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야기 3
금야기
3
八. 烈寒(열한) (2)
“오늘이 조사 결과를 올리는 날이지요?”
차를 따르며 넌지시 묻는 계평에게 옥환이 무심하게 “그래.” 하고 대꾸했다. 결국 승헌은 병부상서의 뜻을 받아들여 대장군 백청을 조사할 것을 일렀고, 오늘 아마 그에 대한 조사 결과가 승헌에게 보고될 것이었다. 옥환에게도 몹시 중요한 날일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모든 것이 끝나는 것입니까? 저와 승상은 이제 어찌 됩니까?”
“나도 모르겠구나. 하나 목숨이 붙어 있는 한 난 무엇도 끝낼 생각이 없다.”
“…….”
최근의 옥환은 폭풍 전야의 고요처럼 조용하게 하루하루를 보내왔다. 조회에는 꼬박꼬박 참여했으나 의견을 내지도 않았고 더 이상 백고를 만나지도 않았다. 문관들과의 교류도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다. 그렇기에 계평은 옥환에게 무언가 심경의 변화가 있다고 예상하고는 앞으로의 일을 물은 것이었다.
하지만 미래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이것은 옥환이 적국에 와 승헌에게 몸을 주면서까지 이루려 한 과업이었다. 모든 것이 의도한 대로 흘러가도록 최선을 다해 계획했지만, 어디든 변수는 있기 마련이었다. 그렇다고 옥환이 그 변수를 그냥 놓아둘 위인은 아니었다. 그저 지금은 그 변수가 수면 위로 드러나기를 기다리고 있을 뿐. 그렇기에 옥환은 자신이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다만. 그 뒤에 이어질 것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옥환의 생각은 항상 그곳에서 멈추었다.
“한데…… 승상. 전에 빼낸 군사 기밀을 전하께 언제 보고드릴 생각이십니까?”
이윽고 내내 옥환의 눈치를 보던 계평이 이내 그렇게 물어 왔다. 차를 마시던 옥환의 손이 아주 잠시 멈추었다.
“곧 큰일이 일어날 테니, 지금은 몸을 사리는 게 좋다고 하지 않았더냐.”
“하나 만일 이번 일로 서국 왕이 승상을 의심하게 되면 그땐 정말로 기회를 놓쳐 버리지 않겠습니까. 필사한 내용을 주시면 제가 알아서 전하께 보내겠습니다.”
“그것은 매우 중요한 정보다. 여차할 때는 그 내용을 토대로 계책을 세워 전하께 말씀드려야 할 수도 있어. 나도 아직은 다 파악이 안 되었으니, 당분간은 내가 가지고 있는 게 낫다.”
계평은 못마땅한 표정이었지만 더는 입을 열지 않고 얌전히 물러났다. 아무튼 기밀을 빼 온 건 옥환이었기 때문이었다. 옥환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그때, 바깥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 왔다. 옥환이 소리가 나는 쪽으로 시선을 향하니 하인 하나가 헐레벌떡 처소 안으로 들어서는 모습이 보였다. 하인은 옥환의 앞으로 달려오며 외쳤다.
“태사! 백 장군이 자수를 하였답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소식에 옥환이 드물게 놀란 얼굴을 하며 되물었다.
“……뭐? 누가? 설마 백고 장군을 말하는 것이냐?”
“그, 그러합니다. 이번 일을 꾸민 것은 자신이라고 전하께 고해 올리셨다고 합니다.”
“해서? 백 장군은 어찌 되었느냐?”
“옥에 갇히셨다고 합니다.”
옥환은 짧게 혀를 찼다. 백고라니. 뜬금없이 왜 그의 존재가 나온단 말인가. 조사가 시작된 뒤 병부상서의 아들을 포함해 심문을 이유로 잡혀간 이가 몇 있긴 했으나, 백고가 그 안에 포함되리라고는 전혀 상상하지도 못했다. 그는 그저 여차할 때 백청을 몰아세우는 데 쓰일 말에 불과했다. 한데 그가 어찌하여 돌연 판의 한가운데 뛰어든 것인지 옥환은 이해할 수 없었다.
‘제 아비의 죄를 대신 뒤집어쓸 심산인가?’
옥환이 혼란을 느끼고 있는데 때마침 문하시중이 찾아왔다. 그 역시 백고의 소식을 듣고는 옥환을 만나러 달려온 모양이었다.
“문하시중. 이미 소식은 들으셨지요? 어찌 된 일인지 아십니까?”
차를 내오기도 전에 옥환이 각설하고 묻자 문하시중이 난감한 어조로 대답했다.
“저도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은 아니나, 오늘 조회가 끝나고 백 장군이 전하를 찾아가 직접 죄를 자백했다는 듯합니다. 감찰관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대장군이든 백 장군이든 그쪽 가문에 혐의가 있는 건 사실이라 일단 자백한 백 장군을 하옥했답니다.”
“하면 대장군은요?”
“우선은 백 장군만 하옥하는 것으로 하고 대장군에게는 이렇다 할 처벌을 내리지 않으신 모양입니다. 다만 백 장군이 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들은 대장군이 노발대발해서 아주 난리도 아니었답니다. 갇혀 있는 백 장군을 만나야겠다며 고집을 부리는 통에 옥졸 몇이 부상을 입기까지 했다지요.”
그 괄괄한 성격에 가문이 치욕을 당한 데다가 아들까지 잡혀갔으니 그나마 죽은 자가 없는 게 용할 터였다. 잠시 찻잔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옥환이 다소 무거운 어조로 물었다.
“병부상서께는 찾아가 보셨습니까?”
“……예. 태사께 들르기 전에요. 낙향할 생각인지 짐을 싸는 모양이었습니다. 별다른 얘기는 안 했습니다만…… 중서령이 이제라도 고발을 없었던 일로 하라고 많이 설득했다고 합니다. 해서 본인도 흔들린 듯했는데, 백 장군이 자백을 했다고 하니 적잖이 노여워했지요.”
“……중서령이요…….”
중서령은 자신을 의심하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앞으로의 방해물은 다름 아닌 그가 될지도 모른다. 나름 그간 학문적인 교류도 하고 그럭저럭 친밀하게 지낸 사이였으나, 그가 자신을 방해하려 한다면 결국 그와도 척을 지는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숙명에 거스를 수 없음을 알면서도 옥환은 마음이 무거웠다.
“하나 병부상서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백 장군이 부친의 죄를 대신 뒤집어썼다는 생각이 듭니다. 실제로 대장군에게 죄가 있든 없든, 백 장군은 그리 생각하고 행동하지 않았을까요.”
“그렇겠지요. 다들 백 장군이 뒤에서 뭘 조작하고 할 사람이 아닌 것은 잘 알지 않습니까. 아마 이번 일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을 테니 조금만 조사해 보면 그의 결백함이 드러날 것입니다.”
하지만 백고가 갇혀 있는 동안 백청은 이번 일에서 빠져나갈 시간을 벌게 될지도 몰랐다. 옥환은 자신이 백고를 만나 봐야 하는 건지 고민이 들었다. 옥환이 고민하는 사이 문하시중이 씁쓸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하나 대장군에겐 이게 더 큰일일지도 모릅니다. 아들이 대신 옥에 갇힌 것이 아닙니까. 병부상서의 아들이 그리된 것과 비슷하니…… 복수라면 복수겠지요.”
“…….”
옥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물론 문하시중의 말대로 인과응보라고 볼 수도 있었다. 하나 이것은 자신이 치밀하게 계획한 일이다. 백고가 대신 잡혀가는 것은 그의 계획에 없던 일이었으나, 백청의 불행이야말로 옥환이 바라고, 또 의도한 일이었다. 옥환은 차를 새로 따르며 신중하게 물었다.
“문관들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어떻기는요. 자기네들도 대장군을 파직시키라며 시위를 벌여야 하는 것 아니냐는 얘기까지 하더군요. 그간 무관들이 병부상서의 일로 저희들을 내내 괄시하지 않았습니까. 일이 이렇게 됐으니 내내 쌓아온 불만이 폭발했겠지요.”
“하나 무관들은 무관들대로 들고 일어서지 않겠습니까? 대장군이 그런 오욕을 당했으니 말입니다.”
“아무렴요. 이대로 밀리면 회생이 불가능해질 테니까요. 하다못해 호 장군이 돌아올 때까지 버텨야겠지요.”
호진의 존재는 이번 계획의 큰 변수이기도 했다. 마침 그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옥환은 대수롭지 않은 척 물었다.
“전하께서 호 장군을 불러들일까요?”
“글쎄요……. 호 장군이야 오고 싶어 하시겠지만, 지금 호 장군을 부르면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꼴밖에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만. 전하께서도 그 정도는 알고 계실 테고요.”
“그렇겠지요. 하나 호 장군은 전하의 오랜 충복이자 많은 것을 터놓는 벗이 아닙니까. 지금 같은 때엔 그의 존재가 절실하실 텐데.”
문하시중을 떠보기 위한 말이었으나, 한편으로는 실제로 옥환이 생각하는 바이기도 했다. 하나 문하시중은 턱을 쓰다듬으며 모호한 대답을 내놓았다.
“뭐…… 그런 감정적인 문제로 섣부른 결정을 내리실 분도 아니고…… 무엇보다 태사는 잘 모르시겠지만 전하는 생각보다 차가운 분이십니다. 상대가 잘 아는 부분에 대해 몇 가지 조언을 구하실 수는 있겠으나, 전하께서 많은 것을 터놓는 상대는 어디에도 없지요.”
