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야기 4
금야기
4
十. 玉淚(옥루) (2)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넓게 펼쳐진 황금빛 들판 위에, 옥환은 덩그러니 서 있었다. 금빛 들판은 그를 기쁘게 하지 못했고, 매번 그랬던 것처럼 서국을 보고 있지도 않았다.
평소와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른 꿈이었다. 옥환은 잘 익은 벼의 냄새를 맡으며 그저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한데 그때, 누군가가 옥환에게 손짓을 했다. 옥환이 고개를 드니 그곳에는 익숙한 풍채의 잘생긴 사내가 서 있었다.
“옥환. 이리와.”
옥환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옥환이 다가가자 승헌은 양팔을 벌렸고, 옥환은 그의 품에 그대로 안겼다. 따스하고 아늑한 품속에서 옥환은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한데 옥환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어 주던 승헌이 문득 손을 멈추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옥환은 엄습하는 불안감에 고개를 들었다.
“옥환. 가야 할 것 같아.”
“저, 전하.”
“미안해, 옥환.”
승헌은 옥환을 놓고는 돌아섰다. 옥환은 당황해서 승헌을 붙잡으려 했으나 옥환의 팔다리에는 들판에서 뻗어 나온 줄기가 감겨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승헌이 걸어간 곳에는 문아원이 있었다. 그녀의 손을 잡으며 승헌은 옥환에게 그랬듯 그녀에게 웃어 주었다.
“전하, 전하!”
옥환이 애타게 부르자 승헌이 안타까운 눈길로 옥환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가 말했다.
“그대가 혼인을 하길 바랐잖아.”
“전하, 저는…… 저는…….”
“그대는 나를 속이고 서국을 배신했지. 그런 그대를, 내가 어찌 사랑하겠나.”
옥환은 발버둥을 멈추었다. 어찌 사랑하겠냐는 그 물음이 옥환을 꼼짝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제 몸에 감긴 줄기는 자신을 깊고 깊은 늪으로 끌어당겼다. 승헌도, 염완도 없는 끔찍한 곳으로.
그렇게 서서히 늪으로 잠기며 옥환은 행복해지는 승헌을 지켜보았다. 그는 문아원과 혼인을 했고, 벽국을 무너뜨리고 나라를 통일해 황제가 되었으며, 문아원과의 사이에서 사랑스러운 아이를 가지게 되었다. 아들이 하나, 딸이 하나. 단란해 보이는 가족을 보며 옥환은 승헌을 애타게 불렀다. 하나 승헌은 더 이상 옥환을 보지 않았다. 마치 그곳에 있는 옥환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옥환을 깡그리 잊었다.
“안 돼……!”
벌떡 일어난 옥환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꿈이었다. 현실이 아니다. 그것을 깨달으니 그제야 요동치던 가슴이 비로소 가라앉았다. 그럼에도 손은 파르르 떨고 있었다.
한데 그때 문밖에서 들린 인기척이 옥환의 신경을 건드렸다. 옥환은 소스라치게 놀라 문을 바라보았다. 웬 그림자가 문 앞에 있다가 순식간에 사라진 것 같았다. 착각일 수도 있었으나…… 어쩐지 뒷목이 서늘했다.
주위를 둘러보자 어둠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옥환은 갑작스러운 공포심을 느꼈다. 꿈의 내용도, 문 앞의 그림자도 돌연 두려워졌다. 하나 그가 의지할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온전히 혼자였다. 이리 끔찍한 꿈을 꾸고도, 저를 위로해 줄 사람 하나 없었다. 옥환은 그것이 갑자기 서러웠다.
‘……전하.’
승헌이 보고 싶었다. 승헌에게 가고 싶었다. 혼인을 해도, 아무리 많은 시간이 흘러도 자신을 잊지 않겠다는 약조를 받고 싶었다. 하나 그 누구도 그것을 허락해 주지 않았다. 옥환 자신조차.
숨이 막힐 듯한 적막과 암흑에 옥환은 탈출구를 찾듯 자리에서 일어나 황급히 창을 열었다. 깊은 새벽의 싸늘한 바람이 옥환의 무방비한 몸을 세차게 때리고 지나갔다.
“어…….”
갑자기 불어온 바람에 눈을 질끈 감았던 옥환은 문득 귓가에 들려온 목소리에 눈을 떴다. 그러자 열린 창 앞에 승헌이 당황한 얼굴로 우두커니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전하……?”
“아, 응. 그래. 안녕, 옥환.”
승헌은 눈에 띄게 놀라서 그답지 않은 어색한 인사를 건넸다. 승헌과 마찬가지로 당황했던 옥환은 “안녕, 옥환.”이라는 지나치게 부자연스러운 인사에 방금까지의 기분도 잊고 작게 웃었다.
“안녕하십니까, 전하.”
“……자고 있을 줄 알았는데.”
옥환의 미소를 지그시 바라보던 승헌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제야 꿈의 내용을 기억해 낸 옥환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안 좋은 꿈을 꾸어서 깼습니다.”
평소라면 변명을 했을 옥환은 충동적으로 그렇게 털어놓았다. 그 말에 승헌은 놀라서 옥환에게 한 걸음 더 다가와 그의 뺨을 감싸고 얼굴을 살폈다.
“괜찮나? 또 무슨 꿈을 꾸었기에 그래.”
“……그냥 좀. 별것은 아닙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옥환은 제 입으로 악몽을 꿨다고 말해 놓고는 다시 신경 쓰지 말라고 하는 자신이 우스웠다. 유치하고 또 치졸한 짓이었다. 결국 자신은 승헌이 제 뺨을 만지게 두고 있지 않은가.
“그대 생각이 나서 왔어.”
한데 그때 승헌이 예고도 없이 자신이 여기 있는 이유를 고백했다. 옥환은 당황해서 승헌을 쳐다보았으나 승헌은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잠이 들어도 진작에 들었을 시간이라 그냥 밖에 서 있었는데, 그리 무서운 꿈을 꾸는 줄 알았으면 깨울 것을 그랬지.”
“어찌 그러셨겠습니까. 그저 꿈일 뿐이니 마음에 두실 것 없습니다.”
“요즘 들어 조회에서도 줄곧 안색이 나빠 보이던데. 게다가 전에도 악몽을 꾸지 않았어.”
옥환은 일전에, 압박감을 견디지 못하고 악몽을 꾼 자신을 안아서 달래 주었던 승헌을 떠올렸다. 옥환은 할 수 있다면 다시금 그의 품에 안기고 싶었다. 하면 조금은 안심이 될 것 같아서.
한데 마치 옥환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고개를 축 늘어뜨리고 있는 옥환을 승헌이 살며시 끌어안았다. 승헌의 품에 안긴 옥환은 어깨를 움찔했으나, 잠자코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옥환. 무슨 일 있는 것은 아니지?”
“…….”
그 다정한 목소리에, 따뜻한 온기에, 옥환의 위태롭던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승헌에게 혼인하지 말라고 하고 싶었다. 그 아리따운 여인에게 승헌을 주고 싶지 않았다. 자신은 승헌을…….
“옥환.”
“…….”
“무슨 일이 있으면, 언제라도 내게 말해.”
옥환은 입을 열었다 닫았다만 반복했다. 혼인 따윈 하지 말고 저만 봐 달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데, 정작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용기가 없었다. 그리 말해서 어떡하려고. 나중에 모든 진실이 드러나면, 승헌은 더 상처만 받게 될 텐데.
“그대가 많이 걱정돼.”
옥환은 목이 메어 오는 것을 느끼면서도 최대한 태연함을 가장한 채 대꾸했다.
“……걱정, 마십시오. 전하의 걱정을 살 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그런 말이 어디 있어.”
승헌은 가늘게 떠는 옥환의 등을 토닥였다.
“그대는 내게 이리 소중한데.”
“제가…… 금야 선생이라서입니까? 이용할 가치가 있으니까?”
말을 하면서도 옥환은 어쩌면 승헌이 화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으나, 승헌은 도리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대가 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이가 아니라 가장 미련한 이라고 해도 상관없어.”
옥환은 천천히 승헌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달빛에 비친 승헌의 늠름한 얼굴에 옥환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제게 너무 잘해 주지 마십시오.”
승헌은 말없이 옥환을 응시했다. 그 눈빛에는 수만 가지 감정이 서려 있었으나, 그럼에도 그것의 본질은 깊은 애정이었다. 그는 옥환의 머리를 슥 쓰다듬고는 말했다.
“이제 그만 들어가서 자.”
“전하께선…….”
“나도 돌아가야지. 여기 조금 서 있다가.”
“어서 들어가십시오. 시간이 많이 늦었습니다. 이리 늦게까지 깨어 계시니 혹 옥체가 상하실까 염려됩니다.”
“무인의 체력을 우습게 보지 마. 누누이 말했지만 지난 일은 정말 운이 나빴던 거라니까.”
“그래도 공연히 여기 서 계실 필요는 없지 않으십니까. 아니면 혹 전하께서도…… 고민이 있으십니까?”
옥환이 심각한 표정으로 물으니 승헌이 쿡쿡 웃었다.
“그대가 또 악몽을 꿀까 봐 그래. 내가 여기 있으면 그대도 덜 불안하지 않을까 해서.”
승헌의 배려에 옥환은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의 그 말 한마디만으로, 더는 악몽을 꾸지 않고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주저하던 옥환은 조심스레 손을 뻗어 승헌의 손을 잡았다. 하다못해 이 말만이라도 하고 싶었다. 옥환은 죄책감을 뒤로하고 눈앞의 승헌만을 시야에 담았다.
“전하. 정 그러시면…… 오늘은 여기서 주무시고 가십시오.”
승헌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옥환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옥환은 얼굴이 홧홧해지는 것을 느끼면서도 변명을 하거나 했던 말을 철회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어색한 침묵 끝에, 승헌이 훌쩍 창을 넘어왔다. 옥환은 또 창을 넘어오시는구나, 하고 생각하며 나직이 웃었다.
한데 승헌이 옥환을 번쩍 안아 들더니 곧장 침상을 향했다. 소스라친 옥환이 승헌의 가슴을 밀어냈으나 승헌은 옥환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어떻게 안 해. 그냥, 아, 그대는 정말.”
제 품 위에 쓰러져 곤란해하는 승헌의 등을 조심스레 감싼 옥환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짙게 깔린 어둠도, 악몽의 내용도 더는 무섭지 않았다. 승헌의 체온이, 그 모든 것을 몰아내 주고 있었다. 옥환은 깊은 안도감을 느끼며 승헌에게 부드럽게 속삭였다.
“그만 주무십시오, 전하.”
“……내 마음을 다 알면서 그러지? 못된 정인 같으니.”
승헌이 제 뺨을 쿡 찌르며 투덜대는 목소리가 들렸다. 입꼬리만 올려 웃던 옥환은 입술에 무언가가 가볍게 닿았다가 떨어지는 감촉에 뺨을 붉혔다.
“잘 자, 옥환.”
작게 속삭인 승헌이 몸을 일으켜 옥환의 옆에 누웠다. 그 기척을 느끼고 있던 옥환은 한참이 지나 슬그머니 눈을 떴다. 승헌은 잠이 들었는지 눈을 감은 채 곤한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옥환은 그 잠든 얼굴을 바라보며, 잘 만들어진 얼굴선을 덧그리며, 행여라도 나중에 이 기억을 잊지 않도록 그의 눈코입 하나하나를 새겨 넣었다.
그날, 옥환은 밤을 꼬박 새웠다.
그리고 그다음 날부터 한동안, 승헌은 매일 밤 옥환을 찾아와 그의 옆에서 잠이 들었다. 그는 옥환에게 손을 대지도 않았고, 늦은 밤중이기에 두 사람은 그렇게 많은 말을 나누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옥환은 그가 있는 날이면 악몽을 꾸는 일 없이 푹 잠들 수 있었다.
승헌이 찾아온 지 닷새째 되는 날 밤. 두 사람은 평소와 달리 바로 잠드는 대신 눈을 뜨고 있었다. 왠지 어색해서 자는 척을 해야 할까 고민하는 옥환에게 승헌이 불쑥 말을 걸었다.
