七. 적(敵)
겨울이 성큼 다가왔는지 창밖에는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옥환은 창을 조금 연 채 책상 앞에 앉아 기밀문서의 필사본을 읽는 중이었다. 일견 그 모습은 열심히 독서를 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했다. 의심을 피하기 위해 필사본을 책처럼 엮은 덕이었다. 밤마다 잠도 안 자고 보는 것보다는 훨씬 자연스러워 보일 터였다.
사실 옥환이 이것을 처음 읽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이미 그 내용 또한 옥환의 머릿속에 저장된 상태였다. 하나 옥환은 그것을 어떻게 이용해야 할지는 결정하지 못했다. 전쟁이 코앞이었으니 차라리 이 내용을 이용해 벽국에서 먼저 선수를 치게 하는 쪽이 나을 수도 있었다. 예기치 못한 선공에 허점을 찔린 서국은 흔들릴 것이고, 그리되면 벽국은 우위를 점하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옥환은 수많은 계획 중 그 무엇도 섣불리 행동으로 옮길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이 일에는 종소도 연관되어 있었으며 기밀을 이용하게 되면 자신이 배신자란 사실은 서국 내에서도 순식간에 알려질 터였다. 자신의 위험이야 당연히 각오하고 있던 바였고, 벽국을 침공하겠다는 승헌의 결정에 자신의 안일함을 후회했던 것이 얼마 전 일이었다. 한데도 옥환이 이제 와 다시 망설이는 것은 결국 자신이 벌이려는 일 또한 전쟁을 야기할 뿐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태사.”
저를 부르는 하인의 목소리에 기밀을 숨긴 옥환은 그를 안으로 들였다. 어쩐 일이냐 물으니 하인이 멋쩍게 웃으며 무언가를 옥환의 앞에 내놓았다.
“간식으로 화전을 부쳐 왔습니다. 아침도 먹는 둥 마는 둥 하지 않으셨습니까.”
“……난 괜찮으니 자네들끼리 나눠 먹게. 마음만 받겠네.”
“그러지 마시고 조금이라도 드십시오. 최근 날이 부쩍 추워졌는데 매일 잠도 늦게 주무시고 식사도 적게 하시니 다들 걱정이 많습니다.”
“다들? 어떤 사람들이 그리 내 걱정을 하는가?”
옥환이 고개를 갸웃하며 묻자 하인이 민망한 듯 대꾸했다.
“그야 저희들이지요. 태사께서 아랫것들에게도 잘해 주시니 저희 또한 성심을 다해 태사를 모시고 싶은 마음이 큽니다. 한데 태사께서는 워낙 뭘 요구하시는 것도 없고, 도리어 저희가 불편할까 신경을 써 주시니 이런 것이라도 해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인의 진심 어린 고백에 옥환은 넋 나간 얼굴로 그를 응시했다. 사람과 사람 간의 일이었다. 약하든 강하든, 그 사이에서 정이 피어나지 않는다면 거짓이리라. 어느덧 그들과도 일 년 가까이를 함께 해 왔으니, 옥환은 둘째 치고 그들 또한 옥환을 그저 적국에서 온 재상이라고 생각할 수만은 없을 터였다.
전쟁이 일어나면 그들도 모두 휘말리게 될 것이다. 물론 벽국의 백성들을 위해서는 그리하는 게 맞았다. 하나, 어찌 그렇게 맺고 끊을 수 있단 말인가.
그 넝쿨 같은 잔정과 망설임은 옥환의 발목을 붙들고 놓지 않았다. 그리고 그 때문에 옥환은 대업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는 것이었다.
하인이 억지로 두고 간 화전을 젓가락으로 깨작거리던 옥환은 기나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러다가 또 일을 그르치게 되고 나서야 정신을 차릴 텐가.’
이윽고 옥환은 자신의 흐트러진 마음을 책하며 필묵을 꺼냈다. 벽국을 위해 일해야 했다. 그것이 자신의 본분이었다.
“내게 연서라도 쓰려고?”
하나 옥환이 마음을 정하고는 붓을 들기가 무섭게 익숙한 목소리가 그를 방해했다. 옥환이 고개를 들자 승헌이 능청스럽게 웃으며 처소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승헌을 보니 옥환은 공연히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믿고 싶지는 않았으나, 이미 아침에 정전에서 보았던 승헌이 웬일인지 반갑게 여겨졌다. 그 악동 같은 미소도, 뻔뻔한 말투도 꽤나 오랜만이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선 만나기 싫을 줄 알았는데, 싫어야 정상인데, 어찌 이럴까. 이젠 염치도 없어졌나.
한편, 옥환의 뚫어질 듯한 시선을 받던 승헌이 제 얼굴을 가볍게 쓰다듬으며 물었다.
“어찌 그리 보기만 하나? 잘생긴 얼굴 닳을라.”
옥환은 그제야 승헌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고는 싸늘하게 대꾸했다.
“군왕이 너무 오만해서도 안 될 일입니다.”
“그래, 그렇게 독설을 날려야 내 옥환이지.”
태연하게 받아친 승헌이 자리에 앉더니 소매 속에 감춰 온 술병을 턱 하니 내려놓았다. 평소라면 한마디 하고도 남을 옥환이었으나 그는 ‘내 옥환’이라는 말에 당황하느라 잔소리할 시기를 놓치고 말았다. 하나 무심코 눈을 맞은 승헌의 머리를 털어 주던 옥환은 문득 그와의 거리가 너무 가깝다는 것을 깨닫고는 슬그머니 몸을 뒤로 뺐다.
“이런 날은 하다못해 우산이라도 쓰십시오. 태감을 무얼 하였답니까.”
어색함을 감추려 입을 열자 승헌이 옥환의 손을 당겨 어깨에 쌓인 눈도 털게 하고는 말했다.
“그대가 있는데 뭐하러.”
싱거운 소리에 평소처럼 눈을 흘기면서도 옥환의 뺨은 아주 조금 붉어져 있었다.
이윽고 승헌과 마주 앉은 옥환은 무의식중에 다시 승헌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항상 느끼는 것이었지만 조정에서의 승헌과 여기서의 승헌은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조정에서의 승헌은 옥환의 적으로 느껴졌으나, 제 처소를 찾아오는 승헌은 능글맞은 청년에 불과했다. 하나 둘은 결국 같은 사람이라는 걸 옥환도 알고 있었다.
‘차라리 다른 사람이면…… 좋았을까.’
“어허. 자꾸 보면 닳는대도.”
옥환이 다소 의기소침한 얼굴로 저를 보고만 있자 승헌이 짐짓 엄하게 타일렀다. 그래도 여전히 옥환이 표정을 풀지 않으니 고민하던 그가 무언가를 짐작하고는 물었다.
“혹 저번에 찾아왔을 때 인사도 없이 보낸 일로 아직 삐져 있나?”
“……삐져 있다니요.”
“시치미 떼도 소용없어. 환관이 그러던데. 그대가 어지간히 서운한 얼굴로 입까지 삐죽삐죽하더라고.”
“말도 안 되는 유언비어입니다. 그것을 고한 자가 누구입니까? 군왕께 거짓을 고했으니, 따끔히 벌을 내리십시오.”
옥환이 인상을 쓰며 되받아치자 그제야 승헌이 눈웃음을 지었다. 옥환은 그 티 없는 미소를 또다시 멀거니 바라만 보았다. 금세 다시 넋 나간 얼굴을 하는 옥환의 모습에 승헌이 짧은 한숨을 쉬더니 옥환의 코앞으로 다가왔다.
“옥환. 어찌 이리 내 말을 안 듣나? 자꾸 그리 보면 오해해. 아니면, 오해해 주길 바라서 그래?”
“무슨 오해…… 저, 전하!”
옥환은 갑자기 제 웃옷 안으로 쑥 뻗어 온 손에 소스라쳤다. 방금까지 밖에 있던 탓에 차디차게 식은 손이 가슴께를 더듬자 등줄기에 쫙 소름이 돋으며 가슴 끝이 저려 왔다. 그리고 마치 그것을 알기라도 하는 듯, 승헌의 손이 뾰족 솟아오른 돌기를 향했다.
“전하, 밖에 하인들이 있습니다……!”
옥환은 제 품에 파고든 승헌의 손을 빼내려 하며 낮게 외쳤다. 하나 승헌은 그런 것은 하등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줄기차게 옥환의 유두를 매만졌다. 그러다 그의 손이 그곳을 가볍게 비틀자 옥환이 히익 숨을 들이켰다. 어떻게든 뒤로 물러나려다 넘어지려는 옥환의 등을 받아 든 승헌은 그를 품에 안은 채 나직이 물었다.
“내가 그리 보고 싶었어? 응?”
“모, 모릅니다. 그보다 빨리 손…… 을 좀.”
“모르다니. 그대가 모르는 게 어디 있어?”
옥환은 입을 틀어막은 채 고개를 가로저었다. 처음에만 해도 승헌이 가슴을 만지면 그저 간지러운 게 다였는데, 언제부턴가 그곳에 손길이 닿으면 끝이 저릿저릿하고 뜨거워졌다. 다 이 사내 탓이다. 그런 생각에 옥환은 원망을 담아 승헌을 노려보았으나, 그 표독스러운 눈빛은 금세 수치심에 허물어졌다.
“전하, 진짜, 그만…….”
“그러게 내가 적당히 보랬잖아. 그리 곱게 쳐다보는데 어느 사내가 혹하지 않겠나?”
승헌은 그렇게 말하며 옥환의 가슴을 정성스레 쓰다듬었다. 그의 손은 유륜을 살살 덧그리다가 이내 손톱을 세워 단단해진 유두 가운데를 가볍게 긁었다. 그러다 엄지와 검지로 유두를 잡아당기기도 하고, 그곳을 빙글빙글 돌리기도 했다. 그때마다 옥환은 맹수에게 잡힌 사냥감처럼 숨만 삼키며 움찔거릴 뿐이었다.
계속되는 애무에 어느새 옥환의 옷깃은 헐렁하게 풀어져 흰 속살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반쯤 벗은 채 승헌에게 안겨 있는 옥환은 지금 상황이 몹시도 난처했다. 가슴이 이상한 건 둘째 치고 아랫도리로 열이 몰리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이대로라면 승헌이 제 이변을 눈치채고 말 것이다. 이 짓궂은 사내에게 그런 창피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정말 사양하고 싶었다.
승헌에게 굽히고 들어가는 것과 그에게 이 이상의 희롱을 당하는 것 중 어느 쪽이 덜 자존심이 상할지 저울에 단 옥환은 더 생각할 것도 없이 곧바로 전자를 택했다.
“저, 전하, 제가 잘못했습니다. 이제 안 볼 테니, 그만…… 읏, 그만하십시오…….”
“안 보다니, 그런 섭섭한 소리 하지 마.”
하나 옥환의 노력도 무색하게 승헌은 살살 녹아내리는 듯한 어조로 타이르며 이번엔 옥환의 귀를 가볍게 물었다. 부드러운 입술이 귓불을 물어 당기고, 젖은 혀가 귓바퀴를 핥자 옥환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옥환은 승헌에게 애원했다.
“전하, 정말 그만…… 읏, 밖에 다, 들립니다…….”
그렇게 말하는 옥환의 어깨는 가여울 만큼 떨고 있었다. 물론 두렵기보다는 치솟는 욕구를 억누르느라 그런 것이었다.
옥환은 왜 오늘따라 유독 승헌의 손길을 쳐 낼 수 없는지 난감할 따름이었다. 이 사내는 자신의 적이었다. 이제 곧 전쟁이 벌어질 테고, 자신은 도둑질한 기밀을 이용해 서국의 뒤통수를 칠 예정이었다. 애당초 그에게 몸을 주는 것도 그에게서 무언가를 받아 내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그를 속이고, 그를 배신하기 위해.
그걸 다 알면서도, 아니. 다 알아서일지도 모른다. 옥환은 어쩐지 제 마음을 뜻대로 가눌 수가 없었다.
“옥환, 다음엔 매정하게 보내지 않을게. 그대를 보면 일에 집중할 수 없어서 그랬어.”
“저는 정말, 응, 그런 건 아무런 상관도…… 아……!”
말을 잇던 옥환은 승헌이 갑자기 유두를 깨무는 바람에 얼른 입을 틀어막았다. 승헌은 그곳을 물고 빨고, 수많은 자국을 남기기까지 하며 몹시도 집요하게 옥환의 가슴을 탐했다. 어떻게든 소리를 꾹꾹 억누르고 있던 옥환은 승헌의 손이 이번엔 바지 속으로 파고들자 놀라서 펄쩍 뛰었다.
“전하, 거기는 안 됩니다……!”
“이리 젖었는데 어찌하려고 그래.”
승헌이 발기한 채 선액으로 축축해진 옥환의 양물을 만지작거리며 웃었다. 옥환은 새빨개진 얼굴로 “그것은 전하가…….” 하고 승헌을 탓하려 했으나 승헌은 옥환에게 입을 맞추는 것으로 그의 말을 막았다. 달라붙은 입술 사이로 혀와 타액이 섞이고, 승헌의 혀가 옥환의 입안 이곳저곳을 핥고 문질렀다. 그렇게 진득하게 입을 맞추던 승헌이 이내 입술을 떼고는 말했다.
“그래, 내가 잘못했지. 하니 수습도 내가 해야 하지 않겠어?”
옥환은 무척이나 곤란한 눈으로 승헌을 응시했다. 승헌은 내내 참느라 붉어진 옥환의 눈가가 고와서, 그곳에 쪽 입을 맞추고는 웃었다.
“아, 읏…….”
잠시 승헌의 미소에 홀려 있던 옥환은 승헌이 제 바지 속에 넣은 손을 움직이기 시작하자 얼른 얼굴을 가렸다. 그러나 소리가 새어 나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승헌은 부끄러워하는 옥환을 그저 귀엽게 여기며 옥환의 젖은 양물을 부드럽게 쓸어 올렸다. 옥환은 쾌감에 사지가 떨리는 것을 느끼며 저도 모르게 승헌의 품에 매달렸다. 승헌은 그런 옥환을 단단히 끌어안고 속삭였다.
“기분 좋아?”
“시, 싫습니다. 전하, 전하가 마음, 대로, 흐읏…….”
갑자기 승헌이 애무의 속도를 올리는 바람에 옥환은 말을 끝내지 못하고 제 얼굴을 승헌의 가슴에 파묻었다. 승헌이 옥환의 양물을 위아래로 쓰다듬을 때마다 옥환은 승헌의 가슴에 대고 흐느꼈다. 눈처럼 하얀 피부는 어느새 잘 익은 복숭앗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승헌이 만지고 물었던 가슴은 산사 열매처럼 삐죽 솟아 발갛게 부어오른 상태였다. 그 음란한 모습에 승헌은 군침을 삼켰다. 이 탐스러운 몸을 당장에라도 삼키고 싶은 충동이 그의 안에서 격렬하게 일었다.
“전하, 이제 그만, 손을 떼 주십시오…….”
“왜. 나올 것 같아?”
옥환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고는 훌쩍이며 말했다.
“저, 전하의, 옷이 더러워집니다.”
승헌은 조금 당황스러웠다. 옥환은 놀라울 정도로 아름답기는 했으나 비유하자면 실존하지 않는 그림 속의 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는 지나치게 완벽했고, 마치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듯도 보였다. 하나 언제부터인지 승헌의 눈에 옥환이 사랑스럽게 보이기 시작했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었으나 가령 지금 같은 때가 그랬다. 그럼 승헌은 옥환을 어찌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졌다. 그를 만지고, 물고 빨고, 한껏 귀여워해 주고 싶은 한편, 그냥 한입에 먹어치워 버리고 싶은 기분도 들었다.
