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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에게 답하기도 전에 빛은 자신을 감싸 마지막에 있었던 장소로 이동시켰다.
뜨거운 햇살과 다르게 거센 물길은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게 만들어 트라우마
를 남겼다. 괜스레 욱신거리는 것 같은 아랫배의 느낌에 애셔는 눈을 질끈 감
았다.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지났다고 했는데…….”
여기서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루크를 찾아서 자신이 괜찮다고 말을 해
야 했다. 칸이 이쪽으로 보내 줬다면 그는 여전히 자신을 찾고 있을지 몰랐
다. 애셔는 빠른 걸음으로 물길을 따라 걸었다. 자신의 알파가 있을 그곳으로.
하지만 루크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대공가로 돌아간 게 아닌가
싶을 때 멀리서 사람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애셔는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걷
다가 그곳에 기사들과 루크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전하.”
물속에서 막 빠져나왔는지 루크의 몸은 흠뻑 젖어 있었다.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도 담지 않은 채 그는 파리하게 질린 얼굴로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겼다.
보기만 해도 아슬아슬해 보이는 그의 모습은 곧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산송장 같은 느낌이었다.
애셔는 천천히 발길을 뗐다가 기사들과 부딪혔다.
“……어, ……어?”
애셔와 부딪힌 기사는 당황했는지 말을 잇지 못했다. 마치, 저승에서 돌아온
사람을 본 것처럼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말만 더듬거릴 뿐이었다. 기사의 이
상함을 눈치챘는지 다른 기사가 그를 응시했다가 루크에게 다가가는 애셔를
발견했다.
“저, 전하!!”
부산스럽게 부르는 기사의 목소리에 루크의 시선이 느릿하게 닿았다. 무심한
듯 애정 없이 기사에게 닿았던 그의 눈동자가 애셔를 발견하고는 거칠게 흔들
렸다.
“……애셔?”
간절함이 만들어 낸 환상인 걸까, 아니면 현실인 걸까. 그는 혼란스럽다는 얼
굴로 그 자리에서 얼어붙은 듯 움직이지 못했다. 애셔는 그런 그를 배려하듯
천천히 다가가 앞에 우뚝 섰다.
“전하.”
은은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따라 애셔의 머릿결이 흔들렸다. 동시에 맡아지는
은은한 바다 향에 루크는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눈시울을 붉혔다.
“정말……, 당신입니까?”
목이 잔뜩 쉬었는지 그는 갈라진 목소리로 애셔의 존재를 확인하듯 물었다.
애셔는 불어 버린 그의 손을 살포시 움켜잡으며 그를 향해 웃어 주었다.
“네. 저예요.”
“…….”
“너무 늦게 와서 죄송해요.”
잔잔한 울림이 있는 애셔의 음성에 루크의 입술이 꾹 다물렸다. 울음을 참으
려고 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애셔는 밀려드는 복합적인 감정에 그를 향해 예
쁘게 웃어 주며 그의 손을 꼭 움켜쥐었다.
“……혹시 기다렸을까요?”
애셔의 말에 루크는 희비가 교차된다는 얼굴로 그를 그대로 끌어당겼다. 꿈이
라도 좋으니 지금 순간이 끝나지 않길 바라며 루크는 애셔를 꼭 끌어안은 채
말했다.
“보고 싶었습니다.”
“…….”
“너무 보고 싶어서……, 미쳐 버리는 줄 알았습니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를 타고 그의 울컥함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가 얼마나
힘들어했는지, 얼마나 고통스러워했는지 그대로 느껴져서 애셔는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아이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루크는 뒤늦게 아이가 생각났는지 애셔를 품에서 떼어 내며 배를 살폈다. 혹
여라도 아이에게 문제가 있지 않을까 불안해하는 목소리와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은 표정이었다. 더는 그를 속여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울음을 억지
로 삼켰다.
“전하께 할 말이 있어요. 실은 제 배 속에 있는 아이는……,”
“미안합니다. 그날의 일을 기억하지 못해서.”
“…….”
“제 아이라는 것을 진작에 눈치챘어야 했는데 이제야 알게 되어서, 당신을 힘
들게 해서…….”
루크는 힘겹게 입술을 떼며 죄책감이 가득한 얼굴로 애셔의 배 위에 손을 가
져가 대었다. 옷을 타고 전해지는 미약한 떨림에 그가 얼마나 힘들어하고 있
는지 고스란히 전해졌다. 애셔는 눈치껏 자리를 피하는 기사들을 보며 눈을
한번 깜박이고는 루크를 향해 응시했다.
“좀 더 일찍 말하지 못해서 죄송해요. 진작 말을 해야 했는데 사실 용기가 나
지 않았어요. 가짜인 제가 전하의 아이를 가졌다고 하면 공작이 가만두지 않
을 것 같았고, 전하께도 피해가 갈 것 같았어요.”
무엇보다 가짜인 자신을 바라볼 그의 눈빛이 무서웠었다. 루크는 배에 닿았던
손을 느릿하게 문지르며 만감이 교차한다는 표정으로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축복.”
“네?”
