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 가약(佳約)
“옥환. 정말 오지 않을 텐가?”
벌써 세 번째 같은 질문이었다. 옥환은 승헌의 옷매무새를 가다듬어 주며 대답했다.
“예. 제가 있으면 모처럼의 축하 자리가 엉망이 될 것입니다.”
승헌은 씁쓸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그렇지 않을 거라고 대답할 수 없었으므로.
오늘은 다름 아닌 승헌이 칭제를 하는 날이었다. 그는 마침내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고, 서국 또한 서 제국으로서 세상에 그 이름을 널리 떨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런 날이 오게 된 데에는 목숨을 걸고 염요를 해치운 옥환의 공이 컸다. 하나 정작 옥환은 마치 죄인처럼 손가락질을 받으며, 그 공을 치하받기는커녕 승헌의 즉위식에도 참여하기가 어려운 입장이 되어 있었다.
패망한 적국의 책사이자 간악한 첩자. 그 존재만으로 거북스러운 이가 뻔뻔스럽게 왕의 사랑을 받고 있는 데다가 감히 궁 안에서 지내고 있으니, 그를 미워하는 이들이 생기는 것도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벽국의 침공 당시 옥환이 첩자였다는 사실을 금군 병사들은 물론 호진까지 알게 되었으니, 그 후 그 사실이 여기저기 퍼지는 것 또한 시간문제였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그 금야 선생이 첩자짓을 했다는 것을 나라 안에 모르는 이가 없는 수준이었다.
하나 옥환은 그저 무던했다. 누가 자신을 욕하든, 손가락질하든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심지어는 저주까지 퍼붓는 이도 있었으나, 옥환은 그자에게조차 그저 싱긋 웃어 주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승헌은 알고 있었다. 목숨 걸고 지킨 나라에서 죄인 취급을 받는 그 마음이 편할 리 없다는 것을. 승헌은 옥환에게 저주를 퍼부은 이에게 모진 벌을 내리고 파직시켰지만, 그것으로 옥환의 상처받은 마음이 치유되지는 않을 터였다. 승헌은 그러한 정인을 향한 미안함과 안타까움이 이루 말로 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하나 억지로 데려가면 데려가는 대로 옥환에게는 가시방석이겠지.’
태연한 척하고 있으나 실은 옥환도 보고 싶을 것이다. 자신이 황제가 되고, 서국이 서 제국이 되는 모습을.
하다못해 예복을 입은 모습이라도 제일 먼저 보여 주려 거추장스러운 차림으로 옥환의 처소까지 왔지만, 막상 옥환을 마주하니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승헌은 옥환에게 무엇이라도 더 해주고 싶었다.
“어찌 이리 멋진 차림을 하시고 그런 표정을 지으십니까. 참으로 늠름하십니다, 환랑. 하늘에서 온 옥황상제도 이보다 빛이 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옥환은 평소와 달리 야단스럽게 굴며 침울한 얼굴을 하고 있는 승헌을 달랬다. 그럼에도 승헌의 표정이 풀어지지 않자 보다 못한 옥환이 승헌의 구겨진 미간을 꾹 눌렀다. 승헌은 고개를 들어 그런 옥환의 손을 쥐었다.
“어찌 그러십니까?”
“…….”
사실 승헌은 불안했다. 옥환을 방해물로밖에 여기지 않는 주변의 상황이, 그를 또 제게서 멀어지게 할까 봐.
옥환이 기적적으로 다시 살아난 이후, 승헌은 모든 게 다 잘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나 그런 승헌에게 옥환은 청천벽력과도 같은 청을 올렸다.
‘잠시 서국을 떠나 있게 해 주십시오.’
그 말을 들었을 때, 승헌은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기분을 경험했다. 두 번 다시 느낄 일이 없을 줄 알았던, 한없이 까마득하고 먹먹한 기분이었다. 내가 또 무엇을 잘못했을까. 어디가 모자랐을까. 어찌 아둔하게 굴어 정인에게 또 이런 말을 하게 만들었나. 승헌은 혼란과 좌절, 자책을 느끼며 떨리는 목소리로 왜냐고 물었다.
‘저는 여전히 이 나라에서 역적입니다. 적어도 환랑의 자리가 굳건해지고 하나가 된 나라가 안정될 때까지 저는 없는 게 낫습니다.’
그 말에 승헌의 가슴이 갈기갈기 찢겼다. 옥환은 제게 있어 가장 소중한 사람이었고, 서국과 백성은 바로 그다음을 잇는 존재였다. 하나 그에게 있어 소중한 것들이 서로를 상처 입히고 있다는 사실이 더없이 비참했다. 그럼에도, 아무리 이기적이라 할지라도, 그는 가장 소중한 사람을 놓을 수는 없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환랑.’
‘절대, 절대 안 돼. 절대로. 나더러 그대 없이 살라고? 그대는 그럴 수 있는지 몰라도 나는 안 돼.’
‘……환랑…….’
승헌은 자신이 죽는 한이 있어도 허락해 줄 수 없다고, 차라리 자신을 죽이고 가라고 단단히 못을 박았다. 그것이 아무리 짧은 이별이라 해도, 피치 못할 이유라 해도, 더 이상 옥환과는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리하면 이번에야말로 옥환을 영영 놓치게 될 것 같았다. 정 그러면 왕위에서 물러나겠다고까지 하는 승헌의 강경한 반대에 다행히 옥환이 먼저 뜻을 꺾었지만, 여전히 그가 서국을 떠나려는 마음을 접은 것은 아니라는 걸 승헌 또한 알고 있었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 또 그런 말을 하게 된다면.’
그러면, 정말로 견딜 수 없을 것이다. 하나 어찌해야 이 사람을 붙잡아 둘 수 있을까. 무엇으로 제 마음을 보여 주어야, 정말로 견승헌이 설옥환 없이는 살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줄까.
옥환이 침묵하는 승헌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는데, 승헌이 드디어 무언가를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그의 어조는 여느 때와 달리 엄중하고 근엄했다.
“순 제국이 무너진 뒤 세상이 혼용무도하여 만백성이 고통에 시달리고 온 나라가 전란에 물들었다. 하여 과인은 천명을 받자와 갈라졌던 대륙을 하나로 통일하고 무너진 기강을 바로 세워 이날 이때에 이르렀으니.”
처음엔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싶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던 옥환은 곧 승헌이 즉위식에서 읽게 될 선포문을 읊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든 백성이 듣게 될 선언이자,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승헌 외에는 그 누구도 할 수 없을 선언이기도 했다. 옥환은 절로 경건한 마음이 되어 승헌의 음성을 들었다. 승헌은 여전히 옥환의 손을 잡은 채 오직 옥환만을 위한 선언을 이어갔다.
“이제 서국은 그 어떤 나라에도 지지 않을 대국의 반열에 올랐다. 하여 온 천하에 이 위세를 떨치고 과인의 뜻을 널리 알리고자, 오늘로서 서국은 황제국이 될 것을 선포하노라. 또한 과인은 황제가 되어 스스로를 짐이라 칭하고, 그 연호는 천수天授로 새로이 이름 붙여 올해를 천수 원년으로 한다.”
서 제국의 새로운 연호인 ‘천수’는 옥환이 직접 지어 준 것이었다. 순 제국의 멸망 이후 80년 만에 세워지는 제국이었다. 정통성을 정립하고자 일부러 하늘이 내린 자리라는 뜻을 붙였다. 자신의 의견이라 서국 조정에서 반대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무사히 받아들여진 듯싶었다.
천수. 승헌이 황위에서 내려올 때까지, 옥환이 지은 그 이름은 계속해서 서 제국과 함께하게 될 것이다. 옥환은 그것이 진심으로 기뻤다.
이윽고 승헌이 마지막 문장을 입에 담았다.
“이제 짐과 서 제국은 순 제국이 내걸었던 위민爲民의 뜻을 이어 치세를 이어갈 것을 이 자리에서 맹세하노라. ……그리고 또한.”
축하한다고 말하려던 옥환은 이어지는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짧은 침묵 후 입을 연 승헌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고 엄숙했다.
“설옥환 그대를 영원히 공경하고 또 사랑할 것을 함께 맹세하노라.”
“……환랑.”
옥환이 흔들리는 눈으로 승헌을 응시했다. 뭐라고 말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옥환에게는 승헌 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자신의 세계가 그 하나인 것처럼.
놀라고 기뻐서 쉬이 말을 잇지 못하는 옥환에게 승헌이 멋쩍은 듯 웃어 보였다.
“더 좋은 데서, 더 좋은 걸 주고 말하고 싶었는데.”
옥환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가로저었다. 황제가 되는,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고 길이 남을 날에 받은 고백이었다. 무엇보다 옥환은 승헌이 말하지 않아도 그가 자신을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는지 충분히 알고 있었다. 옥환은 즉위식에 가지 않아도 지금 이대로 족했다. 보지 않아도 승헌을 우러러볼 수많은 이의 모습을 그려낼 수 있었다. 만백성이 만세를 부르짖고, 문무백관은 감격에 겨워 기뻐하리라. 그리고 승헌은 그 위에 우뚝 서서 자신의 백성들을 자애롭게 굽어보겠지.
“황제가 되신 것을 진심으로 감축드리옵니다, 폐하.”
옥환은 뭉클한 마음으로 부복한 채 인사를 올렸다.
“이 모두가 그대와, 수많은 장수들과, 신하들과, 또 난세를 버텨준 백성들 덕분이야. 나는 그저 그대들의 도움을 받은 것에 지나지 않아.”
“…….”
“옥환. 이제 그만 일어나. 그대는 무릎 꿇지 않아도 돼. 그대야말로 나와 나란히 서야 할 사람인데, 이런 곳에 있게 해서 미안해.”
하나 옥환은 여전히 바닥에 엎드린 채였다. 승헌이 억지로 옥환을 일으키려다가, 문득 그가 어깨를 떨고 있다는 걸 깨닫고는 멈칫했다.
“……옥환.”
승헌이 자상한 손길로 옥환의 고개를 들어올렸다. 옥환의 눈시울은 붉게 변해 있었다.
“옥환. 내가 다 알아. 그대의 고생을, 내가 다 알고 있어.”
