四. 君臣(군신)
그 뒤로 승헌과 옥환은 만나지 못했다. 정확히는, 승헌이 옥환을 찾지 않은 것이었다.
옥환은 승헌이 일부러 찾아오지 않는 건 아닐까 생각했지만, 듣자 하니 승헌은 여러 일로 몹시 바쁘다는 모양이었다. 안 그래도 지방에서 민란이 일어나 골치인데, 조정 인사와 관련해 싸움이 붙은 문관과 무관이 서로를 헐뜯고 힐난하느라 작금의 조정은 거의 마비된 상태나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서국 조정의 두 무리가 서로를 달가워하지 않는 것은 옥환도 알고 있었으나, 조정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정도로 갈등이 깊은 줄은 미처 몰랐다. 이것은 잘만 이용하면 서국을 무너뜨릴 단초가 될 수 있었다.
하나 이런 규방에 갇혀서는 서국을 무너뜨리기는커녕 그들의 약점조차 알아낼 수 없다. 벌써 서국에 온 지 석 달이 지났다. 하다못해 조정의 말단직에라도 들어갔어야 할 시기였다. 옥환은 초조했다. 지금 상황의 답답함도 그러했으나, 저를 안았던 날 승헌이 돌아가면서 한 말이 유독 마음에 걸렸다.
‘나는 과연 그대의 주인일까?’
그때, 무어라도 대답을 했어야 했다. 대답을 하지 않은 것은 그야말로 최악의 선택이었다. 자신이 배신자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 것이 무엇인가. 하나 갑작스러운 상황에 던져진 예상외의 질문은 옥환의 말문을 틀어막고 말았다.
‘아니, 아니다. 충분히 대답할 수 있었어. 나는…… 그에게 거짓말을 할 수 없었던 거야.’
그의 앞에서는 모든 거짓이 탄로 나고 말 것이다. 옥환은 그것을 직감했다. 지금 입을 떼면, 정말로 돌이킬 수 없게 되리란 것을.
그나마 다행인 것은 자신이 설옥환이라는 것이었다. 범인과는 다소 다른 행동을 하더라도, 그 ‘금야 선생’이기에 무언가 다른 셈이 있을 거라고 봐줄 테니까. 어쩌면 자신이 대답을 하지 않은 것은 신중함으로 비쳤을지도 모른다.
‘하나 그자는 영리하다. 그런 질문을 한 것부터가 예사롭지 않아.’
어쩌면 너무 급하게 굴었던 것일까. 아니면 처음 겪는 정사에 취해 저도 모르게 약점을 드러냈나. 최근 들어 옥환의 머릿속은 온통 승헌과 그가 남긴 말로 가득했다.
차라리 얼굴을 좀 봤으면 싶었다. 속을 알기 힘든 사내이기는 하나 이렇게 막연한 추측만 반복하기보다는 얼굴이라도 보고 말이라도 몇 마디 나눠 보는 것이 나았다. 그러나 지금 조정의 상황으로는 그조차 여의치 않았다.
이윽고 잠시 고민하던 옥환이 갑자기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러더니 그는 말도 없이 처소의 문을 나섰다.
“승상, 어디 가십니까?”
놀란 계평이 서둘러 옥환의 뒤를 따르는데 마침 옥환이 문 앞에서 만난 하인 하나에게 이렇게 일렀다.
“편전으로 안내해 다오. 전하를 뵈어야겠다.”
하인은 다소 의외라는 얼굴로, 그러나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얌전히 앞장섰다. 옥환은 그간 자신의 처지를 생각해서인지 아니면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서인지 처소 밖으로 통 나가지 않았었다. 나가더라도 이따금 처소 앞을 산책하는 게 다였고, 왕궁 안, 그것도 편전이 있는 본궁에 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하나 옥환은 망설이지 않았다. 그렇게 걱정이 되면 직접 만나러 가면 될 일이었다. 가서 무슨 말을 할지, 승헌이 이번엔 또 어떤 심술을 부려 저를 곤란하게 만들지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지금의 상황을 타개할 방법은 오직 이것뿐이었다.
얼마 후, 옥환 일행의 눈앞에 거대한 전각이 모습을 드러냈다. 왕이 머무는 편전이었다. 옥환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 안으로 발을 들였다. 당연하게도 병사들이 문 앞을 막았으나 금야 선생이라는 말을 듣고는 눈이 휘둥그레져 금세 비켜났다.
처음 서국에 입성할 때도 보았으나, 서국의 왕궁은 벽국에 비해 훨씬 더 크고 웅장했다. 복도에 놓인 기둥에조차 화려한 용 문양이 새겨져 있을 정도였다. 계평은 자신이 지내던 벽국의 궁과 이곳을 비교하며 이리저리로 눈을 굴렸다. 하나 옥환은 이조차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염완은 왕궁 축조에 최소한의 인력과 자금만을 썼다. 어차피 먹고 자고만 하면 그만인데 살 집이 조금 남루하다고 해서 뭐 어떻냐는 식이었다. 처음에는 반대하던 옥환도 전쟁 이후 어려워진 백성들의 삶을 염려해 결국 염완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해서 그는 벽국의 초라한 궁이 부끄럽지 않았다. 도리어 백성의 입장은 조금도 고려하지 않는 서국의 궁이 못마땅했다.
가여운 백성들을 위해서라도, 이 소모전을 한시라도 빨리 끝내야 한다. 옥환은 다시금 마음을 굳게 먹었다. 그리고 그가 편전의 코앞에 다다랐을 때, 마침 편전 밖으로 나온 이가 있었다. 승헌의 측근 장수인 백고였다. 옥환을 발견하고는 한껏 표정이 밝아진 그는 반가운 얼굴로 옥환에게 냉큼 달려왔다.
“선생!”
옥환도 “백 장군.” 하고 아는 체를 했다. 백고는 그간 잘 지냈냐며 옥환의 이런저런 안부를 물어왔다. 옥환은 속으로 성가셔 하면서도 그것에 일일이 대답해 주다가 문득 그의 손에 들린 두루마리를 보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아, 예. 전하께서 내리신 교서입니다. 지방에 민란이 일어나서, 그를 토벌할 부대의 지휘관으로 저를 임명하신 겁니다.”
“장군을요? 역시 전하께서 장군을 퍽 신뢰하시는 모양입니다.”
“하하, 과찬이십니다. 그 기대에 부응할 수 있어야 할 텐데 말입니다.”
옥환은 짧은 순간 편전의 문과 백고를 번갈아 보았다. 그러더니 그는 곧 백고에게 뜻밖의 제안을 건넸다.
“장군. 이렇게 만나 뵌 것도 반가운데 잠시 저와 차라도 한잔하시지 않겠습니까?”
“예……?”
지아비를 모신 몸이라며 축객을 할 때는 언제고 갑자기 차를 마시자는 옥환의 말에 백고는 동요한 듯 보였다. 그것을 눈치챈 옥환은 섭섭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바꾸었다.
“아…… 장군께선 곧 민란이 일어난 지방으로 떠나셔야 할 테니 여러모로 바쁘시겠지요? 저도 한동안 장군을 뵙지 못할 것이 아쉬워 드린 말씀이었습니다만,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아니, 저…….”
“아무래도 전에 장군을 돌려보낸 일이 계속 마음에 걸려서 그만……. 죄송합니다, 백 장군.”
옥환이 눈을 내리깔고 서글픈 사과를 건넸다. 기다란 속눈썹이 얇은 사紗처럼 곱게 드리워졌다. 말간 뺨에는 안타까운 빛이 어리고, 봉숭아꽃처럼 불그레한 입술은 슬픔을 참아 내듯 꾹 다물렸다. 그 모습을 홀린 듯 바라보던 백고는 옥환이 그대로 고개를 들고 저를 보자 무의식적으로 툭 내뱉었다.
“괘, 괜찮습니다. 차 마실 시간 정도는…….”
“그렇습니까? 잘됐습니다. 하면 제 처소로 가시지요.”
옥환은 어느새 평소의 차분한 모습으로 돌아와 그렇게 이르고는 휙 앞장서 걸어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계평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으나, 정작 옥환의 수에 당한 백고는 기꺼워하며 옥환의 뒤를 따를 뿐이었다.
잠시 뒤 백고와 함께 처소로 돌아온 옥환은 계평이 내온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었다. 그렇게 시답잖은 화제로 대화를 이어가던 옥환이 방금 편전 앞에서 나누었던 화제를 들고 나왔다.
“하면 장군. 민란을 토벌하러 언제쯤 내려가십니까?”
“바로 내일 갑니다. 난을 일으킨 폭도들이 관원들을 몰아내고 관청을 점령한 데다가…… 일전에 보낸 장군이 토벌에 실패하고 폭도들에게 사로잡힌 모양이라서 말입니다. 그 소식을 들으신 전하께서 굉장히 노하셨기 때문에…….”
“예. 저도 조정이 여러 일로 혼란스럽다는 얘기는 건너 들었습니다. 백 장군도 그렇고 전하께서도 심려가 크시겠습니다.”
“저야 뭐, 검밖에 모르는 놈이니 정쟁에 휘말리지는 않았습니다만…… 제 눈에도 관리들이 편을 나눠 싸우는 게 보기 좋지는 않습니다. 전하께서 혼을 내셔도 잠깐뿐이고요. 이렇게 하면 무관들이 난리를 치고, 저렇게 하면 문관들이 난리를 치니 전하께서 무엇을 하시기도 쉽지 않습니다.”
백고의 이야기에 옥환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나라는 무인이 세웠을지언정 그것을 다스리는 데엔 문인의 힘이 필요한 법이다. 그 두 세력 간의 다툼은 서국 조정이 한 번은 거쳐야 할 필연적인 과정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이겨 내는 것은 순전히 승헌의 재량에 달린 문제였다. 염완은 문인도, 무인도 아니었으나 미천한 시골 농민 출신으로 비슷한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이겨냈다. 옥환의 도움 없이도.
그리고 아마 승헌도 이겨 낼 것이다. 이겨 내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지금껏 서국과 싸워 온, 서국을 이기려 여기까지 온 의미가. 견승헌은, 훌륭한 왕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분명 왕의 재목이었다. 어차피 자신이 걱정해 봤자 도울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옥환은 그에 대한 생각은 잠시 접어두었다.
그리고 때에 맞추어 백고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그…… 전하께 선생의 등용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지만 지금은 영 때가 좋지 않아서 말입니다.”
이것은 굳이 손을 쓰지 않아도 될지 모르겠다. 옥환은 그런 생각을 하며 입을 열었다.
“괜찮습니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지요.”
“하나 선생이 조정에 계시면 지금의 어려움도 쉬이 이겨낼 수 있었을지 모르는데…….”
백고는 아쉬운 얼굴로 말끝을 흐렸다. 옥환은 지금의 어려움이 바로 자신이 조정에 들어갈 최적의 기회라고 확신했다.
이윽고 옥환이 자세를 바로잡고 표정을 굳혔다. 옥환의 분위기가 전에 없이 무겁고 진중하게 바뀌자 백고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새삼 그가 천하제일의 책사이자 명재상이라는 실감이 났다.
“백 장군.”
좀 전까지와는 달리 가라앉은 옥환의 부름에 백고는 살짝 긴장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옥환은 이어 물었다.
“저를, 믿어 주실 수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선생께서는 이미 서국의 백성이 아니십니까. 다른 이들이 뭐라 하든 저는 선생이 서국에 도움을 주실 분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하나 백고의 대답에 옥환은 만족한 표정도, 그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심각한 표정을 지은 채 질문을 이어갔다.
“하면 제가 시키는 대로 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무엇이든 의심하지 않고, 거스르지 않고.”
백고가 재빨리 대답하려고 하자 옥환이 손짓으로 그것을 제지했다. 이것은 충동적으로 대답할 일이 아니었다. 자신이 앞으로 백고에게 시킬 것은 의심을 사기 충분한 것이었으니까. 하나 그가 자신의 뜻대로 해 주지 않으면 이 작전은 실패하고 만다. 그렇기에 옥환은 백고의 맹목적인 신뢰가 필요했다. 그것은 힘든 일이긴 했으나, 옥환은 자신을 믿었다. 백고에게서 그것을 끌어낼 수 있으리라고.
