十二. 애별리고(愛別離苦)
도성으로 진입하는 입구인 천양산 협곡. 승헌은 그곳에 진을 치고 벽국의 군세를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도성의 방어가 가장 튼튼하다고는 하나 그곳에서 벽국의 20만 병사와 직접 싸우는 것은 위험도가 높았다. 도성은 그야말로 최후의 보루였다. 승헌은 천양산에서 결전을 벌일 심산이었다. 비좁은 협곡의 지형, 그리고 벽국의 진입 방향과 반대로 부는 협곡풍을 이용해 그들을 막아 낸다는 게 승헌의 전략이었다.
물론 그 전략의 내면에는 적의 병력을 최대한 줄이겠다는 또 다른 목적도 있었다. 20만의 적군은 서국의 도성이 버텨 낼 수 있는 숫자가 아니었다. 같이 죽을 각오를 하고서라도 어떻게든 벽국의 병력을 소모시켜야 한다. 그래야 여기서 패배를 하더라도 이 뒤에 있는 도성이 버틸 수 있었다.
그저 버티는 것으로는 끝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그것은 지금 승헌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결정이었다. 하나 이기고 싶었다. 반드시 이겨야만 했다.
“벽국군의 동태는?”
승헌의 하문에 장수 하나가 나서 탁자 위에 지도를 펼쳐 놓고 손으로 짚어 나갔다.
“현재 연해를 지나 천양으로 곧장 오고 있다 하옵니다. 중간에 유주를 거쳐야 하긴 할 테지만…….”
“유주에는 주둔해 있는 병력이 많지 않지. 정말로 다 꿰뚫고 있군.”
벽국군은 교묘하게 병력이 부족한 지역만을 거쳐 도성으로 오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도성과 가까운 지역의 군량을 훔치거나 불태워 도성이 지원을 받기 어렵게 만들기까지 했다. 그들에게 정보를 제공한 것은 옥환이 아니었고 그를 탓할 생각도 없었지만, 자신의 어리석음이 야기한 일이니 씁쓸해지는 것은 도리가 없었다.
‘아직도 울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군.’
승헌은 잠깐 옥환을 떠올렸으나 곧 머릿속에서 지웠다. 도성을 나오고서부터는 되도록 그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전쟁에 집중해야 했고, 이길 방법만을 생각해야 했다. 그래야 옥환의 곁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었다. 그의 곁에도 사람 하나를 남겨 두었으니, 혹여 옥환이 위험에 빠지더라도 여차할 때는 그가 어떻게든 해 주리라.
“우리의 병력은 얼마나 되나?”
“도성을 지킬 최소한의 병력을 빼면 곧 도착할 해연성의 원군 2만을 합쳐도 12만이 고작이옵니다. 벽국이 워낙 갑작스레 침공한 데다 빠른 속도로 도성까지 오고 있어 변방의 병력을 모으기엔 시일이 촉박하옵니다. 잦았던 벽국의 소규모 공격 때문에 그놈들이 병력을 모으는 것을 미처 눈치채지 못한 탓도 있사옵니다.”
몹시도 주도면밀한 과정이었다. 하나 조금만 더 주의를 기울였다면 마땅히 막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자신의 오만함과 방심이 사태를 이 지경까지 끌고 왔다는 생각에 승헌의 마음이 절로 무거워졌다.
“하면 지금은 10만의 병사가 여기 있는 것이로군. 벽국은 20만이고.”
서국은 벽국에 비해 정보에서도 밀리고 있는 데다 병력까지 턱없이 부족했다. 그야말로 유례없던 위기였다. 공든 탑이 무너지는 건 한순간이라더니, 한때는 벽국의 도성 앞까지 진격했던 서국이 반대의 상황에 몰렸으니 참으로 탄식할 일이었다.
승헌은 벽국군을 대신한 적색 말이 협곡의 코앞에 와 있는 것을 내려다보다가, 이내 양쪽으로 늘어선 장수들을 쭉 훑었다. 그들은 근심과 불안으로 어두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벽국이 전에 없던 기세로 연승하며 도성을 향해 오고 있다는 소식에 서국의 장병들 역시 사기가 많이 떨어진 상태였다. 이대로는 싸우기도 전에 질 것이다. 승헌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장수들이 일제히 승헌을 올려다보았다.
“병사들을 모두 모으도록. 과인이 직접 그들을 격려하겠다.”
이윽고 승헌이 한곳에 모인 장병들 앞에 준비된 연단에 올라섰다. 한때 전장을 제집처럼 누비고 다녔으며 도깨비 장수라는 별명까지 가진 승헌은 그들의 존경과 선망의 대상이었다. 비록 상황은 어려우나 승헌이라면 필시 어떻게든 해 줄 거라는 기대가 그들의 마음속에 막연히 존재하고 있었다. 하나 연단에 오른 승헌은 그 기대를 꺾는 것으로 연설의 화두를 열었다.
“우리는 어쩌면 벽국에 패배할지도 모른다.”
좌중이 혼란에 빠져 순식간에 웅성이기 시작했다. 장수들은 경악한 얼굴로 승헌을 쳐다보았다. 호진은 반쯤 일어선 상태였다. 하나 이 소란을 일으킨 장본인은 태평하게 말을 이었다.
“벽국이 우리의 군사 기밀을 모두 알고 있으니 무리도 아니겠지.”
“전하!”
결국 호진이 참지 못하고 연단 위로 올라오려 했다. 한데 그때 승헌이 말을 이었다.
“과인이 이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대들의 불안이 없었을까? 아니지. 그대들은 이 사실을 알든 모르든 두려웠을 것이야. 반드시 이기는 싸움이라 할지라도 전쟁에 나간 장병들의 마음이란 다 그러할진대, 벽국이 마치 포효하는 범과 같은 기세로 도성을 향해 오고 있으니 어찌 두렵지 않겠나? 그러나!”
승헌의 우렁찬 목소리에 일대가 고요해지고 왠지 모를 긴장감이 감돌았다. 승헌이 병사들을 응시하며 힘 있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 두려움과 마주해야 살 수 있다. 과인이나 다른 이가 어찌해 줄 거라고 생각하지 마라. 그대들의 가족이, 사랑하는 이가 벽국 놈들에게 고통받을 때도 누군가 대신해서 지켜 줄 것이라 생각하나? 절대 그렇지 않다.”
승헌의 말을 들은 대다수의 병사들이 도성이 있는 방향을 무심결에 쳐다보았다. 그곳에는 필시, 제게 소중한 이들이 자신들과 국운을 우려하며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여전히 전쟁은 두려웠다. 하나 그들의 마음에 잊고 있던, 살고자 하는 의지가 솟아나기 시작했다. 여기서 지게 되면 그들은 소중한 이와, 나라와, 삶의 터전을 잃게 될 터였다.
차차 달라지는 병사들의 눈빛에 호진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는 잠시나마 승헌을 의심했던 자신을 책망했다. 승헌은 군왕이기 전에 위대한 무장이었고, 무략에는 천부적인 재능을 지닌 인사였다. 심지어는 그 금야 선생과의 전적도 비슷했으니, 옥환이 천하제일의 책사라면 승헌은 천하제일의 장수였다.
그런 승헌이, 눈을 형형하게 빛내며 병사들 앞에서 두려움과 맞서라 역설하고 있었다. 병사들은 홀린 듯 승헌의 말에 귀 기울였다.
“우리는 벼랑 끝에 서 있다! 하나 그 끝에 서 있다고 반드시 죽는 것은 아니다! 지켜야 할 것이 코앞에 있는데, 어찌 마음 편히 노략질이나 하러 온 놈들에게 도성을 내어 주겠는가!”
순간 매서운 돌풍이 몰아닥쳤으나 승헌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를 바라보는 이들에게는 마치 단단한 요새를 보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장면이었다. 이윽고 돌풍을 버텨 낸 그가 검을 꺼내 치켜들었다.
“적군이 우리의 패를 모두 알고 있다고 하나 창과 칼이 맞부딪치는 전장에서 책략보다 중요한 것은 싸우고자 하는 의지이다! 그대들은 그대들의 땅에서 적군에게 부질없이 죽겠는가? 아니면 끝까지 싸워 이 땅을 지키겠는가? 적어도 과인은, 홀로 남더라도 끝까지 싸울 것이다! 그대들과, 그대들의 소중한 이들과, 과인의 소중한 이들을 위해.”
승헌의 검이 햇빛을 받아 찬란하게 빛났다. 5만의 병사들이 채운 공간은 쥐죽은 듯 고요했다. 승헌의 무쇠 같은 의지 앞에서 아무도 쉬이 입을 열지 못했다. 그때, 감격에 겨운 목소리가 침묵을 깼다.
“맞사옵니다, 전하! 신은 죽음 또한 두렵지 않사옵니다! 벽국 놈들이 이 땅을 차지하면 신의 가솔들이 끔찍한 꼴을 당할 텐데, 신이 죽을지언정 어찌 그놈들이 도성으로 진격하게 두겠나이까?”
“신도 마찬가지이옵니다, 전하! 끝까지 전하를 보좌하겠사옵니다!”
지켜보던 장수 두 명이 일어나 호기롭게 외치자 다른 장수들 역시 따라서 의지를 불태웠다. 그러자 병사들도 일제히 무기를 들어 올리며 함성을 내질렀다.
“국왕 전하 만세!”
“만세!”
“벽국 놈들을 몰아내자!”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한 병사들을 보며 승헌이 미소를 지었다. 한 명이라도 덜 죽게 하기 위해서는, 한 명이라도 더 목숨 걸고 싸우게 해야 했다. 자신의 부덕함으로 인해 사지에 내몰린 가여운 백성들이었다. 그들에게 나라 없는 설움까지 겪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한데 그때, 불온한 뿔나팔 소리가 공기를 갈랐다. 멀리 세워둔 임시 초소에서 경종이 미친 듯이 울리고 있었다. 병사들은 우왕좌왕했고 장수들은 그런 병사들을 달래느라 주위는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승헌은 자리를 피하거나 뽑았던 검을 집어넣는 대신, 그것을 세게 쥐었다.
벽국군이 생각보다 훨씬 이르게, 코앞까지 온 듯했다.
***
땅울음이 일었다.
수만 필의 말이 먼지를 일으키며 지면을 달리는 소리는 마치 천지가 개벽하는 것만 같았다. 거대한 협곡 사이로 펼쳐진 땅은 말굽에 짓밟혔고, 이내 그 위를 다시 보병들이 밟고 지나갔다. 마치 거대한 파도가 들이치는 듯한 모양새였다. 이윽고 선두에서 달리던 양측의 기병들이 중간 지점에서 일제히 부딪쳤다. 칼과 창이 맹렬히 겨룰 때마다 울리는 날카로운 소리가 귀청을 찢었다. 수많은 말이 고꾸라졌고, 누군가는 말에 깔리기도 했으며, 누군가는 찍소리도 내지 못하고 목이 잘려 말에서 추락했다. 지면에 붉은 강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강 위에, 이번에는 보병들의 시신이 쌓였다. 적색 기의 서국군, 황색 기의 벽국군이 섞여 난전이 벌어졌다. 흙탕물을 뒤집어쓰고 피 칠갑을 한 병사들은 누가 아군이고 적군인지도 구분할 수 없었다. 한쪽에선 여럿이 한 명의 병사를 일방적으로 구타하고 있다가, 뒤에서 다가온 병사들에게 목이 따였다. 또 다른 쪽에선 겁에 질려 도망치던 병사가 말굽에 채여 그대로 명을 달리했다.
