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권 - 6화 (6/16)

금야기

2

보리비

六. 黑野(흑야)

옥환은 계평이 들고 온 예상외의 소식에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되물었다.

“정녕 네 말이 사실이냐? 서국 왕이 호진을 지방으로 보냈다고?”

“예, 사실입니다. 관리들이 그리 말하는 것을 직접 들었습니다.”

‘……나 때문인가?’

옥환은 승헌의 의도를 가만히 고민했다. 그는 아마 자신을 향한 증오에 불타고 있는 호진의 머리를 식히기 위해 그러한 결정을 내렸을 터였다. 그리고 감히 왕의 거처인 궁 안에서 궁인도 아닌 관리를 죽이려 한 죄를 그런 식으로 물은 것일 테고.

하나 아무리 그래도 의외의 처사였다. 호진이 자신을 죽이려 한 것은 목격한 이가 많지도 않았고, 일전에도 말했다시피 승헌의 과도한 개입은 도리어 호진의 감정을 키우는 불씨가 될 수도 있었다. 물론 호진이 그리 충성하는 승헌에게 반기를 들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으나, 아무튼 호진이 승헌의 결정을 곱게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 같았다.

결론적으로, 여전히 완전히 신뢰할 수 없는 자신을 보호하려 호진을 내치는 것은 아무래도 손해가 큰 판단이라는 게 옥환의 생각이었다.

“잘된 일 아닙니까. 호진 그놈은 사사건건 트집을 잡으며 승상을 방해했으니 말입니다.”

“그렇긴 하다마는…… 서국 왕의 의도를 모르겠구나. 호진 그자도 이 일로 내게 더 큰 적의를 품을지 모르고.”

그렇게 중얼거린 옥환은 이내 계평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보다 너는 내게 골이 난 것이 좀 풀린 것이냐?”

“……그날은 제가 지나쳤습니다. 송구합니다, 승상.”

계평이 순순히 사과를 하자 옥환은 무슨 바람이 불었나 하는 생각에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옥환의 불신 어린 시선을 느꼈는지 계평이 변명하듯 덧붙였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각자 충의를 표현하는 방식이 다를 수 있는 것이지요. 게다가 아직 무어라고 결정이 난 것은 없으니, 두고 보면 누가 옳은지는 곧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럼 그렇지, 하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옥환은 쓰게 웃었다. 에둘러 표현하기는 했으나 계평의 말인즉 옥환이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를 때까지 좀 더 지켜보겠다는 뜻이었다. 하나 그것이면 충분했다. 이제 와 계평의 신뢰를 얻고 싶은 마음은 옥환에게도 없었다. 그의 말대로, 두고 보면 절로 알게 될 것이니까.

그 뒤, 손님이 왔다는 소식에 옥환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이했다. 옥환을 찾은 이는 문하시중이었다.

“태사.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걱정해 주신 덕에요.”

문하시중은 멀쩡해 보이는 옥환의 상태를 보고는 진심으로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옥환은 그의 진심이 담긴 걱정을 고맙게 여기며 그에게 차를 따라주었다.

“한데 예까지 어인 일이십니까? 정사로도 바쁜 분이 아니십니까.”

“태사께서 전하를 지키시려다 중상을 입으셨는데, 마땅히 더 자주 찾아뵈었어야 할 일을 이제야 오게 되어 면목이 없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해결해야 하는 일이 산더미라, 저나 다른 관리들이나 하루라도 빨리 태사께서 돌아오시길 바라고 있습니다.”

“참 말씀도 잘하십니다. 받아들여지지도 않을 의견을 내는 저 같은 이는 있으나 마나 도움도 안 되는데.”

옥환의 가시가 박힌 말에 문하시중은 곤란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애써 미소를 지었다.

“에이, 그런 말씀 마십시오. 들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호 장군이 전하의 명으로 지방에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그 덕에 무관들의 기세도 다소 가라앉았으니, 이때를 이용해 무관들의 반대로 진행하지 못했던 일들을 처리해야지요.”

“……문하시중의 말씀도 틀리지는 않았습니다만, 지금은 그저 가라앉은 것으로 보일 뿐일 겁니다. 호 장군이 갑작스레 그리되셨으니 몸을 낮추고 상황을 파악하려는 것이겠지요.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이 밝혀지면 그들의 반발은 더욱 드세지지 않겠습니까.”

문하시중은 옥환의 일리 있는 분석에 턱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지금의 기회를 이용해 자신들이 나서야 한다는 것은 두 사람 다 동의하는 바였다.

“제가 간다고 뭐가 그리 크게 바뀌겠습니까. 문하시중이나 중서령 같은 훌륭한 분들이 계시니 조정은 염려되지 않습니다.”

“아닙니다. 전하께서도 태사의 복귀를 바라시는 것을요.”

“전하께서요?”

“제게 직접 태사에게 작금의 조정 일에 대해 전해 드리고 오라고 명하셨습니다. 곧 조정으로 돌아오셔야 한다면서요.”

“……그렇, 습니까?”

옥환은 또 승헌이 무슨 꿍꿍이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그의 호의를 쉽사리 믿지 못하면서도, 그리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게다가 그동안의 일이 있었으니 승헌이 자신을 조금쯤 신용하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리 놀랄 일은 아니었다. 이번이야말로 제 뜻대로 일이 진행되려는 것일까. 그런 기대에 옥환은 다소 가벼워진 마음으로 찻잔을 들었다.

“그리고 그 얘기 들으셨습니까?”

돌연 목소리를 낮춰 말하는 문하시중에게 무슨 얘기냐 물으니, 그가 거의 귓속말에 가까워진 수준으로 작게 말했다.

“지난 모살 사건 말입니다. 잡힌 것은 살수뿐만이 아니라고 합니다.”

“예? 그럼 누가 또…….”

“환관 하나가 그들에게 협력했다는 모양입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요. 해서 전하께서 그를 직접 죽이셨다는 소문입니다.”

“…….”

옥환은 내심 당황했다. 그 죽은 환관을 조종한 것은 계평이다. 거기까지 다다르지 못한 것일까? 아니면 호진이 제게 억울한 누명을 씌웠다고 생각하고 모든 일을 마무리할 작정인 것인가? 그리되면 참으로 다행인 일이겠으나, 의심 많은 승헌이 과연 그렇게 정리를 할지가 의문이었다.

‘……정말로 나를 믿기 시작한 건가……?’

그렇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나 옥환은 섣부른 희망을 품지 않으려 애쓰며 이어지는 문하시중의 이런저런 추측을 가만히 들어주었다.

그 후, 문하시중과 지금껏 있었던 조정의 일에 대해 전해 받은 옥환은 그를 문 앞에서 배웅하고 난 뒤 다시 처소로 돌아가려 했다. 한데 처소로 향해오던 환관 하나가 마침 옥환을 발견하고는 얼른 다가왔다.

“태사.”

환관의 부름에 뒤를 돌아본 옥환은 그가 승헌을 모시는 환관 중 하나라는 것을 깨닫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환관은 머리를 숙인 채 두 손을 모으고 고했다.

“전하께서 후원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전하께서?”

옥환은 채비를 마친 뒤 그리로 향하겠다고 대꾸하고는 처소 안으로 들어가 옷을 갖춰 입었다. 오늘따라 저를 찾는 사람이 많은 날이었다. 옥환이 밖으로 나오자, 지난번 일이 있어서인지 이번에는 하인 하나가 얼른 옥환에게 따라붙었다. 옥환은 승헌이 무슨 연유로 저를 불렀을지 고민하며 길 안내를 위해 앞서 걷는 하인의 뒤를 따랐다.

이윽고 승헌이 기다리고 있는 정자에 다다른 옥환은 그에게 다가가 인사를 올렸다. 승헌은 제 맞은편을 손바닥으로 탁탁 쳤고, 옥환은 잠자코 그곳에 가 앉았다.

“어쩐 일로 부르셨습니까?”

“용건이 있어야만 부를 수 있나?”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보통은 직접 처소에 걸음하시니 여쭌 것입니다.”

옥환이 그렇게 대답하고 나자 마침 궁인들이 평소처럼 주안상을 가지고 나왔다. 한데 옥환의 것 위에는 안주 대신 연시가 올려져 있었다. 승헌이 어서 먹어보라며 권하자 옥환은 연시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물었다.

“이걸 주시려고 예까지 부르신 겁니까?”

“그래. 그대가 과일을 좋아한다면서.”

“…….”

“게다가 최근엔 줄곧 처소 안에만 있지 않았나. 답답할 것 같아 바깥바람이라도 쐬라고 부른 것이지. 마침 하늘도 청명하니 날도 좋아서 말이야.”

오늘 있었던 여러 가지 일로 인해 기분이 썩 좋았던 옥환은 웬일로 정말 그렇다고 승헌의 말에 맞장구를 치고는 연시를 떠서 입안에 넣었다. 확실히 왕에게 진상되는 것이어서 그런지 맛이 좋았다.

“그 연시는 저쪽 용주에서 진상한 거야. 떫은 생감을 햇빛에 오래 두면 그 떫은맛이 없어지고 단맛이 강해지는데, 그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연시지.”

“……잘 아시는군요.”

“글쎄. 그대에게 이야기해 주려고 일부러 공부한 것일 수도 있지 않겠나?”

승헌의 진담인지 농담인지 알 수 없는 말에 옥환은 반응을 망설였다. 승헌은 그저 씩 웃고는 잔에 술을 따랐다. 한데 오늘따라 유독 그 모습이 보기 싫었던 옥환은 그에게 말을 붙였다.

“전하. 줄곧 생각한 것인데 전하께선 음주가 너무 잦으시니 조금 줄이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내가 취해서 그대에게 추태를 보인 적은 없는 것 같은데.”

“그런 뜻이 아니라…….”

그럼 됐지 않나, 하고 대충 넘기며 술을 마시려는 승헌을 옥환은 저도 모르게 얼른 제지했다. 술잔과 자신의 사이에 불쑥 끼어든 옥환의 팔에 승헌이 뭐냐는 듯 옥환을 쳐다보았다.

“제가 안 볼 때도 자주 드시고 계실 게 아닙니까.”

“……이런 말을 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게 그대와 상관이 있나?”

승헌은 궁 안에서도 이름난 주당으로 소문이 자자했다. 그와 대작하여 끝까지 버틴 이는 그 수많은 관료 중 문하시중이 유일하다는 얘기도 있었다. 옥환은 그 얌전한 문인인 문하시중이 굉장한 술고래라는 사실에 놀라기는 했으나, 아무튼 그건 둘째 치고 승헌이 풍류라고 둘러대며 술을 과하게 즐기는 것만큼은 궁 안에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터였다. 엄연히 한 나라의 국운을 짊어진 군왕이 그리 술독에 빠져 어찌할 텐가.

물론 승헌의 음주가 문제가 될 수준은 아니라는 걸 옥환도 잘 알았지만, 그렇다고 또 칭찬받을 일인 것도 아니었다. 기왕 이리된 것 그 버릇을 고쳐 놓기로 마음먹은 옥환은 단호하게 간언했다.

“군왕이 술을 너무 가까이해서도 안 될 일입니다.”

“난 안 취한다니까? 뭘 우려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취해서 정사를 보는 일도 없고, 만일 취한다 해도 이렇다 할 주벽은 없어.”

나름 일리가 있는 주장에도 옥환은 도무지 제 뜻을 굽히려 하지 않았다. 승헌은 그놈의 승부욕이 또 도졌냐고 투덜대면서 옥환의 입안에 연시를 떠서 넣어 주었다.

“안 돼, 옥환. 이건 돌아가신 선친께서 살아 돌아오신다 해도 안 될 일이야. 다른 건 다 져주겠지만 이것만은 못 져 주니 공연히 실망하지 말고 관두는 게 좋아.”

“금주를 청하는 것이 아닙니다. 조금 줄이시기를 청하는 것이지요.”

“그 조금 줄이는 것조차 하기 싫고, 할 필요도 없다고.”

승헌이 완강하게 거부하면서 계속해서 연시를 먹여 주자 옥환은 그것을 열심히 삼키면서 끈질기게 대꾸했다.

“절제를 할 줄 알아야 그것이 풍류가 되는 것이고 오락이 되는 것입니다. ……과유불급이라 하였는데…… 군왕이 절제의 미덕을 몰라서야 어찌 백성을 가르치겠습니까.”

자꾸만 입안에 들어오는 연시를 꿀떡꿀떡 삼키며 애써 말을 잇는 옥환이 승헌의 눈에는 이루 말할 수 없이 귀엽게 보였다. 결국 승헌이 고개를 돌리고는 큭큭거리자, 옥환은 그런 승헌을 잠시 노려보다가 얼른 술병을 제 뒤로 숨겼다.

“제가 이겼으니 오늘은 양보해 주십시오.”

“이기고 지는 게 어디 있어? 난 그런 내기는 한 적 없어.”

그러더니 승헌은 아까까지 웃을 땐 언제고 갑자기 돌변해서는 날쌘 몸놀림으로 옥환의 등 뒤를 습격했다. 옥환 역시 기를 쓰고 승헌에게서 술병을 사수하려 했으나 서생의 힘으로 승헌을 막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금세 승헌에게 밀린 옥환이 뒤로 휙 쓰러지자 승헌이 얼른 그 위로 올라가 옥환의 손에 잡힌 술병을 빼내려 했다.

“너무하시지 않습니까? 어린아이도 아니고 이게 무슨……!”

“그대가 먼저 무력행사를 했잖아. 무로 세운 나라의 왕에게 그런 도발을 하면 못쓰지.”

승헌이 술병을 뺏을 때까지 절대 물러서지 않을 것을 직감한 옥환은 술병이 제 손을 빠져나가려 하자 황급히 소리쳤다.

“걱정이 돼서 그럽니다!”

그러자 승헌이 멈칫하더니 술병을 뺏는 걸 멈추고는 물었다.

“뭐가 걱정이 돼?”

“전하의 옥체가요. 지금이야 젊어서 괜찮으신 거지, 그리 술을 드시면 몸이 남아나질 못합니다.”

“술이라곤 한 방울도 못 하는 그대가 어찌 알아.”

“제가 의술에 조예가 있는 것을 모르십니까?”

옥환이 고집스러운 눈빛으로 승헌을 응시하자, 승헌은 짧은 한숨을 내쉬더니 결국 백기를 내걸었다. 그는 가끔은 져 줄 줄도 알아 보라며 구시렁거리긴 했으나 술병을 놓고는 얌전히 물러났다. 승헌의 맹렬한 기세에 내심 움츠러들었던 옥환은 승헌이 물러나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정자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나란히 서 있는 궁인들의 존재가 눈에 들어왔다. 그제야 장성한 사내 둘이서 얼마나 유치한 몸싸움을 벌였는가 싶어 부끄러워진 옥환은 별것 아닌 일에 열을 냈다는 생각에 제 행동을 후회했다.

“군왕을 이겨 놓고서 표정이 어찌 그래?”

“어디 전하만 이겼겠습니까. 돌아가신 전하의 춘부장 또한 이겼지요.”

승헌의 질문에 금세 괘씸한 기분이 든 옥환은 냉큼 쏘아붙였다. 그 대답에 승헌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실소를 터뜨렸다. 옥환이 한 말은 아까 전 승헌이 죽은 제 아버지가 돌아와도 자신의 음주를 막을 수는 없을 거라는 말을 받아친 것이었다. 무례한 것이라고 여길 수도 있었으나, 승헌은 그저 말은 참 잘한다고 비꼬았을 뿐이었다.

“그보다 그대가 내 술을 뺏어가는 바람에 나는 손도 심심하고 입도 심심해. 그대가 책임을 져 줘야지?”

“이상한 요구를 하시려거든 그만두십시오. 보는 눈이 많습니다.”

“무슨 생각을 하기에 그래? 난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귀 끝이 발그레해진 옥환이 승헌을 원망스러운 눈길로 흘겨보았다. 승헌은 짧은 복수를 끝내고는 이번에는 옥환의 무릎 위로 태연자약하게 드러누웠다. 움찔한 옥환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으나 이렇다 할 제지는 하지 않았다. 도리어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그릇에 담긴 과자를 집어 승헌에게 내밀기까지 했다.

“제게 져 주셨으니 이번만 특별히 드리는 것입니다.”

옥환의 대답에 승헌은 지길 잘했다며 소리 내어 웃고는 과자를 받아먹었다.

“아름다운 정인의 무릎을 베고 누워 가을바람을 맞으니 그야말로 극락이 따로 없군.”