“……그렇습니까……? 호 장군은 물론이고 문하시중 또한 전하께서 많이 의지하시는 분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자주 부르시니 그리 보일 수는 있겠지만, 거의 듣는 쪽이시지 말씀하시는 쪽은 아닙니다. 오히려 전하께선 태사께 더 많은 말씀을 하시지 않겠습니까.”
“…….”
옥환은 그랬던가 하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말을 많이 했다기보다는, 얼마 전 일도 그렇고 위로를 받으러 오는 일이 잦은 것 같기는 했다. 저 또한 조정에서는 신하인데, 그런 제가 얼마나 큰 위로를 해줄 수 있다고. 아니면 그만큼 위로를 구할 상대가 없는 것일까?
왕이라는 자리의 고독함에 대해 새삼 생각하던 옥환은 문득 문하시중과 눈이 마주치고는 멈칫했다.
“어찌 그리 보십니까?”
“아무것도 아닙니다.”
문하시중은 그렇게 대답하며 허허 웃을 뿐이었다. 옥환은 뒤늦게 승헌에 대한 얘기를 할 때가 아니었나 싶어 얼른 화제를 바꾸었다.
“그보다 조정이 큰일입니다. 한시라도 빨리 이 소란을 가라앉혀야 할 텐데요.”
그 말에 방금까지 웃고 있던 문하시중의 표정이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그는 한숨을 길게 내쉬고는 말했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하나 뾰족한 수가 없으니……. 먼저 어느 쪽으로든 확실히 결론이 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요.”
지금의 상황을 단숨에 타개할 수는 없다. 그것이 바로 옥환이 준비한 계책의 본질이었다. 언젠가는 해결이 되더라도, 절대 쉽게는 끝나지 않도록. 대부분이 눈치채지 못했겠으나 어느새 서국 조정에서는 벽국 침공에 대한 얘기가 나오지 않게 된 지 오래였다. 이대로 대립이 길어지고 국정이 어지러워진다면 그때는 벽국을 침공하고 싶어도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리고……?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자신이 갖고 있는 기밀을 이용하면 벽국에게도 승산이 생기게 된다. 하지만 옥환의 마음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벽국은 더 안정되어야 한다고. 염요는 더 성장해야 한다고. 아직, 아직은 서국을 무너뜨릴 때가 아니라고.
이것이 절호의 기회라는 건 알고 있었다. 백청이 원인이었다고는 하나 애당초 서국을 무너뜨리기 위해 준비했던 계획이기도 했다.
일은 계획대로 잘 흘러가고 있었다. 백청은 이미 무너지고 있었으나, 옥환은 그가 완전히 망가질 때까지는 긴장을 늦추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기 전까지는, 그 뒤의 문제에 대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의 옥환에게는 종소의 복수가 먼저였다. 종소의 존재는 옥환이 구하지 못한 백성들을 대표했고, 그를 위한 복수를 하는 것은 자신의 무력함으로 인해 그를 희생시켰다는 죄책감을 무마할 유일한 방법이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옥환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자신을 구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런 옥환을 책망하듯 최근 들어서는 금빛 들판이 나오는 꿈이 거의 매일같이 반복되고 있었다. 옥환은 그 꿈에서 깨어날 때마다 어쩔 도리 없는 막막함을 느꼈다. 마치 코앞이 두꺼운 벽으로 가로막힌 기분이었다. 백청을 향한 복수는 자신을 위한 일인 것과 동시에 벽국을 위한 일이기도 했다. 한데도 꿈이 반복되는 것은 스스로가 제 진심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겉으로만 벽국을 위한 일이라고 변명하고 있을 뿐, 실제로 그 안에는 벽국을 향한 마음 대신 서국에 동화된 자신만이 있다는 걸 알아서.
하나 그래서는 안 된다. 벽국의 재상이자 염완의 뜻을 이어받은 자신은, 서국에게서 돌아서고, 익숙한 면면들을 배신해야만 했다. 어차피 서국의 백성일 뿐인 종소를 구하지 못한 일로 멈춰 서선 안 되었다. 이전에는 아무렇지 않았던 그 의무와 구속이, 지금은 옥환을 괴롭게만 했다.
답답한 마음에 옥환이 내쉬는 무거운 한숨을, 문하시중은 그저 나랏일 때문이라고 여길 따름이었다.
얼마 뒤 문하시중이 돌아가고 나자 옥환은 백고를 만나 보기 위해 그가 갇혀 있는 감옥을 향했다. 옥졸들은 태사면서 궁 안의 유명인사이기도 한 옥환을 보고는 비켜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는 듯했으나, 옥환이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논리적인 설득을 펼치자 뭐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길을 터 주었다.
이윽고 백고와 창을 두고 마주하게 된 옥환은 눈을 감은 채 앉아 있는 그에게 말을 걸었다.
“백 장군.”
그러자 백고가 눈을 번쩍 뜨더니 옥환을 보고는 몹시도 당황했다. 옥환은 그의 평소와 같은 상태에 안도하고는 말했다.
“어찌 이런 곳에 계십니까.”
“그, 그것은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입니다, 태사. 태사처럼 귀하신 분이 어찌 이런 곳에…….”
“백 장군이 여기 계시니 그렇지요. 몸은 괜찮으십니까? 불편하신 데는 없으십니까?”
백고는 옥환이 자신을 걱정한다는 것에 깊은 감명을 받았는지 옥에 갇혀 있는 처지에도 못내 기쁜 얼굴을 했다. 옥환은 그런 백고를 안타깝게 여기면서도 그를 걱정하는 척을 하며 이런저런 상황을 물었다. 이윽고 시답잖은 화제가 동이 나자 옥환이 본론을 꺼내 들었다.
“백 장군. 장군께서 대장군을 위하는 효심으로 이런 선택을 하신 건 압니다. 다만…… 혹 변 장군을 만나셨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옥환의 질문에 백고는 담담하게 대꾸했다. 그 총명한 금야 선생이라면 이미 모든 일을 간파하고도 남았을 터였다. 그는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이번 원정의 두 부장 중에 변 장군의 형제가 있지 않았습니까. 변 장군께서도 제 부친을 걱정하셔서 절 찾아오신 모양이었습니다.”
“물론 그뿐만은 아니겠지요.”
“……태사. 저는 저 하나의 희생으로 다른 이들을 구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잠시 백고의 속내를 가늠하듯 바라보던 옥환은 이내 속으로 허탈하게 웃었다. 백고는 겉과 속이 다른 인물은 아니었다. 차라리 입을 다물었으면 다물었지 거짓을 말하지는 않을 터다. 그는 진심으로, 자신이 모든 죄를 뒤집어써도 좋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 악랄한 자가 아들만큼은 잘 두었구나.’
어쩌면 백청에게는 백고가 죄를 덮어쓰고 벌을 받는 것이 더 치명적일 수도 있었다. 하나뿐인 아들이자 후계자가 아니던가. 그가 그리 중히 여기는 가문 또한 죄인의 가문이 될 것이고. 그렇다면 굳이 나설 필요 없이 이대로 일이 돌아가는 형편을 지켜봐도 될 성싶었다. 빠르게 결정을 내린 옥환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부디 몸조리 잘하십시오, 백 장군.”
“……살펴 가십시오, 태사.”
제 뒤통수에 꽂히는 시선을 느끼면서도, 옥환은 끝내 뒤돌아보지 않고 옥사를 나왔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마침내 많은 이들의 명운을 가를 조회가 다가왔다.
단단히 각오를 다지고 정전을 향하던 옥환은 전각 앞에 펼쳐진 익숙한 광경에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정전 앞마당에서는 문관들이 엎드린 채 백청을 파직하라고 외치고 있었다.
“전하! 이번 원정으로 죽은 병사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서라도 잔학무도한 백고와 백고의 아비인 백청을 파직하여 주시옵소서!”
“파직하여 주시옵소서, 전하!”
그 무리의 맨 앞에는 다름 아닌 병부상서가 있었다. 여기서 판이 뒤집히면 그와 그의 아들은 정말로 목숨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 그로서도 벼랑 끝에 선 심정일 것이었다.
옥환은 문관들의 아우성을 뒤로하고 정전 안으로 들어섰다. 하나 정전 안도 소란스럽기는 매한가지였다.
“네놈이 감히 무어라고 입을 놀렸느냐!”
“허, 쳐 볼 테면 쳐 봐라! 이러니 너희 무관들이 무식하다는 소리를 듣는 게야!”
“무엇이?!”
“그만들 하지 못하겠나……!”
시비가 붙은 문관과 무관 사이를 문하시중이 필사적으로 뜯어말리고 있었다. 하나 다른 신하들은 본척만척하거나, 적극적으로 말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뿐인가. 개중에는 이번 처사에 대해서 항의를 하듯 아예 조정에 출석하지 않은 이들도 다수 있었다. 그야말로 개국 이후 내내 쌓여만 가던 갈등을 옥환이 준비한 작은 계기가 완전히 폭발시킨 모양새였다.
두 신하의 다툼은 문하시중이 말린 덕에 가까스로 멈추었으나, 백청이 정전에 모습을 드러낸 순간 다시금 장내의 공기가 불온하게 술렁였다. 그는 잔뜩 성이 난 얼굴을 한 채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신하들의 예상대로 바깥에서 농성을 벌이던 병부상서 역시 정전 안으로 들어섰다. 백청과 병부상서가 서로를 보는 눈빛은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그들 각각은 우연인지 의도인지 옥환을 한 번씩 쳐다보았다. 또 한편으로 그런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중서령의 따가운 시선까지 느끼면서도 옥환은 끝까지 태연함을 가장했다.
“국왕 전하 납시오!”
