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8/16)

八. 烈寒(열한) (1)

어느새 잠이 들었던가. 옥환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자 무언가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얼음주머니였다. 이 귀한 것이 왜 여기 와 있을지를 생각하던 옥환은 피식 웃었다.

승헌이리라. 그가 태의에게 저를 살피라 했겠지. 하나 옥환은 더 이상 그와 자신이 같은 뜻을 품었다고 여기지 않았다. 결국, 그와 저는 다른 길을 걸을 운명이었던 것이다.

떨어진 얼음주머니를 집어 든 옥환이 쓴웃음을 지었다. 차라리 밀어내려면 아주 밀어낼 것이지, 옥에 가둬 놓고 상처를 돌봐 주는 건 무슨 심보란 말인가.

물론 그를 원망하지는 않았다. 머리가 식으니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알 것 같았다. 승헌의 말대로였다. 그에게 가당치 않은 기대와 정을 품었었다.

정. 정으로 인해 타인에게 기대게 된 것이 이 모든 일의 패착이었다. 옥환은 난생처음으로, 누군가가 자신의 처지를 구해 줄 것이라 믿고 말았다. 의지할 사람을 만들고 말았다. 하나 견승헌은 적국의 왕이 아닌가. 그 누구도 믿지 않는, 저를 거둬준 선왕을 죽이고 그 자리에 오른 사내. 그가 종소를 살려 줄 리가 없었다. 살려 주고 싶어도 살려 줄 수 없었을 것이다. 왕이란 그런 자리였다.

하지만, 염완은 구해 주었을 것이다.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옥환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그와 더불어 옥환은 잠시나마 희생 없는 평화라는 허상 따위를 좇았던 자신이 얼마나 한심했었는지도 알게 되었다. 화친? 서국과 벽국이? 승헌이 원해도 무관들이 원하지 않았고, 자신이 원해도 염요가 원하지 않았다. 그저 제 기대만으로 이뤄질 일이었다면 두 나라가 이토록 길게 싸울 일도 없었으리라.

결국 자신은 서국 백성들의 희생도 막지 못했고, 종소의 죽음도 막지 못했다. 옥환은 스스로의 무력함과 아둔함을 자조하고 저주했다. 짓씹은 입술에서 다시금 피가 배어 나왔으나 아무렇지도 않았다. 할 수 있다면 벽에 머리라도 박고 싶은 심정이었다.

무의식적으로 제 팔에 손톱으로 상처를 내던 옥환은 문득 그것을 멈추고는 바깥의 옥졸을 불렀다.

“무슨 일이십니까?”

죄인을 대하는 것치고는 지나치게 예의 바른 태도에 옥환은 의문을 느꼈으나, 그런 것에 신경 쓸 새는 없었다. 옥환은 짧게 말했다.

“필묵과 종이를 구해다 줄 수 있겠나.”

“예, 그리하지요. 더 필요한 것은 없으십니까.”

없다고 대꾸하니 옥졸은 극진하지는 않지만 나름의 예의를 갖춰 인사를 하고 물러갔다. 이내 옥졸이 가져다준 종이를 바닥에 펼친 옥환은 붓을 들었다.

이제 옥환이 해야 할 일은 명확했다. 다시 본래의 길로 되돌아가는 것. 그리고 그 길 위에서, 저를 막은 방해물을 철저히 제거하는 것.

이미 서국의 패배는 막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그것마저 이용해 이 구역질 나는 난세에 최대한 빨리 종지부를 찍는 쪽이 나았다. 그러려면 서국은 약해져야만 한다. 벽국에게 순식간에 제압당할 만큼.

예정대로 서국에 내분을 일으켜야 했다. 그리고 그 내분으로 말미암아, 백청을 무너뜨릴 것이다. 평화와도, 염완의 뜻과도 상관없이 옥환은 백청을 없애 버리기로 마음먹었다. 백청은 악이었고 적이었다. 서국과 벽국 그 어느 쪽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 인사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종소의 원수였다.

하나 지금 옥환의 입지는 몹시도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제 몸 하나조차 독방에 묶여 자유롭지 못하건만, 한창 승승장구하는 백청을 무너뜨릴 방안이 어디 그리 쉬이 떠오르겠는가. 그렇게 해가 지도록 식사도 거르고 고민에 잠겨 있던 옥환에게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문하시중과 중서령이었다.

어두침침한 독방보다 더 어두운 얼굴로 찾아온 그들은 옥환의 상태를 보고는 결국 참지 못하고 탄식을 흘렸다.

“태사…… 대관절 이게 무슨 일입니까…….”

옥환은 눈을 내리깐 채 한숨 쉬듯 미소 지었다. 민망하고 서글펐으나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태사. 식사는 제대로 하고 계신 겁니까? 이런 데서는 먹을 것도 변변치 않을 듯하여 몇 가지 음식을 싸 왔습니다.”

중서령이 싸 들고 온 것을 옥환 앞에 내보이며 화제를 바꾸었다. 그것을 보며 옥환이 쓰게 웃었다.

“……뭐 이런 것을 다. 죄인 된 몸으로 어찌 잘 먹고 잘 자겠습니까.”

“죄인이라니요. 태사께서 금족령을 어기신 데엔 마땅한 이유가 있겠지요. 부디 닷새만 굳건히 견디십시오. 저와 중서령이 주청하여 전하께서 닷새 뒤에는 태사를 풀어 주시기로 하셨습니다. 게다가 이레 뒤에 전하께서 직접 이번 일에 대한 국문을 여시겠답니다.”

“국문이요?”

“예. 거기서 태사가 첩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밝힐 수 있을 것입니다. 저희도 할 수 있는 한 대장군의 뒤를 파 보겠습니다.”

국문인가. 하나 옥환에게는 더 이상 승헌도 믿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다만 이대로 첩자라는 의심에 매여 있는 것보다는 국문을 통해 다시 조정에 복귀할 발판을 마련하는 쪽이 유리하기는 했다. 국문을 잘 이용해야겠다는 생각에 옥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두 분께는…… 참으로 면목이 없습니다.”

“저희야말로 무관들에게서 태사를 지켜드리지 못한 것 같아 부끄럽습니다.”

“어차피, 아무도 절 지킬 수 없었을 겁니다.”

옥환의 서늘한 단언에 문하시중이 걱정 어린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엉망이 된 몰골도 그러했으나, 옥환의 마음가짐이 거칠어진 것 같아 문하시중은 그것이 크나큰 우려였다. 전에는 맑기만 하던 눈빛이 오늘은 유독 그림자에 뒤덮인 것처럼 보였다. 혹 이번 일로 그 올곧던 의지가 산산조각이 난 것일까.

“……태사. 괜찮으신 거지요?”

문하시중의 진지한 물음에 옥환이 고개를 들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부드럽게 웃었다.

“예, 아주 좋습니다.”

좋다니.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해도 좋다고 대답할 상황은 아니었다. 문하시중과 중서령의 당황한 얼굴을 마주한 채 옥환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내내 마음속에 있던 망설임이 모두 개인 느낌입니다. 이제 제가 무엇을 해야 할지 알겠습니다.”

문하시중은 그게 무어냐고 묻고 싶었으나 어쩐지 불안한 예감에 묻지 못했다. 하나 그런 것까지는 느끼지 못했는지 중서령이 대신 무엇이냐고 물었다.

“물론, 이 난세를 끝내는 것입니다.”

“……그간에는 그것에 망설임이 있으셨습니까?”

문하시중의 의미심장한 물음에 중서령이 문하시중의 팔을 툭 치고는 작게 말했다.

“벽국의 재상이셨던 분이 아닙니까. 어찌 그리 눈치도 없으십니까.”

“……아…….”

문하시중은 그제야 제 실수에 아차 싶어 입을 다물었다. 갑자기 공기 중에 내려앉은 무거운 침묵에 안절부절못하던 두 중신이 결국 참지 못하고 그만 가 보겠다며 일어섰다.

“조심히 돌아가십시오. 그리고 보는 눈이 있으니 더는 안 오셔도 됩니다. 고작 닷새가 아닙니까. 대의를 위해서라면 그깟 시간쯤이야 별것 아닙니다.”

“알겠습니다, 태사. 부디 몸조리 잘하십시오.”

두 사람이 그렇게 떠나고 얼마 후, 웬일인지 문하시중이 다시 돌아왔다. 옥환이 무슨 일인가 싶어 바라보니 문하시중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닷새는 짧다고 하셨으나, 태사 같은 인재에게는 그리 짧기만 한 시간도 아니지 않습니까. 해서 말씀인데, 혹 조정에 일이 있거든 제가 은밀하게 전해드리겠습니다.”

“예? 하나…….”

“저도 전쟁이 일어나길 바라지는 않습니다. 하나 이대로 원정이 끝나면 어떤 식으로든 전쟁이 일어날 테니, 그것을 저희와 함께 막아 주셨으면 합니다.”

문하시중의 진지한 어조에 옥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전쟁은 일어날 것이다. 벽국이 이길 전쟁이. 자신이 그렇게 만들 것이었으니까.

좀 더 빨리 문하시중과 힘을 합칠 수 있었다면 무언가 달라졌을까? 옥환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문하시중은 너무 유순했고, 그의 성격이 지금과 달랐더라도 그가 백청을 막아낼 수 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결국, 이 모든 일은 정해진 수순이었을 뿐이다. 자신이 본래의 길로 돌아온 것과 마찬가지로.

그렇게 문하시중이 정말로 돌아가고 나자 홀로 남은 옥환은 종이와 붓을 아예 한쪽에 치워 버렸다. 아는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없으면서 의지만 앞섰다. 하나 백청을 파멸시키기 위해서는 그 어느 때보다도 철저한 준비를 할 필요가 있었다. 더는 운에 기대지 않도록. 더는 그 누구도 억울하게 희생되지 않도록.

그것을 위해 닷새 정도 버티는 것은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다. 오히려 고작 닷새라는 것이 감사할 정도였다.

그렇게 와신상담하며 닷새를 보낸 옥환은 마침내 옥을 나와 처소로 돌아가게 되었다. 하나 아직 금족령까지 풀린 것은 아니었으니, 그는 굳이 승헌을 만나러 가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의 손에는 문하시중이 은밀히 전해 준 쪽지가 쥐어져 있었다. 그 안에는 백청이 병부상서의 아들을 주장으로 세웠으며, 병부상서는 다혈질인 아들의 성정 때문에 이번 원정을 내키지 않아 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것이면 충분했다. 이를 이용하면 옥환이 뜻한 바를 이루기는 식은 죽 먹기였다.

문하시중에게는 고마웠으나, 더 이상 망설임은 없었다.

“태사, 고생하셨습니다……!”

옥환이 처소에 돌아가니 하인들이 나와 있다가 냉큼 달려와 옥환을 모셨다. 그만한 명성과 지위를 누리면서도 하인들에게조차 허투루 대하지 않는 옥환이었기에, 그는 하인들 사이에서도 평판이 좋았다. 그런 옥환이 돌연 옥에 잡혀 들어갔다 하니 그들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하나같이 심성이 고운 이들뿐이었다.

그들 또한 서국의 백성이었으나, 옥환은 여전히 흔들리지 않았다.

짧긴 하나 옥고를 치렀음에도 식사도 거르고 온종일 책상 앞에만 앉아 있던 옥환은 막상 밤이 되자 의외로 금세 잠자리에 들었다. 하인들은 그 이상한 행동에 고개를 갸웃했으나 금야 선생을 어찌 자신들과 같은 범인이 이해하겠나 싶어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렇게 처소의 모든 불이 꺼지고 자시가 넘은 야심한 시각. 잠든 줄 알았던 옥환은 뜻밖에도 계평을 만나고 있었다.

“전하께 이것을 전하거라.”

환한 달빛에 기대어 옥환은 계평에게 은밀하게 서찰을 전달했다. 그것을 받아든 계평은 의미심장하게 물었다.

“길천 원정과 관련 있는 것입니까?”

“그래. 서국은 이번 전투에서 당연히 이길 것이라 자신하고 있다. 하나 대비도 하지 않은 그들이 천구족에게 이길 리가 없겠지. 나는 곧 있을 패배를 통해 서국에 내분을 일으킬 것이다. 이 안에 앞으로 내가 어찌할지를 적어 놓았으니 전하께 참고하시라고 전하고, 더불어 길천에서 일어나는 일은 모두 내게 전해질 수 있도록 조치해 달라 청하거라. 나를 감시하는 눈이 많으니 각별히 유의하고.”

“알겠습니다.”

이윽고 옥환은 또 하나의 서찰을 계평에게 넘겨주었다.

“그리고 이것은 변회섭 장군에게 전해 다오.”

“그자는 백청의 측근 아닙니까? 이건 무슨…….”

“날 또 의심하려거든 차라리 여기서 펴 보거라.”

눈치를 보던 계평이 서찰을 슬쩍 펼쳤다. 서찰 안의 내용을 확인한 그의 눈이 충격으로 커졌다.

“승상!”

서찰에는 벽국이 길천에 천구족을 배치해 놓았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것을 어찌 서국의 장수에게 알려 준단 말인가? 자신을 노려보는 계평의 서슬 퍼런 눈빛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옥환은 태연하게 대꾸했다.

“내분을 일으키려면 문관과 무관이 싸우도록 해야 하지 않겠느냐. 무관들이 병부상서를 공격할 수 있도록 무기를 쥐여 주려는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것을 안다 해도 이미 원정군을 물리기엔 너무 늦었다. 그리고 당장 전하라는 것이 아니다. 이틀 뒤에 국문이 끝나거든 그때 전하거라. 행여 내가 보냈다는 것이 발각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계평은 노골적인 눈초리로 옥환의 기색을 살피다가 한숨을 내쉬고는 두 개의 서찰을 품에 넣었다. 이윽고 옥환이 그에게 맡겼던 기밀문서를 돌려 달라고 하자, 그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승상. 아예 이것을 통째로 벽국에 넘기는 것은 어떻습니까?”

