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화 (10/16)

九. 夢思(몽사)

세간에서는 이번 일을 ‘적설赤雪’이 내렸다고 표현했다. 나라의 기둥이었던 백청이 모반을 저지르고 죽은 것도 물론이거니와, 그 일과 관련하여 하도 죽은 이가 많다 보니 피에 젖은 붉은 눈이 내렸다고 돌려 말한 것이었다. 하나 죽은 자는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산 자였다.

병부상서는 백청이 죽였고, 그 병부상서를 죽인 백청 본인도 죽었다. 문관들이 득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나 승헌은 그것을 가만히 두고 볼 위인이 아니었다. 문관들의 힘을 키워줄 생각도 없었고, 행여 무관들이 불만을 품고 또다시 백청과 같은 짓을 저지르길 원하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한 번에 해결할 방법으로 승헌이 택한 것은 호진을 불러들이는 것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승헌은 호진을 비어 있는 대장군의 자리에 앉혔다. 그 덕에 무관들의 숨통은 겨우 트일 수 있었고, 호진이 비호를 하고 있으니 문관들도 백고를 몰아세울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럼에도 잡음은 여전했고, 한번 최악으로 치달았던 신하들의 관계는 쉬이 돌려놓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조정의 기능은 조금씩 회복이 되고 있었으나, 서국은 이번 일로 매우 큰 타격을 입은 셈이었다.

그러던 와중, 옥환에게 뜻밖의 소식이 전해졌다.

“사냥제요?”

옥환의 반문에 문하시중은 고상한 움직임으로 긴 소매를 한 손으로 잡고 차를 들이켠 뒤 답했다.

“예. 예부상서에게 들었는데, 올해도 예정대로 진행하라는 전하의 명이 있었답니다. 곧 조회에서 이야기하실 듯합니다.”

승헌은 아마도 이 위기를 정면돌파할 생각인 듯했다. 이런 시기에 사냥제라니, 누가 봐도 무모한 결정이었다. 하나 한편으론 서국이 이번 일로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것을 대내외적으로 공표할 좋은 수단이 될 수도 있었다. 적어도 서국을 호시탐탐 노리는 벽국이나, 국경을 마주한 이민족에게는 효과가 있을지도 모른다.

옥환이 사냥제 개최의 속내를 파악하는 사이 문하시중이 찝찝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하나…… 면구스럽게도 전 되도록 참여하지 않으려 합니다. 솔직히 지금 상황에서 문관과 무관이 한자리에 모이면 싸움밖에 날 게 더 있겠습니까.”

“그러십니까. 요새 일이 많으셨을 텐데, 이번 기회에 푹 쉬시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요. 제대로 된 휴식도 중요한 법입니다.”

옥환은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문하시중이 걱정하는 게 비단 문관과 무관의 다툼만이 아니라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다. 문하시중에게서는 무언가, 더 근본적이고 직관적인…… ‘두려움’이나 ‘불편함’ 같은 감정이 엿보였다. 하나 옥환이 그 감정을 확실히 알아내기 전에 문하시중이 물었다.

“태사께서는 어찌하실 요량이십니까? 솔직히 저는 태사께서도 되도록 참여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만 너무 여럿이 빠져도 모양새가 좋지 않으니…… 제가 무어라 말씀드리기도 어렵군요.”

“문하시중의 말씀대로 태사인 저라도 참여를 해야 전하의 면도 서지 않겠습니까. 걱정 마십시오. 시중께서도 제가 얼마나 제 한 몸 잘 챙기는 인사인지 아시지 않습니까.”

“말도 안 되는 말씀을 하십니다. 전 오히려 제발 몸 좀 챙기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만.”

문하시중은 진심을 담아 핀잔을 준 것이었으나 옥환은 속을 알 수 없는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승헌과 서국의 조정 신료들은 사냥제를 지내기 위해 천양산으로 길을 나섰다. 천양산은 신이 머물다 갔다고 전해지는 신성한 산으로, 매번 한해의 첫 사냥제는 천양산에서 진행되는 것이 규칙이었다.

나흘을 걸려 천양산에 도착한 일행은 병사들이 미리 세워 놓은 막사에서 대기하다가, 모든 준비가 끝났다는 말에 하나둘씩 밖으로 나왔다.

옥환 역시 막사에서 나와 주위를 둘러보았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아직 겨울의 흔적이 다 가시지 않은 산의 경치였다. 가지에 쌓인 눈이 녹아 빗방울처럼 떨어지는 모습을 보며 그는 가볍게 숨을 들이쉬었다. 다소 쌀쌀한 공기 속에는 젖은 흙내와 풀냄새가 섞여 있었다.

몹시도 오랜만에 맡아보는 자연의 내음에 습관처럼 배인 긴장감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그는 얼어붙은 땅속에서 고개를 내민 새싹을 밟지 않도록 조심스레 발을 옮겼다.

그리고 옥환이 자리를 잡자 마침 승헌이 연단 위에 올랐다. 승헌은 가벼운 사냥복 차림으로, 긴 머리를 높게 묶고 등에는 활을 메고 있었다. 그의 머리를 묶은 붉은색 천이 바람에 나부끼는 모습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던 옥환은 문득 승헌과 눈이 마주쳤다. 승헌은 속을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옥환을 잠시 바라보다가, 그대로 고개를 돌렸다. 그 외면이 옥환의 가슴을 빠르게 흔들고 지나갔다.

이윽고 승헌의 힘 있는 목소리가 푸른 하늘을 가르고 울려 퍼졌다.

“다들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 많았네. 이번 사냥제는 새해를 맞아 풍요를 비는 제사의 의미가 강하니 불필요한 살상은 최소한으로 하도록 하고, 특히 다치는 이가 없도록 주의하게. 모쪼록 이번 사냥제로 올 한 해도 서국의 만백성이 평안했으면 좋겠군.”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간단한 연설이 끝나고 문무관들이 일사불란하게 말에 올랐다. 가까스로 평정을 되찾은 옥환 역시 능숙하게 말 등에 올라 고삐를 쥐었다. 말을 타 보는 것도 꽤 오랜만이었다. 옥환은 군의 지휘관으로 활약하는 일이 많았기에 기마에도 꽤 능한 편이었다.

한편 서국의 관리들은 무관은 물론 문관들도 별 어려움 없이 말에 오르고 있었다. 옥환 같은 경우가 아니라면 말을 다루는 게 서툰 벽국의 문관들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산이 많은 벽국과 달리 평지가 많은 서국은 말타기를 일종의 놀이처럼 여기며 익숙하게 즐겨 왔기에, 그들 또한 천구족 정도는 아니어도 훌륭한 기병과 종마를 보유하고 있었다.

옥환은 이번 사냥제를 통해 서국의, 특히 무관들의 실력을 가늠해 볼 심산이었다. 그리고 별 가능성이 없는 얘기긴 했지만, 혹여라도 사냥제가 문무관의 화해의 장이 될 것 같은 때엔 적절한 방해를 가할 생각이기도 했다.

“태사. 무슨 생각을 하시느라 그리 인상을 찌푸리고 계십니까?”

그때, 불현듯 이부상서가 웃으며 다가와 말을 붙였다. 옥환은 옅은 미소를 지은 채 대답했다.

“오랜만에 밖에 나오니 영 낯설어서 말입니다. 그래도 바깥 공기는 참 좋군요.”

“아…… 그간 많이 답답하셨겠습니다. 궁이 넓어 봤자 결국 집 안 아닙니까. 전하께서도 원체 다망하신 분이다 보니 태사를 데리고 나갈 여유도 없으셨을 텐데.”

“예. 하나 별수 없지요. 이다음에…… 기회가 있길 바랄 밖에요.”

언젠가, 모든 것이 무사히 끝나고 만일 자신이 살아 있다면…… 평범한 백성으로서, 작게 농사를 지으며 살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물론 덧없는 생각이었다. 그저 막연한 기대였다. 그것이 이뤄질 리 없다는 건 누구보다 옥환이 잘 알았다. 봄이 오는 것을 직접 느끼니 마음이 들뜬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옥환은 머릿속에서 잡념을 몰아냈다.

그런 옥환을 딱하다는 듯 바라보던 이부상서가 위로 대신 말을 꺼냈다.

“그러고 보니 천양산에는 영물이 사는데, 그 영물을 만나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영물이요?”

“예. 간혹 영물을 목격했다는 이가 나오곤 하는데, 그들의 이야기로는 아주 하얗고 고운 사슴이랍니다. 뿔에는 이름 모를 꽃이 피어 있는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이라지요. 게다가 어떤 병이든 낫게 하는 약초라고도 합니다.”

“그렇습니까? 재미있는 이야기로군요.”

“뭐, 저자에 나도는 속설일 뿐입니다만 이곳은 신성한 곳이지 않습니까. 혹시 모르지요. 영물을 만나시면 태사께서 바라시는 일이 이루어질지도요.”

이부상서의 배려에 옥환은 부드러운 미소를 건넸다. 이부상서는 그 미소를 넋 놓고 바라보다 뒤늦게 민망한 듯 웃었다. 하나 옥환은 만일 그 영물을 만나더라도 자신이 스스로의 행복이 아닌 대륙의 평화를 기원하게 되리란 걸 알고 있었다. 주군이 아신다면 분명 왜 그리 고지식하게 사느냐고 하겠으나, 자신은 그런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병사가 사냥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를 보냈다. 사람들이 일제히 움직이는 바람에 옥환도 얼떨결에 말을 몰기 시작했다.

무심코 맨 앞을 보자 승헌이 빠르게 멀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풍요를 기원하느니 뭐라느니 하더니 무슨 경연대회라도 나온 것처럼 의욕에 불타는 모양새가 기가 막혔다. 저러다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승헌을 쫓아가야 할까. 잠시 고민하던 옥환은 일단 승헌이 가는 방향으로 말을 몰기 시작했다. 한데 방향을 틀자마자 누군가가 옥환의 옆으로 위험할 정도로 바짝 따라붙었다. 겨우 거리를 벌린 옥환이 상대를 확인하니 사나운 눈빛으로 저를 노려보는 호진이 보였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그의 눈은 마치 당장 꺼지라고 말하는 듯했다.

옥환은 무시하고 제 갈 길을 가려 했지만 그때마다 호진은 집요하게 옥환을 쫓아왔다. 이대로 승헌을 쫓아가다간 호진이 반드시 자신을 낙마시킬 것이다. 그렇게 판단한 옥환은 저 멀리 가 있는 승헌을 보고는 고민하다가 결국 슬그머니 뒤로 빠졌다. 어차피 자신이 있으나 마나, 승헌은 알지도 못하는 것 같았다.

‘뭐가 저리 신나서.’

뒤 한번 돌아보지 않고 순식간에 멀어지는 승헌의 야속한 등을 노려보던 옥환은 이내 다른 길로 슬쩍 빠져나왔다. 그러고는 혼자 느긋하게 산속 경치를 구경하며 돌아다녔다. 간혹 앞서간 승헌이 신경 쓰이기도 했지만, 격무에 지친 그에게 오늘과 같은 기회는 귀했을 것이라 생각하니 차라리 다행인가 싶었다.

‘그리 마음껏 달려서라도 그 마음이 조금이나마 개운해진다면.’

옥환은 무심코 그런 생각을 하다가 흠칫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승헌이 편해지기를 바라다니, 바보 같은 생각이었다. 물론 자기 자신이 이번에 일어난 일로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는 건 스스로도 잘 알았다. 하나…… 그런 것을 느껴서 뭘 어찌할 텐가.

승헌이 백청을 막으러 떠난 그날 밤, 옥환은 그를 줄곧 기다렸다. 그는 축시가 되어서야 겨우 궁으로 돌아왔다. 피투성이가 된 채.

아마, 백청을 죽인 건 백고가 아니라 승헌일 것이다. 어쩌면 승헌은 무관들의 중심이자 위협이 될 만한 권력을 가진 백청을 역모라는 계기로 없애 버린 것일 수도 있었다. 하나 그날, 승헌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침묵하는 그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비참하고 쓸쓸해 보였다.

왕이 가는 길. 그 고독한 피투성이 길은, 그를 얼마나 괴롭히고 있는 것일까. 솔직히 말해 그를 위로해 주고 싶지 않았다면 거짓이다. 옥환은 그를 달래 주고 싶었다. 고생하셨다고, 옳은 결정을 내리신 거라고, 이제 쉬시라고 말해 주고 싶었다. 하나 그는 그러는 대신 승헌에게 그만 돌아가 보겠다고 말하고는 매정하게 침전을 나왔다. 그것이 왜 이리 마음에 걸리는지 모를 일이었다. 마치 목구멍에 가시가 박힌 듯이.

‘어리석고 뻔뻔하게도.’

그리 힐난하면서도 한번 일어난 생각과 그로 인한 동요를 쉬이 지울 수 없었던 옥환은 멍하니 말을 몰다가, 이내 자신이 어딘지도 모르는 곳으로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산속 깊은 곳까지 왔는지 나무는 빽빽했고 바닥에는 여전히 눈이 쌓여 있었다. 시간 또한 얼마나 지났는지 모를 일이었다.

‘너무 많이 왔군. 그만 돌아가야겠어.’

그리 생각하며 고삐를 잡아당기려던 옥환은 문득 녹지 않은 눈 위에 선명하게 찍힌 무언가의 발자국을 보고는 멈칫했다. 그냥 지나치기에는 어딘가 위화감이 느껴지는 자국이었다. 말 위에서 그것을 잠시 살펴본 옥환은 머릿속을 스쳐 간 한 가지 추측에 가슴이 철렁했다.

‘설마…… 설마.’

옥환은 그 즉시 말에서 내려 발자국을 살폈다. 확신할 순 없었으나, 그것은 마치 곰의 발자국처럼 보였다. 물론 위험한 맹수들은 병사들이 미리 와서 다 치워 놓았을 것이다. 하나…… 혹시 곰이 동면에 들어가는 바람에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라면? 그리고 그 곰이 원치 않게 동면에서 깨어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간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였다. 옥환은 더 자세히 알아봐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곰이 아니라거나, 곰이 없다는 확신을 얻게 되면 바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발자국은 자신이 왔던 방향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옥환은 그 반대 방향을 되짚어가며 이 발자국이 어디서부터 시작된 건지를 찾았다.

“……이런…….”

이윽고 머잖아 걸음을 멈춘 옥환의 입에서는 짧은 탄식이 터져 나왔다. 난처한 기색이 역력한 그의 눈앞에는 필시 곰의 거처였을 것이 분명한 굴이 있었다. 조심스레 굴을 살피자 곰의 먹이인 듯한 것들의 잔해와 분뇨가 보였다. 더불어 정확히 그 안에서부터 시작된 발자국까지 확인한 옥환은 곧장 말에 올랐다.

곰이 깨어났다. 한시라도 빨리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 이 사실을 알려야 했다.

한데 그때.

“……?!”

천지를 울리는 듯한 포효가 산 전체에 퍼져 나갔다. 분명 곰의 울음소리였다. 옥환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을 느끼고는 서둘러 고삐를 휘둘렀다. 울퉁불퉁한 산길을 달리면서 옥환은 등 뒤를 살펴 활이 몇 개인지 확인했다.

무관들이 있으니 별 탈은 없으리라 생각하지만, 혹시 모른다. 자신이 나서야 할 일이 생길지도.

‘말타기에는 익숙하다고 해도 문관들은 결국 서생이다. 검 같은 것은 쥐어본 적도 없을 텐데, 만일 곰이 그들을 덮친다면 위험하다.’

옥환은 불어오는 바람을 가르며 다급히 말을 달렸다. 아까까지만 해도 그저 상쾌하게만 느껴졌던 초봄의 바람이 지금은 한없이 싸늘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앞만 보고 달리던 옥환의 시야를 이질적인 무언가가 사로잡았다. 그것은 건조하고 메마른 초봄의 숲에는 어울리지 않는, 선명한 붉은 끈이었다. 나뭇가지에 걸린 끈을 발견한 옥환은 곧바로 깨달았다. 그것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승헌의 머리끈이란 것을.

“……전하.”

설마, 전하께서…….

머리로 생각하기 전에 몸이 앞서 나갔다. 이 이상 깊이 들어가선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으나, 옥환은 어느새 막사와는 정반대 방향으로 달리고 있었다. 끈이 걸려 있던 나무를 지나쳐 더 안쪽으로 향하자 아까도 보았던 발자국이 보였다.

“전하! 전하, 어디 계십니까!”

승헌이 자신보다 훨씬 강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나 이곳은 그에게도 익숙하지 않은 산속이었고, 그는 한참을 앞서 나갔으니 어쩌면 혼자가 되었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하필 옥환의 머릿속에는 이전 날 밤 보았던 피투성이가 된 승헌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날 그의 몸을 뒤덮은 피는 그의 것이 아니었으나, 오늘은…… 이번은…….

‘아니야.’

절대 아니야. 옥환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정신없이 뛰는 가슴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그리고 그때, 두 번째 포효가 울려 퍼졌다.

“전하!”

포효가 들린 쪽으로 방향을 튼 옥환은 전속력으로 말을 달렸다. 나뭇가지가 사정없이 옥환의 얼굴을 긁고 지나갔으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전하 걱정 같은 건 안 합니다.’

왜 하필 지금 그 말이 떠오르는지.

‘나는 거짓말쟁이다.’

자신은 승헌을 걱정하고 있었다. 벽국을 걱정하듯, 백성을 걱정하듯, 승헌이 다치지 않고 아프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부정의 여지를 주지 않는 크나큰 감정이 옥환을 집어삼켰다.

발밑에는 곰의 발자국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어쩌면 저곳에 승헌이 있을지도 모른다.

“전하……! 전하!”

옥환은 목청이 터져라 외치며 달려나갔다. 한데 그다음 순간, 갑자기 눈앞의 길이 뚝 끊어졌다. 말이 큰 소리로 울며 허공에 앞발질을 해 댔다. 옥환의 몸은 그대로 앞을 향해 내던져졌다.

“……아……!”

빙글, 몸이 거꾸로 돌며 하늘이 바닥이 되었다. 이대로 죽는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옥환은 허공에 대고 손을 내밀었으나 그 무엇도 잡히지 않았다.

옥환은 눈을 질끈 감았다. 모든 것이 까마득해졌다.

***

“……환. ……옥환……. 옥환!”

자신을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에 옥환이 눈을 번쩍 떴다. 그러자 눈앞에 간신히 자신의 손을 붙잡고 있는 승헌이 보였다.

“전하……?”

“꽉 잡아! 절대 놓지 마!”

그제야 옥환은 자신이 절벽 아래에 있던, 살짝 튀어나온 또 다른 절벽에 매달려 있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그리고 승헌은 그런 자신을 필사적으로 붙들고 있었다.

“조금만 참아. 금방 끌어올려 줄 테니.”

승헌이 이를 악물고 옥환의 몸을 끌어올렸다. 그리 쉬운 과정은 아니었으나 옥환의 몸 절반 정도가 무사히 땅 위로 올라왔다. 하나 옥환이 양팔로 땅을 디디고 마저 올라오려던 때, 승헌과 옥환의 무게를 지탱하던 지면이 별안간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옥환!”

“전하!”

제게 손을 뻗는 옥환의 몸을 승헌이 힘껏 끌어안았다. 옥환 역시 두 팔로 승헌을 감쌌다. 온 세상이 어지러울 정도로 정신없이 돌아갔다. 그렇게 두 사람은 절벽의 경사면을 타고 한참을 굴러떨어졌다.

“윽……!”

그리고 묵직한 충격과 함께 마침내 등이 땅에 닿았다. 잠시 서로를 안은 채 숨을 헐떡이던 두 사람은 뒤늦게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괜찮나, 옥환?”

“괜찮으십니까, 전하?”

서로에게 동시에 물은 두 사람은 잠시 멈칫했다. 승헌은 실소를 흘렸고, 옥환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옥환은 자신들이 떨어져 내려온 방향을 바라보며 말했다.

“경사를 타고 굴러떨어진 덕에 큰 탈은 없었던 듯합니다.”

“그래. 맨 위에서부터 떨어졌다면 저 꼴이 났겠지.”

승헌이 엄지로 어깨 너머를 가리키자 그대로 절명한 듯한 곰의 사체가 보였다. 옥환은 새삼 운이 좋았음에 크게 안도했다.

이윽고 주위를 둘러본 옥환은 살짝 당혹감을 느꼈다. 마치 심연 같던 절벽 밑은 의외로 평화롭기 짝이 없었다. 눈은 다 녹았는지 거의 보이지 않았고, 위쪽보다 싹이 튼 나무나 풀도 많았다. 무엇보다 절벽 사이를 가로지르는 강물은 아직 멀다고 여겼던 봄이 코앞에 온 것처럼 느껴지게 만들었다.

“어디 봐. 다친 데 없는지.”

온화한 경치에 시선을 빼앗긴 것도 잠시, 옥환은 얼른 승헌에게로 눈을 돌렸다.

“전하야말로 괜찮으신 게 맞습니까? 좀 보여 주십시오.”

“난 됐어. 아무 문제도 없으니까.”

승헌의 말투는 꽤 부드러웠지만 태도만은 단호했다. 혹 지난 일로 아직도 마음이 상해 있는 것일까? 걱정하지 않는다는 말이…… 많이 서운했을까?

옥환은 어쩐지 풀이 죽었다. 고개를 숙이는 옥환을 바라보던 승헌이 들리지 않는 한숨을 내쉬고는 두 팔을 벌렸다.

“……자, 봐. 괜찮잖아.”

옥환은 머뭇거리다가 승헌의 소매를 걷어 팔을 살폈다. 마음 같아선 다른 곳도 확인하고 싶었지만 이런 곳에서 그의 옷을 벗기기라도 할 게 아니라면 그냥 포기해야 옳았다. 옥환은 잠자코 물러났다.

“그대야말로 다쳤군.”

이윽고 승헌이 인상을 찌푸린 채 옥환의 뺨으로 손을 뻗었다. 그 걱정 어린 눈빛에 가슴 한구석이 간질거리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옥환은 애써 화제를 바꾸었다.

“전하께선 대체 왜 거기 계셨던 것입니까? 혹시 곰을 만나셨습니까?”

승헌은 옥환의 뺨에 난 상처를 살피며 건성으로 대꾸했다.

“그래. 곰이 우는 소리를 듣고 달려가니 병사들이 곰과 싸우고 있더군. 해서 내가 유인해서 절벽 밑으로 떨어트렸지.”

“전하도 같이 떨어지신 것이고요?”

“나는 떨어지다 말았잖아. 그보다 어쩌다 이리 상처가 났나? 고운 얼굴이 엉망이야.”

옥환은 자기 입으로 승헌을 찾느라 그랬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승헌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는 옥환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반신반의한 채 물었다.

“나를 찾아다녔나?”

감추고 있던 정곡을 찔리자 옥환이 멋쩍은 듯 대꾸했다.

“……멋대로 가 버리시니 그렇지요…….”

지금 생각해보면 승헌을 찾던 자신은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뭐가 그리 걱정이 되어서. 자신이 나서지만 않았다면 승헌이 굴러떨어지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옥환은 그런 생각에 공연히 민망한 기분이 앞섰다. 한데 그런 옥환에게 승헌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

“…….”

“그대가 날 찾으러 와서 기쁘군.”

그 순간, 따스한 바람이 옥환의 뺨과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옥환은 멍하니 승헌을 응시했다. 뭐라고 말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궁이 아니어서일까. 승헌이 평소와는 다른 차림이어서? 아니면…… 그가 다행이라면서, 너무도 해맑게 웃어 주어서……? 그 어떤 이유든 간에, 옥환은 제 가슴이 정신없이 떨리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아니어도 누군가는 왔을 것이다. 호진이었다면 자신보다 더 나은 대처를 했을지도 모른다. 승헌에게 할 수 있는 여러 대답이 떠올랐지만, 그는 끝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그저, 어느샌가 승헌의 얼굴이 가까워져 오는 것을 지켜보기만 했다.

승헌은 부드럽지만 분명하게 옥환의 아랫입술을 물고 살짝 당겼다. 젖은 소리와 함께 옥환의 입술이 살며시 열렸다. 승헌이 그 열리다 만 좁은 틈새를 혀로 파고들어 말랑한 점막을 차례대로 쓸기 시작했다. 혀끝을 세워 입천장을 간지럽히고, 넓은 면으로 타액을 담아냈다. 끈적한 마찰음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느리지만 자극적인 행위에 옥환의 뱃속이 서서히 뜨거워졌다. 옥환이 입을 조금 더 벌렸고, 잠시 망설이다가 제 입안을 파고든 뜨거운 살덩이에 조심스레 혀를 감았다. 그러자 승헌이 더 노골적으로 옥환의 입안을 희롱하기 시작했다.

서로의 타액이 오고 가고, 호흡이 난잡하게 뒤섞였다. 언제 올라왔는지 모를 승헌의 손이 옥환의 등허리를 진득하게 쓸었다. 그 손길은 어느새 허벅지 안쪽으로 미끄러지고 있었다.

승헌은 마치 굶주린 것처럼 허겁지겁 옥환의 입안을 탐했다. 조금 쌀쌀맞게 느껴졌던 아까까지의 태도가 무색하게 그는 옥환과의 접문에 더없이 집중하고 있었다. 옥환은 그 사실에 원인 모를 만족감을 느끼며, 드물게도 승헌에게 더 바짝 달라붙었다.

농밀한 입맞춤에 허리 밑이 저려 왔다. 이런 데서 할 짓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래서 더 묘한 쾌감이 일었다. 옥환은 승헌이 제 다리 사이에 아랫배를 비비는 것을 느끼며 흥분했다.

하나 승헌의 힘에 밀린 옥환의 몸이 뒤로 넘어간 순간, 옥환은 발목에서 느껴진 통증에 신음했다.

“윽……!”

“옥환.”