“옥환. 금을 타는 것 말고 또 잘하는 것이 있나?”
“예? 아…… 글쎄요. 딱히 떠오르는 것은……. 제가 잘하는 것은 전하께서 아시는 게 전부일 것입니다. 의술이나, 병법 같은 것들 말입니다. 아, 그리고 활도 그럭저럭 다루는 편입니다.”
갑작스런 질문에 당황하는 것도 잠시, 옥환이 생각 끝에 그렇게 대꾸했다. 승헌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금야 선생께서 신궁이라는 얘긴 들어본 것 같군.”
“신궁까지는 절대 아닙니다. 아마 활도 전하께서 훨씬 잘 다루실 테지요. 그저 활쏘기를 좋아해서 어렸을 때부터 자주 즐겼을 뿐입니다.”
옥환의 대답을 머릿속에 잘 기억해 둔 승헌이 이내 다시 물었다.
“그럼 못하는 것은?”
“못하는 것이요? 그야 많지요. 아시다시피 술도 하지 못하고, 그림도 별로 잘 그리는 편은 아닙니다. 그리고…… 어렸을 때 노래를 불렀다가 부친께 음치라고 놀림을 받기도 했었습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린 옥환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세월에 묻혀 돌아가신 부모님의 얼굴은 흐릿했으나, 그들과 함께했던 시간의 따스함은 여전히 옥환의 가슴 깊은 곳에 남아 있었다. 승헌 역시 웃으며 옥환의 이야기를 받아 주었다.
“뭐든 잘할 것 같은 그대가 의외로군. 그대의 어렸을 때라…… 그때도 이렇게 고왔나?”
“박색은 아니었겠지요. 서당에 나가면 저를 보러 사람들이 줄을 설 정도는 되었습니다.”
옥환의 뻔뻔스러운 자랑에 승헌이 웃음을 터뜨렸다. 옥환 역시 작게 쿡쿡거렸다.
“그때는 모두 그대를 옥아라고 불렀겠군?”
“아…….”
문득 저 때문에 벌을 받은 금현이 떠오른 옥환이 잠시 머뭇거렸으나, 승헌의 눈치로 보아 딱히 금현을 염두에 두고 말을 꺼낸 것 같지는 않았다. 옥환은 편하게 대답했다.
“친한 동무들끼리는 그리했습니다만, 보통은 설 공자라고 불렀습니다.”
“설 공자라니. 그대에게 참 잘 어울리는군. 그대는 아직도 풋풋하니 소년 같지 않나.”
옥환이 민망함에 대꾸하지 않자 승헌이 몸을 돌려 옥환을 보고 말을 이었다.
“옥아도 무척 잘 어울려. 얼마나 귀하고 어여쁜 자식이었으면 옥 같은 아이라 지었을까.”
“부모에게 금지옥엽 아닌 자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옥환은 공연히 멋쩍어서 무심한 척 대꾸하고는 천장만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하나 승헌은 옥환을 보며 “옥아. 옥아라…….” 하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옥아.”
승헌의 부름에 옥환이 약간의 주저함을 느끼면서도 “예.” 하고 대답했다.
“옥아.”
“……어찌 자꾸 부르십니까?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지금 듣기에는 참으로 어색하고 낯부끄럽습니다. 그만하십시오.”
승헌은 나직이 웃고는 옥환의 손을 쥐었다.
“내 아명은 환랑이야.”
“…….”
“칼 환鋎에 사내 랑郞을 써서 환랑. 우리 집안은 대대로 무가였거든.”
승헌이 옥환의 손바닥 위에 한자를 써 주며 설명했다. 옥환은 승헌의 설명을 들으며 생각했다. 어릴 때의 승헌은 어땠을까. 분명 대단한 장난꾸러기에, 골목대장 노릇을 자처했을 것이다. 매일같이 사고를 치고, 혼이 나고, 그럼에도 많은 아이가 따르는 다정한 아이였겠지.
“옥환. 언젠가…… 그대가 그 이름을 불러 주면 좋겠어.”
승헌의 유년시절을 상상하던 옥환은 승헌의 갑작스러운 청에 당황해서 그를 보았다. 어둠에 잠긴 그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으나, 빛을 반사하는 그의 눈동자는 옥환의 시선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전하가 아니라, 왕이 아니라, 그냥 한 사내로.”
아명을 부르는 것은 어릴 적부터 알고 있던 사이나 그만큼 가까운 사이에 가능한 일이었다. 옥환은 승헌의 첩이기는 했으나, 신분상 감히 왕의 아명을 부를 수는 없었다. 승헌 역시 그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알면서, 청하는 것이다. 옥환의 앞에서 왕이 아닌 그저 한 사내가 되겠다고…… 그러니 이름을 불러 달라고.
“그대는 내게 금야 선생도 태사도 아닌 옥환이니, 언젠가 그대도 나를 환랑으로 봐 주었으면 좋겠어. 이름까지는 그대의 그 고지식한 성격에 무리일 걸 알아서 나도 많이 양보한 거야.”
옥환은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승헌은 재촉하지 않았다. 어쩌면 영원히, 옥환의 입에서 환랑이란 이름을 듣는 일은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괜찮았다. “언젠가”라는 막연한 약속으로라도 묶일 수 있다면. 그래서 옥환이 가끔 머릿속으로 그 이름을 떠올려 준다면 그것으로 족했다.
“잘 자, 옥환.”
평소와 같은 인사를 건네고 승헌은 눈을 감았다. 옥환도 따라서 눈을 감았다. 잡은 손에서 서로의 온기를 느끼며 두 사람은 그렇게 잠이 들었다.
***
옥환이 승헌과 함께 보내는 밤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어느 날, 조회를 위해 정전에 온 옥환은 예부상서와 그 주위에 모인 문관들의 대화를 듣고는 가슴이 철렁했다.
“전하께서 다행히 제 딸아이를 퍽 마음에 들어 하시는 모양입니다. 곧 정식으로 혼담이 오갈 것 같습니다.”
“아이고, 경하드립니다, 예부상서.”
“곧 국구의 자리에 오르게 되시겠습니다그려.”
예부상서는 문관들의 부러움 섞인 축하를 받으면서도 아직은 시기상조라며 말을 아꼈다. 하나 만면에는 기쁨이 가득해 그 역시 자신의 딸이 왕후가 될 것임을 의심하지 않는 모양새였다. 머뭇거리던 옥환이 서먹하기는 해도 같은 문관이라는 생각으로 축하를 해 주려 예부상서에게 다가섰다.
“예부상서. 일전에 따님을 뵈었는데 몸가짐이 바르고 용모가 아리따워 그야말로 국모의 상이었습니다. 곧 경사가 있을 듯하니 저도 서국의 신하로서 참으로 다행스럽습니다.”
“……예, 뭐어…….”
내키지 않는 것을 참고 억지 인사를 건넸더니 예부상서는 뭐가 불만인지 마뜩잖은 표정을 지었다. 옥환이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는 상황을 주시했으나, 어느새 그의 곁에 있던 다른 문관들도 어색해하며 빠르게 자리를 피했다.
불현듯 자신이 홀로 동떨어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옥환은 마침 승헌이 오는 바람에 그 의문을 해결하지 못하고 조회를 시작해야만 했다.
조회가 파한 후, 예부상서와 그의 측근 문관들은 혹여 옥환이 말을 걸 것 같았는지 이번에도 빠르게 흩어져 버렸다. 혹 중서령이 자신에 대한 소문을 뿌렸나? 아니면 자신이 모르는 어떠한 사건이 있었을까? 상황을 파악하려 생각에 잠긴 채 걷던 옥환은 물씬 풍기는 풀 냄새에 고개를 들었다. 너무 깊게 생각에 골몰했던 것인지, 처소가 아닌 후원으로 발걸음을 한 모양이었다.
어느덧 여름이 성큼 다가와 후원도 녹빛으로 물들고 있었으나, 옥환은 혹 아직 다 지지 않은 복사꽃이 남아 있지 않을까 하여 후원을 돌아다녔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볕이 적게 드는 그늘진 한구석에, 마치 철을 잊은 듯 화려하게 피어난 복사꽃을 발견했다.
옥환은 웃으며 그곳으로 다가가 가지에 손을 뻗었다. 옥환의 손길에 꽃잎이 팔랑팔랑 떨어졌다.
은은한 꽃향기를 맡는 옥환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저 때가 되면 곱게 피어나서는 온갖 시름을 다 잊게 해 주니 마음을 위로하는 데엔 이만한 것이 없었다. 옥환은 가지를 꺾어다 처소에 꽂아 놓을 요량으로 손에 힘을 주었다. 하나 가지가 옥환의 키보다 높은 위치에 있어서인지 힘을 주어 꺾기가 쉽지 않았다. 옥환이 소매를 걷고 양손으로 가지를 잡는데, 돌연 굵은 팔 하나가 불쑥 솟아 나와 가지를 쉽게 꺾어 버렸다.
“이게 그리 갖고 싶었나?”
“저, 전하.”
승헌이 꽃이 달린 가지를 든 채 빙그레 웃었다. 옥환은 요동치는 고동 소리를 들으며 한 걸음 물러났다. 아까까지만 해도 은은했던 꽃향기가 현기증이 일 만큼 강해진 기분이 들었다.
“어찌할까. 이것을 줄까 말까.”
“……제가 먼저 꺾으려던 것입니다.”
“먼저 가진 사람이 임자지? 게다가 여긴 내 후원이야. 멋대로 가지를 꺾어 가도 된다고 누가 말했나?”
확실히 왕궁의 주인이 승헌이니 옥환은 반박할 말이 없었다. 옥환이 밉지 않게 흘겨보자 승헌이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하는 척하더니, 이내 선심 쓰듯 말했다.
“정 그리 갖고 싶다고 하니…… 좋아. 환랑이라고 부르면 주도록 하지.”
“……예……?”
“저번에 알려 주었지 않나. 싫으면 별수 없고?”
승헌은 옥환이 곤란해하는 반응을 보고 싶어 장난삼아 한 말이었으나, 옥환은 미간을 모은 채 심각한 얼굴로 침묵했다. 승헌은 속으로 낄낄거리며 가지를 흔들고 놀다가, 적당한 때가 되면 못 이긴 척 주기로 마음먹었다.
“어때. 싫은가? 못하겠어? 이걸 어쩌나. 난 이걸 가져가서 침전에 두려고 하는데, 하면 그댄 이걸 보러 매일매일 내 침전으로 와야겠군.”
승헌의 짓궂은 농담에 옥환의 표정이 굳어졌다. 하나 옥환이 이토록 진지한 것은 고작 나뭇가지를 갖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환랑. 그렇게 불러 달라고 했다. 언젠가, 언젠가여도 괜찮으니 불러 달라고.
옥환은 그 뒤로 매일 밤, 그의 이름을 종이에 쓰고, 속으로 몇백 번을 불렀다. 환랑. 환랑……. 하나 승헌의 앞에만 서면 그 간단한 두 글자는 입술에 대롱대롱 걸려 있다가 땅으로 툭 떨어지고 말았다. 소리가 되지 못한 “환랑”은 그렇게 한없이 발치에 쌓여만 갔다.
옥환도 알고 있었다. 그와 이렇게 지낼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다는 걸. 언젠가…… 승헌이 말하는 언젠가가 되면, 옥환은 부르고 싶어도 그의 이름을 부를 수 없게 될 것이다. 승헌이 지금껏 자신에게 해준 걸 생각하면 이름 한 번 불러주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승헌 본인이 허락한 일이 아니던가.
옥환은 입술을 가볍게 물었다가 떼었다.
“……환랑.”
환랑. 마음속으로는 수없이 불렀고 손으로는 수없이 적었던 그 이름은, 처음 입 밖에 내는 것임에도 그리 어색하지 않았다. 하나 설마하니 옥환이 이렇게 쉽게 제 아명을 불러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는지, 승헌은 크게 놀라서 옥환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는 곧, 그 어느 때보다 기쁜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승헌이 소리 내어 웃자 나뭇가지에 달린 꽃잎이 몇 장 흩어졌다. 옥환은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 모습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환랑. 그렇게 부르자 승헌은 마치 꽃이 피듯 웃어 주었다.
