五. 信疑(신의)
서국의 어전회의에서는 얼마 전 정벌로 얻어낸 녹주 땅과 관련해 승헌과 신하들 간에 담론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승헌은 녹주를 얻어 냈으니 그 옆에 있는 완안 땅까지 한 번에 차지하기를 원했다. 백고가 난을 평정한 이후로 무관들의 힘이 더 커진 덕에 그들의 찬성 여론으로 승헌의 뜻은 그대로 관철되는 듯 보였다.
“그럼 조 장군에게 완안으로 진격하라는 전하의 뜻을 전하도록 하겠나이다.”
군을 통솔하는 표기장군이 머리를 조아리고 고해 올리던 그때였다. 누군가가 그것을 제지하고 나섰다.
“잠시만 기다려주시옵소서.”
“……태사. 이번엔 또 무엇이 문제지?”
승헌이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표현하며 옥환에게 물었다. 승헌의 말대로, 옥환은 정사에 참여하게 된 후로 이렇게 사사건건 트집을 잡는 경우가 많아졌다. 물론 그것이 근거 없는 반대는 아니었으나 그 탓에 안 그래도 논의할 게 많은 회의가 한도 끝도 없이 길어지니, 승헌도 신하들도 지치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승헌은 왕인 자신의 의견에 계속해서 반발하는 옥환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을 터였다.
하나 옥환은 그런 것은 하등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자신의 주장을 피력했다.
“완안으로 진격하는 것은 결코 최선책이 아니옵니다, 전하. 재고해 주시옵소서.”
“무엇이 문제라는 건가? 우리는 녹주를 거의 아무런 피해 없이 수복했네. 완안까지 가는 데엔 아무런 어려움도 없고, 무엇보다 완안으로 진격해 벽국에게 우리의 무서움을 알게 해 주는 것이 중요해.”
“…….”
“듣자 하니 염요가 조세를 줄여 백성들의 호응을 얻고 있다 하더군. 이 이상 벽국의 정세가 안정되면 불리한 건 이쪽이야.”
염요가 조세를 줄여? 옥환은 난생처음 듣는 이야기에 잠시 동요했으나, 그것을 티 내지는 않고 대신 차후 계평에게 반드시 확인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전하. 녹주는 오랫동안 벽국의 땅이었사옵니다. 아무리 그곳이 전에는 서국의 영토였다고는 하나 그것은 벌써 십여 년 전의 일. 녹주를 먼저 정비하고 안정화하는 것을 우선시해야 하옵니다.”
“완안을 정복한 후에 녹주와 완안을 한꺼번에 정비해도 늦지 않아. 어차피 벽국에는 녹주를 되찾을 병력이 없다는 걸 경도 잘 알지 않나. 지금은 여세를 몰아야 할 때야. 시간을 끌면 그때야말로 완안에서 제대로 된 방비를 할 거란 말이야.”
“녹주는 장차 서북지방으로 진출하는 데에 필요한 요충지이옵니다. 지금 민심을 다스리고 어지러워진 땅을 회복하지 않으면 필시 장래에 문제가 생길 것이옵니다.”
“당장에 통일을 할 것도 아닌데, 몇 달 정도 늦어진다고 해서 일을 그르치지는 않네. 그렇게 신중하게만 행동해서는 큰일을 해낼 수 없다는 걸 모르나? 그러니 벽국이 그 모양이었지.”
“하면 전하께선 그리 대담하셔서 소신 같은 일개 서생이 지키던 벽국을 아직도 무너뜨리지 못하셨사옵니까?”
두 사람의 언쟁이 점점 더 수위를 올려 가고 있었다. 옥환이 한번 반기를 들기 시작하면 승헌 역시 그를 반드시 논리로 찍어 누르려 했기 때문에 두 사람의 말씨름은 쉬이 끝나는 법이 없었다.
“태사. 전하의 말씀이 옳습니다. 애초에 벽국의 신하였던 태사의 뜻을 왜 우리가 따라야 합니까?”
“아니, 태사의 의견도 일견 타당합니다. 벽국의 신하셨던 적이 있으시니 더더욱 벽국의 사정에 밝으실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이렇게, 신하들도 두 부류로 나뉘어 각각을 지지하고 나서는 게 요즘 조정의 당연한 일과가 되었다. 주로 무관은 승헌의 편을, 문관은 옥환의 편을 드는 식이었다.
“전하. 저자의 어린아이들이 놀이로 흙집을 지을 때조차 그 토대를 단단히 만들어 두고 시작하는 법이옵니다. 무지한 어린아이들조차 이럴진대, 하물며 드넓은 대륙을 하나로 만들고자 하는 나라의 대업을 허투루 시작해서야 되겠사옵니까?”
“서국의 토대는 이미 완성되었네. 지금 완안을 정복하지 않으면 경이 말하는 그 장래에 도리어 녹주가 위협을 받을 수도 있어.”
“녹주를 단단히 방비해 두면 그럴 일이 없사옵니다! 민심을 다스리지 않고 어찌 통일을 하겠다 말씀하시나이까? 전하께서 원하시는 통일이란 그저 땅덩이를 하나로 만드는 것에 지나지 않는지요?”
사납게 받아치려 입을 열었던 승헌은 짧은 숨을 뱉더니 조금 가라앉은 어조로 물었다.
“경은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과인의 결정을 매번 걸고넘어질 심산인가?”
“……전하. 생각해 보시옵소서. 처음으로 대륙을 통일했던 순국의 태조 또한 남쪽 지방의 작은 영토로 시작하였으나, 성도와 국경의 방비를 튼튼히 하여 끝내는 대업을 이루었사옵니다. 아무리 순국이 멸망했기로서니, 그들이 이룬 위업은 마땅히 보고 배워야 하지 않겠사옵니까?”
다소 누그러지긴 했으나 여전히 물러날 것 같지 않은 옥환의 완고함에 승헌이 결국 신경질적으로 혀를 찼다. 승헌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것을 깨달은 신하들이 옥신각신하던 것을 멈추고 얼른 입을 다물었다. 그저 옥환만이 심각한 얼굴로 승헌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승헌은 한참이나 침묵하며 조정 안을 살벌하게 만들고 나서야 비로소 입을 열었다.
“완안으로 진격하게.”
“전하!”
옥환이 절박한 표정을 지었으나 승헌은 옥환을 봐주지 않았다. 대신 이렇게 말했다.
“태사의 말대로 순국은 통일의 위업을 이루었지. 하나 순국의 태조가 달포 만에 백 리가 넘는 땅을 정복했다는 건 아나?”
“……그것은……!”
“신중한 것도 좋지만, 무릇 군주란 결단을 내릴 용기 또한 필요해. 경의 의견은 잘 들었네만 이번엔 그것을 받아줄 수가 없군.”
그제야 조정 안에 감돌던 팽팽한 긴장감이 비로소 풀어졌다. 하나 옥환은 여전히 분한 듯 입술을 깨문 채 승헌을 원망스러운 눈길로 쳐다보았다.
매번 이랬다. 아무리 옥환이 타당한 의견을 내놓아도 승헌은 끝끝내 자신의 의견을 밀고 나갔다. 일부러 신용을 얻기 위해 서국에 도움이 되는 간언만 올리고 있음에도, 승헌은 옥환과 논의를 하면서도 끝내는 그것을 들어주지 않았던 것이다.
이래서는 조정에 나온 의미가 없었다. 아니, 도리어 해가 되었다. 무엇이 되었든 결과적으로 옥환은 서국 조정에 도움이 되지 않는 존재가 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예 승헌에게 무시를 당하는 것도 아니고, 승헌과 길고 긴 논의를 거치면서도 정작 결과를 내지 못하고 있으니 서국 조정에 있어 옥환은 시간만 낭비하는 존재였다.
이러다간 다시 조정 밖으로 쫓겨난다 해도 신료들이 막아주지 않게 될 것이다. 점점 여론이 그리 변해 가고 있었다. 금야 선생이 생각만큼 대단하지 않다…… 라고. 어쩌면 승헌은 그것을 노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영영, 옥환을 조정 안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그 뒤, 예상보다 반 시진이나 길어진 회의가 끝이 나고 승헌은 망설임 없이 돌아서서 편전을 나갔다. 멀어지는 승헌의 등을 보던 옥환 역시 다른 신하들과 함께 편전의 문턱을 나섰다.
“태사. 기운 내십시오. 전하께도 다 마땅한 생각이 있으셨을 것입니다.”
왕의 조서를 담당하는 중서령이 옥환에게 그렇게 말을 걸었다. 그의 곁에는 문하시중과 이부상서 또한 함께였다. 문관의 고위직인 그들은 옥환에게 가장 호의적인 무리였다. 옥환 역시 그들을 이용해 조정의 내분을 일으킬 생각이었기에 그들과 가까이 지내는 편이었다. 그중 문하시중 조신은 학식이 뛰어나고 문장에 탁월한 능력을 가졌기에, 옥환은 학문적으로도 그와 자주 교류하고 있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전하께선 태사의 의견을 경청해 주시지 않습니까. 물론 전하의 말씀도 틀리지는 않습니다. 다만 저희는 문관이니, 문관답게 이성적인 의견을 올려야지요.”
“하나 문하시중이나 중서령의 의견은 수용해 주시지 않습니까. 저는 단 한 번도…… 제 의견이 전하께 받아들여진 적이 없습니다.”
옥환의 정곡을 찌르는 발언에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그들은 옥환을 알기에 그의 재능을 높이 평가했으나, 그럼에도 옥환이 생각만큼 활용할 길이 많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품고 있었다. 그런 속내를 다 파악하고 있는 옥환은 이대로 가다간 겨우 만든 인맥마저 잃을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느꼈다.
“뭐, 전하께서 워낙 훌륭하시니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따지면 저도 별 대단한 도움은 못 되는 것을요.”
이부상서의 위로에도 옥환은 의기소침한 얼굴로 침묵했다. 물론 그의 의견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옥환은 등용이 되고 나서 더더욱, 승헌이 생각보다 꽤 괜찮은 군왕이라는 것을 여러 번 깨닫는 중이었다. 그는 머리가 좋았고, 이해도 빨랐으며, 무엇보다 사람을 쓰는 법을 잘 알았다. 승헌이 발탁한 서국의 인재들은 다 자신에게 맞는 자리에 앉아 있었기에 국정이 안정적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또한 그는 백성들의 실질적인 어려움을 이해하면서도, 동정에 치우쳐 감정적인 결론을 내리지 않는 이성 또한 갖고 있었다.
‘그러니 이대로는 안 된다. 어떻게든 수를 써야 해.’
승헌이 훌륭한 왕이라면 더더욱 자신이 조정에서 밀려나선 안 될 일이었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였다. 어떻게 들어온 조정인데 이토록 쉽게 물러날 수는 없었다. 옥환은 각오를 단단히 다졌다.
“너무 조바심 내지 마십시오. 아무튼 저희들의 주군 아니십니까. 전하는 인재를 아끼시는 분입니다.”
문하시중 조신의 말에 옥환이 조금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가, 이내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자신의 주군은 언제까지나 “염완” 단 한 사람일 것이라고. 그리고 그렇기에, 무슨 짓을 해서든 이 적지에서 살아남아야만 한다고.
그렇게 신료들과 헤어진 뒤 착잡한 기분으로 처소에 돌아온 옥환은 벽국의 조세 건에 대해 묻기 위해 곧바로 계평을 찾았다. 한데 평소와 달리 모습이 보이지 않던 그는 옥환이 찾은 지 조금 뒤에서야 겨우 모습을 드러냈다. 옥환은 그에게 어딜 갔었냐고 물었다.
“그, 변소에 잠시 다녀왔습니다. 찾으셨다고요?”
“그래. 내 너에게 확인할 것이 있다.”
옥환은 태연하게 대꾸했으나 사실 계평의 말을 믿지 않았다. 최근 들어 그는 갑작스레 모습을 감추거나 어색한 태도를 보이는 경우가 잦았다. 조정의 일로 온 정신이 쏠려있던 옥환은 그것을 크게 걸고넘어지지는 않았으나 확실히 계평에겐 의심할 만한 무언가 있었다.
자신을 향한 승헌의 감시가 견고해진 만큼 그의 움직임 또한 주의를 시킬 필요가 있었으나, 옥환은 계평을 잠시 두고 보기로 했다. 물론 자칫하면 자신의 신변까지 위험해질 수 있다는 걸 옥환도 알았다. 하나 제 처지가 자유롭지 못한 이상, 지금 상황에서 이용할 수 있는 자는 계평 하나였으니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확인할 것이란 게 무엇이십니까?”
“벽국에서 서찰이 온 것이 있느냐?”
“……있다면 진즉 보여드렸겠지요.”
뻔한 거짓말이었다. 만일 염요가 조세를 낮췄다면 그것이 서국에까지 퍼지기 전에 옥환의 귀에 먼저 전해졌어야 정상이었다. 계평은 의도적으로 옥환에게서 벽국의 소식을 감추고 있었다. 옥환은 벌컥 화를 냈다.
“내 오늘 조정에서 무슨 말을 들었는 줄 아느냐?! 벽국에서 조세를 낮추었다더구나! 나는 그것을 이제야 알았다!”
“…….”
옥환은 차디찬 눈빛으로, 하나 이제부턴 바깥에 들리면 안 되는 말이기에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너는 필시 알고 있었겠지. 아마 전하에게서 서찰이 왔었을 것이야. 언제까지 감출 셈이었더냐?”
계평의 표정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그도 언젠가는 들키고 말 것이란 걸 예측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무의미한 짓을 감행한 것은 옥환을 향한 경고의 뜻이었을 터다. 그걸 알기에 옥환은 더더욱 분노를 표출하며 자신의 무고함을 피력했다.
결국 옥환이 정녕 너를 벽국으로 돌려보내야 입을 열 것이냐며 으름장을 놓자 그제야 계평이 말을 꺼냈다.
“……전하께선 승상께 말씀 올리라 명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면 전하께서 내게 아무 말 말라 명하셨더냐? 그렇지는 않을 테지?”
“……그것은…….”
계평이 말꼬리를 흐리자 옥환이 탁자를 쾅 내리쳤다. 옥환은 태사가 된 이후로 내내 예민해져 있던 차였다. 계평은 아무래도 일이 쉬이 풀리진 않을 것임을 직감했다.
“나는 지금 서국 왕의 감시를 받으며 조정에서도 권한 하나 없는 태사 자리에 머물러 있다. 한데도 너는 그리 내가 의심이 가더냐?”
“……어쩔 수 없습니다. 몸의 정은 무서운 법이니까.”
옥환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승헌과 몸을 섞은 지도 꽤 시일이 지났으나, 말을 해도 설득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아니, 염요는 계평이 이런 인물임을 알기에 자신에게 보냈을 터였다. 염요 또한 자신을 믿지 못했으니까. 옥환도 진작에 알고 있던 바였다.
“나가라. 당분간 내 눈앞에 띄지 마.”
옥환은 매섭게 쏘아붙이고는 계평을 돌려보냈다. 일부러 계평을 자유롭게 해준 것이었다. 승헌의 감시가 있다고는 하나 옥환에게 하는 것보다는 허술할 것이고, 무엇보다 계평도 엄연히 왕의 호위였던 자였다. 승헌의 감시를 피해 몇 가지 행동을 하는 것쯤은 그에게 어렵지 않을 터였다. 실제로 계평은 벽국에서 온 서찰도 계속 받고 있었으니 말이다.
