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16)

二. 閨房書生(규방서생)

735년. 눈부셨던 황금빛 들판은 전란의 불길에 휩싸였다.

통일제국이었던 순국이 50년의 짧은 역사와 함께 무너지고, 수많은 소국으로 쪼개진 대륙에는 칼과 창이 난무했다. 그렇게 시작된 긴 전쟁은 70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뒤에서야 비로소 끝이 났다. 지옥 같은 세월이었고, 풍요로웠던 땅에는 죽음이 할퀴고 간 상처만이 남았다.

그리고 그 죽음의 땅에서 부흥을 꿈꾸며 일어선 두 나라가 있었다.

순국의 장군 출신인 “진평”이 세운 일국日國과 지방의 평범한 농민 “염완”이 세운 벽국闢國이었다. 일국과 벽국은 기나긴 세월을 이겨내고 대륙의 새로운 패자로서 군림한 나라였다. 이윽고 전쟁으로 약해진 국력을 정비하기 위해 두 나라는 화친을 맺었고, 그것으로 인해 그들 사이는 일견 균형을 이루고 있는 듯 보였다. 하나 평화는 겉치레일 뿐, 사실은 둘 다 어느 한쪽이 기울어지면 언제든 상대를 잡아먹으려 호시탐탐 기회만을 노리고 있는 상태임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그렇게 다시 긴 대치 끝에 지금에 이르렀다. 일국은 대장군이었던 견승헌이 왕위에 오르며 서국曙國이라는 새 이름을 가지게 되었고, 벽국은 염완의 아들인 염요가 2대 왕으로 즉위하게 되었다. 왕위에 오른 승헌은 나라 안의 혼란을 잠재우자마자 유명무실하던 벽국과의 화친을 깨버리더니, 30만의 군을 이끌고 벽국으로의 친정을 감행했다. 다행히 옥환을 희생양으로 하여 벽국은 그 가느다란 명줄을 이었으나, 두 나라 사이의 길었던 냉전은 마침내 새로운 격변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격변의 한가운데에 선 인물, “옥환”은 오늘도 처소에서 태평하게 글을 써 내려가는 중이었다. 지금의 상황이 초조할 만도 하건만, 그런 기색은 조금도 보이지 않는 유유자적 그 자체였다.

처음 옥환을 서국으로 데려온 뒤, 승헌은 무려 왕궁 안에 그의 거처를 마련해 주었다. 그 뒤에도 여럿의 하인을 붙여주는 등 그의 생활에 부족함이 없도록 해 주었으나, 정작 승헌 본인은 달포가 지나는 동안 단 한 번도 옥환을 찾지 않았다. 옥환은 승헌을 만나기는커녕 그 휘하의 장수들이나 관리들과 인사조차 하지 못한 상태였다.

물론 그렇다고 옥환이 자신의 목적을 잊어버린 것은 아니었다. 차분히 글을 쓰던 옥환은 문득 꽃망울을 틔우기 시작한 나무를 바라보며 회상에 잠겼다.

옥환의 목적.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옥환은 수치를 무릅쓰고 적국에까지 왔다. 그는 그것을 절대 잊지 않았다.

***

약 달포 전. 서국군이 양양을 향해 진격해 오던 그 무렵, 옥환은 다급히 누군가를 찾았다.

“승상께서 어쩐 일이시오?”

옥환은 애첩을 끼고 앉아 있는 벽국의 왕, 염요를 보며 소매 밑의 주먹을 굳게 쥐었다. 서국의 30만 군이 이미 국경을 지나 곧장 수도로 오고 있다는 소식은 염요의 귀에도 진작 들어갔을 터였다. 그런데도 저런 상태다. 서국군의 침략에 대한 보고를 듣고도 염요는 똑똑한 옥환이 어련히 알아서 해줄 것이라며 신경도 쓰지 않았다고 했다.

서국과 벽국은 오랜 기간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며 대륙의 패권을 놓고 다투었다. 벽국은 서국에 비해 백성의 수도 적고 농사가 힘든 척박한 영토를 가져 다소 불리한 위치에 있었으나, 벽국의 재상인 옥환의 비상한 책략 덕에 서국과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나 그처럼 위태롭게 유지되던 균형도 벽국의 왕인 염완이 병으로 급사하고 그의 아들인 염요가 왕위에 오르면서 큰 변화를 맞게 되었다. 염요는 준비되지 않은 군주였다. 아버지인 염완의 부재로 극도의 불안감에 시달린 그는 결국 국사를 내팽개친 채 여인의 치마폭에서 놀아났고, 그런 군주에게 실망한 벽국의 인재들은 차례차례 염요의 곁을 떠나갔다.

그런 와중에도 옥환만은 홀로 염요의 곁에 남아 벽국을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으나, 아무리 그가 하늘이 내린 인재라 한들 혼자의 힘으로 나라를 지킨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제 더는 서국의 왕이 직접 이끄는 대군과 맞설 장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하나 옥환은 염요가 이토록 무기력한 군주가 된 것은 자신의 탓도 있다고 생각했다.

염요는 항상 자신이 그저 범인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농민 출신으로 나라까지 세운 아버지가 대단한 것이고, 자신은 그것을 따라잡을 수 없다고. 옥환은 그런 염요의 열등감을 알고 있었기에 그를 대신해 모든 일을 나서서 처리했다. 하나 염요에게 있어 옥환은 듬직한 충신이 아니라,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지나치게 훌륭한 인재였을 것이다. 옥환은 뒤늦게야 그것을 알았다. 해서 염요의 엇나감을 이해했고, 나라의 존망이 걸린 이날 이때까지도…… 그를 이해하려 애썼다.

이윽고 옥환은 실낱같은 희망을 품은 채 염요에게 말했다.

“전하. 서국군 30만이 벌써 남천과 송주를 지나 양양으로 오고 있다고 하옵니다. 양양을 지나면 곧바로 도성이옵니다.”

“뭐 어떻소? 우리에겐 승상이 있는데. 승상이 필시 신묘한 수를 갖고 계실 것이 아니오?”

승상이라 함은 재상인 옥환을 부르는 호칭이었다. 옥환은 오늘따라 유독 그 호칭에 막중한 책임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송구하오나, 전하. 미천한 신은 전하께서 말씀하시는 신묘한 수를 갖고 있지 않사옵니다. 다만 소신이 양양에 가서 군을 지휘하면 잠시나마 서국군의 발을 붙들 수 있을지는 모르옵니다. 그동안 전하께서는 도성 안의 군과 북, 동쪽에서 보내온 증원군을 정비하고 전투태세를 갖추어 주시옵소서. 아이와 부녀자들의 대피 또한 서두르셔야 하옵니다. 소신이 지시를 내려 놓겠으나 그 뒤의 확인이나 통솔은 전하께서 해 주셔야 할 몫이옵니다.”