환관의 우렁찬 외침과 함께 마침내 승헌이 정전에 나타났다. 그는 밖에서 들리는 신하들의 원성과 험악하기 짝이 없는 조정 안의 분위기에 짜증스레 혀를 찼다. 벌써 일이 시작된 지 거의 달포가 되어가고 있었다. 이보다 더 급선무인 일들이 아직도 산더미였다. 이대로라면 조정이 아니라 나라가 마비될 것이다. 그리고 이 소식은 필시 벽국에도 전해진 상태일 터. 이제는 어떻게든 일의 마무리를 지어야만 했다.
이윽고 문무백관의 인사를 받은 승헌은 곧 누군가를 정전으로 불러들였다. 바로 이번 일의 조사를 맡은 감찰관이었다. 승헌은 이번 조사의 공정을 기하기 위해 일부러 문무관 그 어느 쪽에도 연이 없는 자를 골라 조사를 맡겼다. 그는 승헌에게 공손히 절을 올리고는 입을 열었다.
“전하. 신은 길천 원정의 부장 두 명을 추포하여 심문하였으나, 그들에게서 대장군이나 백 장군의 지시를 받아 전투를 방해하거나 패배하게 하려 했다는 자백을 얻어 내지는 못하였나이다. 또한 병부상서의 아들이 퇴각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각각 상반된 증언을 하는 증인이 있어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가 어려운 상태이옵니다.”
무관들의 표정이 잠시 밝아졌으나 그도 일순, 이어진 감찰관의 보고에 그들은 사색이 되었다.
“다만 그와는 별도로, 원정에서 살아 돌아온 병사 중에 도적들에게 군량을 도난당해 전투에서 패배한 것이라는 증언을 한 자가 있사옵니다. 신이 알아본 바로 군량을 관리하던 것은 부장 중 변예중의 책무였다고 하옵니다.”
변예중은 백청과 절친한 변 장군의 아우였다. 옥환은 백청과 변 장군의 조작으로 정보가 막힌 서국 신하들과 달리, 염요에게 원정의 상황을 전해 들었기에 모든 내용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옥환이 알기로 서국군이 도난당한 군량은 결코 많은 양이 아니었다. 아마 옥환의 추측으로 변예중은 본래 바로 그 일을 병부상서의 아들에게 뒤집어씌우려 했을 터였다.
다만 전쟁에서 패배하게 되면서 그것은 더 이상 사소한 실수가 아니게 되었다. 그러자 혹여 그 일을 공론화했다가 자신에게 불똥이 튈까 겁이 난 변예중과 변 장군은 그것을 감추고 병부상서의 아들이 퇴각 명령을 내리지 않아서 패배했다는 다른 연유를 갖다 붙이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모든 상황을 파악한 옥환은 그 사실을 병부상서에게 전해 그가 끝내는 백청을 고발할 수밖에 없게끔 만들었다.
그리고 지금, 병부상서의 고발이 근거 없는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하나 백청의 흉측하게 일그러진 표정을 보면서도 옥환은 승리를 자신하지 않았다.
이윽고 승헌은 여전히 감정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감찰관의 보고를 재촉했다.
“해서?”
“신이 생각하기로, 이번 일은 주장의 능력 부족도 있었으나, 부장의 관리 소홀로 인한 부분 역시 큰 것으로 보이옵니다. 다만 조정 중신인 변 장군이 동생인 변예중의 실책을 감추려 하였고, 그 과정에서 변 장군이 백씨 가문의 누군가에게 청탁을 하여 의도적으로 병부상서의 아들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씌우려 했다는 정황이 드러났사옵니다.”
감찰관의 보고 역시 옥환의 추측과 같았다. 하나 감찰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백청이 성을 내며 제 억울함을 피력했다.
“말도 안 되옵니다, 전하! 이번 패배에 변 장군이 관련이 있다고 할지언정, 신은 결단코 그런 일을 벌이지 않았사옵니다! 그것은 신의 자식 또한 마찬가지이옵니다!”
무관들 또한 백씨 가문의 충정을 알아 달라며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이는 병부상서의 모략이옵니다! 저와 제 아들이 불리하게 생겼으니 대장군을 모함한 것이옵니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나와 내 아들을 모함한 건 대장군이 아닙니까?!”
한 무관의 발언에 분을 억누르고 있던 병부상서 역시 더는 참지 못하고 고함쳤다. 그러자 이번에는 백청이 나서서 그에게 반박했다.
“뭣이?! 네 자식놈이 불구가 된 것은 그놈이 앞뒤 분간 않고 적에게 달려들었기 때문인데, 목이 붙어 있는 것만으로 감사하지는 못할망정 감히 내 탓을 한단 말이더냐?!”
“말 다하셨습니까?! 그러는 대장군은 자식을 참 잘도 키워서 저뿐만 아니라 서국과 전하께도 이리 큰 폐를 끼쳤나 봅니다?”
“네 이놈이……!”
“두 분 다 진정하십시오! 전하 앞에서 이 무슨 추태입니까? 아직 전하께서는 아무런 신단도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금방이라도 서로를 잡아먹을 것처럼 으르렁대는 백청과 병부상서를 다른 신하들이 말리느라 조정은 한바탕 아수라장이 되었다. 승헌은 내내 말 한마디 없이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하나 그가 얼마나 분을 억누르고 있는지, 굳게 쥔 주먹이 파르르 떨리는 게 멀리 선 옥환의 눈에도 보일 정도였다. 그런 승헌의 이변을 눈치챈 신하들이 적극적으로 나선 덕에 백청과 병부상서의 다툼은 가까스로 진정되었다.
“백고는, 무어라 하던가.”
그리고 겨우 노기를 달랜 승헌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하문하자 감찰관이 고개를 숙이며 대꾸했다.
“예, 전하. 모두 본인이 벌인 일이라고 인정하였사옵니다.”
“전하! 그것은 소신의 어리석은 아들놈이 소신을 감싸려 하는 거짓 주장에 지나지 않사옵니다! 전하께서도 그 녀석의 성정을 잘 아시지 않사옵니까? 소신이 저지르지도 않은 짓을 지레 걱정해서 나선 것이옵니다!”
“그렇지 않사옵니다, 전하! 아무리 백 장군이 아둔하다고 해도 아무런 근거도 없는 일에 대장군을 대신해 나설 리 없지 않사옵니까?”
“네 이놈 심형! 네놈이 정녕 죽고 싶은 게냐……!”
“나를 그리 겁박해도 소용없습니다, 대장군. 정 그렇게 떳떳하면 근거를 대셔야지요!”
물론 백청의 주장에도 일리는 있었다. 백고를 잘 아는 승헌이기에 더더욱 그가 그럴 성격이 아니라는 말은 설득력이 있었던 것이다. 백청 역시 그 부분을 파악해 반전의 여지를 노린 것이었으나, 공교롭게도 감찰관이 나서 찬물을 부었다.
“전하. 백 장군은 변 장군의 부탁을 받아 저자에 병부상서의 자제에 대한 나쁜 소문을 퍼뜨리고 무관들의 시위를 부추겼다고 진술하였사옵니다. 이는 변 장군 또한 인정한 부분이옵니다.”
“……무엇이……?”
감찰관의 말인즉 백고가 주범이라는 설에 범인의 자백과 공범의 증언이 모두 갖춰졌다는 뜻이었다. 백청은 넋이 나간 얼굴이 되었다. 옥환은 그런 백청의 좌절을 빠짐없이 지켜보았다.
“전하! 이제 더는 소모적인 논쟁을 벌일 필요조차 없사옵니다. 부디 영명한 결정을 내려 주시옵소서.”
“영명한 결정을 내려 주시옵소서, 전하.”
신하들이 승헌의 결정을 재촉했으나 승헌 역시 이렇게까지 명백한 증거가 나오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탓인지 미간을 찌푸린 채 섣불리 입을 열지 않았다. 물론 지금 상황에서 가장 답답한 것은 백청이었다. 하나 그는 실낱같은 희망을 품은 채 승헌의 결정을 기다렸다. 이 나라를 세울 때에는 제 아비가 함께했고 승헌을 왕에 올릴 때에는 자신이 함께했다. 제 아들 또한 항시 승헌의 곁을 지키며 그를 위해 목숨까지 내건 충신이 아니던가. 제가 아는 한, 승헌이 저를 배신하는 일 따위는 없을 터였다.
한참을 고심하던 승헌은 조정 안의 날 선 침묵을 깨고 마침내 그 무거운 입을 열었다. 그가 “문무백관은 모두 들으라.” 하고 운을 떼니 신하들이 일제히 머리를 조아렸다.
“감찰관이 말했듯이, 이번 길천 원정의 패인은 주장과 두 부장 모두에게 있다. 다만 주장이었던 심원은 패배에 대한 반절만의 책임을 물어 유배를 보내는 것으로 하고, 부장인 변예중은 책무를 다하지 못한 것도 모자라 그것을 다른 이에게 덮어씌우려 했으니 그 죄를 물어 사형에 처한다. 제 아우의 죄를 감싸려 백고에게 청탁을 한 변의정 역시 사형에 처한다.”
결국 처음 바라던 대로 아들은 유배를 가게 되었고, 진범이 밝혀져 역적이라는 누명까지 벗게 되었으니 병부상서의 승리라고 볼 수 있는 결과였다. 더구나 변 장군은 백고까지 휘말리게 했음에도 결국 자신과 아우의 목숨 모두를 잃게 된 상황이었다. 하나 아직 중요하게 남은 문제가 있었다. 바로 백고에 대한 처분이었다. 승헌은 떨리는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병부상서와 백청을 한 번씩 쳐다보고는 말했다.
“청탁을 받아 변씨 형제의 죄에 가담한 백고 또한 사형에 처해야 맞는 일이겠으나…… 그간의 전공과 자백을 한 점을 참작하여 유배를 보내는 것으로 벌을 대신하노라.”