필시 계평에게는 무언가가 있었다. 옥환은 그를 풀어주고서 그게 무엇인지 알아볼 요량이었다. 그리고 그게 자신에게 도움이 된다면 마음껏 이용할 생각이었고.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을 것이다.’
옥환은 옷깃을 굳게 쥔 채 그 말만을 입속으로 되뇌었다.
창밖의 붉게 물든 잎사귀가 바람에 정신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
옥환이 계평에게 화를 내고 그를 찾지 않게 된 후로 그의 행적은 날로 더 수상해졌다. 신경 쓰지 않는 척하며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예의 주시하고 있던 옥환은 어느 날, 자는 척을 하고 있다가 인기척이 들리자 슬그머니 눈을 떴다. 인기척은 옥환의 침소 바깥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옥환이 재빨리 바깥의 동태를 살피니 계평이 조심스럽게 처소를 나서는 모습이 보였다. 오늘은 그믐날 밤. 달빛이 없어 무언가를 은밀히 하기에는 제격인 때였다. 옥환은 다급히 처소를 나와 조금 거리를 둔 채 계평의 뒤를 따랐다.
얼마쯤 걸어가던 계평이 이윽고 한 전각 앞에 멈춰서 안으로 들어갔다. 바깥에서는 미행을 들키지 않기 위해 멀리 떨어져 걸어야만 했기에 옥환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옥환은 전각에 아주 작게 나 있는 창 밑에 웅크렸다. 창은 닫혀 있었으나 드문드문 들려오는 말소리를 분간할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사흘 후에…… 그들에게…… 당신이 담당…….”
‘사흘 후? 사흘 후에 뭐가 있지?’
옥환은 빠르게 머리를 굴려 정보를 찾아냈다. 사흘 후라면 분명 승헌의 탄신일을 축하하는 연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왕의 생일인 만큼 규모가 큰 연회일 것이고, 그 정신없는 틈을 타 흉계를 부리기도 최적일 터였다.
그렇게 옥환이 추측을 이어가던 때, 갑자기 안쪽에서 큰소리가 났다.
“나, 나는 못 하겠소이다!”
그러자 쾅, 하는 둔탁한 마찰음이 들리고 이어서 계평이 무어라 말하는 듯 분명하지 않은 소리가 들려 왔다. 정확한 내용을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분위기상 협박 비슷한 것 같았다. 상대가 누군지 몰라도, 계평에게 약점을 잡힌 모양이었다.
어차피 이 이상 여기 머물러 봤자 들킬 위험만 커질 것이기에 옥환은 곧 그곳을 벗어나 조용히 처소로 돌아왔다. 다행히 자신의 부재를 눈치챈 이는 없는 듯했다. 그는 그대로 자리에 누웠으나, 결코 잠들지는 않았다. 그의 머리는 떠돌아다니는 온갖 추측을 모아 최선의 해답을 끌어내고 있었다. 정보는 한정되어 있었으나 계평은 그리 영리한 이가 아니었으니 그가 꾸민 계획의 대략적인 윤곽을 그려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누군지는 몰라도 이 왕궁 안 누군가의 약점을 잡은 계평은 그것을 빌미로 상대에게 승헌을 해할 것을 강요하고 있다. 물론 벽국에 도움을 줄 방법은 승헌을 해하는 것 외에도 많았다. 군사 기밀을 빼낸다거나, 옥환의 경우처럼 승헌과 신하들 사이를 이간질한다거나.
하나 옥환은 계평에 대해 잘 알았다. 그는 아직 어렸고, 벽국이라는 나라보다는 염요라는 사람을 섬기는 자였다. 염요는 자신과 비슷한 위치에 있으면서도 영웅이라 평가받는 승헌을 질시하고 두려워했다. 그것을 아는 계평은 분명 염요를 위해서는 승헌을 없애는 것이 최선이라 여기고 행동했을 것이다. 승헌을 칼이나 휘두르는 망나니라며 폄하한 것도 그렇고, 불가피한 일임에도 자신이 승헌과 가까워지는 것을 몹시도 경계하던 것을 생각해보면 승헌을 향한 계평의 감정을 짐작하기는 충분했다.
게다가 계획의 실행일이 승헌의 탄신일 연회인 것도 그 가설에 설득력을 보탰다. 기밀을 빼내거나 하는 은밀한 종류의 계획이라면 도리어 왕궁 안에 외부인이 많아지는 연회일을 노릴 리가 없다. 연회가 열리면 승헌은 경비가 삼엄한 본궁에서 나와 많은 자와 접촉하게 될 것이다. 그를 해하기에는 그야말로 최적의 때였다.
승헌을 죽이기 위한 구체적인 내용을 파악할 만한 단서는 없었으나, 그럼에도 추측하는 정도는 가능했다. 계평의 발언에 주목해보자면 그는 사흘 후 “그들에게”, 그리고 “당신이 담당”이라는 말을 했다.
당신이 담당이라는 말은 공범이 이번 계획과 밀접한 어떤 업무를 담당하고 있거나 하게 될 것이란 뜻일 터. 공범은 아직까지 계획을 실행하는 것에 대해 불안감을 느끼고 있으니, 승헌을 공격하는 등의 중요한 일은 계평도 맡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공범은 간접적으로 도움을 주는 조력자의 역할이다. 그러나 계평은 할 수 없는, 내부자만이 가능한 도움을.
그리고 그들은…….
‘“그들”은 누구일까. 복수로 지칭한 것을 보면 최소 두 명 이상이라는 것일 텐데.’
잠시 생각하던 옥환은 가장 유력한 가능성을 떠올렸다. 말했다시피 연회에는 많은 사람들이 온다. 조정 관리들, 귀족들……. 하나 그들은 하나같이 신분이 높은 자들이다. 그중에 벽국의 첩자가 섞여 있다고 보기도 어렵거니와, 혹 섞여 있다 해도 지금껏 잠잠히 있던 그자들이 고작 계평의 지시로 뜬금없이 승헌을 공격할 리는 없다.
‘하나 연회를 위한 악공이나 무희라면 다르지. 아니, 어쩌면 악공과 무희들 사이에 하나씩 끼어 있을 수도 있어. 그들이라면 견승헌을 공격하기도 쉽고, 연회 날을 실행일로 잡은 것도 납득이 가.’
이윽고 옥환은 자신이 내놓은 해답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사흘 후 연회에서 악공이나 무희 등의, 신분에 대한 보증이 비교적 불확실하면서도 연회를 빌미로 궁 안에 잠입할 수 있는 자들이 승헌의 목숨을 노릴 것이다. 또한 그들에겐 내부의 협력자도 있다…….
국왕인 승헌의 목숨을 노리는 것은 그야말로 무모한 짓이었다. 만일 다른 상황이었다면 옥환은 필시 계평을 말렸을 것이었다. 하나 옥환은 이 무모한 계획을 이용할 생각이었다. 적극적으로 승헌을 보호해 그의 신뢰를 얻어 내기로 한 것이다.
아무리 승헌이라도 자신을 목숨 바쳐 지켜 준 상대를 의심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니, 의심하더라도 대놓고 드러내지는 못할 것이다. 최소한 노골적으로 배척당하고 있는 지금보다는 상황이 나아지리라.
물론 그러다 옥환 본인의 목숨이 위험해질 가능성 또한 있었으나, 어차피 이대로는 길이 없었다. 목숨을 걸지 않고서 어찌 나라 하나를 무너뜨릴 각오를 하겠는가.
이것은 확률 반반의 도박이었다. 만일 승헌을 지키지 못하고 계획의 주모자가 계평이란 것까지 밝혀지면 그때야말로 모든 것이 끝이 난다. 하나 옥환은 자신을 믿기로 했다. 처음부터 신변의 안전을 도모하려 했다면 서국까지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옥환은 자신의 마음을 다독이며 그날 밤을 뜬눈으로 지새웠다.
그 후 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새 연회 당일이 되었다. 옥환은 미리 연회장에 나와 동분서주하는 궁인들이나 인부들을 유심히 살폈으나 특별히 낌새가 이상한 이는 보이지 않았다.
이윽고 초대받은 하객들이 자리를 빠짐없이 채우고, 옥환 역시 주변을 탐색하는 것을 관두고는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그때 마침 승헌이 모습을 드러냈다.
승헌의 등장에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서 부복한 채 하례를 올렸다. 승헌은 흡족한 미소를 짓고는 입을 열었다.
“과인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여준 모든 분께 감사하오. 과인 때문에 마련된 자리이기는 하나 과인만을 위한 자리는 아니니 다들 어려워 말고 즐기다 가시길 바라겠소.”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하객들이 다시 자리에 앉았고, 그 뒤로는 승헌에게 선물과 축하 인사를 전하는 자리가 이어졌다. 국경 너머의 소국에서 찾아온 사신들도 있었고, 서국의 지배가 닿지 않는 먼 지방에서 올라온 호족들도 승헌에게 호화스러운 선물을 건넸다. 귀족들 중에는 자신의 딸을 데려와 승헌에게 일부러 내보이고는 왕후의 자리를 노리는 경우도 있었다. 심지어는 아예 딸을 바치려 한 자도 있었으나 승헌은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과인에게는 이미 귀애하는 정인이 있거늘 어찌 그이의 마음을 아프게 하겠소?”
순간 승헌의 주위에 앉아 있던 신하들의 눈빛이 일제히 옥환을 향했고, 옥환은 못 들은 척 찻잔을 입에 가져갔다. 하나 차의 맛은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게 한동안 선물 공세가 이어지자 그것이 귀찮아진 승헌은 연회에 왔는데 남 선물 받는 모습이나 보고 있으면 안 된다며 여전히 줄을 서 있는 사람들을 자리로 돌려보냈다. 그러고는 승헌이 손짓하자 악공들이 흥겨운 선율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대기하고 있던 무희들이 일사불란하게 쏟아져 나와 아름다운 춤선을 뽐냈다.
하객들이 선물을 바치는 중에도 내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옥환은 가장 의심스럽게 여기던 악공과 무희들이 나오자 잔뜩 긴장한 채 그들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내내 이어지는 옥환의 미심쩍은 행동에 옆에 앉아 있던 문하시중이 의아함을 느끼고는 물었다.
“태사. 아까부터 뭔가 신경 쓰이는 것이라도 있으십니까?”
갑작스러운 물음에 옥환이 말문이 막혀 머뭇거리자 중서령이 웃으며 농담을 건넸다.
“혹 무희들이 신경 쓰이시는 겁니까? 걱정 놓으십시오. 아까 전하께서 말씀하시는 걸 듣지 않으셨습니까. 태사께서 계신데 어찌 다른 이에게 눈길이 가려고요.”
“예? 아니, 저는…….”
“중서령. 어찌 태사께 망측한 말씀을 하고 그러십니까.”
문하시중이 예의상 중서령을 제지하기는 했으나 그 역시 짓궂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옥환은 민망함에 시선을 떨어트리면서도, 생각해보니 무희라면 승헌을 미모로 꾀어내어 그를 몰래 죽이려 들 수도 있겠다 싶어 다시 무희를 자세히 살폈다. 그 모습에 중서령과 문하시중이 저들끼리 시시덕거리며 옥환을 놀려댔으나 옥환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승헌의 곁에는 호진을 비롯한 그의 최측근 장수들이 앉아 있었기에 어느 누구라도 승헌에게 접근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니 살수는 필시 주변의 방어가 허술해지는 때를 노릴 것이다. 아마도 적당히 분위기가 무르익어 그들이 술에 취했을 때쯤…….
그리고 옥환의 예상대로 머잖아 대다수의 장수가 얼큰하게 취해 자리를 뜨거나 풀어진 자세로 경계를 늦추었다. 유일하게 멀쩡한 정신으로 승헌의 곁을 지키던 호진 역시 변소를 가기 위해선지 잠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그때, 가운데서 춤을 추던 무희 하나가 움직임을 멈추는 것이 보였다.
‘지금이다……!’
옥환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승헌에게 가려 했으나 누군가가 그를 붙잡았다. 다름 아닌 계평이었다. 옥환이 당황해서 무희와 승헌 쪽으로 다급한 시선을 향했다. 하나 유감스럽게도 정신 사나운 연회의 분위기 탓에 아무도 무희의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이윽고 무희가 품속에서 빛나는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단도였다. 옥환은 계평의 손을 힘껏 쳐내고는 승헌에게 달려갔다.
“전하!”
옥환의 커다란 고함에 일순 모든 이의 주의가 그곳으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그들 역시 무희가 던진 단도가 승헌에게 일직선으로 날아가는 모습을 목격했다.
‘안 돼……! 여기서 견승헌이 죽어서는 안 된다……!’
옥환의 절박한 심정에도 불구하고 단도는 그대로 승헌을 향했다. 눈앞이 캄캄해지는 듯한 감각과 함께 옥환이 끝을 예감한 순간.
“……!”
‘푹’하는 소리와 함께 단도가 꽂혔다. 하나 그것은 승헌의 가슴이 아닌, 그가 앉아 있던 의자 등받이에 꽂혀 있었다. 찰나의 정적 끝에, 옥환은 비로소 승헌이 단도를 피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야말로 경이로운 반응 속도였다.
이어 무희가 무언가 더 행동을 해보기도 전에 마침 자리로 돌아오던 호진이 달려들어 그녀를 제압했다. 무희는 호진의 무지막지한 힘에 눌려 새된 비명을 질렀다.
끝이었다. 결국 자신은 천운과도 같은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옥환은 망연자실해서 돌아섰다.
……아니, 이것이 정말 끝일까? 살수는 하나가 아닐지도 모른다. 계평은 분명 “그들”이라고 했었다.
옥환이 무언가를 깨닫고는 계평의 표정을 살핀 뒤 황급히 돌아섰다. 연회장 안의 모든 시선은 붙잡힌 무희에게 쏠려 있었다. 하나 옥환은 그 주변, 특히 승헌의 근방을 샅샅이 살폈다.
그리고 옥환의 시선이 악공들에게 다다른 순간, 마침 악공 하나가 금琴 안에서 단도를 꺼내는 모습이 보였다. 악공이 준비한 단도는 적어도 대여섯 개는 되어 보였다. 이번에야말로 확실히 승헌을 죽일 셈이었다.
저렇게 많은 칼에 맞는다면 자신이야말로 죽을지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옥환은 어느새 악공과 승헌의 사이로 뛰어들고 있었다.
“전하!”
그 순간이 옥환은 한없이 더디게 느껴졌다. 승헌을 구하기 위해 달려가는 자신도, 단도를 던지는 악공의 몸짓도, 차디찬 바람과 청명한 하늘도, 모든 것이 다 멈춘 듯이 느껴졌다. 오직 심장 고동만이 귓전을 거세게 때리고 있었다.
하나 단말마는 그야말로 찰나였다. 옥환이 승헌의 앞에 다다르는 것과 동시에 허공을 가른 수많은 칼날이 옥환의 등을 노리고 날아왔다. 그리고.
“헉……!”
옥환은 짧은 숨을 뱉었다. 칼이 꽂히는 소리 따위는 나지 않았으나, 살 속에 무언가 깊이 박힌 느낌에 등골에서부터 소름이 쫙 끼쳤다. 중심을 잃은 몸이 맥없이 무너져 내렸다.
갑자기 달려든 옥환 때문에 놀랐던 승헌은 쓰러지는 옥환의 몸을 떠안았다. 그의 표정에는 아연함이 깃들어 있었다.