“장군. 앞으로 제가 장군께 부탁드릴 일은 어쩌면 터무니없고, 선뜻 이해가 가지 않을 일일지도 모릅니다. 하나 하늘에 대고 맹세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민란을 제압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라고.”
이는 사실이었다. 민란을 제압하기 위한 일이라고 했지, 서국을 위한 일이라고는 하지 않았으니까. 옥환은 민란을 제압할 작정이었다. 서국이 아닌, 자신과 벽국을 위해서.
“선생께선 비책이 있으신 겁니까?”
“……아직은 모릅니다. 저는 서국의 상황도, 민란의 원인도 파악하지 못했으니까요. 하니 장군께서 제 눈이 되어 주셔야 합니다.”
“눈이라니요? 하면 선생께선…….”
무언가를 짐작한 백고가 말끝을 흐리자 옥환이 그의 양손을 붙잡고 말했다.
“장군. 민란의 진원지에 가시거든 그곳의 상황과 관련된 정보들을 전부 제게 보고해 주십시오.”
백고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사실 그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다만 이번 토벌은 저 혼자서 가는 게 아니었다. 보는 눈이 있는 상황에서, 서국 조정의 완전한 신뢰를 얻지 못한 옥환에게 민란의 정보를 전달하는 건 차후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었다.
게다가 옥환이 전에 말했던 대로 그는 이제 승헌의 첩이었다. 첩이 되기 전이라면 또 몰라도 첩이 된 이상 그는 더 이상 정사에 참여해선 안 되는 위치였다. 그렇기에 백고 자신도 옥환이 첩 자리가 아닌 제대로 된 관직을 받을 수 있길 바랐지 않은가.
그리고 한편으로는, 주군인 승헌이 제게 준 일을 시도도 해보지 않고 옥환에게 맡기는 게 자존심이 상하기도 하고 무책임하게 여겨지기도 했다.
백고가 섣불리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침묵하자,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옥환이 입을 열었다.
“어려운 일이라는 것 압니다. 왜 제가 나서려 하는지도 이해하기 어려우실 겁니다. 하나 이번 난은…… 쉬이 평정될 종류의 것이 아닙니다. 다른 계층도 아니고 무려 백성들이 일으킨 난입니다. 힘으로 억누르면 난은 가라앉겠으나, 민심은 더더욱 흉포해질 것입니다.”
“…….”
여전히 백고는 대답하지 못했다. 하나 옥환은 실망하지도, 단념하지도 않았다. 백고 또한 무관이다. 완고하고, 융통성 없는. 그와 같은 무관을 많이 봐온 만큼 옥환은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정 그러시면, 직접 가서 눈으로 확인해 보십시오. 그 이후에 혹 제가 필요하다고 여겨지시면 그때 서찰을 보내 주셔도 상관없습니다.”
“서, 선생. 저는…….”
“백 장군께서 왜 망설이시는지 모르지 않습니다. 저는 괜찮으니 그저 한 가지만 약조해 주십시오. 도움이 필요할 때는 반드시, 저를 찾으시겠다고.”
무안한 표정을 짓고 있던 백고는 옥환의 당부에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곧 백고를 떠나보낸 옥환은 멀어지는 그의 등을 한동안 가만히 바라보고 서 있었다.
“괜찮을까요?”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계평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옥환은 짧게 답했다.
“생각이 있는 자라면 날 찾겠지.”
그러고는 쌩하니 처소 안으로 들어가는 옥환을 보며 계평은 새삼 그의 자신감에 기가 찼다. 하나 그것이 영 근거가 없는 것만은 아니라 아무 말도 못 하고 그저 옥환의 뒤를 따를 뿐이었다.
자리로 돌아온 옥환이 읽다 만 서책이나 마저 읽으려는데, 누군가가 그의 앞에 슬그머니 다가왔다. 지난번 글을 가르쳐주었던 어린 하인이었다. 아이의 이름은 “종소”라고 했다. 옥환은 그 뒤로도 몇 번 종소에게 글을 가르쳤고, 종소 역시 공부에 재미를 붙였는지 옥환을 스승님이라 부르며 잘 따랐다.
오늘도 옥환이 여유로운 틈을 타 서책을 가져온 종소가 손을 꿈지럭거리자, 그의 속내를 눈치챈 옥환이 웃으며 계평에게 붓과 종이를 가져오라 일렀다.
“스승님, 스승님. 오늘은 소인이 배우고 싶은 글자가 있습니다.”
빈 종이를 앞에 두고 종소가 호기롭게 청했다. 옥환은 흔쾌히 받아들이고는 배우고 싶은 글자가 무엇이냐 물었다.
“저어…… 스승님의 자字가 알고 싶습니다.”
“내 자? 금야 말이냐?”
종소는 고개를 끄덕였다. 옥환은 잠시 의외라는 얼굴을 했으나 곧 아무렇지 않게 글자를 가르쳐 주었다. 옥환이 써준 고상한 글자를 보며 감탄하던 종소는 이윽고 질문을 던졌다.
“스승님. 한데 왜 자를 금야라고 지으셨는지 여쭤봐도 되나요?”
“음, 그래. 그럼 옛날얘기부터 해야겠구나. 예전에, 벽국에 가기도 전에 말이다. 나는 혼자 농사를 짓고 살았단다.”
“예전이요?”
“그래. 10년도 더 됐지.”
10년도 더 된 예전에 혼자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는 말에 종소는 의아한 얼굴을 했다. 10년 전이면 어린아이셨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옥환의 나이는 종잡을 수가 없었다. 하나 옥환은 자상한 미소로 말을 이었다.
“일 년 동안 고생을 해가며 농작물을 보살피고, 겨우 첫 수확기를 맞았단다. 벼를 수확하던 날, 잘 여문 벼들이 한없이 펼쳐져 있는 모습은…… 그간의 고생을 모두 잊게 해 주었지. 그것은 영영 잊을 수 없을 광경이었단다. ……너는 가을철의 논을 본 적이 있느냐?”
“소인은 어릴 적부터 궁에서 일해서 잘 모릅니다……. 하나 벼가 노랗다는 것은 알아요.”
그렇게 말한 종소는 곧 무언가를 깨달았는지 “아!” 하고 작게 감탄했다.
“노란 벼가 잔뜩 있어서 금빛 들판이라고 하신 거지요?”
종소가 내놓은 해답에 옥환은 그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던 밝은 미소를 지으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참으로 똘똘하구나. 왕궁과 달리 궁밖에는 아직 밥을 마음껏 먹지 못하는 백성들이 많단다. 아주 예전에는 금빛 들판이 많았지만, 계속된 전쟁으로 많이 사라졌으니 말이다. 나는 금빛 물결이 넘실거리는 그런 들판이 다시 살아나길 바라. 아무도 굶지 않는 세상이. 그것을 위해 내 자를 금야라고 지은 것이란다.”
종소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으나 옥환은 그것을 보지 못했다. 누군가가 “그렇군.” 하고 대답을 했기 때문이었다. 옥환이 소리가 난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자 어느샌가 나타난 승헌이 창틀에 팔을 걸치고 웃는 모습이 보였다. 옥환은 눈을 치켜뜬 채 승헌을 바라보았고, 종소와 계평은 화들짝 놀라 아연실색했다.
“옥환.”
승헌은 미소를 지으며 옥환의 이름을 불렀다. 언제나와 같은 그 미소였다. 옥환은 천천히 눈을 한 번 감았다 뜨고는 본래의 침착한 모습으로 승헌을 대했다.
“전하.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오셨으면 오셨다고 기별을 주시거나, 하다못해 문으로 들어오십시오.”
“나를 보면 그대는 금세 설인 같은 표정을 짓잖아. 하나 이 아이를 볼 때는 한없이 자애로우니 그게 재미있어서.”
갑자기 지목을 당한 종소는 두 사람 사이에서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몸을 물렸다. 어린아이의 눈에도 옥환과 승헌의 사이에는 쌩쌩 찬바람이 부는 듯했다. 교합 이후 첫 만남이었다. 몸을 섞은 데다가 마지막엔 그런 식으로 헤어졌으니, 아무래도 서로가 껄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하나 승헌은 전과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그것에 왠지 모를 안도를 느낀 옥환에게 승헌이 말을 걸었다.
“그대가 편전에까지 왔다가 돌아갔다는 말을 들었어. 설마 내가 보고 싶어서 왔을 리는 없을 테고…… 백고를 만났다지?”
그럼 그렇지, 여기까지 온 것도 제 행동을 탐색하기 위한 것이었나. 옥환은 그것을 마뜩잖게 여기면서도 승헌의 질문에 무어라고 둘러댈지 고민했다. 그러다 그는 문득 떠오른 답을 그대로 입 밖에 내었다.
“보고 싶어서였습니다.”
“……뭐?”
“요즘 전하께서 통 저를 찾지 않으시니, 마냥 기다리기가 답답하여 찾아간 것입니다. 하나 전하께선 일국의 왕이 아니십니까. 이렇게 보고 싶다고 볼 수 있는 게 아니란 생각에 돌아가려 한 것입니다. 백 장군은 좋은 명분이 되어 주었고요.”
옥환의 대답에 계평과 종소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고, 승헌마저도 잠시 얼이 빠진 표정을 지었다. 그런 승헌의 반응을 보니 옥환은 꽁했던 속이 좀 풀리는 것 같았다.
한데 그때, 승헌이 창밖에서 그대로 손을 뻗어 옥환의 뺨을 감쌌다.
“내가 그리 보고 싶었는 줄은 몰랐군. 이렇게나 지고지순한 정인을 버려두었으니 궁 안에 매정한 서방이라고 소문이 나겠어.”
아무튼 능청스럽기로는 따를 자가 없는 인물이었다. 아마 서국에서 제일가는 능구렁이는 바로 눈앞의 사내일 것이라고 생각하며 옥환은 승헌의 손을 떼어내려 했다.
“별로…….”
한데 대답을 하려던 옥환의 입술이 돌연 다가온 승헌의 입술에 의해 틀어막혔다. 갑작스러운 접문이었다. 옥환은 눈을 크게 뜬 채 다소 느리게,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깨닫고 있었다.
반면 창을 넘어 옥환에게 입을 맞춘 승헌은 입술을 떼고는 다정다감한 미소와 함께 말했다.
“나도 보고 싶었어, 옥환.”
“…….”
옥환은 무의식적으로 입을 닦으려다가 겨우 참아냈고, 눈이 휘둥그레져 무어라 말을 하려던 계평은 종소에 의해 끌려나갔다. 방해꾼이 사라지고 나자 승헌은 악동 같은 얼굴로 창을 훌쩍 넘어왔다.
양 뺨에 오른 열을 느끼면서도 그것이 티 나지 않길 바라며 옥환은 싸늘하게 쏘아붙였다.
“전하. 문으로 다니십시오. 체통이 없으십니다.”
“그대가 문을 안 열어 줬잖아. 뭐, 나도 바빠서 금방 가려고는 했지만.”
그런 사람이 아예 눌러앉는 건 무슨 경우인지? 옥환은 하고 싶은 말을 삼키고는 하는 수 없이 손수 차를 내왔다.
여전히 옥환이 뾰로통한 얼굴을 하고 있자 승헌이 시원하게 식힌 차를 들이켠 뒤 짧게 을러댔다.
“어린아이가 있으니 그 정도로 해준 줄 알아.”
승헌의 말에 옥환의 머릿속에는 계평 앞에서 제 입안에 혀를 넣고 휘저어대는 승헌의 모습이 떠올랐다. 종소가 있었던 게 정말 다행이라면 다행인 일이었다.
하나 옥환은 승헌이 정말로 태연한 건지 알 수 없었다. 정녕 화가 나지 않은 걸까? 그에게 그 일은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았나?
‘대범한 건지, 무심한 건지…… 그도 아니면 교활한 건가.’
“해서, 금야 선생.”
새삼스러운 호칭에 옥환이 상념에서 깨어 승헌을 바라보았다.
“농사를 지었다고?”
“……예.”
