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 同床異夢(동상이몽)
옥환의 처소는 여느 때와는 다르게 묘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옥환의 심기가 몹시 좋지 않기 때문이었다.
옥환은 내내 말없이 차만 마시고 있었으나, 사실 차의 양은 전혀 줄지 않고 있었다. 결국 옥환은 찻잔을 내려놓고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또 조금 전 승헌과 후원에서 있었던 일을 회상하려니, 한숨을 내쉬기 무섭게 또다시 옥환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나의 첩이 돼, 옥환.”
승헌이 그렇게 말했을 때, 옥환은 확실히 당황했었다. 달변가인 그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할 정도였다. 짙은 꽃향기가 제 마음을 현혹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나 그는 곧 정신을 차렸다. 이것은 승헌의 함정이라는 게 그의 판단이었다. 일부러 굴욕적인 제안을 건네 자신의 진심을 떠보려는 것이라고.
그렇다면 그것에 응해 주면 그만이다. 옥환은 각오를 단단히 하고, 승헌을 따라 웃으며 물었다.
“전하께선 절 안은 채라면 제 얘길 들어주시겠습니까?”
“그래. 방금 그렇게 말했잖아.”
“하면 좋습니다. 저 역시 말씀드렸다시피, 제 능력을 펼칠 수만 있다면 그곳이 어디든 상관없습니다. 설사 같은 사내의 품속이라도.”
승헌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비웃는다기보다는 기가 막히다는 투였다. 제대로 말에도 오르지 못할 것 같은 이 여린 서생은, 사실 웬만한 백전노장보다 더 배짱이 두둑한 자였다. 그의 말대로 같은 사내에게, 그것도 얼마 전까지 적국이었던 나라의 왕에게 첩이 되라는 제안을 받고도 이런 대범한 반응이라니.
하나 승헌은 크게 실망하지는 않았다. 아무튼 그 설옥환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을 봤으니까. 그것만으로 제법 성과는 있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승헌은 호기심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그대의 대답은 잘 알겠어. 하면 남은 얘기는, 자리를 옮겨서 듣도록 할까?”
그렇게 두 사람은 후원의 풍경이 가장 잘 보이는 정자로 이동했다. 미리 준비한 듯 그곳에는 주안상이 준비되어 있었고, 두 사람은 각자 자리를 잡았다. 이윽고 궁녀들이 승헌과 옥환의 잔에 술을 채우고 물러나자 승헌이 잔을 들었다가 멈칫했다.
“참, 옥환 그대는 술을 못 한다 했었지.”
“송구합니다.”
“한 잔도 못 하나?”
옥환이 그렇다고 대답하자 승헌은 더 이상 묻지 않고 시원스레 자신의 잔을 비웠다. 옥환이 술병을 들고 곁으로 다가와 다시 승헌의 잔을 채웠다. 승헌은 그것마저 주저 없이 마시고는 옥환의 손에서 술병을 빼앗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 일’은 정말 눈 깜짝할 새에 벌어졌다.
“윽…….”
승헌이 세게 끌어당기는 바람에 옥환은 저항 한 번 못하고 승헌의 품 안에 쓰러졌다. 옥환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자 그의 코앞에 승헌의 잘생긴 얼굴이 바짝 다가와 있었다. 승헌의 숨결에서는 희미한 술 냄새와 함께 꽃향기가 났다. 그가 마신 것은 꽃으로 만든 술이었을까. 어릴 적 조부가 건넨 술을 한 잔 마셨다가 졸도한 이후 되도록 그것을 멀리해 왔던 옥환은, 막연히 승헌이 마신 술의 맛이 궁금해졌다.
“이제 얘기해 봐, 옥환.”
냄새만으로 취한 것인지, 조금 몽롱해져 있는 옥환에게 승헌이 말을 걸었다. 옥환은 눈을 깜빡여 취기를 몰아내고는 평소와 다름없이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는 직접 전장에 나가시니 잘 아시겠지만, 현재 서국의 군수물자 수송은 육로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승헌은 짐짓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옥환의 말을 경청했다. 하나 옥환은 그 과장된 반응을 믿지 않았다. 필시 다른 생각이 있는 것이다. 옥환이 승헌을 경계하며 조심스레 말을 이어가는데, 제대로 듣고 있긴 한지 연신 고개를 끄덕이던 승헌이 태연한 손놀림으로 옥환의 옷을 벗겼다.
“전, 전하. 뭐하시는…….”
“그대도 받아들인 것 아니었나? 그대는 내게 하고 싶은 조언을 하고, 나는 그대의 몸을 취하고.”
옥환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승헌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하나 손이 빠른 승헌은 아예 옥환을 자신의 무릎 위에 앉히고는 겹겹이 덮여 있던 옥환의 옷을 훌훌 벗겼다. 흰 피부가 훤히 드러나자 옥환이 저도 모르게 다시 옷깃을 여몄다.
“전하, 저는…….”
“더 얘기해 봐. 평야가 많은 만큼 우리는 육로로 군수물자를 수송하고 있지. 해서, 그대는 그걸 어찌했으면 좋겠는데?”
승헌은 그렇게 물으며 옥환의 손을 치워 내고 그의 가슴과 배를 천천히 어루만졌다. 다시 화제를 돌려놓는 승헌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된 옥환은 어떻게든 말을 이어 보려 했으나 입술이 떨려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저 염완을 따르고 세상을 개혁하는 것을 전부로 알아 왔던 옥환이었다. 색色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고, 그 자신도 그러한 욕구를 거의 느껴본 적이 없었다.
한데 지금 이 순간, 그는 다른 사내의 품에 안겨 맨살을 만져지고 있었다. 차가운 손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승헌의 손은 마치 꿀을 바른 듯 끈적하게, 그리고 몇 번이나 공을 들여 집요하게 옥환의 피부를 더듬었다. 남색이나 비역이 어떻게 가능한 일인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옥환은 승헌의 손길 하나로 그것을 뼛속까지 이해했다.
평소엔 한없이 침착한 옥환이었으나, 생전 처음 느끼는 낯선 감각에 거부감이 왈칵 솟구쳤다. 눈동자에 겁이 서리고, 선이 고운 어깨가 잘게 떨렸다. 그리고 그런 옥환의 반응에 승헌이 손을 멈추었다.
“옥환. 떨고 있군.”
“…….”
“그대도 받아들인 줄 알았는데?”
확실히 자신의 입으로 안겨도 상관없다고 말했었다. 하나 자신의 몸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노골적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옥환은 이 표리부동에 대해 변명할 말이 없었다. 그야말로 낭패였다.
한데 옥환의 침묵에, 뜻밖에도 승헌은 옥환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굳이 싫다는 사람을 억지로 안을 생각은 없어.”
옥환은 황망한 얼굴로 승헌을 올려다보았다. 승헌은 그 표정을 조금 귀엽다고 생각하며 옥환의 옷매무새를 잘 여며 주었다.
“하니 옥환. 언제든 내 제안에 응할 생각이 있으면 찾아오도록 해. 그대가 같은 사내에게 안기는 것에, 말로 하는 것만큼 몸도 준비가 된다면 말이야.”
그러더니 승헌은 정말 뒤도 돌아보지 않고 휙 떠나 버렸다. 홀로 남은 옥환은 승헌이 떠난 방향을 한참이나 멀거니 바라보다가, 겨우 정신을 추스르고는 처소로 돌아왔다.
금야 선생 설옥환의 인생에 다시 없을, 치욕스러운 경험이었다.
회상을 끝낸 옥환은 다 식어버린 찻잔을 내려다보며 분한 마음에 주먹을 굳게 쥐었다. 승헌이 아무리 영리해 봤자 결국엔 검과 전장에 더 익숙한 무장일 뿐이라 생각했다. 자신보다 앞서 나가지는 못할 것이라고. 하나 자신은 승헌의 수에 완벽하게 놀아났다. 이번만큼은 부정할 수 없는, 승헌의 승리였다.
옥환은 자존심에 상당한 상처를 입었다. 지금껏 지략으로는 그 누구에게도 패배한 적 없던 옥환이었다. 한데 속이려 했던 상대에게, 그것도 몹시 굴욕적인 방법으로 당했으니 더더욱 부아가 치밀었다. 하나 한동안 분노를 곱씹으며 절치부심하던 옥환은 곧 마음을 다스렸다. 이 모욕에 대해 앙갚음할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이 목표로 하는 바는 서국에 내분을 일으켜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오늘 같은 일이 있었다고 해서 목표를 이루는 게 불가능해진 것은 아니었다.
‘의심이 깊은 인물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나를 시험할 줄이야. 하나 잘되었다. 도리어 너무 쉽게 몸을 내주었으면 내 의도를 간파했을 수도 있어. 망설이는 것이 결백의 증명이 될 수도 있다.’
옥환은 다시 냉정함을 되찾고는 승헌의 의심을 뿌리칠 방안을 고심했다. 그날, 옥환의 처소에는 오래도록 불이 밝혀져 있었다.
***
옥환의 처소 앞에서 이제나저제나 하고 기다리던 백고가 처소를 나오는 계평을 보고는 반색을 했다. 하나 계평은 싸늘한 얼굴로 딱 잘라 말했다.
