十一. 옥환(玉環)
“전하. 어쩐 일로 보자고 하셨사옵니까?”
“곧 혼인할 사이에 어쩐 일로 보자고 했냐니. 아원, 그대는 나와 혼인하는 척할 생각이 있기는 한 건가?”
승헌의 심드렁한 물음에 문아원이 웃으며 차를 마셨다.
“세간에 도는 소문을 어찌 소녀가 모르겠사옵니까? 필시 태사와 잘되신 거겠지요.”
“…….”
행여 제 딸이 사랑받지 못하게 되거나 혼약이 파투날까 걱정하는 아비와 달리, 문아원은 더없이 여유로웠다. 이런 상황에도 저 대담함이라니. 아무리 봐도 그저 규중에서 썩히기엔 아까운 인재였다.
“대충 상황 파악이 끝난 모양이니 하면 각설하고 말하지. 이 혼약, 파기해야겠어.”
문아원은 우아한 자세로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찻잔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그녀는 웃는 것 같기도 하고 무표정한 것 같기도 한 묘한 표정이었다.
물론 승헌은 문아원이 자신의 아비를 저버릴 수 없다고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에게는 황후가 되는 것이 아비를 위한 일이었을 것이다. 만일 그녀가 자신과의 혼사를 포기하려 들지 않는다면, 유감이지만 승헌은 그녀에게 제 본모습을 보여 주는 수밖에 없었다.
제 앞의 사내에게서 위험한 기운이 흘러나오는 것을 느낀 문아원은 내심 긴장한 채 입을 열었다.
“뭐, 이럴 것 같기는 하였사옵니다.”
“해서?”
“소녀에게 전하의 결정을 받아들이는 것 외에 선택지가 있사옵니까?”
승헌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대꾸했다.
“없지.”
문아원이 눈을 내리깔자 승헌이 “단.” 하고 덧붙였다.
“순순히 받아들이느냐 발악 끝에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내가 그대에게 취할 태도도 달라지겠지.”
“……소녀를 협박하시는 것이옵니까? 소녀는 소녀의 목숨 따위는…….”
“내가 고작 그대의 목숨 따위로 협박을 할 것 같나?”
문아원은 입을 다물었다. 승헌의 말대로였다. 그는 문아원의 목숨으로 협박을 하기보다는, 그녀의 아비에게 딸의 숨겨진 정인에 대해 알았다고 이야기하는 쪽을 택할 것이다. 마치 문아원에게 책이 있어 혼사를 파기하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문아원은 잠시나마 남들이 모르는 군왕의 또 다른 면모를 알게 되었다고 생각했었으나, 견승헌은 변함없이 이무기였다. 그것도 아주 교활하고 거친.
막연한 추측이지만, 그는 언젠가 분명 대륙을 호령하는 용이 되리라.
그런 용에게 맞서서 무얼 하겠는가. 문아원은 한숨을 삼키고 말했다.
“알겠사옵니다. ……전하의 뜻대로 하겠사옵니다.”
“잘 생각했어.”
승헌은 짧게 내뱉고는 문아원의 앞에 비단 주머니 하나를 가볍게 던졌다. 얼떨결에 그것을 받은 문아원은 주머니를 열어 안의 내용물을 확인했다. 안에 든 것은 문서 하나와 갖은 패물이었다.
“소녀를 재물로 회유하실 생각이시옵니까?”
“알아서 없던 일로 하자는데 굳이? 나는 그대가 마음에 들어. 해서 주는 것이니 잔말 말고 받아.”
문아원은 자존심이 상한 듯 눈썹을 찌푸리면서도, 안에 든 문서를 펴보았다. 이윽고 문아원의 고운 눈썹이 위로 치켜올라갔다.
“전하, 이것은…….”
“그대가 서방과 함께 살 곳이야. 적당히 농사지어서 먹고살 수 있을 정도는 되겠지.”
승헌이 문아원에게 패물과 함께 준 것은 다름 아닌 땅문서였다. 도성과는 멀리 떨어진, 기후가 온화한 남쪽 지방에 위치한 땅이었다.
문아원은 눈에 띄게 동요했으나, 떨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소녀는…… 아버님의 뜻을 외면할 수 없사옵니다. 소녀가 하인과 혼인을 하면…….”
“예부상서는 설득이 될 거야.”
“어찌 말씀이시옵니까. 군왕의 권위로 찍어누르기라도 하실 셈이시옵니까? 아버님은 전하의 명을 따르는 척하면서 저와 그이를 떼어 놓으려 할 것이옵니다.”
“잘 사는 모습을 보여 주면 되는 것 아닌가. 물론 당장은 불가능해. 1년만 버티도록.”
“1년을 버티면 뭐가 달라지옵니까?”
“적당히 핑계를 붙여서 그대의 그 정인에게 벼슬을 내려 주지. 그리하면 면천도 될 것이고, 예부상서의 면도 어느 정도 서지 않겠나.”
“전하께서 고작 사가의 하인에게 무슨 수로 벼슬을…….”
승헌은 듣기 싫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몹시도 거만하고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어련히 하겠거니 해. 군왕이 약조를 하였는데 뭘 그리 의심하나. 게다가 내게는 천하제일의 책사가 있어.”
“…….”
못 미더운 얼굴을 하고 있던 문아원도, 옥환이 도와줄 거라는 말에는 한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금야 선생의 명성은 대단한 것이었다. 설마 그런 위인이 눈앞의, 한때는 적국이었던 나라의 왕과 사랑에 빠질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지만.
‘꼭 통속 소설에 나오는 연인들 같지 않은가.’
문아원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나오려는 웃음을 꾹 참았다.
“해서 태사께 청혼은 하셨사옵니까?”
갑작스러운 화제에 못마땅해하면서 승헌이 시큰둥한 어조로 쏘아붙였다.
“그것도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 문아원. 다시 한번 경고하지만 나와 옥환 사이에 간섭할 생각 말아.”
문아원은 이번에야말로 작게 소리내어 웃었다. 이럴 때 보면 한 나라의 군왕도 연심에 빠진 영락없는 청년일 뿐이었다.
이윽고 승헌이 준 비단 주머니를 만지작거리던 문아원이 웃음기를 거두고 말했다.
“힘든 1년이 될 것이옵니다.”
“…….”
“하나 버틸 것이옵니다. 그러니 전하께서도…… 버티시옵소서.”
문아원이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다소곳하게 절을 올렸다. 승헌은 피식 웃으며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전하를 만나 뵙게 되어 소녀의 생에 다시 없을 영광이었사옵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그래. 그만 가 봐.”
문아원은 다시금 허리를 깊이 숙이고는 돌아섰다. 그리고 떠나가는 그녀에게서 차례를 넘겨받듯 환관 하나가 종종걸음으로 승헌에게 다가가는 것이 보였다. 문아원은 고개를 돌려 편전을 빠져나왔다. 과연 혼사가 없던 일이 된 걸 알면 제 아비가 가만히 있을지, 또 조정 신료들은 승헌을 가만히 둘지 걱정이었다.
문아원이 편전의 마당을 나와 부지런히 걷는데, 뒤쪽이 소란스럽다 싶더니 승헌의 행렬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를 보고 아는 척하려던 문아원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제 옆을 황급하게 스쳐 지나가는 승헌을 보고는 표정을 달리했다. 거의 달리다시피 하는, 아니. 중간부터는 달리기 시작한 승헌을 궁인들이 허둥지둥 쫓아가고 있었다.
‘어찌 저러시지?’
문아원은 어쩐지 불길한 예감에 몸을 가볍게 떨었다.
날은 더운데도, 공연히 등줄기가 서늘했다.
***
“옥환!”
처소의 문이 벌컥 열리고 승헌이 옥환을 부르며 다급히 문턱을 넘었다. 처소 안에서는 피 냄새가 물씬 풍겼다. 옥환의 맥을 짚고 있던 태의가 얼른 머리를 조아렸다. 승헌은 다급히 누워 있는 옥환에게로 다가갔다.
“하…….”
옥환은 마치 시체처럼 거무죽죽한 얼굴을 한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승헌은 떨리는 손에 힘을 주고 그의 이마에 조심스레 손끝을 대었다. 아침만 해도 따스했던 몸이 지금은 더없이 차가웠다.
덜컥 겁이 난 승헌은 허리를 굽혀 옥환의 호흡을 확인했다. 미약하긴 해도 아직 숨을 쉬고 있었다. 하나 언제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약하디약한 숨소리였다. 승헌은 돌아 버릴 것 같았다. 왜 이렇게 된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왜.
승헌의 심중에는 옥환을 지키지 못한 자신과, 그를 이렇게 만든 상대에 대한 분노가 걷잡을 수 없이 퍼져 나갔다. 공기를 무겁게 내리누르는 승헌의 살기에 태의를 비롯한 궁인들이 엎드린 채 벌벌 떨었다. 승헌이 당장이라도 태의를 목 졸라 죽일 듯한 눈빛으로 하문했다.
“옥환은 어떻지?”
여기서 말 한 마디라도 잘못하면 곧장 목이 날아갈 것이다. 태의는 최대한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중독이 되셨사옵니다. 다행히 적은 양을 드셔서 즉사는 면하셨으나, 워낙 극약인지라 해독이…….”
“즉사? 즉사라고 했나, 지금?”
“주, 죽여 주시옵소서, 전하!”
태의는 재빨리 사죄를 하며 바닥에 더 납작 엎드렸다. 말이 씨가 된다고 하거늘, 달린 입이라고 무서운 줄도 모르고 함부로 지껄이는 모습이 아주 가관이었다. 저놈의 혀를 뽑아 짐승들의 먹이로 던져 주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승헌은 그것을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 옥환의 상태에 대해 들으려면 적어도 지금은 참아야 했다.
“해서. 해독은 할 수 있겠지?”
“아, 그것이…… 예. 예, 전하. 신의 목숨을 걸고서라도 태사를 구하겠사옵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고작 네놈 하나의 목숨으로 될 것 같으냐? 네 부모, 네 부인, 네 자식, 네 가문을 몽땅 걸어야 할 것이다. 아니면 구족을 멸할 것이니.”
태의는 울고 싶은 것을 참고 명을 받들겠노라 고했다. 다음 희생양은 옥환의 하인들이었다. 전부터 내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주제도 모르고 옥환에게 스스럼없이 구는 것이 꼴사나웠고 정작 사소한 것조차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그 둔함이 못마땅했다. 옥환 같은 이를 모시게 해 주었으면 시킨 일이나 잘하고 얌전히 지낼 것이지, 대관절 뭘 하느라 옥환을 이렇게 만들었단 말인가? 승헌은 옥환이 깨어나는 대로 처소의 모든 하인의 목을 베어 버리겠다고 다짐했다.
“옥환이 언제, 누구 때문에 독을 먹었더냐.”
“…….”
하인들이 섣불리 나서지 못하고 침묵하자 승헌이 가볍게 고갯짓을 했다. 그러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환관들이 하인 하나를 붙잡아 그 목에 칼을 들이댔다.
“바른대로 고하라.”
“저, 저저, 전하, 전하, 목숨만 살려…….”
“고하라!”
하인은 겁에 질려 실금을 하면서도 더듬더듬 대답했다.
“태, 태사께선 식사를 하신 후 갑자기 그리 되셨사옵니다……. 오늘 드신 것은 밥과 반찬 몇 가지…… 아. 보, 복숭아. 복숭아가 다이옵니다.”
하인이 겨우 말을 마치자 그 옆에 있던 다른 하인이 그보다는 침착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다만 태사께서 남기신 식사는 저희 하인들이 나누어 먹었는데 태사처럼 쓰러진 자는 없었사옵니다. 하나 복숭아는 저희 중 누구도 손을 대지 않았으니, 감히 청하건대 복숭아에 독이 있는지 확인해 주시옵소서.”
승헌이 날카로운 시선을 향하자 태감이 하인들에게 얼른 그 복숭아를 가져오라 명했다. 환관 하나를 붙여서 보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태의도 독이 있는지 검사하기 위해 서둘러 은으로 된 막대를 꺼냈다.
이윽고 하인이 복숭아가 담긴 접시를 승헌의 앞에 내려놓고 물러섰다. 태의가 머리를 조아려 승헌의 허락을 구한 뒤 은 막대를 복숭아에 꽂아 놓고, 잠시 뒤 그것을 다시 뽑아 확인했다. 막대는 희미하긴 하나 육안으로 구분이 가능할 정도로 검게 변해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모든 이가 하나같이 숨을 삼켰다. 감히 어느 누가 군왕이 깊이 총애하는, 그것도 천하제일의 책사로 명성이 자자한 금야 선생을 독살하려 했단 말인가? 궁 안에 다시금 피바람이 불겠구나 싶은 예감에 몇몇 하인들은 벌써부터 훌쩍였다.
뼛속까지 얼릴 듯한 눈길로 복숭아를 잠시 내려다보던 승헌이 물었다.
“옥환이 이것을 얼마나 먹었더냐.”
“자, 자른 조각 중 두 개를 드셨사옵니다……. 전하와 나눠 드시겠다고 하시며 많이 남기셨습니다.”
벌벌 떠는 하인의 대답을 태의가 받았다.
“그나마 천만다행인 일이옵니다. 그 이상으로 드셨다면 손쓰기가 더 어려웠을 것이옵니다.”
“하면 태사께선 회생하실 수 있는 것이오?”
태감의 물음에 태의가 승헌의 눈치를 슬쩍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효…… 효력이 강한 독이긴 하나 독을 쓴 자가 복숭아에 많은 양을 바른 것은 아닌 듯하옵니다. 은 막대의 색 변화가 적은 것으로 알 수 있는 사실이옵니다. ……더불어 드신 양이 많지 않고 발견이 빨랐으니, 급히 해독하면 큰 탈은 없으실 것이옵니다. 또한 소…… 소신이 의술을 배울 적에 해독한 적이 있는 독이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옵소서, 전하.”
태의의 장담에 승헌이 잔뜩 일그러져 있던 표정을 살짝 풀었다. 하나 여전히 차디찬 바닷속에 가라앉은 것 같은 감각은 사라지지 않았다. 두려움. 그간 살면서 느껴온 모든 부정적인 감정을 아득히 뛰어넘은, 끔찍한 두려움이었다.
“작은 탈도 없어야 한다. 그 어떤 부작용이나 후유증도 없게 하라.”
“예, 전하.”
태의가 서둘러 해독에 들어간 사이, 침상의 가리개를 드리운 승헌은 하인들을 문초했다.
“이 복숭아를 가져온 이, 씻은 이, 자른 이, 한 번이라도 본 이는 모두 나오라.”
하인 몇 명이 주춤거리며 앞으로 나오는데 승헌이 짧게 덧붙였다.
“사실을 감추다 발각되면 그 자리에서 곧바로 육시를 할 것이다.”
아무런 고저가 없음에도 마치 칼을 들고 겁박을 하는 듯한 느낌에 하인 몇이 겁에 질려 앞으로 나왔다. 승헌은 가만히 그들을 보았다. 무슨 질문을 할지 생각하는 것 같기도 했다. 한데 다음 순간, 승헌의 입에서 예기치 못한 명이 떨어졌다.
“모두 죽여라.”
“저, 전하.”
“전하, 살려 주시옵소서!”
“전하, 전하……!”
태감이 당황하여 승헌을 돌아보았고, 처소 안은 순식간에 하인들의 곡성으로 가득 찼다. 하나 승헌은 옥환이 시끄럽진 않을지 염려하며 하인들을 모두 밖으로 내보내라고 일렀다.
“전하! 전하, 저희가 아니옵니다!”
“억울하옵니다, 전하! 어찌 저희가 태사를 독살하려 하겠사옵니까!”
하나 승헌은 결정을 철회하지 않았고, 하인들은 꼼짝없이 죽게 된 상황이었다. 자신들에게 희망이 없음을 알게 된 이들의 눈동자에 절망의 빛이 어렸다.
“……계평이옵니다! 그자가 범인이옵니다, 전하!”
그때, 한 하인의 외침에 승헌이 하인들을 끌고 나가는 환관들을 제지했다. 처소는 하인들의 절규로 아비규환이었으나, 승헌은 아랑곳하지 않고 제 관심을 끈 하인에게 하문했다.
“네 무어라 하였더냐?”
하인은 엉금엉금 기어 승헌의 앞에 납작 엎드린 채 빌었다.
“계, 계평이옵니다. 필시 계평이 태사에게 독을 쓴 것이옵니다. 하니 제발 소인은 살려 주시옵소서. 소인은 오늘 부엌 근처에는 간 일도 없고 그저 멀리서 복숭아를 들고 가는 하인을 본 게 다이옵니다.”
“계평?”
그러고 보니 옥환의 호위인 그의 모습이 줄곧 보이지 않았다. 승헌이 신경질적인 어조로 태감을 질책했다.
“내가 분명 처소 안의 모든 자를 다 불러 모으라 일렀을 텐데 이게 어찌 된 일이지?”
“송구하옵니다, 전하. 당장 대령하겠나이다.”
“그놈을 데려오지 못하면 너도 돌아올 필요 없다.”
승헌의 경고에 태감이 얼른 머리를 조아리고는 직접 계평을 찾으러 나섰다. 그 사이 승헌은 계평이 범인이라는 주장의 신빙성에 대해 생각했다. 처음에는 옥환에게 앙심을 품고 있는 무관이나, 최근 들어 옥환을 눈에 띄게 외면하기 시작한 예부상서 측 인물을 의심했기에 계평이라는 존재는 승헌에게도 뜻밖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계평은 줄곧 옥환의 호위를 자처하며 그의 곁을 지켰기에 승헌에게도 아주 낯선 인물은 아니었다. 하나 그렇다고 또 익숙한 자도 아니었다. 항상 승헌을 경계한 탓에 얼굴을 마주할 기회도 몇 없었던 것이다. 다만 문제는 계평의 그 경계가 비단 승헌뿐만이 아닌 옥환에게도 향해 있다는 사실이었다. 옥환 또한 벽국에서 함께 건너온 사이치고는 계평을 데면데면 대했다. 도리어 종소에게 보이는 태도가 더 살가울 정도였다.
하나 그다지 친밀한 관계가 아니라고 해도, 그자 또한 옥환과 함께 벽국에 왔으니 결국은 한 배를 탄 사이일 터였다. 한데 그런 그가 왜 옥환을 죽이려 한단 말인가?
‘……설마…….’
승헌의 머릿속에 몇 가지 가정이 떠올랐다. 만일 옥환과 같은 편인 줄 알았던 계평이 옥환을 배신한 것이라면 그 이유는…….
승헌은 몹시도 복잡한 기분으로 쓰러진 옥환을 내려다보았다. 하나 그는 옥환을 의심하는 쪽보다는 믿는 쪽을 택했다. 눈이 멀었다고 해도 좋았다. 그간 옥환이 어떤 일을 했고 누굴 주군으로 모셨든 간에 그것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승헌이 자신의 마음을 인정한 순간부터 그는 옥환의 과거를 덮을 준비가 되어 있었고, 옥환이 놓아 달라 해도 그를 보내 줄 생각 따윈 없었으니까.
그리고 그때 마침 계평을 찾으러 갔던 태감이 돌아왔다. 태감의 안색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계평과 함께 왔어야 할 그가 빈손이었던 것이다. 그를 본 승헌이 이를 갈며 으르렁거렸다.