“그것은 내게도 필요한 정보다. 필사본은 하나뿐이니 그것을 넘기는 것은 시기상조야.”

“하면 필사본을 하나 더 만들어서…….”

“지금은 궁 안의 온갖 눈이 여길 향하고 있다. 눈에 띄는 행동을 할 필요는 없지 않으냐.”

계평은 잠시 망설이더니 고개를 끄덕이고는 물러갔다. 혼자가 된 옥환은 잠시 푸르게 빛나는 달을 올려다보다가, 불쑥 떠오른 한 사내의 모습을 지워 버리고는 창을 닫았다.

계평에게 말한 대로, 모레는 국문이 있는 날이었다. 제 혐의가 벗겨지면 백청도 더 이상 자신을 마음대로 다룰 수 없으리라.

옥환은 백청이 무너질 날을 기대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이틀 뒤, 국문이 열리기 전 옥환은 뜻밖의 소식을 들었다. 간밤에 백청의 집에 불이 났다는 것이다. 불은 금세 진압되었으며, 화재의 진원지가 안채임에도 불구하고 백청이나 백고에게는 아무런 해도 없었다는 듯했다. 크게 다친 이도 없었으니 가벼운 사고로 넘어가도 되겠으나, 하필 백청의 집에 화재라니 그 의미가 남다르게 여겨지는 건 사실이었다. 하인들은 그를 두고 백청이 엉뚱한 옥환을 모함해 벌을 받은 게 아니냐고 수군댔으나 옥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백청에겐 자신이 벌을 내릴 것이다. 그 외의 것은 벌이라고 인정할 수도 없었고, 그걸로 속이 풀리지도 않을 것 같았다.

옥환은 어쩌면, 어쩌면 아직까지 종소가 살아 있을 수도 있다는 덧없는 희망을 끝내 떨치지 못했다. 만약 백청이 아직 종소를 죽이지 않았고 그 상태에서 불이 난 거라면, 종소는 똑똑한 아이니 화재를 틈타 백청의 손아귀에서 탈출했을 수도 있었다. 혹은 백고가 그를 몰래 도망치게 했을지도 모르고.

다른 이도 아니고 무신의 최고직인 대장군의 집에서 일개 하인이 탈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옥환은 여전히 그 가느다란 끈을 놓지 못했다.

그리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국문이 열릴 때까지 백청은 단 한 번도 옥환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아무래도 집에서 화재가 일어난 만큼 그럴 여유는 없는 모양이었다.

얼마 후, 병사들이 국문을 위해 옥환의 처소에 찾아왔다. 미리 준비하고 있던 옥환은 금세 채비를 마치고 나왔다. 병사들과 함께 온 환관은 승헌을 가장 가까이서 모시는 태감이었다. 그는 옥환의 상태를 유심히 살피더니 조심스레 물었다.

“태사,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예, 덕분에.”

“……전하께서 걱정이 많으셨습니다.”

옥환은 그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뭐라고 해야 할지 떠오르지도 않았고, 승헌의 걱정이 정말 순수한 것인지도 알 수 없었으니까. 옥환이 국문장으로 향하는 내내 침묵하는 바람에 환관은 그의 눈치를 보느라 안절부절못했다.

이윽고 국문장에 도착하니 이미 수많은 관리가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작금의 조정 신료들은 길천 원정이나 벽국과의 관계보다도 옥환과 백청의 기 싸움에 더 관심이 많았다. 그리고 오늘, 국문을 통해 두 사람의 치열했던 싸움이 마침표를 찍게 될 예정이었다.

곧이어 백청이 국문장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몹시도 심기가 불편해 보였는데, 옥환은 그 이유에 대한 여러 가지 추측이 떠오르기는 했으나 별 관심을 가지지는 않았다.

머잖아 승헌이 가장 상석에 앉으면서 마침내 국문이 시작되었다. 옥환은 백청이 어떤 식으로 저를 몰아가든 받아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승헌은 맨 처음 옥환에게 물었다.

“태사. 태사가 벽국의 첩자라는 것이 사실인가?”

“……아니옵니다.”

“아니다? 하나 그대는 지난번 조정에서 대장군이 의혹을 제기했을 때는 내내 반론을 펼치지 않았지. 아니라는 말조차 하지 않았어. 그건 왜인가?”

“그때는 예기치 못한 상황에 무척 당황했었고, 무엇보다 대장군께서 의혹을 제기하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단언을 하셨기 때문에…… 대장군이 그리 생각하는 원인을 알아야 반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사옵니다.”

“그대의 침묵이 곧 긍정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단 걸 알면서도?”

생각보다 승헌은 집요했다. 아마도 확실히 추궁해 신하들의 자신을 향한 의심을 완전히 거두려는 심산인 듯했다. 그리고 가슴 한편에는 그 역시 신하들과 같은 의심을 품고 있을 터였다. 옥환은 싸늘하게 대꾸했다.

“대장군께서 작정하고 소신을 몰아가기로 하셨다면…… 아니라는 말이 다 무슨 소용이 있겠사옵니까. 그 상황에서는 소신이 아니라고 해 봤자 결론이 나지 않았을 것이고, 결국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꼼짝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을 것이옵니다. 하면 입을 다무는 것과 다르지 않은데 굳이 조정 안을 소란스럽게 할 필요가 어디 있겠사옵니까.”

누군가가 크게 코웃음 치는 소리가 들렸으나 옥환은 꼿꼿하게 고개를 든 채 승헌을 바라보았다. 백청은 입을 다문 채 상황을 주시하는 듯했다.

이내 승헌이 환관에게서 무언가를 받아 펼쳐 보였다. 옥환도 전에 봤던 ‘자백서’였다. 멀어서 그 내용까지 파악하기는 어려웠으나 종소의 서투르지만 반듯한 필체가 보여 옥환은 가슴이 아려 왔다.

“이것은 대장군이 증거로 내놓은 자백서야. 여기엔 종소라는 시동이 그대의 명을 받아 기밀을 훔치려 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지.”

“……전하. 그것을 쓴 종소는 어디에 있사옵니까. 종소와 대질하게 해 주시옵소서.”

“글쎄. 과인도 그 얘기는 계속 했지만…… 대장군.”

승헌은 그렇게 말하며 백청에게 시선을 향했다. 종소를 데려오라는 승헌의 명에도 백청은 그의 몸 상태가 좋지 않다는 둥 핑계를 대며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하나 국문까지 와서는 더 미룰 수 없을 터였다. 승헌의 하문에 백청은 뭐 씹은 얼굴로 입을 씰룩이더니 대꾸했다.

“그 시동은 죄책감과 처벌에 대한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자결했나이다.”

“……뭐……?”

그럴 리가 없었다. 어린아이가 뭘 알고 제 목숨을 직접 끊겠는가. 필시 백청이 아이를 해치고 시치미를 떼는 것이리라. 옥환은 독기 어린 시선으로 백청을 노려보았다. 당장 저자를 죽여 종소의 원한을 갚아 주고 싶은 충동이 치솟았다.

“하면, 저 자백서가 진짜라는 증명은 불가능한 셈이 아닙니까.”

옥환은 노기를 억누르며 이를 악물고 쏘아붙였다. 백청은 억지로 입꼬리를 올려 조소했다.

“필체를 대조해 보면 그 시동의 것임을 알 수 있을 테지. 네가 그놈에게 글을 가르치지 않았더냐? 네 처소에서 그놈의 글자를 찾아 대조해 보면 되겠군.”

처소에 모아놓은 것은 전부 종소의 유품이나 마찬가지였다. 옥환은 살벌한 얼굴로 으름장을 놓았다.

“제 처소의 물건을 단 하나라도 건드린다면 그게 누구든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흥, 뻔뻔하기도 하지! 첩자 주제에 무엇이 그리 당당하더냐!”

“첩자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애당초 죄다 당신의 일방적인 주장 아닙니까.”

“당신이라고?! 감히 내게……!”

“그만. 여긴 그대들이 말싸움이나 하는 장소가 아니야.”

승헌이 엄하게 타이르자 두 사람이 입을 다물었다. 하나 옥환이 곧 다시 입을 열었다.

“전하. 필체는 얼마든지 흉내 낼 수 있사옵니다. 게다가 종소가 죽었으니 그 아이가 고문을 당해 거짓 자백서를 쓴 게 아니라는 증명 역시 불가능하지 않사옵니까. 대장군은 소신이 서국에 온 뒤로 줄곧 소신을 미워했사옵니다. 그 연유는 전하도 익히 아시리라 생각하옵니다. 만일 정말 소신이 첩자라는 걸 대장군이 알았다면 왜 그 즉시 전하께 알려 소신을 처벌하지 않고 일을 여기까지 끌고 와 주요 증인인 종소까지 죽게 만들었겠사옵니까?”

옥환의 진심으로 억울해 보이는 태도와 이런 상황에서도 잃지 않는 논리정연함에 국문을 지켜보던 이들은 어느새 그의 주장에 흔들리기 시작했다. 더불어 옥환의 청초하고 맑은 얼굴과 백청의 도깨비 같은 얼굴을 비교하자면, 백청이 옥환을 괴롭혔으면 괴롭혔지 저 고운 이가 뒤로 그런 악랄한 일을 저질렀으리라고는 도저히 보이지 않았다. 특히 아직 정치에 대해 잘 모르는 젊은 관리들은 옥환의 명성까지 더해 더더욱 그렇게 믿는 눈치였다.

옥환 쪽으로 기울어지는 분위기를 감지한 백청 역시 서둘러 입을 열었다.

“전하. 설옥환은 서국의 조정에서 태사라는 중책을 맡고 있고, 서국과 벽국의 관계는 나날이 악화일로를 걷고 있사옵니다. 그런 상황에서 소신이 어찌 명백한 증좌도 없이 이런 심각한 문제를 공론화할 수 있었겠사옵니까? 소신은 증좌를 얻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시동을 문초해 자백을 받아 낸 것뿐이옵니다. 소신도 설마 시동이 죽을 줄은 진정 몰랐사옵니다. 하나 그 또한 소신의 죄이니, 그 일로 벌을 내리시겠다면 달게 받겠나이다.”

결정적인 증거는 없고, 옥환과 백청은 완전히 상반된 주장을 펼치고 있었다. 흠, 하고 턱 끝을 톡톡 두들기며 생각에 잠긴 승헌이 이번에는 백청을 향해 물었다.

“대장군. 그 종소란 시동은 죽은 게 확실한가? 죽었다면 시신은 어찌했지?”

“그것은…….”

백청은 잠시 말끝을 흐렸다. 그 모습이 어쩐지 부자연스러워 의문을 느끼던 옥환은, 곧 종소의 죽음이 그의 약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까 종소가 자결을 했다고 대답할 때도 그는 마뜩잖은 표정이었다. 무언가, 종소의 죽음에 감춰져 있는 게 있었다. 옥환은 그 부분을 파고들어야 한다고 본능적으로 느꼈다.

“전하도 아시겠사오나 지난밤에 소신의 집에 화재가 있었사옵니다. 그 과정에서 시동의 시신이 불에 타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매장하였사옵니다.”

“거짓이옵니다, 전하. 소신이 듣기로 화재가 일어난 곳은 안채라 하였사옵니다. 설마하니 죽은 자의 시신을, 그것도 죄인이자 하인인 자의 시신을 안채에 두었을 리 없사옵니다.”

옥환의 재빠른 반박에 백청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승헌은 눈을 가늘게 뜨고 재차 하문했다.

“대장군. 상세한 설명이 필요할 성싶은데.”

“그것이…….”

대답을 주저하던 백청은 승헌의 서늘한 눈빛에 무거운 어조로 고했다.

“누군가가 잠입해 시신을 훔쳐 간 듯하옵니다. 화재 또한 시신을 훔쳐간 이가 저지른 일로 보이옵니다.”

“허, 한데 왜 진작 그리 말하지 않고 과인에게 거짓을 이야기했나?”

“시신을 가져간 자에 대해 조사를 하던 중이었사옵니다. 혹 이 얘기가 퍼지면 조사가 어려워질까 저어한 것이옵니다.”

“전하. 대장군의 주장은 일견 타당해 보이나 조금만 생각해도 말장난에 가깝다는 걸 알 수 있사옵니다. 감히 대장군의 집에 불을 지르고 도둑질까지 한 대담한 자가 과연 대장군의 추격을 예상하지 않았겠사옵니까? 예상하는 것은 물론 그에 대한 대처까지 생각했을 것이옵니다. 하니 이미 꽁꽁 숨었을 터인데, 그 사실을 솔직히 고한다고 해서 새삼 무슨 조사가 어려워지겠사옵니까? 도리어 전하께서 힘을 빌려 주셨을 수도 있지 않겠사옵니까?”

쏟아지는 옥환의 반격에 백청의 얼굴은 흙빛이 되었다. 승헌은 무심한 얼굴로 백청을 바라보았다. 이에 대해 할 말이 있냐는 눈빛이었다. 자신 또한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면 하다못해 옥환에 대해 미심쩍은 구석 정도는 남겨 둔 채 국문을 끝낼 수 있겠으나, 백청은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다. 마치 자신이 종소를 잡아 옥환을 협박했듯, 자신 또한 비슷한 상황에 처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종소는 살아 있었다. 그에게 억지로 자백서를 적게 하긴 하였으나, 아무리 고신을 해도 고집을 꺾지 않는 모습에 백청은 혹 그가 계획에 방해가 될까 싶어 죽이려 했었다. 그러나 백고가 결사반대를 하기도 했고, 백청 역시 나중엔 여차할 때 결정적인 증인으로 쓸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마음을 바꾸어 처분을 미뤄 두었던 것이다.

한데 그런 그가, 어젯밤 화재로 집안이 정신없던 사이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종소를 데리고 간 이가 누군지도 알 수 없었고, 종소가 그자에게 무어라 고백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야말로 이번엔 백청이 옴짝달싹도 못하게 된 상황이었다.