“죄송합니다만 선생께서는 장군을 만나 뵙기 어려울 것 같다고 하십니다.”
“아니, 왜? 선생께 무슨 일이라도 있나?”
계평은 잠시 망설였으나, 결국 영 내키지 않는 얼굴을 한 채 옥환이 시킨 대로 대답했다.
“이제 엄연히 지아비를 모시게 된 몸이니 외간 사내와는 독대할 수 없다고 하십니다.”
“지, 지아비를 모시다니 그게 무슨…….”
“선생께서는…… 국왕 전하의 첩이 되셨습니다.”
“무어라?!”
아까보다도 더 눈을 휘둥그레 뜬 채 반문하는 백고에게 ‘그러니 그만 돌아가십시오.’ 하고 매정하게 내뱉은 계평은 문을 쾅 닫고 들어가 버렸다. 한동안 문 앞에 어른거리던 그림자가 결국 단념한 듯 사라지자 그것을 바라보던 옥환이 곧 문에서 시선을 돌렸다.
사실 옥환이 자신이 첩이 된 걸 알리면서까지 백고를 돌려보낸 건 승헌의 의도대로 움직이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는 자신을 조정에 들이지 않겠다고 말했다. 하니 본인이 그 의사를 철회할 때까지는 자신이 아무리 애를 써도 서국의 조정에 들어갈 수가 없을 터.
자신의 계획이 통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던 옥환이었으나, 뜻대로 되지 않을 가능성 역시 염두에 두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의 계획은 일견 실패한 것처럼 보였다. 하나 사실 그 계획에는 하나의 의도가 더 숨겨져 있었다. 그렇기에 옥환은 곧바로 조정 관리들에게 해 주던 조언을 멈춘 것이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표가 나는 법이다. 수많은 것을 옥환에게 기대던 서국의 관리들이 한순간에 그 편리함을 잃게 되었으니, 그들도 적잖이 곤혹스러울 터였다. 그렇게 만들기 위해 식사 시간도 잊고 관리들을 맞이했으며 아무리 사소한 고민거리라 해도 최선을 다해 조언을 해 주었다. 효과를 보는 것도 당연했다.
‘당신에게는 내가 필요 없을지 모르나 당신의 신하들에게는 아니지.’
게다가 자신이 승헌의 첩인 걸 소문내면 부수적으로 얻게 될 소득도 있었다. 아마 그 능글맞은 작자도 이번 일은 꽤 골머리를 앓게 될 것이다. 옥환은 이번 기회에 자신이 어떤 인물인지를 승헌에게 똑똑히 보여 주리라 작심했다.
그리고 얼마 후, 도성 안에는 승헌이 옥환을 첩으로 삼았다는 소문이 순식간에 퍼졌다. 승헌의 남색 자체는 그리 놀랄 일도 아니었으나, 그가 그 대단한 금야 선생에게 고작 첩 자리를 주었다는 사실은 그야말로 충격 그 자체였다.
서국의 관리들뿐 아니라 일반 백성들 역시 모였다 하면 서로 그 일에 관해 이야기하느라 바삐 입을 놀리곤 했다. 물론 인재 중의 인재인 금야 선생을 첩으로 삼은 승헌의 배포에 감탄을 금치 못하는 이들도 있었으나, 대체로는 금야 선생을 향한 승헌의 대우가 너무 야박한 것이 아니냐는 평이 지배적이었다.
금야 선생이라고 하면 적과 아군 상관없이 백성을 아끼고 훌륭한 인품을 지닌 인물로 잘 알려져 있었다. 오죽하면 벽국을 버리고 변절했음에도 배신한 당사자인 옥환보다도 그를 붙잡지 못한 염요를 탓하는 여론이 강할 정도였다. 게다가 그가 양양의 백성들을 구하려 다방면으로 애를 썼다는 것이 알려져 그를 향한 서국 백성들의 인식은 꽤나 좋은 편이었다.
물론 옥환이 벽국의 편에서 서국을 적대해 온 것은 사실이나, 나라가 쪼개지고 합쳐지길 반복하며 지배층과 다르게 평범한 백성들은 ‘내 나라’라는 구분이 거의 없어진 상태였다. 나라의 이름이 바뀌든, 왕이 바뀌든, 그들의 삶이 퍽퍽한 것은 변하지 않았기에.
그런 점에서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도 백성들을 생각하는 옥환의 모습은 백성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런 옥환이 승헌의 첩이 된다고 하니, 아무래도 비난의 화살은 승헌에게 쏟아질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옥환의 뜻대로 옥환이 조언을 멈춘 일로 조정 관리들 사이에서도 작은 불만이 조금씩 생겨나고 있었다. 옥환의 의견대로 진행하고 있던 안건도 있었던 터라, 그가 갑자기 이렇게 처소에만 틀어박히는 바람에 하던 일을 중지하는 경우까지 생겼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조정 관리들은 왜 그 귀한 인재를 고작 첩으로 삼았냐는 불만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드러내놓고 그 속내를 표시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저들끼리는 삼삼오오 모여서 승헌의 결정에 대해 볼멘소리를 하는 모양이었다. 조정의 분열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었으니 승헌도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제게 유리하게 돌아가는 판세를 보며 승헌의 동태를 예의주시하고 있던 옥환은 어느 날, 유난히 몸단장을 가지런하게 하고 누군가를 기다리듯 문만 바라보았다. 계평이 누구 기다리는 분이라도 있냐고 물으니 옥환이 웃으며 답했다.
“내 지아비께서 오실 때가 된 것 같아서 말이다.”
“……서국의 왕이 말입니까? 하면…….”
계평은 뒷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우물거렸으나 어쩐지 얼굴이 붉어진 것으로 보아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하나 옥환은 오늘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만큼, 어쩌면 자신보다 더 신중한 인물이었다. 섣불리 넘어오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그간 당한 게 있으니, 그가 일부러 허를 찔러 올 수도 있다는 가능성 또한 충분히 생각했다. 옥환은 이전 날, 다른 사내와의 접촉에 쩔쩔매던 그와는 전혀 달랐다. 승헌을 자신의 적수로 인정했기에, 이제는 벽국의 책사로서 그를 상대할 작정이었다.
‘내게 모욕을 준 대가는 톡톡히 받아 낼 것이다.’
그리고 그날 오후, 정말로 승헌이 처소에 찾아왔다. 옥환의 예상이 정확히 들어맞자 계평은 옥환이 요술이라도 부린 건 아닌지 궁금해질 정도였다.
이윽고 계평이 차를 내려놓고 자리를 비켜난 후에 승헌이 입을 열었다.
“지난번 일이 적잖이 불쾌했나 보군, 옥환. 나를 이런 식으로 골탕 먹이다니.”
승헌의 말에 옥환은 웃었다. 드물게 웃는 옥환을 보며 승헌은 슬쩍 놀랐으나 옥환은 여전히 웃음기 어린 얼굴로 말했다.
“참으로 이상한 말씀을 하십니다. 제게 첩이 되라고 말씀하신 건 전하가 아니십니까? 뭇 사내라면 원하는 상대를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은 법일 텐데, 전하께선 저를 이 사내 저 사내에게 보내고 싶으셨는지요?”
“옥환.”
가시가 돋친 어조에 승헌이 못 당하겠다는 듯 픽 웃더니 말을 이었다.
“그대를 이 사내 저 사내에게 줄 생각은 추호도 없어. 하나 그대를 가둬 놓을 생각도 없지. 나는 그리 인색한 지아비가 아니야.”
“송구한 말씀이나 본디 규중에서는 바깥일에 대해 왈가왈부해선 아니 될 줄로 압니다. 하나 저를 찾아오는 손님들께선 하나같이 곤란한 것을 물으시니, 제가 어찌 그분들을 맞이할 수 있었겠습니까?”
옥환을 지그시 바라보던 승헌이 옥환의 허리를 감싸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옥환은 물러나지 않고 그대로 승헌과 마주했다. 두 사람의 거리는 숨소리가 들릴 만큼 가까워졌다.
마치 한 떨기 작약처럼 정숙하게 앉아 있는 옥환에게선 생각과는 달리 연한 묵향이 났다. 평소에도 하는 일이라곤 독서와 서예 외엔 딱히 없다고 들었다. 승헌은 옥환의 조금은 밋밋한 향기가 왠지 모르게 마음에 들었다.
“하면 옥환. 그대는 이제 온전히 내 것이 되기로 한 건가?”
승헌의 질문에 옥환이 처음으로 그의 시선을 피했다. 가지런한 속눈썹이 맑은 눈동자 위에 내려앉았다. 그 뒤, 옥환이 짧은 침묵 끝에 내놓은 대답은 승헌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글쎄요.”
“……글쎄요?”
“전하께선 제 몸을 취하겠다 하셨습니다. 저는 그것에 응하기로 한 것입니다.”