“당신이 사라지고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당신에게도 아이에게도 이름이 없다
는 것을. 그래서 지었습니다. 당신이 사라지고 난 뒤에야 바보같이, 뒤늦게
후회하고 또 후회하며.”
“……전하.”
“애셔 블레이크. 앞으로 당신을 그리 부르겠습니다. 태명은 당신이 싫다면 다
른 걸로 지어도 좋습니다. 하지만 제게 당신이 행운이었듯이 아이는 제게 축
복입니다.”
다만 그걸 뒤늦게 알아서 고통스럽다는 듯이 루크는 괴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애셔는 완연한 봄처럼 완벽해진 이름에 결국 눈물샘을 터트리며 그대로 펑펑
울어 버렸다.
“좋아요……, 너무 좋아요……. 제게도 아이에게도……, 전하가 지어 준 이름이 너
무 좋아서…….”
애셔는 말을 잇지 못하고 그대로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젖어 버린 그의
옷으로 인해 얼굴이 차가웠지만 그마저도 좋았다. 자신을 찾기 위해 정신없이
물길 속에서 헤맸다는 증표였으니까. 지금까지 힘들었던 시간을 다 보상받는
것처럼 느껴졌다. 길었던 도망에 마침표를 찍는 순간이었다.
“몸이 너무 차가워요.”
“괜찮습니다.”
“그러기에는 입술도 파리하고…….”
애셔는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 그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그러다 느껴지는 그
의 체온에 애셔는 그가 열이 있음을 깨달았다.
“열이 심해요!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어서…….”
이동하자고 말을 하고 싶었지만 루크는 괜찮다며 애셔를 꽉 끌어안았다. 두
번 다시 놓치지 않을 사람처럼 강하게 껴안으며 거친 숨을 내쉬었다. 숨소리
만 들어도 그가 얼마나 열이 끓는지 알 수 있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위험해요. 어서 대공가로 가요.”
“별장에서 있었던 일은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당신에게 상처를 준 시간까지
전부.”
“…….”
“그렇다고 그날 일을 기억 못 하는 건 아니었습니다. 러트로 인해 폭주하여
그날의 기억이 뜨문뜨문 났을 뿐. 아무런 체취도 느껴지지 않는 방 안에 확신
이 없었습니다.”
고해성사하듯 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애셔는 조용히 그의 말을 경
청하며 묵묵히 들어 주었다.
“만약 그때 있었던 이가 당신이 아닌 다른 자였다면 안지도 않았을 겁니다.
내가 그날 안았던 이는 애셔, 당신이었으니까. 하지만 눈을 뜨니 당신은 없었
고 방 안에는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제가 당신을 안았다면 페
로몬만큼은 남아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
“그래서 확신이 필요했습니다. 그날의 일이 환상이 아닌 현실이길 바라는 마
음에 당신에게 갔지만, 당신은 끝까지 부정했습니다. 만약 당신이 독약에 의
한 부작용으로 페로몬 향을 잃었다는 걸 알았다면 저는 확신했을 겁니다. 당
신의 배 속에 있는 아이가 제 아이라는 것을.”
평소와 같은 담담한 목소리였지만 루크는 오해한 그 시간이 억울하고 아깝다
는 듯이 공허한 표정을 지었다.
“제일 먼저 우리의 아이를 알아보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아이의 페로몬이 독
하다고 했던 말도, 도망치느라 지쳤을 몸으로 나를 찾아왔던 것도. 당신이 힘
들 때 모른 척 밀어냈던 것도. 모두 하나같이 당신에게는 미안한 것투성이라
저 자신이 용서되지 않습니다.”
“…….”
“만약 당신을 찾게 된다면 당신이 원하는 대로 편히 살게 놓아주겠다고 했는
데……, 당신을 보니 그게 되지 않습니다.”
사랑을 받아 본 적이 없어서 사랑을 주는 방법을 몰랐다. 좋아하는 감정을 표
현하면 그 역시 제게 똑같이 사랑을 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 방식이 애
셔를 힘들게 한 이기적인 방법이라는 걸 깨닫고는 후회와 고통 속에서 살았다.
공작이 있던 자리에서 그를 놓치지만 않았더라면, 조금만 더 빨리 발견해서
그들을 처리했더라면 애셔가 물속에 빠지지 않았을 거라 수없이 자신을 저주
하고 저주했다. 하나, 지금은 자신이 없었다.
애셔를 놓아주려 했으나 이미 그가 없는 세상이 어떤지 알기에, 더 이상 공허
함에 무너지고 싶지 않기에 그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루크는 떨리는 목소리
로 애셔에게 물었다.
“이런 말 염치없다는 걸 알지만, 제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거절이라는 대답이 돌아올까 봐 두려워하는 루크를 보며 애셔는 그를 밀어냈다.
“이미 그러려고 여기에 왔는걸요. 전하랑 행복해지기 위해서.”
“…….”
“그러니까 저랑 결혼하겠다는 말 다시 무르시기 없기에요.”
애셔는 눈물이 고여 있는 눈을 어여쁘게 접으며 환하게 웃어 주었다. 조심스
러우면서도 간절한 애원에 세상에 다시없을 미소로 화답하며 루크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