승헌이 생각에 잠겨 무심코 손을 움직이는 사이 제발 손을 놓아 달라 애타게 호소하던 옥환은 결국 승헌의 손안에서 사정하고 말았다.
“아, 으읏……!”
희멀건 씨물은 승헌의 손을 적시고 그의 옷에 얼룩을 만들었다. 옥환은 수치심에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송구합니다, 전하……. 얼른 가서 닦을 것을 가져오겠습니다.”
옥환이 여전히 작게 떨면서 돌아서는데, 승헌이 그대로 옥환의 허리를 감싸 뒤로 끌어당겼다. 얼떨결에 엎드리는 자세가 된 옥환은 당혹해서 승헌을 돌아보려 했으나, 둔부의 골 사이에 무언가가 닿은 걸 느낀 순간 그대로 굳어 버렸다.
“전하, 정말 안 됩니다. 여기서 하면…… 차라리 침상으로 가십시오.”
“왜. 여기서 하면 문밖의 하인들이 다 들으니까?”
승헌은 태연하게 옥환의 바지를 아래로 쭉 내리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꾸했다.
“어차피 여기나 거기나 다를 바 없어. 그대가 내게 안기는 게 처음 있는 일도 아니고. 하나 혹여라도 누가 그대의 기분을 상하게 하거든 말해. 내 그자의 입을 직접 도려낼 테니.”
그러더니 그는 눈처럼 뽀얀 옥환의 둔부를 양손에 꽉 쥐었다. 옥환은 허리를 움찔하며 숨을 내뱉었다. 승헌의 커다란 손이 볼기를 주무를 때마다 구멍 안쪽이 덩달아 저려 왔다.
“전하께서는, 정사도 보셔야 하고, 지금은 안 됩니다. 밤에, 오십시오…….”
“밤에 또 오라고? 지금 하면서도 밤에도 하고 싶어? 아주 음탕한 첩이로군.”
옥환은 솟아오르는 흥분을 억누르고 가까스로 말을 꺼냈으나 승헌은 얄미운 대답만 골라 할 뿐이었다. 이윽고 승헌은 옥환의 양 볼기를 벌려 그 사이의 틈을 혀로 들쑤셨다. 뒤에 생각지도 못한 것이 닿자 옥환은 새된 비명을 지르며 허리를 들썩였다.
“저, 전하, 무엇을, 안, 안 됩니다!”
놀란 옥환이 뒤로 손을 뻗어 승헌을 밀어내려 했으나 승헌이 구멍을 핥으며 회음을 손으로 지그시 누르는 바람에 옥환의 몸은 균형을 잃고 바닥으로 쓰러졌다. 엉덩이만 위로 들어 올린 자세가 된 옥환은 부끄러운 마음에 얼른 몸을 일으키려다가 다리 사이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자극에 다시 엎어졌다. 그 모습에 승헌이 잠시 혀를 떼고는 근처에 있던 방석을 가져와 옥환의 밑에 깔아 주었다.
“병 주고, 약 주십니까?”
옥환이 승헌을 원망스레 노려보며 물었으나 승헌은 대답 대신 다시금 혀를 놀렸다. 옥환의 머리는 방석 위로 풀썩 쓰러졌다.
“아, 으, 전하……!”
승헌의 혀는 그 거대한 양물보다는 차라리 나았으나, 이것은 이것대로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구석구석을 자극하는 통에 옥환은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거기다 승헌이 누구인가. 다름 아닌 서국의 왕이다. 그런 그가 자신의 뒷구멍 따위를 핥고 있다는 사실은 옥환을 더없이 부끄럽고 송구하게 만들었다. 차마 그런 곳을 입으로 핥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옥환은, 이런 자신이 믿기지는 않았지만 혹 그곳이 더럽지는 않을지가 가장 걱정이었다.
하나 승헌은 흡사 달콤한 즙이 흘러내리는 과육이라도 핥는 듯이 입구와 내벽을 구석구석을 핥고 문지르며 옥환의 안을 타액으로 적셨다. 더불어 손으로도 회음이며 고환을 만지는 바람에 옥환은 빠르게 절정을 향해 가고 있었다.
그렇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끙끙 앓던 옥환의 눈앞이 돌연 소용돌이치며 아래에서부터 무언가가 울컥울컥 치솟기 시작했다. 그 익숙하다면 익숙한 느낌에 옥환은 다급하게 손을 뻗어 제 옷깃을 꽉 물었다. 그리고 그 순간 벼락이 치듯 절정이 찾아왔다.
“으으읍, 흐읍!”
옥환은 전신을 부르르 떨며 쏟아지는 쾌감을 마주했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을 만큼 거센 전율이 옥환의 몸과 마음을 흔들었다. 승헌이 자신을 안으면 안을수록 몸은 점점 더 민감해지고 점점 더 큰 쾌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와 할 때마다 그 전보다 더 황홀한 절정이 옥환을 덮쳐 왔다. 이러다가 정말 승헌의 말대로 몹시 음탕한 몸이 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될 정도였다.
욕정에 무너지는 옥환을 열기 띤 시선으로 지켜보던 승헌은 이제 한계인지 자신의 긴 옷깃을 뒤로 젖혔다. 그러자 터질 것처럼 팽창한 앞섬이 모습을 드러냈다. 승헌이 빠르게 그 안에서 묵직한 살덩이를 꺼내 들었다. 혈관이 불거진 채 거멓게 부푼 그것은 발정이라도 난 것처럼 선액을 질질 흘리며 안으로 들어가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한데 금방이라도 삽입할 것처럼 곧장 젖은 입구로 끝을 갖다 댄 승헌이 갑자기 멈칫했다.
벌써 두 번이나 간 옥환은 제 몸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있었다. 옥환 정도의 체구는 승헌이 들어 올리면 그만이었지만, 제대로 다 열리지 않은 구멍으로 이 큰 것을 넣었다가는 또 옥환이 이틀 정도는 앓아눕게 될 것 같았다.
‘밤에 또 해야 하는데.’
잠시 고민하던 승헌은 숨만 몰아쉬는 옥환을 살며시 끌어안고 가슴을 주무르며 소곤소곤 물었다.
“옥환. 밤에도 해 줄 거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쏘아붙이려던 옥환은 힘이 다하는 바람에 하던 말조차 끝까지 잇지 못했다. 승헌은 자상하게 웃으며 옥환의 등을 따라 천천히 입을 맞추었다. 그 간질간질한 행위에 옥환의 눈동자가 다시 초점을 잃고 흐려지자 승헌이 얼른 말했다.
“이따 밤에도 안긴다고 하면 지금은 안 넣을게.”
“읏, 정말, 이십니까?”
“군왕의 약조를 허투루 듣나?”
평소라면 이래저래 고민을 해볼 옥환이었으나 지금의 그는 코앞에 닥친 위기를 넘기는 데에 급급했다. 옥환이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니 승헌은 만족한 얼굴로 옥환의 꼬리뼈 위에 입을 맞추고는 몸을 들었다.
드디어 끝이 났다는 사실에 안심하던 옥환은 다음 순간, 허벅지 안쪽에 닿아 오는 낯선 감각에 몸을 굳혔다.
“전하, 뭐하시는……?”
“안 넣고 하려면 이리 해야지.”
어느새 승헌의 발기한 양물은 옥환의 허벅지 사이에 끼워져 있었다. 자연스럽게 옥환의 양다리를 붙인 승헌이 이내 그 틈으로 제 양물을 문질렀다. 화들짝 놀란 옥환은 제대로 저항도 못하고 승헌이 하는 대로 몸을 대주었다. 승헌은 그런 옥환에게 바짝 몸을 붙여 왔다.
“읏, 전하…….”
승헌의 행위는 옥환에게 삽입을 할 때와는 또 다른 묘한 쾌감을 불러일으켰다. 저도 모르게 허벅지 사이에 힘이 들어가자 승헌이 짧게 신음하며 더 거세게 허리를 움직였다.
승헌이 허리를 움직일 때마다 옥환의 피부 위로 불끈거리는 남근의 감촉이 그대로 전해졌다. 질척이는 소리와 함께 옥환의 다리 사이가 승헌의 선액으로 젖어 가고 있었다. 삽입하지 않았음에도 절로 그것을 상상하게 만드는 움직임에 옥환의 안쪽이 움직임에 맞추어 무심코 조여들었다 풀어지기를 반복했다.
“응……!”
그리고 그때 승헌이 옥환의 구멍 안으로 검지와 중지를 쑥 박아 넣었다. 긴 손가락이 달구어진 내벽에 마찰하며 옥환의 흥분을 더욱 가속했다. 옥환의 내벽은 승헌의 손가락을 물고 안으로 빨아들였다. 그 노골적인 움직임과 함께 제 것을 단단히 붙들고 있는 옥환의 부드러운 살결에 승헌 역시 뜨거운 숨을 내뱉으며 빠르게 정점으로 치달았다.
이윽고 승헌의 손가락이 특정한 부위를 힘주어 찌르자 옥환이 새된 비명을 지르며 파정했다.
“아읏, 아……!”
“읏, 옥환……!”
승헌 역시 옥환을 붙든 채 한발 늦게 그의 안에 사정했다. 승헌에게서 쏟아져 제 안을 채우는 정액의 감촉에 옥환은 몸의 쾌감과는 또 다른 만족감을 느꼈다. 그렇게 옥환은 황홀경에 전율하며 한동안 몸부림쳤다.
이윽고 겨우 정사가 끝이 나자, 승헌은 옥환의 더러워진 옷을 벗기고는 용포를 덮어 주었다. 옥환은 민망함에 승헌이 빨리 돌아가길 바랐으나, 어쩐지 승헌은 가지 않고 그대로 옥환을 끌어안았다.
오랫동안 침묵하던 두 사람 중 먼저 입을 연 것은 승헌이었다. 그는 눈이 내리는 창밖에 시선을 고정한 채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게 마지막 전쟁이었으면 좋겠군.”
“…….”
“아마 믿지 않겠지만, 진심이야.”
옥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승헌은 그의 불신 어린 표정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아 픽 웃고는 말했다.
“옥환. 옛날이야기를 해줄까? 본래 나는 별로 왕 같은 건 되고 싶지 않았어. 책임을 지는 것도 싫었고, 온종일 궁에 처박혀서 일만 해야 한다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지.”
“……지금도 싫으십니까?”
“싫은 점도 있고, 좋은 점도 있다고 생각해. 아무튼 그럼에도 왕이 된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어. 한 가지는, 왕이 되면 내 손으로 이 진절머리나는 전쟁을 끝낼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야.”
“…….”
“전쟁을 잘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은 달라. 뭐…… 한때는 젊은 치기에 내가 해친 사람의 수를 상처럼 여겼던 날도 있었긴 하지. 하나 전쟁터에 오래 있어 보니 알겠더군. 지옥은 땅 밑이 아니라 땅 위에도 있다는 걸. 지하의 지옥과 달리 지상의 지옥은, 죄 없는 자도 데려가지.”
어느새 승헌 쪽으로 돌아누운 옥환은 말없이 승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에서 무언가를 읽은 승헌이 말했다.
“그대도 잘 알 거야.”
“……예.”
승헌의 말대로였다. 그것을 뼈저리게 느꼈기에 옥환 또한 전쟁을 막으려 하는 것이었디. 전쟁을 일으킨 것은 소수인데, 그것에 짓밟히는 것은 다수였다. 옥환은 그 죄 없는 다수를 구하고 싶었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다면, 그만 끝내고 싶었어. 한데 잘 안 되는군.”
옥환은 혼란스러웠다. 승헌이 전쟁을 일으킨 것은 호승심 따위의 이유가 아니었다. 대륙을 틀어쥐고자 하는 야망이나 영웅이 되고 싶은 욕심 때문도 아니었다. 자신과 같은 마음이었다. 적국의 왕이, 자신과 같은 뜻을 가지고 있었다. 아니길 바랐는데. 당신이 괴물이길 바랐는데.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면 좋겠어.”
이윽고 승헌이 작게 중얼거린 그 한마디에 가슴이 저리는 것을 느끼면서도, 옥환은 그것을 필사적으로 외면하며 서둘러 화제를 바꾸었다.
“하면 왕이 된 다른 하나의 이유는 무엇입니까?”
옥환의 질문에 승헌은 어쩐지 내키지 않는 표정을 지었으나, 곧 대꾸했다.
“선왕 때문이지.”
옥환은 자신이 잘못된 화제를 골랐다고 후회하면서도 최대한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서국의 선왕께서는…… 전하를 무척이나 총애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전하께서 좋은 왕이 되실 것을 알아보시지 않았겠습니까.”
옥환의 말에 승헌이 쓴웃음을 지었다. 한때는 그런 줄 알았었다. 누군가를 향한 존경과 충성심만으로, 평생을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었다. 하지만.
‘나는 그놈이 두렵다. 내가 범 새끼를 키운 게야.’
그에게 있어 자신은 두려움의 대상이었을 뿐.
잿빛으로 점철된 기억을 밀어낸 승헌이 문득 코앞에서 저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옥환을 보고는 멈칫했다. 그럴 리가 없었다. ……그럴 리가.
“……전하?”
승헌이 갑자기 입을 다물어 버리자 옥환은 혹 자신이 실수를 했나 싶어 승헌을 조심스럽게 불렀다. 그 목소리에 상념에서 깬 승헌은 한없이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그대는 너무 고와.”
너무 고와서 탈이야. 승헌은 한숨 쉬듯 말하고는 옥환의 이마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각자 다른 이유로 서로에게 흔들리며, 한동안 서로를 안고 있었다.
***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면 좋겠어.’
옥환은 메마른 나뭇가지를 보며 멍하니 승헌이 했던 말을 되새기고 있었다. 자신도, 주군도, 승헌도, 모두가 전쟁을 끝내고 싶어 하는데 왜 서로 싸우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일까. 왜 무고한 이를 희생시키면서까지 상대에게 이기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일까.
만약…… 만약에, 주군이 살아 계실 적에 서국의 왕을 만났더라면…….
‘그랬다면, 어쩌면, 서국과 벽국이 이렇게 싸우지 않았을 수도 있겠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을지 모른다. 어느 한쪽을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두 나라가 균형을 유지하며 살 방법을 제안한다면…… 그리 바라 마지않던 평화가 찾아올 수도 있다.
물론 그게 그리 쉽게 올 것이었다면 난세가 이리 길어지지도 않았으리라는 건 옥환도 알았다. 하나 자신이 지켜봐 온 승헌은, 다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겪었던 이들과는 다르고, 어쩌면 주군과는 닮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그러나 그것은 기대에 불과할지도 몰랐다. 그런 기대에, 이 땅 위의 백성들을 담보로 해도 되는 것인가.
옥환은 답답한 마음에 처소 밖으로 나왔다. 하인이 어디로 모실지 물으니 고민하던 옥환이 답했다.
“후원으로 가자.”
옥환이 앞서 걷는 하인을 따라 후원에 다다르자, 그곳에는 먼저 온 손님이 있었다. 옥환은 연못을 가로지르는 다리 위에 기대서 있는 상대를 보고는 이상할 정도로 당황했다.
“태사, 전하께서 계십니다만…….”
“……그래. 인사를 드려야겠구나.”
하인이 눈치를 보며 말을 걸자 고민하던 옥환은 이내 결정을 내렸는지 다소곳한 걸음걸이로 승헌을 향해 다가갔다. 그 발소리에 승헌이 고개를 들더니 옥환을 보고는 빙그레 미소 지었다.