다행스럽게도 도성은 튼튼한 성벽과 지리적 이점을 갖고 있으니 전략만 잘 세운다면 방어가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그 이후의 일은 차차 생각해 보아야겠지만, 일단은 코앞에 닥친 위기를 넘는 게 먼저였다. 옥환이 생각한 바를 마저 말하려는데, 염요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물었다.

“나더러 군을 지휘하라고……? 그게 될 거라 보시오?”

“……더는 수가 없사옵니다. 소신은 양양에 가서 시간을 끌어야 하니 나머지는 전하께서…….”

“스, 승상께선 천하에서 제일가는 군사가 아니오? 승상이 어찌해 줄 수 없소? 차라리 내게 구체적으로 지시를 내려 주시오. 그럼 그대로 할 테니…….”

“전하.”

“나는 못 하오. 아니 되오. 승상은 대단한 사람이잖소. 부디 알아서 해 주시구려. 승상께서도 알지 않소? 나는 허수아비 왕에 불과하다는 것을.”

염요의 자포자기와도 같은 발언에 옥환은 참담함을 느끼며 말을 잃었다. 본인의 입으로 허수아비라고 하면, 그를 믿고 이 땅에 사는 백성들은 대관절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대체 언제부터, 어디서부터 내 나라가 이리도 어긋난 길을 걷게 된 것일까.

옥환은 결국 산산조각이 난 희망을 곱씹으며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그대로 편전을 돌아 나왔다. 기나긴 복도를 딛는 한 걸음 한 걸음마다 바닥이 꺼지는 듯했고, 그때마다 땅에 묻힌 주군의 원통한 곡소리가 옥환의 귓전을 때렸다.

다 나의 잘못이다. 내 능력이 부족하고, 내 견문이 좁았던 탓이다.

세상 모든 이가 영웅은 아니다. 그럼에도 벽국의 군사인 자신은 염요를 영웅으로 만들었어야 했다. 차라리 닦달을 하고 궁지에 몰았어야 옳았다. 이해하고 기다려 주어선 안 될 일이었다.

하나 그는 설옥환이었다. 그의 머리는 이런 최악의 상황조차 예상하고 있었다.

결국 옥환은 마지막까지 미뤄두었던 계획을 실행하기로 했다. 이것은 벽국의 백성들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리고 자신과 제 주군이었던 염완의 뜻을 이루기 위한 최후의 수단이기도 했다.

그날 밤. 옥환은 남몰래 염요의 처소를 찾았다. 환관에게 따로 부탁을 해둔 덕에 항상 그의 옆을 지키는 애첩조차 없는 독대였다. 자신에게 차분하게 절을 올리는 옥환을 보며 염요는 안심한 표정이었다.

낮에 그렇게 편전을 나가버린 이후 옥환은 내내 집에 틀어박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런 그가 이런 야심한 시각에 자신을 찾아왔으니, 이는 필시 지금의 난관을 타파할 용한 수를 가져온 것이라 보는 게 마땅했다. 그런 기대를 품은 염요였으나, 그는 이내 옥환의 입에서 나온 충격적인 청에 경악했다.

“전하. 소신을 서국으로 보내 주시옵소서.”

“뭐……? ……그, 그게 무슨 소리요. 서국에 가겠다니? 왜? 사신으로 보내 달라는 것이오? 하나 지금 서국의 왕이 우리 영토 안에 있는데…….”

“화친을 청하겠나이다. 전쟁이 아니라면 방법은 그 하나뿐이옵니다.”

“그럼 양양에 가서 서국 왕에게 직접 하면 되지 않소? 왜 서국에까지…….”

염요는 옥환이 말한 바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 염요를 앞에 두고 옥환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채 머리를 조아리고 말했다.

“서국의 조정에 파고들어 내란을 일으키겠사옵니다.”

“뭐? 그…… 무슨…… 터무니없는 소리요?”

“변절한 척 서국에 가서 서국의 왕과 신하들의 관계를 이간질하는 것이옵니다. 지금 저희가 서국을 상대로 정면승부를 펼치는 것은 어려운 일이옵니다. 하니…….”

“그만하시오! 승상이 없으면 나와 벽국은 어찌하라고……? 서국에 가서 내란을 일으키겠다니, 그 말을 나더러 믿으란 게요? 승상이 정녕 나를 버리려는 게 아니라면 어찌 이런 터무니없는 청을 올린단 말이오?”

크게 동요한 염요를 조금 냉정한 눈으로 쳐다보며, 옥환은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부터 염요가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나 일을 여기까지 오게 한 것은 그의 탓도 있다. 결국엔 염요도 단념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확신하며 옥환은 평소와 같이 말을 이었다.

“그런 게 아니옵니다, 전하. 내부에서 분열을 일으키면 아무리 대국이라 해도 당해 낼 재간이 없사옵니다. 실제로 순국이 그리 무너지지 않았사옵니까. 하니 소신이 가겠사옵니다. 소신이 하지 않으면 할 수 있는 이가 없사옵니다. 부디 소신을 보내 주시옵소서, 전하.”

“말도 안 되오! 애당초 승상은 벽국의 백성이 아니오? 서국의 왕은 의심이 많다던데, 과연 그가 승상을 믿겠소? 불가능한 계획이오. 승상이 없는 동안 벽국이 얼마나 버틸 거라 보시오?”

“소신이 돌아올 때까지 전하께서 잘 다스리고 계시옵소서. 전하의 나라가 아니옵니까.”

“나는…… 나는 그럴 수 없소. 그럴 재목이 아닌 걸 모두가 다 알지 않소. 승상 그대조차.”

옥환은 염요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를 강하게 붙들었다. 초점 없고 탁한 눈이 마치 벽국의 미래를 암시하는 것 같았다. 그의 아버지였던 염완은 이렇지 않았다. 그는 항상 맑고 곧은 눈을 하고 있었다. 그의 피를 물려받았을진대 어찌 이자는 이토록 나약하고 아둔하단 말인가.

옥환은 속으로 통탄을 금치 못하면서도 마음을 굳게 먹었다. 어찌 되었든 염요가 염완의 하나뿐인 자식인 이상, 염완의 의지도 벽국의 통치도 그가 이어가야 옳았다. 그렇다면 염요를 이제라도 왕으로 길러야 한다. 자신이 자리를 비우는 것은 벽국에게 큰 위기일 수 있었으나, 염요에게는 홀로서기를 할 기회가 될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옥환은 벽국을 떠날 생각이었다.