승헌은 옥환을 끌어안고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옥환은 그 품 안에서, 아주 조금 눈물을 흘렸다.
정말 대륙이 하나가 되고 난세가 끝이 났다고 생각하니 금야 선생으로서 보낸 수많은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정말로 힘든 시간들이었다. 다 소용없는 짓은 아닐까. 이 난세가 끝이 나기는 할까. 나는 이 세상을 위해,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사람일까. 수없는 의심과 자괴감에 휩싸여 차라리 죽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여러 번이었다. 현실에 부딪히고 세파에 흔들리며 사람을 향한 믿음도 잃고 본래의 뜻도 잃어 그저 아집에 가까운 목적만이 남았다. 그러나 평화를 이룩하겠다던 그 목적조차 어느샌가 어떻게든 서국을 무너뜨리겠다는 집착으로 변질했고,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이미 옥환은 세상을 난세로 이끈 주범이 되어 있었다. 모든 것을 후회했고, 또한 절망했다.
‘하나 당신이 저를 구해 주셨지요.’
그 후회와 절망 속에서 자신을 꺼내 준 것은 다름 아닌 승헌이었다. 그리고 평화가 왔음을 선포하는 바로 오늘, 그의 금야 선생으로서의 삶은 정말로 종지부를 찍게 된다. 이제 남은 것은 설옥환으로서의 삶뿐이었다.
“울지 마, 옥환. 사실 그대는 우는 모습도 곱긴 하지만…….”
승헌이 눈물을 닦아 주며 위로랍시고 하는 말에 옥환이 울던 것도 잊고 풋, 웃음을 터뜨렸다. 그 모습에 승헌도 그제야 방긋 웃었다. 이윽고 승헌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어디론가 가서 잔 두 개와 물 주전자를 가져왔다.
“그대는 술을 못하니 합환주는 이것으로 대신하자고.”
“예? 합환주요?”
“그래. 방금 꼭 혼례식 같지 않았나. 그러니 합환주도 나눠 마셔야지.”
“하하…… 하하하하!”
참으로 볼품없는 혼례란 생각에 옥환이 웬일로 큰 소리로 웃었다. 하나 그래도 좋았다. 승헌과 함께라면 무엇인들 좋지 아니할까. 승헌도 키득키득 웃고는 물을 채운 잔을 옥환에게 내밀었다. 옥환 역시 물을 따라 승헌에게 주었다.
물잔을 교환하고, 밍밍하기만 한 물을 마시면서도 두 사람은 뭐가 좋은지 서로를 보며 계속 웃었다. 잔을 내려놓은 승헌이 팔을 벌리자 옥환이 냉큼 그의 품에 와 안겼다.
“이제 정말 부부로군. 정말로 서로의 반려가 되었어.”
‘예’ 하고 대꾸한 옥환이 다시 입을 열었다.
“환랑.”
“응?”
옥환의 나직한 부름에 애정 어린 대답이 돌아왔다. 옥환은 승헌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저도 영원히 당신만을 공경하고 사랑할 것입니다. 환랑도 아시지요? 제 손금일랑 다 보시지 않으셨습니까.”
승헌이 웃자 그의 가슴에 안겨 있는 옥환에게도 기분 좋은 울림이 전해졌다.
“내 어찌 그것을 모를까.”
문득 창밖을 보자 새파랗게 갠 하늘이 보였다. 옥환은 무심코 염완이 저기 어디쯤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는 잘살 것입니다, 주군.’
당신의 은혜가 헛되지 않도록.
옥환은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제국이 된 서국에도, 금야 선생의 이름을 벗은 옥환에게도, 새로운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
“자자, 쭉쭉 넘기십시오. 쭉쭉.”
옥환의 처소에서는 때아닌 술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술이라고는 한 방울도 못하는 옥환과는 사뭇 거리가 먼 일이었으나, 그 주동자는 따로 있었다.
“아니, 잔이 비질 않았습니까, 백 장군. 장군께서도 주당이시라 들었습니다. 뺄 생각일랑 마십시오.”
“아, 아니, 문하시중, 저는…….”
술을 부어 주는 이는 문하시중 조신이요, 어쩔 줄 몰라 하며 술을 받는 이는 위장군 백고였다. 두 사람은 승헌을 빼고는 거의 유일하게 옥환과 교류를 이어가는 이들로, 서로 보는 일이 잦다 보니 전에 비해 부쩍 친해진 상태였다.
그리고 오늘 그 두 사람은 옥환과 함께 승헌의 칭제를 축하하겠다며 처소에 들이닥쳤다. 정작 승헌도 없는데 무슨 축하인가 싶었지만, 즉위식에 나오지 못한 자신을 배려해서 그런 것이겠거니 싶어 옥환은 기꺼이 두 사람을 맞았다.
이윽고 한참이나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두 주당을 구경하던 옥환은 그릇에 담긴 동그란 연두색 과일을 보고는 물었다.
“이게 문하시중께서 가져오신 것입니까?”
“예. 포도란 과일인데, 이번에 서역에서 들여온 것을 아주 비싼 값에 샀습니다. 저희 안사람이 절여 놨길래 냉큼 가져왔지요.”
“문하시중 덕분에 귀한 것을 맛보겠습니다.”
술이 들어간 백고가 평소보다 더 헤벌쭉 웃으며 수저로 포도를 떠 꿀꺽 삼켰다. 문하시중은 안에 씨가 있다고 말해 주었지만 그는 괜찮다며 실실거렸다.
“문하시중. 백 장군이 잘 드신다 해도 문하시중과 대작할 만큼은 아니니 좀 봐주면서 하십시오.”
백고의 상태를 빠르게 눈치챈 옥환이 문하시중에게 넌지시 이르자 문하시중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함께 생사를 넘나든 사이여서 그런지 옥환은 제법 백고를 챙기는 편이었다. 물론 승헌은 그것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하나 옥환의 배려가 무색하게 백고는 잔 안의 술을 한 번에 넘기고는 입을 열었다.
“저 선생……. 이걸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싶었습니다만, 선생은 너무 좋은 분이시라 제가 말하지 않고서는 못 배기겠습니다…….”
“갑자기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그럽니까?”
옥환과 문하시중은 평소보다 더 얼이 빠진 백고를 보며 웃음기 어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나 백고는 이번에도 눈치 없이 사고를 쳤다.
“실은…… 폐하께서 혼인을 하실지도 모릅니다.”
“아, 아니, 백 장군!”
별안간 튀어나온 화제에 문하시중이 화들짝 놀라 백고를 말렸으나 이미 엎지른 물이었다. 그저 백고는 날카로워 보이던 이전과 달리 잔잔하게 웃고 있는 옥환이 너무 곱고, 또 그런 옥환이 너무 걱정돼서 저도 모르게 한 말이었다. 하나 그도 자신이 술김에 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닫고는 뒤늦게 입을 막았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 선생. 그런 게 아니고…….”
“이미 말씀하신 것 무를 수도 없지 않습니까. 그냥 알려주십시오.”
옥환의 말투는 차분했으나 그 분위기는 눈에 띄게 차가워져 있었다. 문하시중은 백고의 옆구리를 마구 찌르며 그를 탓했으나, 이미 돌이키기는 늦은 상태였다. 문하시중은 차라리 백고에게 맡기느니 자신이 최대한 좋게 포장해서 설명하는 게 좋겠다 싶어 먼저 입을 열었다.
“저…… 그것이 말입니다. 이번에 칭제를 하면서 여러 나라에서도 축하를 전해 왔는데, 아무래도 폐하께서 황제가 되셨음에도 정비가 없으시다 보니…… 그쪽에 대해서도 말이 많았습니다.”
옥환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전부터 줄곧 승헌이 국혼에 대한 신하들의 빗발치는 원성과 마주해 왔다는 건 옥환도 익히 아는 바였다. 저 때문에 그리되었다고 생각하면 절로 마음이 무거워졌으나, 승헌이 내색하지 않았기에 옥환도 애써 죄책감을 감춰 왔다. 하나…… 승헌이 황제가 되면 이런 일이 더 비일비재할 것 같아 걱정이 되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물론 폐하께서도 새로이 국본을 세우시려 친척 중 양자로 들일 만한 재목을 찾고 계신 모양입니다. 하나 그것이 워낙 비밀리에 진행 중인 일이다 보니…….”
민망한 듯 말끝을 흐리는 문하시중과 여전히 풀이 죽은 백고를 보며 옥환은 걱정 말라는 듯 침착하게 타일렀다.
“한 나라의 신하가 어찌 국모의 자리가 비어 있는 것을 우려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다만 저는…… 나랏일에는 개입하지 않기로 하였으니 혹 제가 걱정이 되시더라도 모른 척해주십시오. 그분의 사람이 되겠다고 결정했을 때 이미 각오한 바였습니다. 만약…… 아주 만약에 폐하께서 혼인하신다 해도 저는 어차피 그분을 기다리는 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하나 그 기다리는 시간마저 후회하지 않을 거라고, 승헌에게 그리 말했었다. 그리고 승헌도 그것을 다 기억하고 있으리라. 그럼에도 도리어 옥환의 초연한 태도가 백고의 연민을 더 자극했는지, 그는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하나 이번엔 다릅니다! 화선국에서 하나뿐인 공주를 보내 왔는데, 그 미모가 몹시도 뛰어난 데다 화선국의 왕위를 이을 유일한 왕족이다 보니 신하들도 그 공주를 황후감으로 여기는 것 같았습니다……. 문무관 모두가 한마음 한뜻이 되어서요.”
“…….”
국혼에는 정치적 의미가 강하게 작용한다. 그리고 화선국의 공주는 그러한 국혼에 아주 제격일 터였다. 하나 옥환은 괜찮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일쯤,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다. 하나 백고는 이번에야말로 입을 다무는 듯하더니 마지막으로 옥환의 인내를 무너뜨릴 발언을 했다.
“하나 이 일이 수면 위로 올라온 지 벌써 스무 날 가까이 되는데…….”
“예?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스무 날 가까이 되는데 국혼을 주청하는 신하들의 기세가 누그러들지 않으니 큰일이다, 그리 말하려던 백고는 자신의 말을 끊고 사납게 묻는 옥환의 어조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아니…… 신하들이…….”
“이 얘기가 나온 지 스무 날이나 되었단 말입니까?”