옥환에게 했던 짓을 돌려받은 만큼 이번 일의 범인이 옥환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으나, 이틀 전만 해도 옥에 갇혀 있던 옥환이 제 집에 불을 지르고 종소를 데려가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했다. 만일 옥환에게 협력자가 있다면 문하시중이나 승헌이었다. 하나 국문까지 열렸음에도 그들은 아직 나설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지금은 누가 그 시동을 데리고 있는지 알 수 없다. 하나 그자는 설옥환의 편일 가능성이 커. 설옥환이 그자의 존재를 아는지 모르는지는 알 수 없으나…… 지금은 설옥환을 자극해서 좋을 게 없다.’

백청은 종소가 사라진 일로 어젯밤부터 한숨도 못 잤고 오늘도 내내 기분이 좋지 않았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으나, 혹 종소가 나타나 백청이 자신을 고문했으며 그로 인해 거짓 자백을 했다고 밝히기라도 하면 궁지에 몰리는 것은 백청이었다. 범인이 아직까지 나서지 않는 걸 보면 그는 자신을 곤란하게 하기보다는 이번 일을 조용히 묻고 넘어가려는 심산인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백청은 그에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시동의 시신을 훔쳐 간 이에 대해 먼저 조사하는 것이…… 우선일 것 같사옵니다.”

백청이 억지인 것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어조로 그렇게 대답하자 옥환이 살짝 의외라는 얼굴을 했다.

“하면 대장군은 제가 첩자라는 주장을 철회하시는 것입니까?”

“그 무슨! 시동이 사라진 것과 네놈이 첩자라는 것은 상관없는 문제다!”

“아니, 아니야.”

옥환과 백청 모두 승헌을 바라보았다. 승헌은 옥좌에 비스듬히 기댄 채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한없이 자애로웠다.

“모든 게 말뿐이지 않나, 대장군. 하다못해 그 자결했다는 시동의 시신이라도 있어야 경의 말을 믿을 생각이라도 들지. 감히 태사직에 오른 이를 고발할 생각을 했으면, 만반의 준비를 하고 덤벼야 하지 않겠어?”

“하나 태사가 첩자가 아니라는 주장 또한 말뿐에 불과하지 않사옵니까!”

“하면 경은? 경은 벽국의 첩자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보일 수 있나?”

“전하!”

발끈한 백청이 승헌을 원망스레 보았으나 승헌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불가능하지? 그런 거야. 먼저 시비를 튼 것은 대장군이니, 경의 주장을 먼저 증명해야지. 그러라고 자리까지 마련해 주지 않았나.”

승헌이 노린 것이 이것이었나 싶어 백청은 분노로 몸을 바르르 떨었다. 어쩐지 줄곧 자신에게 어떠한 제지도 하지 않고 방관만 한다 싶더니, 국문을 계기로 제 힘을 누르려는 속셈이었던 듯했다. 역시 능구렁이 같은 왕이었다. 종소를 납치한 자가 승헌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백청 안에서 조금씩 확신이 되어 갔다.

만일 그렇다면 더는 언쟁을 이어 갈 수 없었다. 승헌은 제 급소를 틀어쥐고 있었다. 지금은 물러날 때였다.

“……시신을 훔쳐 간 자를 찾아낼 때까지…… 시간을 주시옵소서, 전하.”

“그야 어렵지 않지. 이 문제는 그자와 시동의 시신을 찾아낸 뒤에 다시 얘기하도록 하자고. 그때까지는 누구도, 이 문제를 거론하지 마.”

마지막 문장에 힘을 실어 경고한 승헌은 그대로 국문을 파하고는 떠나 버렸다. 구경하던 신하들 역시 주춤주춤 일어나 하나둘씩 떠나갔다.

그 뒤, 국문에 참관했던 신하들은 그날의 국문이 옥환이나 백청의 승리가 아닌, 승헌의 승리였다고 입을 모아 떠들었다.

***

길천으로의 원정이 시작된 지 달포가 흐른 지금, 서국의 혼란은 빠르게 가중되고 있었다. 길천에서의 전투에서 대패했다는 보고가 들어온 것이 그저께 아침, 중상을 입은 병부상서의 아들이 마차에 실려 도성으로 돌아온 것이 어제 낮의 일이었다. 파병한 대부분의 병력을 잃은 탓에 병부상서의 아들을 향한 비난은 조정뿐 아니라 백성들 사이에서도 터져 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누구도 서국이 벽국에게 질 것이라고 예상하지 않았다. 줄곧 군력에서만큼은 서국이 벽국의 절대우위에 있었던 데다가, 더 이상 벽국에는 옥환도 없으니 하나같이 승리를 확신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한데 승리는커녕 너무도 갑작스럽게, 그리고 철저하게 패배해 버렸다.

가장 큰 패인은 역시나 예상하지 못했던 천구족의 참전 때문이었다. 하나 그렇다고는 해도 패배의 규모가 큰 것은 사실이었다. 물론 옥환에게는 다행인 일이었다. 옥환은 길천의 패배를 계기로 문관과 무관의 갈등을 키울 생각이었다. 당연히 패배가 클수록 갈등도 커질 수밖에 없었다.

하나 그렇다고 해서 마냥 기뻐할 수만도 없었다. 천구족 때문에 피해가 클 것은 예상했더라도, 살아남은 자가 손에 꼽힐 정도로 대패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적군이든 아군이든 간에 그들 모두가 결국 백성이었다. 옥환은 진심으로 그들의 명복을 빌어 주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서국 백성들의 민심이 흔들리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하나 비단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전하! 병부상서 심형을 파직하여 주시옵소서!”

병부상서의 아들이 돌아온 지 나흘째 되는 날 아침, 정전 밖에서는 무관들이 엎드린 채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물론 그들의 농성 또한 벌써 나흘 동안 이어지고 있었다. 조회를 위해 정전을 향하다가 그 모습을 본 옥환은 아무렇지 않게 그 사이를 지나 왔다. 하나 그는 정전 안에 들어서자마자 표정을 바꾸고 근심 어린 충신의 가면을 썼다.

중신들의 인사를 받은 옥환은 이게 벌써 며칠째냐며 한숨을 내쉬었다. 특히 이 일의 당사자인 병부상서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낯빛이 파리했다.

“병부상서. 괜찮으십니까?”

“…….”

그는 대답할 기력도 없는지 입을 벌렸다가 한숨만 내쉬었을 뿐이었다. 아들이 전쟁에서 져서 온 마당에 이런 일까지 벌어졌으니 그저 눈앞이 캄캄할 것이었다.

“……제 모자란 자식을 보내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자신을 둘러싼 채 걱정 어린 시선을 보내는 문관들에게 병부상서가 가까스로 한 마디를 꺼냈다. 중서령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찌 그것이 병부상서의 탓이겠습니까. 설마하니 벽국에서 천구족과 동맹을 맺었으리라고 누가 알았겠습니까.”

“맞습니다, 병부상서. 무관들은 이때다 싶어서 벌떼처럼 일어난 것이지, 병부상서가 잘못한 일이 아닙니다.”

문관들의 반응을 지켜보던 옥환은 시기적절하게 동의를 표하며 나서 여론을 몰아갔다.

“그렇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저희 또한 합심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절대 물러서서는 아니 됩니다. 여기서 물러서면 앞으로 저들은 사소한 일에도 트집을 잡아 저희를 몰아내려 할 테니까요. 다들, 전처럼 무관들이 어떻게 나오든 당황하지 말고 저희들의 굳센 의지를 보여 주어야 할 것입니다. 아시겠습니까?”

문관들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는데 마침 대장군 백청을 비롯한 무관 측의 중신들이 정전 안으로 들어섰다. 필시 그들이 밖에서 농성을 벌이는 젊은 무관들을 부추겼을 터라는 생각에 그들을 바라보는 문관들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두 무리가 서로를 매섭게 노려보는 와중 드디어 승헌이 나타났다. 승헌은 밖에서 계속 들려오는 병부상서를 파직하라는 목소리에 인상을 찌푸렸다.

“벌써 이게 며칠째지? 저들은 목숨이 아깝지 않다던가?”

자리에 앉자마자 승헌이 던진 신경질적인 하문에 무관 하나가 허리를 숙이며 대꾸했다.

“전하. 황공하옵게도 신진 관리들 사이에서 병부상서에게 이번 패전에 대한 죄를 물어야 한다는 의견이 끊이질 않나이다. 소신들도 설득을 하였으나 여의치 않사옵니다.”

이윽고 그 뒤를 잇듯 또 다른 무관이 앞으로 나와 간언했다.

“전하.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저들의 의견을 묵과하셔서는 아니 될 줄로 아옵니다. 병부상서에게 죄를 물어야 한다는 말은 비단 신료들뿐 아니라 백성들 사이에서도 나오고 있는 주장이옵니다. 이를 무시하면 조정의 젊은 신료들은 물론이고 안 그래도 패배로 흉흉한 백성들의 민심이 더욱 사나워질 것이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어지러워진 민심을 가라앉히는 것이지 않사옵니까?”

마치 준비된 듯 매끄러운 전개였다. 하나 이런 상황을 문관들이 가만히 두고 볼 리 없었다. 이번에는 문관 측에서 발끈하며 말했다.

“전하. 길천에서의 패배는 서국에게 있어 뼈저린 실책이나, 주장이었던 병부상서의 아들이라면 몰라도 이번 전투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병부상서를 파직하는 것은 온당치 못한 처사라고 사료되옵니다. 재고해 주시옵소서.”

“재고해 주시옵소서, 전하.”

이미 옥환의 설득으로 대비를 하고 있던 문관들이 우르르 나와 머리를 조아리니 무관들이 빠른 대처에 당황한 듯 주춤했다. 한데 그때 우람한 체격의 노장이 앞으로 나섰다. 바로 백청이었다.

“아무런 상관도 없다? 정녕 그리 생각하시는가?”

백청의 질문에 문관들의 표정에 불안함이 스쳤다. 모두의 시선이 저에게 쏠리자 백청의 얼굴에는 비스듬한 미소가 걸렸다. 그는 병부상서를 노려보다가 홱 돌아서 승헌에게 말했다.

“전하. 하명하셨던 이번 원정의 패인에 대한 조사 결과가 나왔사옵니다.”

“아, 그래. 어서 보고해 봐.”

승헌이 재촉하니 백청이 목을 한 번 가다듬고는 보고를 올렸다.

“이번 전쟁에서 이토록 크게 패한 연유는 다들 알다시피 잠복해 있던 천구족의 습격에 당했기 때문이옵니다. 하나 소신이 조사한 바로는, 주장이었던 병부상서의 자제가 패색이 짙음에도 불구하고 퇴각 명령을 내리지 않아 그 피해가 더욱 막심해진 것이라 하옵니다.”

백청의 주장에 조정 안이 소란스러워졌다. 웅성이는 신하들 사이에서 당황한 병부상서가 소리쳤다.

“그 무슨 소리십니까, 대장군! 그 주장이 증거가 있는 것이옵니까?! 이번에도 또 무작정 우기시려는 거라면…….”

병부상서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본 백청이 매섭게 쏘아붙였다.

“이번 원정에서 생환한 병사에게서 그러한 증언이 나왔소! 감히 수만 장병을 죽게 만들어 놓고 발뺌을 할 셈이시오? 병부상서는 아들의 부상만 보이고 밖에 있는 신하들과 백성들의 원성은 들리지 않는 모양이외다?”

“그, 그런…… 그럴 리가.”

예기치 못한 백청의 고변에 당황한 병부상서가 반박하지 못하자 이번에는 문하시중이 대신 나섰다.

“대장군. 이번 원정은 갑작스런 천구족의 개입으로 필시 난전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와중에 퇴각 명령을 듣지 못하는 이가 생길 가능성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오만, 본관은 이미 다수의 병사에게서 같은 증언을 받아 냈소. 문하시중, 이렇게 생각해 볼 순 없겠소? 그러한 난전의 와중에, 병부상서의 아들이 퇴각 명령을 내리지 않고 저 혼자 몰래 도망쳤다면?”

“대장군……!”

어쩌면 억지 주장이라고 볼 수도 있었으나, 명확한 증거가 없는 이상 헛소리라고 치부하기도 어려운 일이었다. 옥환 때와 다를 바가 없는 흐름에 문관들이 백청을 아니꼽게 바라보았으나 백청은 의기양양한 얼굴로 승헌에게 고했다.

“전하. 원하신다면 병부상서의 아들이 퇴각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고 증언한 병사들을 모두 데리고 올 수도 있사옵니다. 전하께서 바라시는 ‘증인’이 갖추어졌으니 이번에는 신의 주장을 묵과하지 않으시겠지요?”

그 무례한 태도에 중서령이 화를 냈으나 정작 승헌은 무덤덤한 표정이었다.

“그래. 병부상서. 경의 아들에게도 입궁을 명하지. 아들이 거동은 가능한 상태인가?”

“……예, 예에, 전하.”

“하면 두 사람에게 하루의 말미를 주지. 그때까지 국문을 준비하도록.”

두 사람이 고개를 조아리니 승헌이 문득 실소를 흘리며 중얼거렸다.

“이번에야말로, 조금은 말이 되는 국문이 열리겠군.”

승헌은 ‘말이 되는 국문’에 유독 힘을 주어 말하며 백청을 내려다보았다. 두 사람의 눈빛이 맞부딪쳤으나, 군신 관계에서 백청은 절대 승헌을 이길 수 없었다. 백청이 고개를 내리니 승헌은 가소롭다는 듯 혀를 찼다.

이윽고 승헌은 바깥에서 농성을 벌이는 신하들에게 오늘 안으로 물러가지 않으면 내일은 차례대로 목을 베겠다고 엄포를 놓고는 조회를 마쳤다.

그 후, 풀이 죽은 병부상서를 위로하며 그를 궁문까지 배웅하던 옥환은 문 앞에서 전전긍긍하고 있는 한 인물을 발견하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병부상서 역시 그를 보더니 의아한 얼굴을 했다.

“저자는…….”