“그놈을 데려오지 못한다면 너도 돌아오지 말라 일렀을 텐데.”
태감은 재빨리 승헌의 앞에 무릎을 꿇고 사정을 고해 올렸다.
“전하, 송구스럽게도 신들이 갔을 땐 이미 그자의 처소가 비어 있었사옵니다. 환관들을 풀어 궁 안을 샅샅이 뒤지고 있사오니 부디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계평이 도망쳐 봤자 어차피 궁에서 나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 생각한 태감은 자신이 혼나더라도 현 상황을 보고해 승헌이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게 하는 게 최선이라고 여겼다. 해서 일부러 승헌에게 다시 온 것이었으나, 정작 마음이 급한 승헌은 합리적인 판단 따윈 안중에도 없었다. 그는 태감을 사납게 노려보며 지시했다.
“금군별장에게 가서 그놈을 반드시 찾아오라고 해.”
승헌이 계평을 찾기 위해 금군까지 동원하겠다는 말에 태감은 물론이고 다른 궁인들 또한 화들짝 놀랐다. 옥환이 독에 당한 것은 물론 큰일이긴 했으나, 금군을 일으키는 것은 빈대를 잡으려다 초가삼간을 태우는 격이기 때문이었다. 금군의 개입은 내부의 혼란을 외부로 퍼뜨릴 것이고, 그 혼란은 겨우 잠잠해진 조정에 영향을 끼칠 것이 분명했다. 하나 승헌의 흉흉한 분위기에 더해 자신의 실책까지 있어, 태감은 감히 그의 결정을 막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태감이 주저하고 서 있자 승헌이 얼른 가지 않고 뭐하냐는 듯 험악한 눈초리로 노려보았다. 자칫하면 정말 사달이 날 것 같아, 태감은 하는 수 없이 금군별장을 부르기 위해 물러났다. 옥환 처소의 하인들 역시 모두 잡혀 옥으로 끌려갔다. 그 대신 자신을 오래 보필한 충성스러운 궁인 몇을 옥환의 곁에 둔 승헌은 그 자신 또한 처소에 남아 내내 옥환의 곁을 지켰다.
태의는 해독이 무사히 끝났다고 했고, 옥환이 내일쯤이면 깨어날 것이라는 희망적인 예측을 내놓았다. 그럼에도 승헌은 안심이 되지 않았다. 옥환이 죽음의 위기를 맞게 된 것이 이것으로 벌써 두 번째였다. 승헌은 특히 자신이 있는 궁 안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것에 크나큰 죄책감을 느꼈다. 계평과의 관계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 시점에서 옥환을 지킬 방책을 마련하지 않은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옥환을 가까이 두고 싶어 하는 이가 많은 만큼 그를 미워하는 이 또한 넘쳐 났고, 궁에서 지내야 하는 그는 스스로를 보호할 수단도 변변치 않았다. 그럼에도 승헌은 고작 궁 안이라는 이유로 마냥 방심하고 있던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초여름 날씨에도 한겨울인 것처럼 차갑게 얼어 있는 옥환의 손끝에 온기를 불어넣어 주던 승헌은, 여전히 한쪽에 놓여 있는 독이 든 복숭아를 보고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저와 나눠 먹고 싶어서 남겨 놓았다니. 그 애틋하고 안타까운 마음에 승헌의 속이 들끓었다. 왜 그때 곁에 있어 주지 않았을까. 왜 지켜 주지 못했나. 저를 연모한다고 하였는데. 저를 마음속에 두었다 하였는데.
피를 토하고 쓰러지던 그 순간, 옥환이 얼마나 두려움에 떨었을지를 생각하면 승헌은 가슴이 미어져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하필 전날 밤 제 앞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던 모습이 자꾸만 떠올라 더더욱 그러했다.
“……내가 대신 누워 있으면 좋겠어. 그대 대신 내가.”
승헌이 매섭게 불어나는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작게 중얼거렸다. 한데 그때, 예상치 못한 목소리가 승헌을 작게 나무랐다.
“나랏일을 돌보셔야 할 분이 어찌 그런 말을 쉬이 입에 담으십니까.”
승헌이 눈을 크게 뜨고 내려다보자 옥환이 눈꺼풀을 겨우 들어 승헌과 눈을 맞추었다. 죽을상을 하고 있는 승헌을 보며 옥환은 웃으려 했으나 그의 몸에는 그럴 만한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승헌을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 옥환은 남은 힘을 쥐어짜 승헌의 손끝을 가까스로 쥐었다.
“살았으니 되었습니다. 살아서…… 전하를 뵈었으니 됐습니다.”
마치 자신의 죽음을 예상하고 있었던 듯한 말투에 승헌의 억장이 무너졌다. 그 안타까움은 이윽고 원망으로 바뀌어 옥환을 향했다.
“왜 그런 식으로 말해, 왜. 그대의 상태가 어땠는 줄이나 알아? 여기 와서 누워 있는 그대를 보는데 내가 무슨 마음이 들었을 것 같나? 나를 연모한다 해 놓고, 하루도 지나지 않아 죽은 듯이 쓰러져 있는데……. 그대로 나를 두고 떠나버리려 했나?”
“……전하.”
옥환이 승헌을 위로하듯 승헌의 손끝을 살짝 쓸어내렸다. 그 작은 행동에 간신히 이어 왔던 승헌의 인내가 속절없이 바스라졌다.
“옥환. 나는…… 나는 그대를 잃는 줄 알았어.”
승헌은 옥환의 손을 쥔 채 쓰러지듯 몸을 숙였다. 다 갈라진 목소리에 그제야 옥환도 심각한 얼굴을 했다.
“지금도 그래. 지금도…… 내가 독을 먹은 거였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 생각밖에 들지 않아.”
“전 싫습니다. 누워 계신 전하를 보는 건 이전의 경험으로 충분합니다. 다치지 않기로 저와 약조하시지 않았습니까.”
옥환의 고집에 울컥한 승헌이 무어라 쏘아붙이려다가, 저를 처량하게 보고 있는 옥환의 눈빛을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눈을 떠서, 다시 그 눈동자 안에 자신을 담아 주어서 너무나 감사했다. 하나 하루를 천년처럼 보낸 그로서는 도저히 살았으니 되었다는 생각은 할 수 없었다.
“전하. 저는 정말 괜찮으니…….”
그때, 공교롭게도 남은 기운마저 다했는지 옥환이 스르르 눈을 감았다. 승헌의 손에 잡혀 있던 그의 손은 힘이 빠져 축 늘어졌다.
“나쁜 생각은…….”
마십시오. 마지막 말을 거의 입 모양으로만 중얼거리며 옥환은 다시 깊고 깊은 잠에 빠졌다. 승헌은 그를 흔들어 깨우고 싶은 충동을 뒤로하고 대신 늘어진 손을 제대로 붙잡았다.
승헌에게는 지옥 같은 밤이 흘러가고 있었다.
***
눈을 뜬 옥환은, 목이 찢어질 듯 메마르고 내장이 뒤집어지는 것 같은 감각에도 제일 먼저 승헌을 찾았다. 간밤에 승헌을 본 것 같은데, 그에게 뭐라고 했었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그저 고통으로 일그러진 그의 표정만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독을 먹은 자신의 상태보다 그런 승헌을 더 걱정하던 옥환은 금군별장에게 무어라 지시를 내리고 막 제 쪽으로 몸을 돌리는 승헌과 눈을 마주쳤다.
“옥환!”
승헌은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옥환을 살폈다. 처음 보는 의관 역시 그 소리에 냉큼 달려왔다.
“옥환, 괜찮나? 이제 정신이 좀 들어?”
새벽에 잠깐 일어났었음에도 불구하고 승헌은 과민하게 반응하며 옥환을 살폈다. 옥환은 웃어 보이려 했지만 여전히 그것은 쉽지 않았다. 입을 열어도 쇳소리만 나올 따름이었다. 다행히 승헌이 얼른 물을 따라 옥환이 마실 수 있게 해 주었다.
“전하…….”
“그래. 그대의 정인은 여기 있어.”
옥환은 일으켜 달라는 듯 손을 뻗었다. 승헌이 등을 받치고 일으켜 주자 옥환이 냉큼 승헌의 가슴에 안겼다. 저를 붙잡을 힘도 없으면서 절박하기만 한 두 팔이 안타까워, 승헌은 옥환의 몫까지 힘을 주어 끌어안았다.
“전하. 저는 정말 살아서…… 이리 살아서 전하를 뵌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어쩌면 당신을 못 보고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두렵던지요. 독을 먹고 쓰러지면서도, 오직 그 하나만이 미련으로 남았습니다.
옥환은 하지 못한 말들을 전부 목 뒤로 넘겼다. 승헌이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을지가 훤히 보이기에 더는 그의 심중을 괴롭게 할 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승헌 역시 옥환의 목에 얼굴을 묻고 그의 숨소리를 확인하며 한숨 쉬듯 말했다.
“깨어나 줘서 고마워, 옥환. 진심으로 그대에게 감사해.”
그렇게 두 사람은 한동안 서로를 꼭 끌어안고 놓지 않았다. 주위에는 의관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이 있었으나 옥환은 하나도 부끄럽지 않았다. 적어도 지금만큼은, 눈앞의 승헌과 자신의 마음만이 중요했다.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승헌이 옥환을 살짝 떼어냈다. 옥환은 승헌을 놓고 싶지 않았으나, 승헌은 옥환을 다시 눕히고는 부드럽게 타일렀다.
“아직 다 낫지 않았어. 다음에 마저 안아줄 테니 지금은 치료부터. 알았지?”
옥환은 왠지 자신이 어린아이가 된 듯한 기분에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에서 제일 영악한 저를 세 살배기 보듯 하는 건 이 사내가 유일할 터였다.
의관이 다가와 옥환의 맥을 짚자 그것을 유심히 지켜보던 승헌이 물었다.
“옥환의 상태가 어떻지?”
“맥이 약하기는 하나 안정적으로 잡히고 다행히 남은 치료를 할 만큼의 체력도 있으신 듯하옵니다. 약해진 신체를 보양하면 남은 독은 몸에서 알아서 몰아낼 것이옵니다.”
“하면 옥환이 홀로 견디는 동안 네놈은 그저 맥이나 짚고 괜찮아질 거란 소리나 해댈 것이냐? 그럼 그 손과 입은 없어도 되겠구나.”
의관이 큰 잘못을 하지 않았음에도 매섭게 쏟아진 승헌의 질책에 옥환이 화들짝 놀라 승헌을 바라보았다. 하나 승헌은 일부러 옥환을 보지 않은 채 의관을 노려보았다. 의관은 병자인 옥환보다 더 창백한 얼굴로 엎드렸다.
“다, 당치 않사옵니다, 전하. 신이 목숨을 걸고 태사를 치료하겠사오니 부디 마음 놓으시옵소서.”
구체적으로 뭘 하겠단 뜻이냐고 독촉하려던 승헌은 옥환이 놀라서 입을 벌린 채 저를 바라보는 것을 느끼고는 별수 없이 하려던 말을 참았다. 대신 그는 마지막으로 단단히 경고를 날렸다.
“어련히 잘하겠지. 지켜본 바가 있을 테니. 그렇지 않으냐, 태의?”
“망극하옵니다, 전하…….”
태의? 이자가 태의란 말인가? 옥환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난생처음 보는 ‘태의’의 용모를 자세히 살폈다. 원래 태의와는 승헌이 다쳤을 때 얘기도 나누고 해서 나름 면식이 있는 사이였으나, 그가 아는 태의는 이자가 아니었다. 저도 모르는 새에 태의가 바뀌었던가? 하기야 요즘은 정신이 없었으니 사람이 바뀐 줄도 모를 만했다. 하물며 조정에 나오지도 않는 태의직이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옥환은 그렇게 생각하고 넘겼다.
그 뒤로도 옥환의 곁을 떠나지 않고 새 태의가 그를 치료하는 모습 하나하나를 감시하던 승헌은 환관 하나가 와서 대장군이 왔다는 소식을 알리자 인상을 찌푸렸다. 대장군이라 함은 호진을 뜻하는 것이라, 옥환 역시도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여긴 병자가 있으니 나랏일을 논할 곳이 아니라고 전해라.”
“전하.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대장군께서 이르시길 벌써 사흘째 그리 말씀하시고 본인을 내치셨으니, 오늘은 전하를 뵐 때까지 무릎을 꿇고 앉아 기다리겠다 하시옵니다.”
사흘? 이틀이 아니고? 옥환은 슬슬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으나, 그보다는 호진을 해결하는 게 먼저였다. 그는 승헌의 옷깃을 잡고 흔들었다.
“전하. 저를 더 미움받게 하시려는 게 아니라면 그만 가 보십시오.”
“어찌 그래. 아직 그대가 식사를 하는 모습도 못 봤고, 해독이 완전히 끝난 것도 아니지 않나. 어찌 또 그대를 혼자 둬. 그랬다가 무슨 꼴을 보았는데.”
“태의께서 이리 열심히 돌봐주시는데 또 뭔 일이 나겠습니까. 저도 이제는 전하 곁을 떠날 생각일랑 일절 없으니 안심하시고 돌아가 보십시오.”
그러면서도 옥환은 말할 기운도 없는 듯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이런 너를 두고 돌아가긴 어딜 가냐는 승헌의 눈빛과 너 때문에 더 피곤하니 좀 가 보라는 옥환의 눈빛이 침묵 속에 맞부딪쳤다. 승헌이 가야 자신이 쓰러진 이후의 상황을 파악하기도 용이했기에, 옥환은 승헌과 함께하고 싶은 제 진심을 억누르고 고집스레 눈을 치켜떴다. 그리고 승헌은, 옥환의 고집을 이긴 적이 거의 없었다.
“그래, 좋아. 하나 저녁 수라는 여기 와서 들 테니 그리 알아.”
“좋습니다.”
다행스럽게도 무사히 두 사람의 합의가 이루어졌고, 승헌은 호진에게 욕을 해대면서 옥환의 처소를 나섰다. 승헌을 미소로 배웅하고 난 옥환은 그가 떠나자마자 곧바로 표정을 바꾸어 태의에게 물었다.
“태의. 실례인 줄은 아나 혹 이전에 계시던 태의는…….”
“아…….”
“괜찮으니 솔직히 말씀해 주십시오.”
태의는 머뭇거리다가 사정을 알고 나면 옥환이 나중에 제게 일이 생겼을 때 저를 비호해 주지 않을까 싶어 솔직히 터놓았다.
“저…… 이전에 계시던 태의는 해독이 잘 끝났고 태사도 금세 일어나실 거라고 전하께 말씀을 올렸는데, 막상 이틀이 되어도 태사께서 깨어나시질 않아서…… 태의직을 삭탈당하셨습니다.”
“이런. 전하께서 태의를 또 바꾸셨단 말입니까?”
전에 그 대신 칼을 맞아 쓰러졌을 때도 그러더니 아주 애먼 자를 벌주는 게 습관인 모양이었다. 그럼에도 저 때문에 얼마나 가슴을 졸였으면 그랬을까 싶어서 옥환은 힘없이 한숨이나 내쉴 따름이었다.
“고작 하루 정도 지난 줄 알았는데.”
“살수가 쓴 독이 워낙 극독이라…… 사흘 만에 깨어나신 것도 무척 빠르신 것입니다.”
옥환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물었다.
“제 처소의 궁인들은 모두 잡혀갔을 것이고…… 혹 범인은 찾았습니까?”
그 질문에 태의가 난처한 듯 입을 다물었다. 거짓말은 못 하는 인사구나. 옥환은 이번 태의가 과연 오래갈 수 있을지 걱정하면서도 설득조로 말했다.
“전하께서 괜한 말 말라고 해두셨겠지요. 하나 저도 머리 하난 비상해서 돌아가는 상황 파악하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습니다. 어차피 알게 될 일 그냥 말씀해 주십시오. 태의께 폐가 될 일은 없을 것입니다.”
태의의 생각에도 그 똑똑한 금야 선생이니 저를 노리는 자의 정체가 무엇인지 대강은 짐작하고 있을 것 같았다. 잠시 동안의 생각 끝에, 승헌이 소문보다 더 옥환에게 약하다는 걸 알게 된 그는 아예 옥환 쪽에 서기로 마음을 먹고는 순순히 대꾸했다.
“먼저 놀라시지 않도록 마음을 편히 만들어 주는 침을 놓고 얘기해드리겠습니다.”
그다지 놀랄 것 같지는 않았으나 옥환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혈 몇 군데에 침을 놓은 태의가 이윽고 그간의 일을 설명했다.
“실은 태사의 호위가 잡혀갔다고 들었습니다. 복숭아에서 독이 나왔고 호위가 의심을 받았는데, 마침 그자가 어디론가로 사라져서 환관들이 그를 찾느라 궁이 발칵 뒤집혔었습니다. 물론 전하께서 금군을 움직이신 덕에 하루가 다 가기도 전에 그를 찾았고요. 호위가 진범인지, 그를 사주한 이가 있는지, 그런 것은 저도 잘 모릅니다. 전하께서도 내내 태사의 곁을 지키시느라 아직 그자를 신문하지는 못하셨을 것입니다.”
옥환이 머릿속을 정리하느라 말이 없어진 사이 태의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덧붙였다.
“태사께서 그 맹독을 드시고도 이 정도로 끝나신 건 그것을 얼마 드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하늘이 도왔다고 할 밖에요. 치사량만큼 먹으면 곧바로 내장을 토하고 죽는 극독인데 다행히 태사께서 복숭아를 적게 드시기도 했고, 살수가 독을 적게 쓴 덕도 있었습니다. 워낙 구하기 어려운 것이라 살수도 충분한 양을 확보하지 못했겠지요.”
태의의 설명을 들은 옥환은 씁쓸한 얼굴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계평이 쓴 독은 필시 염요가 구해 주었을 터였다. 그리고 한 나라의 왕인 그가 독 하나를 구하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양이 충분하지 않았다면 섣불리 계획에 임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물론 추측에 불과했으나, 옥환은 계평이 저를 죽이는 걸 망설인 게 확실하다고 여겼다. 그의 망설임이 저를 살린 것이라고.
하나 그가 승헌에게 잡혔다면 옥환에겐 그를 구명할 방법이 없었다. 더는 염요에게 도움을 청할 입장도 아니었고.
‘염요. 당신의 그 욕심으로 말미암아 당신은 충신 둘을 잃게 되신 겁니다.’
저를 죽이려 했던 자에게 여전히 충성할 만큼 옥환은 맹목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이제는, 염요를 놓아줄 때였다. 그가 아무리 자신이 경애하는 염완의 아들이라고 해도. 그를 위한 충심은 그가 보낸 독을 먹은 순간 함께 죽고 말았다. 그렇게 충신은 죽고, 승헌의 애정으로 설옥환만이 살아남았다.
하나 어쩌면…… 그 설옥환은 곧 사랑하는 이의 손에 죽을지도 모른다. 계평을 통해 자신이 벽국의 첩자였다는 것이 밝혀지면 승헌은 크나큰 상처를 받을 것이다. 그리고 길길이 날뛰며 자신을 죽이려 하겠지.