놀란 승헌이 얼른 입술을 떼고 옥환을 살폈다. 옥환의 시선이 발목에 가 있는 것을 눈치챈 승헌이 그곳으로 손을 뻗었다. 옥환은 괜찮다고 말하려 했지만, 승헌이 신을 벗기는 쪽이 한발 빨랐다.

“옥환, 이 무슨…… 안 다쳤다며!”

승헌은 부어오른 옥환의 왼쪽 발목을 보고는 옥환을 다그쳤다. 하나 그것은 옥환 자신도 몰랐던 부상이라, 옥환은 그저 민망한 얼굴로 침묵하는 수밖에 없었다. 승헌은 화를 내려다가, 시무룩해진 옥환이 안쓰러워 마음을 가라앉혔다. 따지고 보면 화가 나는 것도 옥환이 다쳤고, 자신이 그것을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미안해, 옥환. 그런 줄도 모르고 발정 난 것처럼 굴어서.”

“왜 사과를 하십니까? 저는…….”

싫지 않았습니다. 좋았습니다. 원해서 한 것입니다.

머릿속을 표류하는 수많은 대답 중에서, 옥환이 고른 것은 제일 솔직하지 못한 대답이었다.

“참을 만합니다.”

말을 해 놓고 옥환은 입술을 깨물었다. 참을 만하다고? 무엇이? 마치 승헌과의 행위를 참는 것처럼 들리지 않는가. 아니면 아픈 게 익숙하다는 뜻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최악이었다.

“그건 그저 그대가 그리 생각하는 것뿐이야. 어찌 사람이 싫고 아픈 것에 익숙해지겠나?”

승헌의 대답에 옥환은 역시 자신이 말실수를 했다고 생각했다. 그는 스스로의 아둔함을 모질게 탓했다. 하나 승헌은 아무렇지 않은 듯 옥환을 번쩍 안아 들더니 강가로 그를 데려갔다.

“차가워도 조금만 참아. 붓기를 가라앉혀야 하니.”

승헌은 옥환의 바짓단을 걷어 올리고 부어오른 발목을 강물에 담갔다. 강물의 차디찬 온도에 옥환의 눈썹이 꿈틀했다. 승헌은 그런 옥환에게 겉옷을 벗어주려 했으나 옥환이 한사코 사양하는 바람에 결국 포기했다. 그 대신 그는 옥환의 손을 잡았다. 승헌의 온기에 옥환의 뺨이 붉어졌다. 승헌은 여전히 젖어 있는 옥환의 붉은 입술을 응시하다가, 다친 발목으로 시선을 옮겨 물었다.

“많이 아픈가?”

옥환은 고개를 저었다.

“정말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조금 접질린 정도입니다.”

“…….”

“정말로 괜찮습니다, 전하.”

옥환이 몇 번이나 강조해서 괜찮다고 말하니 승헌이 겨우 고개를 끄덕이곤 옥환의 뺨을 쓸어 주었다.

“괜한 짓을 했어. 곰이고 뭐고 모른 척했어야 하는데.”

“병사들을 구하셨다면서요.”

“그 대신 그대가 다쳤잖아.”

“저 혼자 그런 것입니다. 전하와는 관계가 없으니 자책하지 마십시오.”

승헌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 뒤 갑자기 찾아온 침묵에 두 사람 사이에는 어색한 기류가 감돌았다. 옥환은 무엇이든 말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억지로 입을 열었다.

“그, 영물…… 영물 얘기 들으셨습니까?”

누가 봐도 대충 꺼내 든 화제임이 분명한 부자연스러운 말투였으나 승헌은 피식 웃고는 말을 받았다.

“백록白鹿님 말인가? 아주 오래된 이야기니 서국에서는 모르는 이가 없지.”

“백록…… 전하께선 보신 적 있으십니까?”

“흠, 그대가 그런 얘길 믿을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는데.”

옥환은 잠시 생각하다가 ‘믿는 건 아닙니다.’ 하고 작게 중얼거렸다.

“어릴 적 제가 살던 곳의 야산에는 푸른 뱀이 산다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사실 이런 이야기들이야 어디든 있는 법이지요. 흥미 본위로 이루어진 데다가, 삶이 팍팍한 백성들이 기대기 좋은 이야깃거리니 말입니다. 이 또한 백성들의 삶이 얼마나 힘든지 알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

“그러고 보니 이번에 서쪽 지방에 오랫동안 비가 내리지 않아 백성들의 근심이 깊다 들었습니다. 비를 내리는 것이야 하늘의 마음이나 민심을 다스리는 것은 군왕의 마음이니 이번 기회에 구휼금을 조금이라도 보내시어…….”

국정이 화제가 되자 어느새 어색함도 잊고 열심히 제 의견을 고하던 옥환은 문득 승헌이 지나치게 말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잡고 있던 손도 이미 사라진 뒤였다. 옥환이 앞만 보던 고개를 돌려 승헌에게 시선을 주자, 그가 자신에게서 살짝 등을 돌린 채 무언가에 열중하는 모습이 보였다. 옥환이 못마땅한 얼굴로 ‘전하’ 하고 세 번이나 부르고 나서야 겨우 승헌은 뒤를 돌아보았다.

“뭐하시는 겁니까? 제 얘긴 안 듣고 계시지요?”

“아니야, 다 들었어.”

“그럼 제가 뭐라고 했는지 말씀해 보십시오.”

“…….”

승헌의 묵묵부답에 옥환이 미간을 찌푸렸다. 금방이라도 잔소리가 쏟아질 듯한 분위기에 승헌이 얼른 말했다.

“이거 봐, 옥환.”

그러더니 승헌은 뜬금없이 무언가를 등 뒤에서 꺼내 옥환의 머리 위에 휙 올려놓았다. 옥환은 불만스러운 얼굴로 그것을 머리에서 빼내어 살폈다. 풀꽃으로 엮은 화관이었다.

“……설마 이걸 만드느라 제 말을 무시하신 겁니까.”

“아마…… 아닐걸?”

옥환의 표독스러운 눈매에 승헌이 슬그머니 한 걸음 물러서며 부정했다. 하나 옥환은 한 나라의 군왕께서 이리 장난기가 많으셔서 어쩌냐며 길게 푸념했다. 뺀질거리는 아이처럼 옥환의 잔소리를 듣는 둥 마는 둥 하던 승헌이 옥환의 손에서 화관을 뺏어 다시 그의 머리 위에 올려놓고는 대꾸했다.

“꽃을 보니 그대 생각이 나는 걸 어찌하나. 봐, 이리 고운 것을.”

“……옆에 있는데 생각은 무슨 생각입니까.”

“그러지 말고. 모처럼 밖에 나왔으니 그대도 마음 편히 가져. 정치 얘기는 궁에서도 실컷 할 수 있잖아.”

그러더니 승헌은 또 천연덕스럽게 옥환의 손을 잡았다. 어쩜 저렇게 위기의식이 없나 싶다가도 그 또한 군왕의 미덕일 수 있겠다 싶어 옥환은 결국 단념하고 말았다. 그래도 승헌 덕에 옥환의 불안하던 마음도 다소 가시는 듯했다. 어쩌면 그의 시종일관 여유로운 태도 덕분일지도 몰랐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옅은 미소를 짓고 있는 옥환을 바라보던 승헌이 툭 내뱉었다.

“역시 그대는 뭐든 잘 어울리는군.”

“…….”

“그대가 너무 고와서 행여 다른 놈에게 뺏길까 봐 걱정이야.”

승헌이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이야 항상 있던 일이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지만, 옥환은 불현듯 그의 진심이 궁금해졌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의 말과 행동이 모두 진심일 리는 없었다. 하나 그걸 알면서도 옥환은 살짝 괘씸한 마음이 들었다. 그의 감언이설에 어느 순진한 이가 속아 넘어갈지 누가 아는가.

“왜 또 눈을 치뜨고 그래?”

“……그냥, 말씀을 참 잘하신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 참, 그대만 할까.”

서로를 잠시 노려보던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하나도 웃을 일이 아닌 것 같은데, 서로를 보니 웃음이 났다. 하나 옥환은 순간 발목에서 느껴진 찌릿한 아픔에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아파?”

“아닙니다. 그냥, 조금 거슬려서.”

승헌은 옥환을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더니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섰다.

“올라갈 길이 있는지 좀 보고 올 테니 쉬고 있어.”

옥환은 흔들리는 눈동자로 승헌을 올려다보았다. 그 모습에 승헌의 마음이 약해졌으나, 옥환을 위해서는 최대한 빨리 나가는 게 좋을 듯했다. 승헌은 길만 있다면 옥환을 업고서라도 돌아가리라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전하…….”

“금방 올게.”

옥환은 돌아서는 승헌의 등을 보며 초조한 기분에 휩싸였다. 승헌과 함께 이곳에 떨어진 이후, 줄곧 마음이 붕 떠 있는 것 같았다. 평소와 다른 상황과 분위기가 현실감을 멀리 떨어트려 놓고 있었다. 옥환은 저도 모르게 승헌의 소매를 붙잡았다.

“왜 그래?”

“혹여라도…… 위험한 곳에는 가지 마십시오…….”

“…….”

옥환은 민망한 마음에 재빨리 변명하듯 덧붙였다.

“……뭐가 있을지 모르지 않습니까. 전하는 이 나라에서 가장 중요하신 분이니 부디 옥체를 중히 여기십시오.”

“그래, 얼른 다녀올게. 나도 그대를 혼자 두고선 불안해.”

승헌은 옥환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고는 빠르게 멀어졌다. 그 뒷모습을 오랫동안 지켜보던 옥환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했던 말은 신하로서 군왕에게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충언이었다. 하나…… 그는 옥환의 군왕이 아니었다. 그걸 알면서도 옥환은 제 마음을 어찌할 수 없었다. 아무렇지 않다고, 선을 그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막상 승헌이 위험하다는 걸 알게 되자 이성을 잃고 날뛰지 않았던가.

‘도대체 왜. 왜, 설옥환.’

옥환은 답답함에 가슴을 두들겼다. 하나 졸졸 흐르는 물소리가 그의 마음에 계속해서 돌을 던졌다.

그렇게 얼마쯤 흘렀을까. 옥환은 문득 물소리에 섞여 또 다른 소리가 들린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개를 들자 강 건너 풀숲이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옥환은 긴장감에 몸을 굳혔다. 아마 승헌일 테지만, 어쩌면 산짐승일 수도 있었다. 옥환은 침을 꿀꺽 삼키고는 금방이라도 도망칠 준비를 했다.

그리고.

“……아.”

머잖아 모습을 드러낸 상대를 본 옥환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처음엔 자신의 눈을 의심하기도 했다. 하나 그 선명한 빛깔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말로만 들었던, 흰 사슴…… 백록이었다.

어찌나 놀랐는지 얼떨떨한 얼굴로 멈춰 있는 옥환을, 유유자적 풀을 뜯고 있던 사슴이 고개를 들어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영물. 옥환은 그제야 왜 사람들이 고작 털이 흰색일 뿐인 사슴을 영물이라 부르는지 알았다. 만물을 모두 눈에 담은 듯한 깊은 눈이 자신을 응시하는 순간, 옥환은 알 수 없는 기분에 휩싸였다. 이윽고 사슴이 우아한 걸음걸이로 옥환의 앞까지 다가왔다. 옥환이 천천히 손을 내밀자 사슴이 고개를 살짝 숙였다. 옥환은 사슴의 부드러운 콧잔등을 쓰다듬었다.

“백록 님…… 인가.”

전설과 달리 사슴의 뿔에 꽃은 없었다. 어쩌면, 그저 돌연변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옥환의 머릿속에는 소원을 이루어준다던 그 이야기가 맴돌았다. 그는 무심코 물었다.

“소원을 이루어 주신다는 게 사실입니까?”

사슴은 그저 눈을 내리깐 채 옥환의 손길을 받고 있었다. 잠시 대답을, 어떤 반응이라도 보여주기를 기대하던 옥환은 곧 단념했다. 어차피 말 못하는 짐승일 뿐이다. 소원을 이루어주는 영물이라니, 그런 것이 있다면 어찌 세상이 이리 고단하겠는가. 옥환은 잠시나마 기대를 품었던 자신이 우스워 한숨 섞인 실소를 지었지만, 이내 생각을 달리했다.

‘그래. 말을 못하니…… 어쩌면 좋은 말동무가 될 수도 있겠구나.’

알아듣지 못하기에, 퍼뜨리지 않을 것이기에 더 할 수 있는 말이 있는 법이다. 옥환은 누구에게라도 제 마음을 터놓고 싶었다. 설사 그것이 영물이라 불리는 짐승일지라도.

“제 소원은, 설금야로서는 만백성의 평화입니다.”

처음에는 옥환도 그렇게 생각했다. 하나 막상 영물일지도 모르는 백록을 마주하니, 옥환은 자신의 진짜 욕망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설옥환의 바람이 무엇인지.

“하나…… 설옥환으로서는…….”

옥환은 천천히 입술을 뗐다. 어차피 아무도 모를 일이겠으나, 그럼에도 이 말을 한다는 것이 무척이나 무겁게 느껴졌다.

“주군께서 살아 돌아오셨으면 좋겠습니다.”

잠시,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물론 염완을 만나고 싶었다. 하나 그보다도 옥환은 염완이 살아와서, 제게 이 모든 일을 그만둬도 된다고 말해 주길 바랐다. 더는 승헌과 서국 사람들을 속이지 않아도 된다고, 이제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된다고…….

하나 그 순간 사슴은 옥환의 손에서 벗어나더니, 뒤 한번 돌아보지 않고 매정하게 사라졌다. 당황해서 그 모습을 쳐다보던 옥환은 불현듯 참담함에 휩싸였다.

안 되는구나. 그래, 안 되겠지.

사슴은 뻔뻔스럽다고 자신에게 화를 냈던 건지도 모른다. 이 나라의 수호신인 그에게, 이 나라를 망쳐 놓은 자신이 그런 비겁한 소원을 빌었으니.

옥환은 고개를 숙였다. 애초에 이루어질 수 없는 소원이었다. 이제 와 염완이 정말 살아서 첩자 짓을 그만두라고 한다 해도…… 이미 벌여 놓은 일이 있으니 돌이킬 수는 없었다. 너무 많이 와 버렸다. 너무나 많이. 한데 무슨 염치로 승헌과 함께 웃고, 그를 걱정한다 말했을까.

옥환은 화관을 벗었다. 더는 그것을 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 처음부터 하지 말았어야 했다.

“옥환.”

문득 들려온 익숙한 부름에 고개를 들자 언제 왔는지 모를 승헌이 눈앞에 서 있었다. 옥환은 잠시 자신이 꿈을 꾼 건 아닌지 생각했다. 하나 그는 신속하게 마음을 추스르고는 현실로 돌아왔다.

“전하. 길이 있었습니까?”

“그래. 어떻게든 갈 수 있을 것 같아. 이리 업혀.”

옥환은 눈앞의 놓인 승헌의 넓은 등을 바라보다가 이내 딱딱한 어조로 거절했다.

“괜찮습니다. 무거우실 겁니다. 차라리 혼자 먼저 가셔서 사람들을 불러 주십시오. 저는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왜.”

“그게 나으니까요. 행여 전하께서 저를 업고 가시다가 다치시기라도 하시면 그 책임은 누가 집니까.”

승헌은 말없이 옥환을 빤히 바라보았다. 갑자기 달라진 옥환의 분위기에 서운해진 것일 수도 있었다. 옥환은 그 시선이 불편해 공연히 눈을 피했다.

“짐이 되길 바라지 않습니다. 군왕으로서, 이성적으로 행동하십시오, 전하.”

그것은 옥환이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벽국의 책사로서…… 주군의 신하로서 이성적으로 행동해야 했다.

“……그래. 그러는 게 나을지도 모르지.”

한데 승헌이 그리 말한 순간, 어쩐지 옥환은 가슴 한 귀퉁이가 몹시도 아렸다. 정말 이상하게도.

데려가 주길 바랐던 걸까. 상관없다고, 업고 가겠노라고, 그리 말해 주길 바랐나. 옥환은 그 마음이 기가 막혔으나, 이 실망감은 도무지 부정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한데 그때 승헌이 다시 말했다.

“그래도 나는 그대를 데려가고 싶어.”

“…….”

“이성적이지 못한 군왕이라서 미안하군. 그래도, 그대를 두고 가진 않을 거야.”

왜요? 왜……. 입술에 걸린 물음을 차마 밖으로 내지 못한 채 옥환은 얼떨결에 승헌의 등에 업혔다. 승헌의 등은 너무나 넓고 포근해서, 옥환은 그것이 마냥 혼란스러웠다. 그의 등과 맞닿아 있는 가슴이 원망스러울 만큼 뛰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은, 자신이 승헌의 결정에 기뻐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왜 기뻐한단 말인가. 왜. 그가 자신을 버리고 가지 않은 것이…… 그렇게나 기쁜 것일까. 이러면 안 되는데, 왜 이리…….

옥환은 저도 모르게 승헌의 옷깃을 꼭 쥐었다. 잠시 승헌이 흠칫한 듯했으나, 그에게선 아무런 생각도 읽을 수 없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돌아가는 내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마침내 막사까지 다다르자 승헌을 찾고 있던 문무관과 병사들이 놀라서 달려왔다.

“전하! 괜찮으시옵니까?! 도대체 어디에…….”

당혹해하는 호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린 승헌이 곁에 있던 병사에게 옥환을 넘겼다.

“다쳤으니 의관을 불러 살피게 해.”

그러더니 승헌은 옥환과 눈 한번 마주치지 않고 그대로 떠나 버렸다. 옥환은 차마 그를 붙잡지 못했다. 아니, 잠시나마 붙잡으려 했다는 것이 더 기가 막혔다.

이윽고 막사로 돌아온 옥환이 의관의 진찰을 받았지만, 옥환은 몇 번이고 그저 괜찮다는 말만 반복했다.

아픈 것은 다친 발목이 아니었다. 그곳이 아니었다.

***

승헌은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조정을 정비해 나갔다. 문무관의 반발이 일지 않을 정도의 선에서 조정의 요직에 있는 인사들을 죄다 갈아 치웠고, 백청의 편에 섰던 이들에게는 명확한 벌을 내렸다. 하나 모든 무관이 위기에 처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백고에게 도움이 될 만한 이들에게는 도리어 힘을 주었다. 그 어느 쪽으로도 기울어지지 않도록 정확히 균형을 맞춘 것이었다.

옥환의 계획은 분명 효과가 있었으나, 결국 실패했다고 봄이 옳았다. 역모까지 일어났건만 그에 비해 일이 수습되는 속도가 굉장히 빨랐기 때문이었다. 아니, 수습이 완전히 끝나면 서국은 종전보다 더 건실한 나라가 될 터였다. 이 모두가 오직 승헌이 홀로 해결한 것들이었다. 자신이 일 년 동안 준비한 것을, 승헌은 단 두 달 만에 수습하고 있었다. 솔직히 허탈하지 않다면 거짓이었다.

하나 그럼에도 벽국은 기회를 얻었다. 지금이라면 서국과의 차를 크게 줄일 수 있었다. 그걸 아는 계평 역시 하루에도 몇 번씩 옥환을 닦달했다. 서국의 군사 기밀을 한시라도 빨리 벽국에 전달하라는 것이었다.

“서국 왕이 수습을 하느라 정신이 없을 때 보내야 합니다. 이제 더는 미룰 수가 없단 걸 아시지 않습니까, 승상!”

“목소리를 낮추지 못하겠느냐. 또 일을 그르치고 싶어서 그리 어리석게 구는구나.”

“승상!”

옥환도 언제까지 변명으로 일관하며 피할 수만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제는 마음을 정해야 한다. 옥환은 사나흘 내로 보내겠다는 말로 계평의 입을 막고는 보란 듯이 그의 앞에서 벽국에 보낼 서신을 써 내려갔다. 그러나 실은 쓰는 척만 하고 있을 뿐, 그의 손은 몇 번이고 허공에서 멈추었다.

옥환의 붓이 멈춰 있는 것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계평이 결국 참지 못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제사 전에는 보내셨으면 합니다. 전하께서도 그리 바라시는 것 같고요.”

“제사……?”

옥환이 고개를 갸웃하자 계평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오만상을 썼다.

“설마하니 선왕 전하의 기일까지 잊으신 겁니까?”

“그럴 리가 있느냐.”

옥환의 태연하기만 한 얼굴에 계평은 더 캐묻지 않고 넘어갔다. 하나 사실 옥환은 무척이나 동요한 상태였다. 주군의 기일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승하하신 지 얼마나 되었다고. 하지만 계평이 말해 주지 않았다면 그 제사 당일까지 내내 잊어버리고 있었을 터였다. 그러한 현실을 옥환은 도무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최근의 자신은 정말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솔직히 말해 옥환은 두려웠다. 서국에서의 생활에 익숙해지는 자신이, 서국 백성들을 구하려 길천에서의 전투를 망칠 뻔한 자신이, 승헌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자신이.

그리고 주군의 기일은 잊은 주제에 잠시만 여유가 생기면 승헌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자신이 몹시도 낯설고 두려웠다.

내내 제 마음을 불바다로 만들었던 백청이 사라지고 나자, 옥환은 겨우 자신을 들여다볼 여유를 가졌다. 하나 그게 문제였다. 자신의 마음은 이미 서국에 왔을 당시와는 너무도 크게 달라져 있었다. 목표로 했던 내분은 끔찍한 비극만을 불러왔다. 더는 이런 짓을 벌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 옥환은 곧 고개를 저어 상념을 떨쳐 냈다. 아무래도 서국과 승헌에게 지나친 감정 이입을 하게 된 모양이었다. 승헌의 처지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고, 어찌 되었든 표면적으로는 서국의 신하이자 승헌의 첩이라는 위치에 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그 감정을 끊어 내야만 했다. 자신이 누군지를 잊지 않도록.

잠시 고민하던 옥환은 계평을 바라보았다. 그가 마뜩잖아할 것은 알고 있었으나, 유감스럽게도 도움을 청할 사람은 그 하나뿐이었다. 옥환은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내 부탁이 한 가지 있다.”

평소에는 지시만 내릴 줄 알던 옥환이 갑자기 부탁이 있다는 말에 계평은 의아한 얼굴을 했다. 옥환은 계평이 도리어 이 일로 자신을 더 의심하는 건 아닐지 걱정하면서도 더는 방도가 없었기에 솔직하게 말했다.

“주군의 위패를 모셔야겠다. 준비해 다오.”

“예? 여기에…… 말입니까? 그것은 너무 위험하지 않습니까? 하인들이 청소하다 보기라도 하면…….”

계평의 반응은 당연한 것이었다. 만일 계평 쪽에서 먼저 제안을 했다면 옥환은 단칼에 안 된다고 했을 터였다. 한데 ‘역시 그렇겠지.’ 하고 침울한 표정을 하는 옥환을 못마땅한 듯 쳐다보던 계평이 한숨을 내쉬고는 이렇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어떻게든 해 보지요. 단, 들키지 않게 조심하십시오.”

“……그러마.”

계평의 협조에 옥환은 그나마 마음이 놓였다. 지금의 혼란은 벽국을 떠나온 시간이 길다 보니 생긴 부작용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니 주군께서 항상 곁에 계시다면 이 갈피를 잃은 마음도 방향을 잡을 것이라고, 옥환은 굳게 믿었다.

이윽고 옥환이 어떻게든 다시 서찰을 써 보려 종이 위로 눈을 돌리는데, 하인이 다가와 백고가 찾아왔다는 소식을 전했다. 옥환은 잠시 망설였으나 그를 돌려보낼 수는 없어 안으로 모시라고 일렀다.

두 사람은 백고가 옥에 갇혀 있을 때 만난 것 이후로 처음 보는 것이었다. 백고의 부쩍 여윈 얼굴을 보니 옥환은 새삼 딱한 마음이 들었다. 아무튼 백청을 함정에 빠트린 것은 자신이기에, 그 일로 벌어진 비극에 대해 일말의 책임감을 느끼는 탓이기도 했다. 옥환은 승헌이 백청을 죽였을 거라고 여겼지만, 표면적으로 그 일은 백고의 소행인 것으로 되어 있었다. 적어도 백고는 자신의 아버지가 승헌에 의해 죽는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자신을 키워 준 아버지인데, 백고가 얼마나 힘들지 옥환은 상상도 가지 않았다.

백고는 천성이 그저 검만 휘두르면서 살아야 하는 자였다. 한데 그의 가문이 짊어진 위세가 그를 무겁게 내리누르며, 그가 가진 재능을 죽이고 그를 부족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도 모자라 이제는 끔찍한 선택까지 하게 만든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백 장군.”

“……태사. 갑자기 찾아뵈어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날씨가 많이 쌀쌀하던데, 차부터 드십시오.”

옥환은 친절한 태도로 백고를 대접했다. 그리 달가운 일은 아니었으나, 백고가 제 얼굴을 보고라도 위안을 얻을 수 있다면 미소 정도 지어 주는 것이야 어렵지 않다는 생각에서였다.

따뜻한 차로 어느 정도 몸을 녹인 백고가 먼저 운을 뗐다.

“이번 겨울은 참 긴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예. 유독 춥고 길었지요. 하나 어제 후원에 갔다가 나뭇가지에 싹이 튼 것을 보았습니다. 또 이렇게 봄이 오는 것 아니겠습니까.”

옥환은 그렇게 백고를 위로했다. 옥환의 서투르지만 따스한 위로에 백고는 작게 미소 지었다.

사실 백고는 오늘 승헌에게 자처해서 국경으로 갈 것을 청하려 했었다. 한데 옥환의 얼굴이 유독 눈에 밟혔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그의 처소 앞이었다. 물론 옥환이 자신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다는 것은 그도 잘 아는 사실이었다. 무엇보다 그는 주군인 승헌의 사람이었다. 자신이 넘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게다가 승헌도 필시 자신이 품어선 안 되는 마음을 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터였다. 제 아비와 자신의 대화를 전부 들었을 테니까. 그럼에도 승헌은 내색하지 않았다. 아니, 신경 쓸 필요조차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백고도 자신의 어리석은 마음을 그만 접기로 결심했었다. 무엇보다 아버지의 유언을 지키려면 옥환을 향한 연심은 버려야만 했다. 그래서 옥환과 멀어지려 국경으로 떠나고자 한 것이었다.