갑작스런 옥환의 태도 변화에 문하시중과 백고는 서로를 마주보며 당혹한 표정을 지었다. 하나 옥환은 완전히 굳은 얼굴로 술상의 한 지점만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아무리 그래도 혼사 문제를 반려인 내게 이토록 오래 말도 안 하다니.’
남들이 알려주지 않는 건 상관없었다. 아니, 도리어 알려주지 않기를 바랐다. 금야 선생이 정사에 개입했다는 말을 듣고 싶지도 않았고, 승헌을 부담스럽게 만들고 싶지도 않았다. 하나 약식이었든 허술했든 간에 자신들은 혼례를 올렸고, 이제는 어엿한 부부였다. 한데 합환주를 나눠 마신 지 달포도 지나지 않았건만 벌써 제게 비밀을 만들었단 말인가?
돌연 험악해진 옥환의 분위기에 남은 두 사람은 억지로 술잔을 들었다. 어떻게든 지금의 상황을 면하려면 술이라도 부어야 했다. 물론 정작 화가 난 옥환은 술이라고는 한 잔도 마실 수 없었지만.
“저, 저어, 선생. 꿀떡 좀 드셔보십시오. 정말 달고 고소합니다…….”
“건배도 하시지요. 자자, 잔을 드십시오. 오늘은 축하하자고 모인 날이 아닙니까.”
옥환은 입을 댓 발 내민 채로 부루퉁하게 잔을 부딪쳤다. 문하시중은 슬금슬금 눈치를 보다가 갑자기 백고를 보니 원망이 차올라서 그의 잔에 술을 가득 따라주었다.
“자, 백 장군. 어서 드십시오. 싹 다 드십시오.”
“문하시중…….”
“그리 빼지 말고 차라리 취하기라도 해서 재롱이라도 좀 피워 보시란 말입니다. 이 분위기 어쩌실 겁니까?”
백고가 미안한 마음에 술을 쭉 들이켜자 문하시중이 일부러 더 호들갑을 떨며 다시 잔을 채워주었다. 그 모습에 옥환이 잠깐 정신을 차렸는지 문하시중을 말렸다.
“문하시중, 천천히 하십시오. 백 장군이 취하시면 문하시중께서 업고 가시렵니까?”
“아이고, 이 무거운 분을 제가 어찌 업고 갑니까? 저보다 배는 더 크신데.”
“너무하십니다, 문하시중……. 다 문하시중이 주신 술 아닙니까…….”
백고가 시뻘게진 얼굴로 투덜거리자 옥환이 그제야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문하시중은 비로소 안심을 하고는 다시 백고와 술잔을 주고받으며 시답잖은 이야기를 이어갔다. 일부러 최대한 무거운 화제는 피하는 모양새였다. 옥환은 그런 두 사람의 노력을 고맙게 여겨 최대한 그들의 장단에 맞춰 주려 노력했지만, 부글부글 끓는 속을 완전히 잠재울 수는 없었다.
‘괘씸한 사람 같으니.’
옥환은 야속한 마음에 애먼 포도만 계속해서 입안에 밀어 넣었다. 생전 처음 먹어 보는 과일은 몹시도 달콤하고 상큼했으나 옥환에게는 그 맛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다 입에 발린 소리였나? 벌써부터 이러면 앞으로 내가 그를 어찌 믿어?’
물론 승헌을 잘 아는 옥환이었기에 그가 이 일을 감춘 이유는 어느 정도 예상이 갔다. 혼자서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했을 것이고, 무엇보다 그 스스로가 힘든 일이라고 여기지 않았을 터다. 하나 다른 것도 아니고 혼사 문제다. 적어도 남의 입으로 듣고 싶지는 않았건만.
‘그 공주는 예쁘겠지…….’
분명 젊고 아리따울 것이다. 옥환은 자신의 외모가 특출 나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사람에게는 각기 다른 매력이 있는 법이었다. 그중에 누군가에게는 더 크게 다가오는 매력도 있는 법이고. 그리 생각하니 옥환은 공연히 서러워졌다.
그렇게 얼마쯤 흘렀을까. 결국 문하시중의 공세를 버티지 못하고 백고가 드러눕자, 슬슬 자리를 파해야겠다고 여긴 문하시중이 고개를 들었다. 한데 그는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눈을 크게 떴다.
“아니, 선생. 이 많은 걸 다 드셨습니까?”
옥환이 깊은 우울감에 잠겨 포도를 우물거리고 있는데 문하시중이 화들짝 놀라 물었다. 그가 포도가 담겨 있던 그릇을 들고 있는 걸 보며 옥환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죄송합니다, 제가 다 먹어서…….”
“예? 아니, 그게 아니고 이게 그 술에 절인 것인데…… 술을 못한다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한두 개 드시는 것쯤이야 괜찮을 거라 여긴 것인데 이걸 다 드셔서…… 그, 멀쩡하십니까?”
“……예. 포도가 맛있습니다.”
“그…… 렇다면 다행입니다만.”
문하시중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옥환의 반응이나 태도가 묘하게 어긋나 있는 것 같긴 한데, 또 얼굴은 태연하기만 하니 정말 괜찮은 건가 싶었다. 기실 문하시중은 옥환이 술을 못한다고만 들었을 뿐, 한두 잔만 마셔도 만취 상태가 될 정도로 약하다는 것까지는 모르는 상태였다. 그래서 더더욱 포도 정도는 문제가 없으리라 여겼다. 물론 그런 문하시중조차도 옥환이 그 많은 포도를 다 먹을 줄은 예상도 못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괜찮아 보이는데.’
문하시중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돌연 옥환이 침울한 얼굴로 뜬금없는 것을 물었다.
“문하시중. 전 어여쁩니까?”
“……예……?”
“전 제가 어여쁘다고 생각했는데…… 전 제가 봐도 고운데…… 여기 숟가락에 비친 얼굴을 보니 좀 못난 것 같습니다.”
“예?”
문하시중은 못 들을 말을 들은 사람처럼 ‘예? 예?’ 하고 되묻기만 했다. 숟가락에 제 얼굴을 비춰보며 울상을 짓는 옥환의 모습에 그는 그제야 깨달았다.
역시, 포도가 너무 많이 줄었다는 것을.
***
승헌은 쌓여 있는 일들을 최대한 빨리 처리하고 옥환에게 갈 생각이었다. 하나 지금 그는 처리는커녕 하던 일조차 내팽개치고 다급히 옥환의 처소를 향하는 중이었다. 문하시중에게서 간절한 구원 요청이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문하시중께서 이르시기를 선생께서 많이 취하셔서…… 폐하께서 살펴 주셨으면 좋겠다고 하시옵니다. 몹시도 송구하다고, 하나 최대한 빨리 와 주시길 바란다고 덧붙이셨사옵니다…….’
옥환이 취하다니. 제게 울면서 고백했던 이후로는 한 번도 그랬던 적이 없었다. 한데 어쩌다가?
‘혹시 속상한 일이라도 있었나?’
역시 즉위식에 오지 못한 게 앙금으로 남아 있었을까? 승헌은 초조한 얼굴로 빠르게 궁을 가로질렀다. 누가 설옥환 아니랄까 봐 주사도 그 정도면 얌전한 편이었지만, 제 정인이 남에게 안겨 울고 있기라도 하면 도저히 참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옥환!”
승헌이 옥환을 찾으며 다급하게 처소의 문을 열자 예상과 달리 다소곳하게 앉아 있는 옥환과, 그 옆에서 난처해하는 문하시중, 그리고 바닥에 뒹굴고 있는 백고가 보였다. 승헌은 짧은 한숨을 뱉었으나 아직 안심하기는 일렀다.
“폐, 폐하…….”
문하시중은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절을 올렸다. 승헌은 그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옥환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옥환, 괜찮아?”
“……환랑.”
승헌은 저를 보고 배시시 웃는 옥환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뜨끈뜨끈한 것이 티는 안 나도 취한 게 맞기는 한 듯했다. 승헌이 옥환을 품에 안고 문하시중에게 자초지종을 물었다. 문하시중은 백고의 실수로 옥환이 승헌의 국혼에 대해 알게 된 것과, 그가 술에 절인 포도를 너무 많이 먹은 것을 털어놓았다. 승헌은 사납게 백고를 노려보았으나, 제 품 안에서 뒤척이는 옥환을 보고는 화를 내리눌렀다. 공연히 옥환의 앞에서 화를 냈다가 그가 또 울기라도 하면 큰일이라는 생각에서였다. 물론 이 미인은 우는 모습조차 고왔지만, 그래서 더 남들 앞에서 그 모습을 보여 주기 싫었다. 돌도 움직일 옥환의 그 처연하고 치명적인 눈물은, 반드시 자신만이 알고 있어야 했다.
“저, 그만 들어가시자 해도 폐하께서 오시기 전까지는 안 가겠다고 고집을 부리셔서…….”
“…….”
승헌은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였으나 문하시중은 그의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가는 것을 목격하고 말았다. 그리도 좋으실까. 날이 갈수록 불어나기만 하는 옥환을 향한 승헌의 총애에, 문하시중은 속으로 헛웃음을 흘렸다.
“경은 그만 물러가 봐. 고생 많았네.”
“예, 예에, 폐하. 하면 소신은 이만…….”
“가는 김에 저것도 좀 치우고.”
승헌이 고갯짓한 방향에는 누워서 배를 긁고 있는 백고가 있었다. 문하시중은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싶어 울상을 짓고는 하인들과 함께 백고를 질질 끌었다. 문턱을 넘는 문하시중을 보며 승헌에게 안겨 눈을 끔뻑이던 옥환이 벌떡 일어섰다.
“조심히 드러가십시오, 무나시즁. 백 쟝구늘 잘 부탁드립니다.”
옥환이 꼬인 발음과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꾸벅 인사를 했다. 승헌은 얼른 옥환을 부축하고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웃었다. 문하시중 역시 지친 미소를 짓고는 인사를 하고 물러갔다.
“옥환. 우리도 이만 가서 자자. 시간이 너무 늦었어.”
“예.”