그래서, 옥환은 그저 죽지 않고 살아나 승헌을 다시 본 것만으로 만족했다. 잠시나마 그가 제게 웃어 주었으니 충분하다. 저 따위가 어찌 감히 그와 함께하고, 서국에 남아 행복해질 생각을 품겠는가. 서국과 승헌에게 어떤 짓을 저질렀는데. 그에게 제 마음을 고백한 것 또한 자신의 이기심이 아니던가.
‘하나 적어도…… 전하의 손에 죽을 수는 있겠지.’
염요보다는 승헌의 손에 죽는 게 나았다. 다만 승헌이…… 너무 아파하지 않았으면 했다. 이마저도 욕심이고 위선일 테지만.
급격한 피로를 느끼며 옥환은 다시금 눈을 감았다.
보낸 지 얼마나 되었다고 제 정인이 보고 싶어 또 이리 애가 닳으니…… 이것도 일종의 독인가 싶었다. 만일 그런 것이라면 이 독에 중독되어 죽고 싶었다.
차라리 그랬으면 싶었다.
***
계평은 잔혹한 고문에도 쉬이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럼에도 승헌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보다도 그는 지하 감옥의 악취가 몸에 밴 것 같다고 생각하며 궁인들에게 환기를 시키고 향을 피울 것을 명했다. 곧 옥환을 만나러 가야 했다. 그의 앞에서는 조금의 나쁜 모습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자신을 포함해 옥환 주위의 모든 것은 곱고 좋아야만 했다.
‘옷을 아예 갈아입는 편이 낫겠지.’
예전에 문아원을 처음 만나던 날, 자신의 차려입은 모습을 보고 설레하던 옥환이 생각나 승헌은 빙그레 웃었다. 그렇게 화려한 색의 옷을 입고 온갖 장신구를 걸치는 건 승헌의 취향이 아니긴 했지만, 옥환이 기뻐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면 그렇게 대단한 일도 아니었다.
이미 설옥환이라는 존재는 승헌의 모든 사고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니 이 또한, 더는 대단한 일이 아니다. 승헌은 들고 있던 위패를 내려다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화로를 가져오너라.”
이 더위에 웬 화로인가 하면서도 궁인들은 승헌의 지시에 잠자코 따랐다. 이윽고 승헌은 궁인들이 대령한 화로 안에 위패를 던져넣었다. 나무로 된 위패는 활활 타올랐고, 금세 형태도 없이 사라졌다. 이것으로 끝이었다. 이리 쉬운 것을 왜 그리 미적거리며 망설였던가. 고작 나무패일 뿐인데. 이렇게 태워 버리면 끝인.
잠시 뒤, 옷을 갈아입은 승헌이 옥환의 처소를 향했다. 어느덧 독을 먹고 쓰러진 후로 이레가 흘러 옥환의 몸 상태는 무척이나 호전된 상태였다. 다만 이곳보다 쌀쌀한 벽국에서 지내 온 탓인지 겨울과는 달리 서국의 여름을 유독 힘들어하는 모양이었다. 하나 이제 곧 이 나라의 온화한 날씨에도 익숙해질 것이다. 앞으로 그가 남은 평생을 보낼 곳이니까.
얼음을 넣은 화채를 준비해 옥환의 처소에 다다른 승헌은 마루에 나와 부채질을 하고 있는 옥환을 발견하고는 웃었다. 옥환 역시 왕의 행렬을 보더니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올렸다.
“전하.”
“우리 사이에 뭐 그리 격식을 차리고 그래. 많이 더운가?”
발갛게 달아올라 있을 뿐, 땀방울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 말간 이마를 쓸어주며 승헌이 물었다. 그 서늘한 손의 체온에 옥환이 기분이 좋은 듯 눈을 스르르 감았다가 손이 떨어지자 다시 반짝 떴다. 어쩐지 조르는 듯한 표정에 승헌이 입술을 살짝 물었다. 당장에 안을까 싶었지만, 오늘은 계획한 바가 있었으니 아직은 참아야 했다.
알고 하는 것인지 모르고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으나, 독을 먹고 간신히 깨어난 이후로 옥환은 승헌에게 애교도 피우고 어리광도 부리며 그를 스스럼없이 대했다. 승헌의 생각에 그 자존심 세고 뻣뻣한 옥환이 알고 할 리는 없었고, 무의식중에 나오는 애정 표현일 것 같았다.
“그래도 이리 얇게 입지는 마.”
하나 기분이 좋았던 것도 잠시, 승헌은 흰 모시옷만 달랑 입은 옥환을 보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피부가 어찌나 하얀지 언뜻 보면 옷을 입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물론 그렇다고 안이 비쳐 보이는 건 아니었으나, 승헌은 누군가가 옥환을 보고 불온한 상상을 할까 저어되었다. 특히 백고 같은 놈은 이 근처에 얼씬도 못 하게 해야 할 성싶었다.
“처소 안에 홀로 있던 차라 조금 가볍게 입었습니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하인이 눈치 좋게 챙겨온 겉옷을 걸치며 옥환이 사과를 건넸다. 승헌은 막상 옥환의 백옥 같은 피부가 가려지니 아쉬운 마음이 앞섰으나, 아무렇지 않은 척 옥환을 끌고 마루에 앉았다.
이윽고 승헌은 가져온 화채를 옥환에게 덜어 주고, 궁인들에게 대야에 찬물을 받아 오라고 명했다. 궁인들이 물이 담긴 대야를 가져다 옥환의 발치에 내려놓자 승헌은 직접 옥환의 발밑으로 내려가 신과 버선을 벗기고는 옥환의 발을 찬물에 담갔다.
“전하, 제가 하겠습니다.”
“어때. 좀 더위가 가시나?”
“전하 때문에 도리어 등골이 서늘해질 정도입니다. 누가 볼까 걱정이니 어서 일어나십시오.”
옥환의 재촉에 승헌이 웃으며 일어나 옥환의 옆에 다시 앉았다. 그를 올려다보던 옥환은 제 발을 꼼지락거리며 한쪽으로 옮기더니 말했다.
“전하도 이리 오십시오.”
그 제안을 거절할 리 없는 승헌은 냉큼 신을 벗어 던지고 자신의 발을 대야에 담갔다. 승헌이 발끝으로 옥환의 매끄러운 발등을 슬금슬금 간질이자 옥환이 그런 승헌을 밉지 않게 노려보더니 이내 풋, 하고 웃었다.
“참으로 어린아이가 따로 없으십니다.”
“그대의 웃는 얼굴이 오죽 고와야지. 그것이 보고 싶어 이런 유치한 장난을 하는 것이니 그대도 날 봐줘야 해.”
옥환은 대답 대신 승헌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웃음기를 거두고 입을 열었다.
“전하.”
승헌이 “왜?” 하고 물어도 옥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렇게 간혹, 옥환은 승헌을 부르고는 하염없이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마치, 승헌의 말을 기다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자신은 들을 준비가 되었다고, 그리 말하는 것처럼.
하면 승헌은 왜 불러 놓고 말이 없냐며 투덜거리는 것으로 항상 상황을 넘겨 왔다. 옥환의 체념 어린 눈동자를 마주하는 것이 싫었고, 그 모든 것을 감내하겠다는 태도가 승헌이 보지 않으려 했던 진실을 일러주는 것 같아 껄끄러웠다. 하나 오늘은 달랐다. 오늘만큼은 승헌도 옥환에게 할 말이 있었다.
“옥환. 그대에게 물을 것이 있어.”
옥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방금까지만 해도 더위에 힘겨워하던 그는 돌연 사시나무 떨듯 손을 떨고 있었다. 그런 옥환의 손을 잡아 주며 승헌이 오롯이 제 마음과 마주했다. 군왕이라서 안 된다, 위패가 있어서 안 된다……. 그렇게 수없이 제 발목을 움켜쥐고 놓지 않던 사념을 뿌리치고, 마침내 여기까지 왔다. 승헌은 가볍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다시 내쉬는 것과 동시에 말했다.
“옥환. 내 사람이 되어주지 않겠나?”
“……예……?”
“염완의 책사도, 서국의 태사도 아닌 그저 나, 견승헌의 사람이.”
옥환은 눈을 크게 뜨고 승헌을 바라보았다. 승헌은 조금 긴장한 채로 소매 안에 소중히 넣어 두었던 옥가락지를 꺼내 옥환의 고운 손가락에 끼웠다. 옥환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옥가락지를 내려다보았다. 대경실색한 옥환에게 승헌이 말을 이었다.
“그대의 남은 시간을, 나의 반려로서만 보내 주었으면 해. 정치 같은 것은 관두고 말이야. 비록 내가 왕을 그만둘 수는 없겠지만, 나 역시 그대 아닌 이와는 혼인을 하지도, 후사를 보지도 않을 거야.”
승헌의 말에 옥환이 깜짝 놀라 가락지를 보던 시선을 들어 승헌을 보았다.
“후사를 보지 않으시다니요? 하면 승계는…….”
“친척을 양자로 입양하든, 마땅한 왕재가 있으면 물려주든, 그것은 별일도 아니야. 내가 왕위에 그리 집착하지 않는다는 걸 그대도 알지 않나.”
아무리 그래도 고작 자신 때문에 포기하기엔 너무나 큰 대가였다. 옥환은 갑작스런 고백에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했으나 승헌은 진중한 어조로 말했다.
“그대를 연모해, 옥환. 그대를 너무나 깊이 연모하고 은애해. 하나 우리의 관계를 내가 거래로 만들지 않았나. 그러니 그것을 바로잡을 기회를 줘.”
“……전하.”
“나의 땅에서, 나의 백성으로…… 나의 반려로 살아.”
서국의 백성.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옥환 역시 모르지 않았다. 전부든 일부든 간에 승헌은 자신이 저지른 짓을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것을 덮으려 한다. 자신을 사랑해서. 고작 벽국을 등지고 조정에서 나오는 것만으로 전부 용서하려 하는 것이다.
승헌이 배신에 치를 떨며 자신을 죽이려 들거나 불같이 화를 내는 모습만 상상해 왔던 옥환은 생각보다 더 큰 승헌의 애정에 그저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리고 그의 제안에 진심으로 흔들렸다. 승헌과 앞으로의 생을 함께 하고 싶었고, 무엇보다 그저 평범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은 옥환이 바라던 일이기도 했기에.
평생을 충성했던 나라에도 버림받았고, 문무관을 가리지 않는 신하들의 견제와 비방으로 서국 조정에도 이미 신물이 났다. 게다가 더는 누군가를 속이고 그들의 마음을 이용하며 대업을 위한 일이라고 정당화하고 싶지 않았다.
책략, 정치, 그런 것으로만 점철된 길을 쉬지 않고 달려왔다. 이젠 쉬고 싶었다. 줄곧, 멈추고 싶었다. 그리고 난생처음 연심을 품게 된 이가 그 기회를 주며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어찌 뿌리칠 수 있을까.
하지만…… 그럼에도……. 옥환은 옥가락지를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안 되는 일이었다. 사랑하는 이를 저 때문에 백성들에게 손가락질받게 만들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자신이 벌여 온 일들은 없던 것으로 넘겨도 될 만큼 가볍지 않았다. 승헌이 조금만 섣부르게 움직였다면 서국을 무너뜨리고도 남았을 일이었다. 그러니 양심이 있다면 거절해야 옳았다. 그를 사랑할지언정, 그의 나라에서, 그의 궁 안에서 호의호식할 생각은 하지 말아야 했다.
“전하, 저는…….”
한데 마치 거절을 예감하기라도 한 것처럼, 승헌이 옥환의 말을 가로챘다.
“그대도 나를 사랑한다고 했잖아. 내가 혼인하지 않길 바랐고.”
승헌의 말대로였다. 그래놓고 막상 모든 것을 용서할 테니 제게 오라는 승헌의 제안을 거절하려 했다. 옥환은 이 모든 것이 자신의 이기심일 뿐이라는 깨달음에 가슴이 아렸다. 무엇을 해도, 승헌을 도울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어렵사리 다시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 성군이 되시길 바랍니다. 서국이 좋은 나라라는 걸 압니다. 그렇기에 더더욱 서국은…… 벽국처럼 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에둘러 말한 것이었으나 거절의 의도를 전하기는 충분했다. 승헌은 말이 없었다. 하나 그의 품 안에 안긴 옥환에게는 그의 실망과 좌절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하나 옥환은 그의 등을 감싸려 들었던 팔을 소리 없이 내렸다. 제게 승헌을 위로할 자격이나 있던가.
그때, 승헌이 무거운 어조로 침묵을 깼다.
“나도 여기까지 오는 것이 쉽지는 않았어. 그래도 왔잖아, 결국.”
“…….”
“이틀, 아니 사흘 동안 생각해. 그리해도 그대의 마음이 바뀌지 않는다면…….”
승헌은 말을 맺지 않고 물러났다. 바뀌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또 다른 여인과의 혼사를 추진할까? 적국의 첩자인 저를 죽이려 할까? 그도 아니면…….
‘더는 나를 찾지 않으실까.’
죽이지도, 화내지도 않고 그저 저를 잊을까.
“그만 가 봐야겠어.”
함께 포개어져 있던 발이 무정하게 떨어졌다. 제 발만 덩그러니 남은 대야를 굽어보던 옥환이 뒤늦게 고개를 들었을 때 이미 승헌은 발을 닦고 신을 신는 중이었다.
“전하, 배웅하겠습니다.”
“나오지 마.”
일어나려는 옥환을 승헌이 다시 가뿐히 주저앉혔다. 그는 옥환의 뺨을 쓰다듬으며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침묵하다가, 이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오늘은 배웅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전하.”
뒤늦게 승헌의 맨얼굴과 마주한 옥환의 심장이 덜컥했다. 그를 상처 주려던 것은 아니었다. 하나 필연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었다. 배신자 따위를 위해 가시밭길을 걸어 달라 어찌 청하겠는가. 하물며 서국 안의 사정에 밝고 승헌과 문무관 사이의 알력 다툼을 잘 아는 옥환은 더더욱 그럴 수가 없었다. 연심으로 눈을 가리기에, 그는 지나치게 똑똑했다.
죄책감에 고개를 숙인 채 머뭇거리던 옥환이 겨우 얼굴을 들었을 때, 유감스럽게도 승헌은 이미 떠나가고 없었다. 당황한 옥환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바람에 대야의 물이 튀어 옷과 바닥이 젖었으나 옥환은 개의치 않았다. 그는 맨발로 처소 밖으로 뛰쳐나갔다.
발바닥이 더러워지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편전으로 향하는 길을 달리던 옥환은 이미 따라잡을 수 없는 곳까지 가 있는 승헌의 행렬을 보고서야 겨우 멈춰 섰다. 발바닥에서 느껴지는 따가운 감촉이 그를 현실로 불러왔다. 승헌을 쫓아낸 것은 자신이었고, 그를 따라가서는 안 되었다. 옥환은 망연자실한 채 돌아섰다. 승헌은 사흘을 주겠다고 했다. 하면 그 사흘 동안 그는 옥환을 찾지 않을지도 몰랐다.
대답 여하에 따라, 어쩌면 영원히 그럴 수도 있었다.
“태사, 괜찮으십니까?”
놀란 하인들이 뒤늦게 달려와 옥환의 발을 닦아주고 새 신을 신겼다. 그사이 이제는 점처럼 작아져 버린 승헌을 돌아본 옥환은 문득 그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나도 여기까지 오는 것이 쉽지는 않았어. 그래도 왔잖아, 결국.’
하나 제 고집이 그를 다시 돌아가게 만들었다.
하인들의 재촉에도 한동안 우두커니 그 자리에 서서 후회를 곱씹던 옥환은, 끝내 승헌과 마찬가지로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
깊은 밤, 옥환은 몸을 뒤척이며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있었다. 낮에 승헌을 그렇게 보내놓고 옥환의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이대로 승헌을 보지 못하게 되면 어쩌나 겁도 났다.
한숨을 내쉬며 오른쪽으로 돌아누운 옥환은 문득 등 뒤로 느껴진 인기척에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혹, 계평일까? 아니면 염요가 보낸 또 다른 자객인가?
비록 계평이 잡혀갔다고는 하나 옥환은 아직 자신이 안전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행여 승헌이 걱정할까 싶어 아무런 내색하지 않았을 뿐, 옥환은 언제든 다가올 수 있는 죽음의 위협에 항시 바짝 긴장한 상태였다.
자신의 무위가 생각보다 나쁘지 않다고 해도 사람을 죽이는 것에 특화된 살수를 당해낼 재간은 없었다. 다만 상대는 자신을 손쉬운 먹잇감이라고 여기고 있을 테니 방심을 유도하여 허점을 찌른다면 구명의 기회가 아주 없지는 않으리라. 옥환은 머리를 빠르게 굴리고는 독을 먹은 후부터 줄곧 품에 숨겨 놓았던 은장도를 더듬어 손에 쥐었다.
그사이에도 돌아누운 옥환을 향해 검은 그림자는 조심스레 다가오고 있었다. 행여 자신이 깨어 있는 걸 들킬까 싶어 옥환은 필사적으로 초조함을 억누르고 곤한 숨소리를 내려 노력했다. 그리고 마침내, 정체불명의 그림자가 옥환의 근처까지 다가온 순간.
“……!”
옥환은 재빨리 몸을 상대 쪽으로 돌리며 은장도를 횡으로 휘둘렀다. 예상치 못한 행동에 상대 또한 놀란 기색이었으나 그것은 정말 찰나일 뿐, 상대는 막강한 힘으로 옥환의 팔을 제압했다. 은장도가 맥없이 바닥으로 떨어졌으나 옥환의 저항도 만만치는 않았다. 그는 상대의 우악스런 손아귀에서 팔을 빼내려 발버둥 치며 바깥에 도움을 요청하려 소리를 높였다.
“게 아무도 없……!”
하나 상대가 한발 빨랐다. 옥환이 한 문장을 다 말하기도 전에 그의 입은 커다란 손에 틀어 막혔다. 양팔은 머리 위로 잡힌 상태였다. 발길질을 해보려 했지만 상대는 이미 옥환의 몸 위에 올라타 있어 그조차 쉽지 않았다. 자신이 죽으면 승헌이 얼마나 상심할까. 하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거라면 차라리 죽는 게 나을까? 죽어서라도 그의 마음에 애틋한 정인으로 남는 것이 낫나.
하나 옥환은 약해지는 마음을 다잡았다. 죽더라도 염요의 손에 죽을 수는 없었다. 옥환은 있는 힘껏 팔을 휘둘렀다. 옥환의 양팔을 제압했던 상대의 힘이 풀린 순간이었다.
“설옥환!”
온 힘을 다해 상대에게 내지르던 주먹이 우뚝 멈추었다. 살수의 것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익숙하고, 또 걱정 어린 부름이었다. 어느새 옥환의 입을 막고 있던 손이 사라져, 옥환은 상대를 향해 이렇게 물을 수 있었다.
“……전하?”
그 순간 구름이 걷히며 창으로 쏟아진 달빛에 상대의 얼굴이 환하게 보였다. 살수의 정체는 바로 옥환을 이토록 끈질기게 저항하도록 만든 장본인, 승헌이었다.
옥환은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넋 나간 얼굴로 승헌을 응시했다. 승헌 역시 제 코앞에 와있는 옥환의 주먹을 보다가, 실소를 터뜨리며 그 주먹을 잡아 내려놓았다.