“전하께서도 하실 수 있사옵니다. 주군의 아드님이 아니시옵니까. 의지를 굳게 다지시옵소서. 오직 전하만 믿고 있는 벽국의 백성들을 생각하시란 말이옵니다……!”

하나 옥환의 보기 드문 강경한 태도는 도리어 염요의 반발심만을 키웠다. 그는 옥환의 팔을 치워내며 소리쳤다.

“난 못해! 못한다고! ……그대도 결국엔 나와 이 나라를 버리고 떠나려는 것이지? 다른 작자들이 모두 그랬듯이…… 아버지의 충신이었던 그대조차 나를 저버리려는 게야. 하, 그대를 믿는 게 아니었어……. 벽국에는 그대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내가 어리석은 결정을 내렸어…….”

옥환은 포기하지 않고 염요를 붙잡았다. 자신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해도 상관없었다. 영영 벽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된다 해도, 멀리서 벽국의 미래를 지켜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벽국을 살릴 수 있는 건 자신이 아니라 이 나약한 왕이다.

“그렇지 않사옵니다, 전하! 작금, 개탄스럽게도 벽국의 명운은 마치 바람 앞의 촛불과도 같사옵니다. 그리고 그 약한 불길이나마 어떻게든 일으켜 보려 소신은 제 나라를 떠나 적국에 가려 하는 것이옵니다. 소신 또한 두렵고, 걱정스럽나이다. 어찌 적국에 단신으로 가는 것이 두렵지 않을 것이며, 신하 된 몸으로 조국을 두고 떠나는 것이 걱정되지 않겠나이까? 하나 우리 둘 다, 포기해서는 아니 되옵니다. 소신과 전하가 포기하면 벽국의 백성들이 죽사옵니다. 그러니 부디…… 마음을 단단히 잡수시옵소서.”

“…….”

그 대단한 설옥환이 두려워하고 있다는 말에 염요의 마음에 동요가 일었다. 나이 차이도 그리 크지 않건만 어릴 적 제 스승이었을 때부터 옥환은 모든 걸 알고 있는 사람 같았다. 때로는 나라의 왕인 아버지보다 더 대단해 보일 때도 있었다. 그는 그 어느 때에도 당황하지 않았고,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척척 해답을 내놓았다.

그랬던 그가 지금은 자신을 붙잡고 적국에 가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 금야 선생 설옥환이 내놓은 수가 고작, 적국에 가서 그들의 사이를 이간질하는 것이라니. 게다가 자신이 고안해 낸 그 계책에 본인조차 자신이 없어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

염요는 떨리는 손을 쥐었다. 옥환이 이렇게 말할 정도면 정말로 나라의 안위가 위험한 상태임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나라를 빼앗기는 건 둘째 치고, 도깨비 장수라고 불리던 견승헌이 자신의 목숨을 부지해 줄 리가 만무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옥환의 결정을 자신은 막을 수가 없었다. 염요는 옥환이 고집을 부릴 때면 제 아버지조차 어쩌지 못했음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하나였다. 자신이 살아남을 방법은.

“알겠소. 승상의 청을 받아들이지. 대신…… 계평을 데려가시오.”

“계평은 전하의 호위가 아니옵니까. 어렸을 때부터 전하를 모신…….”

“승상을 믿고…… 어떻게든 혼자서 해보겠소이다. 하나 승상이 나를 저버린다면 나는 더 이상 희망이 없소. 그러니 승상을 돕기 위해서요.”

자신을 믿고 최측근을 보내준다니 감사해야 마땅할 일이었으나 옥환이 아는 염요는 그런 자상한 이가 아니었다. 염요는 옥환의 배신을 우려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옥환을 감시할 요량으로 거의 유일하다고 할 수 있을 제 편까지 보내려 하는 것이고. 그것을 깨달은 옥환은 그저 묵묵히 계평의 호위를 받아들였다.

억울하다면 억울한 일일지 모른다. 열여덟. 관례를 치르기도 전에 세상에 나와 염요의 아버지와 그의 나라를 위해 지금껏 힘써 왔다. 한데도 자신을 믿어주지 않는 염요를 옥환은 원망하지 않았다. 그저 옥환은, 염요가 좋은 왕이 되어 주길 바랄 뿐이었다.

그렇게 옥환은 양양에서 서국의 왕을 맞았고, 서국의 왕은 옥환을 서국으로 데려가며 30만의 군대도 함께 물렸다. 국운이 다하는 듯싶었던 벽국은 또 한 번 옥환의 희생으로 구사일생할 수 있었다.

하나 여전히 서국의 우세는 변하지 않는다. 벽국의 약한 불씨는 서국에서 입김 한 번만 훅 불어도 순식간에 꺼질 것이다. 서국의 왕이 이번에 수도를 앞에 두고 군대를 물린 것은 첫째는 옥환을 얻었기 때문이었고, 둘째는 예상치 못한 군량 부족 등의 사태로 군의 상황이 좋지 않았기 때문일 터였다.

그리고 셋째는, 그가 원하면 언제든 다시 벽국을 침공할 수 있기 때문이리라.

안 그래도 옥환 혼자의 힘으로 겨우 지탱해 나가던 벽국이 이젠 그까지 잃었으니, 그야말로 사면초가였다. 능력 부족의 염요가 지키는 벽국은 승헌에게 있어 잘 손질된 먹잇감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혹여라도 염요가 어지러운 나라 안을 바로잡을 것 같은 때가 오면 그 전에 무너뜨리면 된다. 옥환이 추측한 승헌의 생각은 그러했고, 아마 실제로도 큰 차이는 없을 터였다.

하면 승헌의 예상을 뒤집느냐 뒤집지 못하느냐가 이 기나긴 전쟁의 승부를 결정지을 것이다.

그렇기에 옥환은 결코 긴장을 푼 것은 아니었다. 겉으로는 태평해 보여도 실제 옥환의 머릿속에는 범인은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할 커다란 계획과 머나먼 수가 빼곡하게 들어 있었다.

다만 지금은 기다려야 할 때였다. 때로는 손을 놓고 있는 것이 능사일 때도 있는 법.

‘기다리자. 기다리지 않는 것처럼. 그리하면 바라는 것이 곧 나를 찾아올 것이다.’

그렇게 다음 날, 옥환의 기다림이 보상받듯 뜻밖의 손님이 옥환의 처소를 찾았다. 물론 손님은 승헌이 아니었다. 바로 승헌의 휘하에 있는 “백고”라는 장수였다.