크게 기지개를 켜는 승헌을 가만히 바라보던 옥환은 요즘도 많이 바쁘시냐고 물었다.

“그대와 단둘이 있을 때는 정사 얘기는 하고 싶지 않아.”

“…….”

“또 그대를 내 조정에서 배제하려 한다고 생각하나?”

“아닙니다. 오늘 문하시중이 처소에 왔다 갔습니다. 전하께서 조정 일을 전하라 하셨다면서요.”

“아, 그래. 그랬지.”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승헌은 이 화제 자체가 달갑지 않은 건지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을 눈치챈 옥환이 다른 얘기를 꺼내려는데, 문득 그의 눈에 환관 하나가 이쪽으로 종종거리며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안 그래도 승헌과 이리 가까이 있는 것이 민망했던 옥환은 잘됐다 싶어 얼른 승헌의 팔을 두드렸다.

“일어나십시오, 전하.”

“왜?”

“환관이 드릴 말씀이 있는 모양입니다.”

승헌은 성가시다는 티를 팍팍 내며 누운 채로 환관에게 무슨 일이냐 하문했다. 환관은 승헌의 눈치를 보면서 무관들이 승헌을 만나러 왔다고 고했다. 승헌이 단박에 인상을 쓰자 옥환이 그를 달랬다.

“만나 보십시오. 필시…… 호 장군의 일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고 그자들에게 아우가 그대를 목 졸라 죽이려 해서 벌을 내린 거라고 말할 수는 없잖아.”

“…….”

“그리고 아마 그 일 때문이 아닐 거야.”

옥환이 의문을 느끼면서도 자리를 비켜 주려는데 정작 승헌은 옥환의 무릎 위에서 통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난처해진 옥환이 결국 승헌에게 그만 일어나시라 직접적으로 말을 했으나 승헌은 씩 웃으며 능청스럽게 말했다.

“그대가 있는 게 나아. 아까 져 준 기념으로 뭐든 해 주겠다며.”

“제가 언제 그런 말을…….”

하나 승헌은 옥환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는 멋대로 무관들을 들였다. 무관들은 옥환과 그의 무릎 위에 누워 있는 승헌을 보고는 움찔했다. 옥환 역시 이 상황이 몹시도 낯부끄러웠다. 유일하게 이 상황이 아무렇지 않은 듯한 승헌만이 무관들에게 무슨 일이냐며 먼저 말문을 열었다. 머뭇거리던 무관 무리 중 초로의 무관 하나가 나서 고했다.

“전하. 다름이 아니오라 아직 소신들이 올린 간택 후보자 명단을 보지 않으셨다고 들었나이다.”

무관의 말에 옥환은 의문을 느꼈다. 무슨 명단이라고?

“아, 그거. 정무가 워낙 많아 깜빡했군.”

승헌은 다 알고 있었으면서도 모른 척 시치미를 뗐다. 무관들이 속으로 내쉬는 한숨이 여기까지 들려오는 듯했으나 옥환은 그보다는 다른 데에 정신이 팔려있었다.

‘간택 후보자 명단……?’

간택이라고 하면 자연히 떠오르는 건 왕후였다. 승헌도 이미 혼기가 다 찬 데다가 그가 왕위에 오른 지도 어느 정도 시일이 지났기에 국혼에 대해 생각할 때가 되기는 했다. 하물며 후사를 보는 것은 나라의 안위를 위해 당연히 필요한 일이었으니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하나 그렇다고는 해도 벌써 후보자 명단을 꾸려 승헌에게 올리기까지 했다니, 그 사실을 미처 몰랐던 옥환은 다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견승헌이 혼인을 한다……?’

만일 그렇게 되면 지금은 자신을 향해 있는 승헌의 관심이 새 왕후를 향하게 될 수도 있다. 게다가 후사를 보게 된다면 승헌의 왕권은 더욱 견고해질 것이다. 더 고민할 필요도 없이 반대해야 옳은 일이었다. 하나 무슨 자격으로, 무슨 명분을 붙여 반대한단 말인가. 공연히 반대를 했다가 다시금 승헌의 의심을 받거나 무관들의 미움을 사는 건 결코 최선의 수가 아니었다.

애당초 반대한다 해도 승헌이 제 의견을 받아 줄 이유 또한 없다. 그렇다면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승헌의 국혼을 이용하는 방법 또한 필시 존재할 테니까.

한데도 옥환은 어쩐지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아니, 무관들이 국혼 얘기를 꺼낸 순간부터 내내 목구멍이 꽉 막힌 기분이었다. 인상을 찌푸린 채 상념에 잠겨 있던 옥환을 깨운 것은 승헌의 목소리였다.

“옥환. 그대는 어찌 생각하나?”

“……소신은…….”

승헌이 제게 대답을 구하는 건 자신이 반대해 주길 바라서일지도 모른다. 할 수 있다면 하고 싶었다. 하나 무관들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 합리적이지 못한 이유로 위험을 무릅쓸 수는 없었다.

마음을 정한 옥환은 그럼에도 여전히 주저함이 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소신은, 마땅히 서국을 위해 전하께서 왕후를 맞으시어 후사를 보셔야 할 줄로 아옵니다.”

“흠, 그렇군.”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은 승헌의 반응에 옥환은 소매 밑의 주먹을 굳게 말았다. 어쩐지 이 상황이 더없이 불쾌했다. 이러려고 승헌이 자신을 못 가게 한 건가 싶어 괘씸한 마음도 들었다.

정작 승헌은 장난스러운 얼굴로 옥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대가 내 편을 좀 들어 주길 바랐는데.”

심드렁한 얼굴로 승헌을 본 체도 안 하던 옥환은 문득 그의 말뜻이 조금 이상한 것 같단 생각을 하고는 시선을 내렸으나 승헌은 무관들을 보며 이렇게 말했다.

“뭐, 과인의 정인은 그렇다고 하지만 과인은 아직 혼인할 마음이 없군.”

“전하, 하오나……!”

“경들의 말뜻은 잘 알아. 하나 그 문제는 나중에 생각해도 괜찮지 않나. 지금 집중해야 할 문제는 따로 있으니.”

무관들도 무관들이지만 옥환 역시 상당히 동요한 채 승헌을 바라보았다. 그가 설마하니 국혼을 미루려 할 줄은 몰랐다. 그에겐 그럴 만한 이유가 없었다. 그가 지금 내세운 이유도 구체적인 내용이 없는 변명에 불과했으니까.

“과인은 지금 쉬는 중이야. 경들의 군왕을 과로사시키고 싶은 게 아니라면 경들은 그만 물러가도록 해.”

무관들의 줄기찬 호소에도 승헌은 딱 잘라 말하고는 결국 그들을 돌려보냈다. 마침내 둘만이 남게 되자 옥환은 곧바로 물었다.

“왜 국혼을 미루십니까?”

“왜일까?”

예의 능청스러운 반응에 옥환이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승헌은 손을 뻗어 옥환의 손을 쥔 채 말했다.

“그대의 추론을 먼저 들려줘 봐. 하면 정답을 말해 줄 테니.”

“제가 왜 그런…….”

“물론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되고.”

먼저 말을 꺼낸 것도 자신이고 승헌의 심중이 궁금한 것 또한 사실이었다. 옥환은 미묘한 패배감을 느끼면서도 하는 수 없이 승헌의 장단에 어울려 주기로 했다.

“무관들이 올린 명단에는 그들에게 유리한 인물만 있었겠지요. 거기서 간택을 하면 추후 문관들의 불평이 터져 나올 수도 있습니다. 하나 그런 경우 문관들에게도 명단을 올리게 하면 해결할 수 있으니, 국혼 자체를 아예 거절할 사유는 안 될 것입니다.”

“그래, 맞아.”

“그러니 여쭌 것입니다. 저는 그 연유를 알지 못해서 말입니다.”

“그야 그렇겠지.”

옥환이 그 굳센 자존심을 굽혔음에도 승헌은 쉬이 답을 내어줄 기미가 아니었다. 답답해진 옥환은 다시금 물었다.

“혹 지금은 때가 때인 만큼 정치적인 국혼은 하지 않으시려는 뜻입니까?”

“정치적인 국혼이라. 하면 그대는 내가 진정 연모하는 이를 만나 혼인하길 바라나? 그게 누구든? 아무것도 모르는 촌부라 해도?”

“……차라리 그게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일반 백성이라면 당파 싸움에 휘말려 전하를 힘들게 하지는 않을 테니까요.”

옥환의 대답에 승헌은 진중한 눈빛으로 옥환을 응시했다. 그 눈빛이 못내 껄끄러웠으나 옥환은 말없이 그것을 받아냈다.

“그대는 알다가도 모르겠어.”

그건 옥환이 하고 싶은 말이었다. 도무지 승헌의 속마음을 알 수가 없었다. 전부터 쭉 그랬고, 그때마다 옥환은 불안함과 버거움을 느껴왔다. 하나 지금은 전과는 달리 조바심이 났다. 그의 마음을 투명한 물길처럼 들여다보고만 싶었다.

“나를 걱정하나 싶다가도 다시 냉담한 얘기를 하고. 또 그 잘난 책사님이 되었나 싶으면 다시 내 걱정을 하는 것처럼 얘기하고.”

승헌의 발언에 옥환은 의외라고 생각하면서도 “그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하고 운을 뗐다.

“저는 전하의 첩이자 이 나라의 신하이니, 전하를 염려하고 나라를 생각하는 것은 제 본분이 아니겠습니까.”

“본분이라.”

옥환은 승헌의 교묘한 함정을 잘 빠져나갔다고 생각했으나 승헌은 다소 씁쓸한 표정이었다. 영문을 모르는 옥환이 승헌의 표정이 뜻하는 바를 고민하는 사이 승헌이 불쑥 몸을 일으켰다.

“너무 오래 누워 있었군. 무거울 텐데.”

옥환은 결국 승헌이 국혼을 미룬 이유를 듣지 못했다는 생각에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왜일까. 굳이 알 필요 없는 일일지도 모르지만, 공연히 신경이 쓰였다.

옥환이 승헌을 배웅하기 위해 따라나서자 승헌이 곧장 처소로 돌아가도 된다고 말하고는 돌아섰다. 행여 화가 난 것은 아닌지 옥환이 우려하는데, 승헌이 가다 말고 뒤를 돌아보며 덧붙였다.

“국혼을 미룬 것은 이제 그대에게 미안할 짓은 안 하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야.”

“…….”

“그대 하나로 충분하기도 하고.”

승헌은 그 말을 끝으로 먼저 후원을 빠져나갔다. 잠시 멀어지는 승헌의 등을 바라보던 옥환 역시 곧 하인과 함께 처소로 돌아왔다. 옥환이 자리에 앉으니 하인이 얼른 따뜻한 차를 내왔다. 오늘 날씨는 쌀쌀한 편이 아니었던 터라, 옥환은 그의 행동에 의문을 느꼈다. 그러자 옥환이 묻기 전에 하인이 먼저 말했다.

“얼굴이 붉으십니다. 가을바람이 서늘했던 모양인 듯하여.”

“……뭐……?”

옥환은 당황해서 얼른 제 뺨을 매만졌다. 확실히 양 뺨에는 열이 올라 있었다. 그것을 깨닫자 옥환의 얼굴은 더욱 달아올랐다. 부끄러웠고, 자존심이 상했다.

그럼에도 제 마음을 이리 헤집어 놓고 간 것이 승헌임을, 그는 도저히 부정할 수 없었다.

***

얼마 뒤, 옥환은 다시 조정에 복귀하게 되었다. 확실히 호진이 지방으로 보내진 일로 무관들의 위세는 많이 죽어 있었고, 그렇기에 그들은 지난번 확인한 것과 같이 반등의 기회를 노리며 승헌의 국혼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나선 상태였다. 문관들은 무관들의 주장에 힘을 실어줄 수는 없으니 그저 지켜만 보고 있는 상태였으나, 그들의 생각에도 승헌의 국혼은 굳이 반대할 일이 아니었다. 이런 상황이니 승헌 역시 명단 정도는 봐 줘도 되련만, 그는 꿋꿋하게 ‘국혼은 미루겠다’는 자신의 의견을 밀고 나가는 중이었다.

오늘도 어전회의 말미에 왕후 간택을 간청하는 무관들을 바라보고 있던 옥환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 같아서는 승헌에게 그러지 말고 무관들이 추천하는 후보들을 만나라도 보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나 저 때문에 혼인하지 않겠다는 사람에게 그런 매정한 말을 하는 것은 아무리 옥환이라도 내키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마음 한구석에서는, 고작 말 한마디가 별거라고 승헌의 마음이 다칠까 걱정하는 자신을 더없이 낯설어하는 또 다른 자신이 있었다.

‘그에게 감화라도 된 것인가.’

설마하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어떤 마음으로, 어떤 생각으로.

혼잡했던 어전회의가 겨우 끝이 나고, 편전을 나온 문관 무리는 대화를 나누었다.

“솔직히 저는 국혼에 반대하는 입장은 아닙니다만, 무관들도 참 끈질깁니다. 전하께서 저리 싫어하시는데.”

“하나 전하께서 다른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고 무조건 생각이 없다고만 하시니 저도 좀 걱정입니다. 장차 나라를 통일하고 그 뒤에는 황제의 자리에도 오르셔야 할 분이 아닙니까. 자손은 많을수록 좋은데 아직 정비조차 들이지 않으셨으니.”

“태사께서는 어찌 생각하십니까?”

그들의 대화를 잠자코 듣고만 있던 옥환은 갑자기 자신에게 화살이 돌아오자 난처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성실히 대꾸했다.

“글쎄요……. 전하께선 아직 젊으시고, 당장의 화급한 사안은 아니니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될 일 같습니다만. 전하께서도 앞일을 멀리 보고 계실 것입니다. 나라의 기틀을 튼튼하게 다지고 나서 생각하시려는 모양이지요.”

“흠…….”

“무엇보다 무관들이 저리 강경하게 나오고 있으니 전하께서도 적잖이 피로하실 것입니다. 저희라도 보탬이 되어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 설득에도 여전히 망설이는 듯한 문관들에게 옥환은 그들의 결심에 쐐기를 박을 말을 덧붙였다.

“저희가 끼어들면 필시 무관들은 더욱 기를 쓰고 왕후 간택을 진행하려 할 것입니다. 그들이 도를 넘으면 아무리 무관들에게 약해진 전하라 해도 심기가 불편해지시겠지요. 하면 그들이 전하의 눈 밖에 나는 것도 순식간입니다.”

그제야 문관들은 감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내일부터는 옥환의 의견에 따르기로 한 뒤에 각자 흩어졌다. 옥환은 이걸로 승헌이 좀 편해지기를 바라며 처소를 향했다. 옥환이 막 처소로 돌아오자 계평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인지 곧바로 그의 앞에 무언가를 내놓았다.

“읽어 보십시오.”

계평이 건넨 서찰이 벽국에서 온 것임을 직감한 옥환은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서둘러 그것을 펼쳤다. 이번에도 염요의 친필로 적힌 그것에는 뜻밖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 바로 염요가 아끼는 귀비가 회임을 했다는 소식이었다. 더불어 조세를 낮춘 것과 더불어 그의 이런저런 시도가 꽤 효과를 보이면서 그는 왕으로서의 자신감을 조금씩 되찾아 가는 모양이었다. 필시 아버지가 된다는 사실이 그에게 새로운 계기를 안겨 준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계평의 말대로 내가 없는 것도 한몫했겠지.’

정녕 이대로 돌아가지 않는 게 옳은 것인가. 만일 염요가 지금처럼 잘해 준다면, 굳이 자신이 서국에 혼란을 가져다주지 않아도 벽국은 서국과 당당히 맞설 수 있을지 몰랐다. 어쩌면 돌아가신 주군도 자신이 모든 것을 해결하는 것보다 아들인 염요가 성장하는 쪽을 더 바라고 있었을지도…….

‘이 무슨 삿된 생각인가.’

옥환은 고개를 저어 사념을 털어냈다. 무섭도록 안일한 생각이었다. 자신의 목표는 염요를 돕는 것도, 벽국의 정세를 안정화하는 것도 아니었다. 서국이라는 위협을 무너뜨려 벽국과 백성을 지키는 것이었다. 한데 그것을 잊고 지금에 만족하려 했다. 자신이 이으려던 주군의 뜻을 잊은 것이다.

‘내가 미쳤구나.’