승헌의 품에서 옥환은 팔을 뻗어 승헌의 옷깃을 힘껏 쥐었다. 고통보다는 칼에 맞았다는 충격이 더 컸다. 고통은 그다음에서야 서서히 찾아왔다. 숨이 가쁘고 등이 몹시도 뜨거웠다. 여러 군데를 맞았는지 한 군데를 맞았는지 알 수 없는 불분명한 감각이었다. 시야가 빠르게 흐려지고 있었다.
승헌은 옥환을 안은 채 악공을 잡으라고 소리쳤다. 백고가 노기 띤 얼굴로 뛰쳐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옥환, 설옥환, 정신 차려! 왜 그대가…… 왜…….”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호흡이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등은 뜨거운데도 손발은 몹시 시렸다. 옥환은 승헌을 올려다보았다. 바로 코앞에 있을 그의 얼굴조차 더는 뚜렷하지 않았다. 옥환은 입술을 달달 떨며 승헌을 불렀다.
“전…… 하…….”
“옥환, 나를 봐. 괜찮아. 걱정하지 마.”
주변의 잡음이 서서히 멀어져 갔다. 승헌의 목소리 또한 아득히 들려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절대, 절대…….”
그대를 죽게 하지 않아.
그 말을 끝으로 옥환은 결국 정신을 잃었다.
***
그날로 쓰러진 옥환은 의식을 되찾지 못하고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매일같이 옥환의 처소에 찾아와 거의 온종일 그의 곁을 지키던 승헌은 정사를 돌보셔야 한다는 문하시중과 호진의 충고에 한숨을 내쉬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내 처소에서 돌볼 것을 그랬지.”
“전하, 어찌…….”
“어차피 매일 이곳에 올 거면 그 편이 낫지 않나.”
그렇게 말한 승헌은 끙끙거리던 옥환이 눈을 뜨자 얼른 그의 손을 붙잡고 물었다.
“괜찮아, 옥환? 정신이 좀 들어?”
옥환은 열에 들떠 승헌의 손을 꼭 쥔 채 애처로운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주군. 주군…….”
‘주군’이라는 말에 순간 승헌이 표정을 굳혔다. 그것은 호진도 마찬가지였다. 옥환이 말하는 ‘주군’이 누구를 뜻하는지 둘 다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그저 영문을 모르는 문하시중만이 딱하다는 듯 옥환을 바라보았다.
“전하.”
“두 사람은 그만 물러가.”
호진이 무어라 입을 열려 했으나 승헌이 단호하게 호진과 문하시중을 내쫓았다. 곧바로 일어선 문하시중에 반해 호진은 포기하지 않고 다시금 심각한 얼굴로 승헌을 바라보았다.
“그만 물러가라고 했을 텐데.”
“하오나 전하.”
“아우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알아. 하나 지금은 때가 아니야. 일단은 죽어 가는 사람부터 살려야 하지 않겠나. 뭐가 어찌 되었든 나를 구한 건 설옥환, 이자니까.”
승헌의 고집에 호진은 하는 수 없다는 듯 물러나면서도 내내 옥환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그렇게 두 사람이 떠나고 나자 여전히 오한에 떨고 있는 옥환에게 승헌이 나직이 말을 걸었다.
“그대는 단 한 번도 나를 주군이라 부른 적이 없지.”
“…….”
“잠시 잊고 있었어. 그대가 누군지.”
승헌은 긴 한숨을 내쉬면서도 옥환의 이마를 부드럽게 쓸어 주었다. 뜨겁게 달아오른 뺨에 손을 대어 주자 그 냉기가 마음에 들었는지 옥환은 자꾸만 승헌의 손에 뺨을 부볐다.
“나는 염완이 아니야, 옥환. 나중에 그대가 이 일을 후회해도 나는 책임지지 않을 거야.”
말만 그렇게 할 뿐, 승헌은 옥환이 자신의 손을 붙잡고 있게 내버려 두었다. 손이 미지근해지면 찬 수건에 손을 적셔 다시 차게 하고, 또 차게 하고, 그러면서 옥환의 열을 내려 주었다.
옥환이 자신 대신 칼을 맞은 것은 승헌으로서도 전혀 예기치 못한 일이었다. 모든 것은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 견고한 계획에 뜬금없이 옥환이 커다란 구멍을 내고 말았다. 옥환이 자신과 살수 사이에 끼어들었을 때, 승헌은 옥환을 보호하거나 그 자리를 피하는 일조차 할 수 없었다. 그저 멀거니 서서, 왜 옥환이 이리로 달려오고 있는지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 견승헌마저 당황하게 만든, 그야말로 돌발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대가 그리한 것은 그대의 주군을 위해서일까, 아니면 나를 위해서일까.’
이제부터 그것을 알아보아야 하겠지만, 옥환이 살아나지 못한다면 어차피 의미 없는 헛일일 뿐이었다.
태의는 옥환이 소생하지 못할 수도 있다고 했다. 확률은 반반. 모든 것은 옥환에게 달려 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었다. 물론 승헌은 그렇게 말한 태의를 내쳐 버리고 새 태의에게 반드시 옥환을 살리라고 명했으나, 승헌 역시 삶과 죽음의 경계는 본인이 넘는 것이란 걸 알고 있었다. 수없이 많은 전장에 나가며 몇 번이고 죽을 뻔했던 그였다. 강철보다 더 단단한 의지가 아니면, 인간은 쉽게 죽음의 구렁텅이에 빠지고 만다.
그리고 옥환은 깨어나지 못했다. 오늘로 사흘째. 그의 체력도 이미 한계일 터였다.
“옥환. 혹 그대는…… 다 포기하고 싶어졌나?”
승헌의 무거운 질문에 옥환은 가쁜 숨만 내쉴 뿐 대답하지 못했다. 하나 승헌은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만일 그렇다면 그리된 까닭에는 자신 또한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이이에겐 참으로 못되게 굴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으나, 이유야 어찌 되었든 못되게 굴었다.
“하나 또다시 고달픈 일들을 겪어야 한다 해도, 나는 그대가 살았으면 해. 나는 또 그대에게 못되게 굴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살았으면.”
승헌은 더 이상 자신의 손에 매달리지 않는 옥환의 뺨을 어루만지며 들릴 듯 말 듯 덧붙였다.
“그대의 주군을 만나러 가지 마.”
그 말을 끝으로 잠시 침묵하던 승헌은 “정말로 못된 지아비로군.” 하고 쓰게 중얼거렸다.
아무튼 오늘 밤이 고비다. 오늘 밤이 지나면 옥환은 다시 제게 첩자 취급을 받으며 살거나, 제 주군을 만나러 가거나 할 것이다. 그렇다면 승헌은 적어도 오늘 밤만큼은, 끝까지 옥환을 지켜보리라고 결심했다.
***
옥환은 생각했다. 창은 닫혀 있었으나 어쩌면 눈이 내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깨어나셨습니까.”
바로 곁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비로소 옥환이 창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계평이 있었다. 그는 눈에 띄게 안도한 얼굴로 태의를 불러오겠다며 일어서서 나갔다.
‘어찌 되었더라.’
옥환이 가만히 기억을 더듬으며 상황이 이렇게 된 경위를 파악하는 동안 계평이 태의와 함께 돌아왔다. 약을 달이고 있었는지 태의에게서는 쓴 약 냄새가 났다. 그는 가만히 옥환의 맥을 짚어보고 상처를 살피기도 하더니 한시름 놓아도 되겠다며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생전 처음 보는 이였으나 그가 자신의 병환으로 마음고생, 몸 고생을 했다는 것만큼은 바로 알 수 있었다.
“고맙습니다. 태의 덕에 이 질긴 목숨을 부지했습니다.”
“…….”
태의는 어색한 미소를 짓고는 약을 가져오겠다며 자리를 떴다. 명백히 자신을 피하는 듯한 반응에 옥환이 의문을 느끼자 계평이 대신 대꾸했다.
“승상께서 쓰러져 계신 동안 서국 왕이 멀쩡한 태의 하나를 내쫓고 새로 들인 자입니다. 저자도 매일같이 닦달을 들었으니, 승상이 마냥 편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서국 왕이 태의를 내쫓아?”
“바른 말을 했다고 쫓겨났으니 누군들 눈치를 보지 않겠습니까.”
계평의 설명을 들었음에도 머릿속은 점점 더 오리무중이었다. 하나 승헌의 동태를 파악할 필요가 있었기에 옥환은 자신이 누워 있는 동안 그가 어땠는지 물었다. 그러자 계평은 노골적인 불쾌감을 드러내며 말했다.
“사흘 동안 거의 여기서 살다시피 했습니다. 다른 이들은 모두 내쫓고 말입니다. 그 덕에 저는 승상께서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
“새벽에 승상의 상태가 안정이 되고 나서야 돌아갔습니다. 조정에도 거의 나가지 않아서 중신들이 찾아오고 했습니다.”
옥환은 아무 말 없이 계평의 보고를 들었다. 계획대로, 된 것일까. 하나 만족감도, 다행스러움도 느껴지지 않았다. 침묵하는 옥환에게 계평이 싸늘하게 물었다.
“이래도 정녕 승상과 그자의 관계가 아무것도 아니라 하실 것입니까?”
“…….”
“목숨을 바쳐서 그자를 지키셨으면서? 승상께서는 본래의 목적을 기억하고는 계십니까?”
“……일부러 그의 신용을 얻기 위해 저지른 일이다. 애초에 이 일을 꾸민 건 네가 아니더냐?”
비로소 입을 연 옥환이 갑작스레 핵심을 찌르자 계평이 움찔했다. 그 역시 그날 옥환의 행동을 미루어 볼 때, 옥환이 제 계획을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아무렴 금야 선생이 아닌가. 그 명성은 어디 가지 않았다. 하나 그래서 더 반발심이 들었다. 옥환이 도와주었더라면 견승헌을 죽일 수 있었을지도 모르건만.
“뭐라고 할 생각 마십시오. 결국 승상도 제 계획을 이용하신 것 아닙니까.”
“건방지구나. 자칫하면 너뿐만 아니라 나까지 죽을 뻔했다는 것을 아느냐? 두 번 다시, 이따위 짓은 생각도 말아라. 여차할 땐 너를 버릴 수도 있으니까.”
옥환의 위협에 자존심이 상했는지, 계평은 벌떡 일어서서는 씩씩대며 밖으로 나가 버렸다. 혼자가 된 옥환은 몸을 일으켜 보려다 격심한 고통에 다시 이불 위로 쓰러졌다. 사경을 헤매며 시간을 낭비한 데다가 거동조차 불편하게 되었으니, 승헌의 신용을 얻지 못했다면 그야말로 손해 보는 장사였을 것이다. 옥환은 자신의 대담함에 쓴웃음을 지었다.
‘건방진 건 나일지도 모르지. 운이 좋아 목숨을 구한 주제에.’
멀거니 천장만 바라보던 옥환은 처소의 문이 열리는 소리에 태의가 약을 갖고 돌아왔나 보다 싶었다. 하나 그의 옆에 내려앉은 것은 약 냄새 나는 태의가 아니라 웬 잘생긴 사내였다.
“약이 싫어서 그런 죽을상을 하고 있나? 하나 그대가 아무리 보채도 이 약은 대신 먹어 주지 않을 거야.”
실없는 농담을 건네는 승헌의 모습이 참으로 그다워서, 이제야 좀 살았다는 실감이 나서, 옥환은 깨어난 뒤 처음으로 미소를 지었다. 옥환의 웃는 얼굴에 승헌은 의외라는 표정을 짓고는 옥환의 몸을 일으켜 주었다. 행여 상처가 아플까 싶었는지 꽤나 조심스러운 태도였다.
“남기지 말고 마시도록 해.”
이윽고 승헌이 가져온 약 사발을 내밀자 옥환은 순순히 그것을 받아들고 쭉 들이켰다. 약은 아무리 좋게 말해도 결코 먹을 만한 맛은 아니었으나, 이제는 몸을 회복시키는 것이 최우선이었으니 참아야 했다. 승헌은 함께 가져온 꿀을 크게 떠 냉큼 옥환의 입안에 넣어 주었다. 옥환은 그제야 쓴맛이 좀 가셨는지 겨우 미간의 주름을 폈다.
다행히 승헌은 예전과 같이 자신을 대하고 있었다. 그간 처소에도 발걸음하지 않고, 정사에 대해 논할 때 말고는 말도 붙이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면 아무래도 계획이 효과를 본 듯했다.
또다시 승헌을 속였다는 생각에 마음이 결코 편하지 않은데도, 그의 살가운 모습을 보고 있자니 왠지 모를 안도감이 들었다. 옥환은 그런 자신을 질책하고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전하.”
승헌은 그런 옥환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래.” 하고 짧게 답했다.
“잘못한 걸 안다니 됐어. 하면 다시는 그런 무모한 짓을 저지르지는 않겠지.”
옥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승헌의 신용도 얻었으니 그로서도 이 이상 죽을 고비를 넘는 건 사양이었다. 그런 옥환을 심중을 알 수 없는 눈으로 한참 응시하던 승헌이 이내 가 봐야겠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앉아서 배웅하는 것을 용서하십시오.”
“용서 안 하면 어쩌겠나. 하늘이 도왔는지 살수가 던진 대부분의 단도는 피했지만, 그래도 두 군데나 칼침을 맞았어. 당분간은 조정에도 나오지 말고 회복에 힘쓰도록 해.”
“……예.”
“나도 바빠서 그대를 자주 찾지 못할 테니 필요한 게 있으면 하인이나 태의에게 말하고.”
금세 돌아서는 승헌의 등을 말없이 바라보던 옥환은 그가 문턱을 나서기 전, 저도 모르게 그를 불러세웠다.
“전하.”
승헌은 몸을 돌려 옥환을 보았다. 옥환은 자신의 갑작스런 행동에 당황해선 무슨 말을 꺼낼지 모르고 우물쭈물하다가 겨우 이렇게 물었다.
“그…… 바깥에…… 눈이 내립니까?”
“그래.”
승헌의 눈빛에 공연히 민망해진 옥환은 얼른 둘러댔다.
“그냥 그런 기분이 들어서, 여쭤봤습니다.”
그러자 승헌이 피식 웃으며 옥환에게로 다시 걸어왔다.
“그냥 그런 기분이 뭐야.”
옥환은 말꼬리 좀 잡고 늘어지지 말라는 말을 눈빛으로 전했으나 승헌은 모르는 척하고는 창을 연 뒤 옥환에게 담요를 둘러 주었다.
“찬 기운을 오래 쐬면 좋지 않으니 적당히 지나면 하인에게 다시 닫으라고 해놓지.”
“…….”
민망함에 침묵하는 옥환을 바라보던 승헌이 지나가듯 툭 내뱉었다.
“그댄 사람을 참 헷갈리게 하는군.”
옥환은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물으려 했으나 승헌은 이번에야말로 주저 없이 밖으로 나가 버렸다. 죽을 뻔해서 그런지, 어쩐지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그래서 그런 것이다. 그래서 그런 것이지 그 사내가 가는 것이 싫었던 게 아니다.
자신에게 변명하듯 그렇게 중얼거리며, 옥환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눈이 소복하게 쌓이고 있었다. 마치 가을이 끝났음을 암시하듯.
***
계절은 겨울의 한복판에 접어들었다. 계평은 그 뒤로 계속 골이 난 것 같긴 했으나 그래도 옥환의 간병에 최선을 다했고, 태의도 승헌이 무서워서인지는 몰라도 종일 옥환 곁에 붙어 흉터조차 남지 않도록 애를 썼다. 태의와 계평 덕에 옥환의 회복은 무척 순조로웠다. 이제는 거의 완치되었다고 볼 수 있을 정도였다.