옥환이 고개를 끄덕끄덕하고는 등을 내미는 승헌에게 폴짝 업혔다. 승헌은 그래도 옥환이 생각보다 취하지 않아 다행이라고 여겼다. 보는 저야 귀엽고 사랑스럽지만, 나중에 옥환이 깨고 나면 몹시도 수치스러워할 것이 눈에 선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그렇고 나도 큰일이군.’
국혼 얘기를 들었다고 했으니 단단히 화가 났을 것이다. 그래서 술에 절인 포도인 줄도 모르고 그리 막 먹어댔겠지. 별것도 아닌 일에 걱정을 끼치기 싫었던 것이나…… 섭섭해하는 옥환의 마음도 이해는 갔다. 이번 일은 순전히 자신의 탓이었다.
“옥환. 화 많이 났어?”
승헌이 옥환을 업고 가며 다정하게 물었다. 옥환은 잠이 든 건지 말이 없었다. 승헌은 차라리 자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침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침소의 문을 열고 침상 위에 옥환을 내려놓은 승헌은, 뜻밖에도 그가 눈을 말똥말똥 뜨고 있는 것을 보고는 당황했다.
“안 자고 있었나?”
“예, 환랑. 환랑에게 줄 것이 있습니다.”
“나한테?”
뜬금없는 소리에 승헌이 당황하는 사이 옥환이 승헌의 손을 잡고 끌어 그를 침상 위에 앉혔다. 이윽고 옥환은 자신의 소매 안에서 병 하나를 꺼내 놓았다. 정체불명의 병은 대체 어떻게 소매 안에 들어가 있었는지 의심이 가는 크기였다.
‘어쩐지 평소보다 조금 더 무거운 것 같더라니.’
승헌이 홀로 그리 생각하며 납득하고 있는데 옥환이 방긋방긋 웃으며 말했다.
“환랑 주려고, 제가 챙겨왔습니다.”
“이게 뭔데……?”
“술입니다. 환랑이 제일 좋아하는 거.”
그렇게 대꾸한 옥환은 소매 안에서 약과도 꺼내고, 대추도 꺼내고, 떡도 꺼냈다.
“여기 이것들도 다, 환랑 거입니다.”
“다? 이걸 다 내게 주려고?”
“네.”
순진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옥환을 보며 승헌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옥환은 아마 내일이 되면 쥐구멍으로 숨으려 할 테지만, 그래도 승헌은 옥환이 귀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아, 옥환. 어찌 이리 귀엽나?”
“귀엽기만 하고 곱지는 않으십니까?”
“응? 그야 당연히 곱지. 세상에서 제일 귀엽고 고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몇 번이고 곱다고 얘기한 승헌은 뒤늦게 왜 옥환이 그런 것을 물었는지 깨달았다. 아마도 국혼의 상대로 거론된 화선국의 공주가 신경 쓰였으리라. 승헌은 역시 이참에 백고를 먼 변방으로 보내버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옥환. 미안해. 오늘도 내가 그대를 속상하게 했지?”
“조금이요.”
아주 조금. 그렇게 말하며 제 품에 안겨 오는 옥환이 안쓰러워서, 승헌은 그를 힘주어 끌어안고는 반듯한 이마 위에 입을 맞추었다.
“그 일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야. 난 그 공주에게 관심도 없고, 얼굴도 본 적 없어. 앞으로도 볼 일은 없을 테지. 화선국이라니, 난 이 서 제국을 다스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그럼에도 옥환은 풀이 죽은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승헌은 그런 옥환이 안쓰러워 계속해서 말을 걸었다.
“옥환. 고운 우리 옥아. 내 사랑. 나 좀 봐.”
“왜 보라고 하십니까.”
“얼굴을 보고 얘기해야 마음이 통하지. 옥환. 내가 얼마나 그대를 사랑하는지 모르겠어?”
“…….”
“나는 그대와 혼인을 하였고 내 반려는 오직 그대 하나인데 어찌 다른 이를 맞나.”
다정한 설득에도 옥환이 도리어 입을 문어처럼 내밀고 고개를 팩 돌리자, 승헌이 그런 옥환의 입술을 살살 달래 제자리로 밀어 넣으며 말을 이었다.
“곧 태자를 올릴 거야. 괜찮은 아이를 찾았거든. 일단 태자를 올리면 신하들의 기세도 수그러들겠지. 물론 그대가 먼저 그 아이를 태자로 올릴 만한지 확인해줘야겠지만. 이 나라는 그대와 나의 나라니까.”
“제 나라라면서 왜 그걸 이제야 말씀해주십니까? 공주도, 국혼도, 태자도 다!”
“……옥환.”
“저더러 반려라고 하셔 놓고는…… 환랑은 거짓말쟁이입니다……. 이제 저도 비밀을 만들 것입니다.”
“옥환, 어찌 그리 겁나는 소리를 해. 비밀이라니. 안 돼, 옥환. 내가 잘못했어. 응?”
“됐습니다! 이제 저도 환랑의 말일랑 하나도 안 믿을 것입니다!”
잠시 취기에 흐려졌던 분노가 깨어났는지, 옥환이 승헌의 넓은 가슴팍을 주먹으로 퍽퍽 때렸다. 승헌은 그것을 곧이곧대로 다 맞아주며 말했다.
“옥환. 나를 좀 용서해줘. 그대가 힘들어할까 봐 그랬어.”
“힘들어도, 같이 나눠야지요!”
“그러다 그대가 내게 질려서 날 떠나면 어찌해.”
“제가 왜 질립니까? 이리 잘생긴 얼굴이 어찌 질립니까?”
옥환이 꿈쩍도 하지 않는 승헌의 가슴을 이리 밀고 저리 밀며 쏘아붙였다. 승헌은 쓰게 웃으며 옥환을 양팔로 폭 감쌌다.
“내가 그대를 불행하게 하니까.”
술에 취한 이에게 할 소리가 아니라는 건 알았으나, 지금이 아니면 도저히 옥환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옥환이 행복하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나 그것을 인정해 버리면 옥환을 놓아줘야만 할 것 같아 외면하고 있었을 뿐이다.
하나 그렇게 옥환을 붙잡아 놓은 탓에, 옥환은 여전히 궁 안에서만 머물며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고, 황제의 반려임에도 없는 사람 취급을 당해야만 했다. 한데 이것을 어찌 불행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환랑.”
“그대가 날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아. 그대는 오랫동안, 아주 오랫동안 날 사랑하겠지. 그래서 아무리 힘들고 괴로워도 견뎌낼 거야. 하나 힘들고 괴로운 게 어찌 행복이 되겠나? 같은 사랑일지언정, 나는 그대가 행복한 사랑을 하게 해주고 싶었어. 정말 그러고 싶었어. 그런데…… 정작 난 그대가 불행한 사랑을 하게 만든 장본인이지 않나.”
“환랑.”
죄책감에 고개 숙인 승헌의 뺨 위에 옥환의 손길이 닿았다. 옥환의 목소리는 어느새 다시 다정해져 있었다. 화가 풀렸다는 걸 알았음에도 여전히 불안한 승헌이 천천히 고개를 들자, 옥환이 입을 열었다.
“환랑. 지금 제가 취했습니다.”
“……응?”
난데없는 소리에 승헌이 기가 막혀서 웃음을 터뜨렸다. 하나 옥환은 꿋꿋하게 말을 이었다.
“그래서, 평소의 똑똑한 옥환처럼 다 말해드릴 수 없습니다. 술이 다 깨면, 막, 엄청 말이 떠오르는데…….”
“……옥환…….”
그제야 승헌은 옥환이 무얼 말하려는지 깨달았다. 옥환은 풀린 눈으로 웃으며 승헌의 손을 제 가슴에 대었다.
“내일, 똑똑한 옥환이 다 설명해 줄 것입니다. 제 마음, 여기 전부 다. 그래도 이것 하나는 지금도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옥환이 제 가슴에 대고 있던 승헌의 손을 이번엔 제 뺨에 갖다 댔다.
“전 정말 행복합니다……. 환랑이 있어서요. 다시 살아나서 불행했던 적은 지금껏 단 한 번도 없습니다.”
“…….”
말갛게 웃은 옥환은 승헌에게 입을 맞추었다. 그저 입술만 붙이고 있는 접문이었지만, 승헌은 그런 옥환을 오랫동안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닿아 있는 입술에서 전해진 온기가 전신으로 퍼져 나가는 듯했다. 불순물이라고는 일절 없는 순수한 연정이 무엇인지, 승헌은 바로 이 순간 깨닫게 된 것 같았다.
이윽고 입술을 뗀 승헌이 옥환을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 한없이 고맙고 기쁜데, 왜 이렇게 가슴이 아픈지 알 수 없었다.
“옥환, 그대는…… 어찌 이리 다정한가. 왜 이리 따스해. 이러니 나는 평생 그대에게 홀딱 빠져 있을 수밖에 없잖아.”
이토록 사랑스러운 이가 세상에 또 있을까. 옥환은 이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항상 자신을 구원하는 유일무이한 존재였다. 사랑하고, 사랑하고, 또 사랑해도 부족했다.
치솟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어 침묵하는 승헌의 등을 옥환이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그러더니 그는 이제 잘 시간이라며 승헌에게 밤 인사를 건넸다.
“푹 자고 내일 똑똑한 옥환에게 꼭 행복한 이유를 들으십시오. 아시겠지요? 열 가지…… 아니 오십 가지나 말씀드릴 것입니다.”
“……그래. 그럴게.”
이미 듣지 않아도 충분했지만, 성실한 옥환이라면 부끄러워하면서도 그 오십 가지의 이유를 또박또박 설명해 줄 터였다. 승헌은 옥환을 눕히고 자신도 그 옆에 누워 옥환의 가슴을 토닥였다. 옥환은 무거운 눈꺼풀을 깜빡이며 말했다.
“내일 만나요, 환랑…….”
“……그래. 내일 만나.”
내일도, 모레도, 글피도…… 계속.
눈을 감는 옥환을 승헌은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그가 잠든 후에도 한참이나.
행복. 행복하다고 해 주었다. 단 한 번도 불행했던 적이 없노라고. 어쩌면 거짓일 수도 있었다. 하나 옥환의 그 따스한 마음이, 승헌의 차갑던 불안을 모두 녹여 주었다.