옥환은 그 순간 가슴이 저리고 아파서, 저도 모르게 가슴을 움켜쥐었다.
“……환랑…….”
환랑이라 부르고 군왕의 탈을 벗기니,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제 가슴속에 피어난 복사꽃의 주인은 승헌이었다. 그곳에 돌연 찾아온 봄의 주인도, 이 아픔의 주인도 모두 그였다.
그를 만날 때마다 꽃향기가 나던 이유와, 문아원을 보며 당치도 않은 투기를 품었던 이유와, 그를 환랑으로 부르고 싶었던 이유도 전부 그였다.
설옥환이, 견승헌을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아. 어찌 이럴 수가 있나.
줄곧 외면하고 있던 진실과 마주하자 옥환은 그만 다리에 힘이 빠져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승헌은 놀라서 얼른 옥환을 부축해 일으켰다.
“옥환, 괜찮은가?”
“……예. 신경, 신경 쓰실 것 없습니다. 제게 신경 쓰지 마십시오.”
거리를 두려는 것처럼 옥환은 되풀이해서 말했으나 승헌은 그를 향한 걱정에 미처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옥환은 얼른 두 다리에 힘을 주고 섰다. 미친 듯이 뛰는 심장 소리가 승헌에게 들리진 않을까 겁이 났다.
“어찌 그래? 어디 안 좋아?”
“아닙니다. 그냥 순간 좀 중심을 잃어서. 정말 괜찮습니다.”
미심쩍은 얼굴을 하면서도 옥환의 단언에 일단 그를 놓아준 승헌은 이윽고 들고 있던 꽃가지를 내밀었다.
“처음부터 그대에게 줄 생각이었어. 이리 말하면 화낼 텐가?”
옥환은 고개를 가로젓고는 가지를 받았다. 승헌은 씩 웃고는 옥환의 어깨에 내려앉은 꽃잎을 떼어 냈다.
“다행이야.”
“……무엇이…… 말입니까?”
자신의 상황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승헌의 발언에 옥환이 고개를 들어 물었다.
“모르겠어. 다행인 일이 너무 많거든.”
거기까지 말한 승헌은 멀리서 자신을 찾는 환관의 목소리에 짧은 한숨을 뱉었다.
“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
승헌은 적잖이 아쉬운 얼굴로 옥환의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다가 충동적으로 말했다.
“그대를 서국에 데려온 게 제일 다행이야.”
“…….”
“그러니 전에 내가 한 말은 잊어. 그건…… 서국 왕이 한 말이고, 이건 환랑이 하는 말이니까.”
승헌은 마지막으로 옥환의 뺨을 한 번 쓰다듬고는 빠르게 멀어졌다. 옥환이 그 자리에 멀거니 서 있자 얼마 가지 않아 환관 하나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전하께서 태사를 처소로 모시라고 하셨습니다. 곧 태의도 당도할 것이니 어서 돌아가시지요.”
“태의? 전하께서 나를 진맥하게 하시라던가?”
“그렇습니다.”
참으로 걱정도 많은 인사였다. 자신이 의원인데, 또 의원을 불러 보게 할 필요가 어디 있단 말인가. 그리고 무엇보다 옥환은 왜 자신이 승헌의 앞에서 주저앉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승헌을 사랑한다. 벽국의 재상인 자신이 적국의 왕인 그를 사랑하게 되고 말았다.
그 외의 세상 그 무엇이 천하의 설옥환을 주저앉힐 수 있겠는가. 옥환은 설레고, 또 그 설렘에서 혐오감을 느끼는 제 마음을 어쩌지 못했다.
그는 무의식중에 승헌이 준 복숭아꽃 가지를 꼭 쥐었다. 가지에서 풍기는 꽃향기가 이 마음이 착각이 아님을, 이 모든 상황이 꿈이 아님을 일러 주고 있었다.
***
“태사.”
조회를 무슨 정신으로 끝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옥환은 그저, 신하들을 내려다보는 승헌을 넋 놓고 쳐다보지 않으려 애를 쓰는 게 고작이었다. 석연찮은 일부 문관들의 태도도 신경 쓰이지 않았고, 저를 힐끔거리는 백고나 문하시중의 시선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 마음을 어찌 다잡아야 할까. 이 감정을 어떻게 하면 없던 것으로 할 수 있을까? 옥환은 내내 그런 생각만 하며 발끝을 보고 걸었다. 해서 문하시중이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제게 말을 걸 때까지, 그가 온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태사.”
“아, 문하시중.”
문하시중은 옥환의 표정을 유의 깊게 살피더니 이내 신중하게 물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하십니까? 혹…… 예부상서 때문이십니까?”
“예?”
예부상서 따윈 옥환의 안중에도 없어진 지 오래였으나, 그렇다고 솔직히 말할 수도 없었으므로 옥환은 문하시중의 오해를 그대로 두었다. 이윽고 문하시중은 주위를 살피더니 이내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최근 예부상서의 태도가 달라진 것을 태사께서도 눈치채고 계시겠지요. 큰 경사를 앞두고 저이가 왜 저러나 싶으실 겁니다.”
“……문하시중께서는 그 연유를 알고 계시는 겁니까?”
문하시중은 난처한 듯 미간을 좁혔으나 이내 곧 “그것을 알려드리려고 쫓아온 것입니다.” 하고 운을 뗐다.
“그것이…… 전하께서 매일 밤 태사의 처소를 찾으신다는 이야기가 신하들 사이에도 퍼져서 말입니다. 아무래도 딸아이의 혼사가 걸려 있는 문제니 예부상서도 그냥 넘길 수는 없었겠지요.”
옥환은 “아…….” 하고 말끝을 흐릴 뿐 섣불리 입을 열지 못했다. 승헌도 나름 조심한다고 모두가 잠든 뒤에나 자신을 찾아왔으나, 홀로 지내는 옥환의 처소에 다른 이가 묵고 간 흔적을 완전히 감출 수는 없을 터였다. 게다가 승헌을 모시는 태감이나 옥환 처소들의 하인들도 그 사실을 알았으니, 아무리 그들의 충심이 깊다 해도 말이 새어 나가는 것을 막기란 힘들었다.
“……전하께서 아직도 태사를 그리 총애하시니, 예부상서도 딸아이의 장래를 생각하면 걱정을 안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이의 태도를 너무 고깝게 여기지는 마십시오, 태사. 저도 딸이 있어 압니다만 아비의 마음이란 것이 그렇습니다. 태사가 미워서 그런 건 아니니 곧 가라앉을 것입니다.”
옥환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그저 사실을 전해 준 문하시중에게 고맙다는 인사만 전했다.
그 뒤 처소로 돌아온 옥환은 승헌에게 더 이상 저를 찾아오지 말라고 해야 할지 오랫동안 고민했다. 가진 것이라고는 영원을 약속받을 수 없는 승헌의 관심과 호의뿐인데 그마저도 승헌과 평생을 함께할 배필에게 주어야 한다는 것이 억울하고 원통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은데도 옥환의 마음은 주인의 말을 듣지 않았다. 아니, 그의 마음의 주인은 더 이상 그가 아니었다.
하나 옥환은 뼛속까지 정치가였다. 나라를 맨 앞에 두고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아무리 승헌을 향한 자신의 감정이 예사롭지 않다는 걸 알았어도, 제 욕심만을 내세울 수는 없었고 그렇게 해본 적도 없어 어찌하는 줄도 몰랐다.
가족을 잃고 난 뒤로 옥환은 많은 일을 참아야 했고, 난세에 뛰어든 뒤로는 대의라는 이름하에 자신의 감정을 수없이 죽여야 했다. 그렇게 수십 년을 살아온 옥환은, 이제 와 제 몸을 소리 없이 태우는 이 연심을 어찌 다루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하물며 승헌은 적국의 왕이었으니, 그에게 남다른 마음을 품은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또 참았다. 이것은 제게 내리는 벌이라고 생각하면서.
이윽고 옥환이 침울한 표정으로 승헌에게 이제 밤에 처소로 오지 마시라는 서찰을 써 내려갔다. 하인의 편에 그것을 보낸 옥환은 얼마 후 승헌에게서 온 답신과 함 하나를 받았다. 옥환은 먼저 답신을 읽었다. 그 안에는 옥환의 뜻대로 더는 밤에 찾아가지 않겠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옥환은 승헌의 주저 없는 결정에 상처를 입었으나, 애써 담담한 척하며 이어지는 서찰의 내용을 읽었다.
‘다만 그대가 또다시 잠을 설칠까 걱정이 되어 도움이 될 만한 것을 동봉하니, 모쪼록 나라고 생각하고 잠들 때 사용하도록 해.’
옥환은 환관이 들고 온 작지도 크지도 않은 함을 열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이것은…….”
승헌이 보내온 것은 연꽃 모양의 고급스러운 향로와 향이었다. 옥환이 향로를 보고 있자 선물을 가져온 환관이 첨언했다.
“전하께서는 향로와 함께 수면에 도움을 주는 향을 함께 보내셨습니다. 아랫것들에게 일러두겠으니 침수에 드실 때 사용해 보십시오.”
“……아. 감사하다고 전해 주겠나?”
“예, 태사.”
환관이 물러간 뒤 향로를 침상 옆 잘 보이는 곳에 둔 옥환은 승헌이 보내온 서찰을 고이 접었다. 문득 보니 어느덧 서랍 안에 모아둔 승헌의 서찰이 꽤 되었다. 처음엔 명색이 군왕이 준 것이라 함부로 할 수 없어 따로 둔 것이었는데, 시간이 흐르며 그의 힘 있는 필체를 흠모하게 되었고, 그 후에는 종이에 배인 그의 향기를 그리워하게 되었다.
‘이리 마음 가는 줄도 모르고, 나도 참으로 둔하구나.’
잠시 모아 둔 서찰을 내려다보던 옥환은, 서랍 안이 지저분한 것은 좋지 않다고 제게 변명하고는 이내 그것을 하나하나 펴 보고 가지런히 정리하기 시작했다. 한창 정리를 하던 그때, 못마땅한 것이 역력한 목소리가 옥환의 집중을 깨트렸다.
“무슨 귀하디귀한 보물이라도 다루듯 하십니다?”
계평의 비아냥에 옥환이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최근엔 자신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데다가 전부터 자신과 승헌의 사이를 의심하고 있던 그였으니, 이젠 그 의심이 확신이 되었다 해도 할 말이 없었다. 옥환도 더는 자신의 마음을 부정할 수 없었다. 부정하면 할수록 제 대책 없는 감정은 승헌에게로 뻗어 나갔다.
하나 어찌 그럴 수 있을까. 주군이 제게 어떤 분이신데. 자신은 벽국을 배신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승헌을 향한 자신의 마음을 억누를 수도 없었다. 옥환이 최근 밥 한 술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여위어만 가는 것을 승헌은 악몽 탓이라고 여겼으나, 사실 그것은 옥환 본인의 죄책감 때문이었다. 적국의 왕을 마음에 품게 된 자신은 맛있는 것을 먹을 수도 없었고 즐거운 일을 해서도 안 되었다. 다만 승헌과 있을 때만큼은 그 죄책감마저 잊을 수 있었다. 그를 향한 마음이 벽국과 염완을 저버렸다는 죄책감보다 컸기에.
‘미친 것이다.’
미쳤다고밖에 볼 수 없었다. 속으로는 모질게 자신을 책망하면서도, 옥환은 지극히 태연한 얼굴을 가장하고 계평에게 말했다.
“전하보다는 나를 귀하게 여겨 주시는 분이다.”
“허.”
계평은 자신이 방금 들은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옥환을 노려보았다. “뭐라고요?” 하며 어처구니없다는 어조로 몇 번씩 되묻기까지 했다. 옥환은 승헌의 서찰을 서랍 안에 넣으며 차분히 대꾸했다.
“전하께선 나를 버리고 싶어 하시지 않으냐.”
“해서, 이젠 서국에 충성하겠다 이겁니까?”
그럴 리는 없었다. 그럴 수도 없었고. 하나 옥환은 자포자기의 심정이었다.
“더는 전하께 내가 필요 없다면…… 나는 그냥 이렇게 살았으면 싶구나.”