그렇게 혼잡한 병사들 위로 돌연 화살비가 쏟아졌다. 벽국이 쏘아 보낸 불화살이었다. 서국 역시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협곡 위에서 무수한 돌덩이가 굴러 떨어지며 벽국군을 무자비하게 깔아뭉갰다.
사람의 목숨이 매 순간마다 스러지고 있는, 그야말로 지상 위에 펼쳐진 지옥도였다. 이것이 전쟁이었다. 옥환이 그렇게 막고 싶어 했던.
살 타는 냄새와, 비릿한 철 냄새와, 고막을 찢는 비명, 날붙이의 마찰음, 그 따위 것에 둘러싸여 남의 팔다리를 밟았고, 내 팔다리가 잘렸다. 여기선 눈, 코, 입, 모든 것이 무용지물이었다. 모든 것이 전쟁의 잔혹한 감각에 사로잡혀, 차츰 인간성이 말라죽는 곳이 바로 전쟁터였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승헌이 있었다. 도깨비 장수. 서국의 왕. 그가 포효하며 창을 휘두를 때마다 적국군의 목 여러 개가 한꺼번에 날아갔다. 맹렬한 속도로 질주하는 그에게 수십 개의 화살이 날아왔고 수십 명의 병사들이 칼을 내리쳤다. 화살이 어깨를 관통했고 칼이 옆구리를 베고 지나갔지만 승헌은 개의치 않고 창을 휘둘렀다. 흡사 사냥감을 낚아채는 매의 발톱처럼, 날카롭고 신속한 창끝이 적의 목숨을 앗아갔다.
승헌이 제 앞으로 달려든 벽국 병사의 목을 긋자 멀리서 화살 하나가 날아와 정확히 그가 탄 말의 앞다리에 꽂혔다. 말이 휘청이자 승헌은 재빨리 엎어지는 말등에서 뛰어내리며 들고 있던 창을 던져 활을 쏜 궁수에게 명중시켰다. 궁수는 단말마와 함께 그대로 고꾸라졌다.
하나 쉴 새는 없었다. 어느새 제 주변에 몰려온 적군을 상대하기 위해 승헌은 허리춤에서 검을 꺼내 들었다.
“죽어라, 원룡!”
한 병사가 기세 좋게 외치며 검을 들고 승헌을 향해 달려왔다. 그것을 허리를 숙여 피한 승헌은 병사의 발목을 자르고, 쓰러진 벽력거를 밟고 올라가 뛰어내리며 그 아래 있던 병사를 베었다. 등 뒤를 노리고 들어오는 병사의 공격을 피하며 발을 걸어 쓰러뜨리고, 그의 등에도 검을 꽂았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병사의 공격을 방금 죽인 병사의 시신으로 막아낸 승헌은 그 시신에 검을 꽂아 넣었고, 검은 그대로 상대의 복부까지 꿰뚫었다.
하나 그래도 여전히 끝은 나지 않았다. 고개를 드니 모래 물결 같은 수많은 벽국 병사가 보였다. 그에겐 흐트러진 숨을 고를 새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내 피인지 남의 피인지 모를 것을 닦아 냈으나 피로 피를 닦아 내니 시야는 더 붉어지기만 했다.
그럼에도 협곡의 좁은 길 때문에 벽국의 수많은 병사는 서국의 방어선을 쉬이 뚫지 못했다. 하늘을 수놓던 불화살 역시 협곡 사이로 부는 바람에 부질없이 추락했다. 서국 병사가 죽는 만큼, 벽국 병사도 죽었다. 승헌은 검을 고쳐 쥐었다.
“전하!”
승헌을 한참 찾던 호진이 승헌과 마찬가지로 피범벅이 된 채 승헌에게 달려왔다. 오면서도 두 명의 병사를 해치운 그는 승헌을 지키듯 그의 등 뒤에 섰다.
“전하, 이곳은 너무 위험합니다!”
“어딘들 위험하지 않겠나. 아우. 나를 지키려 하지 말고, 이길 생각만 해.”
“전하!”
하나 호진이 뭐라 더 말하기도 전에 승헌은 이미 적진 한복판으로 뛰어들고 있었다.
어느덧 하늘에서는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하나 그 비도, 이 잔혹한 전쟁의 피를 씻어 내지는 못했다.
오늘은 앞으로 이어질 길고 긴 싸움의 첫째 날일 뿐이었다.
***
“게 누구 없느냐! 문을 열어라! 열란 말이다!”
쾅! 쾅! 텅 빈 전각에는 철창을 두들기는 소리만이 요란했다. 하도 철창을 흔들고 두들겨 옥환의 손과 팔은 멍으로 얼룩덜룩했으나 정작 옥환은 아픈 줄도 몰랐다. 승헌이 떠나고 하루가 지났다. 이미 전투가 시작되었을까? 승헌은 아직 궁 안에 있나?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옥환은 초조함에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승헌이 떠났다. 저를 두고 전장에 나갔다. 그 사실만으로 그는 이성을 유지할 수 없었다.
“당장 이 문을 열어라! 내 어찌…… 어찌 여기서 내 목숨만 부지하란 말이냐!”
승헌을 지켜야 했다. 서국이 무너지면 염요는 제일 먼저 그를 죽이려 들 것이다. 아니, 어쩌면 전장에서 죽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둘 순 없었다. 그는 서국 백성들에게…… 그리고 제게 너무나 필요한 사람이었다.
연모한다는 말 외에는 무엇도 해 준 적이 없었다. 받고, 또 받고, 그렇게 받기만 한 연심이 승헌을 잃고 침몰하고 있었다. 아무리 절규해도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옥환은 철창을 쥔 채 스르르 주저앉았다.
“……제발…….”
무어라도 할 수 있게. 그 사람을 위해, 죽기라도 할 수 있게.
다 말라 버린 줄만 알았던 눈가에서 그새 또 눈물이 샘솟았다. 미련하게 울어 봤자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걸 아는데도 눈물은 제멋대로 흘러나왔다. 마치 둑이 터지기라도 한 것처럼.
그렇게 한동안 눈물을 떨구고 있던 옥환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는 서둘러 옷을 벗어 철창 사이에 걸었다. 두 철창 사이에 옷을 감아 비틀면, 철창이 조금쯤은 벌어질 수도 있었다. 그 좁은 구멍으로 빠져나갈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으나 무엇이든 좋았다. 아주 작은 희망이라도 있다면 옥환은 제 뼈를 모조리 으스러뜨려서라도 밖으로 나갈 심산이었다.
하나 탄력 없고 부드럽기만 한 비단 옷감은 철창을 구부리기는커녕 금세 실밥이 뜯어져 너덜너덜해졌다. 옥환은 온종일 굶었음에도 불구하고 젖 먹던 힘까지 짜내 옷을 비틀었으나, 애석하게도 옷은 얼마 못 가 금세 찢어지고 말았다.
“안 돼…….”
하나 옥환은 포기하지 않았다. 바지든 속곳이든 쓸 수 있는 천은 아직 있었다. 승헌의 목숨이 달려 있는데 어찌 단념할 수 있으랴.
옥환이 막 남은 옷마저 벗으려던 그때, 뜻밖에도 전각의 문이 살짝 열렸다. 옥환은 눈을 크게 뜨고 문을 바라보았다. 누구일까. 누구든 좋았다. 저를 바깥으로 꺼내 주기만 한다면.
그리고 옥환의 눈앞에 등장한 자는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이었다.
“……백 장군?”
“태사.”
머뭇거리며 문 안으로 들어선 백고는 옥환의 상태를 보고는 다시 문밖으로 나가야 할지, 아니면 다가가서 도와줘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황했다. 하나 옥환은 자신의 모습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철창 앞에 바싹 달라붙었다.
“백 장군! 저를 여기서 꺼내 주십시오! 전하께서 위험하십니다! 제가, 제가 그분을 도와야 합니다!”
어쩔 줄 몰라 하던 백고는 옥환의 그 말에 심각한 얼굴이 되어서는 옥환에게 다가왔다.
“태사. 전하께서는 이미 출병하셨습니다.”
승헌이 이미 출병했다는 말에 옥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혹시, 어쩌면, 하늘이 돕는다면, 마지막으로 그를 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그 허튼 마음에 옥환은 속으로 자조했다. 뻔뻔하게도. 이러니 벌을 받는 것이다. 하나, 그 벌이 승헌에게까지 가게 둘 수는 없었다.
옥환은 마음을 추스르고는 다소 침착해진 어조로 말했다.
“백 장군. 그래도…… 그래도 저는 나가야겠습니다. 제발, 백 장군. 저를 여기서 꺼내 주십시오…….”
“태사.”
“이곳에 있지 않을 것입니다. 전하를 홀로 보내지 않을 것입니다.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더라도 함께 갈 것이고, 그분 없는 삶을 혼자 살아가지도 않을 것입니다.”
절대 물러설 것 같지 않은 옥환의 태도에 백고의 마음은 한없이 무거워졌다.
기실 자신이 이곳에 있는 것은 승헌이 저를 남기고 갔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금군 병사로는 마음이 놓이지 않았는지, 출병 직전 승헌은 백고를 따로 불러 궁에 남으라고 명했다. 표면적인 이유는 그에게 도성을 맡기겠다는 것이었으나, 실질적으로 승헌이 바란 것은 그가 옥환을 지켜 주는 것이었다. 당연히 백고는 극구 거절했다.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전투에서 승헌과 함께 싸우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하나 승헌은 왕명 운운하며 끝끝내 백고를 이곳에 남겨 놓고 말았다.
옥환을 향한 제 마음을 다 아는 승헌이 굳이 저를 옥환 곁에 남겨 놓은 이유는 무엇일까. 옥환을 어떤 얼굴로 봐야 할까. 백고는 도성 안의 아녀자들을 대피시키고 병사들을 배치하는 내내 두 가지 문제에 대해 고민했다. 그러다 결국 더는 미룰 수 없어 겨우 옥환을 찾아온 참이었다. 하나 막상 그가 마주한 옥환은 승헌을 향한 걱정에 제정신이 아니었다. 머리는 산발을 하고 눈은 벌겋게 부은 데다 속곳 차림이기까지 한 그는 어떻게 봐도 멀쩡한 사람 같지 않았다. 이런 그를 밖으로 꺼내 줘도 되는지 백고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하나 옥환을 어찌 막을 수 있을까. 자신은 승헌이 아닌데.
그러다 문득 옥환의 팔을 뒤덮은 멍을 본 백고가 숨을 삼켰다.
‘옥환을 지켜 줘. 내키진 않지만 백 아우가 옥환을 아끼는 것은 잘 아니, 남이 할 수 없는 일을 해 줄 수 있으리라 믿네.’
남이 해 줄 수 없는 일. 줄곧 그 말이 무슨 뜻인지를 고민해 왔다. 이게 정녕 승헌이 원했던 바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결국 백고는 열쇠를 꺼내 철창의 문을 열어 주었다.
“식사부터 하시지요. 줄곧 공복이지 않으십니까.”
승헌이 전각 앞을 지키게 한 금군 병사는 옥환에게 식사를 주지 않았다는 모양이었다. 어찌 전하의 명을 어기고 그런 짓을 벌였냐 물었더니 이번 전쟁을 일으킨 주범에게 식사를 챙겨주는 것이 도리어 반역이 아니냐는 대답이 돌아왔다. 승헌에게 이미 들어 옥환이 저지른 일을 알고 있는 백고는 금군 병사를 차마 벌하지 못했다. 어쩌면 옥환이 이렇게까지 망가진 것은 그러한 죄책감 때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을 추스르셔야지요. 태사의 마음이 어떤지 모르지 않습니다. 저 또한 최전선에 나가 계신 전하를 생각하면 이곳에 있는 제가 원망스럽습니다.”