승헌으로서는 최선의 결정이었다. 하나 백청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 또한 충분히 예상 가능한 결과였다. 백청은 승헌의 결정이 자신의 기대와 어긋나자 더없이 분노했다.
“전하! 전하, 어찌 그러실 수 있사옵니까! 신의 아들은 전장에서 전하를 보필하지 않았나이까! 호 장군을 쫓아낸 것으로도 모자라시나이까?!”
진심으로 억울함을 피력하는 백청과 그것에 공감하는 무관들을 고려해 승헌은 최대한 좋은 말투로 백청을 달래려 애썼다.
“대장군. 경의 마음을 모르지는 않으나 죄인들의 증언이 일치하고, 백고 또한 본인 그랬노라고 자백을 하였네. 하필 지금처럼 어려운 때에 백고가 저지른 일로 국정은 마비되고 민심은 흐트러졌어. 과인이 백고를 죽이지 않은 것은 경의 말대로 과인을 보필한 백고의 공을 감안한 것이니 겸허하게 받아들이게.”
“전하! 전하께서 이러실 수는 없사옵니다! 어찌 오르신 왕위이옵니까? 소신이 전하를 어찌 그 자리에 모셔다드렸는지 잊으신 것이옵니까?”
왕위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승헌의 표정이 눈에 띄게 차가워졌다. 문관도 무관도 백청이 선을 넘으려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나 누구도 제 주군을 무시무시하게 노려보는 백청을 막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대장군. 그 정도로 하지. 말했을 텐데. 과인은 백고의 처지를 최대한 살폈다고.”
“전하께서는 한순간의 안위를 위해 충신을 버리실 심산이시옵니까?! 호 장군도 내치고 소신과 소신의 아들까지 내친 뒤에 전하는 누구를 곁에 두려 하시옵니까? 설옥환이옵니까? 병부상서이옵니까? 간신들의 감언에 귀를 기울이셔서는 혼군이 될 뿐이란 걸 어찌 모르시나이까!”
“대장군!”
승헌을 모독하는 발언에 무관들이 화들짝 놀라 뒤늦게 백청을 제지하려 했으나 이미 엎어진 물이었다. 승헌은 웃음기가 싹 가신 얼굴로 나직하게 물었다.
“백청. 내가 그대까지 죽여 버려야겠나?”
주변의 공기마저 얼어붙는 듯한 사나운 어조에 옥환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무심코 잊고는 하나 승헌은 수백, 수천의 목을 베고 제 주인의 피를 뒤집어쓰며 왕이 된 자였다. 그가 걸어온 길은 피 칠갑을 한 시체의 길이다. 옥환은 유난히 무거워진 공기가 제 폐부를 짓누르는 것 같다고 느끼며 바짝 긴장했다.
하나 백청은 그런 승헌의 태도에 이루 말로 할 수 없는 크나큰 배신감을 느꼈다. 본래의 주군이던 선왕을 저버리고 그를 왕위에 올렸건만, 돌아온 것은 이런 널리고 널린 잡배보다 못한 취급이란 말인가. 저뿐만 아니라 제 아들 또한 그를 위해 몇 번이고 목숨을 내놓았는데, 변명할 기회조차 주지 않고 유배라니.
원통했다. 억울하고 또 억울했다. 그는 핏발이 선 눈으로 눈앞에 놓인 현실을 응시했다. 마음 같아서는 병부상서고 옥환이고 싹 다 베어 버리고 싶은 마음밖에 들지 않았다. 하나 여기서 소란을 피운다고 해봤자 승헌의 신용만 잃을 뿐이다. 그는 필사적으로 분을 삭였다. 부득부득 이가 갈렸으나 그럼에도 꾹 참았다. 참아야만 했다. 하나뿐인 아들을 위해서라도.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
잠시 백청을 시험하듯 시간을 끌던 승헌이 마침내 그렇게 말하고는 일어섰다. 팽팽했던 긴장감이 겨우 해소되는 순간이었다. 생각보다 싱겁게 끝난 상황에 옥환은 다소 당황했으나, 승헌은 더 이상 여지를 주지 않겠다는 듯 빠르게 정전을 나가 버렸다.
‘이래선 안 되는데. 백청이 더 날뛰어야만 했다.’
옥환은 조바심을 내며 백청을 쳐다보았다가 일순 멈칫했다. 그의 표정이 흡사 귀신과도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제야 옥환은 깨달았다. 백청은 단념한 것도, 받아들인 것도 아니다. 그저 승헌과의 직접적인 대립을 피했을 뿐이다.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일이 일어난다면 필시 오늘 밤이다.’
내일이면 승헌이 말한 대로 이번 일의 관련자들에게 처벌이 내려질 것이다. 한번 유배를 떠나게 되면 무엇을 해도 되돌릴 수 없다. 생각에 잠겨 정전의 문턱을 넘던 옥환은 문득 방금 보았던 백청의 표정이 떠올라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가 벌이려는 일은…… 생각보다 큰일일 수도 있었다. 일전에만 해도 병사들을 끌고 와 자신을 잡아갔던 이가 아니던가. 그의 오만불손함과 앞뒤 가리지 않는 직선적인 성정은 사고를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병부상서도 병부상서지만 저 또한 몸을 사려야 할지도 모른다.
‘계평에게 처소를 잘 지키라고 해야겠군.’
아마도 오늘은 기나긴 하루가 될 것 같았다.
***
그믐. 뭐든 일을 벌이기에는 최적의 때였다. 백청은 일렁이는 불꽃을 바라본 채 서 있었다. 겉으로는 냉정을 가장하고 있으나 지금 그의 속은 저 불꽃처럼 뜨겁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오늘 조회에서 있었던 일은 그를 그 어느 때보다 분노하게 만들었다. 그깟 병부상서의 아들을 좀 곤란하게 만들었다고 해서, 문무백관이 보는 앞에서 제게 그런 수치를 안겨 주다니. 심지어 고작 병부상서 따위가 제게 바락바락 대들고 눈에 핏발을 세우는 모습을 보고도 아무도 막아서지 않았다. 거기다, 뭐라고? 백씨 가문의 뒤를 이을 제 아들을 유배 보낸다고?
사실상 패배의 책임이 병부상서의 아들에게 있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 아니던가. 천구족이든 백만의 벽국군이든 저와 백고라면 필시 다 무찌르고도 남았을 것이다. 한데 병부상서와 그 아들놈은 감히 그들의 능력 부족을 충신인 자신들에게 덮어씌우려 했다. 더 참을 수 없는 사실은 그들의 뒤에 설옥환이 있다는 것이었다.
설옥환. 그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첩자 놈은 제 죽마고우였던 호진의 아버지를 죽인 것도 모자라 이제는 제 아들까지 사지에 몰아넣으려 하고 있었다. 백청은 걷잡을 수 없이 치솟는 노기에 빠드득 이를 갈았다.
자신이 길천 원정의 패배를 변 장군에게 들어 미리 알고 있었고, 그것을 이용해 병부상서 부자를 없애려 했다는 사실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는 살면서 오늘과 같은 치욕을 단 한 번도 겪은 적이 없었다. 백청 자신에게 있어 그는 피해자였고, 모함을 당한 충신이었다.
물론 자신을 외면한 승헌에게도 배신감을 느꼈으나, 그는 고지식한 인물이었다. 승헌을 원망은 할망정, 책망을 하지는 않았다. 이 모든 일은 승헌의 탓이 아니었다. 그를 잘못된 길로 들어서게 만든 간신들이 문제다. 그들의 거짓이 드러나면 승헌 또한 마음을 돌릴 것이다. 그리하면 자신의 이 치욕도 씻을 수 있고, 아들도 되찾을 수 있었다.
다행히도 아직까지는 자신을 지지하고 따라주는 이들이 많았다. 그들의 협력을 얻는다면 이 난관을 타개하는 것 또한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대장군. 데려왔습니다.”
이윽고 수하들이 그의 앞에 누군가를 데리고 왔다. 그들에 손에 의해 끌려온 것은 바로 피투성이가 된 병부상서였다. 저항이 심해서 조금 손을 봐 줬다는 수하의 설명을 들으며 백청은 병부상서 앞으로 다가갔다. 병부상서는 간신히 고개를 들어 백청을 쳐다보았다.
“이것은 반역입니다, 대장군……!”
“반역? 아니, 이것은 애국이다. 네놈과 같은 간신배들을 몰아내 전하를 제정신으로 돌려놓고 내 나라를 지키려는 것이지.”
백청의 뻔뻔한 대답에 병부상서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그는 제 목숨이 위협을 받고 있는 와중에도 이렇게 되받아쳤다.
“이, 이놈, 백청! 전하께서는 그래도 너를 충신으로 여기셨거늘……. 오늘과 같은 결정을 내리신 것은 백고를 희생해서라도 너를 살리겠다는 뜻임을 정녕 모른단 말이더냐?”
“물론 전하께선 훌륭하신 분이시지. 하나 이번 일은 그분의 실수다. 내가 무관들 사이에서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지를 간과하신 게야. 나는 이 나라의 대장군이다. 통수권은 내게 있어. 하니 병사들을 이용해 너를 이리 만들 수도 있는 것이지.”
“이런 금수만도 못한 놈……! 전하의 성은을 이런 식으로 갚다니…….”
백청은 검의 손잡이로 병부상서의 머리를 냅다 후려쳤다. 병부상서의 머리에서 피가 후두둑 떨어졌으나 백청은 아랑곳하지 않고 물었다.
“네놈과 설옥환이 이번 일을 작당한 것을 안다. 필시 너와 그놈이 주고받은 서찰이 있겠지. 어디 있느냐.”