“허튼소리 하지 마십시오!”
옥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윽박을 지른 계평은 잠시 감정을 추스르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하나 질문을 던지는 그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다.
“이렇게라니요. 세상을 바꾸는 일을 사명으로 여기시지 않았습니까. ……정녕 서국 왕에게 마음이라도 주셔서 이리 멍청하게 구시는 겁니까?”
옥환은 침묵했다. 언제까지고 계평에게 숨기고만 있을 수도 없었으나, 그렇다고 또 자랑스레 얘기할 일도 아니었다. 다만 옥환은 거짓말을 하는 것에 지쳤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비밀을 누구에게든 터놓고 싶은 충동도 들었다. 주변 사람들의 의심과 견제를 버티는 것과, 승헌의 혼사와, 그 혼사를 막지 못하는 자신까지. 옥환의 신경은 닳을 대로 닳은 상태였다.
옥환의 무언을 긍정으로 판단한 계평의 눈빛에서 독기가 뿜어져 나왔다.
“하, 나 참 우스워서! 다리 벌려 얻은 하룻밤 정에 인생을 망칠 셈입니까? 정녕 서국 왕이 승상을 아끼기라도 하는 것 같아요? 적국의 왕입니다! 그런 자와 몸을 섞은 것도 모자라 정까지 주다니, 한 나라의 재상이라는 자가 천박하기가……!”
말을 잇던 계평은 옥환이 집어던진 벼루에 어깨를 맞았다. 검은 먹물이 마치 피처럼, 혹은 터져 버린 감정의 둑처럼 그의 몸을 비롯한 온 사방에 튀었다.
“말을 삼가지 못하겠느냐!”
벼루에 맞은 제 어깨를 쥐고 옥환을 표독스럽게 노려보던 계평이 순식간에 달려와 옥환의 목을 틀어쥐었다. 놀란 옥환이 발버둥을 쳤으나 어느새 계평이 품속에서 꺼낸 단도가 그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저를 찌를 듯한 서슬 퍼런 칼날에 옥환은 저항을 멈춘 채 싸늘한 눈빛으로 계평을 응시했다. 계평 역시 분노로 치를 떨면서 옥환을 죽일 듯이 쏘아보았다.
그렇게 소리 없는 대치 끝에, 서서히 흥분을 가라앉힌 계평이 물었다. 여전히 칼은 거두지 않은 채였다.
“그래서…… 당신은 전하를 배신할 셈입니까?”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라고 목이 잡혀 기침을 해대면서도, 옥환은 그 기세가 조금도 누그러들지 않은 어조로 말했다.
“전하께서 나를 죽이라고 하셨느냐?”
“제 말에 대답하십시오!”
“……말하고 말하지 않고 할 필요가 있더냐. 나는 전하를…… 염요를 잘 안다. 혼자서도 승승장구하고 계시니, 이제 적국에 보내 놓은 나는 눈엣가시겠지. 행여 공이라도 세워 나중에 벽국으로 귀환하기라도 하면 큰일이 아니더냐. 혹은 변절을 할 수도 있고.”
제 주인의 명이 아니라면 아무리 화가 났더라도 이런 무모한 짓을 벌일 리 없는 계평이었다. 그렇기에 옥환도 반신반의한 상태로 제 추측을 계평에게 확인한 것이었다. 계평의 표정으로 보아 자신의 추측은 사실인 모양이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니, 얼마 전 악몽을 꾼 날 문 앞에 서성이던 그림자도 저를 죽이러 왔던 계평이었나 싶었다.
하나 그런 계평이 제 목을 단숨에 베지 않는 것은 그에게도 망설임이 있기 때문일 터였다. 옥환은 칼을 쥔 계평의 손을 목에 갖다 댔다. 흰 살갗이 베이고 피가 흐르기 시작하자 계평이 눈에 띄게 당황했다.
“하면 죽이거라. 그것이 전하께서 내게 내린 마지막 명이라면…… 한때는 제자였던, 그리고 주군의 아들이자 내 조카나 마찬가지였던 아이가 바라는 일이라면 기꺼이 죽으마.”
목에서 흐르는 피의 양이 늘었다. 옥환은 눈을 감았다. 차라리 이렇게 끝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벽국을 배신하지도 않고, 승헌을 향한 마음을 접을 수도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승헌이 혼인해서 다른 이와 행복해지는 모습을 볼 바에야…….
‘한데도 마지막 이 순간까지 당신이 보고 싶으니 어찌하면 좋단 말입니까.’
계평이 칼을 높이 드는 모습을 보며 옥환은 눈을 감았다. 그러자 어둠 속에서 승헌의 얼굴이 떠오르는 것 같기도 했다.
마치 잠이라도 든 것처럼 평온하기만 한 옥환의 가슴에 칼을 내리꽂으려던 계평은, 무언가를 보고는 멈칫했다. 죽음 앞에서도 한없이 초연하고 대담하기만 했던 옥환의, 소매 아래 반쯤 가려진 손이 가늘게 떨고 있었다.
계평은 이를 악물었다. 염요의 명이었다. 옥환을 죽여야 했다. 진작 내려온 그 명을 곧바로 수행하지 못하고 지지부진하게 끌어왔다. 왜 제게 이런 주저함이 존재하는지 계평 본인도 이해할 수 없었다. 옥환이 고신을 당해 죽을 뻔한 자신을 지극정성으로 치료해 줘서? 그깟 정에 흔들릴 정도라면 염요가 자신을 서국에 보내지도 않았을 것이고 왕의 호위가 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저…… 목숨을 바쳐 벽국에 충성해 온 충신의 최후가 이런 모습이라는 것에 회의감이 느껴진 탓이었다. 결국 신하란 한낱 주인의 말에 불과한가. 그의 변덕에 따라 언제든 죽을 수 있는. 그럼에도 신하란 이유로 죽음을 받아들이고 그 두려움조차 감춰야만 한다. 그 모든 것이 계평의 눈에는 허탈하게만 보였다.
‘하나 이자는 적국의 왕을 마음에 품었다. 그 감정은 필시 화를 자초하겠지. 여기서 죽여야만 한다.’
계평은 의지를 다졌다. 염요의, 왕의 명령이었다.
“……!”
보지 않아도 칼날이 날아오는 기척에 옥환이 입술을 물었다. 아. 차라리, 승헌에게 혼인하지 말아 달라고 해 볼 것을. 짧은 후회가 스쳐 갔다.
“망할!”
콰직, 날붙이가 무언가에 박히는 소리와 함께 옥환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하나 예상했던 고통은 주어지지 않았고, 계평의 흐트러진 숨소리만이 짙게 깔린 적막을 채웠다.
옥환이 눈을 뜨자 계평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고, 제 얼굴 바로 옆에 박힌 칼날만이 보였다. 옥환은 잘 벼린 칼날에 비치는 자신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쓰게 웃었다.
죽지 못했다. 아쉬움과 안도감이 동시에 들었다.
옥환은 느릿느릿 일어나 옷깃을 적시는 피를 손으로 닦아 냈다. 그때 마침 뛰쳐나가는 계평을 보고 무슨 일인가 싶어 걱정이 든 하인이 옥환을 찾으며 방 안으로 달려왔다. 하인은 옥환의 목에 생긴 상처와 바닥에 박힌 흉흉한 칼을 보고는 숨을 삼켰다.
“태, 태, 태사! 괜찮으십니까?! 서, 설마 계평 그자가…….”
“아무 일도 아니니 호들갑 떨지 말게. 괜한 소문도 내지 말고. 알겠나?”
“하지만……!”
“계평에겐 내가 제대로 벌을 내릴 것이니 자네는 상관하지 말아 주게. 이건 부탁이 아니라 명령이야.”
옥환이 단단히 주의를 주자 하인이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이고는 옥환의 상처부터 살폈다.
“태사께선 아무 말 말라 이르셨지만 전하께서 보시면 그냥 넘어가시겠습니까?”
심각한 얼굴로 상처에서 흐른 피를 닦고 약을 발라 주며 묻는 하인에게 옥환은 잠시 멈췄다가 답했다.
“……전하는 당분간 내 처소에 드실 일이 없을 테니 괜찮을 것이네.”
“하나…….”
“아직 어린아이라 혈기가 왕성한 것을 어쩌겠나. 실수로 일어난 일이고, 스스로 한 짓에 놀라 도망쳤으니 지금쯤 크게 반성하고 있을 것이야. 나중에 불러다가 혼을 낼 테니 자네는 입단속을 잘하게.”
여전히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듯 입을 삐죽거리는 하인에게 이내 옥환이 화제를 바꾸어 물었다.
“그보다…… 자네. 혹…… 술을 좀 구해다 줄 수 있겠나?”
“……예?”
난데없는 지시에 하인은 계평의 일을 승헌 쪽 태감에 고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던 것도 잊어버렸다. 옥환은 술을 못한다고 알고 있는 데다, 무엇보다 그 고매한 금야 선생과 술이라니 도저히 상상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무슨 심경의 변화인가 싶어 하인은 적잖이 난감했다.
“저…… 태사. 지금은 다치셨으니 술을 드시는 건 좋지 않을 듯합니다…….”
“아.”
옥환은 뒤늦게 자신이 꺼낸 말이 두서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멋쩍어하며 덧붙였다.
“당장 마시겠다는 건 아니네. 그냥…… 나중에, 좀 필요할 것 같아서. 되도록 약한 술이면 좋겠네. 아니…… 음, 그래. 그리해 주게.”
큰일이 있어서인지 횡설수설하는 옥환을 보며 하인이 근심 어린 시선을 보냈다. 최근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자지도 못하는 것을 보면 국혼과 관련해 아무래도 심사가 편치 않은 듯했다. 게다가 승헌이 매일 밤 옥환의 처소를 찾는다는 소문이 나서 예부상서가 탐탁지 않아 한다고 들었다. 여기서 치이고 저기서 치이니 아무리 저 굳건한 분이라 해도 힘에 부칠 만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죽하면 술을 찾으실까.’
하인은 최대한 좋은 술을 구해 드려야겠다고 다짐했다. 숙취도 적고 맛도 좋은 것으로. 이윽고 하인이 얼른 바닥에 꽂혀 있던 칼을 뽑아 숨기고는 물러갔다. 방금까지 칼이 꽂혀 있던 곳에 남은 자국을 보며 옥환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과연 계평이 포기할까? 그야 모를 일이었다. 하나 염요를 그리 끔찍이 여기는 계평이 그의 명을 어기면서까지 제 목숨을 보전해 준 것은 옥환에게는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었다.
죽음을 코앞에 두니 승헌이 보고 싶었고, 승헌에게 진심을 말하지 못한 것이 후회로 남았다. 하나 자신이 승헌을 본다고 과연 혼인하지 말라는 말을 할 수 있을지, 확신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해서 하인에게 술을 구해 달라고 했다. 술의 힘을 빌리면 혹…… 그것이 좀 쉬울까 싶어서.
‘설옥환, 설옥환. 네가 정신이 나갔구나. 정말로 미친 게지.’
옥환은 얼굴을 감싸 쥐었다. 자신답지 않은 어리석음에 헛웃음이 터졌다. 술이라니. 염요가 계평을 시켜 저를 죽이려 하는데, 승헌에게 혼인하지 말라고 청할 생각이나 하고 있다니. 정녕 목숨 아까운 줄도 모르는, 아니. 염완이 거둬 준 목숨을 허투루 쓰고 있는 스스로가 기가 찼다.
옥환은 승헌이 준 향로를 집어 들어 서랍에 넣으려다가 다시 멈칫하고는 그것을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하나 이 향을 피운다고 해서 과연 제대로 잘 수 있을지, 옥환은 영 자신이 없었다.
***
옥환의 자기희생에 가까운 노력에도 불구하고 예부상서의 옥환을 향한 경계심은 날이 갈수록 커져 갔다. 어찌나 예민하게 구는지, 종래에는 딸에게 벌써부터 회임에 좋은 약을 먹이고 있다는 소문까지 돌 정도였다. 물론 예부상서와 유난히 가까운 몇몇을 제외하면 대다수의 문관은 옥환에게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지는 않았다. 다만 그들 역시 종사宗社를 우려해 승헌이 하루라도 빨리 후사를 보길 원하고 있었기에, 제 군왕의 심중을 옥환이 흩트려 놓는다면 그들도 좌시하지만은 않을 터였다.