백고가 옥환을 타이르며 챙겨온 식사를 내려놓았다. 하나 옥환은 식사를 하지 않고 그것을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백고는 제 겉옷을 벗어 옥환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백 장군께선 어찌 여기 계십니까.”
“……전하께서 태사를 제게 맡기고 가셨습니다.”
그 말만으로 승헌의 마음을 다 알았는지, 일순 옥환의 눈가에 물기가 어렸다. 하나 그는 소매로 눈물을 훔치고는 숟가락을 들어 밥을 꾸역꾸역 밀어 넣었다. 백고는 혹여 옥환이 체할까 싶어 물을 따라 주었다.
그렇게 고된 식사를 마친 뒤 옥환이 일어섰다.
“저는 가야겠습니다, 백 장군. 제 마음을 이해한다 하셨지요? 하면 저를 막지 마십시오.”
그러자 백고 역시 따라서 일어섰다. 옥환은 백고가 저를 막으려 이러는 건가 싶어 한 걸음 물러서서 백고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그가 자신에게 약하다는 점을 이용하면 빠져나갈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옥환이 백고를 어떻게 따돌릴지를 고심하며 빠르게 머리를 굴리는데, 불현듯 백고가 작게 웃었다.
“태사는 정말…… 포기를 모르시는 분이십니다.”
그러자 경계만이 가득했던 옥환의 표정에 절절한 그리움과 애정이 가득 찼다.
“어찌 포기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그분 없이는 못 삽니다.”
일순 백고의 눈에 씁쓸함이 스쳤으나 그는 갑자기 돌아서서 문 쪽으로 걸어갔다. 영문을 모르는 옥환이 주춤거리다가 백고를 따라 나왔다.
“잠깐 계십시오. 먼 길을 가야 하니 채비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 설마 장군, 저와 함께 가실 요량이십니까?”
“전하께서 태사를 지키라 하셨으니 태사를 혼자 보내면 전하께 크게 혼이 날 것입니다.”
솔직히 말해 옥환에겐 희소식이었다. 백고가 함께 가준다면, 자신이 계획한 바를 이루기도 좀 더 쉬울 것이다. 하나……. 잠시 머뭇거리던 옥환이 이내 진중한 얼굴로 말했다.
“살아 돌아오지 못할 길일 수도 있습니다.”
“상관없습니다. 저도 전하와 장수들만 보내 놓고 홀로 남아 있을 생각은 없었습니다. 무장이 전장에서 죽는 것은 그야말로 영광스러운 일이 아닙니까.”
그리고 승헌이 말했던 ‘남이 해 줄 수 없는 일’, 백고는 줄곧 그것이 무엇일지 고민했으나 옥환을 만남으로써 비로소 그 해답을 찾았다. 그것은 바로 옥환의 편에 서 주는 일이었다. 옥환에게 식사를 주지 않았던 금군 병사처럼, 어쩌면 서국에는 옥환의 편이 되어 줄 사람이 더는 없을지도 모른다. 하나 자신은 그렇게 해 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로 마음먹었다.
이윽고 백고가 말과 옥환이 갈아입을 옷 등을 준비해 돌아왔다. 서둘러 옷을 갈아입은 옥환이 말에 오르자 백고 역시 따라 오르며 말했다.
“전하께선 천양산에 계십니다. 쉬지 않고 달리면 사흘 내로 도착할 것입니다.”
“아니요.”
옥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신이 갈 곳은 따로 있었다.
“전하께 가지 않으시는 겁니까? 하면…….”
“그것은 제 욕심일 뿐입니다. 그리고 제가 가면 전하는 제 도움도 받지 않고 저를 또 보내거나 숨겨 두려 하시겠지요. 저는, 전하를 지키러 갈 것입니다.”
옥환의 굳은 결의를 확인한 백고가 그러면 어디로 갈 것이냐 물으니, 옥환이 말고삐를 쥐고 나직이 일렀다.
“벽국입니다.”
“예……?”
아연한 기색으로 되묻는 백고에게, 옥환이 다시 한번 힘주어 말했다.
“저는, 벽국의 도성으로 갈 것입니다.”
***
서국의 도성을 떠나온 지 달포 가까이 흘렀다. 옥환은 벽국으로 향하는 길에 변방의 성에 들러 병력을 모았다. 그래 봤자 고작 1만 남짓이었다. 게다가 벽국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자잘한 전투로 죽은 자들도 꽤 되었다. 하나 옥환은 그 적은 병력을 이끌고 벽국의 도성을 향하고 있었다. 그는, 직접 염요를 공격할 생각이었다.
비록 염요가 서국의 군사 정보를 알게 되었다고 하나, 옥환 역시 벽국의 군사 정보를 꿰고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옥환이 알기로 서국에 쳐들어간 20만의 병력은 벽국 전체의 병력과 맞먹는 수준이었다. 그렇다면 현재 벽국에는 도성을 지킬 병력이 많지 않을 것이다. 1만의 군사로도 염요를 위협하기는 충분할 만큼. 옥환은 그렇게 판단했다.
물론 겁 많은 염요가 도성에도 어느 정도의 병력을 남겨 놓았을 거라는 건 알았다. 옥환이 실제로 벽국이나 염요를 쓰러트리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렇기에 옥환은, 오히려 금야 선생이 군을 이끌고 벽국의 도성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퍼뜨렸다. 그리하면 염요는 겁을 먹고 서국에 보낸 군대를 불러오려 할 것이다. 그럼…… 승헌은 살 수 있다. 물론 단단히 대비를 한 염요의 군대 앞에서, 자신들은 손쓸 새도 없이 죽겠지만.
애초에 옥환의 목적은 서국의 승리가 아니었다. 승헌의 생존이었다. 이번 위기만 넘기면 승헌은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그만큼 강하고, 또 대단한 사람이었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내는 그런 사람이었다.
하나 할 수 있다면, 만일 가능하다면, 그를 위해 염요를 치고 싶었다. 염요가 대비를 하기 전에 도성에 당도할 수만 있다면 아주 말이 안 되는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옥환은 그 낮은 가능성에 제 목숨을 걸었다. 그 가능성 때문에 생명을 깎아 가며 전속력으로 말을 달렸다.
백고도, 1만의 병사들도, 그리고 자신까지 모두 승헌을 위해 적지의 한복판으로 향한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도성의 코앞까지 왔다.
“모든 준비가 끝났습니다, 태사. 내일이면 도성으로 출발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여기까지 왔군요.”
백고는 새삼스러운 눈길로 옥환을 우러러보았다. 처음 옥환의 계획을 들었을 때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하나 옥환은 그 말도 안 되는 계획을 여기까지 끌고 왔다. 어쩌면, 정말로 그는 기적을 일으킬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의 지략과 벽국에 대한 지식도 보탬이 되었으나, 무엇보다 그의 절박함이 그들을 여기까지 이끌었다.
옥환은 자신이 죽는 것에 주저함이 없었고, 수없이 많은 위험에 몸소 뛰어들었다. 그럼에도 옥환이 지금껏 아무 탈 없이 살아 있는 것은 백고가 헌신적으로 그를 지킨 덕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그저 운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하나 옥환은 그런 위기를 넘는 와중에도 병사 하나하나를 제 몸보다 더 챙겼고, 잠을 줄이고 식사를 거르며 부상자들을 치료하고 그들에게 식량을 더 분배해 주었다. 그 모습을 보며 1만의 병사들은 이미 그에게 완전히 감화된 상태였다. 그 금야 선생이 저렇게까지 하는데, 자신들이 눈앞의 길을 두려워해서야 되겠는가.
그리고 백고는 그런 옥환을 어떻게든 지켜 내겠다고 다짐했다. 백고의 생각에 이 계획에는 옥환이 반드시 필요했다. 그는 살아남아야 했다. 적어도 뜻한 바를 이룰 때까지는.
“가시지요, 태사. 목적지가 코앞입니다.”
대열을 정비하고 돌아온 백고가 그렇게 말하고는 말에 올라타려는데, 무슨 일인지 옥환이 그것을 제지했다. 백고를 보는 옥환의 눈빛은 심상치 않았다.
“백 장군. 몇 날 밤을 생각해보았습니다만, 장군은 그만 돌아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예?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태사. 저는 전하께 태사를 지키라 명받은 몸입니다.”
옥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의 시선은 백고의 허리 언저리를 향하고 있었다. 비록 갑옷에 가려져 있으나, 그 안에는 백고가 옥환을 지키느라 입은 상처가 있었다.
“상처가 제대로 아물지 않고 있습니다. 누워서 쉬어도 모자랄 판인데 온종일 말을 달리니 그렇겠지요. 백 장군이 함께 와 주신 덕에 여기까지 무사히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장군께선 이제 할 몫을 다하셨습니다. 전하께서도 장군을 치하하실 것이니 그만 돌아가십시오.”
“태사!”
쉬이 납득하려 하지 않는 백고의 완강한 태도에 옥환이 입술을 살짝 깨물고 있다가, 별수 없이 말을 꺼냈다.
“저는…… 백 장군이 저 때문에 죽길 원하지 않습니다. 저는 장군께 그런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장군. 장군의 부친은…… 저 때문에 죽은 것입니다. 제가 그리 만들었습니다.”
“아닙니다.”
백고는 단호하게 부정했다. 옥환이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하는 건지 어렴풋이 짐작은 갔다. 옥환이 서국의 기밀을 빼냈다는 것은 승헌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기밀은…… 아마 자신과 아비를 이용해 빼낸 것이리라. 하나 아비의 반역은 본인의 의사로 벌인 일이었고, 승헌을 해하려는 아비를 막아선 것도, 저더러 아비를 죽인 것으로 하라는 승헌의 명에 따른 것도 모두 백고 자신이었다. 옥환이 의도한 일이라고 해도 판단을 내리고 행동에 옮긴 것은 자신이다. 그리고 그것에, 후회는 있을지언정 원망은 없었다.
“끝까지 함께하겠습니다. 전하께서도 그리하길 바라실 것입니다.”
백고는 승헌의 핑계를 댔다. 사실은 자신이 옥환을 홀로 두고 떠날 수 없는 것뿐이었다. 옥환은 아마 평생토록 승헌만을 사랑할 것이고, 그를 위해 죽는다 해도 외려 기뻐할 사람이었다. 그런 옥환을 향한 미련을 끝내 버리지 못하는 것도 결국 제 선택이었다.
“……하면…… 하면 살아 주십시오. 저를 위해서 죽으시면 안 됩니다. 백 장군께서 그리하신대도, 저는 그 마음을 반의반도 돌려드리지 못할 것입니다.”
백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옥환은 그런 백고에게 미안함과 고마움을 동시에 느꼈다. 이리 좋은 사람이고 또한 충신이니, 그가 부디 살아남아 승헌의 곁에 오래오래 있어 주길 바랐다.
‘나는, 없는 쪽이 나은 사람이겠지만.’
옥환은 묵묵히 안장 위에 올랐다. 승헌의 미래에 자신이 불필요한 존재라고 해도, 지금은 아니었다.