자신이 내어 줄 것이 결코 마음까지는 아니라는 거겠지. 승헌은 옥환의 솔직한 점을 싫어하지 않았지만, 오늘은 어쩐지 그의 말이 거슬렸다. 이윽고 그는 옥환의 허리를 받친 채 다른 손으로 옥환의 흰 비단옷을 휙 끌어 내렸다. 그러자 옥환의 어깨는 물론이고 가슴과 배까지 훤히 드러났다.
“하면 그대의 몸만큼은 내 마음대로 해도 되겠군.”
승헌의 짓궂은 발언에도 옥환은 이렇다 할 말이나 행동을 하지 않았다. 그저 아주 조금, 승헌의 곁으로 다가갔다. 아주 미세한 움직임이었으나 원래부터 가까웠던 두 사람의 거리는 금방이라도 입술이 부딪칠 듯 좁혀졌다.
승헌은 의외다 싶었다. 그저 좀 놀려 주려던 것인데, 옥환은 서툴긴 해도 마치 자신을 유혹하는 듯 행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거기다 옥환이 살포시 눈을 감기까지 하자 승헌은 결국 그것에 이끌리듯 옥환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개었다.
승헌이 부드럽게 문 옥환의 아랫입술에서는 옥환이 즐겨 마시는 차 맛이 났다. 도톰한 입술은 보이는 그대로 말랑하면서도 탄력이 있어서, 승헌은 그 감촉에 조금 집요하게 옥환의 입술을 빨았다. 옥환의 입술을 탐하는 승헌의 혀끝에는 내내 엽차의 쌉싸래한 맛이 감돌았다. 그렇게 긴 접문을 이어가던 승헌은 살짝 웃으며, 여전히 옥환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붙이고 말했다.
“옥환. 입을 벌려.”
잠시 멈칫하던 옥환이 굳게 닫고 있던 입술을 슬그머니 열었다. 승헌이 그 안으로 혀를 밀어 넣고 점막을 차례차례 문지르자 옥환이 몸을 움찔거렸다. 승헌은 옥환의 입안을 느리게 헤집으면서도 옥환의 반응을 유심히 살폈다. 옥환은 조금 긴장한 듯 보였지만 전과는 달리 거부감 없이 승헌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어느새 옥환의 팔은 승헌의 목에 둘러져 있었다. 그것에 만족한 승헌은 마침내 옥환의 맨 가슴으로 손을 옮겼다.
가슴을 위아래로 쓰다듬던 손이 자연스레 돌기를 건드리자 옥환이 살짝 몸을 뺐다. 승헌은 입술을 떼고서는 옥환의 유두를 끈질기게 매만졌다.
“그대는 사내에게 안긴 적이 없지?”
그저 조금 간지럽기만 한 감각에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던 옥환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나직이 말했다.
“……부디 전하께서, 알려 주십시오.”
옥환의 대답에 미소 지은 승헌이 옥환의 바지 속으로 손을 넣으며 낮게 속삭였다.
“기꺼이.”
이윽고 승헌이 옥환의 양물을 쥐자 옥환이 가느다란 숨소리를 냈다. 수음을 한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옥환이었다. 남이 만지는 것은, 그것도 같은 사내가 만지는 것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옥환은 저도 모르게 놓아달라고 할 뻔한 것을 겨우 참아냈다.
승헌의 손은 능숙하게 옥환의 양물을 애무했다. 기둥을 부드럽게 쓸고, 부푼 귀두를 가볍게 압박했다. 옥환은 새어 나오려는 목소리를 억누르면서도 속으로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이 관계는 거래다. 승헌이 먼저 말을 꺼낸 데다가 둘 사이에는 정치적 간섭과 몸이라는, 서로 간에 오고 가는 것도 있었다. 그만큼 옥환은 승헌에게 ‘제공’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나 지금 이 순간 승헌이 받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받는 쪽은 옥환이었다. 다행스러운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옥환이 상상한 것과 사뭇 다른 상황임은 확실했다.
그리고 마치 그런 옥환의 속을 읽기라도 한 듯 승헌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나는 기분 좋게 해 주는 걸 좋아하거든. 상대가 흥분하는 모습을 보면 나도 기분이 좋아져.”
“…….”
‘그러니, 옥환’ 하고 귓가에 속삭인 승헌은 귀두 끝을 지그시 누르며 말했다.
“더 느껴 봐.”
“흣…….”
강도를 올린 자극에 옥환이 결국 작게 신음했다. 옥환은 적잖이 곤혹스러웠다. 승헌이 제 몸에 무엇을 해대든 그저 꾹 참으면 다 지나갈 것이라고 여겼다. 승헌의 욕정만 다 해소되면 끝이 날 것이라고. 하나 그게 아니었다. 승헌은 제 욕정을 해소하려는 게 아니라 옥환의 욕정을 끌어내려 하고 있었다. 옥환은 이렇게 기분이 좋을 줄도 몰랐고, 또 그 모습을 승헌이 뚫어지게 보고 있을 줄은 정말 몰랐다. 지금 옥환이 참고 있는 건 모욕감이 아니라 쾌감이었다.
옥환은 결국 소매로 얼굴을 가렸다. 적국의 왕에게, 그 견승헌에게 이런 모습만큼은 정말 보이고 싶지 않았다. 욕정 따위는 이성으로 억누를 수 있다고 생각했던 그였기에 더더욱 그랬다.
그렇게 옥환이 얼굴을 가린 채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데, 문득 그의 하반신에 지금껏 느꼈던 승헌의 손과는 다른 무언가가 닿는 게 느껴졌다. 제 양물만큼 달아오른 그것의 거세게 뛰는 맥을 느낀 순간, 승헌이 얼굴을 가린 옥환의 손을 내렸다.
“저, 전하.”
단숨에 옥환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서로 맞붙어 있는 두 개의 살덩이였다. 그중에서도 거대하다고밖에 할 수 없는 검붉은 기둥이 승헌의 양물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하나 그것이 자신의 것처럼 단단하게 발기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았다.
뒤늦게 옥환이 고개를 번쩍 들자 승헌이 느릿하게 허리를 움직여 자신의 양물을 옥환의 것에 비볐다. 젖은 두 개의 양물이 질척이며 마찰했다. 그 낯뜨거운 장면에 옥환이 고개를 돌리려는데, 승헌이 옥환의 턱을 잡아 시선을 붙들고는 말했다.
“똑바로 봐. 그대가 곧 받아들이게 될 물건이니까.”
투명한 액체를 흘리며 불끈대는 양물은 그 독보적인 존재감을 뽐내며 옥환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옥환은 저토록 길고 굵은 것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과연 저것이 자신이 가진 것과 같은 것인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하나 옥환이 더 생각하기도 전에 승헌이 옥환의 손으로 두 양물을 쥐게 했다. 직접 만지니 그 크기와 무게감이 더 와 닿았다. 옥환은 과연 제 안에 이것을 넣을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들어간다 하더라도 그 과정이 상당히 고통스러울 것 같았다.
그런 옥환의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윽고 승헌이 옥환의 손을 감싼 채 위아래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반신에 느껴지는 압박감과 함께 손바닥에 닿는 단단한 감촉에 옥환의 입에서 떨리는 한숨이 흘러나왔다. 승헌의 혈관이 불거진 기둥이 자신의 것에 진득하게 달라붙어 문질러졌고, 그럴 때마다 옥환의 그곳으로 열이 몰렸다. 꼿꼿했던 그의 자세는 승헌에게 기대듯 흐트러져 있었다. 수치심은 여전히 남아 있었으나, 점점 더 그것은 옅어지고 성적인 흥분만이 커져 갔다. 옥환에게는 그저 이런 장난 같은 행위마저 낯설고, 또 음란하게 느껴졌다. 잡혀 있는 살덩이가 찌릿찌릿 저려 왔고 아랫배에서부터 퍼진 열기가 머리 꼭대기까지 뜨겁게 만들었다. 그것이 자신의 몸이 예민하기 때문인지, 승헌이 능숙하기 때문인지 옥환은 알 수 없었다.
그런 옥환에게 승헌이 귓가에 대고 다정하게 물었다.
“옥환. 내 것이 마음에 드나?”
“아, 읏…….”
승헌의 숨결이 닿자 옥환이 더는 견디지 못하고 파정했다. 전신이 파르르 떨리고, 부푼 양물의 선단에서 반투명한 액체가 울컥울컥 쏟아졌다. 자신과 승헌의 손에 뿌려진 제 씨물을 보며 옥환은 이루 형언할 수 없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런 옥환을 보며 승헌이 픽 웃었다.
“그대는 생각보다 음란하군.”
옥환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승헌은 옥환의 그 찌를 듯이 높던 자존심이 조금은 꺾이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기실 승헌은 바로 그런 옥환의 의기소침한 얼굴이 보고 싶었다. 하나 옥환은 승헌과 조금 거리를 벌리는가 싶더니 양다리를 활짝 열었다. 승헌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쳐다보고 있자 옥환이 이미 내려가 있던 바지를 조금 더 내리며 말했다.
“마저…… 하셔도 됩니다.”
“……뭐?”
“아직, 안 식지 않았습니까.”
