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1/16)

十. 玉淚(옥루) (1)

승헌의 환후는 경과가 좋았다. 그 탓에 중신들도 더는 승헌의 복귀를 막을 수 없었고, 그렇게 그는 돌아온 지 닷새 만에 조회에 나갔다. 그리고 승헌이 조회에 나온 날, 옥환 또한 그 자리에 있었다. 그는 이미 전날부터 조정에 복귀한 참이었다.

정전에 든 승헌은 전과 다름없는 옥환의 말간 얼굴을 보고는 속으로 안도했다. 그리 고생을 했는데도 여전히 저리 뽀얗고 고운 것을 보면 참으로 신기할 정도였다. 하나 이틀 전 악몽을 꿨는지 겁에 질려 제 품에 매달리던 모습이 여전히 마음에 걸렸다. 그 뒤로 나쁜 꿈은 안 꾸나.

하인을 통해 별일이 없는지 보고를 받고 있긴 했으나 옥환이 강한 척, 괜찮은 척 따위에 능하다는 걸 알기에 걱정이 앞섰다. 자신이 아니어도 좋으니 그가 가진 고충을 누구에게든 터놓았으면 싶었다.

그러다 문득 승헌은 옥환을 보고 있는 것이 자신뿐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조심스럽고도 애절한 시선의 끝에는 백고가 있었다. 승헌은 옥환이 누구에게든 고충을 터놓았으면 좋겠다던 방금의 생각에서 한 가지를 덧붙였다. 백고만 빼고.

그를 멀리 보내 버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으나 호진의 반대도 있었고, 무엇보다 옥환이 진정 그를 의지하고 있다면 옥환을 위해서라도 그를 없애 버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언감생심, 옥환을 마음에 품다니.

‘주제도 모르는 놈. 어딜 감히. 안됐지만 너는 옥환의 취향이 아니다.’

승헌은 백고를 노려보며 속으로 있는 욕 없는 욕을 다 퍼부었다. 눈치가 없어도 저리 없을 수 있을까 싶은 인사니, 아마 알아차리지는 못했을 테지만.

“전하. 신이 간곡히 청하고자 하는 일이 있사옵니다.”

그렇게 속으로 한창 백고의 욕을 하고 있던 승헌은 예부상서의 목소리에 그곳으로 시선을 향했다. 신하들이 무언가를 ‘간곡히’ 청한다는 것은 번거로운 일이 일어난다는 뜻과 같았다. 그를 아는 승헌은 마뜩잖은 표정으로 예부상서를 쏘아보았다. 마치 시선으로 기를 죽여 입을 다물게 하려는 것처럼 몹시도 매서운 눈이었으나, 예부상서가 꺼내려는 안건은 예부상서 본인으로서도 절대 물러설 수 없는 것이었다.

“소신, 이번 일로 전하께서 짊어지신 군주의 책무가 얼마나 무거운지를 미력하게나마 깨달았으나, 신하 된 몸으로는 그저 국정을 돕고 백성을 굽어살피는 것 외에 도울 수 있는 것이 없음을 알고 크게 상심하였나이다.”

“상심할 것 없네, 예부상서. 그게 경의 본분이니까. 그 본분만 잘 지키면 앞으로 과인이 도성을 비우는 일은 결단코 없을 것이네. 하니 예부상서는 물론 다른 신료들도 모두 심려치 말게.”

승헌은 한없이 너그러운 어조로 뼈 있는 말을 던지고는 빠르게 대화를 마치려 했으나, 예부상서도 허투루 상서의 자리에 오른 것은 아니었다. 그는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는 것으로 좌중의 주의를 끌고는 얼른 입을 열었다.

“전하. 감히 미거한 소신 따위가 어찌 한 나라를 다스리는 전하의 심경을 다 헤아릴 수 있겠사옵니까. 다만, 무엇이든 그 아래를 단단히 받쳐 주는 기틀이 있으면 쉬이 무너지지 않는 법이옵니다. 신은 이번 일로 더더욱, 전하께는 전하의 그 무거운 짐을 나눠 들어줄 존재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였사옵니다.”

“…….”

승헌은 이때쯤엔 이미 예부상서가 무슨 말을 꺼내려고 하는지를 눈치챘다. 이윽고 예부상서가 이미 바닥에 붙은 듯한 몸을 더 납작 숙이며 승헌이 예상한 그대로의 말을 입에 담았다.

“하오니 바라건대, 하루라도 빨리 정비를 맞이하시어 사직을 보전하여 주시옵소서.”

“보전하여 주시옵소서, 전하!”

예부상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문관들이 한목소리가 되어 주청했다. 승헌의 표정은 그리 탐탁지 않은 것 같았으나, 신하들이 저리 주장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번에 혹 승헌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었다면 왕위는 어쩔 뻔했는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는 나라님이었으니 되도록 빨리 왕비를 들이고 후사를 낳아 국본을 세우는 것이 왕위 계승의 안전성을 확보할 최선의 방책이었다.

그러나 의외로 옥환은 문관들을 따라 함께 청하지는 않았다. 승헌이 싫어할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이제 막 병석에서 일어난 사람에게 혼인부터 하라는 재촉을 하고 싶지 않은 연유에서였다. 승헌이 하기 싫다면, 그냥 그대로 두고 싶었다. 그래서 옥환은 문하시중의 배신당한 듯한 시선을 외면한 채 다른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한편, 꿇어앉은 문관들을 보며 잠시 말이 없던 승헌은 턱을 괸 채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그래. 간택 후보를 올리라 명하긴 했었지.”

그리고 그 후보 중에는 예부상서의 여식이 있었더랬다. 만일 그의 여식이 왕후가 된다면 예부상서는 국구의 자리까지 얻게 되는 셈이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아니, 도리어 발 벗고 나서야 옳았다. 사정이 이러니 그 소극적인 예부상서가 먼저 말을 꺼낸 것도 납득이 갔다.

물론 승헌도 줄곧 혼사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옥환에게도 혼인을 하겠노라 공언하지 않았던가. 승헌은 애먼 곳을 쳐다보고 있는 옥환에게 잠깐 눈길을 주고는 말했다.

“간택 후보 중에 예부상서, 그대의 여식이 괜찮아 보이더군. 만나 보도록 하지.”

“……예?”

당연히 승헌이 능구렁이처럼 빠져나가거나, 아니면 썩 물러가라며 뭐라도 집어던질 것이라 예상했던 신하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특히 예부상서는 벼락이라도 맞은 듯한 표정이었다.

“전하, 지금…… 하면…… 국혼을 하시겠다는…….”

“경들이 귀에 딱지가 앉도록 주청하는 것을 어쩌겠나? 과인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얼른 진행하는 편이 좋을 것이네.”

승헌은 시답잖은 화제라는 듯이 가볍게 대꾸하고는 그대로 조회를 끝냈다. 꿇어 있던 문관들은 뒤늦게 떨떠름한 표정으로 일어났다. 승헌의 변덕이 여전히 혼란스러운 모양이었다.

“저, 태사. 혹 태사께서 전하를 설득해 주신 것입니까?”

불현듯 옥환에게 다가온 문하시중이 반신반의한 표정으로 그렇게 물어왔다. 옥환이 대답을 망설이는 사이 다른 문관들이 “역시 그렇군요!” 하며 멋대로 대화에 난입하는 바람에 승헌이 혼사에 대해 마음을 바꾼 것은 옥환의 덕분인 것으로 결론이 내려지고 말았다. 물론 옥환은 몇 번이고 아니라고 했으나 문관들은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그만큼 승헌의 행동이 몹시도 의외였기 때문이었다. 하나 옥환은 문관들의 그러한 결론이 달갑지 않았다. 이러다간 승헌이 또 문관들을 뒤에서 조종했다고 오해할지도 몰랐으니까.

“정녕 태사가 아니신 겁니까?”

정전을 나와서도 내내 답답해하는 옥환에게 눈치를 보던 문하시중이 물었다. 옥환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대꾸했다.

“아까부터 계속 그리 말씀드리고 있지 않습니까……. 저는 이제 전하의 뜻을 저나 문관들이 원하는 대로 유도할 생각이 없습니다. 뭐든 전하의 뜻을 존중하기로 마음먹었단 말입니다.”

옥환의 말인즉 정치에서 한발 물러나겠다고 한 것이나 마찬가지라, 그 똑똑하고 고집 센 금야 선생이 설마 그럴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나 또다시 생각하면 지난번 승헌을 지극정성으로 돌본 것도 그렇고, 그의 아픈 모습에 마음이 약해졌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결국 옥환의 말을 믿기로 한 문하시중은 이내 걱정스레 물었다.

“하면…… 괜찮으신 겁니까? 전하께서 이번에야말로 간택에 큰 관심을 기울이시는 것 같은데.”

“……전하께서 원하신다면, 그리 하셔야지요. 제 마음이 무어 중요하겠습니까.”

옥환의 표정은 매우 침착했으나 그와 짧지 않게 사귀어 온 문하시중은 이제 그의 진짜 속마음을 조금 알 것도 같다고 생각했다. 이 말을 하는 것이 옳은지 걱정하면서도, 문하시중은 벗에게 하는 조언이라고 여기고 이렇게 말했다.

“저, 태사의 위치상 뭐라고 하기가 어려운 것은 알지만, 혹 싫으시거든 애써 감추려 하지 마십시오. 태사도 사람인데, 아무렴 제 짝이 다른 짝을 찾는 것이 내키시겠습니까?”

그러자 옥환이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얼른 주위를 살폈다.

“문하시중, 그 무슨……! 표현을 삼가십시오. 누가 들을까 무섭습니다.”

“저도 사람 아닙니까. 태사나 전하가 그렇듯이요.”

옥환은 문하시중을 나무라듯 엄한 표정을 짓다가, 문하시중의 뻔뻔한 태도에 피식 웃어 버렸다. 이것이 그의 서투른 위로라는 것은 그도 알고 있었다. 아무튼, 속이 좋아도 탈이었다.

“하면 내일 뵙겠습니다.”

“예, 조심히 가십시오.”

그렇게 문하시중과 처소 앞에서 인사를 하고 헤어진 옥환은 처소의 문을 열었다가 승헌이 창틀에 기대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당혹했다. 자신보다 먼저 와 있는 데다가 차림새를 보니 조회가 끝나자마자 곧장 이리로 온 모양이었다.

옥환은 뛰는 심장을 손으로 지그시 누르며 평정심을 가장했다. 이윽고 옥환이 “전하” 하고 평소처럼 부르자 승헌이 옥환을 보더니 반가운 얼굴을 했다.

“기다리다 목 빠지는 줄 알았어. 문하시중이 그리도 좋나?”

“아직도 제 취향을 모르십니까?”

옥환의 되바라진 대꾸에 승헌은 소리 내어 웃었다. 그 모습이 보기 좋아 옥환 역시 자그맣게 웃고는 승헌의 곁에 앉았다.

“이쯤에서 한번은 제대로 짚고 넘어가야 할 성싶은데.”

웃다 말고 뜬금없이 분위기를 잡는 승헌의 태도에 옥환이 고개를 갸웃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승헌은 창틀에 팔꿈치를 올리고 턱을 괸 채 옥환을 보며 물었다.

“나는 그대의 취향에 들어맞는 사내인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은 옥환은 이내 눈을 내리깔고는 옷소매를 만지작거리며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글쎄요……. 만일 전하께서 이처럼 위장부가 아니셨다면, 첩이 되라는 명을 따르기가 조금 더 어려웠을 수도 있겠지요.”

“뭐?”

“기왕이면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지 않습니까.”

승헌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옥환을 쳐다보다가 아무리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는지 실소를 터뜨리고는 말했다.

“왕더러 보기 좋은 떡이라? 게다가 그 얌전하신 금야 선생께서 사내의 얼굴을 밝힌다는 말을 하면 어느 누가 믿을까. 나만 거짓말쟁이가 되겠지.”