대체 언제부터 자신들의 얘기를 듣고 있었나 싶어 옥환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일국의 왕에, 도깨비 장수라는 별명에, 누가 봐도 대장부인 승헌이 창 밑에 쭈그리고 앉아 남의 얘기를 엿듣고 있는 모습은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았다.
“나는 그대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는 것 같군.”
“과거는 신경 쓰지 않는 분이 아니십니까.”
“과거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않는 것이지, 그대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는 게 아니야.”
“…….”
“가령, 그대가 벽국의 신하였던 것은 상관하지 않아. 하나 나 외의 다른 사내를 품은 적이 있다면 그건 못 참아.”
옥환은 더더욱 표정을 구긴 채 승헌을 바라보았다. 따지자면 수도 없이 받아칠 부분이 많았다. 무엇보다 첫째로 자신은 사내에게 안긴 경험이 없다고 확실히 말했고, 둘째로 자신들의 관계는 거래에 불과했으며, 셋째로 저를 툭하면 시험해 볼 땐 언제고 질투한다는 말을 하는 건 몹시도 기가 막힌 일이었다.
할 말이 많다는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도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옥환에게 승헌이 놀리듯 물었다.
“왜, 옥환? 그대의 입으로 말했잖아. 뭇 사내라면 원하는 상대를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법이라며?”
“지금 이 순간에 전하의 것이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그게 아닌 것 같아서.”
승헌의 의미심장한 발언에 찻잔을 집으려던 옥환이 헛손질을 했으나, 옥환은 그것을 내색하지 않고 다시 찻잔을 들었다. 이 사내는 또 자신을 시험해 볼 요량이다. 당연한 일이었다. 지난번의 실책이 있었으니.
“그대를 곤란하게 할 생각은 없어. 하지만 안아 보니 알겠어. 그대는 돌부처도 홀릴 사람이라는 걸.”
옥환은 바짝 긴장했다. 말로는 마치 자신을 아껴서 그러는 것처럼 하고 있지만, 지난 일로 의심을 더욱 키운 그는 자신에게 족쇄를 씌우려 하는 게 분명했다. 하나 섣불리 나섰다간 불난 집에 기름만 붓는 꼴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옥환은 말없이 소매 밑의 주먹만 굳게 쥐었다.
“옥환. 이전에 했던 말은 철회하지. 나는 인색한 서방이 되어야겠어.”
“……하면…….”
승헌은 턱을 괸 채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나 말고는 아무도 만나지 마.”
“…….”
“내가 어느 정도 그대를 자유롭게 놔두고 있었던 걸 그대도 알 거야. 하나 이젠 안 돼. 나 외엔 아무도 만나지 마. 내 명이 없이는, 여기서 나가서도 안 돼.”
명백한 금족령이었다. 옥환은 입술을 깨물었다. 불쌍한 척을 해서 설득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으나, 승헌은 백고와 달리 쉬이 넘어오지 않을 터였다. 몸까지 내주었으니 이젠 더 거래에 내걸 대가도 없었고, 제 실수가 자초한 일인 만큼 누굴 탓하기도 어려웠다.
그렇다면 차라리 순순히 받아들이는 쪽이 나았다. 결백함을 호소하기 위해서도 그 방법이 최적이었고, 사람을 못 만나고 밖에 나가지 못한다고 해서 바깥과의 모든 통로가 막힌 것도 아니었으니까.
“알겠습니다. 다만 조금 답답하긴 할 테니…… 전하께서 자주 찾아와 주십시오.”
의외의 반응에 승헌은 눈을 가늘게 뜨고 옥환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옥환은 묵묵히 그 시선을 받아냈다. 승헌도 옥환도 자신이 한 말에 진심 따위는 갖고 있지 않았고, 상대가 한 말을 믿지도 않았다.
그렇게 서로를 의심하고 탐색하며 이어지던 정적을 깨고, 승헌이 옥환의 뺨을 가볍게 쓰다듬은 뒤 말했다.
“걱정하지 마. 외롭게 하진 않을 테니까.”
옥환은 그저 웃었다. 염완이 죽은 뒤로 한 번도 사라진 적이 없던 이 외로움을, 승헌이 없앨 수 있을 리 만무했기에.
***
승헌의 금족령은 일견 옥환에게 치명상을 입힌 것처럼 보였으나, 기실 옥환에게 그 일은 그리 큰일이 아니었다. 원래부터 밖으로 잘 나가지도 않았고, 첩이 됐다는 이유로 몸을 사리고 나서는 찾아오는 객도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백고와의 연락은 서찰로 주고받을 예정이었다. 물론 백고와 서찰을 주고받는 걸 알면 승헌이 그것을 막으려 들겠으나, 아직 승헌도 거기까지는 생각이 닿지 못했을 터였다.
그럼에도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옥환은 얌전한 첩을 연기하며 승헌의 의심을 걷어내려 애를 썼다. 그리고 다행이라고 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외롭게 하지 않겠다 약속한 뒤로 승헌은 매일같이 옥환의 처소를 찾았다. 물론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고 왔다가도 오래 있지 못하고 금방 돌아가야 했지만, 그는 하루도 빠짐없이 옥환을 만나러 왔다. 조정이 혼란스럽고 난이 평정되지 않아도, 그래서 아무리 생각할 거리가 많고 일이 많아도.
그리고 오늘도 승헌은 그 약속을 지켰다.
어제와 다름없이 잘생긴 얼굴에 내려앉은 그림자를 보며 옥환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얼마 전부터 계속 이런 상태였다. 옥환은 승헌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이번에도 저를 곤란에 빠트리려 벌이는 행동이겠으나, 옥환은 그것이 가소롭지도, 화가 나지도 않았다. 솔직히 말해서…… 마음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이윽고 옥환은 직접 승헌에게 차를 내주었다. 습관적으로 그것을 마시려던 승헌은 평소와 다른 향에 찻잔의 내용물을 확인했다. 그 안에 든 것은 어제까지 마셨던 연녹색의 엽차가 아니었다.
이게 무어냐고 옥환에게 눈빛으로 물으니, 옥환이 그것을 용케 알아듣고는 대꾸했다.
“도라지 차입니다. 원기 회복에 좋다 해서 준비한 것이니 그냥 드십시오.”
승헌은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도라지 술이라면 환영인데.” 하고 투덜거렸다. 유치한 불평에 옥환이 눈살을 찌푸렸으나 승헌은 한 모금 마셔보고는 아예 찻잔을 내려놓고야 말았다.
“이런 건 됐어. 안 그래도 태의가 매일매일 쓰디쓴 보약을 갖다 주고 있으니까.”
“……하면 하다못해 제 처소에 들르시는 거라도 그만두십시오. 어차피 그 잠깐 들르신다고 딱히 달라지는 것도 없습니다.”
옥환의 냉정한 어조에도 승헌은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크게 하품을 했다. 그러다 여전히 다소 불안한 눈길을 보내고 있는 옥환과 눈이 마주치자, 씩 웃으며 한마디를 던졌다.
“정 그렇게 내가 걱정이면 이런 차가 아니라 무릎베개라도 해 주든가.”
“제 무릎은 딱딱해서 편하지 않으실 텐데요.”
당연하면 당연하게도 쌀쌀맞은 반응이 돌아왔으나 그다음 순간 승헌은 제 눈을 의심했다. 옥환이 곁으로 다가와 얌전히 무릎을 내준 것이다. 하나 당황하는 것도 잠시, 승헌은 모처럼의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것처럼 냉큼 옥환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
분명 옷이 사이에 있는데도 어쩐지 승헌의 머리칼이 제 무릎을 간지럽히는 것 같다고 느끼며 옥환은 일부러 시선을 허공에 두었다. 둘 곳을 잃은 손은 어색하게 바닥에 놓여 있었다. 그는 자신의 모습이 퍽 우스꽝스러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데 그런 옥환을 빤히 바라보던 승헌이 불쑥 입을 열었다.
“옥환.”
“예.”
“그대는 참 곱군.”
옥환은 승헌을 내려다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보는 위치에서는 자신이 고와 보이지 않을 것 같았다. 그는 그 말에 담긴 속뜻을 파악하려는 듯 승헌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승헌은 마치 그것을 눈치채기라도 한 것처럼 스르르 눈을 감고 말을 이었다.
“그 고운 얼굴 때문에 나는 마치 나쁜 사람이 된 기분이 들어.”
“…….”
옥환은 뭔 소린지 물으려다가 승헌이 잠들려는 것 같아 그냥 두었다. 그리고 승헌은 정말로 잠이 들었는지, 그 뒤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곤한 숨소리만 냈다.
내내 딴 곳을 보다가 겨우 허공에서 시선을 내린 옥환은 승헌이 잠든 것을 확인하고는 천천히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견승헌. 적들의 우두머리인 그가 제 무릎 위에서 자고 있다니, 계평이 보면 뒤로 넘어갈 모습이었다. 하나 무방비하게 잠들어 있어서 그런지 옥환은 딱히 승헌이 적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그저 평범한 청년 같았다. 눈에 띄게 잘생긴 것만 빼면.
자신 또한 남다른 외모로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았긴 하지만, 옥환의 생각에는 승헌 역시 인기가 많을 것 같았다. 그의 외모는 옥환이 봐온 수많은 사내 중 손에 꼽힐 정도였다.
짙은 눈썹과 강렬한 눈매, 날렵한 콧날과 선이 뚜렷한 입술은 그야말로 사내대장부의 얼굴이었다. 전장에 자주 나가는 만큼 다소 그을린 피부와 떡 벌어진 어깨도 그런 인상을 강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전에 스치듯 들은 바로는 왕이 되기 전 원정을 나갈 때마다 많은 여인이 승헌의 수청을 들고 싶어 했다는 듯했다.
‘그런 사내가 나 같은 자의 비위를 왜 맞추고 있는지.’
지난번 금야의 의미에 대해 설명할 때는 자세히 이야기하지 않았으나, 옥환은 어릴 적에 부모와 떨어져서 숙부 내외와 함께 살았다. 하나 옥환이 성인이 되기 전에 그들마저 세상을 떠났고, 그 뒤 옥환은 숙부가 남겨준 땅 한 마지기에 직접 농사를 지었다.
그러다 일국의 군대가 옥환이 살던 마을을 공격하면서 옥환은 그 작은 터전을 잃고 세상으로 나오게 되었다. 처음에 다른 이를 따르던 그는 곧 염완을 만나 그의 책사가 되었고, 머잖아 세상에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그리고…… 염완은 죽었다. 정말로 갑작스럽게.
숙부 내외와 살았을 때, 염완의 책사로 지냈을 때를 제하면 옥환은 내내 혼자였다. 사람들은 옥환의 마음보다 외모를 보았고, 함께 대화를 나누기보다는 제게 가르침을 내려 주기를 바랐다. 옥환은 누군가에게 속내를 터놓은 적도, 위로를 구한 적도 없었다.
그렇게 오직 홀로 염완의 뜻과 벽국을 짊어졌다. 그것이 옥환의 외로움이었다. 보통 사람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무거운.
그런 자신의 외로움을 승헌은 정말로 달래 보려는 것일까? 고작 이 작은 공간에 갇혀서 지내는 것이 자신이 느끼는 외로움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건가?
‘그렇다면 다 부질없는 짓이다.’
부질없는 짓이니, 그만해야 옳았다. 한데도 멈추지 않는다.
제 무릎을 베고 누워 잠든 이 사내가 자신을 신용하지 않는다는 건 옥환도 알았다. 그렇다면 그가 이런 행동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직, 자신을 회유하고 싶어 하는 것인가.
평소와 같은 짓궂은 장난이라고 생각하기엔 드는 노력에 비해 성과가 적었다. 옥환은 이제 승헌이 자신을 정말 활용하고 싶어 하는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승헌에게 있어 옥환은 계륵일 뿐이었다. 그가 유능한 인재를 좋아하는 건 알았지만 집착이 강한 사람이라고 보기는 힘들었다. 그리고 굳이 승헌의 성정을 따지고 들지 않아도, 객관적으로 봤을 때 승헌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정말로 저와 한 약속을 지키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대체 왜? 자주 찾아와 달라고 한 건 맞지만, 매일 와 달라고는 하지 않았다. 애초에 자주 와 달라고 했던 말도 그저 빈말이었음을 승헌 또한 알 것이다.