옥환을 처음 본 백고는 생각지 못한 옥환의 아름다운 자태에 넋이 나가 있다가 계평이 차를 내오자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그…… 이것을 전해드리러.”

옥환을 찾아온 백고가 멋쩍은 얼굴로 내민 것은 여러 권의 서책이었다. 옥환은 서국에 온 뒤 승헌에게 서국에서밖에 구할 수 없는 책들을 구해달라고 청했다. 승헌은 기꺼이 그것들을 구해 주었고, 직접은 아니나 사람을 통해 구한 책들을 보내 왔다. 하나 책을 전해 주는데 굳이 장수를 보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옥환이 추측건대 백고는 필시 자신을 만나기 위해 명분을 찾은 것일 터였다.

“공사다망하신 터에 손수 책을 전해 주기까지 하시고. 일개 서생의 여흥일 뿐인데 백 장군의 시간을 빼앗았으니 면목이 없습니다.”

“아, 아닙니다. 안 그래도 금야 선생을 꼭 한번 뵙고 싶었습니다.”

백고는 옥환이 굳이 분위기를 만들 것도 없이 금세 제 진짜 목적을 털어놓았다. 그럼에도 옥환은 일부러 ‘소생을 말입니까?’ 하고 모른 척 시치미를 뗐다. 백고는 부디 말씀 편하게 하시라고 말한 뒤 조금 긴장한 표정으로 화두를 열었다.

“지금 천하에서 가장 현명한 분을 꼽자면 금야 선생 외에는 없지요.”

“당치 않습니다. 천하에서 가장 현명한 자가 어찌 적국에 투항하겠습니까.”

“그래서 더 현명하신 겁니다. 벽국이 망해 가는 것은 코흘리개 애들도 아는 명백한 일이지 않습니까. 전하께서도 곧 선생을 마땅한 자리에 앉히실 것입니다. 지금은 그저 잡음이 가라앉길 기다리고 계신 것이지요.”

잡음? 옥환은 백고가 흘린 말을 놓치지 않았으나, 마치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가볍게 수긍했다.

“예. 저 같아도 적국에서 온 책사를 쉬이 믿어 주지는 않을 것입니다. 특히 호 장군은 가장 가까이서 전하를 모시는 몸이니 더욱 그렇겠지요.”

백고는 옥환의 떠보기 위한 말에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 반응을 보며 옥환은 제 추측이 맞아 들었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등용을 반대하는 세력이 있고, 그로 인해 승헌이 자신을 방치해 두고 있는 것이다.

옥환이 언급한 호 장군은 호진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는 승헌의 최측근으로 승헌이 옥환을 서국에 데리고 가려 했을 때부터 격한 반대를 표시하고 나섰던 인물이었다.

전장에서의 모습이 날쌘 새와 같다고 해서 붙여진 흑조黑鳥라는 자를 가진 호진은 벽국에서도 모르는 이가 없는 맹장이었다. 그는 승헌이 순국의 장군일 때부터 부장副將으로서 승헌을 수행하며 오랜 기간 그와 연을 쌓아 왔다. 그만큼 승헌이 깊이 신용하는 장수였으니, 옥환 역시도 그를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그런 호진이 옥환을 조정에 들이는 것을 반대하고 있다면 승헌도 그것을 억지로 찍어 누를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호진은 충심이 지극하고 오직 검밖에 모르는 목석같은 무관이라, 긴 시간을 승헌의 최측근으로 지내면서도 파벌을 만들거나 제 사람을 두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조직적으로 반대 의견을 내세우지는 못했을 것이다. 아마 백고가 ‘잡음’이라 표현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일 터. 그렇다면 호진을 중심으로 한 반대 세력은 시간에 의해 자연히 가라앉을 것이다.

하나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하고 기다리기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제 기다리는 건 충분히 했으니, 지금부턴 직접 나설 차례였다.

옥환은 너그러운 미소를 가장하고 입을 열었다.

“호 장군께서 저를 탐탁지 않게 여기시는 것 이해합니다. 쫓겨나지 않고 이 좋은 처소에서 서책에 파묻혀 지내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백 장군께서도 모쪼록 개의치 마십시오.”

“그리 말씀해 주시니 한결 마음이 편합니다. 금야 선생씩이나 되는 분을 그저 객으로만 두는 것에 대해 조정에서도 의견이 분분합니다. 해서 드리는 말씀인데 혹 선생께서는…… 저희 서국을 도와 전하의 대업을 거들어 주실 의향이 있으십니까?”

옥환은 천천히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백고는 자신의 등용을 지지하는 측인 게 분명했다. 등용을 반대하는 것이라면 억지 이유까지 붙여 저를 찾아올 이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서국을 위해 일하겠다는 제 확언을 받은 뒤 중립 세력을 끌어들이거나, 본인의 입장을 굳건히 하려는 데에 이번 방문의 목적이 있을 것이다.

판단을 정리한 옥환은 찻잔을 내려놓고는 백고가 기다리던 대답을 내놓았다.

“제 나라를 배신하고 여기까지 온 변절자의 몸이나, 서국과 국왕 전하는 제게 은인과도 같습니다. 미력하나마 제 힘이 보탬이 될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옥환의 대답에 백고는 크게 반색했다. 그는 조정 중신들도 이 얘기를 들으면 좋아할 것이라며 기쁜 얼굴을 했다.

“저는 칼이나 휘두를 줄 아는 무장이나 내 나라를 위해 필요한 이가 누군지는 압니다. 서국에는 선생 같은 분이 필요합니다. 전하께서도 그걸 아시기에 선생을 서국으로 데려오고 궁 안에 거처를 마련해 주신 것이겠지요. 하나 전하께서 반대파의 목소리가 강경해 섣불리 나서시지 못하는 만큼 저희가 앞서 전하의 의지를 거들어드려야 할 것입니다.”

옥환은 말을 하는 백고를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은 나라를 향한 애정과 제 주군을 위한 충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자신감이 넘쳤다. 승헌의 뜻을 누구보다 이해하고 그 뜻에 함께하며, 승헌과 서국이 그 뜻을 이룰 것을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옥환은 저렇게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백고가 부러웠다. 승헌도, 서국도, 서국의 백성들도 모두 부러웠다. 이제 벽국에는 백고와 같은 신하가 남아 있지 않았다. 옥환조차 이 먼 적국에 와 있으니 더더욱 믿고 나라를 맡길 이가 없었다. 염요가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면 옥환이 아무리 애를 써도 벽국은 끝내 멸망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이렇듯 벽국은 서국에 비하면 모든 것이 밀렸다. 하나 단 한 가지, 벽국이 서국에게 지지 않는다고 여기는 것이 있었다. 바로 세상을 좋은 곳으로 만들고자 하는 강인한 의지였다. 염완에게서부터 이어져 내려온 그것은 자신이 이렇게 계승하고 있다.