“이 기세면 크게 걱정 안 해도 되겠군.”
“전…… 하께서 어찌…….”
여전히 어안이 벙벙한 옥환에게서 비켜난 승헌이 그의 몸을 일으켜 주고는 자신이 붙잡았던 손목을 살폈다. 옥환이 너무 거세게 반항하는 바람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가고 말았다. 붉어진 손목을 보며 승헌은 혀를 찼다.
“송구합니다, 전하. 저는…… 전하이신 줄은 꿈에도 모르고.”
혀를 차는 승헌을 보며 옥환이 민망한 얼굴로 사과를 건넸으나 승헌이 화난 것은 자기 자신 때문이었지 옥환 때문이 아니었다.
“나야말로 미안하군. 그대를 놀라게 할 생각은 아니었어.”
그 말에 옥환은 새삼 승헌을 올려다보았다. 조금 전까지 그리던 이가 눈앞에 있으니 어쩐지 기분이 묘했다.
“나도 놀라긴 했어. 그대가 설마하니 이런 걸 품에 지니고 다닐 줄은 몰랐거든.”
이윽고 승헌이 떨어진 은장도를 주워 들고는 그것을 흥미로운 시선으로 살펴보며 그렇게 말했다. 옥환은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고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하나 승헌은 이내 진지한 얼굴로 옥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걱정하지 마. 아무도 그대를 해치게 두지 않아.”
“궁 안이니 그럴 일은 없을 테지요. 저도 압니다.”
“그런 뜻이 아니야. 그대는 두 번이나 ‘궁 안에서’ 죽을 뻔하지 않았나. 그대의 처소는 항상 금군이 숨어서 지키고 있으니 걱정할 필요 없어.”
“예?”
금군이라는 말에 옥환의 귀가 번쩍 뜨였다. 왕의 직속 호위군인 금군을 고작 제 처소를 지키는 일 따위에 사사로이 쓰다니, 중신들이 알면 뒷목을 잡을 일이었다.
“전하.”
“내 군대고 내 수족들이야. 어찌 쓰든 내 마음이지.”
마치 옥환이 하는 생각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 승헌이 단호하게 대꾸했다. 옥환은 적국의 재상이었던 제 과거도 덮겠다는 사람에게 금군이 대수랴 싶어 훈계하려던 것을 관두었다. 애초에 승헌이 군왕이랍시고 여러모로 제멋대로 군 것도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다. 대신 그는 진심으로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한데 어찌 이리 조용히 오셨습니까?”
그러자 승헌의 안색이 대번에 나빠졌다. 옥환은 자신이 물으면 안 될 것을 물었나 싶었지만 그가 몰래 들어오는 바람에 하마터면 그에게 주먹질을 할 뻔했으니 모른 척 넘어갈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냥, 너무 늦은 시간이지 않나.”
그러더니 승헌은 자연스레 옥환의 허리에 팔을 감고 침상 위로 쓰러졌다. 그대로 승헌에게 안겨 눕게 된 옥환은 대답에 납득하지 못했다는 듯 승헌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 못 이긴 승헌이 미간을 찌푸린 채 투덜거렸다.
“그대가 걱정돼서.”
“무슨 걱정 말씀이십니까? 금군까지 두셨다면서요.”
“……또 악몽을 꿀까 봐.”
옥환은 일순 당황해서 멍청한 표정으로 승헌을 보기만 했다. 승헌은 그런 옥환에게서 슬그머니 시선을 돌린 채 덧붙였다.
“낮에 그렇게 두고 간 것이 마음에 걸리기도 했고.”
그는 나중에 옥환이 맨발로 자신을 쫓아나갔다가 허탈하게 돌아갔다는 이야길 들은 것을 일부러 감추었다. 굳이 들춰내 자존심 강한 옥환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나 그 얘길 듣고 나서야 비로소, 승헌은 옥환도 필시 힘들 것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혹 저 혼자만 이리 애달프고 절절한가 싶어 잠시나마 섭섭해했던 자신이 한심했다.
결국 종일 옥환의 생각만을 하던 승헌은, 행여 또 그가 잠 못 이루고 있을까 봐 야밤을 틈타 옥환의 처소에 몰래 찾아온 것이었다.
사흘을 주겠다고 뻔뻔하게 얘기해 놓고 그새를 못 참아 체통도 잊고 처소에 숨어들었다는 것이 부끄럽지 않다면 거짓이었다. 게다가 자칫하면 옥환에게 한 대 맞을 뻔하기까지 했다. 만일 처소를 감시 중인 금군이 처소에 찾아온 게 자신인 것을 미리 알지 않았다면, 더 끔찍한 사태가 벌어졌을 수도 있었다.
하나 승헌은 일부러 더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이 깊은 밤에 사람들을 다 깨워 가며 오기도 그렇지 않나. 그대 또한 이미 잠들어 있을 수도 있는데.”
물론 승헌이 말하지 않은 속내까지 다 알게 된 눈치 빠른 옥환은, 승헌에게 자신이 그렇게 좋냐고 묻고 싶을 정도였다. 자존심이라면 승헌도 제게 지지 않는다 여겼는데, 그는 제 앞에선 군왕의 체통은 물론 사내의 체면까지 버리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니 이 지고지순한 마음을 어느 누가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전하.”
잠시 생각하던 옥환이 나직이 입을 열었다. 승헌은 옥환의 말을 들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는 듯했지만 결국 막지 않고 옥환이 말을 잇게 두었다.
“전하께서 가시고 나서 쭉 생각해 보았습니다. 제가 만일 전하의 뜻을 받들면 어찌 될지를요. 중신들은 반발할 것이고, 저를 의심하는 대장군이나 중서령은 절 협박하려 들지도 모릅니다. 정비를 들이지 않고 버티시는 전하와 신하들의 사이는 멀어질 것이고, 후사가 없는 전하의 권력은 약해질 것이며, 말씀하신 대로 양자를 입양하거나 다른 이에게 왕위를 물려주시면 추후 왕위 다툼의 발단이 될 수도 있겠지요. 전하는 만인에게 비난받는 저를 지키기 위해 절 아주 궁 깊은 곳에 감춰 두셔야 할 것입니다. 물론 그곳에서조차 저는 전하와 서국을 망쳤다는 생각에 평생 죄책감에 붙들려 살 테고, 언젠가는 전하의 총애마저 잃을 수도 있겠지만요.”
“옥환.”
“하지만.”
승헌이 입을 열었으나 옥환은 그에게 말할 틈을 주지 않았다. 승헌은 애타는 눈빛으로 옥환을 바라보았다. 옥환은 차분히 말을 이었다.
“전하께서 하사해 주신 작은 땅에서 농사를 지으며, 매일 전하께서 정무가 끝나고 돌아오시길 기다리고, 돌아오시면 그 품에 안겨 유유자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죄책감이 들다가도 전하를 보면 모든 것이 잊힐 것이고, 언젠가 전하가 왕위에서 물러나시면 둘이 한적한 곳으로 떠나 여생을 함께하리란 희망을 품으며 살아가겠지요. 행여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저는 전하와 보낸 시간을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승헌의 생각에 옥환은 이틀을 더 기다릴 필요도 없이 이미 마음을 정한 것 같았다. 하면 어느 쪽일까. 그에게는 어느 쪽이 더 무거운 것일까. 승헌은 문득 옥환의 빈손을 내려다보았다. 제가 준 가락지는 어디에 두었을까. 어쩌면…… 옥환의 대답은 변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는 승헌의 품에 옥환이 얼굴을 묻고 말했다.
“조금만 더 기다려주십시오. 제게도…… 많은 것과 작별을 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
“전하께서 주신 시일이 지나면, 대답을 들고 찾아뵙겠습니다. 약속한 대로.”
옥환은 혹 실망한 승헌이 떠나 버릴까 저어했으나, 승헌은 그대로 옥환을 강하게 감싸 안았다. 어쩌면 이렇게 함께 누울 수 있는 것도 오늘로 마지막일지 몰랐으니까.
물론, 승헌은 옥환을 보내 줄 생각 따위는 없었다. 하나 제 기대와 상반되는 선택을 한 옥환을 붙들어 둔다면 그 대가로 자신은 옥환의 사랑을 포기해야 할 터였다. 옥환은 자신을 존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할 위인이 아니었다. 승헌은 사랑하는 이를 손 놓고 떠나보낼 위인이 아니었고.
짧은 침묵 후, 승헌이 입을 열었다.
“그만 자.”
옥환은 고개를 끄덕이고 눈을 감았다. 그렇게 밤이 저물었다.
이틀 후 아침. 승헌과 약속한 날이 되었다. 옥환은 담담하게 일어나 소세를 하고 아침 식사를 했다. 아직 몸이 다 회복되지 않았기에 조회에도 나갈 필요가 없는 그는 식사 후 책을 읽다가, 한동안 생각에 잠겨 처소의 앞마당을 거닐었다.
그렇게 산책까지 끝내고 난 옥환은 이번엔 하인 하나에게 등불을 가져다 달라 청했다. 하인이 등불을 가져오자 옥환은 그를 내보내고 홀로 남았다.
우렁차게 우는 매미 소리를 들으며, 잠시 창가 앞에 멀거니 앉아 있던 옥환이 이내 서랍을 열어 무언가를 꺼냈다. 서국의 기밀문서였다. 그와 관련된 일들이 다 먼 옛날처럼 느껴진다고 생각하며 옥환은 그것을…… 천천히 찢었다.
종이는 옥환의 손끝에서 갈기갈기 조각났다. 종잇장이 찢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옥환은 회상에 잠겼다. 이것을 빼내려 목숨을 걸었고, 종소를 죽일 뻔했으며, 자신 또한 위기를 맞았다. 하나 더 이상 미련은 없었다. 옥환은 그것을 찢다가 이내 등잔을 들어 불을 붙였다. 종이는 활활 타올랐고, 빠르게 재가 되었다. 구하려 할 땐 그리 어렵던 것이 막상 없애려 하니 너무도 쉬워 옥환은 한없이 허탈했다.
기밀문서를 모두 태운 옥환은 돌연 옷매무새를 가다듬더니 머리까지 다시 빗었다. 그러고는 방 한가운데에 동쪽 방향을 보고 섰다.
그리고 그는 그 방향을 향해 절을 올렸다. 염완의 나라가, 무덤이 있을 그곳을 향해.
두 번의 절을 올린 그가 허리끈에 매달린 옥 장신구를 내려다보았다. 이것은 염완이 제게 준 것이었다. 그의, 제게 남은 유일한 유품이었다.
“주군.”
옥환은 나직이 염완을 불러 보았다. 왜 그러시는가, 선생. 웃음기를 머금은 인자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를 떠올리자 자연히 코끝이 시큰해지는 것을 느끼며 옥환이 말을 이었다.
“주군, 제가…… 연모하는 분이 누구인지 아시지요?”
그는 알 것이다. 하늘에서 모두 보고 있었을 테니까. 어쩌면 무척이나 화가 나 있을지도 몰랐다. 염완이 자신을 아들인 염요보다 더 아껴 주었음을 옥환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젯밤 승헌이 나타난 순간, 옥환은 그간의 방황이 무색하게 곧바로 길을 찾았다. 승헌에게로 곧장 나 있는 단 하나의 길을. 그와 동시에 그는 필연적으로 제 마음을 거스를 수 없음을 깨달았다. 이 목숨을 끊지 않는 한, 자신은 평생 승헌을 그리고 바랄 것이다.
옥환의 마음은 승헌이 제 사람이 되어 달라 청했던 그때부터 이미 정해져 있었다. 그저 그곳으로 시선을 향하지 않으려 했을 뿐. 옥환은 어젯밤 그 사실을 통감했다.
“제 남은 날이 짧든 길든, 저는 이제 그 모든 날에 그분을 두려 합니다. 그날이 단 하루라도. 단 한 시진이라도.”
내일이 되면 죽는다고 해도 옥환은 이 순간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하나 저를 챙겨 주고 믿어 주고 존중해 주었던 염완의 얼굴이 스쳐 가자 옥환의 단정한 미간이 일그러졌다. 죄책감에 몸이 으스러질 것 같았다. 벌써 벌이 내렸나 싶을 만큼 괴로운 마음으로, 옥환이 입을 열었다.
“주군. 저를 용서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제게 벌을 내려 주십시오. 은혜를 원수로 갚는 이 배은망덕한 간신에게 벼락을 치십시오. 저는 지옥에 떨어질 것입니다. 그분도 주군도 없는 그곳에서, 업화의 불길에 영겁을 타오를 것입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옥환이 느릿느릿 몸을 일으켰다. 망설임과 미련이 그의 발목을 붙들었으나 그는 결코 멈추지 않았다.
“이제 저는 그분의…… 견승헌의 사람이 되겠습니다.”
그때, 옥환의 눈앞에 살아생전 모습 그대로의 염완이 나타났다. 그는 인자하게 웃으며 물었다.
“선생. 정녕 그 길로 가시는가.”
잠시 당황했던 옥환은 이내 마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염완의 표정이 일순 차갑게 굳었다. 그 모습을 본 옥환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와 보냈던 십 년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하나 눈을 깜빡여 잔상을 몰아낸 옥환이 단호하게 허리끈에 달린 옥 장신구를 떼어 냈다. 고개를 들자 염완의 환각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후였다.
“죄송합니다, 주군.”
옥환은 장신구를 쥔 채 눈을 감고 크게 한 번 숨을 내쉬었다. 다시 눈을 뜬 옥환의 눈에 더 이상의 미련은 없었다. 그는 서랍을 열어 장신구를 넣고, 대신 그 안에 있던 승헌이 준 옥가락지를 꺼냈다.
옥으로 만든 가락지를 ‘옥환玉環’이라고 부르기도 한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승헌이 이것을 꽤 고심해 준비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내 옥환은 그것을 조심스레 손에 끼웠다. 흰 손가락 위에서 상서로운 빛깔의 맑은 옥이 영롱하게 반짝였다.
자신의 이름과 같은 물건. 그리고 앞으로는, 자신의 분신이나 마찬가지가 될 물건이었다. 옥환은 자신이 분명 죽을 때까지 이것을 빼지 않으리란 것을 알았다.
그리고 이것을 보면 승헌은 자신의 대답이 무엇인지 곧바로 알아챌 것이다. 그 잘생긴 얼굴로 웃으며, 크게 기뻐해 주겠지. 저를 안아 줄 것이고, 사랑한다 말해 주리라. 그것만으로 이 선택에는 충분한 가치가 있었다.
옥환은 처소를 나서 승헌이 기다리고 있을 편전을 향했다. 그리고 머잖아, 편전의 화려한 외벽이 보이기 시작했다.
곧 승헌을 만난다는 사실에 뒤늦게 옥환의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그는 정신없이 박동하는 가슴에 손을 얹었다.
“전하. 태사께서 뵙기를 청하시옵니다.”
환관의 알림에 편전의 문이 조용히 열렸다. 열린 문을 앞에 두고, 옥환은 돌연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꼈다. 편전 안은 지나치게 어두웠다. 그 어둠이 기이하게도 마치 저를 잡아먹으려 아가리를 벌린 괴물처럼 느껴졌다.
이 모든 게 그저 승헌을 만난다는 긴장감 때문이리라. 불안감에 떠는 마음을 달랜 옥환은 가볍게 문턱을 넘었다.
“옥환.”
그리고 그곳에서, 그는 서릿발 같은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승헌과 마주했다.
마음이 통한 이후로는 한 번도 본 적 없던 그 싸늘한 눈빛에, 옥환은 그제야 무언가가 잘못됐다는 것을 직감했다.
***
한여름에도 냉기로 가득 찬 지하 감옥 안. 코를 찌르는 악취와 오물 속에서, 계평은 끊어질 듯한 숨을 가까스로 붙잡고 있었다. 온몸을 한 뼘이 넘는 바늘로 찔리고, 생살이 저며지는 고문을 받으면서도 그는 염요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반면 결국 설옥환은 그 질긴 목숨을 이번에도 부지했다는 모양이었다. 모든 게 자신의 실책이었다. 염요가 준 독을 절반도 채 쓰지 않았다. 물론 절반이라고 해도 그 모두를 먹었다면 죽고도 남았겠으나, 운이 좋았는지 옥환은 죽음을 면했다. 그리고 그에게 그 운을 만들어 준 것은 본인이었다. 찰나의 망설임으로 일을 그르친 것이다.
주인의 명에 따르다 죽는 것은 두렵지 않았다. 도리어 바라던 바였다. 하나 염요의 명을 제대로 완수하지 못하고 죽을 수는 없었다. 그는 염요가 자신을 충성스러운 신하이자 훌륭한 벗으로 기억하길 바랐다. 그것만을 위해 어린 나이에서부터 잔혹한 훈련을 받았고, 염요의 그림자에서 지저분한 일을 도맡아 처리하며 버텼다. 오직 염요의 인정을 위해서. 이제 와 그간의 삶을 모두 물거품으로 만들 수는 없었다.
물론 이곳에 갇힌 이상 옥환을 제 손으로 죽이는 것은 불가능했다. 어쩌면 옥환보다 그가 더 먼저 죽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나, 염요는 계평 본인이 옥환을 죽여야 한다고 한 적은 없었다. 어떤 방법으로든 설옥환은 죽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하면, 오랜 시간 섬겨온 나라를 배신하게 만든 정인의 손에 죽는 것은 어떨까. 그것은 설옥환에게 있어 단순한 죽음보다 더 끔찍한 일일 터였다. 당연히, 제 주인을 배신했으니 그 정도의 대가는 치러야 했다.
자신이 저지른 일은 마땅히 스스로가 감당해야 하는 법이다. 그것이 계평의 오랜 철칙이었다. 그는 메마른 목구멍을 열어 소리쳤다.
“어이, 가서 네놈들 윗대가리에게 전해라! 그리 바라 마지않던 자백을 해 주겠노라고.”
잠시 뒤, 지하 감옥에 계평이 기다리던 이가 등장했다. 높아 봤자 대장군 정도일 거라고 여겼던 계평은 고개를 들어 상대를 확인하고는 적잖이 놀랐다. 눈앞에 선 이는 이 나라의 군왕인 승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손에는 날이 선 칼이 들려 있었다.
몹시도 위협적인 모습이었으나 승헌이 온 것은 계평에게는 도리어 잘된 일이었다. 본인의 귀로 직접 진실을 듣는 편이 더 충격이 클 것이다. 그 충격으로 말미암아 무너진다면 더할 나위 없고.
“이렇게 대단하신 분이…….”
“자백을 하겠다고?”
승헌이 비아냥 섞인 계평의 말을 단호하게 자르고 물었다. 계평은 얼굴을 일그러뜨렸으나 계속된 고문에 그의 얼굴은 이미 엉망이었다. 환관이 얼른 의자를 가져오자 승헌은 됐다는 듯 손짓했다. 그야말로 자백만 듣고 가겠다는 태도였다.
기실 승헌은 계평의 입에서 “염요”라는 이름이 나오기만을 고대하고 있었다. 그 이름이 나온다면 승헌은 벽국을 쳐부술 명분을 가질 수 있었고, 그리하면 옥환이 돌아갈 곳을 영영 없애 버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이름을 말하는 순간 더는 이놈을 살려 둘 필요도 없게 된다. 옥환을 죽이려 한 놈의 목숨줄을 여태까지 붙여놓은 것은 오직 그 하나만을 위해서였다.