‘……아니면 나를 이토록 혼란스럽게 하는 것이 목적일지도 모르지.’
그런 추측에 다다라 옥환은 그만 복잡한 머릿속을 갈무리해야겠다는 판단이 섰다. 이렇게 승헌의 진의를 고민하는 게 그의 손안에서 놀아나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잡념을 훌훌 털어 버리고 승헌을 언제쯤 깨워야 할지나 고민하던 옥환은 불현듯 구름이 움직여 햇빛이 쏟아지자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다 잠든 승헌의 얼굴에도 햇볕이 내리쬐고 있다는 걸 깨닫고는 손을 들어 그것을 막았다. 그런 옥환의 귓가에는 승헌이 했던 말이 맴돌았다.
“그 고운 얼굴 때문에 나는 마치 나쁜 사람이 된 기분이 들어.” 승헌은 그렇게 말했었다. 옥환은 그 말뜻이 무엇이었는지 이제야 조금 이해할 것 같았다.
제게 쏟아지는 햇빛은 아랑곳하지 않고 승헌에게 쏟아지는 햇빛을 막아주고 있는 게, 이 잘생긴 얼굴 때문인 것 같다고 느끼는 지금 이 기분과 비슷한 것이리라.
“……더워.”
옥환은 그렇게 중얼거렸으나 손을 움직이지는 않았다. 이럴 거면 그냥 관두면 될 텐데. 어쩌면 승헌보다 더 오리무중인 것은 저 자신의 속내일지도 몰랐다.
***
백고가 떠난 지 달포가 흘렀다. 무더위는 절정에 다다랐으나 조정의 혼란은 조금씩 소강상태에 접어들고 있었다. 다만 여전히 해결하지 못한 민란이 승헌의 유일한 걸림돌로 남아 있었다.
“승상.”
그리고 그날도 처소에 들른 승헌을 배웅하고 난 뒤 뒷정리를 하던 옥환은 계평의 부름에 고개를 들었다. 계평은 손에 들고 있던 것을 아무 말 없이 옥환에게 넘겨주었다. 옥환은 그 즉시 계평이 준 것이 백고에게서 온 서찰임을 직감했다.
옥환이 고갯짓으로 창을 닫으라 명하자 계평이 얼른 열려 있던 모든 창문을 닫았다. 옥환은 자리에 앉아 빠른 손놀림으로 서찰을 펼쳤다.
‘금야 선생께.’
그렇게 시작한 서찰은 짧은 안부와 함께 도움을 바란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백고가 아는 난에 대한 정보가 적혀 있었다. 그간 있었던 일과 현 상황 등이었다. 그리 자세한 것은 아니었으나 지금 상황에선 추가로 무언가를 요청하기도 어려웠다. 백고와 여러 번 서찰을 주고받으면 승헌에게 들킬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이 부족한 정보로 어떻게든 해결책을 내야만 했다.
달포. 달포 동안 민란은 가라앉지 않았다. 그간 군량도 바닥이 나 백고와 장수들은 새로이 군량을 요청했다고 한다. 당연히 승헌은 역정을 냈고, 일주일 안에 해결하고 돌아오지 않으면 목을 베어 버리겠다고 엄포를 했다는 모양이었다.
좀 전까지만 해도 맞은편에 앉아 저에게 생글생글 눈웃음을 치던 사내가 휘하 장수에게 목을 베어 버리겠다며 화를 내는 모습은 아무래도 상상하기가 힘들었다. 아마 승헌에게는 제게 보여주지 않는 모습이 있을 것이다. 군왕으로서의 모습이. 자신은 신하가 아니니 그런 걸 보여줄 필요가 없었던 것이겠지. 아니, 오히려 경계하고 있기에 더더욱.
옥환은 머릿속에서 승헌에 대한 생각을 밀어내고 다시 서찰로 눈을 돌렸다. 일단은 시간을 벌어야 했다. 아무것도 나아진 게 없는 지금 상황에서는 일주일 안에 난을 평정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최소 보름의 유예. 그리고 군량도 필요하다. 서찰이 오고 가는 시간까지 합하면 더 긴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하나 그 부분은 백고가 어떻게든 해결해 주길 바랄 수밖에 없었다.
민란은 궁지에 몰린 백성들이 택하는 최후의 방도다. 하니 그들의 흉흉한 민심을 가라앉히면 자연히 난도 가라앉을 것이었다.
백고가 준 서찰에 의하면 사건의 발단은 새로 부임한 지방 관리가 백성들을 착취하면서부터라고 했다. 안 그래도 흉년으로 고통받던 와중 관리가 정해진 것보다 더 많은 세전을 거둬들이면서 백성들의 불만이 폭증했고, 그것이 여러 일을 거쳐 폭동으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그 폭동이 점차 주변 지역으로 번지면서 결국 민란으로까지 이어지고 말았다.
‘진작에 관리를 내쳤으면 이렇게까지는 되지 않았을 텐데.’
아마 윗선까지 보고가 들어가지 않은 것은 부패한 관리들이 그것을 막았기 때문일 터다. 벽국에서도 익히 있었던 일이니 옥환은 그것이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국력이 강하다고 해서 그것이 투명한 정치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나라가 잘살고 커질수록 부정부패는 증가하는 법이었다. 여유가 생기면 곧바로 욕심을 부리는 게 사람의 천성이니까.
“저도 들었습니다만 민란의 규모가 점점 더 커지는 모양입니다.”
계평의 첨언에 옥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민란이라고 얕볼 것이 아니다. 여기서 어떻게든 막지 않으면 서국은 장차 나라의 근간을 위협받을 수도 있었다.
하나 가여운 백성들에게 누가 죄를 물을 수 있겠는가.
생각을 정리한 옥환은 붓을 들어 백고에게 보낼 답서를 써 내려갔다. 옥환의 첫 번째 지시는 아래와 같았다.
‘지원받은 군량미를 풀어 백성들에게 나눠 주십시오.’
슬그머니 옥환이 쓴 내용을 훔쳐본 계평이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백고가 과연 저대로 할 수 있을지 확신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겨우 받아낸 군량을 낭비하는 것이 아닌가. 병사들을 먹이지 않으면 폭도들과 싸울 수도 없다. 이 방법은 자신의 살점을 내어 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나 옥환은 막힘없이 두 번째, 세 번째 지시를 써 내려갔다.
‘하옥한 죄인 중 일부를 풀어 주십시오. 그 뒤 그들에게 금전을 나누어 주고, 죄인 중 밀고자가 있었다는 소문을 퍼뜨리십시오.’
‘민란지 근방에 전염병 등으로 사라진 마을이 있다면 그곳을 뒤져 보십시오. 폭도들의 거점은 그곳에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옥환의 세 가지 지시를 보고 화들짝 놀랐던 계평은 그가 마지막으로 적은 내용을 보고는 더더욱 기함했다.
‘실제 밀고자가 나오든 거점을 찾아냈든 주동자를 발견하면 그를 하옥했다가 이틀 후에 풀어 주십시오.’
그 뒤로도 몇 가지 사소한 당부를 적은 옥환이 곧 붓을 내려놓자 입을 열 기회만을 보고 있던 계평이 얼른 물었다.
“승상. 이게 가능할까요? 아무리 대단한 계책이라 해도 그 백고란 자가 따르지 않으면…….”
“내게 손을 벌리는 정도의 생각은 있었으니 백 장군도 마냥 아둔한 작자는 아니겠지. 머리를 굴릴 줄은 몰라도 전장에서 활약하던 무장이 아니냐. 하니 내가 일러준 대로만 하면 백 장군은 반드시, 민란의 주동자를 잡아낼 것이다. 그리하지 않으면 그는 죽은 목숨이니까.”
옥환의 설명에도 계평은 여전히 하고 싶은 말이 남아 있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백성을 가엾게 여기는 것 같더니, 그런 그가 서찰에 적은 방법들은 결국 백성을 이용하는 것이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하나 계평은 끝내 침묵을 택했다. 어차피 벽국이 아닌 서국 백성들을 이용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어떤 방법이든 관여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그렇게 다 쓴 서찰을 계평에게 들려 보낸 뒤, 옥환은 그저 가만히 기다림을 이어갔다.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처럼 차를 마시고, 서책을 읽고, 승헌을 만났다. 확실히 승헌은 그다지 기분이 좋아 보이진 않았지만, 옥환이 전처럼 무릎을 내어 주니 그 위에 눕고는 금세 잠이 들었다.
서찰을 보내고 사흘 뒤에 백고가 승헌에게 간곡한 청을 올렸다는 소식이 들려 왔고, 다시 그 이틀 뒤 승헌이 그것을 승낙했다는 소식이 들려 왔다. 백고가 무엇을 부탁했는지까지는 옥환이 알아낼 수 없었으나, 굳이 알아내지 않아도 백고는 자신이 시킨 대로 청을 올렸을 터였다.
“옥환.”
이제는 제법 이름을 불리는 것에도, 승헌이 찾아오는 것에도 익숙해졌다. 옥환은 승헌의 부름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승헌은 말없이 옥환의 말간 뺨을 어루만졌다.
오늘 승헌은 밤에 옥환을 찾았다. 교합 이후로는 처음이었다. 옥환은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금세 눈치챘다. 승헌은 오늘 밤 자신을 안을 것이다.
어쩌면 길다고 할 수도 있었다. 벌써 거의 두 달이 흘렀으니까. 옥환은 첫 교합 때 있었던 일 때문에 승헌이 자신과의 교합을 꺼리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한데 오늘 다시 자신을 안는다면 그것은…….
‘나에 대한 의심이 좀 풀린 건가.’
옥환은 그게 왠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왜 마음에 들지 않는지를 생각해 보기도 전에, 승헌이 옥환을 침상 위로 쓰러트렸다. 승헌이 자신의 허리끈을 풀고 옷깃을 열어젖히자 옥환은 전신을 약간 굳히고 승헌을 올려다보았다. 옥환의 시선을 받으며 승헌이 입을 열었다.
“그렇게 보면 꼭 기대하는 것 같잖아.”
“……기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십니까?”
옥환은 혹시 자신이 또 거부감을 드러냈나 걱정돼서 물은 것이었으나 그것을 다르게 알아들은 승헌은 쿡쿡 웃으며 말했다. 그럼 기대한다고 생각하지.
이윽고 승헌이 옥환의 옷을 완전히 벗겼다. 이전에도 승헌은 몇 번 저를 건드리긴 했었으나, 제대로 된 교합은 지난 한 번이 전부였다. 한데 그것도 경험이라고, 승헌의 앞에서 전라가 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자신이 옥환은 우스웠다.
그럼에도 승헌의 손길이 닿을 때는 약간이긴 하나 여전히 낯선 기분이 들었다. 맨 처음 승헌이 자신을 만질 때 느꼈던 거부감과는 다른 종류의 감각이었다. 아주 조금, 몸이 뜨거워지는 것 같기도 했다.
옥환은 생각했다. 이 사내와의 교합에 지나치게 몰입해 제 작전을 망치지만 않는다면, 어느 정도의 수준에서는 이 행위를 즐겨도 될 것 같다고. 오히려 그 편이 승헌을 속이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저번만 해도 허무함을 느끼며 거북해하던 자신이 고작 두 달 만에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이 우습긴 했으나, 옥환은 어쩐지 그렇게 하고 싶어졌다.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을 쉽게 팔아넘기지 말라는 염완의 말을 지키는 방법인 것 같기도 해서였다. 진심으로 이 사내에게 안긴다면, 그것은 자신을 파는 게 아닐 테니까.
‘바보 같은 생각일지도 모르지. 하나 나는…… 평생을 가도 그분의 뜻을 저버릴 수 없을 거야.’
“……읏.”
가슴을 물린 옥환이 짧게 신음했다. 그가 고개를 들자 승헌이 나직이 “옥환” 하고 불렀다. 옥환을 부른 승헌은 미소를 짓고 있었으나, 그의 눈은 한없이 차가웠다. 살짝 놀란 옥환이 멈칫하자 그것을 눈치챈 승헌이 이번엔 완벽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겁먹지 마, 옥환. 난 정말 애를 쓰고 있으니까.”