“아는 사람입니까?”

옥환의 질문에 병부상서가 대답하기 전에 마찬가지로 이쪽을 본 상대가 초조한 얼굴로 달려왔다.

“어르신, 큰일입니다!”

“무슨 일이냐?”

“그, 도련님이 일부러 퇴각 명령을 내리지 않고 혼자 도망쳤다는 소문이 나서 백성들이 집 앞에 몰려와 돌을 던지고 난리도 아닙니다!”

“뭐라고……?!”

화들짝 놀란 병부상서가 먼저 가 보겠다며 허둥지둥 하인을 따라나섰다. 생각보다 더 심각한 상황에 문관들은 멀어지는 병부상서를 보며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어찌 그 소문이 이리 빨리 퍼졌을까요? 방금 막 조회에서 나온 얘기가 아닙니까.”

물론 무관들은 길천에서 패배할 것을 미리 알고 있었을 터였다. 자신이 계평에게 이번 원정에 천구족이 참전했음을 변 장군에게 알려주라고 일렀으니까. 그러니 당연히 그들은 모든 것을 미리 준비했을 터였다.

하나 옥환은 모르는 척 심각한 얼굴로 문하시중에게 눈빛을 보냈다. 두 사람의 시선 교환에 중서령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설마…… 무관들이 일부러 퍼뜨렸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하지만…… 아무리 우리들과 사이가 좋지 않다고 해도 그것은 너무하지 않습니까. 꼭 병부상서의 아들에게 패배의 죄를 물어야 하는 이유라도 있는 것처럼.”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르지요.”

옥환의 차분한 목소리에 중서령과 문하시중이 동시에 그에게 시선을 향했다. 옥환의 말 속에 숨은 뜻을 알아챈 문하시중은 잠시 고민하다가 곧 실소를 흘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리가 없지요. 설마 그렇게까지 하겠습니까. 지나친 생각이에요.”

“무슨 말씀입니까, 두 분 다. 저만 빼놓고 얘기하실 겁니까?”

중서령의 원망 어린 목소리에 입에 담기도 꺼려 하는 문하시중 대신 옥환이 제 추측을 들려주었다.

“이번 원정의 부장이 누구였습니까. 백청의 조카사위와 그의 측근 아니었습니까. 그들은 애초에 이번 전쟁을 방해하기 위한 존재였을지도 모릅니다.”

“예……?”

“애초에 백청이 왜 주장을 무관이 아닌 문관 측에서 뽑았겠습니까? 그것도 성질이 급하기로 알려진 병부상서의 아들을요. 백청은 병부상서 아들의 실수를 유도하고, 제 측근들이 공을 세우게 만들려던 심산이었겠지요. 하나 예상치 못하게 패배를 하였으니 제 계략이 들키지 않도록 모든 죄를 주장에게 씌울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서, 설마요. 설마…… 대장군이 그렇게까지 비열하겠습니까……?”

물론 옥환도 백청의 계획을 이용하긴 했으나, 그의 생각에도 백청이 집요할 만큼 병부상서를 노리고 있는 것만은 확실했다. 백청은 문관들보다도 그 한 사람에게 집중하고 있는 모양새였다. 왜 병부상서일까. 옥환이 의문을 느끼고 있던 그때, 문하시중이 침묵을 깨고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꺼냈다.

“대장군은 병부상서를 싫어하지 않습니까.”

문하시중이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달은 중서령의 눈동자에 경악의 빛이 번졌다. 영문을 모르는 옥환이 표정으로 의미를 물으니 중서령이 대답했다.

“그…… 소문이긴 합니다만, 지금은 돌아가신 대장군의 부인께서 본래는 병부상서와 혼인을 약조한 사이였어서요. 그 당시는 병부상서가 이렇게 입신하기 전이라, 부인의 집안에서는 파혼을 하고 대장군에게 시집을 보냈다는 모양입니다. 그리고 그…… 부인께서 혼인한 지 얼마 안 돼 회임을 하셨고요. 얘기하기 좋아하는 치들은 부인이 낳은 아이가 병부상서와의 사이에서 가진 것이라고…….”

말을 하던 중서령 역시 내키지 않는지 결국 말끝을 흐렸다. 백청의 부인이 낳은 아이라면 곧 백고를 말하는 것이었다. 백고가 병부상서의 아들이라고? 그럴 리 없다고 여기면서도, 옥환은 문득 백청과 달리 정 많고 조심스러운 백고의 성격이 병부상서와 조금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서 백청이 병부상서를 노린 거였군.’

중서령의 설명에 모든 것을 납득한 옥환이 문득 고개를 들자, 두 중신의 표정이 몹시도 어두운 것이 눈에 들어왔다. 굳이 구슬리지 않아도 그들은 이미 백청을 향한 의심을 품은 모양이었다.

상황은 옥환이 계획한 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 모두가 그간 수없이 반복된 문관과 무관의 자잘한 갈등 덕이었고, 또한 일 년을 공들여 그들 사이에 파고든 제 노력 덕이기도 했다.

“그나저나 병부상서가 걱정입니다. 전하께서는 병부상서를 연좌하실 것 같진 않으나, 병부상서도 심지가 굳센 편은 아니지 않습니까. 아들에게 변고가 생기면 버틸 수 있을지…….”

이윽고 문하시중이 무거운 어조로 말을 꺼내자, 중서령은 여전히 백청을 향한 의심에 석연치 않은 얼굴을 하면서도 곧 문하시중의 말을 받았다.

“예. 무슨 수를 써야 할 것 같은데. 모레가 국문이니 내일쯤 병부상서를 찾아가 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러지요.”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그렇게 세 사람은 내일 다 함께 병부상서의 집에 가기로 약속하고는 헤어졌다. 제 계획에 병부상서가 포함돼 있긴 했으나, 옥환은 그를 희생시킬 생각은 없었다. 수심에 차 있던 병부상서의 얼굴을 떠올리니 옥환도 마음이 좋지는 않았다.

하나 전쟁이란 잔혹한 것이다. 어떻게든 승부가 날 수밖에 없으며, 이기기 위해서는 단순히 무위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아마 병부상서의 아들이 아버지의 조언을 좀 더 주의 깊게 듣고 항상 잊지 않았다면, 적어도 그가 대역죄인 취급을 받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나 이제 와 생각한들 다 소용없는 일이었다. 자신이 좀 더 빨리 행동했다면, 일찍이 종소의 안전을 확보했었다면, 승헌을 만나러 간 그때, 백청에게 들키지 않았다면, 승헌이 제 말을 들어주었다면…….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은 수도 없이 많았으니까.

그럼에도 옥환은 두 부자를 위해 모든 일이 끝나는 대로 병부상서의 아들을 유배 보내고, 병부상서 본인은 자진하여 사직하게 할 생각이었다. 그리하면 더 이상의 희생 없이 계획을 마무리 지을 수 있으리라.

‘마무리, 인가…….’

어쩐지 하늘이 내내 우중충하다 싶더니, 옥환이 처소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옥환은 창밖으로 차디찬 비가 내리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 겨울이 끝나면, 모든 것이 끝나게 될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옥에 갇힌 때로부터 여러 날이 흘렀으나 여전히 옥환의 가슴속에는 증오와 후회의 불길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감정만을 앞세워 일을 벌이는 게 맞는지는 그도 알지 못했다. 이것이 종소를 위한 것인지, 자신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벽국이나 염완을 위한 것인지도 대답할 수 없었다. 옥환은 눈을 감은 채 창밖으로 몸을 내밀고 내리는 빗방울을 그대로 맞았다. 이 비가 자신의 염화와 같은 마음을 식혀 줬으면 했다.

그렇게 제 머리를, 어깨를 때리는 비의 감촉을 느끼고 있던 옥환은 어느 순간 그것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는 눈을 떴다. 눈앞에는 승헌이, 머리 위에는 우산이 있었다. 우산을 든 승헌은 그것을 옥환 쪽으로 기울인 채 옥환을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당황했던 옥환은 이내 감옥 안에서 매정하게 저를 외면하던 승헌의 뒷모습을 떠올리고는 표정을 굳혔다. 그 표정의 변화를 눈치챈 승헌의 눈동자에 씁쓸함이 스쳤다.

그러다 문득 옥환은 승헌이 제게 우산을 씌워 주는 바람에 그의 어깨 끝이 젖어 들어간다는 것을 깨닫고는 얼른 우산을 그에게 밀었다.

“송구합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옥환이 몸을 뒤로 물리려고 하는데 승헌이 손을 뻗어 옥환의 젖은 뺨을 어루만졌다. 옥환이 멈칫하고는 승헌의 손을 떼어 냈으나 승헌은 아랑곳하지 않고 소매 끝으로 옥환의 얼굴을 닦아 주기 시작했다. 이마와 코, 눈가를 쓰는 손길이 마치 귀한 보석이라도 다루는 듯 퍽 섬세했다. 그러면서도 내내 입을 열지 않는, 평소와 다른 승헌의 모습에 옥환은 살짝 난감했다. 왜 이렇게, 이 사내가 밉지 않은지 알 수 없었다. 결국 종소를 구해 주지 않았는데. 자신을 믿어 주지도 않는데.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알고 있었다. 승헌을 탓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다 자신의 안일함이 자초한 일이었고, 자신의 무력함과 오만함이 종소의 목숨을 앗아 간 것이었다. 옥환은 승헌이 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 알고 있었다. 그것을 다 알기에, 저 또한 염완의 가까이서 왕이란 자리의 어려움을 다 지켜보았기에 이처럼 미워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 옥환은 승헌의 입장을 이해하면서도, 도저히 그와 전처럼 웃고 떠들 수는 없었다. 적어도 아직은 그랬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금세 괜찮은 척을 했을지도 모른다. 승헌이 아니었다면…… 그 누구든, 옥환은 이렇게 서운함을 내비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아직도 그 알량한 정이란 것을 다 버리지 못한 것일까.’

하나 옥환의 마음을 추호도 모르는 승헌은 마지막으로 물방울이 맺힌 긴 속눈썹을 손끝으로 쓸어 주며 말했다.

“태감에게 이리로 산책을 오자고 했어. 해도, 그대를 보기는 힘들 거라고 생각했는데.”

“…….”

그렇게 말한 승헌이 마침내 살짝 물러섰다. 옥환은 저도 모르게 손수건을 꺼내 승헌의 젖은 소매를 감쌌다. 마치 자신을 붙잡는 듯한 그 행동에 승헌이 잠시 옥환을 응시했다. 옥환의 까만 눈동자는 물기를 머금어 투명해 보였다. 비에 젖은 입술은 평소보다 조금 더 붉었다. 찰나의 침묵. 이윽고 승헌을 재촉하는 환관의 기침 소리에 옥환이 그쪽으로 살짝 시선을 향했다.

“가셔야…….”

승헌은 마치 옥환의 시선을 차단하듯 우산을 내렸다. 하나 다음 순간, 옥환은 승헌이 가린 것이 자신의 시선이 아니라 환관의 시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우산 속에서 승헌의 얼굴이 가까워져 왔으나 옥환은 그것을 거부하듯 고개를 돌렸다. 잠시 멈칫한 승헌이 쓴웃음을 지었다.

“이럴 줄 모르고 온 것은 아닌데.”

“…….”

“전하. 이제 그만 돌아가셔야 하옵니다.”

무어라 더 말하려던 승헌이 환관의 재촉에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를 너무 속상하게 하지 마.”

“제가 왜 이리 되었는지 잘 아시지 않습니까.”

옥환의 말에 무어라 대답하려던 승헌이 단념하듯 중얼거렸다.

“그래. 차라리 내게 화를 내. 나는 내 나름의 벌을 받고 있을 테니.”

승헌은 옥환이 더 물을 수도 없게 곧바로 돌아섰다. 옥환은 조금 크게 뜬 눈으로 승헌의 등을 쳐다보았다. 나름의 벌이라니, 무엇이? 승헌의 말은 도통 영문을 알 수 없는 것뿐이었다.

하나 비 때문일까. 아니면 그 사내 때문일까.

옥환은 어느새 들끓던 제 마음속 불길이 크게 사그라들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멍해졌다. 그조차 아주 잠시, 아주 잠시뿐이었지만.

***

다음 날, 병부상서는 조회에 불참했다. 이제는 계획의 다음 단계로 넘어갈 차례였다. 옥환은 조회가 끝난 뒤 약속대로 병부상서를 찾아가기 위해 채비를 했다. 함께 가기로 했던 문하시중은 급히 처리할 일이 생겨 가지 못하게 되었고, 그 빈 자리를 병부상서의 자제와 친분이 있었던 젊은 문관 둘이 채우게 되었다.

또한 옥환은 환관을 통해 승헌에게 외출에 대한 허락을 청했다. 그는 머잖아 가도 된다는 허락이 담긴 서찰을 받았다. 서찰 안에는 바쁜 탓에 서찰을 대신 보낸다는 말과, 지금은 때가 좋지 않으니 행여라도 책 잡히지 않도록 언동을 주의하라는 당부의 말 따위가 적혀 있었다.

옥환은 승헌이 직접 적어 보낸 답장을, 그의 성격이 그대로 묻어 있는 강인한 필체를,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서랍장 안에 고이 접어 넣어 두었다.

승헌에게 허락을 받은 당일 오후, 문관들과 함께 병부상서를 찾은 옥환은 어제보다 더 핼쑥해진 병부상서의 모습에 섣불리 말을 잇지 못했다.

“여기까지 행차하시게 하고…… 면목 없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당연히 와 보아야지요. 다른 이들도 함께 오기를 바랐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아 그리하지 못했으니 병부상서께서는 모쪼록 이해해 주십시오.”

“예. 여러분께서 와 주신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병부상서는 기운 없는 목소리로 그렇게 인사를 전했다. 옥환은 먼저 자신이 다친 병부상서의 아들을 살펴도 될지를 물었다.

“물론 의원이라고 자처할 정도도 되지 않습니다만, 벽국의 의술을 알고 있으니 어쩌면 도움이 될지도 모릅니다.”