“옥환.”
“어찌 이 추운 날에 나와 계십니까.”
“글쎄? 그대를 보려고 그랬나?”
“……그럴지도 모르지요.”
평소라면 눈을 흘기고도 남았을 옥환이 웬일인지 그리 대꾸하며 승헌의 곁에 나란히 섰다.
“저는 전하를 뵈려고 나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뭐?”
“저 자신도 몰랐으나, 사실은 내심 편전으로 가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하나 후원에 온 덕에 전하를 만났으니 다행이지요.”
옥환은 승헌에게 다시금 전쟁에 대해 물을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고 생각해 그리 대답한 것이었으나, 그런 옥환의 속을 알 리 없는 승헌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옥환을 쳐다보았다.
“어디서 그리 사내를 홀리는 법을 배웠나?”
“예……?”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옥환의 허리에 자연스럽게 팔을 두르며 승헌이 바짝 거리를 좁혀 왔다.
“누가 그대에게 감히 그런 것을 가르쳤냐고.”
승헌이 제 말뜻을 오해했다는 것을 깨달은 옥환은, 그럴 만하다고 여기면서도 승헌이 하는 말이 어처구니가 없어서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아무도 가르치지 않았고, 만일 배웠다면 전하에게서 배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나는 그렇게 사람 가슴을 떨리게 하는 말은 한 적 없어.”
“하셨습니다.”
“안 했어.”
“하셨어요.”
“했어?”
승헌의 의미심장한 물음에 옥환이 멈칫하더니, 이내 자신이 그의 함정에 빠졌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얼굴에 당혹감이 번졌다. 그 표정을 보며 승헌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하……!”
눈썹을 찌푸린 옥환을 앞에 두고 한참을 웃은 승헌은, 여전히 웃음기가 어린 얼굴로 옥환에게 몸을 기울이고 물었다.
“내가 그대를 설레게 했나?”
“……아니요.”
“그대가 방금 그랬다고 했잖아.”
불리한 상황에 옥환이 입을 꾹 다물었으나, 그의 양 뺨에 떠오른 홍조까지 감출 수는 없었다. 승헌은 그 불그레한 뺨을 어루만지며 눈웃음을 지었다. 그 모습에 더더욱 민망한 기분을 느낀 옥환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중요한 건 이런 게 아니건만.
한데, 마치 그런 옥환의 속내를 읽기라도 한 듯이 승헌이 이렇게 물었다.
“해서 그대의 임이 어찌 보고 싶었는데?”
옥환은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괜히 찬물을 끼얹는 것은 아닌지 우려하면서도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어 솔직히 털어놓았다.
“……지난번에 해 주셨던…… 전쟁을 끝내고 싶으시다는 말. 그것이 줄곧 신경이 쓰였습니다.”
“흠.”
승헌의 반응은 어쩐지 미적지근했다. 옥환이 제 의도를 더 설명해야 할지 망설이고 있는데, 의외로 승헌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냥 그 말 그대로야. 왜 끝내고 싶은지도 그때 충분히 설명했다고 생각하는데.”
승헌은 “하지만 옥환.” 하고 잠시 간격을 두더니 말을 이었다.
“나는 내 나라를 위협하는 무리를 그냥 두고 볼 생각은 없어. 피를 흘려야 할 때가 온다면, 마땅히 흘려야겠지. 그 결정을 내리는 게 왕의 역할이니까.”
제 의도를 모두 꿰뚫어 보고 있는 듯한 승헌의 대답에 옥환은 더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하필 그때 환관이 승헌을 찾으러 왔다. 신하들이 승헌을 만나러 편전에 찾아왔다는 이야기에 승헌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옥환을 돌아보았다.
“바래다줄 테니 어서 와.”
“……아닙니다. 저는 후원을 좀 더 돌아보겠습니다.”
“추워서 안 돼. 고뿔 들어.”
“하면 혼자 가겠습니다. 신하들이 기다리고 있다 하니 먼저 돌아가십시오.”
옥환의 거절에 못마땅한 기색을 드러낸 승헌이었으나, 어차피 실랑이를 해 봤자 옥환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걸 그 역시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자신이 입고 있던 모피를 옥환의 어깨 위에 둘러 주고는 돌아섰다. 얼떨결에 옷을 받게 된 옥환은 멀어지는 승헌의 등을 지켜보다가 무심코 입을 열었다.
“전하. 혹, 서국을 위협하는 무리가 더는 서국을 위협하지 않는다면…… 전하께선…….”
막상 말을 꺼낸 옥환이 주저함에 말끝을 흐리자 승헌이 먼저 대꾸했다.
“고려는 해 볼 수 있겠지.”
“……예?”
“전쟁을 하지 않는 쪽에 대해서도.”
그 말을 마지막으로 승헌은 미련 없이 후원을 떠났다. 승헌이 사라진 뒤에도 한동안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던 옥환은 승헌이 둘러준 모피를 여미며 고개를 숙였다. 모피는 승헌의 온기 때문인지 무척이나 따스했다.
***
어쩌면, 승헌은 다를지도 모른다. 승헌이 상대라면 전쟁도, 내분도 일어나지 않을 수 있다. 후원에서 승헌을 만난 뒤로 옥환의 그러한 생각은 조금 더 강해졌다. 하나 이것은 어쩌면 벽국과 주군을 저버리는 결정이 될 수도 있었다. 그것을 알기에 옥환은 승헌의 진심을 알게 된 이후로 사흘을 내리 고심했다. 그리고 사흘 만에 그가 내린 결론은, 이대로 고민만 하며 우물쭈물하다가 전쟁이 일어나는 모습을 지켜보느니, 다소 무모하더라도 행동으로 옮겨 보자는 것이었다.
이윽고 의지를 굳힌 옥환은 하인에게 필묵을 준비하라 일렀다. 그의 앞에는 금세 흰 종이와 먹 따위가 놓였다. 잠시 그것을 바라보던 옥환은 이내 크게 심호흡을 하고는 붓을 들었다.
옥환은 염요와 승헌 모두에게 제대로 된 화친을 맺을 것을 제안해 볼 요량이었다. 언젠가는 다시금 두 나라가 다툴 날이 올지도 모르겠지만, 지금과 같은 때에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서로에게 득 될 것이 없었다. 지금은 양국 모두 나라 안을 정비하는 쪽이 더 시급했다. 그 부분을 중점으로 설득을 하면, 적어도 논의해 볼 가치는 있다고 판단할 것이다.
‘벽국에서 먼저 도발을 멈추고, 서국에서 그간 벽국이 바치던 공물을 절반 정도로 줄여 주면 당장은 전쟁을 일으킬 필요도 없어질 터.’
만일 일이 잘 풀리면 그땐 벽국의 사람도, 서국의 사람도 아닌 자신의 존재가 오히려 해가 될 것이다. 하나 그렇게만 된다면 옥환은 자신이 희생해도 좋다고 생각했다. 백성과 대의를 위한 일이었다. 목숨 따윈 아깝지 않았다.
이렇듯 성공 가능성도 높지 않고 위험부담도 있었으나, 그럼에도 옥환은 서국을 무너뜨리려 했을 때보다는 훨씬 마음이 가벼웠다.
얼마 후, 단숨에 붓을 놀린 옥환이 금세 서찰을 완성하고는 잠시 먹이 마르기를 기다렸다. 과연 자신의 뜻대로 될지 불안한 마음과, 만일 이대로 된다면 누구의 희생도 없이 평화를 얻을 수 있다는 기대감이 뒤섞여 심장이 쿵쾅거렸다.
다른 이라면 기대는커녕 애초에 시작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 옥환은 승헌과 보낸 시간을 통해 다른 건 몰라도 그가 백성을 아끼고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 게다가 그의 입으로 직접 전쟁을 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까지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한 번쯤은 믿어도 좋으리라.
이윽고 다 마른 서찰을 바라보던 옥환이 그것을 고이 접어 계평에게 맡길 요량으로 그를 찾았으나, 그보다 앞서 옥환을 만나고자 하는 손님이 있었다. 다름 아닌 문하시중이었다.
얼른 서찰부터 치운 옥환이 하인에게 문하시중을 들이라 말하려는데, 옥환이 입을 열기도 전에 문하시중이 먼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본래 예의가 바른 인물이었기에 문하시중의 이런 행동에는 필시 연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옥환은 말없이 그를 맞이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자리에 앉자마자 충격적인 이야기를 털어 놓았다.
“태사. 큰일입니다. 북쪽 국경에 있는 길천 지방의 절도사가 벽국에 투항을 했답니다.”
“예?”
믿을 수 없는 소식에 옥환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벽국의 장수가 서국에 투항을 했으면 몰라 그 반대의 상황이라니, 벽국을 위해 여기까지 온 옥환조차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대관절 어찌 된 것입니까? 투항이라니요? 전투가 벌어졌다는 소식은 못 들었는데 설마 싸우지도 않고 항복한 것입니까?”
“그렇다고 합니다. 저도 자세한 내막은 아직 모르겠습니다. 방금 막 병부상서에게 듣고 태사께 달려온 참입니다. 그 내용을 파악하느라 관련자들도 아주 바쁜 모양입니다. 전하께서도 무척 놀라셨다는 모양이고.”
“……어찌…….”
옥환은 착잡함에 쉬이 입을 열지 못했다. 이번 일은 벽국 침공을 더욱 앞당길 계기로 작용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평화를 찾을 기대에 부풀어 있었건만, 그것이 어그러질지도 모르는 위기에 옥환은 낙담했다. 어찌 무엇 하나 쉬이 흘러가는 법이 없을까. 난세란 다 이런 것일까. 서국과 벽국 사이에 낀 옥환의 마음은 그저 답답할 따름이었다.
하나 난세의 밑바닥에서 견뎌야 하는 백성들은 이런 저보다 배는 더 괴로울 것이다. 옥환은 약해지려는 마음을 굳건히 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번 일이 전쟁의 도화선이 되지 않도록 막는 것이었다.
잠시 침묵하던 옥환이 생각 끝에 입을 열었다.
“문하시중께서도 아시겠으나, 이 일을 빌미로 무관들이 당장 전쟁을 벌이자 전하께 청할 것입니다. 하나 제가 볼 때 지금은 전쟁을 벌일 적기가 아닙니다. 겨울이라 식량도 넉넉하지 않고, 곧 봄이 오면 파종을 해야 할 터인데 전쟁이 벌어지면 어디 그것이 쉽겠습니까? 나라는 또다시 황폐해지고 말 것입니다. 문하시중께서도 제 말뜻을 아시겠지요?”
옥환의 말인즉 저를 거들어 전쟁에 반대하란 뜻이었다. 문하시중도 무관들의 주전론主戰論을 달갑게 여기는 것은 아니었으니 그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다만, 자꾸만 무관들과 척을 지는 옥환이 걱정되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뿌리부터가 서국 사람인 저나 중서령과 달리 옥환은 벽국의 재상이었다는 불리한 배경을 갖고 있었다. 내내 옥환을 향해 이어진 무관들의 미움과 악감정이 혹 큰일로 이어지는 건 아닌지, 솔직히 걱정이 되었다.
하나 전쟁을 막아야 한다는 옥환의 주장은 흠잡을 데 없는 정론이었다. 문하시중은 결국 사사로운 정보다는 대의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 뒤 옥환의 처소를 나오며 문하시중은 전쟁을 막자고 말하던 옥환의 단호한 표정을 떠올렸다. 그 결의에 찬 얼굴에 문하시중은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 고운 서생은 마치 대나무처럼, 그 어떤 일이 있어도 꼿꼿하게 서서 제 의지를 관철했다. 하나 대나무는 생각보다 쉽게 쪼개지는 법이다. 과연 그가 무관들의 칼바람을 어디까지 버틸 수 있을는지.
아무래도 전쟁은 서국의 조정 안에서 먼저 벌어질 듯했다.
***
“전하, 추위와 가난으로 고통받는 백성들에게 전장에 나갈 것까지 강요하신다면 민심은 더욱 흉흉해질 것이옵니다. 그렇잖아도 식량이 부족한 계절인데 이런 시기에 전쟁이라니, 당치 않사옵니다.”
“태사의 의견은 근시안적인 사고방식에 불과하옵니다. 벽국이 힘을 키워 서국을 압박한다면 그 고통은 결국 백성들이 감내하게 되어 있사옵니다. 그것을 예방하고자 벽국을 먼저 치자는 것이 아니옵니까?”
어전회의가 시작되자마자 이어진 옥환과 대장군 백청의 설전은 다른 이들은 끼어들 수도 없을 만큼 치열했다. 벌써 두 식경이 넘도록 제 말에 토를 달고 있는 백청을 노려보며 옥환이 매섭게 쏘아붙였다.
“당장 굶어 죽게 생긴 이가 어찌 먼 훗날을 볼 수 있겠습니까? 배불리 먹고 자는 대장군과 달리 백성들은 생존하는 것 자체가 매일의 과업이란 말입니다. 오늘을 살아남아야 내일을 맞이할 수 있는 그들에게 내일도 아닌 몇 년 뒤의 일에 대비해야 한다고 하면, 그것이 과연 와 닿겠습니까?”
“허, 전하께서 네놈을 좋게 봐주시니 아주 뵈는 게 없는 모양이로구나! 그리 서국의 백성을 아끼는 놈이 어찌 벽국에서 온갖 술수로 서국의 백성을 고달프게 했단 말이냐?”
제 속의 죄책감을 파고드는 빈정거림에 옥환의 표정이 삽시간에 얼어붙었다.
“……저는 항상, 적은 희생을 내고자 노력했습니다.”
“해서 북기에서 그 많은 병사를 다 죽였더냐?”
북기대전. 서국으로 이름을 바꾸기 전의 일국과 염완이 다스리던 벽국 사이에 벌어졌던 전쟁으로, 40만의 군사를 이끌고 갔던 일국은 겨우 5만을 데리고 후퇴하며 참혹한 패배를 맞았다. 그 패배는 나라의 이름이, 왕이 바뀌어도 서국에게 있어 씻을 수 없는 상처와 같았다. 그리고 그 전쟁에서 적군을 진두지휘한 것이 다름 아닌 눈앞의 옥환이었다.
그곳에서 죽마고우였던 호진의 아버지는 물론 수많은 전우를 잃었던 백청은 서슬 퍼런 눈으로 옥환을 향해 낮게 뇌까렸다.
“뻔뻔하기 짝이 없는 놈. 여기가 감히 어디라고.”
옥환에게도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당시 군을 이끌었던 서국의 선왕은 잘못된 전략을 택했고, 결국 그 전략이 자승자박이 되어 피해가 더욱 커진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나, 자신이 그때 벽국에 있었고 서국의 군사들을 죽게 만들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한데 침묵하는 옥환 대신 내내 상황을 관망하던 승헌이 입을 열었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내 편이 될 수도 있는 법 아닌가. 과인은 인재라면 마다하지 않아. 좋은 인재는 좋은 나라를 일구는 도구가 될 테니까.”
옥환을 감싸는 그의 태도에 백청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옥환을 바라보는 무관들의 시선 역시 냉담하기 그지없었다. 하나 옥환은 개의치 않고 승헌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전하. 서국은 양양과 완안, 녹주까지 대부분의 주요 국경지를 손에 넣었사옵니다. 고작 길천 하나를 뺏긴다고 해서 당장 큰일이 생기는 것은 아니옵니다. 다만 절도사가 변절한 것은 가벼이 여길 수 없으니 이 일을 국경에 나가 있는 군 인사를 쇄신할 계기로 삼으시옵고, 안으로는 국정과 민심을 살펴 후일에 대비하여 주시옵소서.”