툴툴대는 승헌을 모른 척하던 옥환은 열린 창을 통해 바닥에 떨어지는 꽃잎을 한쪽에 모으며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면 정비는 얼굴을 밝히지 않는 어진 여인으로 들이십시오.”

“…….”

옥환은 농담조로 한 말이었으나 승헌의 분위기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얼굴 위의 웃음기를 지운 채 옥환을 바라보았다. 옥환은 승헌의 저런 눈빛을 잘 알았다. 제 의중을 살피려는 것이다. 정녕 자신이 혼인하기를 바라는 것인지, 아니면 또 속임수인지. 하나 옥환은 진심이었다. 승헌은 혼인을 해야 했다. 그가 싫다면 억지로 강요하지 말자고 생각했었으나, 그를 위해서는 혼인을 하는 쪽이 좋은 일이었다. 그것이 옥환 자신에게 좋고 나쁘고는 상관이 없는 것이다.

“저는 정말 괜찮습니다.”

“그대가 괜찮은지 묻지 않았어.”

승헌의 예민한 반응에 옥환은 주저하면서도 자신의 의도를 설명했다.

“전하께서도 괜찮으셔서 받아들이신 것 아닙니까? 혹 저 때문이라면…… 지금이라도 무르십시오. 지난 일은 제가 잘못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혼인은 인륜지대사가 아닙니까. 전하는 비록 한 나라의 주인이시나, 한편으로는 이 땅 위에 사는 한 사람이기도 하니 혼사만큼은 원하시는 대로 하셨으면 합니다.”

옥환의 말이 거짓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하나 진심이든 거짓이든, 승헌에게 있어서는 어느 쪽도 달갑지 않은 게 사실이었다.

침묵하는 승헌을 보며 옥환은 또 그가 지난번처럼 자신의 말을 믿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그래도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옥환은 새삼 제 언변이 얼마나 하잘것없는지를 통감했다. 정치나 병법에만 통달하면 무엇하나. 군왕이 아닌 한 사내의 앞에서는 분위기를 망치는 원흉일 뿐인데. 옥환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한데 승헌이 시무룩해진 옥환을 빤히 쳐다보더니 이내 그의 상앗빛 뺨을 쿡 찔렀다. 옥환이 화들짝 놀라 어깨를 움찔하는 것을 보며 승헌은 쿡쿡 웃었다. 기분이 상한 옥환은 승헌에게 나무라듯 물었다.

“뭐하시는 겁니까?”

“그대 취향의 잘생긴 사내를 앞에 두고 다른 생각을 하기에 그리했지.”

“전하께서 먼저 갑자기 입을 다물지 않으셨습니까.”

“이 잘생긴 얼굴을 어찌 활용할까 고민하던 중이었는데?”

기가 막힌 옥환이 할 말을 잃은 채 승헌을 보고 있는데, 별안간 승헌이 냉큼 옥환의 앞으로 다가섰다. 옥환은 무의식적으로 몸을 뒤로 뺐으나 승헌은 옥환이 멀리 가지 못하도록 그의 허리에 얼른 팔을 감았다. 두 사람의 거리는 호흡이 섞일 만큼 가까워졌다. 승헌은 옥환과 눈을 맞춘 채 물었다.

“이리 활용하면 될까?”

승헌이 장난치듯 던진 물음은 옥환의 귀에 들어가지 못했다. 승헌의 뚜렷한 이목구비가 바로 제 코앞에 다가와 있었기 때문이다.

먹처럼 짙은 눈썹과 시원스레 뻗은 콧날, 선이 뚜렷한 입술을 보니 왜 궁녀들이 멀리서라도 그의 얼굴을 보기 위해 매번 길을 에둘러 가는지 알 수 있을 듯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승헌의 눈동자는, 이따금 빛을 받을 때마다 호박색으로 변하며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고는 했다. 멀리서 승헌을 올려다보기만 하는 이들은 절대 알 수 없는, 오직 그와 가까운 몇 명만이 아는 그의 특징이었다. 그리고 옥환은 승헌의 눈동자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아는 소수 중 하나였다.

하지만 옥환에게 있어 승헌의 얼굴은 그렇게 새로울 것도 없었다. 하루 이틀 보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승헌은 몇 번이고 자신에게 이런 식으로 접근해 왔었다. 그러니 새삼 놀랄 필요는 없었다. 없었는데…….

막상 승헌의 얼굴을 앞에 둔 옥환은 제대로 숨조차 내쉬지 못하는 상태였다. 처음 봤을 때도 미남자라고는 생각하였으나, 지금 이 순간, 옥환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마음을 완전히 빼앗기고 있었다.

양양의 성에서 만났던 승헌과 지금 눈앞에 있는 승헌 사이에 달라진 것은 없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그것은…….

“못 당하겠군.”

그때, 승헌이 옥환의 상념을 깨며 뒤로 물러났다. 줄곧 멈춰 있던 듯한 옥환의 심장은 돌연 생존 신고라도 하는 것처럼 거세게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그 아플 정도로 세찬 고동에 옥환은 저도 모르게 가슴을 짚었다.

“조금은 수줍어하거나, 하다못해 독설이라도 날릴 줄 알았더니. 뭐 어쩌겠나. 천하일색에 담까지 큰 그대를 얼굴로 꾀어내려 한 내 책임이지.”

승헌은 살짝 아쉬워하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듯 단념조로 말하다가, 문득 옥환의 이상한 상태를 깨닫고는 표정을 달리했다. 옥환은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한 채 제 가슴을 부여잡고 있었다. 승헌은 그런 옥환을 빤히 바라보다가, 바닥에 놓여 있는 옥환의 손끝을 슬그머니 잡았다.

“……!”

그 작은 행동에도 옥환은 소스라치게 놀라더니 이내 그의 귓불과 뺨이 타오를 것처럼 달아올랐다. 승헌에게 잡힌 손끝은 파르르 떨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승헌과는 눈도 마주치지 못하는 것이, 마치 남몰래 은애하는 임이라도 만난 양 풋풋하고 어리숙해 보였다.

“옥환.”

승헌의 부름에 옥환은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그는 필시 승헌이 저를 비웃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옥환 자신조차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제 와서 갑자기 왜. 왜 이리 미친 것처럼 가슴이 떨리는지.

하나 옥환이 그 이유를 제대로 고민해보기도 전에 승헌이 먼저 그를 그대로 뒤로 넘어뜨렸다. 다행히 승헌이 재빨리 머리를 받쳐 주긴 했으나, 갑자기 바닥에 눕게 된 옥환은 아연한 눈으로 승헌을 올려다보았다.

“그대는…….”

당황한 옥환에게 무어라 말하려던 승헌은 픽 웃더니 변명 대신 입을 맞추었다. 열심히 입술을 빨던 승헌은 금세 옥환의 입술 사이로 젖은 혀를 밀어 넣었다. 옥환은 한층 커진 제 심장 소리가 이제는 승헌의 귀에도 들릴 것 같다고 생각했으나, 오늘은 도저히 그를 밀어낼 수 없었다. 자신의 감정에도, 견승헌에게도 저항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이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확인을 해보자. 그리 마음먹은 옥환은 승헌의 목에 팔을 두르고는 적극적으로 승헌과 혀를 섞었다. 옥환의 행동에 승헌이 입을 맞춘 채로 피식 웃는 소리가 났다. 그 순간, 자신의 감정을 재미로 대하는 듯한 승헌의 태도에 옥환은 적잖이 불쾌해졌다. 이윽고 옥환이 언제 매달렸냐는 듯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한창 옥환의 아랫입술을 물고 빨던 승헌은 돌연 입술이 떨어지자 눈썹을 찡그렸다.

“왜 주다 말아. 감질 나게.”

“저는 전하의 수라상에 올라간 요리가 아닙니다.”

자신만 휘둘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나 휘둘리지 않을 수 없다면, 차라리 양쪽 다 서로를 휘두르는 쪽이 낫다는 게 옥환의 판단이자 오기였다. 옥환의 고집 어린 눈빛에 승헌은 짧은 숨을 내뱉고는 옥환의 뺨부터 시작해 어깨로 이어지는 목선을 따라 일일이 입을 맞추었다.

“그대가 그리 사랑스럽게 굴어서 날 아침 댓바람부터 발정 난 놈으로 만들었잖아.”

“사…… 무슨…….”

어릴 적 외에는 들어본 적 없는 낯부끄러운 표현에 옥환의 말문이 막혔다. 하나 승헌은 태연한 손길로 옥환의 허리끈을 풀고는 그의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으며 짓궂게 말했다.

“이 얼굴이 그리 좋다 하니, 오늘은 꼭 마주 보는 자세로 해야겠군.”

옥환은 금방이라도 옷을 찢고 나올 듯 팽팽해진 승헌의 바지 앞섬을 보며 숨을 삼켰다. 승헌이 자신을 재미로 대하고 있다는 생각은 대단한 착각이었던 듯했다. 그는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고, 또한 다급했다.

“잠깐, 전하. 용포가 더러워지기라도 하면…….”

“벗을 시간 없어.”

승헌은 웃고 있었지만, 그의 눈동자에는 타오르는 정염이 일렁이고 있었다. 흐트러진 옷깃 사이로 보이는 탄탄한 가슴이 거칠게 들썩였다. 굶주린 짐승처럼 금방이라도 제게 달려들 듯한 승헌의 모습에, 옥환은 어쩐지 자신이 수렁에 발을 잘못 들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 옥환이 뭘 어떻게 해보기도 전에 승헌이 먼저 옥환의 다리를 들어 제 어깨 위에 올리고는 바지 속에서 꺼낸 양물을 그대로 뿌리까지 삽입했다.

“하윽……!”

막무가내로 파고드는 묵직한 물건에 옥환의 눈앞이 점멸했다. 숨을 헐떡이던 옥환은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본능적으로 승헌의 어깨를 마구 밀어냈으나, 꼼짝도 하지 않는 승헌 때문에 도리어 반동으로 삽입만 깊어졌다. 메마른 내벽은 안을 들쑤시는 남근의 혈관이며 부푼 귀두의 모양을 적나라하게 느꼈다. 옥환은 민망함과 동시에 치솟아 오르는 열기에 입술을 꽉 깨물었다.

“옥환…….”

승헌은 나직이 이름을 부르며 벽을 짚고 느리게 허리를 뒤로 물렸다가 있는 힘껏 쳐올렸다. 퍽, 하고 살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나며 옥환의 몸이 위로 밀렸다. 아픔과 쾌감이 섞인 강렬한 자극에 옥환은 입을 틀어막았다.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으나 승헌은 한 번 더 같은 행위를 반복했다.

“아흐윽, 전하!”

결국 옥환이 참지 못하고 다시 승헌의 가슴을 때렸다. 물론 승헌은 지금도 엄청 참고 있는 중이었다. 몇 번 오가지도 않았건만, 옥환의 내부는 제 것에서 질질 흘린 선액으로 잔뜩 젖어 있었다.

승헌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입술을 핥았다. 눈물을 뚝뚝 떨구는 고운 눈가와, 새하얀 눈밭 같은 목과, 뾰족 선 자그마한 유두 중 어디부터 먹을지를 고민하니 삽입을 한 와중에도 아랫배가 뻐근하게 당겨 왔다.

“윽, 전하, 조금만 살살…….”

“그래, 옥환. 그래. 노력하고 있어. 정말, 미친 듯이 노력하고 있어. 알지?”

승헌의 뜨거운 숨결이 옥환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그 감각조차 외설적으로 느껴져 옥환은 허리를 비틀었다. 그러자 승헌이 일순 움직임을 멈추었다. 옥환이 왜 그러나 싶어 올려다보는데, 그가 들릴 듯 말 듯 무어라 중얼거렸다.

“살살 해달라더니.”

“예?”

제대로 듣지 못한 옥환이 되물었으나, 승헌은 대답 대신 옥환의 안쪽을 마구잡이로 범하기 시작했다. 승헌의 격렬한 움직임에 옥환은 저항 한번 못해 보고 손만 허공에 저었다.

“전하, 잠깐, 안 돼, 아……! 아, 전하!”