옥환은 전처럼 서책을 읽거나 글자를 쓰며 하릴없이 시간을 보냈다. 처소에서 지내는 시간이 긴 탓인지 종소의 자리가 유독 크게 느껴졌으나, 옥환은 그 아이가 살아 있길 바라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종소는 지난번 민란 때 일을 계기로 옥환의 곁을 떠난 지 오래였다. 일전에 백고에게 보내던 서찰과 관련해 거짓말을 한 것에 대한 보복을 받은 것이었다. 큰 벌을 받았다고는 들었으나 그것이 어떤 것인지, 그 뒤로 어떻게 됐는지 옥환은 알 수도 없었고 승헌에게 물을 엄두는 더더욱 내지 못했다.
어쩌면 아이가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더 나아가 아이가 죽어도 자신은 알 길이 없다는 생각에 옥환은 마음이 무거웠다. 너무도 많은 이를 밟고 올라선 계획이었다. 옥환은 그럼에도 그것을 포기하지 않는 자신이, 제 편을 이용하고 제 목숨을 내놓기까지 하는 자신이, 마치 괴물처럼 여겨졌다.
‘여기서 책이나 읽고 있다고 해서, 전과 같은 건 아무것도 없구나.’
이제 더는 승헌과의 산책도, 종소에게 글을 가르쳐 주는 것도 기대할 수 없다. 옥환은 아주 새삼스럽게, 그때가 자신의 삶에서 세 번째로 평화로웠던 때였음을 깨달았다. 첫 번째는 가족과 함께 살던 유년기였고, 두 번째는 농사를 지으며 지내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이제 그런 평화는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라.
‘지금 이 고요조차도, 곧 끝이 나겠지.’
승헌은 옥환이 깨어난 날 이후로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다. 아예 무관심한 것은 아닌 듯 태의에게 매일 제 상태에 대한 보고를 듣는다고는 하나, 옥환은 어쩐지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승헌을 죽이려다 실패한 살수들이 어찌 되었는지는 계평조차 모른다고 했다. 계평은 그들이 자신과 어릴 때 함께 자란 동무이며 행여 잡혔더라도 죽으면 죽었지 자백은 하지 않을 충성스러운 자들이라고 장담했으나 옥환은 불안감을 떨치지 못했다.
애당초 이 계획은 염요가 먼저 계평에게 제안한 것이라고 했다. 정말로 우연찮게 환관 하나가 궁녀와 사통하는 것을 알게 된 계평이 그 내용을 염요에게 전달했고, 염요가 기뻐하며 그를 이용하면 승헌을 죽일 수 있겠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지시 아닌 지시에 계평이 구체적인 계획을 덧붙여 실행에 옮긴 것이라고 했다.
다만 염요는 이 일에 옥환의 협력을 얻길 바랐으나, 계평은 혼자서도 가능하다고 생각해 옥환에게서 그것을 감추었다고 털어놓았다. 물론 이 내용은 옥환이 미리 그럴 것이라 짐작하고 계평을 다그친 덕에 들은 사실이었다.
진실을 알게 된 옥환은 충격에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 소심한 염요가 무려 서국의 왕을 죽이려는 마음을 먹었다는 이야기가 통 믿기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좋은 의미의 놀라움은 아니었다. 옥환이 염요에게 바란 것은 나라 안을 잘 돌보는 것이었지 쓸데없이 적국을 건드려 전쟁의 단초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었기에.
자신이 아는 염요는 그런 대담한 짓을 꾸밀 이가 아니다. 하나 조세를 줄였다는 것도 그렇고, 최근 염요의 동향은 옥환이 아는 그와는 자꾸만 멀어지고 있었다. 무언가, 그의 심경에 변화가 생긴 것이 분명했다. 하나 계평은 자신을 의심하며 염요에 대한 정보를 일부러 차단하고 있었고, 자신 역시 여러 가지 상황으로 벽국의 동태를 파악하는 것이 어려웠다.
역시, 살아났다고 해서 모든 게 해결된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옥환은 상념을 몰아내고는 서책을 덮었다. 어느덧 약을 먹을 시간이었기 때문이었다. 예상대로 처소의 문이 열렸으나 약 사발을 든 자는 태의가 아니었다. 계평이나 승헌도 아니었다. 그는 백고였다.
“……백 장군. 어찌 또 오셨습니까.”
“거의 다 나으셨다는 얘기 들었습니다. 이제 조정에 나오셔도 되는지 확인도 하고, 또 드릴 말씀도 있어서 왔습니다.”
옥환이 상처를 회복하는 동안 백고는 옥환을 자주 찾아왔다. 승헌의 눈치도 보이고 해서 옥환은 그의 방문을 달갑지 않게 여겼으나, 백고는 바쁜 승헌 대신 옥환의 상태를 살피기 위해 오는 것이라며 옥환의 걱정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일단 약부터 드십시오.”
하는 수 없이 옥환이 사발을 받아 그것을 비우자 백고가 얼른 단 과자를 내밀었다. 하나 굳이 그릇에 둔 과자를 직접 집어 입에 넣은 옥환은 곧바로 본론을 물었다.
“해서, 하실 말씀이란 게 뭡니까?”
“아, 전에 여기서 일하던 어린 하인 말입니다. 그 아이와 관련된 얘기입니다.”
어린 하인이라는 말에 옥환이 고개를 번쩍 들고 소리쳤다.
“종소 말씀이십니까?!”
백고는 갑작스러운 옥환의 태도 변화에 당황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예에, 그 아이입니다. 태사께서 많이 아끼셨다지요?”
“……예. 하나 종소는…… 저 때문에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릅니다.”
“걱정 마십시오. 그 아이는 제가 거둬들여 지금은 제 밑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예?”
백고의 대답에 옥환은 눈을 크게 떴다. 백고의 입에서 종소의 이름이 나온 것도 놀라운데, 그가 종소를 데리고 있기까지 하다니 대체 무슨 일인가 싶었다. 그런 그에게 백고가 차분히 설명을 이어갔다.
“마구간에서 일하며 다른 궁인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제가 담당 관리에게 청하여 시동으로 삼았습니다. 앞으로는 제가 데리고 지낼 터이니 부디 마음 놓으십시오.”
다행스러운 사실에 옥환은 크게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옥환의 반응에 뿌듯함을 느낀 백고는 이렇게 덧붙였다.
“혹 기회가 되거든 언제 한번 궁으로 데리고 오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장군…….”
옥환은 진심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종소가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한데, 그 아이가 더는 힘든 일 없이 백고 밑에서 일할 수 있게 되다니 참으로 안심이 되었던 것이다. 옥환은 다시 한번 백고에게 제대로 된 인사를 전했다.
“백 장군. 장군의 은혜를 어찌 다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장군 덕에 조정에까지 들어왔는데…… 저는 항상 장군께 빚만 지는 기분입니다.”
“아닙니다, 태사. 그런 말씀 마십시오. 태사께서 서국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계신 것을 압니다. 게다가 목숨 바쳐 전하까지 구해 주셨으니, 저야말로 감사를 표해야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자 옥환은 오랜만에 밝게 웃었다. 백고는 그런 옥환의 미소에 홀리기라도 한 듯이 넋이 나간 눈으로 옥환을 빤히 응시했다. 그러자 옥환 역시 백고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백고는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옥환에게서 미묘하게 벗어난 곳에 시선을 두었으나, 옥환이 “백 장군.” 하고 부르는 순간 절로 눈이 가고 말았다.
옥환은 아름다웠다. 아름답다는 말이 하찮게 느껴질 만큼 아름다웠다. 그 아름다운 이는 자신의 주군인 승헌의 첩이었으나, 승헌은 옥환을 사랑해서 첩으로 삼은 것은 아닌 것 같았다. 백고는 그 사실이 못내 안타까웠다.
“아무쪼록 종소를…….”
종소를 잘 부탁한다고 말하려던 옥환은 갑자기 처소의 문이 난폭하게 열리는 소리에 말을 멈추고 소리가 난 곳을 돌아보았다. 백고 역시 화들짝 놀라 문 쪽을 쳐다보았고, 두 사람은 그곳에 선 인물을 보고는 더더욱 기함했다.
“전하……!”
벌떡 일어선 백고가 대경실색한 채 숨을 삼켰다. 옥환의 반응도 그와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그들이 그토록 놀란 것은 그저 승헌이 느닷없이 들이닥쳤기 때문이 아니었다. 마치 머리에서부터 피를 뒤집어쓴 듯한 승헌의 끔찍한 몰골 때문이었다. 심지어 그의 손에는 마찬가지로 피로 범벅이 된 칼이 들려 있기까지 했다.
그나마 뒤늦게 정신을 차린 옥환이 서둘러 손수건을 꺼내 승헌에게 가려 했으나, 승헌이 먼저 입을 열었다.
“백 장군. 그대는 돌아가는 게 좋겠군.”
“저, 전하. 하오나…….”
“돌아가지 않겠다면 나도 이번엔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야.”
승헌의 살기 어린 협박에도 백고는 옥환을 우려하는 것인지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하나 그런 백고에게 옥환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그의 등을 슬며시 밀어냈다.
“……전하. 태사께서는 전하를 위해 목숨까지 거신 분이옵니다. 부디…… 그것을 유념해 주시옵소서.”
백고는 머리를 숙이고는 내키지 않는 듯 굼뜬 걸음으로 처소를 나갔다. 백고가 사라지자 승헌은 옥환의 시선이 자신이 손에 든 칼에 머물러 있는 것을 깨닫고는 그것을 바닥에 대충 던져 버렸다. 그러더니 옥환이 있는 곳으로 성큼성큼 걸어와 옥환의 손에서 손수건을 낚아채 거칠게 얼굴을 닦으며 자리에 앉았다.
옥환 역시 다른 손수건을 찾아와서는 승헌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그의 옷을 닦아 주었다.
“백고는 내가 그대를 죽일 것 같았나 보더군. 그럴 만한 죄라도 지었나, 옥환?”
옥환은 승헌의 질문에 간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면서도 침착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나 백고와 함께 있는 모습을 목격한 승헌은 아무래도 기분이 좋지는 않을 터였다. 옥환은 그 부분을 헤아려 최대한 조심하고자 노력했다.
“목욕물을 준비하라 이를까요.”
“내가 거북한가?”
“아닙니다. 불편하실까 봐 여쭌 것입니다.”
눈을 내리깐 채 제 옆에 앉아 있는 옥환에게 피 묻은 손을 뻗었던 승헌은, 제 손을 보고는 손수건으로 한 번 더 닦은 뒤 옥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대가 물어야 할 건 그게 아니잖아.”
“……누군가, 죄를 지은 이가 있어 처결하신 것 아닙니까. 어련히 잘 알아서 하셨을 일을 와병 중인 제가 무엇하러 여쭈겠습니까.”
“그대를 다치게 한 놈들을 심문했어.”
승헌의 옷을 닦던 옥환의 손이 아주 짧은 순간 멈추었으나 그는 곧 아무렇지 않게 옷을 마저 닦았다. 하나 제 머리를 쓰다듬는 승헌의 손길이 이루 말할 수 없이 꺼림칙하게 느껴졌다.
“뭐, 어떻게 고신을 했는지는 말하지 않는 편이 낫겠지. 그들을 왜 지금까지 살려 두었는지는 아나?”
“……필시 또 다른 공범이 있다고 짐작하셨기 때문이겠지요. 그 공범을 찾아내기 위해서.”
“그래. 그대는 역시 똑똑해. 하면 그 공범을 알아냈는지, 못 알아냈는지도 아나?”
“…….”
“내가 왜 그놈들을 죽이자마자 그대의 처소를 찾았는지는 알아?”
옥환은 당혹함을 내색하지 않으려 애를 썼다. 지금 승헌의 분위기로는 전부 발각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았으나, 어쩌면 자신을 떠보려는 수작일 수도 있었다. 심증만 있고 물증이 없는 경우라면 가능성 있는 얘기였다.
물론 계평이 주모자인 것을 들켰을 가능성 또한 존재했다. 만일 그렇다면 의심에서 벗어나는 건 이미 무리다. 하나 그런 것이 아니라 그저 자신이나 자신과 관련된 인물이 공범일 수도 있다는 짐작 정도라면, 아직은 어떻게든 모면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옥환은 매우 신중하게, 단어 하나하나를 고르고 골라 대답을 내놓았다.
“……무언가…… 저를 의심하실 만한 정황이 나온 것입니까.”
하나 승헌은 그것에 대해 직접적인 대답을 하는 대신 또 다른 질문으로 되받아쳤다.
“그대는 나 대신 칼을 맞았지. 나는 그게 계속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그대가 그 상황에서 어떻게, 또 다른 살수가 있을 줄 알고 내 앞을 막아섰을까?”
“우연이라고 말씀드려도 믿지 않으려면 믿지 않으실 수 있겠지요. 제가 전하를 감싸 생사의 기로에 섰던 것도, 전하를 속이기 위해서라고 생각하시려면 얼마든지 그러실 수 있습니다.”
“하면 그대에게는 그것이 우연이고, 나를 속이기 위해서가 아니었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증명할 수단이 있나?”
“저는…….”
옥환이 말을 이으려 했으나 승헌은 그에게 여유를 주지 않고 계속해서 몰아붙였다.
“살수들이 벽국 출신인 것은 어찌 생각하지? 살수들의 입에서 누구의 이름이 나왔을 거라고 생각해?”
그 말을 들은 순간 옥환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무어라 대답을 해야 했으나 새하얘진 머릿속은 마땅한 말을 찾아내지 못했다.
‘이름이라니. 살수들이 자백을 했단 말인가? 하면 계평도, 나도 죽겠구나…….’
내내 가시방석에 앉은 듯 불안하던 예감이 결국 적중했다. 눈앞이 까마득해지는 기분이었다. 설마하니 살수들이 자백을 할 줄은 몰랐다. 그리 자신하더니 계평이 결국 일을 그르쳤는가. 적국의 왕을 죽일 계획을 세우면서 어찌 사람을 쓰는 데에 그리 부주의했을까. 계획에 실패했으면 어떻게든 살수를 죽였어야 옳았다. 그저 계평의 동무였다는 말에 그들을 믿고 방심했던 자신 또한 원망스러웠다.
할 말을 잃은 듯 침묵하던 옥환은 겨우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명백히 동요한 목소리였다.
“만일…… 만일 제가 꾸민 일이라면…… 죽으려 했을 리가 없습니다. 전하를 해할 기회도 제겐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굳이 그런 방법을 택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걸로는 안 돼. 그대가 이 일과 관련이 없다는 것을 증명해야 해. 그대는 내 의심을 뒤집을 수 있나?”
승헌이 주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옥환은 오랫동안 지금의 난관을 타개할 수를 찾았다. 하나 아무리 머릿속을 뒤져봐도 그런 수는 떠오르지 않았다. 옥환은 낙담한 채 고개를 저었다. 증명할 수 없었다. 이름까지 나왔다는데 어떻게 그것을 뒤집겠는가.
이 모든 건 계평이 준비한 것이고 자신은 아무것도 몰랐다고 말하기에는, 자신이 몸을 던져 승헌을 지킨 게 있어 신빙성이 떨어진다. 그렇다고 무작정 아니라고 우기기만 하는 것은 아무런 소용도 없다.