그러자 백청 역시 보란 듯이 그 옆에 부복하고 흔들림 없는 어조로 간언했다.
“전하. 작은 틈 하나에 100년을 쌓은 성도 무너지는 법이옵니다. 길천을 빼앗긴 것은 결코 가볍게 여길 일이 아니며, 벽국의 힘이 더 커지기 전에 그 화근을 꺼트리셔야 할 줄로 아옵니다. 이는 나라의 사직과 백성의 안위를 위한 일이오니 부디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옥환과 백청 어느 쪽의 말도 틀린 게 아니었다. 하나 평행선을 달리는 두 사람이 돌연 합의를 하는 일은 없을 테니, 결국 결정을 내리는 건 승헌의 몫이었다.
깊은 고민에 잠겨 옥환과 백청을 내려다보던 승헌이 이내 입을 열었다.
“이 문제는 좀 더 시일을 둔 뒤에 결정을 내리는 것으로 하지. 절도사가 왜 변절을 한 것인지도 아직 모르지 않나. 병부상서. 경은 우선 길천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 상세한 경위를 파악해 보고를 올리도록.”
“예, 전하.”
“하오나 전하……!”
결정을 미루겠다는 승헌의 발언에 백청이 반발했으나 승헌은 그마저 짧은 손짓으로 제지했다. 잠시 표정을 구긴 채 그 자리에 서 있던 백청이 이를 갈며 물러나니 문하시중이 기다렸다는 듯 얼른 다른 안건을 올려 화제를 바꾸었다.
어느새 제자리로 돌아간 옥환은 금세 새 안건에 대한 의견을 내놓기 시작했다. 하나 그런 그를 백청이 몹시도 흉흉한 눈빛으로 노려보고 있음을, 옥환은 미처 알지 못했다.
그 후 회의가 끝나고 처소로 돌아온 옥환은 벽국에 화친을 제안하는 서찰의 내용을 조금 바꾸었다. 길천의 일로 서국의 여론이 좋지 않으나, 그것은 자신이 막아 보겠다는 내용을 덧붙인 것이었다. 이번에야말로 그것을 계평에게 전하라고 시킨 옥환은 이번엔 승헌에게 전할 서찰을 펼쳐 보았다. 그에게는 직접 말로 전할 예정이긴 했지만 혹시 몰라 글로 써둔 것이었다.
화친을 맺자고 하면 승헌은 뭐라고 할까. 반드시 자신이 원하는 반응이 나오라는 법은 없었다. 화를 낼 수도 있었고, 제안을 비웃을 수도 있었다. 아니면 전쟁을 고려해 보겠다고 했던 말조차 모른 척할지도 몰랐다. 옥환은 그 모든 경우의 승헌을 상상했다. 전부 다 말이 된다면 말이 되는 모습들이었다.
한데 부정적인 반응만을 보이던 상상 속의 승헌이 어느 순간 진중한 얼굴로 화친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는 더 좋은 안을 내놓거나, “그대답군.” 하고 옥환을 보며 웃기도 했다. 승헌의 긍정적인 반응에 옥환의 입가에 나직한 미소가 걸렸다.
그렇게 잘 이어져 가던 상상이 묘하게 바뀐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아까까지 잘 웃고 있던 승헌은 갑자기 낮은 목소리로 옥환을 부르며 갈증 섞인 시선을 보내왔다. 그에게 안길 때마다 마주했던, 저를 몹시도 원하는 그런 시선이었다.
의식이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자 옥환은 소스라치게 놀라 고개를 저었다. 저 혼자만의 생각이건만 마치 누가 보기라도 한 것 같아 무척이나 민망하고 낯뜨거웠다.
하나 한번 열이 오른 얼굴은 통 식을 줄을 몰라, 하는 수 없이 옥환은 산책을 핑계로 열을 식히러 바깥에 나왔다. 매서운 바람이 뺨을 할퀴고 지나가는 듯했으나, 지금의 옥환에게는 차라리 반가운 것이었다. 그렇게 길을 나선 옥환은 일부러 후원이나 편전 쪽으로는 가지 않고 처소 주변을 천천히 돌아다녔다.
걷다 보니 궁문 앞까지 오게 된 옥환은 너무 많이 왔다 싶어 왔던 길을 되짚으려 돌아섰다. 한데 그때 마침, 퇴청을 하던 백고가 문을 향해 걸어오다가 옥환을 보고는 멈칫했다.
“백 장군.”
“태, 태사.”
어떻게든 승헌을 잊고 싶었던 옥환은 적절하게 나타난 백고의 존재가 굉장히 반가웠다. 한데 기분 탓인지 백고는 자신을 만난 것이 영 불편해 보였다.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던 옥환은 그제야 최근 백고의 태도가 줄곧 부자연스러웠다는 것을 깨달았다. 전에는 고개를 들면 항상 그가 저를 보고 있었고, 조정에서도 틈만 나면 제게 말을 걸어오기 일쑤였다. 하나 요즘에는 그런 일이 통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도 그는 제 앞에서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왜 저러는 것이지? 나한테 잘못한 것이라도 있나? 하나 저자가 내게 잘못할 일이 무엇이 있다고? 그와 내가 관련된 일이 대체 뭐가…….’
별안간 달라진 백고를 의뭉스런 눈으로 쳐다보던 옥환은, 문득 떠오른 한 가지 불길한 예감에 표정을 달리했다. 하나 그는 제 속의 감정을 감추고 태연한 척 물었다.
“백 장군. 요즘엔 도통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없어 아쉬웠는데 잘 되었습니다. 종소는 잘 지내고 있는지요?”
“예? 아, 저…….”
핵심을 찔렀는지 백고는 어깨를 흠칫 떨며 옥환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옥환은 그 태도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끼며 방금까지와는 다른 심각한 어조로 그를 다그쳤다.
“혹 종소에게 무슨 일이 있습니까? 그래서 저를 계속 피하고 계신 겁니까?”
“아, 아닙니다, 태사. 큰일이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큰일이 있지는 않을 것이라니, 그것이 대체 무슨 뜻입니까? 종소가 어찌 된 것입니까? 어디가 아픕니까? 아니면…….”
옥환이 덜컥하는 마음에 추궁하듯 캐묻자 백고가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더니 옥환의 말을 끊고는 그만 가보겠다며 돌아섰다. 하나 옥환은 재빨리 그의 소매를 붙들었다.
“장군, 종소가 제게 있어 어떤 존재인지 아시지 않습니까……! 무슨 일이 생겼든 장군을 탓하지 않을 테니 그 아이가 무사한지만 알려 주십시오. 제발, 백 장군. 그간의 정을 생각해서라도…….”
보기 드문 옥환의 약한 모습에 흔들린 백고가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망설이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종소가…… 작은 잘못을 하여 벌을 좀 받았습니다. 하나 그 아이에게 큰일이 생기지 않도록 제가 막을 테니 걱정 마십시오.”
그러더니 백고는 매몰차게 옥환의 손을 떼어내고는 그대로 달아나 버렸다.
“백 장군, 잠시만……!”
옥환이 백고를 애타게 부르며 붙잡으려 했으나 그는 이미 궁문의 문턱을 넘은 뒤였다. 궁을 나갈 수 없는 옥환은 허탈한 마음에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놀란 하인이 옥환을 부축했으나 그는 갑자기 하인의 손을 뿌리치고는 어딘가로 급하게 달려갔다.
“태사, 어디 가십니까……! 태사!”
필시 종소에게 변고가 일어난 게 분명했다. 그리고 종소를 해한 이는 백고가 아닌 백청이라는 게 옥환의 추측이었다. 조정에서 저를 죽일 듯이 노려보던 백청의 모습을 생각하면 그러고도 남을 터였다. 전쟁이 제 뜻대로 일어나지 않는 것도 모자라 승헌이 옥환의 편을 들기까지 했으니 백청의 성격에 그것을 두고 볼 리가 없었다. 그리고 그의 지척에는 옥환과 친밀한 종소가 있지 않던가. 단순한 백고는 백청의 물음에 자신과 종소의 관계를 순순히 불었을 것이다. 왜 괜찮을 줄로만 알았던가. 뭘 믿고 방심을 했나.
하나 옥환은 제 손으로 종소를 구할 힘을 갖지 못했다. 다만 단 한 사람. 종소를 구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자가 있었다.
‘전하, 전하라면 반드시…….’
승헌에게 사정해서 일단 종소를 구해 내고, 그 수습은 자신이 어떻게든 하면 된다. 궁 안에서나 제게 일어나는 일은 뭐든지 해결할 수 있었다. 하나 종소는 제 힘이 닿지 않는 바깥에 있었다. 그런 옥환이 손을 벌릴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승헌뿐이었다.
줄곧 이런 상황을 경고했던 승헌이 제 청을 들으면 어떻게 생각할지의 문제 따위는 고민할 새도 없었다. 궁 안에서 잘 지내던 종소를 밖으로 몰아낸 것도, 밖에서 또다시 곤경에 처하게 만든 것도 모두 자신이었다. 그를 어떻게든 구해야 했다.
편전 앞까지 한달음에 달려온 옥환은 어서 전하께 고해달라며 환관을 채근했다. 하나 환관은 곤란한 표정으로 절망적인 대답을 내놓았다.
“전하께선 지금 군사 회의 중이십니다. 절대 아무도 들이지 말라는 엄명이 있었습니다. 부디 이해해 주십시오, 태사.”
“하, 하면 그것은 언제 끝나는가? 내 그것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겠네.”
“군사 회의는 한번 시작하면 언제 끝나는지 기약이 없습니다. 다만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한 시진 이상은 걸릴 것입니다.”
옥환은 크게 낙담했다. 하필 지금 같은 때에. 하나 누굴 탓하겠는가. 하나부터 열까지 죄다 제 잘못이었다. 다른 일에 정신이 팔려 종소를 위험에 빠트려 놓고도 안부 한번 확인하지 않았다. 어린아이 하나 지키지 못해 어찌 만백성을 지키겠냐며 승헌에게 대들었던 제 목소리가, 그의 가슴을 세차게 때리고 지나갔다.
“태사. 날이 너무도 찹니다. 이러다 고뿔에라도 드시면 전하께서 상심하실 테니 모쪼록 처소로 돌아가십시오.”
옥환은 간곡하게 청하는 하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자신이 고뿔에 든다면, 아니. 바깥에서 하염없이 기다리게 했다는 것만으로 이 하인과 환관은 승헌에게 벌을 받을 것이 분명했다. 이 이상 저 때문에 관련도 없는 이가 다치게 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 결국 옥환은 소득 없이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터벅터벅 처소로 돌아온 옥환은 하인에게 혹 편전에서의 회의가 끝나거든 곧바로 제게 알려 달라 부탁해 놓았으나, 밤이 깊도록 회의가 끝났다는 소식은 전해지지 않았다.
종일 식사도 거른 채 종소에 대한 걱정만 되풀이하던 옥환은 어느덧 해시亥時를 알리는 종이 울리자 오늘은 승헌을 만나는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한데 죄책감에 괴로워하는 옥환에게, 하인이 소식 하나를 들고 왔다.
그것은 옥환이 기다리던 소식은 아니었다. 어쩌면 가장 듣고 싶지 않았던 소식일 수도 있었다.
그것은, 백청이 옥환을 만나러 찾아왔다는 소식이었다.
***
처소 안에 들어선 백청은 다짜고짜 옥환의 앞에 무언가를 던졌다. 바닥에 툭 떨어진 그것을 집어 든 옥환은 숨을 삼켰다. 그것은 칼로 잘라 낸 듯한 머리카락 묶음이었다. 말하지 않아도 그것이 종소의 것임은 자연히 알 수 있었다.
“다음엔 머리가 아니라 다른 것을 자를 수도 있다.”
“대장군!”
격노한 옥환이 벌떡 일어나 윽박을 질렀다. 어떤 일이 있어도 침착하기만 했던 옥환이 낸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우레와 같은 노성이었다. 하나 백청은 꼼짝도 하지 않고 도리어 옥환을 비웃었다.
“네놈이 자만이 넘쳐 바보 같은 짓을 저질렀구나. 그따위 대담한 짓을 저질러 놓고서 정녕 들키지 않을 것이라 믿었더냐? 세상에 똑똑한 것은 너 하나뿐이라고 생각한 게야? 하찮은 너희 벽국에서나 그랬겠지. 나와 서국은 다르다.”
옥환은 두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당장에 백청을 죽여 버리고 종소를 되찾고 싶었으나 종소의 목숨을 담보로 잡힌 상황에서는 그 어떤 행동도 섣불리 저지를 수 없었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노기를 가라앉힌 옥환은 언제 그랬냐는 듯 고상한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늦은 시간이긴 하나 예까지 찾아오셨으니 차라도 한잔 드시지요.”
“흥. 네놈이 준 차에 무엇이 들었을 줄 알고? 내 용건은 하나다.”
“……용건이 하나든 둘이든 일단은 앉아서 얘기하십시오. 설마하니 차도 모자라 처소 바닥까지 의심하시는 겁니까?”
“이 건방진 놈…….”
증오로 이글거리는 눈으로 옥환을 노려본 백청은 그 여유가 어디까지 가나 보자며 자리에 털썩 앉았다. 옥환은 차분한 움직임으로 제 잔에만 차를 따르고는 천천히 그것을 음미했다.
백청이 곧장 승헌에게 가 제 죄를 고해 올릴 수 있음에도 굳이 자신을 직접 찾아온 것은 제게 원하는 것이 있기 때문일 터였다. 그렇다면 그 대가로 백청이 내걸 것은 필시 종소의 목숨이리라. 옥환은 그 무엇과도 종소의 목숨을 저울질할 생각이 없었으나, 종소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절박함을 들켜서도, 백청에게 주도권을 잡혀서도 안 될 일이었다.
“해서, 용건이 무엇입니까.”
“우습구나. 아까까지만 해도 나를 죽일 기세더니. 허세 부릴 것 없다. 혹시 모르지 않으냐. 네놈이 내 발치에 울며 매달리면 그 하인 놈의 목숨은 살려 줄지.”
백청의 노골적인 도발에도 옥환은 서늘하게 미소 지었다. 제 감정을 드러내 보이는 실수는 아까 한 번으로 족했다.
“안타까운 일이나 이미 아이의 명줄은 대장군께 넘어갔습니다. 제가 패배한 것이지요. 그것을 인정하고 겸허히 받아들이는 것은 대장군도 잘 아시는 덕목이 아닙니까.”
“네놈 따위가 감히 내 상대가 될 수나 있다고 보느냐?”
“아까 용건이 있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늦은 시간이니 얼른 용건만 말씀하시고 그만 돌아가 주시지요.”
“왜. 나를 빨리 보내고 싶으냐? 내가 무엇을 말할지 두려운 게지?”
“대장군 따위가 어찌 두렵겠습니까. 제게는 그보다 더 두려운 존재가 계시는데.”
“무어라?”
눈을 치켜뜨는 백청을 비웃으며, 옥환이 차갑게 대꾸했다.
“저는 전하의 첩입니다. 이런 야심한 시각에 장군이 저를 찾아오신 걸 알면 전하께서 그냥 넘어가리라고 보십니까?”
세상 무서울 것 하나 없는 백청이지만 그런 그라 해도 군왕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분한 듯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그에게 옥환이 재차 할 말만 하고 물러가 달라고 말하자 그가 코웃음을 치고는 입을 열었다.