“나도 그대가 있어 행복해. 그대가 사는 이 마음이 어떤지, 그대가 만든 내 세상이 어떤지, 그대는 영원히 모를 거야.”
승헌은 옥환에게 입을 맞추고, 그를 더 가까이 끌어안았다. 그러자 잠결에도 옥환이 배시시 웃었다.
그날, 두 사람은 작은 초가집에서 함께 농사를 짓고 살아가는 꿈을 꾸었다. 아주 상냥하고 행복한 꿈을.
***
옥환은 눈앞의 논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이내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무언가를 열심히 기록하기 시작했다. 모르는 이가 보면 희대의 발명이라도 하는 듯 심각하고 진지한 모양새였다. 종소는 그런 옥환에게 시원한 물을 떠다 주었다.
승헌이 후원 옆에 있던 전각을 허물고 옥환에게 만들어준 논은 한때 궁 안에서 큰 화제가 됐었다. 몇몇 이들은 옥환을 향한 승헌의 크나큰 총애를 부러워했고, 몇몇 이들은 황궁의 위엄을 떨어트리는 일이라며 못마땅해했다. 그리고 또 어떤 이들은, 여전히 옥환을 경멸하고 미워했다.
그럼에도 옥환은 정말로 괜찮았다. 모두 다 감당하고 인내하겠노라고 다짐했던 일이었다. 고작 이런 일들로 승헌과의 행복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승헌을 보겠다는 일념 하나로 저승에서도 살아 돌아왔는데, 그 이상 어려울 것이 어디 있겠는가.
하나, 옥환은 그렇게 생각했던 것을 철회해야만 했다. 그 대단한 금야 선생에게 있어 저승에서 살아 돌아오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 존재했던 것이다.
“크큭…… 풉, 푸하하하하하하!”
천지가 떠나가라 웃어대는 목소리를 들으며 옥환은 붓을 멈추었다. 종소는 손을 꼼지락거리며 옥환의 눈치를 살폈다. 하나 웃음소리의 주인은 배를 잡고 그야말로 박장대소를 하다가 사레가 들렸는지 콜록콜록 기침까지 했다. 그것을 꾹 참고 들어 주던 옥환이 더는 견디지 못하고 일어섰을 때, 웃음소리의 주인인 승헌이 입을 열었다.
“옥환. 그대는 진정 하늘이 내린 인재로군.”
“……그리 놀리실 거면 저리 가십시오. 쌓여 있는 국무가 많으실 텐데요.”
옥환의 찬바람 쌩 부는 태도에도 승헌은 능청스럽게 다가와 옥환을 번쩍 안아 들었다.
“누가 그대에게 금야란 자를 붙였을까? 응? 이래서야 금야를 만들 수 있겠어?”
승헌의 말대로, 옥환이 가꾸는 논은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 심어 놓은 모는 줄도 맞지 않았고 힘없이 축 늘어져 있었으며,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중에도 바닥에 픽 쓰러지기까지 했다.
옥환은 입을 삐죽이면서도 여전히 승헌의 품에 안긴 채 대꾸했다.
“옛날에는…… 잘했습니다. 풍작이었단 말입니다.”
“내가 볼 땐 그것도 다른 이들이 도와준 게 분명해. 이리 열심히 하는데도 결과가 영 시원찮으니 불쌍하게 여긴 사람들이 남몰래 도와줬겠지. 게다가 그대가 좀 어여쁜가? 오히려 그대를 도와주고 싶어 안달이 났었을걸?”
“…….”
생각해 보니 또 그랬던 것도 같아 옥환은 적잖이 민망해졌다. 정말 자신은 농사에 재능이 없는 것일까? 논밭을 가꾸며 사랑하는 이와 함께 사는 게 소원이었건만…… 이래서야 수만 평의 논이 있어도 자신이 수확한 벼로는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울 성싶었다.
“연구 중이니…… 곧 성과가 있을 것입니다.”
“이런이런. 이래서 서생은 안 된다니까. 농사는 실전이야, 옥환. 일단 모를 좀 똑바로 심어야 하지 않겠어?”
승헌이 그렇게 말하며 심술궂은 소년처럼 웃었다. 옥환은 자존심도 상하고 괘씸하기도 한 마음에 이렇게 되받아쳤다.
“하면 환랑이 심어 보십시오. 얼마나 잘하는지 몸소 배우고 싶습니다.”
“내가 가르쳐 주면 그대는 무엇을 줄 건데?”
“참으로 야박하십니다. 정인에게까지 대체 뭘 받아 내려 하십니까?”
옥환이 눈을 흘기며 묻자 승헌이 옥환의 목에 부드럽게 입술을 댔다. 그는 비단 같은 살결 위에 제 입술을 천천히 문질렀다. 그러자 품에 안은 옥환의 몸이 딱딱하게 굳는 것이 느껴졌다.
“내가 받고 싶은 것이야 항상 같지.”
“종소가 봅니다……!”
한발 늦게 정신을 차린 옥환이 승헌의 어깨를 퍽 때리며 외쳤으나 승헌은 꼼짝도 하지 않고 느긋하게 대꾸했다.
“왜. 그 녀석도 이제 다 컸어. 아이를 어찌 갖는지 알아야 장차 사내 구실을 하지. 뭐, 내가 친히 교육을 해 주려 해도 본인이 도망치면 다 소용없는 일이지만.”
그 말에 옥환이 주위를 둘러보자 확실히 종소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눈치 빠르게 자리를 피한 모양이었다. 그럼에도 옥환은 귀를 발갛게 물들인 채 승헌의 어깨를 한 번 더 때렸다.
“제 제자에게 이상한 걸 가르칠 생각일랑 마시고, 제게 모심기나 가르쳐 주십시오.”
“아주 정인이 동네북이군.”
“안 아픈 것 압니다.”
승헌은 좀 이따 두고 보자며 볼멘소리를 하고는 옥환을 내려 주었다. 그러더니 이윽고 팔다리를 걷어붙이고는 본격적으로 모심기에 임할 준비를 했다. 일국의 황제가 모심기라니, 옥환은 웃음이 나려는 걸 열심히 참고 승헌의 앞에 모판을 가져다주었다.
“모심기는 속도와 정확성이 중요한 법입니다, 환랑.”
“그렇게 잘 아는 사람이 정작 자기 모는 다 드러눕게 해뒀나? 자식 같은 모가 행여 졸릴까 봐 그랬어?”
“…….”
반박도 못하고 퉁퉁 부어 있는 제 정인을 보며 승헌이 낄낄거렸다. 옥환은 어디 얼마나 잘하는지 두고 보겠다는 시선으로 승헌을 노려보았다. 이윽고 승헌이 모를 몇 가닥 집어 논바닥에 심었다. 아주 완벽하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처음치고는 능숙한 솜씨였다. 모는 마치 제 집을 찾듯 정확한 자리에 쏙쏙 들어가 안착했고, 그렇게 한 줄을 완성한 승헌이 보란 듯이 우쭐댔다.
“봤나?”
“…….”
승헌은 옥환이 그답게 또 독설을 날릴 거라고 생각했지만, 옥환의 반응은 의외였다. 그는 눈을 빛내며 옹기종기 서 있는 모를 바라보다가 순수한 감탄을 담아 말했다.
“정말 잘하십니다.”
“응?”
“다행이 아닙니까. 나중에 둘이 살게 되면 그래도 굶어 죽을 일은 없겠습니다.”
활짝 웃는 옥환을 보며 승헌은 뭐라고 하면 좋을지 몰라 얼빠진 표정으로 서 있었다. 둘이 살게 되면. 옥환이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물론 승헌 역시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그 또한 언젠가는 그렇게 할 것이라고 진작부터 다짐해 왔었다. 이제 막 제국이 된 서국을 안정시키고, 곧 태자로 세울 인재가 충분히 성장하면 황위를 넘겨줄 생각이었다. 그러고 나서 황제도 장수도 아닌 견승헌이 되면, 소중한 정인과 둘이서 멀리 떠나 조용히 살아가리라 마음먹었다. 그때 꾼 그 꿈처럼.
‘……혹 같은 꿈을 꾸었던 건가……?’
생각에 잠긴 승헌의 의식은 사랑하는 이의 부름에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환랑. 이제 이리 나오십시오. 흙으로 엉망이 되셨습니다.”
승헌의 손은 진흙투성이였으나 옥환은 주저 없이 자신의 손을 내밀었다. 승헌은 옥환이 내민 손을 조심스레 쥐었다. 따스하고 부드럽지만, 생각했던 것보다는 컸다.
“여기 잠깐 앉아 계십시오.”
승헌을 마루에 두고 옥환은 종종걸음으로 사라졌다. 옥환을 잠시 기다리는 동안 승헌은 옥환이 꼼꼼하게 쓴 농사일지를 넘겨다보다가 혼자 쿡쿡거렸다. 뒷장에 행복한 이유 오십 가지가 적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을 떠올리느라 꽤 고심했을 옥환의 모습을 떠올리니 승헌은 제 정인이 사랑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하나 이내 익숙한 기척이 들리자, 승헌은 얼른 일지를 덮고는 모른 척 고개를 들었다.
“그대가 씻겨 주려고?”
대야를 들고 있는 옥환을 보며 승헌이 의외라는 투로 물었다. 그러면서도 승헌의 만면에는 기쁨이 가득했다. 옥환은 속이 다 보인다고 생각하면서 마루 위에 대야를 내려놓았다. 뒤따라온 종소 역시 물이 담긴 주전자를 두고 다시 총총히 사라졌다.
“황제가 되시고 나서 더 바빠지지 않으셨습니까. 별것은 아니나 이런 것으로라도 피로가 풀리셨으면 해서 준비했습니다.”
“그대의 고운 마음씨에 벌써 피로가 다 풀린 기분이군.”
승헌은 그렇게 말하고는 옥환의 뺨에 쪽 입을 맞추었다. 옥환은 아까처럼 잔소리를 하는 대신 어쩔 수 없다는 듯 미소를 한 번 짓고는 말했다.
“손부터 씻으십시오.”
“손도 씻겨줘야지.”
옥환은 짧은 한숨을 내쉰 뒤 승헌의 손을 대야에 담그고 손가락 사이에 묻은 진흙을 씻어 주었다. 승헌은 제 손가락 사이에 파고든 희고 긴 옥환의 손가락을 지그시 내려다보다가 살짝 튀어나온 뼈마디를 살살 간질였다.