상대는 이미 자신에게 매우 불리한 증거를 갖고 있었다. 하나 처소에만 틀어박혀 있던 자신이 무슨 수로 제 결백함을 증명할 수 있을까.
차라리 순순히 모든 것을 털어놓고 구명을 청해야 할까? 승헌이 만일 그를 배신한 환관의 존재까지는 모르고 있다면, 그것을 대가로 거래를 할 수는 없을까?
‘……하나 그렇게 살아남아 무엇을 한단 말인가. 그리되면 나는 더 이상 왕궁 안에 머물 수 없게 된다. 벽국으로 돌아갈 수도 없게 되겠지…….’
애당초 옥환은 이 계획에 목숨을 걸었다. 한데도 승헌이 그걸 믿지 못하겠다면, 그에게는 목숨 이상으로 내걸 것이 없었다.
……여기까지인가. 결국, 여기까지였나. 그런 허망함만이 옥환의 가슴을 채웠다.
다만 자신의 입으로는 인정하지 않을 셈이었다. 끝의 끝까지, 그저 억울하게 죽는 걸로 남고 싶었다. 이미 다 들켰다 해도, 그것을 인정해 서국이 벽국을 공격할 빌미를 제공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한낱 호위가 국왕의 시해 계획을 세운 것과, 재상이었던 자가 세운 것은 천지 차이다. 옥환이 벌이는 일은 모두 벽국 자체가 벌이는 일과 같았기에.
하나 옥환의 침묵에 승헌의 표정은 더더욱 일그러졌다. 마치 모든 것을 단념한 듯 입을 다문 채 앉아 있는 옥환의 모습이 그는 견딜 수 없이 갑갑했다. 그는 이내 옥환의 멱살을 쥐고 낮게 으르렁댔다.
“왜, 왜 포기하지? 그대는 바득바득 서국에 남아 있었잖아. 내 조정에 들어오려 했잖아. 그대의 말대로, 날 위해 목숨을 바쳤잖아.”
“……제게는 전하의 믿음을 얻을 방법이 없습니다. 선생이라고까지 불리던 설금야는 고작……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입니다.”
입 밖으로 내고 나니 더더욱 그 사실이 와닿았다. 자신의 능력은 한없이 부족했다. 목숨까지 걸어놓고 고작 이런 데서 포기해야 할 만큼. 하나 어차피 도박이라 여겼던 계획이었다. 뜻대로 풀리지 않을 수 있다는 것도 진작 예상했다. 어차피 벽국이 망국이 되는 모습을 지켜봐야 한다면 차라리 적국 왕의 손에 일찍 죽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미련이 없다면 거짓이었으나,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견승헌을 상대로 지금과 같은 난관을 벗어나는 것은 무리였다. 옥환은 지쳐 있었다. 몸도 마음도. 승헌의 말대로 다시 바득바득 싸우기에, 그는 이제 막 죽을 고비를 넘긴 차였다. 그 고비에서 살아 돌아온 것만으로 그는 기력을 다한 상태였다. 염완이 죽은 뒤로 내내 그가 없는 벽국을 지탱하느라 애를 썼고, 그러다 결국 적국에까지 오게 되었으며, 끝내는 그 나라의 왕에게 몸까지 주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하나뿐인 목숨을 걸었었다. 한데도 이 꼴이다.
아무리 옥환이 대단한 정신력의 소유자라 해도, 한 나라를 상대로 고군분투하는 것에는 한계란 게 있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옥환이 느끼기에 그 한계는 지금인 것 같았다.
그는 외려 잘됐다며 자신의 마음을 위로했다. 살아서는 줄곧 고생만 해오지 않았던가. 죽으면 적어도, 주군을 만나러 갈 수는 있겠지.
숙적이었던 견승헌을 이기기 위해 싸우다 죽었다고 하면…… 하늘에 계신 주군도 용서해 주시리라.
“뜻대로 하십시오.”
마음을 정리한 옥환은 고개를 숙이고는 아예 눈까지 감아 버렸다. 하나 그렇게 애를 썼음에도 굳게 쥔 주먹은 잘게 떨리고 있었다. 그라고 해서 죽고 싶을 리가 없었다. 하나 솟아날 구멍이 보이지 않았다. 그 똑똑한 머리로도 도저히.
단념한 옥환을 살벌한 눈으로 노려보던 승헌은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돌연 이마를 짚었다. 그의 입에서는 무거운 한숨이 새어 나왔다. 길어지는 침묵에 눈을 뜬 옥환은 영문도 모른 채 그저 승헌이 혼란스러워 보인다고 생각했다. 마치 저를 죽이는 걸 망설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설마 그럴 리가.’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혹…….
아주 조금이라도 제게 정을 붙여 저를 죽이는 게 아쉬워졌다면…… 아직, 기회는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희망을 품으면서도 옥환은 행여라도 말을 잘못해 일을 더욱 그르치게 될까 봐 섣불리 입을 열지 못했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옥환에게 오히려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옥환이 여기서 서투른 변명으로 위기를 벗어나려 했다면 승헌은 완전히 옥환을 믿지 못하게 되었을 터였다.
아무 말도 못 하고 저를 처연히 바라보기만 하는 옥환의 시선에, 그것을 마주하는 승헌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만일 옥환이 억울하게 누명을 뒤집어쓴 거라면, 옥환은 승헌을 위해 몸을 던지고도 바로 그 승헌의 손에 죽고 말 것이다. 하나 제 목숨이 걸린 위기에도 제대로 변명조차 하지 못하는 옥환의 모습이 승헌에겐 도리어 솔직하게 보였다.
결국, 승헌은 이것이 어리석은 짓인 것을 알면서도 옥환에게 사실을 털어놓았다.
“살수들이 나를 노린 것은 그대의 지시였다고 자백했어. 하나…… 나는 그것을 믿지 않아.”
“예? 그 무슨…….”
예기치 못한 사실과 상황에 옥환은 말을 잇지 못할 정도로 놀랐다. 머릿속이 뒤죽박죽으로 엉켜갔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는 것처럼 안절부절못하던 옥환은 얼마 후에야 겨우 한마디 물었다.
“왜…… 그 자백을 믿지 않으십니까?”
“글쎄. 일단은 감이라고 해두지.”
승헌의 말이 진담인지 농담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옥환은 전장에서 단련된 무인의 예리한 감각을 그저 감으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옥환의 생각에도 살수들의 자백에는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지금껏 옥환은 살수들이 계평이 주모자임을 자백해, 그의 주인인 자신에게까지 의심이 뻗친 것으로 생각했었으나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살수들은 자신의 이름을 직접 언급한 것이다. 하나 옥환은 그들을 모를뿐더러 계평이 말해줄 때까지 계획의 구체적인 내용 또한 알지 못했다. 그들의 자백은 무언가 이상했다.
혹 계평이 자신을 죽이기 위해 거짓 자백을 시킨 것인가? 아니면…….
멈춰 있던 옥환의 사고가 정신없이 가속하기 시작했다.
‘생각할 시간이 좀 더 필요해. 지금은 정보가 너무 부족하다.’
부족한 정보를 보충할 방법은 승헌뿐이었다. 하나 어떻게? 승헌이 자신에 대한 판단을 망설이고 있다고는 해도, 그의 저변에는 기본적으로 자신을 향한 의심이 깔려 있었다. 어리숙한 대처는 그 의심을 키울 뿐이다. 승헌은 언제라도 자신을 죽일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었다.
생각을 정리한 옥환이 마침내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전하. 제가, 이 사건을 조사할 수 있게 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승헌의 표정이 굳어지는 것을 보며 옥환의 가슴이 철렁했다. 마치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한 다리를 건너는 것처럼 몹시도 조심스럽고 아슬아슬했다. 이 사내와의 대면은, 항상 그랬다. 그래, 항상. 그리고 그것을 지금껏 용케도 버텨 왔다. 자신은 그런 사람이다. 옥환은 그렇게 다독이며 제 마음을 다잡았다.
“범인이 주모자로 그대를 지목한 마당에 조사를 하게 해달라?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저는 주모자가 아닙니다. 물론 모든 증거가 저를 가리키고 있으나, 전하께서도 필시 무언가 마음에 걸리는 게 있기에 결단을 망설이고 계신 것이겠지요. 그러니 제게 기회를 주십시오. 혹 진상을 밝혀내지 못한다면, 그때는 전하도 저를 범인으로 생각하시고 주저 없이 죽이시면 됩니다.”
금세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와 당돌한 주장을 펼치는 옥환에게, 승헌은 대답 대신 조소를 보냈다. 잠시나마 엿보이는가 싶었던 인간 설옥환은 또다시 금야 선생의 이름 뒤로 꽁꽁 숨어 버렸다. 그를 이토록 인간미 없는 책사로 만든 것은 염완일까? 그자는 진짜 설옥환에 대해 알고 있나? 그런 생각이 연이어 드니 불쑥 짜증이 치솟았다.
승헌은 옥환의 턱을 잡고 차갑게 내뱉었다.
“그대는 참 대단하군. 박수라도 쳐 주고 싶을 정도야. 방금까지 죽겠다던 게 다 거짓말 같을 정도로.”
“……그런 건 아니었습니다. 저는 그저…….”
“그놈들의 자백도 못 믿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대를 믿는다는 뜻은 아니야. 그대는 지금까지 나를 몇 번이고 속여 왔잖아?”
옥환은 자신이 발을 잘못 디뎠다는 것을 깨닫고는 입술을 깨물었다. 하나 이렇게 끝낼 수는 없었다. 누군가가 자신이 죽길 바라고 있다. 진실이 밝혀져 죽는 것이라면 또 몰라도, 누군가의 작당으로 억울하게 죽는 것은 제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자신을 그토록 만만히 본 상대에게 반격을 하고 싶었다. 살수들의 거짓 자백이 꺼져 가던 옥환의 의지에 불을 지핀 셈이었다.
그렇다면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한 가지였다. 승헌을 이용하는 것. 그러려면 어떻게든 그의 마음을 돌려야만 했다.
옥환은 절박한 표정으로 승헌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제가…… 제가 어찌하면 됩니까? 뭘 어떻게 하면 저를 좀 믿어주시겠습니까? 저는 모르겠습니다. 목숨까지 걸었는데 아니라고 하시면 제겐 답이 없습니다. 전하께서 아신다면 부디 말씀해 주십시오.”
하나 승헌은 역시 쉬이 넘어오지 않았다. 옥환은 정말 마지막이라고 여기며 진심을 담아 호소했다.
“전하께선 제가 죽길 바라십니까? 차라리 제가 전하 대신 칼을 맞고 죽었어야 할까요? 제가 살아난 것을…… 원망하십니까?”
“…….”
끝내 승헌은 대답하지 않았다. 옥환은 그것이 긍정의 침묵이라고 생각했다. 그러자 어쩐지, 가슴이 무척이나 미어졌다.
“그러시겠지요. 제가 죽었더라면…… 전하도 살수를 죽이셨을 테고, 그렇게 끝이 났을 테니까.”
옥환은 고개를 떨구었다. 다 인과응보다. 승헌의 말대로 그를 수없이 속여왔으니, 이제 와 믿어달라는 건 무리가 있었다. 그러나 옥환은 포기하지 않을 셈이었다. 제 힘으로 조사를 하지 못하게 되더라도, 백고를 이용하든 계평을 협박하든, 뭐라도 해서 살아남을 생각이었다. 저를 모함한 게 누구인지 알아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그렇게 노력을 했는데도 안 되면, 정말로 안 되면, 그때는 죽어야 하겠지만…….
“……나도 그대를 믿고 싶어. 믿을 수만 있다면, 진작 그리했겠지.”
문득 승헌이 꺼질 듯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린 진심에 옥환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승헌은 좀 전과는 달리 무척이나 쓸쓸한 표정으로 자신의 속내를 터놓았다.
“그대가 죽길 바란 적은 없어. 아니, 살아나길 바랐어.”
승헌이 흔들리고 있었다. 자신의 뜻대로 된 것이다. 그야말로 절호의 기회라 할 수 있었다. 한데, 한데도 옥환은 목이 막힌 듯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승헌보다 더 동요하고 있는 것은 자신이었다. 심장이 요동을 치고 있었다. 내가 살아나길 바랐다고? 왜? 승헌에게 있어 자신은 골칫덩이에 지나지 않는다고, 그럼에도 그런 자신을 승헌이 놓지 않는 건 다 자신을 이용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던 옥환이었다. 그런 그에게 지금 승헌이 보인 반응은 크나큰 혼란을 안겨 주었다.
완전히 굳어 버린 옥환의 뺨을 쓰다듬으며 승헌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내가 차라리 그대에게 반하기라도 했다면 좋았을 텐데. 나든, 그대든, 누군가가 상대를 사랑하게 되었다면 이 지긋지긋한 짓거리도 끝낼 수 있었을 거야.”
그것은 불행이다. 둘 중 누군가가 상대에게 연심을 품는다면 그것은 비극을 초래할 불행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 옥환은 승헌이 무슨 뜻으로 이런 말을 하는지만큼은 이해했다. 항상 그들은 서로의 의도를 파악하려 했고, 주고받는 말 안에 믿음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끝나지 않는 신경전에 지친 것은 자신뿐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아니, 승헌은 본래 사람을 잘 믿지 못하는 인물이었다. 왕이 되고 나서는 측근조차 의심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테니, 그는 자신보다 더 지쳤다면 지쳤지, 덜 지치지는 않았을 터였다.
자신이 그렇듯, 그 역시 그만두고 싶을 것이다. 하나 그는 왕이니 그럴 수 없다. 그 족쇄가 그의 마음을 더더욱 옭아매고 있으리라. 그렇다면 옥환이 파고들 곳은 바로 그 부분이었다.
잠시 생각하던 옥환은 두 팔을 들어 승헌을 끌어안았다. 승헌이 놀라서 살짝 몸을 굳히는 것이 느껴졌으나 옥환은 망설이지 않고 물었다.
“제가 어찌하면 되겠습니까. 어찌하면…… 이 지긋지긋한 짓거릴 끝낼 수 있겠습니까. 전하를 연모하게 되면, 끝이 납니까?”
“……뭐?”
“그럼 이제부터 전하를 연모하겠습니다. 이 마음속에 연심을 품겠습니다. 더는 전하께서 절 의심하시지 않게, 제게만은 마음을 열어 보이실 수 있게……. 하니 제게 기회를 주십시오. 살아남을 기회를, 전하의 신용을 얻을 기회를 말입니다.”
누가 누구를 연모해? 누구에게 마음을 열어? 승헌은 마치 찬물을 한 바가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정말로 기가 막혔다. 누구든 상대를 사랑하게 되었다면 좋았을 거란 얘긴 그딴 식으로 써먹으라고 한 말이 아니었다. 제 진심이었다. 자신이 죽었으면 좋았겠냐고 묻는 옥환이 더없이 가여워져서, 옥환이 그렇게나 깨어나길 바랄 땐 언제고 또다시 그에게 못되게 구는 자신이 한심해서 한 말이었다.
한데 저를 사랑할 테니 살아남을 기회를 달란다. 이처럼 무신경한 이가 또 있을까. 이젠 하다 하다 거짓 고백까지 하는데도, 승헌은 더 이상 화가 나지 않았다. 아니, 그보다는 옥환의 그 오만함을 무너뜨리고 싶었다. 그가 그리 쉽게 입에 담은 ‘연정’이라는 말이 얼마나 무섭고 막중한 것인지 확실히 깨닫고, 후회하게 해 주고 싶었다.