강한 자극에 옥환이 승헌의 등을 힘껏 끌어안았다. 뒤늦게 머리맡에 열려 있는 창이 보였으나, 그것을 닫아달라는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승헌이 제 안을 오고 갈 때마다 머릿속에서 폭죽이 터지는 것 같았다.

승헌은 옥환의 첫 사내였고, 그의 몸을 길들인 사내이기도 했다. 그는 옥환이 어디를 어떻게 하면 좋아하는지 놀라울 만큼 잘 알고 있었다. 가령, 옥환은 승헌이 끝이 조금 휘어진 그의 양물로 내벽 위쪽을 긁어줄 때마다 금방이라도 절정에 다다를 듯 교성을 내질렀다. 그리고 특히 오늘은 더 옥환의 몸이 예민한 것이 승헌에게도 느껴졌다. 평소가 쾌감에 빠져들면서도 마지막 남은 이성의 끈은 놓치지 않으려 애를 쓰는 게 눈에 보였다면, 오늘은 그 이성의 끈이 흐물흐물 녹아 없어진 듯했다.

“아흐으, 하아, 아읏……!”

동공이 풀린 채 낯뜨거운 신음을 내는 옥환의 팔을 제 목에 두르게 한 승헌이 연신 허리를 흔들며 물었다.

“그리 소리를 내면, 밖에 다 들리잖아. 아니면, 이 얼굴이, 그리 좋아? 이 얼굴을 한 사내가 박아 주니, 못 참겠어?”

“전하, 더는, 아앗, 아……!”

계속된 마찰에 옥환이 견디지 못하고 사정했다. 반투명한 액체가 승헌의 옷에까지 튀었다. 옥환은 온몸을 휘감은 황홀감에 잘게 경련했다.

“옥환. 이리 빨리 해 버리면 어찌하나. 응? 내 건 아직도 이리 빳빳한데.”

승헌이 옥환의 손으로 제것을 쓰다듬게 하며 짓궂게 웃었다. 옥환은 한 번이면 족하다고 여겼으나, 오늘은 어쩐 일인지 승헌의 것을 만지는 것만으로도 제 물건까지 반쯤 서고 말았다. 몸도 마음도, 어느 것 하나 멀쩡한 곳이 없었다.

옥환의 나쁘지 않은, 아니. 도리어 저를 다시 유혹하는 듯한 반응에 승헌이 옥환을 엎드리게 했다. 자세라도 바꿔 주지 않으면 또 누워서 자리보전을 하게 될 테니 이것도 승헌의 배려라면 배려였다. 하나 옥환은 적잖이 난감했다. 엎드린 몸이 향하고 있는 방향은 열린 창가였다. 이대로는 밖을 지나는 이에게 제 음란한 모습을 봐달라 말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하나 승헌이 노린 것이 바로 그것이었는지, 승헌은 옥환이 말할 여유를 주지 않고 곧바로 삽입을 이어 가기 시작했다.

방금 막 절정에 다다라 민감해진 옥환의 내벽은 크고 굵은 양물의 감각을 적나라하게 느꼈다. 그대로 열락에 빠져 든 옥환은 발정 난 짐승처럼 울부짖으면서도 승헌에게 애원했다.

“전하, 하읏, 으응, 밖에, 소리…… 앗, 아앙……!”

“소리 안 나게 해줄까?”

옥환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자 승헌이 그의 목덜미에 입술을 쪽쪽 맞추고는 하반신에 힘을 주었다. 양물이 안으로 쑥 파고들며 내벽을 문지르자 옥환이 허리를 휘며 교성을 질렀다.

“소리 안 나게 해 주세요, 하고 부탁해야지.”

이런 와중에도 옥환이 난감해하는 게 보였으나, 평소와 다른 옥환의 모습이 승헌의 가학성을 부추긴 듯했다. 이 정도면 사실 농담 수준에 불과하다. 승헌은 적어도 그렇게 생각했다. 무엇보다 이런 때가 아니면 옥환이 제게 애걸복걸하는 모습을 보기란 불가능하기도 했고.

“어서, 옥환. 누군가 그대의 이런 모습을 보게 되어도 좋아? 그대가 사내에게 안겨 우는 모습을 하인들이 봐도 괜찮은 건가?”

옥환은 도리질을 했다. 승헌에게 보여 주는 것이야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 승헌 또한 저를 보며 흥분하니 상관없었지만, 그 외에 다른 이들이 저의 이런 모습을 본다면 옥환은 평생을 수치심 속에서 살아야 할 터였다. 더 생각할 것도 없이, 옥환은 승헌의 움직임에 이리저리 흔들리면서 간청했다.

“앗, 전하, 소리, 소리 안 나게, 해 주십시오……. 읍, 흐읍……!”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승헌이 옥환의 턱을 잡고 그대로 입을 맞추었다. 혀가 섞이고, 서로의 타액이 오고 갔다. 위아래로 젖은 소리가 났다. 두 사람의 몸은 완전히 밀착한 채 서로에게 맞추어 앞뒤로 맹렬하게 움직였다. 달아오른 감각이 급하게 정점으로 내달렸다.

“으읍, 읍……!”

옥환은 승헌과 입술을 포갠 채 또 한 번 황홀경에 빠졌다. 다리 사이에서 씨물이 쏟아졌다. 귓가가 웅웅거리고, 발가락이 오그라들었다. 승헌 역시 옥환의 몸 위로 사정을 하며 몸을 떨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절정에 다다르고서도 한동안 더 정사를 이어 갔다.

“……읏.”

그리고 마침내 기력이 다한 옥환이 바닥으로 쓰러지려는 것을 승헌이 얼른 안아 들었다. 옥환은 제 몸을 가누지도 못하는 상태였다. 그를 침상 위에 눕힌 승헌은 뒤늦게 너무했나 싶은 마음이 드는 한편, 여느 때와 다르게 가련해 보이는 그 모습이 고와서 쇄골과 가슴 부근에 연신 입을 맞추었다.

“그만, 좀…….”

반쯤 잠든 옥환이 성가시다는 듯 승헌의 가슴을 떠밀었다. 그대로 수마에 빠지려던 옥환은 문득,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는 감긴 눈을 억지로 떴다. 그러자 코앞에 놓인 승헌의 얼굴이 보였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하던 옥환이 화들짝 놀라 몸을 뒤로 물리자 승헌이 옥환의 손을 제 뺨에 가져다 대며 웃었다. 그 모습에 옥환은 제 가슴을 두들기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어쩐지 멀미가 날 것 같기도 했다.

“그대가 좋아하는 얼굴이니 보여 주려 한 것인데. 싫은가?”

“…….”

“내가 싫어, 옥환?”

옥환은 멍하니 입술만 달싹였다. 싫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어찌 왕에게 그런 대답을 하겠는가. 그는 그렇게 승헌의 질문에 부정하지 못하는 제 마음을 포장했다.

“……싫은 것은…… 아마도 아닙니다.”

“그대치고는 꽤나 두루뭉술한데?”

승헌의 장난스러운 반응에 인상을 찌푸리며 옥환은 몸을 홱 돌려 누웠다. 등 뒤로 들리는 승헌의 낮은 웃음소리에 귓바퀴가 근질거렸다.

제 마음을 확인하려고 한 것이건만, 도리어 마음속이 더 어질러진 것만 같았다.

***

코끝을 간질이는 바람이 퍽 따스했다. 서책을 읽고 있던 옥환은 문득 불어오는 봄바람을 느끼고는 고개를 들었다. 반쯤 열린 창에서 꽃내음이 풍겨왔다. 옥환은 종이를 내려놓고 창가로 다가가 문을 활짝 열었다. 한데 그때, 커다란 곰 같은 형체가 불쑥 나타나는 바람에 옥환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날이 좋군, 옥환.”

코앞에는 승헌이 창틀을 잡은 채 서 있었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린 옥환은 승헌이 도대체 어디서 나타난 건지 의아해하며 창밖으로 몸을 내밀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사이 승헌은 창틀을 훌쩍 넘어 처소 안으로 들어오는 중이었다. 이제 창문으로 들락거리지 말라고 하기도 지쳐서, 옥환은 그가 들어오는 모습을 그저 찌푸린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하늘에서 떨어지셨습니까?”

“하늘은 아니고 그보다 좀 낮은 곳에서.”

승헌은 장난스럽게 대꾸하고는 잠시 그 자리에 서서 옥환을 바라보았다. 평소 같으면 진작 찻상 앞에 앉아 제 옆자리로 오라고 손짓했을 그가 평소와 다르게 굴자, 옥환 역시 고개를 갸웃하며 승헌을 응시했다.

“아…….”

그러고 나서야 옥환은 비로소, 승헌이 평소와는 다른 차림새를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쪽빛 비단으로 만든 옷에는 섬세하고 화려한 무늬가 은실로 수놓아져 있었고, 어깨에서부터 바닥으로 떨어지는 긴 흰색 표의는 양쪽에 두꺼운 매듭을 달고 명주실을 늘어뜨려 화려함을 가미했다. 평소에 저를 만날 때 입던 소탈한 평복이나 조회 때 입는 위엄 있는 정복과는 또 다른 느낌의, 마치 귀공자처럼 우아하고 매력적인 모습이었다. 정말로 하늘에서 내려왔나 싶을 만큼 화사한 외양에 옥환이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어찌 이리 차려입으셨습니까? 탄신연에도 이처럼 입지는 않으셨던 것 같은데.”

그러자 승헌이 씩 웃으며 태연하게 옥환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글쎄. 그대에게 보여 주고 예쁨 받고 싶어 그랬나 보지.”

“예쁨이라니…… 군왕께서 어찌 그런 말을 하십니까.”

민망해하는 옥환의 반응에 승헌은 쿡쿡 웃고는 옥환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돌연 진지해진 시선에 옥환이 슬그머니 고개를 숙였다. 승헌은 그런 옥환에게 고개를 기울여 속삭였다.

“그냥 그대 생각이 나. 그냥, 아무 때나.”

옥환은 언제부터 주위에 이런 달콤한 향기가 났었는지를 생각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또 심장이 제멋대로 뛰고 있었다. 승헌의 나직한 목소리는 귓가에 녹아내리듯 내려앉았다. 그의 부드러운 숨결에 귓불이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으나, 옥환은 승헌이 한 말에 대해 생각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정말로 그랬을까. 정말로 제 생각을 많이 하나. 자신이 그렇듯이.

발그레한 얼굴로 골똘히 생각에 잠긴 옥환을 내려다보던 승헌이 이내 짧게 웃었다. 그의 눈에 옥환이 사랑스러워 보이는 것은 더 이상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승헌은 항상, 지금 이 순간에도, 심지어는 보고 있지 않을 때조차 옥환이 견딜 수 없이 사랑스러웠다. 옥환을 향한 감정을 인정하고 난 뒤로 그것은 감당이 되지 않을 만큼 커져, 끝내는 승헌의 온 세상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옥환. 요즘 내가 좀 이상해.”

이윽고 서로의 숨결이 섞일 만큼 두 사람의 거리가 좁혀졌다. 승헌이 빙그레 웃으며 덧붙였다.

“그대도 그랬으면 좋겠어.”

승헌을 담은 옥환의 눈동자가 흔들렸으나, 승헌은 그대로 옥환의 입술에 제 입술을 부드럽게 포개었다.

옥환은 완전히 굳어 버린 채 승헌의 입맞춤을 받았다. 눈도 감을 수 없을 만큼 가슴이 떨렸다. 언제나와 다른 승헌의 모습은 옥환에게 새삼스러운 설렘을 안겼다. 그리고 그런 승헌과 나누는 접문 역시 평소와는 달랐다.

