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권 - 1화 (1/16)

금야기 1

금야기

1

보리비

一. 戰國(전국)

답지 않게 싸늘한 3월의 초봄. 양양의 성 앞에는 바람 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무거운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서국의 대군은 성이 보이는 둔덕에서 벌써 이틀째 대기만 하고 있었다. 하나 그들 중 누구도 왜 나아가지 못하는지에 대한 의문을 품지 않았다.

이 앞에는 설옥환이 있다. 금야 선생, 설옥환. 그가 누구던가. 북기에서 고작 10만의 군사로 그의 4배였던 일국의 40만 군사를 격파한 지략가 중의 지략가다. 그 당시 “진평”이 다스리던 “일국”은 40만의 군사 중 고작 5만을 데리고 겨우 도망쳤고, 그 패배의 충격으로 인해 진평은 얼마 못 가 죽음을 맞이했다. 그 뒤 일국의 2대 왕으로 “견승헌”이 즉위하고, 나라의 이름 역시 “서국”으로 바꾸었으나 군사들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북기대전 때의 공포가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한데 그때, 서국의 왕인 견승헌이 있는 막사에 병졸 하나가 다급하게 들이닥쳤다.

“전하! 전하, 급보이옵니다!”

“무슨 일이더냐?”

장수 하나가 대신 묻자 병졸이 혼비백산한 얼굴로 외쳤다. 나와서 직접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이윽고 병졸에게 물었던 장수가 밖으로 나가 무언가를 확인하고는 병졸과 똑같이 놀란 표정으로 견승헌에게 달려왔다. 견승헌이 대관절 무슨 일이냐 물으니 그가 큰 소리로 외쳤다.

“전하! 성에 항복의 깃발이 내걸렸사옵니다! 금야 선생이…… 투항했사옵니다!”

도무지 믿을 수가 없는 내용이었다. 견승헌과 그의 장수들은 서둘러 밖으로 나가 성에 걸린 항복의 깃발을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믿기지가 않았다. 그 금야 선생이, 싸우지도 않고 항복을 하다니?

“전하. 이는 필시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이옵니다. 반드시 확인을 해보셔야 할 줄로 아옵니다.”

견승헌은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이도 아니고 설옥환이다. 그의 항복이 그저 항복일 리 없었다. 그렇게 뜻밖의 항복 소식에도 누구 하나 마음 놓고 기뻐하지 못하던 때, 또 하나의 놀라운 소식이 당도했다. 설옥환이 직접 견승헌에게 서찰을 보내온 것이었다. 그 안의 내용은 서국군의 혼란을 더더욱 부추겼다.

‘서국의 국왕 전하께선 이미 성벽에 걸린 항복의 깃발을 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저는 서국군과 싸울 용의가 없으며, 성안에는 오직 저와 호위 하나만이 남아 있습니다. 항복 의사와 함께 선물을 바치고자 하니 전하는 부디 주변을 물리시고 홀로 안으로 와 주시기 바랍니다.’

견승헌과 측근 장수들은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이것이 설옥환이 준비한 함정인지 진심 어린 투항의 뜻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설옥환의 항복과 서찰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30만의 대군을 이끌고 성안으로 진격하는 건 피해가 막심한 일이었다. 서국과 견승헌은 항복한 적장을 죽인 겁쟁이에 비겁자라는 오명을 쓰게 될 것이고, 무엇보다 서국 내에서조차 명망이 높은 설옥환을 증좌도 없는 의심으로 함부로 죽이는 것은 나라 안의 정서를 혼란하게 할 위험이 있었다. 더불어 군대의 사기 또한 떨어질 터.

하나 설옥환의 항복이 거짓이라면, 그가 어떤 계략을 준비했는지 모르는 채로 그의 뜻에 따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도 저도 어렵다. 그렇다고 설옥환의 계략을 경계해 아무것도 하지 않고 군대를 물리는 것은 그야말로 최악 중 최악의 선택이었다.