한데 옥환이 잔뜩 풀이 죽어 있는 백고의 표정을 보더니 이내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백 장군. 이럴 때일수록 마음을 굳건히 하셔야 합니다. 백 장군은 나라를 구한 것입니다. 그것을 자랑스러워하십시오. 행여 누가 손가락질을 한다면 제가 그자에게 따끔하게 한마디 하겠습니다.”

“……태사…….”

옥환은 고왔다. 처음엔 분명 그의 아름다운 외모에 혹한 것이었고, 그가 한없이 차가운 사람이라는 것은 백고도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그럼에도 옥환은 차가운 외면 안에 온기를 품은 사람이었다. 잘 보여 주지 않는 것이기에 더더욱 귀하고 절실하게 느껴지는지도 모른다. 백고는 옥환의 그런 고운 마음까지도 사랑하게 되었다.

잠시 옥환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백고는, 이내 갑작스러운 질문을 던졌다.

“태사. 태사께서는 전하를 사모하십니까?”

“예……?”

옥환의 표정에 당혹함이 번졌다. 견승헌을 사랑하느냐고? 물론 아니었다. 그럴 수 없었다. 옥환은 제 마음속의 그러한 대답을 확인하고는 안심했다.

“……전하께서는 존경스러운 분이시지요. 참으로요.”

하나 이 말로는 백고가 원하는 대답이 되지 않을 터였다. 별것도 아닌 일로 공연한 의심을 살 필요는 없다는 생각에 옥환은 웃으며 이렇게 덧붙였다.

“물론 저는 전하를 사모하고 있습니다.”

“……그러시군요…….”

옥환의 확고한 대답에 백고는 눈을 내리깐 채 쓴웃음을 지었다. 옥환과 승헌은 누가 봐도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그리고 승헌 역시 옥환을 아낀다는 것을 백고는 잘 알고 있었다. 한데도, 자신은 도저히 옥환을 단념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죽은 백청이 알면 또 호되게 혼을 낼 일이었다. 그렇다면 나중에 죽어서 그 원망을 다 듣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백고는 제 마음을 버리지 않기로 했다. 옥환과 맺어질 생각을 하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그저 억지로 꺾지 않기로 결정했을 뿐이었다.

언젠가는 꽃이 지듯이 이 마음도 서서히 지는 날이 오겠지, 하며.

“전하께서는 태사를 행복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 행여라도 전하께서 태사를 속상하게 만드시거든 언제든 제게 터놓으십시오. 저 따위가 감히 전하께 한마디 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태사의 말동무는 되어드리겠습니다.”

“…….”

백고의 입장에서는 최선을 다해 제 진심을 전한 것이었으나, 옥환에게선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옥환은 갑자기 넋이 나간 것처럼 멀거니 찻잔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상해진 백고가 두 번이나 더 옥환을 부르고 나서야 비로소 그는 정신을 차렸다.

“아, 죄송합니다, 백 장군.”

“아닙니다. 피로하신 모양인데 저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날이 추우니 행여 고뿔 들지 않게 조심하십시오.”

“……예…….”

백고를 돌려보낼 때까지 내내 멍하던 옥환은 백고가 떠나고 나서도 그저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 백고가 승헌을 사랑하느냐고 물었을 때만 해도 옥환은 멀쩡했다. 아니라고 당당하게 대답할 수 있었다. 한데, 거짓인 걸 알면서도 자신이 승헌을 사랑하고 있다고 말한 순간 제 마음속 무언가가 무너져 내렸다.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옥환은 몹시도 혼란스러웠다. 드러나선 안 되는 것이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성큼성큼 뻗어 나오고 있었다. 옥환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것을 어떻게든 억눌러야만 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화가 나는 건지 서러운 건지 알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면서 옥환은 쿵쿵 뛰고 있는 제 가슴을 연신 문질렀다. 차라리 몸이 아픈 것이었으면 싶었다. 차라리.

한데 그때, 하필 옥환이 지금 세상에서 가장 보고 싶지 않은 사내가 나타났다. 방금까지 거짓으로 사랑한다고 말했던 승헌이었다.

***

‘주군께서 살아 돌아오셨으면 좋겠습니다.’

보고문을 읽고 있던 승헌은 갑자기 떠오른 목소리에 미간을 찡그렸다. 일순 짜증이 솟구쳤다. 만일 누군가 앞에 있었다면 공연한 화풀이를 했을 만큼.

옥환은 눈치채지 못한 듯했지만, 사냥제 때 옥환이 백록에게 소원을 비는 순간 승헌 역시도 그 자리에 있었다. 그 옥환이라면 분명 대륙의 평화 따위를 빌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금야 선생으로서는 그것을 빌었다. 하나 설옥환으로서는…….

승헌은 이내 보고문을 내려놓고 양 손바닥으로 눈두덩이를 꾹 눌렀다. 온종일 잠 한숨 못 자고 일만 했다. 겹겹이 쌓인 피로는 그를 예민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이럴 때마다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자연히 생각나는 건 옥환이었다.

‘옥환을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였지?’

새삼 계산해 보니 사냥제 때 이후로 옥환을 본 적이 아예 없는 듯했다. 일이 바쁜 것이 가장 큰 이유였으나, 승헌은 어쩌면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옥환을 피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사냥제 때는 손금 얘길 안 했었군. 나중에 얘기해 주겠다고 했었는데.’

문득 생각이 나 자신의 손바닥을 들여다보던 승헌이 갑자기 픽 웃었다. 승헌이 쉬려는 것 같아 다과를 내오던 환관은 그 모습을 보고는 어찌 그러시냐 물었다.

“……내 손금은 옥환한테 안 가르쳐주는 게 좋을 것 같아. 그 콧대 높은 자존심에 또 이러쿵저러쿵 싫은 소리를 해댈 게 분명하군.”

“그러고 보면 태사께 가지 않으신 지 꽤 되었지요. 혹 태사를 뵈러 가시려거든 준비를 하라 이르겠사옵니다.”

“……음.”

승헌이 갈등하고 있는 사이 중서령이 찾아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아무래도 오늘 역시 옥환을 만나러 가는 것은 어려울 성싶었다. 승헌은 가벼운 한숨을 내쉬고는 짧은 휴식을 끝낸 뒤 중서령과 대면했다. 중서령이 절을 올리고 나자 승헌은 그에게 앉으라며 자리를 권했다.

“경이 무슨 일이지?”

어쩐지 중서령은 잔뜩 긴장한 얼굴이었다. 생각해보면 그는 최근 들어 계속 무언가 불안해 보였었다. 심상치 않은 그의 모습에 승헌은 좋지 않은 예감을 느꼈다.

“전하. 줄곧 고민했사옵니다만, 아무래도 말씀을 드리는 게 좋을 것 같아 찾아왔사옵니다.”

“무슨 말을 하려고? 쓸데없는 얘기를 하면 가만두지 않을 테니 잘 생각하고 말해.”

안 그래도 바빠 죽겠는데 또 무관이 어쩌고 하면서 제 골치를 아프게 만들 거라면 아예 입도 뻥끗 말라고 미리 으름장을 놓은 것이었으나, 중서령은 물러나기는커녕 굳은 결심을 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전하. 부디 신의 뜻을 곡해하지 마시고 들어 주시옵소서. 절대 역적을 감싸려는 것은 아니옵니다.”

“……백청 얘기라면 더더욱 듣고 싶지 않은데.”

“물론 그자에 대한 얘기는 아니옵니다. 태사에 대한 얘기이옵니다.”

“태사?”

승헌이 눈을 가늘게 뜨고 중서령을 응시했다. 중서령은 그 눈빛에 주눅 들지 않으려 애를 쓰며 말을 이었다.

“실은…… 일전에 병부상서에게 갔었을 때 말이옵니다. 전하께서도 기억하시지요? 태사가 전하께 직접 허락을 구했다고 들었사옵니다만.”

승헌은 계속해서 얘기해 보라는 듯 눈빛을 보냈다. 중서령은 고개를 한 번 숙이고는 말을 이었다.

“그날, 태사가 병부상서에게 백청을 고발하면 어떻겠냐는 얘기를 꺼냈었사옵니다.”

“…….”

“무, 물론 병부상서가 거절을 했고, 태사 역시 알겠다며 물러난 뒤에는 더 얘기하지 않았사옵니다만…… 결국 그 며칠 후에 병부상서가 백청을 고발하지 않았사옵니까. 아무래도 신경이 쓰여서.”

승헌은 말이 없었다. 그의 표정 역시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는 상태였다. 중서령은 조마조마한 기분으로 남은 말을 이어 나갔다.

“거기다 병부상서가 길천 원정에 대해 제기한 의문은 결국 사실이었음이 밝혀지지 않았사옵니까. 한데 그가 그것을 어찌 알았을지……. 만에 하나 태사가 그 정보를 준 것이라면, 태사는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는 처지인데 그러한 정보를 어디서 손에 넣었겠사옵니까. 게다가 죽은 백청도 계속 태사를 걸고넘어지지 않았사옵니까. 그가 원래부터 태사를 싫어하긴 했으나, 어쩌면 무언가 심증이 있었을 가능성도…….”

“중서령.”

승헌이 자신의 말을 끊고 저를 나직하게 부르자, 중서령은 잔뜩 굳은 자세로 “예, 예에.” 하고 머리를 조아렸다.

“해서 경이 과인에게 하고 싶은 말이 뭔가? 태사가 벽국의 첩자인 것 같다고?”

승헌의 직설적인 물음에 중서령이 당황한 얼굴을 했다. 아직은 의혹, 아니 의혹이라고 부를 수조차 없는 지레짐작 정도에 불과했다. 이 화제를 수면 위로 올리자면 명백한 증거가 있어야만 했다. 그게 아니라면 안 그래도 어지러운 나라를 더 혼란스럽게 만드는 일에 지나지 않을 테니까.

중서령도 그것을 알고 있었으나, 그럼에도 옥환은 승헌과 특히 가까운 자리에 있었다. 적어도 승헌은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아 위험을 무릅쓰고 찾아온 것이었다. 하나 두 사람이 가까운 만큼 이 밀고로 자신이 승헌의 눈 밖에 날 수도 있다는 것 역시 예상한 바였다.

중서령은 얼른 바닥에 무릎을 꿇고 말했다.

“그런 것은 아니옵니다, 전하. 다만 만사 불여튼튼이라 하지 않사옵니까. 이 일은 다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고, 그때 함께 갔던 문관들에게도 입단속을 시켜 놓은 상태이옵니다. 신 역시 공연한 일로 낭설이 돌기를 바라지는 않사옵니다. 그저 이 미거한 소신이 가당찮은 일로 전하를 염려하여 올린 말씀이오니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중서령의 대처는 나쁘지 않았다. 자칫하면 옥환에 대한 무고죄는 물론이고 또다시 조정에 분란을 일으키려 한 죄까지 가중처벌을 받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나 그저 충심으로 인해 과도한 걱정을 했을 뿐이라면, 그것으로 인해 벌을 내릴 수는 없었다.

잠시 중서령을 내려다보면 승헌은 이내 짧게 명했다.

“알았으니 그만 물러가 봐.”

“……전하. 소신은…….”

무언가 더 말을 하려던 중서령은 승헌의 서늘한 눈빛에 입을 다물었다. 이윽고 그가 내키지 않는 얼굴로 인사를 한 뒤 물러가자 방금까지만 해도 태연했던 승헌이 잔뜩 화가 난 얼굴로 책상 위에 있던 보고문을 내던졌다. 놀란 궁인들이 뒤늦게 그것을 치우러 달려왔다.

중서령 앞에서는 내색을 하지 않았으나 사실 그는 매우 동요한 상태였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의심하지 않은 게 도리어 이상한 일이었다. 그만큼 옥환의 행동은 의심스러운 구석이 많았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옥환이 갑자기 백고의 집에 가겠다고 했을 때부터 어딘가 부자연스러웠다. 말로는 종소를 보러 가는 것이라고 했으나, 이번 일의 밑준비를 하기 위해 염탐을 하러 갔을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거기다 옥에 갇힌 백고에게 찾아가기도 했었다고 들었다. 백고의 자백 또한 옥환이 준비한 덫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백청의 일이 터지는 바람에 본래 예정되어 있던 벽국 침공은 무기한 연기된 상태였다. 그것만으로 옥환을 의심하기는 충분했다. 하필 벽국에 쳐들어가려던 차에 그러한 일이 터지다니, 시기가 지나치게 적절하지 않은가.

‘……그리고 옥환은 여전히 염완을 그리워하고 있지.’

물론 승헌도 옥환을 의심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하나 수많은 정황이 그를 가리키고 있었고, 그가 뒤에서 암약했다고 한다면 이번 일이 이렇게까지 확산된 것도 납득이 갔다. 옥환이 누구던가. 명재상 금야 선생이 아니던가. 그가 처음부터 서국에 내분을 일으킬 생각으로 일 년이나 잠입해 있던 것이라면? 자신 또한 그것을 의심했기에 초반엔 옥환을 조정에 들이지 않으려 했던 것이 아니었나.

뒤늦게 피어난 의심은 꼬리에 꼬리를 물며, 도리어 지금껏 안일했던 스스로를 책망하고 꾸짖었다. 알면서도 모른 척했던 것인지, 아니면 어느새 그렇게까지 설옥환을 믿게 된 것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물론 승헌의 가슴 한구석에는 옥환의 태도가 전부 거짓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자신이 있었다. 제 말에 이따금씩 얼굴을 붉히는 옥환이, 제 손을 잡아주던 옥환이, 저를 속이고 제 나라를 무너뜨리려 연기를 했을 뿐이었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문제는 비단 승헌 하나의 의심만이 아니었다. 그가 옥환을 믿더라도 신하들이 옥환을 의심하기 시작하면 아무리 왕이라 해도 도리가 없었다. 지금은 중서령도 일을 크게 만들 생각은 없는 듯했으나, 필시 옥환을 예의 주시하고 있을 터였다. 조금이라도 수상쩍은 행동을 한다면 그 역시 마냥 좌시하지는 않을 것이다.

옥환을 만나야 했다. 밀려 있는 국무를 생각하면 아니 될 일이었으나 그의 말과 태도가 거짓이 아니란 걸 확인하지 않으면 분명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을 터였다. 승헌의 마음은 그만큼 몹시도 급했다. 평소의 신중함과 철저함은 온데간데없었다.

그 후, 곧바로 준비를 마치고 옥환의 처소를 향하던 승헌은 마침 그의 처소를 나오는 백고를 발견하고는 멈칫했다. 백고를 본 순간 그는 돌연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왜. 지금 자신이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 줄이나 알고 저놈을 자꾸 만나는 것인가? 백고가 옥환에게 은밀한 마음을 품은 것은 승헌도 알고 있었다. 하나 승헌은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껏 보아 온 옥환의 언동은 백고에게 그가 하등 관심이 없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승헌은 옥환의 그 무엇도 확실히 믿는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이윽고 멀리서 승헌의 행렬을 발견한 백고가 인사를 올리기 위해 얼른 멈춰 섰으나, 승헌은 그를 무시한 채 휙 지나쳤다. 당황한 백고는 멀어지는 승헌의 등에 대고 엉성한 절을 올렸다.

옥환을 모시는 하인 역시 승헌을 발견하고는 옥환에게 말을 전하려 했으나 승헌은 그것마저 무시하고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뭘 했는지 얼빠진 얼굴로 앉아 있던 옥환은 승헌의 등장에 이상할 정도로 놀랐다.

“저, 전하. 어찌…….”

승헌은 미소를 지었다. 속에서는 천불이 났으나 그는 그만큼 더 환하게 웃어 보였다. 영문을 모르는 옥환은 말간 얼굴로 저를 올려다보고 있었으나, 그의 눈동자에는 묘한 거부감이 서려 있었다. 그것이 자신을 향한 것이라고 생각하니 승헌은 더더욱 열이 받았다.

“그대를 보러 왔지, 뭐하러 왔겠나.”

승헌이 태연하게 말하며 옥환 곁을 지나쳐 먼저 자리에 앉자, 옥환이 얼른 그 뒤를 따라왔다. 승헌은 하인이 차를 내올 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고 옥환을 유심히 살폈다. 옥환 역시 침묵하고 있었으나, 그는 오늘따라 유독 안절부절못하는 듯 보였다. 마치 무슨 죄라도 지은 것처럼.

그런 옥환의 행동이 방금까지 백고가 이곳에 있었다는 사실과 맞물리니 승헌의 머릿속에는 불쾌한 상상만이 떠올랐다. 더불어 지난번 옥환에게서 풍기던 역한 국화꽃 냄새도 덩달아 생각이 났다. 모두가 터무니없는 망상이었다. 옥환은 자존심 때문에라도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승헌은 차를 벌컥벌컥 들이켜며 잡념을 떨쳐 내려 애썼다.

옥환이 어느새 빈 자신의 잔에 차를 따르는 걸 지켜보던 승헌은 무거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백고가 다녀간 모양이더군.”

옥환은 눈에 띄게 어깨를 움찔하며 그렇다고 대답했다. 승헌은 왜 그렇게 놀라냐고 묻고 싶은 것을 가까스로 참아냈다.

“무슨 얘기를 했나?”

“그냥…… 별 얘기 안 했습니다.”

“별 얘기가 아니면 나한테도 말해줄 수 있잖아.”

“시답잖은 얘기들입니다…….”

옥환은 평소와 달리 눈에 띄게 건성으로 대꾸하고 있었다. 백고와 이야기한 내용을 감추려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으나, 그의 태도가 석연치 않은 것은 사실이었다. 승헌은 눈썹을 찌푸렸다. 승헌이 그렇게 말없이 한참을 쳐다보고 나서야 옥환은 겨우 자신의 무례한 행동을 깨닫고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죄송합니다, 전하. 그…… 생각할 게 좀 있어서.”

“무슨 생각? 이 나라에 대해 걱정이라도 해?”

옥환은 승헌의 말 속에 담긴 진의를 눈치챈 건지 못 챈 건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대꾸했다.

“서국은 전하께서 잘 돌보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대답지 않은 대답이군. 이제 나랏일에는 관심이 없어졌나? 생각해 보면 최근 들어 그대가 꽤 조용하긴 했어.”

“…….”

그제야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느낀 옥환은 경계하는 눈초리로 승헌을 응시했다. 그런 옥환의 눈빛을 받으며 승헌은 넉살 좋게 웃을 뿐이었다. 옥환은 주저하는 듯하더니 이내 물었다.

“백 장군의 일로 화가 나셨습니까……?”

“그랬으면 좋겠나?”

승헌은 능청스럽게 되물었으나 옥환은 대답하지 않았다. 승헌의 인내는 점점 더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옥환은 다시 상념에 골똘히 잠긴 듯 시선을 내리깐 채 침묵했다. 끝내 승헌은 혀를 차며 옥환의 손목을 낚아챘다. 어찌나 세게 잡아당겼는지 옥환의 상체가 승헌 쪽으로 끌려갈 정도였다.

“그대의 주인이 묻고 있잖아. 대답을 해야지?”

옥환은 놀랐는지 눈을 휘둥그레 떴으나, 곧 흠칫하며 다급하게 몸을 뒤로 뺐다. 묻는 말에 대답은 않고 제게서 떨어지려는 옥환의 행동에 승헌이 그의 손목을 더 힘주어 잡았다.

“설옥환.”

“……이미 화를 내고 계시지 않습니까. 제가 내지 말아 달라고 하면 안 내시겠습니까?”

승헌은 이를 갈더니 그대로 옥환을 힘껏 잡아당겼다. 상 위의 다기들이 엎어지며 옥환의 소매가 찻물로 젖어 들었으나 승헌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얼굴이 맞닿을 것처럼 가까워졌다.

“정말 궁금해지는군. 나는 그대의 주인이 맞긴 맞나?”

“…….”

전에도 비슷한 것을 물었었다. 옥환의 반응은 그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당혹감과 거북함. 그리고 지금은 그때보다 더 불쾌해 보이기까지 했다. 승헌은 자조하듯 웃었다. 이런 옥환에게 병부상서를 만나 왜 그런 말을 했냐고, 백고와는 무슨 대화를 나눈 것이냐고 묻는 것은 불가능했다. 무슨 대답을 듣든 간에 옥환을 향한 의심은 사라지지 않을 테니까. 애초에 찾아오는 게 아니었다. 옥환이 언제는 제가 바라던 대로 행동한 적이 있었나.

“옥환. 어차피 내가 말해도 그대는 계속 백고를 만나겠지?”

“명확한 이유를 알려 주시면 따르지 못할 것도 없…….”

“백고가 그대에게 연심을 품고 있어.”

승헌의 충격적인 발언에 옥환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승헌은 그런 옥환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옥환도 백고의 마음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면 알면서도 만난 이유는 무엇일까. 그 대답은 뻔했다. 백고를 이용하기 위해서. 안 그래도 멍청한 백고가 자신에게 푹 빠져 있기까지 하니, 제 뜻대로 부리기에는 그야말로 최적의 상대였을 것이다. 왜 그 생각을 이제야 했을까. 멍청한 것은 백고뿐 아니라 자신 역시 마찬가지일지도 몰랐다.

다만 눈앞의 옥환은 자신의 말에 명백히 동요하고 있었다. 백고가 그에게 품은 마음을 자신이 모를 거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었다. 만일 그렇다면 옥환을 이토록 방심하게 만든 것은 자신일 터였다. 그만큼 옥환에게 마음을 주었다는 뜻이니까. 저 또한 옥환이 이용하는 대상이었다는 것도 모르고.

물론 이 모든 게 질투에 눈이 먼 자신의 억측일 수도 있었다. 하나 그의 이성은 억측일 가능성보다는 사실일 가능성이 더 높다고 말하고 있었다. 승헌은 더없이 속이 쓰렸다.

“하지만, 전하. 맹세컨대 백 장군도 저도 전하께 누가 될 만한 행동을 한 적은 절대 없습니다.”

이윽고 어쩔 줄 몰라 하던 옥환이 뒤늦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백고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든 아니면 그에게 이용가치가 남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든 승헌은 이 이상 옥환이 그를 감싸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다.

“그리고…… 저, 전하.”

승헌이 돌연 옥환의 옷깃을 난폭하게 끌어내리는 바람에 옥환은 말을 멈추었다. 마치 손을 탄 적 없는 백자처럼 희기만 한 피부 위에, 승헌이 가만히 입술을 대었다.

승헌의 돌발행동에 옥환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으나 그도 잠시, 옥환의 입에서 고통에 찬 짧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윽, 전하, 이 무슨.”

승헌이 옥환의 목을 깨문 탓이었다. 어찌나 세게 무는지 피가 맺힐 정도의 고통이 느껴졌다. 옥환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으나 승헌은 멈추지 않고 그 반대쪽을, 그 옆을, 잘근잘근 깨물고 씹었다. 그리고 그 상처 위를 혀로 덧그리고는 힘껏 빨아당겼다.

옥환은 어떻게든 승헌의 품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승헌은 그를 단단히 붙잡고 결코 놓아 주지 않았다. 승헌이 몸을 깨물 때마다 옥환은 외마디 소리를 냈다. 누가 들을까 싶어 기를 쓰고 소리를 죽인 옥환은 승헌의 이 화풀이가 한시라도 빨리 끝나길 빌었으나 승헌의 행위는 몹시도 집요하게 이어졌다.

“전하, 이제 그만 하십시오……!”

결국 참다 못한 옥환이 있는 힘껏 승헌의 가슴팍을 떠밀었다. 그래 봤자 옥환의 목과 어깨는 이미 승헌이 남긴 자국으로 가득했다. 승헌은 수치심과 고통으로 얼굴이 새빨개진 옥환을 보고는 작게 코웃음 치더니 불쑥 옥환의 목을 감싸 쥐고 말했다.

“이 꼴을 하고서도 백고를 만날 수 있으면 얼마든지 만나.”

“전하!”

“물론 다음엔 그놈이 보는 앞에서 그대를 안겠지만.”

그러더니 승헌은 미련 없이 돌아섰다. 뒤에서 옥환이 저를 원망스레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으나 더는 신경조차 쓰이지 않았다. 이것은 모두 옥환이 자초한 일이었다.

그렇게 옥환의 처소를 뒤로하며 승헌은 환관에게 일렀다.

“옥환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해서 보고하도록. 뭘 하든 단 한 가지도 빼놓지 마.”

“명 받잡겠나이다.”

그럼에도 승헌은 여전히 옥환이 아니길 바라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마음이, 유독 짐처럼 느껴지는 날이었다.

***

승헌이 내놓은 상처 때문에 옥환은 한동안 본의 아닌 요양에 들어가야만 했다. 이전에 비슷한 일이 있었던 때보다도 훨씬 상처가 심해서, 도저히 가릴 수조차 없었던 것이다. 와병을 이유로 조회에도 불참하고 처소에만 틀어박혀 있는 옥환에게 수많은 이들이 문병을 왔지만 옥환은 그조차도 모두 사양했다. 태사가 정말 큰 병에 걸린 것이 아니냐며 궁 안에는 불온한 소문들이 떠돌기도 하였으나 옥환으로서도 별수가 없었다. 지금은 누구도 만날 수가 없는 상태였으니까.

조정에 나가지 않은 지 사흘. 옥환이 거울에 비친 제 목의 상처를 살피고 있는데 계평이 그 모습을 보고는 혀를 차더니 사납게 불평했다.

“나 참, 그게 짐승이 할 짓이 아니면 무엇이랍니까? 어찌 사람 목을 그리 물어뜯어 놓는지.”

“…….”

“이번에도 승상의 발을 묶어 두려 그런 것일지도 모릅니다. 또 그놈의 의심병이 도져서 말이지요. 참으로 대단한 인사입니다. 일 년을 공들였는데 아직도 의심을 하다니요. 군왕이라는 자가 그리 속이 좁아서야.”