옥환은 다시금 제 마음에 채찍을 휘두르고는 계평에게 말했다.

“서국의 군사 기밀을 알아내야겠다.”

“예? 승상께서는 서국 조정의 내분을 일으키시려던 게…….”

“물론 그것은 그대로 진행할 것이다. 하나 내가 반드시 성공하리란 보장이 없지 않으냐. 전하께서 이리 애를 쓰고 계신데, 신하 된 도리로 나도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 봐야지.”

계평은 몹시도 의외라는 표정으로 옥환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 무례함에 혀를 차면서도 옥환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진작부터 생각했던 것이다. 언젠가는 서국과 벽국이 다시 맞붙을 날이 오지 않겠느냐. 그때를 위해서 적국의 약점은 당연히 쥐고 있어야지. 그간엔 네게 말해도 당장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 잠자코 있었을 뿐이다. 이젠 서국 신료들과 서국 왕의 신뢰도 얻었겠다, 일에 착수해도 되지 않겠느냐.”

“……설마 거기까지 내다보고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계평은 진심으로 탄복한 듯한, 그러면서도 옥환을 인정해야 하는 지금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옥환은 작게 코웃음 치고는 더욱 소리를 낮춰 말했다.

“상세한 계획은 내가 다 세울 테니 너는 여차할 때 내 지시에 따라 다오. 나를 못 믿는 것은 잘 알지만 너나 나나 서국의 백성임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런 우리가 적국에까지 온 것은 결국 조국을 위한 마음이 아니었겠느냐.”

“……알겠습니다.”

계평의 대답에 옥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구체적인 계획이 있냐는 계평의 질문에 옥환이 답했다.

“백고를 이용해야겠지.”

“그 얼빠진 장군 말입니까? 뭐, 그자라면 승상께 홀딱 빠져 있으니 어렵지는 않겠으나…… 그런 자가 정녕 도움이 되는 것입니까?”

“그래 보여도 그의 조부는 개국공신이고 그의 부친 또한 무관들의 우두머리격인 대장군이다. 그리고 단순한 자니 이용하기 더 쉽지 않겠느냐.”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계평은 옥환의 겉모습에 현혹돼 저 속에 든 진짜 설옥환을 알아보지 못한 백고가 어리석게 느껴졌다. 염요는 계평에게 말했었다. 금야 선생은 자신의 주군인 염완만이 삶의 전부인, 그야말로 충직한 개라고.

하나 서국에 온 뒤로 옥환이 승헌을 보는 눈빛은 나날이 달라져 갔다. 처음만 해도 찬바람이 쌩쌩 부는 듯하던 그것은 계절을 역행하듯 점점 더 온기를 품어 갔다. 계평은 그것을 막연히 느꼈기에 옥환을 의심했었으나, 그런 계평도 만일 옥환이 서국의 군사 기밀을 빼내는 데 성공한다면 그 후엔 자신의 판단이 틀렸음을 인정해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후, 옥환은 자신이 생각한 계획을 진행하기 위해 승헌을 만났다. 옥환이 직접 편전까지 자신을 보러 왔다는 말에 승헌은 상당히 의외라는 듯한 반응이었다.

“공사다망하신 와중에 찾아뵙게 되어 면목 없습니다. 용건만 짧게 말씀드리고 곧바로 돌아가겠습니다.”

“또 딱딱하게 구는군. 뭐, 제 발로 날 찾아왔다는 점에 의의를 둬야겠지. 해서? 그대가 나를 찾게 만든 그 용건이란 게 뭔데?”

옥환은 본론을 꺼내는 것을 조금 망설였다. 혹여 승헌이 제 청을 허락하지 않거나, 자신을 조금이라도 의심하게 되면 이 계획은 실패할지도 몰랐다. 자연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 괜찮으시다면, 종소에게 서찰을 보내고 싶습니다.”

“종소? 아, 그게 누군지 말 안 해도 돼. 기억하니까.”

옥환은 태연하게 대답하는 승헌의 안색을 유심히 살피며 말을 이었다.

“예. 저 때문에 궁을 나가게 되었는데 그 뒤에 백 장군께서 거두어 주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직접 얼굴을 보기는 어려우니 서찰으로라도 안부를 묻고 싶은데…….”

“내 허락을 받고 싶다?”

“……여러 날 고민을 거듭했습니다만 그래도 전하께 말씀드리는 것이 좋을 것 같았습니다.”

승헌은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그리 불쾌한 것 같지도, 그렇다고 썩 내키는 것 같지도 않았다. 어쩌면 옥환의 의도를 파악하려 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었다.

이윽고 꽤 긴 침묵 끝에 승헌이 입을 열었다.

“옥환.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정을 붙이는 건 좋지 않아. 그대도 알겠지만, 사람은 생각보다 쉽게 죽어. 어리면 어릴수록 더 그렇지. 나 역시 그런 세상을 바꾸기 위해 이 자리에 있지만, 아무튼 당장의 현실은 그래.”

승헌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옥환은 왜 갑자기 그가 이런 말을 꺼내나 싶어 잠자코 있었다. 승헌이 계속해서 말했다.

“고작 하인에게 서찰 좀 쓴다고 해서 뭐라고 하려는 게 아니야. 그대가 백성들을 어여삐 여기는 것도, 특히 아이들에게 약한 것도 알고 있으니까. 그리고 그대가 강한 사람인 것도 알고 있어.”

승헌이 하는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옥환은 비로소 그의 속뜻을 깨달았다. 그럼에도 자신이 없는 듯 여전히 반신반의한 채 물었다.

“혹 전하께선 종소가 잘못돼서 제가 영향을 받을까 봐 그러십니까……?”

승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그의 표정으로 제 추측이 맞았음을 확인한 옥환은 다급히 입을 열었다.

“그 아인 백 장군께서 돌봐주고 계시니 그럴 가능성도 낮을뿐더러 전하의 말씀대로 저는 그런 일로 영향을 받을 만큼 나약하지도 않습니다. 행여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신하로서의 책무는 다할 것이고 전하께 폐를 끼치지도 않을 것입니다. 제가 그 아이에게 정을 붙인 것은 사실이나 그게 걱정하실 만큼 대단한 것은 아니란 걸 전하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그래. 말했잖아. 전부 다 알아. 아는데, 걱정이 되는군.”

“……그 걱정에는 구체적인 근거로 삼을 만한 이유가 있습니까?”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 듯한 옥환의 질문에 승헌이 쓴웃음을 짓더니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없어서 난감한 거야. 그냥 그대가 걱정돼서.”

“…….”

“됐어. 쓸데없는 잔소리였군. 그대가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해.”

이제 그만 돌아가 봐도 된다는 승헌의 허락에 옥환은 머뭇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승헌은 이미 보고문으로 눈을 돌린 상태였다. 그 앞에서 옥환은 입술을 달싹이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돌아 나왔다. 편전을 나오자마자 성큼성큼 걷는 옥환의 속도를 따라잡느라 그의 하인이 애를 먹었으나, 옥환은 그조차 깨닫지 못한 채 무언가에서 달아나듯 빠르게 걸었다.

사실 승헌은 그렇게 말했지만, 자신은 종소를 이용하려는 것뿐이었다. 바로 승헌의 나라를 무너뜨리기 위해서. 그의 걱정을 살 자격 따윈 제게 없었다.

자신은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승헌에게도, 종소에게도. 아니, 그뿐만 아니라 자신은 그들의 가장 끔찍한 적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서국에 온 뒤 처음으로, 옥환은 이곳에서 도망치고 싶어졌다.

***

평소와 다름없는 오후. 옥환은 종소에게 보낼 서찰을 써 내려가고 있었다. 평소라면 일필휘지로 적었을 그였으나 오늘따라 유독 그의 붓은 몇 번이고 허공에 멈추기를 반복했다. 이 서찰을 보내면 더는 되돌릴 수 없게 될 것이다. 하나 과연 이게 옳은 것인가?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는 내내 그러한 질문에 대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었다.

답답한 마음에 궁 안이라도 한 바퀴 돌아보려 처소를 나온 옥환은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승헌이 있는 편전까지 와 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머뭇거리던 옥환이 고개를 젓고는 돌아 나오는데, 누군가가 등 뒤에서 그를 불러 세웠다.

“혹시…… 옥아?”

옥아란 옥환의 아명兒名이었다. 결코 아무나 알 수 없는 호칭에 옥환이 놀라서 뒤를 돌아보자 옥환의 오랜 기억 속에 잠겨 있던 한 인물이 반신반의한 표정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옥환은 뒤늦게 그가 누군지를 알아보고는 반가운 미소를 지었다.

“역시 옥아 네가 맞구나!”

“만적 형님이 아니십니까. 참으로 오랜만입니다.”

옥환의 인사에 “만적”이라 불린 사내 역시 반갑게 웃었다. 자는 만적, 이름은 금현인 이 사내는 어릴 적부터 옥환과 같은 동네에 살며 동문수학했던 사이로 옥환의 옛 지기이자 선배라고 할 수 있었다. 후에는 벽국에서 함께 입신하여 같은 주군을 모셨던 사이이기도 했다.

벽국에 있었을 당시 옥환은 능력이 특출 난 재능을 가진 만적을 적극적으로 기용하고자 하였으나, 염요가 왕위에 오르면서 그에게 환멸을 느낀 만적은 관직을 마다하고 벽국을 떠나 버렸다. 서국으로 갔다는 소식을 나중에 접하기는 하였으나 여기서 이렇게 만날 줄 몰랐던 옥환은 그가 무척이나 반가웠다. 어쩌면 내내 외톨이 같았던 서국에서 옛 추억을 공유하는 벗을 만났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옥아 네가 서국으로 왔다는 이야기는 진작 들었다만, 내가 변방에 있는 바람에 만나러 오질 못했다. 궁 안에 있다는 걸 알면서도 서찰 한번 보내질 않았으니 무심한 형님이라고 욕해도 할 말이 없구나.”

민망한 듯 웃는 만적에게 옥환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서로 각자의 사정을 잘 알고 있는데 그것이 뭐 그리 대수겠습니까. 무엇보다 형님께서 건강하신 듯하여 안심입니다.”

“너도 그래 보이는구나. 그렇게 벽국을 떠나오고 나서 다른 것에는 미련이 없었지만, 옥아 네가 몹시도 마음에 걸렸었다.”

“별걱정을 다 하셨습니다. 보다시피 저는 괜찮습니다.”

마지막으로 본 뒤 3년 만에 만나는 것이건만, 옥환은 그 고생을 해놓고서도 그때와 하나도 다를 바가 없었다. 아니, 전보다 더 고와진 것 같기도 했다. 염완을 향한 옥환의 존경심을 잘 알았던 만적은 옥환이 서국에 투항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적잖이 걱정했었으나, 그래도 이렇게 멀쩡한 모습을 보니 그나마 마음이 좀 놓이는 기분이었다.

“옥아야. 잠깐 여유가 된다면 그간 못다 한 이야기라도 나누었으면 하는데.”

“예, 좋습니다.”

옥환은 만적의 제안에 기꺼이 응하고는 그와 후원을 거닐며 옛 추억을 회상했다. 두 사람은 같은 스승 밑에서 공부하던 시절이나, 벽국에서 함께 겪었던 사건사고 등을 이야기하며 꽤 긴 시간 대화를 이어 갔다. 그러던 중, 만적이 새 화제를 꺼내 들었다.

“그러고 보니 기억하느냐? 예전에 선왕께서 네게 어주를 하사하시는 바람에 그걸 억지로 마셨다가 기절을 하지 않았더냐.”

“아…… 예, 기억합니다.”

“그 뒤로 선왕 전하께서 어찌나 놀라서 안달복달하시던지. 본인이 내린 술인데 그걸 마시고 가장 아끼는 신하가 졸도를 해 버렸으니 그럴 만도 했지. 울기까지 하셨었지?”

“관례를 치르고 나서는 처음 입에 대는 것이라, 어렸을 때와 달리 이제는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었습니다만……. 아예 술이 안 받는 체질인 모양입니다. 그렇다 쳐도 고작 그런 일로 크게 놀라셨으니, 지금 생각해도 지나칠 정도로 정이 많으신 분이셨지요.”

옥환은 감회에 잠긴 채 천천히 기억을 떠올렸다. 기절했다가 다시 깨어난 옥환의 옆에는 눈이 퉁퉁 부은 염완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앉아 있었다. 옥환은 한 나라의 왕이 어찌 그리 마음이 약하시냐며 모진 소리를 했었으나, 이제 두 번 다시 술은 냄새도 안 나게 할 테니 오래오래 살아 달라는 염완의 청에 웃어 버리고 말았다.

‘한데 저더러 오래오래 살라고 하시고는 어찌 그리 덧없이 가 버리셨습니까.’

오랜 추억에 미소 짓는 것도 잠시, 이내 사무치는 그리움에 옥환의 시선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염완이 지금 자신의 모습을 본다면 뭐라고 할까. 그가 살아 있었다면…… 이곳에 올 일도, 이렇게 괴로울 일도 없었을 텐데.

그 뒤, 옥환은 만적과 한동안 더 얘기를 나누었으나 염완 생각에 더는 대화가 즐겁지 않았다. 게다가 만적 역시 곧 다시 관할지로 돌아가야 했기에 아쉬운 작별을 고해야만 했다.

만적과 기약 없는 재회를 약속한 뒤 처소로 돌아온 옥환은 쓰다만 서찰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염완을 떠올려서 그런지 유독 그가 보고 싶었다. 차라리 함께 죽었으면 좋았을까. 하나 그러기에 자신의 어깨에 짊어진 짐은 너무나도 크고 무거웠다. 그 짐은 염완이 준 것이라서, 도저히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참으로 야속하십니다. 야속하십니다, 주군…….’

옥환은 서러움과 애달픔에 그저 떠나간 염완만 원망했다.

한데 그때, 한없이 깊은 곳으로 침전하는 옥환의 의식을 나직한 목소리가 끌어올렸다.

“옥환.”

그 익숙하면서도 생소한 부름에 옥환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앞에는 마치 날카로운 검 같은 사내가 있었다. 염완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절대 부러질 것 같지도, 무뎌질 것 같지도 않은 사내.

그리고 그의 표정은 마치 피 묻은 검날처럼 원인 모를 음험함을 품고 있었다.

“……전하.”

두려움을 느낀 옥환이 슬그머니 한 발 뒤로 물러서려는데, 승헌이 그의 손목을 낚아챘다.

“왜 그리 초상난 얼굴이지?”

승헌이 싱그럽게 웃으며 질문을 던졌다. 옥환은 눈을 내리깔았다. 뭐라고 답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승헌은 그런 옥환의 뺨을 감싸고는 그에게 다정하게 입을 맞추었다. 짧은 입맞춤은 옥환이 밀어낼 새도 없이 금방 끝이 났으나, 승헌은 그대로 옥환을 품에 안았다. 옥환이 당황해서 몸을 뒤로 빼려 하는데 승헌이 이렇게 말했다.

“오늘도 안 좋은 일이 있었어, 옥환.”

“……무슨…… 일이십니까?”

조금은 걱정이 되어 물으니 승헌이 한숨을 쉬며 자못 안타까운 투로 대꾸했다.

“아끼던 신하가 있었는데, 주제도 모르고 방자하게 굴어서 벌을 주었지.”

“제가 아는 이입니까?”

“음, 글쎄.”

승헌이 천천히 옥환을 놓았다. 그제야 승헌의 눈을 본 옥환은 알 수 없는 불길함을 느꼈다. 승헌의 눈은 피까지 얼어붙을 듯한 냉기를 머금고 있었다.

“금현이라고 아나, ‘옥아’?”

“……저…… 전하.”

옥환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승헌을 올려다보았다. 승헌은 잔인스레 미소 짓고 있었다. 옥환은 그제야 승헌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부주의했다. 벗을 만난 것이 반가워 이곳이 어딘지도 잊고 벽국에 대한 이야기를 했으니. 길을 지나던 궁인이든, 제 뒤를 따르던 하인이든, 그 대화를 승헌에게 일러바칠 이는 어디든 있었는데.

“전하, 그이와 저는 그저 어렸을 때 동문수학하던…….”

“그 자식과 그대가 무슨 사이인지는 내 알 바가 아니야.”

옥환의 변명을 자르고 승헌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그 날카로운 반응에 옥환의 말문이 막혔다. 침묵하는 옥환 앞에서 승헌은 다시 억지 미소를 지으며 그의 입술을 어루만졌다.