전란의 시대. 대의는 또 다른 대의에 의해 무너지고, 영웅은 또 다른 영웅에 의해 죽는다. 승헌에게도 뜻이 있을 것이고 그런 승헌의 뜻을 진심으로 따르는 신하들이 있지만, 옥환 또한 믿는 바가 있어 여기까지 왔다. 어느 쪽이 옳은지는 승자가 만든 승자의 역사가 결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의지를 관철할 것이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자신의 시선에 부끄러워하는 백고에게서 시선을 돌리며, 옥환은 차를 마시고는 입을 열었다.

“백 장군의 뜻은 잘 알겠습니다. 장군의 충심 앞에서 저는 참으로 부끄러워지는군요.”

“당치 않습니다, 선생. 선생이 오셔서 서국이 대통일제국의 꿈에 한 발짝 다가선 것입니다.”

옥환은 그 말에 긍정도, 부정도 표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어느새 빈 백고의 찻잔에 차를 따라 주며 뜻밖의 말을 꺼냈다.

“하면, 백 장군. 제가 백 장군을 조금 도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백고의 눈이 의문으로 커지는 것을 보며 옥환은 빙그레 미소 지었다.

서국이 통일제국의 꿈을 이룰 수 있을지 어떨지는, 끝까지 두고 봐야 알 것이다.

***

“선생, 금야 선생.”

백고가 옥환의 처소에 들른 지 며칠 뒤, 백고가 다시 다급하게 옥환을 찾아왔다. 오늘도 느긋하게 책을 읽고 있던 옥환은 백고의 목소리에 읽던 책을 치웠다. 그가 막 주변을 정리했을 때 백고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백 장군. 오셨습니까.”

다소곳하게 앉아 자신을 올려다보는 옥환의 모습에 주춤한 백고는 마치 못 볼 것이라도 본 것처럼 고개를 돌렸다. 백고에게 있어 옥환의 미모는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백고는 이토록 아름다운 사람을 살면서 본 적이 없었다. 어쩌면 하늘에서 내려온 신선이 아닌가 의심이 들기도 했다.

백고는 사람들이 옥환에 대해 이야기할 때 국사무쌍의 책사라는 말과 더불어 경국지색의 미인이라고 하는 것을 비웃었었다. 나라에 둘도 없는 책사이자 나라를 기울게 할 미인이라니, 그런 게 어디 있겠냐는 생각이었다. 하나 옥환을 본 순간 그는 그 말이 전부 맞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 그것으로는 부족할 정도였다.

다만 옥환은 나라를 기울게 할 존재가 아니었다. 쓰러져 가는 나라도 일으킬 존재였다. 백고는 이번 일로 이미 그것을 확신했다.

“백 장군.”

옥환의 부름에 비로소 현실로 돌아온 백고가 금세 환한 웃음을 지으며 자리에 앉아 말했다.

“선생. 선생의 말대로 됐습니다. 양양의 성 말입니다. 선생께서 알려 주신 대로 의견을 올렸더니 모두 잘되었습니다. 다들 이 미련한 제게서 어찌 그런 영특한 생각이 나왔냐며 궁금해했습니다.”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입니다. 다만 그 의견의 출처는…….”

“걱정 마십시오. 선생께서 일러 주신 것이라고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옥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전에 백고가 처음 옥환을 찾았을 때, 옥환은 그에게 최근 조정에 어려운 일이 없는지를 물었다. 백고는 안 그래도 조정에서 지난번 벽국 정벌에 나섰을 때 차지한 양양의 성을 어떻게 처리할지에 대한 일로 의견이 분분하다고 했다.

양양은 벽국의 수도로 통하는 관문인 만큼 반드시 지켜야 할 요충지였다. 하나 많은 수의 군사를 주둔시킬 경우 그만큼 서국의 영토 내에서 병력 손실이 생기게 된다. 그렇다고 적은 수의 군사를 보내면 다시 벽국에 양양을 빼앗길 위험이 있었다. 서국의 상황이 벽국보다는 낫다고 하나 시대가 시대인 만큼 서국 내의 정세도 그리 안정적인 편은 아니었다. 병력을 줄이는 것은 부담이 컸다.

그 얘기를 들은 옥환은 백성들에게 그곳에서의 경작을 시킬 것을 제안했다.

“양양은 산간지방이기는 하나 보리와 감자의 재배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그곳에서 백성들에게 농사를 짓게 하면 서국의 식량 공급에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나 백성들만 보내놓기에는…….”

“백성들에게 돌아가면서 갑옷을 입고 경비를 서게 하십시오. 벽국에서도 양양을 되찾고 싶어 할 것이나, 현 상황에서 군을 일으키기엔 여의치 않습니다. 양양의 성을 지키는 군사들이 있다는 걸 알면 섣불리 진격하지 않을 것입니다. 서국에서는 오직 백성들의 관리를 위한 소수의 군사만 보내면 됩니다. 서국의 백성들을 굳이 이주시킬 필요도 없습니다. 양양의 백성들이 아직 그곳에 있습니다.”

옥환의 조언에 진심으로 탄복한 듯 연신 고개를 끄덕이던 백고는 옥환의 마지막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예? 양양의 백성들? 그들은 선생께서 피난시킨 것이 아니셨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을 피난시키기엔 시일이 부족하여 일단은 양양의 산채에 도피시켜 놓았습니다.”

“하면 아직도 그들이 양양에 있단 말입니까?”

“……그렇게 되었습니다. 투항을 하기로 마음먹었으나 제 목숨조차 담보할 수 없는 상황에서 양양의 백성들을 서국군에 노출시킬 순 없었습니다. 이제 양양은 서국의 땅이니 그곳의 백성 또한 서국의 백성이 아니겠습니까. 이 문제로 저를 벌하시는 것은 기꺼이 받아들이겠으나, 무고한 백성들에겐 죄가 없으니 부디 백 장군께서는 헤아려 주십시오.”