“옥환. 손으로도 느낄 수 있다는 것 아나?”
“……이런 때 무슨.”
옥환은 단호한 말투로 승헌에게 여지를 주지 않으려 하는 것 같았으나, 그의 귀는 이미 불긋하게 물들어 있었다. 승헌은 씩 웃으며 옥환의 손목부터 손바닥까지를 진득하게 쓸어내렸다. 옥환이 작게 숨을 삼키는 것을 보며 승헌이 낮게 속삭였다.
“그대도 잘 알잖아. 지난밤에 내 걸 만져주며 덩달아 느끼지 않았나.”
승헌의 손끝이 옥환의 손바닥을 둥글게 문질렀다. 노골적인 유혹에 옥환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머뭇거렸다.
“여기로 내 양물을 쥐고 흔들었잖아. 응?”
옥환은 그때의 감각을 떠올리지 않으려 애를 썼다. 하나 승헌의 손길과 귓가를 파고드는 밀어에 마치 맥이 뛰는 승헌의 양물을 쥐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굵고 단단한 그것의 혈관이나 달군 듯한 열기가 선명하게 느껴지는 듯했다.
“한 지 오래됐는데, 쌓이지는 않았나? 오늘 밤에 할까?”
아무런 대꾸도 없이 시선을 피하는 옥환에게 승헌이 몸을 기울이고 물었다.
“아니면 지금 할까?”
그 순간 첨벙, 하며 물이 튀는 소리와 함께 옥환이 승헌의 손등을 찰싹 때렸다.
“자중하십시오!”
옥환의 매서운 외침에 승헌이 울상을 지었다.
“아야, 옥환. 어찌 이리 손이 맵나? 그대도 동했으면서.”
“툭하면 저를 놀리려 드시니 그렇지요! 사람이 모처럼 생각해서 준비한 선물인데 환랑은 이런 장난이나 치고……! 됐고 발이나 이리 주십시오!”
화를 내면서도 성실하게 발을 씻겨 주는 모습에 승헌이 풋, 웃음을 터뜨렸다. 정치나 전략에만 통달했지, 제 정인은 그 외의 일에 관해선 영 요령이 없는 사람이었다. 자신이 먼저 손을 쓰지 않았더라면 어느 능구렁이 같은 자식에게 넘어갔을지 모른다. 그리 생각하니 일어나지도 않은 일임에도 화가 나고, 있지도 않은 놈에게 열불이 났다. 이러니 매일같이 옥환에게 혼이 나고 철이 없다고 욕을 먹는 거란 생각에 승헌은 또다시 웃었다.
“어찌 그리 실없이 웃고 계십니까?”
“간지러워서 그렇지. 한데 그거 아나, 옥환? 사람은 발로도 느낄 수가 있다던데…….”
승헌이 또 장난을 치려 하자 옥환이 승헌의 발을 꺼내고는 수건으로 거칠게 닦았다.
“농담이야, 농담.”
“국혼 건을 감춘 일로 제게 몹시도 미안해하시던 분은 어디 가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어……?”
제대로 찔린 약점에 승헌의 말문이 잠시 막혔다. 승헌은 얼른 자세를 낮추고는 옥환에게 눈웃음을 쳤다.
“그야 여기 있지. 여기서 사랑하는 그대의 미소를 애타게 바라고 있지 않나.”
“…….”
“옥환. 어차피 난 그대가 아니면 서질 않으니 다른 이를 들여도 후사는 못 봐. 신하들에게도 그렇게 말했다니까? 세상 제일가는 미인을 반려로 둬서 그 외의 사람들은 다 박색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정녕 서 제국 황제가 고자라는 소문이 나돌아도 상관없느냐, 하고.”
“나 참…….”
옥환은 그 능청스러움에 기가 막혀서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승헌이 정말 신하들에게 그렇게 말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은 채. 결국 옥환은 이 뻔뻔한 사내를 어찌 이기나 싶어 표정을 풀고는 승헌의 발을 곱게 닦아 주었다. 승헌 역시 그제야 안심하고는 빙긋 웃었다.
“고마워, 옥환. 감동이군.”
이윽고 세족이 끝나자 승헌이 다정한 인사를 건넸다. 옥환은 그런 승헌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양팔로 끌어안았다. 갑작스런 포옹에 놀라면서도 승헌은 미소를 지으며 옥환을 마주 안았다.
“이것도 선물인가? 나를 얼마나 더 행복하게 해주려고 그래?”
“환랑.”
“왜?”
입이 귀에 걸려 있던 승헌은 옥환의 진지한 부름에 고개를 갸웃했다. 옥환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황제가 되신 후로 더 바빠져서, 내색은 안 하셔도 많이 지치셨다는 것 압니다. 하나 저는 환랑의 반려가 아닙니까. 혹여라도 제 도움이 필요할 땐 언제든 말씀해 주십시오. 필요하다면 저는 다시 조정에 돌아갈 수도 있습니다. 하나 지금 상황에서는 제가 조정에 돌아가 봤자 환랑의 근심거리만 늘리는 꼴이 되겠지요.”
생각지 못한 옥환의 고백에 승헌은 쓴웃음을 짓고는 품에 안긴 옥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왜 그런 말을 해. 그대의 능력이 출중함은 만백성이 다 알아. 하나 나는 그대를 조정에 내보내기 싫어. 사랑하는 이를 뭐하러 그런 지저분한 곳에 보내겠나.”
“어떤 마음이신지 저도 압니다. 그래서 저도…… 환랑이 앞으로 가게 되실 길이 걱정되는 것입니다.”
“걱정하지 마.”
“또 강하다고 말씀하시려고요? 환랑은 신이 아니지 않습니까. 무릇 사람이란 누구나 약한 부분이 있기 마련입니다.”
“아니.”
걱정 어린 목소리에 승헌이 옥환을 더 강하게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그대가 있으니 괜찮아.”
“…….”
“내 일에는 신경 쓰지 말라고, 여기선 날 그저 환랑으로만 봐 달라 해도 그게 마냥 쉽지 않다는 것은 알아. 하나 그대의 뜻대로 힘든 일이 있으면 꼭 말할 테니 괜한 생각은 말아. 조정에 나가다니, 우리 옥아는 농사일로도 충분히 바쁘지 않나.”
잠시 승헌의 말뜻을 가늠하듯 말이 없던 옥환이 이내 고개를 끄덕거렸다.
“좀 바쁘긴 하지요.”
그 능청스러운 대답에 승헌이 픽 웃음을 터뜨리고는 장난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래. 얼마나 바쁘신지 머리만 대면 잠이 드는 바람에 이 서방은 밤마다 외로워 죽을 지경이야. 하나 그대의 일 년 농사에 우리 밑천이 달려 있으니 별수 있나. 많이 벌어야 해, 옥환. 볼 거라곤 얼굴밖에 없는 날 먹여 살려야지.”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자신 없는 목소리에 승헌이 소리 내어 웃고는 위로를 건넸다.
“너무 걱정하지는 말고. 논이 별로면 밭을 갈구면 되잖아. 이 옆에다 만들어 줄게.”
“논을 만들어놓은 것만으로도 그리 말들이 많은데 밭까지 두시면 어찌합니까.”
“어차피 잔소리 들을 거면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게 낫지.”
철없는 소리를 내뱉는 정인의 모습에 옥환이 고운 눈썹을 찌푸렸다.
“한 나라의 황제 폐하께서 왜 아직도 이리 막무가내이십니까.”
“이 서방이 그리 걱정되면 앞으로도 옆에 딱 붙어서 감시해. 알았지, 옥환?”
아무튼, 변함없이 능글맞은 인사였다. 옥환은 결국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평생 붙어서 잔소리를 해드릴 것입니다.”
옥환의 대답이 흡족했는지 승헌이 쪽쪽 소리를 내며 옥환에게 입을 맞추었다. 옥환은 얼굴을 붉히며 승헌의 어깨를 밀어냈다.
“남사스럽습니다.”
“누가 본다고 그러나? 어찌 그대는 이리 꽉 막혔어?”
“환랑이 너무 뚫렸으니 저라도 막혀야 균형이 맞지요.”
옥환은 되바라지게 대꾸하고는 승헌의 품에서 나와 일지를 들고 다시 논 앞으로 향했다. 얼떨결에 옥환을 놓친 승헌은 논 앞에 쪼그려 앉아 있는 옥환을 뒤에서 끌어안고 추근댔다.
“옥환. 너무 고지식한 것도 좋지 않아. 날 이렇게 방치해 두고 나중에 뒷감당은 어찌하려고 그래?”
“협박을 하시는 겁니까?”
옥환이 제 허리를 만지작거리는 승헌의 손을 떼어 내며 묻자 승헌이 뻔뻔스럽게 말했다.
“논리적으로 설득을 하는 거지. 그대의 정인으로서 나는 그대의 사고를 유연하게 해줄 필요가 있어.”
“방해 마시고 저리 가 계십시오. 저더러 환랑을 책임지라면서요.”
“내 아랫도리도 그대가 책임져 줘야 할 것 아닌가.”
“낯뜨거운 말씀 좀 그만하십시오!”
옥환이 야멸차게 쏘아붙였지만 승헌의 손은 어느새 옥환의 허벅지 안쪽을 쓰다듬고 있었다. 사실 한번 불이 붙은 승헌의 욕정을 잠재우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던 데다가, 승헌의 말대로 그와 정을 통하지 않은 지도 꽤 되긴 했다. 시간만 있다면 하루에도 몇 번씩 저를 안는 이를 벌써 닷새나 기다리게 하였으니, 이대로 두면 승헌은 근시일 내에 기어이 자신을 앓아 눕게 만들고 말 터였다. 물론 그건 옥환 쪽에서도 사양이었다.
아까 저를 놀린 게 괘씸해서 작은 복수를 해 주려던 옥환은, 결국엔 그가 요망한 손을 마음대로 움직이게 내버려 두었다. 이윽고 승헌이 옥환의 옷깃 사이로 슬금슬금 손을 넣으며 옥환의 반응을 살폈다. 옥환은 들으란 듯이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정말 참을성 없으십니다. 돈 벌러 나온 정인을 이리 괴롭히십니까?”