때에 맞지 않게 이어지는 추위와 오랜 시간의 행군은 30만 대군을 지치게 했다. 더욱이 황폐한 벽국의 토지는 각종 풍토병을 일으키고, 군량을 부족하게 하여 군대를 약화시켰다. 견승헌은 이 전쟁을 최대한 빨리 끝내고 싶었다. 하나 패배만은, 절대 있어선 안 된다. 승리는 못 할지언정 여기까지 온 이상 제대로 된 전리품 하나라도 얻어가야 했다.

그렇게 하루가 꼬박 흘렀다. 다음 날 이른 아침, 견승헌은 장수들을 모아놓고 일렀다.

“혼자 가겠다.”

“전하!”

장수들이 하나같이 그를 만류했으나 그의 결정은 확고했다. 그 어떤 희생도 만들지 않고, 설옥환의 수에도 쉽게 넘어가지 않을 방법은 이것 하나였다. 이 경우 최악의 상황이라고 해봤자 자신이 죽는 게 전부였다. 여기 있는 장수들은 모두 전장에서 수많은 공을 세운 명장들이었다. 저 하나가 죽는다 해도 크게 동요하지 않고 휘하를 통솔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밤새 그가 고민해서 내린 결정이었다.

“만일 내가 두 시진 안으로 나오지 않는다면 대장군은 전군 공격을 감행하라.”

결국 견승헌은 그 한마디를 남긴 채 단신으로 성을 향했다. 그가 성문 앞에서 말을 멈춰 세우자 곧 문이 열렸다. 그는 그 안으로 다시 말을 몰았다. 그의 장수와 군사들은 그저 그 모습을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부디 자신들의 왕이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바라며.

***

성안은 서찰의 내용대로 텅 비어 있었으나 승헌은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양양의 군사는 몇천에 불과하다 해도 주변에서 증원군을 보내왔다면 그 수가 몇만이 되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들이 모두 이 안에 숨어 있지는 않겠지만 단 몇백의 군사로도 혼자인 자신을 죽이기는 충분했다. 그리고 그것이 설옥환의 노림수라면 지휘관을 잃은 서국의 군대에 혼란을 일으키는 데에 그 목적이 있을 것이라고 승헌은 생각했다.

하지만.

“서국의 국왕 전하를 뵙습니다.”

그를 맞이한 것은 설옥환, 혼자였다. 그의 항복이 사실이었던 것이다.

승헌은 말없이 옥환을 빤히 바라보았다. 옥환은 감색의 비단옷을 입고 단정하게 앉아 있었다. 속세 따윈 모르는 것처럼 말갛고 어여쁘기만 한 얼굴이 승헌에겐 다소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나이조차 짐작할 수 없어 혹 신선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간 이리 고운 얼굴을 하고 그런 놀라운 전술을 고안해냈다는 것인가.

“그대가 금야 선생인가?”

침묵도 잠시, 승헌이 태연하게 자리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으며 묻자 옥환이 여전히 눈을 내리깐 채 대꾸했다.

“송구하지만 그렇습니다. 상상하신 바와 많이 다른 모양이지요?”

“선생이라고 불리기에 나보다는 늙었을 줄 알았지.”

“저야말로 한 나라의 군주이시니 좀 더 나이가 지긋한 분이실 줄 알았습니다만.”

승헌은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말없이 웃으며 제 앞에 놓인 잔을 들었다. 적장에 대한 정보를 그 설옥환이 모를 리 없었다. 물론 승헌 역시 옥환이 아리따운 미남자라는 것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다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을 뿐이다. 수많은 미인을 보아온 승헌조차 옥환의 미모에는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이런 자리엔 마땅히 술 한잔이 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

잔에서 차향을 맡은 승헌이 가볍게 중얼거리자 옥환이 누군가를 불러냈다. 조용히 모습을 드러낸 호위는 미리 준비해둔 술병을 들고 승헌의 잔에 따라주었다.

호위의 존재에도 승헌은 딱히 놀라지 않고 도리어 옥환에게 직접 술을 따라주겠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나 옥환은 그의 제안을 사양했다.

“망극합니다. 술을 전혀 하지 못하는 몸이라.”

“유감이군. 이 좋은 것을 알지 못하다니.”

옥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어떤 사내를 떠올렸을 뿐이었다. 술자리에서 꼭 저를 옆에 끼고 안줏거리를 챙겨주던 사내.