평소라면 승헌의 속내에 대해 분석을 하든 계평의 입단속을 시키든 했을 옥환이 오늘은 유난히 말이 없었다. 한참 승헌의 욕을 하던 계평은 뒤늦게 옥환이 지나치게 조용하다는 것을 깨닫고 그를 쳐다보았다.

“어찌 그러십니까?”

“……이번 일은 내가 잘못한 것이다.”

옥환의 대답에 계평은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이내 신랄하게 쏘아붙였다.

“지금 서국 왕의 편을 드시는 겁니까? 언제부터 그런 걸 신경 쓰셨다고? 미안하게 생각하려거들랑 본인이 벽국의 첩자인 것부터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계평의 비아냥에 옥환이 눈빛을 달리했다. 그 차디찬 시선에 계평은 입을 다물었으나 여전히 불신과 불만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주제넘기가 짝이 없구나. 내가 방심하여 일을 그르쳤다고 말한 것뿐이거늘, 어찌 그리 생각이 부족한 게냐? 가끔은 전하께서 너더러 날 도우라고 보내신 건지 방해하라고 보내신 건지 모르겠다.”

“승상!”

“닥치지 못할까!”

옥환의 매서운 꾸지람에 계평은 원망 어린 눈으로 옥환을 노려보다가 휙 나가버렸다. 옥환은 저 녀석이 도대체 언제쯤이면 철이 들는지 하고 속으로 푸념을 하며 거울을 내려놓았다.

상처는 아물어 가고 있는 중이었고, 이제 더는 아프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계평에게도 말했다시피 자신이 잘못한 일이었다. 승헌이 백고와 만나는 걸 싫어한다는 걸 알면서도 계속해서 그를 만났지 않은가. 계획의 실행을 위해서 불가피한 일이었다고는 하나 그조차 서국을 망치기 위한 행동이었으니, 승헌이 이보다 더 심한 짓을 한다고 해도 옥환에게는 할 말이 없었다.

게다가 이번에도 자신이 주인이 맞냐는 승헌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물론 이번에는 처음과는 다른 이유였다. 백고에게 한 거짓 고백으로 옥환의 심중은 몹시도 어지러웠고, 그런 상태에서 도저히 승헌이 제 주인이라는 대답은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나 그것은 승헌의 분노에 부채질을 한 격에 지나지 않았다.

이럴 줄 몰랐던 것이 아니다. 언젠가는 승헌이 모든 것을 알았을 테고, 당연히 일어날 것이라 생각했던 일들이 일어나고 있을 뿐이었다. 한데도 그 당시에는 승헌의 행동에 화가 났다. 억울할 것이라곤 하등 없었거늘.

‘나도 참 낯짝이 두껍구나.’

옥환은 가만히 상처를 짚었다. 화를 내던 승헌의 표정을 떠올리니 어쩐지 가슴이 욱신거렸다. 생각해 보면 그날 승헌의 행동은 단순히 백고와 만난 일 때문에 화가 나서 그런 것만은 아닌 듯한 기분이 들었다. 혹 자신을 의심할 만한 일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안 그래도 중서령이 저를 미심쩍어하고 있지 않던가. 그가 승헌에게 바람을 불어넣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당분간은 승헌의 눈 밖에 날 행동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어차피 상처 때문에 칩거하고 있었으니, 그것을 핑계로 정사에 신경을 끄기에도 적당한 때였다. 이번 일로 인해 옥환은 거의 잠도 이루지 못한 데다가 정신적으로도 양심의 가책을 많이 느껴 다소 지친 상태였다. 앞으로를 위해서라도 그 역시 휴식을 취할 필요가 있었다.

시간이 좀 더 흐르면…… 승헌의 화도 풀릴 것이다. 손금에 대해서도 말해 주기로 하지 않았던가. 그는 약속을 잘 지키는 사내이니, 바쁜 일이 끝나고 생각할 여유가 좀 생기면 다시 제게 찾아와 주리라. 옥환은 자신에게 그런 위안을 건네며 이부자리 위에 누워 천천히 눈을 감았다.

하나 공교롭게도 일은 옥환이 바라는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어지러운 조정 때문인지 문관들이 옥환의 의견을 듣고 싶다며 매일같이 그를 찾아왔던 것이다. 마치 옥환이 맨 처음 서국에 왔을 때 그의 조언을 들으러 수많은 객이 찾아왔던 것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더구나 옥환의 병증이 심상치 않다는 괴소문까지 도는 바람에 문관들은 자신들의 정신적 지주와도 같은 옥환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싶어 더욱 자주 그를 찾아왔다. 언제까지 그들을 문전박대할 수도 없었던 옥환은 결국 조정에 나가지 않게 된 지 일주일째 되는 날, 문병을 온 문하시중과 몇몇 문관들을 만났다.

“태사. 정말로 걱정했습니다. 갑자기 또 아프다고 하셔서…….”

생각보다 괜찮은 옥환의 모습에 문하시중은 크게 안도한 모양이었다. 옥환은 옅은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자꾸 걱정을 끼쳐드리게 되는 듯하여 민망할 따름입니다. 보시다시피 저는 멀쩡하니 다들 부디 마음 놓으십시오.”

“그것은 다행입니다만 요양이 길어지시니……. 고뿔을 아주 독하게 걸리신 모양입니다. 겨울도 다 끝나가는데 추위가 물러가지 않아 여러 가지로 큰일입니다.”

옥환이 두꺼운 모피를 걸치고 있는 것을 보며 문관 하나가 그렇게 말했다. 옥환은 목의 상처를 가리기 위해 그리한 것이었으나, 문관의 말에 모르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곧 농번기가 다가올 텐데 이처럼 날이 쌀쌀해서야 굳은 땅이 제때 녹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태사는 얼른 쾌유하는 것부터 생각하십시오. 지금이야말로 태사의 힘이 절실한 때입니다.”

옥환은 혹 조정에 무슨 일이 있냐고 물으려다가 문득 승헌의 매섭던 눈빛이 떠올라 단념했다. 적어도 달포 정도는 몸을 사릴 생각이었다. 옥환이 평소처럼 궁금해하지 않은 탓인지 문관들이 다소 초조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저, 태사. 실은 이번에 호 장군이 공석인 병부상서의 자리에 인재를 하나 천거했는데…… 선왕이 승하하신 뒤로 낙향했던 주형이라는 자입니다.”

새 병부상서의 건인가. 옥환은 내키지는 않았으나 일단은 제 생각을 말했다.

“……그렇습니까. 지금의 전하께서 즉위하신 뒤 줄곧 은거하고 있었던 인사라면 현 무관들과는 큰 인연이 없을 테니 괜찮을 것 같습니다만.”

“하나 병부상서까지 무관 측 인사가 차지하게 되면 저희는 병권과 관련된 관직은 하나도 없는 셈이 되지 않습니까…….”

문관들의 불만은 충분히 예상했던 바였으나 옥환이 의외라고 생각한 것은 문하시중이었다. 그는 당파싸움보다는 문무관이 평화롭게 지내는 것을 더 원하는 자였다. 그러니 이번 인선에서도 필시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반응을 보아하니 그도 호진이 천거한 인재가 썩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문하시중께서는 어찌 생각하십니까?”

옥환이 일부러 문하시중을 떠보려 물었다. 문하시중은 옥환의 의도를 알고 있는지 솔직하게 대꾸했다.

“저도 또다시 조정에서 논쟁이 벌어지길 바라지는 않습니다만, 지난 일을 겪고 나니 역시 병권은 고루 나누어 가지는 게 좋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입니다.”

“하나 무관들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그들도 지난 모반과 관련하여 꽤 많은 이들이 축출되지 않았습니까. 병부상서직을 되찾아 오자면 문관 측에서도 내놓는 게 있어야 할 텐데요.”

옥환은 일이 쉽지 않을 거라고 여겨 그리 말한 것이었으나, 문관들은 예상보다 더 성을 냈다. 아직도 두 무리 사이의 갈등은 전혀 해소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당치도 않습니다! 돌아가신 전 병부상서 또한 문관이 아니셨습니까? 그 난리 통을 만든 것은 무관인데, 뭘 그리 잘했다고 저리 뻔뻔한지 모를 일입니다!”

“맞습니다! 게다가 병부상서 자리까지 뺏어가려 하다니, 인면수심에도 정도가 있지요……!”

이대로라면 또다시 신하들 사이에 싸움이 벌어질 것이 자명했다. 지금 상황에서 당쟁이 일어나면 가장 먼저 의심을 받을 것은 자신이었기에, 옥환은 차분하게 문관들을 타이르고자 했다.

“호 장군 때문이겠지요. 호 장군 또한 무관이나 이번 일과는 완전히 연관이 없었으니까요. 다만 그도 굳이 낙향했던 인사를 천거한 것을 보면 나름대로 인선에 신경을 쓴 것 같은데, 차라리 병부상서직을 내어주고 국경의 절도사 자리를 가져오는 것은 어떻습니까. 마침 호 장군이 도성으로 돌아오면서 자리 하나가 비지 않았습니까.”

나름 합리적인 제안이라고 내놓은 것임에도 문관들은 납득한 것 같지 않았다. 이럴 때면 문하시중이 젊은 문관들을 다독여 가장 안전한 방향으로 결정을 유도하고는 했으나 오늘은 그 문하시중이 나서지 않으니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겉부분만 엉성하게 봉합했을 뿐, 여전히 서국의 조정은 안에서부터 곪아 터져 있는 것이다.

옥환은 자신이 생각보다 큰일을 저지른 것 같다는 생각에 앞날이 까마득해졌다. 그리고 이대로 승헌이 괜찮을지도 우려가 되었다. 그는 눈을 천천히 감았다 떴다.

“전하께서 격무로 잠도 제대로 주무시지 못하는 상태라고 들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모르지 않으나 고생하시는 전하를 생각해서라도 지금은 조용히 몸을 낮추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문관들은 고민하는 듯 입을 다물었다. 옥환의 설득은 그들의 굳은 결심에 어느 정도 생각할 여지를 준 것 같기는 하였으나, 그것을 듣지 못한 다른 문관들도 옥환의 뜻에 따라 줄지는 미지수였다. 이윽고 문하시중이 문관들을 먼저 보내고는 옥환과 단둘이 되자 속내를 터놓았다.

“태사. 사실 우리들은 두려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도 명색이 육부의 수장인 상서 자리에 있던 자가 너무도 허망하게 죽지 않았습니까. 물론 백청 역시 죽었으나, 무관들이 얼마나 기고만장한지, 얼마나 눈에 뵈는 게 없는지를 알게 된 것입니다.”

“……문하시중…….”

옥환은 그제야 문하시중이 지난 사냥제 때 참여하지 않겠다고 말했던 연유를 깨달았다. 그는 정말로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행여 무관들이 실수인 척 자신을 죽이기라도 할까 봐.

“욕심은 억누를 수 있으나 두려움은 억누를 수 없는 법이지요. 부끄러운 이야기입니다만 저를 포함한 문관들은…… 상대가 쥔 칼을 뺏어오기를 바랍니다. 그 칼에 맞고 싶지 않으니까요.”

문하시중의 심정은 이해가 갔다. 옥환은 벽국에 있을 당시 매일 외줄 타기를 하듯 살았다. 전장에도 수없이 많이 나갔기에 호진이 저를 죽이려 했을 때도, 백청이 저를 노리고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이렇다 할 공포는 느끼지 않았다. 하나 서책만 읽고 정치만 한 서국의 문관들은 다르다. 문하시중의 말대로 그들은 새삼 무관들에게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옥환 자신은 느낀 적이 없었던 것이기에 무심코 간과했던 부분이었다.

하나 더 이상은 승헌에게 저를 의심할 빌미를 주어서는 안 되었다. 정말로 내키지는 않았으나, 더는 방법이 없었다. 옥환은 작게 한숨을 쉬고는 말을 꺼냈다.

“문하시중. 정 그렇다면……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병부상서를 내주는 대가로 절도사와…… 왕후의 자리를 가져오시는 건 어떻습니까.”

“……예? 잠깐, 태사.”

“국혼 건은 제가 전하께 잘 말씀드려보겠습니다. 애초에 저 때문에 거절하신 것이니 제가 괜찮다고 하면 전하께서도 허락하실 것입니다.”

문하시중은 난처한 표정으로 옥환을 바라보았다. 옥환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으나 모피 속에 감춰진 두 손은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문하시중께서, 전하께 어울리는 어질고 현숙한 이를 찾아 주실 거라고 믿습니다. 왕후 정도면 다른 문관들도 납득할 테지요. 무엇보다 더는 조정에 분란이 일어나선 안 됩니다.”

“하, 하나 태사. 정녕 괜찮으시겠습니까……?”

“어차피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비를 들이고 후사를 가지면 조정도 더 빨리 안정되지 않겠습니까. 저는 어찌 되었든 첩에 불과합니다. 그것도 남첩이지요.”

“아닙니다, 태사. 태사께서는…….”

당황한 문하시중이 어떻게든 위로를 하려 입을 열었으나 옥환은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병 주고 약 주는 것도 아니고, 서국이 이러한 위기에 이르게 한 것은 자신인데 또 이제는 그것을 수습하려 애쓰고 있다니.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무튼 그렇게 아시고 문관들을 잘 타일러 주십시오. 저는 몸이 안 좋아 그만 쉬어야 할 것 같습니다.”

단호한 옥환의 분위기에 문하시중은 더 뭐라 하지도 못하고 떠나가야만 했다. 홀로 남은 옥환은 화로 앞으로 차갑게 식은 손을 가져가며 생각했다. 자신이 국혼을 받아들이라 청하면 승헌은 더 화를 낼지도 모른다. 하나 모든 걸 얻을 수는 없는 법이었다. 승헌에게 더 큰 의심을 살 바에야 차라리 미움을 받는 쪽이 나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의심에서 벗어나는 일이었으니까.

물론 그가 정말로 국혼을 받아들일지는 알 수 없었으나 이것으로 자신의 충심을 증명해 보이기는 충분할 것이다. 이렇게 다시 신임을 얻다 보면 기회는 찾아오리라.

‘……그럼 나는 또 서국을 무너뜨리려 하면 되는 건가. 사람들이 서로에게 칼을 겨누게 하면서.’

옥환은 자조했다. 어찌 자신의 이 지독한 전쟁은 끝나는 일이 없는지 한탄하며.

***

승헌이 오고 있다는 소식에 옥환은 조금 놀랐다. 드디어 화가 풀린 걸까 싶기도 했다. 그 뒤로 조정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알려고 하지도 않았고 알지도 못했으나, 큰 싸움이 벌어졌다면 옥환의 귀에도 들어왔을 터였다. 다행히 그런 얘기는 들리지 않았으니 조정은 아직 잠잠한 듯했다. 하면 승헌의 의심도 조금은 풀렸을 것이다.

옥환은 혹여나 하고 하인에게 물어 손금에 대해서도 더 배워 두었다. 승헌이 그것을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이번에는 재물선에 대해 배워 놓았으니 지난번처럼 곤란한 상황이 생기지는 않을 터였다. 물론…… 국혼에 대한 얘기도 해야 할 것이다. 그리 생각하면 마음이 조금 무거워지긴 했으나 그럼에도 옥환의 기분은 엄밀히 말해 들떠 있는 쪽에 가까웠다. 하지만.

“……!”

승헌이 오자마자 옥환의 코앞에 내던진 것은 피투성이가 된 계평이었다. 옥환은 당황해서 계평에게 달려가 그의 상태를 살폈다. 상처는 눈 뜨고 보기 힘들 만큼 참혹했으나 다행히 목숨만은 아직 붙어 있었다.

“전하, 이 무슨…… 계평이 무언가 죄를 지었습니까?”

옥환이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승헌이 얼음장 같은 어조로 대꾸했다.

“이놈이 몰래 궁 안으로 무언가를 들여오려 한 정황을 잡았는데, 아무리 고신을 해도 입을 열지 않더군. 하니 그대가 말해 봐. 뭘 시켰나?”

혼란으로 가득 찬 옥환의 머릿속에 불현듯 염완의 위패를 준비하려던 것이 떠올랐다. 필시 계평은 그 준비를 하다가 승헌에게 들킨 것이리라. 하나 옥환은 더더욱 난감해졌다. 그것을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창백한 얼굴로 입을 다문 옥환에게 승헌이 조소를 지으며 물었다.

“왜. 벽국과 밀서라도 주고받던 참인가?”

“저, 전하.”

옥환의 말문이 막혔다. 어찌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승헌의 눈빛은 잘 벼린 칼날처럼 날카로웠고, 그의 말은 수없이 많은 가시가 돋친 듯했다. 예전에 보여 주던 다정함은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그는 처음 만났을 때보다 더 매정한 타인처럼 굴고 있었다. 하나 옥환은 마음을 다스렸다. 여기서 무너져서는 안 된다고 자신을 채찍질하며.

“전하, 오해이십니다. 실은…… 계속 사라졌다는 종소의 시신을 찾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계평이 그 단서를 찾아온 모양입니다. 다만 계평이 전하께 솔직히 고하지 않은 것은 아무래도 그 아이와 제가 일전에 안 좋은 일로 엮였다 보니 걱정이 되어 그랬을 것입니다. 이는 다 아랫것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제 어리석음이고 제 죄이니 부디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옥환은 머리를 깊이 조아렸다. 손끝이 차갑게 얼어붙고 목소리가 떨렸으나 승헌에게 직접적인 물증이 없는 만큼 자신을 크게 벌하기는 어려울 것이었다. 한데 그때, 승헌이 옥환의 뒷덜미를 잡아 그를 난폭하게 일으켰다.

“그놈의 종소 타령은 이제 귀에 딱지가 앉겠어. 언제까지 그 아일 우려먹을 셈인가?”

“전하.”

“자비를 베풀어 달라? 거기 그놈에게도, 백고에게도, 그대에게도? 얼마나? 얼마나 더 베풀어야 하지?!”

승헌의 눈빛은 분노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옥환은 승헌이 왜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이해는 했지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가 뭐라고 해도 자신은 할 말이 없는 입장이다. 그가 자신의 진짜 목적을 알았든 몰랐든, 자신이 그를 속이고 서국을 망치고 있는 건 사실이었으니까. 머리로는 이해하는 것을, 가슴이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억울해선 안 되는데 억울했고, 서러워선 안 되는데 서러웠다.

노기 띤 승헌의 얼굴을 바라보며, 옥환은 무거운 어조로 청했다.

“……하면…… 하면 베풀지 마십시오. 그 의심으로 말미암아 저를 죽이십시오.”

반쯤은 진심이었다. 홧김에 한 말이었으나 그냥 편해지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매일매일을 전전긍긍하면서 보내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기대하고 실망하고, 눈치를 보고 자책을 하고…… 이젠 지긋지긋했다. 벽국과 서국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헤매는 자신이 괴로웠다. 벽국을 배신할 수도, 서국을 망칠 수도 없다면 차라리 그 짐을 내려놓는 게 낫지 않을까.

하나 문득 귓가에 들리는 승헌의 낮은 웃음소리가 옥환을 현실로 건져 올렸다. 옥환은 고개를 들었다. 이런 상황이건만 승헌은 웃고 있었다. 옥환은 그런 그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대는 이런 식으로 줄곧 나를 속여 왔군. 여차할 땐 목숨을 들이밀면서.”

심장이 차디찬 바닥에 내던져진 것 같았다. 수도 없이 대비를 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상상만 하던 일이 코앞에 닥치니 두려움이 엄습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속이다니…….”

옥환이 겁에 질린 얼굴로 물었으나 승헌은 대답 대신 질문을 던졌다.

“무엇을 들여오려 했나? 지금이라도 솔직히 말해.”

옥환은 다급하게 머리를 굴렸다. 하나 무슨 말로 변명을 해야 할지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다. 위패는 시킨 자신조차 잊고 있던 물건이었다. 애초에 제정신이었다면 그런 바보 같은 짓을 지시했을 리가 없었다. 그만큼 최근의 자신은, 그저 승헌에 대한 생각으로만 가득 차 있었다. 왜 그랬을까. 이자는 적국의 왕인데. 그 위패는 주군을 잊지 않으려 그런 것이었는데. 자신은 벽국의 재상이고, 백성들을 구하려고 여기 온 것이었는데…….

혼란스러워하는 옥환을 바라보며, 승헌이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그는 고통스러운 듯 인상을 쓴 채 말했다.

“그대가, 병부상서를 부추겼지.”

옥환은 뭐라고든 대답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승헌은 그럴 여지를 주지 않고 연이어 물었다.

“그대는 벽국의 사람인가?”

“……저는…….”

나는 누구인가. 저를 향한 분노와 미움으로 점철된 승헌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옥환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새삼 고민했다. 하나 그 대답이 쉽게 나올 리 없었다. 그것을 알지 못해 계속 방황하고 있던 것이 아닌가.

그럼에도 옥환은 인정해야만 했다. 벽국을 향한 자신의 충심이 더는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을. 이제는 벽국을 위해서라는 말만으로 제 마음을 설득할 수 없다는 것을.

하나, 승헌의 사람이 될 수는 없었다. 이런 눈을 하고 저를 보는 사내의 사람이 되는 것은 불가능했다. 자신이 그리 만든 것이다. 하면 어디로 가야 하나. 누구도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간악하고 괘씸한 모사꾼으로만 본다면…….

결국 갈 곳 잃은 옥환이 기댈 수 있는 사람은 단 하나뿐이었다.

‘나는 주군의 사람이다. 주군밖에 없어.’

자신은, 염완의 사람이었다. 그와 함께 같은 꿈을 꾸었고, 그의 유지를 받들기로 마음먹었다. 그것이 최초의 목적이었다. 그것을 이루기 위해 자신은 잘못된 걸 알면서도, 끔찍한 결과를 초래할 걸 알면서도 이 길을 택했다. 그렇다면 최후의 최후까지 그 길을 걸어야만 했다. 이제 와 후회를 하고 돌아가기에는 너무도 많이 와 버렸다.

자신이 방향을 바꾼다 해도…… 승헌은 자신을 받아 주지 않을 것이다. 그곳에 승헌은 없으니까. 자신이 가는 길 어느 방향에도, 승헌은 없으니까.

‘우리는 처음부터 잘못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된 사이가 아니었던가. 서로 원하는 것을 갖기 위해 거래를 한 사이. 반려 같은 것은, 유치한 농담이었을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옥환의 가슴속에서 요동을 치던 감정의 파도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아니, 속까지 얼어붙었다. 그러고 나니 정신이 맑아졌다. 승헌이 무어라 하든 이 위기를 넘겨서 주군의 의지를 이어 가야 한다는 생각만이 옥환의 머리를 지배했다.

옥환은 자신을 붙잡고 있는 승헌의 팔을 힘주어 잡으며 차분하게 설명했다.

“병부상서의 일은…… 오해하실 만하다는 걸 압니다. 하나 저는 그저 병부상서를 돕고 싶어 그리한 것이었습니다. 무엇보다 백청이 병부상서의 아들을 모함하고 반란까지 꾀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아닙니까.”

“웃기는군. 이게 다 백청이 자초한 일이다? 그리되도록 조작한 게 그대 아닌가?”

“그렇게 따지자면 처음부터 문관과 무관이 적대시하고 있었기에 벌어진 일이라고 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 식으로 거슬러 올라가자면 한도 끝도 없겠지요.”

옥환은 잠시 간격을 두었다가, 승헌을 똑바로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솔직히 제가 보기에 전하는 그저 절 믿고 싶지 않으셔서, 온갖 일에 저에 대한 의심을 끼워 맞추고 계실 뿐인 것 같습니다.”

“뭐? 뭐라고……?”

승헌은 기가 막히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믿고 싶지 않아서 그런 것이라고? 옥환의 한 마디에 승헌은 그간 자신이 고민하고, 망설이고, 걱정하던 모든 것이 부질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과 옥환 사이에는 단 한 번도, 서로를 향한 믿음이 생긴 적이 없었다. 자신의 손을 잡아 주었던 그때조차 옥환은 자신을 믿지 않았었다.

승헌은 잔인하기 짝이 없는 현실을 절감하면서도, 마지막으로 확인하듯 물었다.

“하면 문관들이 자기네 입맛에 맞는 여인들을 자꾸 나한테 찍어다 붙인 것도 그대가 시킨 일이 아니겠군? 나 혼자 멋대로 의심한 것일 테지?”

“아닙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러지 않을 필요가 없으니까요. 저는 당쟁을 막기 위해 왕후 간택을 내세워 그들을 설득했을 뿐입니다.”

“그러지 않을 필요가 없어? 나는, 혼인하지 않겠다고 했잖아. 그대를 위해서. 그대는 그게 아무렇지 않았어? 장난 같았나?”

승헌이 한 음절, 한 음절 뱉을 때마다 그것은 옥환의 가슴에 와 비수처럼 박혔다. 하나 옥환은 고집스럽게 되뇌었다. 그것은 장난이었을 것이라고. 혼자 두지 않겠다는 말과 같이.

실제로 그는 지금까지 몇 번이나 자신을 혼자 두지 않았던가.

“……진심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옥환의 단호한 대답을 들은 승헌은 더 이상 웃지 않았다. 화를 내지도 않았다. 그저 상처받은 얼굴로 옥환을 바라보기만 했다. 옥환은 그런 승헌에게서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승헌의 눈빛을 견뎌낼 자신이 없었다.

그렇게 영겁 같은 긴 적막이 흘렀다. 옥환의 얼어붙은 줄 알았던 마음은 그사이 수천 번을 흔들렸다. 지금이라도 용서를 빌어야 하는 것인지, 자신도 원해서 한 일이 아니었다고 고백해야 하는 것인지, 수도 없이 고민했다.

하나 옥환의 동요는 승헌의 한마디에 산산조각 났다.

“그대를 서국에 데려오는 게 아니었어.”