그리고 옥환을 향한 문관들의 여론이 변화하는 것을 의식한 탓인지, 승헌은 빠르게 문아원과의 혼약을 공표했다. 물론 옥환은 문관들의 견제 따위보다도 승헌의 혼사가 구체화 된 것이 훨씬 더 가슴 아팠다.
그의 혼사는 국가의 행사를 담당하는 예부와 궁중 내의 일을 관장하는 소부에서 함께 진행할 예정이었다. 그리고 마음이 급한 예부상서는 필시 국혼일을 최대한 앞당기려 하리라. 하나 승헌은 혼사뿐 아니라 쌓여있는 국무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양양에서의 전투와 그로 인한 부상으로 자리를 비운 동안 처리하지 못한 일이 산더미 같았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옥환이 그를 만나기란 쉽지 않았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옥환은 몇 번 하인을 보내 편전의 동태를 알아보라고 했으나, 돌아온 것은 승헌이 너무 바빠 환관들이 말도 못 붙이게 한다는 암울한 소식뿐이었다. 혼사를 직전에 둔 상황이니 환관들이 매사에 신중을 기하는 것은 당연했다. 지금 같은 때에 승헌이 옥환을 만나게 하면 예부상서와 몇몇 문관들의 불안감을 키우는 일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하나 그 탓에 옥환은 승헌에게 얘기를 꺼낼 기회를 좀처럼 얻지 못하고 있었다. 직접 출진하겠다는 승헌을 말리지 않은 것은 옥환 자신이었으니, 어찌 보면 인과응보라고 할 수도 있었다.
며칠 뒤. 하인이 구해 준 술병의 입구를 만지작거리던 옥환은 그것을 내려놓고 거울을 꺼내 제 목의 상처를 살폈다. 계평이 남긴 상처는 생각보다 깊어, 흉터가 사라지려면 며칠 시일이 더 걸릴 듯싶었다.
이 목의 상처를 낸 뒤로 계평은 어디로 처박혔는지 거의 모습을 내비치지 않았으나, 하인이 나중에 그를 만나 호되게 혼을 냈다고 한 것으로 보아 궁을 나간 건 아닌 것 같았다. 그 후 하인들은 승헌이 찾아오지 않아 우울해진 옥환을 신경 쓴 건지, 웬만하면 돌아가면서 온종일 옥환의 곁을 지켰다. 이런 상황에서는 계평도 옥환을 노리기가 쉽지 않을 터였다. 물론 암살에 능한 그였으니 마음만 먹으면 그까짓 일, 아주 불가능한 것도 아니겠지만.
옥환은 혹시라도 계평이 궁을 나가겠다고 한다면 무사히 탈출할 방편을 마련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나 그가 정녕 염요의 명을 완수하지 못한 채 궁을 나가려 할지는 미지수였다. 어쩌면 자신의 얄팍한 소망일 뿐일까.
“태사, 태사.”
문득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상념에서 깬 옥환은 무슨 일이냐 물었다. 주로 옥환의 식사를 챙겨 주던 하인이 활짝 웃으며 희소식을 전했다.
“오늘 전하께서 오신답니다. 이따 저녁 즈음 들르실 것이라고 태감이 알려 왔습니다.”
“다망하신 분이 무슨 일로 오신다던가?”
옥환이 기쁨보다도 먼저 걱정을 담아 묻자 하인이 대꾸했다.
“글쎄요. 태감도 별다른 말은 없어서. 처소에 오신 지 꽤 시일이 지났으니, 아무래도 태사를 뵈러 오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셔도 괜찮을지 모르겠군.”
옥환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아주 오랜만에 얼굴에 활기를 띠고 있었다.
그날 저녁, 전하께서 오시면 반드시 확인해 보실 거라는 하인의 으름장에 들어가지 않는 식사를 억지로 마친 옥환은 몸을 정갈하게 하고 승헌을 기다렸다. 해가 지고 달이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냈을 때쯤, 하인이 승헌이 왔음을 고했다.
“옥환.”
하인이 문을 열어 주기도 전에 제 손으로 냉큼 문을 열고 들어선 승헌은 다소곳이 인사를 올리는 옥환을 보고는 활짝 웃었다.
“잘 지냈나? 서방이 보고 싶지는 않았고?”
“예, 저는 잘 지냈습니다.”
옥환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여전히 희게 질린 옥환의 안색을 보고는 승헌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어찌 얼굴이 이리 까칠해? 내가 보낸 향이 별로 효과가 없었나? 밥은 제대로 먹고 있는 거야?”
“송구합니다. 날이 조금 더워서 그런 것이니 개의치 마십시오.”
“왜 매번 개의치 말라는 말만 하나. 얼음을 보내라고 해두지. 태의도 보낼 테니 진찰을 다시 받아 보고.”
옥환은 괜찮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일전 저를 찾아온 태의는 그저 체력이 약해져서 그렇다는 답만 내놓았을 뿐이었다. 하나 어찌 보면 그 말이 정답이었다. 죄책감과 연정에 무너진 마음이 몸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다. 옥환 역시 그것을 잘 알았으니 괜히 바쁜 사람을 오라 가라 할 필요는 없었다. 옥환의 고집을 잘 아는 승헌은 푹 한숨을 내쉬더니 푸념조로 말했다.
“원하는 게 있으면 제발 말을 해. 그대는 항상 참기만 하질 않나. 아무렇지 않은 척 시치미를 떼는 데도 달인이니 그대가 정말로 어떤지 나는 잘 몰라. 하니 부디 말로 해. 내 속 그만 태우고. 응?”
“송구합니다, 전하…….”
승헌은 미간을 찌푸린 채 걱정이 그득한 눈으로 옥환의 이곳저곳을 살피다가, 문득 그의 목에 난 상처를 보고는 험악한 얼굴을 했다.
“이건 또 뭐지?”
옥환은 아차 싶어 얼른 승헌에게서 한 발 물러나 옷깃으로 상처를 가렸으나 승헌은 그의 손을 떼어 내고 그를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자상이잖아.”
상처를 본 승헌이 그것이 날카로운 물건에 의해 난 것임을 눈치채고는 싸늘하게 말했다. 옥환은 고개를 숙였다.
“자상이라니요. 실수로 넘어지면서 긁힌 것입니다.”
“어찌 넘어지면 목을 긁히나? 게다가 긁힌 게 아니라 찔린 것인데.”
승헌은 매섭게 쏘아붙이고는 옥환의 하인들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옥환은 재빨리 승헌의 손을 끌어당겨 벌벌 떠는 하인들에게서 승헌의 시선을 돌렸다.
“전하. 이쯤하고 어서 가서 앉으시지요. 전하를 오래 기다렸습니다.”
제대로 하인들을 족칠 생각이었던 승헌은 옥환이 저를 기다렸다는 말에 금세 목적을 잊고 풀어진 얼굴을 했다. 마지막으로 경고하듯 하인들을 사납게 쏘아본 그가 별수 없이 웃으며 옥환을 보았다.
“그대에게 이리 약하니 큰일이야.”
옥환은 힘없이 웃었다. 승헌의 태도는 퍽 다정했으나, 그럼에도 그가 혼인하지 말라는 제 얘길 들어줄지 문득 자신이 없어져서였다.
생각해 보면 승헌은 항상 다정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쭉. 그의 심기를 크게 거스르지만 않으면 대체로 잘해 주었고, 혹 다투더라도 결국 사과하는 것은 승헌 쪽이었다. 하나 그런 다정한 그가 자신을 의심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아니, 그 다정함 속에는 언제나 깊은 불신이 혼재했다. 혼인하지 말라고 하면…… 이번에도 승헌은 그것에 정치적인 의미부터 부여할 것이다. 옥환은 그것이 걱정이었다.
하나 주안상 앞에 옥환과 마주 앉은 승헌은 내내 그의 뺨을 쓰다듬고 머리칼을 어루만지며 눈을 떼지 못했다. 여윈 얼굴이 안쓰럽고 눈 밑에 진 그림자가 애달팠으나 그럼에도 곱고 고운 제 정인이었다. 못 보는 사이에도 사랑은 수없이 피었고 그리움은 질 줄을 몰랐다. 그의 마음에는 지상보다 더 완연한 봄이 와 있었다.
이윽고 옥환이 승헌의 잔에 술을 따라 주었다. 사랑하는 이를 옆에 끼고 좋아하는 술을 즐길 생각을 하니 승헌의 얼굴에 절로 기쁨이 어렸다. 그러다 문득 위화감을 느낀 승헌은, 뒤늦게 옥환의 앞에 놓인 술잔을 발견하고는 의문을 표했다.
“그대는 술도 못하면서 어찌 술잔을 놓았어? 그놈의 하인들이 또 실수를 한 건가?”
“아닙니다, 전하. 지금껏 신하 된 도리를 저버리고 전하께서 홀로 술을 드시게 하였으니, 오늘은 두어 잔이나마 전하와 함께 마셔 보고 싶습니다.”
“나야 좋지만 그대는 술에 굉장히 약하다면서. 요새 몸도 안 좋은데 술을 마시고 더 나빠지기라도 하면 어찌하나? 괜찮으니 무리하지 마.”
“약한 술로 골랐습니다. 한 잔이라도 좋으니…….”
오늘따라 유독 평소와 달라 보이는 옥환의 태도에 고민하던 승헌은 이내 대답 대신 술잔을 입에 대었다. 그 행동을 거절이라고 생각한 옥환이 낙담하는데, 승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술인지 복숭아즙인지 알 수가 없긴 하군. 대신 조금만 마셔야 해.”
승헌이 그렇게 말하고는 옥환의 잔에 아주 조금 술을 따라 주었다. 옥환은 이걸로 입술이나 적실 수 있겠냐는 눈빛을 보냈으나 승헌은 완고한 태도로 술병을 등 뒤에 숨기기까지 했다. 옥환은 승헌에게 눈을 흘기면서도 그의 입에 안주를 넣어 주었다. 물론 독설을 날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제가 술병을 숨겼을 때는 그리 체통 없이 노발대발하시더니.”
“나하고 그대하고 같나?”
“다를 것은 무엇입니까? 같은 사내에, 나이도 비슷하고, 제가 전하보다 크게 뒤처지는 것도 없지 않습니까.”
옥환이 따박따박 던지는 말대꾸에 승헌이 크게 코웃음을 쳤다.
“그 나뭇가지 같은 가냘픈 몸으로 나보다 뒤처지는 게 없다니, 기가 찰 노릇이군.”
“전하에 비하면 그런 것이지 뭇 사내들에 비해 더 마르거나 왜소하지는 않습니다. 게다가 전하께서 못 보셔서 그렇지 전 말도 잘 타고 활도 잘 쏩니다.”
승헌은 웃으며 술을 한입에 털어 넣고는 옥환의 허리를 한 팔로 감싸고 말했다.
“그래도 그대를 전장에 내보내진 않을 거야.”
돌연 가까워진 거리에 옥환이 시선을 내리깔았다. 승헌에게선 미약한 술 향기와 함께 복숭아 향이 물씬 풍겼다.
“그대가 세상에서 제일가는 무인이라고 해도, 절대 내보내지 않을 거야.”
승헌은 옥환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의 체취와 섞인 향기를 맡으며 옥환은 잠시 눈을 감았다. 승헌이 조곤조곤 말하는 목소리가 더 선명해졌다.
“계속 여기 있어, 옥환. 내 나라에, 내 궁에…… 내 옆에.”
옥환은 대답하지 않았다. 침묵하는 옥환에게, 승헌은 문아원과의 혼약에 대한 비밀을 터놓아야 할지 고민했다. 혹여라도 옥환이 섭섭한 마음을 가지게 하면 안 될 것 같았다. 하나 옥환은 혼인을 목전에 둔 오늘도 그저 덤덤하기만 했다. 승헌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또 내가 괜한 기대를 했나.
‘그래도 그대가 거짓으로라도, 계속 곁에 있겠다고 해 주면 좋겠는데.’