한데 그때, 계평이 큭큭거리며 웃었다. 어쩐지 섬뜩한 웃음소리에 감옥 안의 모든 이가 공연한 불안감을 느꼈다. 하나 승헌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계평의 목을 틀어쥐고 하문했다.
“염요더냐? 다 무너져가는 약소국의 왕 따위가 감히 서국 조정의 신하를 건드린 것이야?”
목이 막혀 켁켁대면서도 계평은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고는 건방진 투로 대꾸했다.
“서국 조정의 신하……? 웃기는군. 서국의 왕께서는 정녕 설옥환이 서국의 신하라 보시오?”
“그래. 그러니 네놈들이 그것을 알고 옥환을 죽이려 했던 것이 아니냐?”
계평은 목을 잡힌 채로 낄낄거렸다. 가래가 끓는 소리와 섞인 웃음소리는 막힌 목구멍을 뚫고 나와 한층 더 기괴해졌다. 승헌은 손아귀에 힘을 주어 아예 계평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숨통이 막히자 계평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컥, 컥,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며 괴로워하는 계평을 차갑게 내려다보던 승헌이 이내 손에서 살짝 힘을 풀더니 다른 손에 들고 있던 칼을 들이대고 물었다.
“너는 이 질문에만 답하면 된다. 염요더냐?”
계평이 이제는 다소 흐려진 미소로 대답했다.
“설옥환이오.”
그의 동문서답에 승헌의 인내도 바닥에 다다랐다. 그가 자백하겠다는 말을 들은 이가 꽤 되니, 염요라는 이름을 말하고서 죽었다고 해도 크게 의심 살 일은 없을 것이다. 간단한 계산 끝에 승헌이 칼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한데 그때.
“설옥환이 이 나라의 기밀을 벽국에 넘겼소.”
“……뭐?”
승헌은 어처구니가 없어 그렇게 되물었다. 그러다 이내 실소했다.
참으로 기가 차는 이야기였다. 누가 무엇을 해? 승헌은 이 헛소리를 절대 믿지 않았으나, 함께 있는 궁인들이나 옥졸, 형부상서는 다를 수도 있었다. 호진이 여기 없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승헌은 이 자리에 있는 자들의 목을 베어야 할지, 아니면 입단속을 철저히 시켜야 할지 고민했다. 하나 계평의 이어지는 자백이 승헌의 신경을 건드렸다.
“믿지 못하겠소? 하면 기다려보시오. 곧 전쟁이 일어날 것이니. 우리는 서국이 군량미를 각 지방 어느 곳에 보관하고 있는지, 어느 지방에 병력이 많고 적은지 모두 알고 있소. 모든 게 다 설옥환 덕이지.”
“그리해서 내가 의심으로 말미암아 옥환을 죽이게끔 만들려고? 웃기지도 않는군. 네놈이 하늘을 하늘이라 이르고 땅을 땅이라 일러도 나는 너보다 옥환을 더 믿는다.”
계평은 가소롭다는 듯 승헌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군왕이 이리 아둔하니 이 나라의 미래도 까마득하군. 이보시오, 원룡. 설옥환이 백청의 집에서 기밀을 빼냈소. 그래 놓고 후환을 방지하기 위해 당신과 신하들을 속여 백청을 처리해 버렸지. 기억하시오? 백청이 설옥환을 거의 확정 지어 의심했던 것을. 그게 그냥 근거 없는 헛소리였을까? 한 나라의 대장군이란 자가 정녕 그랬다고 보시오?”
“…….”
“설옥환이 백고를 이용해 기밀을 빼냈고, 나와 그자가 그것을 필사해 돌려놓았소. 물론 돌려놓는 데에는 종소를 이용했지. 설옥환은 그런 자요. 제 목적을 위해서라면 저를 좋아하는 사내도, 제가 아끼는 제자도 모두 하나의 장기말일 뿐인.”
거짓으로 치부하기에는 계평의 발언으로 설명되는 일이 너무나 많았다. 승헌은 각 사건의 연결고리를 떠올리지 않으려 애를 썼다. 하나 승헌의 눈동자에 언뜻 스친 동요를 눈치챈 계평이 히죽이며 덧붙였다.
“원룡, 당신 또한 그의 장기말이었겠지.”
“염요가 나와 옥환을 그리 이간질해서 내게 옥환을 죽이게 하라고 명하더냐? 참으로 간악하구나. 그따위 간교로 나라를 통치하니 벽국이 기울지 않고 배기나. 하나 아쉽게도 나와 옥환의 관계는 그런 거짓으로 무너지지 않는다. 참으로 유감이구나.”
승헌은 일부러 더 빈정거리며 계평을 도발했으나 이미 죽음을 앞둔 계평에게는 무서울 것도, 망설일 것도 없었다. 승헌이 의심하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자신은 진실만을 말하면 그만이었으니까.
“설옥환이 당신을 연모한다고 하더이까? 그것이 벽국에게 시간을 벌어 주기 위함임을 아직도 모르시겠소? 벽국이 선공할 때까지, 당신의 의심을 거두고 정사에서 눈멀게 하기 위함임을?”
옥환이 어쩌면, 벽국의 첩자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승헌도 어렴풋이 하고 있었다. 적어도 그는 마음속에 여전히 염완을 품은 채 서국에 온 것이란 걸 알았다. 하나 서국에서 보낸 시간을 통해 두 사람은 서로를 연모하게 되었고 위패를 태우는 것으로 승헌은 옥환의 과거도 함께 태워 없앴다고 여겼다.
한데, 옥환이 군사 기밀을 넘겼다고? 그럴 리가 없었다. 만일 그랬다면 옥환은 저를 연모한다고 해선 안 됐다. 그리고 옥환은 그런 뻔뻔한 사람이 아니었다. 거짓으로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이도 아니었다. 전쟁을 벌이기를 주저했고, 종소를 구하려 목숨까지 걸었던 사람이었다. 그런 옥환이…… 그랬을 리 없었다.
제 목을 겨누고 있던 칼날이 부쩍 멀어진 것을 깨달은 계평이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사람 마음속 깊은 곳의 의심을 건드리면서도 당당하기 짝이 없는 태도로 상대를 혼란스럽게 만들던 수법은 옥환이 자주 쓰던 것이었다. 일 년간 옥환의 곁을 지키며 보고 배운 것이 그의 목숨을 위협하게 될 줄 누가 알았으랴. 계평은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옥환은 기밀을 벽국에 넘기지는 않았다. 어쩌면 지금쯤 그것을 없앴을지도 몰랐다. 그랬다면 정말로 설옥환은 눈앞의 사내에게 완전히 넘어간 것이겠지. 금야 선생 설옥환이, 연정으로 인해 지금까지의 명성과 충심을 허사로 만든 것이다.
하나 그가 없애든 없애지 않았든, 그가 기밀을 벽국에 넘겼다는 거짓은 곧 사실이 될 터였다. 승헌이 원정에서 돌아와 부상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옥환이 처소를 뛰쳐나간 날, 책상 위에 고스란히 놓인 기밀을 발견한 계평이 그것을 필사해 벽국에 넘겼기 때문이었다. 그 일을 한 주체가 누구든 기밀을 빼낸 것은 옥환이었으니 그에게도 일말의 책임이 있었고, 모두의 의심을 사기도 충분했다.
어쩌면 그때부터, 옥환은 승헌에게 마음이 기울었는지도 몰랐다. 그 중요한 기밀을 그저 책상에 내팽개치고 나가 며칠씩 돌아오지 않았으니 말이다. 물론 그 덕에 계평은 그것을 필사해 벽국에 넘길 시간을 벌었지만.
염요는 그것을 활용할 방안을 모색했고, 마침내 벽국은 서국을 칠 만반의 준비를 끝냈다. 그리고 침공에 들어가기 전, 염요는 옥환을 없애 버리라고 명령했다. 염요는 서국 정벌의 공을 오롯이 자신의 것으로 하길 원했던 것이다. 하나 엄밀히 말해 옥환은 벽국을 배반한 적이 없었고, 도리어 서국에 가서도 벽국을 위해 일해 왔다. 그것을 알기에 계평 역시 옥환을 죽이는 데에 망설임이 있었던 것이나, 옥환이 결국 적국의 왕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게 밝혀졌으니 이젠 일의 인과 따윈 더 이상 중요치 않았다.
‘이것으로 끝이다.’
이래도 견승헌이 설옥환을 죽이지 않는다면…… 계평에게도 더는 수가 없었다. 나라를 망하게 할 만큼의 연정을 무슨 수로 막겠는가.
한참 침묵하던 승헌이 계평을 놓고 물러섰다. 감옥 안의 모든 이가 서로 곁눈질하며 승헌의 눈치를 살피는데, 승헌이 바닥으로 늘어뜨렸던 칼끝을 들어 계평을 무자비하게 베었다. 촤악, 날붙이가 사람의 살을 가르며 피가 뿜어져 나왔다.
“커헉……!”
그 모습을 본 궁인들이 숨을 삼켰다. 개중에는 짧은 비명을 지르는 이도 있었다. 지하감옥의 악취를 완전히 누르고 남을 만큼의 혈향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
승헌의 말끔한 얼굴은 피로 새빨갛게 뒤덮였으나 그는 그것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돌아서서 감옥 안의 이들에게 경고했다.
“오늘 들은 이야기가 또다시 내 귀에 들어오면, 네놈들 모두가 이렇게 편히 죽지는 못할 것이다.”
“며, 명심하겠나이다, 전하.”
궁인과 옥졸들이 일제히 엎드려 벌벌 떨었다. 마찬가지로 엎드려 있던 형부상서는 속으로 탄식을 내뱉었다. 저것이 편히 죽었다고? 승헌이 일부러 숨을 남길 만큼만 베어 계평은 피를 다 흘릴 때까지 고통에 몸부림쳐야 할 터였다. 저보다 더 끔찍한 죽음은 무어란 말인가. 나라를 생각하면 간과할 수 없는 일이라 여기면서도, 형부상서는 두려움에 계평의 자백을 누군가에게 전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목에서 갈비뼈까지를 베인 계평은 더 이상 말을 하지도 못하고, 폐가 찢어져 호흡조차 여의치 않을 터였다. 하나 형부상서의 생각대로 피를 모두 흘리기 전까지는 죽을 수도 없었다.
승헌은 베인 목과 입에서 피거품을 내는 계평을 이글거리는 눈으로 쏘아보다 돌아섰다. 그는 계평과 더불어 자신의 의심까지 베었다. 그러고는 지하감옥을 빠르게 빠져나오며 수없이 되뇌었다.
옥환이 그럴 리가 없었다.
옥환이 절대 그럴 리가 없었다.
백청과 계평은 옥환을 의심스럽다 말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았다. 그리고 단 한 사람. 그것을 확인해 줄 수 있는 이가 있었다.
편전으로 돌아온 승헌이 금군 병사에게 짧게 일렀다.
“종소를 데려와. 당장.”
명을 받고 재빨리 떠나려던 병사를 보던 승헌이 무언가 생각난 듯 덧붙였다.
“그 아이의 어미도 함께.”
그리고 그날 밤늦게, 도성 밖에서 종소와 종소의 어미가 승헌의 앞에 끌려왔다. 바들바들 떠는 두 모자에게 승헌은 자애로운 미소를 짓고 말했다.
“겁낼 것 없다. 과인이 네게 물을 것이 있어 부른 것이니.”
“무, 무엇이든, 하문하시옵소서.”
승헌은 엎드린 종소의 앞에 허리를 굽히고 앉아 물었다.
“네가 백청의 집에서 일할 때, 옥환이 네게 무언가를 시킨 적이 있더냐?”
종소는 말이 없었다. 그저 겁에 질렸거나 대답을 고르느라 그런 것이라고 볼 수도 있었다. 하나 승헌은 자신이 질문을 한 순간 종소의 손끝에 잠깐 힘이 들어갔던 것을 용케 알아챘다. 만일…… 만일 옥환이 제 계획에 누군가를 끌어들였다면, 그가 끌어들인 이는 필시 믿을 만한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그 인물이 어린아이일지라도 가볍게 봐선 안 될 일이었다.
이윽고 종소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없사옵니다. 그런 일은…… 없사옵니다.”
승헌이 원하던 대답이었으나 무언가가 개운치 않았다. 질문을 던졌을 때 일순 굳었던 종소의 반응은 그저 착각인 것일까?
‘또 의심병이 도졌군.’
승헌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없다면 없는 것이다. 역시, 계평의 자백은 모두 거짓이었다. 옥환이 그랬을 리 없었다. 잠시나마 흔들린 자신을 알면 옥환이 크게 실망할 터였다. 승헌이 쓴웃음을 짓고는 일어서는데, 등 뒤로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솔직히 말하거라! 전하의 앞이다! 네가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모르느냐?!”
다름 아닌 종소의 어미였다. 솔직히 말하라니. 이미 종소는 솔직한 대답을 내놓았다. 그리 생각하며 고개를 돌린 승헌은 종소의 표정을 보고는 눈빛을 달리했다. 종소는 몹시도 동요한 모습이었다. 설마.
승헌은 칼을 뽑아 종소의 어미에게 겨누었다.
“어, 어머니!”
“종소야!”
당황한 종소는 얼른 바닥에 머리를 조아리고 빌었다.
“저, 전하. 전하. 제발 소인의 어미만은 살려 주시옵소서. 소인의 목숨을 거둬 가시옵고 어미의 목숨은 부지해 주시옵소서. 제발…….”
“그래. 네 효심이 지극한 것은 과인도 잘 알고 있지. 하니 거짓을 고하면 아니 되겠지?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하나 종소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 겁에 질려 있으면서도 쉬이 입을 열지는 않았다. 아닐지도 모른다. 아니어서 그럴 것이다. 그리 믿으면서도 승헌은 마지막으로 종소를 겁박했다.
“네가 말을 안 하면 네 어미는 죽는다. 그냥 죽는 것이 아니고, 팔다리를 잘리고 눈알이 뽑혀 죽을 것이다.”
승헌은 칼끝으로 여인의 팔을 툭툭 쳤다.
“네가 보는 앞에서 그리되겠지.”
제 어미의 팔 위에 있는 날카로운 칼날을 본 종소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아무리 대범하다 할지라도 결국 아이일 뿐인 종소는 이내 엉엉 울음을 터뜨리며 예상치 못한 진실을 털어놓았다.
“태사께서, 소인에게 서찰을 주셨는데…… 그 안에 또 다른 종이 뭉치가 있었사옵니다. 서찰에는 그 종이 뭉치의 내용을 절대 보지 말고 대장군의 난초 화분 아래 있는 함에 돌려놓으라는 지시가 적혀 있었사옵니다…….”
“……뭐라고?”
“소, 소인은 태사께서 시키신 대로 그것을 보지 않고 함 안에 돌려놓았사옵니다……. 한데 며칠 후에 대장군께 그 일로 의심을 사 고신을 당하게 됐던 것이옵니다.”
말을 마치고는 목놓아 우는 종소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승헌은 머릿속이 멍해졌다. 종소의 자백은 누가 봐도 옥환을 의심하기 충분한 것이었다. 하나 그럴 리가 없었다. 이것은 정황에 불과했다. 절대…… 절대…….
승헌은 맑고 곱게 웃던 제 정인을 떠올렸다. 보석 같은 눈물을 떨구며 저를 연모한다 말하던 그이를, 아리따운 옥을 닮은 그이를 믿어야 했다. 믿고 싶었다. 그의 마음이 진심이라고, 그가 벽국의 사람일 리 없다고. 하나 승헌은 결코 옥환을 찾아가 그를 추궁하지는 못했다. 그와 쌓아 올린 모든 것이 무너질까 두려웠다.
하나 더욱 잔혹한 현실이 그를 기다리고 있음을 그는 미처 알지 못했다.
다음 날, 승헌의 앞에는 한 인물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새로 부임한 병부상서였다. 그의 얼굴은 무슨 일인지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다. 승헌은 방금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것이 맞는지 반신반의하며 되물었다.
“그것이…… 그것이 정녕 사실이더냐?”
“예, 전하. 벽국이 20만의 장병을 이끌고…… 서국을 침공하였사옵니다…….”
승헌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종소의 자백을 들었을 때만 해도, 그는 아직 실낱같은 희망을 붙들고 있었다. 우연일 것이다. 아니면 종소가 겁에 질려 거짓 자백을 했을 수도 있다. 아무튼 승헌의 마음은 옥환을 믿고 싶어 하는 쪽에 기울어 있었다. 하지만 벽국이 서국을 침공했다. 아무것도 없는, 서국에 한참 밀리던 그 나라가. 무언가 믿는 구석이 없다면 벌이지 않을 무모한 전쟁이었다.
그들이 서국의 군사 기밀이라도 가진 게 아니라면.
‘……이럴 순 없어. 이럴 수는.’
기실 승헌은 최근 들어 벽국의 동태를 알아볼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평소라면 기민하게 살폈을 일이건만, 옥환과의 일로 정신이 팔려 소홀히 했던 것이다. 옥환이 그의 관심과 시야를 모두 앗아갔다. 옥환이 취중에 한 고백이, 그를 눈먼 장님으로 만들었다.
이 순간, 승헌은 계평이 했던 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설옥환이 당신을 연모한다고 하더이까? 그것이 벽국에게 시간을 벌어 주기 위함임을 아직도 모르시겠소? 벽국이 선공할 때까지, 당신의 의심을 거두고 정사에서 눈멀게 하기 위함임을?’
“하.”
승헌은 실소를 터뜨렸다. 옥환의 그 고백이, 눈물이, 연심이 거짓일 리가 없었다. 다른 건 다 괜찮아도 그것 하나만은 그래선 안 되었다. 그래선 안 되는데. 내가 어떻게 그대에게 갔는데. 그대에게 어떻게 했는데.
병부상서가 승헌의 명을 한참 동안 기다렸으나 승헌은 얼굴을 감싸 쥔 채 마른세수만 반복했다. 탄식조차 흘러나오지 않았다. 후회, 아픔, 자책…… 그 무엇으로도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그를 좀먹었다. 이제 어쩌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알고 싶지 않았다.
하나 믿고 싶지 않은 현실에서 도피하려는 그를 병부상서의 걱정 어린 목소리가 다시 현실로 불러왔다.
“전하…… 부디 명을 내려주시옵소서.”
승헌은 그제야 꿇어앉은 병부상서를 바라보았다. 이자는 이 나라와 자신의 신하였다. 승헌은 가까스로 왕의 책임을 떠올렸다.
“군사 회의를 열겠다. 중신들을 소집하도록.”
승헌이 태감에게 이르자 태감이 재빨리 머리를 숙이고 물러났다. 승헌은 병부상서에게 벽국군의 상세한 동태를 조사하라는 명을 내리고 그 또한 내보냈다. 하나 혼자가 되기 무섭게 또 다른 객이 승헌을 찾았다.
“전하, 태사께서 뵙기를 청하시옵니다.”
“…….”
