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091*
흙먼지처럼 일어난 바람을 타고 누군가가 자신을 이끄는 것을 느꼈다. 불안한
느낌에 애셔가 뿌리쳤지만 누군가가 강한 물건으로 애셔의 머리를 내리쳤다.
띵-, 하고 두개골이 울리는 감각이었다. 휘청이듯 어지러워하는 애셔를 보며
남자는 재빨리 본인이 데려온 기사들과 어디론가 뛰기 시작했다.
이마를 타고 흐르는 따뜻한 액체가 만지지 않아도 피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
다. 코끝에 맡아지는 비릿함과 함께 느껴지는 오메가의 페로몬. 애셔는 그 대
상이 브래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브래든?”
“내가 그립지 않았어요?”
브래든은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듯이 기사들에게 내려놓으라 명하고는 주위를
경계하라 했다. 옆으로 거친 물살이 흐르는 것을 보니 그는 자신을 그 물살
안으로 밀어 넣을 계획인 것 같았다.
“내가 그랬잖아요. 절대 포기하지 않을 거라고.”
브래든은 품 안에 넣어 두었던 단검을 꺼냈다. 아리아를 죽였다고 했던 검이
었다. 그는 여전히 그 검으로 자신을 찔러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은 모양
이었다.
“그러니 이제 편히 가요. 아리아의 곁으로.”
브래든은 단검을 검집에서 꺼내 애셔에게 내리꽂았다. 위급한 순간이었다. 서
둘러 몸을 반 바퀴 굴려 피하려 했지만, 그의 검은 애셔의 어깨에 꽂혀 그대
로 박혀 들어갔다.
“흐윽……!”
살갗을 찢다 못해 고통스러운 감각이 퍼졌다. 하지만 고통은 그게 끝이 아니
었다. 브래든은 그 틈을 타서 애셔의 배를 발로 내리쳤고, 어깨에 박힌 검을
그대로 뽑아냈다.
“배, 배가……!”
어깨의 고통보다 배의 고통이 극심했다. 혹여라도 아이가 잘못되지는 않을까,
애셔는 울음을 토해 내며 몸을 웅크려 말았다. 단 한 번도 아이에게 잘해 준
기억이 없었다. 도망치느라 몸만 혹사시켰고, 그 흔한 태명 하나 지어 준 적
없었다.
태명이라는 건 함께 지어야 의미가 있는 거였으니까. 애셔는 목에 핏대가 설
만큼 새빨개진 얼굴로 울음을 토해 내며 땅을 기었다. 자신은 죽더라도 아이
만큼은 제발 살려 달라고, 그렇게 속으로 울부짖었지만, 브래든은 이제 모든
것이 다 끝났다는 듯이 검날에 묻은 피를 혀끝으로 핥았다.
“제발, 흐흑……,”
“이제 다 끝났어요. 잘 가요. 가짜 망나니.”
브래든은 검을 다시 한번 들어 애셔의 어깨에 박아 넣었다. 수영도 못할 두
팔로 다시는 기어 나오지 못하게, 칼에 목숨을 거두는 것보다 물속에서 더 끔
찍하게 죽어 가길 바라며 애셔를 물 안으로 밀어 넣었다.
쏴아아-, 거친 물살에 휩쓸려 빠져 버린 애셔는 브래든의 예상대로 어깨를 움
직일 수 없었고, 그대로 입안에 물이 가득 차는 것을 느꼈다.
이 모든 것이 다 끝이 나 버리는 걸까. 자신에게 와서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하
는 아이에게 미안해서, 루크가 너무 보고 싶어서 애셔는 발악하듯 말을 외쳤다.
“살려…… 주세…… 요.”
애셔의 마지막 말에 팔목에 채워진 팔찌에서 작은 빛이 흘렀다. 마치, ‘살려
주세요.’라는 말이 주문이었다는 듯이 애셔의 상처 난 머리와 어깨 주위에 빛
이 흘러들어 상처를 치유했고, 애셔의 몸을 전체적으로 감싸 따뜻한 기운을
흘려보냈다. 그 빛은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며 애셔와 함께 사라졌다.
*
루크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 애셔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풀 위에 선연하게 묻
어 있는 붉은 핏자국, 그리고 옅은 바다 향은 애셔가 그곳에 있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어딨습니까.”
루크는 작은 희망이라도 잡고 싶다는 듯이 칼을 들고 있는 브래든에게 물었
다. 브래든은 뒤늦게나마 자신에게 시선을 온전히 주는 그가 좋아서 해사하게
웃어 보였다.
“어디에 있을까요? 글쎄요? 이미 물살에 휩쓸려 영영 헤어 나오지 못하는 거
아닐까요?”
“…….”
“제가 양어깨에 칼을 박아서 못 쓰게 만들어 버렸거든요.”
그것만큼이나 악질적인 게 있을까. 태연하게 대답하는 브래든을 보며 루크는
단숨에 거리를 좁혀 그의 목을 잡아 움켜쥐었다. 대기하고 있던 이들 역시 손
으로 죽였는지 그의 손에는 많은 양의 피가 묻어 있었다.
“양어깨에 칼을 박았다 했습니까?”
“……이제야, ……저를 봐 줄 마음이 생겼나요?”