“그리해 주신다면 감사할 따름이지요……. 하나 별 소용은 없을 것입니다.”

쓰게 웃은 병부상서는 옥환을 아들이 있는 방으로 안내했다. 다 같이 병자를 보러 갈 수는 없으니 나머지 문관들은 일단 다른 방에서 먼저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

옥환은 초췌한 모습으로 누워 있는 병부상서의 아들을 살폈다. 다른 상처는 회복의 조짐이 보였으나 문제는 왼쪽 다리였다. 옥환이 판단하기로 이제 이 다리는 더 이상 쓸 수 없다고 보는 것이 옳았다. 아들을 진찰한 수많은 의원 또한 같은 결론을 내린 모양이었다.

“병부상서. 잠시 자리를 비켜 주실 수 있으십니까?”

“예? 어찌…….”

“부탁드립니다.”

옥환의 갑작스러운 청에 머뭇거리던 병부상서가 방을 나갔다. 잠시 뒤 방에서 나온 옥환은 병부상서에게 가만히 고개를 저어 보였다.

“아무래도…… 다리를 다시 쓰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이윽고 실망한 병부상서와 함께 문관들이 기다리고 있던 방으로 자리를 옮긴 옥환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보다 병부상서. 상황은 어떻습니까? 내일 국문 준비는 다 되셨습니까?”

“……아들에게 물으니 대장군이 주장하던 그러한 일은 결단코 없었다고 가슴을 치며 억울해 하더이다. 하나 진위가 어떻든 어차피 다 대장군이 짠 판일 텐데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전…… 모르겠습니다.”

“병부상서. 어찌 그런 나약한 말씀을 하십니까. 아드님은 유배를 보내는 쪽으로 저희들이 어떻게든 주청을 드려 볼 테니 너무 걱정 마십시오.”

“맞습니다. 아드님은 유배를 가는 것으로 하고, 병부상서도 자진하여 사직을 하시면 곧 이 소란도 가라앉을 것입니다.”

“하나 저렇게 처형하라는 주장이 강력한데…….”

병부상서의 눈동자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불안한 것도 당연했다. 문관들은 최선을 다할 것이나, 정말로 그가 살아서 유배를 갈 수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무거워진 분위기에 중서령은 애써 미소를 지으며 병부상서에게 술을 따라 주었다.

“자자, 이걸 드시고 마음을 편히 가지십시오. 저희가 최선을 다할 것이고, 막상말로 병부상서의 자제가 죽을 만큼 잘못을 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모두가 병부상서와 자제를 죄인 여기듯 하나 어디 전쟁에서 이기고 지는 것이 마음대로 되는 일이더이까?”

망설이던 병부상서가 술잔을 한 번에 비우자 다른 문관들 역시 중서령의 주장에 맞장구를 쳤다.

“맞습니다. 애초에 병부상서 또한 안 내켜 하시지 않았습니까. 아드님께서는 나라를 위해 충심을 다했건만 어찌 졌다는 이유만으로 이리 박하게 대한답니까. 이게 다 무관들 때문입니다. 그자들이 난리를 치니 전하께서도 어쩌지 못하시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조회 때도 또 병부상서를 파직하라며 어찌나 야단을 피우는지. 인정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자들입니다. 전하께서 정말 그자들의 목이라도 쳐 버리셨으면 좋겠습니다.”

평소라면 문하시중이 나서서 지나친 뒷말은 삼가라 일렀겠으나, 오늘은 문하시중이 없는 탓에 문관들의 불만을 제지할 이가 없었다. 더구나 중서령 또한 문하시중에 비해 감정적인 편인 데다가 유서 깊은 학자 집안 출신이다 보니 힘만 앞세우는 무관을 깔보는 경향이 있었다. 젊은 문관들의 의견을 거들었으면 거들었지 막을 이는 아니었다.

그리고 오늘은 옥환도 평소와 달리 자신의 의견을 적극 내세웠다.

“저도 조정의 분열을 막기 위해 그간 웬만한 일은 참고 넘겨 왔습니다만 이번 일은 참으로 경우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듭니다. 전도유망한 청년이 저리 되었지 않습니까. 탓할 때 탓하더라도 정도를 지켜야지요. 그들 때문에 조정도 거의 마비가 되지 않았습니까.”

“역시 태사께서도 그리 생각하시지요?”

웬일로 옥환이 자신들의 의견에 동의하고 나서자 더욱 기세가 붙은 문관들이 켜켜이 쌓인 불평불만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내내 술만 벌컥벌컥 들이켜며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던 병부상서는 옥환의 한마디에 표정을 달리했다.

“의도한 대로 되었으니 아마 무관들은 지금쯤 신이 났을 것입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병부상서가 반응을 보이자 옥환은 자못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아…… 아닙니다. 그냥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요. 제가 너무 함부로 입을 놀린 것 같습니다. 개의치 마십시오.”

“태사.”

중서령 역시 옥환을 재촉했으나 옥환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때 병부상서가 옥환의 팔을 붙잡았다. 그 힘이 어찌나 센지 옥환이 고통에 눈썹을 찌푸릴 정도였다.

“태사. 아는 게 있으시다면 부디 말씀해 주십시오. 무관들이 어쨌다는 것입니까? 대장군이 제 아들을 천거한 것이 부자연스럽다는 건 저도 압니다. 하나…… 그것은 그저 주변 시선이 있어 저희 쪽 인사를 쓰기는 써야 하니, 대신 일부러 공을 세우기 힘든 제 아들을 주장으로 정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 뭐 그도 그렇지요…….”

옥환이 애매하게 말끝을 흐리니 문관들이 안달이 난 얼굴로 옥환을 채근했다.

“태사. 어찌 하실 말씀이 있으시면서 그리 빼십니까.”

“맞습니다. 지금도 저들이 병부상서의 아들을 처형하라 닦달하고 있는 상황인데 파고들 만한 건 뭐든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특히 태사께선 전하와 각별한 사이이시니 필시 무언가를 더 알고 계실 것입니다. 저희 모두 이 일로 조정을 혼란케 하지 않을 것입니다. 병부상서를 봐서라도 얘기해 주십시오.”

옥환은 주저하는 척 뜸을 들이다가 계속되는 설득에 하는 수 없다는 듯 말문을 열었다.

“그것이…… 대장군이 이 모든 것을 미리 준비해 놓은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말입니다. 만일 대장군이 병부상서의 자제를 주장으로 세운 것이 병부상서를 노리고 행한 것이라면요?”

“……그, 무슨…….”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의 병부상서와 달리 중서령이 전에 했던 대화를 떠올리고는 얼굴색을 달리했다. 옥환과 의미심장한 눈빛을 주고받은 그가 무거운 어조로 물었다.

“병부상서. 작고하신 대장군의 부인과 친분이 있으시지요?”

그러자 병부상서가 핏기가 싹 가신 얼굴로 중서령을 쳐다보더니, 이내 노기 띤 목소리로 소리쳤다.

“중서령! 얼토당토않은 생각 마십시오! 태사도 마찬가지십니다! 어찌 그런 망측한 말씀을 입에 담으십니까?!”

“두 분이 어쨌다는 게 아닙니다. 다 지나간 옛 인연 아닙니까. 병부상서는 기억도 흐릿하시겠지요. 하나…….”

옥환이 말끝을 흐리며 중서령을 바라보니 중서령이 내키지 않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때 당시엔 저도 말단 관리에 불과했고 병부상서도 조정에 등용되시기 전이었습니다만, 대장군과 부인께서 혼인하신 지 얼마 되지 않아 백 장군이 태어났습니다. 그렇다 보니 백성들 사이에서 백 장군이 부인과 본래 정혼자 사이에서 태어난 거라는 이야기가 돌았고요.”

“허……!”

병부상서는 깊은 탄식을 흘렸다. 잠시 혼란스러운 듯 말을 잇지 못하던 그가 이내 다시 말했다.

“하나 오래전 일이 아닙니까. 20년도 더 넘은 일 말입니다. 백 장군께선 백가의 후계자이자 대장군의 자제로 잘 자랐고, 저 또한 지금의 내자를 만나 아들을 낳고 잘 살고 있었습니다. 한데 어찌…….”

중서령 역시 그에 동의한다는 듯 다시 옥환에게 시선을 향했다. 평범하게 생각했을 때 20년이나 지난 일로 이제 와 복수를 한다는 것은 납득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백청은 지금껏 병부상서와 매일같이 조정에서 얼굴을 맞대면서도 한 번도 그러한 낌새를 보인 적이 없었다.

“벼르고 있었을 수도 있지요. 군자의 복수는 10년이 걸려도 늦지 않다고 하지 않습니까. 더구나 하나뿐인 아들과 관련된 일인데 20년이 대수겠습니까. 어쩌면 최근에 어떤 계기가 있었을지도 모르고요.”

“정말 대장군이 저에게 앙심을 품고 그러셨단 말입니까? 태사께선 어찌 그리 생각하시는 겁니까? 계기라니요, 뭔가 짚이는 바가 있으십니까?”

병부상서의 심상치 않은 표정에 옥환은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직접적으로 뭐라고 말씀드릴 순 없습니다. 이것은 그저 저의 개인적인 의견일 뿐이니 너무 깊게 생각하지는 마십시오.”

옥환은 그렇게 선을 그었으나 듣는 쪽은 그렇게 받아들일 리 없었다. 승헌의 첩이면서 백고와의 친분도 있으며, 세상에서 가장 현명하다는 금야 선생이 하는 말이었다. 옥환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그들에게는 기정사실과도 마찬가지였다. 옥환 역시 그것을 알고 있기에 이용하는 것이었고.

“실은 아까 병부상서의 아드님을 진찰하면서 몇 가지를 여쭈었습니다.”

“예? 하면 자리를 비켜달라 하신 것은…….”

“아마 아드님께서 지금껏 침묵을 고수하고 계신 건 부친인 병부상서께 누를 끼치고 싶지 않기 때문일 겁니다. 해서 그러한 청을 드렸던 것이고요.”

침통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는 병부상서를 바라보던 옥환이 말을 이었다.

“주장 외에 그를 보좌할 부장을 정하는 것은 대장군의 권한이지 않았습니까. 군사들 또한 대장군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을 것이고. 게다가 이번 부장이 누구였습니까. 하나는 대장군의 조카사위였고, 또 하나는 대장군과 친한 변 장군의 동생 아니었습니까.”

“해서요?”

“병부상서의 아드님께 물으니, 원정 내내 두 사람은 계속 아드님의 명령에 불복종하고 독자적인 행동을 벌였다고 합니다.”

병부상서의 아들과 독대했을 때, 옥환은 마치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처럼 그에게 정곡을 찌르는 질문만을 던졌다. 침묵을 지키던 병부상서의 아들은 옥환이 이미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순순히 당시의 상황을 털어놓았다. 옥환의 예상대로, 이번 일은 백청의 손바닥 위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천구족의 개입이나 서국의 패배는 그에게 아무런 변수도 아니었던 것이다.

“아드님은 주장으로서 갈등을 봉합하려 애를 썼지만, 두 사람에게 병부상서와 대장군 부인의 얘길 들은 뒤로는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고 합니다. 아드님께선 차마 부친인 병부상서께는 그러한 말을 올릴 수가 없어서…….”

말을 잇던 옥환은 순간 병부상서가 탁자를 쾅 내리치는 바람에 하던 말을 멈추었다. 병부상서의 눈은 취기와 더불어 분노로 시뻘게져 있었다.

“태사께서는 무슨 말씀이 하고 싶은 것입니까? 백청 그자가…… 제 아들이 일부러 지게 만들었다는 것입니까? 고작 20년 전의, 사실 여부도 확인되지 않은 일 때문에요?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벼, 병부상서. 진정하십시오.”

“예. 태사께선 일부러 지게 만들었다기보다는, 그런 일이 겹쳐서 패하게 되었다는 말씀이시겠지요. 태사. 이 얘긴 이만하는 것으로…….”

뒤늦게 문관들이 사태를 수습하려 했으나 옥환이 차분하게 물었다.

“하면 병부상서께선 왜 이번 원정이 이처럼 크게 실패했다고 보십니까? 그저 천구족 때문에? 그래 봤자 천구족은 말이나 잘 타는 오랑캐일 뿐입니다. 서국군이 그런 자들에게 전멸을 당할 정도로 약하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태사!”

“전하께선 대장군을 시켜 이번 전쟁의 패인을 조사하셨었습니다. 그리고 대장군은 모든 죄를 병부상서의 아드님에게 덮어씌웠고요. 물론 그들도 이렇게 패할 생각은 없었을 겁니다. 그저 병부상서의 아드님이 실수를 저지르도록 하고, 그 수습은 본인들이 하려는 속셈이었겠지요. 한데 예기치 못한 패배를 맞게 되자, 그들은 병부상서의 아들을 방패막이로 세워 빠르게 일을 끝맺는 게 낫다고 생각한 겁니다.”

“…….”

여전히 미약한 의심이 남은 병부상서에게 옥환이 결정적인 이야기를 꺼냈다.

“병부상서. 대장군은 이번 원정을 간절히 원하고 계셨습니다. 저를 협박해 제가 반대하지 못하도록 할 정도로요.”

“예? 협박이라니요?”

“하면 그때 태사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던 것은…….”

문관들의 휘둥그레진 눈을 보며 옥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장탄식이 쏟아졌다. 제게 향해진 연민 어린 시선에 옥환은 행여 화제가 자신으로 바뀌지 않도록 얼른 말을 꺼냈다.

“협박의 자세한 내용까지 알려드릴 순 없으나, 그 탓에 저는 병부상서가 지금 겪고 계신 것과 같은 일을 겪었습니다. 대장군이 이렇게까지 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이번 일을 모두 계획해 놓은 게 아니라면 말입니다.”

“어찌…….”