옥환이 그렇게 말하며 바라보고 있는 것은 승헌의 여전히 발기해 있는 양물이었다. 승헌은 매번 짓던 그 만면의 미소를 잃은 채 옥환을 멍하니 응시했다.
이번에도, 자신은 옥환에게 크게 당한 모양이었다.
잠시 침묵하던 승헌이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더니 돌연 옥환을 뒤로 쓰러트리고 그 위로 다가섰다. 두 사람의 거리는 또다시 바짝 줄어들었다.
“옥환. 정말 그대는 나를 못 참게 만드는군.”
“참으실 필요…….”
말을 잇던 옥환의 입을 자신의 입으로 막은 승헌이 처음보다는 조금 거칠게 입술을 비벼왔다. 그러다 그는 의외로 곧 입술을 뗐지만, 그 눈빛은 여전히 열기로 가득차 있었다.
“하나 지금은 그대를 안지 않을 거야.”
뜻밖의 발언이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승헌은 여전히 자신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유두를 만지작거리며 뜨거운 숨결을 내뱉고 있었다. 옥환은 그가 자신을 안고 싶어 한다고 확신했다. 그렇다면 그가 참을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저를 못 믿으셔서 그러십니까?”
“아니. 나는…….”
승헌은 옥환의 체취를 맡는 듯 깊이 숨을 들이마시며 말을 이었다.
“좋아하는 건 제일 나중에 먹거든.”
순간 말문이 막힌 옥환은 발끈한 마음에 미간을 찌푸린 채 물었다.
“하면 저를 드시기 전까지는 다른 걸 드실 심산이십니까?”
그 말에 승헌에게서 또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가 웃을 때마다 그의 입술이 닿아 있는 쇄골 부근이 간지러워서 옥환은 몸을 움츠렸다.
“맛없는 건 먹어봤자 입맛만 버릴 테지. 그대를 맛보기 전까지는 참는 수밖에.”
“제가 기대하시는 만큼 맛이 좋아야 할 텐데요.”
“정말 한마디도 지지 않는군.”
승헌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투덜거렸으나 옥환은 그것을 못 들은 척하고는 몸을 일으키려 했다. 분위기도 가라앉은 듯하니 더는 이 사내와 마주할 이유가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한데 승헌이 그런 옥환의 손목을 잡아 도로 쓰러트렸다.
“하나 이리 날 부추기는 그대를 모른 척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겠지.”
그러더니 승헌이 옥환의 바지를 벗기고는 옥환의 맨다리를 다시 양쪽으로 활짝 벌렸다. 옥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승헌이 하는 양을 가만히 두고 보았다.
옥환의 하얀 둔부 사이로 보이는 닫힌 구멍을 조금 벌린 뒤, 승헌은 다른 손으로 자신의 양물을 쥐고 문지르기 시작했다. 누워 있는 자세의 옥환은 그 행위를 볼 수는 없었으나, 들리는 소리와 분위기로 승헌이 수음을 하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이따금 승헌의 발기한 양물이 옥환의 둔부 사이에 닿았고, 그때마다 옥환의 둔부는 승헌의 선액으로 적셔졌다. 옥환은 이 민망한 상황에 그저 입술만 질끈 깨물었다. 문득문득 찾아오는 망측한 생각을 서책의 내용을 떠올려 덮어 버리며.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겨우 승헌은 씨물을 쏟아 내고는 행위를 멈추었다. 자신과 옥환의 몸을 닦으면서도 승헌은 여전히 아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나 옥환은 자신의 양물이 다시 발기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 그대 마음대로 해도 좋아.”
“……예?”
옥환이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있는데 바지춤을 여민 승헌이 문득 그렇게 말문을 열었다.
“이제 손님을 맞고 싶지 않다면 거절해도 좋다고. 내 핑계를 대든, 무엇을 대든.”
옥환은 눈을 내리깔고는 알겠다고 대답했다. 승헌은 그런 옥환을 응시했으나, 그의 속은 여전히 짐작이 가지 않았다.
몸을 완전히 섞으면 그때는 좀 알게 될까. 승헌은 그러한 궁금증을 느끼며 남은 열기와 함께 옥환의 처소를 나섰다.
***
“우리가 목숨을 걸고 전장에 나가 있는 동안 안락한 도성 안에서 호의호식하던 놈들이 전하 앞이라고 아주 기세가 등등하구나!”
“뭐라고? 이보시오, 고 장군! 말이 지나치시오!”
서국의 조정은 아침부터 신료들 간의 말다툼으로 떠들썩했다. 그들은 문관과 무관으로 편을 나누어 서로에게 삿대질을 하며 언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 가운데 옥좌에 앉아 있는 승헌은 턱을 괸 채 못마땅한 얼굴로 그들이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었다. 하나 두 당파 간의 싸움은 통 그칠 줄을 몰랐고, 결국 승헌이 참다못해 그만 좀 하라고 불호령을 내리고 나서야 겨우 소란이 잦아들었다.
“오늘 조회는 이만하지. 더는 경들과 정사를 논할 생각이 들지 않는군.”
승헌은 신경질적으로 내뱉고는 자리를 박차고 나와 버렸다.
작금의 서국 조정은 무관과 문관들의 다툼으로 바람 잘 날이 없었다. 왕인 승헌 본인이 장군 출신이기도 하고, 무력으로 세워진 국가이니만큼 서국은 무관의 힘이 강했다. 하나 나라가 자리를 잡아 가면서 차츰 문관들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시간이 갈수록 그들의 존재감도 커졌다. 한데 문관들이 힘을 가지게 되면서 문관과 무관, 두 집단 간에 의견 충돌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어느 순간 그들 사이에는 메울 수 없는 깊은 감정의 골이 생겨난 것이다.
그렇게 지금에 이르러서는 방금과 같은 다툼이 일상이 될 만큼 두 집단의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아 있었다. 승헌은 자신과 함께 칼을 들고 싸운 전우인 무관들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아직은 전시 상황이기에 벽국을 정복하고 나면 또 모르지만, 지금으로서는 무관을 홀대해선 안 될 일이었다.
하나 문관들이 무관들에게 불만을 품는 것도 이해는 갔다. 무관들은 전장을 누비는 만큼 덕이나 예의와는 거리가 먼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그들은 승헌의 권세를 등에 업고 백성들을 수탈하는 등의 횡포를 부려 원성을 사기도 했다. 그동안 나라를 위해 바친 것이 있으니 보상을 받고자 하는 무관들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 탓에 나라를 위태롭게 만든다면 이는 좌시해선 안 될 일이었다.
그렇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고민에 빠진 승헌에게 또 하나의 안 좋은 소식이 전해졌다. 바로 옥환이 식음을 전폐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환관의 보고를 들은 승헌은 눈썹을 찌푸렸다. 조정의 일만도 머리가 아픈데, 이젠 옥환까지 말썽이었다.
승헌은 제 나라 안팎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옥환을 이용하고 싶었다. 해서 덫을 놓았으나, 옥환은 그 덫에 걸리지도, 그것을 피하거나 간파하지도 않았다. 승헌은 도무지 옥환의 속을 알 수 없었다. 처음 우려했던 대로 정말 애물단지로 전락하려는 것인지.
그렇게 며칠이 흘러, 승헌이 옥환의 처소를 찾았다.
“전하.”
옥환은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로 승헌을 맞았다. 한데 전에도 봤던 흰 비단옷의 품이 어쩐지 낙낙해진 느낌이 들었다. 그다지 티는 나지 않았으나, 확실히 옥환은 야위어 있었다.
옥환의 절을 마다한 승헌은 자리에 앉자마자 볼멘소리를 했다.
“옥환. 이번엔 또 뭐가 불만이야? 난 정말 열심히 그대의 비위를 맞춰 주고 있는데.”
“…….”
“원하는 게 있으면 말로 해. 그대의 전 주인은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사람 마음을 그리 잘 헤아리는 편이 아니야.”
잠시 침묵하던 옥환은 승헌의 잔에 차를 따라주며 말했다.
“그런 것 없습니다. 전하께선 지금도 충분히 제게 잘해 주고 계십니다. 부디 개의치 마십시오.”
“그럼 그대가 쫄쫄 굶고 있다는 말을 듣게 하질 말든가.”
“하면 이젠 제 일을 윗선에 보고하지 말라고 하인들에게 일러두겠습니다. 전하의 사람들이 과연 제 말을 들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의 내용엔 다소 가시가 있었으나 그 말을 하는 옥환의 모습에선 승헌을 힐난하려는 의도는 보이지 않았다. 그저 기운이 없는 것일까. 잠시 옥환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승헌은 밖에 선 궁인들에게 지시한 것을 안으로 들이라 일렀다.
이윽고 궁인들이 수많은 음식을 가져와 상 위에 올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저 시큰둥한 얼굴이던 옥환은 곧 음식을 보고는 반색했다. 승헌이 가져온 것은 다름 아닌 벽국의 요리였다.
“향수병이 아니라면 어쩔 수 없지만,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이게 다야.”
“…….”
그리움에 젖은 얼굴로 음식들을 바라보던 옥환이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 반응을 확인한 승헌이 어서 먹으라며 직접 수저를 옥환의 손에 쥐여 주자 옥환이 곧 식사를 시작했다. 느리지만 무엇 하나 빼놓지 않고 골고루 먹는 모습을 보며 승헌은 뿌듯한 얼굴을 했다.