그리고 다음 날. 금야 선생이 온다는 소식을 들은 벽국의 성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고, 옥환 역시 만반의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이윽고 소수의 기마부대가 선봉에 섰다. 물론 그 안에는 옥환과 백고도 있었다. 그리고 그들 중 절반은 무기 대신 커다란 방패만을 들고 있었다. 공성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문이 얼마나 빨리 뚫리느냐였다. 그리고 옥환은 성문을 뚫을 보병들을 보호하기 위해 아예 기병들 절반의 공격을 포기했다. 또한 나머지 기병 반은 사다리를 이용해 벽국의 성벽을 오르며 모든 공격이 그들에게 집중되도록 할 예정이었다. 모두가 이미 목숨을 버릴 각오를 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옥환은 그들의 죽음을 헛되이 만들고 싶지 않았다. 반드시 벽국의 성문을 뚫어 이 지나치게 길었던 전쟁을 끝맺겠노라고, 그는 제 뒤를 따르는 병사들을 보며 맹세했다.
“전군, 돌격하라!”
백고가 소리 높여 외치자 너나 할 것 없이 수백의 기병들이 방패를 들고 달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보병들이 성문 앞으로 올 때까지 공격을 막아 주고, 또한 그들이 성문을 부술 수 있도록 지켜 주는 역할이었다. 그리고, 가장 쉽게 죽을 수 있는 역할이기도 했다. 무차별적으로 퍼부어지는 공격을 받아 내야 했기에.
마치 연습이라도 한 듯 수많은 방패는 줄을 맞추어 달렸다. 진군이 시작되자 벽국의 성벽 너머에서 소나기 같은 화살이 쏟아져 내렸다. 쏟아지는 화살의 대부분은 방패에 맞아 튕겨나갔으나, 고작 방패 하나가 완전할 수는 없었다. 화살은 그들이 탄 말을, 미처 방패가 막아주지 못하는 틈을 찌르고 들어왔다. 옥환의 옆에서 달리던 기병이 고꾸라졌으나 옥환은 돌아볼 여유도 없었다. 그는 이를 악물고 달렸다.
쾅! 무언가가 방패에 부딪치며 방패를 들고 있던 옥환의 팔이 찌르르 울렸다. 지나치게 빨리 달리는 말 때문에 금방이라도 앞으로 넘어질 것 같았다. 하나 옥환은 버텼다. 근육이 찢어져도, 감각이 마비되어도.
그리고 마침내, 굳건히 잠긴 성문이 눈앞에 보이기 시작했다. 문 앞에 다다르자마자 옥환은 말을 세우고 재빨리 방패를 들어 올렸다. 옥환을 따라 무사히 성문 앞까지 도착한 다른 기병들 역시 일제히 방패를 들어 올렸다. 밖에서 보기에 그것은 마치 작은 요새처럼 보였다.
방패를 들지 않은 나머지 절반의 기병들 중 살아남은 이들은 뒤따라오고 있는 보병들을 지켰다. 보병들이 전력을 다해 달려오는 와중에도 기병들에게는 끝없는 화살과 포석, 뜨거운 기름 따위가 쏟아졌다. 수많은 병사가 죽어 나갔고, 보병들이 오기까지의 시간이 영겁 같았다.
“크윽!”
“버텨라! 버텨야 한다!”
옥환 역시 돌덩이가 방패를 때리고 지나갈 때마다 팔뼈가 으스러지는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 어쩌면 정말 금이 갔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나 버텼다. 버텨야 했다. 아직 성문을 뚫을 보병들은 문 앞에 다다르지 못했다. 성문을 부술 거대한 망치를 들고 옮기는 보병들은 벽국군의 공격에 고스란히 노출된 상태였다. 그들 역시 무수히 목숨을 잃었으나, 한 사람이 죽어 망치를 들 수 없게 되면 다른 이가 달려들어 다시 들어 올렸다. 오직 희생으로 쌓아 올린 끈기였다.
“크헉……!”
옥환의 오른쪽에 있던 기병이 방패 사이로 날아온 화살에 맞아 쓰러졌다. 방패의 진이 무너져 옥환이 난감해하던 그때, 맞은편에 있던 백고가 얼른 떨어진 방패를 주워 들었다. 안 그래도 크게 만들어진 방패는 하나를 드는 것만으로 팔이 떨어져 나갈 것 같았으나, 백고는 사력을 다해 두 개의 방패를 들고 있었다. 옥환은 기도했다. 제발, 우리 모두가 쓰러지기 전에 보병들이 도착하기를.
그리고 마침내, 옥환의 등 뒤로 우렁찬 기합 소리가 들려왔다. 망치를 든 보병들이었다. 방패를 들고 있던 기병들이 그들을 보고는 재빨리 길을 터 주었다. 보병들은 방패로 만든 요새 안으로 들어왔다. 방패 사이의 틈은 잽싸게 다시 맞물렸다.
“신호에 맞춰서 때려라!”
옥환은 후들거리는 팔로 방패를 지탱한 채 소리쳤다. 그 말을 가장 가까이서 들은 보병이 큰 목소리로 구호를 외쳤다.
“하나! 둘!”
그러자 남은 보병들도 구호를 따라하며 하나에 망치를 뒤로 물렸다가, 둘에 힘차게 성문을 두들겼다.
성문이 공격당하는 것을 눈치챈 벽국군의 공세가 더욱 매서워졌다. 옥환의 발밑에도 시체가 쌓였다. 특히 임시로 만든 방어벽은 집중포화의 대상이었다. 더 이상 견디지 못한 기병들이 하나둘씩 나가떨어지기 시작했고, 구멍이 뚫린 방어벽 위로 쏟아지는 화살에 무방비한 보병들이 차례차례 쓰러졌다. 그러다 결국, 부쩍 줄어든 인원에 망치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보병들이 그것을 놓치고 말았다.
“안 돼!”
옥환은 방패를 내던지고 말에서 내려 직접 망치를 들어 올리려 했다. 방패 두 개를 드느라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던 백고가 그 모습을 보고는 기함했다.
“태사, 위험합니다!”
위험한 것은 어디에 있든 마찬가지다. 옥환은 속으로 그렇게 대꾸하며 주춤거리는 보병들에게 일렀다.
“어서 들어 올려라! 벽국의 성문도 거의 부서졌다! 조금만 더 버티면 된다!”
옥환의 격려에 힘을 얻은 보병들이 젖 먹던 힘까지 짜내 다시 망치를 들어 올렸다. 옥환 역시 팔에 힘을 주었다. 언제 손가락이 부러진 것인지, 오른손의 약지와 소지가 기괴한 방향으로 비틀려 있는 것이 보였으나 옥환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손가락 두 개 정도 못써도 검을 들기엔 충분했다. 무엇보다 지금은 벽국의 성문을 반드시 부숴야 했다.
옥환은 갈라진 목소리로 외쳤다.
“하나! 둘!”
“하나! 둘! 하나! 둘!”
망치를 든 손바닥이 까져 피가 줄줄 흘렀다. 눈앞이 흐려졌다 밝아졌다, 정신없이 흔들렸다. 앞에 있던 병사들이 하나둘씩 쓰러졌다. 안 돼. 안 돼……. 옥환이 간절하게 중얼거렸다.
“제발……!”
옥환의 짧은 외침과 함께 우지끈, 하는 굉음이 들렸다. 그리고, 영원히 무너지지 않을 것 같던 벽국의 성문이 마침내 떨어져 나갔다. 성문은 어마어마한 소리를 내곤 먼지를 일으키며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문이, 열린 것이다.
“검을 들라! 어서!”
옥환은 병사들에게 외치며 허리춤에 있던 검을 뽑았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었다. 이 앞에 있는 산이, 진정 그들이 넘어야 할 시련이었다.
“공격하라―!”
“공격하라! 벽국군을 쓸어 버려라!”
열린 성문으로 수많은 서국 군사가 쳐들어갔다. 옥환은 검을 들고 달렸다. 다른 건 중요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염요의 항복을 받아 내야 했다.
“백 장군! 저를 엄호해 주십시오!”
백고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옥환의 곁으로 달려왔다. 옥환은 수많은 아군과 적군을 지났다. 오직 염요, 그가 있을 왕궁을 향해서.
그와 자신 사이의 모든 인연과 악연을 끊어 버리기 위해.
어느 정도 성문과 멀어지자 옥환은 바닥에 떨어져 있던 활과 화살통을 주워 들고는 어깨에 멨다. 하나 그가 멘 것은 빈 화살통이었다. 그는 화살통에서 꺼낸 화살 대부분을 버리고는 두 개만을 옷 속에 챙겼다. 백고는 그 영문 모를 행동에 의문을 느꼈으나 옥환은 어서 가야 한다며 그를 재촉했다. 이윽고 두 사람은 좁은 샛길로 방향을 틀었다. 도성 안의 지리는 물론 궁으로 가는 은밀한 경로까지 익히 알고 있는 옥환이었기에 병사들을 피해 궁 안에 잠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윽고 왕족만이 다니는 비밀 통로로 손쉽게 내전에까지 들어온 옥환은 목소리를 낮추고 백고에게 말했다.
“염요는 필시 대전에 있을 것입니다. 제 목숨을 애지중지하는 위인이기는 하나 작금의 상황 또한 궁금해서 안달이 나 있을 테니까요. 우리가 염요를 사로잡는다면, 성문 앞의 전투가 어찌 되든 승기는 우리가 잡게 될 것입니다.”
백고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비밀 통로는 곧장 편전과 이어져 있었다. 염요가 편전에 있을 가능성도 있었으나, 옥환은 편전에서 대전까지의 최단 경로를 미리 머릿속에 그려 놓았다. 통로 밖으로 나가면 궁을 지키고 있는 병사들 또한 존재할 것이다. 그들과 마주치게 되면 고작 둘뿐인 자신들은 죽은 목숨이라고 봐야 옳았다. 옥환은 들키지 않을 길만을 고르며, 혹시 발생할지 모르는 모든 돌발상황의 대처법을 생각해 놓았다.
자신이든 백고든, 하나라도 살아남아 염요를 잡으면 모든 것을 끝낼 수 있었다.
잠시 후, 옥환과 백고가 편전의 숨겨진 문을 열고 나타났다. 서둘러 주위를 살폈으나 상황이 상황이기 때문인지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옥환은 아주 잠깐 동안, 1년 반 만에 보는 편전의 모습에 염완과의 추억을 떠올렸다. 염요를 찾아와 훈계와 하소연을 늘어놓던 일도 생각났다. 하나 그것은 찰나에 불과했다. 그는 빠르게 편전을 가로질러 문을 열어 밖을 살펴본 뒤, 신속하게 밖으로 나왔다.
“이쪽입니다, 백 장군.”
옥환은 소리 죽여 이야기하고는 재빠른 걸음으로 대전을 향했다. 저 전각만 지나면 대전의 뒷문으로 들키지 않게 들어갈 수 있을 터였다.
“백 장군, 이제…….”
백고에게 말을 하려 뒤를 돌아본 옥환은 아연실색했다. 어느새 백고가 사라지고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당혹해하는 옥환의 앞에, 전혀 예기치 못한 인물이 나타났다.
“이자를 찾으시오, 승상?”
너무나 잘 아는, 그리고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에 옥환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마지막으로 들었을 때와 달라진 게 있다면 유약하고 기운 없던 목소리가 자신감에 차 있다는 것이었다.
염요. 벽국의 왕이자, 옥환의 주인이었으며, 옥환을 죽이려 했던 인물이었다.
염요는 백고를 인질로 잡은 채 열댓 명의 병사들과 함께 옥환이 서 있는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주변에는 벽국의 중신들 또한 함께하고 있었다. 염요의 여유 있는 표정에 옥환은 자신이 실패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으나, 염요는 자신이 올 것을 예상했던 것이다. 어쩐지, 전투가 벌어졌다고는 하나 궁 안이 너무 허전한 것에 의문을 느끼던 차였다. 옥환은 검을 쥔 손을 아래로 내렸다. 이런 상황에서 어차피 저항은 의미가 없었다.