그러자 승헌이 풀이 죽어 다시 슬금슬금 손을 빼려 했다. 한데 옥환이 고개를 설레설레 젓더니 이렇게 덧붙였다.
“하나 별수 없지요. 볼 거라곤 얼굴뿐인 이 정인을 제가 책임지겠다 하였으니.”
승헌은 잠시 눈을 깜빡이며 옥환을 바라보다가 이내 음흉한 눈빛으로 옥환의 목깃을 만지작거렸다.
“이번엔 자중하라고 안 할 텐가?”
“아까 저더러 잠만 잔다고 뭐라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정인의 옆구리를 시리게 둬서 쓰겠습니까?”
“역시 그대는 대장부로군!”
승헌은 신이 나서 외치고는 그대로 옥환을 번쩍 안아 들어 제 무릎 위에 앉혔다. 옥환은 뭘 하려는 거냐고 물으려 했지만 그럴 필요도 없었다. 승헌이 그대로 옥환의 바지를 내렸기 때문이었다.
“읏, 환랑! 이, 이런 데선……!”
“왜. 그대가 아끼는 소중한 논이 바로 앞에 있어서 싫어?”
손이 빠른 승헌은 어느새 옥환의 양물을 쓰다듬고 있었다. 자신의 것이 커다란 손 안에서 이리저리 휘둘리는 것을 보며 옥환이 떨리는 숨을 삼켰다. 뿌리와 기둥, 귀두가 두꺼운 손가락으로 정신없이 비벼졌다. 승헌의 급한 마음만큼 거친 손길이 오히려 옥환의 열감을 더욱 부추기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승헌은 다른 한 손으로 옥환의 가슴을 쓰다듬었다. 작은 자극에도 옥환의 유두는 꼿꼿하게 서서 금세 옷 위로도 느껴질 정도가 되었다.
“흐응…….”
승헌이 그대로 옷 안에 손을 넣어 옥환의 맨가슴을 움켜쥐자 옥환이 기분 좋은 콧소리를 냈다. 최근 편안한 생활에 살이 조금 올라서인지, 생각보다 살집 있는 가슴이 승헌의 손안에 들어왔다.
“옥환, 그대의 젖가슴은 정말 부드럽군…….”
승헌이 연신 손을 움직이며 열에 들떠 속삭였다. 계속되는 애무에 옥환의 양물은 이미 축축하게 젖은 상태였다. 옥환은 무의식중에 승헌의 다리 사이에 제 엉덩이를 비비고 있었다. 엉덩이 골 사이로 짓눌린 승헌의 남근을 문지르자 그것이 제 것보다 더 딱딱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옥환은 기분 좋게 신음하며 승헌에게 완전히 몸을 기댔다.
이윽고 승헌이 옥환의 양물에서 나온 액으로 젖은 손가락을 둔부 사이의 구멍 안으로 조심스레 밀어 넣었다.
“하읏…….”
닫힌 구멍이 열리는 감각은 여전히 낯설고 거북했으나, 수없이 반복된 정사에 이제는 습관처럼 기대감이 들었다. 옥환의 몸은 얼른 승헌을 받아들이고 싶어 하는 것처럼 빠르게 달아올랐다. 어쩌면 쌓여 있던 것은 자신도 마찬가지일지도 모르겠다고 여기며, 옥환은 제 안을 휘젓는 승헌의 손가락에 몸을 떨었다.
승헌은 옥환의 안에 박아 넣은 손가락을 빙글빙글 돌리며 내벽의 주름을 쓰다듬고 입구를 벌렸다. 제 무릎 위에서 허리를 흔드는 옥환이 견딜 수 없이 사랑스러웠지만, 한 번으로 끝내지 않으려면 그만큼의 공을 들여야만 했다. 이윽고 승헌이 옥환의 가슴에서 손을 떼고 그의 웃옷을 난폭하게 끌어 내렸다. 너무나 하얀 나머지 빛이 나는 듯한 매끈한 등이 드러나자 옥환의 다리 사이에 깔린 승헌의 것이 더욱 크기를 키웠다. 승헌은 옥환의 도드라진 등뼈에 입을 맞추고, 그곳을 혀로 핥았다.
“응, 환랑…….”
옥환의 내벽은 이제 노골적으로 승헌의 손가락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누가 봐도 음란하기 짝이 없는 제 정인의 몸짓에 승헌은 차오르는 만족감을 느꼈다. 곱고 단정한 옥환을 이토록 음탕한 사람으로 만든 건 바로 자신이었다. 승헌은 그 사실이 몹시도 기꺼웠다.
“옥환, 이제 넣을까?”
승헌이 여전히 옥환의 뒤에 넣은 손가락을 움직이며 목덜미에 입을 맞추고 묻자 옥환이 새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 역시 얼굴을 볼 수 있는 자세로 했어야 하나? 승헌은 잠시 흔들렸지만, 오늘은 자신이 그리도 열심히 가꾼 논 앞에서 난잡하게 무너지는 옥환이 더 보고 싶다는 쪽으로 기울었다. 이어 그가 뒤로 안은 자세 그대로 옥환을 들어 올려 제 양물의 끝과 옥환의 벌려 놓은 입구를 맞추었다. 그러자 옥환이 승헌의 팔을 잡고 말했다.
“환랑, 천천히…… 해 주십시오……. 세게 하면, 안 됩니다?”
옥환의 떨리는 목소리를 들으니 도리어 간신히 유지하던 인내가 새카맣게 타 버린 느낌이었다. 초조하게 제 입술을 혀로 핥은 승헌은 이내 들어 올린 옥환의 몸을 아래로 쑥 내렸다.
“아흑, 아아!”
옥환이 쾌감과 고통에 울부짖으며 몸부림쳤다. 하나 승헌은 잔뜩 흥분한 탓에 옥환이 적응할 시간조차 주지 않고 그의 내벽을 아래에서 위로 쳐올렸다. 옥환은 제 청을 무시한 승헌에게 화 한 번 내지 못하고 그의 품 안에서 자지러졌다.
“아흐응, 하으, 환랑!”
“큭, 옥환, 하, 어찌 이리, 달라붙나. 내 것이 그리도 맛있어?”
“하으윽, 아흣!”
승헌이 힘을 주어 허리를 밀어 올릴 때마다 옥환의 몸이 튕겨져 올라갔다. 옥환의 비좁은 내벽은 안 그래도 큰 데다 더 비대해지기까지 한 승헌의 양물을 조였다 풀었다 하며 깊숙이 받아들였다. 승헌의 양물이 기분 좋은 곳을 찌르고 다시 빠져나가면, 내벽은 마치 딸려 나갈 것처럼 그것에 차지게 달라붙어 왔다. 승헌은 쾌감에 헐떡이며 정신없이 옥환의 안을 범했다. 빠른 삽입 속도에도 그는 정확히 옥환의 성감대를 찔렀다. 굵은 양물의 구부러진 끝이 예민한 천장을 죽 긁으며 자극하자 옥환이 교성을 질렀다.
“앗, 환랑, 너무 빠릅, 니다……!”
열락에 무너진 옥환의 벌어진 입으로 삼키지 못한 타액이 뚝뚝 흘러내렸다. 승헌은 한 손으로 옥환의 허리를 잡고 퍽퍽 쳐올리며 다른 한 손으로 거칠게 옥환의 가슴을 애무했다. 부어오른 유두는 승헌의 배려 없는 손길에 위아래로 비틀렸다. 정사를 벌이지 않은 것은 고작 닷새였을 뿐임에도, 두 사람은 서로를 애타게 갈구하며 짐승처럼 탐하고 있었다.
“하응, 환랑, 환랑!”
“하, 옥환……! 젠장……!”
이성을 잃은 승헌이 양팔로 옥환의 다리를 잡고 활짝 벌렸다. 벌겋게 달아오른 옥환의 은밀한 곳이 한계까지 벌어져 승헌의 울퉁불퉁한 성기를 품었다. 옥환은 왈칵 치솟는 사정감에 팔다리를 허우적댔다.
“환랑, 싫습니다, 여기, 서는, 하으……!”
“왜, 흣, 그대의 논에 씨물을 뿌리는 게 부끄러워? 발정이 나서 아끼는 논 위에 싸지르는 게 창피한가?”
“아, 환랑, 그만……!”
승헌의 낯뜨거운 물음에 옥환의 아래가 더욱 조여들었다. 승헌은 옥환의 귀를 깨물고 빨며 그에게 속삭였다.
“하면 나는 그대 안에 할게. 읏, 전부 그대 안에다 싸 줄 테니, 걱정하지 마. 알았지?”
“앗, 아아, 아!”
치솟는 쾌감을 견디지 못한 옥환의 다리 사이에서 희멀건 액체가 후두둑 뿜어져 나와 그대로 논 위에 뿌려졌다. 승헌 역시 말한 대로 옥환의 안에 씨물을 쏟아냈다. 옥환은 수치심에 흐느끼면서도, 몰아치는 쾌락에 저항하지 못하고 다시금 승헌과 몸을 섞었다. 절정이 끝나기 무섭게 다시 삽입을 지속하던 승헌은 옥환이 두 번을, 자신이 한 번을 더 가고 나서야 멈추었다.
“환, 랑…… 흐읏, 흐으…….”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옥환의 눈물을 혀로 핥아 올린 승헌이 그를 안아 들었다. 당연히 승헌이 침소로 갈 것이라 여겼던 옥환은 예상했던 방향과 경로가 달라지자 덜컥 겁이 났다.
“화, 환랑……? 어디로 가는…….”
“그대가 내 아랫도리를 책임지겠다 했으니 나도 그대의 유연한 사고를 책임져야지.”
뒤늦게 흠칫한 옥환이 승헌을 제지하려 했으나 이미 승헌은 처소 뒷담까지 옥환을 안고 온 참이었다. 그리고 옥환이 입을 열기가 무섭게 승헌이 옥환의 등을 벽에 기대게 하고 그의 양다리를 붙잡았다. 다리가 벌어지자 승헌이 방금까지 옥환의 안에 배출한 씨물이 투두둑, 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그 낯뜨거운 모습에 승헌의 것이 다시 빳빳하게 발기했다.