“전하께서는 안 드십니까……?”
한창 먹는 데에 여념이 없던 옥환이 뒤늦게 멋쩍은 듯 묻자 승헌이 씩 웃으며 대꾸했다. 나는 괜찮아.
“그대가 잘 먹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나쁘지 않군. 그대의 식사는 앞으로 벽국 출신의 요리사가 맡을 테니, 이제는 거르지 말고 먹어.”
옥환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식사를 이어 갔다. 그렇게 만족할 만한 식사를 끝내고 상을 치우자, 옥환이 승헌에게 물었다.
“제가 서국의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못 먹는 것을 어찌 아셨습니까?”
“그냥 짐작으로. 그대는 여간한 일에는 꿈쩍도 하지 않는 대장부가 아닌가. 그리 마음이 강한 그대이니, 문제가 생겼다면 마음이 아니라 몸이라고 추측한 거지.”
“……현명한 판단이셨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잠시 우물쭈물하던 옥환은 이내 한마디를 덧붙였다.
“감사합니다.”
그 감사 인사에 승헌은 금야 선생에게 인사를 다 받아 본다며 커다랗게 웃었다. 그 모습을 지그시 바라보던 옥환이 저도 모르게 속엣말을 입 밖에 냈다.
“제게 왜 이리 잘해 주십니까?”
“뭐?” 하고 의외라는 듯 반문하는 승헌에게, 옥환은 기세를 몰아 물었다.
“사실 전하께선 저를 불신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한데 직접 저를 보러 오시고, 저를 이처럼 챙겨 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전하께선 제가 무엇을 하길 원하십니까?”
이렇게 직접적으로 물을 줄은 몰랐는데. 승헌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옥환의 질문에 대답을 내놓았다.
“그대가 나의 첩이 되었으니, 어찌 되었든 내 백성이기도 한 것 아닌가. 군왕이 민초에게 긍휼을 베푸는 것이야 당연한 일이지. 그대가 나를 그대의 왕으로 생각하든, 생각하지 않든 간에.”
승헌의 대답을 곱씹듯 고개 숙인 채 말이 없던 옥환이 이내 다른 질문을 던졌다.
“왜 저입니까?”
두루뭉술한 질문이었으나 승헌은 그 구체적인 뜻을 묻지는 않았다. 그 안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담겨 있을 터였다. 왜 자신을 서국에 데려왔는지, 왜 자신을 첩으로 삼았는지, 왜 자신을 못 믿으면서도 이용하려 하는지. 하나의 질문은 수십 가지의 질문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승헌이 할 수 있는 대답은 단 한 가지였다.
“고와서.”
“……예?”
“그대가 고와서 마음에 들었거든.”
뜬금없다고 할 수도 있을 대답에 옥환이 반응을 고민하는데, 승헌이 돌연 화제를 바꾸었다.
“옥환. 내가 그때 그대를 안지 않아서 섭섭했나?”
“예상하고 있던 바입니다. 하나…… 김이 좀 샌 것은 사실이지요.”
“하하하하, 김이 샜다니. 그대다워.”
승헌의 웃음소리에 웬일인지 옥환이 마주 웃었다. 옥환에게서는 이전과는 달리 사뭇 풀어진 분위기가 엿보였다. 그리고 승헌은 지금이 적기라고 확신했기에, 옥환을 나직이 불렀다.
“옥환.”
마치 다음 말을 예상하기라도 한 듯, 옥환이 ‘예’ 하고 단정하게 대답했다.
“그만 가봐야겠어.”
승헌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옥환이 얼른 그 뒤를 따랐다. 옥환이 손수 문을 열어주며 “살펴 가십시오” 하고 인사를 하는데, 승헌이 문을 나서다 말고 작게 덧붙였다.
“밤에 다시 오지.”
일순 멈칫했던 옥환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기다리겠습니다.”
그렇게 옥환의 처소를 나와 얼마간 걷던 승헌이 갑자기 쿡쿡 웃었다. 환관이 어찌 그러시냐 물으니 승헌이 여전히 싱글벙글한 얼굴로 말했다.
“기다리겠다는군.”
“예?”
“그 설옥환이 말이야.”
영문을 모르는 환관을 둔 채 승헌은 걸음을 재촉했다. 그 뒷모습은 조금 들뜬 것 같기도 하였다.
***
늦은 밤. 옥환의 처소를 향하던 승헌은 무언가를 보고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웬일인지 처소의 쪽문이 열려 있었고, 옥환은 그 앞에 걸터앉아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렇게 쓰는 거란다. 자, 따라 써보거라.”
“예!”
어린 하인에게 글자를 가르쳐 주며 옥환은 전에 없이 부드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이를 바라보는 눈빛이 얼마나 살가운지 마치 다른 사람처럼 보일 정도였다.
내내 저에겐 차가운 시선만 쏘아 대던 옥환을 생각하면, 승헌은 도저히 이 순간을 방해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하인에게 얼마간 글자를 더 써 주던 옥환이 뒤늦게 승헌의 존재를 깨닫고는 “전하” 하고 일어섰다.
하인 역시 승헌을 보고는 놀란 얼굴로 뒤따라 일어섰다. 두 사람이 절을 올리려 하자 승헌이 바닥에 꿇을 필요 없다고 사양하고는 처소 안으로 들어섰다.
“귀여운 아이더군. 내가 그대에게 붙여 준 하인들을 내 사람들이라면서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옥환이 술상을 내오자 승헌이 그렇게 말문을 열었다. 승헌의 잔에 술을 따라주며 옥환이 대답했다.
“멋모르는 어린아이에게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다만…….”
“다만?”
“……영특한 아이니 제가 가르쳐 보고 싶습니다. 물론 전하께서 허락해 주신다면 말입니다.”
승헌은 시원스럽게 그러라고 대꾸했다. 기실 옥환은 아이가 승헌이 좋은 왕이라고 칭찬하던 것을 말하려다 말았다. 아이의 말에 의하면 승헌은 궁인들에게도 자주 음식이나 쌀을 베풀고, 누구라도 궁인들에게는 함부로 하지 못하도록 단속한다는 모양이었다.
안 그래도 저 오만한 사내가 얼마나 기고만장해질지 뻔히 보여서 그냥 입을 다물었으나, 솔직히 의외긴 했다. 승헌은 선왕인 진평이 지병으로 죽고 나서 왕위에 올랐으나, 세간에서는 승헌이 진평을 죽인 것이라는 이야기가 공공연한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그만큼 승헌은 간웅이라는 평가가 많았고, 게다가 도깨비 장수라는 별명까지 붙은 인물이니 인덕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한데 그런 그가 직접 부리는 궁인들에게는 좋은 평가를 받고 있을 줄은 전혀 몰랐다.
옥환에게 있어 승헌은 여러 가지로 예상을 벗어나는 존재였다. 하나 한편으로는 왕이 됐으니 민심에도 신경을 써야 옳은 일이긴 했다. 도리어 승헌이 궁 안에서조차 망나니라고 소문이 났더라면 옥환은 그와 얼굴을 맞대고 싶지도 않았을 것이다.
승헌이 술잔을 몇 번 기울이는 사이 옥환이 하인들을 시켜 처소의 양쪽 문을 활짝 열었다. 그러자 까만 밤하늘에 처연히 빛나는 초승달이 보였다. 그렇게 두 사람은 잠시 달구경을 했다.
“달이 곱군.”
달을 올려다보고 있던 옥환은 승헌의 말에 그를 돌아보았다. 하나 그는 하늘이 아닌 옥환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자연스레 뻗어오는 승헌의 손길을 피하지 않은 옥환은, 그의 손이 자신의 뺨을 쓰다듬게 놔두었다.
옥환도 자신의 외모가 유별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어렸을 때는 여자아이로 오해받는 일이 잦았고, 커서는 성별과 관계없이 많은 이들의 구애를 받고는 했다. 그리고 명망 있는 책사로 이름을 날린 후에도 여전히 혈기왕성한 사내들은 옥환에게 수많은 추파를 던졌다. 오직 염완만이 예외였다. 그렇기에 옥환은 일부러 더 색을 멀리했고, 책략가로서의 뛰어난 면모를 보이고자 노력했다.
그렇게 해도, 여전히 누군가에게 옥환은 그저 안아 보고 싶은 상대일 뿐이었다. 사내란 다 그랬다. 특히 지위나 권력이 있는 자들은 더더욱 사람마저도 지배하고 싶어 했다. 그 대상이 천하제일의 책사라 불리는 미인이라면 더더욱.
하나 옥환도 목적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외모를 이용하는 것쯤은 주저하지 않았다. 벽국에 있을 때도 염완은 달가워하지 않았었으나, 옥환은 적장에게 직접 술 접대를 하거나 제 미모로 꾀어내는 것에 주저가 없었다. 이번 일 역시 전부 옥환의 모략이었다. 곡기를 끊은 것도, 승헌에게 고마워한 것도 모두 연기였을 뿐이다. 이 모든 건 승헌이 자신을 안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또다시 승헌에게 거절당한다면, 계획도 계획이지만 무엇보다 자존심이 상당히 상할 것 같았다. 하나 승헌을 의도대로 꾀어낸 지금조차 여전히 옥환은 그 무엇에도 확신이 없었다.