염요는 당황한 옥환의 얼굴을 보며 거드름을 피웠다.
“어찌 그리 놀란 얼굴을 하시오? 승상. 과인은 승상에 대해 잘 알고 있소. 아주 잘 말이오.”
“…….”
“계평은 아마 과인이 제일 미워하고 두려워하며, 한편으론 부러워하는 인물이 견룡이라 생각했을 테지. 하나 그것은 틀렸소. 과인이 미워하고, 두려워하고, 또한 부러워했던 이는 견룡이 아니라 그대라오, 금야 선생.”
생각지 못한 일이었으나 납득은 갔다. 자신이 충정이라 여기며 해 왔던 모든 일들이, 때로는 저를 구속하기도 했던 벽국에 대한 책임감이, 염요에게는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흉기였을 테니까.
자신이 사라진 이후 달라진 염요의 행보를 보면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이었다. 그저 생각하지 않았다. 일부러 피했는지도 모른다. 벽국에 있어서 가장 방해물이었던 존재가 서국이 아닌 자신이라는 걸 인정하기 싫어서.
하나 염요와는 결국 대척점에 서고 말았다. 언젠가는, 이리될 운명이었을지 몰랐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뜻이 통했던 염완과 달리 그의 아들인 염요와 옥환은 지나치게 달랐다. 상성이 전혀 맞지 않았다. 옥환에게 있어 염요는 부족한 주군이었고, 반대로 염요에게 있어 옥환은 과한 신하였다. 둘은 서로를 고달프게 하는 존재였다.
“그대를 닮고 싶었소. 과인을 보필해야 하는 신하들에게도, 과인을 우러러봐야 하는 백성들에게도, 심지어는 과인을 사랑하는 것이 당연한 아버지에게조차 과인보다 더 사랑받는 그대를. 해서 그대의 행동과 사고를 관찰하고, 기록하고, 그대가 떠난 뒤에는 그것을 흉내 냈지. 그랬더니 이것 참, 우습기는 하지만 모두가 나를 훌륭한 군왕이라 칭찬하는 것이 아니겠소?”
옥환은 염요의 말을 듣는 척하며 재빨리 병사의 수와 그들의 공격 범위를 예상했다. 하나 염요는 그런 옥환의 심리조차 파악했다는 듯 싸늘하게 일렀다.
“검을 내려놓으시오. 그대에게 검을 쥐여 줄 정도로 과인은 아둔하지 않소.”
“…….”
“어서 내려놓으시오. 아직 승상과는 하고 싶은 말이 많소이다.”
염요가 손짓하자 궁수들이 앞으로 나서 일제히 옥환을 겨누었다. 이래서는 검을 휘둘러 보기도 전에 화살받이가 될 것이다. 옥환은 결국 검을 바닥에 내려놓아야만 했다.
“태사…….”
백고가 그런 옥환을 안타까이 바라보았으나 그에게도 마땅한 수는 없었다. 결국 이렇게 죽는가. 백고는 허탈한 마음에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해서, 전하. 소신에게 무슨 할 말이 그리 많으시옵니까?”
“승상에게 보여 주고 싶었소. 과인은 승상이 깔보고 업신여길 정도로 무능하지 않다는 것을. 보다시피 이렇게, 과인이 승상을 이기지 않았소?”
옥환은 어깨를 으쓱했다. 염요의 무능함을 염려하고 원망하기는 했으나 맹세컨대 염완의 아들인 그를 업신여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하나 염요가 그리 생각했다면, 저를 향한 미움이 오랜 기간 동안 켜켜이 쌓였으리라. 제게 수치심을 주기 위해 벽국의 신하들과 함께 등장한 것만 봐도 그러했다. 그는 아마, 반드시 자신을 죽이려 들 것이다.
“군왕이 충신을 이겼으니 참으로 잘되었사옵니다, 전하.”
옥환이 무심한 얼굴로 비꼬자 염요가 역정을 냈다.
“충신?! 적국의 왕을 마음에 품은 그대 따위가 어찌 충신이지?”
그러자 옥환 역시 냉담한 표정으로 염요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이번 침공이 누구 덕에 가능한 일이었사옵니까? 전하께서 받으신 서국의 군사 기밀은 누가 빼낸 것이옵니까? 신이 적국의 왕을 마음에 품었다? 누구에게 들으신 것이옵니까? 계평? 전하를 닮아 신을 미워하던 일개 호위 말이옵니까?”
염요가 주먹을 부르르 떨며 무어라 반박하려 했으나 그보다 먼저 옥환이 호통을 쳤다.
“신이 이곳에 온 것이 누구 탓인데! 그것을 정녕 몰라 이러시옵니까? 전하께서 계평을 시켜 소신을 죽이라 하시지 않았사옵니까?!”
“그것은 승상이……!”
“소신은 그저 그 이유가 알고 싶었사옵니다. 적국에 가서 수많은 치욕과 비난을 견뎌 내며 충성을 바쳤거늘, 왜 이리 버려져야만 하는 것인지 전하께 묻고 싶었사옵니다. 하나 물을 필요가 없을 것 같사옵니다.”
옥환은 염요보다는 병사들의 표정을 살피며 말을 이었다. 그들이 염요를 배신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아주 짧은 시간이라도 좋으니, 그들이 틈을 보이기만 하면 되었다. 옥환은 품속에 숨겨 둔 화살의 감촉을 느꼈다. 화살통이 비어 있으니 염요도 설마하니 화살이 남아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으리라. 그리고 옥환은 그것을 위해 빈 화살통을 메고 다녔던 것이다.
두 개의 화살. 이것이 옥환에게 남겨진 유일한 기회였다.
“전하께선 소신을 질투하셨던 것이지요. 그래서 소신이 벽국을 떠난 틈을 타, 소신을 아예 없애 버리려 한 것이옵니다.”
“아, 아니오! 그렇지 않소! 과인을 배신한 건 승상이 아니시오?!”
옆에 선 신하 하나가 염요를 제지하려 했으나 그는 말을 듣지 않았다. 인간의 본질은 쉬이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에게 내내 열등감을 느끼고 있던 염요라면 자신의 등장에 내심 긴장하고 있었을 터였다. 옥환은 순식간에 여유를 잃고 안절부절못하는 염요를 차디찬 눈으로 응시했다. 이런 자에게 이 땅을 다스릴 자격은 없었다. 절대로.
옥환은 염요를 더 흔들기로 작정했다. 백고에게 제 작전을 전하기 위해서라도 시간이 좀 더 필요했다.
“선왕 전하께서는 소신에게 전하를 맡기셨사옵니다. 부덕한 아들이니 그대가 잘 보필하여 왕이라는 이름값이나마 할 수 있게 해 달라며. 하나 소신이 불충하여 선왕 전하의 뜻을 받들지 못했으니, 이 자리에서 죽으라면 죽겠사옵니다.”
“웃기지 마시오! 아버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을 리가 없어!”
“글쎄요. 전하께서 선왕 전하에 대해 뭘 그리 잘 아시옵니까? 선왕 전하에 대해 더 잘 아는 것은 소신이옵니다, 전하.”
“설옥환!”
염요는 염완이 살아 있을 때부터 그의 관심에 들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하나 염완은 군왕으로서의 책무를 부모로서의 책무보다 우선시했고, 그런 그에게는 아들인 염요보다 책사인 옥환이 우선인 게 당연했다. 옥환은 새삼 생각했다. 제대로 된 부모 역할을 하지 못한 것에서, 염완 또한 실패했는지 모른다고.
일의 인과는,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부터 시작되어 이렇게 잔인하게 끝을 맺는 모양이라고.
“소신을 죽이시옵소서, 전하! 소신도 그만 선왕 전하의 곁으로 가고 싶사옵니다!”
옥환이 팔을 벌리며 앞으로 한 걸음 나서자, 염요와 그 주변을 둘러싼 이들이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 벽국의 공신이자 승상의 자리에서 사실상 염요를 대신해 벽국을 다스리던 옥환은 벽국 사람들에게 그만큼 막강한 존재감을 지니고 있었다. 특히 옥환이 일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본 신하들과 그의 활약상을 익히 들어온 병사들에게 있어 금야 선생은 마치 전설과도 같았다. 그래서 방금 있었던 염요와 옥환의 대화로 그들의 심중은 더 혼란스러워진 참이었다. 정녕 금야 선생이 벽국을 배신한 게 맞는가? 여기서 그를 죽여도 되는 것인가? 염요조차 저리 동요하고 있는데, 자신들이 결정을 내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그때, 옥환이 숨겨 두었던 화살을 꺼내 활에 걸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옥환은 본래 검보다는 활에 훨씬 능한 인사였다. 부러진 오른편 손가락들이 말썽이었으나 옥환은 멀쩡한 손가락으로 최대한 시위를 당겼다.
‘닿아라!’
옥환이 간절하게 외치며 시위를 놓자 화살이 맹렬한 속도로 염요를 향해 날아갔다. 그러나.
“억……! 전, 하…….”
염요는 곁에 서 있던 중신을 끌어당겨 화살을 막았다. 대신 활을 맞은 중신의 눈동자에 충격과 원한이 서렸으나 염요는 방패로 쓴 중신을 내던지고는 옥환을 보며 회심의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 이거 참 아쉽게 되었군그래, 금야 선생. 선생께서 활을 메고 있는 걸 보았을 때 이 정도는 충분히 예상했지. 선생은 명사수로 자자한 분이 아니신가. 그래서 일부러 검은 빼앗고 활은 그냥 두었던 것이야.”
염완이 저를 부르던 것과 같은 호칭에 옥환이 미간을 찌푸렸다. 염완과는 하나도 닮은 점이 없다고 생각했었으나, 저를 선생이라 부르는 두 사람의 목소리는 제법 비슷했다. 이것까지 예상하고 있었다니, 그는 정말 염완의 능력을 물려받았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옥환은 주먹을 꽉 쥐었다. 부러진 손가락이 고통을 호소했으나, 지금은 분노를 가라앉히기 위해서라도 그 고통이 간절했다.
“이젠 제 흉내도 모자라서 주군의 흉내입니까?”
“마음껏 힐난하시게! 최후의 일격이 이리 허무하게 끝났으니 얼마나 억울할 텐가? 다 이해하네.”
옥환은 눈을 감았다. 염요는 승리에 도취해 저를 당장 죽일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아니, 제 비참한 최후를 마음껏 즐길 심산인 듯했다. 염요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고 있던 옥환이 천천히 눈을 떴다.
“염요. 그대를 가르치던 일이 엊그제 같은데, 그대가 이리 장성하였으니 스승인 저도 뿌듯할 따름입니다.”
옥환의 말투가 오래전의 그것으로 바뀌자 염요의 표정이 굳었다. 스승과 제자. 군신이 아닌 사제의 관계에서 자신은 항상 옥환의 밑이었다. 모든 이가 옥환을 스승으로 뒀다는 말에 염요를 부러워했고, 당연히 염요도 옥환의 수준으로 뛰어날 것이라 예상했다. 그리고 그 부러움과 기대는 항상 실망으로 끝이 났다. 그렇기에 염요는 할 수만 있다면 그 과거를 영영 지우고 싶었다. 옥환에게서 받은 모든 것을 버리고 싶었다.