옥환은 흔들리는 눈빛으로 승헌을 바라보았다. 승헌은 웃으며 그대로 옥환의 손끝에 입을 맞추고, 다시 손목 안쪽에 입을 맞추었다. 그렇게 손끝에서 어깨까지 일일이 입을 맞추던 승헌은 쇄골 부근으로 입술을 옮겨 그곳을 강하게 빨아들였다.
“아…….”
몸을 침식하는 미지근한 열기에 옥환은 짧은 숨을 뱉었다. 이윽고 승헌이 옥환의 흰 목에 입술을 대었다. 문득 지난번 제 몸에 수많은 자국이 났던 것을 떠올린 옥환은 무의식적으로 승헌의 가슴팍을 떠밀었다.
방심하고 있다 밀려난 승헌이 뭐냐는 듯 옥환을 쳐다보자, 옥환이 살짝 붉어진 얼굴로 한 손을 들어 제 목을 가리고는 말했다.
“목에는 자국을 남기지 말아 주십시오.”
“그대의 호위에게 보이는 게 민망한가? 아니면…… 그 어린 하인인가? 이건 그대가 내 첩이라는 증거인데 그리 거부하면 의심스럽잖아?”
“어차피 이 궁 안, 아니 이 도성 안의 모든 이들이 저와 전하의 관계를 알고 있을 겁니다.”
“그런 얘기가 아니야.”
옥환에게 떠밀린 탓인지 아니면 정말 의심을 하는 것인지 승헌은 쉽사리 물러서지 않았다. 하나 옥환의 고집도 만만치 않은 터라,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서로를 노려보았다. 그렇게 날 선 신경전에서 먼저 발을 뺀 것은 승헌이었다. 그는 긴 한숨을 내쉬더니 슬쩍 몸을 물렸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미련이 남았는지 짜증스레 혀를 차고는 덧붙였다.
“그대의 그 얼굴이 문제야.”
옥환은 잠시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조금은 “제 얼굴이 그리 마음에 드십니까?” 하고 묻고 싶기도 했다. 저를 사로잡으려 자존심을 굽힌 사내들도 있었으니 그렇게까지 말이 안 되는 일은 아니지만, 지난번에도 그렇고 자꾸만 얼굴을 들먹이는 게 다소 의아했다. 견승헌 정도 되는 인물이라면 저와 같은 수준의 미인은 처음 보는 것도 아닐 텐데.
하나 짧은 의문도 잠시, 승헌이 마치 화풀이라도 하듯 옥환의 유두를 깊게 빨아 당기는 바람에 그는 더 이상 아무 생각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옥환은 아픔을 느끼며 몸을 뒤로 빼려 했으나 침상 위에서는 그도 여의치 않았다. 하나 도망칠 수 없는 것은 그 때문만이 아니었다.
서국의 왕이 제 가슴에 매달려 소리를 내며 젖을 빨고 있다. 옥환은 그 모습을 볼 때마다 몸이 이상해지는 기분이었다. 마치 술 향기를 맡았을 때처럼, 머리가 몽롱해지고 숨결이 뜨거워졌다.
옥환은 이 낯선 감각이 어쩐지 민망했지만, 이것이 무엇인지는 확실히 이해했다.
“옥환.”
문득 고개를 들고 열띤 시선으로 저를 바라보는 승헌의 모습에 옥환은 생각했다. 굳이 애를 쓰지 않아도, 자신은 이 사내와의 정사에 빠져들 수 있을 것 같다고.
그날 밤, 두 사람은 또 한 번 몸을 겹쳤다.
***
백고가 보내온 서찰을 읽고 있던 옥환은 그것을 다 읽고는 계평에게 태워 버리라 일렀다. 서찰에는 다행히 군량미 지원을 받아 그것을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옥환이 시킨 대로 수색한 결과 폭도들의 거점을 발견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다만 잡은 폭도들을 풀어 주는 일은 다른 장수들의 반발로 쉽지 않다고 했다. 다행히 거점을 발견한 일을 승헌에게 보고해 어느 정도의 유예 기간을 청했다고 했으니, 승헌이 그것을 허락만 해준다면 시간이 부족하지는 않을 터였다.
“답신은 안 하십니까?”
“어차피 했던 말을 다시 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텐데, 괜한 위험을 짊어질 필요가 있겠느냐.”
계평의 질문에 그렇게 대꾸한 옥환은 어서 가서 서찰을 태우라고 말하려다가 갑자기 문가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움찔했다.
“무슨 위험을 짊어져?”
문이 벌컥 열리고 문간을 넘은 승헌이 옥환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승헌이 이처럼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는 게 하루 이틀 일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자신을 감시하고 있다면 일부러 틈을 노릴 수도 있다. 그에 대해 항상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던 옥환은 곧 평정을 되찾고는 여상히 대꾸했다.
“제 호위가 너무 안에만 있으면 몸이 안 좋아지는 것 아니냐고, 요 앞을 잠시 산책하는 건 어떻냐고 물어서 말입니다.”
승헌은 옥환과 계평의 표정을 한 번씩 살피고는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위험까지는 아니야.” 하며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와 자리에 앉으려 했다. 한데 그가 자리에 앉다 말고 돌연 당혹스러운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저 호위가 손에 든 것은 뭐지? 서찰 같은데. 옥환 그대에게 온 건가?”
옥환은 그걸 얼른 숨길 것이지 지금까지 손에 들고 뭘 하고 있었나 싶어 계평을 눈으로 책망했다. 무어라 변명해도 그것이 자신과 관계된 문서라면 승헌은 그걸 보겠다고 나설 것만 같았다. 옥환도 계평도 어쩔 줄 모르고 머뭇거리자 처소에는 무거운 적막이 내려앉았다. 변명이 늦어질수록 저에게 불리하다. 그것을 아는 옥환은 일단 뭐라고든 둘러대려 입을 열었다. 한데.
“저, 전하, 소인이 죽을죄를 지었사옵니다……!”
느닷없이 나타난 종소가 승헌의 발치에 엎드려 그렇게 빌었다.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아연한 얼굴로 엎드린 종소의 등을 바라보았다. 종소는 더듬더듬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 그것이 실은 소인이…… 밖에 계신 어머니가 너무 보고 싶어서, 선생께 서찰을 보내 달라 청하였나이다. 안 되는 일인 줄은 알지만 마땅히 부탁드릴 분도 없고 아프신 어머니도 너무 걱정이 돼서…….”
어린 종소의 순간적인 기지에 옥환은 속으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서찰을 손에 들고 쩔쩔매던 계평과 달리 종소는 순식간에 꾀를 낸 것은 물론이요, 두려움을 무릅쓰고 국왕인 승헌에게 거짓을 고해 올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승헌이 굳이 서찰의 내용을 확인하려 들 가능성도 있었으나, 만일 그렇게 된다 해도 종소가 낸 계책이야말로 지금 상황에선 최선의 수였다.
종소가 죄를 청한 뒤 짧은 침묵이 찾아왔다. 잠시 종소를 내려다보던 승헌은 떨고 있는 종소의 몸을 일으켰다. 종소가 겁을 먹은 채 시선을 들자 그의 눈앞에 미소를 짓고 있는 승헌의 얼굴이 들어왔다.
“어미를 생각하는 네 마음이 참으로 갸륵하구나. 어린 네가 어찌 가족의 정을 끊어 낼 수 있었겠느냐. 서찰을 보낼 게 아니라, 네게 하루의 말미를 줄 테니 아예 궁 밖에 나가 어미를 만나고 오거라.”
승헌의 예상치 못한 반응에 말을 꺼낸 종소는 물론 옥환도 적잖이 놀랐다. 하나 곧 종소는 환한 얼굴로 되물었다.
“저…… 전하, 그것이 정녕 참말이시옵니까?!”
“종소야. 어찌 일국의 군왕이신 전하께서 거짓을 말씀하시겠느냐. 어서 감사 인사를 하려무나.”
옥환이 인자한 목소리로 타이르자 종소는 이마가 바닥에 닿을 정도로 깊게 허리를 굽혀 절을 했다. 몇 번이나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하며.
크게 감격한 종소가 밖으로 나가고, 종소 덕에 한숨 돌린 계평이 차를 내오자 승헌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대가 왜 아끼는지 알겠어. 어린 것이 참으로 기특하지 않나.”
“……예, 참으로 그렇습니다. 그리고 저도, 전하의 넓은 아량에 참으로 탄복하였습니다.”
“그런 말은 됐어. 그대는 서릿발처럼 굴 때가 제일 그대다우니까.”
“아첨이라 생각하십니까? 저는 그런 건 할 줄 모르니 믿으셔도 됩니다.”
옥환이 살짝 자존심이 상한 듯 대꾸하자 승헌이 소리 내어 웃었다. 그 모습을 본 옥환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꼭 쥐었다. 갑자기 몹시도 이 순간이 거북해졌다.
전에도 생각한 것이지만 견승헌은…… 생각보다 더 이상적인 왕일지도 모른다. 자신이 믿고 따랐던 염완만큼.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결정과 뜻을 바꾸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어떤 상대인지 알고 대처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아무튼 칭찬을 받아서인지 기분이 좋은 듯한 승헌은 차를 마시고는 입을 열었다.
“사실은 오늘 그다지 기분이 좋지 않았는데 말이야. 자칫하면 그대에게 괜한 화풀이를 했을지도 몰라.”
그러십니까, 하고 무관심하게 대답한 옥환은 승헌이 무언가를 기대하는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자 하는 수 없이 말을 이었다.
“하지 않으셨으니 됐지요. 그리고…….”
옥환은 잠시 고민하다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제게는 그러지 않으실 거란 걸 압니다.”
승헌은 특유의 짓궂은 미소를 띤 채 옥환의 곁으로 몸을 당겨 왜냐고 물었다. 옥환은 괜한 말을 꺼낸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면서도 딱 잘라 말했다.
“그러신 적이 없으니까.”
“……그대가 그렇게 말하면 나는 그대의 기대를 배반하기가 싫어지잖아.”
“기대가 아니라 경험에 의거한 판단입니다. 배반이든 뭐든 하고 싶으면 하십시오.”
“글쎄. 그러고 싶지 않은데.”
승헌은 느릿하게 대답하며 옥환의 손목을 쥐었다. 옥환을 바라보던 그의 권태로운 눈빛에 짙은 열기가 깃들었다. 승헌이 그런 표정을 지을 때면, 옥환은 자신의 가슴이 떨리는 것을 도무지 막을 수가 없었다. 몇 번이나 애를 써 봐도.
이윽고 승헌은 옥환의 소매를 살짝 내려 손목 안쪽의 상처를 확인하고는 그 위에 입을 맞추었다. 승헌은 이렇게 자신이 옥환에게 남긴 자국을 이따금 살피고는 했다. 마치 노비의 낙인이라도 확인하는 듯한 그 행동을 옥환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으나, 승헌은 매번 자국 위에 입을 맞추고는 씩 웃는 것으로 상황을 모면하고는 했다.
민망해진 옥환은 손목을 빼내 감추고는 얼른 새 화제를 꺼내 들었다.
“오늘은 어찌 기분이 상하셨습니까.”
승헌은 방금까지 옥환의 손목을 쥐고 있던 자신의 손을 아쉬운 듯 바라보며 대꾸했다.
“죽여 버리고 싶은 놈이 있어서.”
옥환은 잠시 자신이 말을 잘못 들었나 싶어 드물게도 “예?” 하고 승헌에게 되물었다. 그와 달리 승헌은 태평하게 말을 이었다.
“백고 말이야. 보고문을 보냈는데,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더란 말이지.”
승헌이 이렇게 직접적으로 백고에 대한 얘기를 꺼낼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옥환은 승헌의 발언 의도에 대해 수많은 가능성을 떠올렸다. 좋은 기회이긴 했으나, 이것을 그대로 덥석 물어도 되는 건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하나 옥환은 곧 방침을 세웠다. 뭐가 됐든, 평소대로 행동한다. 몸을 사리지도, 굳이 나서지도 않고 그저 아무것도 모르는…… 그러나 벽국의 재상이었던 설금야처럼 구는 것이다.