승헌은 여느 때처럼 옥환을 밀어붙이는 거친 입맞춤 대신 입술을 꾹 붙이고만 있다가 살짝 입술을 벌려 옥환의 입술을 잘근거렸다. 그러다 입술을 소리가 나게 빨고, 다시 맞붙이고, 느리게 문질렀다. 옥환이 뒤늦게 눈을 질끈 감자 승헌이 웃으며 옥환의 아랫입술을 물어 당겼다. 그러고는 옥환의 벌어진 입술 사이로 달아오른 혀를 넣어 점막을 이리저리 헤집었다. 그의 혀는 옥환의 타액을 꿀인 양 핥아 내고, 입천장과 치열 안쪽을 느긋하게 쓸기도 했다.

달라붙은 입술과 입술 안에서 옥환의 간헐적인 신음이 울렸으나, 승헌은 이리저리 고개를 꺾어가며 그 진득한 행위를 몇 번이나 되풀이했다.

그 가벼운 듯하면서도 질긴 접문에 옥환이 가쁜 호흡을 내뱉자 승헌은 그 호흡마저 삼킬 듯 옥환과의 접문에 열중했다. 승헌이 혀를 움직이거나 입술을 빨 때마다 옥환은 오금이 저렸다. 머릿속이 흐려지며 몸 한가운데부터 뜨거운 무언가가 치솟았다. 승헌은 제게 쓰러지듯 기대오는 옥환의 몸을 단단히 붙든 채 질척이는 소리를 내며 접문을 이어갔다.

“읍, 흐으, 전하.”

옥환이 고개를 돌려 승헌에게서 멀어지려 했으나 승헌은 그런 옥환을 따라와 다시금 입술에 달라붙었다. 접문이 길어질수록 옥환의 온 신경이 곤두섰고, 승헌이 손대는 허리나 허벅지가 잘게 경련했다. 지나친 흥분에 옥환은 그만 승헌과의 접문을 끝내고 싶었다. 그러나 성적인 쾌감에 멍해진 탓인지 몸은 무의식적으로 승헌을 원하듯 그에게 밀착했다.

제 입술에서 느껴지는 열이 자신의 것인지 승헌의 것인지 분간하지 못한 채 끈질긴 접문을 받아 내던 옥환은, 한참을 그러다 더 이상 숨이 막혀 오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승헌의 가슴을 가볍게 밀어냈다. 그러자 승헌은 예상보다 쉽게 밀려났다. 하나 옥환을 바라보는 눈빛은 노골적인 욕망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럼에도 섣불리 손을 뻗지 않는 승헌의 태도에 옥환이 호기롭게 말했다.

“……다른 것도 하셔도 됩니다. ……하시고 싶은 게 있으시면.”

그 말에 승헌이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고 싶은 거야 많지. 너무 많아서 탈이야.”

한데 왜 가만히 있냐는 듯 눈빛으로 물어오는 옥환의 뺨을 가만히 간질이면서 승헌이 말했다.

“오늘도 늦게 일어났다면서.”

일순 옥환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안 그래도 붉었던 얼굴이 더욱 붉어지는 것을 보며 승헌은 난감한 듯, 우스운 듯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는 옥환도 어느 정도 적응이 되어가는 중이었지만, 평생 색사를 멀리하고 살아왔던 옥환에게 승헌과의 교합은 감당하기 쉬운 것이 아니었다. 평소 자신의 체력이 약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는데, 일 때문에 며칠 밤을 새우는 건 가능해도 승헌과 정사를 벌인 다음 날은 도저히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아무래도 승헌의 넘쳐 나는 양기를, 정욕을 몰랐던 자신의 몸이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실제로 벌써 몇 번이나 승헌과 밤을 보내고 다음 날 앓아누웠던 옥환이었으니, 승헌이 걱정하는 것을 옥환 역시 이해는 했다.

“그대가 얼마나 철두철미한 사람인지 모르지 않는데, 답지 않게 늦잠을 잤다면 그건 내 탓 아니겠나?”

그러더니 승헌은 자신의 무해함을 보여 주려는 듯 양손을 들고 한 걸음 물러섰다. 멋쩍음에 시선을 내리깔았던 옥환은 고민하다 이렇게 말했다.

“……이제 많이 익숙해졌습니다.”

“뭐?”

그냥 이대로 수긍할 줄 알았더니, 난데없이 자신을 부추기는 듯한 옥환의 발언에 승헌이 잠시 넋 나간 표정을 지었다. 하나 그는 곧 소리 내어 웃었다. 옥환이 어디 그냥 사내던가. 대담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대장부 중의 대장부 아니던가. 이 청아한 얼굴에 잠시 잊고는 할 뿐, 옥환은 항상 대담한 사람이었다.

이윽고 자신에게로 뻗어오는 손길에 옥환이 긴장한 채 어깨를 굳혔으나, 승헌은 그런 옥환의 어깨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하나 나는 그냥 그대와 차를 마시는 것도 좋아.”

“……정말이십니까?”

“그럼. 그대와 후원에 놀러 가는 것도 괜찮고. 둘이 가서 복숭아나 먹을까? 그대가 껍질을 까주면 좋겠는데.”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려던 옥환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는 머뭇거렸다. 승헌이 이렇게 입은 것은 그의 말과 달리 자신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가 아닐 터였다. 연회든 사절 접대든, 분명 공적인 목적이 있으리라. 그런 그가 저와 노닥거리는 데 시간을 허비하게 만들 수는 없었다. 옥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늘은 안 될 듯합니다. 또 궁인들 몰래 나오신 것 아닙니까. 그만 편전으로 돌아가십시오.”

옥환이 금세 평소의 완고한 말투로 돌아와 단호하게 대꾸하니, 승헌은 한숨을 폭 내쉬고는 품속을 뒤지며 선심 쓰듯 말했다.

“그대에게 줄 선물도 가져왔는데.”

“선물이요?”

이윽고 눈을 동그랗게 뜬 옥환의 손바닥 위에 승헌이 무언가를 턱 하니 내놓았다. 그가 선물이랍시고 꺼낸 것은 다름 아닌 서찰이었다. 제게 연서라도 썼나 싶어 다소 가벼운 기분으로 서찰을 펼친 옥환은 첫 문장을 읽자마자 그대로 굳어 버렸다.

‘스승님께.’

자신을 스승님이라 칭할 이는 단 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 적힌 글씨 역시, 제게는 너무나도 익숙한 것이었다. 하나 믿을 수가 없었다. 종소가 살아 있단 말인가? 대체 어떻게…… 어떻게?

‘전하께서 이 목숨을 부지해 주시어…….’

‘……저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궁 안의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 몸을 숨겨야 해서 미처 연락을 드리지 못하였으니…….’

빠르게 서찰을 읽어 내려간 옥환은 모든 전모를 파악하고는 당황한 얼굴로 승헌을 올려다보았다. 구해 주지 않겠다고 했었다. 왕의 위치로는 그럴 수가 없다고. 제게 오만하다며 화를 내지 않았던가. 설마 그것이 다, 백청과 무관들의 의심을 피하기 위한 연기였던가?

제 앞의 승헌은 다정한 눈빛으로 자신이 웃어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뻐하고, 고마워하기를. 왜 이렇게까지 한단 말인가. 옥환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승헌이 이럴 필요는 없었다. 한때 종소를 구해 주지 않은 그를 원망했던 것은 사실이나, 그가 그럴 수밖에 없는 처지임을 옥환은 잘 이해하고 있었다. 한데 그는 굳이 어려움을 무릅쓰고 자신의 청을 들어 주었다. 그가 얼굴도 몇 번 보지 않은 하인을 위해 그랬다고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하면, 백청에 의해 죽게 생긴 억울한 백성을 구하기 위해서였을까? 아니면 백청의 약점을 잡기 위해서? 아아, 그래, 그랬을 것이다. 종소 또한 그에게는 정치적으로 이용할 도구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 그렇다면 종소가 살아 있다는 것을 제게 알려 주는 이유는 무엇일까. 서찰까지 직접 가져다주며, 자신의 반응을 기대하고 있는 것은 어째서란 말인가. 이것은 과했다. 그는 군왕으로서, 이리해선 안 되었다. 고작 첩 따위를 위해서…… 벽국의 첩자 따위를 위해서 그러면 안 되었다.

기대했던 반응이 나오지 않자 승헌의 표정이 실망과 의문으로 물들어갔으나, 옥환은 그것을 외면하듯 그에게서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때 마침, 멀리서 승헌을 찾는 궁인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하, 전하! 어디 계시옵니까!”

승헌은 궁인들의 외침을 듣고는 눈썹을 찌푸리더니 갑자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고는 옥환이 무어라 하기도 전에 냉큼 한쪽에 놓인 자개장 안으로 몸을 숨겼다.

“전하, 뭐하시는…….”

기가 막혀서 승헌을 끌어내려는 옥환에게, 승헌이 빠르게 말했다.

“내가 그대의 원대로 종소를 구해 주었지 않나.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어야지?”

“전하. 일국의 군주는 자고로 백성의 본보기가 되어야 하는 법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으시고 이리 꾀만 부리시니 백성이 무엇을 보고 배우겠습니까? 무엇보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으시기에 도망까지 나와서 숨으려 하시는 겁니까? 혹 누굴 만나시는 겁니까?”

“……글쎄.”

작게 중얼거리는 승헌의 눈동자에 알 수 없는 감정이 깃들었다가 사라졌다. 후회 같기도 하고 기대 같기도 한 모호한 감정이었다. 옥환이 찰나에 드러난 그 감정의 정체를 아주 잠깐 생각하는 동안 승헌은 방심한 그를 그대로 끌어당기더니, 얼른 자개장의 문을 닫아 버렸다.

졸지에 컴컴하고 좁은 장 안에 승헌과 단둘이 갇히게 된 옥환이 얼른 나가려 했으나, 그보다 먼저 들려온 태감의 목소리에 그는 그대로 정지했다.

“태사. 태사. 안에 계십니까?”

승헌을 찾으러 여기까지 온 태감은 문 앞에서 초조한 목소리로 옥환을 불렀다. 하나 옥환이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자 설마 또 둘이 정사를 벌이고 있나 싶어 적잖이 난감해졌다. 한데 그때 마침 심부름을 하고 돌아온 처소의 하인이 무슨 일이냐 물었다. 태감이 풀 죽은 어조로 입을 열었다.

“혹 전하께서 예 찾아오시지 않았는가?”

“음, 문으로 들어오시지는 않았습니다만.”

“또 창문으로 들어가신 건가……. 태사께선 안에 계시나?”

“예, 계실 겁니다.”

내내 대화를 듣고 있던 옥환이 혹 두 사람이 방 안으로 들어올까 싶어 다시 바깥으로 나가려 했으나, 승헌은 그런 옥환의 몸을 꼭 끌어안고 통 놔주질 않았다. 옥환은 소리를 죽여 외쳤다.

“전하, 놔주십시오……! 어차피 금방 들킵니다!”

“하면 이대로 들켜도 나쁘지 않겠군. 첩과 옷장 안에서 굴러먹다 들킨 군왕이라. 그것도 괜찮지 않나?”

“굴러먹다니, 그런 낯부끄러운 말씀 좀 하지 마십시오!”

“내 말투는 그만 지적하고, 정말로 그런 오해를 안 살 거라고 생각해?”

옥환은 입을 다물었다. 승헌과 비좁은 공간에서 몸싸움을 벌이는 바람에 두 사람의 옷매무새는 상당히 흐트러져 있었다. 게다가 대낮에 왕과 그의 첩이 옷장 안에 들어가 있는 상황을 설명할 마땅한 이유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승헌이 갑자기 숨자고 했다고 어찌 말할 것이며, 궁인들이 그것을 믿으면 믿는 대로 승헌의 위엄은 땅에 처박힐 것이 뻔하지 않은가.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는 것과 승헌의 위엄을 지키는 것 중에서, 결국 옥환은 후자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승헌이 자신을 갑자기 끌어당기지만 않았다면 하지 않아도 되었을 선택이었지만.

옥환이 잠잠해지니 승헌은 두 손을 깍지 껴 옥환의 몸을 단단히 붙들고는 “고마워.” 하고 속삭였다. 승헌의 숨결이나 체온에 몸이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이 느껴졌으나, 옥환은 아랫입술을 꽉 물고는 바깥에서 들려오는 대화에 집중하려 애를 썼다.