“환랑, 이건, 이런 자세는…….”
“떨어지지 않게 잘 잡아.”
승헌은 옥환과 몸을 더 가까이 붙이고는 그의 볼기를 잡고 양쪽으로 벌렸다. 여전히 탁한 액체가 흘러나왔지만, 승헌은 그 틈을 막기라도 하듯 자신의 물건을 젖은 구멍 안으로 푹 쑤셔 박았다. 길고 두꺼운 그것은 들어가자마자 옥환의 깊숙한 곳을 자극했다.
“아흣……!”
허리 밑으로 힘이 빠지려 해 옥환은 두 다리를 승헌의 허리에 감고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논 앞에서보다 더 깊어진 삽입 탓인지 승헌의 꺼슬한 음모와 팽팽해진 고환이 제 몸 위에 문질러지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아흐으, 환랑, 이, 이런 건, 앗……! 너무, 깊어…….”
“옥환. 읏, 큭…… 어찌 이리, 흥분했어? 서서 하는 게 그리 좋은가? 밖이라서, 더, 좋아?”
“하아, 환랑…… 아읏…… 안 됩니다……. 차, 차라리, 침소로…….”
혹시 담 너머로 누군가 자신의 목소리를 듣진 않을까, 음탕한 자신을 보지는 않을까, 옥환은 그런 걱정에 쥐구멍으로라도 숨고 싶었지만, 한편으로는 그러한 사실에 짜릿함을 느끼는 자신이 몹시도 낯설고 부끄러웠다. 하나 그런 옥환의 이중적인 마음을 알아챈 승헌은 더더욱 옥환을 몰아붙이려 거센 삽입을 이어갔다.
“아흣, 하앙, 아앙!”
“옥환, 옥환……!”
옥환은 소리를 참으려는 노력조차 할 수 없는 상태로 승헌이 주는 황홀감에 전율했다. 들으란 듯이 내지르는 교성은 이미 담 너머로 전해지고도 남을 터였다. 하나 행여 다리에 힘을 풀면 바닥에 떨어지고 말 것만 같아, 옥환은 계속해서 승헌의 몸에 허리를 붙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달군 쇠막대처럼 뜨거운 살덩이가 제 안으로 들어오면, 울면서도 힘껏 허리를 돌리고 승헌을 절정으로 이끌었다. 두 사람은 선 채로 또 한 번 극상의 쾌감을 맛보았다.
이윽고 승헌이 다시 허리를 움직이며 옥환에게 입을 맞추었다. 마치 굶주린 맹수가 먹잇감을 뜯어먹듯 사나운 접문이었다. 그는 옥환의 입술을 깨물고, 소리 나게 빨고, 다시 자신의 혀로 옥환의 입천장과 타액이 고인 혀 밑을 정신없이 쓸었다. 서로의 타액이 섞여 턱밑으로 흐르고 입술 사이로 거미줄처럼 늘어졌다. 하나 옥환은 네 번의 절정에 몹시도 예민해진 내벽을 마구잡이로 찔리는 바람에 자신이 접문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저 본능처럼 승헌의 혀를 찾고 그의 타액을 받아먹을 따름이었다.
“아, 환랑, 이제, 앗, 이제……! 아흐응-!”
“하, 옥환, 나도 더는……! 크윽!”
미친 듯이 접문을 나누던 두 사람이 동시에 절정에 이르렀다. 옥환은 계속해서 뒤를 자극받는 바람에 사정도 하지 않고 절정을 느꼈다. 눈앞이 팽팽 돌고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힘이 빠진 옥환을 승헌이 단단히 붙잡았다.
“옥환, 괜찮나?”
어느 정도 옥환이 안정이 되자 승헌이 다정하게 물었다. 옥환은 기진맥진한 채 승헌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우리 조금만 더 할까?”
“……예?”
옥환이 눈을 크게 뜨고 되물었다. 갈라진 목소리에는 그의 기막힘이 그대로 묻어났다.
“태감이 날 부르러 올 때까지만. 응?”
“……마음대로 하십시오…….”
옥환은 더 이상 거절할 힘도 없었다. 차라리 실컷 당하다가 기절이라도 해서 승헌이 당분간 저를 건드리지 못하게 하는 쪽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물론 그렇게 되면 저 또한 오늘처럼 흥분해서 만년 발정기인 사내에게 또 당하고 말 테지만. 아무튼 이 못난 연심이 문제였다.
“아, 읏, 환랑……!”
옥환이 늘어져 있는 사이 그를 안고 침소로 온 승헌은 그를 침상 위에 눕히자마자 다시 정사를 시작했다. 그 집요한 자극에 방금까지 절정을 느껴 약해진 옥환 역시 순식간에 휩쓸리고 말았다. 승헌은 옥환의 가슴에서 젖이라도 짜내려는 듯 쪽쪽 빨아대며 그의 안에 제 양물을 깊이 넣었다가, 다시 귀두만 남겨 놓고 빼더니 이내 힘을 주어 처박았다. 옥환의 몸은 그때마다 펄떡펄떡 뛰며 위로 밀려 올라갔지만, 그 역시 성감의 극치에 다다랐음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옥환, 좋은가? 그리 울만큼, 이 큰 것이 좋아?”
“아, 조, 좋습니다……! 환랑, 아흣, 너무, 너무 좋아……!”
옥환은 또 한 번 사정도 하지 않고 절정을 느꼈다. 하지만 그가 미처 모르는 사실이 있었다. 오늘은 더 이상 승헌을 부르러 올 사람이 없을 거라는 사실이었다.
애석하게도 그가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은, 해가 저물 때까지 승헌에게 시달린 뒤였다.
“참 너무하십니다!”
어느덧 창밖이 캄캄해지고, 셀 수도 없는 정사 끝에 거의 기절하듯 잠들었던 옥환은 깨자마자 승헌의 가슴팍을 내리쳤다. 승헌은 아프지도 않은지 싱글벙글 웃으며 옥환의 목과 가슴에 연신 입을 맞추었다.
“지금 저 화내고 있는 것 안 보이십니까?!”
“나도 아는데…… 그대가 자꾸 먹고 싶은 걸 어찌하나.”
“정말 이상한 약이라도 드신 것 아닙니까? 어찌 이리……!”
옥환이 갈라진 목소리로 고함을 치다가 콜록콜록 기침을 하자 승헌이 얼른 물을 따라 주었다. 옥환은 쌀쌀맞은 태도로 물 잔을 받고는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옥환. 그대도 좋았잖아. 내가 좀 지나치긴 했지만, 그래도 서로 만족했으니 된 것 아닌가.”
“만족이요? 그리 밀어붙이는데 당해 낼 재간이 있겠습니까? 전 중간부터 그만하자고 했습니다!”
“정확히는 ‘환랑, 그만, 앗, 좋아.’ 였지.”
승헌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얼굴이 새빨개진 옥환이 승헌의 가슴을 주먹으로 퍽퍽 두들겼다.
“태감이 부르러 올 때까지만 하자고 하셔 놓고!”
“그자가 날 안 부른 거지 내 탓이 아니지 않나?”
“부르러 오지 말라고 하셨겠지요!”
승헌은 시치미를 떼고는 옥환의 가슴을 만지작거렸다. 옥환은 그 손을 매몰차게 치웠으나, 저를 꼭 끌어안는 팔에서는 벗어나지 못했다. 코끝이 닿을락 말락 하는 거리에서 승헌이 나직이 말했다.
“옥환. 실은 방금도 꿈을 꾸었어.”
“어물쩍 넘어갈 생각 마십시오.”
“아니아니, 들어 봐. 우리 둘이 산등성이에 작은 초가집을 짓고 사는데, 어느 날은 내가 소일거리로 돈을 벌어 고기를 사왔다? 한데 그대가 그걸 보더니 이번 농사도 흉작이라면서 우는 거야. 나한테 밥을 못해줘서 미안하다고.”
승헌의 이야기에 옥환이 화내던 것을 멈추고는 물었다.
“……그래서요?”
“그래서 내가 웃으면서, 그래도 그대가 키운 감자가 있으니 괜찮다고 달랬어. 그랬더니 그대도 곱게 웃더라고. 그리고 둘이서 감자를 쪄서 고기랑 같이 먹었지.”
“…….”
정말 별것 아닌 꿈이었으나, 절로 느껴지는 평화로움에 옥환은 입꼬리를 올린 채 말했다.
“실은 저도 같은 꿈을 꾸었습니다.”
“그럴 것 같았어. 우리가 서로를 너무 사랑해서 이제 같은 꿈까지 꾸나 보군. 그렇지 않나?”
“……글쎄요.”
여전히 화가 다 풀리지 않은 옥환이 뾰로통하게 대꾸하자 승헌이 그런 옥환을 끌어안고 흐트러진 머리칼을 빗어 넘겨주며 말했다.
“옥환. 난 적어도 10년 뒤에는 그대와 그렇게 살고 싶어. 아니, 반드시 그렇게 할 거야.”
“…….”
“그대는 그래줄 수 있나? 나와 함께, 그리 살아 주겠어? 아무것도 없이, 단 둘뿐인 채로?”
승헌의 진지한 물음에 옥환은 승헌의 눈을 바라보았다. 호박색의 눈동자는 달빛을 받아 은 세공품처럼 빛이 났다. 자신이 더없이 사랑하는 눈동자였다. 그러니 아무것도 없다는 말은 틀렸다. 옥환은 승헌의 뺨을 쓰다듬으며 미소 지었다.
“당신이 제게 전부인데, 어찌 아무것도 없다 하겠습니까?”
눈을 크게 뜬 승헌은 픽 웃더니, 이윽고 옥환에게 부드럽게 입을 맞추었다.
“못 당하겠군, 설옥환. 이러니 어느 누가 안 반해?”
무어라 말하려던 옥환은 갑자기 인상을 쓰고는 물었다.
“……왜 또 서셨습니까?”
“으음…… 반해서?”
잠시 후, 처소의 창밖으로까지 옥환의 ‘환랑!’ 하는 노성이 울려 퍼졌지만, 결국 옥환은 그 뒤로도 한참을 시달려야만 했다.
그렇게, 금야 선생이 아닌, 설옥환의 하루가 저물었다.
[금야기 외전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