“그대가 내게 뭘 가르쳤다 하시오? 그대는 일부러 나를 미련하게 만들었지. 저 혼자만 빛나기 위해!”
“전 그런 적이 없습니다. 스승의 가르침에 잘 따라오지 못한 것은 제자인 당신이겠지요.”
“난 더 이상 그대의 제자가 아니야!”
“하나 제가 당신을 가르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작금의 이 사태는 스승인 제가 제자인 당신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것에 대한 벌이 아니겠습니까.”
“그만해! 스승, 제자, 지긋지긋하군!”
귀를 틀어막은 염요가 이내 엉거주춤하게 서 있는 병사들에게 일렀다.
“역적을 붙잡아라! 모든 백성이 보는 앞에서 내 저자의 목을 매달 것이다!”
그들은 살짝 주저했으나, 옥환이 직접 염요를 죽이려 했으니 더는 묵과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병사들이 옥환을 잡기 위해 그에게 다가왔다. 그럼에도 혹 옥환이 또 돌발행동을 벌이진 않을지 잔뜩 긴장한 모양새였다. 그리고 그때, 불현듯 옥환과 백고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러자 지금까지 그저 상황을 관망하고 있던 백고가 돌연 공격 자세를 취했다. 그가 주시하고 있는 상대는 바로 염요였다. 병사들이 옥환을 잡기 위해 떠나간 탓에 그의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중신들 또한 방금 화살을 맞고 죽은 이처럼 될까 싶어 멀찍이 떨어진 상태였다. 그는 줄곧, 이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곧이어 백고가 있는 힘껏 염요를 향해 달려들었다.
“으허억……!”
갑작스런 공격에 염요는 화들짝 놀라 그대로 굳어 버렸다. 백고는 눈 깜짝할 새에 뒤에서 염요의 양팔을 붙잡고 그가 꼼짝하지 못하도록 결박했다.
“태사, 지금입니다!”
그 말에 사태를 파악한 염요가 경악하며 옥환에게 고개를 돌렸지만 이미 때는 너무 늦어 있었다. 옥환은 뒤로 펄쩍 뛰어 병사들과의 거리를 벌리고 마지막 화살을 활에 걸었다. 피에 젖은 손바닥 때문에 시위가 자꾸만 미끄러졌다. 방패를 드느라 무리한 팔은 정신없이 떨며 조준을 방해했다. 게다가 병사들을 피하기 위해 최대한 뒤로 물러서는 바람에 염요와의 거리는 지나치게 멀었다. 하나 반드시 맞춰야만 했다. 맞출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이것이 옥환이 준비한, 진짜 최후의 일격이기에.
그리고 화살 끝이 정확히 염요를 조준한 찰나.
“염요―!”
옥환은 우레와 같은 고함을 내지르며 한계까지 당긴 시위를 놓았다.
팅, 시위가 제자리로 돌아가며 화살이 허공을 가르고 목표를 향해 날아갔다. 화살이 염요에게로 날아가는 그 순간이, 옥환의 눈에는 지독히도 느리게 보였다. 그렇게 염요를 죽이는 것에만 정신이 팔린 옥환은 제게 다가오는 그림자를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아니, 애당초 죽을 각오를 하고 벌인 일이었다.
“커헉……!”
병사 하나가 휘두른 칼이 옥환의 복부를 찔렀다. 옥환의 눈이 감겼다. 하나 그는 웃고 있었다.
‘청출어람은 아니 되셨나 봅니다, 염요.’
날카로운 화살촉이 염요의 가슴에 명중했다. 마치 그린 듯한 솜씨였다. 염요가 제 가슴에 꽂힌 화살을 쥐고 바닥으로 쓰러지는 것과 동시에 옥환 역시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그 모습을 지켜본 신하와 병사들이 놀라 염요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궁 안은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었다.
“태사!”
한편 염요를 놓은 백고는 검에 찔린 옥환을 보고는 그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달려갔다. 옥환을 찌른 병사를 힘껏 밀어낸 백고는 병사와 몸싸움을 벌이다가 그의 검을 빼앗아 목에 찔러 넣었다. 병사는 단말마의 경련과 함께 그대로 숨이 끊어졌다.
“태사……!”
서둘러 옥환에게 다가온 백고가 어쩔 줄 몰라 하며 그를 부축했다. 검이 꿰뚫었다 나온 복부에서는 피가 홍수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옥환은 상처를 틀어막았으나 출혈은 멈추지 않았다.
“승상!”
그런데 그때, 벽국의 중신 중 하나가 말을 끌고 달려왔다. 옥환이 벽국에 있었을 적 가까이 지내던 이였다. 그는 서둘러 백고에게 말고삐를 쥐여 주었다.
“어서 승상을 데리고 빠져나가십시오! 곧 더 많은 병사들이 몰려올 것입니다!”
백고는 이유를 물을 새도, 망설일 새도 없이 옥환을 안고 말 위에 올랐다. 우선은 궁을 빠져나가는 것이 먼저였다. 하나 그 이후에는 어찌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치료가 시급했으나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모두 전멸할 각오로 왔기에 돌아갈 막사도 없었고, 짐이 되는 약초 등도 모두 버린 지 오래였다. 하나 백고는 말을 달렸다. 옥환을 살려야 했다. 살려서 반드시, 서국으로 돌려보내야 했다.
“태사, 조금만 참으십시오. 조금만 더 견디십시오. 전하를 보셔야지요. 그리 연모하는 전하를 만나러 가셔야지요.”
“……전하.”
옥환은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승헌을 떠올렸다. 문득 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는 저를 살리고 싶어 눈물을 머금고 서국에 남겨 두었는데, 정작 저는 서국을 나와 벽국에서 죽게 되었으니…… 그의 마음을 다 알면서도 들어주지 못한 것이 몹시도 미안했다. 그가 돌아오면 자신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야 한다는 것이 가슴 아팠다.
‘하나, 벌이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이것은 자신이 받아야 할 벌이고, 또 저를 두고 간 승헌이 받아야 할 벌이었다.
‘참으로 못된 정인이라고, 평생을 원망하며 기억해 주십시오. 아둔하고 매정한 정인이 있었다, 그리 기억해 주십시오.’
그렇게 해서라도 승헌의 기억 속에서 잊히고 싶지 않았다.
나는 끝까지 못됐구나. 그리고 나는, 그분을 정말 많이 사랑하는구나.
서글픈 깨달음을 마지막으로 옥환의 의식은 깊은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
승헌이 이끄는 서국군은 벽국의 도성을 코앞에 두고 있었다. 그들은 도주하는 벽국군을 쫓아 이곳까지 온 참이었다.
천양산에서 시작된 지독한 전쟁은 스무 날 가까이 이어졌다. 수적 열세와 기밀을 빼앗겼다는 불리한 상황에서도 서국 병사들은 강한 의지로 적군과 맞섰고, 승헌의 전략대로 협곡의 지형과 협곡풍 역시 큰 효과를 거두었다. 하나 그것만으로는 벽국을 무찌를 수 없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버티고 또 버텼다. 이 뒤에서 기다리고 있을 소중한 이들을 떠올리며 이를 악물고 싸웠다.
그리고 놀랍게도, 결코 무너지지 않는 철벽같았던 벽국군이 돌연 와해되었다. 벽국과 함께 전쟁에 참전했던 천구족이, 전투가 생각보다 길어지고 자신들의 희생이 커지는 것 같자 결국 벽국을 배신했던 것이다. 처음부터 천구족과의 협력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던 옥환의 예상대로, 벽국과 염요는 가장 중요한 때에 그들에게 뒤통수를 맞은 셈이었다. 물론 승헌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서국군은 지금까지의 싸움이 무색할 정도의 전의와 체력으로 벽국군을 벼랑 끝까지 몰아갔고, 마침내 그들은 벽국군의 퇴각을 이끌어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서국군 또한 절반이 넘게 전사했으나 두 배 가까이 차이가 나던 병력을 생각하면 그조차 기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천운과 굳센 의지가 맞물린, 역사에 길이 남을 대승이었다.
그렇게 본래 20만이던 벽국군은 천양산에서 그 반의반으로 줄었고, 다시 후퇴하던 중 서국군에게 공격받아 이젠 거의 전멸했다고 봄이 옳았다. 하나 승헌은 이번 승리에 도취해 있을 생각이 없었다. 시간이 부족해 미처 오지 못했던 원군들을 모아 벽국을 역공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이것은 절호의 기회였다. 승헌은 어쩌면 이번 싸움으로 벽국과의 기나긴 관계를 청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었다.
부쩍 가까워진 벽국의 도성을 바라보며 그는 문득 옥환을 떠올렸다. 마음먹은 것과 달리 그는 수도 없이 옥환을 생각했다. 그는 천양산에서의 승리가 확실시되자마자 궁으로 연통을 보냈다. 지금쯤이면 옥환에게도 소식이 전해졌을 터였다.
승헌은 가지 말라 저를 붙잡던 옥환의 애처로운 모습을 떠올렸다. 벽국을 무너뜨리고 나면, 이제 더는 그이를 슬프게 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게 승헌이 새삼 각오를 다지고 있던 그때, 앞서 보냈던 정찰병이 급하게 돌아오는 모습이 보였다.
“전하, 급보이옵니다!”
승헌은 손을 들어 군을 멈추었다. 황급히 승헌 앞에 다다른 정찰병이 말에서 내려 무릎을 꿇고 고했다.
“전하, 벽국의 도성에서 이미 전투가 벌어지고 있사옵니다!”
뜬금없는 소식에 승헌이 눈썹 사이를 좁히며 되물었다.
“전투라니? 우리 군은 여기 있는데 누구와 전투를 벌인단 말이더냐? 혹 내분이라도 일어난 것이냐?”
고개를 가로저은 정찰병이 본인도 믿을 수 없다는 어조로 대답했다.
“저희 서국군이옵니다. 도성의 성문이 뚫려 있고, 그 앞에서 저희 병사들과 벽국군이 싸우고 있사옵니다!”
“……뭐라고?”
승헌은 영문을 알 수 없는 상황에 당혹했다. 주위의 다른 장수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국의 병사들이 아무도 모르게 벽국의 도성을 침범했단 말인가? 도대체 왜? 그리고, 어떻게?
하나 전투가 진행 중이라면 사태 파악보다는 아군을 돕는 것이 우선이었다. 승헌은 진군을 서둘렀다. 그렇게 10만의 병사들이 빠르게 벽국의 도성을 향했다.
얼마 후, 벽국의 도성 앞. 옥환을 따라 결사 항전했던 병사들은 대부분이 차갑게 식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살아남은 소수의 생존자들 역시 다수의 벽국 병사들에게 둘러싸여 궁지에 몰린 상태였다. 궁 안에 잠입한 옥환이 어찌 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과연 자신들의 희생에는 의미가 있었던 것일까. 그것을 확인하지 못한 채 꼼짝없이 죽겠구나. 그리 생각하며 좌절하고 있던 서국 병사들의 귀에, 문득 뜻밖의 외침이 들려왔다.
“전군, 진격하라!”
서국 병사들은 물론 그들을 죽이려 하던 벽국 병사들 역시 놀라서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바라보고는 크게 경악했다. 저 대군은 대관절 어디서 왔단 말인가. 그리고 그 순간 마치 그 의문에 대답을 해 주듯, 붉은 바탕에 검은 기린이 수놓인 서국의 기가 바람에 나부꼈다.