승헌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옥환을 거칠게 놓았다. 옥환은 움찔하며 저도 모르게 승헌을 올려다보았다. 이제 그의 얼굴에는 좌절이나 실망 따윈 보이지 않았다. 있는 것은 군주의 냉철함일 뿐.

“설옥환. 그대는 애물단지였어. 버리느니만 못한.”

옥환은 눈을 크게 떴다. 아무 말도…… 아니, 숨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말이라는 것이, 사람의 입에서 나온 것이, 이리도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 놓을 수 있는 것인지 옥환은 미처 몰랐다. 그는 실제로 칼에 찔리기라도 한 것처럼 제 가슴을 짚었다. 아. 소리 없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마치 심장이 뛰지 않는 것만 같았다. 세상의 온기란 온기는 모두 사라진 듯했다. 그런 세상에, 저 혼자 남은 것 같았다. 얼어붙은 송곳으로 가슴을 파낸다고 하면, 이리 아프고 이리 시릴까?

크게 충격을 받은 옥환을 버려두고 승헌이 자리에서 일어났으나 옥환은 그를 붙잡지도, 아니, 올려다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가 얼마나 경멸이 담긴 눈으로 자신을 볼지가 두려웠다.

그렇게 승헌은 홀로 떠나갔고, 옥환은 홀로 남겨졌다.

***

축시가 넘은 야심한 새벽. 승헌이 머무는 궁에는 아직까지 불빛이 밝혀져 있었다. 그 안에서 승헌은 자지도 않고 의자에 앉아 홀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가 손에 쥐고 있는 것은 두 동강이 난 위패였다.

그것은 옥환의 호위가 수상한 행동을 하는 것을 붙잡았다가 발견한 물건이었다. 그것에 이름은 새겨져 있지 않았으나, 승헌은 본능적으로 그것이 염완을 위한 것임을 알았다.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의 기분은 도저히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실망이나 배신감 따위의 한 단어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크나큰 파도가 자신을 덮쳐 끝없이 깊은 물속으로 가라앉는다고 하면 그나마 조금 비슷할까.

하나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위패에는 아무것도 적혀져 있지 않았으니, 이것은 염완의 위패가 아닐 수도 있었다. 옥환의 가족 중 누군가일 수도 있었다. 정이 많은 옥환이, 가족을 그리워해 그런 것일 수도 있었다. 제발 그랬으면 했다.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옥환을 찾았던 승헌은, 그곳에서 더욱 잔혹한 현실과 마주해야 했다. 그럼에도 마지막까지 위패에 대한 것은 묻지 못했다. 이미 대답은 나와 있었다. 하나 그것을 옥환의 목소리로 들을 자신이 없었다.

스스로의 나약함에 승헌은 기가 찼다. 자신이 이토록 약한지 지금껏 살면서도 모르고 있었다. 아니면 그만큼 옥환이 제 마음속을 차지하고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더더욱 안 될 일이었다. 옥환의 마음속에 견승헌의 자리는 터럭만큼도 없다는 걸 직접 확인했으니까.

차라리 모두가 바라는 대로 혼인을 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세상에서 자신을 제하고는 모두가 그러라고 아우성이지 않은가. 하나뿐인 정인조차.

자신이 원해서 오른 왕위였으나 뜻대로 흘러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불화가 끊이지 않는 조정과, 날로 힘을 키워가는 적국, 빗발치는 백성들의 원성……. 한 문제를 해결하면 또 다른 문제가 저를 기다렸다. 왕이 되고 나서 승헌은 가장 힘든 시기를 지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를 가장 크게 괴롭히는 건 다름 아닌 설옥환이라는 존재였고, 그 사실에 승헌은 다시 고통 받았다.

승헌이 그때 옥환에게 했던 말은 진심이었다. 옥환을 서국에서 데려와선 안 되었다. 설마하니 옥환이 제게 이렇게까지 큰 영향을 미칠 줄은 몰랐었다. 고작 한 사람으로 인해 이런 무력감과 좌절감을 느낀 것은 처음이었다. 승헌은 이 낯선 상황을 어찌 대처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다만 그 뒤에 한 말은 진심이 아니었다. 옥환이 서국에 와 많은 일을 도운 것은 누구나가 인정하는 바였고, 특히 문관들 사이에서 옥환이 가진 존재감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른 상태였다. 하나 그렇기에 문제였다. 원한다면 그는 조정의 중론을 조작할 수도 있을 테니까. 자신의 견제를 받고 무관의 방해를 받으면서도 결국 그렇게까지 성장한 것이다.

차라리 관직을 빼앗고 첩으로만 들어 앉혀야 할까. 하나 옥환이 그것을 순순히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벽국의 첩자로서든, 서국의 충의지사로서든 간에, 그에게 정치는 사명과도 같은 것일 터.

승헌은 한숨을 내쉬며 관자놀이를 짚었다. 며칠 전부터 두통이 그치지 않았다. 승헌을 진찰한 태의는 피로가 누적된 탓이라고 했다. 하나 이런 상황에서 어찌 쉴 수 있으며, 억지로 쉰다 한들 그것이 제대로 된 휴식이 되겠는가.

그렇게 밤과 함께 승헌의 시름이 깊어져만 갔다.

다음날, 제발 쉬셔야 한다는 태감의 간언에 승헌은 바람이라도 쐴 요량으로 후원을 찾았다. 조정이 뒤집어지고 제 마음이 어지러워지는 사이 세상에는 봄이 찾아왔다. 후원에는 작년과 같이 복사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승헌은 꽃잎이 흩날리는 별천지를 거닐며 제 뒤를 쫓아오던 일 년 전의 옥환을 떠올렸다. 승헌은 그때까지만 해도 옥환을 믿지 않았다. 그를 이용하다가 적당한 때가 되면 버릴 생각이었다. 하나 이젠 적당한 때가 언제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아니, 그때는 영영 찾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차라리 지금이라도…….

미간에 주름을 새긴 채 골몰하던 승헌의 걸음이 예고도 없이 멈추었다. 그는 무언가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그의 시선 끝에는 정자에 앉은 채 풍경을 감상하는 옥환이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옥환은 변함없이 고왔다. 씁쓸할 만큼.

옥환은 하인과 함께 앉아 멍하니 꽃잎을 응시하고 있었다. 태감이 승헌의 눈치를 보며 어쩔 줄 몰라 했으나 승헌은 역정을 내지도, 처벌을 지시하지도 않았다. 그저 옥환을 말없이 지켜볼 따름이었다. 그가 옥환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승헌이 유난히 무거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문관들에게 간택 후보를 올리라고 해.”

“……예, 전하.”

내내 국혼을 거부하던 승헌의 갑작스러운 변심에 태감은 의문을 느끼면서도 분부를 받들었다. 마지막으로 옥환에게 시선을 준 승헌은 긴 한숨을 내쉬고는 자리를 떴다. 승헌이 서 있던 자리에는 연분홍빛 꽃잎만이 무성했다.

이윽고 며칠 뒤, 승헌에게 더욱더 큰 고난이 찾아왔다.

어전회의. 승헌은 비어 있는 옥환의 자리를 보며 신하들의 목소리를 한 귀로 흘리고 있었다. 옥환은 여전히 병을 핑계로 조정에 출석하지 않고 있었다. 차라리 얼굴을 보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한편, 옥환의 처소를 찾은 날 보았던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그의 표정이 뇌리에 박혀 잊히지가 않았다.

한데 그때, 누군가가 갑작스레 편전으로 들어섰다. 급한 일이 생겨 회의에 늦는다던 호진이었다. 그는 성큼성큼 걸어와 승헌에게 절을 올리더니 다급하게 고했다.

“전하,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양양이 벽국에 의해 공격당하고 있다는 소식이옵니다.”

“무어라?”

충격적인 보고에 좌중이 술렁였다. 하필 이런 시기에 벽국의 공격이라니, 그야말로 악재 중 악재였다. 양양은 일 년 전 벽국에게서 뺏어온 요충지이기도 했다. 점령 당시와 달리 지금은 어느 정도의 병력을 보내 놓은 상태였으나, 갑작스런 공격에 제대로 대비가 되어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한데 불안감에 웅성이던 신하들이 갑자기 들려온 ‘쾅’ 하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그곳으로 시선을 향했다가, 소리의 원인을 깨닫고는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승헌이 화를 이기지 못하고 옥좌의 팔걸이를 내리친 것이다. 그야말로 팔걸이가 부러지는 것은 아닌가 싶을 만큼 커다란 소리였다. 옥환일지도 몰랐다. 벽국이 이렇게 적절한 때에 공세로 전환한 것은…… 옥환이 정보를 넘겼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리 생각하니 가슴 한가운데가 불에 달군 꼬챙이로 꿰뚫리는 기분이 들었다.

승헌의 위협적인 분위기에 그 앞에 꿇고 있는 호진은 마른침을 삼켰다.

“하면 지금 양양은 어떤 상태지?”

노기를 억누르며 승헌이 간신히 묻자 호진이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더 깊이 조아렸다.

“성문을 걸어 잠그고 버티고 있다고는 하나, 벽국에서 생각보다 많은 병력으로 쳐들어온 탓에 방어가 쉽지 않사옵니다. 물론 가까운 지역에서 증원군을 보내겠지만, 국경지다 보니 주변의 병력을 빼기도 쉽지가 않아 증원이 도착하는 데엔 시일이 걸릴 듯하옵니다.”

거기까지 말한 호진은 서둘러 이렇게 덧붙였다.

“전하. 이번 전쟁에는 부디 소신을 보내 주시옵소서. 소신이 벽국의 군세를 깡그리 몰아내고, 서국은 감히 자신들이 넘봐선 안 되는 나라라는 것을 통감하게 하겠나이다.”

하나 승헌이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문하시중이 나서 말했다.

“대장군. 대장군의 충심은 모르지 않으나 지금 같은 때에는 대장군께서 도성을 지키셔야 할 줄로 압니다.”

“또 그대들이 천거한 자를 보내자고 할 생각이시오?”

“대장군, 문하시중은 걱정해서 한 말씀입니다!”

“그게 어딜 봐서 걱정입니까? 평소 본인들 언행을 생각해 보십시오.”

호진의 날카로운 반응 하나에 또다시 문무관 사이에 언쟁이 일어났다. 승헌은 이를 갈았다.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매일같이 서로에게 으르렁대는 신하들과, 어지러운 정세와, 제 마음을 흐트러뜨리는 옥환으로 그는 충분히 괴로웠다. 한데 이제는 벽국까지 제 나라의 영토를 침범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제 이득만 생각하며 언쟁을 벌이는 신하들의 철없는 모습을 보며, 승헌은 생각했다. 그리 잘났으면 저희들끼리 한번 해보라고. 자신은 사라져줄 테니.

이윽고 신하들이 서로의 주장을 내세우며 승헌에게 결정을 촉구했다. 승헌은 아무 말 없이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승헌의 돌발행동에 신하들이 의문을 느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어 승헌이 내뱉은 말은, 조정 안의 모든 이를 대경실색하게 만들었다.

“……과인이 가겠다.”

“전하, 그게 무슨 말씀…….”

“이번 전쟁에는 과인이 직접 나가겠다고.”

“예……?!”

그야말로 얼토당토않은 주장에 하나같이 말문이 막혔는지, 아까까지 시끄럽던 조정 안이 몹시도 고요해졌다.

물론 승헌의 주장은 당연히 받아들여선 안 될 일이었다. 특히 문하시중의 경우는 호진의 출진조차 반대를 했던 터라, 왕인 승헌의 경우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것은 다른 이들이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윽고 문하시중이 결사반대를 할 생각으로 곧바로 입을 열었으나, 그 전에 승헌이 선수를 쳤다.

“지금부터 과인의 결정에 토를 다는 자는 누구든 그 자리에서 바로 목을 베겠다.”

승헌의 엄중한 경고에 신하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승헌의 눈빛은 그의 말이 진심임을 나타내듯 더없이 싸늘했다. 하나 제 목숨을 걸고서라도 자신의 출진을 반대할 이들이 있다는 걸 승헌도 알았다. 그렇기에 승헌은 당장 내일 출병하겠다는 말만을 남긴 채 시간을 주지 않고 편전을 나갔다.

문하시중이 얼른 그 뒤를 따라갔으나 남은 신하들은 승헌의 결정을 바꾸기가 쉽지 않을 것임을 직감했다. 그렇게 승헌이 떠난 조정에는 묵직한 적막이 내려앉았다. 신하들은 군왕을 전장으로 내몬 자신들의 행동을 후회했으나, 이미 때는 너무 늦어 있었다.

***

“……승상.”

서책을 읽고 있던 옥환이 부름에 고개를 들었다. 팔에 붕대를 감은 계평이 그곳에 서 있었다. 승헌은 계평의 목숨만은 살려 주었으나, 그를 위해 의원을 보내주지는 않았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옥환은 계평의 치료에 전념해야만 했고, 그 탓에 더더욱 그의 바깥출입은 전무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일이라면 계평의 회복이 수월한 편이라는 것이었다. 부러진 팔이 붙으려면 시일이 좀 더 걸리겠지만 아무튼 곤죽이 되었던 당시에 비하면 생활은 할 수 있을 정도까지 회복이 된 상태였다.

“어찌 그러느냐.”

먼저 말을 걸어놓고는 입을 다물어 버린 계평에게 옥환이 그렇게 물었다. 계평은 솔직히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위패를 들여오던 중 서국의 병사에게 들켜 끌려갔고, 거기서 심한 고신을 당했다. 그 뒤의 일은 기절해 있는 바람에 제대로 알 수 없었으나, 하인들에게 듣기로는 서국 왕과 옥환이 크게 다투었다는 모양이었다. 그 탓인지 옥환은 조정에 나가지도 않았고, 이제는 자포자기한 사람처럼 책만 읽으면서 지내고 있었다.

솔직히 계평도 다 망했다고 생각하는 참이었다. 위패엔 다행히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지만, 옥환의 반응으로 봐서는 아무래도 일이 잘못된 듯했으니까. 그 잘난 설옥환도 제대로 변명을 하지 못한 것이겠지. 서국 왕 역시 곧바로 저를 추궁하던 것을 보아 이미 옥환의 배신을 짐작하고 있던 듯하고.

하나 이 말을 묻기가 참으로 어려웠다. 그럼에도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순 없는 일이기에, 계평은 무거운 입을 열었다.

“저…… 이제 모두 끝난 것 아닙니까……? 서국 왕이 왜 저희를 살려 두고 있는지는 모를 일이나, 더 이상 여기 있는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을 듯합니다만.”

옥환은 책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무심하게 대꾸했다.

“그렇다고 도망이라도 치자는 것이냐? 어쩌면 그 사람은…… 나를 허수아비처럼 여기 놓아두는 게 가장 큰 벌이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르지.”

“실제로 그렇지 않습니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이럴 바엔 차라리 목숨을 걸고 뭐라도 해보는 것이 낫지 않습니까?”

“겨우 구해놨더니 무정하기도 하구나.”

“승상……!”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만, 옥환이 보고 있는 서책은 단 한 장도 넘어가지 않은 채였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매일 그의 옆을 지킬 수밖에 없는 계평이기에 잘 알았다. 옥환은 지금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상태라는 것을.

“제가 어떻게든 벽국에 도움을 요청해 보겠습니다. 저도 저지만…… 승상은 아직 벽국에 필요한 인재입니다. 게다가 서국의 기밀도 아직 보내지 못한 상태고…….”

“지금 그것을 보내려 하다가는 정말로 목이 달아날 것이다.”

“죽으면 좀 어떻습니까! 지금 여기서 이러고 있는 것이야말로 죽느니만 못한 일입니다!”

일순 옥환의 표정에서 생기가 사라졌다. 승헌이 했던 말을 떠올린 탓이었다. 버리느니만 못하다던 그 말. 억지로 잊어보려고 밤새 책을 읽어도 보고, 글자를 적어도 보고, 그를 원망도 해 보았지만 되지 않았던 그 말이었다.

“승상, 제발 정신 좀 차리십시오. 승상도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아직은 끝낼 생각이 없다고. 명줄이 붙어 있으니 뭐라도 해 봐야지요……!”

“네 말이 맞다.”

옥환은 넘어가지 않던 책을 덮었다. 그 말에 쉬이 답을 듣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계평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난 아직 무엇도 끝내지 않았다. 그저, 지금은 상황을 봐야 하지 않겠느냐. 서국 왕의 의도를 알 수 없으니 말이다. 아무튼 나를 살려는 두었으니 한동안은 그의 비위에 맞춰 주어야겠지. 해서 잠시 숨을 죽이고 있을 뿐이다.”

“……정말이십니까?”

“하면 내가 그깟 일로 다 포기할 것 같았더냐. 나는…… 내겐 주군의 뜻을 잇는 것 외엔 아무것도 없다. 그게 다야.”

계평은 조금 의아한 눈길로 옥환을 응시했다. 줄곧 봐 왔던 오만하고 총명하던 옥환의 모습이 아닌 것 같아서였다. 어쩐지 그는 외롭고, 나약해 보였다.

“그러니 그거 하나라도 잘해야겠지. 아무튼 괜한 일에 신경 쓰지 말고 몸조리나 잘하거라.”

어쩐지 말을 붙이기 어려운 분위기에 계평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용히 물러갔다. 계평이 사라지고 나자 옥환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계평에게 말한 대로 아직 아무것도 끝내지 않았고, 끝낼 수도 없었다. 이 난관을 타개할 방책을 찾아야 했다. 다시 의지를 다져야 했다. 한데.

……한데 그게 되지 않았다. 계평에게는 잘난 척 말했지만, 옥환은 더 이상 의욕을 내지 못했다. 승헌이 제 가슴에 깊이 박은 칼날이 아직도 그곳에 남아 있었다. 뽑으려 해도 뽑히지 않을 만큼 깊숙하게 박힌 채. 그 칼날이 움직일 때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옥환의 가슴은 잔인하게 찢어졌다.

그렇게 하루 종일 침울해져 있는 옥환에게, 보다 못한 하인이 바깥 산책을 하시는 건 어떠냐고 제안해 왔다. 옥환은 딱히 나갈 생각이 들지는 않았으나, 하인이 옥환을 설득하려 꺼낸 한마디가 그의 석상 같던 마음을 움직였다.

“벌써 봄이 한창이라 후원에 복사꽃이 한가득 피었습니다. 한번 보시고 오시면 기분도 좋아지실 것입니다.”

궁의 후원은 승헌이 제게 맨 처음 보여 줬던 광경이었다. 그 말에 동한 옥환은 정말로 오랜만에 처소를 나와 후원을 향했다. 후원은 그야말로 꽃 잔치가 벌어진 듯했다. 양옆으로 길게 늘어선 꽃나무를 보고 있자니 이 나라를 도원향으로 만들겠다던 승헌의 말이 생각났다. 자신은 그때 무어라 생각했던가. 도원향은 신선들이나 노니는 곳이라며 비웃었고 그 도원향을 만드는 데 들어갈 백성들의 노고에 분노했었다.

하나 지금은 달랐다. 승헌은 백성을 아끼는 왕이었다. 그는 자신의 힘으로 직접 도원향을 만들어, 다른 누구도 아닌 백성들에게 보여 주고 싶어 했던 것이리라. 그것을 이제는 옥환도 알았다.

그런 그가 꿈꾸던 낙원을 자신이 망가뜨렸다. 그래놓고는 어찌 이리 정을 주었는지, 스스로 생각해도 자신이 참 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올해는 복숭아를 먹지 못하겠구나.’

나무 사이를 느릿느릿 거닐던 옥환은 나뭇가지를 보고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게다가 올해의 복숭아는 작년의 것처럼 탐스럽지도 않을 것이다. 승헌에게서 그것을 돌볼 시간을 앗아갔지 않은가. 지금도 그는 무척이나 바쁘다고 들었다. 여전히 문관과 무관의 싸움은 끊이지 않았고, 백성들은 가난으로 몸부림쳤다. 어쩌면 그는 제게 신경 쓸 시간조차 없어 저를 살려 두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이러한 옥환의 마음도 모르고 봄바람은 온화하기만 했다. 꽃내음 섞인 바람을 맞으며 얼마쯤 더 걷던 옥환은 커다란 복사나무 앞에 있는 정자에 자리를 잡았다. 눈앞에 펼쳐진 정경은 그야말로 극락과도 같았으나, 옥환의 마음은 여전히 깊은 수심에 잠겨 있었다. 오히려 후원에 오니 더더욱 침울해지기만 했다.

옥환은 무릎을 끌어안은 채 얼굴을 묻었다. 다시 벽국으로 돌아갈까. 가다가 죽으면 죽는 것이고, 차라리 그 편이 마음은 편할 것 같기도 했다.

항상 곱다고 했었다. 공연한 걱정이 든다고 했었다. 하나 데려오지 말았어야 한다고도 했다. 애물단지라고, 버리느니만 못하다고. 이 전부가 같은 사내가 한 말들이었다.

“……애물단지…… 인가.”

그럴지도 모른다. 지금에 와서는 자신이 진정 벽국에 도움이 되고 있는지도 자신이 없었다. 승헌과의 신뢰 관계가 완전히 무너졌으니 훔친 기밀을 벽국에 넘기는 건 불가능하다고 봐야 했다. 이 전례 없는 위기를 어찌 극복해야 할지, 천하제일의 책사인 그의 머리로도 마땅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애물단지요?”

한데 옥환의 혼잣말을 들었는지 하인이 불쑥 말을 걸었다. 고개를 든 옥환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무심코 물었다.

“자네의 눈에는 내가 애물단지 같나?”

“예? 그럴 리가요. 금야 선생이 아니십니까. 어느 누가 태사께 그런 말을 하려구요.”

“그런데…… 그렇게 말한 이가 있어.”

옥환은 눈을 내리깔았다. 하인은 묻지 않아도 옥환에게 그런 말을 한 상대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말한 대로 명재상인 금야 선생에게 그런 식의 모욕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단 한 사람뿐이었다. 게다가 두 사람은 얼마 전 크게 다투지 않았던가.

어쩐지 하인을 보기가 민망해진 옥환은 시선을 돌리다가 멈칫했다. 하인이 어찌 그러시냐 물었으나 옥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누가 있었던 것 같아서.”

“저는 못 봤습니다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살펴보고 올까요?”

“아니다. 내 착각이겠지.”

이제는 하다 하다 그 사람의 환각까지 보는구나. 옥환은 씁쓸한 얼굴로 시선을 떨구었다.

그 뒤, 시간이 일부러 제 애를 태우듯 느릿느릿 흘러가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옥환은 겨우겨우 며칠을 보냈다. 그렇게 닷새째 되는 날, 옥환은 문하시중이 다급하게 자신을 찾아왔다는 소식에 그를 만나야 할지 고민했다. 더 이상 이 나라의 신하들과는 얽히고 싶지 않았다. 만날 필요가 없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승헌에게 행여 미움을 받을까 하는 두려움에서였다. 어차피 다 끝났다는 걸 알면서도.

결국 옥환은 하인을 통해 정중히 거절했으나, 문하시중은 평소답지 않게 끈질겼다. 연이은 청에 그의 고집을 꺾지 못한 옥환이 마침내 그를 안에 들이자, 그가 절박한 표정으로 옥환의 손을 붙잡았다.

“무, 문하시중. 어찌 이러십니까?”

“전하를 막을 수 있는 건 태사뿐입니다. 부디 전하를 설득해 주십시오.”

승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옥환이 표정을 달리했다. 그는 문하시중에게 무슨 일이냐고 닦달했다.

“전하께서 출병을 하신답니다. 직접이요.”

“출병이라니요. 어디로 말입니까.”

“양양입니다. 벽국이 그곳을 침략했습니다.”

경악할 소식에 옥환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는 전혀 모르고 있던 바였다. 이번에도 계평이 일부러 벽국에서 보내오는 정보를 차단한 것인가 싶기도 했으나, 그는 상처를 치료하느라 계속 처소에만 있었을 터였다. 물론 계평 본인이 승헌의 의심을 경계해 일부러 서신을 받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하나 낭패로군. 양양이면…… 또다시 내가 의심받을 수도 있다.’

맨 처음 자신이 승헌을 맞은 곳이 양양이었고, 서국이 양양을 차지한 뒤 적은 수의 군사를 배치해 벽국을 속이자는 안을 낸 것 또한 자신이었다. 물론 그 뒤에 양양의 병력은 재정비를 했다고 들었으나, 그래도 의심의 화살은 자연히 저를 향할 터였다. 그야말로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화급한 내용이 있었다.

“전하께서 직접 출진을 하시다니요. 이런 때에 어찌 도성을 비우신단 말입니까?”

“그것이…… 아무래도 전하께서도 한계에 다다르신 듯하여…….”

옥환이 무슨 뜻이냐는 듯 바라보자 문하시중은 그간 승헌이 한 고생과 오늘 어전회의에서 있었던 신하들의 다툼에 대해 설명했다. 이야기를 다 들은 옥환은 머릿속이 적잖이 복잡해졌다. 아마 승헌이 그렇게 된 건 자신의 책임이 가장 클 터였다.

“하나 이는 있어선 안 될 일입니다. 전하께서 아니 계시면 조정은 더욱 혼란해질 테고…… 무엇보다 지난번에는 벽국에게 크게 지지 않았습니까. 이번에도 패배하지 말란 법이 없는데, 혹 전하께서 부상이라도 입게 되시면…….”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제가 전하께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승헌이 다칠 수 있다는 말에 옥환은 곧바로 몸을 일으켰다. 문하시중의 말대로 승헌을 막아야 했다. 다 버리고 도망가고 싶은 승헌의 심정은 이해가 갔지만 군왕인 그가 한순간의 감정으로 그릇된 결정을 내려서는 안 될 일이었다. 평소의 그라면 하지 않을 결정이다. 그만큼 그가 궁지에 몰렸다는 뜻일 터. 자신이 어떻게든 설득을 해야 했다.