“……저는 누굴 모함할 생각도 없고, 조정에 분란을 일으킬 생각도 없습니다. 그저 의심의 싹은 뿌리를 뽑자는 것입니다. 그것이 병부상서의 아드님을 위해서도, 또 이 나라를 위해서도 꼭 필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술잔을 기울이며 푸념을 늘어놓던 대화의 장은 어느샌가 옥환이 주도하는 모의의 장이 되어 있었다. 줄곧 안절부절못하던 중서령이 그만하자며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으나, 누구 하나 그를 따라 일어서는 이는 없었다.

“나라와 백성을 생각하자면 패배를 종용해서는 아니 되겠지요. 하나, 그 패배조차 이용하는 게 정치판입니다. 솔직히 말해 길천에서의 패배는 의외의 결과이기는 하지만 서국의 병력에 큰 타격은 아닙니다. 더 적나라하게 말씀드릴까요? 이번 패배는, 최근 불리했던 무관들에게는 도리어 절호의 기회입니다.”

“하지만…….”

“사실 여기 계신 분들 모두 한 번씩은 의심하시지 않았습니까? 무관들의 움직임이 너무도 조직적이고 신속하다는 것을요. 마치 질 것을 알기라도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순간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옥환은 그 어느 때보다 냉철하고, 또한 날카로웠다. 중서령을 비롯한 문관들은 지금껏 본 적 없는 진짜 금야 선생의 모습에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그런 그의 말에 섣불리 반박할 수 있는 대담한 이는 몇 없었다.

“그렇다고 칩시다. 해서 태사께서는 뭘 어떻게 하자는 말씀이십니까?”

다시 자리에 앉은 중서령이 용기를 내 그렇게 묻자 옥환이 태연한 얼굴로 생각지도 못한 방법을 입에 담았다.

“대장군을 고발하는 것이지요. 병부상서께서 직접, 문무백관과 전하의 앞에서 말입니다.”

충격적인 방법이었으나 그만큼 효과가 확실한 방법이기도 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라면 승헌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고, 이번 일의 당사자인 병부상서가 나선다면 고발에 대한 명분도 선다.

하나 방금까지 화를 내던 병부상서는 생각보다 더 큰 부담감에 주저함을 내비쳤다.

“……태사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는 알겠습니다. 하나 솔직히 말해서, 저조차도 이번 일을 빨리 끝내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제가 고발을 하게 되면 또 얼마나 큰 파장이 있겠습니까? 게다가 명확한 물증이 있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태사의 말씀대로 아들은 유배를 보내고 저 또한 상서직에서 물러나는 게 최선입니다. 이 이상의 분란은 일으키고 싶지 않습니다.”

조금은 억울한 부분이 있더라도 아들을 위해서 감내하겠다는 병부상서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옥환 또한 병부상서가 쉽게 넘어오지 않으리라고 예상한 바였다. 하면 이제 옥환이 어찌 나올 것인가. 모두 그것을 궁금해하며 옥환을 보는데 옥환이 뜻밖의 말을 꺼냈다.

“정 그러시다면, 더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의외의 반응에 거절의 뜻을 내비쳤던 병부상서 본인조차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하나 옥환은 허무하리만치 깔끔하게 물러났다.

“어찌 병부상서의 마음을 모르겠습니까. 저도 병부상서나 아드님이 이 이상 힘들어지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습니다. 더구나 아직 국문이 남아 있지 않습니까. 국문 결과가 어찌 나올지 모르는 일이니, 오늘 제가 드린 말씀은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 뒤 옥환은 백청의 의혹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다. 문관들은 내내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었으나 병부상서가 하지 않겠다고 한 일이니 더는 무어라 할 수도 없었다. 그렇게 얼마쯤 더 시간을 보낸 그들은 곧 해가 저물자 병부상서의 집을 뒤로했다.

궁으로 돌아가는 길, 다른 문관들과도 헤어진 옥환은 중서령과는 같은 방향이라 한동안 함께 걸어갔다.

“저, 태사.”

중서령의 부름에 옥환이 시선을 향했다. 중서령은 마치 목에 가시라도 걸린 듯 몹시 불편한 얼굴로, 고민을 하는 듯하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오늘…… 왜 그런 말씀을 하신 것입니까?”

“왜냐니요. 의문점이 있으니 그에 대해 여러분의 의견을 듣고 싶어서 그런 것이지요. 병부상서가 걱정이 되기도 하고.”

“……다른 이들의 의견을 듣기보다는 태사의 의견을 말하는 자리였던 것 같습니다만.”

옥환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 묻는 눈으로 중서령을 바라보았다. 중서령은 미간을 찌푸린 채 바닥을 내려다보다가 이내 옥환의 어깨를 탁탁 쳤다.

“아닙니다. 대장군을 비롯한 무관들의 행동이 의아하기는 했지요. 태사께서 의심하시는 것도 당연합니다. 병부상서의 상황이 다소 억울한 것도 맞고요.”

옥환은 “예.” 하고 짧게 대꾸했다. 그러고는 궁문 앞에서 중서령과 헤어지려는데, 중서령이 마지막으로 작게 덧붙였다.

“하지만 오늘 그 이상으로 병부상서를 부추기시지 않은 것은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계속해서 병부상서를 부추기셨다면 저도 무관들과 같은 눈으로 태사를 봤을 것만 같아서요.”

옥환이 눈을 크게 뜨고 중서령을 쳐다보았으나 중서령은 멋쩍게 웃고는 내일 보자며 갈 길을 가 버렸다. 중서령이 자신을 의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곧 일이 벌어지면 그의 의심은 더더욱 커지겠지. 하나 옥환은 멈출 생각 따윈 없었다. 자신이 병부상서를 더 부추기지 않은 건, 그래 봤자 지금은 역효과만 날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번 일은 병부상서가 주도해야 한다. 그렇다면 병부상서가 자신을 찾아오게 만들어야 했다. 오늘 일은 그것을 위한 미끼였을 뿐이다.

‘그리고 그자는 반드시 나를 찾아오겠지. 그가 멈춘다 해도, 무관들은 결코 멈추지 않을 테니까.’

옥환은 그렇게 확신하며 어둠에 파묻힌 길을 나아갔다. 그리고 머잖아, 옥환의 모습 역시 어둠에 파묻혀 사라졌다.

그리고 다음 날 열린 국문에서, 백청이 준비한 철저한 계략에 당한 병부상서의 아들은 옥환이 그랬듯 병사들에게 붙들려 옥으로 끌려갔다.

***

조회의 시작.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의 등장에 일대에는 파란이 일었다. 그 주인공은 다름 아닌 병부상서였다. 내내 조정에 나오지 않던 그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승헌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으나 그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승헌에게 절을 올린 병부상서는 그대로 일어나는 대신, 제 이마를 바닥에 쿵 찧었다.

“전하! 신 심형은, 이번 패배의 책임을 지고 병부상서의 직에서 물러나겠나이다!”

“……병부상서. 일단은 일어나지.”

승헌이 인상을 찌푸린 채 지시하자 병부상서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이마에서 철철 흐르는 피에 몇몇 신하들이 당황해서 웅성거렸다.

“태감. 가서 태의를 불러와.”

승헌의 지시에 환관이 얼른 물러나려는데 병부상서가 쩌렁쩌렁하게 외쳤다.

“전하! 소신은 죽어도 상관없사옵니다! 하나, 부족한 자식 놈이었다고 해도 소신의 아들이 이대로 역적이 되어 원통하게 죽기를 바라지는 않사옵니다!”

평소의 유약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오직 아들을 위해 제 머리까지 깬 병부상서의 모습에 그곳에 있던 이들 모두가 크게 놀랐다. 도대체 무엇이 그를 저렇게 만들었는지 의문이 들기도 했다. 그리고 그것을 아는 자는 단 하나, 옥환뿐이었다.

이틀 전, 옥환의 앞으로 서찰이 하나 도착했다. 보낸 이는 다름 아닌 병부상서였다. 아들을 죽게 둘 수 없었던 그가 끝내 옥환을 택한 것이었다. 옥환은 곧바로 그에게 답신을 적어 보냈다. 백청을 무너뜨릴, 그에겐 한없이 치명적인 정보였다.

이윽고 옥환은 상념에서 깨어 승헌이 어찌 나올지를 주시했다. 혼란 속에서도 일말의 동요를 보이지 않고 한겨울 서릿발 같은 눈으로 병부상서를 응시하던 승헌은, 이내 눈빛과는 다른 부드러운 어조로 병부상서를 달랬다.

“병부상서. 어찌 그리 섣부른 선택을 하는가. 과인은 아직 경의 아들을 처형하겠다고 하진 않았어. 하나 그가 이번 원정의 주장이었고, 원정은 실패했으니 마땅히 그 책임은 져야 하는 것 아니겠나. 과인은 이런 일로 인재를 잃고 싶지는 않아. 하니 경의 사직은 받아들이지 않겠네.”

승헌이 병부상서의 사직을 승낙하지 않겠다는 말에 신하들 사이에는 미묘한 기류가 흘렀다. 백청이 노린 것은 비단 병부상서의 아들뿐 아니라 병부상서 본인이기도 했기에, 병부상서를 감싸는 승헌의 태도는 백청의 계획에 큰 방해가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병부상서 또한 마찬가지였다. 옥환에게 서찰을 쓸 때는 그만한 각오를 가지고 임한 것이었으나, 그럼에도 여기까지 오기로 마음먹는 데에는 적지 않은 용기가 필요했다. 더는 잃을 것도 없다지만 여전히 두려움은 가시지 않았다. 자신이 지금부터 하려는 일은 조정은 물론이거니와 서국 자체를 흔들어 버릴 수도 있었다. 자신의 목숨을 걸지 않고서는 덤벼서도 안 될 일이었다. 하나 그 또한 아비로서, 하나뿐인 아들이 죽는 모습을 지켜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이제 더는 물러설 수 없다. 병부상서는 그야말로 배수진을 친 셈이었다.

이윽고 그가 스무 해 가까이 키워 온 아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마침내 그 말을 입에 담았다.

“전하! 바라옵건대 대장군 백청을 이번 패배의 배후로서 조사해 주시옵소서!”

“……뭐……?”

생각지도 못한 청에 정전 안의 모든 이가 경악했다. 그중에서도 백청은 눈을 부릅뜬 채 분노와 수치심으로 사지를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공신가 출신에, 무관들의 수장으로 어떤 때는 무관들에게 왕인 승헌보다도 더 큰 존재감을 떨쳤던 그였다. 한데 이런 터무니없는 모함을 당했으니 그 억울함은 극에 달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 승헌은 빠르게 주위를 단속하고는 병부상서에게 하문했다.

“경이 그런 청을 올린 것에는 타당한 연유가 있는가? 만일 근거도 없이 감히 대장군을 고발한 것이라면, 그만한 벌을 받을 각오를 해야 할 것이네.”

“물론 증좌는 없사옵니다. 하나 심증이라면 있사옵니다. 소신은 아들이 죽게 되어 미친 것도 아니고, 소신이 저지르지도 않은 일로 관직에서 물러나게 돼 억하심정을 가진 것도 아니옵니다. 소신은 그 어느 때보다 멀쩡하옵니다. 소신의 고발로 인해 벌어질 모든 상황을 책임질 각오 또한 되어 있사옵니다. 조사가 시작되면 소신이 아는 것 모두를 고해 올릴 것이옵니다.”

“…….”

승헌이 생각에 잠긴 얼굴로 병부상서를 내려다보았다. 시간이 흘러도 승헌의 입에서 쉽사리 거절의 말이 나오지 않자 결국 백청이 나섰다.

“전하! 신 백청, 하늘에 대고 맹세컨대 그 어떤 이유로도 조국을 배신할 마음은 품은 적이 없나이다! 이번 패배로 죽은 병사들이 수만이옵니다! 만일 신이 이번 일과 관련이 있다면 어찌 그들과 그들의 가족들에게 뻔뻔스레 얼굴을 들 수 있겠나이까? 혹여라도 그런 극악무도한 일이 있었다면 신은 신의 손으로 목숨을 끊을 것이옵니다!”

백청의 기세는 그야말로 하늘을 찔렀다. 그만큼 결백하다는 뜻으로 볼 수도 있었으나, 병부상서 또한 목숨을 걸었으니 그의 주장을 마냥 묵살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승헌의 시름이 깊어졌다.

잠자코 물러난 채 이 상황을 관망 중인 옥환은 승헌이 결국 병부상서의 청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만일 승헌이 백청을 존중해 이 일을 그저 묻고 넘어간다면, 병부상서가 단념한다 해도 다른 문관들의 마음속에는 백청을 향한 의심이 남을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병부상서의 아들은 조사해 놓고 백청은 조사하지 않았으니 승헌이 무관들을 감싼다는 생각에 승헌을 향한 충심 또한 흔들릴 수도 있다.

그것은 작은 균열에 불과하겠지만, 공든 탑이 무너지는 것은 결국 그 작은 균열에서부터였다. 승헌은 똑똑한 군주이기에 더더욱 그것을 간과할 수 없으리라. 물론 옥환이 바로 그 점을 파고들어 공든 탑을 무너뜨리려 한다는 걸 그로서는 알 리가 없었겠지만.

그렇게 침묵 속에서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이 문제는…… 과인에게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군. 일단 두 사람은 물러가게. 오늘 조회는 여기까지 하도록 하지.”

승헌은 생각 끝에 그렇게 통보하고는 그대로 정전을 나가 버렸다. 승헌이 시간을 벌기는 했으나 이 문제는 오래 끌어서 좋을 일이 아니었다. 가까운 시일 내에 그도 결정을 내려야 할 것이다.

정전을 나가는 그의 어깨가 유난히 무거워 보였던 것을 회상하던 옥환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병부상서의 주위에 모여든 문관 무리로 다가갔다.

“병부상서, 괜찮으십니까? 어서 빨리 의원에게 보이시지요.”