어떻게든 군왕으로서의 이성을 유지하려던 승헌의 노력은 그 말을 들은 순간 물거품이 되었다. 왜 하필 또 지금……. 승헌은 눈을 질끈 감았다. 모든 것이 마치 저를 옭아매는 그물 같았다. 자신이 알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착착 맞아떨어지지 않는가.
지금은 도저히 옥환을 보고 싶지 않았다. 사흘 내내 그토록 그리워하던 얼굴이건만, 승헌은 지금만큼은 옥환의 옷자락도 보고 싶지 않았다. 하나, 미룰 수 없는 일이었다. 모든 것을 확인하고…… 확인하고…….
‘그 뒤에는?’
그런 건 생각하지 않았다. 할 수도 없었다. 옥환. 옥환, 왜. 그를 보면 무슨 말을, 무슨 짓을 하게 될지도 두려웠다. 그럼에도 자신은 왕이었다. 마땅히 첩자의 죄를 묻고, 그 죄에 대한 벌을 내려야 했다. 그리고 그 사실이 이토록 징그럽게 느껴진 것은 처음이었다.
승헌이 말없이 손짓하자 문 앞에 대기하던 궁인들이 조용히 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서는 발걸음 소리가 들릴 때마다 승헌의 심장이 아래로, 아래로 끝없이 추락하는 기분이었다. 이내 어둠 속에 멀거니 서 있는 승헌을 발견한 옥환은 복숭아처럼 발그레한 얼굴로 눈을 빛내며 웃었으나, 그 사랑스러운 모습에도 승헌은 마주 웃어 줄 수 없었다. 이조차 가식은 아닐까, 다 연기인 건 아닐까, 하는 의심에.
승헌의 기색이 심상치 않은 것을 눈치챈 옥환의 얼굴에서 미소가 서서히 사라졌다. 이런 와중에도 그 모습이 안타까워 승헌은 기가 막혔다. 여전히 옥환을 사랑했고, 그가 더 웃어 주었으면 했다. 하나…….
승헌은 주먹을 쥐어 잡생각을 치우고는 옥환을 바라보았다. 자신은 옥환의 정인인 한편 서국의 왕이기도 했다. 이것은 벗어날 수 없는 그의 책무였다.
승헌의 험악한 분위기에 옥환이 더 다가오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승헌은 한숨 쉬듯 입을 열었다.
“옥환.”
승헌의 부름에 반갑게 대꾸하려던 옥환은, 그다음에 이어진 승헌의 말에 삽시간에 얼어붙었다.
“벽국에 우리의 기밀이 넘어갔어.”
핏기가 가신 옥환의 얼굴을 바라보며, 승헌이 침통한 어조로 물었다.
“그대인가?”
순간 승헌의 눈에 비친 옥환은 생기가 죄다 빠져나간 것 같았다. 그 어느 때에도 지지 않던 아름다움도, 총명함도, 어둠에 먹힌 것처럼 사그라들었다. 그리고.
“아…….”
쓰러지듯 주저앉는 옥환을 보며 승헌의 위태롭던 마음 역시 무너져 내렸다.
***
옥환은 멍하니 승헌을 올려다보았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주위는 지나치게 고요했고 승헌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차라리 시간이 멈췄으면 했다. 차라리.
방금 무슨 말을 들었던가. 방금…….
‘벽국에…… 기밀이 넘어갔다고?’
넘긴 것은 자신이 아니나 빼낸 것은 자신이었다. 어찌 된 일인지 파악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옥환은 승헌의 싸늘한 눈빛에 결박당한 듯 꼼짝도 하지 못했다. 돌연 전신에 오한이 들며 덜덜 떨려 왔다. 그렇게 침묵하는 옥환을 승헌이 차갑게 다그쳤다.
“그대냐고 묻잖아.”
“…….”
“설옥환. 대답해. 어서, 대답해.”
승헌이 옥환에게로 다가왔다. 옥환은 차마 승헌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그가 얼마나 실망하고 분노했을지 알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믿고 싶지 않았다. 분명히 태웠는데. 찢고, 태워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텐데.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도대체 어디서부터.
“대답하라고 하잖아!”
승헌이 옥환의 양어깨를 붙들고 윽박을 질렀으나 옥환은 필사적으로 시선을 내리깔고 침묵했다. 어찌 된 일이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지. 뒤늦게 녹슨 바퀴가 움직이듯 정신없이 해답을 찾는 옥환의 머릿속 위로 머잖아 선명한 답이 떠올랐다.
계평.
자신이 승헌을 향한 마음에 정신이 팔린 동안, 그에게는 기밀을 넘길 기회가 수도 없이 존재했다. 왜 한 번도 그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왜 그를 의심하지 않았지? 그가 기밀을 넘기지도 않고 저를 죽이려 했을 리가 없는데.
자신의 어리석음에 이제는 속이 메스꺼웠다. 최대한 승헌을 보지 않으려 아래로 향한 시야에 비친 바닥이 비스듬하게 기울어졌다. 할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 이곳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멀리, 최대한 멀리. 옥환은 그저 그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한데 그때 누군가의 외침이 옥환의 귓전을 때렸다.
“……아니라고 해! 제발 아니라고 해, 옥환…….”
언제부터였던가. 승헌의 다그침은 어느새 애원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제야 옥환이 돌덩이 같은 고개를 들어 승헌을 쳐다보았다. 승헌의 고통에 찬 표정을 보니 옥환의 가슴속에서 애써 외면했던 서러움이 왈칵 치솟았다.
“전하…….”
아아, 그가 모든 것을 알아 버렸다. 영원히 감추고 싶었고 감추려 했던 그것을 모두.
인정하고 싶지 않은 현실에 하늘이 뒤집어지고 땅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어떡해야 하지. 이제 어쩌면 좋지. 이 사람을 어찌해야 하나.
하나 옥환의 그 좋은 머리로도 승헌을 슬프게 하지 않을 방도는 떠오르지 않았다. 어느 쪽을 택해도 그 길의 끝은 승헌의 좌절과 절망이었다. 옥환은 그저 천 길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진 듯 모든 게 아득하고 암담하게만 느껴졌다.
“내가 그대를 지켜 줄 수 있어. 그대를 의심하는 자들도 모두 치울게. 그러니 제발 아니라고만 해. 그 한 마디면 돼. 그대가 그러지 않았잖아. 그대는 그러지 않을 거잖아. 나를…… 나를 연모하는 그대가 왜 그런 짓을 하겠나……? 그렇지?”
그렇지, 옥환? 승헌은 간절하게 물었다. 아니, 빌었다. 그 모습을 보며 옥환은 비로소 깨달았다. 염완이 벌을 내린 것이라는 걸. 그는, 단 하루…… 아니. 단 한 시진이어도 좋으니 승헌과 함께하게 해달란 말을 이토록 매몰차게 거절한 것이다.
옥환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염완이 너무나 미웠다. 끔찍하게 싫었다. 긴 세월을 그 하나만 보고 충성했는데, 고작 하루도 아쉬워서 이렇게 벌을 준단 말인가. 이렇게, 승헌을 아프게 한단 말인가. 차라리 벼락을 내리지. 차라리 저를 죽게 할 것이지.
“옥환.”
승헌이 대답이 재촉하듯 이름을 불렀음에도 옥환은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뭐라고 하겠는가. 그렇다고도, 아니라고도 할 수 없었다.
아무리 애걸복걸해도 처연한 눈으로 저를 바라보기만 하는 옥환의 모습에, 승헌은 천천히 알고 싶지 않은 진실을 깨달았다.
“……옥환.”
승헌의 절박함 어린 눈동자가 서서히 냉담한 빛을 띠기 시작했다. 그는 고개 숙인 옥환에게 물었다.
“다, 거짓이었나?”
승헌의 음성은 그의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차디찼다. 처음 만났을 때도, 저를 의심해 화를 낼 때도 이랬던 적은 없었다. 옥환은 뒤늦게 고개를 들어 승헌의 말을 부정하려 했지만, 한기가 스며 나오는 듯한 승헌의 표정을 보니 순간 말문이 턱 막혔다. 그에게서 그토록 넘쳐 나던 애정이 한 조각도 없이 모두 사라진 것 같았다. 옥환은 너무나 두려웠다.
“제가, 제가 그런 게 아닙니다, 전하…….”
승헌의 사람이 되려 했다. 주군을, 조국을 저버리고서라도. 정치도 관두고, 세상을 이롭게 하겠다는 대의도 뒤로 하고, 승헌과 둘이서 살고 싶었다. 그를 기다리면서 살고 싶었다.
“전하…….”
하나 옥환은 그것이 영원히 불가능하다는 것을, 사랑하는 이의 표정과 눈빛으로 알게 되었다. 너무나 잔인한 방법으로 실감하게 되었다.
옥환은 가슴을 부여잡았다. 이렇게 아프고 숨이 멎을 것만 같은데, 피는 하나도 나지 않았다. 보이는 상처는 아무것도 없었다. 믿기지가 않았다.
“모든 게 그대를 가리켜. 백청의 의심과 종소의 자백이 그랬고, 벽국의 침공이 그것에 쐐기를 박았지.”
“침공…… 이요?”
침공이라니. 벽국이? 하면 기밀이 넘어갔다는 말은…….
다급해진 옥환이 오해를 풀기 위해 서둘러 입을 열었다.
“전하, 제가, 제가 기밀을 빼냈지만…….”
“말하지 마!”
하나 말을 꺼내기 무섭게 쏟아진 승헌의 일갈에 옥환이 어깨를 움찔했다. 겁에 질린 옥환의 눈동자를 보며 승헌이 쓰게 웃었다.
“아무 말도 하지 마…….”
승헌은 옥환이 이 모든 일을 직접 인정하는 모습만큼은 보고 싶지 않았다. 아니, 옥환이 그 무엇이든 입도 뻥끗하지 않았으면 했다. 옥환을 내쫓고 싶은 한편으로 그를 끌어안고 싶었다. 그에게 화를 내고 욕을 하고 싶었지만 그에게 제발 아니라고 말해 달라 빌고 싶은 마음도 존재했다. 승헌은 자기 자신을 어찌할 수 없었다. 마음이 불 속에 던진 짚더미처럼 활활 타들어 가 끝내는 검은 재가 되어가는 듯했다.
“전하…….”
“부르지도 마. 보지 마. 그대가…… 그대가 어찌 내게 이럴 수 있나? 내 마음이 어떤 건지 알았잖아. 그것을 이용할 대로 이용하면서, 한 번도 미안한 마음은 안 들던가? 그대에게 깜빡 속아 넘어가는 내가 우스웠어?”
옥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맹세컨대 승헌을 우습게 여긴 적은 단 한 순간도 없었다. 그와 함께하는 모든 시간에 죄책감이 동반했고, 매일매일 그를 향해 커져 가는 마음을 칼로 찌르고 싶다고 생각한 것도 수십 번이었다. 이런 식으로 끝이 날 거라는 걸 알면서도 애써 외면했을 뿐이었다. 알고 싶지 않았다. 그저 그와 마주 보고 웃는 순간이 마냥 소중해서…… 그래서, 사랑하는 이에게 해선 안 될 짓을 저질렀다.
“제가, 감히.”
옥환의 시선이 차마 승헌을 보지 못하고 허공에 멈추었다.
“제가 감히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
“처음이었습니다. 누군가에게 이리 깊이 사랑받은 것도…….”
누군가를 이토록 깊이 사랑한 것도.
승헌과 보낸 시간은 벽국이나 염완과 보낸 시간에 비하면 더없이 짧았으나, 그 짧은 시간은 옥환의 인생을 통틀어 가장 소중하고 가장 가슴 아픈 때였다. 그래서 더더욱, 이렇게 끝내고 싶지 않았다. 한없이 소중히 하고, 닿는 것조차 아까워하며 하염없이 바라보고만 싶었다.
괜찮을 줄로만 알았다. 하나 모든 게 눈먼 자신의 어리석은 기대일 뿐이었다. 기대는 기대로 그쳤다.
그리고 그 대가로, 자신이 살아서 숨 쉬는 동안 승헌은 계속해서 고통받을 것이다.
“전하.”
애절하게 승헌의 자비와 애정을 바라던 옥환의 얼굴에 체념의 빛이 감돌았다. 혹여라도 이런 날이 오면, 이 말을 해야겠다고…… 막연히 준비하고 있었다. 목이 메었으나 옥환은 끝내 말을 꺼냈다.
“전하, 저를 죽여 주십시오.”
무섭도록 시린 적막. 옥환의 눈에서 기어코 눈물 한 줄기가 떨어졌다. 승헌은 멍하니 바닥에 떨어진 눈물방울을 보고 있었다. 그저 그것이 너무나 무겁게 느껴졌다.
“저를 죽이고, 전하.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설옥환은 사랑하는 이의 손에 처참한 죽음을 맞이한다. 그것만이 옥환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속죄였고, 또 그의 마지막 바람이기도 했다. 처음부터 이랬어야 옳았다. 적국의 왕을 연모하게 되었다는 걸 알았을 때부터, 자신의 미련과 이기심이 모든 것을 망치리란 걸 예감하고 있었을 때부터 그리해야 했다. 하나 그것을 모른 척 방치한 끝에, 결국은 파국을 불러오고 말았다. 이제는 오직 죽음만이 옥환이 승헌을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심연처럼 깊은 눈으로 옥환을 응시하던 승헌이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어떻게?”
“전하…….”
“그대가 어떻게? 내게, 어찌…… 어찌 그랬어?”
옥환의 죽여 달라는 말에 분노라는 가면을 쓰고 있던 승헌의 맨얼굴이 서서히 드러났다. 깨진 가면 아래의 승헌은 그저 좌절하고 절망한, 한 사내일 뿐이었다.
“전하, 저는…… 저는 그냥…….”
“날 사랑한다고 하지 말았어야지. 그런 짓을 저지를 거면, 그러지 말았어야 해. 나는…… 그대를, 그대를 너무나…….”
옥환은 도리질을 했다. 차오른 눈물이 어느새 옥환의 양 뺨을 흠뻑 적셨다.
“제가 그런 게 아닙니다. 제발 믿어 주십시오…….”
“하면 또 누가 했다고 할 텐가?”
승헌의 입술에 걸려 있던 비웃음이 천천히 사라졌다.
“나는 이제 그대를 믿을 수 없어.”
“…….”
저를 믿을 수 없다는 말에 옥환은 입술을 문 채 처량한 눈물만 뚝뚝 흘렸다. 다 자신이 뿌린 씨앗이었으니 원망할 수도, 고집을 피울 수도 없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는 승헌의 가슴도 아파왔다. 아니, 난도질을 당하는 것 같았다. 이마저도 연기고 거짓이라 해도, 옥환의 눈물은 승헌의 심금을 휘저어 놓았다. 하나 승헌은 왕으로서, 그리고 배신 당한 정인으로서, 옥환의 처분을 결정해야 했다.
실의에 잠긴 옥환을 한참 동안이나 바라보던 승헌이 천천히 무릎을 굽혔다. 그는 심중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옥환의 눈물을 손끝으로 쓸어냈다.
“울지 마. 모두 내 탓이니까.”
“전하.”
“그대에게 멋대로 사랑에 빠져, 냉정함을 잃은 내 탓이지. 그대는 그저 그대의 일을 했을 뿐이야. 벽국의 신하로서, 염완과 염요의 사람으로서 적국의 왕인 나를 무너뜨렸을 뿐이라고.”
내가 그대에게 진 거야, 옥환. 씁쓸하게 중얼거린 승헌은 팔을 벌려 옥환을 끌어안았다. 승헌의 품에 안기자 옥환의 쏟아질 듯 넘실거리던 감정이 파도가 되어 그를 쓸어 갔다.
그저 모든 걸 버리고 그가 준 반지를 끼고 가면 모든 게 잘될 줄 알았다. 이 품에 안겨서, 그와 정담을 나누고 자신이 그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이야기할 수 있을 줄 알았다. 한데 그게 아니었다. 왜.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그저 열심히 산 것도 죄란 말인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이 이토록 모진 벌을 받을 대죄던가.
방금 전까지만 해도 더없이 사랑하던 이의 손에 죽고자 하는 자신이 비참하고 가여웠다. 현실의 지독함에 그저 목놓아 울고만 싶었다. 승헌에게 제발 저와 같이 도망쳐 달라고 빌고 싶었다.
하나 이어진 승헌의 말이 옥환의 앞에 놓인 현실을 더더욱 지독하게 만들었다.
“벽국으로 돌려보내 주지.”
경악할 발언에 옥환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어디로…… 어디로 보내겠다고?
“그대의 나라로 돌아가.”
“그 무슨…… 시, 싫습니다.”
“공을 세운 그대를 벽국 왕이 마다하겠나. 그대도 줄곧 돌아가고 싶었겠지.”
옥환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으나 승헌은 그것을 무시하고 일어섰다. 그러고는 짧게 작별을 고했다.
“잘 가, 옥환.”
말을 마친 승헌은 묵묵히 돌아섰다. 벽국이라니. 그럴 순 없었다. 절대, 절대로. 옥환은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승헌을 쫓아가 매달렸다.
“차라리 저를 죽이십시오! 벽국에 돌아가라고 하실 바에는 그냥 죽여 주십시오! 제가 기밀을 훔쳐 벽국에 넘겼습니다! 제가 거짓된 말로 전하를 속였고, 전하의 순수한 마음을 짓밟았습니다! 하니 제게 벌을 내리십시오!”
상황을 관망하던 금군 병사들이 쏜살처럼 달려와 승헌에게 매달리는 옥환을 떼어 냈다. 옥환은 병사들의 손에서 빠져나오려 발버둥 치며 승헌을 애타게 부르짖었다.
“전하! 전하, 저를 죽여 주십시오! 제가 했습니다! 전부 제가 한 것입니다……!”
“그대는 참으로 잔인하군.”
승헌이 픽 웃으며 옥환을 쳐다보았다. 그의 눈동자는 단념과 좌절로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방금 전까지 사랑하던 이를 죽이라고? 견승헌더러 설옥환을 죽여라? 나는 그럴 수 없어. 수천 번을 생각해 봤지만, 그럴 수가 없다고. 나를 어디까지 몰아세워야 성에 차겠나?”
옥환은 병사들을 뿌리치고 승헌의 앞으로 엉금엉금 기어가 사정했다.
“벼, 벽국에 가기 싫습니다, 전하……. 여기 있게, 아니. 여기서 죽게 해 주십시오. 제가 다 잘못했습니다. 저를 미끼로 쓰셔도 되고 이용하다 버리셔도 되니 제발, 전하, 제발…….”
승헌은 제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지는 옥환의 손을 떼어 냈다. 벽국으로 보내 주겠다고 해도 왜 싫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정녕 제 손에 죽기라도 할 셈인가. 그것이, 금야 선생의 알량한 양심이던가.
하나 승헌은 그것에 응해 줄 생각이 없었다. 옥환에게 말했듯이, 있어도 그럴 수 없었다.
승헌이 고갯짓을 하자 병사들이 다시금 옥환의 팔을 붙들었다. 승헌의 완고한 태도에 충격을 받은 옥환은 속수무책으로 끌려 나갔다. 하나 편전의 문 앞에 다다르기 전, 비로소 정신을 차린 옥환이 몸부림을 치며 저항했다.
“전하! 전하, 싫습니다! 벽국으로 보내지 마십시오……! 가지 않을 것입니다!”