하나 옥환이 다른 거짓말은 해도 자신의 마음을 속이지는 못하는 사람이란 걸 아는 승헌은 단념하듯 옥환에게서 떨어졌다. 대신 그는 이렇게 말했다.
“예부상서의 여식과 최대한 빨리 혼인을 올릴 생각이야.”
술을 마시지는 않고 술잔만 만지작대던 옥환이 그 말에 고개를 들었다. 승헌은 술잔을 기울이며 말을 이었다.
“날이 너무 더워지기 전에 처리하라고 일렀어. 그대도 참석해야 할 테니.”
한 잔이었던 술이 두 잔, 세 잔으로 연거푸 늘어나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던 옥환이 돌연 제 술잔을 들고는 찰랑이는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그러더니 놀란 승헌이 제지하기도 전에 잔을 다시 채워 또다시 들이켰다.
“옥환, 뭐하는 거야?”
승헌이 얼른 잔을 뺏어서 멀리 던져버렸다. 잔이 데구르르 구르다 문가에 가서야 멈춰 섰다. 술상의 한 지점만을 뚫어져라 보고 있던 옥환은 불현듯 승헌을 똑바로 바라보더니, 잔뜩 긴장한 어조로 말문을 열었다.
“전하.”
옥환의 부름에도 그의 몸 상태가 나빠지지는 않는지가 걱정인 승헌은 그의 이마에 손을 대 열이 없는지 확인하고, 얼른 물을 따라 내밀었다.
“전하. 전하…….”
“어찌 자꾸 불러. 혹 취한 것은 아니지?”
옥환에게 물을 먹여 준 승헌이 그제야 고개를 들어 옥환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 옥환은 극심한 긴장감을 느꼈다. 방금 물을 마셨음에도 입안이 바싹바싹 말라 갔다.
하나 옥환은 의지를 다지듯 이내 주먹을 강하게 쥐었다. 말해야 했다. 이 말을 하려고, 몸에 받지도 않는 술까지 마셨다. 혼인하지 말라고, 다른 사람에게 가지 말라고 해야 한다. 그의 혼례에 태연하게 참석할 자신은 도저히 없었다. 그러니 반드시 말해야만 했다. 하면 승헌은 묻겠지. 왜. 혼인하라고 한 건 너면서 왜 이제 와 이러느냐고.
‘당신을…… 나는, 당신이.’
긴장감에 머릿속으로 말이 정리되지 않았다. 하나 승헌을 잃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기엔 온몸을 짓누르는 감정의 크기가 너무 컸다.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말을 해야 했다.
“전하, 저는…….”
“왜?”
옥환은 눈썹을 찌푸린 채 되묻는 승헌을 멍하니 응시했다. 승헌이 화를 낼 것만 같았다. 또 무슨 꿍꿍이냐고, 내가 너의 꼭두각시인 줄 아느냐고 소리를 지를 것 같았다. 애물단지라고, 데려오는 게 아니었다고, 없느니만 못하다고…….
생각이 한없이 부정적인 방향으로 미치자 목구멍 역시 꽉 막힌 듯 소리를 내지 못했다. 왜. 왜 술을 마셔도 되지 않을까. 술이 너무 약했던 것일까? 옥환의 애타는 마음과는 반대로 두 사람 사이에는 침묵이 이어졌다. 옥환은 몇 번이고 입술을 달싹였으나 그의 목소리는 도통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잠시 평소와 다른 옥환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승헌이 돌연 실소를 터뜨렸다. 옥환이 당황한 얼굴로 승헌을 바라보는데, 승헌이 뜻밖의 말을 꺼냈다.
“내가 또 그대를 의심할까 봐 그래? 이젠 안 그럴 거야, 옥환.”
“……예?”
“억지로 혼인하는 것도 아니고, 그대가 이 상황을 종용했다고 생각하지도 않아. 내가 결정했고, 내가 원해서 하는 일이니…….”
아. 옥환이 멍하니 입을 벌렸다. 승헌이 결정했고, 원해서 하는 일.
그 한 음절 한 음절이 그의 심장에 송곳처럼 와서 박혔다. 그가 결정했고, 또 원해서…… 원해서.
승헌은 그때 본 그 아름다운 여인과 혼인하길 원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옥환의 눈앞에 지나칠 만큼 잘 어울리던 승헌과 문아원의 모습이 스쳐 갔다. 그 모습이 꿈에서 본 행복한 가족으로 변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승헌은 그렇게 하고 싶다고 말하는 것이다. 감히 자신 따위는 절대 이루어 주지 못할 바람이었다. 그와 제대로 혼인할 수도 없었고, 아이를 낳아 주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한 자신 따위로는.
승헌이 원하는 미래에 옥환은 없었다. 그것을 깨닫자 그간 옥환이 억누르고 억눌렀던 수많은 감정이 왈칵 치솟았다.
옥환을 안심시켜 주려 말을 잇던 승헌이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던 중 돌연 그의 표정이 충격으로 물들었다.
“옥환……?”
대경실색한 승헌의 부름에 옥환은 의문을 느끼다가, 문득 무언가가 제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감촉을 느끼고는 그곳에 손을 갖다 댔다. 뺨에 댄 손끝에서는 물기가 묻어나왔다. 한참이나 그것을 바라보다가 뒤늦게야 그것이 눈물임을 깨달은 옥환의 입에서 기운 빠진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 제가 왜…….”
왜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일까. 염완이 죽었을 때조차 울며 애도나 할 바에는 그가 남기고 간 일들을 처리하는 게 낫다고 생각해 단 한 방울도 흘리지 않던 것이다. 한데 왜, 이런 때에. 이게 정말 눈물이 맞기는 할까. 그도 그럴 것이, 옥환은 슬프지 않았다. 적어도 울 정도로 슬프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승헌이…… 원해서 혼인을 하는 것이고 더는 그것을 막을 수 없다고 해도…….
“옥환.”
하나 승헌이 애절한 목소리로 옥환의 이름을 부르며 그를 끌어안은 순간, 옥환의 눈에서는 마치 봇물이 터지듯 굵은 눈물방울이 수도 없이 떨어졌다. 그의 혼인이 속상해서가 아니었다. 하려던 말을 못했기 때문도 아니었다.
승헌의 품이 너무 좋아서. 생각한 것보다 훨씬, 훨씬 더 승헌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아서.
그의 미래에 자신이 있을 자리가 없다면, 차라리 미래가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만큼 그를 사랑한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어찌 사람을 이토록 좋아할 수가 있나. 어찌 한 사람을 향한 마음이 이리 가슴을 죄 문드러지게 할 수가 있어. 눈물과 섞여 흘러내린 연정은 승헌의 어깨를 푹 적셨다. 가슴이 아리고 아려서, 옥환은 제 가슴을 연신 두들겼다. 승헌이 그런 옥환을 멈춰 세우며 안쓰러운 얼굴로 말했다.
“옥환, 그러지 마. 어찌 내 애간장을 이리 다 태우나. 어찌 나를 이리 속상하게 해.”
옥환은 대답할 수 없었다. 제 목구멍을 막고 있던 것이 눈물과 함께 계속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오직 승헌에게 안겨 감당할 수 없는 연심의 크기를 절감하는 것뿐이었다.
승헌은 품 안에서 서럽게 흐느끼는 옥환을 어찌 달래야 할지 몰랐다. 옥환이 갑자기 왜 우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의 눈물을 본 순간, 머릿속은 새하얘지고 가슴은 갈기갈기 찢기는 듯했다. 그 강인한 이가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 앞에서 이토록 우는 것을 보면 비단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난 것이 틀림없었다. 하나 아무리 물어도 대답을 하지 않으니, 승헌은 답답함에 복장이 터질 것 같았다.
“옥환, 옥환. 나 좀 봐. 무엇 때문에 그래. 국혼이 문제야? 예부상서가 그대를 힘들게 하던가? 내 당장 그놈의 직을 파하고 멀리 유배를 보내 버릴 테니 울지 마.”
하나 승헌이 아무리 달래도 옥환의 눈물은 그칠 줄을 몰랐다. 쏟아지는 눈물을 소매로 훔치며 옥환은 애써 변명을 늘어놓았다.
“괜찮습니다, 전하. 제가…… 아마 술을 마셔서 그런 것 같습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금방 그칠 것이니…… 정말로 금방 그칠 것이니…….”
하나 말과는 달리 옥환이 흘리는 눈물은 더욱 불어나기만 했다. 그 애처롭기 그지없는 모습에 승헌이 옥환의 뺨을 쓸어 주다가, 그의 젖은 입술에 제 입술을 포개었다.
승헌의 입술이 닿자 마치 거짓말처럼 옥환의 눈물이 뚝 멈추었다. 하나 옥환은 그래서 더 슬펐다. 저를 울게 하는 사람도, 그치게 하는 사람도 전부 승헌일 수밖에 없어서.
그런 옥환의 흐트러진 마음을 달래듯 부드럽게 입술을 붙인 승헌은 이윽고 옥환의 윗입술을 가볍게 빨고 벌어진 입술 틈새로 혀를 넣어 입안의 점막을 차례대로 문질렀다. 승헌의 입맞춤을 받으며, 옥환은 할 수만 있다면 영원히 이 시간에 머무르고 싶었다.
“옥환, 울지 마.”
이윽고 입술을 뗀 승헌이 옥환의 속눈썹에 위태롭게 매달린 눈물방울을 닦아 주며 속삭였다. 하나 금방이라도 다시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모습에, 승헌은 가슴이 난도질을 당하는 것 같은 아픔을 느꼈다. 어떻게든 옥환을 달래 주고 싶었다. 그의 눈물을 멈출 수만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었다. 정말로 무엇이든.
승헌은 옥환에게 한 번 더 입을 맞추고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아무런 소용이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이 말을 하는 것이 두렵기도 했지만, 차라리 놀라기라도 해서 이 안타까운 눈물을 그쳐주길 바랐다.
이윽고 승헌이 금방이라도 녹아서 사라질 듯한 목소리로 옥환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대를 연모해, 옥환.”
그 순간 옥환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믿을 수 없다는 듯 승헌을 바라보았다. 돌연 심장이 방망이질을 해대기 시작했다. 혹 술기운에 듣고 싶은 말을 멋대로 들었다고 착각하는 것은 아닐까? 하나 옥환의 이마와 뺨에 연신 입을 맞춘 승헌이 옥환의 의심을 걷어내듯 분명한 어조로 제 마음을 고백했다.
“그대를 정말로 깊이 연모하고 있어. 그대가 누구라도 상관없어. 그대가 다른 이를 마음에 품었다 해도, 내가 죽을 때까지 그대의 마음속에 들어갈 수 없다 해도.”
“…….”
“그대의 눈물이 날 얼마나 가슴 아프게 하는지 그대는 모를 거야. 내가 그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도 모르겠지. 하나 그런 무정한 그대를 좋아해. 그러니.”
그러니 울지 마. 승헌이 쓴웃음을 지으며 옥환의 눈가에 고인 눈물을 마저 닦아내고는 마지막으로 길게 입을 맞추었다.
승헌의 상냥하지만 애정 어린 입맞춤을 받으며 옥환은 생각했다. 아. 이것이 가당키나 한 일일까? 눈앞의 사내가,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고 만인에게 영웅이라 칭송받는 한 나라의 왕이, 저를 사랑한다고 해 주었다. 그저 외사랑이어도 좋다며, 저를 보며 연심을 속삭였다.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은 그에게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이런 과분한 고백을 들을 자격이 없었다.
어쩌면 꿈일지도 모른다. 술에 취해서 꾸는, 간절히 바라마지않던 꿈. 하나 만일 그렇다 해도 상관없었다. 정말로 그렇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승헌을 사랑했다. 연모하고, 은애했다.
가슴이 벅차서, 터질 듯 부풀어서, 옥환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까 흘리던 것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눈물이었다.
다시금 옥환의 뺨이 젖어 가는 것을 눈치챈 승헌이 놀라서 서둘러 입술을 뗐다. 하나 옥환은 그런 승헌의 옷깃을 끌어당겨 제 입술을 꼭 붙였다. 갑작스런 상황에 눈도 감지 못한 승헌이 제게 접문을 하는 옥환을 바라보다가, 무언가를 깨닫고는 옥환의 허리에 팔을 감아 적극적으로 옥환을 밀어붙였다.