병부상서보다 더 안색이 창백해진 문하시중이 손수건으로 병부상서의 이마를 지혈한 채 걱정스레 말했다. 병부상서는 일부러인지 옥환 쪽은 쳐다보지 않았다. 이윽고 그가 다른 문관들의 부축을 받아 정전을 떠나는 모습을 바라보던 옥환 역시 곧 처소로 돌아가려 문 쪽으로 돌아섰다. 그런데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 있던 중서령과 문득 눈이 마주쳤다.

중서령은 옥환의 시선을 피하더니 얼른 정전을 나갔다. 평소와 다른 모습이었으나 중서령이 혹 자신을 의심하더라도 그에게 자신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그렇게 하기 위해, 무려 일 년이나 적국에 거짓 충성을 바쳤던 것이기에.

정전의 문턱을 넘은 옥환은 이번에는 백청과 그 휘하 장수들을 만났다. 백청은 옥환을 보고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으나, 그의 눈빛은 오금이 저릴 만큼 살벌했다. 필시 이 일을 뒤에서 조종한 것이 옥환임을 의심하고 있는 것이었다.

온통 저를 의심하는 자들뿐이었으나 옥환은 걱정하지 않았다. 아무런 의심도 없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큰 위험을 짊어져야 함을 알았기에 심혈을 기울였던 것이 아닌가. 백청을 망가뜨릴 수만 있다면 제 목숨은 아깝지 않았다.

하나 그렇게 끄떡없던 옥환의 결심은, 제 처소에 와서 저를 기다리고 있는 승헌을 보는 순간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평소와 달리 침통한 얼굴로 찻잔을 내려다보고 있는 승헌의 모습에 옥환은 몹시도 동요했다.

“……전하.”

한참을 망설이던 옥환이 조심스레 부르자 승헌이 고개를 들고는 미소를 지었다.

“옥환. 아직도 내게 화났나?”

“억울하게 죽은 아이는 어떻게 해도 되살아나지 않을 테니까요.”

피곤한 얼굴로 눈을 지그시 감은 승헌이 이내 자리에서 일어섰다. 한데 옥환이 승헌의 옷소매를 붙잡았다.

“하나, 그것이 어찌 전하의 탓이겠습니까.”

“…….”

승헌은 말없이 옥환을 응시했다. 언제까지 승헌과 냉랭한 관계로 지낼 수는 없었다. 수많은 이의 의심을 받는 상황에서 승헌과의 관계는 앞으로의 계획에 큰 영향을 끼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자신이 서국에서 지내는 한은 승헌과 좋게 지내 나쁠 게 없었다. 나중에 백청을 쳐내기 위해서라면 더더욱 그랬다. 그리고 또…….

옥환은 그렇게 승헌을 붙잡아야 하는 이유를 몇 가지나 생각해 냈다.

승헌이 다시 자리에 앉으니 옥환이 고개를 숙이고 고했다.

“송구하지만 먼저 환복을 하고 오겠습니다.”

“안 그래도 돼.”

“관복을 입고 있으면 제대로 된 첩이 아니지 않습니까.”

승헌은 다소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옥환이 자신의 앞에서 신하가 아닌 첩으로 있겠노라고 말한 것이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방금 있었던 일로 자신에게 연민이 들기라도 했나 싶어 승헌은 피식 웃었다. 하나 그리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이윽고 옷을 갈아입은 옥환은 승헌의 앞에 조용히 앉았다. 승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옥환 역시 함부로 조언을 하려 하거나 격려의 말을 건네지 않았다. 하나 침묵이 오래 이어지자 고민하던 옥환이 입을 열었다.

“전하. 실은 제가 하인한테 손금에 대해 배웠습니다.”

“……뭐?”

“감히 군왕의 손금을 볼 수는 없으니, 제 손금을 보여드리겠습니다.”

그러더니 옥환은 상 위에 제 손을 올려놓았다. 뜬금없는 행동에 승헌의 얼굴에 웃음기가 어렸다. 이윽고 승헌은 “그래서 그대의 손금이 어떤데?” 하고 물었다.

“저도 하인에게 들은 것인데, 여기 이게 혼인선이라고 합니다.”

“이걸로 혼인을 하는지 알 수 있는 건가?”

“예. 선의 개수에 따라 혼인의 횟수를 알 수 있고, 선이 길면 상대와의 정이 깊다고 합니다.”

승헌은 옥환의 손바닥을 유심히 살피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그렇다면 그대는 세 번이나 혼인을 하는 데다가, 상대에게 정도 안 주는 매정한 이로군.”

“예?”

당황한 옥환이 자신의 손바닥을 보려고 하자 승헌이 큰소리로 웃었다. 그제야 옥환은 승헌이 장난을 쳤다는 것을 깨닫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로 제 손금이 그랬다면 도리어 분위기가 나빠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사실 하인에게 지나가듯 듣기만 했지 제 손금을 볼 생각은 하지도 않았던 터라, 옥환은 행여 이걸로 분위기가 더 이상해지는 건 아닌지 걱정하던 차였다.

이윽고 승헌은 여전히 옥환의 손을 쥔 채 천천히 손금을 짚었다.

“그대는 한 사람과 혼인해서, 평생 그 사람을 깊이 사랑할 거야.”

“…….”

자신의 손을 자상하게 바라보는 승헌을, 옥환은 멍하니 응시했다. 어쩐지 가슴이 아렸다. 승헌은 마치 ‘그 사람’이 자신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는 것만 같았다. 옥환이 사랑할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는 걸.

가느다란 바늘에 찔리는 듯한 불편한 감각에 옥환은 힘을 주어 제 손을 빼냈다.

“그저 장난일 뿐입니다. 이런 선으로 모든 것이 정해진다면 삶이 이리 각박하지도 않겠지요.”

“그대가 먼저 하자고 해 놓고는 어찌 그래?”

“재미가 없어져서 그렇습니다.”

“아무튼 간에.”

승헌은 피식 웃고는 다시금 옥환의 손을 끌어당겼다. 옥환이 또 뭐를 보려고 그러시냐며 퉁명스레 물으니 승헌이 태연자약하게 대꾸했다.

“그대의 고운 손을 보려고 그러지.”

“그저 평범한 손일 뿐입니다.”

“아니야. 고와, 옥환.”

승헌의 눈은 그가 쥔 새하얀 손을 바라보고 있었으나, 옥환은 그가 실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겉으로는 웃고 있어도 속이 편할 리 없었다. 이것은 다 자신이 벌인 일이었다. 그걸 알게 되면 승헌은 이렇게 다정하게 굴지도, 제게 곱다고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전처럼 불같이 화를 내며 잔인한 말만 하겠지.

그렇게 생각할 때마다 옥환의 마음은 한없이 답답해졌다. 체한 것처럼 가슴이 먹먹하고 숨을 쉬는 것이 불편해졌다. 이것은 죄책감일까. 아니면 자꾸만 이 사내에게 흔들리는 자신을 향한 분노인가. 설마하니 이렇게까지 정이 들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는데.

그럼에도 옥환은 제 혼란스러운 감정을 미뤄둔 채 남은 한 손을 들어 승헌의 손 위에 살포시 올렸다. 이것은 연기일 뿐이었다. 그런 ‘척’이었다.

하나 승헌은 의심하는 일 없이 고개를 들고 미소 지었다.

“그대는 강하지만, 역시 걱정이 되는군.”

“무엇이 말씀이십니까?”

“정이 너무 많지 않나. 나 말고 다른 사내에게도 이럴까 봐 걱정이야.”

일순 옥환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하나 그것은 찰나에 불과했을 뿐, 평정을 가장한 옥환은 승헌의 첩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전처럼.

“제가 뭐하러 사내의 손을 잡겠습니까?”

“하면 내 손은 뭐하러 잡았나?”

“전하하고 다른 사내하고 같습니까?”

옥환의 능청스러운 대꾸에 승헌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승헌은 제 손등 위에 올라가 있는 옥환의 손을 제대로 쥐며 말했다.

“그대가 이리 사내의 마음을 잘 달래니 걱정이 안 되고 배기나.”

승헌의 다정한 시선에 옥환의 기분이 가라앉았다. 그에게 잡혀 있는 양손도 갑자기 답답하게만 여겨졌다. 옥환은 굳어진 제 표정이 승헌에게 보이지 않길 바라며 슬그머니 머리를 숙였다.

승헌은 그런 옥환을 보려는 듯 고개를 내리고 눈을 맞춘 채 물었다.

“옥환. 내게만 이리하겠다고 약속하겠나?”

“……전하 말고 또 누구에게 하겠습니까.”

옥환의 퉁명스럽지만 그다운 대답에 승헌이 작게 웃었다. 그 미소에 옥환은 무의식적으로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미소라고 하기도 애매한 것이었으나 지극히 오랜만에 보는 옥환의 미소에 잠시 놀란 듯하던 승헌은 냉큼 옥환에게 입을 맞추었다. 옥환은 어깨를 움찔했으나 승헌을 밀어내지는 않았다.

두 개의 입술은 부드럽게 맞물리는가 싶더니, 이내 진득하게 달라붙어 서로를 탐했다. 그렇게 한참을 접문에 집중하던 승헌은 잠시 입술을 떼고는 자신들을 방해하는 상을 치워 버린 뒤 아까보다 더 거침없이 옥환을 밀어붙였다. 결국 옥환은 승헌의 힘에 못 이겨 풀썩 쓰러졌고, 승헌은 그런 옥환의 위로 올라가 그대로 다시 입을 맞추었다.

승헌의 혀는 옥환의 입안을 파고들어 치열을 훑고 여린 살들을 문질렀다. 그 격렬한 기세를 겨우 따라가면서도 옥환은 승헌의 옷깃을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 이윽고 승헌이 잠시 입술을 떼더니 작게 중얼거렸다.

“멈춰야 하는데.”

하나 말과는 달리 승헌은 여전히 옥환의 이마와 뺨에 연신 입을 맞추고 있었다. 다만 그는 옥환의 옷을 벗기거나 옥환을 그 이상 만지려 들지는 않았다. 옥환은 주저하다가 승헌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더 하셔도 됩니다.”

예상치 못한 옥환의 행동에 승헌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옥환은 민망한 듯 시선을 다른 곳에 두고 있었다. 승헌은 그런 옥환의 턱을 잡아 자신을 보게 만든 뒤 물었다.

“내가 얼마나 참았는지 알고 말하는 건가?”

“……글쎄요.”

“글쎄요?”

승헌은 코웃음을 쳤다. 저를 유혹할 땐 언제고 또 이렇게 한발 물러나는 옥환의 태도가 승헌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이윽고 그는 일부러 심술을 부리듯 옥환의 꽁꽁 싸인 옷깃을 활짝 열어젖히고는 흰 가슴 위의 돌기를 양손으로 잡고 비틀었다. 그러자 옥환의 깨끗한 미간 사이가 구겨지며 입술 사이로 짧은 숨이 터져 나왔다. 여전히 제 가슴이 뭐가 그리 좋은지는 이해할 수 없었으나, 이제는 옥환도 승헌이 가슴을 애무할 때마다 견디기 힘든 쾌감을 느꼈다. 이내 부드럽기만 하던 유두가 단단해지는 모양새에 승헌이 만족한 미소를 짓더니 그곳을 입으로 물었다.

“응…….”

옥환은 서둘러 입술을 깨물었으나 다 누르지 못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승헌이 혀를 움직일 때마다 그와는 상관없는 다리 사이로 자꾸만 열이 몰렸다. 그래도 몇 번 승헌에게 안겼다고, 이제는 몸이 민감해진 모양이었다. 승헌 역시 가슴만 만졌음에도 부풀어 오른 옥환의 바지 앞섬을 보고는 씩 웃더니 옥환의 허리끈으로 손을 가져갔다.

옥환은 잠시 당황한 표정으로 자신의 옷을 벗기는 승헌의 손길을 지켜보다가 곧 몸의 힘을 풀었다. 접문을 허락한 것도, 그가 옷을 벗기게 두는 것도, 그리고 그와 몸을 섞는 것도 다 벽국을 위해서였다. 행여 승헌이 자신이 준비한 난관을 돌파할 방안을 생각해 내지 못하도록, 그의 관심을 저에게 돌리려는 것뿐이다. 옥환은 반쯤 벗은 자신을 안고 침상으로 향하는 승헌의 옆얼굴을 올려다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이윽고 침상 위에 옥환을 내려놓은 승헌이 그의 양다리를 벌렸다. 침상에 상반신을 기댄 채 다리를 벌리고 앉게 된 옥환은 민망함에 고개를 돌렸다. 한데 승헌이 그의 턱을 잡아 시선을 맞추고는 말했다.

“그러고 보니 처음엔 그대가 직접 밑준비를 했었지. 이번에도 한번 해 보겠나?”

그 짓궂은 제안에 옥환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옥환이 승헌을 원망스럽게 노려보았으나, 옥환의 자존심 강한 성격을 잘 아는 승헌은 태연하게 옆에 놓인 서랍 안에서 향유를 꺼내 옥환의 둔부를 적셨다. 그 끈적하고 차가운 감촉에 옥환이 인상을 썼다.

“자, 손가락 넣어 봐.”

“……전하.”

“왜. 할 수 있잖아. 아니면 내가 해 주는 게 좋나? 내가 해 주는 게 좋다고 말한다면 다시 생각해 볼 수도 있는데.”

물론 승헌은 옥환의 자존심에 절대 그런 말을 하지는 않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그 예상대로, 옥환은 머뭇거리면서도 결국 제 손에 향유를 부어 적신 뒤 둔부의 입구로 젖은 손을 가져갔다.

잠시 동안의 망설임 후, 하얗고 긴 중지가 조심스럽게 구멍을 벌려 슬금슬금 내부로 파고들었다. 붓을 쥐거나 찻잔을 들던 그 고운 손가락이 스스로 가장 은밀한 곳에 들어가는 모습을 승헌은 한 장면도 빼놓지 않으려는 듯 집요하게 응시했다. 그 시선에 수치심을 느끼며, 옥환은 천천히 손가락을 안으로 밀어 넣었다. 자신의 손가락에 달라붙는 내벽의 감촉을 느끼자 낯이 뜨거워졌다.