마침 옥환의 하인은 옥환이 아무리 불러도 대꾸가 없으니 처소 문을 열어 본 참인 듯했다.

“태사께서 안 계시지 않나?”

“그러게요? 아까까지 계셨는데. 잠시 자리를 비우셨나?”

“……하면 전하께서도 안 오신 건가…….”

다행히 태감은 방 안에 옥환도, 승헌도 없음을 확인하고는 돌아가려는 듯한 눈치였다. 설마하니 그들도 두 사람이 옷장 안에 숨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을 터였다.

“한데 전하께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아까부터 가만 들으니 다들 전하를 찾고 있는 것 같던데…….”

“에휴. 말도 말게. 아침나절부터 온 궁인이 달라붙어 치장을 해드렸더니, 거울을 보시고는 갑자기 창을 넘어 사라지시지 뭔가.”

태감의 한숨 섞인 대답에 옥환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제 처소에서만 창을 넘는 게 아니었던 건가. 옥환은 승헌을 나무라듯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 그 표정이 보일 리 만무했으나, 승헌은 제 발이 저렸는지 작게 헛기침을 했다. 하나 태감의 이야기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러고는 온 전각의 지붕을 타고 돌아다니시는데, 그 높은 곳에 계시는 분을 붙잡을 재주가 어디 있겠나? 전하를 쫓아 궁 안을 휘젓고 다니느라 다들 지쳐 나자빠졌다네.”

옥환은 이번엔 승헌이 어둠 속에서도 제 못마땅함을 느낄 수 있도록 “전하.” 하고 나무라듯 불렀다. 승헌 역시 작게 “왜. 뭐.” 하고 투덜거렸다.

“궁인들 보기 부끄럽지도 않으십니까? 군왕이 아니더라도 다 큰 장정이 지붕 위를 밟고 다니다니요.”

이제 보니 방금 제 처소에 왔을 때도 하늘에서 떨어진 게 아니라 지붕에서 떨어진 게 분명했다. 하나 승헌은 불리한 상황에선 침묵을 택했다. 옥환은 장 밖으로 나가면 그에게 단단히 한마디 해 주겠노라 다짐했다. 그리고 그때 다시 들려온 태감의 목소리가 옥환의 주의를 사로잡았다.

“곧 예부상서 댁 규수께서 오실 시각인데…… 그 신출귀몰한 분을 어디서 찾는단 말인가.”

“아, 오늘이 간택 후보를 만나 뵙는 날입니까? 저런…… 전하께서 부르시고는 어디를 가신 것인지요.”

“그러게 말이네.”

간택 후보를 만난다는 말에 옥환이 멈칫했다. 돌연 찬물을 뒤집어쓴 듯한 감각이었다. 그랬구나. 그래서 이리 멋지게 차려입었구나. 옥환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런 줄도 모르고 승헌의 새로운 모습에 설렜던 자신이 더없이 한심하게 여겨졌다.

승헌이 뒤에서 “옥환.” 하고 작게 부르는 소리가 들렸으나 옥환은 대꾸하지 않았다.

“혹 태사께서 돌아오시거든 전하를 뵙지 않았는지 꼭 여쭈어 주게나.”

“아, 알겠습니다.”

그렇게 태감이 물러가고 하인마저 방을 나간 후 마침내 두 사람이 자개장에서 나왔다. 승헌은 태감이 나간 문 쪽을 매섭게 노려보고는 그대로 인상을 쓴 채 옥환에게 다가갔다. 옥환이 화를 내면 화를 내는 대로 문제겠지만, 옥환이 화내지 않을 것을 알기에 더더욱 심기가 불편했다.

이윽고 옥환은 가벼운 한숨을 내쉬더니 말없이 승헌의 차림새를 가다듬어 주었다. 영문을 모르는 와중에도 제게 닿는 옥환의 손길에 승헌의 표정이 풀어졌다. 하나 그도 잠시, 이어진 옥환의 말에 그의 표정은 싸늘하게 바뀌었다.

“이리 중요한 날에 흐트러진 모습으로 가실 수는 없지요.”

“…….”

“누가 봐도 위장부이시나, 오늘따라 유독 그 깊이가 다르니 예부상서의 여식도 전하께 한눈에 반할 것입니다. 제게 하듯 못되게 굴지 마시고, 상냥하게 대해 주십시오.”

“……내가 그대에게 그리 못되게 굴었나?”

승헌이 옥환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 안타까움과 후회가 서린 눈빛을 외면하며 옥환이 말을 이었다.

“어느 누가 자상한 사내를 마다하겠습니까. 듣자 하니 예부상서의 여식은 학식이 높고 품행이 방정하여 많은 귀족가에서 탐내던 인재라고 합니다. 백성들 사이에서도 국모의 그릇이라 칭찬을 한다고 하니, 부디 전하와 좋은 인연으로 맺어졌으면 합니다.”

이것은 옥환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자신이 승헌에게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은 거짓이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잔정에서 그쳐야만 했다. 그 이상의 감정으로 발전해서는 안 되고, 한다 해도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기에 자신과 승헌은 너무나 다른 길에 서 있었다.

승헌이 혼인을 하면 자연히 그의 마음은 멀어지게 될 것이다. 물론 멀어지고 싶지 않았지만, 그러한 이기적인 이유로 그의 왕권을 위태롭게 만들 수는 없었다. 승헌을 위하는 마음과 염완을 배신하고 싶지 않은 마음 모두가, 옥환에게 승헌의 혼인을 받아들이라고 강요하고 있었다.

옥환의 단단한 의지가 깃든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보던 승헌이 씁쓸하게 웃었다. 이윽고 그가 제 옷깃을 매만지고 있는 옥환의 손을 천천히 떼어 내며 말했다.

“그대가 그 여인이 마음에 든다면, 그래. 되도록 그 여인과 혼인하도록 하지.”

“……전하의 마음에도 드는 여인과 하십시오.”

“정말 끝까지.”

화를 내려던 승헌은 강제로 분노를 삼켰다. 이럴 줄 몰랐던 것이 아니다. 결국 옥환의 청을 받아들이기로 하지 않았던가. 혼인을 하고 후사를 봐야만 그를 사랑할 수 있다면, 그 또한 감내하겠노라고.

하나 그렇다고 애써 괜찮은 척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 승헌은 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듯 인사도 없이 돌아서 옥환의 처소를 나왔다. 하나 그의 사나운 발걸음은 얼마 가지 못해 질질 끌리듯 느려졌다. 이윽고 그의 입술 사이로 한숨이 흩어졌다.

이리 밉고 서운한데, 돌아서자마자 또 보고 싶으니 그야말로 병도 이런 중병이 없었다.

***

총천연색의 꽃이 흐드러지게 핀 후원의 정자에서, 누가 봐도 선남선녀인 두 남녀가 마주 앉아 있었다. 사내는 승헌이었고, 맞은편에 앉은 여인이 바로 예부상서의 여식 “문아원”이었다. 맑은 피부에 오목조목한 눈코입을 가진 그녀는 예전의 승헌이라면 혹했을지도 모를 만큼의 미인이었다. 심지어 귀족 가문의 여식답게 그저 찻잔을 드는 움직임 하나마저도 단정하고 우아했으니, 옥환이 왜 얼굴도 모르는 자를 칭찬했는지 알 것도 같았다.

그에 반해 잘 차려입은 것이 무색하게 삐딱한 자세로 앉아 옷자락이 구겨지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는 승헌은, 턱을 괸 채 무심하게 문아원을 응시하고 있었다. 승헌의 눈에도 그녀는 왕후의 역할을 맡기에 제격인 듯싶었다. 하나 겉모습만 그래서는 충분하지 않았다. 승헌은 왕후가 제 애정을 바라는 것도, 자신이 옥환에게 쏟아부을 애정을 질투하는 것도 바라지 않았다. 하나 아무것도 모르는 이에게 그저 참기만 하라고 강요할 순 없으니, 그도 나름의 확인을 거치고 고심을 하여 수많은 후보 중 문아원을 불러낸 것이었다.

만일 그녀가 안 된다면, 승헌은 마땅한 왕후감이 나타날 때까지 얼마든 기다릴 수 있었다. 옥환과 자신을 위한 일이었으니까.

“문 소저. 알겠지만 궁인을 모두 물려 지금 이 주위엔 과인과 그대뿐이야.”

“……참으로 고즈넉하고 좋사옵니다, 전하. 밀담을 나누기에도 말이옵니다.”

마치 제 속을 꿰뚫어 본 듯한 그녀의 대답에 승헌이 짧게 코웃음 쳤다. 옥환은 현명하고 어진 이를 들이라 닦달이었으나, 승헌의 생각에 너무 똑똑한 것도 좋지는 않았다. 물론 왕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는 당당한 여인의 모습이 일순 옥환의 모습과 겹쳐 보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옥환은 옥환이었고 여인은 여인이었다. 두 사람은 달랐고, 승헌은 평생이 가도 그녀를 사랑하게 될 순 없을 터였다. 승헌은 들고 있던 찻잔을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제법 배짱이 두둑한 여인이로군. 그게 언제까지 갈까 궁금하지만.”

승헌의 도발에 문아원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머릿속에 옥환의 상냥하게 대해 주라는 말이 떠돌아다녔으나 승헌은 그것을 깡그리 무시했다.

승헌은 마치 날씨 얘기를 하듯 천연덕스러운 말투로 툭 내뱉었다.

“그대에게 정인이 있음을 알고 있어.”

가히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왕후 간택 후보로 올라온 여인에게 정인이라니. 내내 흔들림 없는 움직임으로 차를 마시던 문아원의 손끝이 한순간 가늘게 떨렸다. 물론 동요의 징후는 순식간에 사라졌으나, 승헌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뭐, 정인이 있다는데 과인이 포기 못할 이유도 없지만…… 공교롭게도 그 상대가 그대의 집에서 일하는 하인이라지? 그 누가 와도 절대 맺어질 수 없는 상대가 아닌가?”

“……이미 다 알고, 부르신 것이옵니까.”

고운 다홍색 치맛자락을 쥔 문아원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승헌은 심드렁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하면, 과인의 정비가 될 자를 조사도 않고 택할 거라 생각했나?”

“혹 이 일로 제 아비를 겁박하시려는 거라면 그 생각은 그만 접으시는 게 좋을 것이옵니다. 여차할 땐 소녀의 명줄을 끊으면 그만이니.”

약점을 잡으려 든다면 죽겠다는 문아원의 으름장에 승헌이 피식 웃었다. 여인이 아닌 사내로 태어났다면 필시 큰일을 하고도 남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하나 여인의 몸으로 못할 것은 또 무엇인가. 지금 이 순간, 승헌은 제 계획에 문아원을 끌어들이기로 마음먹었다.

“소저의 아비를 건드릴 생각은 전혀 없어. 예부상서는 그럭저럭 일을 잘하고 있으니 말이야. 안 그래도 지난 일로 죽은 이가 한 무더기인데, 또 칼을 휘두르면 조정에 일을 할 자가 남아나겠나?”

승헌은 태평한 어조로 말했으나 그 말을 듣고 있는 문아원의 속은 바싹 타들어 갔다. 왕이 무서운 자라는 것은 아비에게 몇 번이나 들어 잘 알고 있었다. 미소를 지어도 그 안에 독이 있고, 화를 내도 그 안에 치밀한 계산이 있다는 능구렁이, 아니 꼬리가 구백 개는 달린 여우와 같은 교활한 자라고 했다.

아무도 모를 비밀을 간직한 채 간택 후보로 서는 게 두렵지 않다면 거짓이었겠으나, 그녀는 홀로 저를 키워준 아비의 청을 차마 거절하지 못해 이 자리에 와 있었다.

아비나 정인에게 폐를 끼칠 바에야 그냥 혀 깨물고 죽는 것이 낫다. 문아원은 각오를 단단히 다지고 승헌의 처분을 기다렸다.

“문 소저.”

“…….”

