 남은 사람은 나와 고금성 둘뿐이었다.
고금성은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담담하게 공수하고 말했다.
“소인이 막가 공자를 준비해 두겠습니다. 내일 존주와 함께 시골역으로 갈 것입니다.”
손바닥과 고금성을 번갈아 바라보고는 멋쩍게 손을 내리고 알겠다고 대답했다.
진짜 이상하다. 아무것도 묻지를 않네…….
* * *
유가의 취향이나 품위에 대해 뭐라고 할 수가 없었다. 어쨌든 내가 준 거니까. 여자를 꾀고 남자와 노는 걸 좋아하는 점도 유가가 세상을 우습게 아는 걸 더 부각하기 위한 것이었고 그의 성격에 강한 작용을 했다.
그러니 눈앞에 이 여린 소공자를…… 소공자를…….
“오랫동안 여행을 못 했는데 막가 공자와 함께라면 무료하진 않겠구나.”
무료하긴…… 개뿔!
막가(家)의 공자 막청(莫清)은 잘생겼고 눈도 시원하게 트여 있었다. 고개를 들고 사람을 볼 때는 마치 물이 울렁이듯 부드러웠다. 늦가을이었지만 다행히도 모두 수진인사(修真人士)여서 추위를 타지 않았다. 몸에 걸친 가볍고 담백한 옷은 바람이 불면 가볍게 흩날렸고 선기(仙氣)가 감돌았다. 완전 유가 취향이었다.
막 이 세계에 왔을 때 고금성이 교육을 다 시켰다고 했는데, 무슨 교육을 시켰는지 알고 싶지 않았다. 지금 직접 실물을 보니 마음이 영 불편했다.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막청이 나에게 점점 다가왔다. 담백한 향기가 덮쳐오자 온몸이 굳어지고 가슴이 쿵쾅거렸다.
그래, 너무 불편하다.
시골역까지 ‘먼 길을 고생스럽게’ 가야 하기에, 고금성이 세심하게 차를 준비해 주었는데 마존이 혼자 날아갈 순 없겠지?
화려하게 꾸며진 쌍두사자차(車)에 앉아 고금성이 미리 준비해 둔 다과를 먹자 만족스럽긴 만족스러웠다. 옆에서 향기를 풍기는 막청은 무시했다.
난 기회를 엿봐서 막청을 기절시키고 천하 변계에 버린 뒤, 혼자 도망갔다고 말하고 송기연을 극한지경으로 데려갈 예정이었다. 고금성에겐 미리 날 시중들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 두어서 이번 출타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다.
옆에 막청은 차에 탄 이후로 줄곧 말이 없었다. 고개를 숙이고 내 몸이라도 닿으면 내가 그를 잡아 먹는 맹수라도 되는 것처럼 몸을 떨었다.
그를 무시하고 차 안 두꺼운 휘장을 걷어 쌍두사자에게 멈추기를 명령하려는데 웃고 있는 얼굴과 마주쳤다. 허공에서 휘날리는 팔자수염에 얼굴이 더욱 우스워졌다.
“존주 대인 시골역에 가시려고요? 왜 말씀 안 하셨습니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진짜 재수도 없지! 어떻게 이자가 아직 마궁에 남아있다는 걸 잊을 수가 있지. 어떻게 해야 따돌릴 수 있을까? 왕다국이 뻔뻔하게 따라온다고 해도 난 저자를 거절할 만한 이유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존주, 마궁에서 한참을 기다렸습니다.”
이 자식은 또 콧수염을 만지작거리더니 어디선가 꺼낸 부채를 머리 위로 들어 올려서 부끄러워하는 얼굴을 가렸다.
웩—
“아, 막가 공자도 계셨군요?”
내가 만만해 보였는지 왕다국은 점점 도가 지나쳤다. 멋대로 차에 오르고 손을 내밀어 막청의 턱을 어루만지며 입맛을 다졌다. 완전 호색한 같은 모습이었다.
“못 본 사이에 더 멋있어졌습니다.”
난 한참 동안 말없이 막청을 바라보았다. 막청이 점점 더 격하게 몸을 떨고 가늘고 긴 손가락을 꽉 쥐었다. 광대는 붉게 달아오르는 게 아무래도 저 호색한에게 화가 난 것 같았다.
내가 한숨을 쉬고 한마디 하려는데 왕다국이 말했다.
“존주 대인, 막가 공자를 딱 이틀만 제가 빌려 가도 되겠습니까?”
“???”
“소인도 다 압니다. 존주 대인께서는 더 중요한 일을 하러 가셔야 한다는 걸요. 시골역에 막청을 데려가시는 건 다 핑계시잖아요?”
왕다국이 막청의 턱을 잡고 있던 손을 떼고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어 보였다.
“이자는 핑계거리일 뿐일 테니, 존주께선 이자를 떼어내고 싶으실 겁니다. 그러니 인적이 드문 황무지에서 이자를 죽이실 거면 우선 소인이 한번 즐기게 해 주십시오.”
……갑자기 왕다국의 눈을 볼 수가 없었다. 이 자식은 뭘 이렇게 다 알고 있지? 고개를 숙이고 있는 막청을 힐끗 바라봤다. 왕다국은 이자에게 왜 이렇게 집착하는 걸까?
난 다시 휘장을 걷어 올리고 쌍두사자에게 손을 흔들었고, 날아오른 지 1분 정도가 지나서 대답했다.
“앞으로 본존을 귀찮게 하지 말고 네 마음대로 해라.”
“존주 대인 감사합니다!”
왕다국은 대답을 다 하기도 전에 손을 뻗어 막청의 허리를 감싸더니 발버둥치는 그자를 아랑곳 않고 멋대로 뛰어내렸다. 확실히 조급한 것도 괜찮았다.
그의 미간 사이에서 희색이 도는 게 오히려 수상했다.
“다음에 또 소인과 한잔해 주십시오!”
……제발, 오지 말아줘.
쌍두사자차(車) 안은 두 사람이 사라지자 조용해졌다. 잠시 후 송기연이 갇혀 있는 저택에 도착했다.
문앞에는 몸을 거대하게 키운 아구가 쪼그리고 앉아 날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사자차에서 미처 다 내리기도 전에 조그맣게 변한 아구가 어깨에 쪼르르 올라오더니, 내 귀밑머리에 문대며 조잘조잘 끊임없이 혼자 있었던 불평을 늘어놓았다.
암실에 송기연은 아직 곤히 자고 있었다. 이불이 가지런히 덮여 있는 건 아구 짓이었다.
정말 겉과 속이 다른 녀석이라니깐.
침대 옆에 앉아 아구의 날카로운 부리를 긁어주는데 마음이 한결 안정되었다.
엽망지가 없으면 어때? 《천진결》이 여기에 나타나도 또 뭐? 이미 이 아이를 돕기로 마음먹었으니 난 내 역할을 잘 연기해 내야지.
제4장 극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