적극적인 옥환의 태도에 문하시중은 그나마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옥환의 말이라면 승헌도 들어줄 것이었다. 누구보다도 아끼는 이가 아닌가.

하나 문을 향해 가던 옥환이 갑자기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옥환을 따라가려 일어섰던 문하시중이 무슨 일이냐고 물으려는데 옥환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문하시중.”

“예? 아니라니요, 무엇이…….”

“제가 갈 일이 아닙니다.”

문하시중은 아연실색해서 옥환을 쳐다보았다. 방금까지만 해도 간다고 하더니, 별안간 이게 무슨 심경의 변화란 말인가. 하나 옥환은 아랫입술을 꾹 깨문 채 고개를 숙였다. 자신이 가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무엇을 말한다 한들 승헌이 들어줄 리 없었다. 그는 자신을 믿지 않았고, 제가 하는 말은 다 속임수라고 생각할 테니까. 도리어 자신이 가서 막으면 더더욱 가려고 할지도 몰랐다.

무엇보다 옥환은 승헌의 걱정을 하고 싶지 않았다. 할 필요가 없었다. 그가 부상을 입는다 해도 벽국에게는 도리어 반가운 일이었다. 버리느니만 못하다고 하지 않았던가. 애물단지에 지나지 않는 자신이 왜 승헌에게 조언을 하고 그를 구하려 한단 말인가. 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태, 태사. 이번 일은 심각합니다. 전하께선 당장 내일 출병하겠다고 결정하신 상태입니다.”

문하시중이 어떻게든 옥환의 마음을 바꾸려 했으나 옥환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전하께서는 강인한 무인이 아니십니까. 이기고 돌아오시겠지요.”

“……태사…….”

문하시중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그런 문하시중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지 않는다면 거짓이겠으나, 지금은 옥환도 도저히 승헌을 보고 싶지 않았다. 화를 내는 모습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자신을 보면 이번엔 또 얼마나 무서운 말을 할지 겁이 났다. 더는 그에게서 상처받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전장에 나가 머리를 식히고 돌아오시는 게 나을지 모릅니다. 저는 전하의 승리나 빌겠습니다.”

“태사, 어찌 그리 매정한 말씀을 하십니까. 저희의 주군이시고 태사의 지아비이십니다. 두 분 사이에 작은 불화가 있다는 얘기는 들었습니다만, 정녕 태사는 전하께서 다치셔도 된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다치시지 않을 겁니다. 혹여 다치시더라도, 이기면 됩니다. 전하께서 직접 가시면 군사들의 사기도 오를 것이고, 양양을 지키는 자들 또한 용기를 얻겠지요. 그저 나쁘기만 한 선택은 아닙니다.”

“태사!”

문하시중이 보기 드물게 화까지 냈으나 옥환은 요지부동이었다. 한동안 더 옥환을 설득하던 문하시중은 결국 단념하고 일어섰다. 옥환은 그의 마음을 알면서도 외면하는 것에 대해 사과를 했으나, 그는 쌩 돌아서더니 마지막으로 이렇게 덧붙였다.

“태사까지 이러시면 전하께선 어찌하셔야 한단 말입니까.”

옥환은 문하시중이 있으니 괜찮을 것이라고 답하려 했으나 그는 이미 문을 나선 뒤였다. 이젠 마지막 남은 제 편인 문하시중까지 잃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옥환은 답답함에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승헌의 걱정 따윈 하고 싶지 않았다. 해선 안 되었다. 자꾸만 속에서 그를 향한 생각이 솟아났으나, 옥환은 그것을 꾹꾹 억눌렀다.

다시는 고개를 들지 못하도록, 몇 번이고 즈려밟았다.

***

“오늘이 며칠이더냐?”

“아흐렛날입니다, 태사.”

하인의 대답에 옥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승헌이 떠난 지 오늘로 달포가 되었다. 여기서 양양까지의 거리가 열흘 정도 걸리니, 지금쯤이면 전투가 끝나고 돌아오고 있을 무렵이었다. 아직 승전보는 전해지지 않았으나 승헌은 이길 것이었다. 일국의 장수였을 때부터 그는 거의 패배한 전적이 없는 신화적인 인물이었다. 그렇기에 옥환은 승헌을 보냈다.

그가 출병하는 날, 옥환은 병을 핑계로 배웅을 나가지도 않았다. 물론 그 일로 문하시중의 원망 어린 비난을 들어야만 했으나, 그래도 문하시중은 예상과 달리 꼬박꼬박 옥환을 찾아왔다. 옥환은 그런 그에게 미안함과 고마움을 함께 느꼈다.

어쩌다 한 번씩 문하시중이 찾아올 때를 제하면 옥환은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보냈다. 요즘은 전처럼 책조차 읽지 않았다. 그가 하루 종일 하는 행동이라고는 벽국에 보내기 위해 적은 서국의 기밀이 담긴 서찰을 만지작거리는 것뿐이었다.

서찰을 보낸다면 승헌이 자리를 비운 지금이 적기였다. 호진은 승헌을 대신해 국정을 돌보느라 정신이 없었고, 중서령의 경계도 자신이 오랜 기간 아무것도 안 하고 처소에만 틀어박힌 덕에 다소 풀어졌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지금은 승헌이 궁을 비운 상태였다. 얼마 전만 해도 서찰을 보내는 것은 반쯤 포기하고 있었으니, 이는 그야말로 천재일우의 기회임이 틀림없었다.

이제 결정만 내리면 된다. 이것은 벽국에게 있어 전세를 뒤집을 큰 힘이 될 것이다. 그리하면 주군의 뜻도 이룰 수 있다. 벽국이 대륙을 통일하여 백성들이 고통받지 않는 평화로운 나라를 만드는 것이다. 염요도 이제는 달라졌으며, 그의 뒤를 이을 후사도 곧 태어난다. 벽국의 치세는 안정적으로 이어질 것이고 하늘에서 그것을 지켜볼 주군 역시 크게 만족하시겠지.

물론 서국을 치는 과정이 몹시도 험난하리라는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수많은 희생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 과정에서 생길지 모를 자신의 죽음은 진작에 각오하고 있었다. 가까운 이들의 죽음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오늘도 저에게 승헌이 걱정되지 않느냐며 한바탕 잔소리를 하고 간 문하시중이나, 매일 같이 툴툴대는 계평 또한 죽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견승헌도…….’

그도 죽을 수 있다. 벽국이 서국을 정복하게 되면…….

“그야 당연히 죽이시겠지요.”

옥환은 놀라서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제야 그의 정신이 현실로 돌아왔다. 그는 방금 막 차를 따르던 계평에게 벽국이 서국에게 이기게 되면 염요가 승헌을 어찌할 것 같냐고 물었었다. 그에 대해 계평이 아까와 같이 대답한 것이다.

“……잘 아시겠지만, 전하께선 서국 왕을 싫어하시지 않습니까. 뭐, 애초에 그런 문제가 아니긴 하지만요. 망국의 왕을 살려둘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남은 세력을 규합해 다시 봉기를 할지도 모르는데.”

뭐든 다 아는 금야 선생께서 왜 그런 걸 묻냐는 듯 계평의 어조는 쌀쌀맞기 그지없었다. 하나 옥환의 안색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벽국에 서찰을 보내면, 승헌은 죽는다. 계평이 말한 대로 당연한 일이었다. 애당초 그러기 위해 이 나라에 온 것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지금의 상황은 달랐다. 이 서찰이, 자신이 서찰을 보내는 행동이, 그의 죽음을 야기할 수도 있는 것이다. 조정에 혼란을 일으켜 승헌을 고생하게 만든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이것을 벽국에 건네는 것은 염요의 손에 승헌의 급소를 찌를 칼을 쥐여 주는 것과 같았다. 모르는 사이면 몰라도 승헌과는 그간 함께한 시간이 있었다. 그런 승헌을 죽게 만드는 것은 옥환이 아무리 강한 정신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망설임 없이 행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혹 전쟁이 벌어지고 서국이 패망해도 자신이나, 문하시중이나, 호진은 용케 살아날지도 모른다. 하나 승헌만은 예외였다. 그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제 나라의 왕인 염요의 손에.

그 무거움을 뒤늦게 절감한 옥환에게 계평이 말을 걸었다.

“그보다 승상. 아까 서찰을 보시는 듯하던데…… 벽국에 보낼 것입니까? 하면 제게 주십시오.”

“……아니, 아니다. 그것은, 예전에 종소와 주고받았던 것이다.”

옥환은 저도 모르게 거짓으로 둘러대고 말았다. 그의 대답에 계평은 노골적으로 불편한 기색을 내보이더니 이내 따지듯 물었다.

“하면 벽국에는 대체 언제쯤 서찰을 보내실 생각이십니까? 목숨을 걸고서라도 보내야 할 서찰이 아닙니까. 이렇게 미루고 미루다간 서국 왕이 저희를 먼저 죽이고야 말 것입니다.”

“거의 끝났다. 아무래도 전하께서 양양을 찾고 싶어 하시는 것 같아, 그에 대해 도움이 될 만한 정보가 없을까 찾아보느라 그런 것이다.”

“먼저 쓴 걸 보내고 나중에 그 내용을 덧붙여도 되지 않습니까. 일단은 최대한 빨리 보내야…….”

“이번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훔친 문서가 너무 많고 쓸데없는 것도 섞여 있어 전부를 보내기는 어려우니 최대한 축약해서 도움이 될 내용을 담아야 하지 않겠느냐.”

계평은 못마땅한 한숨을 쉬었으나 결국 이번에도 옥환의 뜻에 따르기로 했다. 계평이 뜻을 꺾자 옥환은 그에게 그만 나가 보라고 일렀다. 계평이 나간 직후 옥환은 책 안에 숨겨 놓았던 서찰을 꺼냈다. 이것을 없애 버리면 승헌은 살 것이나, 벽국이 서국을 이길 절호의 기회를 잃게 되고 말 것이다. 이러한 기회는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이대로라면, 아무리 벽국이 발버둥쳐도 서국에게 패배할 가능성이 더 높았다.

하나 그렇다고 이것을 벽국에 보낸다면…… 승헌이 죽을 것이다. 제 손으로 죽이게 되는 것이다. 기밀을 빼낼 때만 해도 그저 긴박하고 간절하기만 했다. 서국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기는 했으나 그것이 승헌의 죽음으로 이어진다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어찌 그렇게 눈앞만 보았을까. 왜 이리 어리석은가. 왜 이리 바보가 되었어.

옥환은 자신을 책망하면서도 한참을 고민했으나, 너무도 잔혹한 선택지에 결국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그의 손안에서 서찰이 구겨졌다.

이번에도 사냥제 때와 마찬가지였다. 옥환은 승헌에 대한 걱정에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그는 승헌이 떠난 날부터 매일 그에 대한 우려로 밤을 새웠으며, 지금 이 순간에조차 그가 다치는 모습을 상상하며 불안에 떨고 있었다. 하지만…… 하지만.

‘내가 어찌 벽국을 배신할 수 있을까. 주군이 어떻게 세운 나라인데. 주군이 내게 어떻게 해 주셨었는데.’

염완은 유일하게 자신의 외면이 아닌 내면을 봐준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옥환은 그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겠다고 맹세했었다. 그런 그가 죽는 그 순간까지도 걱정한 그의 나라와 그의 백성을, 자신이 어찌 저버릴 수 있단 말인가.

옥환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애꿎은 서찰을 구기고 있는데 하인이 옥환을 찾았다. 옥환은 얼른 서찰을 숨기고는 무슨 일이냐 물었다. 하인은 밝은 어조로 고했다.

“기쁜 소식입니다, 태사. 전하께서 내일 돌아오신다 합니다.”

“결과는? 이기셨다 하더냐?”

“그렇습니다. 역시 전하께서는 백전백승이십니다.”

환하게 웃는 하인의 얼굴을 보며 옥환은 즐거워하지도, 안타까워하지도 못했다.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그로서도 알 수가 없었다. 하나 승헌이 이겼다. 역시 그도 서국도 쉬이 쓰러지지 않는 강적이었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이 서찰을 벽국에 넘기는 것이 두 나라의 힘을 비슷하게 맞출 계기가 될지도 몰랐다.

‘보내자. 그 사람과는 다른 길을 가기로 하지 않았던가. 이 길 외엔, 나아갈 방향이 없다.’

옥환이 속으로 그러한 결심을 하고 있는데 하인이 웃는 낯으로 말을 이었다.

“참으로 다행인 일이 아닙니까. 태사께서 내내 근심하시던 것을 압니다. 이제는 한시름 놓으셔도 되겠습니다.”

“…….”

다행. 다행이라. 승헌이 이겨서 다행인 것인지, 아니면 그 소식에 드디어 마음을 정할 수 있어서 다행인 것인지 옥환은 알 수 없었다.

애당초 무엇을 선택하든 후회할 수밖에 없을 것이었고, 벌써부터 마음이 지옥불에 떨어진 듯 괴롭기만 했다. 그럼에도 해야만 했다. 그것이 이 난세를 살아가는, 그리고 끝내려 하는 자신의 사명이기에.

하나 드디어 마음을 굳힌 그날 밤도 옥환은 동이 틀 때까지 잠들지 못했다.

마침내 승헌이 귀환하는 날. 옥환은 이날이야말로 많은 이들의 관심이 승헌에게 쏠릴 것을 알았기에, 이때를 틈타 서찰을 벽국에 전하기로 했다. 써 놓기는 진작에 썼으나 내내 보내지를 못했던 서찰을 잠시 바라보던 옥환은, 곧 하인에게 계평을 불러오라고 시켰다.

“찾으셨습니까?”

부름에 찾아온 계평이 안으로 들며 물었다. 평소보다 묵직한 공기와 옥환의 심상치 않은 표정에 계평은 무언가 중요한 지시가 있으리라고 예상했다. 어쩌면 드디어 벽국에 서국의 기밀을 보내려 하는지도 모른다.

옥환은 잠시 서찰을 내려다보다가, 제 안의 주저함을 끊어 내듯 그것을 집어 들었다. 제 발목을 붙잡는 수많은 미련과 감정을 외면하고.

마침내 옥환이 서찰을 넘겨주려던 그때였다. 바깥이 웅성거리는가 싶더니, 하인이 백짓장처럼 새하얘진 얼굴로 옥환 앞에 달려왔다.

“태사, 태사! 전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생각보다 이르구나. 알겠다. 나중에 찾아뵐 것이니…….”

“한데 큰 부상을 입으시어 의식조차 없으시다 합니다!”

어찌나 놀랐는지 옥환은 입을 벌린 채 얼어붙은 것처럼 하인을 쳐다보았다. 무슨 말인지 확 와 닿지가 않았다. 부상? 의식이 없어……? 누가…….

“전하가……?”

눈앞에 승헌의 장난기 어린 미소가 떠올랐다. 하나 그 미소는 머지않아 피에 벌겋게 물들었다.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옥환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그대로 아무 말도 않고 달려 나갔다. 하인과 계평이 놀라서 그를 불렀으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하늘이 노래지고, 지면이 뒤집히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옥환은 있는 힘껏 달렸다. 이렇게 정신없이 달려 본 일은 그의 생에 한 번도 없었던 일이었다. 승헌을 봐야 했다. 그를 직접, 자신의 눈으로 확인해야 했다.

허둥지둥 달려온 옥환이 침전 앞에 다다르자 병사들이 마침 승헌을 옮기기 위해 마차의 문을 여는 모습이 보였다. 그 안에서 실려나온 승헌의 어깨는 피투성이였다. 그 참혹한 몰골에 옥환은 숨을 삼켰다. 디디고 선 바닥이 심연으로 푹 꺼지는 것만 같았다. 줄곧 억눌러 왔던 걱정과 불안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그 맹렬한 감정의 파도에 옥환은 일순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전하…….”

겨우 중심을 잡은 옥환이 혼란스러운 상태에서도 넋이 나간 것처럼 승헌을 부르며 그 뒤를 따라 들어갔다. 병사들이 승헌을 침상 위에 눕히고 물러가자, 옥환보다 한발 빨리 달려온 신하들이 그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옥환은 숨을 고를 새도 없이 그들 사이를 헤집고 들어가 서둘러 승헌의 상태를 살폈다. 가까이서 보니 승헌의 상처는 더욱 심각했다. 게다가 그는 의식을 찾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확인하니 눈앞이 까마득해지는 듯했지만, 옥환은 최대한 침착하게 승헌의 맥을 짚었다.

‘맥이 약하다. 게다가 지혈이 제대로 안 되고 있어. 상처가 벌어진 게 분명하다. 왜 이런 상태로 도성에 귀환했단 말인가. 이처럼 큰 상처라면 도성까지 오는 길에 더욱 악화될 수밖에 없는데…….’

그렇게 생각하니 옥환의 속에서 이 일과 관련된 모든 이들을 처벌하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일었다. 온통 무능한 자들뿐이었다. 어찌 제 주군 하나 제대로 모시질 못해서. 하나 그는 애써 감정을 다스렸다. 지금은 승헌을 치료하는 것이 먼저였다.

“따뜻한 물과 수건을 준비하거라. 갈아입을 옷과 붕대도 필요하다. 최대한 빨리.”

주변 궁인들에게 그렇게 지시한 옥환은 빠르게 승헌의 상의를 벗기고, 제 손수건으로 피를 닦아 냈다. 그러면서도 그의 지시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전하를 보좌한 부장이 누군가? 이 상처가 어찌 생긴 것인지, 다른 상처는 없는지 아는 대로 말해 주게. 그리고 지혈을 위한 약화제를 써야겠으니 누군가 필묵을…….”

한데 그때 누군가가 옥환을 거칠게 밀어냈다. 깜짝 놀란 옥환이 고개를 들자 싸늘한 표정의 호진이 서 있었다. 그의 뒤에는 태의도 함께였다.

“당장 꺼져라! 하잘것없는 재주로 전하의 옥체에 무슨 짓을 할 셈이더냐!”

당황하는 것도 잠시, 옥환은 서둘러 호진의 앞을 막아섰다.

“저는 오랫동안 의술을 익혀 왔습니다! 지금은 저를 배척하실 때가 아니라 전하의 용태를 먼저 살펴야…….”

“태사의 마음은 알겠으나 태의까지 왔으니 치료는 태의께 맡기시지요.”

갑자기 나서서 호진의 편을 드는 중서령의 태도에 옥환이 주춤했다. 중서령마저도 자신이 승헌에게 무슨 짓을 할까 의심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모두 다 자업자득이었다. 계속 버티면 승헌의 치료가 늦어진다는 생각에 옥환은 하는 수 없이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침전에서 나가지는 않고, 태의가 치료하는 모습을 빠짐없이 지켜보았다. 호진은 그것이 내키지 않는 듯 옥환에게 한마디 하려고 했으나 문하시중이 전하 앞이니 자중하라며 그를 막았다.

이윽고 무거운 침묵 아래서 승헌의 치료가 이어졌다. 다행히 출혈은 곧 멈추었으나, 상처가 워낙 깊어 봉합이 필요한 상태였다. 상처의 주변을 닦아낸 태의는 실과 소독한 바늘을 꺼내 신중한 손놀림으로 찢어진 상처를 꿰매나갔다. 바늘이 움직일 때마다 옥환은 제 살이 찔리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차라리 승헌이 의식을 잃어 다행이었다.

그렇게 모든 치료가 끝날 때까지 족히 반 시진이 넘게 걸렸다. 실을 잘라낸 태의는 바늘을 내려놓고는 이마에 맺힌 땀을 소매로 훔치며 크게 숨을 내쉬었다.

“이제 약화제를 쓰겠습니다. 신열을 내리고 회복이 빨라지도록 돕는 약을 처방할 것입니다.”

“……전하께선 괜찮으신 건가?”

“공교롭게도 좀 더 상황을 지켜봐야 할 듯합니다. 비록 급소를 다치진 않으셨으나 상처가 깊고 출혈이 심했던 데다가, 혹 상처가 제대로 아물지 않으면 염증이 생겨 회복이 더뎌질 수도 있습니다. 회복이 끝날 때까지는 왼팔을 쓰시기 힘드실 겁니다.”

태의의 부정적인 소견에 호진이 주먹을 불끈 쥔 채 성을 냈다.

“어찌……! 전쟁에선 이겼다지 않았나! 한데 전하께서 왜 이리 큰 상처를 입으신 게야?!”

호진의 다그침에 승헌을 보좌했던 부장이 어깨를 움찔했다. 그는 서둘러 바닥에 무릎을 꿇고 말했다.

“그것이…… 전하께서 이미 벽국군에게 함락당한 양양의 성을 탈환하신 뒤 안을 살피셨는데, 거기서 벽국군이 차려놓은 염완의 사당을 보시고는 다소 동요하신 듯했습니다. 그리고 하필 그때 숨어 있던 살수가 튀어 나와 공격을 하는 바람에……. 모두 제 탓입니다. 저를 죽여 주십시오.”

태의를 도와 약화제를 쓰고 있던 옥환은 염완의 사당이라는 말에 저도 모르게 붓을 떨어트렸다. 그 소리에 모든 이의 시선이 옥환을 향했다. 옥환은 머뭇거리며 떨어진 붓을 주워들었다. 붓을 쥔 손이 파르르 떨렸다.

승헌은 자신이 처소 안에 염완의 사당을 차리려 했다는 사실은 아직 모를 터였다. 한데 그가 양양에서 사당을 보고 동요했다면…… 혹, 무언가 알아챈 것인가? 하면 승헌이 이렇게 다친 것도 결국 제 탓이란 말인가?

“태사, 괜찮으십니까? 먹물이 옷에 튀셨는데 환복을 하심이…….”

“아, 아닙니다. 그보다 약화제는 이 정도면 될 것 같습니다.”

옥환의 대답에 태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약을 달이겠다며 밖으로 나갔다. 그사이 부장의 이어지는 보고를 듣고 있던 호진은 분한 마음을 내비쳤다.

“간악한 놈들 같으니……! 졌으면 곱게 물러갈 것이지 감히 살수 따위의 비겁한 방법을 쓴단 말인가?”

“역시 전하께서 가시면 안 됐습니다. 적국의 왕이 직접 온다는데, 당연히 벽국에서는 전하께 어떻게든 해를 끼칠 마음을 먹었을 것입니다.”

중서령 역시 그렇게 대꾸하고는 이를 갈며 분노했다. 심각한 표정으로 승헌을 바라보던 문하시중은 부장에게 물었다.

“전하께서 부상을 입으셨으면 치료를 우선할 것이지, 왜 무리해서 귀환을 했나? 그 탓에 전하께서 중태에 빠지셨네. 혹…… 전하께서 그리 명하시던가?”

“그…… 그러합니다. 이리 오래 도성을 비워서는 안 될 일이었다고 하시며…… 상처는 괜찮으니 하루라도 빨리 돌아가자고 명하셨습니다. 심지어 상처의 상태에 대해 감추시는 바람에, 저는 중간까지 전하의 상태가 그리 심각한 줄도 몰랐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세 중신은 머리를 좌우로 젓거나 한숨을 내쉬었다. 옥환 역시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기분이었다. 승헌이 아무도 믿지 않고 아무에게도 의지하지 않는 것은 잘 아는 바였으나, 그럼에도 그 고집으로 자기 자신까지 위험에 처하게 했으니 답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앞으로 이 일을 어쩝니까. 안 그래도 전하께서 도성을 오래 비우셨는데 이젠 아프시기까지 하시니…….”

“당분간은 저희가 좀 더 최선을 다해야겠지요. 아니 그렇습니까, 대장군?”

문하시중의 동의를 구하는 물음에 호진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마음 같아서는 승헌의 곁에 붙어 그를 간병하고 싶었으나, 문하시중의 말대로 지금은 국정을 살펴야 할 때였다. 나중에 깨어날 승헌을 위해서라도.

“하면 제가 전하 곁을 지켜도 되겠습니까.”

그때 세 중신의 대화를 듣고 있던 옥환이 간병을 자처하며 나섰다. 당연히 호진이 결사반대를 했고 중서령도 애매한 반응을 보였으나 문하시중이 옥환의 편을 들었다.

“전하께서 총애하시는 분입니다. 태사의 목소리를 들으시면 더욱 기운이 나실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총애라니, 무슨 총애 말씀이십니까? 전하는 더 이상 저자를 찾지도 않으시는데.”

“……저도, 태사께서 굳이 전하를 간병하실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호진과 중서령의 반대에도 옥환은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오늘만큼은 승헌의 상태를 지켜보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는 간곡하게 청했다.

“제가 의술을 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필시 도움이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 제가 전하를 막았어야 하는데 그리하지 못해 일이 이 지경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그 책임을 통감하고 있으니…… 전하의 회복을 도울 수라도 있게 해 주십시오.”

“전하가 출진하시던 날도, 돌아오시는 오늘도, 태사는 얼굴 한번 내비치지 않으셨습니다. 저는 태사께서 무슨 책임을 통감하신다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중서령의 말대로다. 그리 전하를 걱정했다면 네놈이 그렇게 처소에 처박혀 있지도 않겠지.”

물론 옥환의 진짜 속내를 그들이 알 리는 없었으나, 그렇다고 또 두 사람의 말이 아주 틀린 것도 아니었다. 옥환은 승헌에게 내내 무관심하려 했고, 일부러 외면했다. 하나 그렇기에 더더욱 옥환은 이대로 물러설 수 없었다. 두 사람이 쉽사리 뜻을 굽히지 않을 것 같자 망설이던 옥환은 무언가 결심한 듯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곳에 있던 모든 이가 충격에 휩싸였다. 옥환이 두 사람 앞에서 머리를 깊이 숙인 것이다. 그 자존심 강한 옥환의 믿을 수 없는 행동에 중서령은 물론이고 호진 역시 놀란 얼굴을 했다.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저를 못 믿으시겠거든 감시를 붙여도 좋으니 부디 전하의 곁을 지킬 수 있게만 해 주십시오.”

“……저도 부탁드리겠습니다. 전하께는 태사가 필요합니다.”