옥환에게 화를 내지 않았을 뿐, 이것은 어쩌면 분노일지도 모른다. 혹은 지배욕이거나, 단순한 악의일 수도 있었다.
하나 확실한 것은, 그 이름도 붙일 수 없는 감정에 자신이 빠르게 침식당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승헌은 그 감정에 아예 몸을 내던진 채 이렇게 말했다.
“그래, 좋아.”
승헌의 시원스럽기까지 한 대답에 도리어 말을 꺼낸 당사자인 옥환이 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 태도에 승헌은 옥환이 아무런 준비도 없이 말을 꺼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맥이 빠졌으나, 침착함을 되찾은 옥환은 앞으로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고 물어왔다.
촌극이었다. 저를 사랑하겠다고 하면서, 어떻게 하면 사랑할 수 있는지를 묻다니. 승헌은 역시 화가 난다고 생각했다.
“글쎄. 오고 가는 연정을 몸만큼 확실히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또 있을까.”
승헌이 짓씹듯 내뱉고는 힘으로 옥환을 쓰러트렸다. 일순 옥환의 눈동자에는 당혹함이 비쳤으나 그것은 금세 가라앉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승헌은 그런 옥환을 망가뜨리고 싶었다. 파헤치고, 들쑤시고, 뒤집어서 그 밑바닥에 숨은 진짜 설옥환을 끄집어내고 싶었다. 제 밑에 깔려 울부짖고, 난잡하게 흐트러져 저를 원하는 그런 모습을 봐야만 이 응어리진 감정이 조금이나마 풀릴 성싶었다.
승헌 본인조차 감당하지 못하는 강렬한 충동이 이윽고 타오르는 욕정으로 그 형태를 바꾼 것이었다.
이윽고 옥환을 번쩍 안아 침상 위에 내려놓은 승헌은 옥환의 옷을 거칠게 벗겨 내고는 그 새하얀 몸에 이를 박았다. 마치 짐승이 사냥감의 살점을 물어뜯듯 몹시도 난폭한 움직임이었다.
옥환은 평소처럼 최대한 소리를 참아내려 했으나, 승헌이 가슴을 깨무는 순간 고통에 짧은 비명을 질렀다.
“윽……!”
하나 옥환의 반응에도 승헌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유두를 붙잡아 비틀어 올리고, 입술을 물어 피를 냈다. 그의 태도는 그야말로 전에 없이 포악했다. 승헌에게서 풍기는 피 냄새 때문에 옥환은 자신이 승헌에게 안기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잡아먹히고 있는 것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하나 이것이 바로 옥환이 처음 상상했던 승헌과의 교합이었다. 그동안의 그가, 너무 자상했던 것이다. 그러니 이게 정상이다. 이게 당연한 것이다. ……그래야만 하는데, 옥환의 마음은 자꾸만 중심을 잃고 허물어졌다.
이윽고 승헌이 동요하는 옥환의 양물을 손에 쥐었다. 그러고는 기둥을 뿌리부터 길게 쓰다듬고 연신 선단을 비벼댔으나 메마른 채 늘어져 있던 그것은 계속된 애무에도 끝부분이 겨우 젖어 들 뿐이었다. 그 둔감한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승헌이 인상을 찌푸리며 옥환을 내려다보았다.
“연모하는 이에게 안겼는데도 기뻐 보이지 않는 것 같은데.”
옥환은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으로 승헌을 바라보았다. 그 얼굴에 묘한 만족감을 느낀 승헌은 조금 더 부드럽게 손을 움직이며 나긋한 어조로 덧붙였다.
“아, 그래. 그대는 나를 앞으로 연모하겠다고 했지, 지금 연모한다고는 안 했군.”
승헌의 분위기가 조금 풀어진 듯하자 옥환은 눈에 띄게 안도했다. 하나 그도 잠시뿐, 승헌이 침상 옆 서랍에서 꺼낸 향유를 둔부 사이에 붓고는 그 안으로 손가락을 두 개나 밀어 넣는 바람에 옥환의 신경은 또다시 날카롭게 곤두섰다.
“어떻게 연모해야 하냐고 물었던가?”
승헌은 그렇게 물으며 검지와 중지를 이용해 옥환의 안쪽을 마구잡이로 벌렸다. 옥환은 거푸 숨을 들이켰다. 제 안을 헤집는 손가락의 굵은 뼈마디가 몹시도 선명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향유가 닿은 곳은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워지고 있었다. 그런 옥환에게 승헌이 조금 더 다정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나를 원한다고 해 봐.”
“읏, 응…….”
“더 해달라고 말해.”
옥환은 숨을 헐떡이며 승헌의 단단한 팔을 붙잡았다. 승헌의 눈동자는 몹시도 서늘했다. 옥환은 승헌의 화를 풀고 싶었다. 그래야 자신이 살 수 있었다. 그렇기에 옥환은 기꺼이 입을 열었다.
“전하를, 원합니다. 더 해 주십시오.”
승헌은 웃었다. 하나 그 웃음은 옥환이 원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엎드려 절받기도 이 정도면 짜증이 나는군.”
신랄하게 중얼거린 승헌은 정말로 화풀이라도 하듯 옥환의 안에 자신의 것을 그대로 삽입했다. 그야말로 쑤셔 넣는다고밖에 할 수 없을 만큼 난폭한 삽입이었다.
“아윽……!”
예고 없이 이루어진 삽입에 옥환에게서 고통 어린 비명이 터져 나왔다. 손가락으로 안을 벌렸다고는 하나 그것으로는 턱도 없었다. 몸이 쪼개지는 듯했고 눈앞이 흐려졌다. 아픔과 압박감에 절로 눈물이 뚝뚝 흘렀다. 그럼에도 승헌의 양물은 끝까지 들어가지도 못한 상태였다.
옥환은 그제야 승헌이 지난 교합 때마다 자신을 얼마나 배려해 주었던 건지 알 수 있었다. 거대한 살덩이가 파고든 둔부의 안쪽에서부터 열이 치솟았다. 옥환은 제발 빼달라고 빌고 싶은 것을 입술을 달달 떨면서 참아냈으나, 조금만 집중이 흐트러지면 금방이라도 의식을 잃을 것만 같았다.
“이래도 원해? 더 해줬으면 해?”
승헌의 비웃음 섞인 물음에 옥환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아픔은 가실 줄을 몰랐고, 이물감과 압박감에 호흡이 가빴다. 승헌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음에도 숨이 껄떡껄떡 넘어갔고 온 사지가 경련을 일으켰다. 지금의 상황이, 그리고 앞으로 벌어질 상황이 두려웠다.
그리고 승헌 역시 굳이 옥환이 대답하지 않아도 그가 어떤 상태인지는 알고 있었다. 명기라고 소문난 기생들조차 버거워하던 물건이다. 얼마 전까지 사내에게 안기기는커녕 교합도 해본 것이 맞는지 싶었던 옥환의 수준으로는 제 것을 수월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리 없었다.
옥환이 이제라도 잘못했다고, 살살 해 달라고 사정한다면 승헌도 받아 줄 용의가 있었다. 아니, 애초에 그것을 바라고 벌인 일이었다. 옥환의 고집은 승헌도 잘 아는 바였지만, 그가 안 될 것 같은 일에는 얼른 발을 뺀다는 것 또한 익히 아는 사실이었다. 처음 그를 안던 날, 밑준비를 하는 방법을 누구에게 배웠냐고 물었을 때 금세 대답한 것을 보면 그랬다. 그러니 이번에도 포기를 할 것이다. 승헌은 그렇게 생각하며 옥환을 다그쳤다.
“어서 대답해, 옥환. 그대가 싫다고 하면…….”
옥환은 새빨개진 눈으로 울면서 승헌의 옷깃을 붙들었다.
“빨리…… 빨리 움직여 주십시오……. 전하를, 원합니다…….”
예상에 없던 대답에 승헌이 입술을 깨물었다. 옥환의 한마디가 불씨가 되어 미약하게 남아 있던 이성조차 남김없이 태워 버린 듯했다. 옥환은 제 안에서 느껴지는 당혹스러운 감각에 몸을 굳혔다. 아래가 욱신거려 제대로 느낄 수도 없었으나, 분명 안에 들어와 있는 묵직한 물건이 그 부피감을 더 키우고 있었다. 그리고 한층 더 거대해진 그것은 승헌이 힘차게 허리를 움직이는 것과 동시에 옥환의 내벽을 마구잡이로 파헤쳤다.
“아흐윽, 아아……!”
격렬한 자극에 옥환이 새된 비명을 질렀다. 안 그래도 뿌옇던 시야가 점멸하듯 정신없이 번쩍이며 이리저리로 뒤섞였다. 옥환은 저도 모르게 승헌의 가슴팍을 마구 떠밀었으나, 승헌은 도리어 가까이 다가와 옥환에게 입을 맞추며 그의 반쯤 시들어 있던 양물을 주물렀다.
승헌에게 잡아먹히듯 혀와 입술을 빨리며 옥환은 연신 소리를 질렀다. 그때마다 승헌이 틀어막은 입안에서 억눌린 비명이 울렸다. 조금만 정신을 놓으면 그대로 기절할 것만 같았다. 승헌의 양물은 옥환의 안에서 펄떡거리며 내벽을 미친 듯이 문질러댔다. 옥환이 있는 대로 힘을 주고 있어 넣고 빼는 것이 쉽지 않을 텐데도, 승헌은 그 빡빡한 내부를 정신없이 오고 갔다.
“옥환, 설옥환…….”
입술을 뗀 승헌이 옥환의 턱 끝에 입을 맞추더니 이윽고 입술을 옮겨 새하얀 목과 쇄골을 물고 빨았다. 수많은 자국이 생겨났으나 옥환은 그것을 막을 새가 없었다. 승헌이 양물을 박을 때마다 허리가 정신없이 들리며 눈물이 흘렀다. 도저히 억누를 수 없는 소리는 결국 팔을 물어 막아냈다. 팔에 잇자국이 날 만큼 세게 물고 있었으나 아픈 줄도 몰랐다.
“읍, 흐읍!”
이윽고 승헌이 쥐고 있는 옥환의 양물에서 흰 액체가 튀었다. 옥환은 어깨를 흠칫거리며 몸부림쳤다.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러운데도, 승헌이 입을 맞추고 제 것을 만지기 시작하면서 쾌감이 동반되고 있었다. 그래서 더 괴로웠다. 아프고, 좋았다. 너무 아프고 너무 좋아서 어쩌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절정에 다다른 옥환을 봐주지도 않고 부풀 대로 부푼 양물을 퍽퍽 박아대면서, 승헌은 강한 희열에 몸을 떨었다. 제 물건을 받아들이는 것조차 버거워 보이는 옥환은 제대로 조이지도 못하고 있었으나, 젖은 눈으로 저를 올려다보며 교성을 지르는 그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승헌은 견딜 수 없이 짜릿했다.
흰 살결을 붉게 물들이고 유두와 양물을 바짝 세운 채 옥환이 흐느끼고 있었다. 그가 원하던 대로, 옥환이 그 누구보다 음란한 몰골로 제 밑에서 울부짖고 있는 것이다. 그 올곧고 단정한 금야 선생의 이처럼 난잡한 모습을 본 이는 세상에 자신뿐일 것이다. 그러한 생각이 드니 쾌감과 함께 크나큰 만족감이 그의 전신을 지배했다.
물론 옥환의 참는 모습을 보는 것도 좋았지만, 오늘은 그 어떤 것도 참게 두고 싶지 않았다. 승헌은 옥환이 물고 있는 팔을 빼냈다. 옥환이 힘을 주어 버티려 했으나 그것을 간단하게 제압한 승헌은 옥환의 입안에 자신의 손가락을 넣었다.
“정 물고 싶으면 이걸 물어. 내 손가락을 물 수 있다면.”
그게 아니라면 교성을 지르라는, 승헌의 말은 그러한 뜻이었다. 옥환은 차마 군왕인 승헌의 손가락을 물지는 못하고, 어떻게든 참아 보려 꺽꺽 숨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하나 승헌이 계속해서 마찰로 부어오른 옥환의 유두를 꽉 깨문 순간, 필사적인 노력도 허무하게 옥환은 콧소리 섞인 비명을 질렀다.
“흐아앙……!”
그와 동시에 옥환이 두 번째 절정에 이르렀다. 쾌감이 극치를 달리는 와중에도 승헌이 계속해서 삽입을 해대니 옥환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조차 분간할 수 없었다. 그저 짐승처럼 소리 내어 울며 눈앞에 있는 사내의 탄탄한 몸을 끌어안을 뿐이었다.
결국 제어가 끊어진 옥환은 계속해서 낯뜨거운 교성을 내며 승헌에게 매달렸다. 승헌 역시 열에 들뜬 채 어느새 부드러워진 옥환의 안에 귀두까지 뺐다가 뿌리까지 쑤셔 넣기를 반복하며 격렬한 행위를 이어 갔다. 이윽고 다시금 옥환이 씨물을 쏟아 내며 전율했다.
“아흐, 하, 전하, 전하!”
옥환은 몸을 부르르 떨며 승헌의 것을 깊게 빨아들였다. 그제야 승헌도 짧은 신음을 하며 옥환의 안에 쌓여 있던 욕정을 토해 냈다. 긴 사정에 접합부가 흠뻑 젖었으나 옥환은 승헌을 안은 채 떨리는 목소리로 청했다.
“전하, 더, 원합니다. 더 많이…….”
그 달콤한 충동질에 승헌이 대답도 없이 옥환을 안아 올리더니 앉은 자세로 삽입을 시작했다. 옥환의 몸이 사방팔방으로 흔들리며 뒤로 넘어갈 듯 자지러졌다. 승헌은 그런 옥환의 몸을 단단히 받쳐 들고 세차게 허리를 움직였다.
안이 망가질 것만 같은 감각에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옥환은 몇 번이고 더 해달라 떼를 썼다. 승헌의 땀 냄새와 섞인 피 냄새도 더는 거북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승헌의 눈동자는 처음과 같이 차갑지 않았다. 그것에 다정함은 터럭만큼도 없었지만, 타오르는 열기만으로 충분했다. 자신을 더없이 갈망하는 그 눈동자를 볼 때마다 옥환은 오금이 저려 왔다. 그 어느 누구도, 자신을 이렇게까지 원하지는 않았을 터였다.
그 열기에 덩달아 휩쓸린 것인지, 어느새 옥환 또한 허리를 튕기며 승헌과의 정사에 거침없이 빠져들고 있었다.
“옥환…….”
정염이 인 부름에 옥환이 숨을 삼켰다. 승헌과 닿아 있는 부분이 녹아내리는 것만 같았다. 귓가가 웅웅거리고, 머리는 물에 잠긴 듯 멍했으나 몸은 집요하리만치 쾌락을 찾아다니고 있었다. 옥환은 아예 욕정에 자신을 내맡긴 채 승헌과 살을 맞대었다.
그렇게 몇 시진을 내리 승헌과 몸을 섞은 옥환은, 더는 얼마나 갔는지 셀 수도 없게 되고 나서야 승헌에게 더 해달라고 청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할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에 가까웠다.
축 늘어진 몸은 더 이상 손 까딱할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머릿속 역시 멍했다. 하나 그런 옥환의 다리 사이에 승헌이 다시금 자리를 잡았다. 당황한 옥환은 승헌에게 무어라 말하려 했지만 쉬어 버린 목에서는 바람 새는 소리만이 나왔다.
“나를 연모하겠다고 했잖아.”
승헌은 옥환의 몸 이곳저곳에 입을 맞추며 낮게 중얼거렸다.