“제게 말씀하셔도 되는 겁니까?”
머릿속을 정리한 옥환이 약간의 호기심을 드러내면서도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하자 승헌이 차를 채워 달라는 듯 잔을 내밀었다.
“변덕일 뿐이야. 그리고 그대는 백고와 꽤 친하잖아. 안 그래?”
“……보기에 따라서는.”
“아니라고는 안 하는군.”
“아니라고 해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으시겠지요.”
승헌은 들으란 듯이 한숨을 내쉬고는 불만을 토로했다.
“그대는 그 말대답하는 습관을 좀 버리도록 해. 그대의 전 주군께선 이런 그대의 비위를 잘 맞춰주던가?”
예기치 못한 인물의 등장에 옥환의 가슴이 덜컥했다. 염완에 대한 이야기는 승헌 본인에게도 민감할 수 있는 화젯거리였다. 승헌이 저를 시험해 보려 이러는 것인지, 아니면 그새 편해졌다고 생각해서 쉽게 말하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물론 옥환은 염완에 대한 언급에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앞선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백 장군이 맡은 바를 허투루 하실 분은 아니지 않습니까.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충심만큼은 투철하신 것 같았습니다.”
그러자 승헌 역시 자연스럽게 옥환의 말을 받아 대답했다.
“과유불급이라고 하잖아. 백성들에게 군량미를 나누어 주고 있다던데, 그게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거슬리는 건 사실이지.”
군량미를 나누어 주는 게 문제라고? 난을 일으킬 정도로 수탈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일순 발끈한 옥환은 참지 못하고 속의 말을 꺼냈다.
“오죽하면 군사들 먹일 쌀을 백성들에게 나눠 주겠습니까? 그만큼 백성들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고 생각지는 못하십니까?”
옥환의 날카로운 반응에도 승헌은 그저 조금 흥미롭다는 시선을 보내며 대답했다.
“굶주려 죽기 직전인 백성에게 쌀을 주는 걸 뭐라 하겠나. 하나 내게 아무 말도 없이 ‘군량미’를 청해놓고 그것을 ‘구휼미’로 쓰는 건 문제지. 백고는 마치 백성들에게 쌀을 주기 위해 일부러 군량미를 요청한 것 같더군. 그렇다면 그건 의도를 감춘 게 되는 거야.”
“…….”
“그가 내게 칭찬받아 마땅할 선의를 감추면서까지 백성에게 먹을 것을 나눠줄 이유가 뭐가 있을까? 극단적으로 생각하면 이건 반역이라 할 수도 있겠지. 내가 받아야 할 신망을 그가 앗아가는 게 될 테니까.”
“전하, 그것은 지나친 비약이신 듯합니다. 백 장군이 설마하니 그러시겠습니까.”
지금처럼 중요한 시기에 혹여라도 백고에게 불똥이 튀면 안 된다는 생각에 옥환이 그를 감싸고 나서자, 승헌이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
“사람의 속은 아무도 모르는 법이야. 하물며 이 나라에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그대가 그리 단언할 수 있을 정도로 백고에 대해 잘 아는 것도 아닐 테고.”
그렇게 말하고 난 승헌은 잠시 침묵한 채 허공을 응시했다. 마치 무언가를 회상하기라도 하는 듯한 그 모습을 보며 옥환은 그가 사람을 믿기 힘들게 만든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추측했다.
그것을 잘만 이용하면 서국의 내분을 더욱 가속시킬 수가 있다. 하나 옥환은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오늘은 더 이상 파고들지 않기로 했다.
“예,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하나 백 장군의 행동이 아직 거슬리는 정도이시라면, 확실한 판단이 설 때까지는 잠시 두고 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래. 신중해서 나쁠 것은 없지. 뭣보다 지금은 무관들에게 반발할 거리는 주지 않는 게 최우선이니까.”
고개를 끄덕거리는 옥환을 잠시 바라보던 승헌이 문득 손을 뻗어 옥환의 뺨을 감쌌다. 옥환이 행동의 의미를 묻는 듯한 눈길을 보내자 그가 엄지손가락으로 뺨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나랑은 산책해도 괜찮아.”
앞뒤 없이 튀어나온 발언에 어리둥절했던 옥환은 곧 승헌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깨달았다. 방금 그가 갑작스레 처소에 들이닥쳤을 때 변명이랍시고 산책을 하려다 말았다는 이유를 댔던 것이다.
옥환은 실소를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정말 제가 병이라도 날까 걱정이십니까? 그럴 필요 없으십니다. 규방서생이라고까지 불리는데, 규방에서 먼지 좀 쓴다고 큰일이 나겠습니까.”
그러나 아무런 대답도 없는 승헌의 표정이 생각보다 진지해서, 옥환은 정말로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런 옥환을 멀거니 응시하던 승헌이 옥환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일순 움찔했던 옥환이 가만히 눈을 감자, 승헌의 입술이 조금 강하게 문질러졌다. 아랫입술을 끈질기게 물어 당기고 혀로 치열을 훑던 승헌은 옥환이 별수 없이 입을 벌리자 그 안으로 냉큼 파고들었다. 뜨끈한 혀가 옥환의 입안으로 들어가 옥환의 혀를 얽고, 젖은 점막 이곳저곳을 헤집었다. 서로의 숨결이 난잡하게 섞였다.
그렇게 한참이나 접문을 이어가던 승헌이 겨우 입술을 떼었다. 옥환이 다시 눈을 떴을 때 승헌은 여전히 그의 코앞에 있었다. 금방이라도 제게 달려들 듯한 승헌의 표정에 옥환은 얼른 그의 손을 잡고 말했다.
“산책하러 가시지요.”
이윽고 옥환은 지극히 오랜만에 밖으로 나왔다. 어느 정도 걷다가 문득 승헌이 전과 달리 자신의 걸음걸이에 속도를 맞추고 있다는 걸 깨달은 옥환은 일부러 더 발을 질질 끌었다. 그러자 승헌은 옥환의 팔을 끌어당겼다. 벌써 못 걷겠다면 업고 가겠다는 으름장까지 놓으면서.
그렇게 승헌이 옥환을 데리고 향한 곳은 전에도 봤던 도원이었다. 어느덧 꽃은 다 지고 열매도 끝물이었다. 하나 옥환은 화려하기만 한 꽃밭보다는 실한 열매가 드문드문 달린 녹음이 더 보기 좋았다.
완숙된 과실에서 물씬 풍기는 달콤한 향을 맡으며 옥환은 고개를 갸웃했다.
“전하. 어찌하여 일부 나무에는 열매를 남겨두셨습니까?”
“음? 새들에게도 먹을 걸 남겨줘야 할 것 아닌가. 그대는 농사도 지었다면서 그런 것도 몰라?”
“…….”
“그보다 그대는 이곳의 복숭아를 못 먹어 봤나? 내가 분명 한 상자 보내라고 했을 텐데.”
듣고 보니 최근 식사 시간 때 후식으로 복숭아가 자주 나왔던 것 같기는 했다. 평소 소식을 하는 옥환이었지만, 복숭아는 꽤 맛있어서 남기지 않고 먹었던 기억이 남아 있었다.
“먹었습니다. 아주 달더군요.”
“궁인들이 열심히 가꾼 덕에 이번에도 좋은 결실을 맺었지. 나도 간혹 돌보기도 했고. 그대라면 알겠지? 그 복숭아에 담긴 정성을.”
고작 복숭아 따위로 뿌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승헌을 보며 옥환은 기분이 조금 묘해졌다. 이 사내는 도대체…….
‘정체를 모르겠어.’
그 뒤로도 복숭아를 궁인들에게 나눠 준 일이며, 남은 복숭아를 싼 가격에 팔아 백성들과 조정 양쪽에 이익을 안겨준 일 등을 자랑스럽게 얘기하던 승헌은 얼마 후 옥환을 처소 앞까지 바래다주었다.
“나는 바로 가야 해. 그대 먼저 들어가.”
“예. 그…… 다음에도 복숭아 얘기 해 주십시오.”
옥환의 뜻밖의 청에 쿡쿡 웃은 승헌은 지나가듯 말하며 돌아섰다.
“그대를 위한 텃밭을 하나 만드는 것도 괜찮을지 모르겠군.”
이윽고 그는 수많은 궁인을 줄줄이 매달고 빠른 걸음으로 멀어져 갔다. 저를 가둬 놓은 장본인이면서, 산책이며 텃밭 따위로 챙겨 주는 척을 하는 게 옥환은 가소로웠다. 하지만…….
……이렇게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 모른다. 텃밭에서 채소를 기르면서, 가끔은 그 사내와 산책을 나가고, 책을 읽고, 또 어떨 땐 종소에게 글을 가르치면서 사는 것도.
하나 그것은 터무니없는 허상이었다. 그래서 참으로 발칙하고 또 무서운 그 허상을, 옥환은 단호히 떨쳐내고는 두 번 다시 떠올리지 않았다.
***
옥환이 백고에게 서찰을 보낸 지 달포가 됐을 무렵, 마침내 백고가 돌아왔다. 다름 아닌 개선장군이 되어서였다.
승헌의 골칫덩어리였던 민란을 평정한 데다, 흉흉했던 민란지의 민심도 가라앉히고 온 그는 그야말로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도성에 귀환했다. 이번 일만큼은 문무백관 모두가 하나같이 백고의 공적을 칭찬하기 바빴다.
이윽고 백고가 정전正殿에 들어 승헌의 앞에 섰다. 승헌에게 절을 올린 백고는 늠름한 표정으로 승헌을 바라보았다.
“전하. 전하의 명을 받자와 민란을 평정하고 돌아왔나이다.”
옥좌의 팔걸이에 팔을 괸 채 앉아 있던 승헌은 흡족한 얼굴로 백고를 칭찬했다.
“백 장군. 과인은 진심으로 경의 노고를 치하하는 바네. 처음엔 반신반의했지만, 역시 경은 과인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군.”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백고가 진심으로 감격한 듯 다시금 절을 올리자 승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백고를 바라보는 신하들의 시선이 모두 호의적인 건 아니었으나, 그럼에도 지극히 오래간만에 조정의 분위기는 제법 화기애애했다. 이윽고 승헌이 백고에게 뭐든 그의 청을 한 가지 들어주겠노라 공언했으나, 뜻밖에도 백고는 청을 나중으로 미루었다.
잠시 뒤, 승헌이 백고를 위한 연회를 베풀었다. 백고를 포함한 많은 신하가 참여한 덕에 연회장은 왁자지껄했고, 무희들이 춤을 추며 더욱 흥을 북돋웠다. 하나 사실 그다지 연회를 좋아하지 않는 승헌은 일단 열기는 했으니 감흥 없는 얼굴로 연거푸 술잔만 기울였다.
복숭아로 담근 술을 마시던 그는 옥환에게도 한 홉 가져다줄까 고민하다가 미소를 지었다. 이리 달큼하니 옥환도 멋모르고 입에 댈 것 같았다. 옥환의 처소에 보낸 요리사의 말로는 옥환이 복숭아가 후식으로 나가는 날은 남기지 않고 잘 먹는다고 했었다. 그러니 술이라 해도 복숭아 맛이 나면 좋다고 하고 마실지도. 그럼 사실 술일랑 한 모금도 못 하는 그 서생은 얼굴이 새빨개져 제 품에 쓰러질지도 모른다.
그렇게 옥환에 대해 생각하던 승헌은 갑자기 백고가 일어서서 제 앞에 엎드리자 현실로 돌아와 백고를 내려다보았다. 승헌의 손짓에 경쾌하게 흐르던 음악이 멈추었고, 무희들은 알아서 물러갔다.
“전하. 황송하오나 전하께 한 가지 청을 올리고자 하옵니다.”
“아, 그래. 이젠 생각이 났나?”
정전에서 약조한 바가 있기에 승헌은 기꺼이 백고의 청을 듣고자 했다. 한데 백고의 기색이 조금 이상했다. 마치 죄라도 지은 듯 안절부절못하고, 청을 올리는 것을 주저하는 듯한 모양새였던 것이다. 그것을 곧바로 눈치챈 승헌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전하. 소신은…….”