제 속의 동요를 잘 감춘 옥환은 제 뺨을 가만가만 쓰다듬는 승헌의 손을 잡고 물었다.
“이제 아끼는 걸 드실 결심이 서셨습니까?”
승헌은 대답 대신 옥환에게 다가가 입을 맞추었다. 내심 안도한 옥환이 승헌의 입맞춤을 받으며 손짓을 하자 하인들이 얼른 열린 문을 닫았다.
제게 달라붙은 승헌의 입술과 혀에서는 진한 술맛이 났다. 일부러 술을 먹인 것이긴 했으나, 이대로면 술이 몹시 약한 자신까지 취하게 될 것 같았다. 그리되면 공든 탑이 무너지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옥환은 슬그머니 몸을 뒤로 뺐다. 갑자기 입술이 떨어지자 승헌이 옥환을 빤히 바라보았고, 옥환은 자못 태연한 얼굴로 변명했다.
“여기서 할 건 아니지 않습니까.”
옥환의 대답에 승헌이 어린아이처럼 씩 웃었다. 그 미소를 본 옥환은 당황했으나 승헌은 여전히 눈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나는 여기서 해도 되는데.”
“……하면 뜻대로 하십시오.”
옥환은 승헌에게 휘둘리고 싶지 않아 한숨 섞인 어조로 그렇게 답했다. 하나 옥환의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승헌은 옥환을 쓰러트리고 거침없이 옷을 벗겼다. 그 다급한 움직임 탓에 상 위에 올려져 있던 술병이 쏟아져 승헌의 소매를 적셨으나 그는 신경도 쓰지 않는 듯했다. 하는 수 없이 대신 술병을 세워 놓으려던 옥환은 따끔한 감촉에 움찔했다.
“읏, 전하…….”
승헌은 옥환의 유두를 잘근잘근 깨물며 이전처럼 그의 몸을 섬세하게, 그리고 끈적하게 어루만졌다. 옥환은 승헌이 유두에 집착하는 걸 그만뒀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제 몸을 탐닉하는 그의 모습을 보는 게 그리 나쁘지만은 않아 그냥 두었다.
옥환이 지금껏 살펴본 바에 의하면, 승헌은 항상 여유가 넘치고 속을 읽을 수 없는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었다. 옥환은 그를 이길 수 없었다. 그는 때때로 거대한 벽 같기도 했고, 헤치고 나아갈 수 없는 넝쿨 같기도 했다.
하나 그런 승헌이 자신의 몸을 원할 때만큼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일전에도, 지금도, 그는 조금 전까지 보이던 미소는 온데간데없이 옥환에게 흥분해 있었다. 옥환은 그것이 썩 흡족했다. 지배욕이나 우월감일까? 아니면 자신의 적수라고 인정한 상대에게 잠시라도 우위를 점할 수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는 것일까? 옥환은 그 감정에 이름을 붙이지 못한 채 승헌의 열기에 덩달아 휩쓸려갔다.
이윽고 승헌이 옥환의 목에 얼굴을 묻고 흰 살결을 가볍게 빨아당겼다. 그러자 새하얀 피부 위에 붉은 자국이 남아 상당히 색정적인 모양새가 되었다.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하니, 처음엔 그저 목석같이 누워 있던 옥환의 입술 사이로 달콤한 한숨 소리가 새어 나왔다.
다소 흐트러진 옥환의 숨소리를 들으며 승헌은 옥환의 옷을 완전히 벗기고는 다리를 벌렸다. 한데 승헌이 일순 멈칫하더니, 갑자기 실소를 터뜨렸다. 옥환은 그 웃음의 의미를 짐작하는 듯 다리를 슬그머니 오므리려 했으나 승헌이 그것을 막고는 물었다.
“그대가 직접 했나?”
“……예. 전하의 손을 더럽힐 순 없지 않습니까.”
옥환의 둔부 사이는 끈적한 향유로 흠뻑 젖어 있었다. 옥환 본인의 말에 의하면 쓴 적이 없을 구멍 역시 벌어진 채 안이 빨갛게 부어올라 있었다. 아무래도 밑준비를 한 모양이었다.
승헌은 바지 속에서 부푼 제 양물을 꺼내는 대신 그대로 아랫배를 옥환의 다리 사이에 바짝 붙인 채 가볍게 문지르며 물었다.
“해서? 이런 것은 어디서 배웠나?”
“……그냥, 예전에.”
“그냥 예전에, 어떻게?”
일부러 자신을 괴롭히려는 듯한 승헌의 행동을 성가시다고 여기며, 옥환은 승헌의 가슴을 살짝 밀어내고는 말했다.
“이러다 식습니다.”
“안 식었잖아.”
승헌은 옥환의 양물을 꽉 쥐며 단호하게 내뱉었다. 돌연 가해진 자극에 미간을 찌푸린 옥환은 자신만만한 미소를 짓고 있는 승헌에게 차분하게 일렀다.
“어떻게 배웠는지는 이다음에, 다 하고 나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더니 옥환은 승헌의 목 뒤로 손을 뻗어 그를 제 쪽으로 끌어당기고 덧붙였다.
“제 마음이 내키면.”
옥환의 도발에 승헌은 눈을 가늘게 하고 웃었다. 그는 몹시도 기분이 좋아 보여서, 도리어 옥환은 그것이 마음에 걸릴 정도였다.
“하면 나는, 그대를 만족시키면 되겠군. 그대가 모든 걸 말해 주고 싶어질 만큼.”
지나치게 다정한 목소리에 옥환이 괜한 말을 했나 잠시 후회하는 사이 승헌이 제 손가락을 옥환의 둔부 사이로 푹 집어넣었다. 한 번에 세 개가 들어오는 바람에 전혀 대비하지 못한 옥환의 입에서는 작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읏……!”
옥환의 당황한 표정에도 승헌은 태연하게 안쪽의 공간을 마구잡이로 벌리며 말했다.
“고작 이 정도 풀어놓는 걸로 내 건 안 들어가. 그대도 전에 봤잖아?”
“전하, 천천히…….”
“걱정하지 마, 옥환. 그대가 앞으로는 어떻게 밑준비를 해야 하는지, 제대로 가르쳐 줄 테니까.”
옥환의 안에 들어간 승헌의 손가락은 질척질척 소리를 내며 내벽을 문지르고 좌우로 벌렸다. 자신 또한 준비를 할 때 손가락을 쓰기는 했으나, 승헌의 손가락은 자신의 것보다 훨씬 굵었고 무엇보다 옥환은 손가락을 세 개나 넣지는 않았었다. 손가락이 이리저리 움직이며 깊숙한 곳을 파헤치는 낯선 감각에 옥환의 전신은 바짝 긴장했다.
“옥환. 벌써부터 이렇게 조이면 풀기가 힘들잖아. 응?”
“알면 좀, 천천히, 해 주시겠습니까.”
자신을 놀리는 듯한 승헌의 말투에 자존심이 상한 옥환이 가쁜 숨을 쉬면서도 이를 악물고 대꾸했다. 통 꺾일 줄을 모르는 옥환의 오기에 피식 웃은 승헌은 “천천히 해줄게.” 하고 대답하더니 이윽고 다른 한 손으로 옥환의 양물을 감싸고는 느리게 쓰다듬었다.
“읏…….”
말한 대로 승헌은 아주 천천히, 하나 젖은 기둥에서 무언가를 짜내려는 것처럼 조금 힘을 주어 쓸어올리고, 다시 쓸어내리기를 반복했다. 그 행위가 가져다주는 쾌감에 둔부 사이에서 느껴지던 거북함은 점점 더 옅어져 갔다.
옥환이 흥분하는 듯하자 승헌은 조금 더 노골적으로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귀두 밑을 손끝으로 슬금슬금 문지르고 요도구를 가볍게 눌러주니 옥환의 양물은 어느새 선액으로 잔뜩 젖어 들었다. 하나 승헌이 워낙 느리게 만져대는 탓에 옥환은 쉽사리 절정에 이르지 못했다. 쌓여 가는 고양감에 옥환의 표정에는 쾌락과 함께 간절함이 깃들기 시작했다.
“옥환, 이제 손가락이 네 개가 들어갔는데.”
“그럼 넣으시면 되지…… 않습니까.”
“그래도 되겠어?”
“손을 통째로 밀어 넣으실 게 아니라면…… 흣…….”
떼를 쓸 줄 모르는군. 승헌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마침내 발기한 제 물건을 꺼내 들었다. 여유롭게 말하던 것치고 승헌의 양물은 금방이라도 터질 듯 부풀어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승헌은 옥환이 제게 졸라대는 모습을 보고 싶었으나, 아무래도 더는 참기가 힘들 것 같았다.