“나한테 연정이란 이런 거야, 옥환. 그러니 이제 두 번 다시 그런 말은 하지 마.”
그 순간 옥환은 뭐라고 말할 수 없는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으나, 승헌은 다시 허리를 치대기 시작했다. 그 아래서 갈라진 음성으로 흐느끼던 옥환은 어느 순간 정신을 잃었다.
잠들기 직전 그가 마지막으로 본 광경은 어느덧 캄캄해진 창밖의 하늘이었다.
***
옥환이 깨어났을 때, 승헌은 이미 떠나고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지난날의 일 자체가 없었던 것처럼 이부자리도, 제 몸도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단정하게 묶인 침의의 허리끈을 잠시 내려다보던 옥환은 뻐근한 몸을 느릿느릿 일으켰다. 그 기척을 들었는지 하인 하나가 문을 열고 들어와 옥환에게 데운 꿀물을 내주었다.
“식사를 준비하겠습니다.”
“응? 아직 이른 시간이 아니더냐.”
“……아.”
어쩐 일인지 옥환의 질문에 하인이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끝을 흐렸다. 옥환이 이유를 묻듯 바라보자 하인이 다소 민망한 얼굴로 눈을 내리깐 채 대꾸했다.
“그, 태사께선 하루를 내리 잠들어 계셨습니다. 내내 공복이신 것이 걱정되어…….”
“……뭐? 하면…… 전하께서 왔다 가시고 나서 벌써 하루가 흘렀단 말이냐?”
하인은 그렇다고 말했다. 옥환은 당황해서 입을 다물었다. 무리를 했다고는 생각했지만, 깨어나 보니 몸 상태가 그리 나쁘지만은 않아서 괜찮은 줄 알았다. 한데 그게 아니라 하루를 그냥 통째로 날려 버린 것이다. 승헌과 종일 정사를 벌이는 바람에 지나간 하루까지 더하면 총 이틀이었다. 옥환은 어이가 없었다.
“저…… 식사를 올릴까요?”
하인의 질문에 상념에서 깬 옥환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다지 허기는 느껴지지 않았으나, 종일 굶고 있던 것이라면 속에 무어라도 채워 넣어야 했다. 그 뒤, 몸단장을 하고 식사를 끝낸 옥환은 계평을 불러냈다.
이윽고 계평이 부루퉁한 얼굴로 옥환 앞에 나타났다. 그가 여전히 자신에게 불만을 품고 있다는 걸 옥환도 알았으나, 그 외에는 마땅히 부릴 수 있는 수족이 없었으니 별수 없는 일이었다.
옥환은 각설하고 물었다.
“바깥의 상황은 어떻더냐?”
“평소와 다를 바 없습니다. 서국 왕이 비밀리에 일을 진행하고 있는지, 살수나 관련된 일에 대해선 정보가 전혀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옥환은 한숨을 내쉬었다. 승헌이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저를 믿어 주기로 한 것일까? 아니면…….
“그 살수들은 믿을 만한 것이 맞겠지? 서국 왕은 그자들에게서 자백을 얻어 내기 위해 고문을 하고 있을 것이다. 절대 쉬이 죽여 주지 않을 것이야.”
“압니다. 하나 걱정 놓으십시오. 그들이 저와 전하를 배신할 리 없습니다.”
옥환은 마치 계평의 속을 꿰뚫어 보기라도 할 것처럼 날카로운 시선으로 계평을 응시했다. ‘자신과 염요는 배신하지 않는다’라. 하나 살수들이 주모자로 지목한 이는 계평도 염요도 아닌 옥환이었으니 계평의 말에는 분명한 허점이 있었다. 그 허점이 의도한 것인지 아닌지를 가늠하기 위해 옥환은 계평을 심문해 보기로 했다.
“그들도 사람일진대, 죽음이나 고통이 두려워 자백을 할 수도 있지 않겠느냐?”
“없습니다. 처음부터 죽기를 각오하고 한 일입니다.”
“잡혔을 경우는 어찌하기로 했지?”
“정하지 않았습니다. 본래는 무조건 자결하려 하였으니.”
“자결? 계획이 성공해도 말이냐?”
“서국 왕을 죽인다고 서국에서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말씀드렸다시피, 애초에 죽을 것을 알고 임한 것입니다.”
확실히 대단한 충성심이었다. 죽을 걸 알면서 적진에, 그것도 왕궁에 뛰어들다니.
고아인 아이들을 거두어 왕의 호위대로 키우게끔 제안한 것은 다름 아닌 옥환 자신이었으나, 그들을 교육한 것은 계평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그들이 염요를 향한 충성심만큼은 제대로 배운 모양이었다.
‘그래. 계평은 그들의 대장이다. 거짓 자백을 시킨다 해도 그대로 따르겠지.’
계평은 내내 자신을 의심하고 있었다. 이번 일을 이용해 자신을 치워 버리려 했대도 아주 말이 안 되는 일은 아니었다. 다만…….
“무슨 일 있으신 겁니까?”
무언가를 짐작한 듯한 계평의 질문에 옥환이 태연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신을 음해하려 한 자의 정체가 확실하지 않은 이상, 승헌이 살수의 자백을 믿지 못하고 있단 얘기는 계평에게도 비밀로 해야만 했다.
“서국 왕이 뭔가 눈치챈 것은……?”
“그렇지는 않다. 다만 죽을 뻔했으니 당연히 나나 너를 의심할 수밖에 없겠지.”
“하나 승상께선 그자를 지켜 주시지 않았습니까? 그자의 신용을 얻기 위해서라고 하셨던 것 같은데요.”
마치 비꼬는 듯한 계평의 말투에 옥환의 입매가 굳었다. 짧은 침묵 후 다시 말문을 연 옥환의 어조는 몹시도 싸늘했다.
“그렇기에 그나마 드러내 놓고 의심하지 못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여기서 적국의 백성이었던 자는 너와 나 둘뿐인데 의심을 사는 것도 당연하지 않으냐? 그런데도 너는 굳이 일을 만들어 상황을 여기까지 끌고 왔고 말이다.”
“저는……!”
“다 죽자는 심산인 게냐? 너와 내가 여기서 부질없이 죽으면 전하께서 참 잘하셨다고 상을 내리시겠구나. 널 보낸 덕에 모든 일을 그르쳤으니 아주 좋아하시겠어.”
노골적인 옥환의 도발에 걸린 계평이 붉으락푸르락해진 얼굴로 탁자를 쾅 내리쳤다.
“예! 다 죽는 게 나을지도 모르지요! 전하께 승상은 필요 없으니까요! 실제로 승상이 벽국을 떠나고 나서 전하께선 권위를 되찾으셨습니다! 하나 혹 승상이 벽국으로 돌아가기라도 하는 날엔 말짱 도루묵이 될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뭐……?”
전혀 생각지 못했던 이유에 옥환은 아연한 표정으로 계평을 바라보았다. 일부러 계평의 속내를 떠보려 했던 것이나, 설마하니 이렇게까지 직접적으로 말할 줄은 몰랐다.
자신이 벽국으로 돌아가면 염요가 힘을 잃는다……. 그의 주장이 마냥 터무니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옥환은 더 당혹스러워했다.
그리고 그런 옥환에게 계평이 조금 누그러진 모습으로, 두 주먹을 꼭 쥔 채 말했다.
“그래도…… 아닙니다. 전하께선 승상을 죽이라고 하지 않으셨으니까.”
“…….”
“저는 전하께 충성을 맹세한 심복입니다. 제가 모시는 것은 벽국도, 선왕 전하도 아닌 지금의 전하이시고. 하니 그분이 지시하지 않은 일은 절대 제멋대로 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더니 계평은 자리를 박차고 나가 버렸다. 옥환은 그런 계평을 참으로 미숙하기 짝이 없는 인물이라 여겼으나, 계평이 자신을 음해하려 한 장본인은 아닐 것 같다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었다. 계평의 방금 모습에서 어느 정도 진실성이 엿보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계평을 용의선상에서 완전히 제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염요가 제 생각만큼 헛산 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무조건적으로 제 말을 들어주는 이가 하나라도 있지 않은가. 적어도 자신보다는 나은 편이었다.
야속한 제 신세에 옥환은 한숨을 내쉬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머릿속이 복잡하니 바깥 공기라도 쐬면서 생각을 좀 정리할 요량이었다. 하인에게 들키면 말릴 것 같아 옥환은 그에게 일을 시키고는 몰래 밖으로 나왔다. 바깥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으나 안개비에 불과했기에 옥환은 우산도 없이 길을 거닐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생각에 잠겨있던 옥환은 문득 제 머리 위에 그림자가 진 것을 깨닫고는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는 그다지 만나고 싶지 않았던 인물이 서 있었다.
“호 장군…….”
“네놈이 왜 여기 있지?”
호진의 적대적인 태도에도 옥환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막 머릿속에 섬광처럼 번뜩인 한 가지 가능성에 대해 골몰하고 있었다. 하나 호진이 거칠게 어깨를 잡아채는 바람에 옥환은 상념에서 깨어 호진을 바라보았다.
“네놈이 왜 여기 있냐고 물었다!”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나야말로 묻고 싶습니다. 내가 왜 여기 있으면 안 됩니까?”
옥환이 싸늘한 어조로 묻자 호진은 대답 대신 옥환의 어깨를 휙 밀치고는 돌아섰다. 하나 그대로 자리를 벗어나려는 듯한 호진을 옥환이 재빨리 붙잡았다.
“대답하십시오.”
“뭐? 건방진 자식! 감히 누구에게 명령이냐?”
옥환의 팔을 매몰차게 쳐낸 호진은 그대로 옥환의 멱살을 틀어쥐고는 낮게 위협했다.
“내가 정녕 네놈이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를 줄 알았더냐? 아직 목이 붙어 있는 걸 감사히 여기지는 못할망정……!”
“…….”
금방이라도 저를 잡아먹을 것처럼 이글거리는 호진의 눈빛을 빤히 응시하던 옥환은 천천히 중얼거렸다.
“당신이군요…….”
“뭐?”
자신이 죽기를 바라는 사람…… 아니. 적어도 자신을 방해물이라고 여기는 사람이라면 바로 코앞에 있다. 그의 자신을 향한 적의는 몇 번이나 확인했다. 만일 살수들을 심문한 것이 호진이라면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물론 그저 감이었다. 논리도, 이성도 없는. 그럼에도 옥환은 자신의 감이 들어맞을 것만 같다고 느끼며 입을 열었다.
“날 주모자로 몰아 놨는데도 여전히 살아서 이리 돌아다니고 있으니, 그게 내키지 않았겠지요. 안 그렇습니까?”
그 순간 호진의 눈빛이 불길하게 번뜩였다. 그가 내뿜는 살기가 어찌나 강렬한지, 옥환은 자신이 살아 있는지 새삼 확인해야 할 정도였다. 하나 옥환은 물러서지 않고 도리어 대담하게 물었다.
“왜 날 그리 싫어합니까?”
“왜? 왜냐고? 진정 몰라서 묻는 것이냐?”
“예, 모르겠습니다. 날 의심하는 것은 이해합니다. 하나 당신이 그저 나를 의심해서 그랬다고 하기에, 이번 일은 너무 심하지 않습니까?”
호진은 코웃음을 쳤다. 하나 그는 곧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변해 노성을 질렀다.
“그래! 네게 있어서 내 부친은 한낱 파리 목숨에 불과했겠지!”
“그게 무슨…….”
말을 잇던 옥환은 그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것을 감지하고는 뒤늦게 한발 물러섰으나, 그보다 먼저 호진의 커다란 손이 옥환의 가녀린 목을 틀어쥐었다.
“여기서 네놈을 죽이고 네가 자백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하면, 전하도 받아들이실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옥환은 거침없이 제 숨통을 조여 오는 호진의 손을 힘주어 붙잡았다. 하나 옥환이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호진의 힘을 이겨 낼 수는 없었다. 옥환의 손톱이 몇 번이나 호진의 팔과 손등을 긁었으나 호진은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그의 눈은 그야말로 광기와 증오에 사로잡혀 있었다.
눈앞이 핑핑 돌고, 머릿속이 몽롱해졌다. 숨이 막혀 몇 번이나 켁켁거렸으나 제 목을 조르는 팔의 힘은 조금도 약해지지 않았다.
정말로 저를 죽일 것만 같은 호진을 바라보며 옥환은 기억을 더듬었다. 아버지. 호진의 아버지. 그제야 조금 기억이 났다. 옥환이 아직 벽국에 있었을 때, 서국과의 전투에서 전사한 서국 측의 노장이었다. 그가 호진의 아버지인지는 확실하지 않았으나, 호씨에 장군이기까지 하다면 아마 틀림없을 터였다. 그리고 그 전투 당시 벽국의 군대는 옥환이 지휘했었으니, 호진이 자신을 미워하는 이유 역시 납득이 갔다.
‘그래. 부모의 원수라면 미워할 만도 하지.’
옥환은 멀어지는 의식 속에서 그런 생각을 했다. 태평하게 그런 것이나 따지고 있는 자신이 우스웠으나 이제는 저항할 힘마저 빠져나가고 있었다. 적국의 신하였으니 이런 원한이 있는 것도 당연하다. 그만큼, 자신의 계획이 위험했다는 뜻이었다. 이런 일을 전혀 예상 못한 것도 아니었다.
이윽고 호진의 팔을 붙잡고 있던 옥환의 팔이 스르르 바닥으로 떨어졌다. 핏기가 싹 가신 옥환의 얼굴은 보랏빛으로 변하고 있었다. 그리고 머잖아, 그는 정신을 잃었다.
“그 정도면 됐겠지.”
문득 등 뒤에서 들려온 승헌의 싸늘한 음성에 호진이 움찔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제야 호진은 혼절한 옥환을 보고는 서둘러 손을 놓았다. 옥환의 몸은 맥없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두 사람의 곁으로 성큼성큼 걸어온 승헌은 쓰러진 옥환을 번쩍 안아 들었다.
“아우가 뭘 하려고 한 건지는 처소로 돌아가서 천천히 생각해 보도록 해. 내가 부를 때까지, 입궁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군.”
호진은 뒤늦게 자신이 한 짓을 깨달았는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양손을 가늘게 떨고 있었다. 승헌은 그런 그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곧장 옥환의 처소로 향했다.
승헌이 쓰러진 옥환을 안은 채 처소 안으로 들어서자 화들짝 놀란 하인들이 얼른 누울 자리를 준비하고 태의를 부르러 달려 나갔다. 옥환을 자리에 눕힌 승헌은 남은 하인들을 모두 모아놓고 살벌한 어조로 하문했다.
“내가 너희들의 주인은 이제 태사이니 그를 잘 모시라고 했을 텐데, 이런 날에 우산도 없이 나가게 하는 걸로도 모자라 사람 하나 붙이지 않았더냐?”
“소, 송구하옵니다, 전하……!”
바닥에 납작 엎드려 죄를 청하는 하인들을 바라보던 승헌은 짜증이 가득 담긴 얼굴로 곁에 선 환관에게 눈짓했다.
“싹 다 갈아 치워.”
“분부 받들겠나이다.”
하인들이 환관들에게 붙들려 끌려나가자, 누군가가 승헌의 소매를 붙들었다. 옥환이었다.
“……그러지 마십시오. 제멋대로 행한 일입니다. 저를 벌하십시오.”
“그대의 벌은 목을 졸린 걸로 되었어.”