그 사내를 위해, 자신은 지금 이 자리에 있다.

옥환은 그 사실을 상기하고는 맞은편의 상대를 바라보았다. 다부진 체격에 이목구비가 선명한, 아주 보기 드문 미남이었다. 하나 그 속이 그의 얼굴처럼 깨끗하고 시원스러울지는 모르는 일이다. 다만 조금의 새삼스러운 마음은 있었다. 이자가 바로 서국의 왕, 자신들의 숙적이라는 사실에.

견승헌. 그는 전장에서 도깨비 장수라고 불렸던, 자국 병사들에게는 마치 두려움의 대명사와도 같은 존재였다. 그리고 옥환에게 있어 그는 서국 그 자체였다. 반드시 무찔러야 할 상대. 그러나 영영 쓰러지지 않는 상대.

한데 그저 벽처럼 느껴지기만 하던 존재를 이렇게 직접 마주하니, 그도 그저 하나의 인간이었을 뿐이라는 사실이 못내 낯설었다.

그렇기에 영웅이라고 칭송받는 것일까.

‘하나 내가 하려는 짓은 결코 영웅이 할 일은 아니겠지. 어쩌면 벽국과 주군을 욕보이게 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옥환은 자신의 결정을 철회하지 않을 것이다.

이윽고 그는 자신을 향한 자조와 연민을 던지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잠시 뒤, 예상 밖의 일이 벌어졌다. 그의 꼿꼿한 머리가 천천히 바닥으로 내려앉은 것이다.

천하제일의 군사 설옥환이, 적국의 왕에게 절을 올리고 있었다.

“…….”

무턱대고 절을 하는 옥환의 행동에 당황하면서도 승헌은 침착함을 유지했다. 과연 설옥환이 가지고 나올 계책은 무엇일까. 걱정이 드는 것도 사실이나 호기심이 이는 것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렇게 승헌은 걱정 반 호기심 반으로 옥환에게 다가가 그에게 손을 뻗었다.

“선생.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것을 받아주십시오.”

하나 옥환은 엎드린 그대로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승헌에게 건넸다. 벽국의 왕이 보낸 친서였다. 친서에는 화친을 청하는 내용과 화친을 맺을 시 벽국이 서국에게 바칠 공물의 가짓수 따위가 적혀 있었다.

“그대가 내게 주겠다던 게 이것인가?”

지금의 상황에서 화친은 충분히 예상 가능한 대응이었다. 화친을 맺는 것은 승헌에게도 나쁜 제안이 아니었다. 다만, 이것이 그 설옥환이 내놓은 계책이라기엔 영 김이 샜다. 금야 선생조차 어쩔 수 없을 만큼 벽국의 상황이 나쁜 것인가? 만일 그렇다면 일시적인 화친을 맺는 것보다는 이대로 진군해 벽국을 아예 무너뜨리는 쪽이 나을 수도 있다.

승헌이 깊은 고민에 잠겨 있는데, 옥환의 맑은 목소리가 그를 생각에서 건져냈다.

“보시다시피, 저희 벽국은 서국에게 화친을 청하는 바입니다. 하나 그것을 받아들일지 말지는 전하의 뜻입니다. 벽국의 신하로서 제가 할 일은 그 친서를 전하는 것뿐입니다.”

옥환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듣던 승헌은 뭔가 깨닫고는 고개를 들었다. 벽국의 신하로서. 하면, 다른 입장으로서 할 일이 따로 있다는 것인가? 승헌이 의문을 느끼고는 옥환에게 물으려는데 옥환이 고개를 깊이 숙이더니 믿을 수 없는 말을 꺼냈다.

“저를 서국으로 데려가 주십시오.”

승헌은 입을 다물었다. 주변은 몹시 고요했다. 하나 이내 승헌이 낮게 웃기 시작했다. 그 웃음소리를 들으면서도 옥환은 결코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부덕한 군주와 망조가 든 나라를 짊어지고 가망 없는 싸움을 하는 것도 이젠 지쳤습니다. 벽국의 왕께서는 저를 제물로 내놓으셨습니다. 하니 저를 거두십시오.”