백고는 침을 한번 꿀꺽 삼키고는 가까스로 말을 이었다.
“소신은, 금야 선생을 조정에 등용해 주셨으면 하나이다. 이번 난을 평정한 것은 기실 모두 그분의 공이옵니다. 소신에게는 아무런 상을 내려 주지 않으셔도, 아니 벌을 내리셔도 좋사오니 부디 선생의 공적을 인정해 주시옵소서.”
그 순간, 백고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승헌은 앞에 놓여 있던 술병을 집어던졌다. 술병은 바로 백고의 옆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바닥에서 산산조각이 났다. 병이 깨지는 소리에 연회장은 찬물을 끼얹은 듯 고요해졌다.
백고를 내려다보는 승헌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살벌했다. 취해 있던 장수들은 전장에서나 보았던 승헌의 얼어붙을 듯한 살의에 취기가 싹 가신 얼굴로 몸을 사렸다. 문관들 역시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서로의 눈치만 보았다.
확실히 백고의 청은 몹시 당혹스러운 것이었다. 난을 평정한 것이 옥환의 덕이라니, 언제부터 옥환과 그리 의견을 주고받았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승헌은 내내 옥환을 조정에 들이는 걸 달갑지 않게 여겼으니, 백고의 청은 그의 의사에 반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신하들 간에 근심 어린 눈빛이 오고 갔다.
한편 연회를 망친 장본인인 백고는 승헌이 발하는 살기에 몸을 떨면서 그저 납작 엎드려 있을 수밖에 없었다. 승헌은 한참 동안 백고를 죽일 듯이 노려보더니, 돌연 말없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그대로 떠나 버렸다.
격노한 승헌 때문에 연회는 결국 다급하게 마무리되었고, 백고는 죄인처럼 퇴궐했다. 신하들 역시 싸늘하게 식은 분위기에 입도 뻥긋하지 못하고 물러가야만 했다.
그렇게 다음 날. 백고가 민란을 평정하고 돌아왔다는 소식만 들었을 뿐 바깥 일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는 옥환은 승헌이 구해다 준 의서를 읽고 있었다. 의술에도 조예가 깊은 그는 병서뿐 아니라 의서도 즐겨 읽는 편이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집중하고 있던 옥환은 책 한 권을 다 읽고 나서야 책을 덮었다. 문득 창밖을 보니 전에 비해 부쩍 선선해진 기온이 느껴졌다. 벌써 여름이 물러가고 있었다.
‘이제 슬슬 소식이 들릴 때가 되었는데.’
곧 승헌이 올 시각이었다. 어쩌면 그가 기다리는 소식을 들고 올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옥환은 천천히 차를 우렸다. 매일 반복되는 승헌과의 만남에 옥환은 이제 그의 의도를 고민하지는 않았다. 그는 그냥, 자신을 만나러 올 뿐이었다.
그리고 머잖아 창밖을 통해 저 멀리서 승헌과 그 행렬이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옥환은 하인을 시켜 미리 문을 열어두었고, 잠시 뒤 옥환의 처소 앞까지 온 승헌은 말없이 그 안으로 들어섰다.
“납시셨습니까, 전하.”
옥환이 일어서서 승헌을 맞이했다. 한데 어쩐지 승헌의 기분이 저조해 보였다. 옥환은 또 조정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짐작하면서 승헌이 앉는 것을 본 뒤 자신도 그 맞은편에 앉았다.
“전하. 일전에 구해다 주신 의서를 읽었습니다. 서국의 의술은 저로서도 배울 점이 참으로 많은 듯합니다.”
옥환은 승헌의 기분을 풀어 주기 위해 일부러 서국에 대한 칭찬으로 대화를 시작했다. 하나 승헌은 이렇다 할 대꾸를 하지 않았다. 아무리 화가 나 있어도 웬만해선 자신 앞에서 티를 내지 않는 편이었는데, 오늘은 일이 있어도 정말 큰일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옥환은 어떻게 하면 그의 기분을 조금이라도 나아지게 할 수 있을지 고민하면서 천천히 잔에 찻물을 채웠다.
한데 그때, 승헌이 거친 손길로 옥환이 들고 있던 찻주전자를 옆으로 던져 버렸다. 그뿐만 아니라 찻잔이 올려져 있던 상 역시 찻잔과 함께 내동댕이쳤다. 깨진 주전자와 찻잔에서 흘러나온 뜨거운 찻물이 바닥을 적셨다.
돌연 벌어진 일에 놀란 옥환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승헌을 바라보자, 승헌이 살기가 등등한 표정으로 픽 웃었다.
“차나 따르고 있을 인재가 아니잖아, 그대는. 안 그런가?”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그대가 더 잘 알 텐데.”
얼음장 같은 어조에 옥환은 속으로 긴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면 오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나, 정말로 올 것이 왔구나 싶었다.
승헌은 자신을 조정에 들이지 않겠다고 했다. 오죽하면 금족령까지 내려서 외부와의 접촉도 금지했다. 하나 자신은 백고를 이용해 난을 진압했고, 그것을 발판으로 조정에 진출하려 했다. 승헌은 이제 그것을 다 알았으리라.
자신의 계획대로 되었지만, 옥환은 승헌이 전과 다르게 차디찬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이 공연히 씁쓸했다.
“저를…… 조정에 들이고 들이지 않고는 전하의 뜻입니다.”
옥환의 차분한 대답에 승헌은 그의 멱살을 잡아당기고는 으르렁댔다.
“나의 뜻? 내가 그대를 들일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 놓고?”
“…….”
옥환은 차라리 입을 다물기로 했다. 쓸데없는 말로 승헌의 화를 돋울 필요는 없었다. 승헌의 입은 웃고 있었지만, 그의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저번에도 이런 표정을 본 일이 있었으나 그때보다 더 독기 어린 눈빛이었다. 옥환은 이번에야말로 자신이 승헌의 신뢰를 완전히 잃었을 거라 생각했다.
“매일같이 나를 만나면서 뒤로는 내 장수와 밀서를 주고받고 있었단 말이지……. 참으로 대단해, 금야 선생.”
오늘따라 유독 ‘금야 선생’이라는 호칭이 비수처럼 느껴진다고 생각하며 옥환은 고개를 숙였다. 남을 속이면서 괴롭지 않았던 적은 없었다. 하나 이런 상황도 다 예상하고 서국에 온 것이다. 어차피 평생 첩으로 살 것도 아니니, 조정에 드는 데에 승헌의 신뢰 따위는 필요하지 않았다. 서국의 신하들이 자신을 믿는 것만으로 충분했으니까.
“백고가 청하더군. 이번 난을 평정한 건 모두 선생의 덕이니, 선생을 부디 조정에 등용해 달라고. 제게는 상을 내리지 않아도 상관없고, 도리어 남의 도움을 받은 죄를 물어도 괜찮다면서.”
승헌이 말을 하면서도 분을 이기지 못하고 이를 부득 갈았다. 옥환은 낭패다 싶었으나 백고는 올곧은 무인이니 당연히 그렇게 말하고도 남을 터였다. 자신의 불찰…… 아니. 이것은 모두 예상대로였다.
“……전하. 백 장군은 처음부터 제게 기댄 것이 아니고…… 읏.”
어떻게든 승헌을 달래 보려던 옥환은 승헌이 그의 목을 깨무는 바람에 끝까지 말하지 못했다. 승헌은 옥환의 살을 잘근잘근 씹었다. 옥환은 승헌이 왜 이러는지 알지 못한 채 그의 힘에 눌려 바닥으로 쓰러졌다. 이윽고 승헌은 입술을 옮겨 목의 다른 부분을 물어뜯다시피 깨물었다. 애정이나, 하다못해 그가 전에 가졌던 욕정조차 없는 그야말로 화풀이였다. 그렇게 목 이곳저곳을 깨물고 난 승헌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내가 어리석었어. 그대가 누군가와 서찰을 주고받는지까지는 감시하지 않았거든. 아니, 이미 달포 전부터 그대에게 붙인 감시를 다 치워 놓았지.”
아픈 목을 감싸고 있던 옥환은 의외의 발언에 놀라서 승헌을 쳐다보았다. 옥환의 고요한 가슴속에 돌연 소용돌이가 쳤다.
그런 옥환을 바라보는 승헌의 눈동자에도 불길이 일어 있었으나 그것은 차차 식어, 이내 그의 눈동자는 얼어붙은 호수처럼 가라앉았다. 승헌은 냉담한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내 오만이었어. 그대를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대는 내 지배하에 있다고 생각했지. 그대를 안타까이 여겨서 그런 것도, 믿어서 그런 것도 아니니 그런 불쌍한 표정은 지을 필요 없어.”
가시 돋친 어조로 내뱉은 승헌은 마침내 옥환을 던지듯 놓아 주었다. 동요한 옥환이 승헌을 올려다보자 승헌이 짧게 내뱉었다.
“이제 그대에게 속는 일은 없을 거야, 금야 선생.”
그러고는 주저 없이 돌아서는 승헌의 등에 옥환은 무어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승헌은 그것을 기다리지 않고 처소를 나갔다.
그 뒤, 옥환을 태사로 제수한다는 승헌의 칙서가 내려온 것은 그다음 날의 일이었다.
***
“선생!”
처음 등청하는 날, 정전으로 가는 길목에서 백고를 만난 옥환은 걸음을 멈추었다. 환한 얼굴로 옥환에게 다가온 백고는 실수를 했다는 듯 말을 바꾸었다.
“아, 참. 이젠 태사이시지요.”
옥환은 백고에게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태사太師란 태사, 태부, 태보의 삼사 중 하나로, 왕의 스승이자 자문 역할을 하는 왕의 최측근으로서 권력의 주축이라고 할 수도 있는 자리였다. 서국에서는 문관 중 으뜸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하나 옥환은 승헌이 자신에게 그런 높은 자리를 내린 것은 자신을 완전한 감시 아래 두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태사라 하더라도 왕이 그를 믿지 않으면 소용이 없으니 생각만큼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삼사는 지금 시대에선 거의 명예직이나 다름없는 직책이었다. 마땅히 정해진 업무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실질적으로 주어지는 권한도 없었다.
승헌이 옥환에게 준 관직은 그저 자신의 가장 곁에 두고 지켜보기 위한 허울에 지나지 않았다. 높은 자리에 있을수록 움직임 역시도 제한되기에.
“……백 장군. 이번 일은 참으로 감사드립니다.”
옥환은 백고에게 늦은 인사를 건넸다. 옥환의 관복 차림도 참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고 있던 백고는 제풀에 찔려 냉큼 대꾸했다.
“아, 아닙니다. 저도 처음엔 반신반의했지만, 태사의 그 기가 막힌 전술 덕에 민란을 평정할 수 있었던 것이니까요.”
“해도…… 직접 공을 세우신 건 장군인데 저 때문에 상을 못 받게 되셨다니 면목이 없습니다.”
“제 상은 태사께서 조정에 드신 걸로 충분합니다.”
실제로 승헌은 백고가 옥환의 등용을 청한 것을 이유로 그에게 아무런 상도 내리지 않았다. 지나친 처사이긴 했으나 승헌의 험악한 분위기에 아무도 그것을 걸고넘어지지 못했다는 듯했다.
“한데 태사. 몸이 안 좋으신 겁니까?”
느닷없이 튀어나온 화제였으나 옥환은 놀라지 않았다. 백고가 자신의 목을 보고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옥환의 목에는 어두운 색의 비단이 둘러져 있었다. 옥환은 “목이 좀 부은 듯하여.” 하고 대꾸했다. 백고는 그렇게 말하는 옥환의 표정이 영 이상하다고 느꼈다. 아파하는 것 같다기보다는 조금…….
‘슬픈 것 같기도 하고?’
하나 백고는 속에 든 생각을 굳이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이윽고 두 사람은 함께 정전으로 걸어가며 민란에 대한 대화를 나누었다.
“처음엔 놀랐습니다. 군량미를 백성들에게 나눠 주는 것도 그렇지만, 민란의 주동자를 잡으면 다시 놓아주라고 하셔서 말입니다.”
백고가 화두를 열자 옥환이 그것을 받아 대꾸했다.