“그런 건 없다. 이미 네 아들이 자백까지 한 마당에 아직도 네놈이 무고하다 주장할 셈이더냐?”
“입 닥쳐라! 네 자식놈의 무능함이나 원망할 것이지, 감히 나를 걸고넘어져? 죽고 싶지 않거든 바른대로 대거라. 설옥환이 네게 지시한 바가 있을 터!”
“어리석은 놈. 어찌하여 태사를 의심하느냐. 그저 너희들이 감추려던 진실이 드러난 것이 다인데.”
“웃기지 마라! 그놈이 뱀처럼 간사한 혀로 매번 내 아들을 이용하고 있었다는 걸 모를 성싶더냐! 이번에도 필시 그놈이 나를 들먹이면서 내 아들을 속인 게 분명해!”
“…….”
확실히 옥환이 제게 준 정보를 생각해보면 그의 충심에 의심이 가는 것은 사실이었다. 어쩌면 저와 백청은 물론이고 이 나라 자체가 그자의 손에서 놀아나는 것일 수도 있었다. 하나 병부상서는 후회하지 않았다. 다른 것은 다 견딜 수 있었으나 아들이 불구가 된 것도 모자라 고금에 다시 없을 죄인이 되어 후대에까지 욕을 먹는 것은 참을 수가 없었다. 아들이 눈앞에서 병사들에게 끌려가던 그때, 그는 마귀의 손이라도 붙잡겠다고 결심했었다.
어차피 옥환과는 이미 한 배를 탔다. 그가 벽국의 첩자라 해도 그를 고발할 수는 없었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한 가지는, 제 복수심으로 인해 승헌이 고생을 하게 되었다는 사실뿐이었다.
병부상서는 눈을 질끈 감았다 뜨고는 말했다.
“죽여라. 나는 더 이상 두려울 것도, 잃을 것도 없다.”
“하, 정녕 그렇더냐? 정녕 잃을 것이 없어?”
“내 아들을 빌미로 협박할 생각이라면 관두거라. 내 아들은 아직 궁 안에 잡혀 있다. 그리고 곧 유배를 가겠지. 아무리 너라 해도 건드릴 수가 없을 테니 차라리 갇혀 있어 다행이구나.”
한데 그때 백청이 기분 나쁜 미소를 띤 채 검을 꺼내 병부상서에게 겨누었다. 병부상서는 죽음을 각오하고는 그것을 담담히 바라보았으나 이내 백청이 내뱉은 충격적인 말에 창백하게 질렸다.
“너를 죽여 그 수급을 네 아들에게 보낸다면, 네 아들의 정신이 온전할 것 같으냐?”
“……뭐……?! 이런 개 같은 놈아! 금수만도 못하다고 말했지만 정말이었구나!”
병부상서가 고래고래 악을 썼으나 백청은 콧방귀를 뀌고는 으름장을 놓았다.
“네 아들을 구하려 나라를 어지럽힌 너도 남 말은 못 할 것이다. 선택해라. 이미 네가 설옥환과 만났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때 함께 너를 찾아왔던 문관들의 집에도 내 수하들을 보냈지. 네가 아니더라도 그놈들을 털면 이번 일에 설옥환이 관련되어 있다는 건 자연히 알게 될 것이다. 하니 괜한 일로 목숨을 잃고 싶지 않거든 순순히 자백해라. 그것이 네놈의 하찮은 목숨줄을 조금이라도 늘리는 법이니까.”
“고작 그런 것으로 이번 일이 뒤집힐 것 같으냐?! 네놈이 아무리 그리해도 바뀌는 건 없다!”
“바뀌는 게 있을지 없을지는 해보면 알겠지!”
백청은 그렇게 외치며 검을 횡으로 크게 휘둘렀다. 끔찍한 비명과 함께 병부상서가 제 눈을 감싸 쥐었다. 눈을 가린 손가락 사이로 피가 흐르고 있었다.
“다음엔 정말로 네놈의 목을 베겠다. 하니 어서 이실직고하거라! 이번 일은 네놈들이 짠 계략이 아니더냐!”
“네놈이 내 사지를 절단 낸다 해도 나는 네가 원하는 말은 해 주지 않을 것이다! 날 어서 죽여라!”
“네가 그런다고 정 방법이 없을 것 같으냐?”
백청의 협박에 병부상서는 분노보다도 더 큰 절망을 느꼈다. 아무리 일이 이렇게 됐다지만 명색이 무장들의 우두머리인 자가 이런 식으로 모반을 일으키다니. 그는 마지막 남은 충심으로 백청을 꾸짖었다.
“너는 이 나라의 대장군이 아니더냐! 이젠 대장군으로서의 긍지도 버린 것이냐? 너는 이 나라의 오점이다! 너 따위가 대장군인 서국이 앞으로 어찌 될지 눈앞이 캄캄하구나!”
“네 이놈…….”
병부상서의 발언은 그야말로 백청의 역린을 건드렸다. 게다가 병부상서는 생각 외로 완고했고 백청은 그리 참을성이 좋은 편이 아니었다. 말한 대로 병부상서를 죽이고 그 목을 그의 아들에게 보내는 것도 복수이자 경고가 될 테니 그리 나쁜 선택은 아니었다. 애초에 백청은 병부상서가 솔직히 말을 한다 해도 그를 살려주고 싶은 생각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마음을 정한 백청이 이내 병부상서의 코앞에 칼을 겨누었다. 눈앞은 보이지 않았으나 병부상서는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살기에 본인의 죽음을 직감했다.
‘아들아. 부디 무사하거라.’
병부상서는 마지막으로 그것을 빌었다. 이윽고 백청이 칼을 높이 쳐들고 외쳤다.
“죽어라!”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칼부림에 지면에 피가 흩뿌려졌다. 털썩, 하는 소리와 함께 병부상서의 몸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렇게 병부상서는 너무도 허무하게 죽고 말았다. 하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병부상서의 시신 앞에서 백청은 생생한 피 냄새를 깊이 들이마시며 생각했다.
오늘은 무척 기나긴 밤이 될 것 같다고.
***
오늘도 여지없이 옥환의 앞에는 황금빛 들판이 길게 펼쳐져 있었다. 하나 꿈속의 자신이 보는 것은 언제나 멀리 보이는 도시 쪽이었다. 옥환은 가야 했다. 꿈속의 그도 그것을 알고 있었으나 그는 항상 망설였다. 그의 걸음은 추를 매단 것처럼 무거웠고, 그의 마음은 천년 묵은 암석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저 하염없이, 도시를 바라볼 뿐. 비탄에 잠겨.
‘……비탄?’
옥환이 새삼 꿈속의 자신이 느끼고 있는 감정에 대해 생각하는 것과 동시에 그는 잠에서 깨었다. 항상 생생한 꿈인 탓에 헤어 나오는 게 쉽지 않았다. 옥환은 습관처럼 꿈의 잔상을 털어 내기 위해 창문을 열었다. 잠시 차디찬 겨울바람을 쐬던 옥환은 문득 바깥 경치에서 위화감을 느꼈다. 벌써 자시가 훨씬 넘은 시각일 텐데, 궁 안 곳곳에 불빛이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무언가 좋지 않은 낌새를 느낀 옥환이 자리에서 일어서 처소 밖으로 나온 순간, 문 앞에 있던 두 명의 병사가 놀라서 옥환을 바라보았다. 하나 놀라기는 옥환 쪽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일반 병사도 아니고 무려 금군이었다. 왕의 친위대인 금군이 왜 이런 야심한 시각에 제 처소를 지키고 있단 말인가?
“……자네들은 어찌 여기 있는가?”
옥환이 인상을 찌푸린 채 묻자 그들이 대답을 망설였다. 금군이 움직였다면 필시 승헌의 명이었을 것이다. 하면 그 이유는 둘 중 하나였다. 저를 의심해서 감시하기 위해 보냈거나, 혹은…….
‘나를 지키기 위해 보냈거나.’
만일 후자라면 예상한 대로 백청이 일을 친 것이 틀림없었다. 상황을 확인해야 했다.
“전하께 무슨 일이 생겼나? 저 불빛들은 다 무엇이고. 자네들이 아는 대로 고해 주게.”
“……저희는 그저 전하의 지시를 받았을 뿐입니다, 태사. 통촉해 주십시오.”
금군은 몹시도 폐쇄적이고 충성스러운 조직이었다. 그것을 잘 아는 옥환은 그들에게서 정보를 캐내는 것을 관두고 승헌을 직접 만나 보기로 했다. 한데 옥환이 그대로 처소를 나서려 하자 당황한 금군들이 그런 옥환의 앞을 막아섰다.
“태사. 처소 안에 계십시오. 태사를 지키라는 명이셨습니다.”
“나를 대체 왜? 무슨 일이 있어서? 하나 자네들에겐 물어도 답을 안 해 줄 테니 내가 직접 전하께 묻는 수밖에 없지 않나. 게다가 여긴 궁 안이네. 어느 아둔한 자가 궁 안에 있는 나를 해치러 온단 말인가?”
“…….”
금군들은 적잖이 당황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옥환은 그 융통성 없는 모습에 고개를 내저으며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금군들 역시 큰일 났다는 표정으로 그런 옥환의 뒤를 졸졸 쫓아왔다. 승헌의 침전에 불이 밝혀져 있는 것을 본 옥환은 그 앞으로 주저 없이 걸어갔다. 옥환을 본 환관 역시 몹시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태, 태사.”
“늦은 시간에 찾아와 미안하게 되었으나 나는 지금 전하를 뵈어야겠네. 깨어 계신 듯하니 고해 주게.”