문아원이 침을 꿀꺽 삼키고 승헌을 바라보았다. 이런 분위기만 아니라면 몇 번이고 감탄했을 미남자였다. 이윽고 그 사내는 예기치 못한 말을 꺼냈다.

“과인에게도 정인이 있어.”

“……예……?”

문아원은 순간 왕의 앞이라는 것도 잊고 얼빠진 목소리로 되물었다. 승헌이 빈 잔에 차를 따르려는 것을 얼른 막아 대신 따르며, 그녀는 승헌의 기색을 살폈다. 그리고 그녀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마치 얼어붙은 송곳을 품은 듯했던 승헌의 눈동자가 어느새 봄볕보다 더 따스하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문아원 역시 같은 입장이기에 알았다. 승헌이 진정으로 그 정인을 연모하고 있다는 것을.

돌연 동병상련의 정에 이끌린 그녀는 조심스레 그 상대를 물었다.

“대관절 어떤 대단한 여인이 전하의 마음을 훔친 것이옵니까?”

“……여인이 아니야.”

“예? 하면…….”

사내란 말인가? 당황한 문아원의 머릿속에 말로만 들었던 “첩”의 존재가 스쳐 지나갔다. 첩이라는 신분이 화제가 된 것은 잠시뿐, 태사나 명재상으로 더 익히 알려졌던 사람이라 연결 짓기가 쉽지도 않았다. 하나 승헌이 밤거리에 나가 뜬금없이 웬 사내에게 반한 것이 아니라면, 그와 그런 관계가 될 만한 사람은 주변에 하나뿐이었다.

“혹 그분이 금야 선생, 이시옵니까?”

승헌은 복잡한 눈으로 문아원을 바라보다가 “그래.” 하고 짧게 대꾸했다.

“나의 유일한, 그리고 앞으로도 하나뿐일 정인이지.”

“…….”

“하나 아무리 사랑한들 무엇하겠나. 그대도 과인도, 앞을 가로막는 벽이 너무 두터운 것을.”

잠시나마 온기가 느껴졌던 눈동자는 현실의 잔혹함에 파묻혀 사라졌다. 그 표정을 잘 아는 문아원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벽을…… 전하와 소녀의 혼인으로 뚫고자 하시옵니까?”

“그래. 왕후가 되어 내게 사랑받을 꿈을 꾸는 여인을 데려다 놓는 것보다는 차라리 다른 사내를 품은 여인을 데려다 놓는 게 낫지 않나. 과인은 그 누구도 옥환에게 상처 주지 않기를 바라.”

중신 집안의 규수로 하인을 품은 자신도 자신이었으나, 왕의 신분으로 적국에서 온, 그것도 같은 사내를 품은 승헌도 어처구니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렇기에 더더욱 두 사람은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고 깊이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진지하게 고민하던 문아원이 신중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소녀는…… 다른 이를 가슴에 담은 채로 전하의 비가 되고자 찾아왔사옵니다. 가여운 홀아비의 청을 거절할 수 없었기 때문이옵니다. 소녀는 정인과의 정도, 부모와의 정도 포기하고 싶지 않고 포기할 수도 없사옵니다. 전하께서도 필시 그러하기에 이런 결정을 내리셨겠지요.”

“그래. 하나 선택은 소저의 몫이야. 겉치레에 불과하다고 해도 사랑하는 이가 다른 이의 부인이 되는 것이 아닌가. 그대의 정인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겠지.”

“아마 그 사람은…… 이해해 줄 것이옵니다. 그 사람의 사랑은, 소녀가 가진 것을 하나도 놓치지 않도록 지켜주는 것이기에.”

문아원의 애정 어린 목소리를 들으며 승헌은 옥환을 떠올렸다. 차라리 옥환도 왕인 자신을 생각해 혼인을 부추긴 것이었으면 했다. 자신을 아껴서, 자신을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 그런 것이었으면.

“그 정인 잘 지키도록 해. 하인이 모시는 주인을 연모하다니. 그것만으로 그자에겐 크나큰 용기가 필요했겠지.”

“……망극하옵니다, 전하.”

“아무튼 당장 결정하라고는 안 해. 이틀의 말미를 줄 테니 그 안에 소저의 결정을 들려줬으면 좋겠군.”

“그리하겠사옵니다.”

문아원은 깊이 고개 숙여 절을 올리고는 일어섰다. 승헌은 그녀를 멀리 배웅하지는 않았다. 후원에서 그녀와 헤어진 승헌은 다시 정자로 돌아와 환관에게 술을 가져오라 일렀다.

이것이 정녕 최선인지, 승헌 역시도 알 수 없었다. 아니, 이게 최선이었다. 옥환은 어쩌면 벽국의 첩자일지도 몰랐고, 그게 아니더라도 여전히 염완을 가슴 깊이 품고 있었으며, 더 나아가서는 그를…… 연모했을 수도 있었다. 그러니 나라를 위해서는 옥환과 거리를 두는 게 맞았다. 적어도 자신의 가장 가까운 자리는 비워 놓아야만 했다.

하나 옥환이 그 자리에 앉으려 한다면, 자신은 자리를 내어주고 말 것임을 알고 있었다. 옥환을 향한 의심은 아무것도 해명된 것이 없는데도, 제 마음은 앞뒤 분간을 못하고 그저 그에게만 달려들었다. 하루, 이틀, 해가 한 번 뜨고 질 때마다 옥환을 향한 마음은 배가 되었다. 처음 이 연심을 깨달았을 때만 해도 이렇지는 않았는데. 옥환 때문에, 그저 옥환 때문에, 주제도 모르는 감정이 흐드러졌다.

승헌은 여전히 옥환이 혼사를 막아 주길 바랐다. 저를 다시 이용하려는 것이어도 좋으니, 혼인하지 말라고 해 주기를 바랐다. 하다못해 기뻐하고 부추기지는 않았으면 했다. 참으로 터무니없는 기대였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이러한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 자신은 왕으로서의 자격을 잃어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더는 공명정대하지 못했다.

‘……나는 그대가 원하는 훌륭한 왕조차 되지 못하는군…….’

승헌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실은 자신을 이렇게 만든 상대가 막상 저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했다면, 문아원은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가여워했을까? 아니면 우스워했을까? 하나 승헌 역시 본인이 스스로의 처지에 어떤 마음을 느끼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그는 한참 동안 쓰디쓴 속을 달래듯 술잔만 기울였다.

***

“웬 것입니까?”

제 앞에 뜬금없이 큰 보따리를 내놓는 문하시중을 바라보며 옥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문하시중은 웃으며 선물이니 풀어 보시라 일렀다. 옥환은 최근 들어 제게 선물을 갖다 주는 사람이 많아진 것 같다고 생각하며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좌우로 길고 무게가 있는 것으로 보아 대충 보따리 안의 물건이 무엇인지는 짐작이 갔다.

아니나 다를까, 보따리를 푸니 이내 고급스러운 칠현금七絃琴이 모습을 드러냈다. 검게 칠해진 판은 깊이가 있었고 명주실을 꼬아 만든 일곱 개의 현은 가지런히 놓여 고상함을 뽐내고 있었다.

오동나무로 만든 앞판을 가만히 쓸어 보던 옥환의 입가에 살포시 미소가 걸렸다.

“아주 좋은 금입니다. 이 정도면 필시 이름난 명인이 제작한 것일 텐데요.”

“그럼요. 서국에서 제일가는 명인이 평생을 들여 만든 천하오금天下五琴 중 하나입니다. 이리저리 돌고 돌아 제 손에 들어온 것이지요.”

“그렇다면 필시 비싼 값을 치르셨을 텐데, 어찌 이 귀한 것을 제게 주십니까?”

“뭐, 저야 금을 탈 줄도 모르고, 왜 소문 중에 태사께서 초령족의 왕을 금 연주로 사로잡았다는 말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 소리 한번 들어 보려 뇌물을 바친 것이지요.”

“뇌물이라니, 시중이나 되시는 분께서 표현을 삼가십시오.”

옥환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금에 시선을 고정한 채 그것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금을 선물한 게 탁월한 선택이었다는 걸 깨달은 문하시중은 흡족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니 제게도 선물에 대한 보답으로 연주 한번 들려주시지 않겠습니까?”

잠시 고민하던 옥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금을 타는 것이야 어렵지도 않았고, 큰 선물을 받았으니 마땅히 보답은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다만 워낙 오랜만에 잡아 보는 터라, 실력이 녹슬지는 않았을지가 걱정이었다. 옥환이 현을 몇 번 튕겨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워낙 좋은 금이라 다소 실력이 부족하더라도 소리가 받쳐 주겠거니 싶었다.

이윽고 옥환이 왼손으로 줄을 짚은 채 연주를 시작했다.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팽팽한 현을 가볍게 튕기자 현이 흔들리며 영롱한 음이 퍼져나갔다. 이내 한 음, 한 음이 연결되며 은은하고 묵직한 선율이 공간을 채우기 시작했다. 낮고 느리게 울리던 가락은 차츰 처연해지며 높이 올라갔다 끊어지고, 다시 이어지며 낮아졌다. 옥환은 현을 지그시 누르며 곡에 서린 한을 고스란히 담아냈다. 마치 누군가가 섧게 우는 듯 애틋하고 절절한 소리였다. 듣는 이의 심금을 절로 울리고도 남을 애달픈 곡이었다.

그렇게 한동안 이어지던 연주는 가장 낮은 음을 묵직하게 튕기는 것으로 끝이 났다. 어느 순간부터 소맷자락으로 눈물을 찍어내던 문하시중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왜 초령족의 왕이 태사의 연주에 홀딱 넘어갔는지 알겠습니다……. 태사처럼 아름다우신 분이 그리 수준 높은 연주를 하시는데 어느 누가 감탄하지 않겠습니까?”

옥환은 그저 말없이 미소만 지었다. 초령족의 왕을 제 외모와 칠현금 연주로 꾀어낸 것은 사실이었으나 결코 자랑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옥환은 막연히 그 소문이 승헌의 귀에는 들어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리 좋은 연주도 들었으니 태사께 금을 드린 것이 후회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별말씀을요. 이것은 문하시중께서 제게 맡기신 것이라 생각하겠습니다. 연주가 듣고 싶으시거든 주저 말고 찾아오십시오.”

“하하, 어찌 그러겠습니까. 간혹 가다 찾아뵐 테니 너무 부담 갖지 마십시오.”

잠시 대화를 더 나누다 돌아가려는 문하시중을 배웅하는데, 불현듯 문하시중이 뒤를 돌아보더니 물었다.

“아 참, 한데 아까 연주하신 그 곡은 무엇입니까? 들어본 적이 없는 곡입니다만 계속 마음에 남아서 말입니다.”

“……벽국의 곡조입니다. 죽은 연인을 그리워하는 내용이지요.”

대답을 들은 문하시중이 잠시 침묵하더니 넌지시 한마디를 던졌다.

“태사께서 무엇을 생각하며 그 곡을 연주하셨을지 궁금하군요.”

“저는…….”

“아, 대답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문하시중은 자상하게 웃으며 인사를 하고는 떠나갔다. 자리로 돌아온 옥환은 칠현금을 쓰다듬으며 상념에 잠겼다. 무슨 생각을 했느냐……. 그 절절한 이별곡을 연주하면서, 자신이 생각했던 것은 누구던가.

사실 옥환은 누구도 떠올리지 않았었다. 염완도, 승헌도 아니었다. 그저 자연히, 아주 당연한 듯이 손가락이 현을 뜯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니 그 곡이었을 뿐이다. 왜 그런지는 옥환도 설명할 수 없었다. 무엇이 그리 애달프고 슬퍼서.

‘슬펐나?’

좋은 금을 받아 기뻤던 것 같은데. 하나 옥환도 제 마음을 가늠할 수가 없었다. 내내 무언가가 꽉 막힌 듯, 해소되지 않는 감정이 있었다. 그것은 어느 시점을 기준으로 더더욱 커져 이제는 잠을 이루지 못할 지경에 이르기까지 했다.