“옥환. 날 하루 종일 기다리게 할 셈인가?”

미적거리는 손가락의 움직임에 승헌이 보란 듯이 비아냥거렸다. 옥환이 눈을 매섭게 치떴으나 아무리 그래도 승헌의 앞에서 제 밀부를 보란 듯이 후벼 댈 정도로 낯짝이 두껍지는 않았다. 글쎄요, 그 한마디가 이런 사태를 만들 줄 알았다면 옥환도 좀 더 신중히 말을 골랐을 것이다.

옥환이 난처함에 붉은 입술을 지그시 깨무는데, 손가락 하나를 겨우 머금은 구멍 안으로 갑작스럽게 이물이 난입했다.

“읏……!”

옥환보다 훨씬 두꺼운 승헌의 손가락이 옥환의 손가락이 든 채로 안을 헤집기 시작했다. 단숨에 옥환의 전신이 뻣뻣해지며 아래로 피가 몰렸다. 승헌이 손가락을 움직일 때마다 제 손가락까지 덩달아 움직이며 내벽이 이리저리로 자극을 받았다. 그 거북하면서도 은밀한 쾌감을 내포한 감각에 옥환의 허리에 힘이 들어갔다. 옥환은 제 손가락이라도 빼 보려 애를 썼으나 승헌은 다른 손으로 옥환의 팔을 쥐고 단단히 고정시켰다.

“정 그러시면 전하가 하시면 되지 않습, 니까……!”

옥환이 손가락의 움직임이 선명하게 느껴지는 안쪽에 신경을 쓰지 않으려 애쓰며 외치자, 승헌이 손가락을 한 바퀴 돌리며 태연하게 대꾸했다.

“그대가 그대 자신과 나의 손가락으로 느끼고 있는 모습이 얼마나 야한 줄 아나?”

옥환은 단박에 인상을 찌푸렸으나 신음을 참느라 더는 대꾸하지 못했다. 질척질척 젖은 소리를 내며 삽입할 공간을 확보하던 승헌이 이내 웃으며 오른쪽 부근의 어딘가를 툭툭 건드렸다.

“아, 으응, 응……!”

“옥환 그대가 좋아하는 곳이잖아. 자, 여기. 손가락으로 느껴 봐. 조금 더 단단하지?”

승헌이 제 손가락을 옥환의 손가락에 감아 특정 부위를 쿡쿡 찔렀다. 손끝에 느껴지는 묘한 감촉과 절로 허리가 들리는 짜릿한 쾌감에 옥환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승헌은 옥환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새를 틈타 손가락 하나를 더 밀어 넣었다. 자신의 손가락을 포함해 어느새 세 개의 손가락이 안에 들어와 있었다. 옥환은 한층 더 강해진 자극에 온몸에 열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옥환, 어찌 손가락 좀 넣어 준 것으로 이렇게나 허리를 들썩이나? 그렇게 하고 싶었어?”

“하고 싶었던, 게 아니라…….”

“한데 왜 시치미를 떼. 그대도 줄곧 참았으면서.”

그렇게 말한 승헌이 돌연 손가락을 쑥 빼더니 용포를 벗어 던지고 바지를 내려 제 발기한 양물을 꺼내 들었다. 언제 봐도 감당이 되지 않는 크기에 옥환이 침을 꼴깍 삼켰으나, 이제는 미약한 기대가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옥환은 자신이 조금쯤 기대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채 얼른 제 손가락부터 뺐다. 저 검게 부푼 살덩이를 넣는 것만으로도 벅찬데, 그 이상은 도저히 무리였으니까.

그리고 역시나, 옥환의 둔부와 승헌의 양물에 향유를 듬뿍 부어 최대한 마찰을 줄였음에도, 삽입을 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아……! 읏, 전하……!”

“조금만 참아, 옥환. 어찌 그렇게 들락날락해도 이리 좁은가?”

“그래서, 싫으십니까?”

승헌의 무릎 위에 앉은 옥환이 헐떡거리며 묻자 승헌이 눈빛을 달리하더니 하반신에 힘을 주었다.

“좋아서 미칠 것 같으니 그러지.”

“앗, 전하, 잠깐……! 갑자기 커지시면……!”

한층 더 부풀어 오른 양물이 내벽과 입구 모두를 압박하기 시작하자 옥환은 숨을 삼키며 승헌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그 행동에 승헌이 픽 웃고는 옥환의 허리를 붙들고 아래로 쑥 내렸다. 반쯤 들어가 있던 양물이 순식간에 뿌리까지 박혔다.

“아흑!”

고통을 동반한 쾌감에 옥환은 눈물이 핑 돌았다. 승헌의 어깨에 기대 숨을 몰아쉬던 옥환이 조금 익숙해지자 뒤늦게 승헌을 노려보며 가슴팍을 가볍게 밀쳤다. 승헌은 능글맞게 웃으며 말했다.

“그대가 얼른 넣어 달라고 하지 않았나.”

“제가 언제, 말입니까.”

“나를 잡아당기지 않았어. 얼른 와 달라는 듯이.”

“그런 적…… 아흐……!”

그런 적 없다고 쏘아붙이려던 옥환은 갑자기 허리를 쳐올리는 승헌의 움직임에 고개를 뒤로 꺾으며 새된 교성을 냈다. 아까 손가락으로 자극했던 곳이 승헌의 혈관이 불거진 기둥과 부푼 귀두에 의해 문질러지는 것을 느끼자 옥환의 허리가 튕겨 올라갔다.

“앗, 으응……!”

승헌이 격렬하게 안쪽을 들쑤시고 밀어 올릴 때마다 옥환의 입에서 간드러진 교성이 새어 나왔다. 접합부가 뜨겁게 녹아내려 하나가 된 듯 달라붙었다. 승헌의 짓궂은 태도에 불만이 일었던 것도 잊었는지 옥환의 몸은 머리와 달리 승헌을 기쁘게 맞았다. 단단해진 남근이 비좁은 공간을 가르고 깊숙한 곳에 닿으면 몸은 기다렸다는 듯 그것을 꽉 조이고 쉬이 놓지 않았다.

달아오른 내벽이 제 양물을 빈틈없이 감싼 것을 느끼며 승헌이 만족스러운 한숨을 흘렸다. 자신이 첫 사내인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옥환의 몸은 자신에게 완전히 맞춰져 있었다. 조이는 강도도, 안쪽의 형태도, 짓눌린 신음까지 모두 승헌을 기쁘게 하기 위한 것 같았다. 이러니 어찌 빠지지 않을 수 있으랴.

승헌은 옥환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그의 여린 피부를 잘근잘근 깨물었다. 연한 묵향이 감각을 사로잡는 듯했다. 그는 어깨를 타고 내려가 쇄골에, 가슴에 계속해서 자국을 남기며 말했다.

“조정이 저 난리인데 왕이란 자가 여기서 첩을 안고 있는 걸 들켰다간 쫓겨날지도 몰라. 지아비를 잃어도 괜찮겠나?”

옥환은 헐떡거리면서도 태연자약하게 대꾸했다.

“쫓겨나도, 같이 쫓겨나겠지요.”

“하면 나와 같이 갈 의향은 있고?”

“타국에 와서 의지할 데가…… 전하 말고 또 어디 있겠습니까.”

최대한 침착하려 안간힘을 썼으나 쾌감에 젖은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승헌은 그 대답이 마음에 들었다. 어떻게든 제 본능을 참아 내려는 모습조차 자극적으로만 여겨졌다.

“그대는 어찌 이리 음란한지.”

“하윽……!”

승헌이 허리에 힘을 주자 옥환이 쓰러질 듯 자지러졌다. 아래가 찡하고 울리며 빠르게 절정이 찾아오고 있었다. 하나 승헌은 그것을 쉬이 허락해 주지 않았다. 저는 몇 번을 해도 모자라건만, 옥환은 한 번을 해도 금세 지쳐버리니 간단히 보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승헌이 선액으로 젖은 옥환의 양물을 움켜쥐고 손으로 끝부분을 틀어막았다. 옥환은 뭉개진 발음으로 승헌에게 놓아 달라 재촉했다.

“안 돼, 옥환. 아직, 더.”

“저, 전하, 아, 아흐, 빨리……!”

승헌이 별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젓더니 삽입의 속도를 올렸다. 물론 옥환은 빨리 손을 놓아 달라는 뜻이었지만 승헌은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고도 남을 인사였다.

“아, 전하! 전하, 그만!”

금방이라도 전부 터질 것만 같은데, 걷잡을 수 없이 부풀어 오를 뿐 해소가 되지 않으니 옥환은 머리가 이상해질 것만 같았다. 아래가 불에 덴 것 같았다. 승헌의 양물이 푹푹 찌르고 들어오는 것이 마치 불에 달군 쇠막대를 쑤셔 넣는 듯한 감각을 불러일으켰다. 옥환은 발버둥 치며 승헌의 등에 손톱을 박았다. 자신이 상처를 내고 있는 상대가 왕이라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제발 빨리, 승헌이 어서 빨리 한계에 다다라 손을 놓아주길 애타게 바랄 뿐이었다.

그리고 그 간절한 마음의 크기만큼, 옥환 역시 하반신에 힘을 주어 승헌의 양물을 힘껏 조였다.

“큭……!”

“아, 전하, 전하―!”

절정을 맞은 승헌이 그제야 손을 놓아주자 옥환은 새된 비명을 지르며 씨물을 쿨럭쿨럭 쏟아냈다. 그와 동시에 둔부의 골 사이가 승헌의 것으로 젖어 드는 감각이 선연했다.

광풍처럼 몰아닥친 쾌감은 그렇게 옥환의 전신을 훑으며 천천히 사그라들었다.

“흣, 으읏…….”

시간이 흘러도 쉬이 가라앉지 않는 고양감에 옥환이 사지를 움찔거렸다. 승헌은 그런 옥환의 몸 이곳저곳에 입술을 대고 자신의 흔적을 남겼다. 그렇게 방 안에 가득했던 열기가 가벼운 후희와 함께 느릿느릿 식어 갔다.

가까스로 흥분이 가라앉자 옥환은 무거운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승헌이 괜찮다며 그를 붙잡아도 그는 기어코 승헌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하나 그는 나오기가 무섭게 곧장 침상 위에 쓰러졌다. 승헌은 그 고집스러운 태도에 고개를 가로저으면서도 하인에게 따뜻한 물과 수건을 가져오라 지시했다. 하인이 대령한 수건을 물에 적신 승헌이 옥환의 몸을 닦으려 하자 그가 몸을 뒤로 빼며 퉁명스레 쏘아붙였다.

“제가 할 수 있습니다.”

“당연히 그러시겠지. 하나 내가 꼭 해 주고 싶으니 허락해 주겠나?”

장난과 진지함이 반반씩 섞인 태도에 옥환이 주저하다가 결국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지금은 손 까딱할 힘도 없어서 자칫하면 하인이 들어올 때까지 발가벗고 누워 있어야 할지도 몰랐다. 물론 제 몸을 정성 들여 닦는 승헌을 보고 있자니 잔소리가 목구멍까지 올라왔으나, 자신이 허락해 놓고는 입을 놀려 뭐하겠나 싶어 그냥 시선을 돌리고 말았다.

이윽고 몸을 다 닦은 승헌이 자신의 몸은 대충 수건으로 훑고는 한쪽에 던져놓은 옥환의 옷을 들고 왔다. 옥환이 눈앞의 광경을 의심하는 듯한 표정으로 승헌을 올려다보자 승헌이 어깨를 으쓱하고는 대꾸했다.

“그대의 나신은 너무 자극이 심해서.”

“군왕께서 손수 옷을 입혀주시니 성은이 망극하여 죽을 것 같습니다.”

“어차피 혼자서는 하지도 못할 거면서 무어 그리 불평이 많은가?”

“몸을 섞은 상대에게 원래 이리 하십니까?”

자신이 풀었던 허리끈을 꼼꼼하게 묶어 주는 승헌을 내려다보며 옥환이 무의식중에 물었다. 승헌은 눈을 가늘게 뜨고 옥환을 쳐다보았다. 옥환은 말실수를 했다고 생각하고는 사과를 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송구합니다. 말이 지나쳤습니다.”

잠시 옥환의 의도를 헤아려 보는 듯하던 승헌이 가볍게 툭 내뱉었다.

“……그대에게만 이리하는 것이니 그리 날 세울 것 없어.”

옥환은 고개를 숙였다. 승헌에게 이처럼 냉랭하게 구는 것이 자신의 복잡한 마음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죄책감과 불편함, 민망함, 그리고…… 이름을 붙일 수 없는 감정. 그 모든 것들 때문이었다. 그저 괜한 이에게 화풀이를 했을 뿐.

옥환은 받은 게 있으니 승헌이 옷을 입는 걸 도와줘야 할까 고민했다. 하나 옥환이 주저하는 사이 옷을 다 갈아입은 승헌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옥환은 당황해서 승헌을 올려다보았다.

“갈 테니 나오지 마. 날이 차군.”

하나 옥환은 곧장 승헌을 따라 일어섰다. 그래도 배웅까지 안 할 수는 없었다. 방금까지 사내의 양물이 오고 갔던 아래가 욱신거리고 허리가 찌르듯 아파 왔으나 옥환은 안간힘으로 버티고 섰다. 승헌은 무어라 말을 하려다가 옥환의 표정을 보고는 단념한 듯 그가 자신을 배웅하게 내버려 두었다.

“옥환. 다음에 오면 그땐 내 손금이 어땠는지 말해 주지.”

“……예. 기다리겠습니다.”

웬일로 옥환이 고분고분 대꾸하자 승헌은 어쩐 일인가 생각하면서도 옥환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고는 떠나갔다. 옥환은 승헌이 완전히 떠나 보이지 않을 때까지 한참을 문 앞에 서 있었다.

승헌의 말대로였다. 날이 너무나도 찼다.

[3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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