“이 고운 입술은, 어찌 항상 내가 싫어하는 말만 할까?”

“옛이야기를 한 것이 전부입니다. 정말로, 아무런 의도도 없는 대화였습니다. 부디 아량을 베풀어 주십시오…….”

옥환이 간절히 청했으나 승헌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는 대신 물었다.

“만약에, 염완이 죽지 않았다면 그대는 이곳에 왔을까?”

“전하……!”

“왜. 죽은 주군의 이름이 나오니 싫어? 마음이 아픈가?”

옥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그의 표정으로 그 마음속을 헤아리기는 충분했다. 그것을 아는 승헌은 마치 쓰디쓴 독을 삼킨 것처럼 고통스러운 얼굴로 천천히 내뱉었다.

“그대는, 왜 매번 나를 실망시키지?”

승헌의 입 밖으로 나온 한 음절 한 음절이 옥환의 가슴에 가시처럼 박혔다. 승헌이 상처받았다는 것은 알았지만 옥환 역시 억울했다. 저를 흔드는 것이 누군데. 하나 이 진심을 누구에게 털어놓을 수 있을까. 모든 것이 다, 제게서 비롯된 일이었다.

낙담한 채 입을 다물어 버린 옥환을 못마땅하게 노려보던 승헌은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옥환은 그런 승헌의 등을 지켜볼 뿐,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

“태사. 큰일입니다. 벽국이 또 국경을 공격했답니다……!”

“예? 또요?”

전혀 예기치 못한 소식에 옥환은 아연실색했다. 이것으로 벌써 세 번째 공격이었다. 벽국군은 마치 술래잡기라도 하는 것처럼 적은 수의 군사만으로 서국의 국경을 가볍게 건드리고 빠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사실상 서국에는 거의 피해가 없다고 봐야 했으나, 계속해서 국경을 공격당하고 있으니 백성은 불안해했고 군사는 피로해질 수밖에 없었다.

화친을 맺은 지 1년도 채 되지 않았다. 불리할 때는 간이고 쓸개고 내어줄 것처럼 굴더니, 조금만 여유가 되자 이 모양이었다. 손바닥 뒤집듯 하는 벽국의 태도에 서국의 인내는 시시각각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작금의 상황은 마치 벽국이 서국의 공격을 받고 싶어 안달이 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옥환은 도대체 염요가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지 알 수 없었다.

“이번에도 별 탈 없이 물리쳤다고는 합니다만…… 소식을 들으신 전하께서 몹시 노하셨다고 합니다.”

“…….”

옥환의 머릿속에 일순 승헌에 대한 걱정이 지나갔으나 그는 그것을 얼른 털어 버리고는 상황을 정리했다. 문하시중이 이렇게 급히 달려와 전해준 것도 그렇고, 필시 사건의 형편이 저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벽국의 도발이나 전과 다른 행보는 옥환이 서국에 오면서부터 시작된 것이니, 도리어 옥환이 뒤에서 벽국을 돕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받기에도 충분할 터였다.

“태사.”

문하시중의 걱정 어린 목소리에 옥환은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직은 무어라 섣불리 판단할 수도, 행동할 수도 없었다. 정보가 부족한 만큼 일단은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봐야 했다.

“걱정 마십시오. 벽국의 속내는 저도 정말 모르겠습니다만, 무관들이 절 의심하는 것이야 하루 이틀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문하시중은 “예, 예, 그렇지요.” 하고 맞장구를 치면서도 여전히 불안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옥환은 단순히 걱정이 많은 그의 성격 탓이라 여겼으나, 며칠 뒤 조회에서 문하시중의 걱정은 기우가 아니었음이 밝혀졌다.

그날은 아침부터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듯 먹구름이 잔뜩 낀 날씨였다. 어전회의 시작부터 승헌의 심기는 몹시 좋지 않아 보였다. 그 연유를 모르지 않는 신하들 역시 근심 어린 얼굴로 승헌에게 인사를 올렸다. 이윽고 승헌이 험악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이걸로 세 번째야. 도대체 과인이 얼마나 더 참아야 하나?”

“망극하옵니다, 전하.”

“이는 모두 소신의 불찰이오니 소신에게 벌을 내려 주시옵소서.”

군을 통솔하는 장수들이 나서 사죄를 청하였으나 승헌은 일어나라 손짓했다.

“벽국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군. 벽국 왕이 몇 가지 일을 벌이더니 나랏일에 재미라도 붙인 건가? 벽국 백성들이 조세를 내린 일로 그자를 칭송한다던데, 그 맛에 취하기라도 했나 보지?”

“그래 봤자 사상누각에 불과한 나라가 아니옵니까. 전하와 서국의 은혜로 겨우 명맥을 이어가는 소국 주제에, 참으로 건방지기 짝이 없사옵니다.”

“마냥 얕볼 일이 아니야. 어쩌면…… 벽국에 태사와 같은 인재가 아직 남아 있을지도 모르지 않나?”

승헌이 그렇게 말한 순간 옥환은 그와 눈이 마주치는 바람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혹 자신을 의심하고 있는 것인가 생각하니 심장이 정신없이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 장수 하나가 나서 고했다.

“전하.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이번 일도 그렇고, 최근 들어 벽국 왕이 펼치는 정책들도 그렇고, 더 이상 벽국이 하는 일을 간과해서는 아니 될 줄로 아옵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다른 장수들이 나서서 그의 말을 거들었다.

“맞사옵니다, 전하. 이 이상 벽국의 농간에 당할 수만은 없사옵니다. 부디 벽국에 대한 침공을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전하.”

침공이라니. 이렇게 갑작스럽게? 뜻밖의 전개에 옥환이 당황해서 승헌을 쳐다보았으나 승헌은 생각에 잠겨 말했다.

“……침공이라. 그래. 원래대로라면 그 나라는 진작에 멸망해 없어졌어야 할 일이지. 여러 사정이 있어 잠시 미루어 두었으나, 이 이상 미룰 일이 아닐지도 몰라.”

승헌의 긍정적인 반응에 무관들의 표정에 화색이 돌았다. 그들은 이 기회로 말미암아 지방으로 쫓겨난 호진을 불러오려 하는 것이 분명했다. 전쟁이 시작된다면 당연히 그의 힘이 필요해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더불어 전쟁에서는 무관들이 공을 세울 기회도 많아지기에, 그때를 틈타 자신들의 힘을 되찾고 세력을 더욱 불리려는 심산이리라.

옥환은 당혹감에 입술을 깨물었다. 정보가 너무 적었던 탓에 무관들보다 한 발짝 늦고 만 것이 지금의 패인이었다. 아니, 그뿐인가. 줄곧 흔들리는 제 마음을 제대로 단속하지 못했고, 그 탓에 승헌의 마음 역시 돌아서게 하고 말았다. 하나 이미 물은 엎어졌으니, 지금은 어떻게든 침공 계획을 뒤로 미뤄야만 했다. 옥환은 서둘러 나섰다.

“전하. 벽국의 잦은 도발에 어떤 의도가 있을지 모르는데, 당장에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생각하옵니다. 게다가 벽국에서 여전히 공물을 바치고 있어 화친이 끊어진 것은 아니지 않사옵니까. 지금은 서국이 충분히 유리한 상황이니 먼저 벽국의 현 상황에 대해 소상히 알아보신 뒤에 결정을 내리셔도 늦지 않을 것이옵니다.”

옥환의 간언도 나름대로 일리가 있었기에 승헌은 고민에 빠졌다. 그러자 무관들은 이 기회를 놓칠세라 재빨리 옥환을 비난하고 나섰다.

“지금은 태사가 나설 자리가 아니외다! 아무튼 태사도 벽국 사람이 아니오? 지금 나서는 건 벽국을 감싸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소이다만?”

“맞습니다. 그리 말씀하시면서 도리어 벽국을 지키려는 속셈은 아니십니까?”

“어허, 거 말이 지나치시오!”

문관인 중서령이 옥환을 대신해 무관들을 제지했으나 그들은 쉬이 물러설 기미가 아니었다. 옥환 역시 드러내 놓고 반박하지는 않았으나 무관들을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두 무리의 싸움을 막은 것은 결국 승헌이었다.

“그만들 해. 안 그래도 정국이 어지러운데 경들까지 이럴 텐가? 그리고 황 장군, 변 장군. 태사에게 무례한 언동은 삼가게.”

“……송구하옵니다, 전하.”

두 장수가 누가 봐도 억지인 것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태도로 물러나자 옥환이 때를 놓치지 않고 얼른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전하. 원하신다면 앞으로 소신은 조회에도 어전회의에도 참여하지 않겠나이다. 하나 전쟁이 시작되면 희생될 수많은 백성을 생각해 주시옵소서. 전쟁은 불가피한 것이라 할지라도, 백성들의 희생은 최소한으로 해야 하지 않겠사옵니까. 부디 영명한 결정을 내려 주시길 바라옵나이다.”

옥환이 말을 끝내는 것과 동시에 바닥에 깊이 머리를 조아렸다. 그러자 문관들도 그를 따라 줄줄이 부복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전하!”

그러자 무관들 역시 전쟁을 재촉하며 문관들의 의견에 반발하고 나섰다. 수많은 신하가 바닥에 엎드려 있는 모습을 보며 승헌은 관자놀이를 짚었다. 이제 모든 것은 그의 판단에 달려 있었다.

이윽고 기나긴 침묵 끝에, 그가 결론을 냈다.

“태사의 의견도 타당하기는 하나, 과인은 한시라도 빨리 벽국을 무너뜨리는 게 백성들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하네. 대의를 위해서 희생은 감안해야 하지 않겠나.”

“전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승헌의 한마디에 문관과 무관의 희비가 엇갈렸다. 그중에서도 옥환은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격이었다. 본래 목표로 했던 내분조차 아직 일으키지 못했다. 어쩌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옥환이 충격에 빠져있는 사이 승헌이 근엄한 목소리로 일렀다.

“문무관은 모두 들으라. 서국은 가까운 시일 내에 벽국을 침공할 것이니, 모두 그에 맞춰 만전을 기하도록.”

“명 받들겠나이다, 전하.”

승헌의 발밑에 신하들이 일제히 머리를 조아렸다. 마침내 벽국과의 해묵은 관계를 청산할 때가 다가온 것이다.

그렇게 충격 속에서 어전회의가 끝나고, 무거운 걸음으로 돌아온 옥환은 예고도 없이 찾아온 위기에 머리를 감싸 쥐었다.

‘내 불찰이다. 서국이 언제든 벽국을 침공할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에 대한 대책을 전혀 세워 놓지 않았어. 내가 우위에 있다고 생각했다. 견승헌의 신임을 얻었으니, 모든 건 내 손바닥 위에 있다고 자만했던 것이야.’

하나 옥환은 곧 후회를 털어냈다. 지나간 일은 돌이킬 수 없다. 그렇다면 우선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했다.

그리고 지금의 상황에서 옥환이 할 수 있는 일은 바로 서국의 군사 기밀을 빼내는 것이었다. 안 그래도 마침 그 일에 착수하려 하던 차가 아니던가. 지금은 내분을 일으키는 것보다는 기밀을 빼내는 쪽을 우선해야 했다. 그래야 서국과의 전쟁에서 벽국에 조금이라도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마음을 정한 옥환은 종소에게 보낼 서찰부터 적어 내려갔다. 더 이상 옥환에게서 망설임은 보이지 않았다. 그 망설임으로 인해 벽국의 백성이 죽게 생긴 상황이었다. 죄책감 때문에라도 옥환은 멈춰설 수 없었다.

서둘러 서찰을 적은 옥환이 사람을 시켜 그것을 종소에게 보내자마자 그에게 다른 하인이 다가와 뜻밖의 소식을 전했다.

“태사. 전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하필 이 순간 가장 만나고 싶지 않은 상대였다. 승헌이 찾아왔다는 하인의 전언에 당황한 옥환은 불안한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난번 그에게 상처를 준 것도 그랬지만, 서국을 배신할 계획을 세우고 있는 지금으로서는 승헌의 존재 자체가 껄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안으로 들어선 승헌이 먼저 자리에 앉고는 멀거니 서 있는 옥환에게 앉지 않고 뭐하냐는 듯한 시선을 던졌다. 옥환이 착잡한 기분으로 맞은편에 앉자 승헌이 입을 열었다.

“그대에겐 달갑지 않은 일이라는 거 알아. 하나 필연적인 일이기도 하지.”

승헌이 언급한 ‘일’이란 벽국을 향한 침공을 말하는 것이었다. 앞뒤도 없이 무작정 꺼낸 화제에 옥환은 승헌의 마음이 그렇게나 급했던 건지를 생각하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전하께 저를 내놓은 순간부터, 아니. 그러기로 결정했을 때부터 진작 생각했던 문제입니다. 저는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그래. 그랬겠지. 그대는 몇 수 앞을 내다보니까.”

승헌이 찾아온 것은 필시 저를 떠보려는 수작일 터였다. 행여 벽국을 침공하는 것에 대해 거부감이나 망설임을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닌지 확인하려는 것이다. 옥환은 속으로 이런 사내를 상대로 신임을 얻었다고 생각한 자신의 허술함을 질책하고는 대답했다.

“다만 전하. 제가 침공을 반대한 것은 회의 때 말씀드렸다시피 위험한 다리를 건널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벽국이 안정이 되었기로서니, 아직까지 우위에 있는 것은 서국입니다. 서국 입장에서는 급할 것이 없는 만큼 되도록 안전한 길을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딱히 그런 걸 따지러 온 것은 아니야.”

하면 왜 온 것인가. 무엇을 확인하려고. 옥환은 단단히 대비한 채 승헌을 응시했다. 그 진중한 눈빛에 승헌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말을 잘못했군. 애당초 그대에게 무언가를 따지러 온 것이 아니야.”

그러더니 승헌은 여전히 웃음이 섞인 얼굴로, 그러나 다소 씁쓸한 듯 말했다.

“뭐, 그대가 그리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만.”

“…….”

“그렇다면 왜 왔는지, 그대는 묻지 않는군.”

“전하의 의중을 감히 제가 어찌 파악하려 하겠습니까.”

승헌은 조금 못마땅한 어투로 ‘그래그래’하고 대답하더니 잠시 침묵했다. 그는 조금 주저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런 승헌의 낯선 태도를 주시하던 옥환의 눈동자가 어느 순간 크게 흔들렸다. 이제야 왜 승헌이 자신을 찾아왔는지 비로소 알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을 걱정해서 찾아온 것이었다. 아무리 버리고 왔다고는 하나 한때는 자신이 사력을 다해 지키려 했던 벽국을 침공하게 되었으니 신경이 쓰였던 것이다. 더구나 얼마 전에만 해도 벽국을 그리워하다가 승헌이 애먼 사람을 벌하게 하지 않았던가.

승헌의 뜻을 알고 난 옥환은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승헌이 이러지 않았으면 했다. 이런 건 그답지 않았다. 제 마음을 얼마나 더 쥐고 흔들려는 것일까. 갑자기 벽국을 침공하겠다는 말로 자신을 구렁텅이에 빠트릴 땐 언제고, 왜 이리 찾아와 손을 내민단 말인가.

옥환이 혼란스러워하는 사이 승헌이 짧은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아까 조정에서 내가 했던 말이 마음에 걸렸어. 물론 벽국 침공에 대한 것도…….”

예상대로였다. 옥환은 더 이상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전하.”

승헌은 갑자기 자신의 말을 자른 옥환을 놀란 듯 바라보았다. 그간은 제 말에 하나하나 반박하기는 했어도 중간에 끼어든 적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군신 간의 예의에 어긋났으며, 옥환의 차분한 성격을 생각해 볼 때도 흔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옥환은 감정을 읽을 수 없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이번에도 제 의견을 묵살하신 것은 전하이십니다. 전하는 항상, 제 의견은 받아들이지 않으셨습니다. 제가 억지로 조정에 들어왔다는 이유로 말입니다.”

승헌은 단박에 인상을 찌푸렸으나 옥환은 더욱 대담하게 행동했다.

“사실 전하께서는 벽국을 공격하고 싶지 않으셨습니까? 제가 벽국의 선왕 전하를 잊지 못하는 걸 다 아시고…….”

“그만.”

짧은 명령이었음에도 승헌의 목소리에서는 불쾌감이 역력하게 묻어났다. 옥환은 곧바로 입을 다물었으나 승헌의 반응에 송구해하거나 주저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울컥 치솟은 짜증을 가라앉히려는 듯 한동안 말이 없던 승헌은 얼마 뒤 겨우 침착해진 어조로 말을 꺼냈다.