“네놈이 그 하인 놈을 시켜 내 집을 뒤졌다는 걸 안다. 그 전에도 줄곧 나를 염탐하고 감시했겠지? 서찰을 주고받는다는 명목으로 정보를 공유하면서 말이다.”
“…….”
“지난번 내 집에 온 것도 군사 기밀을 빼내려는 목적이었겠지. 고작 망해 가는 소국 따위를 위해 감히 백씨 가문을 이을 내 아들을 이용하다니, 아주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구나.”
옥환은 침묵을 택했다. 백청은 아마 자신이 기밀을 빼냈는지의 여부까지는 확인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행여 백청에게 그에 대한 단서를 주지 않도록 입을 다물고 있는 쪽이 현명했다.
하나 백청은 이런 상황을 예상했는지 오히려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윽고 그는 뜻밖의 이야기를 꺼냈다.
“마음 같아선 이 모든 일을 전하께 고해 너를 당장 죽이고 싶다만 이 일이 밝혀지면 조정 안팎으로 또다시 큰 소란이 일겠지. 네가 네 죄를 쉬이 인정할 리도 없으니 더더욱 그리될 것이야. 지금은 전쟁을 앞둔 상황이니, 그런 소란은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 진정한 충신의 역할이 아니겠느냐.”
당장에라도 저를 죽일 것 같았던 기세치고는 예상외의 발언이었다. 그리고 그런 백청의 의도를 아는 옥환은 속으로 그를 비웃었다. 충신이 어쩌고 하는 것은 그저 대충 둘러댄 변명에 불과했다. 사실 그가 바로 승헌에게 가지 않고 옥환과 거래하는 쪽을 택한 것은, 저를 죽이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었다. 고작 시동이 옥환의 지시를 받아 벽국의 기밀을 빼냈으며, 그 모습을 제 집의 다른 하인이 보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잠깐의 소란을 일으킬 수는 있어도 옥환을 죽게 만들 수는 없었다. 아마도 종소는 살이 찢어지고 뼈가 부러지는 고신을 당하면서도 절대 제 존재를 입 밖에 내지는 않았을 터다. 그랬기에 백청 역시 방법이 없어 저를 찾아온 것이겠지.
‘종소야. 내가 네게 참으로 못할 짓을 저질렀구나.’
종소를 떠올리자 옥환은 가슴 한 귀퉁이가 떨어져 나간 듯 아려 왔다. 저 때문에 그런 고초를 겪게 된 아이를 죽게 둘 수는 없었다. 옥환은 무슨 짓을 해서든 종소를 구하겠노라고 마음먹었다.
“해서, 어쩌자는 것입니까. 말씀하신 대로 제가 가만히 앉아 당하고만 있지는 않으리란 걸 잘 아실 텐데요.”
“네놈이 가만히 앉아 당하는 것의 대가로 그 하인 놈을 살려 주겠다면?”
“……그 아이는 살리고, 저는 죽어라? 제가 아무리 그 아이를 아낀다고 해도, 제 목숨을 버릴 정도는 아닙니다.”
“죽으라는 게 아니다. 네놈은 이번 전쟁을 막고 싶겠지? 그 뜻을 접으라는 것이다.”
터무니없는 제안에 옥환의 얼굴에 경악의 빛이 어렸다. 이자는 정녕 전쟁을 일으킬 셈인가. 제 잇속을 차리려 전쟁을 일으켜, 죄 없는 백성들이 죽는 꼴을 봐야만 하겠단 말인가. 그것을 위해서라면 제 나라를 배신한 첩자의 존재까지 눈감아 주겠다고?
그 잔인하고 비열한 제안에 옥환의 안에서 반발심이 치솟아 올랐다. 이런 자가 한 나라의 대장군이라니, 옥환은 당장 승헌에게 가 백청을 처형하라 소리 지르고 싶은 것을 종소를 떠올려 꾹꾹 참아 눌렀다.
“해서…… 전쟁에 반대하지 말고 입을 다물라?”
“그뿐만이 아니다. 내일 있을 조회에서도 없는 듯 몸을 낮추고 있거라. 전쟁이 끝날 때까지는 네놈의 존재를 허락해 주마. 전쟁이 끝난 뒤에는 네놈의 나라도 망국이 되어 있겠다만…… 내 그때는 친히 네놈의 목을 문무백관의 앞에서 베어 주지.”
백청의 경고에 옥환은 주먹을 꽉 쥐었다. 당장 그의 뜻에 따른다고 해서 큰일이 벌어지는 것은 아니니 우선은 그의 거래를 받아들여야만 했다. 이런 자의 뜻대로 움직여야 한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하고 복장이 터졌으나 모두가 자신이 자초한 일이었다. 옥환은 입술을 질끈 물고 있다가 진중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하면 종소를 돌려주십시오.”
“그놈의 목숨은 살려 줄 것이다.”
“제게, 돌려주시란 말입니다. 장군께선 그 아이를 데리고 있다가 후일에는 결국 죽이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제가 무엇 하러 이런 거래에 응한단 말입니까.”
“네가 그 아이를 데리고 간 뒤에 말을 바꿀 수도 있지 않으냐? 내가 뭘 믿고?”
“……하면, 적어도 아드님께 맡겨 주십시오. 그 뒤에 제가 약속을 지키면 아이를 인도받는 것으로 하지요.”
백고라면 종소를 지켜 줄 것이고, 백청도 제 아들인 그를 불신하지는 않을 터였다. 눈치가 없고 마음이 약하기는 했으나 지금의 상황에선 그것도 큰 문제는 아니었다.
“……좋다. 하나 내 아들에게 접근할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아.”
백청 역시 같은 생각을 했는지 옥환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윽고 일어서려던 백청은 불현듯 인상을 찌푸렸다. 뭔가 계속 걸린다 싶더니, 내내 그가 느꼈던 위화감의 정체가 비로소 밝혀졌다. 그것은 다름 아닌 옥환의 표정이었다.
옥환에게는 필시 큰 위기이건만 그는 여전히 무덤덤한 표정이었다. 무엇을 잘했다고 저리 당당하단 말인가. 이를 갈던 백청은 돌연 옥환의 멱살을 잡았다.
“이걸로 안심하지 마라. 이 상황을 벗어날 같잖은 꾀를 부리지도 마. 내 목숨을 걸고 너를 죽여 없앤다는 선택지도 있기는 하지만, 감히 전하와 나를 우롱한 네놈을 그리 곱게 죽여 주는 건 성에 차지 않아 유예를 둔 것뿐이다.”
하나 옥환은 두려움은커녕 더욱 초연한 얼굴로 백청을 응시할 따름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에게 백청이 악에 받친 저주를 내뱉었다.
“너는 너를 따르던 문관들과 백성들 앞에서 손가락질 받으며 죽어야 한다. 금야 선생이란 명성은 땅에 떨어지고, 잠시나마 너를 신임했던 전하는 배신감에 치를 떠시겠지. 그 앞에서 죽는 것이다. 모든 이가 성문에 효수된 네 머리를 보며 너를 욕하고 네게 돌을 던질 것이다. 내가 너를 그리 죽게 할 것이야.”
백청의 악담 따위에 옥환은 티끌만큼의 영향도 받지 않았다. 다만 그의 입에서 승헌의 이름이 나온 순간은 잠시나마 동요가 일었다. 하나 지금은 종소를 구하는 게 먼저였다. 옥환은 제 멱살을 잡은 백청의 손을 야멸차게 떼어 내며 말했다.
“할 말 다 하셨거든 그만 돌아가 보십시오.”
여전히 의연한 옥환의 태도에 백청은 미간을 구겼으나, 아까 옥환이 첩을 운운하며 겁박했던 것이 신경 쓰이는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옥환은 배웅은커녕 그 뒷모습조차 보기 싫다는 듯 이미 등을 돌린 뒤였다. 백청은 그런 옥환을 괘씸하게 여기다가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내가 방금 한 말을 명심하는 게 좋을 게다.”
그렇게 백청이 처소를 떠나고 나서야 옥환은 비로소 제 가슴을 틀어쥐고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종소야. 종소야. 목소리가 되지 못한 부름이 입안에서 맴돌았다. 그 말간 얼굴과 순진무구한 미소가 눈앞에 아른거리는 듯했다. 그런 아이가 지금은 무슨 짓을 당하고 있을지 알 수가 없었다. 하필이면 백청은 전장에서도 잔학하기로 소문이 난 자였다. 상대가 어린아이고 제 집에서 일하던 가솔이라는 사실은 그가 종소에게 행했을 고문에 방패막이 되어 주지 못했을 것이다.
무책임한 것. 매정한 것. 후원에서 희희낙락할 시간은 있었고 제가 궁지에 몬 어린아이의 안부 한번 살필 시간은 없었던가. 옥환은 그렇게 자신을 탓하며 괴로워했다. 하나 그러한 좌절 속에서도 단 한 가지, 옥환이 절대 놓지 않은 다짐이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제 목숨을 걸고서라도 반드시 종소를 구해 내겠노라는 다짐이었다.
다음 날, 어전회의를 위해 조정 중신들이 모인 정전에는 묘한 초조함이 감돌고 있었다. 병부상서가 길천에 대한 조사 내용을 승헌에게 보고했다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하면 전쟁을 벌일 것인가, 벌이지 않을 것인가, 그 여부가 오늘 결정 날 것이다.
중신들은 정전에 들어설 때마다 백청과 옥환을 한 번씩 힐끔거렸다. 승헌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오늘의 어전회의는 반드시 평소보다 더 길어지리라는 것을 누구나가 예감하고 있었다.
그렇게 긴장 어린 침묵이 이어지는 와중에 승헌이 정전에 나타났다. 인사를 받고 자리에 앉은 승헌은 곧바로 길천의 일을 화제로 꺼내 들었다.
“병부상서가 이르기를 길천의 절도사는 벽국에서 보낸 어떤 서신을 받고 나서 돌연 투항을 했다는군. 그 서신 안의 내용까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야. 벽국이 무언가 꿍꿍이를 품고 있는지도 몰라.”
만일 승헌의 추측이 사실이라면 먼저 벽국을 치는 것은 좀 더 신중하게 결정할 필요가 있었다. 승헌의 말에 내포된 뜻을 눈치챈 신하들은 승헌이 옥환의 손을 들어주리라고 예측했다. 그럼에도 섣불리 입을 열지 못하고 백청의 눈치를 슬금슬금 살피는데, 때마침 백청이 앞으로 나섰다.
“전하. 전하의 말씀대로 지금껏 길천을 잘만 다스려 온 절도사가 하필 지금과 같은 시기에 변절을 한 것은 결단코 우연이라 볼 수 없사옵니다.”
“……그래. 따져보면 최근 벽국의 행보에는 미심쩍은 구석이 많았지. 마치 우리가 공격해 주길 바라는 것처럼.”
승헌이 심각한 얼굴로 턱을 쓸며 대꾸하자 백청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어쩐지 불온함을 띠고 있었다. 특히 문하시중은 회의가 시작된 이후로 줄곧 창백하게 굳어 있는 옥환에게 걱정 어린 시선을 슬쩍 던졌다.
“전하께서는 기억하시옵니까? 어쩌면 벽국에 아직 태사와 같은 이가 남아 있을 수도 있다고 하셨던 일 말이옵니다.”
안 그래도 일전에 그 일을 마음에 걸려 했던 승헌은 달갑지 않은 화제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 한데 지금은 그런 것을 논할 때가 아니지 않은가, 대장군?”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전하. 이번 일에, 아니. 비단 이번 일뿐만이 아니옵니다. 지금까지 벽국이 벌인 모든 일에 태사가 연루되어 있을지도 모르옵니다.”
“대장군. 또 태사를 걸고넘어지시는 겁니까? 전하의 말씀대로 지금은 그런 비생산적인 이야기를 나눌 때가…….”
“시끄럽소! 무엇이 중한 줄도 모르고 제 편을 감싸기에만 급급한가!”
중서령이 백청을 비난하고 나서는데 백청이 돌연 역정을 냈다. 그 기세에 주춤한 중서령이 입을 다문 사이 백청이 자신만만한 얼굴로 승헌을 보았다.
“전하. 신은 이미 태사가 서국을 배신했다는 증좌를 확보했사옵니다.”
“……뭐……?”
승헌은 물론 조정 중신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옥환을 향했다. 문하시중은 언젠간 이런 사달이 날 줄 알았다는 듯 속으로 탄식하며 옥환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명색이 금야 선생이 아니던가. 그가 이리 쉬이 백청의 수에 넘어갈 리가 없었다.
“…….”
한데 옥환은 어쩐 일인지 자신을 위한 변명 한마디 하지 않은 채 침묵하고 있었다. 그 평소답지 않은 모습에 조정 안의 모든 이가 의문을 느꼈으나, 승헌이 대신 백청에게 재차 물었다.
“증좌라니. 확실한 건가?”
“그러하옵니다, 전하. 어찌 전하 앞에서 확실하지도 않은 일로 말씀을 올리겠나이까? 태사가 몰래 소신의 집에 보낸 시동이 소신의 방을 뒤진 것이 틀림없사옵니다. 전하 이것을 봐 주시옵소서.”
이내 백청이 품속에서 접힌 종이 한 장을 꺼내 승헌에게 바쳤다. 환관이 그것을 받아 승헌에게 넘겨주니 승헌이 그것을 펴보기 전 먼저 물었다.
“……시동이라 했나?”
“예. 태사가 그 아이를 시켜 서국의 군사 정보를 빼낸 뒤 벽국에 넘겼다는 게 신의 생각이옵니다.”
승헌은 그 시동이 누구인지 굳이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그는 눈썹을 일그러뜨리며 옥환을 쳐다보았다. 옥환은 고개를 숙인 채 마치 아무 말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 서 있었다. 하나 그 얼굴이 몹시도 수척해 승헌은 짧게 혀를 찼다. 그러게 일개 백성에게 너무 정을 주지 말라고 누차 일렀거늘.
이내 승헌이 종이를 펼치고 그 내용을 훑었다. 아래로 내려가던 시선이 어느 한 곳에 머문 순간, 승헌의 미간이 꿈틀했다. 이윽고 그가 날카로운 눈으로 옥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자백서로군.”
자백서……? 옥환은 승헌의 시선에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백청은 여유로운 태도로 승헌에게 말했다.
“그러하옵니다, 전하. 시동이 태사의 명으로 소신의 집을 뒤졌다고 자백했사옵니다. 이 이상의 증거가 있겠나이까?”
이윽고 상황을 지켜보고만 있던 신하들의 시선이 일제히 옥환을 향했다. 승헌 역시 옥환에게 설명을 요구하는 듯한 시선을 보냈다. 하나 평소라면 말을 시키기도 전에 논리적인 반박을 쏟아 냈을 옥환이 오늘은 웬일인지 목석이라도 된 양 침묵을 고수하고 있었다.
“태사. 대장군의 주장에 대해 경의 해명이 필요할 성싶은데.”
하는 수 없이 승헌이 억지로 옥환을 담론 안으로 끌어들이자 옥환은 생기를 잃은 얼굴로 힘없이 대꾸했다.
“소신은…… 드릴 말씀이 없사옵니다.”
“왜 할 말이 없지?”
“태사가, 아니. 저놈이 벽국의 첩자이기 때문이 아니겠사옵니까.”
승헌의 질문에 대답한 것은 옥환이 아닌 백청이었다. 그러자 다른 무관들도 덩달아 어쩐지 옥환의 행동이 줄곧 수상쩍었다는 둥, 당장 옥환을 잡아 가둬야 한다는 둥 옥환을 몰아가기 시작했다. 하나 옥환이 최소한의 부정조차 하지 않자 결국 문하시중이 대신 나섰다.