브래든은 숨이 콱콱 조여 오는 순간에도 웃는 얼굴을 지우지 않았다. 혹여라
도 그가 자신의 일그러진 모습을 보고 정떨어질까 억지로 유지하고 있는 상태
였다. 루크는 아무것도 담지 않은 공허한 눈으로 반대 손으로 브래든의 어깨
를 강하게 움켜잡았다.
“크악……!”
뼈가 으깨지고 부서질 것 같은 감각이었다. 루크는 나머지는 세인트에게 부탁
한다는 듯이 브래든을 넘기고는 물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오로지 애셔만을 위
해. 마지막 순간까지 제게 집중하지 않고 물속에 들어가는 루크를 보며 브래
든은 미친놈처럼 날뛰었다.
“……왜! 끝까지 애셔입니까?! 왜!”
절규에 가까운 음성이었지만 루크에게 닿지 않았다. 뒤늦게 도착한 기사들은
루크를 보호하기 위해 서둘러 물살 속으로 뛰어 들어갔지만, 루크는 애셔를
찾기 전까지 나가지 않겠다는 듯 몇 시간이 지나도 나오지 않았다.
“전하! 이러다가 위험하십니다!”
아무리 우성 알파라고 할지라도 장시간 물속에서 있는 건 위험했다. 무엇보다
루크가 찾는 애셔는 밤이 될 때까지 아무런 흔적도 나오지 않았다. 더는 진행
할 수 없는 수사에 세인트가 만류했지만, 루크는 포기하지 않았다.
“제발! 정신 차리십시오!”
세인트는 이성을 잃은 루크를 억지로 끌어당기며 언성을 높였다. 이것 또한
나중에 죄를 받겠다는 듯이 다시 물속에 들어가려는 루크의 앞을 막아섰다.
“비켜라.”
“나머지는 저희에게 맡기시고 전하께서는 잠시 쉬십시오. 이러다가 전하마저
잘못되실까 걱정됩니다.”
“아이가 있는 몸이다. 한시라도 늦어서는 안 된단 말이다!”
하지만 이미 물길이 이어진 곳은 모두 수색한 뒤였다. 물에서 빠져나왔다면
흔적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그런 흔적도 없었고, 그렇다고 물속에 있다고 하기
에는 너무 오랜 시간이 흘렀다. 대공에게는 차마 할 수 없는 이야기였지만 이
미 최적 시간이 지나 버린 상태였다.
“……전하.”
세인트는 고개를 숙인 채 말을 아꼈다. 루크는 세인트의 반응에 부정하며 다
시 물속으로 들어갔다. 어떡해서든 그를 찾아 살려 내고 말 거라고 다짐을 했
지만, 밤이 걷히고 푸르스름한 새벽이 와도 애셔의 흔적은 그 어디에도 드러
나지 않았다.
“……몸이 많이 차십니다.”
모든 것을 다 잃은 듯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루크의 곁에 세인트가 담요 하나
를 가져왔다. 루크는 그 담요마저 던져 버리며 물길 속으로 다시 뛰어 들어갔
다. 그렇게 몇 번을 반복했지만, 애셔는 머리 한 올 보이지 않았다.
“전하.”
루크만큼이나 물속을 찾다 지친 톰스가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미동조차 없이
물길만 바라보고 있는 그를 보며 톰스는 어렵사리 입술을 뗐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톰스의 말에 루크가 감정 없는 얼굴로 그를 내려다봤다. 공허한 붉은 눈동자
에는 생기가 없었으며, 그의 얼굴은 며칠 동안 밤을 새운 탓에 눈 밑에 그늘
이 내려와 있었다.
거의 죽었다 해도 될 만큼 피폐한 모습이었다. 톰스는 무겁게 달라붙은 입술
을 억지로 떼어 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우선 이런 상황에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이 잘못된 거라는 걸 알지만, 더 늦
게 말씀드리면 안 될 것 같아서요.”
“……무엇이냐.”
고생을 많이 한 게 느껴질 만큼 루크의 목소리가 잔뜩 갈라져 있었다. 안쓰러
울 만큼 형편없는 목소리에 톰스는 이유 모를 죄책감이 밀렸다.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한 채로 애셔가 그간 숨겨 왔던 비밀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실은 도련님 배 속에 있는 아이는…… 전하의 아이입니다.”
“……뭐?”
“전하께서 별장의 열쇠를 주셨을 때 애셔 도련님은 그 별장에 가셨습니다. 우
연히 그 별장에 전하께서도 계셨고, 도련님은 제게 그곳에 있었던 흔적을 지
워 달라고 하셨습니다.”
루크의 얼굴에 충격이 가해진 듯 작은 균열이 생겼다. 지금까지 꿈이라고 생
각했던 그 날의 잔상이 현실이었다는 것에 충격이었지만, 오랫동안 억눌렀던
러트의 폭주로 인해 그날을 기억하지 못했다는 게 더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아무리 흔적을 지운다 해도 페로몬의 향은 지울 수가 없다.”
“사실 도련님은…… 페로몬의 향을 잃으셨습니다.”
“…….”
“공작가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는데, 도련님은 그때 먹은 독약으로 인해
부작용으로 페로몬의 향이 나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그제야 루크는 별장에서 뜨문뜨문 나는 기억과 다르게 그 안에서 아무런 향도
나지 않았던 이유를 깨달았다. 하지만 어째서, 왜 자신의 아이를 갖고서 약혼
까지 거절하며 자신을 밀어냈는지 이해조차 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