“태사…… 태사의 말씀대로 지금은 매우 늦은 시간이고…… 이리 전하를 찾아뵙는 것은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니 부디 재고해 주십시오…….”
“일단 고해 주게. 전하께서 보지 않겠다 하시면 곧바로 물러갈 터이니.”
환관 역시 조회나 어전회의 때의 옥환을 지켜보며 그의 고집이 웬만한 쇠심줄 저리 가라 하는 것을 잘 아는 터라, 하는 수 없이 벌을 받을 각오를 하고 승헌에게 옥환이 찾아왔음을 전했다. 다행히 안으로 들이라는 대답이 돌아왔고, 문이 열리자 옥환은 냉큼 침전에 발을 들였다.
형부상서와 함께 있던 승헌은 옥환을 보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전하. 이런 시간에 찾아뵈어 망극하옵니다. 벌을 주신다면 달게 받겠으나, 화급한 사안인 듯하여 부득불 찾아뵈었으니 용서하시옵소서.”
“용서하란 것치곤 상당히 뻔뻔한데.”
승헌은 그렇게 투덜거리면서 옥환의 뒤에 서 있는 금군 병사들에게 눈길을 주었다. 그들은 마치 채찍질이라도 당한 것처럼 몸을 움찔하며 고개를 푹 수그렸다. 옥환 또한 그 모습을 보고는 입을 열었다.
“소신이 억지로 오겠다 한 것이옵니다. 벌을 주시려거든 소신에게만 주시옵소서.”
“거 봐. 뻔뻔하잖아. 뭐…… 됐어. 차라리 곁에 두는 게 나도 안심이 될 테니까.”
옥환이 찾아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반쯤 단념한 상태여서인지 승헌의 태도는 꽤 막힘이 없었다. 행여 두 사람의 싸움에 휘말릴까 걱정했던 형부상서는 그제야 제 가슴을 쓸어내렸다. 옥환은 뒤늦게 형부상서와 눈으로 인사를 나누었다.
이윽고 승헌은 궁인들을 불러 지시했다.
“태사를 잘 모시도록. 오늘 밤은 과인의 침전에서 머물게 할 것이다.”
“예, 전하.”
얼떨결에 궁인들에게 양팔을 잡힌 옥환이 그제야 상황 파악을 하고는 다급하게 말했다.
“잠깐, 전하. 어찌 된 영문인지 소신에게도 말씀을 해 주셔야…….”
“그댄 몰라도 돼.”
승헌이 싱긋 웃으며 하는 말에 옥환은 자신이 속았다는 걸 깨달았으나 도저히 저항할 방법이 없었다. 적어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알아 둬야 하건만. 한데 그때, 불행인지 다행인지 금군 병사 하나가 급하게 승헌을 찾아왔다.
“전하, 급보이옵니다!”
승헌은 옥환을 슬쩍 보더니 궁인들에게 그를 데려가라는 듯 고갯짓을 했다. 알아서 가겠다며 궁인들의 손을 뿌리친 옥환은 승헌이 보이지 않는 위치까지 오자 일부러 굼뜨게 걸었다. 다행히 상황이 상황인 탓인지 병사의 목소리는 옥환이 들을 수 있을 만큼 컸다.
“대장군이 병사들을 데리고 병부상서의 집을 점거하고 있나이다. 또한 병부상서는 이미 죽은 것을 확인하였사옵니다. 아무래도 대장군이 저지른 일 같사옵니다.”
‘병부상서가 죽어……?’
가히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옥환이 버티고 서 있자 궁인들이 발을 동동 굴렀으나, 옥환은 조용히 하라는 듯 입술에 검지를 대고는 병사의 보고에 귀를 기울였다.
“다른 문관들은?”
“중서령은 구했으나 두 명은 죽었고 남은 하나는 대장군 측에서 인질로 잡고 있사옵니다. 대장군이 주장하기를 이번 일은 모두…… 태사께서 종용하신 것이라고. 이미 그 증거도 확보했다고 하옵니다.”
병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쾅’ 하는 소리가 들렸다. 승헌이 탁자를 내리치는 소리였다. 그는 싸늘하게 가라앉은 어조로 으르렁거렸다.
“백청이 그렇게 나온다면 이쪽도 더는 수가 없겠지. 형부상서. 아까 지시한 대로 진행해.”
“예, 예에, 전하. 하면 소신은 먼저 물러나 보겠나이다.”
형부상서가 물러나고, 승헌은 금군 병사에게도 백청을 잘 감시하고 있으라는 명령을 내린 뒤 돌려보냈다. 백청이 사사로이 군을 움직이다니. 이것은 명백한 역모였다. 혹 백청에게 그럴 의도가 없다 해도, 멋대로 문관들을 숙청하고 승헌의 지시에 반한 것은 죽어 마땅한 대죄였다. 옥환이 원하던 대로 서국이 흔들릴 만한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하나 옥환은 벽 너머에 있을 승헌을 생각했다. 그는 그때처럼 또 기운 없는 얼굴을 하고 있을까. 만약에 지금 위로를 하러 가면, 나중에 이 모든 일이 자신이 준비한 계략이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더욱 화를 내게 될까? 그렇게 되면…….
잠시 주저하던 옥환은 결국 승헌에게서 돌아섰다. 위로라니, 주제넘은 짓이었다. 승헌을 더 괴롭게 만들 일밖에 되지 않는다.
옥환은 궁인들이 시키는 대로 얌전히 침상에 가 앉았으나, 결코 잠자리에 들 생각은 없었다. 오늘 밤의 일은 옥환도 끝까지 지켜봐야 했다.
‘설마하니 백청이 이렇게까지 망가질 줄은 몰랐는데. 그만큼 견승헌을 향한 믿음이 두터웠다는 것이고, 또 내 생각보다 더 자존심이 강했다는 것이겠지. 덕택에 일이 쉬워졌다.’
호진을 쫓아낸 것도 그렇고, 벽국 출신인 자신을 등용한 일 등 그가 불만을 품을 일이 많기는 했다. 더구나 이번 일에 자신이 관여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승헌이 내린 결정은 자신을 감싸주기 위한 것이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었다.
결국엔 제 권위와 명성에 취해 주변을 둘러보지 못하게 된 옹졸한 노장의 말로였다. 아마 호진이나 백고가 있었다면 그가 어긋나지 않도록 도왔을지도 모르겠으나, 그렇지 못한 것도 운명이라면 운명이리라. 무고한 어린아이를 죽여 놓고 아무 벌도 받지 않는다면 그것이 더 문제였겠지.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옥환은 얼마쯤 시간이 흐르자 밖에서 들리는 인기척에 현실로 돌아왔다. 그는 무슨 일인지 알아보기 위해 다시금 침상에서 나와 말소리가 들릴 정도의 거리로 다가갔다.
“전하. 모든 준비가 끝났사옵니다. 명을 내려 주시면 대장군에게 항복의 뜻을 받아오겠나이다.”
“……과인이 직접 가도록 하지.”
“예? 하, 하오나…….”
“다른 누구도 아닌 대장군이 벌인 일이야. 과인이 수습해야 마땅하지 않나.”
승헌이 직접 간다는 말에 옥환은 저도 모르게 승헌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옥환의 등장에 승헌이 단박에 인상을 썼다.
“옥환. 들어가 있으라고 말했을 텐데. 다 들었겠지만 그대 또한 대장군의 표적이야.”
“궁 안에 있는데 무엇이 위험하겠습니까. 그보다 전하. 가지 마십시오. 전하께서 가실 필요가 없는 일입니다.”
옥환의 제지에 승헌은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한숨을 쉬었다.
“또 시작이군. 알아도 모른 척 좀 할 수 없나? 난 항상 그대 때문에 더 피곤해.”
“전하야말로 군주면 군주답게 저를 이용할 때는 하십시오. 그렇게 쭉 감싸고 돈다고 무관들이 저를 덜 미워하기를 합니까, 제가 편안하기를 합니까? 모르고 있으면 몰라도 알게 된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으니 제 말을 들어보고 판단해 주십시오.”
옥환은 나름 절박하고 간절했다. 신하들 앞에서는 자신을 소신이라 칭하는 그였으나, 그것을 잊을 만큼 급했다. 하나 승헌은 옥환의 말을 귀 기울여 들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도대체 그대의 그 요망한 입을 어찌해야 할까.”
“요망한지 현명한지는 들어 보시면 알 것 아닙니까.”
또다시 시작된 승헌과 옥환의 외줄타기 같은 실랑이에 당사자 둘을 뺀 모든 이가 바짝 긴장했다. 옥환의 정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말투는 항상 지켜보는 이들을 떨게 만들었다. 승헌은 언제든 옥환의 목을 베어 버리라고 할 수 있는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승헌은 짜증이 서린 얼굴로 일어서더니, 옥환에게 화를 내는 대신 옥환의 어깨를 턱 하니 붙잡고는 그를 침실로 밀어 넣었다. 옥환이 힘을 주어 버티려 해 봤으나 모두 소용없는 발버둥일 뿐이었다.
“가끔은 내 말도 좀 들을 줄 알아 봐.”
“전하, 가지 마십시오. 대장군은 지금 제정신이 아닙니다. 전하께 무슨 해코지를 할지 모르지 않습니까.”
“그럴 일 없어.”
“무슨 자신으로 그런 말을 하십니까? 전하가 아무리 대단한 무인이기로서니 허점은 누구에게나 있는 법입니다. 전하께서는 그저 어린아이처럼 제 말이면 뭐든 들어주고 싶지 않으신 건 아닙니까?”
“내 난생 그렇게 어이없는 말은 처음 들어보는군. 차라리 내가 걱정되면 걱정이 된다고 말해. 그게 그나마 흔들릴 것 같으니까.”