“전하. 이는 전하께서 친히 확인해 보실 필요가 있다고 사료되옵니다. 물론 대장군의 주장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나, 조정의 중신인 태사가 적국의 첩자라는 사실은 사직과 전하의 위엄을 뒤흔들 큰일 중의 큰일이옵니다. 감찰부를 통해 자백서의 진위를 확인하고, 그 후 태사의 처분을 논하셔도 늦지 않을 것이옵니다.”
태사직에 있는 옥환의 입지가 흔들리는 것은 그 휘하에 있는 문관들에게도 중차대한 문제였다. 그렇다 보니 문관들은 문하시중의 주장에 동의를 표하며 옥환을 적극적으로 감싸고 나섰다. 백청은 그것이 내키지 않는 듯 옥환에게 눈을 부라렸으나, 옥환이 약조한 바는 자신을 변호하지 않겠다는 것뿐, 저를 변호해 주는 이들을 밀어내겠다는 약조는 한 적이 없었다.
애초에 약조를 어긴 것은 백청 또한 마찬가지였다. 제 죄를 고해 올리지 않겠다더니, 보란 듯이 승헌에게 말을 꺼내지 않았던가. 게다가 자백서라니? 물론 종소를 원망하는 마음은 손톱만큼도 없었고, 차라리 종소가 그런 것을 적어 조금이라도 편해졌다면 도리어 잘했다고 칭찬이라도 해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다만 마치 기다렸다는 듯 저를 몰아가는 백청의 태도만큼은 몹시도 거슬렸다.
조정에 소란이 이는 것을 원치 않아? 옥환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아마도 백청은 자신의 팔다리를 꽁꽁 묶어 놓고 더 수월하게 전쟁을 준비할 심산인 듯했다. 상대는 다른 이도 아니고 설옥환이다. 그저 말로 나눈 약조만으로는 당연히 안심할 수 없었으리라.
물론 옥환 역시 백청이 약조를 지키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으나, 지금 그에게는 백청을 상대할 힘이 부족했다. 아무리 억울하고 화가 나더라도 당장은 몸을 낮추고 반격의 기회를 엿보아야 했다. 겉으로는 백청의 뜻에 따르는 척하고, 물밑으로 승헌과 이야기를 나눠 볼 생각이었다. 그리고 종소를 되찾는 대로 백청에게 저를 건드린 대가를 톡톡히 받아 내리라. 옥환은 끓는 울화를 가라앉히며 그렇게 자신을 달랬다.
한편 갑작스레 백청의 고발을 듣게 된 승헌은 상당히 골치가 아팠다. 지금은 당장 전쟁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시기이니만큼 조정의 분열은 반드시 피해야만 했다. 아마 백청도 그것을 알기에 지금을 노리고 옥환을 고발했을 터였다. 옥환의 처분을 미룰 수 없도록 하기 위해.
하면 어찌할 텐가? 옥환과 백청을 번갈아 보며 잠시 고민하던 승헌은 이내 신속하게 머릿속을 정리하고는 다시 입을 열어 옥환에게 하문했다.
“태사. 아직도 할 말이 없는가?”
“……황송하옵게도, 그러하나이다.”
옥환은 고개를 떨군 채 가련하게 대꾸했다. 그 모습이 퍽 애처로워 몇몇 신하들이 안타까운 얼굴을 했으나, 승헌은 무심하게 입을 열었다.
“하면 이 일의 진위가 밝혀질 때까지, 태사는 처소에서 자중하도록.”
승헌의 결정에 백청이 잔인스레 웃었다. 모든 것이 그의 뜻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한데 그때, 예상치 못한 인물이 앞으로 나섰다. 백고였다.
“전하, 아무리 그래도 태사에게 금족령을 내리시는 것은 과한 처사라고 생각하옵니다……. 아직 태사가 첩자라고 결정이 난 것이 아니지 않사옵니까.”
마치 옥환을 감싸듯 옥환의 앞에 선 백고를 서늘한 눈으로 내려다보며 승헌이 피식 웃었다.
“우습군. 그대의 아비는 태사를 내치라 하고 그대는 태사를 감싸라 하니.”
“송구하옵니다, 전하.”
심기가 좋지 않은 듯한 승헌의 반응에 백청은 서둘러 사죄하고는 백고의 손목을 힘껏 틀어쥐었다. 백고가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입을 열려 했으나 백청이 작게 무어라 속삭이자 그의 얼굴에 핏기가 가시더니 곧 그가 뒤로 물러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승헌이 조정 신료들을 쭉 내려다보며 물었다.
“이제는, 다들 동의하겠지?”
동의하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듯한 엄중한 하문에 신하들은 그저 서로의 눈치만 보다가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하고 절이나 올릴 따름이었다.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승헌에게 절을 올린 옥환은 백청과 눈이 마주치자 무심하게 눈을 돌렸다. 백청은 속으로 그 모습을 비웃었다. 저리 태연한 척하고 있으나 옥환이 승헌 대신 칼에 맞았던 이후 승헌이 이렇게까지 옥환의 편을 들어주지 않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속이 뒤틀리지 않고 배길 리가 없었다.
“뭣들 하느냐. 어서 태사를 처소로 데려가라.”
승헌의 명에 병사 몇이 옥환에게로 다가왔다. 옥환은 잠시 승헌을 보았다. 승헌에게도 다 생각이 있으리라. 그리 믿고 싶었으나 견승헌이라는 사내의 속은 쉬이 읽을 수가 없었다. 자백서가 나왔으니 저를 의심할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 승헌의 전과 달리 쌀쌀맞은 태도가 옥환의 마음에 걸렸다.
하나 화친을 맺기 위해서도, 종소를 구하기 위해서도 승헌의 힘은 꼭 필요한 것이었다. 그의 심기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
그리 마음을 달랬음에도 서국 중신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끌려가려니 자존심이 상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옥환은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얼음장 같은 표정으로 정전 안을 걸어 나왔으나, 소매 밑 굳게 쥔 주먹은 가느다랗게 떨리고 있었다.
“태사…….”
병사들에게 양팔을 잡혀 끌려나가는 옥환을 백고가 처량하게 바라보았다. 옥환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가볍게 고개를 젓고는 입 모양으로 종소를 부탁한다고 말을 남겼다. 백고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멀어지는 옥환을 하염없이 응시했다. 그 모습을 못마땅한 듯 지켜보던 승헌이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다음 안으로 넘어가지.”
한편 옥환 처소의 하인들은 옥환이 웬 병사들을 달고 처소로 돌아오자 깜짝 놀라 얼굴이 시퍼레졌다. 옥환은 별일 아니니 개의치 말라고 그들을 달래고는 안으로 들어섰다. 병사들은 처소 안까지 따라오지는 않았으나, 문 앞에 서서 오고 가는 이들을 감시했다. 창밖으로 병사들의 모습을 확인한 옥환은 조용히 창문을 닫았다.
“승상. 어찌 된 일입니까?”
옥환이 조회가 끝나기도 전에 병사들에게 포위되어 돌아왔다는 소식에 한달음에 달려온 계평이 그리 물어왔다. 옥환은 하인들에게 했던 것과 다름없이 태평하게 대꾸했다.
“백청의 함정에 빠졌다. 금족령이 내렸으니 당분간은 처소에서 옴짝달싹 못할 듯싶다.”
“……괜찮은 것입니까? 듣자 하니 어제 늦게 그 백청인지 하는 노인네가 찾아왔었다던데.”
“내게 종소의 목숨을 담보로 협박을 하더구나.”
계평 역시 하인 중에서는 그나마 종소와 가장 가깝게 지냈었기에, 그 이름이 나오자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표정이 꽤나 살벌한 것이 그도 종소가 걱정되기는 하는 모양이었다. 옥환은 가벼운 한숨을 내쉬고는 계평이 따른 차를 마셨다.
“종소는 구해낼 것이니 걱정하지 말거라. 기밀을 훔친 일 역시 뒤탈이 없도록 철저히 조치하지 않았더냐.”
“하나…….”
정말 괜찮은 게 맞냐는 듯 계평이 보내는 무언의 눈빛에 옥환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백청도 이 일이 커지면 본인이 곤란해진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저 내 팔다리를 묶어놓기 위해 나에 대한 의심을 공론화했을 뿐이야. 오히려 이번 조사를 통해 내가 첩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무관들도 더 이상 그 일로 왈가왈부하지 못하게 될 게다. 그럼 앞으로가 더 수월해질 수도 있겠고.”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백청은 어찌하실 겁니까?”
“종소의 안전이 확인되는 대로 나도 다시 행동을 개시할 것이다. 감히 종소의 목숨으로 나를 겁박했으니, 그 오만방자한 작자를 가만히 두어선 안 되겠지.”
옥환은 자못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으나, 복수를 다짐하는 눈동자에는 매서운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것을 본 계평은 그제야 옥환이 몹시도 화가 난 상태라는 것을 깨달았다. 옥환을 진심으로 화나게 만든 이 중에 불행을 맞이하지 않은 자는 없었으니, 아마 백청도 머잖아 좋지 않은 꼴을 당하게 될 성싶었다.
이윽고 옥환은 서랍 속에 꽁꽁 숨겨 두었던 서책 한 권을 꺼내 계평에게 건네며 넌지시 일렀다.
“혹시 모르니 이것은 네가 갖고 있도록 하여라. ……전하께 서신이 오면 알려주고.”
“예, 승상.”
옥환이 준 서책이 서국의 기밀을 정리해 둔 것임을 아는 계평은 긴장감에 침을 꿀꺽 삼켰다. 그것을 품속에 잘 갈무리한 계평이 물러가고, 한동안 종소를 향한 걱정에 잠겨 있던 옥환은 식사 시간이 되었다는 말에 정신을 차렸다. 하인들이 잘 차려진 상을 갖고 들어왔으나 무언가를 먹을 기분이 아니었던 옥환은 상을 물리라고 하려 했다. 한데 그때 하인 하나가 옥환의 귓가에 나직이 속삭였다.
“문하시중께서 전하신 서신이 있습니다.”
그러고는 하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처럼 조용히 제 할 일을 했다. 이윽고 식사 시중은 받지 않는 옥환이 평소처럼 하인들을 물린 뒤 돌연 요리가 담긴 그릇을 전부 들어보기 시작했다. 그러자 곧 나물 반찬이 담긴 그릇 아래에서 작게 접힌 종잇조각이 나타났다. 문하시중이 이런 방식으로 말을 전한 것은 마땅한 연유가 있을 터였다. 어쩌면 자신이 떠난 사이 조회에서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을 수도 있었다. 옥환은 초조함을 느끼며 종이를 펼쳤다. 안에 적힌 내용은 짧았으나 그 의미는 몹시도 무거웠다.
‘전하께서 벽국 침공은 미루셨으나, 벽국에 빼앗긴 길천은 되찾을 것이라고 공표하셨습니다. 당장 이틀 뒤에 길천 원정이 시작될 것입니다.’
옥환은 낙담하여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결국 일이 이렇게 되는가. 침공이 미루어졌다고는 하나 길천 원정은 자연스럽게 벽국 침공으로 이어질 것이었다. 그것이 바로 백청이 의도한 바이기 때문이었다. 그간의 노력이 허사가 된 것 같아 옥환은 마음이 무거웠다.
백청은 방해물인 자신을 조정에서 내보내고 나서 곧장 일을 진행시킨 게 분명했다. 길천은 국경지였으니 그곳을 되찾아 오자는 주장의 명분으로서도 그럴싸했고, 벽국에게 연이어 당하고 있다는 사실은 서국 신하들의 자존심을 자극했을 테니 일을 진행하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이대로 서국과 벽국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면 당연히 호진이 다시 도성으로 불려 올 것이고, 군 통수권을 가진 백청은 더 큰 권력을 휘두르게 될 것이 자명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백청의 노림수였다.
백청은 어느새 조정을 제 뜻대로 주무르고 있었다. 반면 자신은 기약도 없이 처소 안에 갇혀 있는 상태였다. 누가 봐도 이번 일은 백청의 완벽한 승리였다.
‘모든 게 다 그의 계획대로 되는구나.’
백청의 뻔뻔스러운 면상을 떠올리니 다시금 속에 맺힌 울분이 치밀었으나, 옥환은 기다려야 한다고 자신을 달랬다. 종소의 안전이 확인되고 조사가 끝나는 대로 승헌에게 가 화친을 제안하면 된다. 일찍이 벽국에 보낸 화친 요청서는 이미 도착했을 것이다. 염요도 그것을 확인했을 테니, 옥환은 승헌만 설득하면 되었다. 그때쯤 길천 원정은 이미 시작되었겠으나, 사나흘 정도라면 회군을 하기에도 늦지는 않을 터였다. 이제부턴 정말로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조금만…… 조금만 참으면 된다.’
옥환은 자신의 불안감을 지우듯 몇 번이고 그렇게 되뇌었다.
***
“승상. 벽국에서 온 서신을 확인하려고 해도, 금족령 때문에 감시의 눈이 많아 그러기가 쉽지 않습니다.”
금족령이 내린 뒤 이튿날, 벽국에서 아직 답신이 오지 않았냐는 옥환의 물음에 계평이 그와 같은 대답을 내놓았다. 답을 들은 옥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하면 금족령이 풀리고 나서야 받아 볼 수 있는 것이냐?”
“예. 저도 병사들이 이리 많이 올 줄 몰랐습니다만.”
옥환이 처소로 돌아오고 나서 옥환과 함께 왔던 두 명의 병사 외에 추가로 다섯의 병사가 더 와서 옥환의 처소를 지키고 있었다. 계평은 이내 불안한 듯 물었다.
“혹…… 서국 왕이 다시 승상을 의심하는 겁니까?”
“아마 아직은 아닐 것이다. 하인에게 물으니 병사는 백청이 보냈다고 하는구나.”
계평은 못마땅한 얼굴로 인상을 썼다. 옥환 역시 답답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이렇게까지 철저하게 자신의 존재를 차단하다니, 백청도 꽤 오랜 시간 저를 공격할 준비를 해 왔던 모양이었다.
“일단은 알겠다. 어떻게든 틈을 만들어 볼 터이니 너는 항상 준비를 하고 있거라.”
“예, 승상.”
그날 오후, 옥환은 갑자기 배가 아프다며 의관을 불러 달라고 청했다. 얼마 안 있어 태의서에서 나온 말단 의관이 옥환의 처소를 찾았다. 옥환의 하인은 태사께서 아프신데 어찌 일개 말단 의관 따위가 올 수 있냐며 역정을 냈으나 옥환은 그를 제지했다.
하나 옥환도 내심 당혹스럽기는 하였다. 지금껏 옥환이 아플 때마다 옥환을 돌본 것은 태의가 아니었던가. 한데 경력이 오래된 의관도 아니고 말단이라니.
“소, 송구합니다, 태사. 저는 그저 위에서 명을 받아 온 것이라…….”
“……위에서……? 그래, 알았다.”
백청이 시켰을 수도 있는 일이었으나, 그렇다고 해도 승헌이 이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말단 의관이 왔다면 이는 결국 승헌도 묵인했다는 뜻일 터. 왕의 승인이 있었으니 누가 항의를 하든 아무 소용없는 일이었다.
의관은 겁에 질려 옥환을 진맥하고는 신경이 많이 예민해지신 것 같다며 마음가짐을 편히 하고 잠을 충분히 잘 것을 당부한 뒤 서둘러 떠나갔다. 의관이 물러가자 하인은 옥환의 눈치를 살폈다.