그렇게 뜨거운 입맞춤을 나누던 중 옥환의 몸이 승헌의 힘에 밀려 뒤로 쓰러졌다. 승헌이 옥환의 몸 위에 올라탄 채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서는 미약한 기대와 열기가 묻어났다.
“옥환. 그대의 마음속에 내가 들어갈 수 있겠나?”
옥환은 손을 뻗어 승헌의 뺨을 감쌌다. 그의 목구멍을 틀어막고 있던 덩어리는 일찍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이미 진작에 들어와 계셨습니다.”
일순 굳었던 승헌의 입가에, 서서히 미소가 번졌다. 그런 그에게 옥환이 그가 제게 해 주었듯, 흔들림 없는 어조로 전했다.
“연모합니다, 전하.”
당신께서 그렇듯이.
“아주 깊이…… 연모합니다.”
마침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두 사람이 서로를 끌어안았다. 절대 놓지 않을 것처럼 강하게.
***
옥환이 눈을 떴을 때, 그의 오른손은 승헌의 옷깃을 단단히 틀어쥐고 있었다. 승헌은 옥환에게 팔베개를 해준 채 불편한 자세로 잠들어 있었다. 옥환은 소스라치게 놀라 승헌의 옷깃을 놓고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갑자기 속이 메슥거리고 눈앞이 핑 돌아서, 그는 잠시 숨만 몰아쉬며 누워 있어야 했다. 그러는 새 전날의 기억이 하나둘씩 되살아났다.
어젯밤, 저를 안고 수도 없이 입을 맞춰오는 승헌을 겨우 밀어낸 옥환이 주저함을 누르고 물었다.
“문 소저와 혼인 하실 것입니까……?”
“그 혼인은 그대를 위한 거였어, 옥환. 그대가 싫다면 하지 않을 거야. 약속해.”
승헌의 대답은 거침이 없었다. 하나 그토록 기다리던 대답에 가슴이 한껏 부풀어 오르는 것도 잠시, 돌연 불안감이 치솟아 옥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갑자기 머리가 너무도 뜨겁고, 만사가 다 슬퍼졌다. 그는 승헌의 등을 마구 두들기며 소리쳤다.
“약속 말고, 맹세하십시오……! 약속은 툭하면 어기시지 않습니까!”
난생처음 보는, 생각지도 않았던 옥환의 생떼에 승헌의 얼굴 위에 당황이, 그리고 실망이 잠시 스쳐 갔다. 하나 그는 눈을 한 번 감았다 뜨고는 다정하게 대꾸했다.
“그래. 맹세해. 하늘에 대고, 부모님을 걸고, 맹세하지.”
방금과는 달리 그렇게 대답하는 승헌의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어려 있어서, 옥환은 서글픈 얼굴로 웃음이 나오냐고 따져 물었다.
승헌은 옥환의 이마에 다정하게 입을 맞추고는 말했다.
“옥환. 그대는 취했어.”
옥환은 승헌을 올려다보았다. 자신이 취했을 리 없었다. 아마도. 하나 옥환은 혹 승헌이 화나지는 않았을지 생각했다. 물론 승헌은 여전히 웃는 낯이었다.
“내일이 되면 그대는 다 잊을지도 몰라.”
“저는, 한 번 본 것은 안 잊습니다.”
이제는 딸꾹질을 하며 고집을 부리는 옥환의 모습에, 승헌이 한없이 귀여운 것을 보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잊지 마. 잊지 않겠다고 그대도 맹세해.”
“맹세, 합니다…….”
“그럼 됐어.”
승헌은 양팔로 옥환을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마치 요람에 누운 것만 같은 그 포근함에 옥환이 승헌의 가슴팍에 대고 뺨을 비볐다.
“이제 그만 자.”
승헌이 느리게 옥환의 등을 토닥였다. 옥환의 천근 같던 눈꺼풀이 금세 내려앉았다. 옥환은 입안으로 중얼거렸다.
“……연모합니다…….”
거의 개미 목소리만 한 소리였음에도 용케 알아들은 승헌이 “나도.” 하고 속삭였다. 옥환은 잠들기 직전, 승헌의 인사를 들었다.
“잘 자, 옥환.”
그 음성은 한없이 따스하고, 더없이 향기로웠다.
하나 술이 깬 지금, 그 모든 기억을 떠올린 옥환은 믿고 싶지 않은 자신의 행동에 그대로 굳어 버렸다. 주사라니, 살면서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짓을 하필 승헌 앞에서 벌이다니.
그렇게 한동안 누워서 수치심에 괴로워하던 옥환은 퉁퉁 부어 앞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눈을 문지르며 엉거주춤하게 일어났다. 한데 그때 등 뒤에서 제게 말을 거는 목소리에 어깨가 움찔했다.
“일어났나?”
옥환은 슬그머니 뒤를 돌아보고는 저도 모르게 무릎을 꿇고 앉았다. 승헌은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옥환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승헌의 따끔거리는 시선을 받아 내면서, 옥환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침묵했다.
“옥환.”
“다 기억합니다.”
한데 승헌이 말을 꺼내기 무섭게 갑자기 옥환이 선수를 쳤다. 승헌은 옥환의 발언에 놀라서 “뭐?” 하고 되물었다. 옥환은 딱 잘라 말했다.
“그리고 무르지 않을 것입니다.”
“…….”
이번엔 승헌 쪽에서 말이 없었다. 옥환은 손톱이 파고들 만큼 주먹을 힘껏 쥔 채 말을 이었다.
“제 마음을 의심하셔도 좋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든 상관없습니다. 비웃으셔도 되고, 화를 내셔도 다 감내하겠습니다. 하지만…… 맹세를 하셨으니…… 혼인하지 않겠다는 약조만큼은 지켜 주셨으면 합니다.”
시작과는 달리 끝으로 갈수록 기어들어 가던 목소리는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승헌은 옥환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귀를 기울였고, 단 한 단어도 놓치지 않았다. 놓칠 수 없었다. 그리도 애타게 기다리던 말이었기에.
승헌은 옥환의 무릎 위에 놓인, 꼭 쥔 주먹을 살살 달래 풀며 흡족하게 웃었다.
“그래. 그대도 맹세를 지켰으니까.”
그런 승헌의 미소를 넋 놓고 바라보던 옥환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승헌은 어느새 옷을 갖춰 입는 중이었다.
“저 때문에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셨으니 면목 없습니다. 조회에 가실 채비를 돕겠습니다.”
“됐어. 그대는 숙취에 시달리느라 힘들지 않나. 내가 알아서 준비할 테니 좀 더 누워서 쉬어.”
숙취라니. 제 인생에서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단어에 옥환의 귀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리고 애써 묻어 놓았던, 자신이 어젯밤 승헌의 앞에서 벌였던 행패도 다시금 떠올랐다. 울고불고, 그의 등을 때리고, 딸꾹질을 하며 제 기억력이 좋다고 우긴 것까지 전부 다.
옥환은 진심으로 쥐구멍이 있다면 들어가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최대한 침착함을 가장한 채 승헌에게로 다가섰다.
“괜찮습니다. 저도 곧 조회에 나가야 하니.”
“오늘은 나올 필요 없어.”
“툭하면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나오질 않아 문관들이 저를 바람만 불어도 쓰러지는 병약한 서생으로 압니다. 조회 또한 신하의 책무일진데 어찌 게을리하겠습니까?”
귀는 발갛게 물들인 주제에 표정은 자못 태연하게 짓고는 평소처럼 야무지게 대꾸하는 옥환을 보며 승헌은 도저히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입을 맞추지 않을 수도 없었다.
“전하……!”
아침 댓바람부터 제게 접문을 해대는 승헌의 행동에 옥환이 기겁을 하며 그를 나무랐다. 어젯밤에도 그가 셀 수도 없을 만큼 퍼붓는 바람에 아직도 입술이 쓰라렸다. 하나 승헌은 오늘 아침 이 나라 안, 아니 이 대륙 안에서 가장 행복한 사내임이 틀림없었다. 옥환의 매몰찬 거절도 그의 행복을 방해할 수는 없었다.
승헌은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피하는 옥환의 입술을 쫓아 몇 번이고 깊은 입맞춤을 나누었다. 끈질기게 거절하던 옥환도 숙취로 지친 것인지 아니면 승헌에게 덩달아 휩쓸린 것인지, 더는 저항하지 않고 승헌의 입맞춤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혀를 강하게 빨아당기며 젖은 점막을 문질러대던 승헌이 슬그머니 옥환의 허리를 쓰다듬었다. 숨이 차서 헐떡이던 옥환은 그 손길에 몸을 굳히긴 했으나 더는 승헌을 밀어내지 않았다. 승헌은 기세를 몰아 옥환의 옷깃을 열어젖혔다.
“옥환.”
힘이 빠져 침상 위에 앉게 된 옥환은 흐트러진 숨을 몰아쉬며 승헌을 올려다보았다. 승헌은 입었던 옷을 다급하게 벗고는 옥환의 위로 올라가 가슴을 살짝 밀었다. 옥환은 그대로 밀려 침상 위로 쓰러졌다. 옥환과 어울리는 푸른 비단옷의 벌어진 옷깃 사이로, 살짝 유두가 보였다.
승헌이 입술을 핥으며 몸을 낮추던 그때, 공교롭게도 환관이 승헌을 찾는 목소리가 두 사람을 방해했다.
“전하. 기침하셨사옵니까?”
그 말에 취한 듯 풀려 있던 옥환의 눈동자에 총기가 돌아왔다. 그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얼른 옷깃을 여몄다. 승헌은 환관이 서 있을 문밖을 쏘아보며 한껏 인상을 썼으나, 옥환의 반응으로 보아하니 은근슬쩍 안아 보려던 작전은 이미 실패한 듯했다. 결국 그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고는 순순히 물러났다.
승헌이 벗으면서 떨어트린 겉옷을 주워든 옥환은 승헌에게 그것을 내밀었다. 승헌이 못마땅해하면서도 소매에 팔을 꿰자 옥환이 옷 입는 것을 마저 거들어 주고는 밖에 일렀다.
“전하께서 기침하셨네. 편전으로 돌아가실 것이니 안으로 들게.”
그러자 문이 열리고 수많은 궁인이 머리를 조아린 채 우르르 들어왔다.
간단히 채비를 마치고 궁인들과 함께 처소를 나서려던 승헌은 뒤를 돌아보고 덧붙였다.
“하면, 조금 이따 다시 보지. 무리하지는 말고.”
“예, 전하.”
그렇게 승헌이 떠나고 나서, 옥환의 하인들 역시 옥환의 아침 준비를 도왔다. 그들이 자신의 머리를 빗기고 옷을 입히는 동안 혼이 빠진 것처럼 우두커니 앉아 있던 옥환은 조정에 나오고 나서야 비로소, 승헌이 제게 고백했으며, 그가 자신을 위해 혼인하지 않기로 했다는 사실을 직시했다.
옥환은 뒤늦게 안절부절, 이게 현실인가 싶어서 크게 당황했다.
‘전하가…… 정말로? 나를 연모한다고 하셨던가?’
저야 살해당할 위기에도 아랑곳하지 않을 정도로 심각하고 절박했었으나, 승헌의 입장에선 어쩌면 벽국의 첩자일지 모르는 자신을 사랑할 이유가 없었다. 더군다나 이번 혼사가 그의 의지에 의한 것이라면, 옥환을 택하는 것보다는 예부상서 여식과의 혼사를 택하는 것이 훨씬 이득이었다. 게다가 혼사를 무르면 신하들의 반발은 물론이고 왕으로서 그의 위엄도 떨어지게 될 것이다. 승헌이 그 모든 부담을 감내할 필요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하나 그럼에도 승헌은 위험을 짊어지고 저를 택해 주었다.
‘그대를 연모해, 옥환.’
‘그대를 정말로 깊이 연모하고 있어. 그대가 누구라도 상관없어. 그대가 다른 이를 마음에 품었다 해도, 내가 죽을 때까지 그대의 마음속에 들어갈 수 없다 해도.’