이윽고 승헌이 자신의 양물 끝을 방금까지 손가락으로 드나들었던 옥환의 벌어진 구멍에 맞추었다. 할 수 있을 만큼 벌려 놓았음에도 승헌의 양물 역시 완전히 발기한 탓인지 삽입은 쉽지 않았다.
승헌은 혀를 차며 접합부에 향유를 쏟아붓더니 허리에 힘을 주었다.
“흐, 으…….”
몸 안쪽이 벌어지는 느낌에 옥환이 이불을 꼭 쥐었다. 허벅지가 잘게 떨리고, 하반신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손가락 네 개만으로 숨이 넘어갈 지경인데, 사내의 양물은 그와는 차원이 다르게 버거웠다. 게다가 승헌이 삽입하는 모습을 제대로 볼 수는 없었으나, 지난번 확인한 바로 그의 양물은 보통 크기가 아니었다. 그래도 워낙 준비를 길게 했으니 어떻게든 들어갈 수는 있을 것이다. 옥환은 그렇게 생각하며 이를 악물었다.
“옥환. 힘을 빼야 해.”
승헌의 목소리에 옥환은 어떻게든 힘을 빼보려 했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신경은 팽팽해지고 안쪽은 오그라들 뿐이었다. 어찌할 바를 모른 채 붉어진 눈시울로 저를 올려다보는 옥환의 모습에, 승헌은 그냥 박아 버리고 싶은 충동을 꾹꾹 억누르며 다시금 옥환의 양물로 손을 가져갔다.
아까까지와는 달리 빨라진 손의 움직임에 옥환의 눈앞이 흐려졌다. 해소되지 못한 사정감이 갑작스레 솟구쳤다. 승헌이 기둥의 뿌리부터 쭉 잡아 올리자 옥환이 입술을 물었다. 아래로 몰린 열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흡…….”
입술을 물고 있음에도 그 안으로 참지 못한 소리가 울렸다. 눈물이 핑 돌고, 전신을 짜릿한 감각이 빠르게 훑고 지나갔다. 발끝과 발바닥이 저릿저릿한가 싶더니, 어느새 다리 사이가 뜨뜻해졌다. 옥환이 쏟아낸 씨물이 그의 고간을 적시고 있었다.
육욕에 저항하려 애를 쓰는 옥환의 모습에서 느껴지는 왠지 모를 배덕감과 오싹한 쾌감에 승헌이 초조하게 입술을 핥으며 다시금 허리에 힘을 주었다. 방금보다 긴장이 풀린 옥환의 몸은 좀 더 수월하게 승헌을 받아들였다.
하나 점점 더 강해져 오는 이물감에 옥환의 얼굴이 이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사력을 다해 소리를 내지 않고 버티던 옥환은 승헌이 움직임을 멈춘 걸 깨닫고는 물었다.
“이제, 다 된 것입니까?”
“음…….”
“물론 저도 넣는다고 끝이 아닌 건 압니다.”
행여 승헌이 저를 또 놀리려 들거나 행여 오해를 할까 봐 옥환이 서둘러 덧붙였으나 승헌은 쓴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옥환. 그대에겐 미안하지만, 아직 반밖에 안 들어갔어.”
옥환은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이게 반이라니? 손가락을 네 개나 넣었을 때조차 지금 느끼는 것의 절반도 안 되는 수준이었다. 한데, 이게 반이라고?
충격으로 말을 잃은 듯한 옥환의 반응에 승헌이 씩 웃으며 물었다.
“그럼 오늘은 반만 넣을까? 그랬으면 좋겠어?”
“…….”
“그대가 원한다면 그렇게 할게. 그대가 오늘은 반만으로 만족할 수 있다면.”
더는 자존심을 세울 때가 아니었다. 하는 수 없이 옥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한 태도가 마음에 들었는지, 승헌은 옥환의 허벅지 안쪽에 자상하게 입을 맞추고는 이내 천천히 허리를 움직였다.
“아, 윽…….”
하나 그조차 옥환에게는 정신이 혼미해질 듯한 강도였다. 하나 승헌은 이번엔 옥환의 양물을 만져 줄 생각이 없었다. 그는 옥환의 안을 애무할 때 확인했던, 조금 단단한 부분으로 양물을 움직였다.
“하으응……!”
갑작스레 세상이 뒤집히는 듯한 충격에 옥환의 몸이 펄쩍 뛰었다. 저도 모르게 흘러나온 교성은 마치 자신의 것이 아닌 듯한 음탕한 소리였다. 옥환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방금 자신이 느낀 것은 그만큼 강렬한 쾌감이었다.
옥환의 반응을 확인한 승헌은 다시금 허리를 움직여 그곳을 지그시 눌렀다. 옥환은 이번에는 어떻게든 소리를 참아 냈지만, 눈앞이 빙글빙글 도는 듯했다. 어느새 옥환은 승헌을 절박하게 끌어안고 있었다.
“옥환. 기분 좋아?”
승헌이 천천히 삽입하며 물었다. 옥환은 어떻게든 제정신을 유지하려 애쓰며 대답했다.
“전하께선, 좋으십니까?”
난생처음 하는 사내와의 정사에도 흐트러지기는커녕 끝까지 제 성격을 꺾지 않는 옥환의 고집에 승헌은 실소를 흘렸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이 콧대 높은 자존심을 무너뜨릴 수 있을까.
아무튼 오늘은 그만 단념하기로 한 승헌은 허리를 굽혀 옥환의 턱 끝에 입을 맞춘 뒤 말했다.
“응. 좋아.”
“윽……!”
승헌이 그렇게 말하자마자 강하게 허리를 치대는 바람에 옥환은 갑작스러운 절정에 다다랐다. 힘껏 조여드는 내벽의 압력에 승헌의 미간도 살짝 찌푸려졌다. 옥환은 얼굴을 가린 채 몸을 떨었다. 아랫배에서부터 솟아오른 뜨거운 열기에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지나친 쾌감에 두려움이 느껴질 정도였다. 머리가 이상해지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나 승헌의 앞에서 첫 교합임을 굳이 티 내고 싶지는 않았다. 과하게 흥분해서 난잡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도 않았다. 옥환은 남들보다 배는 강한 정신력으로 겨우 두 번째 절정을 버텨냈다.
물론 승헌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다시금 삽입을 이어갔다. 결코 빠르지도, 격렬하지도 않은 행위였으나 옥환은 경련하듯 전신을 떨며 온 신경을 지배하는 황홀경에 저항했다. 아무리 이성을 유지하려 해도 승헌이 양물을 박을 때마다 옥환의 머릿속에는 느껴본 적 없는 쾌감의 극치에 대한 갈망만이 커져 갔다.
게다가 다소 느린 삽입 속도 때문인지, 옥환은 제 안쪽을 가르고 깊숙하게 파고드는 양물의 묵직함이며 형태 따위가 너무도 선연하게 느껴졌다. 도대체 승헌이 자신의 어디를 자극하고 있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가 그곳을 커다란 덩어리로 꾹꾹 누르면 옥환은 그저 울고 싶은 기분에 휩싸여야 했다. 옥환은 몇 번씩이나 자지러지게 교성을 지르며 승헌에게 매달리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다.
그렇게 옥환이 더는 참을 수 없다고 생각했을 때, 마침내 세 번째 절정에 다다랐다.
“아흑……! 아!”
눈앞이 새하얗게 물들고 머릿속이 타들어 가는 듯한 감각에 옥환은 결국 교성을 질렀다. 소리를 누르고 또 눌렀으나 접합부에서부터 퍼진 열기와 쾌감에 새된 소리가 삐져나왔다. 맹렬하게 몰아치는 쾌감에 휩쓸릴 것만 같아, 옥환은 승헌의 목을 힘껏 끌어안았다.
그렇게 옥환이 저를 꼭 안은 채 희열을 느끼는 모습을 지켜보던 승헌은 옥환의 절정이 끝이 나자 그제야 비로소 옥환을 놓아주었다.
옥환은 길었던 정사에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아직도 남은 쾌감에 그의 몸은 이따금 움찔거렸다. 그리고 뒤늦게 막대한 피로감이 몰려왔다.
“꽤 만족한 것 같은데, 이제 말해 주겠나?”
식어가는 열기에 나른함을 느끼고 있던 옥환에게 승헌이 문득 그렇게 물어 왔다. 아직 그럴 생각이 안 든다면 만족할 때까지 더할 수 있다는 협박 아닌 협박과 함께.
옥환은 평소처럼 미간을 찡그리는 대신 픽 웃고는 입을 열었다.
“집요하십니다.”
“나는 지는 건 싫어, 옥환.”
그렇게 속삭인 승헌은 다시 옥환의 위로 자리를 잡았다.
“하나 그대에겐 이기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아. 이상하게도.”
승헌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옥환의 양다리를 아래서부터 들어 올리고는 제 허리를 붙였다. 그 노골적인 행위에도 옥환은 이렇다 할 거부 반응 없이 그저 승헌의 행동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첫 교합인 데다가 오래도 끌었으니 지칠 만도 하건만, 옥환은 다 받아들이겠다는 듯 초연한 모습이었다. 그렇게 말해 주기 싫은 건가. 승헌은 괜한 오기를 느끼며 옥환의 안에 다시금 제 양물을 찔러 넣었다.