벽국에 가서 무엇을 어찌하라고. 당신도 없는 땅에서, 자신을 죽이려 했던 염요의 나라에서 대체 무엇을 하라고.
죽어도 서국에서, 승헌의 손에 죽고 싶었고, 그가 디디고 선 땅에 묻히고 싶었다. 그것이 마지막 남은 옥환의 소원이었다. 그마저도, 그 하잘것없는 소원마저도 안 된단 말인가. 멀어지는,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승헌의 등을 속절없이 바라보던 옥환이 저도 모르게 외쳤다.
“환랑!”
단 한 번, 옥환의 입에 담겼던 이름. 그것을 두 번째로 들은 승헌이 걸음을 우뚝 멈췄다. 그 이름은, 그 이름을 부르는 옥환의 목소리는 승헌에게 있어 외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환랑, 저를 보내지 마세요…….”
옥환이 바들바들 떨며 바닥에 엎드렸다. 승헌은 주먹을 불끈 쥐고 돌아보지 않으려 애썼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상처가 났지만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본인 입으로 죄목을 자백까지 했는데, 필부라면 몰라도 군왕으로서 그런 그를 용서할 수는 없었다. 목숨을 거두는 것까지는 불가능하다지만 이 이상 서국에 머무르게 하는 것 또한 안 될 일이었다. 염요가 옥환을 죽이려 했다는 사실이 떠올랐으나 어쩌면 그것도 자작극이었을지 모른다는 억측이 망설임을 뒤덮었다. 승헌은 그 무엇도 제대로 사고할 수 없었다. 저를 연모한다 말하던 옥환이 뒤로는 벽국에 기밀을 보냈을 것을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치솟고 눈앞이 아찔해졌다. 모든 거짓이 탄로 난 지금, 대관절 무슨 희망을 더 가질 수 있을까.
“전하,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기밀을 빼낸 건 맞지만 보낸 것은…….”
“끌고 가라. 어서!”
승헌의 사나운 명령에 옥환은 제대로 된 변명도 해보지 못하고 병사들에게 잡혀 끌려 나갔다. 편전의 문이 닫히는 것 역시 순식간이었다. 옥환이 아무리 뒤를 돌아보며 승헌을 불러도 병사들은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결국 제풀에 지쳐 순순히 병사들에 의해 끌려가며 옥환은 뼈저리게 후회했다. 후회가 심장까지 좀먹어 드는 것만 같았다.
이러면 안 되는데. 이러기를 바란 것은 아닌데. 승헌은 영영 지워지지 않을 상처를 받았고, 자신은 서국에서조차 죽을 수 없게 되었다. 맹세컨대 옥환은, 이런 걸 바란 적이 없었다.
‘내가…… 내가 또 실패했다.’
무엇이 천하제일의 책사란 말인가. 그 누가 이런 천치를 천재라고 했는가. 옥환은 할 수만 있다면 벽에 머리를 깨 죽고 싶었다.
‘당신께선 왜 저 같은 것을 마음에 두셔서.’
승헌을 떠올리니 옥환의 뺨에서 한 줄기 눈물이 툭 떨어져 내렸다. 기대와 희망으로 들어찼던 가슴은 공허했고, 온몸은 얼어붙은 강물 속에 빠져 버린 듯 싸늘하게 굳었다. 어쩌면…… 정말로 여기서 목숨을 끊는 것이 최선일지도 모른다. 옥환의 약해진 마음이 속삭였다. 이 이상의 참혹한 꼴을 보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 편이 나을 수 있다고.
승헌의 손에 죽을 수도 없고, 서국에 남아 있을 수도 없다면 차라리.
후원을 가로질러 궁 밖으로 나가는 길을 걸으며, 옥환은 한쪽에 놓인 연못을 바라보았다. 저곳에 빠져 죽으면 되지 않을까. 그러면…… 망령이 되어서라도 승헌의 곁에 머물 수 있지 않을까. 몹시도 충동적이었으나 모든 게 무너진 지금의 옥환에게는 그것이 유일한 탈출로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때마침, 편전을 향하는 무관 무리들을 피해 병사들이 잠시 걸음을 멈추고 전각 뒤로 몸을 숨겼다. 옥환은 병사들이 이끄는 대로 손쉽게 끌려갔다. 이윽고 무관들이 막 사라져 가던 그 순간, 옥환은 기다렸다는 듯 병사들의 손을 뿌리치고 연못으로 달려 나갔다.
“엇……!”
얌전해진 옥환 때문에 방심하고 있던 병사들은 행여 무관들에게 들킬까 싶어 상황을 살피느라 한발 늦게 옥환을 쫓아왔다. 그사이 연못 앞까지 다다른 옥환은 주저 없이 연못 안으로 발을 뻗었다.
찰랑. 잠잠하던 수면에 파문이 일었다.
“태사!”
병사들이 기겁을 하며 옥환을 불렀다. 옥환은 어찌 받아들였을지 모르나 승헌이 옥환을 벽국으로 보내라 한 건 지나치게 너그러운 처사였다. 적국의 첩자를 살려서 돌려보내다니. 그것은 승헌이 여전히 옥환에게 미련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었고, 옥환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그들은 살아남지 못할 터였다. 하나 그들에겐 다행스럽게도 옥환은 연못 앞에 우뚝 멈춰 서 있었다.
물에 뛰어들려던 순간, 흔들리는 수면 위에 비친 스스로의 모습이 옥환을 붙들었던 것이다.
그곳에 비친 자신은 무기력하고 한심했다. 그저 제게 놓인 현실을 부정하고 주변 사람들을 원망할 줄만 알았다. 믿을 수가 없었다. 한 번도 이런 자신을 본 적이 없었다. 내가, 이토록 약했던가? 정녕 그랬던가?
잠시 수면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던 옥환은 뜻밖에도, 그대로 연못에 뛰어들었다.
“태사……!”
연못은 생각보다 깊지 않았으나, 옥환이 잠기기에는 충분했다. 물론 그가 빠져 죽는 것은 불가능했다. 병사 둘이 순식간에 옥환을 건져 올렸기에.
젖은 몸을 바람이 훑고 지나가자 한여름임에도 오한이 들었다. 그리고 그제야, 옥환의 머릿속이 조금이나마 개었다.
벽국이 서국을 침공했다고 했다. 자신이 빼낸 기밀을 이용해 쳐들어온 것이다. 그것을 막아야 했다. 서국의 패망은 곧 승헌의 죽음이었다. 아직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터였다. 이렇게 포기해서는 안 되었다. 서국을 이렇게 만든 건 자신이었으니, 그 책임 또한 져야 했다. 이런 비겁한 방식으로 도망치는 건 승헌을 사지로 모는 일밖에 되지 않았다.
‘같잖은 목숨이나 아직은…… 아직은 단념할 때가 아니다.’
승헌을 위해서라도, 절대.
옥환은 다시 제 팔을 붙드는 병사들에게 일절 저항의 빛을 보이지 않았으나, 그의 눈동자만은 형형하기 그지없었다.
결단코 서국이 무너지는 모습을 지켜보지도, 염요의 손에 죽지도 않으리라. 그는 자신에게 맹세했다. 무슨 짓을 해서든, 자신이 저지른 죄의 대가는 치르겠노라고.
그리고 그러한 옥환에게 하늘이 한발 늦은 자비를 내려 주듯, 저 멀리 몹시도 심기가 불편한 얼굴로 그들 앞을 지나가는 이가 있었다. 바로 호진이었다. 아까의 무관들도 그렇고, 군사 회의를 위해 급하게 입궁한 모양이었다.
병사들 역시 지금의 상황을 들키면 곤란해질 인물이 나타나자 서둘러 옥환을 데리고 자리를 뜨려 했다. 이번에는 행여 옥환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팔을 단단히 붙든 채였다. 하나 그들도 설마하니 옥환이 호진을 소리쳐 부를 줄은 미처 몰랐다.
“대장군!”
그 부름에 호진이 눈썹을 치켜올린 채 주위를 살폈다. 하나 옥환과 호진은 서로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 난 사이였다. 그런 호진이 절대 옥환을 도와줄 리가 없었다. 도리어 더 노발대발하지 않으면 모를까.
“태사, 가셔야 합니다! 얼마나 더 전하를 곤란하게 만들 심산이십니까?!”
병사 하나가 모질게 질책하며 옥환의 입을 틀어막았다. 다른 병사 하나는 옥환을 강제로 끌어당겼다. 두 사람의 힘을 당해낼 수 없던 옥환은 빠르게 호진과 멀어졌다. 모퉁이만 돌면 호진에게도 그들이 보이지 않을 터였다. 하나 공교롭게도, 그들이 모퉁이를 도는 것보다 호진이 옥환과 그 일행을 발견하는 게 먼저였다.
“게 섰거라!”
금군 병사들은 난감한 얼굴로 걸음을 재촉했다. 물론 호진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는 빠르게 옥환 쪽으로 다가오며 으름장을 놓았다.
“서라고 했다! 감히 대장군인 나의 말을 무시할 셈이더냐? 아무리 전하의 직속 군대라고 해도 네놈들 또한 이 나라의 군졸. 내 휘하에 있다는 것을 몰라서 이리 무례하게 구는 것이냐!”
호진은 옥환에게뿐 아니라 모두에게 다혈질인 사내였으나, 옥환도 오늘만큼은 그의 그런 성격이 감사했다. 병사들이 하는 수 없이 멈춰 서자 호진이 거칠게 옥환의 어깨를 붙들어 돌려세우려 했다. 옥환의 좌측에 있던 병사가 놀라서 막아서니 호진이 눈을 부라렸다.
“뭐하는 짓이냐?”
“저희는 전하의 명을 수행하는 중입니다. 물러서 주십시오.”
하나 금군 병사 역시 완고한 태도로 버텼다. 다만 그들이 간과하고 있었던 것은 바로 옥환의 존재였다. 옥환은 호진과 병사들이 대치하는 틈을 타 제 입을 막고 있던 병사의 손을 깨물어 치워 내고 외쳤다.
“대장군, 저는 벽국의 첩자입니다!”
“……뭐?”
호진의 표정이 단박에 흉포해졌으나 옥환은 두렵지 않았다. 그의 돌발행동에 외려 금군 병사들이 크게 당혹해했다. 하나 옥환은 병사들을 떨쳐 내고 호진의 옷깃을 부여잡은 채 속사포로 말을 쏟아냈다.
“제가 전하를 꾀어내 시야를 흐리게 하였고, 백청에게서 빼낸 기밀을 벽국에 넘겼습니다. 하나 전하께선 이런 저를 몹시도 총애하시어 절 죽이기는커녕 벽국에 보내려 하십니다. 대장군. 충신인 당신께선 저를 이대로 보내실 겁니까?”
왜 옥환이 제 발로 사지에 들어가려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호진은 옥환의 자백으로 이미 대부분의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그는 특히 승헌이 옥환을 아껴서 그를 죽이는 대신 벽국에 보내려 한다는 말에 크게 노했다.
“네 이놈! 네놈이 그러고도 사람이더냐! 사람의 가죽을 뒤집어쓴 금수가 아니고?!”
호진은 단박에 옥환의 멱살을 잡고 윽박질렀다. 병사들이 호진의 손을 떼어 내려 했으나 옥환은 더욱 대담하게 굴었다.
“그러게 대장군께서 전하를 더 잘 보필하셨어야지요. 저 같은 금수에게 당하지 않도록.”
물론 호진을 도발하기 위한 말이었으나, 반쯤은 진심이기도 했다. 차라리 승헌이 호진을 더 믿어 저를 계속 의심했으면 좋았을 것을. 하나 옥환이 더 자책하기 전에 호진이 먼저 그에게 주먹을 날렸다.
“윽……!”
“대장군!”
호진의 힘이 바짝 들어간 주먹에 옥환이 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 병사 하나가 서둘러 옥환을 부축하고, 또 다른 병사가 호진의 앞에 섰다. 하나 호진은 유일하게 궁 안에서 검을 차는 것을 허락받은 이였다. 그의 허리춤에 걸려있던 검은 검집에서 나와 이미 옥환을 겨누고 있었다.
“대장군, 냉정히 생각하십시오.”
호진의 앞에 선 병사가 호진에게 충고했다. 하나 호진은 더욱 열을 내며 외쳤다.
“전하께서 저놈에게 어찌하셨는데! 한데도 저리 뻔뻔한 작태라니! 저 꼴을 보고도 네놈이 감히 내 앞을 막아서느냐?! 네가 그러고도 전하의 금군이더냐!”
“그래도 태사를 죽이시는 건 안 됩니다! 전하께서 대장군을 용서치 않으실 것입니다!”
검을 휘두르려는 호진의 팔을 붙잡으며 병사가 외쳤다. 옥환은 찢어져 피가 흐르는 입술을 닦으며 호진을 올려다보았다. 자신의 노림수와 달리 호진이 정말 자신을 죽이게 된다 해도 그렇게까지 최악은 아니었다. 그만큼 옥환은 호진의 손에 죽을지언정 벽국으로 돌아갈 생각은 일절 없었다.
계속해서 병사와 언쟁을 벌이던 호진이 궁 안에서 금군 병사까지 해치울 순 없다고 판단했는지 결국 한발 물러섰다.
“하면 저놈을 옥에 가둬놓겠다!”
“하나 전하께선…….”
“전하께는 내가 직접 말씀드릴 것이다! 감히 첩자를 벽국으로 돌려보내다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수급을 보내는 거라면 몰라도 그것은 내가 절대 허락 못 한다!”
병사들 역시 이 이상 소란을 벌이는 것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뿐이라는 생각에 하는 수 없이 호진의 고집을 받아들였다. 대신 보는 이가 많은 옥사에 가둘 수는 없다는 생각에 병사가 조건을 붙였다.
“규율을 어긴 금군 병사를 따로 가두는 전각이 있습니다. 그곳으로 가시지요. 옥사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이 일을 알려서 좋을 게 없다는 건 대장군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흥, 좋다. 하나 이놈이 절대 나가지 못하도록 철저히 감시해야 할 것이야.”
호진은 난폭하게 옥환을 일으켜 질질 끌고 갔다. 얻어맞고 끌려가기까지 하면서도 옥환은 오히려 깊이 안도했다. 호진이라면 필시 자신이 벽국으로 가게 내버려 두지 않을 거라고 여겼다. 그의 생각대로 되어 서국에 남게 되었으니, 그것이 비록 옥에 갇히는 비참한 형태라 해도 옥환은 개의치 않았다.
아니, 오히려 호진이 제게 더 화를 내주었으면 했다. 승헌이 내지 않은 만큼.
“윽.”
이윽고 궁 안 깊은 곳에 위치한 은밀한 전각으로 옥환을 끌고 온 호진이 전각 안에 놓인 철창 안으로 그를 내팽개쳤다. 바닥에 쓸려 옥환의 무릎이 까졌으나 호진은 싸늘한 눈길로 으름장을 놓았다.
“허튼 생각은 추호도 마라! 그랬다간 내 죽을 각오를 하고 네놈의 목을 그 자리에서 베어버릴 것이니!”
그 뒤 호진은 철창의 문을 단단히 걸어 잠그고 떠나 버렸다. 금군 병사들 역시 잠시 머뭇거리다가 별수 없이 밖으로 나갔다. 그들은 문을 나서면서도 이런 상황에서조차 태연하기만 한 옥환의 모습에 혀를 내둘렀다. 연못에 빠지고 호진에게 얻어맞았음에도 옥환은 그저 차분했다. 정말로 세상에 저토록 독한 이가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하나 병사들이 나가고 문이 닫히자마자, 가까스로 붙잡고 있던 옥환의 감정의 둑이 허물어졌다. 그의 눈에서 투명한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쏟아졌다.
“윽, 흐윽……. 전하…….”
옥환은 가슴을 부여잡고 오열하며 무너졌다. 왜 그랬을까. 대체 왜 멈추지 못했을까.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이 후회뿐이었다. 신념도, 충의도, 연심도, 죄다 승헌을 찌르는 칼날이 되었다. 머릿속에 승헌의 상처받은 얼굴이 떠오르자 옥환의 가슴이 갈가리 찢어졌다.
아. 환랑이라고 부르지 말 것을. 품에 안기지 말 것을.
하루만…… 단 하루만, 아니, 단 한 시진이라도 빨리 승헌을 찾아갔다면 짧은 시간이나마 그의 사람이 될 수 있었을 텐데. 뭐 그리 대단한 작별씩이나 한다고 그를 기다리게 하고, 결국 제 마음을 듣기도 전에 진실을 알게 해 버렸을까. 승헌의 모든 불행은 자신에게서 비롯되었고, 그걸 다 알면서도 자신은 승헌의 사랑을 받으려 했다. 옥환은 그런 이기적인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그럼에도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것은 승헌을 향한 사무치는 그리움이었다. 그에게 평생 잊지 못할 배신을 안겨주고도, 그가 너무나도 보고 싶었다. 이제 영원히 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니 미칠 것만 같았다. 그게 너무나 미안했다. 그 무엇보다도 그것이 가장 죄스러웠다.
그렇게 옥환은 몇 시진을 내리 울기만 했다. 그에게는 지나치게 싸늘한 여름밤이, 그렇게 눈물과 함께 꾸역꾸역 깊어 갔다.
얼마나 되었을까. 전각의 창은 두꺼운 종이로 풀칠이 되어 있어 시간을 알 수가 없었다. 옥환은 붉게 부어오른 눈을 감싼 채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무엇이든 하겠다고 결심했지만, 정작 현실 속의 그는 무엇도 할 수 없었다. 옥환은 여전히 길을 잃은 채였다.
한데 그때, 전각의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철창 앞으로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호진일까. 아니면 병사인가. 저를 죽이러 온 것일지도 모른다. 힘으로 뚫고 나가야 하나. 아니면 말로 설득할 수 있을까. 무모하고 어리석어도, 승헌을 구하고 싶었다. 그와, 그가 아끼는 서국을 지키고 싶었다.
옥환은 간절한 마음으로 무릎에 얼굴을 파묻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
하나 한참을 기다려도 상대는 말이 없었다. 옥환이 의아함에 무거운 고개를 들었다가, 철창 앞에 선 상대를 보고는 숨을 삼켰다. 늦은 밤, 전각을 찾은 이는 옥환이 그리 애타게 찾던 사람이었다.
“……옥환.”
갈라진 승헌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승헌이 이런 곳에는 왜 왔을까. 어쩌면, 자신이 이곳에 있다는 말을 듣고 조금은 가엾게 여겨주었을까? 제 진심에 대해 조금이라도 생각해 주진 않았을까? 그런 기대를 품으면서도, 옥환은 속으로 스스로를 모질게 질책했다. 참으로 양심도 없는 놈이었다. 여기까지 와서도 여전히 승헌의 애정을 갈구하는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하나, 승헌은 옥환에게 손을 뻗었다. 그의 손은 철창에 가로막혀 옥환에게 닿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는 더, 더 손을 뻗었다.
“옥환.”
승헌의 표정은 어둠에 잠겨 보이지 않았다. 그가 어둠 속에서 말했다.
“그대가, 떨어트린 옥가락지를 보았어.”