“원군이다! 원군이 왔다!”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는 대군을 보는 병사들의 얼굴에는 희망이 차올랐다. 승헌은 대열의 가장 앞에 서서 검을 휘둘렀다. 다른 서국군 역시 기세 좋게 적군을 해치워 나갔다. 그렇게 2만이 채 되지 않던 벽국군은 5배가 넘는 서국군에 당해 차례차례로 쓰러져 갔다. 상황이 완전히 역전된 것이다.
성문 앞의 난전은 순식간에 정리가 되었고, 서국군은 도성을 완전히 포위했다. 이제 남은 일은 항복을 받아 내는 것뿐이었다.
“전하.”
호진이 감격에 차오른 목소리로 승헌을 바라보았다. 대륙 통일이라는 대업을 자신의 대에 이룰 수 있다니, 다시는 없을 영광이었다. 승헌 역시 피가 들끓는 것을 느꼈으나 아직 기뻐하기는 일렀다. 그리고 그때 마침 구출된 서국 병사들이 승헌의 앞에 달려왔다.
“성은이 망극하나이다, 전하!”
그들은 깊이 머리를 조아리며 감사를 표했다. 안 그래도 승헌은 그들이 왜 여기 있는지, 누가 지휘를 한 건지 궁금하던 차였다. 이리 어려운 시국에 기꺼이 자신을 희생해 나라를 도우려 애쓴 이들이었다. 병사들도 병사들이지만, 승헌은 누구보다 그들을 지휘한 장수에게 큰 감명을 받았다. 하나 승헌은 정작 구사일생으로 구출된 병사들의 분위기가 어쩐지 석연치 않은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너희들이 고생이 많았다. 너희가 세운 공에 대해서는 과인이 후일 반드시 포상할 것이다. ……해서 너희들을 지휘한 자가 누구냐? 누가 너희를 벽국까지 이끌었지?”
“실은 그것이…….”
한 병사가 우물쭈물하는가 싶더니, 갑자기 구출된 병사들 모두가 바닥에 무릎을 꿇고 고했다.
“전하, 이러실 때가 아니옵니다! 어서 가서 태사를 구해 주시옵소서!”
미소를 짓고 있던 승헌은 일순 미간을 찌푸렸다. 여기서 들을 리 없는 이름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누구……? 방금 누구라 하였느냐?”
“태사께서 소인들을 이끌고 여기까지 오셨사옵니다! 벽국 왕을 무찌르겠다고 들어가셨는데…….”
승헌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누구라고? 누가 여기 있어? 서국에 있어야 할 옥환이 왜 벽국에 와 있단 말인가? 게다가, 뭐? 무엇을 하러 들어갔다고?
승헌이 떨리는 음성으로 물으며 성문 안쪽을 가리켰다.
“……네 말인즉…… 옥환이 저 안에 있단 말이냐? 벽국의 궁 안에?”
“그, 그러하옵니다, 전하.”
승헌은 고개를 들어 성문 안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이, 마치 제 정인을 잡아먹은 짐승의 아가리처럼 보이는 것은 왜일까.
그는 머잖아 이 모든 일의 끔찍한 전모를 파악했다. 옥환이 백고의 도움을 받아 탈출한 것이다. 그러고는, 의연하게 적지로 뛰어들었다…….
“전하! 어디 가시옵니까! 전하!”
승헌은 그대로 말을 달려 궁을 향했다. 제대로 생각하기도 전에 몸이 앞서나갔다. 옥환이 벽국에 있다. 홀로 군을 이끌고 와서는 왕을 시해하려 한 것이다. 그것이 가당키나 한 일인가? 성공할 수 있는 일이던가? 옥환은 죽을 각오를 했을 터였다. 그리고 만일 성공했다 하더라도 그는…….
머릿속에 최악의 결말이 떠오르자 그 어떤 때에도 끄떡 않던 몸이 덜덜 떨려오기 시작했다. 승헌은 고삐를 손이 새하얘질 만큼 세게 쥐었다.
‘왜. 도대체 왜.’
적국의 왕을 죽여 주길 바란 게 아니었다. 그저 살아만 있어 달라고, 그 하나만 간청하지 않았던가. 해서 그 마음에 대못을 박고 돌아선 것이 아니던가. 그 마음을 다 알면서 어찌 이리 매정할까. 어찌 사람이 이토록 독할 수가 있어.
‘안 돼, 옥환. 나를 떠나면 안 돼. 제발 나를 기다려.’
승헌은 연신 고삐를 채치며 전속력으로 달렸으나 코앞에 있는 것처럼 보이던 왕궁은 아무리 달려도 여전히 멀었다. 승헌은 조바심에 현기증이 났다. 전쟁에서 이겨도, 벽국을 무너뜨려도 옥환이 없다면 의미가 없었다. 옥환 없이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그럴 수는 없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승헌의 애를 태우던 왕궁의 정문이 잡힐 듯 가까워졌다. 한데 그 활짝 열린 문으로 말을 타고 미친 듯이 뛰쳐나오는 이가 있었다. 다름 아닌 백고였다.
“……전하!”
백고 역시 승헌을 발견하고는 반색했다. 하나 승헌은 그가 아닌 그의 품에 안긴 이를 보고 있었다.
“옥환…….”
제 사랑. 제 정인. 절대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되는 사람.
설옥환. 그가 피를 쏟으며 죽어가고 있었다.
백고가 도망쳐 나온 궁 안에서 벽국의 병사들이 우르르 쫓아 나왔다. 하나 승헌의 시선은 옥환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승헌은 말을 세우지도 않고 뛰어내렸다. 바닥에 구르는 것도 개의치 않아 했다. 놀란 백고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데, 때마침 갑자기 뛰쳐나간 승헌을 뒤쫓아 온 호진과 몇몇 장수들이 상황을 보고는 재빨리 벽국 병사들을 막아섰다.
“이곳은 우리가 맡을 테니 전하와 태사를 모셔라!”
호진의 지시에 고개를 끄덕인 백고가 일단 옥환을 승헌의 품에 건넸다. 옥환의 몸은 축 늘어져 있었다.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가 그의 하얗고 곱던 몸을 시뻘겋게 물들였다.
“전하, 일단은 가셔야 하옵니다! 소신이 호위하겠사옵니다!”
승헌은 옥환을 안은 채 다시 말에 올랐다. 품에 안은 옥환의 몸이 너무 차가워 숨이 막혔으나, 승헌은 빠르게 말을 몰았다. 멀리, 옥환을 이곳에서 최대한 멀리 데려가기 위해.
그렇게 한참을 달린 승헌이 옥환을 안은 채 벽국의 성문을 지나 임시로 세워 둔 막사에 도착했다. 무슨 정신으로 왔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저 여기까지 오는 동안에도, 옥환이 시시각각 생기를 잃어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옥환을 안은 채 다급히 태의를 찾았다.
“태의! 태의는 어디 있는가! 어서 옥환을 살펴라! 당장!”
승헌의 윽박에 부상병들을 돌보던 태의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승헌은 막사 안에 옥환을 조심스레 눕혔다. 태의는 옥환이 흘린 피의 양이 예사롭지 않은 것을 보고는 속으로 탄식했다. 다년간의 경험으로 태의는 무얼 해도 죽을 자와 살 가능성이 있는 자를 어느 정도 구별해 낼 수 있었고, 대체로는 그 감이 들어맞는 편이었다. 그리고 옥환은…… 전자라는 데에 직감이 왔다.
하나 그는 잡념을 떨쳐 버리고는 저를 보좌하는 의관에게 어서 지혈약을 가져오라 지시했다. 조심스레 옷을 벗기자 복부에 생긴 커다란 상처가 보였다. 태의는 맥을 짚고, 상처를 살폈다. 한데 옥환을 살피면 살필수록, 안 그래도 좋지 않던 태의의 표정은 점점 더 통탄에 물들었다.
“태의, 지혈약을 가져왔습니다!”
잠시 뒤, 빠르게 돌아온 의관이 약을 내밀었으나 무슨 일인지 태의는 약을 쓰기를 주저했다. 그 모습을 본 승헌이 역정을 냈다.
“무엇을 하는 것이냐! 어서 지혈하지 않고!”
승헌의 재촉에 태의가 난감한 얼굴로 하는 수 없이 약을 상처 위에 뿌렸다. 하나 이미 상처에서는 거의 피가 나오지 않는 상태였다. 승헌은 불길한 예감에 휩싸여 태의를 닦달했다.
“옥환은 어떻지? 괜찮은 것이겠지?”
태의는 고개를 숙인 채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다. 체온도 빠르게 식어 가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맥이 거의 잡히지 않았다. 처음 그 직감대로였다. 제게도 믿고 싶지 않은 일이었으나 옥환이 소생할 가능성은 매우 희박했다.
“……송구하옵니다, 전하…….”
승헌은 믿을 수 없다는 듯 태의를 쳐다보았다. 송구하다니 무엇이? 왜? 옥환을 구하면 되었다. 옥환을 살려만 준다면, 다시 눈을 뜨게만 해준다면 아무 문제도 없었다. 승헌은 옥환을 끌어안았다.
“송구할 필요 없다. 살리면 되니까. 살려라, 어서. 살려내.”
“……전하.”
“아직 숨을 쉬고 있지 않느냐! 아직 이렇게, 심장이 뛰고 있지 않느냔 말이다! 무엇이든 해! 할 수 있는 건 무엇이든!”
미쳐 날뛰는 승헌 때문에 태의는 소용이 없을 거란 걸 알면서도 결국 옥환에게 침을 놓았다. 하나 정말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게 다였다. 신이 내린 의원이라 할지라도 죽어가는 이는 살릴 수 없었다. 신이 직접 구하지 않는 이상, 옥환을 살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고개를 내젓는 태의 앞에서 승헌은 좌절했다. 이럴 순 없었다. 어찌 하늘이 이리도 무심하단 말인가. 이기게 해 달라고 하지 않았다. 벽국을 손에 넣게 해 달라고도 하지 않았다. 한데 원하지도 않은 것을 줘 놓고는 멋대로 옥환을 빼앗아 가는 건 너무하지 않은가. 승헌은 받은 것을 다 돌려줄 수 있었다. 제 목숨을 거둬 가도 좋았다. 하나 옥환을 데려가서는 안 되었다. 그래선 안 되었다.
“옥환, 가지 마…….”
승헌은 얼음장처럼 차가운 옥환의 뺨에 얼굴을 대었다. 그 부드럽던 뺨이 마치 딱딱한 얼음처럼 느껴져 승헌의 억장이 무너졌다.
“나를 떠나지 마…….”
연모한다 했잖아. 나의 사람이 되어 주겠다 했잖아.
“왜 나를 이리 아프게 하나. 옥환. 전생에 그대와 나는 무엇이었기에, 나를 이토록 괴롭게 해…….”
승헌은 옥환의 얼어붙은 뺨에 연신 온기를 불어넣으며 한이 서린 부름을 토해냈다.
“옥환, 제발. 옥환. 옥환……. 일어나서 나를 좀 봐…….”
하나 승헌이 아무리 애타게 불러도, 그토록 사랑하던 이가 하염없이 저를 찾아도 옥환은 결코 눈을 뜨지 않았다. 수십, 수백 번이 넘도록 옥환을 붙들고 있던 목소리가 갈라지고, 끝내는 흐려졌다. 옥환을 하염없이 바라던 승헌의 눈동자에서, 한순간 모든 빛이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승헌은 뼈저리게 깨달았다. 옥환은 제 부름에 대답하지 않는 게 아니라, 대답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아. 어째서. 왜.
승헌은 옥환의 희게 질린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옥환.”
그대를 연모해.