승헌은 그렇게 투덜거리고는 옥환을 결국 눌러 앉혔다. 그러고는 미련도 없이 휙 돌아서자, 그 뒷모습을 허탈하게 바라보던 옥환이 오기로 이렇게 말했다.
“전하 걱정 같은 건 안 합니다.”
그 말에 승헌이 우뚝 멈춰 섰다. 그의 넓은 어깨가 잠시 움찔한 것 같기도 했다. 이윽고 그는 짧게 대꾸했다.
“……그래, 나도 알아.”
그 말을 끝으로 승헌은 결국 백청을 막으러 떠나고 말았다. 홀로 남은 옥환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러려던 것이 아닌데. 공연히 뭐가 얹힌 것처럼 속이 답답했다. 그야 견승헌을 가게 두어도 되는 일이긴 했다. 아니, 그가 다쳐서 돌아오기라도 하면 벽국이 서국을 칠 절호의 기회가 생기게 된다. 한데 왜.
‘나는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지.’
차라리 아예 서국을 멸망시킬 속셈으로 행동하든가, 그게 아니라면…….
옥환은 고개를 휘저어 후자의 선택지를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벽국을 배신하는 일 따위는 있을 수 없었다. 서국을 멸망시켜야 한다. 그것을 위해 움직여야 한다. 양심의 가책도, 하잘것없는 정 따위도 모두 털어 내야만 했다.
‘나 같은 게 양심의 가책이라니, 주제도 모르고.’
그럼에도 옥환은, 승헌이 돌아올 때까지 문 앞을 수도 없이 서성였다.
***
백청이 점거한 병부상서의 집. 병사 하나가 다급히 백청의 앞으로 달려왔다.
“대장군! 전하께서…… 행차하셨습니다!”
“전하께서?”
“대장군과 독대를 하고 싶으시다며 모든 병력을 물리셨습니다.”
“참으로 교활한 분이시군.”
피 묻은 검을 닦고 있던 백청이 피식 웃고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발밑에는 죽은 병부상서의 시신이 목이 잘린 채 놓여 있었다. 결국 상황을 반전시킬 만한 증거는 찾지 못했으나, 백청은 문관 하나를 사로잡은 상태였다. 그는 옥환이 병부상서를 찾아갔을 때 함께했던 자로, 옥환이 저를 고발하도록 병부상서를 부추겼다는 증언을 해줄 인물이었다. 이자의 증언을 들으면 전하도 필시 마음을 바꿔 주시리라. 백청은 그렇게 생각했으나, 그렇다고 승헌을 아주 믿고 있는 건 아니었다. 한 번 배신 당했는데 두 번은 당하지 말란 법이 있던가.
이미 이 근방은 금군에게 포위당한 상태였다. 승헌은 진작부터 자신이 이리 나올 것을 알았는지 모든 병력을 대기시켜 놓았고 그 덕에 대처 또한 빨랐다. 승헌이 여차하면 저를 죽일 생각이라는 것을 백청 또한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하나 어차피 가문이 망하고 아들이 유배를 가게 된다면 차라리 한 번은 발악이라도 해 보는 게 낫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었다. 병사의 수로는 밀릴지 모르나, 자신을 따르는 무장들의 충의는 승헌이 아닌 저를 향하고 있었으니까. 저를 죽이면 무장들이 승헌을 저버릴 수도 있었다. 승헌도 그것을 알기에 독대를 운운하며 병력을 물리고 단둘이 만나고자 한 것이 아니겠는가.
승헌이 준비한 함정임이 분명했으나, 명분을 잃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자신은 무고하다. 저를 따르는 이들은 그것을 믿고 있다. 승헌과의 만남을 피하면 그 정당성이 사라지게 될 것이었다. 백청에게도 선택의 여지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이윽고 승헌과 마주하기 위해 백청이 밖으로 나왔다. 승헌이 설득을 하든 겁박을 하든 쉬이 물러날 생각이 없었던 그였으나, 승헌 대신 제 앞에 서 있는 인물을 본 순간 그는 얼어붙고 말았다.
“……아버지.”
저를 한없이 처량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는 이는 다름 아닌 그의 아들 백고였다. 하나 승헌이 제 아들을 내세울 수도 있다는 가능성 또한 충분히 생각했다. 생각했음에도 동요가 일었으나, 백청은 간신히 감정을 억누를 수 있었다. 물론 백고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는 금방이라도 통곡을 할 것 같은 얼굴로 제 아비를 응시했다. 아비가 저 때문에 이렇게 됐다고 생각하니 모든 일에 후회만 들었다.
“아버지…… 송구합니다. 이 불효막심한 자식 때문에…….”
“……설옥환이 네게 그러라고 시켰더냐?”
자신과 달리 냉철한 백청의 물음에 백고가 당황해서 반문했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네가 변 장군과 같은 증언을 했다지. 설옥환이 그러더냐? 나를 구하려면 네가 죄를 뒤집어쓰는 수밖에 없다고.”
백고는 상당히 충격을 받은 얼굴로 백청을 응시했다. 설마 이 모든 일이 옥환을 향한 제 아비의 감정 때문에 벌어졌단 말인가? 호진이 쫓겨난 이후로 백청은 옥환을 대놓고 미워하게 되었고, 옥환을 향한 승헌의 총애가 깊어질수록 열등감을 느끼는 것 같기도 하였다. 하나 단순히 정치적인 대립으로 인한 반감과 죽은 호진의 아버지 때문에 느끼는 해묵은 미련이 전부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병부상서와 제 어머니 사이의 일은 추호도 모르는 그는 경악해서 소리쳤다.
“아버지…… 설마 태사를 의심하셔서 이런 일을 벌이셨습니까? 태사와는 무관한 일입니다! 변 장군께는 제가 도와 달라 한 것입니다. 혹 변 장군이 조사를 받게 되면 행여 아버지에 대한 얘기가 나올까 봐, 그럴 바엔 제가 먼저 손을 쓰는 게 나을 것 같아 그리했습니다!”
“거짓말! 옥에 갇혀 있던 네가 무슨 수로 변 장군과 말을 맞춘다는 말이냐? 사실대로 고하지 못하겠느냐! 네놈이 그 여우 같은 놈에게 마음을 주었다는 걸 내 정녕 모를 성싶더냐?”
“아, 아버지!”
두 사람의 대화는 분명 승헌도 듣고 있을 터였다. 행여 백청이 더 당혹스러운 얘기를 할까 봐 걱정이 된 백고는 하는 수 없이 사실을 털어놓았다.
“아버지. 이번 일은 정말 태사와 아무런 관련도 없습니다……. 실은…… 제가 변 장군에게 먼저 제안을 한 것은 아니고, 변 장군 쪽에서 제게 먼저 접촉해 왔습니다. 아버지를 구하려면 그 수밖에 없다고 하여……. 어차피 저처럼 모자란 놈이 가문을 잇는 것보다는 아버지께서 오래오래 건사하시는 쪽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변 장군 또한 아버지의 힘이 되어주시는 분이 아닙니까…….”
백고의 고백에 백청은 기가 차서 헛웃음을 흘렸다. 이리도 멍청한 놈이 제 하나뿐인 자식이라는 게, 가문을 이끌어 갈 주인이 될 녀석이라는 게 한탄스러울 따름이었다. 백청은 이제야 알았다. 죽기 직전에도 눈에 독기를 품고 있던 병부상서와 백고는 다르다는 것을. 그의 아들은, 한없이 유약했던 제 어미를 닮았을 뿐이었다. 하나 그렇기에 더더욱, 백청은 자신의 아들과 가문을 지켜야만 했다.
“너는 변 장군이 너를 희생양으로 삼으려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더냐?”
“아, 안 한 것은 아닙니다만…… 어차피 아버지를 구할 방법이 이뿐이라면, 변 장군에게도 빚을 지게 해서 나쁠 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변 장군을 도왔으니 변 장군도 나중에는 아버지를 돕지 않을까 하고…….”
백청은 머리를 짚었다. 진실을 알게 되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옥환이 무고하다는 것이 밝혀진 것은 아니었다. 옥환이 병부상서를 앞세워 저를 궁지에 몬 것만큼은 사실이다. 그에 대한 증언도 확보했다. 백청은 절대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전하를 뵈어야겠다. 전하는 어디 계시느냐.”
백청이 앞으로 나아가려 하자 백고가 얼른 그의 팔을 붙잡고 매달렸다.
“아, 아버지. 지금이라도 전하께 비십시오. 이 이상 더 나가시면 정말 돌이킬 수 없게 됩니다.”
“이미 너무 늦었다. 여기서 판을 뒤집지 않으면 우리는 어차피 대역죄인으로 남게 돼.”
“아버지가 계시면 가문은 무사할 것입니다! 저 하나 유배를 간다고 해서 큰일이 날 리 없지 않습니까? 친척을 입양해서 대를 잇게 하면…….”
“허튼소리! 우리 가문이 어떤 가문인데! 이 가문은 네가 이어야 한다. 아무리 네가 모자라고 아둔한 놈이라고 해도.”
백고의 설득에 백청이 저를 붙잡은 그를 매몰차게 쳐내며 소리쳤다. 하나 백고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백청을 붙들었다.
“아버지께서 병부상서를 죽였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전하께서 그것을 용서하실 것이라고 보십니까? 아버지가 무슨 수로 태사를 모함한들, 전하께서는 믿어 주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놈이 연관돼있다는 증언을 얻었다! 전하께서 현명한 군주라면 반드시…….”
“전하께선 태사를 진심으로 총애하고 계십니다! 만약, 아주 만약에 태사께서 정말로 이번 일을 뒤에서 조종했다고 해도…… 전하는 태사를 포기하지 않으실 겁니다……. 차라리 아버지를 포기하시겠죠.”