“그대를 제물로 내놓았다?”

“목숨을 걸고서라도 어떻게든 화친을 맺고 오라 하신 것은 그런 뜻이 아니겠습니까.”

승헌은 천천히 옥환의 고개를 들어 올렸다. 옥환의 표정에서는 아무것도 읽히지 않았다. 억울함도, 분함도, 비참함도.

“벽국의 왕이 말한 뜻은, 적국에 몸을 의탁하라는 뜻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승헌의 떠보는 듯한, 혹은 비웃는 듯한 말투에 옥환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떴다. 짧은 순간 수많은 기억이 눈꺼풀 위를 지나쳤다. 같은 뜻을 품은 동지들, 그리고 무고한 백성들의 피와 살로 만든 길이다. 그 길의 끝을 보기 위해서라면 더 이상 주저함은 없었다.

“돌아가신 저의 옛 주군인 염완 님을 경애하여 지금껏 그분의 의지를 이어가고자 분골쇄신하였으나, 이날에 이르러 뒤를 돌아보니 제가 이루고자 한 것은 한 가지도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어질지 못한 주군을 버리는 것 또한 신하의 권리일 것이니, 이제 저는 서국의 신하가 되어 뜻을 이루고자 합니다.”

“그대가 이루고자 하는 뜻이 무엇이기에?”

“그것은…….”

옥환이 말을 이으려는데 승헌이 몸을 기울여 옥환의 귓가에 대고 나직이 물었다.

“그대가 그리 경애하는 염완의 뜻이 아닐까?”

“…….”

“이것이 그대가 준비한 또 다른 계책이라면?”

승헌이 부드럽지만 강한 힘으로 옥환의 어깨를 밀자, 옥환은 저항 없이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승헌은 그 위에 올라탄 채 옥환의 목을 가볍게 쥐고 말을 이었다.

“하면 나는 그대를 여기서 죽여야 하지 않을까?”

승헌의 어조는 한없이 다정했다. 옅은 미소까지 띠고 던지는 질문은 도무지 그 진의를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옥환은 천천히 숨을 골랐다. 이것은, 창과 칼이 없는 전쟁이었다.

“물론…….”

옥환은 조금의 두려움도 없는 눈으로 승헌을 응시하며 제 목을 쥔 승헌의 손을 붙잡았다.

“저를 죽이고 살리시는 것은 전하의 마음입니다. 저의 배신을 염려하신다면 차라리 여기서 그 싹을 잘라내시는 것이 차선일지도 모릅니다.”

“차선? 하면, 최선은 무엇이지?”

“저를 이용할 만큼 이용한 뒤에 버리시는 것입니다.”

승헌이 흥미가 담긴 눈길로 옥환을 바라보자, 옥환이 마저 말을 이었다.

“서국의 군왕께선 인재를 귀하게 여기신다고 들었습니다. 능력 있는 자라면 출신과 나이를 불문하고 누구든 등용하신다고. 하면 저는, 천금의 가치를 지닌 인재가 아닙니까?”

본인의 입으로 천금의 가치를 지닌 인재라. 참으로 대단한 자부심이었으나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현시대, 아니 이전 시대의 모든 위인을 통틀어도 손에 꼽힐 책사가 바로 설옥환이었다. 자신이 인재를 귀하게 여긴다는 주장 또한 맞는 말이었다.

하나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기에는 그 위험성이 너무 크다. 만일 옥환이 다른 마음을 품고 저에게 오는 것이라면, 배신할 나라와 주인을 위해 그가 자신의 능력을 얼마나 발휘해 줄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은 그의 조언을 전부 믿지도, 아주 안 믿지도 못할 것이다. 하면 이만한 애물단지가 또 어디 있겠는가.

물론 그런 승헌의 셈을 전부 읽은 옥환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저를 충분히 활용하는 것도, 제 쓸모가 다했다고 여겨질 때를 재는 것도, 모두 전하의 능력에 달린 문제입니다. 설마하니 일국의 군주씩이나 되는 분께서 저처럼 힘없는 서생의 배신을 두려워하실 리가 있겠습니까?”