“그대의 마음은 잘 알겠어.”

“무슨 말씀이십니까.”

“나를 쫓아내고 싶은 거겠지.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내가 싫어할 행동만을 골라서 할 이유가 없으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하나 나는 왕이야. 내 나라의 백성을 지켜야 하는.”

이번에는 승헌이 옥환의 말을 자르고는 먼저 일어섰다. 일순 옥환의 표정에 동요가 스쳐 갔으나 그것을 보지 못한 승헌은 차갑게 돌아섰다. 그렇게 그는 문으로 거침없이 향하다가, 문을 나서기 전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남겼다.

“오늘은 그대와 화해하고 싶었는데.”

“…….”

그렇게 승헌이 떠나고 나자 옥환은 길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언급했던 조정에서 했던 말이란 벽국에 저와 같은 인재가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얘기를 할 때 눈이 마주쳤던 일을 말하는 것일까? 그런 사소한 것까지 신경을 쓰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그답지 않았다.

그가 자꾸만 자신의 마음에 던지는 돌이, 수없이 많은 파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 일렁임에 옥환은 더 이상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들여다볼 수도 없었다.

‘내 주군은 염완 님이시다. 나의 나라는 벽국뿐이야.’

옥환은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가슴을 굳게 움켜쥐었다. 마치 그곳에 낙인을 새기듯이.

그리고 그날 밤, 옥환은 꿈을 꾸었다.

빛나는 금빛 들판에 서서, 그는 저 멀리 보이는 융성한 도시를 바라보고 있었다. 도시는 멀었으나 옥환은 그곳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세상은 평화로웠다. 새가 지저귀는 소리, 내리쬐는 햇볕, 부드러운 바람, 그 모든 것이 옥환의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 주었다.

이윽고 옥환은 손을 뻗어 살랑살랑 흔들리는 이삭을 쓸었다. 따스한 온기가 손바닥에 닿았다. 들판은 어디까지고 한없이 펼쳐져 있었다. 이제 그 누구도 굶지 않아도 된다. 자신과 주군이 바라던 세상이다. 금야의 세상.

그리고 옥환은 천천히 돌아서 도시와 등을 졌다.

‘…….’

꿈속의 옥환이 무언가 떠올리려 하는 것과 동시에 그의 정신은 잠에서 깨어났다. 눈을 뜨니 주변은 아직 어둑어둑했다. 옥환은 잠시 멍하니 누워 꿈을 되짚었다. 몹시도 선명한 꿈이었다. 손바닥에 느껴지던 이삭의 감각이 지금도 남아 있는 듯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유도 모른 채 가슴이 먹먹했다.

그렇게 한동안 꿈이 남긴 여운을 느끼던 옥환은 다시 잠드는 대신 이불을 털고 일어나더니 등불까지 켰다. 그러고는 종이를 꺼내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바로 서국의 군사 기밀을 빼내는 데 쓰일 시였다.

꿈은 자신에게 내려진 계시였다. 필시 하늘에 계신 주군이, 흔들리는 자신을 다잡기 위해 그런 꿈을 보여준 것이다. 정신 차리라고, 이제 거의 다 왔다고 자신을 격려하고 일으키기 위해.

이것은 비단 주군만의 뜻이 아니다. 자신의 뜻이기도 하다. 어떤 마음으로 금야란 자를 지었었는지 벌써 잊었단 말인가. 아니, 그것은 잊을 수 없는 일이다. 굶어 죽는 노인들과 부모 잃은 아이들과 전장에서 죽은 사내들과 전쟁에 짓밟힌 여인들. 그 모든 백성의 희생에 피눈물을 흘리며, 두 번 다시는 그런 참상을 만들지 않겠다고 맹세하며 지은 이름이다.

붓을 천천히 움직이며, 옥환은 굳게 다짐했다. 무엇을 희생해서든 꿈에서 본 그 세상을 만들고야 말겠노라고. 그러려면 전쟁을 막아야 했고, 전쟁을 막으려면 서국을 배신해야 했다.

그리되면…… 승헌은 제 배신에 치를 떨며 자신을 죽이려 하리라. 그러면 그때에는…… 그때에는…….

옥환은 고개를 휘저어 잡념을 떨쳐냈다. 죽으면 죽는 것이다.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할 일이었다. 승헌의 상처도, 자신의 후회도, 지금은 생각해선 안 될 일이었다.

옥환은 그렇게 몇 번이고 자신의 마음을 채찍질하며 밤을 지새웠다.

***

그렇게 서국이 벽국과의 전쟁을 준비하는 사이 보름이 조용히 흘렀다. 그 아까운 시간 동안 옥환은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가끔 종소에게 서찰을 보내거나 백고를 만나는 게 그가 한 일의 전부였다. 뒤늦게 벽국 침공에 대해 알게 된 계평은 그런 옥환을 매일같이 닦달했으나 옥환은 평소처럼 다 생각한 바가 있다는 말조차 하지 않았다.

이러한 답답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계평은 이렇다 할 행동을 벌이지는 않았다. 옥환의 배신이 확실해질 때는 같이 죽는 한이 있더라도 옥환을 처단하겠다 마음먹은 그였으나, 그로서도 옥환이 그저 손 놓고 있지만은 않은 것 같다는 짐작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매일 밤 옥환이 거의 자지 않고 무언가를 계획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 뒤부터, 계평은 일단 그를 기다려보는 쪽을 택했다.

아무튼 별 특이할 것 없는 옥환의 일상에서 계평이 가장 불편하게 생각하는 것은 바로 그가 백고를 자주 만난다는 것이었다. 언제는 북풍보다 더 차갑게 굴더니, 요즘은 백고를 대하는 그의 태도가 전에 없이 살가웠다. 도대체 무슨 심경의 변화인지, 계평은 그야말로 오리무중이었다.

오늘도 옥환은 자신의 처소를 찾아온 백고를 반갑게 맞이한 참이었다. 자리에 앉은 백고는 이내 옥환의 앞에 무언가를 내놓았다.

“종소가 전해 달라고 한 것입니다. 아마 그 아이가 연습한 글씨인 듯합니다. 태사께서 봐 주시면 좋겠다면서 제게 부탁했습니다.”

“아, 감사합니다. 시동의 부탁까지 다 들어주시고. 다음에는 장군께서 번거로운 걸음 하시지 않게 서찰을 보내라고 하겠습니다.”

“아닙니다. 어차피 서찰을 보내는 것도 다 사람을 통해 하는 것인데, 입궁하는 김에 전해 주는 것이야 어렵지 않지요. 그 덕에 이렇게 태사의 얼굴도 뵙고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백고는 은근슬쩍 자신의 진심을 내비쳤으나 옥환은 대답 대신 속을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백고는 그런 옥환의 반응에 내심 아쉬워하면서도 밝은 어조로 화제를 바꾸었다.

“그보다 아이가 태사를 많이 뵙고 싶어 하는 것 같던데 말입니다.”

“그렇습니까? 물론 저도 만날 수만 있다면야 참으로 좋겠지만…….”

“무얼 그리 걱정하십니까. 제가 데리고 오면 되는 일인데.”

어딘지 모르게 주저하는 듯한 옥환의 태도에 백고는 자신 있게 말했다. 하나 옥환이 이윽고 백고가 예상하지 못했던 문제점을 지적했다.

“……혹 아이가 다른 궁인들의 눈에 띄거나, 전하의 눈에 띌까 걱정이 되어 그렇습니다.”

“아…….”

확실히 종소는 옥환의 처소에서 쫓겨나 다른 궁인에게 괴롭힘을 당하다가 백고의 아래로 들어가게 된 상태였다. 누군가가 그의 모습을 봐서 좋을 일은 없었다. 더구나 승헌이 옥환의 처소를 예고도 없이 자주 드나드니 혹 종소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보기라도 하면 백고와 옥환은 물론이고 종소는 정말 목숨을 부지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었다.

“안 그래도 저 때문에 왕궁에서 쫓겨난 아이에게 어찌 그런 위험을 또 짊어지게 하겠습니까. 이렇게 서찰을 주고받는 것만으로도 저는 충분합니다. 처음 서국으로 와 힘들었던 시기를 위로해 준 아이인 만큼, 제겐 특별한 존재이기도 합니다. 그런 아이가 이 이상 다치는 건 원하지 않으니 장군께서도 부디 이해해 주십시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어쩔 도리 없이 쓸쓸해하는 옥환의 표정에 백고의 가슴이 내려앉았다. 옥환 자신의 말대로 그는 홀로 적국으로 넘어와 배척당하고 의심받으며 필시 험난한 시간을 겪었을 터였다. 그런 옥환에게 아무 도움도 되어주지 못한 것이 백고는 못내 미안했다.

‘태사께서 우리 집에 오시면 되겠지만…….’

그 생각은 전에도 몇 번쯤 했던 것이었으나, 백고는 이번에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기실 옥환이 자신과 이렇게 교류를 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조정의 신하이기 때문이었다. 하나 그에 앞서 그는 승헌의 첩이었다. 본래 법도대로라면 두 사람은 서로 시선도 마주쳐서는 안 되는 사이인 것이다.

백고가 승헌의 첩인 옥환을 제 집으로 초대하는 것은 어쩌면 승헌에 대한 모욕으로 비칠 수도 있었다. 백고는 본인이 난처해지는 것은 상관하지 않았으나, 자신의 짧은 생각으로 옥환이 지금보다 더 큰 어려움에 빠지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백고에게 옥환은 그저 말갛게 웃으며 말했다.

“저는 정말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백 장군.”

백고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그저 얼굴만 붉힐 뿐이었다.

하나 이틀 뒤, 어전회의에서는 옥환을 두고 신하들 사이에 다툼이 벌어졌다.

“맞는 말 아니오? 태사가 서국에 온 뒤로 계속 서국에는 안 좋은 일만 생기고 있소!”

“그래도 그렇지, 죽은 벽국 왕의 망령이 씌었다니…… 전하가 계신 앞에서 부끄럽지도 않소이까?!”

옥환은 직접 나서지는 않고 있었으나, 떨리는 입술을 꾹 깨문 채 무관을 노려보고 있었다. 주먹까지 부르르 떠는 것이 정말로 단단히 화가 난 듯 보였다. 그럼에도 그는 기를 쓰고 분노를 억눌렀다. 이윽고 쉽사리 소요가 가라앉을 기미를 보이지 않자 승헌이 으름장을 놓았다.

“오늘도 회의일랑 집어치우고 그렇게 싸우다가 집에 갈 생각인가? 그렇다면 다음 회의부터는 다들 나올 필요 없겠군.”

그제야 신하들이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그 모습에 신경질적으로 혀를 찬 승헌은 이내 거무죽죽한 얼굴을 하고 있는 옥환을 슬쩍 보았다. 이어 그는 옥환에게 염완의 망령이 씌었다는 발언을 한 무관을 보며 말했다.

“선 장군. 경은 어찌 때와 장소를 잊고 망발을 하는가? 당분간 벌로 가택에서 자숙하도록.”

“……망극하옵니다…….”

벌을 받은 무관이 뭐 씹은 표정으로 허리를 숙였다. 그렇게 다툼은 마무리가 되었으나, 옥환을 노려보는 무관들의 표정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그 눈빛 안에서 그저 고독하게 서 있는 옥환을, 백고 또한 하염없이 바라보고만 있었다.

회의가 끝난 뒤 오후. 퇴청했던 백고는 다시 옥환을 찾아갔다. 얼마 전에도 만났던 터라 그냥 돌아가려 했으나, 회의 때 벌어진 일도 그렇고 아무래도 옥환의 상태가 영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종소에게 물어 옥환이 좋아하는 저자의 서책 몇 권을 가지고 처소를 향하던 백고는 문득 무언가를 보고는 걸음을 멈추었다.

옥환은 처소 한구석의 쪽문 앞에 웅크려 앉아 무언가를 읽는 중이었다. 날도 쌀쌀한데 무엇을 하는가 싶어 백고는 조용히 그에게 다가갔다. 가까이서 보니 옥환은 무언가를 읽는 게 아니라 서찰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백고가 종소의 글씨라며 전해준 그 서찰이었다.

“태사.”

“……아, 백 장군.”

백고의 부름에 얼른 일어난 옥환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서찰을 접었다. 백고는 그 모습을 자못 안타까운 눈으로 지켜보다 물었다.

“종소의 글씨입니까? 하면 안에서 보시지 않고요. 날이 이리 추운데 어찌 밖에 나와 계십니까.”

“……그러게 말입니다. 지난봄에 여기 앉아 아이에게 글을 가르쳐 주던 것이 생각나서요.”

평소와 달리 쓸쓸함이 섞인 옥환의 어조에 백고가 잠시 말을 잃고 그를 바라보았다.

전쟁을 준비하는 중임에도 승헌은 아직까지 호진을 불러들이지 않았고, 무관들은 그것을 옥환의 탓으로 여기고 있었다. 게다가 요즘엔 승헌이 옥환에게 꽤 부드러운 태도를 보이는 바람에, 무관들은 필시 옥환이 승헌을 꾀어내 조종하고 있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 때문에 그들은 옥환이 지나갈 때마다 눈을 흘기고, 승헌이 없을 때면 들으란 듯이 비아냥거리고는 했다. 개중에는 도가 지나친 폭언도 있었으나, 옥환은 그저 꾹 참기만 했다. 전쟁을 앞두고 행여 조정 안의 싸움으로 번질까 걱정을 하는 듯했다.

오늘 어전회의 때의 일도 그러한 상황의 연장선이었다. 특히 오늘은 죽은 전 주군의 이름까지 나왔으니 그 설옥환이라 해도 어느 정도 타격이 있었을 터였다. 그래서 더 종소가 생각났는지도 모른다.

백고는 어떻게든 옥환을 돕고 싶었다. 그로 인해 자신이 손가락질을 받거나 오해를 사게 된다고 해도 감당할 수 있었다. 그저 옥환이, 그 고운 얼굴로 웃어 주기를 바랐다. 계속 승헌의 존재가 걱정이었으나, 요즘 승헌이 옥환에게 하는 태도를 보면 지금이 적기일 수도 있었다. 백고는 고민에 빠졌다.

“일단은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말씀하신 대로 날이 찹니다.”

옥환의 제안에 처소로 들어온 백고는 그 이후로도 생각에 잠겨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옥환은 조용히 그의 기색을 살피다가 평소처럼 말을 걸었다.

“백 장군. 아까부터 계속 무슨 향이 나나 싶었는데, 장군에게서 꽃향기가 납니다.”

“예? 아, 아…… 꽃향기요. 부친께서 국화를 좋아하셔서요. 여기에 오기 전에 정원에 국화를 옮겨 심는 걸 도와드렸더니.”

옥환은 “그렇군요.”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 귀족의 사치품인 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옥환은 코를 찌르는 향에 내심 거북함을 느끼면서도, 백고에게 효자라며 칭찬을 건넸다. 한데 옥환의 칭찬에도 평소와 달리 무덤덤하게 앉아 있던 백고가 불쑥 뜻밖의 말을 꺼냈다.

“태사. 저희 집에 오시는 건 어떻습니까?”

“……예? 갑자기 무슨…….”

“초대를 하는 것입니다. 태사께서 오셔서 종소도 보시고 하면 좋을 것 같아서요. 신하들끼리 서로의 집에 오고 가며 교류하는 일이야 자주 있지 않습니까. 무관인 저와 문관인 태사가 잘 지내는 모습을 보이면 조정의 분란을 가라앉힐 좋은 계기가 될 수도 있고요.”

옥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백고의 명분은 그야말로 명분에 불과함을 알았다. 오히려 자신이 백고의 집에 가게 되면 무관들은 이를 부득부득 갈 것이고 문관들은 백고를 얼빠진 위인이라 생각할 것이 분명했다. 실제로도 자신의 처소에 자주 드나드는 백고를 두 무리는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아마 백고가 대장군 백청의 아들이자 승헌과 함께 전장을 누빈 전우가 아니었더라면, 그는 조정에 발도 들이지 못했을 터였다.

하나 옥환에게 있어 그는 너무나도 이용하기 좋은 대상이었다. 자신을 좋아하고 있었고, 그가 가진 지위 역시 지금 옥환에게 제일 절실한 것이었다. 그리고 방금 백고가 꺼낸 제안은 그런 백고를 이용해 옥환이 유도한 결과에 지나지 않았다. 그를 위해서 최근 백고에게 공을 들였고, 무관들의 경거망동 또한 눈감아주고 있었던 것이다.