어젯밤, 승헌이 제게 입을 맞추며 전했던 그 고백을 옥환은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았다. 승헌의 그 마음만으로도 옥환은 모든 것을 보상받을 수 있었다. 그와 맺어질 수도 없고, 그의 미래에 자신이 있을 자리조차 없다 해도…… 그 또한 이런 마음으로 자신을 여겨준다고 생각하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아니, 감사했다.
“국왕 전하 납시오!”
그때 환관의 새된 외침과 함께 승헌이 조정에 모습을 드러냈다. 옥환은 갑자기 가슴이 너무 뛰어서, 감히 승헌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숨만 몰아쉬었다.
“태사…… 태사!”
조회 내내 바닥에 시선을 고정한 채 승헌의 고백만 되새김질하던 옥환은 문하시중이 옆구리를 찌르고 나서야 겨우 고개를 들었다. 평소의 그답지 않은 흐리멍덩한 표정에 문하시중이 소리를 낮춰 나무랐다.
“전하께서 계속 부르고 계시지 않습니까!”
“예?”
뒤늦게 옥환이 용상이 있는 쪽을 바라보자 승헌이 자신을 걱정스럽게 내려다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주변의 신하들 역시 모두 옥환에게 시선을 집중한 상태였다. 잠시 혼란에 빠졌던 옥환은 재빨리 평정을 되찾고는 바닥에 엎드렸다.
“송구하옵니다, 전하.”
“태사는 무슨 생각을 그리 하시기에 전하께서 부르셔도 모르오? 원, 조회에서도 저러다니 정신을 어디다 두고 다니는 건지.”
무관의 비아냥거림을 못 들은 척한 옥환은 승헌의 일어나라는 말에 꿇었던 무릎을 폈다.
“태사. 괜찮은가?”
“예, 전하. 부디 불충한 소신을 용서하시옵소서.”
“뭐 고작 그런 것으로 불충하다 하나. 여기엔 불충한 놈들이 널리고 널렸는데.”
승헌이 특히 방금 옥환을 대놓고 흉봤던 무관을 노려보며 이야기하자 승헌의 살벌한 눈빛을 받은 무관이 얼른 머리를 조아렸다. 승헌이 다시금 옥환을 살피기 위해 시선을 향하니 옥환의 붉어진 귓불이 보였다. 어찌 저리 또 부끄러워하고 있을까? 승헌은 나중에 옥환에게 가서 놀려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나 사실 옥환이 부끄러워하고 있는 것은 모두 승헌 때문이었다. 전에는 승헌이 제 편을 들어 주어도 그 이유를 알지 못해 민망하고 의심스럽기만 했는데, 오늘은 달랐던 것이다. 저를 아껴 주는 마음에 그리했는가 싶어 그것이 무척 고맙고도 설렜다.
조회가 끝나고 하늘이라도 날 듯 가벼운 발걸음으로 처소를 향하던 옥환은 갑자기 자신이 우스워졌다. 정, 연심, 그런 것은 한낱 사소한 감정 문제고, 그런 것으로 자신이 영향받을 일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참으로 어리석었다. 그 사소한 감정이라는 것이 삶을 송두리째 바꾸는 것인 줄도 모르고. 자신 또한 이렇게 누군가를 절절하게 그릴 수 있는지를 모르고.
처소로 돌아와 관복을 갈아입고 나자 하인이 다가와 말을 붙였다.
“태사. 식사부터 드시지요. 전하께서 태사를 걱정하시어 어식을 내리셨습니다.”
“아…… 그러셨는가.”
옥환은 문득 이렇게 받기만 하는 자신의 처지가 미안해져서, 승헌에게 해 줄 수 있는 게 없을지를 고민했다. 그러다 자연스럽게 서국을 돕는 것이 최선이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하나…….
옥환은 그제야 현실로 돌아왔다. 자신은 벽국의 첩자였고, 아직 완전히 벽국을 저버릴 결심도 내리지 못했으며, 승헌에게 자신이 첩자라는 사실을 끝까지 들키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었다. 이제 와 첩자로서의 역할을 놓는다고 해서 그 전에 저지른 짓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옥환은 자신이 너무도 한심했다. 아직도 해결해야 할 문제는 첩첩산중이건만.
‘무엇보다 나는 언제 죽을지도 모르지 않은가.’
여전히 계평이 자신을 노리고 있다. 과연 자신이 그를 끝까지 막을 수 있을까? 승헌에게 사실대로 말해 보호를 청할 수도 없었고, 자신이 계평과 맞선다 해도 그를 이길 정도의 무위를 가진 것은 아니었다. 하인들을 주위에 배치해 놓는 것이 전부일까. 하나 언제까지? 언제까지 그렇게 피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럼에도 옥환은 포기하고 싶지 않았고, 포기할 생각도 없었다. 하루라도 더, 승헌의 얼굴을 보고 그와 함께하고 싶었다. 그렇다면 싸워야 했다. 계평과도, 염요와도.
차마 벽국에 해를 끼치는 일까지는 할 수 없겠지만, 그들이 더는 자신을 건드릴 수 없도록 만들어야 했다. 옥환은 강한 의지를 다졌다.
한편 오랜만에 잘 먹는가 싶더니, 또 얼마 가지 않아 수저를 내려놓는 옥환을 보며 하인들이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워낙 철두철미하고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인사라 그리 티가 나진 않았으나, 그 백옥처럼 고운 얼굴에는 그림자가 가시지 않았고, 그가 즐겨 입는 흰 비단옷은 갈수록 품이 낙낙해지고 있었다. 하나 옥환이 수저를 내려놓은 것도 모자라 이제 그만 상을 물리라고까지 하니, 보다 못한 하인 하나가 나서서 말했다.
“태사. 어찌 이 조금을 드시고 마십니까? 전하의 성은을 봐서라도 조금만 더 드시지요.”
“……생각할 것이 많아서 그러네. 어차피 나 혼자서는 다 못 먹을 양이니 그대들끼리 나눠 들게. 아예 손을 대지 않은 것도 많아.”
“태사. 저희 먹는 것이야 대수입니까. 평소에도 전하께서 태사께 내리신 것을 다 먹지 못한다며 저희에게 항상 나누어 주시지 않으십니까. 전부터 소식을 하시던 분이 이제는 거의 절식을 하시니 걱정이 되어서 그럽니다.”
“음…….”
제 탓에 공연히 하인들만 힘들어지는 것 같아 미안했으나, 지금의 그는 입이 텁텁해서 도저히 무언가를 먹을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때 눈치를 보던 다른 하인이 말했다.
“그러시면 상을 물리고 과일이라도 올릴까요? 전하께서 복숭아를 너무 많이 보내 주셔서 아직도 한참 남았습니다.”
“그래, 복숭아 정도는 먹을 수 있을 것 같네. 그래 주겠나?”
그제야 하인들이 환한 얼굴로 상을 물리고 과일을 준비해 오겠다며 떠났다. 행여 옥환이 덥지는 않을까 부채질을 해 주던 하인이 옥환이 심심하지 않도록 말을 걸어왔다.
“태사. 그러고 보니 아침에 계평을 보았습니다.”
“계평? 어디서? 뭘 하고 있던가?”
“공연히 처소 주변을 기웃거리고 있기에 제가 멀리 쫓아 보냈습니다. 태사께 그리 무례하게 구니 좋게 보이겠습니까?”
“그 뒤로는 못 봤고?”
“예. 주로 자기 방에 처박혀 있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던 옥환이 문득 부채질을 하는 하인을 잠깐 응시했다. 이 하인은 필시 고향이 벽국이라고 했었다. 승헌은 옥환을 위해 식사를 만드는 자들은 물론, 옥환을 직접 시중드는 하인들도 대부분 벽국 출신으로 바꿔 주었다. 그 사실을 떠올린 옥환이 돌연 한숨을 내쉬었다. 하인이 왜 그러시냐 물어보니 옥환이 자못 심각한 얼굴로 대꾸했다.
“계평 그 아이가 너무 철이 없어 걱정일세. 지난 일도 그래. 전하께서 내게 주시는 총애를 이용해서 예부상서를 혼내 주라 하지 뭔가. 전부터 계속 그런 말을 하기에 이번에 크게 나무랐더니 그것이 적잖이 분했는지 나를 칼로 위협하더군.”
“예에? 한데 그놈을 그냥 두시라 하셨습니까? 제가 당장 가서 전하께 고변을…….”
“그러지 말게. 안 그래도 전하께서 다망하신데, 이런 일로 골치 아프게 해드릴 필요가 있나. 그리고 이러니저러니 해도 나라를 저버리고 온 나를 따라준 아이네. 타향살이를 하면서 힘든 일이 있을 때는 위로도 되었고. 이번 일도 그저 시늉만 하려던 것이, 익숙하지 않은 일에 놀라 사고를 낸 것에 지나지 않아. 그저 내가 전하의 총애를 받는데도 제게 떨어지는 콩고물이 없어 심통이 난 것뿐이니, 그 철없는 생각이 사라질 때까지만 자네들이 신경 좀 써줄 수 있겠나? 이상한 짓 못 하도록 말이네.”
하인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특히 계평이 옥환의 타향살이에 도움이 되었다는 말에 공감을 한 모양이었다. 이것으로 당분간은 하인들이 계평을 감시해 줄 것이다. 하나 옥환은 안심하지 않았다. 어쩌면 자작으로 위험을 꾸며 승헌에게 도움을 받는 게 나을 수도 있었다. 다만 옥환은 웬만하면 승헌을 걱정시킬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저를 걱정하던 그 눈빛, 손길이 전부 진심이라면 더더욱.
그때 마침, 옥환을 깊은 생각에서 건져 내듯 반듯하게 깎인 복숭아가 접시에 담긴 채 그의 앞에 놓였다. 코끝을 간질이는 완숙된 과실의 향기에 옥환도 미약하게나마 식욕이 동했다.
“고맙네.”
옥환은 복숭아를 가져다준 하인에게 인사를 하고는 복숭아를 집어 베어 물었다. 잘 익어 말캉한 과육을 씹으니 이내 달콤한 과즙이 입안에 가득찼다. 남으면 청을 담가도 좋겠다. 그런 사소한 생각을 하며 복숭아 두 조각째를 입에 넣은 옥환은 그것을 다 씹고 세 번째 조각을 집는가 싶더니 돌연 손을 멈추었다.
“어찌 복숭아까지 드시다 마십니까?”
하인들의 걱정 어린 얼굴에 옥환은 멋쩍은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승헌과 나눠 먹어야겠다는 생각에 멈췄다는 말을 할 수 없었던 탓이었다.
“그냥…… 그냥 나중에 먹겠네.”
“태사.”
“나중에…… 손님이 올 수도 있지 않나.”
옥환이 에둘러 변명하자 그제야 옥환의 속마음을 눈치챈 하인들이 웃으며 복숭아를 치우고 물러갔다. 물론 “손님”이 오시는 대로 전해드리겠다는 말을 남겨 놓고. 옥환은 민망함에 눈썹을 찌푸렸으나 종일 처소에 있는 그들이 저와 승헌 사이의 감정을 모를 리가 없었다. 어차피 감출 수 있는 감정도 아니지 않던가.
옥환은 혹여라도 승헌이 오면 그 모습이 잘 보이도록 창을 활짝 열어 두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해서 막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뭔가 이상했다. 분명 일어나서 걸으려 했건만, 갑자기 지면이 코앞에 있었다. 몸이 제멋대로 기울어진 것이다.
옥환은 쓰러지는 몸을 겨우 팔로 받쳐 버텨냈다. 하나 여전히 눈앞은 빙글빙글 돌고 있었고, 격한 기침이 나왔다. 뱃속에서부터 뜨거운 것이 울컥 넘어왔다. 별안간 벌어진 일에 옥환은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내장이 타들어 가는 듯 고통스러웠다.
“태, 태사!”
하인 하나가 기침 소리를 듣고 문을 열었을 때, 옥환은 피를 토하고 있었다. 바닥이 그의 피로 시뻘겋게 물들었다.
‘아. 하다못해 그분을 뵙고 가야…….’
피를 한 바가지 쏟아 낸 옥환은 생각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정신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