작게 속삭인 그가 옥환에게 입을 맞추었다. 모든 온기가 가시기 전에, 그 흔적을 느끼려는 듯.
마지막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옥환은 그의 마지막 소원처럼, 승헌의 가슴에 영원히 지지 않을 아픔을 남겼다.
***
옥환은 금색 바다 위에 누워 있었다. 하나 숨을 쉬는 게 괴롭지도 않았고, 몸이 가라앉지도 않았다.
그는 천천히 손을 뻗어 물결을 쓸어보았다. 한참 뒤에야 그는 그것이 물결이 아니라 벼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금야 위에 누워 있었다.
‘가야 한다.’
옥환은 몸을 일으켰다. 마치 모든 짐을 훌훌 털어 버린 듯 몸은 가벼웠다. 저 멀리 서국이, 제 사랑하는 임이 있을 나라가 보였으나 옥환은 그곳에서 시선을 돌렸다. 가야 한다. 어쩌면 자신은 진작 죽을 것을 알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매번 이 꿈을 꾸었는지도 모르겠다.
승헌과 이런 들판을 보았으면 좋았을걸. 봄에는 복숭아를 나눠 먹고, 여름에는 작은 대야 안에 서로의 발을 포개어 담그고, 가을에는 금빛으로 반짝이는 논을 구경하고, 또 연시도 먹고, 겨울에는 눈을 보며 금을 타고…….
그렇게 살았으면 참으로 좋았겠지. 더 많이 연모한다 말하고, 더 많이 품에 안기고, 그랬으면 참으로 좋았을 텐데.
하나 후회해서 무엇하리. 옥환은 승헌과 멀어지는 한 걸음 한 걸음마다 후회 한 가지씩을 버렸다. 원래 마지막이란 다 그런 것인지, 미련을 버리는 것이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선생. 결국 예까지 와 버리셨는가?”
천천히 제 발을 내려다보며 걷던 옥환은 매일 그리워했던 목소리가 들리자 퍼뜩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는 염완이 생전 모습 그대로 인자한 미소를 짓고 서 있었다.
“……주군…….”
옥환이 울상을 지으며 달려가자 염완이 그런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고생 많았네그려. 참으로 고생이 많았어.”
“주군, 저는…… 정말로 힘들었습니다. 정말 많이요.”
“다 아네. 전부 다. 내 미안하이. 내가 부덕하여 선생을 괴롭게 했어.”
옥환은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염완의 하나뿐인 아들을 죽인 것은 자신이었다. 염완이 자신을 평생 미워한대도 이해할 수 있었다. 하나 염완은 그저 자상하게 웃었다.
“선생이 그 길로 가기를 바라지 않았는데. 그 길은 이 몹쓸 망자를 만나러 오는 길이라, 선생이 오지 않기를 바랐어. 한데 왜 내 말을 안 듣고 어찌 이리 일찍 오셨는가.”
“……저를 줄곧 기다리고 계셨습니까?”
“그랬지. 한 50년은 기다릴 요량이었는데.”
옥환은 승헌을 만나러 가기 전, 그 길로 가겠냐고 묻던 염완의 환상을 떠올렸다. 그것은 죽은 염완이 제게 전한 경고였을까. 하나 괜찮았다. 염완을 만나게 되었고, 승헌과 서국을 구해냈다. 그리고 다소 아파야만 했으나, 결국 승헌과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다. 다시 돌아간다 해도 옥환은 같은 선택을 했을 터였다.
“괜찮습니다.”
옥환은 눈을 내리깐 채 흐린 미소를 지었다. 정말로 괜찮았다.
“이제 그만 가시지요. 저를 기다리느라 애쓰셨겠습니다.”
“그래, 그랬지. 어서 가자고, 선생.”
염완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앞을 향했다. 옥환 역시 그의 등을 보며 천천히 따라나섰다. 멀리서 강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건너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을 강이었다.
“여기서부턴 선생을 현혹하려 드는 망령들이 나타날 걸세. 해도 흔들리면 절대 아니 되네.”
염완이 다소 딱딱한 어조로 옥환에게 일렀다. 망령? 망령이 저를 어찌 현혹한단 말인가? 옥환은 갸웃하면서도 알겠다고 대꾸했다. 한데 한 걸음을 떼자마자, 그를 꼼짝도 못하게 만들 목소리가 들려왔다.
‘옥환, 가지 마.’
옥환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절대 착각할 리가 없었다. 이 목소리는…… 목소리의 주인은…….
“……전하.”
옥환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하마터면 뒤까지 돌아볼 뻔했다. 승헌이 있을 것만 같았다. 승헌이 뒤에서, 저를 애타게 찾고 있을 것 같았다. 그러면 안 되는데. 이제 나는, 가야 하는데.
‘옥환, 제발 가지 마.’
구슬픈 애원에 도저히 발이 떨어지지가 않아, 옥환은 눈을 질끈 감고 귀를 틀어막았다. 흔들리면 안 된다. 그렇게 되뇌며. 그럼에도 여전히 목소리는 옥환의 귀를 파고들었다.
‘나를 떠나지 마.’
‘연모한다 했잖아. 나의 사람이 되어 주겠다 했잖아.’
‘왜 나를 이리 아프게 하나. 옥환. 전생에 그대와 나는 무엇이었기에, 나를 이토록 괴롭게 해.’
승헌이 저를 절박하게 찾고 있었다. 그 목소리가 진실이든 거짓이든, 옥환은 결국 그 자리에서 한 걸음도 움직이지 못했다. 어느새 앞서 걷던 염완의 등이 멀어지고 있었으나 그를 쫓아갈 수가 없었다. 시야가 눈물로 흐려지지 않도록, 계속해서 눈을 깜빡이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선생. 어서 오시게.”
염완이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거기 계속 있으면 나와는 함께 못 가게 되네.”
함께 가지 못하게 된다는 말에 옥환은 무거운 돌덩이를 매단 듯한 발을 억지로 움직였다. 돌아본다고 해서 돌아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돌아가선 아니 되었다. 옥환은 염완의 등만을 바라보았다. 괜찮았다. 다 알고서 저지른 일이다. 서국을 무너뜨리려 하고, 멸망할 위기에 처하게 만들고, 승헌을 속여 상처를 준 자신은 그의 곁에 있을 수 없었다. 옥환은 처음부터 그렇게 생각해 왔다. 승헌도 지금은 저리 괴로워하지만 언젠가는 잊으리라. 잊지 않길 바랐으나…… 그의 애절한 부름을 들으니 잊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옥환, 제발.’
옥환이 내딛는 걸음걸음마다 보이지 않는 눈물이 흩뿌려졌다. 옥환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염완의 뒤를 따랐다. 이내 눈부시게 아름다운 강이 두 사람을 맞이했다. 염완은 그 앞에 도착할 때까지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이제 이 강을 건너면 끝이네.”
‘옥환. 그대를 연모해.’
섞여서 들려오는 목소리들에 옥환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입을 열면 소리 내어 울게 될 것 같았다. 하나 괜찮았다. 괜찮아야 했다. 참아야 했다. 승헌을 위해서였다. 그에게는 승헌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일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사라져 주는 것 외에는.
사공 없는 배가 천천히 두 사람의 앞으로 다가왔다. 염완은 동전 두 닢을 꺼내 강물 속으로 던졌다. 동전이 투명한 물속으로 사라져 갔다. 이제 저 배에 올라타면 정말로 끝이 난다.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 없게 될 것이다. 옥환은 붉어진 눈시울을 하고 배에 발을 올리는 염완을 바라보았다.
“한데 선생.”
“……예, 주군.”
작게 대답하는 옥환의 목소리는 떨고 있었다. 염완은 여전히 돌아보지 않은 채 물었다.
“이대로 정인과 헤어져도 괜찮은가?”
“…….”
“정녕 그를 영원히 못 보게 되어도 괜찮아?”
일순 말문이 막혔던 옥환은 목을 가다듬고는 최대한 침착하게 말했다.
“예. 그분에게 저는 필요가 없습니다. 혼란스러운 나라를 안정시켜야 하고, 곧 칭제도 하셔야겠지요. 좋은 배필을 만나 후사도 보셔야 합니다. 그 과정 무엇에도, 저는 방해물밖에 되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
염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대의 마음에 대해 묻고 있는 걸세, 선생.”
내 마음? 내 마음에 대해 어찌 말할 수 있을까. 지금도 이리 찢어지고 갈라지는 마음을, 무슨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나는 봄이 되어도, 여름, 가을, 겨울을 지나도, 또다시 봄을 맞아도 그저 그분을 그리워하리라. 꽃이 피면 피는 대로, 지면 지는 대로, 세월이 흐르면 흐르는 대로, 영원히 그렇게.
옥환은 견디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이제 승헌의 목소리는 저를 붙잡지 않았건만, 부정할 수 없는 자신의 마음이 제게 가지 말라 청하고 있었다.
도망치고 싶었다. 앞으로 자신이 가게 될 곳이 두렵지는 않았다. 염완과 함께라는 것에는 오히려 감사했다. 그런데도, 돌아가고 싶었다. 그 사람에게 가고 싶었다. 도움이 되지 않더라도, 언젠가 정이 식어 저를 외면하게 되더라도, 그래도 승헌의 곁에 있고 싶었다.
“……주군, 저는 돌아가고 싶습니다…….”
무너지는 옥환을 등진 염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옥환은 염완이 제게 화가 났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미안했다. 송구스러웠다. 그래도, 돌아가고 싶었다. 더 살고 싶었다.
“죽고 싶지 않습니다…….”
딱 한 번만 더 기회를 준다면 못해본 그 수많은 일들을 하고 싶었다. 그러고 나서, 승헌과 천수를 누린 뒤에 떠나고 싶었다.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손을 잡고 이곳에 다시 오고 싶었다. 말도 안 되는 욕심이었지만 그러고 싶었다.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끼는 옥환의 울음소리를 듣던 염완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침묵하는가 싶었던 그가 이내 짧게 말했다. 그 목소리는 후련한 듯, 섭섭한 듯했다.
“어서 가시게.”
옥환은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던가. 당혹함에 굳어버린 옥환에게 염완이 부드럽게 일렀다.
“아직 늦지 않았네. 힘껏 달리시게. 내가 선생이 나갈 때까지 버티고 있을 테니.”
옥환이 주춤거리며 일어섰다. 염완의 등을 멀거니 쳐다보던 그가 이내 무언가를 깨달은 듯 돌아섰다. 그리고 달리기 시작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를 만큼.
그리고 그제야 염완이 뒤를 돌아보았다. 옥환이 제 얼굴을 보면 쉬이 결정할 수 없을 것을 알아 일부러 돌아서지 않았었다. 십 년의 세월을 제 곁에서, 벽국을 위해서 사느라 고생한 사람이었다. 이 정도는 해 주는 것이 “벗”의 도리였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누군가의 물음에 염완이 씁쓸하게 웃었다. 제 업보가 저 여린 이에게 내려 젊은 나이에 이런 곳까지 오게 만들었으니 어찌 괜찮겠는가. 그저 미안하고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아무쪼록 무사히 돌아가야 할 것인데.
이제 염완이 바라는 것은 오직 옥환이 그의 삶을 사는 것, 그 하나였다. 벽국이나 서국을 위해서도, 자신이나 승헌을 위해서도 아닌, 설옥환을 위한 삶을. 부디 앞으로는 그리 살아주었으면 했다.
그리고 아주 오랜 시간 뒤에 다시 재회하게 되기를.
염완은 자애로운 미소로 옥환을 배웅하고는 돌아섰다. 눈부신 강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