일이 계획대로 흘러감에 안도하면서도 옥환은 짐짓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대꾸했다.

“하나 아시다시피 저는 서국에 온 뒤로 궁 밖에 나가 본 적이 없습니다. 전에는 금족령이 내려지기도 했고……. 물론 지금은 풀리긴 했습니다만, 전하께서 탐탁지 않게 여기시는 건 아닐지. 저 하나만이라면 상관없지만 백 장군까지 전하의 눈 밖에 나면 어찌합니까.”

그러자 백고는 잠시 망설이다가 곧 솔직하게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저…… 줄곧 생각했습니다만, 제가 아니라 태사께서 청하시면…… 어쩌면 승낙해 주실지도 모릅니다. 오늘도 태사께 심한 말을 한 무관에게 벌을 내리신 것도 그렇고, 요즘은 어쩐지 전하께서 태사께 좀 더 너그러워지신 기분이 들어서요. 아마 그리 생각하는 건 저뿐만이 아닐 테지요.”

“……예? 장군뿐만이 아니라니요?”

“저는 문관들과는 친하지 않아서 잘 모르겠습니다만, 무관 쪽은 아무래도 그리 생각하는 눈치입니다.”

백고는 최대한 표현을 부드럽게 하려 애쓴 것 같았으나, 그의 말을 해석하자면 무관들은 자신이 감언이설로 승헌을 구슬려 제 입맛대로 이용하고 있다고 욕을 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옥환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시선을 내리깔았다. 승헌이 제게 너그러워졌다……. 확실히 그럴지도 모른다. 일전에도 못된 말을 해 그를 화나게 했었으나, 그는 백고의 말대로 오늘도 제 편을 들어 주었다. 하나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그것이 다,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차라리 전처럼 저를 노골적으로 깔보고, 의심하고, 경계했으면 싶었다. 승헌의 신임을 얻으려 애쓸 땐 언제고, 그와 상반되는 것을 바라게 된 자신의 마음이 옥환은 우스웠다. 그럼에도 그는 웃지는 못했다.

짙은 우수가 내려앉은 옥환의 표정에 백고 역시 당황해서 입을 다물었다. 좋은 뜻이라고 한 말인데, 도리어 그 말이 옥환을 침울하게 만든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보니 백고는 무언가가 떠오를 것만 같았으나, 옥환의 미모에 홀린 그가 그것을 떠올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깊은 수심에 찬 옥환은 전과는 비할 바가 되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전까지의 옥환이 마치 화폭에 담긴 완벽한 그림처럼 항상 거리감을 느끼게 했다면, 애상에 젖은 지금의 옥환은 여태껏 없던 인간미를 보이며 백고의 마음을 흔들고 있었다. 백고는 그 누구든 지금의 옥환을 본다면 가진 것을 모두 바쳐서라도 달래 주려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백고 역시 그러한 충동을 강하게 느꼈다. 일순 옥환이 제 주군인 승헌의 사람이라는 것조차 잊어버릴 정도였다. 하나 그에게는 다행히도, 옥환은 곧 평소의 인공적이고 메마른 표정으로 돌아왔다.

“하면 전하께 청을 올려보겠습니다. 하나 조금이라도 전하의 심기가 불편해 보이시면 관둘 테니 백 장군께서도 크게 기대하지는 마십시오.”

“……아…… 아, 예.”

백고는 뒤늦게 밀려오는 민망함과 수치심에 괜한 차만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 뒤 백고가 뭐에 홀린 듯한 표정으로 비척거리며 처소를 나서자, 옥환 역시 밖으로 나갈 채비를 했다.

머잖아 처소를 나온 옥환은 곧장 편전을 향했다. 어차피 미적거리고 있어 봤자 달라지는 건 없었다. 자신은 해야 할 일을 해야 했다. 벽국의 재상으로서.

어쩌면 승헌이 자신을 믿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그의 노림수일 수도 있었다. 신임하는 척하면서 자신이 활개 치게 내버려 두고 어찌 나오는지 보려는 것이다. 자신이 아는 승헌이라면 그러고도 남을 인사였다. 여태까지도 그 수에 당한 적이 많지 않던가. 오히려 지금의 그가 몹시 이상한 축에 속했다.

‘……내가 그에 대해 뭘 얼마나 안다고.’

옥환은 곧 그런 자조 섞인 생각을 하며 감정을 털어 냈다.

그렇게 옥환이 억지로 마음을 다잡으며 편전 앞에 다다르자 환관이 승헌에게 옥환이 찾아왔음을 고했다. 곧 들어오라는 답이 돌아왔고, 옥환은 안으로 들어섰다.

조회 때도 보았던 얼굴이건만 옥환은 승헌을 오랜만에 만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지난번 그를 쫓아낸 뒤로 그가 사적으로 찾아온 일이 없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옥환은 승헌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전하.”

내내 보고문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승헌이 옥환의 인사에 비로소 고개를 들었다. 승헌의 눈동자는 최근에 봤던 것 중 가장 싸늘했다. 그 시선에 옥환은 피가 차갑게 식는 기분이었다. 무관들은 자신이 승헌을 꾀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으나 승헌은 그럴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조정에서는 제 편을 들어주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또 이렇게 냉담하지 않은가. 무슨 일로 기분이 상했는지는 몰라도 어쩐지 옥환은 예감이 좋지 않았다.

“그대가 어인 일이지?”

“……청을 드리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그리 서 있지 말고 이리와 앉아.”

옥환이 조심스레 승헌의 맞은편에 앉자 승헌이 일순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궁인들에게 향을 피우라 명했다. 이내 주위에는 지금껏 승헌에게서 익숙하게 맡아 왔던 은은한 향기가 퍼져나갔다.

“그래서, 그 청이라는 게 뭔지 들어보지.”

어느새 교지를 적기 시작한 승헌이 붓을 움직이며 말했다. 옥환은 그다지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는 승헌의 표정에 때를 잘못 맞췄나 고민하면서도 순순히 털어놓았다.

“잠시 외출 허가를 받고 싶습니다.”

“외출?”

“예. 벌써 서국에 온 지도 어언 일 년이 다 되어 가는데, 여태껏 저는 궁 밖으로 나가본 일이 한 번도 없습니다. 감시를 붙이셔도 좋으니 잠시라도 나갔다 올 수 있게 해 주십시오.”

“…….”

승헌은 교지를 적고 있던 손을 멈추고 옥환을 바라보았다. 옥환은 사실상 궁이 아닌 바깥에서 머물러야 하는 태사의 자리에 있었으나, 그에 앞서 승헌의 첩이기도 했다. 첩이란 결국 승헌의 소유물이나 마찬가지였으니 승헌이 안 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이번에 허락을 받지 못한다 해도 옥환은 무슨 수를 써서든 밖으로 나갈 생각이었지만.

옥환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승헌이 이내 빙그레 웃었다. 하나 입만 웃고 있을 뿐, 그의 눈은 차갑게 굳어 있었다.

“별로 허락해 주고 싶지 않군.”

“저를 의심…… 읏.”

자신을 의심하는 거냐고 물으려던 옥환은 승헌이 돌연 제게 입을 맞춰 오는 바람에 말을 삼켰다. 승헌은 옥환의 뒷머리를 받친 채 생각보다 깊게, 접문을 이어 갔다. 제 입안을 이리저리 헤집는 승헌의 혀에 동요하는 것도 잠시, 옥환은 곧 평정을 되찾았으나 그럼에도 승헌의 이러한 행동을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와 몸을 섞은 지는 꽤 되었고, 그는 지난 정사로 하룻밤을 꼬박 잠들어 있던 제게 미안했는지 제 몸에 접해 오는 일 자체를 자제하는 듯 보였다.

‘참을 만큼 참았다는 것인가?’

하면 몸을 주고 자신의 요청을 쉬이 받아들이도록 하는 게 더 나을 것인가? 옥환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승헌이 문득 입술을 떼더니 짧게 혀를 찼다. 그러고는 옥환을 번쩍 안아 들어 침상 위에 그를 거칠게 내려놓았다.

“전하, 무슨…….”

승헌이 저를 안길 원한다면 경우에 따라서는 충분히 안길 수도 있다고 생각한 옥환이었으나,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갑작스러웠다. 그리고 무례했다. 게다가 승헌은 흥분했다기보다는 불쾌한 쪽에 가까운 듯한 표정이었다. 기꺼이 안는 것이면 모를까, 상대 또한 그다지 내키지 않는 표정을 하고 있으니 옥환 역시 자존심이 상할 수밖에 없었다.

“전하, 대낮입니다. 체통을 지키십시오.”

“체통을 지켜야 하는 것은 그대지. 그대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있나?”

승헌은 일어나려는 옥환의 양어깨를 짓누른 채 질문했다. 옥환은 인상을 쓴 채 짧게 대꾸했다.

“저는 전하의 신하입니다.”

“저번부터 계속 그리 말하면서 내 속을 긁는데, 그대는 내 첩이야. 혼례를 올리지 않았을 뿐, 엄연히 나의 반려라고.”

“…….”

혼례, 반려. 모르고 있던 사실은 아니나 새삼 직접 귀로 들으니 몹시도 낯설고 당황스러웠다. 첩이 되면 얘기를 들어주겠다 하니 거래의 일종으로 받아들였을 뿐, 옥환은 승헌과 진심으로 한평생을 같이 보낼 생각을 한 적은 없었다. 또한 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을 터였다.

하나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승헌의 곧은 시선에 옥환은 형언할 수 없는 민망함에 휩싸였다. 그렇다면 승헌은 지금껏 자신을 반려로 생각해 왔단 말인가? 어쩌면 그럴지도 몰랐다. 따지고 보면 지난 국혼을 미룬 것 또한 그런 연유에서였을 것이다. 물론 승헌에게 있어서는 반려 또한 단순한 종속 관계에 불과할지도 몰랐다. 하나 한번 의식하게 되고 나니 옥환은 지금 상황이 무척이나 부끄러워졌다.

“전하의 말씀인즉, 저는 첩이니 밖으로 나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까?”

옥환이 최대한 평정을 가장하려 애를 쓰며 묻자 승헌이 쓴웃음을 지었다. 막상 말을 꺼내 놓고도 승헌이 이번에는 또 뭐라고 대답하여 저를 혼란스럽게 할지 걱정하고 있던 옥환은, 이어진 승헌의 돌발 행동에 대경실색했다.

“잠깐, 전하, 뭐 하시는 겁니까……?!”

승헌은 갑자기 손을 뻗더니 무턱대고 옥환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그 우락부락한 손길에 옥환은 소리만 높일 뿐 제대로 된 저항도 하지 못했다.

“전하!”

결국 참다못한 옥환이 그로서는 드물게도 큰소리를 내자 승헌의 손이 그제야 멈췄다. 하지만 옥환이 막아서 멈췄다기보다는 더는 벗길 필요가 없어서 멈췄다고 보는 것이 옳았다. 다행히 백주 대낮에 알몸이 되는 상황까지는 모면했으나, 옥환의 옷은 속곳만을 남기고 훌훌 벗겨져 있었다.

겨우 잠잠해진 상황에 옥환이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있는데, 승헌이 짧게 툭 내뱉었다.

“나는 국화 향을 싫어해, 옥환.”

“그게 무슨…….”

“그 뭐 같은 향이 다 빠질 때까지 여기 있도록 해.”

승헌은 냉담한 어조로 명령하고는 침상 위에 그대로 옥환을 둔 채 제 일을 하러 다시 탁상에 가 앉았다. 옥환은 그제야 승헌이 왜 화가 났는지 비로소 깨달았다. 국화 향. 백고에게 나던 그 향이 제게 옮겨 온 것이 분명했다. 승헌은 자신이 오늘도 백고를 만났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테고, 그러니 국화 향이 누구에게서 옮겨 온 것인지도 충분히 추측이 가능했을 것이다. 자신의 첩이 다른 사내의 향을 달고 왔는데 어느 누군들 좋아하랴.

좀 전까지만 해도 승헌이 이리 포악하게 구는 이유를 몰라 그저 부아가 치밀었던 옥환이었으나, 그가 화를 내는 원인을 알고 나니 더는 반항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옥환은 승헌이 시키는 대로 여기서 가만히 시간을 죽이다가 승헌의 분이 풀리고 나면 다시금 외출 허가를 받아 볼 요량이었다. 백고를 자주 만나는 것에 대한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쪽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것을 설명하고 나면 승헌도 외출을 허락해 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승헌의 행동을 다 용서한 것은 아니었다. 궁인들도 다 있는 데서 제 옷을 벗기다니. 다만 부탁을 하는 건 자신이니 결국엔 굽히고 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었다.

결정을 내린 옥환은 침상 위에서 몸을 일으켜 얌전히 자리를 잡고 앉았다. 왕인 승헌이 일을 하고 있는데 신하인 자신이 그 옆에 누워 있을 순 없다고 생각해 내린 판단이었다. 그렇게 옥환은 조용히 앉아 승헌이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승헌은 제게 그처럼 화를 내놓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 일에 집중하고 있었다. 승헌은 강인한 무인이었으나, 국정을 돌보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문인의 자질도 충분한 자였다. 제 주군인 염완 역시 그에 뒤처지지는 않겠지만 솔직히 말해 염요와 승헌은 비교가 불가능했다.

하나 그런 염요가 조금씩 변화의 기미를 보이고 있다. 앞으로 염요가 더욱 성장하기 위해서는 당분간 서국과 전쟁을 벌여서는 안 될 일이었다. 지금의 수준으로는 염요도 벽국도 힘 한번 써 보지 못하고 서국의 무력 앞에 무너지게 될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승헌을 보며 자신의 의지를 다지고 있던 옥환은 문득 승헌과 눈이 마주치자 멈칫했다. 하지만 오히려 승헌 쪽이 더 놀란 것인지 그는 잠시 눈을 크게 떴다가 곧 피식 웃었다.

“향을 빼라고 했지 나를 그리 열렬하게 보라고는 한 적이 없는데.”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보는 것보다야 전하를 보고 있는 것이 낫지 않습니까.”

옥환의 되바라진 대답에도 승헌은 미소를 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음 보고문을 손에 들었다. 승헌의 행동을 주시하던 옥환은 그가 또 일을 하려는 것 같자 저도 모르게 그에게 말을 걸었다.

“많이 바쁘십니까?”

다행히 승헌은 성가셔하는 기색 없이 대꾸했다. 물론 보고문은 여전히 손에 들린 채였다.

“그대는 자주 그것을 묻는군. 일국의 군왕이 바쁘지 않으면 어쩔 텐가. 이 나라는 아직 사상누각에 불과해. 그대도 전에 말했던 토대를 튼튼하게 쌓기 위해 나 역시 불철주야 노력하는 것이지.”

당연하고도 올바른 대답이었다. 도리어 자신의 질문이 우문이었다. 승헌은 앞으로도 평생 바쁠 것이다. 그가 제대로 된 왕이라면, 그래야 옳았다. 저 또한 벽국에서 염요를 대신해 국무를 대행하며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지 않았던가. 하나 나라를 위해서라면 휴식 따윈 없어도 좋았고, 백성들의 행복이 곧 자신의 행복이 되었다. 어쩌면 승헌도 그와 비슷한 감정일지 모른다.

‘이리 가까이 있는데 어찌 물이 들지 않을까.’

대적하고 있을 뿐, 자신과 승헌의 입장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렇기에 더더욱 선을 긋는 것이 어려운지도 모른다. 옥환은 공연히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을 느끼며, 그 뒤로는 쭉 침묵한 채 승헌을 지켜보았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마침내 승헌이 쌓여 있던 보고문을 다 처리했는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이 뒤로도 환관이 가져올 보고문이 산더미였다. 하나 그는 곧바로 다음 보고문을 처리하는 대신 옥환에게 다가왔다. 뭘 하려나 싶어 승헌을 쳐다보던 옥환은 그가 갑자기 제 쪽으로 휙 가까워지는 바람에 몸을 움찔했다. 승헌은 옥환에게서 국화 향이 빠졌는지 확인하고는 뒤로 물러섰다.

“먼저 언질을 좀 주시고…….”

“아직 덜 빠졌군.”

“…….”

옥환이 정색을 하니 승헌이 쿡쿡 웃었다. 그 뒤 그는 궁인을 시켜 옥환이 입을 새 옷을 가져오라 일렀다. 이제야 겨우 처소로 돌아갈 수 있겠다는 생각에 옥환은 내심 안도했다.