“뻔하디뻔한 얘기만 하는 것을 보니 실력도 없는 자입니다. 어찌 저런 자를…….”
“신경 쓰지 말거라. 별 대단한 일도 아닌데 바쁜 태의를 불러 쓰겠느냐.”
“……알겠습니다, 태사.”
말은 그렇게 했지만 옥환의 속도 복잡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승헌이 일부러 이리 모질게 구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 저를 못 믿어서 그러는 것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불편한 기분에 한참을 뒤척거리던 그는 도저히 누워 있을 수가 없어 자리에 일어나 앉았다. 언제부터인지 머릿속에 한번 승헌에 대한 생각이 돋아나면 그것을 몰아내기가 영 쉽지 않았다.
“태사. 계평입니다.”
한데 그때, 다행스럽게도 저를 찾는 목소리에 옥환은 승헌의 존재를 지웠다. 문을 열고 들어선 계평은 주변을 극도로 경계하며 문을 닫았다. 그 행동에 무언가를 눈치챈 옥환이 조용히 손을 내밀자 계평이 벽국에서 온 서찰을 내밀었다. 방금 전 배가 아프다고 의관을 부른 사이 주변이 부산스러워진 틈을 타 계평이 서찰을 받아온 듯싶었다.
자신이 지시한 일이건만, 옥환은 원인 모를 불안함을 느끼며 그것을 천천히 펼쳤다. 마치 팔에 돌이라도 매단 것처럼 자꾸만 움직임이 늘어졌다.
이윽고 다 펼친 서찰을 읽어내려가던 옥환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대경실색한 채 줄곧 서찰을 쳐다보기만 하던 옥환은 이내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들고 계평에게 물었다.
“이것이…… 사실이냐?”
“……하면 전하께서 거짓을 말씀하시겠습니까. 승상께서도 그것이 진실임을 이미 꿰뚫어 보시지 않았습니까.”
지난 일을 생각해보면 서찰의 내용이 사실이라는 것은 확실했다. 그간 염요의 이상했던 행동이 이 서찰 안의 내용 하나로 전부 납득이 갔으니까.
그럼, 그렇다면…….
옥환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서찰을 접었다.
“그만 나가 보거라.”
“……승상. 차라리 잘되었습니다. 이대로 한발 물러서서…….”
“알겠으니 나가 보래도.”
옥환의 날카로운 태도에 계평은 언짢은 기색을 내비치면서도 하는 수 없이 물러났다. 혼자가 된 옥환은 평소처럼 서찰을 태우는 대신 그것을 제 품속에 잘 갈무리해 넣고는 넋이 나간 것처럼 그대로 한참을 앉아 있었다.
그렇게 몇 시진이나 흘렀을까. 그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다급하게 처소를 뛰쳐나왔다.
이윽고 그가 다다른 곳은, 뜻밖에도 승헌이 있을 편전 앞이었다.
***
편전을 앞에 둔 옥환은 잠시 멈칫했다. 금족령이 내려진 상태였고, 저를 막아서는 병사들에게 비키지 않으면 목숨을 끊겠노라고 협박까지 해서 이곳에 왔다. 그야말로 미친 짓이었다. 자신의 명줄이 내일까지 붙어 있을지 알 수 없었고, 종소의 명줄 또한…… 그러했다.
하나 옥환은 돌아갈 생각을 하는 대신 지나가는 병사들을 피해 몸을 숨겼다. 어떻게든 승헌을 만나야 했다. 이대로라면 서국이 길천 원정에서 크게 패하는 것은 물론, 원정에 나간 병사들이 모조리 죽게 될 것이다.
아닌 척했지만, 옥환은 지난번 백청이 언급했던 북기대전을 내내 마음에 담아 두고 있었다. 아니, 그 당시에도 옥환은 괴로워했었다. 자신으로 인해 너무도 많은 이들이 죽지 않았던가.
적국의 백성들이다, 전장에서 모두가 다 살 수는 없다, 그리 위로를 해보아도 부질이 없었는지, 전쟁은 승리로 끝났으나 그 후 옥환은 며칠을 몸져누웠다. 그렇게 앓고 나서야 겨우 묻을 수 있었던 감정이건만, 그것이 길천 원정에서 서국이 반드시 질 거라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다시금 떠오르고 만 것이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서국에 와서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눈앞을 스쳐 갔다.
무심한 자신을 챙겨 주는 하인들부터 시작해서 적국에서 온 자신을 환영해 주었던 문관들, 함께 백성을 걱정하고 나라를 생각했던 문하시중과 중서령……. 길천 원정군 중에는 그들의 벗이나 가족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승헌과 조정 신료들이 그리 아끼던 백성들이기도 했다. 거의 일 년 가까이를 서국의 신하로 지냈다. 그것이 거짓이고 연기라 해도, 옥환은 이제 자신과 서국을 완전히 분리할 수 없었다.
북기대전 때처럼 서국 백성들이 죽는 모습은 도저히 보고 싶지 않았다. 벽국을 배신할 수는 없었으나, 서국이 대패하고 나면 그 뒤는 곧바로 서국과 벽국의 전면전으로 이어질 터였다. 당장 내일이 원정군의 출병일이었으니 옥환에게는 적당한 수를 낼 여유조차 없었다. 자신이 가진 모든 패를 내놓고 승헌을 설득해야 했다.
하나 아직도 마음속에서는 갈등이 일었다. 제 목숨은 아깝지 않았다. 다만 종소에게는, 어쩌면 자신이 구해 주길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그 아이에게는 죄가 없었다. 입으로는 목숨에 경중이 없다고 떠들고 다니면서도, 결국 수만 백성의 목숨과 종소 한 사람의 목숨을 저울질하여 더 무거운 쪽을 택한 자신이 치졸하고 비겁하게 느껴졌다. 팔자에 없던 고초를 겪게 한 것도 모자라 죽음에서 구해 주지도 못하다니, 지옥에 떨어져 종소의 원망을 듣는다 해도 할 말이 없었다.
‘……그래, 나는 지옥에 떨어지겠지.’
수많은 사람이 저로 인해 죽었고, 하늘이 주신 재능으로 제 잇속만 차렸다. 새삼 이런다고 해서 그러한 제 행동이 모두 사라지는 건 아니겠으나 옥환은 결국 각오를 다졌다.
이윽고 옥환이 편전을 지키는 환관에게 다가가자 그가 옥환을 보고는 기함했다.
“태, 태사, 어찌……!”
“……전하께 고해 주겠나.”
“태사, 전하께선 태사께 금족령을 내리셨습니다! 어서 처소로 돌아가십시오……!”
환관은 지금이라도 옥환이 돌아가면 모든 게 해결될 것이라고 믿는 모양이었으나 실상은 달랐다. 옥환이 제 목에 칼을 들이밀어 잠시나마 따돌린 병사들이 지금쯤 자신을 정신없이 찾고 있을 터였다. 궁 안에 있는 한 그들에게 발각되는 것도 시간문제. 무엇보다 옥환은 자신이 벽국의 첩자라는 사실까지 밝힐 각오를 하고 온 것이었다. 그런 그가 물러설 리가 없었다.
“전하께 고해 주게. 뒷감당은 다 내가 할 테니.”
“태사…….”
“아니면 내가 직접 문을 열고 들어가야겠나?”
“태, 태사. 지금 전하께선…….”
완고한 옥환의 태도에 환관이 무어라 고하려 했던 그때였다.
“그럴 필요 없다.”
모골이 송연해지는 음성에 옥환이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환관은 금방이라도 기절할 듯 숨을 들이켰다. 옥환이 착잡한 눈으로 응시한 음성의 주인은 다름 아닌, 백청이었다.
“대, 대대, 대장군. 그, 태사께서는…….”
환관이 재빨리 무어라 변명하려 했으나 그 전에 백청이 옥환의 머리채를 틀어쥐었다.
“……!”
“대, 대장군! 고정하십시오! 여긴 편전 앞입니다……!”
“왕명을 거역한 죄인을 추포하러 왔거늘 어찌 환관 따위가 내 앞을 막아서느냐?! 당장 물럿거라!”
백청의 우레와 같은 일갈에 환관이 바들바들 떨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백청이 승헌이 머무는 편전 앞에서 이토록 당당하게 군 이유가 곧 밝혀졌다. 백청은 비릿하게 웃으며 옥환에게 말했다.
“아쉽게 되었구나. 널 구해 주실 전하께서는 지금 편전에 계시지 않는다.”
옥환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옥환은 애타는 마음으로 편전의 문을 바라보았으나 이리 소란이 일었음에도 승헌이 나타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참으로 허탈했다. 목숨을 걸고 나왔으나, 애초에 승헌을 만날 수 없었던 것이다. 발밑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감각이 들었다.
“금야 선생이란 이름도 별것 아니구나. 네놈이 이리 어리석은 줄 알았다면 그간 당해 줄 필요도 없었을 텐데.”
“종소는, 윽……!”
“대장군, 이 무슨……!”
종소만은 살려 달라 청하려던 옥환은 백청의 솥뚜껑 같은 손바닥에 뺨을 맞고는 바닥으로 쓰러졌다. 환관이 놀라서 얼른 옥환을 부축하려 했으나 백청이 함께 데려온 병사들은 환관을 밀어내더니 옥환의 양팔을 잡고 들어 올렸다.
옥환은 퉁퉁 부은 뺨과 찢어진 입술을 하고서도 고집스레 청했다.
“종소는, 살려 주십시오. 약조는 지킨 셈이 아닙니까.”
“마지막까지 뻔뻔하기 그지없구나. 내 그놈은 친히 육시를 하여 그 몸뚱이를 들개들의 먹이로 써 주마.”
옥환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으나, 백청을 노려보는 눈동자만큼은 무장인 그조차 주춤하게 만들 만큼 살기로 가득차 있었다. 하나 이내 백청은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그리 보면 어쩔 테냐? 어차피 너도 곧 죽을 목숨인 것을.”
백청은 옥환의 배를 한번 걷어차고는 격렬한 기침을 하는 옥환을 만족스레 바라본 뒤 병사들에게 일렀다.
“이놈을 당장 옥으로 끌고 가라! 내 이놈이 전하를 뵈러 온 연유를 반드시 밝혀내겠다!”
“예, 대장군!”
고통에 정신이라도 잃은 건지 축 늘어진 채 끌려가는 옥환을 보며 환관은 발을 동동 굴렀다. 하나 백청은 마지막으로 환관을 돌아보며 살벌한 눈빛을 보냈다. 승헌에게 이 사실을 고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무언의 경고였다. 어차피 승헌도 머잖아 알게 될 것이나, 적어도 원정이 시작될 때까지는 잠잠한 편이 나았다.
그렇게 옥환을 끌고 가며 백청은 흡족하게 웃었다.
그 눈엣가시였던 설옥환을 무너뜨렸으니, 이젠 남은 하나도 치울 차례였다. 저에게 치욕을 준 그 사내를.
***
“승상……. 승상.”
의식을 깨우는 나직한 부름에 옥환이 무거운 눈꺼풀을 들었다. 눈앞엔 계평이 걱정스런 얼굴로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옥환은 주위를 둘러보고는 이곳이 여전히 감옥 안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막 잡혀 왔을 당시, 이때만 기다렸다는 듯 제게 고신을 행하려던 백청은 돌연 무슨 일인지 저를 두고 급히 나가 버렸다. 그 뒤 옥환도 곧 의식을 잃었다가 겨우 깨어난 참이었다.
한데 계평은 과연 이곳에 어찌 온 것일까. 혹 잡혀 온 것인가. 그러다 옥을 지키는 옥졸들이 전부 기절해 있는 것을 본 옥환은 온몸이 비명을 지르는 듯한 고통을 억누르고 입을 열었다.
“……어찌 된 것이냐.”
“갑자기 처소를 뛰쳐나가시니 몰래 뒤를 따랐습니다. 그러다 그 고약한 노인네가 승상을 잡아가는 것을 보고 어찌나 놀랐던지요. 그 후 상황을 주시하다가 노인네가 뭔 일이 났는지 다급하게 돌아가길래 그사이를 틈타 잠입한 것입니다.”
계평도 엄연히 벽국 왕의 호위였다. 특히 그는 염요의 뒤에서 암약하는 일이 많았기에, 비록 옥사 안이라고는 하나 다른 죄수들과 달리 따로 떨어진 독방에 갇혀 있는 옥환에게 오는 것이 아주 불가능하지는 않았을 터였다.
“백청이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 너는 이것을…… 가져가 태우거라.”
옥환은 품 안에 있던 염요의 서찰을 계평에게 건넸다. 계평은 그것을 받아들며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 서찰 안에는 벽국이 천구족과 동맹을 맺었으며, 최근의 도발은 모두 서국을 천구족과 맞붙게 하기 위한 계책이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서국과 화친을 맺을 생각 따윈 일절 없다는 말도.
천구족은 벽국과 서국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유목민족으로, 특출 난 기마술을 가진 탓에 양 나라에서도 탐을 내던 존재였다. 하나 그들은 그 기마술을 가지고 외부의 공격을 방어하는 것은 물론, 서국과 벽국 그 어느 쪽의 거래나 대화에도 응하지 않는 중립적인 태도를 보여 왔다. 한데 벽국이 그들을 포섭했다. 것도 국경인 길천 땅을 내어 주고서.
그들에게 국경을 내주는 것은 옥환이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일이었다. 천구족은 의리나 약속 따위는 쉬이 어기는 야만족이기 때문이었다. 혹여 천구족이 서국 측으로 돌아서거나, 아예 땅만 받고 모르쇠로 나온다 해도 벽국으로선 크게 대응할 방법이 없었다.
하나 그들은 강했다. 자신들의 적이 벽국군이라고만 생각하고 있는 서국군은 손 쓸 새도 없이 패배할 것이 자명했다. 해서 몇 시진을 고민하고 노심초사하다 끝끝내 위험을 무릅쓰고 승헌을 만나러 간 것이었으나…… 결국엔 이 모양이다. 차디찬 감옥 안을 휘 둘러본 옥환은 실소를 흘렸다.
“승상. 지금 웃음이 나오십니까?”
“하면 울겠느냐. 너는 내일 틈을 봐서…… 서국을 빠져나가거라. 혹 그것이 어렵거든 기밀이라도 벽국에 전해야 한다. ……더 말하지 않아도 어련히 잘할 거라 믿는다.”
‘믿는다’는 옥환의 말에 계평의 표정이 더더욱 괴상해졌다. 그는 망설임과 기막힘이 섞인 얼굴로 옥환을 바라보았다. 옥환이 정말 벽국만을 위해 행동하고 있는 것인지, 계평은 여전히 확신할 수 없었다. 하나 그는 이런 데서 죽을 위인이 아니었다. 그것만은 확실했다. 계평은 이건 정말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저도 모르게 속말을 입 밖에 내었다.
“……서국 왕에게 도움을 청하겠습니다.”
“됐다. 어차피 전하께서도 곧 알게 되실 거고 그럼…… 죽일 때 죽이더라도 시시비비는 가려 주시겠지.”
계평은 승헌에 대한 옥환의 믿음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으나 정말 승헌이 그런 자라면 조금은 안심이 될 것 같았다.
“그래도 말은 한번 해 보겠습니다. 제가 가서 얘기하면 승상이 억울한 것이라는 증명이 되지 않겠습니까. 죄지은 이가 굳이 구명을 청하지는 않을 테니까요.”
계평이 그새 조금은 머리가 쓸 만해진 듯하다고 생각하며 옥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전하께 가거라. 가서, 나는 되었으니 종소를 살려 달라고 청해.”