옥환의 설명은 반은 사실이고 반은 거짓이었다. 양양의 백성들을 그대로 두면 혹여 서국군에게 공격을 당할까 싶어 숨겨 두기는 했다. 하나 옥환이 백고에게 한 조언은 그의 머릿속에 진작부터 들어 있던 작전이었다. 양양을 정복한 뒤 서국이 그 후처리에 애를 먹을 것을 그는 일찍이 예상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나중을 위해 양양의 백성들을 숨겨 두고, 추후 그들이 다시 생업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조치하면 된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실제로 백고는 옥환을 찾아와 그에게 양양의 성에 대해 조언을 구하고 있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백고는 결국 옥환의 설명에 납득한 듯 옥환을 추궁하지 않고 그대로 돌아갔다. 그리고 오늘 이렇게 백고가 다시 찾아왔고, 옥환은 모든 것이 자신의 계획대로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백고가 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옥환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한데 저…… 금야 선생. 전하께서 선생의 의견대로 백성들을 이용해 성을 지키기로 하였습니다만…… 양양의 백성들이 배신할 것을 우려하여 양양에는 서국의 백성을 대신 보내기로 하였습니다.”

“예? 하면 양양의 백성들은…….”

“그들은 서국으로 이주시켜 양양으로 보낸 백성과 맞바꿀 생각입니다.”

백고의 대답에 옥환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목숨을 부지한 것은 다행이나 결국 그들은 터전을 잃고 타국으로 가야만 한다. 원래부터 농업에 종사하던 이들이니 작물의 종류를 바꾼다고 해서 큰일은 없을 것이다. 하나 그들을 오래도록 살던 곳에서 떠나게 만든 것이 옥환은 못내 미안했다.

“죄송합니다, 선생. 하나 전하의 말씀에도 일리가 있어서…….”

“아닙니다. 백 장군께서도 양양의 백성들을 위해 많이 애써 주셨겠지요. 다만…… 한 가지 청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서국의 백성들은 산촌에서 지낸 경험이 없을 테니 그들의 적응을 돕기 위해서라도 양양의 백성을 일부 남겨 놓도록 말씀 올려주십시오.”

“아, 예. 그리 해보겠습니다. 선생의 의견이 타당하니 전하께서도 응해 주실 것입니다.”

백고의 대답에 옥환은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렇게 백고가 돌아가고 두 사람의 얘기를 듣고 있던 옥환의 호위, 계평이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옥환에게 다가왔다.

“승상. 승상께서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 겁니까? 지난번 저 장군에게 양양을 지키는 방법에 대해 일러 주셨을 때도 당황했습니다만, 승상께서 어련히 생각이 있으시겠거니 해서 기다렸습니다. 하나 이젠 양양의 백성들마저 서국으로 보내지게 생겼으니 저희는 양양을 완전히 빼앗긴 것이 아닙니까?”

계평의 볼멘소리에 옥환은 차분하게 대꾸했다.

“어차피 지금 상황에서 벽국은 군을 움직일 수 없다. 서국이 양양의 성을 비워 놔도 그곳에 보초를 세울 군사들조차 보낼 수 없단 말이다. 하면 차라리 서국에서 최소한의 병력만 보내놓게 만들고, 나중에 우리가 군을 재정비하면 그때 쉬이 되찾을 수 있게 하는 게 낫지.”

“…….”

“이 건은 전하께 보고를 올려도 상관없다. 지금은 서국의 신뢰를 얻는 것이 중요해.”

여전히 못 미덥다는 듯 자리를 뜨지 않고 자신을 바라보는 계평에게 옥환이 조금 귀찮다는 듯이 쏘아붙였다.

“내가 정말 벽국을 배신하려는 속셈이라면 진작 너를 죽였을 것이다. 물론 네가 죽으면 전하께 내 배신이 들키겠지. 하나 그러면 어찌할 테냐? 벽국에서 서국에 군을 보내 나를 죽일 수나 있느냐? 나를 벌할 수 있느냔 말이다.”

“승상……!”

“감정적으로 생각하지 말거라. 하면 허점이 보이게 되는 법이다. 내가 아무리 처신을 잘해도 네가 들키면 다 소용이 없어. 전하께 무슨 말을 올리든 관여하지 않겠다만 내 일을 방해하지 마라.”

옥환의 단호한 태도에 할 말이 없어진 계평은 알겠다고 대답하고는 하는 수 없이 물러났다.

계평은 어릴 적부터 염요와 함께 자란 동무로, 커서는 입신하는 대신 염요의 호위가 되는 쪽을 택한 염요의 충성스런 신하였다. 다만 염요는 다섯 살 때부터 아버지인 염완과 떨어져 지내, 열여섯 살이 되던 해에 염완과 재회할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옥환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그것은 계평도 마찬가지였고, 그 탓인지 계평은 옥환의 실력이나 업적을 영 못 미더워했다.

게다가 그는 염요의 오랜 동무였고 유일한 지지자였기에 염요의 깊은 신뢰를 받고 있었다. 해서 염요 외의 인물에게는 안하무인으로 굴었는데, 그나마 옥환은 재상의 자리에 있었기에 이 정도 대접을 받는 것이었다. 더불어 그는 지금 옥환의 협력자인 동시에 감시자이기도 했다. 경계심을 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옥환은 그것을 이해하고 있었고, 그렇기에 계평의 무례함이나 의심에 대해서는 개의치 않았다. 사실 그보다 걱정이 되는 것은 따로 있었다.

‘전하께선 내 일이나 캐고 다닐 것이 아니라 국정을 살피셔야 할 것인데.’

하나 그쪽은 자신이 걱정해도 어쩔 수 없는 문제다. 지금은 자신이 해야 할 일에 최선을 다해야 했다. 옥환은 고개를 저어 생각을 떨쳐내고는 다시 책을 펼쳤다.

그로부터 얼마 뒤. 백고가 옥환에게 조언을 얻어 양양의 일을 해결한 이후, 이번에는 서국의 신하들이 옥환을 찾기 시작했다. 그들은 옥환에게 이런저런 조언이나 가르침을 청했고, 옥환은 기꺼이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물론 옥환은 백고에게 자신의 존재를 비밀로 해달라고 얘기했으나, 이미 백고가 옥환의 처소를 드나든다는 소문은 퍼질 대로 퍼져 있었다. 그리고 옥환은 일이 이렇게 될 것을 진작에 알고 있었다. 아니, 처음부터 그가 노린 것이 이것이었다. 일부러 자신의 의도를 들키지 않기 위해 거짓으로 부탁을 했을 뿐.

자신을 반대하는 세력이 있다면, 자신이 서국에 필요한 인재임을 보여 주면 된다. 자신을 등용할 수밖에 없도록.

“고맙습니다, 선생. 정말 고맙습니다.”

“아닙니다. 도움이 되었다니 영광입니다.”

연신 옥환에게 머리를 숙이던 노신老臣이 돌아가고 나자 계평이 찻잔을 치우며 퉁명스레 투덜거렸다.

“원, 제 자식 혼인 문제까지 승상께 논의한답니까. 벽국의 신하들은 하나같이 모자란 자들뿐인가 봅니다.”