곁에 있던 문하시중까지 덩달아 머리를 숙이는 바람에 호진과 중서령은 더는 반대하기가 어려워졌다. 고작 간병을 하겠다고 허리까지 굽히는데, 보는 눈도 있는 와중에 계속 고집을 피우는 것도 눈치가 보였기 때문이다. 결국 두 사람이 마지못해 허락하자 옥환은 곧장 승헌의 곁으로 다가가더니 그의 땀을 정성스레 닦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마뜩잖은 표정으로 지켜보던 호진은 정말로 감시를 붙일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고는 침전을 나갔다. 할 일이 많은 문하시중 역시 옥환에게 잘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는 중서령과 함께 빠르게 떠나갔다.

가까스로 침전에 남게 된 옥환은 혼자가 되자 참아 왔던 한숨을 내쉬었다. 시급한 치료는 끝났다고 하지만 승헌은 여전히 괴로워 보였다. 그 강인하고 여유로운 사내가, 어찌 그리 쉬이 당했을까. 그가 다친 왼쪽 어깨에서 조금만 내려가면 심장이 있다. 하마터면 그는 영영 돌아오지 못했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가지 말라고 할 것을. 무슨 말을 듣든, 가선 안 된다고 빌기라도 해볼 것을.

다 자신의 탓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승헌이 양양으로 떠난 것도, 그곳에서 다친 것도, 무리해서 돌아오려 한 것도 모두 제게서 비롯된 일이었다. 자신이 그에게 그릇된 선택을 하게 만들었고, 그것을 알면서도 막지 않았다.

옥환은 앞으로 어쩌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기밀을 벽국에 보내려고 했던 것이 바로 방금 전이었다. 하나 지금은 기밀이나 벽국 따윈 안중에도 없었다. 그저 승헌이 한시라도 빨리 낫기를 바라는 마음뿐이었다. 자신이 승헌을 이렇게 걱정하는 건 서국의 기밀을 빼낸 것에 대한 죄책감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런, 속물 같은 이유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옥환은 모든 사념을 털어 냈다. 지금은 그저 승헌을 돌보는 데에만 집중하고 싶었다. 승헌의 몸은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옥환은 열이 내리도록 그의 몸 구석구석을 꼼꼼하게 닦았다. 자신이 쓰러졌을 때 승헌이 내내 옆을 지켰다고 했었다. 그 당시의 그는 이렇게까지 애틋하지는 않았겠지만, 이런 식으로 자신을 간병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면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은 것 같았다.

항상, 그에게는 감사 인사를 한 적이 별로 없었다. 옥환은 그것이 새삼 후회가 되었다.

승헌의 몸을 닦던 옥환의 손이 문득 승헌의 꿰맨 상처 앞에서 멈추었다. 주저하던 옥환은 떨리는 손끝으로 조심스레 승헌의 상처를 매만졌다. 그 지독한 자국에 자신의 가슴 또한 똑같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이리 후회할 거면서 왜 그리 고집을 피웠던가. 매번, 그에게 모진 행동을 해 놓고 고통을 받는 건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옥환은 자신과 승헌의 관계가 원망스러웠다. 자신이 서국 사람이었다면, 승헌이 염완보다 먼저 자신을 찾아 주었더라면, 진짜 주군과 신하였다면…… 이리 괴롭지 않아도 됐을 것을.

“……전하. 제가 다 잘못했으니…….”

옥환이 어렵사리 입을 열었으나, 그가 꺼낸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제발 무사히 깨어나 달라고 하면, 도리어 깨어나지 못할까 봐 두려웠다. 그렇게 염완을 보냈었다. 승헌은 절대 그런 식으로 보내고 싶지 않았다. 서로 미워한 채 끝낼 수 없었다.

한참을 침묵하던 옥환은, 승헌의 손을 조심스레 쥐고 말했다.

“사실은 믿었습니다. 전하께서 국혼을 미루신 것은 저를 위해서였다는 말. 그 외에도 제가 전하께 한 거짓말이 아주 많습니다. 그러니…… 그것을 들어 주십시오. 들어 주셔야 합니다, 전하.”

승헌은 대답하지 않았다. 옥환은 승헌의 손을 조금 더 힘주어 잡은 채 덧붙였다.

“그리고 손금도…… 손금에 대한 얘기도 해드릴 것이니…… 그것도 꼭 들어주십시오.”

참으로 말주변도 없다. 옥환은 속으로 자책을 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하나 승헌이 들었으면 분명 웃었을 것이다. 웃으며 저를 놀려댔겠지. 그 모습이 보고 싶었다. 그저 그 하나만이 간절했다.

옥환은 애통한 얼굴로 천천히 승헌의 손을 놓고는, 다시 그를 간병하기 시작했다. 이번만큼은, 절대 그를 보내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

“나는 그놈이 두렵다. 내가 범 새끼를 키운 게야. 이제는 다 큰 범이 되었고.”

“하오나 전하. 견 장군은 많은 공적을 세우지 않았습니까.”

“그래. 너무 많은 공적을 세웠지. 너무 많아…….”

그날, 일국의 왕은 자신이 두려워하던 그 범이 자신들의 대화를 듣고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퇴청한 줄 알았던 그는 왕의 지병이 도졌다는 말에 귀한 영약을 구해 그것을 전해 주러 돌아온 참이었다. 문 너머에서 왕의 진심을 들으면서, 그는 웃었다. 하필 왕에게 주려던 영약을 든 채 그 얘기를 듣고 만 자신이 비참해서. 하늘도 참 무심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에게 있어 왕은 아버지였고 형제였으며 제 목숨의 주인이었다. 그런 존재의 배신은,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기 충분한 것이었다.

그 뒤, 그는 제 주인이 전쟁을 핑계로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걸 알았고, 그보다 먼저 제 주인을 물어 죽였다. 그리고 제 주인의 자리를 뺏어 새 나라의 왕이 되었다.

그것이 바로 서국의 왕 “견승헌”이 걸어온 길이었다.

승헌은 그 이후로 아무도 믿지 않기로 했었다. 상대 또한 자신을 믿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전하 걱정 같은 건 안 합니다.”

“솔직히 제가 보기에 전하는 그저 절 믿고 싶지 않으셔서, 온갖 일에 저에 대한 의심을 끼워 맞추고 계실 뿐인 것 같습니다.”

“……진심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유독 한 사람이 했던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승헌의 가슴에 오래도록 남아 그를 괴롭혔다. 그가 자신을 믿지 않는다는 것에 화가 났고, 배신감이 들었으며, 좌절까지 했다. 그를 만나지 않으면 온종일 그의 생각을 했고, 그를 만나면 왠지 모르게 조바심이 났다. 어떻게든 하고 싶었다.

어떻게든…….

“…….”

꿈속에서 무언가를 깨달은 승헌은 천천히 눈을 떴다. 맨 처음 느낀 것은 익숙하면서도 그리운 향기였다. 오래된 종이와, 먹과, 찻잎의 향기.

승헌은 그 향기의 주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이 깨어난 줄도 모를 만큼 무언가에 집중한 상태였다. 승헌은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자신의 팔 위에 놓인 희고 고운 손이 보였다. 그는 자신의 팔을 주무르는 중이었다.

‘참으로 열심히도 하는군.’

내내 이러고 있었을까? 수척해 보이는 것이 아마도 그런 듯했다. 잠도 자지 않았으리라. 그는 강하고, 또 고집스러운 사람이니까.

그리 미운 말만 해댈 땐 언제고 또 이렇게 정성을 다해 간병을 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작게나마 남아 있던 앙금은 봄눈 녹듯 녹아 버렸다. 아니, 미워하고 있을 때조차 그를 그리워했었다.

어느 순간부터 옥환을 보면 가슴속에 피어오르는 것이 있었다. 그것이 이제는 무엇인지, 승헌은 알고 있었다. 깨닫고야 말았다.

“……전하! 정신이 드십니까?!”

불현듯 승헌과 눈이 마주친 옥환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어찌나 반가운 얼굴을 하는지, 승헌은 속으로 누가 보면 걱정깨나 한 줄 알겠다고 생각했다. 이윽고 잠시 옥환을 응시하던 그가 옥환에게 손을 뻗었다.

“옥환.”

가만히 뺨을 감싸 쥔 채 부르자 옥환이 “예, 전하.” 하고 맑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숭헌은 잠시 옥환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대는 참 곱군.”

“…….”

“밤을 꼬박 새워도 곱고, 나한테 못된 말을 해도 곱고, 나 아닌 다른 이들에게만 잘해줘도 고와.”

“전하, 저는…….”

“옥환.”

옥환이 무어라 말을 하려 했으나 승헌은 그것을 가로막았다. 이제는 이 감정을 외면할 길이 없었다. 칼에 찔리던 그 순간에도, 상처의 고통에 괴로워할 때도, 오직 옥환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한시라도 그를 빨리 보고 싶어서 아픈 몸을 이끌고 궁으로 돌아왔다.

이 모든 것이 뜻하는 바는 단 한 가지였다. 바로 자신이, 옥환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

인지하지 못하던 때조차 무의식적으로 피하고 있었으나, 결국 이 모양이었다. 벗어나려 했지만 줄곧 끌려가고 있었다. 이제는 마주해야만 하는 때였다.

누군가를 연모함을 깨닫고 나서 이처럼 씁쓸해진 경우는 처음이었다. 옥환을 보는 것은 기꺼웠으나, 자신이 그것을 기꺼워하는 이유를 아는 것은 불쾌했다.

승헌의 좋지 않은 안색에 영문을 모르는 옥환이 불안한 얼굴을 하고 있는데, 생각에 잠겨 있던 승헌이 예고도 없이 충격적인 말을 내뱉었다.

“옥환. 그대가 원하는 대로 왕후를 간택하도록 하지.”

내내 걱정으로 가득 차 있던 옥환의 표정이 삽시간에 얼어붙었다. 그의 굳은 얼굴이 저를 향한 정과 섭섭함 때문이기를 바라며 승헌은 말을 이었다.

“문관들이 추천한 여인을 만나서, 국혼을 올리고, 후사를 보겠어. 그게 그대가 원하는 바잖아.”

옥환은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그의 얼굴에 잠시나마 떠올랐던 혼란은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승헌은 속으로 자조했다. 무엇을 기대했던 것인지.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침묵하던 옥환이 이윽고 말했다.

“……깨어나셨으니 태의를 불러오겠습니다.”

일어나려는 옥환을 승헌이 강한 힘으로 붙들었다. 내내 앓아누워 있던 이가 어디서 그런 힘이 솟아났나 싶었는지, 옥환은 눈은 동그랗게 뜨고 승헌을 바라보았다.

“우리의 거래를 잊지는 않았겠지, 옥환.”

“거래라니 무슨…….”

“내가 그대의 뜻대로 했으니, 그대도 내 뜻대로 해야지.”

승헌은 그대로 옥환을 끌어당겨 깊게 입을 맞추었다. 미처 옥환이 저항할 틈도 없었다. 뒤늦게 상황을 깨달은 옥환은 당황해서 승헌을 밀어내려 했으나 그 견승헌이 쉬이 물러날 리가 없었다. 도리어 그는 아픈 게 맞나 의심이 갈 만큼 강한 힘으로 옥환을 밀어붙일 뿐이었다.

옥환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승헌의 접문을 받고 있다가, 승헌의 손이 제 웃옷 안으로 들어와 가슴을 더듬자 소스라쳤다. 이내 그 손이 아래로 미끄러지듯 내려가 바지 속을 파고든 순간 결국 옥환은 참지 못하고 승헌의 혀를 깨물었다. 짧은 신음과 함께 겨우 승헌의 입술이 옥환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전하, 이 무슨……!”

옥환의 얼굴은 수치심과 분노로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저를 원망 어린 눈으로 씩씩대며 바라보는 옥환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승헌은 피를 삼키고 말했다.

“……환자에게 너무하는군. 그렇게 싫었나?”

승헌은 웃고 있었으나 옥환은 그에게서 거리를 벌리며 주저 없이 대답했다.

“예, 싫습니다. 지금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좋아서 했던 적은 없잖아.”

차가운 말투에 옥환이 당황해서 승헌을 쳐다보았다. 그렇게 불편한 적막 끝에, 옥환이 재차 고했다.

“……지금은 쉬셔야 할 때입니다. 태의를 불러오겠습니다.”

이번엔 순순히 당하지 않겠다는 듯 곧바로 돌아선 옥환이 재빨리 침전의 문을 닫고 나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승헌은 옥환이 사라지고 나자 뒤늦게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콧대 높은 옥환의 자존심을 건드려놨으니, 그 성격에 지금쯤 아마 단단히 화가 났을 터였다. 오랜만에 만난 그를 화나게 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는데.

하지만, 그런 관계가 아니던가. 항상 무언가를 주고받아야만 하는 관계. 이런 식이 아니면 승헌은 옥환을 안을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이 가누기 힘든 애정을 어떻게 억눌러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염완이라면 달랐을지도 모르지.’

꿈을 꾸고 나니 조금은, 옥환이 염완에게 품은 마음이 이해가 갔다. 만일 자신도 선왕에게 배신당하지 않았더라면 그를 위해 무엇이든 했을 터였다. 승헌은 살수의 공격을 받아 앓던 옥환이 내내 염완을 찾던 일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다.

어쩌면 염완을 향한 옥환의 마음은, 존경과 믿음뿐만이 아닐지도 모른다. 자신이 그에게 바라는 것을, 그는 염완에게 주었는지도 모른다. 평생 한 사람만을 그리고 사랑할 것이라는 그의 손금처럼.

태의를 불러오겠다던 옥환은 한참이 지나도록 감감무소식이었다. 그가 아예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던 승헌은 자리에서 일어나 서랍장 앞으로 다가갔다. 서랍장 깊은 곳에서 그가 꺼내 든 것은 쪼개진 위패였다. 찾지 않았다면 좋았을 텐데. 이것만 없었더라면, 그저 눈먼 셈치고 제 어리석은 감정에 모든 것을 내던질 수 있었을 텐데.

승헌이 착잡한 심경으로 위패를 쥐고 있는데 환관이 태의가 왔음을 전해 왔다. 승헌은 위패를 다시 숨겨 놓고는 그를 안으로 들였다. 태의는 승헌이 깨어난 모습을 보고는 잠시 동안 안도했으나, 자리에서 일어나 있는 승헌에게 어서 누우셔야 한다며 닦달했다. 승헌은 하도 옥환을 봐주었더니 이제 별놈이 다 제게 명령을 하는 것 같다고 생각하다가, 옥환이 보면 잔소리를 할 것 같아 하는 수 없이 침상으로 돌아갔다.

“태사는 안 온다던가?”

침상에 기대앉은 승헌이 제 맥을 짚어보는 태의에게 하문하자 그가 답했다.

“잠시 찬바람을 쐬고 오신다 하였사옵니다. 태사께서 내내 전하의 곁을 지키셨으니 아무래도 많이 지치셨을 것이옵니다.”

태의의 대답에 잠시 생각하던 승헌이 다시 물었다.

“태사가 얼마나 여기 있었지?”

“어제 낮부터 계셨습니다.”

어제 낮이라면 하루하고도 반나절이었다. 사람을 그 오랜 시간 동안 혹사시켜 놓고 저 늙은이는 뭐가 저렇게 태평한지 모를 일이었다. 애초에 간병은 태의란 자리에 올라 녹봉을 받아먹는 그가 해야 할 일이 아닌가. 승헌은 짜증이 이는 것을 느끼며 신경질적으로 쏘아붙였다.

“한데 아무도 태사에게 쉬란 소리 한마디 안 했나? 이 궁에는 과인을 간병할 이 하나 없는가 보지?”

승헌의 싸늘한 태도에 뒤늦게 무언가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은 태의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숙였다.

“소, 송구하옵니다, 전하. 하나 태사께서 계속 전하의 간병을 하시겠다며 고집을 부리셔서……. 소신도 몇 번이나 쉬시기를 청하였으나 소용이 없었나이다.”

“고집을 부려? 태사가? 그대들이 미룬 것은 아니고?”

점점 더 험악해지는 분위기에 태의는 결국 바닥에 엎드려 그간의 사정을 고해 올렸다.

“처,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이시옵니다, 전하. 태사께서는 중서령과 대장군 앞에 머리까지 숙이시며 전하의 간병을 본인에게 맡겨주길 청하셨나이다. 소신은 감히 태사의 뜻을 막을 수 없었으니 부디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뭐?”

누가 누구한테 머리를 숙여? 승헌은 믿기 어려운 이야기에 미간을 찌푸렸다. 옥환이 왜? 하물며 호진은 그를 목 졸라 죽이려고까지 했던 인물이다. 한데, 고작 자신의 간병을 하겠다고 호진의 앞에서 머리를 숙였다? 그 자존심 강한 설옥환이 한 행동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혹 과인이 쓰러지고 나서 대장군과 태사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나?”

“예……?”

“옥환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냐고.”

살벌한 목소리에 태의가 머리를 더 깊이 조아리며 대꾸했다.

“아, 아니옵니다. 그저 태사께서는…… 전하의 부상에 크게 상심하신 모양이었사옵니다. 소신이 소식을 듣고 오기 전까지는 태사께서 직접 전하의 용태를 살피고 계셨었사옵니다.”

“……그럴 리가 없어.”

승헌은 저도 모르게 제 속내를 중얼거렸다. 그만큼 납득이 가지 않았다. 군왕의 도리를 지키지 못했다며 출진을 한 일로 설교를 한다면 또 몰라도, 옥환은 절대 자신이 다쳤다고 속상해한다거나 호진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간병을 청할 위인이 아니었다. 차라리 또 무슨 꿍꿍이가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하는 게 더 설득력 있어 보였다. 그만큼, 자신과 그는 가식적이고 메마른 관계였다.

만일 그의 행동이 진심이라면, 정녕 자신을 걱정했다면, 왜 지금껏 그리 잔인한 행동을 했으며 왜 자신의 출진을 막지 않았단 말인가.

‘중서령과 호진의 의심을 피하고 싶었을지도 모르지.’

그래서 일부러 더 과장해서 자신을 걱정하는 척한 것이다. 지금까지 옥환이 한 행동을 되짚어보면 그리 생각하는 게 가장 타당했다. 하나 제게는 야속하기 짝이 없는 그 결론에 승헌은 허탈하게 웃었다. 그래도 옥환이 아주 조금은,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정도로는, 제 걱정을 했다고 믿고 싶었다. 그러다 문득 승헌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짧은 한숨을 뱉었다. 믿다니. 견승헌이, 누군가를 믿고 싶어 하다니.

“저, 전하.”

기분이 무척이나 좋지 않은 듯한 승헌의 분위기에 태의는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승헌은 내내 제 눈치를 보며 엎드려 있던 태의에게 그만 일어나 나가 보라고 지시했다. 태의가 도망치듯 물러가고 혼자가 된 승헌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짚었다.

그저 보고 싶다는 일념 하나로 아픈 몸을 이끌고 여기까지 달려왔건만, 떠나기 전과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도리어 피하고 외면하던 제 마음을 깨닫는 계기만 만들고 말았다. 하나 제 입으로 못된 소리를 해서 쫓아냈는데도, 그를 믿지 못하는데도, 승헌은 여전히 그가 보고 싶었다. 실제로 마주한 애정은 생각한 것보다 훨씬 크고 무거웠다. 그야말로 몸을 뚫고 나올 듯 팽창하며, 한없이 옥환을 갈구하고 있었다.

‘연모의 정에는 약도 없다는데.’

승헌은 급격히 몰려오는 피로감에 천천히 눈을 감으며 생각했다. 아무래도 이 열병은, 쉬이 낫지 않을 것 같다고.

***

태의를 부르겠다고 나온 옥환은 얼마 가지 못하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자신이 바랐던 건 이런 게 아니었다. 승헌이 깨어났을 때만 해도 마냥 기쁘기만 했다. 그라면 분명 저를 보며 또 짓궂은 농담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을 기대했다.

그리고 그런 승헌에게 옥환은 그간 못한 말을 하려고 했다. 그가 깨어나서 정말로 기쁘다는 말, 지난번에 한 말은 전부 사실이 아니라는 말, 이제는 그가 위험한 행동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 전부를. 하지만 승헌의 입에서 나온 것은 짓궂은 농담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나 차가웠다.

“옥환. 그대가 원하는 대로 혼인을 하도록 하지.”

왜 그 화제가 나온 것인지 옥환은 이해할 수 없었다. 혼인 따위는 하나도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제야 그가 아직도 화가 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혼자 후회하고 미안해하고, 이제 그러지 말아야지 생각했을 뿐. 정작 상처를 받은 이는 사과를 받아줄 생각조차 없었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 생각은, 자신들의 관계를 “거래”로만 보는 승헌의 발언으로 확실해졌다.

그래도 서러웠다. 전전긍긍하며 그의 곁을 지키던 그 애타는 마음만큼 서러웠다. 자신을 향한 그의 미움을 어떻게 하면 풀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계속 그의 태도가 변하지 않으면 어쩌나 두려웠다.

이렇게 원망스럽고 겁나는데도, 옥환은 끝내는 그를 향한 걱정에 다시 일어섰다. 아직 아픈 사람을 두고 이럴 때가 아니었다. 태의를 찾으러 가며 옥환은 결심했다. 그가 미워하면 미워하는 대로, 그것을 다 받아 주겠다고. 그의 화가 다 풀릴 때까지 꾹 참아 내겠다고. 그 전에 승헌에게 받은 상처로 제 마음이 넝마가 되더라도.

태의를 먼저 침전으로 들여보낸 옥환은 하늘에 뜬 달을 올려다보며 의지를 굳게 다졌다. 이대로라면 자신들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최악으로 치달을 것이다. 이제는 옥환도 자신의 진심을 알고 있었다. 더는 승헌과 멀어지고 싶지 않다는 그 진심을. 그것의 본질이 무엇인지까지는 확인하고 싶지 않았지만, 승헌과 멀어지기 싫다면 자신이 먼저 마음을 열어야 한다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문득 쌀쌀함을 느끼며 돌아선 옥환의 시선에 쟁반을 든 채 헤매고 있는 태의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불안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옥환을 발견하고는 냉큼 달려왔다.

“태사. 아직까지 밖에 계셨습니까? 한참을 찾았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전하께서 약을 드셔야 하는데…… 저 대신 좀 전해 주시겠습니까?”

“예……? 그것은 어렵지 않습니다만, 혹 무슨 일 있었습니까?”

“아, 아닙니다. 태사께서도 약만 전해 주시고 그만 쉬십시오. 꼭입니다, 꼭.”

태의는 옥환의 두 손을 붙잡고 단단히 당부하더니 줄행랑을 치듯 빠르게 멀어져갔다. 옥환은 아무래도 화가 난 승헌이 태의에게까지 화풀이를 한 모양이라고 짐작했다. 물론 옥환이라고 해서 기분이 저조한 승헌을 마주할 용기가 나는 것은 아니었으나, 승헌이 먹어야 할 약이 제게 있는 한 누구처럼 도망을 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다시금 침전의 문 앞에 선 그는 크게 심호흡을 한 뒤 환관에게 고해 달라 청했다.

“전하. 태사께서 오셨습니다.”

안에서는 대답이 없었다. 눈치를 보던 환관이 한 번 더 고했으나 승헌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옥환은 잠시 망설이다가, 방금까지 새겼던 각오를 떠올리고는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약을 가지고 왔습니다. 약만 드리고 바로 돌아갈 터이니…….”

승헌은 침상에 기댄 채 창밖을 보고 있는 듯했다. 옥환은 약을 둔 채 돌아가려다가, 아무래도 열린 창이 신경 쓰여 승헌에게 다가갔다.

“전하. 아직 아침저녁으로는 바람이 쌀쌀하니 창은 닫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

“전하. 뭐라고든 말씀을…….”

답답함에 승헌에게 따지려던 옥환은 무언가 이상한 것을 깨닫고는 승헌의 얼굴을 살폈다. 그는 눈을 감은 채였다. 옥환은 재빨리 승헌의 이마에 손을 짚었다. 다행히 열은 없었다. 그저 잠이 든 모양이었다.

옥환은 가벼운 한숨을 내쉬고는 승헌이 편히 잘 수 있도록 자세를 바꾸어주려 했다. 하나 외부의 접촉에 무인으로서의 감이 발동했는지 승헌이 번쩍 눈을 뜨고는 옥환의 목을 틀어쥐었다. 잡힌 목도 목이지만 그 살기가 등등한 눈빛에 옥환이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 떨었다. 그는 옥환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곧바로 손을 놓았다.

“송구합니다. 주무시는 듯하여.”

“……아니야. 나야말로 습관이라.”

‘습관’인가. 자다가도 언제든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이 그에겐 습관일까. 승헌이 지나온 삶이 얼마나 삭막하고 험난했을지를 짐작하니 옥환의 마음은 추를 매단 듯 무거워졌다. 무릇 왕이 된다는 것은 옥좌에 앉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짊어지는 것이었다. 그를 잘 아는 옥환이기에, 승헌이 그 짐을 내려놓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이 유독 안타까웠다.

“약을 가져왔습니다, 전하. 피곤하시겠으나 드시고 주무십시오. 그래야 회복이 빠릅니다.”

승헌은 고개를 끄덕인 뒤 몸을 일으켰다. 옥환은 얼른 약사발을 승헌에게 내밀었다. 승헌이 약을 한 번에 들이켜자 옥환이 종지에서 꿀을 떠 승헌의 입안에 넣어 주었다. 약사발을 치우고 승헌의 입을 닦아 준 옥환이 말했다.

“조금 더 주무십시오. 곁을 지키겠습니다.”

순순히 자리에 누운 승헌은 느릿느릿 고개를 돌려 옥환을 바라보았다. 옥환은 침상 옆에 의자를 가져와 앉았다. 오늘도 밤을 샐 의지가 확고한 그 행동에 승헌이 힘없이 웃었다. 그 꼴을 당해놓고도 저를 위해 밤을 샐 마음이 드는지. 이 정도 정성이면 아무리 거짓이라 한들 미워할 수도 없었다. 하나 옥환은 승헌의 미소에 놀란 듯 그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얼굴에 구멍 나겠어.”