계평은 이런 와중에도 계속 가만히만 있을 거냐며 독촉을 했지만 지금의 옥환은 무언가를 할 의욕도 용기도 없었다. 평소라면 상황을 주시하며 정보를 모으고 있다고 얘기했을 텐데, 그런 변명조차 제대로 내놓지 못했다. 자신의 주저함을 부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제 마음이 정리되지 않는 한은 서국과 벽국 어느 한쪽도 택할 수 없었다. 생각하고 감당해야 할 것이 너무나 많았고 인내하고 단념해야 하는 상황은 끝도 없었다. 옥환은 길을 잃은 채, 찬비를 맞으며 주저앉아 있었다. 그저 괜찮은 척하고 있을 뿐. 그저 덮어놓고 생각하지 않으려 할 뿐.

차라리 죽을 것을. 죽을 자리라면 수도 없이 많았는데. 무슨 대단한 일을 하겠다고 끈질기게 살아남아 서국의 신하도, 벽국의 첩자도 아닌 채 살아가고 있단 말인가. 이렇게 살아서 이룬 것은 무엇이 있던가.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승헌을 만난 그때부터 이미 어긋나 있었나?

그럼에도 승헌을 보면, 죽은 듯 쓰러져 있던 때와 달리 다시 건강해진 그의 모습을 확인하면, 이 모든 시름은 잊히고 메마른 가슴이 달가운 비를 맞은 듯 벅차올랐다. 그와 손끝이라도 닿으려 하면 심장이 널을 뛰었고 그의 미소를 보면 제 입가에도 절로 미소가 피어났다. 하나 아닐 것이다. 이 마음은 그저 그를 향한 존경과 미안함일 뿐, 그 외의 의미는 없으리라. 옥환은 수도 없이 아니라고, 그런 게 아니라고 타일렀다.

다음 날, 여전히 침울하게 가라앉아 있던 옥환이 기분이나 달랠 겸 칠현금을 꺼내 드니 하인이 그 모습을 보고는 물었다.

“금을 타시렵니까? 하면 오늘은 후원에서 타시는 게 어떻습니까? 날이 좋아 썩 괜찮으실 겁니다.”

“음.”

옥환이 후원을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된 뒤로 하인은 간혹 이런 제안을 해 오고는 했다. 오늘은 공연히 후원에 가는 게 내키지 않았지만, 하인이 모처럼 얘기를 꺼내 준 데다가 딱히 거절할 이유도 없었기에 옥환은 곧 칠현금을 챙겨 나갈 채비를 했다.

이윽고 꽃이 만발한 후원 입구에 다다른 옥환은 뜻밖의 인물과 조우했다.

“백 장군.”

옥환이 의외라는 듯 이름을 부르자 백고가 옥환의 목소리를 듣고는 화색이 되어 돌아보았다. 그 반가운 기색에 옥환이 껄끄러운 표정을 지었으나 지나가다 만난 것을 무시하고 갈 수도 없는 일이었다. 옥환은 최대한 빨리 인사만 나누고 헤어질 요량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태사.”

“안녕하십니까, 백 장군.”

“아, 네. 후원에 가시는 길입니까?”

백고가 하인이 든 칠현금에 눈길을 주며 묻자 옥환은 그렇다고 대꾸했다. 제 연주를 듣고 싶어 하는 눈치였으나 옥환은 그것을 모른 척하고 먼저 가 보겠다고 말하려 했다. 한데 그때, 두 사람의 주의를 끌 듯 후원 안에서 부드러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그런 일이 있었단 말이옵니까?”

“그래. 다 지나간 일이지만.”

고개를 돌리자 승헌과 아리따운 여인이 정답게 대화를 나누며 걸어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백고가 난처한 듯 옥환의 표정을 살폈다. 옥환은 그 자리에 박힌 듯 서서 승헌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머잖아 승헌과 여인 역시 두 사람을 발견하고는 천천히 다가왔다.

“옥환.”

승헌은 아까까지의 미소는 온데간데없이 살짝 인상을 쓴 채 옥환과 백고를 번갈아 보았다. 여전히 승헌을 넋 나간 듯 보고 있던 옥환이 속을 알 수 없는 얼굴로 공손히 읍했다.

“전하.”

백고 역시 뒤늦게 인사를 올리자 여인이 승헌을 올려다보았다. 승헌은 두 사람에게 여인을 소개했다.

“문가의 아원 소저네. 아원. 이쪽은 태사, 그리고 이쪽은 백 장군이야.”

옥환은 여인을 이름으로 부르는 승헌의 모습에 일순 동요했다. 둘이 벌써 그렇게 가까워진 것인가. 함께 웃고 있던 두 사람의 모습이 떠오르자 목구멍으로 독이 넘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여인, 문아원은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우아하게 인사를 올렸다.

“문아원이라고 합니다.”

옥환은 고개를 숙여 인사를 받으며 그제야 문아원에게 시선을 향했다. 이 여인이 바로 승헌의 혼인 상대라는 사실에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들어만 봤지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인 그녀는 생각보다 훨씬 더 아름다웠고, 또…… 승헌과도 너무나 잘 어울렸다. 옥환은 자꾸만 떨리는 다리에 힘을 주어 버티며 억지 미소를 만들어 냈다.

“문 소저이시군요. 반갑습니다.”

옥환을 다정하게 바라보던 문아원은 옥환의 친절을 가장한 인사에 환한 얼굴로 응했다.

“명성이 자자하신 금야 선생을 이리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한 번쯤은 꼭 뵙고 싶었는데, 전하께 청해도 통 보여 주질 않으시지 뭡니까. 하여 퍽 아쉬웠던 참에 이처럼 만났으니 소녀가 참으로 운이 좋은가 봅니다.”

“……아닙니다. 예부상서께서는 훌륭한 충신이지요. 존경하는 분의 따님을 뵙게 되어 저도 영광입니다.”

문아원은 말씀도 곱게 해 주신다며 칭찬을 건네고는 이내 백고와도 인사를 나누었다. 그 사이 옥환과 눈을 마주친 승헌이 살짝 미간을 찌푸리고는 백고를 턱으로 가리켰다. 왜 그와 같이 있느냐는 무언의 추궁이었다. 옥환은 대꾸하지 않고 눈을 돌렸다.

“두 분이 담소를 나누시는데 방해할 순 없으니, 저희는 그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아, 무, 물러가 보겠습니다.”

“저희”라는 칭호에 승헌이 못마땅한 기색을 드러냈으나 눈치 없는 백고는 옥환과 마찬가지로 인사를 하고는 돌아서려 했다. 한데 뜻밖에 다른 누구도 아닌 문아원이 두 사람을, 정확히는 옥환을 붙잡았다.

“저, 태사. 저것은 금이 아닙니까? 혹 금을 타러 오신 것입니까?”

금방이라도 후원을 떠날 기색이었던 옥환은 제게만 들릴 정도로 짧은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문아원에게로 돌아섰다.

“송구하지만 하잘것없는 실력이라 남들에게 들려줄 정도는 되지 않습니다. 두 분의 화기애애한 시간을 망치게 될까 우려되니 물러감을 허락해 주십시오.”

아직 문아원이 연주를 청하지 않았음에도 거절부터 돌아온 셈이었다. 그 철벽같은 태도에 잠시 멋쩍은 기류가 감돌았으나 문아원도 결단코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그녀는 어여쁜 얼굴로 옥환의 거절을 받아쳤다.

“당치 않습니다, 태사. 태사의 연주가 뛰어남은 뭇 서국 백성들도 잘 아는 사실입니다. 초령족의 왕이 태사의 연주에 홀려 벽국에 투항했다는 얘긴 거의 전설처럼 내려오고 있지 않습니까. 한데 하잘것없는 실력이라니요. 겸손이 과하십니다.”

옥환이 불편함을 드러내기도 전에 먼저 신경질적인 어조로 말을 꺼낸 이가 있었다.

“초령족의 왕? 그자가 뭐에 홀려? 연주에 홀린 게 맞긴 한가?”

승헌이 이제는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내보이며 옥환을 노려보고 있었다. 옥환은 눈을 감았다 뜨고는 한숨 쉬듯 대꾸했다.

“옛일이고 과장된 소문입니다.”

“해서 그자는 당연히 뒈졌겠지?”

뜬금없는 상스러운 욕설에 옥환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승헌을 쳐다보았다. 어찌 혼인할 여인 앞에서 그런 말을 쓰냐는 소리 없는 질책이 마구 쏟아지는 듯했다. 하나 마치 듣지 못한 것처럼 태연한 얼굴을 하고 있던 문아원이 다시 화제를 돌려놓았다.

“초령족이 벽국에 복속되었으니 적어도 태사와 만날 일은 없었을 것이옵니다, 전하. 그보다 태사, 감히 청컨대 태사의 칠현금 연주를 꼭 들어보고 싶습니다만…… 많이 어려우시겠습니까?”

옥환은 잠시 주저했다. 솔직히 두 사람과 함께 있고 싶지 않은 마음이 간절했다. 하나 저 때문에 승헌이 문아원의 앞에서 욕을 한 것도 그렇고, 장차 왕후가 될 이를 무시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것도 좋지 않을 것 같아 그는 결국 문아원의 청을 받아들였다.

“백 장군은 어쩌시겠습니까?”

“아, 저도 태사의 연주를 들을 수 있다면 정말 좋겠습니다만…….”

또 눈치 없이 말을 뱉어내는 백고의 눈에 문득 험악한 표정의 승헌과 웃고 있음에도 가시가 돋친 듯한 문아원이 보였다. 아무리 둔한 그라도 자신을 거부하는 분위기만큼은 알 것 같아, 그는 멋쩍은 얼굴로 물러났다.

“일이 있어서…… 연주를 듣는 건 다음 기회로 하겠습니다.”

백고는 마지막으로 옥환을 지그시 바라보고는 떠나갔다. 그 시선에 승헌이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입가를 씰룩였으나 문아원이 승헌의 팔을 붙잡았다.

“왜.”

“태사께 못되게 굴지 좀 마십시오. 이러니까…….”

문아원은 말끝을 흐렸으나 승헌의 귀에는 “이러니까 네가 사랑을 못 받는 거지.” 하는 말이 다 들린 것 같았다. 승헌이 눈을 부라리니 문아원은 모른 척 생긋 웃었다.

거짓 혼인을 제안한 이틀 후, 승헌은 그녀에게서 그것을 받아들이겠다는 대답을 들었다. 기왕 같은 배를 타게 되었으니 승헌은 혹 문아원이 옥환 앞에서 실수를 하지 않도록 옥환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문아원은 어찌 왕이 외사랑을 하냐며 법석을 떨더니 틈만 나면 옥환을 만나게 해 달라, 이리하면 안 되고 저리해야 사랑받는다 하며 온갖 지적질을 해대기 시작했다. 승헌은 자신의 어리석었던 행동을 크게 후회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앞서 걷던 옥환은 뒤에서 들려오는 소란에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거리상 두 사람의 말소리가 들리진 않았으나, 둘이 투닥거리는 모습을 보니 또다시 명치에서부터 둔탁한 고통이 퍼졌다.

이렇게 멀어져 가는 것일까. 이런 식으로, 승헌은 다른 이를 보게 되려나.

옥환의 반듯한 어깨가 아래로, 아래로, 한없이 처졌다.

그런 옥환을 우연찮게 보게 된 문아원의 표정이 의미심장하게 바뀌었다. 아까 후원 입구에서 봤을 때부터 무언가 석연치 않았는데, 문아원의 직감상 아무래도 승헌이 단단히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두 사람을 돕기로 마음먹었다.

이윽고 일행이 각자 다른 마음을 품은 채 후원의 정자에 다다랐다. 정자에는 궁인들이 미리 다과상을 차려놓은 상태였다. 승헌이 먼저 자리에 앉자 문아원이 냉큼 그의 옆으로 가 앉았다. 옥환은 그 모습을 씁쓸하게 바라보다가 두 사람의 맞은편에 앉아 금을 내려놓았다.