“……전하. 제 옷이 오는 동안 잠시 쉬십시오.”

옥환이 외출 허락도 받을 겸 의견을 올리자 승헌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옥환의 옆에 앉았다.

“안 그래도 그러려고 하던 참이야. 그대가 핑계가 되어주니 좋군.”

“어느 누가 전하의 휴식을 방해하겠습니까.”

“널리고 널렸지. 문하시중부터 시작해서…… 물론 그들의 앞잡이는 바로 그대겠지만.”

“앞잡이라니, 군왕께서 그런 상스러운 표현은 삼가십시오.”

“아니라고는 안 하지?”

짓궂게 묻는 승헌을 흘겨본 옥환은 곧 본론을 꺼내 들었다.

“전하. 제가 백 장군을 만난 것은 종소 때문입니다.”

“또 그 아이로군. 내가 그 아이를 어찌해야겠나?”

승헌의 위협에 흠칫한 옥환은 승헌의 표정을 확인하고는 그가 진심으로 한 말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안도한 그가 말을 이었다.

“저 때문에 그리된 것 같아 아무래도 마음에 걸리는 것이 사실입니다. 외출을 허가해 주십사 청을 올린 것 또한 그 아이를 만나고자 한 것이었을 뿐…… 전하의 심기를 해치려는 마음은 없었으니 부디 헤아려 주십시오.”

“그렇게까지 할 일이 아니야, 옥환.”

“압니다. 하나 어린아이 하나 책임지지 못해서야 어찌 나라를 돌볼 수 있겠습니까? 제 미련한 고집을 받아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나름의 설득에도 승헌이 여전히 못 미더워하는 눈초리로 자신을 바라보자 옥환이 생각 끝에 이렇게 덧붙였다.

“백 장군과의 일을 걱정하시는 거라면 마음 놓으십시오. 애초에 백 장군은 제 취향이 아닙니다.”

“뭐?”

“전하의 첩인 제가 어디 그 정도 얼굴로 만족하겠습니까.”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대답인지 승헌은 드물게도 얼빠진 표정으로 옥환을 쳐다보다가, 이내 커다랗게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웃으라고 한 소리는 아니었던지 잠깐 당황한 듯했던 옥환도, 승헌이 시원스럽게 웃는 모습에 이내 작게 따라 웃었다.

한참 웃던 승헌은 여전히 웃음기가 어린 얼굴로 말했다.

“다행이군. 그대가 내 얼굴은 마음에 들어 하는 듯해서.”

옥환은 일순 뭐라고 대답하면 좋을지 몰라 머뭇거렸다. 유하게 넘기려면야 얼마든지 그럴 수 있었으나, 왠지 승헌의 말 속에 뼈가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하나 승헌은 옥환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딱 반나절. 그때까지만 궁 밖에 나가는 것을 허락하지.”

“…….”

옥환이 애매한 표정을 짓고 있자 승헌이 특유의 속을 알 수 없는 얼굴로 능청스럽게 말했다.

“전에 말했잖아. 나는 인색한 지아비가 되겠다고.”

그러더니 승헌은 한 손으로 옥환의 뺨을 감싸고는 고개를 가까이 기울였다. 옥환은 또 접문을 하려는 건가 싶어 살며시 눈을 감았으나 승헌의 입술은 옥환의 입술이 아닌 귓가로 다가갔다.

“얼굴만으로도 좋으니 나 외에 다른 이에겐 만족하지 않길 바라.”

눈을 감고 있던 옥환은 뒤늦게 부끄러움을 느끼고는 눈을 떴으나 승헌은 낮게 웃으며 덧붙였다.

“다시 감아.”

그러더니 승헌은 이번엔 제대로 입을 맞추었다. 승헌이 자신의 입술을 가볍게 물었다 놓는 것을 느끼며 옥환은 자연스럽게 입술을 벌렸다. 승헌의 혀는 그 사이를 미끄러지듯 파고들었다. 제 입안을 능숙하게 희롱하는 혀의 움직임에 옥환의 몸에 열이 번졌다. 아까보다는 훨씬 더 부드럽고, 또한 긴 접문이었다. 서로의 호흡이 포개어지고 타액이 섞였다. 승헌과 닿는 것 자체가 오랜만이어서인지 옥환의 사고는 쉽게 흐려졌다. 옥환은 무심코 이대로라면 승헌에게 안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나 승헌은 이내 입술을 떼고 옥환에게서 떨어졌다. 그리고 그때 마침 궁인들이 옥환의 새 옷을 가지고 돌아왔다.

“옷을 다 갈아입으면 돌아가도 좋아. 덕택에 잘 쉬었으니 나도 다시 일을 해야겠군.”

다시 탁상 앞으로 향하는 승헌의 등을 멀거니 쳐다보던 옥환은 궁인들이 자신의 환복을 위해 침상의 휘장을 치고 나서야 시선을 돌렸다. 옥환이 옷을 다 갈아입고 나자 환관 하나가 다가와 인사 없이 그냥 돌아가셔도 된다는 말을 전해왔다. 혹 제 인사가 방해가 된다고 여겨 그런 건가 싶은 마음에 옥환은 괜스레 서운했다.

‘인사 좀 받으면 어떻다고.’

하나 뾰로통한 얼굴로 걷는 것도 잠시, 승헌이 어린아이처럼 웃던 모습을 떠올린 옥환은 어쩐지 가슴 한구석이 간질간질한 감각을 느꼈다. 게다가 기분 탓인지 모르지만, 처소를 향하는 발걸음이 전보다 가벼워진 듯했다. 화해…… 이번에는 정말로 화해를 한 것 같았다.

그렇게 한결 가뿐해진 마음으로 처소에 돌아온 옥환을 기다리고 있던 이가 있었다. 바로 계평이었다. 그는 옥환을 보더니 아무 말 않고 무언가를 그의 앞에 내놓았다.

옥환은 그것을 보자마자 그대로 굳어 버렸다. 계평이 그에게 건넨 것은 다름 아닌 염요의 서찰이었다.

그 납처럼 무거운 서찰을 받아드는 순간, 옥환은 마침내 현실로 돌아왔다. 서찰 안에는 계평에게 들었다며 옥환이 무사히 서국의 기밀을 빼내길 빈다는 염요의 격려가 적혀 있었다.

그랬다. 자신은 서국을 무너뜨리기 위해, 백고의 집에 가려 하는 것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승헌에게 외출을 허락받은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승헌을 속여 그가 자신의 계획을 돕도록 만든 것이다. 한데 그래놓고, 승헌의 미소에 기뻐하다니. 그가 일만 하는 것을 걱정하고, 그가 배웅해 주지 않은 것을 섭섭해하다니.

‘나는…….’

옥환은 넋 나간 얼굴로 한참을 말없이 서찰만 내려다보았다. 이것이 제 앞에 놓인 하나뿐인 길이었다. 다른 선택지는 주어지지 않았다. 처음부터 쭉. 그에게 진창길 외에 갈 수 있는 길은 없었다.

‘왜. 어찌 자꾸 이래.’

계평을 내보낸 뒤 혼자가 된 옥환은 자신의 가슴을 때렸다. 왜 자꾸 길을 어긋나려 하나. 돌아볼 수 있는 길조차 없는데.

그렇게 그는 한참 동안, 저를 내리누르는 듯한 서찰을 들고 멀거니 앉아 있었다.

***

“어서 오십시오, 태사!”

백고는 그야말로 버선발로 뛰어나와 옥환을 맞이했다. 과한 환영 인사에 부담스러워하면서도 옥환은 곱게 웃었다.

“백 장군.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제가 직접 모시러 갔었어야 하는데…….”

“전하께서 기거하시는 궁 안에서 그리하시는 건 법도에 어긋납니다.”

“예…….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거절하셨지요.”

백고는 여전히 아쉬운 표정이었으나 반나절의 외출 허락조차 겨우겨우 받아 낸 것이었다. 행여 승헌의 신경을 건드렸다가는 그마저도 철회당할 수 있으니 옥환에게는 애초에 선택의 여지란 없었다. 게다가 승헌이 옥환의 외출을 위해 수많은 호위와 지나칠 정도로 호화로운 마차를 준비해 직접 보낸 덕에, 백고가 굳이 궁까지 그를 마중 나갈 필요도 없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가벼운 안부를 나누고는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문득 누군가가 다급하게 달려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옥환이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못 본 사이에 키가 좀 큰 듯한 종소가 옥환을 보고는 크게 반색했다.

“스승님!”

“종소야.”

오랜만에 보는 종소의 얼굴에 옥환의 표정 역시 활짝 펴졌다. 제 앞으로 달려온 종소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옥환은 폭포처럼 걱정을 쏟아냈다.

“그간 잘 지냈느냐? 괴롭히는 이들은 없고? 일은 잘하고 있는 것이지? 백 장군이 네게 큰 은혜를 베푸셨으니 그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종소는 옥환을 본 것이 마냥 좋은지 헤벌쭉 웃은 채 연신 고개만 끄덕였다. 옥환이 어찌 그리 웃고만 있느냐 하니 그제야 스승님께서는 잘 지내셨냐며 안부를 물어왔다.

“나야 항상 같지. 그저 네 걱정을 많이 했단다. 그새 좀 자란 것 같구나.”

“예. 여기서 저는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잡니다. 나중에는 스승님의 키도 훌쩍 넘을 것이에요.”

“하하하, 그리되면 좋겠지만 외면보다도 내면의 성장이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잊지 말거라. 마음이 큰 사람이 진정 어른인 것이야.”

이대로라면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옥환의 당부에 하는 수 없이 백고가 여기서 이러지 말고 들어가서 얘기하자며 대화를 중단시켰다. 옥환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백고를 따라나섰다. 종소 역시 싱글벙글한 얼굴로 그 뒤를 따랐다.

“대장군께서 계신 날에 왔었더라면 좋았겠지만…… 모쪼록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이윽고 자리를 잡은 일행 앞으로 찻잔이 놓이자 옥환이 그렇게 운을 뗐다. 백고는 손사래를 치며 대꾸했다.

“아닙니다, 태사. 솔직히 태사의 말씀대로 저희 부친께서 태사가 오시는 걸 알면 달가워하시진 않았을 겁니다.”

“대장군께서는 전하의 명으로 관방 정비를 위해 변방에 가셨지요?”

“예. 가까운 지역은 직접 돌아보고 싶어 하셔서 말입니다. 벽국의 계속되는 공격으로 책임감을 느끼시는 모양이시라……. 달포 정도 걸린다고 하셨으니, 앞으로 며칠은 더 안 계실 겁니다.”

백고의 아버지인 대장군 백청은 무관들을 이끄는 자리에 있으면서 호진은 물론이고 호진의 죽은 아버지와도 막역한 사이였다. 반면 그 반대의 위치에 있는 옥환의 존재는 백청에게 있어 그야말로 눈엣가시였다. 호진만큼 저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나 조정에서도 공공연히 저를 무시하거나 모욕하는 발언을 해오기도 했다.

물론 옥환은 백청이 자신을 싫어하기 때문에 그가 없는 날을 골라 백고의 집에 온 것이 아니었다. 옥환이 이날을 택한 것은, 바로 백청이 없는 사이 그의 방을 뒤지기 위해서였다.

다른 이들이 듣는다면 기겁을 할 일이었으나 오늘, 옥환은 다름 아닌 바로 백청의 집에서 군사 기밀을 훔칠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전에 계평에게 말했듯 옥환은 진작부터 서국의 군사 정보를 벽국에 빼돌릴 작정으로 조정 내부를 염탐해 왔다. 그러한 과정에서 그는 승헌이 군사 기밀에는 유독 민감한 탓에 핵심적인 군사 회의는 백청을 비롯한 아주 일부의 무관만이 승헌과 독대하는 형태로 진행하고 있으며, 일반적으로 병부에서 관리하는 문서 외에 중요한 정보가 담긴 문서는 군사 회의에 참여하는 무관들이 나누어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고작 여기까지 다다르는 데에 족히 반년이 걸렸다. 승헌이 어찌나 완벽하게 감추어 왔는지, 각각의 정보가 서로 다른 이에게 흩어져 있는 바람에 그것을 조합하는 것조차 쉽지가 않았다. 그의 기밀 관리에 대한 철저함만큼은 옥환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목표를 설정할 수 있을 정도의 정보는 모았다. 옥환의 목표는 바로 백청이었다. 백고를 통해 접근하기가 가장 쉽기도 했고, 아무래도 대장군의 자리에 있는 만큼 그가 가장 주요한 문서를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었다.

감히 무관의 집에서 무언가를 훔치려 하다니. 자신이 생각해도 터무니없는 작전이었으나 그렇기에 더더욱 맹점을 파고들기 쉬웠다. 그 누구도 설마하니 금야 선생이 문서를 훔치려 서국 대장군의 집에 왔다고 생각하진 않을 테니까.

하나 만일 일이 잘못되거나 나중에라도 훔친 것을 들키게 되면 자신의 목숨은 물론이요, 이와 연관된 백고 그리고 종소까지도 역적이 될 터였다. 옥환은 제 앞에서 그간 연습한 글자들을 보여 주고 있는 종소를 바라보았다. 이 계획에는 종소의 힘이 필요했다. 하나 그 안에 종소의 동의는 들어가 있지 않았다. 옥환은 아무것도 모르는 무고한 이를 끌어들이려 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고 싶지 않다.’

몇 번이나 그리 생각했지만, 전쟁이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옥환은 더 이상 백성들이 죽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전쟁을 벌일 바에야 차라리 영영 두 개의 나라로 나뉜 채 적대하며 지내는 것이 낫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하나 상황은 여의치 않다. 그렇다면, 선택을 하는 수밖에.

지금의 상황으로는 종소의 도움을 받는 것이 최선이었으나, 그럼에도 제 선택에 대한 가눌 수 없는 죄책감은 옥환의 어깨를 무겁게 내리눌렀다. 하나 어쩌겠는가. 시대가, 그리고 자신이 이리 잔혹한 것을.

공연히 종소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은 옥환은 이내 눈을 질끈 감았다 뜨고는 입을 열었다.

“백 장군. 생각해 봤는데, 대장군께서는 필시 나중에 제가 왔던 것을 아시게 되지 않겠습니까. 하면 아무래도 백 장군께도 폐가 갈 듯한데.”

“아…… 저야 뭐, 이미 내놓은 자식 취급이라.”

“저 때문에 더 그리되시지 않겠습니까. 해서 별것은 아니나…….”

옥환은 말을 흐리며 궁에서부터 챙겨온 두루마리를 꺼냈다. 그것을 넘겨받은 백고가 두루마리를 펴보고는 감탄을 했다. 그것은 옥환이 직접 지은 시로, 내용인즉 신하의 충정을 상록常綠이라 표현하며 칭송한 것이었다.

“참으로 훌륭한 시입니다. 부친의 충의를 이리 아름답게 표현해 주시니 제가 다 감사할 따름입니다.”

“아닙니다. 대장군의 인덕과 충의에 비하면 한참 모자란 글이지요. 하나 이런 것으로라도 제가 평소 대장군을 존경하고 있다는 뜻을 전달하고 싶었습니다. 부디 대장군께 대신 전해 주십시오.”

“아, 예. 물론이지요. 부친께서도 분명 기뻐하실 것입니다.”

두루마리를 조심스레 접은 백고는 하인을 불러 이것을 백청의 방에 놓아두라 지시했다. 하인이 명을 받고는 물러나려 하던 그때 옥환이 재빨리 입을 열었다.

“백 장군. 잠시 변소에 다녀와도 되겠습니까.”

“예? 아, 예에. 물론.”

백고의 어색한 반응에 옥환은 그가 자신에게 품은 환상에 대해 다시금 자각하고는 살짝 어처구니가 없어졌으나, 겉으로는 미소를 지으며 방을 나왔다.

이윽고 옥환은 함께 나온 하인에게 변소가 어디냐고 물은 뒤 그가 알려준 방향으로 가는 척하다가, 이내 살그머니 뒤로 돌아 하인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이따금씩 지나가는 이들을 피해 몸을 숨기기도 하며 하인을 쫓던 옥환은 머잖아 하인이 복도 안쪽에 있는 큰 방 안으로 사라졌다가 곧 다시 나오는 것을 확인했다. 어느새 하인의 손에 들려 있던 두루마리는 사라진 후였다. 저곳이 백청의 방임을 확신한 옥환은 주변을 살피고는 그 안으로 잠입했다.