“저래 보여도 서국의 조정 신료 중 가장 오래된 자다. 그런 자에게 빚을 지워 나쁠 것은 없지. 해서, 바깥의 동태는 어떻더냐?”

옥환은 움직임이 자유롭지 않은 본인 대신 계평에게 밖의 상황을 조사하라 일렀다. 물론 계평 역시 서국에서 온 이방인이었으니 행동에 제약이 있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하나 옥환보다는 눈에 덜 띄었고, 무엇보다 그는 옥환의 수발을 드는 하인들 얘기를 엿들을 수 있었기 때문에 내린 지시였다.

이윽고 옥환의 질문에 계평이 답했다.

“승상에 대한 소문이 아주 자자합니다. 다만 승상의 이름을 노골적으로 입에 담을 수는 없으니 자기들끼리는 규방서생이라 부른답니다.”

“규방서생?” 하고 되물은 옥환이 피식 웃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오히려 선생이라는 부담스러운 칭호보다 나은 것 같기도 했다. 이내 옥환은 보고를 계속하라는 듯 손짓했다.

“호진인지 뭔지 하는 놈은 계속 승상을 쫓아내라고 하는 모양입니다만, 이제는 그에 드러내 놓고 동조하는 자들도 많이 줄었다고 합니다. 다만…… 서국 왕의 속내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양양의 일이 승상의 계책이었다는 것을 알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는 진작부터 알고 있었을 게다. 얕잡아볼 이가 아니야. 굉장히 영리한 사내니까.”

“그렇습니까? 뭐 거창하게 원룡元龍이라는 자까지 붙여 놨습니다만, 그래 봤자 그자는 그냥 칼 휘두르는 것이나 좋아하는 망나니 같은 놈이 아닙니까? 선왕을 죽이고 그 자리에 오른 악질 중의 악질이지요.”

“그렇지 않다. 나도 그를 포악한 인물일 것이라 생각했지만…….”

옥환은 창밖을 내다보며 승헌을 회상했다. 그는 적국의 재상인 자신에게 예의를 갖춰 대했다. 자신의 제안에 섣부른 판단을 내리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겁을 내지도 않았다.

그는, 견승헌은 마치 잘 벼린 명검의 날카로운 칼날 같다. 그의 표정과 태도, 어디에서도 난폭함이나 상스러움은 느껴지지 않았다. 하나 분명, 그는 맹수였다.

“다만 표정이 없으면 좀 무서워 보이긴 하겠더구나.”

“예?”

반문하는 계평에게 잘 웃어서 그렇지 따져보면 인상은 사나운 편이라고 말하려던 옥환은 무언가를 느끼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창가에 턱을 괸 채 씩 웃는 승헌의 얼굴이 보였다.

“내가 그대를 무섭게 했나?”

“……전하.”

옥환이 여기서 전하라고 부를 이는 단 한 사람이었다. 계평은 눈앞의 사내가 자신이 방금까지 이야기하던 인물이란 사실에 화들짝 놀라 말을 잇지 못했다. 하나 정작 옥환은 무안해하기는커녕 태연한 얼굴로 이렇게 받아쳤다.

“오셨으면 문으로 들어오시지 않고.”

“그대가 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같기에.”

옥환의 마음속에 일순 반발심이 일었으나, 따지자면 창을 열어 놓은 것도 말실수를 한 것도 전부 옥환 본인이었다. 해서 그는 그저 묵묵히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고 승헌을 마중했다.

“봄바람이 차니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하나 승헌은 처소 안으로 들어가는 대신 문턱에 서서 처소 앞에 있는 나뭇가지를 끌어당겼다. 가지에 맺힌 꽃잎이 몇 장인가 흐트러지며 옥환의 코앞에 짙은 향기를 뿌렸다.

“밖에는 꽃이 피었네, 규방서생.”

확실히 날은 그다지 춥지는 않았다. 더구나 무인에 강골인 승헌은 더더욱 추위를 느끼지 않을 터였다. 하나 그게 뭐 어쨌다는 말인가. 저를 찾아왔으니 볼일을 보려면 일단 안으로 들어와야 할 것이 아닌가.

또 무슨 꿍꿍이를 품고 있는 건가 싶어 옥환이 승헌을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승헌이 불쑥 제안을 건넸다.

“하니 괜찮으면 걸으면서 얘기하지 않겠나?”

“……알겠습니다. 얼른 채비를 마치고 오겠습니다.”

옥환이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승헌이 그의 어깨 위에 자신의 겉옷을 휙 펼쳐 둘러 주었다.

“이러면 채비는 끝났겠지.”

머뭇거리던 옥환이 하는 수 없이 소매에 팔을 넣는데, 소매가 어찌나 큰지 옥환의 손끝만 겨우 밖으로 나왔다. 그는 뭐라 하고 싶은 기분을 억누르고 남은 팔도 마저 넣었으나 이번엔 옷자락이 바닥에 질질 끌렸다.

“전하. 송구합니다만 전하의 옷이 더러워질 것 같으니…….”

“그럼 그건 그대에게 주도록 하지. 빨리 와, 옥환. 나는 시간이 많지 않아.”

“…….”

옥환은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승헌이 제 옷을 주겠다고 해서가 아니었다. 자신을 ‘옥환’이라 부르는 승헌의 호칭 때문이었다. 이름은 부모 외엔 결코 아무나 부르는 것이 아니다. 하물며 옥환이 주군으로 모신 염완조차 항상 옥환을 승상 혹은 선생이라고 불렀고, 세간에서도 그를 선생으로 칭했다.

옥환은 나름대로 자신이 이룬 것도 있고 명성도 얻었다고 생각했다. 한데 승헌이 마치 자신을 하인 취급하듯 스스럼없이 이름을 부르자 동요할 수밖에 없었다. 적국의 왕인 승헌에게 대단한 대우를 받고 싶은 것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이름을 부르는 것은 저를 크게 무시하는 처사였다.

하나 승헌은 불만을 말할 수도 없게 성큼성큼 걸어 벌써 저만치 가 있었다. 일순 발끈했던 옥환은 곧 자신의 마음을 다스렸다. 어쨌든 모든 걸 버리고 적국에 온 것은 자신의 선택이다. 이제 와 사소한 일에 감정을 앞세워선 안 될 일이었다.

그 어떤 굴욕도 감내하리라고 다짐하며 옥환은 곧 승헌의 뒤를 따랐다. 한데 중간에 승헌이 휙 돌아보더니 옥환의 어깨너머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자는 두고 와.”