“……그대가 금을 타는 줄은 몰랐는데.”

옥환이 능숙하게 줄을 잡자 승헌이 그런 옥환을 보며 중얼거렸다. 옥환은 무심한 투로 어릴 적에 배웠노라 대꾸했다.

“나는 참 그대에 대해 모르는 게 많아.”

“저도 그렇습니다.”

“뭐?”

승헌의 물음에 옥환이 현을 느리게 튕겼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승헌이 이리 쉽게 변심하는 사람인 줄 몰랐다, 라고 말하려던 것을 옥환은 겨우 참아 냈다. 자신이 미친 것 같았다. 자꾸만, 가슴이 먹먹해졌다. 연주고 뭐고 내팽개치고 처소로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괜히 왔다. 후회가 막심했다. 뭐가 예뻐서 승헌의 입장을 신경 써 주었는지, 돌연 화도 났다.

그리고 그런 복잡한 상태로 연주하는 곡은 엉망일 수밖에 없었다. 선정한 곡 자체가 상당히 난해하고 침울했던 데다가 몇 군데를 틀리기까지 했으니, 영 못 들어줄 수준은 아니었으나 소문에 미치지 못하는 수준에서 연주가 끝나고 말았다.

연주를 마친 옥환이 그제야 수치심과 민망함에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자 어색한 공기를 가르고 문아원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저…… 죄송합니다, 태사. 소녀가 공연한 청을 올린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오늘은 몸 상태가 저조하신 듯한데, 어려운 청을 드려 폐를 끼쳤으니 사과를 드리겠습니다.”

“아닙니다, 소저. 제가…… 제가 잘못 연주했습니다. 다 제 잘못입니다.”

상당히 풀이 죽은 옥환을 딱하게 바라보던 승헌이 옥환을 위해 얼른 화제를 돌렸다.

“한데 금은 어디서 났나? 그대가 금을 타는 줄 알았더라면 내 나라, 아니 대륙 안에서 제일 좋은 것을 구해다 주었을 텐데.”

“아…… 문하시중께 받은 것입니다. 서국의 훌륭한 명인이 만든 몇 안 되는 금이라 하였는데…… 제가 이리 엉성하게 연주하였으니 문하시중께도 면목이 없습니다.”

승헌의 노력이 무색하게 옥환의 기분은 더더욱 가라앉았다. 난감해진 문아원이 이번엔 복숭아로 화제를 돌렸다.

“아, 저 복숭아가 참으로 맛이 좋사옵니다. 아니 그렇습니까, 전하? 태사. 태사께서도 어서 드셔보십시오.”

승헌 역시 얼른 문아원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분위기를 바꿔 보려 애를 썼다.

“그래. 올해는 내가 돌보지 못하긴 했지만 제법 괜찮게 자란 모양이야. 옥환. 어서 먹어 봐.”

옥환이 축 처진 눈꼬리로 복숭아를 깨작대는데, 승헌이 자상하게 말을 이었다.

“그대도 복숭아를 좋아했지? 환관들을 시켜 그대의 처소에 많이 가져다 놓으라 해둘 테니 사양하지 말고 먹어.”

“소녀도 전하께서 직접 복숭아를 키우신다는 얘길 들었사옵니다. 내년에는 꼭 전하께서 키우신 복숭아를 먹어 볼 수 있었으면 좋겠사옵니다.”

“뭐, 아원 그대가 내 말을 잘만 듣는다면.”

“예?”

문아원이 승헌을 쏘아보자 승헌은 작은 목소리로 “그러니까 쓸데없는 짓 좀 하지 마.” 하고 엄포를 놓았다. 문아원 역시 “왜요?”, “전하께서 혼자 잘도 외사랑을 끝내시겠습니다.” 하며 승헌에게 지지 않고 대들었다.

그만 돌아가겠다고 하려다가 두 사람이 또 아웅다웅하는 모습을 본 옥환은 순간 울컥했다. 일견 다투는 것처럼 보였으나 승헌도 문아원도 정말 화가 나 보이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럴 거면 저를 뭐하러 앉혀 두었단 말인가. 그야말로 허수아비만도 못한 취급이었다.

옥환은 두 사람을 당장 떼어 놓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문아원을 멀리 치워 놓고 승헌이 자신을 보게 하고 싶었다. 그녀에게 지금껏 승헌이 제게 했던 일을 모두 알려 주고 싶었다. 승헌이 자신을 안고 싶어 안달을 냈었던 일과, 자신을 위해 종소를 구해 주었던 일과, 그녀를 만나는 날에 제 처소에 숨었던 일 전부를. 그런 자신이 경멸스럽고 낯설었지만 옥환은 자신이 왜 이런 건지, 모르지 않았다.

믿고 싶지 않았지만, 이 모든 끔찍한 생각은 모두 “질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옥환은 기가 막혀서 헛웃음이 나왔다. 승헌을 그리 밀어낼 땐 언제고, 첩 같은 건 되고 싶지 않고 반려라는 것도 알 바 없다고 생각했던 주제에, 막상 승헌이 다른 이와 화목하게 지내니 가당치 않게 투기를 느끼고 있지 않은가.

문아원은 좋은 사람이었다. 누구나가 두려워하는 승헌과 단기간에 저렇게 친해진 것만으로도 그녀가 승헌과 잘 맞는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거기다 좋은 왕후감이었고, 자신과 다르게 후사도 볼 수 있었다. 그러니…… 질투를 하는 것 자체가 주제넘은 짓이었다. 승헌의 짝으로는 감히 그녀와 견줄 수도 없는 자신이.

옥환은 기운 없이 일어섰다. 그제야 다툼을 벌이던 두 사람이 고개를 들어 옥환을 올려다보았다.

“……저는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잠깐, 옥환.”

빠르게 멀어지는 옥환의 뒷모습을 망연히 바라보던 승헌이 뒤늦게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뒤를 쫓았다. 옥환은 이미 저만치 멀어진 상태였으나 승헌은 체통도 잊고 그를 향해 뛰었다. 일부러 신하들에게 보여 주느라 문아원과 잦은 만남을 갖는 바람에 최근 옥환과는 얼굴을 마주할 새도 없었다. 비록 백고와 같이 있어 심기가 불편하긴 했어도 모처럼 만난 것이 마냥 반가웠는데, 어찌 옥환은 이리도 제 마음을 몰라주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옥환, 기다려.”

승헌의 손에 옥환의 어깨가 잡힐 정도로 가까워졌을 때쯤, 옥환이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승헌은 행여 자신이 그에게 거칠게 굴게 될까 봐 얼른 손을 거두고 그의 앞으로 돌아갔다.

“옥환. 몸이 안 좋나? 어디가 아파? 아니면 백고 때문에 뭐라고 해서 그런가? 마음 풀어. 그대를 미워해서 그런 게 아니야.”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변명을 들으며 옥환은 고개를 푹 숙였다.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질투를 하는 자신이 혐오스러웠고, 그런 자신을 쫓아와 준 승헌이 고맙고도 미웠다. 질투라니. 마치…….

마치 그를 정말 정인으로 여기기라도 하는 것 같지 않은가.

“옥환. 처소까지 데려다주지. 태의를 부를 테니 진찰을 받아.”

“전하, 저는 괜찮습니다. 그저…… 연주를 망쳐 두 분을 방해한 것이 송구스러워 그런 것이니 개의치 마십시오.”

“……내가 어찌 그래. 바래다줄 테니 가지.”

승헌이 그렇게 말하며 옥환의 손을 쥐었다. 옥환은 당황해서 손을 빼내려 하며 물었다.

“문 소저는요? 문 소저를 정자에 그냥 두고 오신 겁니까? 문 소저께서 적잖이 섭섭해하실 겁니다. 그만 돌아가시지요.”

“아원 얘기는 그만해. 그대가 그리 칭찬을 해대서 결국 그 여인과 혼인하기로 했잖아. 내가 또 질투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그러나?”

승헌이 짜증스레 내뱉은 말에 옥환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승헌은 왜 그러냐는 듯 옥환을 바라보았다. 옥환은 마치 승헌이 제 마음을 죄다 들여다본 것 같은 기분에 머뭇거리며 되물었다.

“……질투…… 라고 하셨습니까?”

“그래. 뭘 그리 새삼스럽게 구나? 내가 하루 이틀 질투한 것도 아니고. 그 탓에 그대에게 난폭하게 굴기도 많이 굴었잖아.”

“그것은…….”

지금껏 승헌이 옥환을 만난 백고나 금현을 상대로 보였던 행동은 전부 소유욕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첩인 자신이, 그의 말을 따르지 않아서 내리는 벌 같은 것이라고.

하나 지금 문아원을 상대로 질투했던 옥환은 이것이 소유욕이 아님을 알았다. 자신은 승헌을 향한 소유욕 때문에 이러는 게 아니었다. 하면 승헌도…… 승헌도 그랬단 말인가? 이런 마음으로, 제게 화를 내고 저와 가까운 자들을 내쳤던가?

“왜……? 왜 질투를 하십니까?”

“그야…….”

당연한 듯 대답하려던 승헌이 돌연 입을 다물었다. 옥환은 그런 승헌에게서 대답을 듣기 위해 그를 조용히 응시했다. 대답을 듣기 전까지는 움직이지 않을 것 같은 분위기였다. 승헌은 짧게 한숨을 쉬고는 돌아서서 그와 마주 섰다. 승헌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그건 내가 그대를…….”

옥환은 몹시도 긴장한 상태로 승헌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막연히, 승헌의 대답을 들으면 돌이킬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마음속에는 승헌의 입을 틀어막고 싶은 충동과 그에게 빨리 대답해 달라고 다그치고 싶은 충동이 동시에 일었다.

하나 희게 질린 옥환의 낯빛에 승헌은 하려던 말을 삼키고는 그를 걱정스럽게 살폈다.

“옥환, 안색이 너무 안 좋군. 어서 처소로 돌아가야겠어.”

“…….”

순간 긴장이 탁 풀린 옥환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승헌은 옥환에게 등을 내밀며 말했다.

“이리 업혀.”

“……제가 어찌 감히 전하의 등에 업히겠습니까. 제 발로 걸을 테니 일어나십시오.”

“걷다가 쓰러질 것 같아서 그래. 그대가 나의 첩인데 업히면 좀 어떤가. 그대는 내 사람이니 아무도 무어라 하지 못해. 어서 업혀.”

평소라면 끝까지 고집을 피웠을 옥환이었으나, 오늘은 도저히 그를 거부할 수가 없었다. 아니, 업히고 싶었다. 그래서 옥환은 얌전히 팔을 뻗어 제 몸을 승헌의 등에 맡겼다.

작지 않은 키에 사내인 만큼 골격이 있어 꽤 무게가 나갈 텐데도, 승헌은 옥환을 업은 채 가볍게 일어섰다. 반면 갑자기 중심이 이동하는 바람에 몸이 뒤로 쏠린 옥환은 저도 모르게 승헌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갑작스레 벌어진 일에 일순 승헌의 몸이 굳는 것이 느껴졌으나, 이내 그의 입에서 짧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꼭 잡고 있어, 옥환.”

옥환은 아무런 대답도 못하고 얼굴만 붉혔다. 왜 이리 저답지 않게 구는지. 승헌이 자신의 한심한 표정을 볼 수 없다는 것이 그나마의 위안이었다.

승헌의 목을 끌어안고 있던 옥환은 아주 조심스럽게, 승헌의 등에 머리를 기댔다. 승헌에게서는 옅은 복숭아 향이 났다. 옥환은 불쑥, 승헌에게 복숭아를 같이 먹자고 말하고 싶어졌다. 하나, 자신이 어찌 그러겠는가. 곧 혼인을 할 이에게. 곧 자신은 필요하지 않게 될 이에게.

‘하나 저는…….’

옥환은 소리가 나지 않게, 입모양으로 중얼거렸다.

‘당신께서 아니 계셔도 괜찮은 것인지, 이제 모르겠습니다…….’

자신의 진심이 그에게 전해지지 않도록.

[4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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