“이번 난은 부패한 관리에 대한 백성들의 원망으로 벌어진 일이니, 장군이 선정을 베풀면 백성들의 마음도 능히 돌려놓을 수 있겠다 생각했습니다.”
“예. 그래 봤자 오합지졸의 무지한 백성들인데, 그것을 모르고 처음엔 태사의 뜻대로 하지 않으려 했었으니, 지금 와 생각해보면 참으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들에겐 제대로 된 지도자가 있을 리 없으니까요. 희생자가 적었다니…… 그나마 다행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옥환의 표정은 복잡미묘했다. 백고가 보기에 마치 자책을 하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하나 백고가 그것에 대해 묻기 전에 두 사람은 정전 앞에 도착했다. 옥환이 안으로 들자 전부터 옥환에게 호의를 품고 있던 몇몇 신하들이 곧바로 옥환의 곁에 몰려와 그에게 이런저런 말을 걸어댔다. 신하들에게 둘러싸여 피로함을 느끼고 있던 옥환은 국왕 전하께서 납신다는 환관의 알림에 겨우 풀려날 수 있었다.
잠시 뒤 승헌이 정전에 모습을 드러냈고, 문무백관 모두가 머리를 조아려 그에게 절을 올렸다. 모두 일어서라는 말에 몸을 일으키며 옥환은 처음으로, “서국의 왕”인 승헌과 마주했다.
왕이라고 볼 수 없던 평소의 수수한 차림새와는 달리, 금사로 화려한 자수가 놓인 검은색 정복을 입고 영롱한 빛깔의 구슬을 꿴 면류관을 쓴 승헌에게선 그야말로 군왕으로서의 위엄이 느껴졌다. 거기다 뚜렷한 이목구비와 늠름한 풍채는 무인의 중압감까지 뿜어내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절로 머리를 숙이고 싶은 충동을 느끼며 옥환은 승헌의 출신을 떠올렸다. 분명 왕가는 아니었건만, 승헌에게서 느껴지는 저 기운은 그 어떤 고귀한 자에게서도 느껴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인정하기는 싫었지만 염완에게서조차 저런 것은 느껴본 일이 없었다.
옥환의 눈앞에 있는 옥좌의 주인은, 그를 매일 찾아오던 짓궂은 사내와는 완전히 다른 존재 같았다.
‘이제 그는 어디에도 없겠지. 아니…… 애초에 날 속이고 있던 것은 저자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옥환은 제 감정에 반발하듯 일부러 더 고개를 빳빳하게 들었다. 그러다 승헌과 눈이 마주쳤고, 승헌은 가볍게 눈썹을 찌푸렸다.
“태사. 목에 두른 그것은 무엇이지?”
“……송구하옵니다. 찬 공기를 마신 탓인지 목이 부어서…….”
“풀어.”
승헌의 짧은 명령에 옥환은 당황해서 고개를 들었다. 목에는 승헌 본인이 낸 상처가 있다. 누가 봐도 잇자국인 그것이. 이것을 위해 상처를 낸 것이었나. 저를 부끄럽게 만들기 위해? 옥환은 뒤늦은 깨달음에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왕인 과인 앞에서 목을 감추다니 무엄하군. 조회는 밖에서 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지.”
“저, 전하. 태사께서는…….”
백고가 대신 나서 옥환을 위한 변명을 하려 했으나 승헌은 조용히 하라는 듯 입가에 검지를 대었다. 그리 강압적이지는 않았으나 승헌이 한번 포악해지면 막을 길이 없는 것을 아는 백고는 더 이상 반박하지 못했다. 물론 그것은 다른 신하들도 매한가지였다.
궁지에 몰린 옥환은 잠시나마 승헌에게 미안함을 느꼈던 자신을 원망하며 하는 수 없이 목을 감싸고 있는 비단으로 손을 가져갔다. 이것을 보면 다들 얼굴을 붉히겠지. 새삼 자신들의 눈앞에 있는 것이 벽국의 명재상 금야 선생이 아니라 왕의 첩인 설옥환이라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그것을 위해 승헌은 자신에게 목의 자국을 보여 주라 말하고 있었다. 신하들이 품고 있는 자신을 향한 존경심을 무너뜨리기 위해.
옥환은 여전히 차가운 시선으로 자신을 응시하는 승헌에게 원망스러운 눈빛을 보낸 뒤, 하는 수 없이 비단을 풀었다. 승헌과 옥환의 신경전에 그저 침묵하고 있던 신하들이 옥환의 목을 확인하고는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신하들의 표정에는 민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옥환 역시 수치심이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었으나, 시키는 대로 했으니 이제는 끝이 났을 거라 여겼다. 한데 승헌이 던진 질문은 옥환의 수치심을 배로 부풀렸다.
“태사. 목의 상처는 무엇인가?”
“…….”
옥환은 기가 막혀서 승헌을 쳐다보았다. 아니, 무엄하게도 왕인 승헌을 명백히 노려보고 있었다. 그 자존심 강한 설옥환에게 이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벽국에서는 재상의 자리에서 나라를 다스리고 문무백관을 지휘하던 자신이, 고작 적국 왕의 첩이 되어 우스갯거리가 됐다는 사실을 그는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더더군다나 승헌에게 미력하게나마 품고 있던 죄책감은 이제 옥환의 분노를 키우는 기름이 되어 있었다. 하나 승헌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 웃으며 재차 하문했다.
“목의 상처가 왜 난 것이냐고 물었어. 아무렴 경도 과인의 신하인데 신경을 써 줘야지.”
“정녕 몰라서 하문하시는 것이옵니까?”
옥환의 사나운 대거리에 신하들이 속으로 움찔했다. 아무리 그래도 왕에게 저런 식으로 대하는 것은 생각도 못할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하나 옥환으로서는 이것도 최대한 참은 것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뭘 하는 거냐고 화를 내고 싶었다.
그럼에도 승헌이 “과인은 모르겠는데?” 하고 시치미를 떼자 옥환은 뜻밖에도 윽박을 지르는 대신 냉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지아비께서 남긴 자국이옵니다. 소신의 지아비께서 어찌나 밝히시는지, 소신의 말일랑 듣지도 않으시고 목을 물어뜯어 놓으시더군요. 이제 만족하셨는지요?”
지아비라고 에둘러 말하긴 했으나 왕인 승헌을 “밝힌다”고 표현한 것에 대해 신하들이 난처함에 웅성거렸다. 하나 승헌의 태도도 다소 지나친 감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어느 쪽의 편도 들지 못하고 그저 상황만 지켜보았다. 그런 와중, 갑자기 강렬한 인상의 무인 하나가 나서더니 다짜고짜 옥환에게 검을 겨누고는 외쳤다.
“네 이놈, 무엄하다! 저 하잘것없는 벽국에서 목숨이나 구걸하여 온 주제에, 국왕 전하의 은혜도 모르고 감히 무어라 지껄이느냐!”
옥환은 자신에게 검을 겨눈 상대가 필시 호진일 것이라 판단했다. 바로 자신의 등용을 그토록 반대하던 인물이었다. 옥환은 대담하게도 검날에 제 목을 더 들이대며 싸늘하게 물었다.
“그런 하잘것없는 제 지혜를 구걸하러 오신 분들은 서국의 관리들이 아니십니까?”
“무어라?!”
옥환의 거만한 태도에 호진은 물론이고 몇몇 신하들의 표정 또한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분위기는 점점 더 옥환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승헌은 아까까지 짓고 있던 미소를 싹 지운 채 옥환을 바라보았다.
“네 이놈! 내 당장 네놈의 멱을 따 뱀 같은 네놈의 세 치 혀에서 내 나라를 지킬 것이다!”
결국 격분한 호진이 검을 휘두르려는 순간, 옥환이 두 눈을 부릅뜨고 호령했다.
“서국을 지키는 것이 왜 저를 죽이는 것입니까!”
전장을 누빈 자신을 능가하는 옥환의 패기에 호진의 검이 멈칫했다. 그사이 백고가 얼른 두 사람 사이를 막아섰다. 자리에서 뛰쳐나가기 일보 직전이던 승헌은 그 모습을 확인하고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네놈이 지금 무어라 지껄였느냐?”
백고를 사이에 두고도 여전히 검을 겨눈 채 호진이 묻자, 옥환이 길게 숨을 내쉬고는 평소의 차분한 모습으로 돌아와 말했다.
“이번 민란을 평정한 것은 백 장군의 공이 가장 크겠으나, 어찌 되었든 저의 덕이기도 합니다. 하잘것없는 지혜일지언정 서국에 도움이 된다면 마땅히 그것을 이용해야지 무작정 의심하고 배척하면 그것이 정녕 서국에 도움이 됩니까?”
“아주 입만 살았구나! 네 그 발칙한 주둥이를 놀려 여기까지 왔을지 모르겠지만, 내게 그런 것은 아무런 소용도 없다!”
“호 장군. 저는 호 장군을 도우러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딱히 호 장군을 설득하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뭣이?!”
“호 장군, 진정하십시오……!”
옥환에게 달려들려는 호진을 백고가 필사적으로 붙잡았다. 옥환은 그런 호진에게 차가운 시선을 던지고는 승헌에게 다가가 물었다.
“소신을 죽이시렵니까?”
“…….”
“전하. 소신은 묻고 있사옵니다. 전하의 지론을 무너뜨리고, 서국에 유용한 인재인 소신을 죽이실 것인지를. 전하의 것인 소신을 죽이실 건지를 말이옵니다.”
금세 무관심한 표정으로 턱을 괴고 앉아 있던 승헌은 이내 낮게 웃기 시작했다. 한동안 그치지 않고 이어지는 웃음소리에 옥환의 눈초리가 매서워졌다. 겨우 웃음을 그친 승헌은 짧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과인의 지론? 과인의 지론이 무엇이지? 경은 과인에 대해 그렇게 잘 아나?”
“…….”
“글쎄. 과인은 경에 대해 잘 모르겠군. 경이 정녕 이 서국에 도움이 되는 인재인지.”
옥환은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승헌이 원해서 자신을 등용한 것이 아니니, 환영은 절대 받지 못할 것이고 분명 방해도 있으리라고 충분히 예측했다. 하나 설마하니 승헌이 직접 나서 자신을 이렇게 배척할 줄은 몰랐다. 승헌의 이 매정한 태도에 자신은 왜 이렇게 배신감이 드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런 옥환을 뚫어질 듯한 시선으로 응시하던 승헌이 무게감이 실린 목소리로 말했다.
“하나 한 가지는 맞는 말이군. 첩이든, 태사든, ‘그대’는 ‘내 것’이야.”
갑작스레 바뀐 호칭에 옥환이 멈칫한 사이 승헌은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호진과 그를 붙잡고 있는 백고에게 일렀다.
“서국에 도움이 되지 않는 자라면 그게 누구든 과인은 주저 없이 버릴 것이네. 해악을 끼치는 자라면 더 주저 없이 벨 것이고. 그리고 그 판단은 다른 누구도 아닌 과인이 하는 것이야.”
승헌의 얼음장 같은 어조에 호진과 백고는 얼른 부복하고는 “황송하옵니다, 전하.” 하고 사죄했다. 승헌은 두 사람에게 일어나 자리로 갈 것을 명령했다.
이윽고 승헌은 여전히 제 앞에 서 있는 옥환에게 귀찮다는 듯 손짓을 했다. 옥환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승헌을 째려보다가 하는 수 없이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렇게 옥환의 첫 조회는 몹시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시간이 흘러 조회가 끝이 나고, 승헌이 먼저 정전을 나섰다. 승헌의 뒤를 쪼르르 따르던 환관은 문득 그가 웃고 있는 것을 보고는 의문을 느꼈다. 아무리 생각해도 오늘 조회 분위기는 그 어느 때보다 최악이었기 때문이었다. 환관의 의문을 눈치챘는지 승헌이 입을 열었다.
“이제 두고 봐야겠지. 아무튼, 내 나라의 조정에 새 바람이…… 아니, 태풍이 불기 시작했군.”
태풍이면 안 좋은 것이 아닌가? 한데 왜 전하께선 저리 기분이 좋아 보이시는가? 환관은 고개를 갸웃거릴 따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