옥환이 고개를 돌려 승헌이 가리킨 곳을 바라보자, 그곳엔 자신을 따라오고 있는 계평의 모습이 보였다. 승헌의 지시에 계평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으나 옥환은 조용히 고개를 가로젓고는 승헌을 쫓았다.

앞서 걷는 승헌의 커다란 등을 바라보며 옥환은 염완을 떠올렸다. 두 사내는 완전히 정반대였다. 옥환은 염완의 등을 본 적이 없었다. 그는 항상 옥환과 나란히, 혹은 조금 뒤에서 걸었다. 상대의 보폭에 맞춰서 속도를 조절했다. 하나 승헌은 거침없이 나아간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제 주군 또한 이렇게 살아야 했는지도 모른다. 버릴 것은 버리고, 때로는 매정하게 끊어내야 했는지도. 하나 그는 모든 것을 다 짊어지고 가려 했다. 누구도 버리지 않고, 다 함께 걸어가려 했다. 자신의 걸음을 늦춰서라도.

그 다정함이 끝내 벽국을 위태롭게 만든 것일까.

‘설령 그렇다 해도 저는 그게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누구도 그렇게 말하도록 두지 않을 것입니다.’

흩날리는 꽃잎 속에서 승헌이 아닌 다른 이를 바라보고 있던 옥환이 이내 발을 멈추었다. 그는 자신의 걸음을 방해하는 큰 옷을 벗어 들고 승헌의 뒤를 빠르게 뒤쫓았다.

“전하. 현 서국의 군수물자 수송 방식에 대해 건의드릴 사항이 있습니다.”

옥환이 이날만을 위해 기다렸던 말을 마침내 꺼냈다. 그는 자신의 지략으로 서국에 도움을 주고, 신뢰를 얻는 것과 동시에 조정에 발을 들일 속셈이었다. 자신의 등용을 반대하는 여론을 누르기 위해 간접적으로 서국의 신하들과 접촉했고, 결국 이렇게 승헌이 자신을 찾아오게까지 만들었다.

이 능구렁이 같은 사내가 또 속에 무엇을 숨기고 있을지는 모르지만, 옥환은 이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을 생각이었다.

하나 승헌은 옥환의 얘기를 듣는 둥 마는 둥 하더니 돌연 걸음을 멈추었다. 옥환이 이때다 싶어 말을 이으려 했으나, 승헌이 선수를 쳤다.

“그대에게 보여 주고 싶었어.”

또 뭔가 싶어 조금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돌린 옥환이 드물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느새 그의 눈앞에는 연분홍빛 꽃 천지가 펼쳐져 있었다. 그 삭막한 옥환의 마음조차 녹일 만큼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이 후원이 나의 가장 큰 자랑거리지. 귀한 손님이 오면 항상 보여 주곤 해. 마침 봄이어서 다행이야. 그대에게 이 모습을 보여 줄 수 있으니.”

“……복사꽃이군요.”

옥환이 그렇게 중얼거리며 손을 뻗자 손안에 꽃잎이 쏟아졌다. 승헌이 그 모습을 보며 말을 이었다.

“나는 이곳을, 내 나라를 도원향으로 만들고 싶어. 그를 위해 만든 정원이야.”

하나 한순간의 감동도 잠시, 옥환은 곧 이곳을 만들고 가꾸는 데에 들어갔을 백성들의 노고를 떠올리고는 표정을 굳혔다. 고작 이런 눈요기를 위해 얼마나 많은 백성의 피와 땀이 들어갔을 텐가. 도원향은 신선들이나 노니는 곳이다. 사람이 사는 세상은, 사람다워야 했다. 어릴 적 보았던, 금빛 이삭들이 춤추는 넓은 들판처럼.

누구나가 굶지 않고 살 수 있는 그런 세상. 염완과 자신이 만들려던 이상향. 금야金野.

그 꿈을 되새기며 옥환은 현실로 돌아와 능청스럽게 화제를 돌려놓았다.

“미천한 제게 이런 것까지 보여 주시고,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 보답으로 아까 말씀 올렸던 서국 군의 군수물자 수송에 대해 더 이야기를 드리고 싶은데 어떠실지요.”

승헌은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는 옥환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흑진주처럼 검은 눈동자를, 티 한 점 없는 상앗빛 뺨을, 흩날리는 복사꽃을 머금은 듯한 입술을 차례차례로 바라보았다.

그러고 나서, 옥환의 귓가에 붙은 꽃잎을 떼어주며 살갑게 물었다.

“옥환. 내게 조언을 하고 싶나? 내 신하들에게 그리했듯 말이야.”

“…….”

“내 조정에, 들어오고 싶나?”

상상과는 전혀 다른 승헌의 반응과 마치 제 속을 모두 읽고 있는 듯한 날카로운 질문에 일순 옥환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하나 그는 눈 하나 깜짝 하지 않은 채 대꾸했다.

“예, 그러합니다. 줄곧 저의 지략을 활용해 세상을 바꾸는 것이 하늘이 제게 부여한 사명이라 여기고 살아왔습니다. 그것은 벽국에 있든, 서국에 있든 변하지 않는 저의 신념입니다. 더불어 인재 또한 쓰지 않으면 녹이 스는 법입니다. 하니 전하께서 저를 써 주셨으면 합니다. 전하의 재능껏.”

옥환의 대담한 발언에도 동요하지 않은 승헌은 ‘옥환, 옥환.’ 하고 그의 이름을 부르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대는 내 조정에 들어올 수 없어. 단 한 발짝도. 내가 뭘 믿고 그대를 조정에 들이겠나?”

이번에는 옥환도 도저히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 당황한 얼굴로 입을 다물어 버린 그에게 승헌이 자못 고심하는 얼굴로 말했다.

“하나 귀빈인 그대를 섭섭하게 하고 싶진 않아. 해서 말인데, 그대가 내게 정 그렇게 조언을 하고 싶다면 한 가지 방법이 있기는 해.”

‘알려줄까?’ 하고 장난스레 묻는 승헌의 태도에 옥환은 수치심을 느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가 방금보다 더한 말을 꺼냈다.

“나의 첩이 돼, 옥환.”

“……그, 게 무슨.”

“내 품 안에서라면 뭐든 들어주지. 군수물자의 수송 방법에 대한 조언이든, 그대의 그 잘난 재능에 대한 자랑이든, 뭐든 간에.”

하니 내게 안겨서 해. 승헌은 천연덕스럽게 이야기하고는 대답을 구하듯 옥환을 바라보았다.

옥환은 쉽사리 말을 잇지 못했다. 도무지 이 사내의 속을 알 수가 없었다. 하나 그 냉정한 옥환의 속을 헤집어 놓은 당사자는, 봄볕보다 더 화사하게 웃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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