‘중요한 물건을 숨길 만한 곳은…….’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서는 최대한 빨리 돌아가야만 했다. 시간이 촉박한 만큼 옥환은 가장 미심쩍은 공간을 수색해 볼 생각이었다. 백청은 올곧은 성정으로, 계략이나 술수보다는 정정당당하게 힘으로 겨루는 것을 선호하는 전형적인 무인이었다. 그러니 무언가를 숨기는 데에도 교묘한 속임수를 쓰는 것보다 차라리 꽁꽁 숨겨 놓는 쪽을 택했을 것이다. 거기다 나이가 있으니 혹여 잊어버리지 않도록 찾기 쉬운 장소이면서도, 청소를 하는 하인들도 거의 뒤지지 않을, 당연하고도 평범한 장소여야 한다. 마지막으로 궁에 가지고 들어가야 할 경우가 있을 테니 꺼냈다 넣는 것이 수월할 필요도 있었다.

머릿속으로 추리를 펼치며 빠르게 주변을 훑던 옥환의 시선이 어느 한 곳에 머물렀다. 다름 아닌 책장이었다. 백청이 책을 자주 읽는지 읽지 않는지는 모르겠으나, 커다란 책장에는 책이 빼곡하게 꽂혀 있었다.

옥환은 재빨리 책장 앞으로 다가가 그것을 살폈다. 책장은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했는데, 책이 공간에 비해 많이 꽂혀 있는 탓에 책 한 권 꺼내기가 쉽지 않았다. 아마 꺼내고 나면 그것을 돌려놓는 것 또한 쉽지 않을 것이다. 책장 안에서도 정확히 문서가 숨겨져 있을 만한 칸을 찾아내야 했다.

‘아무래도 백청은 무릎이나 허리를 굽히기 쉽지 않을 테니 눈높이에 맞는 위치를 선호하겠지. 백청의 신장을 생각해보면…… 이 칸을 기준으로 위아래 정도까지겠군.’

옥환이 추측한 범위 중 제일 위 칸에 꽂힌 책들을 모두 꺼내 보려는데, 문득 바깥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화들짝 놀란 옥환은 책장 옆에 있던 옷장 속으로 서둘러 숨어들었다. 옥환이 옷장 문을 닫자마자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안으로 들어온 것 같았으나, 캄캄한 옷장 안에서는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방도가 없었다.

옥환은 심장이 정신없이 뛰는 것을 느끼며 그저 정체불명의 인물이 한시라도 빨리 방에서 나가기만을 간절히 기도했다. 하나 얼마쯤 기다려 봐도 그가 방을 나가는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설마 백청이 돌아온 것인가?

‘……낭패다.’

이대로 시간을 지체하게 되면 백고가 곧 자신을 찾으려 할 것이다. 만에 하나 지금 방 안에 있는 인물이 백청이 아니거나, 자신이 백청의 방에 잠입한 것을 들키는 일 없이 돌아간다고 해도 모든 게 해결되는 건 아니었다. 오늘이 아니면 옥환은 더 이상 기밀문서를 훔칠 기회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승헌이 허락한 것은 오늘, 그것도 딱 반나절뿐이었으니까.

마음은 급하건만 영 진전이 없는 상황에 옥환의 입안이 바싹바싹 말랐다. 처음부터 어리석을 만큼 무모한 작전이었다. 어쩌면 자신이 너무 성급하게 굴었던 것일까? 옥환은 애꿎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더 구체적이고 성공 가능성 있는 계획을 세웠어야 할지도 모른다. 하나 그럴 여유가 없었다. 서국이 침략하려고 해서가 아니었다. 문제는, 자신의 마음에 있었다. 제 마음이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니게 되어 간다. 옥환은 그 사실에 조바심이 났었다. 그리고 그 조바심이 지금의 위기를 초래했다.

옥환은 애써 고개를 저어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시 붙잡았다.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아직 제대로 해본 것은 아무것도 없다. 죽을 때 죽더라도 계획한 바는 실행해야 했다.

각오를 단단히 다진 그는 옷장의 문을 아주 살짝 열었다. 문틈으로 보이는 것은 하인의 뒷모습이었다. 그는 책상 위에 놓인 난의 잎을 정성스레 닦고 있었다. 옥환은 방 안에 있는 인물이 백청이 아니라는 사실에 한시름 놓았다. 그리고 그때 마침, 운 좋게도 하인이 난을 돌보는 것을 끝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옥환은 이제 그가 한시라도 빨리 방에서 나가기를 바랄 뿐이었다. 한데.

“…….”

하필 옷장 문이 살짝 열린 것을 발견한 하인이 이쪽을 빤히 보며 멈춰 섰다. 순간 옥환의 가슴이 철렁했다. 이윽고 하인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옷장 쪽으로 다가왔다. 옥환은 최대한 안쪽으로 웅크린 채 숨을 죽였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쿵쾅거리고 있었다.

“이게 왜 열려 있지?”

하인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옷장 문으로 손을 뻗었다. 옥환은 이제 다 틀렸다고 생각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감은 눈 위로 승헌이 화를 내는 모습과, 고신을 당하는 종소의 모습이 그려졌다. 후회가 막심했다.

그런데 절망하던 옥환에게 기적과도 일이 일어났다. 금방이라도 문을 열려던 하인이 갑자기 멈추더니, 밖에서 누군가가 부르기라도 했는지 뒤를 한 번 돌아보고는 옷장 문을 닫고 돌아선 것이다. 그리고 머잖아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옥환은 그제야 참았던 숨을 내쉬며 쓰러지듯 옷장 벽에 기댔다.

“……하아…….”

긴 한숨으로 마음을 추스른 옥환은 즉시 옷장 밖으로 나왔다. 아직도 심장이 정신없이 뛰고 있었으나, 옥환은 떨리는 손에 힘을 주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이제는 정말 시간이 없었다. 옥환은 황급히 책장의 책들을 꺼내 안을 뒤졌다.

그렇게 빠르게 책을 뒤지던 옥환은 무슨 일인지 갑자기 우뚝 손을 멈추었다. 그러더니 아까보다 더 창백해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없다…….”

기밀문서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혹시 몰라 책을 꺼낸 뒤 빈 책장을 살피기도 했으나 특별한 점은 보이지 않았다. 여기가 아니었다. 어쩌면 책장이라는 추측조차 틀렸을 수도 있었다. 하나 이 이상 의심이 가는 장소도, 다른 데를 뒤져볼 만한 시간도 남아 있지 않았다. 안타까움에 쉽사리 발을 떼지 못하던 옥환은, 결국 소득 없이 돌아서야만 했다.

잠시 뒤, 백청의 방을 빠져나온 옥환이 서둘러 백고의 방으로 돌아왔다. 살짝 늦은 감이 있기는 했으나 백고는 딱히 옥환의 행동을 의심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차를 마시다 말고 긴 한숨을 내쉬는 옥환의 행동에 무슨 일 있으시냐고 물은 게 다였다.

그렇게 백고와 대화를 나누고 종소의 글자를 봐주던 옥환은 해 질 녘이 되었을 때쯤 집을 나왔다.

“서찰을 보낼 테니 그리 서운한 얼굴 말거라.”

저를 배웅하며 풀이 잔뜩 죽은 종소를 옥환이 다정하게 위로했다. 종소는 옥환과 헤어지는 것이 적잖이 아쉬운 듯 내내 울상이었다. 마차에 오르기 전, 옥환은 마지막으로 종소에게 당부했다.

“글자를 열심히 배우렴. 학문을 익히는 것은 네게 어떤 식으로든 반드시 도움이 될 것이란다.”

“……제가 평생 하인으로 살지라도요?”

“그래. 글을 가르쳐 주는 것이 내가 네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이기도 하고.”

“어찌 그리 말씀하십니까? 스승님께서는 제게 뭘 해 주시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고귀한 분이신데, 저를 이리 만나러 와 주시는 것조차 과분합니다.”

“아니…… 그렇지 않단다.”

어쩐지 씁쓸한 얼굴로 그렇게 중얼거린 옥환은 뜻밖에도 종소를 끌어안았다. 갑작스러운 옥환의 포옹에 종소는 물론 백고도 놀랐으나, 옥환은 작게 중얼거렸다.

“당분간, 아니 어쩌면 영영 만나지 못할 수도 있겠구나. 그렇더라도 나를 너무 그리워하지 말거라.”

“……잘 안 될 것 같습니다. 스승님은 제게 아버지나 마찬가지인 분이십니다. 스승이시고, 형이시고, 어머니 다음으로 제게 따스했던 분이십니다.”

제 옷에 따뜻한 눈물이 번지는 것을 느끼며, 옥환은 종소를 더 꼭 끌어안아 주었다. 미안하다는 말은 도저히 할 수 없었다. 고맙다는 말은 주제넘은 것이었다. 옥환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그가 이제라도 자신을 의심하고 멀리하길 바라는 것뿐이었다.

옥환은 주먹을 꼭 쥐었다가 폈다. 망설임과 후회로 가득했던 눈동자는 어느새 식어 있었다. 그는 종소에게 아주 낮은 목소리로 일렀다.

“……다음 서찰에는 네게 부탁할 일을 적어 놓을 테니, 그대로 하고 서찰은 반드시 태워 버리거라.”

갑작스러운 지시에 종소가 잠시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으나 옥환은 종소를 놓고는 돌아섰다. 종소 역시 곧 옥환의 말뜻을 이해한 듯 작게 “예.” 하고 대꾸했다. 그 목소리를 들으며 옥환은 마차에 올라탔다.

마차가 궁을 향하는 내내, 옥환은 죽은 염완에게 빌었다. 부디 종소만큼은…… 무탈하게 해달라고.

***

늦은 밤. 옥환의 처소에는 흐릿한 불빛이 들어와 있었다. 바깥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의 밝기였으나, 그 어슴푸레한 촛불에 의지한 채 옥환과 계평은 무언가를 급하게 써 내려가고 있었다. 그들이 쓰고 있는 것은 옥환이 백청의 방에서 몰래 빼내 온 서국의 군사 기밀 문서였다.

오늘 낮, 백청의 방에 숨어들었던 옥환은 끝내 기밀문서를 찾지 못하고 돌아섰다. 한데 막 방을 나서려던 그의 눈에 띈 물건 하나가 있었다. 방금까지 하인이 돌보던 난이었다.

도저히 빈손으로 돌아갈 수 없었던 옥환은 반신반의한 마음으로 난을 살펴보고는 곧 무언가를 발견했다. 난 밑에 마치 받침대처럼 놓인 작은 함이었다. 언뜻 보면 그저 난을 받치기 위해 사용하는 것으로 보였으나, 그것은 분명 안에 무언가를 넣을 수 있는 궤짝이었다.

옥환은 곧장 난을 치운 뒤 궤짝을 열어 보았고, 그 안에는 역시나 군사 정보가 적힌 문서더미가 들어 있었다. 급한 마음에 그것을 몽땅 꺼내온 옥환은 필사를 한 뒤 다시 돌려놓기 위해, 계평과 함께 이런 야심한 밤중에 다급하게 붓을 놀리고 있던 것이었다.

“승상. 이것은…….”

문서를 넘기던 계평이 무언가를 보고는 옥환에게 내밀었다. 그 안에는 지역마다 배치된 병력의 수가 상세히 적혀 있었다. 이로써 벽국은 서국의 치명적인 약점을 쥐게 된 셈이었다. 급하게 가져오느라 별 쓸모가 없는 내용이 대부분이었으나, 이 문서 하나만으로 목숨을 걸 가치는 충분했다.

“지금은 한시가 급하니 어서 필사부터 하거라.”

옥환의 지시에 계평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붓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날이 밝기까지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 안에 필사를 끝내야만 했다.

그리고 마침내 베껴야 할 문서의 양이 거의 줄었을 때쯤, 계평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승상. 이것들을 어찌 돌려놓으실 생각이십니까?”

“…….”

옥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글자를 적어 내려갔다. 그 설옥환이라면 어련히 준비한 바가 있겠으나, 여차할 때는 자신이 나서야 할 수도 있으니 계획을 알아 둬 나쁠 것은 없다는 것이 계평의 생각이었다.

물론 계평의 예상대로 옥환에게는 문서를 돌려놓을 방안이 마련돼 있었다. 바로 종소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옥환은 종소에게 보내는 서찰에 기밀문서를 숨겨 보낼 생각이었다. 그를 위해서 낮에 종소에게도 미리 언질을 해 두었다. 다만, 옥환은 아직까지도 망설이고 있었다. 혹 더 나은 방법이 있지는 않은지 최후의 최후까지 고민하고 있었다. 하나 그것을 찾아내지 못하는 자신의 부족한 능력이 그저 원망스러울 따름이었다.

복잡한 심경에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옥환을 보며 계평은 속도 모르고 입을 삐죽였다. 하나 그 역시 다시 문서를 베껴 적는 작업으로 돌아갔고, 서서히 동이 터올 때쯤 두 사람의 은밀한 작업이 비로소 끝이 났다.

모든 일을 마치고 난 옥환은 계평을 돌려보내고는 아침 시중을 들기 위해 찾아온 하인을 평소와 다름없이 맞이했다. 관복으로 갈아입은 그는 얼마 뒤 조회를 위해 정전을 향했고, 조회는 어제와 같이 별 탈 없이 끝이 났다. 이윽고 자연스럽게 다가온 백고에게 옥환이 살가운 인사를 건넸다.

“백 장군.”

언제나와 그다지 다를 것 없는 무미건조한 미소건만 백고에게는 한없이 눈부시게만 보였다. 남들은 별일이 아니라고 할지 몰라도 옥환이 자신의 집에 찾아왔었다는 것이, 궁이 아닌 다른 공간에서 옥환을 만났다는 것이 그에겐 무척 특별한 경험이 된 듯했다.

그것을 다 아는 옥환은 일부러 웃으며 백고에게 말을 걸었다.

“백 장군. 어제는 초대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종소가 잘 지내는 것을 보니 저도 안심이 되었습니다.”

“별말씀을요. 앞으로도 종소를 보고 싶으시면 언제든 찾아오셔도 됩니다. ……아, 물론 전하께서 허락하시면요.”

옥환은 속으로 그건 힘들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딱히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이윽고 그는 백고의 앞에 챙겨온 서찰을 내밀며 본론을 꺼냈다.

“백 장군. 이것은 종소에게 몇 가지 당부할 말과 그 아이의 공부에 도움이 될 만한 내용을 적은 것입니다. 당분간은 서찰을 쓰는 것조차 힘들 듯하여 준비한 것이니 대신 전해 주십시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서찰을 쓰는 것조차 힘드시다니요?”

“……곧 전쟁이 시작될 것이 아닙니까. 하니 저도 그 준비에 힘을 보태야지요.”

옥환의 설명에 백고는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백고가 서찰을 받아 챙기는 모습을 주시하던 옥환은 한순간 그에게 절대 서찰을 읽어 보지 말라 말하는 게 나을지 흔들렸으나 곧 관두었다. 괜한 말로 서찰에 대한 관심을 키우는 것은 도리어 악수였다.

의심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서찰이 백고를 통해 종소에게 전해지도록 했다. 이제는 서찰이 무사히 전달되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서찰 안에는 자신이 빼 온 기밀문서와, 종소에게 그것을 절대 보지 말고 제자리에 돌려놓으라는 지시가 적혀 있었다. 아이는 아마 자신의 지시에 따를 테지만, 그것으로 아무 탈이 없길 바라는 건 과욕이었다.

사정을 모르는 세간에서는 저를 천하제일의 책사라는 둥 과분한 이름으로 칭하지만 자신은 사실 그저 운에 맡기는 일이 부지기수인 모사꾼에 불과했다.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일을 그르쳐 제 목숨을 잃는 것은 하늘의 뜻이겠으나, 자신의 부족한 책략으로 인해 죄 없는 이들까지 죽는 것은 도무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진정 이 길이 맞는 길일까. 이 피에 절고 오물로 뒤덮인 진창길의 끝에, 꿈에서 본 금야가 있을까. 만일 있다 한들, 그 들판은 진정 금빛일까. 새카맣지는 않을까.

“하면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태사께서도 쉬십시오.”

하지만 이미 서찰은 백고의 손에 넘어간 뒤였다. 뺏을 수도 없고 뺏어서도 안 된다. 백고의 인사를 받은 옥환은 곧 돌아섰다.

더는 돌이킬 수 없었다. 이 길의 끝이 낭떠러지라 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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