뻔하디뻔한 도발이었으나 승헌의 표정이 일순 굳어졌다. 영웅이라 평가받거나 수많은 사람 위에 군림해본 자들일수록 자존심이 세고 우월감이 높다. 옥환은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런 단순한 부추김에 넘어오리라는 것도.

그리고 만일 그가 넘어오지 않더라도 그 주변의 사람들이 가만있을 리가 없었다. 자신들의 주군이 배신을 겁내 금야 선생씩이나 되는 인재를 버리고 왔다는 얘길 들으면 실망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자존심뿐 아니라 휘하 통솔을 위해서라도, 승헌은 부하들 앞에서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지 않길 원할 것이다.

‘당신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나를 서국에 데려가서 차라리 가둬놓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내 청을 거절할 수는 없을 테지.’

옥환은 내내 침묵하는 승헌을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다. 그는 자신의 감정을 잘 감출 줄 알았고, 상대의 감정은 잘 읽어낼 자신이 있었지만 이 사내는 그것이 쉽지 않았다. 자신의 제안에 동요하고 있는 것만큼은 분명하건만, 언뜻 표정이 풍부해 보이는 얼굴에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가 올라오는 게 다였다. 하나 옥환은 섣불리 자기변호를 하는 대신 그가 반응을 나타낼 때까지 기다리는 쪽을 택했다.

그리고 마침내 승헌이 무거운 입을 열었으나, 그 내용은 옥환이 생각한 것과는 달랐다.

“선생. 예전에 우리 집에 굉장히 일을 잘하는 하인이 하나 있었어. 그 아인 내 아버지를 잘 따랐고, 아버지도 자식처럼 그 아일 아꼈지. 그리고 그런 아이를 질투하던 큰형님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자신이 집안의 주인이 되자 곧바로 그 아이를 쫓아냈어. 쫓겨나던 날, 그 아이는 아주 많이 울었지. 화를 내고, 악을 쓰고, 싹싹 빌기도 했어.”

“…….”

지금 상황에서는 뜬금없는 이야기였으나 옥환은 머잖아 승헌이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깨달았다. 승헌이 말한 하인은 자신을 이르는 것이었다. 벽국을 위해 열심히 일했건만 나라의 주인이 바뀌자 쫓겨났다. 그렇다면 억울함이나 서러움을 느끼는 게 당연한 일인데, 자신에게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예리한 지적이었다. 하나 옥환은 변함없는 얼굴로 승헌의 의문에 답했다.

“제 청을 어찌 받아들이셨을지는 모르겠으나, 제가 주군의 나라를 배신하고 적국의 왕 앞에 섰을 때는…… 그만한 각오와 감정의 정리가 있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니까 그대의 말인즉슨, 참고 있는 것이다?”

“이 마음을 어찌 말로 다 할 것이며, 어찌 눈물 따위로 제 속이 편해지겠습니까?”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 낮게 깔린 정적 안에서 두 사람은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눈빛이 부딪치고, 자신의 표정을 감추면서도 서로의 약점을 잡아내려는 무언의 탐색전이 이어졌다.

옥환은 승헌의 눈빛을 똑바로 응시하면서도 속으로는 바짝 긴장한 상태였다. 누구에게든 말로는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하나 이 사내의 앞에서 자신의 능력 따위는 그저 잔재주에 불과한 기분이 들었다. 이 사내는 분위기로 모든 것을 압도했다. 마치 배가 부른 포식자처럼, 일견 여유로워 보이는 그 모습 뒤에서 냉기 띤 시선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세심히 관찰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 옥환은 무너지지 않았다. 동요하지도 않았다. 그저 승헌이 쏟아내는 경계와 의심을 받아치는 대신, 고스란히 받아냈을 뿐.

그렇게 숨 막힐 듯한 침묵 속에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드디어 승헌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옥환이 그런 승헌의 속내를 읽으려 애쓰는데, 뜻밖에도 승헌이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데려가 주지, 서국으로.”

“…….”

옥환은 망설임 없이 승헌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하나 그는 자신이 이겼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모든 건 지금부터 시작이다.

두 사내의 전쟁은 이제 막 전초전을 끝냈을 뿐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