“읏…….”
“아직도 아파? 이번에도 반밖에 안 넣었는데.”
옥환은 입술을 질끈 깨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크게 내색을 안 할 뿐이지, 옥환의 아래에 느껴지는 압박감은 가히 어마어마했다. 방금까지의 행위가 도리어 옥환의 아래를 민감하게 만들어 고통과 이물감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승헌은 그런 옥환을 조금은 안쓰럽게 여기면서도 멈출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대신 옥환의 손목 안쪽에 입을 맞추며 위로랍시고 이렇게 말했다.
“좀 더 하면 괜찮아질 거야. 어차피 그대도 적응해야 하잖아?”
옥환은 인상을 쓴 채 승헌을 바라보았으나 승헌은 시치미를 떼는 건지 정말 모르는 건지, 태연하게 허리를 움직일 뿐이었다.
“흐읏…….”
확실히 방금까지 한 것치고 옥환의 안은 다소 빡빡했으나, 젖은 내벽은 승헌의 것을 기세 좋게 조여 왔다. 게다가 옥환이 내는 소리 안에는 쾌감 역시 섞여 있었다. 지금 승헌의 상태로는, 끝까지 넣지 않는 정도가 그가 양보할 수 있는 마지막 선이었다.
이윽고 승헌이 아까까지와는 달리 빠른 속도로 옥환의 안을 오고 갔다. 마치 이번에야말로 옥환의 흐트러진 모습을 보겠다는 각오라도 한 것 같았다. 물론 지친 옥환이 쓰러지기 전에 끝내려는 생각도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승헌은 옥환의 몸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느끼고 있으면서도 입을 꾹 다문 채 그것을 내색하지 않는 옥환의 표정은 오히려 승헌 안의 무언가를 부추기는 것 같았다.
옥환은 제 안을 들쑤시는 열기에 숨을 삼켰다. 빨라진 삽입은 옥환의 인내심을 한계로 끌고 가고 있었다. 그렇게 승헌의 품 안에서 정신없이 흔들리면서도, 옥환은 승헌의 팔을 붙잡은 채 천천히 말했다.
“전에, 흣, 기방에 잠입한 적이, 있습니다.”
그 말에 승헌이 고개를 들고 짧게 웃었다. 하나 그는 허릿짓을 멈추지 않았고, 옥환은 가쁜 숨을 내뱉으면서도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때 가르쳐, 주더군요. 실제로 하지는 않았지만…… 하읏.”
승헌은 말없이 옥환의 안에 제 양물을 박아 넣는 것에만 몰두했다. 적나라한 소리를 내지 않으려 애를 쓰느라 정신이 없던 옥환의 시선에 문득 그런 승헌의 표정이 잡혔다. 이런 상황이긴 하나 승헌이 살짝 미간을 모은 채 제 몸에 열중한 모습에 옥환은 조금 웃음이 나오려 했다. 물론 웃기에는 금방이라도 절정에 다다를 것 같은 상태였지만.
“하면 옥환. 그것은 누가 알려 줬나? 듣기만 했어, 아니면 직접 했어?”
한데 불쑥, 정말 난데없이 승헌이 그런 질문을 던졌다. 왜 기방에 잠입했냐고 물을 줄 알았지, 이런 어처구니없는 것을 물을 줄은 몰랐던 옥환은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옥환. 대답해야지.”
자신을 어린아이처럼 구슬리는 승헌의 말투에 불쾌함을 느껴서인지, 옥환은 작은 심술을 부렸다.
“그것도, 내키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건 부추기는 것밖에, 되지 않아.”
승헌은 대답과 함께 허리에 힘을 주었다. 벼락이 치듯 옥환의 눈앞이 하얗게 점멸했다.
“흐읍, 흐……!”
벌써 네 번째의 절정에 다다른 옥환이 입술을 꽉 깨물고 전신을 훑는 쾌감을 견뎌냈다. 하나 이번에도 사지는 덜덜 떨리고, 꽉 다문 입술 안에서는 억눌린 소리가 맴돌았다. 눈을 꼭 감자 쾌감으로 인한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러다 죽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더는 소리를 참으려는 생각도 들지 않았으나 물었던 입술을 놓을 정신조차 없었다.
결국 입술이 터져 피가 흐르고 나서야 겨우, 파도처럼 밀려들던 쾌감이 왔던 것과 마찬가지로 한꺼번에 물러갔다.
그제야 옥환은 제 다리 사이가 질척한 무언가로 젖어 있음을 깨달았다. 승헌의 씨물이었다. 그 역시 파정을 한 것이다. 자신이 네 번을 가는 동안 겨우 한 번이었다. 그조차 썩 만족해서 한 것은 아닌 것 같아 옥환은 미묘한 기분이 되었다. 창피한 건지, 무안한 건지 알 수 없는.
하나 그도 잠시, 다시금 제 허벅지를 붙잡는 승헌의 행동에 옥환이 얼른 정신을 차리고는 입을 열었다.
“듣기만 한 겁니다.”
“…….”
“말로 알려주기만 했습니다. 기방의 기생들은 대부분 여인이었기 때문에…….”
옥환은 말끝을 흐리면서도 옆에 내팽개쳐져 있던 옷을 끌어와 입으려 했다. 명백한 거절 의사였다. 승헌은 가벼운 한숨을 내쉬고는 결국 몸을 물렸다.
“소리 좀 낸다고 안 잡아먹어.”
승헌이 손을 뻗어 옥환의 피 묻은 입술을 쓸며 나직이 말했다. 옥환은 승헌의 손을 치워 내고는 손등으로 입술을 닦았다. 손등에 묻어나온 피를 보고 살짝 놀란 듯한 그는 이내 몸을 완전히 일으켰다. 허리가 무겁고 하반신이 뻐근했다. 온몸이 젖은 솜처럼 축 늘어졌다. 자신도 즐기지 않았다고는 말할 수 없었으나, 그럼에도 대체 이런 행위에 무슨 의미가 있는 건지 옥환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방금까지 몸을 겹쳐 놓고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우스웠지만, 그것에는 정말 애정 같은 건 터럭만큼도 없었으니까.
쾌락. 오직 그것만을 위해 이 남자는 자신을 안은 걸까. 그게 그리 중요한 건가. 적국의 재상을 안을 만큼.
“화가 나 보이는군.”
승헌이 말을 걸자 옥환은 옷고름을 매며 대꾸했다.
“아니요. 그저…… 부질없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왜 부질이 없지? 그대에겐 확실한 목적이 있었잖아.”
그랬다. 자신은 서국의 정사에 간섭하고, 서국의 조정에 들어간 뒤, 서국을 내분으로 무너뜨린다는 목적이 있었다. 그 사실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그러한 옥환의 속내를 읽기라도 한 듯이 승헌이 대충 옷을 입으며 물었다.
“하면 말해 봐. 전에 말하려던 게…… 그래. 군수물자의 수송에 관한 것이었나?”
하나 승헌의 물음에 옥환은 응하지 않았다. 그는 대신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늘은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렇게……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어야 하는, 그런 거래는 아닙니다.”
“그럼 무슨 거래지?”
딱히 돌려줄 말도 없건만 옥환은 이것이 ‘그런 거래’라고 단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자신은, 속물이었다. 품은 뜻이 숭고한 것이든 고결한 것이든, 제 목적을 위해서라면 자신을 포함한 많은 이를 희생하고 짓밟을 수 있는. 그 증거로 이렇게, 적국의 왕과 몸까지 섞지 않았는가.
다만…… 주군이, 염완이 마음에 걸렸다. 그와 약속했다. 자기 자신을 대의라는 것에 팔아 버리지 않기로.
벽국을 위해서, 주군을 위해서라는 말로 이미 팔아넘긴 지 오래인지도 모르겠지만, 옥환은 승헌과 자신의 관계를 얼버무리는 것으로 염완과의 약속을 지키고 싶었다.
옥환이 오랫동안 대답이 없자 그를 알 수 없는 시선으로 바라보던 승헌이 불쑥 물었다.
“기방에 잠입한 것은 염완을 위해서였나?”
옥환은 옅게 남아 있던 나른함마저 모두 물러가는 것을 느끼며 상념에서 깨어났다. 그는 잠시 대답을 주저했으나, 곧 차분하게 대꾸했다.
“……그렇습니다.”
승헌은 작게, 그러나 확실한 목소리로 “대단한 충성심이군.” 하고 중얼거렸다. 옥환은 왠지 모를 거북함을 느끼며 자리에서 완전히 일어섰다. 이제는 그만, 이 사내를 내보내고 싶었다.
그만 돌아가시는 게 좋겠다는 옥환의 제안에 승헌은 군말 없이 문으로 향했다. 그리고 문턱을 나서려는 순간, 그가 옥환에게 넌지시 던진 말은 옥환의 마음에 파문을 일으켰다.
“그대가 나를 위해서도 그렇게 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
“…….”
“나는 과연 그대의 주인일까?”
옥환은 침묵했다. 침묵밖에는, 답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