“……승상.”
“나는 백청에게 졌다. 네 생각대로 오만하고 방자하여 일을 그르친 것이다. 아니면…….”
‘정’이 문제였을지도 모른다. 옥환은 뒷말을 삼키고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더 해야 할 말은 없었다. 무엇보다 몸이 너무 무거웠다.
옥환은 종소의 얼굴을 떠올리다가, 그대로 잠에 빠졌다.
***
서국군이 길천을 향해 출병하는 날, 그들을 배웅하기 위해 서국 신하들이 성문 앞에 나와 있었다. 군 행렬의 맨 앞에 선, 아직 앳된 티가 묻어나는 주장主將은 병부상서를 향해 늠름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나 병부상서는 그 미소를 보며 마치 배라도 아픈 사람처럼 구겨진 표정을 지었다. 물론 그게 그가 간신히 지은 웃음임을 아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아들의 시선이 다른 곳으로 향하자 그제야 병부상서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에 옆에 서 있던 문하시중이 사정을 다 아는지 위로의 말을 건넸다.
“병부상서. 너무 걱정 마십시오. 병부상서의 자제는 훌륭한 인재가 아닙니까. 필시 승리하고 돌아올 것입니다.”
하나 문하시중의 위로에도 병부상서의 얼굴은 통 밝아질 기미가 없었다.
“물론 그래야지요. 그래야 하지만…… 아직 철이 덜 든 아이입니다. 지난 전쟁의 공도 넘치는 혈기를 주체하지 못한 것이 운 좋게 승리로 이어진 것뿐이라, 혹 저 녀석이 섣부른 판단으로 일을 그르치지는 않을까 걱정입니다.”
“……병부상서께서 몇 번이고 잘 타이르셨다면서요. 그래도 이제는 전장에 나가 본 어엿한 무장이니, 병부상서의 충고를 허투루 듣지는 않을 것입니다.”
문하시중의 조언에 병부상서가 불안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경험이 부족한 병부상서의 아들이 이번 원정의 주장이 된 것은 뜻밖에도 백청이 주도한 일이었다. 당연히 무관 측 인사를 주장으로 내세우리라 생각했던 것과 달리, 그는 자신들과 반대되는 문관 측, 즉 병부상서의 아들을 주장으로 추천했다. 병부상서는 제 아들의 미숙함을 거론하며 에둘러 거절을 표했으나 백청이 준비한 판에서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했다.
백청은 자신들이 길천의 싸움에서 질 리가 없다며, 쉽게 이기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군의 사기를 올리고 민심을 안정시키자고 주장했다. 더불어 병부상서의 아들이 지난 벽국 원정 당시 세웠던 공을 읊으며 제 주장의 설득력을 높였다. 갑작스런 상황인 데다가 마땅히 거절할 사유도 없었던 병부상서는, 결국 내키지 않는 얼굴로 백청의 의견에 동의했다.
어쩐지 백청이 무언가 꿍꿍이를 감추고 있는 듯해 문하시중은 공연히 불안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옥환을 쫓아낸 것도 그렇고, 백청의 행동 하나하나가 예사롭지 않았다.
‘전하께선 괜찮으신 건지…….’
불현듯 떠오른 승헌을 향한 걱정에 고개를 들고 옥좌가 있는 방향을 바라본 문하시중은 환관 하나가 헐레벌떡 달려와 승헌에게 무어라 귓속말을 전하는 것을 보고는 의문을 느꼈다. 이윽고 환관의 보고를 들은 승헌의 표정이 단박에 사나워지더니, 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그대로 다급히 사라져 버렸다.
“아니, 이 무슨……. 전하께서 대관절 어딜 가신 것입니까?”
“그, 그러게 말입니다.”
원정군을 배웅하다 말고 사라져 버린 승헌 때문에 신하들이 웅성거렸으나, 승헌이 어디로 갔는지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얼마 뒤, 군사들을 내팽개치고 달려온 승헌은 옥사 앞에 있었다. 고귀한 군왕이 찾아올 곳은 아니었으나, 그는 화들짝 놀란 옥졸들을 뒤로하고 안으로 들어섰다.
“저, 저, 전하. 이런 누추한 곳까지 어인 일이시옵니까?”
옥사를 담당하는 병부의 관리가 허둥지둥 나와 승헌에게 물었다. 승헌과 함께 온 태감이 심각한 표정으로 일렀다.
“간밤에 태사께서 이곳에 하옥되셨다고 들었다. 그분이 계신 곳으로 앞장서거라.”
험악한 분위기에 관리는 사달이 났구나 싶어 냉큼 승헌을 독방 앞으로 안내했다. 관리의 안내로 독방에 다다른 승헌은 독방의 견고한 창살 너머로 웅크린 채 누워 있는 옥환을 보고는 주먹을 꽉 쥐었다.
“열어라.”
낮게 깔린 음성에 관리가 손을 떨며 열쇠를 두 번이나 떨어트리고 나서야 감옥의 문이 열렸다. 승헌의 뒤로 태감이 얼른 따라 들어가 옥환의 상태를 살피고 휘하의 궁인에게 한시 빨리 태의를 불러오라 지시했다.
승헌이 옥환의 가까이로 다가가자 태감이 물러나 자리를 터 주었다. 차디찬 손끝을 멍이 든 뺨에 갖다 대니 그 많은 인기척에도 죽은 듯 쓰러져 있던 옥환이 느리게 눈을 떴다.
“……전하.”
흐린 눈을 몇 번쯤 깜빡인 그가 뒤늦게 승헌을 알아보고는 갈라진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보기만 해도 가슴이 아려 오는 안타까운 모습에 승헌이 입술을 꽉 깨물었으나, 이내 그가 평정을 가장하고 몸을 일으켜 물었다.
“옥환. 왜 처소에서 자숙하란 내 명을 어겼지?”
“전하께…….”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휘청이며 승헌의 앞에 무릎을 꿇은 옥환이 겨우 꺼낸 말은 목이 쉬어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승헌이 미간을 찌푸리자 태감이 눈치 좋게 따뜻한 물을 가져와 옥환이 마실 수 있도록 해 주었다. 목을 축인 옥환이 다시금 대답했다. 여전히 다 갈라진 목소리였으나 말을 이을 정도는 되었다.
“전하께 긴히 청할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 중요한 청이었나? 왕명을 어길 만큼? 해서 그 모습을 대장군에게 들켜 옥에 잡혀 올 만큼?”
“…….”
“그대의 처소를 지키는 병졸들에게 비키지 않으면 자결을 하겠노라 협박을 해서 도망쳐 나왔다지. 제정신인가, 그대는? 그 뒤가 어찌 될지는 생각하지도 않았어?”
승헌의 매서운 다그침에 옥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승헌은 그런 옥환에게서 살짝 몸을 돌리며 단호한 어조로 내뱉었다.
“대장군이 직접 그대를 잡아 왔으니 나로서도 풀어줄 방도가 없어. 그대가 금족령을 어긴 사실을 증언할 이가 못해도 열은 되니까.”
단념하듯 시선을 떨어트린 옥환은 바닥을 쳐다보다 말문을 열었다.
“……전하. 길천에 군사를 보내셔서는 아니 됩니다…….”
“하.”
그 말에 승헌이 실소를 터뜨렸다. 그런 승헌을 보는 옥환의 눈동자에는 충격과 체념이 번갈아 지나갔다.
“고작 그런 얘기를 하려고.”
“고작이 아닙니다. 전하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벽국에게는 숨겨진 무언가가 있습니다.”
서둘러 품 안에 손을 넣었던 옥환은 자신이 염요의 서찰을 이미 계평에게 넘겼다는 것을 깨닫고는 힘없이 손을 내렸다. 혹 백청에게 들킬까 저어되는 마음에 넘긴 것이었으나, 백청보다 승헌이 먼저 찾아왔으니 참으로 운도 없었다.
“게다가 원정군은 이미 출발했어. 벽국에서 무엇을 준비했든, 서국도 그리 호락호락 당하지는 않을 테니 그대가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될 일이야.”
방금까지와는 달리 조금 누그러진 어조에 옥환이 승헌을 보았으나 그의 냉담한 표정만 봐서는 자신의 착각인 것 같았다. 승헌은 옥환의 그런 시선을 외면하듯 고개를 살짝 틀었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승헌의 말대로 서국이 그리 막무가내로 당하고만 있을 리도 없었다. 제게서 돌아선 승헌의 넓은 등을 바라보며 옥환은 고개를 떨구었다. 그렇다면 하다못해, 하다못해…….
옥환은 간밤 기절한 내내 꿈에서 보았던 종소의 얼굴을 떠올리며 승헌의 발치에 엎드렸다.
“종소를 구해 주십시오, 전하.”
“…….”
승헌은 옥환의 부르튼 손끝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옥환은 그 시선을 보지 못한 채 말을 이었다.
“종소가 대장군에게 잡혀 있습니다. 대장군이 저를 싫어하시는 것은 잘 압니다. 제가 어명을 어긴 것도 맞습니다. 저를 추국하고 고신하셔도 좋습니다. 제게 씌워진 혐의도 다 받아들이겠습니다. 하나 그 혐의를 씌우기 위해 대장군은 종소를 이용하였습니다. 그 아이에게는 맹세컨대, 아무런 죄도 없습니다. 죄가 있다면 저 같은 자를 스승이랍시고 모시고, 제게 정을 준 것이 다입니다. 하니 전하께선 부디 아량을 베푸시어 가련한 소년을 구해 주십시오.”
옥환이 말을 끝맺을 때 그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다. 감정을 억누르려 애를 쓰는 게 역력한 목소리였다. 승헌은 담담하게 옥환의 말을 들었으나, 그의 가슴은 괴로움과 안타까움으로 한없이 미어졌다. 왜 이리 어리석어서, 왜 이리 곧아서 제 마음을 죄 문드러지게 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승헌은 옥환이 저를 찾아온 진짜 이유는 종소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백청에게 위협을 당했거나, 길천 원정이 시작된다는 말에 혹 백청이 필요가 없어진 종소에게 무슨 짓을 할까 염려가 되어 그런 것이라고. 그는 설마하니 옥환이 염요와 밀서를 주고받고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았고, 그가 벽국을 저버리고 서국을 구하려 했다고는 더더욱 생각도 못했다.
승헌은 당장 무릎을 굽혀 옥환의 차디찬 몸을 녹이고 상처를 돌봐 주고 싶은 마음을 억눌렀다. 이번 일은 표면적으로는 명백히 옥환의 잘못이었고, 그 내면에는 무관들의 옥환을 향한 불신과 원망이 짙게 녹아 있었다. 그것을 이번 기회에 풀지 않으면 장차 옥환은 이보다 더 큰 화를 입을 수도 있었다.
특히 백청은 결코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아니, 옥환을 이만큼 애먹일 정도면 제 생각보다도 더 대단한 위인일지도 몰랐다. 승헌은 옥환을 이대로 더 외면하기로 했다. 자신의 손길과 관심에서 멀어져야 옥환이 안전할 수 있었다.
하나 그렇게 마음먹었음에도 막상 실제로 옥환을 떼어 놓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제 앞에서 다친 채 애원하는 옥환을 보니 승헌은 도무지 매정해질 수가 없었다. 이제껏 공사의 구분은 철저히 해왔건만, 옥환의 존재가 군왕으로서의 자신을 자꾸만 허물고 있었다.
‘더는 안 돼.’
더는 옥환에게 휘둘려서도, 그 탓에 무관들에게 불만을 안겨 주어서도 안 될 일이었다. 자신은 서국의 왕이었다. 그의 어깨 위에는 수도 없이 많은 백성의 목숨이 올라가 있었다. 그들을 위해서는, 공정하고 흔들림 없는 군왕이 되어야만 했다.
승헌은 의지를 굳히고는 입을 열었다.
“그건 어려울 것 같군.”
“……예……?”
옥환은 마치 못 들을 말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승헌을 황망히 올려다보았다. 승헌은 옥환에게서 완전히 돌아선 채 말했다.
“내가 무슨 이유를 대고 그 아이를 대장군에게서 구해 오겠나? 그 아이를 억지로 뺏어오면 무관들의 반발을 키우는 일밖에 되지 않아. 똑똑한 그대라면 이 정돈 알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면 알면서도 무시하는 건가?”
“저, 전하. 차라리 제게 벌을 내리십시오. 제게는 뭐라고 하셔도 좋습니다. 종소가 죽어야 한다면 제가 대신 목숨을 내놓겠습니다. 제가 다 잘못했습니다. 전하께서도 대장군이 얼마나 잔학한 성정인지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 아이가 지나친 고초를 겪지 않도록 차라리 이곳에 가둬 주십시오. 그것은 전하께서도 해 주실 수 있지 않습니까.”
승헌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떴다. 옥환의 간절한 시선이 뒤통수에 꽂히는 듯했지만 승헌이 낸 목소리는 가시처럼 날카로웠다.
“설옥환, 아니. 태사. 정말 도가 지나치군. 내가 그대의 사소한 부탁까지 들어줘야 하나? 그대가 벌인 모든 행동이 나를 얼마나 곤란하게 만들고 있는지는 아냔 말이야.”
“……전, 하.”
“그대가 대놓고 어명을 어기는 바람에 내 권위는 땅바닥에 처박혔어. 거기다 기밀을 빼내다니. 진위가 확인되지 않았다고 해도 자백서까지 나온 상태가 아닌가. 만일 그대가 결백하다면 그 종소란 아이가 거짓 자백을 했단 말인데, 그대를 배신한 아이를 굳이 살려 줄 필요가 있을까?”
옥환은 고개를 세차게 저었으나 저를 등지고 선 승헌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머리로는 무슨 말이든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도 왜인지 목구멍이 턱 막혀 입이 열리지도, 목소리가 나오지도 않았다. 눈앞의 사내는 자신이 알던 승헌이 아닌 것 같았다. 뭘 멋대로 기대하고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옥환은 가눌 수 없는 좌절감과 실망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윽고 승헌은 할 얘기가 끝났다는 듯 밖으로 나가려 했다. 그 모습에 옥환이 황급히 일어서 승헌의 옷자락을 붙잡았고, 승헌은 그것을 일부러 더 매몰차게 쳐냈다. 한데 평소보다 더 약해져 있던 옥환이 승헌의 힘에 밀려 그대로 중심을 잃었다. 밀쳐진 당사자보다 더 놀란 승헌이 재빨리 옥환의 허리를 받쳐 그를 부축했다.
“……!”
처음으로 옥환의 얼굴을 제대로 본 승헌은 새하얀 얼굴 한쪽을 뒤덮은 커다란 멍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피딱지가 앉은 입술까지 보니 지금까지의 인내가 무색하게 절로 이가 갈렸다.
“그대는……!”
그깟 어린애가 그리 중하냐고, 본인 목숨은 안중에도 없냐고 따져 묻고 싶은 것을 승헌은 입술을 물어 간신히 참아 냈다. 여기 있다가는 옥환을 끌고 나와 제 침전에 보낸 뒤 곧바로 백청의 목을 치러 갈 것 같았다. 머릿속을 지배하는 강렬한 충동에 승헌은 옥환의 중심을 잡아 주고는 도망치듯 옥사를 벗어났다.
그 모습을 멀거니 지켜보던 옥환은 그대로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믿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꿈이었으면 했다. 하나 저를 저버리고 간 사내는, 자신이 믿고 있던 그 견승헌이었다. 넋이 나간 채 승헌이 쳐낸 손을 내려다보던 옥환이 이내 그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옥환의 마지막 남은 희망은, 그렇게 허무하게 꺼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