“……송구합니다.”

옥환이 서둘러 고개를 숙였으나 승헌은 그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개었다. 옥환이 다시 고개를 드니 승헌이 말했다.

“내가 잠들면 돌아가도록 해.”

“하오나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일은 무슨 일. 나는 강해, 옥환. 걱정하지 마. 이번에는 조금…… 무리를 했을 뿐이야. 애초에 궁인이 저리 많은데…….”

승헌은 다시 잠이 쏟아지는지 스르르 눈을 감았다. 옥환은 제 손등 위에 올려진 승헌의 손을, 남은 한 손으로 꼭 쥐었다. 승헌은 그 온기에 줄곧 날카롭게 곤두서 있던 신경이 부드럽게 풀리는 것을 느꼈다. 옥환은 눈을 감은 승헌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작게 말했다.

“……이제 아프지 마십시오.”

하고 싶은 말은 산더미였건만, 고작 이 한마디를 전하는 게 다였다. 그조차도 수백, 수천 번을 고민하다 간신히 입 밖에 낸 것이었다. 반쯤 잠들어 있던 승헌은 그런 옥환의 고충을 아는 것인지, 살짝 입꼬리를 올린 채 “그래. 약속해.”하고 대답하더니 금세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잠든 승헌의 얼굴을 보며 옥환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 다정하게 대답해 주면서, 이리 걱정하게 만들면서 무엇이 거래란 말인가. 그는 승헌이 했던 말이 그저 화가 나서 아무렇게나 한 소리길 바랐다.

그날 밤, 옥환은 승헌이 잠든 뒤에도 한참 동안 그의 곁을 지켰다.

***

한쪽 뺨이 따스했다. 마치 양지에 있는 것처럼, 볕이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공기에서는 간간이 꽃내음이 났다. 몸은 아직 피로를 호소하고 있었으나 나쁜 기상은 아니었다. 옥환은 제 손을 감싼 부드러운 감촉에 천천히 눈을 떴다. 눈앞에 놓인 제 손은 그보다 더 크고 단단한 손에 잡혀 있었다. 검을 오래 잡아 군데군데 굳은살이 배긴 무인의 손이면서, 궁인들의 섬세한 관리를 받는 누구보다 고귀한 손이기도 했다.

자신의 손에 깍지를 낀 채 잡고 있는 승헌의 손을 가볍게 쥐어 본 옥환은 왠지 가슴 한구석에 봄바람이 불어오는 듯한 살랑살랑한 감각을 느꼈다. 그러다 그는 퍼뜩 정신을 차리더니 얼른 고개를 돌려 승헌의 상태를 확인했다. 승헌은 아직 잠들어 있는 것인지 곤한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옥환은 자신의 허리에 감겨 있는 승헌의 팔을 조심조심 치운 뒤 몸을 일으켜 승헌의 열을 쟀다. 그다음에는 상처 자국을 살폈다. 열도 없었고 상처도 이상은 없었다. 표정도 훨씬 편해 보이는 것이, 이제는 안심해도 될 수준인 듯했다.

그렇게 승헌의 몸 상태를 살피고 나서야 옥환은 뒤늦게 왜 자신이 승헌과 같은 침상에서 자고 있는지를 생각했다.

‘내가 감히 왕의 침상 위에 올라왔을 리는 없고.’

옥환의 시선이 자연히 승헌을 향했다. 지난밤 내내 승헌을 간병하다가, 어느 순간 기억이 없었다. 피곤한 탓도 있었지만 승헌이 다시 웃어 준 것에 안심하는 바람에 잠이 들었을 터였다. 그리고 승헌이 중간에 깨서 졸고 있는 자신을 침상으로 옮겨 온 것이리라.

그렇게 판단한 옥환은 잠시 승헌의 흐트러진 머리칼을 정돈해 줄까 말까 고민했다. 지금 상황이 매우 민망했지만, 뭔가…… 민망한 것과는 다른 감정도 느껴졌다. 하나 승헌을 깨우는 환관의 목소리에 옥환은 고개를 저어 쓸데없는 생각을 털어 내고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대충 머리를 손으로 빗은 옥환이 침전의 문을 열자 승헌을 부르던 환관과 침전 앞을 지키고 있던 궁인들이 얼른 고개를 조아렸다.

“전하께서는 아직 주무시고 계시네. 어차피 약을 달여야 하니 좀 더 쉬시게 하게. 나는 약을 준비해 올 테니 혹 전하께서 나를 찾으시거든 그리 전해드리고.”

“알겠습니다, 태사.”

환관이 물러가자 옥환은 처소에 들러 간단하게 씻고 환복한 뒤 약을 준비하기 위해 곧바로 태의서를 향했다. 태의는 어젯밤 늦게 퇴청한 탓인지 아직 입궐 전인 듯했다. 어차피 승헌의 열이 내렸기에 약화제를 고치려 했던 옥환은 태의의 수고도 덜 겸 약탕기 앞에 자리를 잡았다.

의관들은 문관의 으뜸인 태사이면서 승헌의 애첩이기도 한 옥환이 고작 약 따위를 달이려 한다는 것에 안절부절못했으나, 옥환은 그들을 제자리로 돌려보내고는 태연하게 약탕에 부채질을 하기 시작했다. 옥환은 필요할 때는 자신의 권위를 얼마든지 내세울 수 있는 자였으나, 그렇다고 자리에 연연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명색이 군왕이 마실 약인데, 일개 의관들을 시키는 것이 내키지 않은 탓도 있었다.

그렇게 옥환이 정성을 들여 약을 달이고 있던 때였다. 문하시중이 수많은 의관의 인사를 받으며 태의서에 나타났다. 옥환 역시 문하시중이 여기까지는 웬일인가 싶어 자리에서 일어섰다. 옥환을 발견한 문하시중은 위엄 있던 얼굴은 온데간데없이 울상을 지으며 옥환에게 달려왔다.

“태사……! 전하 좀 말려 주십시오!”

“예? 또 전하를 말려 달라니, 이번에는 무슨 일입니까?”

당황한 옥환이 묻자 문하시중이 일단은 가면서 얘기하자며 옥환을 재촉했다. 옥환은 마침 조제가 끝난 약을 단지에 담아 들고 따라나섰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그러십니까, 문하시중. 제가 나올 때만 해도 전하께선 잠들어 계셨는데.”

“아직 그러실 때가 아닌데 국정에 복귀하시겠답니다.”

“예?”

아무리 아침에 살핀 상태가 나쁘지 않았다지만, 상처가 제대로 아무는지는 더 지켜봐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혹 염증이 생기거나 곪기라도 하면 치료가 어려워지기 때문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바로 국정으로 복귀하는 것은 염증을 유발할 가능성이 높았다.

“……전하께서도 마음이 급하시겠지요.”

하나 승헌이 왜 그런 고집을 부리는지 모르지 않기에 옥환은 한숨 쉬듯 중얼거렸다. 문하시중이 놀라서 “하면 태사께서도 전하의 뜻에 찬성하십니까?” 하고 묻자 옥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아닙니다.”

이제 아프지 않겠다고 약속까지 해 놓고서, 참으로 사람 말을 하찮게 여기는 인사였다. 옥환은 죄책감과 동질감을 뒤로 미루고 승헌에게 단단히 쓴소리를 해 줄 생각으로 침전에 들었다.

“전하.”

옥환이 문하시중과 함께 들자 중서령, 호진과 함께 있던 승헌은 단박에 인상을 썼다. 문하시중에게 서늘한 시선을 쏘아대는 것이 필시 제 약점을 이용한 문하시중을 나중에 가만두지 않을 셈인 듯했다.

“……일단, 약부터 드시옵소서.”

옥환은 하고 싶은 말을 꾹꾹 누르며 단지에서 약을 떠 사발에 담았다. 승헌에게 약사발을 건넨 옥환이 어젯밤과 같이 약을 삼킨 그에게 꿀을 먹여 주고 입까지 닦아 주자 그 정성 어린 모습에 중서령과 문하시중은 적잖이 놀랐다. 그 장면만으로 이틀간 옥환이 승헌을 어찌 간병했을지가 눈에 선했다. 그 탓인지 옥환은 전보다 생기를 잃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기가 막힌 건 기운이 없으면 없는 대로 더 청초하고 가련하게 보일 뿐, 그 아름다움이 어디 가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하나 그 아름다운 미인은 약사발을 치우자마자 군왕을 매섭게 추궁했다.

“전하. 정녕 국정에 복귀하신다고 하셨사옵니까? 지금이 어느 때인지 알고 말씀하신 것이옵니까?”

“언제까지 자리보전이나 할 수는 없잖나. 너무 오래 궁을 비웠어.”

옥환의 딱딱한 어조에도 승헌은 태평하게 대꾸했다. 저를 지성스럽게 간병한 옥환에게는 유감이지만, 나랏일은 나랏일이었다. 안 그래도 옥환 때문에 군왕답지 못한 일만 저지르고 있는데, 이제라도 중심을 잡아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옥환을 더 마음 편히 좋아하기 위해서라도.

“아직 상처가 다 아물지도 않았사옵니다. 오늘이라도 휴식을 취하시고, 정 그렇게 조정이 우려가 되시면 차라리 침전에서 집무를 보시옵소서.”

“그럴 거면 조정에 나가는 게 낫지.”

“안 낫사옵니다. 내내 전하만 기다리고 있던 신하들이 온갖 문제를 아뢰고 온갖 장소章奏를 올려 신단을 내려달라 청할 것인데, 상처가 다시 터지지나 않으면 다행인 일이옵니다.”

“태, 태사.”

옥환을 불러온 당사자이긴 하나 그의 원색적인 표현에 당황한 문하시중이 눈치를 보며 제지했다. 호진은 정신 나간 사람을 보는 표정으로 옥환을 보고 있었다. 물론 이런 대화가 한두 번도 아니었으나, 그리 애틋하게 간병할 땐 언제고 또 가시 돋친 소리를 저리 해대니 신하들은 속으로 두 사람이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관계란 생각을 했다. 정작 승헌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가볍게 받아쳤다.

“터지면 터지는 거지.”

“전하!”

이번엔 옥환뿐 아니라 남은 중신 셋도 함께 입을 모아 승헌을 질책했다. 그럼에도 승헌은 여유가 넘치는 얼굴로 궁인들에게 조회에 나갈 것이니 정복을 가져오라 일렀다.

“전하, 아니 되시옵니다. 부상을 입고 돌아오신 지 고작 사흘도 안 되었사옵니다.”

“맞사옵니다, 전하. 소신들끼리 어떻게든 해볼 터이니 오늘 하루라도 더 쉬시옵소서.”

“수라도 아직 잡숫지 않으셨사옵니다. 이틀 동안 거의 드신 것도 없으신데 어찌…….”

줄줄이 이어지는 신하들의 간언에 승헌이 혀를 찼다. 그 가운데서 옥환은 얼굴을 굳힌 채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하나 별수가 없었다. 왕의 자리란 본디 가시밭길을 걷는 것과 같기에. 물론 아무도 이해해 주지 못하는 고독한 길이기도 했다.

승헌의 옷을 가져온 환관들이 여전히 움직이지 않는 중신들을 보고 자리에 멈춰 섰다. 중신들 역시 서로 눈치를 보며 어떻게 승헌을 막을지 고민하는데, 별안간 옥환이 이렇게 통보했다.

“하면 소신도 조회에 나갈 준비를 하겠사옵니다.”

“뭐? 안 돼. 그대는 쉬어야…….”

“가겠사옵니다.”

옥환은 고집스러운 눈으로 승헌을 바라보았다. 승헌은 난감함에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도 자신이지만 옥환 역시 계속해서 무리를 하고 있었다. 어제도 제 곁을 지키다 겨우 두어 시진 잠든 게 전부였고, 아침만 해도 저보다 더 일찍 일어나 약을 달이러 가지 않았던가. 서 있는 것만으로도 벅찰 터였고, 정신력으로 버티고 있는 게 분명했다.

“태사. 이건 왕명이야. 당장 처소로 돌아가 쉬도록 해.”

승헌이 엄한 어조로 지시했으나 옥환은 바닥에 엎드리더니 말했다.

“어찌 아프신 군왕을 두고 소신 혼자 쉬겠나이까. 신하 된 도리로 결단코 그럴 수 없사오니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설옥환.”

승헌이 협박조로 낮게 이름을 불렀으나 옥환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승헌은 옥환이 찬 바닥에 꿇고 있는 것만으로도 신경이 쓰여 죽을 것 같았다. 하나 옥환의 방법이 효과가 있는 것 같자 남은 세 중신 또한 마찬가지로 바닥에 엎드렸다.

“전하. 태사의 충의를 감안하셔서 부디 자비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자비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전하.”

승헌은 미간에 주름을 새기며 고민에 빠졌다. 다른 세 놈이야 엎드려 있다가 망부석이 되든가 말든가 알 바가 아니었으나 옥환은 달랐다. 바닥에 닿아 있는 옥환의 손과 무릎을 초조하게 보던 승헌은 결국 항복의 뜻을 표할 수밖에 없었다.

“알겠어. 알겠다고. 안 갈 테니 어서 일어나, 태사.”

그제야 비로소 옥환이 고개를 들었다. 왜 그렇게 고집이 세냐고 꾸짖으려던 승헌은 옥환이 살포시 웃는 바람에 말을 삼켰다. 저리 곱게 웃는 얼굴에 대고 어느 누가 싫은 소리를 하겠는가.

옥환을 손수 일으킨 승헌은 뒤늦게 엎드려 있던 세 사람에게도 그만 돌아가라고 일렀다. 한바탕 소동이 끝나고 나자 승헌이 옥환을 침상으로 끌고 갔다.

“약속했으니 그대도 쉬도록 해.”

“전하는…….”

“나는 그대가 시킨 대로 식사를 할 테니, 그동안 자고 있어.”

아무리 그래도 어찌 왕의 침상 위에서 자겠는가. 옥환은 승헌의 손안에서 나오려 하며 말했다.

“하면 식사 시중을 들고 나서 처소에 돌아가 쉬겠습니다.”

“그대는 참 말을 안 듣는군. 나라서 안 듣는 건가, 아니면 원래 그리 청개구리 같은가?”

“그건 제가 전하께 여쭙고 싶은 말입니다.”

“신하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그게 왕인가?”

“옳은 말은 귀담아들으셔야지요. 그래야 좋은 군왕이…….”

한마디도 지지 않고 대꾸하던 옥환은 풀썩, 하고 쓰러지며 말을 멈추었다. 옥환을 쓰러뜨린 장본인은 어느새 옥환의 위로 올라와 있었다. 옥환은 승헌이 정말 아픈 사람이 맞는지 의심하며 그를 쏘아보았다.

“그대의 말을 귀담아듣게 하고 싶으면 그대도 해야 할 일이 있잖아. 또 말도 안 되는 고집을 피워 내가 왕의 도리를 다하지 못하게 했으니 그 책임은 져야지.”

승헌은 일견 설득력 있어 보이는 말로 옥환의 관심을 돌려놓고는 잽싸게 옥환의 옷깃을 풀었다. 옥환은 어제처럼 날 선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풀어진 옷깃을 여미려 하며 강경하게 말했다.

“전하. 아직 상처가 다 낫지 않으셨습니다. 그리 힘을 쓰시면 상처가 벌어집니다.”

“그럼 살살 하지.”

승헌의 철없는 대꾸에 옥환은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하고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는 진지한 눈빛으로 승헌을 응시했다.

“몸부터 생각하십시오. 다른 건 그 뒤에 생각해도 늦지 않습니다. 국정도 그렇고 저도 그렇습니다. 둘 다 항상 여기 있을 것입니다, 전하.”

“과연 그럴까. 그대는 어디든 갈 수 있잖아.”

승헌이 피식 웃으며 빈정대듯 말했다. 하나 그 목소리 안에서 왠지 모를 외로움이 묻어나 옥환은 걱정을 담아 물었다.

“왜 또 그리 말씀하십니까.”

한숨을 쉬는 듯한 옥환의 어조에 승헌은 표정을 풀고는 그의 품에 얼굴을 묻으며 물었다.

“내가 그리 말하면 싫은가?”

“……당연히 싫습니다.”

“나도 그래, 옥환.”

옥환은 허공에 손을 올린 채 망설이다가, 그 손을 살며시 승헌의 머리 위에 내려놓았다. 승헌에게 상처를 줄 때마다 자신 또한 상처받았다. 어쩌면 승헌도 마찬가지였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대에게 심한 말을 했었지.”

“벌써 다 잊었습니다.”

“잊기는. 그대같이 똑똑한 이가.”

잠시 침묵하던 승헌이 생각 끝에 말을 꺼내려는데, 옥환이 먼저 뜻밖의 말을 했다.

“죄송합니다, 전하.”

승헌은 당황한 것인지 말이 없었다. 옥환은 승헌이 지난 일을 사과하려 한다는 것을 알고 선수를 친 것이었다. 지난 일에 사과해야 하는 것은 자신이 먼저였으니까. 자신이 먼저 그에게 심한 말을 했다. 줄곧 그래 왔다. 사과도, 감사도 하지 않고 그의 사과만 받아 왔다. 이제는 마음을 열기로 했으니, 서투르더라도 차근차근 나아가야 했다. 그리고 이것은 옥환이 내민 첫걸음이었다.

“그날 한 말은 모두가 거짓입니다. 사실은, 전하께서 양양에 가시는 것도 싫었습니다. 얼굴을 보면 막아서게 될까 봐 배웅하지 않은 것이니…… 부디 노여움을 푸십시오.”

승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옥환은 괜한 말을 꺼내 도리어 승헌의 기분을 상하게 한 것은 아닌지 초조해졌다. 그렇게 옥환의 애간장을 태우던 승헌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대는 내게 뭘 원하나?”

승헌의 목소리는 다소 쌀쌀맞게 들렸다. 옥환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끼며 대꾸했다.

“제 말이 가식으로 느껴진다고 하셔도 할 말 없습니다. 제가 뿌린 씨앗이지요. 그저…… 전하께 한 번도 제대로 사과를 드린 적이 없는 것 같아서 그리했습니다.”

“그대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

승헌은 느릿느릿 몸을 일으켰다. 그의 얼굴은 몹시도 지쳐 보였다.

“그냥 하던 대로 해, 옥환.”

“속이려는 것이 아닙니다, 전하. 저는…….”

“우리는 이대로가 딱 좋아. 손 뻗으면 닿을 거리지만, 한 발만 물러나면 다시 닿지 않게 될 사이.”

“…….”

하면 전하는 저와 닿지 않게 되셔도 괜찮으십니까? 이 시작도 끝도 없는 관계가 정녕 전하께서 원하시는 겁니까? 만일 제가, 제가 굳이 손을 뻗지 않아도 닿을 거리만큼 가까워지고 싶다면 어쩌시겠습니까…….

밖으로 내지 못한 물음이 옥환의 입안을 맴돌았다.

“전하. 수라를 대령했나이다.”

환관의 부름에 승헌은 곧 침상에서 벗어났다. 황망한 얼굴로 누워 있는 옥환을 본 승헌이 짧게 덧붙였다.

“자고 있어. 자고 일어나면 그대의 식사도 준비하라 이를 테니.”

그렇게 승헌이 떠난 뒤, 옥환은 미어지는 가슴을 부여잡은 채 멀거니 천장만 올려다보았다.

한 걸음 따위로 될 일이 아니었다. 수백 리를 걸어가면 그에게 닿을 수 있느냐 하면, 그도 아니었다. 전에도 말했지 않던가. 그와 자신은 아예 다른 길에 서 있다고. 앞으로 몇 번을 더 깨달아야 이리 바보같이 굴지 않을까.

‘벌을 받는구나.’

이제는 저를 믿어 주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거짓말의 대가였다. 진창길임을 알고서도 걸어온 벌이었다. 옥환은 잔혹한 현실에서 도망치듯 눈을 감았다. 돌아갈 수가 없었다.

돌아가는 길이 없는 것 같았다.

괴로움에 억지로 잠을 청한 옥환은 또다시 금야의 꿈을 꾸었다. 파도처럼 넘실대는 들판을 본 순간 옥환의 인내가 끊어졌다. 그만하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이제 좀 봐달라고 빌고도 싶었다.

주군. 주군, 이 정도면 되지 않았습니까. 이만큼 했으면 이제 그만해도 되지 않습니까. 아무에게도 믿음을 주지 못하는 제가 무슨 수로 백성을 구하겠습니까. 앞으로 얼마나 더 곁에 있는 사람들을 배신하고 농락하며 이것은 옳은 일이라고 자신을 속여야만 하겠습니까. 이제 그만하고 싶습니다. 그만하게 해 주십시오…….

옥환은 허공에 대고 한탄하다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주군을 탓할 일이 아니었다. 이곳에 온 것도, 사람들을 속인 것도 전부 자신이 의도하고 계획한 일이었다. 그래 놓고 새삼 주군을 원망하다니, 이 얼마나 뻔뻔하고 옹졸한 인간인가.

‘가야 한다.’

옥환이 멍하니 주저앉아 있는데 문득 또 다른 자신이 그렇게 말했다. 어디를 가야 한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벽국으로 돌아가라는 것인가? 아니면, 그 진창길을 계속 걸으라는 재촉일까? 옥환은 짜증스레 가슴을 때렸다. 왜 이 꿈만 꾸면 이렇게 가슴이 먹먹하고 아픈지 알 수 없었다. 제 마음이 벽국에게서 돌아서고 있는 것을 자신 또한 알았기 때문에?

옥환은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머나먼 도시에서 즐거운 웃음소리가 들렸다. 해가 져도 불빛이 지지 않는 불야성. 저곳은…….

“옥환, 일어나. 어서.”

격렬한 흔들림에 옥환은 눈을 떴다. 자신은 누군가에게 안겨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온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저를 감싼 사내의 커다란 등에 매달렸다.

“옥환, 괜찮아. 꿈이야. 괜찮아.”

승헌이 옥환의 등을 토닥이며 자상하게 달랬다. 그 온기에 안도하며, 옥환은 눈을 감은 채 한동안 승헌의 품에 안겨 있었다. 승헌은 그런 옥환에게 몇 번이나 괜찮다고 말해 주었다. 그렇게 어느 정도 진정이 되자 옥환이 천천히 승헌의 품에서 나왔다. 그다지 악몽까지도 아니었건만 이리 겁먹은 어린아이처럼 굴다니. 민망함에 낯이 뜨거웠다.

“송구합니다…….”

“가위에 눌리는 듯하던데. 나 때문에 무리한 탓이겠지.”

승헌이 소매로 옥환의 땀을 닦아 주며 근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옥환은 고개를 들어 승헌을 바라보았다. 그는 진심으로 저를 걱정하는 것 같아서 도리어 야속한 마음이 들었다. 헷갈리게 하는 것은 이 사내 또한 마찬가지가 아닌가.

이윽고 승헌은 환관에게 태의를 불러오라 일렀다. 식사를 준비하라는 말도 덧붙였다. 옥환은 승헌이 또 어딘가 안 좋은가 생각하다가 그의 의도를 깨닫고는 당황했다.

“전하. 저는 괜찮습니다.”

“내가 안 괜찮아. 그대를 계속 재우는 게 아니었어. 중간에라도 깨워서 뭐라도 먹여야 했는데.”

“저도 의원이니 진찰은 안 받아도 됩니다. 그저…… 전하의 추측대로 기력이 다해 그런 것일 뿐입니다. 식사 또한 처소로 돌아가서 하겠으니 명을 물려 주십시오.”

승헌은 옥환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청을 허락한 승헌의 심중은 알 수 없었으나, 옥환은 지금만큼은 혼자 있고 싶은 기분이었다.

“궁인들에게 배웅하라 할 터이니 그것은 거절하지 마.”

“……알겠습니다.”

“그럼 됐어. 처소로 돌아가 쉬도록 해.”

옥환은 가볍게 읍하고는 승헌이 붙여준 궁인들과 함께 침전을 나왔다. 어느새 하늘은 주황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꽤 오랜 시간 잠들었던 듯했다.

사흘 만에 처소로 돌아온 옥환이 목욕을 끝내고 나오자 하인들이 미리 가지고 들어온 상 위에는 승헌이 보냈다는 요리들이 가득 차려져 있었다. 왕이 내린 어식이라 옥환은 입맛이 없는 것을 꾹 참고 먹을 수 있는 데까지 먹었다. 그래도 헛헛한 속을 채우니 정신이 조금 맑아지는 것 같았다.

상을 치우고 책상 앞에 앉은 옥환은 문득 무엇인가를 깨닫고는 당황했다. 벽국에 보내려던 서찰이 책상 위에 그대로 올려져 있던 탓이었다. 그러고 보면 서찰을 주려다 말고 승헌이 다쳤다는 소식에 뛰쳐나왔었다. 혹 누가 본 것은…….

재빨리 서찰을 숨기려던 옥환은 돌연 움직임을 멈추더니, 이내 책상 위에 쓰러지듯 엎드렸다. 이제는 행여 들킬세라 가슴을 졸이는 것에도 이골이 난 탓이었다. 그렇게 엎드린 채, 옥환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금세 잠이 든 옥환은 여지없이 들판 한가운데 서 있었다. 이번엔 화가 나지도, 두렵지도 않았다. 그는 일부러 이 꿈을 꾸려 했다.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다.

옥환은 멀리 떨어진 도시로 눈을 돌렸다. 아까까지만 해도 멀던 곳이 지금은 유독 가까워 보였다. 성벽에 꽂힌 깃발이 보일 만큼. 바람에 나부끼는 그것에는, 검은 기린이 수 놓여 있었다. 옥환에게도 무척이나 익숙한 모양이었다.

전장에 나갈 때마다 보았던, 적국의 기旗.

꿈속의 옥환이 속절없이 바라보던 도시는, 바로 서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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