백청은 순간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 뭐? 전하께서 누구를 포기해? 내가 아니라, 그 벽국의 첩자 놈을 택하실 거라고?
그럴 리가 없다. 절대. 이 나라는 제 조부가 세웠고, 승헌은 자신이 왕위에 올렸다. 자신과 제 가문은 승헌의 은인이나 마찬가지란 뜻이었다. 하나 만일 고작 첩 따위를 위해 저를 배신하려 든다면 결국 거기까지인 주군일 뿐이었다. 선왕을 그렇게 했듯, 다시 바꾸면 그만이다. 승헌은 고작 몇 년 된 왕이었지만, 제 가문은 서국이 세워질 때부터 나라에 뿌리를 내린 유서 깊은 가문이었다. 원한다면 왕을 바꾸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했다.
“비켜라.”
“아버지……!”
“비키라고 했을 텐데!”
백청이 백고를 밀어내려는데, 그보다 앞서 백고가 백청에게 검을 겨누었다. 백청은 일순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본 것처럼 우뚝 멈춰 섰다.
“네가 감히…… 나는 네 아비다! 너를 낳아 준 부모란 말이다!”
“아, 아버지. 검을 내려놓으십시오. 그 검을 들고 전하를 만나러 가시려는 것입니까? 전하를…… 어찌하시려는 것입니까?”
백청은 코웃음을 쳤다. 승헌을 어찌하다니, 아무리 여차하면 왕을 바꿀 수 있다고는 생각했다지만 승헌은 자신의 주군이었다. 제 뜻을 받아들여 주지 않는다고 해서 무작정 해코지를 할 수는 없는 일이지 않은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이냐? 내가 전하께 무슨 짓을 한다고.”
“아버지의 표정이 어땠는지 아십니까?! 아무리 제가 성에 차지 않는 아들이라고 해도, 아버지의 자식입니다. 아버지의 속내를 모를 것 같으십니까?”
“…….”
백청은 당황한 듯 얼른 정색을 했다. 백고는 한 마디 한 마디 할 때마다 고통스러운 듯 눈을 찌푸리면서도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아버지. 이런 상황에서는 전하도 아버지의 말을 들어주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리 아끼시는 가문의 명맥을 이어야 하지 않습니까……. 저든 아버지든, 누구 하나는 남아 있어야 한단 말입니다.”
순간 백청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백고가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전하께서 그리 하라시더냐? 네 손으로 나를 죽여서, 너라도 역적의 죄를 씻어야 한다고?”
“……만일 아버지를 막아야 한다면, 제가 직접 하는 게 모두를 위해서 낫다고 하셨습니다.”
“하하…… 하하하하하!”
백청은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그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에 아들인 백고 마저 움찔했다. 그때, 백청이 제게 겨누어진 백고의 칼날을 힘주어 움켜쥐었다. 백청의 손에서 피가 튀었다.
“아, 아버지!”
“그래! 네 말이 맞다! 우리 중 누군가는 죽어야겠지……!”
“아버지, 그게 무슨…….”
백청은 백고가 동요한 틈을 타 칼날을 쥔 채 백고를 밀어내 버리고는 앞으로 걸어 나가려 했다. 그리고 그때, 어디선가 날아온 수많은 화살이 일제히 백청을 노리고 들어왔다.
“아버지……!”
백청은 놀라운 몸놀림으로 날아드는 화살을 검으로 쳐냈으나, 아무리 그라고 해도 모든 화살을 다 피할 수는 없었다. 그의 어깨와 팔, 다리에 화살이 박혔다. 하나 그는 멈추지 않았다. 왜냐하면 눈앞에, 그리도 기다리던 승헌이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느새 하늘에서는 추적추적 비가 내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빗물과 섞인 피가 바닥을 느리게 적셨다.
“……전하. 전하께 충성한 제게 고작 이런 식으로 보답하시는 것이옵니까……?”
노신의 쇳소리 섞인 물음에 승헌은 한겨울의 빗줄기보다 더 차디찬 어조로 대꾸했다.
“보답? 우습군. 그대에게는 수도 없이 많은 보답을 했어. 마치 그대가 그 자리에 있는 게 그대의 능력과 가문 덕분인 줄 아는 것 같은데, 그대가 얼마나 대단한 일을 했든 이 나라는 나의 것이야. 내가 붙잡은 왕위고, 내가 만든 나라지. 그대가 그렇게 잘났으면 직접 왕을 하지 그랬나?”
“전하!”
우레와 같은 고함에도 승헌은 꿈쩍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그 자리에서 우산도 쓰지 않고, 무기도 들지 않은 채 백청을 비웃고 있었다. 승헌의 말대로였다. 자신이 왕이 될 수도 있었다. 왜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던가. 왜 하지 않아서, 이런 날이 도래하게끔 했나.
“전하께서도 무인이 아니십니까. 이런 비겁한 수를 쓰시다니…… 부끄러운 줄, 아십시오.”
“역적을 정정당당하게 대우해 주는 왕이 어디 있나? 제대로 된 대접을 받고 싶었으면 행동부터 제대로 했어야지.”
“……저는 모반을 한 것이 아닙니다…….”
“그대의 아들이 말한 대로야. 그대가 무어라고 주장하든, 나는 오만하기 짝이 없는 그대보다는 옥환을 택하겠지.”
아무리 그래도 그 말만큼은 용서할 수가 없었다. 적국의 책사로서 수많은 자국의 백성을 죽게 만든 것도 모자라, 자존심도 없이 나라와 몸을 팔아 여기까지 온 자를 저보다 더 낫다고 평하다니.
백청은 눈을 깜빡여 흔들리는 시야를 바로잡았다. 오만한 것은 누구인가. 그는 삐딱하게 서 있는 승헌을 향해 온 힘을 다해 달려들었다.
“견승헌─!”
“아버지……!”
백고의 외침도 무색하게 이내 촤악, 하고 피가 튀었다. 피는 승헌의 얼굴을 적셨으나 그것은 승헌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바로 백청의 것이었다. 백고는 들고 있던 검을 바닥에 떨어트렸다. 그의 검은 제 아비의 피로 흥건했다.
무장하지 않은 승헌으로서는 피할 수 없는 공격이었고, 백고는 살면서 가장 어려운 선택을 해야만 했다.
역적이 될 것인가, 불효자가 될 것인가를.
결국 그는 불효자가 되는 쪽을 택했고, 친아버지를 제 손으로 베었다. 하나 순간의 망설임이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처음부터 죽일 생각은 없었던 것인지 백청은 쉬이 쓰러지지 않았다. 백고는 서둘러 그에게 다가갔다.
“아, 아버지. 저를 용서하십시오. 아니, 용서하지 마십시오…….”
백청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백고에게 손을 뻗었다. 피 묻은 손이 눈물로 젖은 그의 뺨을 감쌌다.
“가문을…… 가문을 지켜야…… 한다.”
백고가 눈물을 흘리며 대답을 하려던 순간, 갑자기 그의 몸이 뒤로 밀쳐지는가 싶더니 날카로운 칼날이 순식간에 백청의 몸을 관통했다. 백청은 단말마도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명을 달리했다. 너무도 한순간에 벌어진 일에 백고는 그저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확연히 와 닿지가 않았다. 그저 눈을 뜬 채 영영 멈춰 버린 백청의 뒤로, 마치 야차와 같은 얼굴을 한 사내가 보였다.
백청을 한순간에 죽여 버린 승헌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시신에 박힌 검을 뽑았다. 피가 튀며 그의 옷자락을 붉게 물들였다.
“저…… 전하…… 아버지…….”
큰 충격에 빠진 백고에게 다가간 승헌은 그의 멱살을 잡고 제 계획을 빠르게 읊었다.
“똑바로 들어. 백청은 네가 죽인 것이다.”
“어…… 어찌…….”
“너는 역적인 아비를 베고 그 죗값을 치르려 했다. 무관들과 작당해 병부상서의 아들을 모함한 것 또한 사실은 네 아비고, 너는 그 죄를 대신 뒤집어쓴 것뿐이다.”
백고가 제 말을 제대로 듣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가 가만히 있어도 어떻게든 백씨 가문의 위세를 지켜야 하는 무관들이 알아서 그를 변호할 터였다. 승헌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이제부터 네가 네 가문의 주인이다. 네 아비처럼 죽고 싶지 않거든 나를 배신하지 마라.”
백청의 지나치게 큰 권력은 항상 승헌의 눈엣가시였다. 게다가 그의 거만함은 언제든 그에게 역심을 품게 하기 충분할 터였다. 승헌은 기왕 이렇게 된 것, 백청을 처리해 버리기로 했다. 그는 처음부터 백청을 죽일 생각이었던 것이다. 하나 백청은 끝까지 승헌이 저를 쉽게 죽일 리 없다는 자만을 하고 있었다. 그것이 백청이 지고, 승헌이 이긴 이유였다.
환관이 얼른 달려와 승헌에게 우산을 씌워 주었다. 다른 환관은 승헌의 얼굴과 옷을 닦으려 했으나 승헌은 그것을 제지했다. 이 또한 전쟁이었다.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승헌을 그것을 잊지 않으려 했다.
하나 이걸로 끝이 아니었다. 아니, 어쩌면 이제부터 시작일지 모른다. 한데 그 순간.
‘전하 걱정 같은 건 안 합니다.’
돌연 떠오른 옥환의 마지막 말을 되새기며 승헌은 쓰게 웃었다. 왜 하필 지금 그 말이 떠오르는지.
비는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승헌에게는 여러모로 지독한 겨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