옥환은 그제야 제 손을 살폈다. 분명 왼손 약지에 끼워 놓았던 것이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그는 창백한 얼굴을 들었다. 하나 승헌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무릎으로 한 걸음 앞으로 기어갔다.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그사이 승헌이 다시 말했다.
“호진이 와서 말하더군. 그대를 가둬놓았다고. 그대가 죄를 자백해서 그리했다고. 그러니 그대를 죽이라고.”
승헌이 느리게 말을 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금방이라도 꺼질 듯했다.
“나는 그대가 떨어트린 옥가락지를 쥐고, 종일 생각했어. 어쩌면 내 어리석은 기대일지도 몰라. 이 모든 게, 그저 내가 그리 생각하고 싶어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지도 몰라. 하나 나는…… 어쩌면 그대가 나를 조금은, 아주 조금은 사랑해 주지 않았을까, 그리 생각했어.”
옥환은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손을 들자 승헌이 뻗은 손끝이 닿았다. 옥환은 그것을 붙잡아 제 뺨에 대었다. 승헌의 손끝이 움찔했으나, 이내 옥환의 뺨을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하나 이제야 알겠어. 다 부질없는 짓이야. 모든 게 다.”
옥환은 고개를 들어 승헌을 보았다. 무엇이 부질없다는 것일까. 설마하니 저와 보낸 그 시간들이 다 미워졌을까. 그러고도 남겠지. 남겠지만…….
“…….”
어슴푸레한 빛에 승헌의 얼굴이 비로소 보였다. 자신을 더없이 소중하게 바라보는 그 눈빛에, 옥환의 감정이 다시금 요동쳤다.
승헌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보기만 해도 괴로운 미소였다.
“그대를 연모해.”
옥환이 움직임을 뚝 멈추었다. 천금 같은 고백이 옥환의 가슴에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옥환은 숨을 삼키며 제 가슴을 짚었다.
저 때문에 진창에 곤두박질을 쳤어도, 여전히 저를 연모한단다. 그 한결같은 마음에 끝내 옥환의 뺨이 젖어 들었다. 소리를 죽인 울음이 적막 속에서 작게 퍼져 나갔다.
“이 사랑을 어찌할 수가 없어.”
수만 개의 변명과 이유를 갖다 붙여도, 이 비참한 감정을 뿌리치는 데엔 쓸모가 없었다. 옥환을 본 순간, 승헌은 그저 그 비참한 감정에 붙들려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는 거지처럼 옥환의 사랑을 구걸했다.
“옥환. 거짓으로라도 좋아. 그대도 나를, 같은 마음으로 여기고 있다고 생각해도 될까? 그런 기대를 품는 것을 허락해 주겠어?”
“전하…….”
옥환이 결국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잘못했습니다. 제가 정말 잘못했습니다, 전하……. 옥환은 수없이 그 말만을 되풀이했다. 승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옥환의 눈물을 닦고, 또 닦아 주었다.
배신감에 치를 떨며 옥환을 내쫓았지만, 그가 바닥에 떨어트리고 간 가락지를 발견한 순간 승헌은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었다.
너는 왕이라고, 나라와 백성을 구해야 한다고, 이래선 아니 된다고…… 수많은 목소리가 그를 책망했지만, 종일 고통에 몸부림치면서도 그는 옥환을 향한 연정에 허덕였다. 딱 한 번,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더 그를 만나고 싶었다. 옥환을 사랑했다. 지독히도 사랑했다. 그가 자신을 배신했어도, 그가 입에 담은 모든 것이 거짓이라 해도.
하지만 그토록 사랑하는 이를 제 손으로 내쫓고 말았다. 이제는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다. 그 사실에 절망하고 무너지는 승헌의 앞에 호진이 나타나 말했다. 옥환이, 아직 이곳에 있노라고. 그 순간 승헌이 느낀 것은 오직 안도였다. 만날 수 있다. 아직, 아직은 그를 볼 수 있다.
아무리 화가 나도, 옥환이 자신을 농락했고 그의 마음에 자신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도, 승헌은 옥환을 떠나 보낼 수 없었다. 왕의 자리조차 그를 막지 못했다. 치솟는 감정은 잠시뿐, 결국 그는 몇 번이고 옥환에게 돌아왔다.
그리고 옥환은 이제야 그 마음을 다 알았다. 그래서 더 괴로웠다. 이토록 자신을 사랑해 주는 이에게 무슨 짓을 저지른 것일까. 후회는 아무리 해도 모자랐다.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을 돌려놓고 싶었다. 과거로 가서, 다시 승헌을 택하고 싶었다. 더 일찍. 그리고 더 많이 그를 사랑하고 싶었다.
하나 옥환은 눈물을 닦아 내고 마음을 추슬렀다. 승헌에게 해야 하는 말이 있었다. 만일, 만에 하나라도 승헌을 다시 만나게 된다면 하려고 생각했던 말들이 너무나 많았다. 그것을 다 전하려면 시간이 많지 않았다.
“전하, 저도 전하를 연모합니다…….”
“…….”
“이 마음이 어찌 그 한마디에 다 담길 수 있을까요. 고작 연모라는 단어로 다할 수 없을 만큼, 당신을 연모하고 은애하고 또 사랑합니다.”
옥환의 고백에 승헌의 가슴이 내려앉았다. 그가 기밀을 훔치든 훔치지 않았든, 그가 벽국의 첩자든 아니든 간에 승헌은 더 이상 상관없었다. 옥환이 없으면 살 수가 없었다.
“전하의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하늘이 허락한다면…… 염치불구하고 그리하고 싶었습니다.”
승헌은 억장이 무너지는 심경으로 옥가락지를 내려다보았다. 하면 이것을 끼고 왔던 것은, 그 마음을 허락받고 싶어서였을까. 저를 보고 그리 맑게 웃던 것은 제 사람이 되겠다고 말하려 그런 것이었나.
분노와 배신감에 미처 보지 못했던 것들이 모습을 드러내자 승헌의 마음이 뼈아픈 죄책감으로 아려왔다.
“제가 미쳤지요. 제까짓 게 감히. 저 같은 게 감히 전하를요.”
승헌은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하고 싶었다. 정말, 옥환의 마음이 진심이라면 그런 말은 하지 않길 바랐다.
하나 심호흡을 한 번 한 옥환이 무거운 어조로 먼저 입을 뗐다. 이제는 모든 것을 털어놓을 때였다. 자신뿐만이 아닌 승헌을 위해서라도. 그는 모든 것을 알 자격이 있었다.
“기밀을 빼낸 것은 저입니다.”
“…….”
“백고 장군을 이용해 백청의 집에 갔을 때 그리하였고, 그것을 필사한 뒤 종소를 시켜 돌려놓았습니다. 그 일로 저는 종소를 인질로 잡혀 백청에게 협박을 받게 되었고…… 백청이 제 이기심에 전쟁을 일으키려 하는 모습에 실망해 병부상서를 이용해 그를 쳐낸 것입니다. 그 뒤로 빼낸 기밀의 필사본을 줄곧 갖고 있었습니다. 계속해서 벽국에 보내려 했지만 그때마다 왠지 모를 주저함이 제 발목을 잡았고, 전하께서 부상을 입고 돌아오신 뒤에는 아예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옥환의 어조는 아까 전까지와는 달리 무척이나 차분했으나, 그는 말하면서도 계속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승헌은 철창 너머의 옥환을 끌어안아 주지 못한 채, 그저 그의 눈물을 손끝으로 훔치고 또 훔쳤다. 옥환은 애써 말을 이었다.
“아마 그때, 혹은 그 뒤에…… 계평이 그것을 다시 필사해 벽국에 보냈겠지요. 그는 저보다도 제 마음을 먼저 눈치채고 있었으니. 하나 그 사실을 몰랐던 저는 오늘 낮에 그것을 태웠습니다. 그걸로 아무 문제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전하께선 아무것도 모를 것이고, 저는…… 전하의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옥환은 가벼운 한숨을 내쉬고는 흐리게 웃었다. 그 바람에 눈가에 맺혀 있던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믿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기밀을 넘긴 게 제가 아니라고 해서, 제 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란 걸 압니다. 애초에 제가 그것을 빼내지 않았다면…… 아니. 그런 간악한 마음을 품고 서국에 오지 않았더라면 다 일어나지 않았을 일입니다.”
승헌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옥환이 자신의 행동을 지나칠 만큼 후회하고 반성한다는 걸 승헌도 알았다. 그게 아니라면 서국에 남지도, 저를 죽여 달라 청하지도 않았으리라. 무엇보다 승헌은 이제 옥환을 탓하고 싶지 않았다. 이미 벌어진 일은 벌어진 일이다. 그저 옥환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으로 충분했다.
떠나기 전, 그것을 알았으니 족했다.
“그대를 믿어.”
“……전하…….”
승헌의 대답에는 일말의 의심도 없었다. 옥환은 승헌의 손을 더 꼭 쥐었다. 승헌은 옥환에게 자상하게 웃어 주었다.
“고마워, 옥환. 나를 택해 주어서.”
옥환의 눈에서 또다시 왈칵 눈물이 차올랐으나, 그는 그것을 억지로 참아 냈다. 승헌은 다시금 옥가락지를 옥환의 손에 끼워 주었다. 이번엔 절대 빠지지 않도록.
아마도 이것이, 그가 옥환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일 터였다. 행여 모든 것이 잘못되더라도 옥환이 가락지를 보고 저를 떠올려 주었으면 했다. 자신이 사라져도 이것만은 옥환의 손가락에 남아, 평생 함께하길 바랐다. 그러니 절대 잃어버려선 안 되었다.
“잘 간수해야 해, 옥환.”
“그럴 것입니다. 전하께서 마음의 증표로 주신 것이니, 죽을 때까지 간직할 것입니다.”
승헌은 그걸로 됐다는 듯 후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한없이 다정하고 부드러운 태도였으나, 옥환은 어딘지 모를 불안감을 느꼈다. 그저 저와의 오해를 풀어 기쁜 것이라고 여기기에 그의 태도는 묘하게 초연해 보였다. 그리고…… 승헌이 꺼낸 한마디로 옥환의 불안은 현실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그대를 만나서 다행이야.”
“예……?”
생각지 않은 단어에 옥환의 가슴이 철렁했다. 마지막이라니……? 그게 무슨.
“이제 나는 가야 해, 옥환.”
“가, 가시다니요? 어디를…….”
그렇게 물으면서도 옥환은 그 대답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그저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을 뿐. 그리고 승헌이, 그런 옥환을 안쓰럽게 바라보며 사과했다.
“미안해, 옥환. 더 곁에 있어 주지 못해서.”
“어…… 어디를 가신다는 말씀이십니까?”
옥환은 희게 질린 얼굴로, 도저히 꺼내고 싶지 않았던 말을 꺼냈다.
“벽국과 싸우러…… 가시려는 겁니까?”
일순 승헌의 눈동자에 망설임이 스쳤으나, 그는 곧 짧게 “그래.” 하고 대꾸했다.
“피할 수 없는 일이지 않나.”
“제가…… 제가 그리 만들었지요.”
승헌이 죄책감을 느끼는 옥환을 달래려 입을 열었으나 그보다 한발 빠르게 옥환이 청했다.
“저도 가겠습니다.”
“옥환.”
“저를 이용하십시오. 미끼든, 인질이든, 아니면 제 책략을 이용하셔도 좋습니다. 제가 어떻게든 생각해 내겠습니다. 목숨을 걸고서라도 서국을 지키겠습니다. 그러니 저도 데려가 주십시오, 전하…….”
“그럴 수 없어.”
“전하!”
옥환의 절박한 외침을 승헌은 애써 무시했다. 옥환은 호진에게 죽을 뻔하면서까지 서국에 남았고, 승헌도 더 이상 옥환을 벽국에 보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하나 그를 전장에 데리고 가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옥환이 목숨을 내놓을 것을 알기 때문에 안 되는 일이었다. 패배할 가능성이 더 높은 전쟁이었다. 그런 곳에선 옥환을 제대로 지켜 줄 수도 없을 것이고, 옥환은 죄책감 때문에라도 제 목숨을 거는 것에 주저가 없을 터였다. 그걸 알면서 옥환을 데려갈 순 없었다.
“나는 이 나라의 왕이지 않나. 위험이 닥치면 앞장서는 게 바로 나의 책무야. 하나 그대는 달라. 그렇게 할 필요도 없고, 그리해서도 안 돼.”
“왜, 왜 안 된다는 것입니까. 제게도 그리할 의무가 있습니다. 제가 책임질 일입니다. 다 제 잘못으로 벌어진 일이지 않습니까. 어찌 그런 곳에 전하 혼자 가려 하십니까?”
승헌은 옥환의 고집을 알고 있었으나, 이것이 마지막임을 알기에 되도록 옥환을 달래 주고 싶었다. 그는 옥환의 붉어진 눈가를 어루만지며 쓴웃음을 지었다.
“서국을 위해서 안 되는 거야. 호진이 그대의 죄를 알고, 나 역시…… 견승헌으로서는 그대를 믿지만, 서국의 왕으로서는 그대를 데려갈 수 없어.”
옥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럴 순 없었다. 승헌을 사지에 홀로 내보낼 순 없었다. 그것도 자신이 만들어 낸 사지에. 왜. 왜 끝의 끝까지 자신의 과오에 발목을 잡혀야만 하는 것일까. 왜 이렇게까지 현실은 제게 매정하게 구는 것일까. 아직도, 지금에 이르러서도 벌이 다 끝나지 않은 것일까.
하나 승헌을 어찌 홀로 보내겠는가. 함께 가도 고되고 힘겨울 그곳에, 어찌 그만을 보내 놓고 저만 남아 있을 수 있을까. 자신이 수백 번을 고쳐 죽을지언정, 승헌에게는 단 한 번의 죽음도 허락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바라보고만 있어도 애가 닳는데…… 도대체 어떻게.
“전하…… 전하, 가지 마십시오. 저를 데려가십시오. 저를 묶어 놓으셔도 좋고, 화살받이로 쓰셔도 좋습니다. 전하…… 제게 이러지 마십시오…….”
승헌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옥환이 납득하지 않을 거란 걸 알았다. 그리고 그에겐 더 이상 시간이 없었다. 이러고 있는 동안에도 벽국은 시시각각 도성을 향해 진격하고 있을 터였다. 그들이 서국의 병력 규모는 물론 강점과 약점을 모두 알고 있었기에, 서국은 그들이 도성까지 쳐들어오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보고 있어야만 했다. 도성이 함락되면 모든 게 끝이 난다. 무엇을 걸든 간에 도성은 지켜 내야만 했다. 저를 믿고 있는 백성들을 위해서. 언젠가 찾아올 평화를 위해서. 그 대가가 자신의 목숨이라고 해도.
“옥환. 내겐 아무런 미련도 없어.”
“그리 말씀하시지 마십시오!”
옥환은 고함을 쳤다. 비극을 예감하는 승헌의 태도에 피어나는 불안감을 분노로 감추려 했다. 하나 승헌이 “옥환.” 하고 따스하게 부르자 그 연기는 모두 무용지물이 되었다. 옥환은 서럽게 흐느꼈다. 어찌 미련이 없다고 할까. 왜, 죽으러 가는 사람처럼 말을 해.
“전하, 제가, 제가 있는데, 왜 미련이 없다 말씀하십니까……. 저를 연모하신다면서요. 저를 믿으신다면서요. 죽더라도 서국에서, 전하의 손에 죽고 싶었던 연유가 무엇인지 정녕 몰라서 이러십니까……?”
승헌은 천천히 몸을 뒤로 물렸다. 철창 사이로 포개어져 있던 두 사람의 손이 무정하게 떨어졌다. 옥환은 손을 뻗어 승헌의 소매를 붙잡았다.
“옥환.”
“가지 마세요, 환랑……. 가지 마세요…….”
“옥환, 그대에게 긴히 부탁할 것이 있어.”
승헌이 울며 매달리는 옥환의 손을 부드럽게 쥐어 제 가슴에 대었다.
“옥환. 내가 만일, 영영 돌아오지 못하는 길을 가거든.”
“하지 마십시오, 전하……. 말하지 마세요, 제발.”
그런 길에 보내고 싶지 않았다. 보낼 수 없었다. 제발, 누구든 좋으니 저이를 보내지 않게 해달라고 옥환은 속으로 간절하게 빌었다. 하나 승헌은 끝끝내 말을 이었다. 옥환에게 있어, 낙인과도 같은 부탁을 남겼다. 염완이 그랬듯이.
“서국 백성들이, 벽국과 염요에게 너무 핍박을 받지 않도록 그대가 잘 지켜 줘.”
“또 제게 짐을 지우려 하십니까……? 제가 주군의 유언으로 얼마나 힘겨워했는지 아시면서, 그것 때문에 이렇게 된 걸 다 아시면서, 왜 이리 잔인하십니까……?”
그래야 옥환이 더 살아 줄 테니까. 사실은 마음이 약하고 정이 많은 그는,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그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계속해서 살아 줄 것이다. 하나 승헌은 그러한 속내를 꺼내지는 않았다. 옥환이 몰라야 저와의 약속을 더 잘 지켜 줄 것이 아닌가. 혹여 분한 마음에 제가 떠난 길을 따라오려 하면 큰일이었다.
“이제 갈게, 옥환.”
승헌은 되도록 작별 인사를 말하고 싶지는 않았으나, 하지 않으면 않는 대로 아쉬움이 남을 것 같았다. 옥환은 멀어지는 승헌을 보며 철창을 쥐고 마구 흔들었다. 그럼에도 승헌과 저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지는 일은 없었다.
“전하……! 싫습니다! 안 됩니다……! 전하, 제발…….”
안 돼요. 안 돼……. 철창에 피부가 긁히고 뼈가 눌려도 아랑곳하지 않고 옥환이 승헌에게로 손을 뻗어 왔다. 그 손을 잡아 주고 싶은 마음이 절실했으나…….
‘아직도 미련이 남아 있었구나.’
승헌은 쓴웃음을 짓고는 돌아섰다. 전각을 나오자 저를 목놓아 부르는 옥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완전히 쉬어 버린 목소리가 처절하게 저를 찾고 있었다. 승헌은 눈을 질끈 감았다 뜨는 것으로 그를 향한 마음을 털어 내고는 문 앞을 지키고 있던 병사에게 지시했다.
“옥환의 식사를 꼭 잘 챙겨주고, 혹…… 이곳이 위험해질 것 같거든 옥환을 데리고 벽국으로 도망쳐라. 현명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이니 나와의 약조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살아남아 줄 것이다.”
말을 마친 승헌이 잠시 옥환이 있을 전각을 돌아보며 기도했다.
부디 그래 주기를. 부디 그대는, 오래오래 살다 오시기를.
이 잔인한 세상 무어 더 볼 것이 있겠느냐마는, 주군도 잃고 정인도 잃고 무슨 의욕이 나겠느냐마는, 사람의 마음이란 게 참으로 간사해 저는 몰라도 사랑하는 이만은 길게 살아 주길 바라는 법이었다. 질긴 목숨 부지하며 살다 보면…… 언젠가는 그이가 좋아하는 복사꽃도 필 것이고, 그리 바라 마지않던 평화도 오지 않겠는가.
‘그러니 살아야 해.’
그렇게 승헌은, 마지막 염원을 남겨 놓고 칼과 창의 길로 머나먼 여정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