그렇게 내뱉은 승헌은 그럼에도 환관에게 이렇게 덧붙였다.
“죽이지는 마.”
환관이 고개를 조아리고는 물러나자 처소 안에는 승헌과 옥환만이 남게 되었다. 옥환이 눈치를 보며 승헌에게서 조금 벗어난 곳을 멀거니 응시하고 있는데, 승헌이 입을 열었다.
“내가 조금만 늦었더라면 그대의 죽은 척도 먹히지 않았을 거야.”
“……먹혔으니 됐습니다.”
“다 알고 있었나?”
“궁인 하나가 지나가다 저희를 보고는 얼른 달려가기에, 호 장군이 무서워서 도망치려는 게 아니면 필시 누군가를 부르러 갔겠거니 싶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태연하게 이야기하는 옥환의 모습에 승헌은 실소를 흘렸다. 옥환은 정말로 죽을 뻔했다. 그의 새하얀 목에 선명하게 남은 푸른 멍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화를 낼 만도 한데. 아니면 두려워하거나. 그는 벌써 몇 번이나 죽을 뻔하지 않았는가.
하나 옥환은 화를 내거나 두려워하는 대신 뜻밖의 질문을 던졌다.
“전하도 일부러 더 지켜보고 계셨지요?”
“……서운한가?”
“아닙니다. 중간에 호 장군을 막으려 하셨다면 반발이 더 컸을 것입니다. 저를 다른 곳도 아닌 궁 안에서 거의 죽일 뻔하였으니, 그분도 앞으로는 조금 자제를 하시겠지요.”
승헌은 더 이상 웃지도 않았다. 그저 조금 질렸다는 듯 옥환을 바라볼 따름이었다. 그 시선이 새삼스러울 것도 없기에, 옥환 역시 입을 다문 채 그것을 받아 냈다. 그렇게 두 사람이 침묵하자 바깥에서 들려오는 빗소리만이 공간을 메웠다. 그새 빗줄기가 거세진 모양이었다.
한참이나 그저 빗소리만 듣고 있던 승헌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내게 화를 내도 돼.”
“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그리 똑똑한 그대이니, 내가 호진과 그대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었다는 것도 알 것 아닌가.”
“흔들리셨습니까……?”
옥환이 의외라는 듯 묻는 바람에 승헌 또한 미묘한 얼굴이 되었다. 승헌이 정말 몰랐냐고 반문하자 옥환이 민망한 어조로 대꾸했다.
“당연히 저보다는 전장을 함께 누빈 전우이자 충신을 우선하실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부모의 원수라는데 아무렴, 그 원한을 갚아 주고 싶지 않으셨겠습니까.”
“그대도 나의 사람이야.”
“반쪽짜리지 않습니까. 그보다는 당연히 호 장군이 위에 있겠지요.”
마치 자조하는 것처럼 보이는 옥환의 대답에 승헌이 무어라 말하려 했으나, 옥환이 먼저 물었다.
“그 외에도 알고 계셨던 것이 있지 않습니까?”
승헌이 하려던 말을 관두고 옥환을 말없이 응시했다. 옥환은 그 시선에서 슬그머니 눈을 돌린 채 애먼 곳을 쳐다보며 말했다.
“만일 전하께서 호 장군이 저를 모함하려 거짓 자백을 시켰단 걸 알고 계셨다면, 당연히 지난 모살 계획의 진짜 내막도 알고 계시는 것 아닙니까.”
“……왜 그리 생각하지? 내가 호진의 계획을 안 것은 극히 최근이고, 그간에는 아무리 나라도 속았을 수 있잖아?”
“지난번에 살수들의 자백을 믿지 않는다 하셨지요. 그때는 감이라고 하셨지만, 전하께선 그저 감으로 제게 그런 얘길 하실 분이 아니십니다. 그렇게 판단할 만한 단서를 이미 갖고 계시지 않은 이상은요. 물론 그 당시엔 저도 정신이 없어 미처 알아채지 못했지만 말입니다.”
옥환은 혹 자신의 발언으로 다시 승헌과의 사이가 삭막해지는 것이 아닌가 우려했으나, 한편으로는 그런 우려를 하는 자신이 못내 낯설고 거북했다. 승헌은 잠시 침묵하더니 곧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대는 지나칠 정도로 똑똑하군.” 하고 중얼거렸다. 그 반응에 옥환은 다시금 긴장했다. 하나 다행히 승헌은 화내는 일 없이 순순히 고백했다.
“그래. 누군가가 나를 죽이려 할 것이라는 내용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연회는 그야말로 그자들을 색출해 내기 위한 방편에 불과했을 뿐.”
내심 짐작하고는 있었기에 물어본 것이었으나, 정말로 견승헌은 방심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그래도 그렇지 자기 자신을 미끼로 쓸 줄이야. 놀란 옥환의 시선을 느꼈는지 승헌이 다시 말했다.
“위험한 계획이라고 생각하나? 하나, 몸을 사린다고 해서 위기가 날 피해 가는 것은 아니잖아.”
옥환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사실 그는 바짝 얼어붙은 상태였다. 겉보기엔 승헌의 기색이 그리 나쁘지 않았으나, 그가 정말 모살 계획에 대해 모든 걸 알고, 그 주모자가 계평인 것까지 알아냈다면 이제 더는 피할 길도 없었기에.
그럼에도 옥환은 어떤 결과든 겸허하게 수용하리라 마음먹고는 조용히 승헌의 처분을 기다렸다. 어찌 되었든 자신을 모함한 이도 알아냈고, 그자 또한 충분한 것은 아니어도 벌을 받았으니 목표했던 바는 어느 정도 이룬 셈이었으니까.
그런 옥환을 지그시 바라보던 승헌이 무거운 어조로 운을 뗐다.
“옥환. 그대에게 묻지.”
“…….”
“그대가 이번 일의 주모자인가?”
승헌이 그렇게 묻는 순간은 유난히 주위가 고요했다. 그리 세차게 내리던 비도 멎었는지, 숨 쉬는 소리조차 거슬릴 것만 같은 적막이 그들 주변에 내려앉았다. 옥환은 그제야 눈동자를 들어 승헌을 바라보았다. 승헌 역시 눈 한번 깜빡하지 않고 옥환을 마주 보았다. 옥환의 메마른 입술은,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열렸다.
“저는 주모자가 아닙니다.”
승헌 역시 오랫동안 침묵했다. 어쩌면 옥환이 그랬던 시간보다 더 오래. 이윽고 그가 말했다.
“그래.”
승헌의 대답은 그게 다였다. 눈에 보일 만큼 굳어 있던 옥환은 싱거운 대답에 의아한 눈으로 승헌에게 설명을 요구했다. 승헌은 쓴웃음을 지은 채 말했다.
“아까도 말했다시피, 이번 모살 계획은 진작에 간파하고 있었지. 하나 그대가 끼어들 줄은 미처 몰랐어. 그래서 난 도리어 그대를 의심했지. 그대가 이 계획에 관여한 것은 아닐까 하고.”
“…….”
“그대가 세웠다고 하기엔 맥빠질 만큼 허술한 계획이었지만, 이게 만일 그대가 목숨 바쳐 나를 지키고, 그 공으로 내 신임을 사려는 것이라면 얘기는 다르지. 그럴 경우엔 오히려 조금은 허술한 계획을 세워야 할 테니까.”
“그런데 살수들이 저를 지목한 것이군요.”
옥환의 말에 승헌이 고개를 끄덕였다.
“해서 그대가 아니라는 걸 알았어. 물론…… 반반이었지만.”
“그렇기에 저를 줄곧 시험해 보신 것이었겠지요.”
“그래. 그러니 화를 내도 된다고 하는 거야.”
옥환은 “아닙니다.” 하고 고개를 저었다. 그럼에도 사실 그는 자신이 승헌의 의심에서 무사히 벗어났다는 안도감보다도, 승헌이 여태껏 했던 행동이 전부 연기였을 거란 사실에서 비롯된 실망감을 더 크게 느끼고 있었다. 자신 역시 승헌을 이용하려 했었으니 할 말이 없는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한번 흐트러진 마음은 잘 추슬러지지 않았다.
그렇게 옥환이 풀이 죽어 있는데, 문득 승헌이 옥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옥환이 고개를 들자 그가 한숨 쉬듯 말했다.
“미안해, 옥환.”
“…….”
옥환은 승헌의 사과에 몹시 당혹했다. 마치 갑자기 머리라도 맞은 듯 정신이 멍해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사과 한마디에 그리 어수선하던 마음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도대체 왜?
“그대는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고도 남을 위인인 건 알지만, 그래도 나로서는 내내 마음이 좋지 않았어.”
옥환은 무어라 말을 해야 할 것 같았으나 뭐라고 말하면 좋을지 잘 떠오르지 않아 머뭇거렸다. 그리고 하필 그때 태의가 찾아오는 바람에 결국 옥환은 승헌의 사과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넘어가야만 했다.
태의는 옥환의 목에 생긴 상처를 보고는 승헌의 눈치를 슬쩍 살피더니 상처만 나으면 될 것 같다며 가져온 고약을 꺼내 들었다. 한데 승헌이 그것을 빼앗고는 말했다.
“내가 대신하지.”
“아, 예.”
태의가 눈을 굴리며 멀뚱히 앉아 있자 승헌이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그를 쳐다보았다. 그제야 태의는 얼른 일어나 물러가 보겠다며 처소를 나갔다.
“제가 바를 수 있습니다.”
“나도 알아.”
더 이상의 여지는 주지 않겠다는 듯한 승헌의 강건한 태도에 옥환은 별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옥환의 코앞으로 몸을 기울인 승헌은 멍이 든 부위에 조심스럽게 약을 펴 발랐다. 승헌의 손길이 목에 닿자 옥환은 방금까지와는 달리 몹시 멋쩍은 기분에 휩싸였다. 내내 잊고 있던 지난밤의 기억이 떠오른 탓이었다. 방금의 사과까지 더해 옥환은 승헌이 몹시도 어색했다. 하나 어디에 시선을 두면 좋을지 몰라 이리저리 헤매던 옥환의 눈동자는 하필 승헌이 시선을 든 순간 그와 딱 마주치고 말았다.
“뒤로 돌아 봐.”
“예?”
“뒤에도 발라야 할 것 아닌가.”
옥환은 엉성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얼른 뒤로 돌아앉았다. 얼굴을 안 보니 좀 낫다고 여긴 것도 잠시, 승헌의 손끝이 뒷목을 쓰는 순간 옥환의 전신은 잔뜩 굳어 버렸다. 아무리 머리로는 괜찮다고 여겨도 몸은 절로 승헌의 손길에 반응하고 말았다. 옥환은 그런 제 상태를 들키지 않으려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조금 반성하는 중이야.”
승헌의 숨결이 목덜미에 닿는 바람에 움찔했던 옥환은 뒤늦게 무엇을 반성하시냐 물었다.
“그저께 밤의 일 말이야.”
안 그래도 그때의 일이 자꾸만 떠올라서 복잡했던 옥환은 승헌이 직접 그 일을 입에 담으니 더더욱 당황해서 완전히 얼어붙었다. 하나 승헌은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심한 손길로 약을 바르며 말을 이었다.
“어제 종일 잠들어 있었다는 말을 들었어. 그 탓에 오늘도…….”
“아닙니다.”
옥환이 생각보다 큰 소리로 말하는 바람에 승헌이 의문을 느끼며 말을 멈추었다. 잠시 침묵하던 승헌은 이윽고 씁쓸한 어조로 물었다.
“……내가 무섭나?”
“왜 그리 생각하십니까.”
“지금 그대가 마치 맹수 앞에 선 작은 동물처럼 굳어 있으니까.”
옥환의 얼굴은 무안함과 수치스러움에 빨갛게 달아올랐다. 무섭지 않다면 거짓이겠으나, 승헌이 생각하는 그런 류의 것은 아니었다. 겨우 되찾은 승헌의 호의를 잃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옥환은 다급히 입을 열었다.
“그날은, 서로의 합의하에 있었던 일입니다. 저 역시 계속 졸랐었고, 아시다시피 저는 경험이 부족하니…… 부디 통촉해 주십시오.”
그 말에 승헌은 작게 웃었다가, 옥환이 그 소리에 어깨를 작게 떠는 걸 보고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하나 곧 옥환의 목이 새빨간 것을 깨닫고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열이 나는 건가? 아니면 너무 세게 잡혔던 건가…….”
“저, 그것은…….”
“나는 가는 게 좋겠군. 태의에게 다시 들어서 그대를 진찰하라 이를 테니 그리 알고 있어.”
옥환은 승헌을 붙잡아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를 붙잡을 만한 마땅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옥환은 이제 와 자신이 연애와 같은 것에는 무척이나 형편없는 사람임을 깨달아야만 했다. 얼굴만 멀쩡하지, 목석이나 다를 바 없는 자신이 상대에게는 얼마나 밋밋하게 느껴질 것인가.
그런 자신을 속으로 책망하며 승헌을 얼른 따라나선 옥환은, 문득 승헌의 옷자락에 흙탕물이 튀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냉큼 그를 붙잡았다.
“전하. 잠시만.”
옥환이 손수 바닥에 무릎을 굽혀 가며 제 소매로 승헌의 옷자락에 묻은 얼룩을 닦아내자, 멈칫한 승헌이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옥환을 일으키려 했다.
“어차피 환복하면 그만이야. 아픈 이가 이러면 쓰나.”
“그래도 권위라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왕의 권위는 이런 것으로 서거나 무너지는 것이 아니야. 어서 일어나.”
승헌이 강제로 옥환의 팔을 끌어당겼으나 옥환이 몸을 뒤로 빼며 말했다.
“이런 것이라도 하게 해 주십시오.”
“…….”
승헌은 짧은 한숨을 내쉬고는 결국 옥환을 내버려 두었다. 옥환은 또 쓸데없는 일에 고집을 부렸나 싶어 겸연쩍은 마음에 입을 열었다.
“어쩌다 이렇게 되셨습니까? 비가 그리 많이 내리지는 않았는데. 혹 웅덩이라도 밟으셨는지요?”
왕이 다니는 길목에는 그런 것이 생기지 않도록 궁인들이 관리를 하는 데다가, 만일 있더라도 환관이 알아서 그것을 피했을 터였다. 옥환은 순수한 호기심으로 질문한 것이었으나 승헌은 픽 웃더니 조금 짓궂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것을 정녕 몰라서 묻나? 그대처럼 똑똑한 이가?”
옥환이 어리둥절한 눈으로 승헌을 올려다보자, 승헌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옥환을 일으켜 주고는 툭 내뱉었다.
“천재와 천치는 정말로 한 글자 차이로군.”
옥환은 저에게 천치라고 하는 건가 싶어 기분이 확 상했으나, 승헌은 아무 말도 않고 그대로 몸을 돌려 처소 밖으로 나가 버렸다. 도대체 뭐가 문제였나 하는 생각에 얼룩이 묻은 소매를 만지작거리며 침상으로 돌아가던 옥환은 비로소 승헌의 옷에 왜 흙탕물이 튀었는지를 깨닫고는 그대로 멈춰섰다.
‘……뛰어왔구나.’
자신이 호진에게 목을 졸리고 있다는 말에, 군왕인 그가 체통도 잊고 뛰어왔던 것이다.
왕이 머무는 궁 안에서 살인을 저지르는 것은 대죄다. 충복인 호진이 행여 죄인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랬을 것이다. 그런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면서도, 옥환은 한참 동안이나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빗속을 달려왔을 승헌을 생각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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