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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를 찌르는 악취에 애셔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축축하면서도 습한 것이 곰팡
이가 가득한 공간인 것 같았다. 애셔는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 천천히 입술
을 떼고는 답답한 숨을 내쉬었다.
“……흐.”
약 기운이 가시지 않았는지 두통이 밀려왔다. 속은 토악질이 날 만큼 메스꺼
웠고, 전날 과음이라도 한 사람처럼 고통이 가시지 않았다. 애셔는 뒤늦게 자
신이 납치당했다는 걸 깨닫고는 발버둥 쳤지만, 손발이 묶여 있는지 몸은 꼼
짝하지 않았다.
“소용없어요.”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애셔가 소리가 나는 쪽으로 몸을 틀었다. 자세히
들어 보니 익숙한 사람의 목소리 같았다. 애셔는 촉각을 최대한 세운 채로 배
를 보호하듯 몸을 말았다.
“……누구세요?”
“이젠 제 목소리도 잊어 버렸나 봐요? 하긴, 그러니까 이렇게 다시 돌아왔겠
지. 멍청하니까.”
애셔는 그제야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브래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첫 만남부
터 말을 바르게 해서 잘 몰랐는데, 자연스럽게 말을 가볍게 하는 브래든의 목
소리를 들으며 애셔가 흠칫 놀랐다.
“벗겨.”
브래든의 말에 기사가 애셔의 눈가에 묶인 천을 풀어 주었다. 그제야 시야가
확 밝은 빛으로 가득해져 애셔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애셔는 빛에 익숙해
지려는 듯 눈을 몇 번 감았다 떠 올리고는 브래든이 있는 곳으로 응시했다.
“벌써 세 번째 만남이네. 반가워.”
그는 자신에게 친근함을 표시하듯 인사를 건네 왔다. 서로 인사를 주고받을
만큼 친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그는 자신에게 하대함으로써 본인의 신분 위치
를 과시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가짜인 자신에게 진짜의 위치를 알려주려
는 듯한 그의 모습에 애셔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게 뭐 하는 행동이죠?”
“내가 그랬지? 네가 누렸던 것 모두 다 내 것이었다고. 다 되찾고 말 거라 했
잖아. 사람의 경고를 왜 못 알아들어.”
페로몬을 흘리고 있지 않았다 뿐이지, 그는 나쁜 기운을 풍기며 애셔를 억압
했다. 애셔는 아리아의 저택에서 나눴던 그의 말을 떠올렸다.
-아리아는 내가 아네스트가로 돌아가는 걸 원치 않아 했지만, 나는 돌아갈 생
각입니다. 그 자리가 원래 내 자리였고 당신이 누리는 모든 것들조차 내가 누
려야 할 것들이었으니까요. 그러니까 나는 꼭 되찾고 말 겁니다. 당신이 누린
작은 행복조차도.
“이곳에 나타나지 말았어야 했어. 그랬다면 우리가 이렇게 마주하는 일 또한
일어나지 않았을 거고, 내가 이렇게 나쁜 사람이 되지도 않았겠지.”
이 모든 것들이 애셔로 인해 일어난 일이라는 듯이 브래든은 원망을 드러냈
다. 만약, 공기에도 형태가 있다면 아마 자신은 이 자리에서 죽고도 남았을
날카로움이었다. 애셔는 그의 기분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기에 잠시 침
묵을 유지한 채로 그의 말을 기다렸다.
“당신이 그랬잖아. 아네스트가에서 지내는 동안 마음 편한 적 없었다고. 그러
니 다시 돌아오지 않겠다고. 그런데 왜 약속을 안 지킨 거지? 계약을 위반한
건 그쪽 아닌가?”
브래든의 말대로 처음에는 다시 돌아올 생각이 없었다. 이곳에 단 하나의 미
련도 남기지 않고 떠날 생각이었으니까. 하지만 계획은 늘 빗겨 나가기 마련
이었고, 어쩔 수 없는 상황을 만들었다. 애셔는 미안함에 차마 입술을 떼지
못한 채 깨물길 반복했다.
“이제 와 내 자리를 탐내려 하는 건 반칙이지. 내가 무슨 마음으로 다시 돌아
왔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뺏길 거 같아?”
“……자리를 탐내려고 했던 건 아니었어요.”
“변명은 집어치워. 네가 이곳에 돌아온 순간부터가 내 자리를 탐내려 했던 거
와 다를 게 없으니까.”
애셔의 말 따위는 듣고 싶지 않다는 듯이 그가 옆에 있는 물건을 내리쳤다.
얼마나 강하게 내리쳤는지, ‘쾅.’하고 울리는 소리가 공간을 가득 메웠다. 뾰
족한 창날처럼 날카롭게 세워진 공기의 흐름에 애셔가 뭐라 변명하려 했지만,
그는 그런 틈조차 주지 않은 채 애셔를 몰아붙였다.
“그동안 내 걸 누리고 즐겼으면 됐잖아?! 그런데 뭘 얼마나 더 원하는 거지?
뭘 얼마나 원하길래, 대공 전하의 별장에서 머무는 거냐고!”
결국 브래든이 화가 난 건 자신이 루크와 함께 있었다는 사실인 것 같았다.
“열성 오메가 주제에. 나보다 형질도 약하면서, 내가 갖고 싶어 하는 것들만
다 가져가는 게 정말 싫어! 재수 없다고!”
그간 억눌렀던 서러움을 표출하듯 브래든이 모든 감정을 쏟아 냈다. 그가 아
네스트가에 가서 행복할 거라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적응
해서 잘 지내고 있지 않을까 싶었다. 먼발치에서 봤던 그의 모습은 당당했고,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처럼 꼿꼿했으니까.
그래서 루크가 자신과 결혼을 할 거라고 말했을 때도 살짝 기대한 건 사실이
었다. 하지만 지금 브래든의 모습을 보며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을 했
는지 알 것 같았다. 애셔는 밀려오는 죄책감에 눈을 느릿하게 내리깔고는 조
용히 읊조렸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겨우 한 말이 미안하다는 말이라고?”
“…….”
“최소한 내게 미안했다면 대공 전하 주변에는 얼씬거리지 말았어야지. 내가
그날 얼마나 자존심이 상하고 화가 났는지 알아?! 네가 모든 걸 망쳐 버렸다
고! 알아?”
브래든은 루크에게 거절당했던 그 날의 일이 생각났는지 얼굴을 일그러트렸
다. 더는 감정을 참지 않겠다는 듯이 그는 고깝지 않은 얼굴로 그를 노려봤
다. 그러다 곧, 비아냥을 담은 얼굴로 입술을 삐뚜름히 휘며 삐딱하게 말했다.
“나도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어. 하지만 우리 모두 제자리를 찾아야지.
나는 이곳에서, 너는 아리아가 있는 곳에서.”
“설마…….”
불길한 마음에 애셔가 서둘러 몸을 물렸지만, 뒤에 있던 기사는 애셔를 포박
하듯 그를 끌어와 움켜잡았다. 브래든은 기다렸다는 듯이 애셔에게 다가가 안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단검 하나를 꺼내 들었다.
“이러지…… 말아요. 제발……!”
“내가 너한테 말하지 않은 비밀이 있는데, 들어 볼래?”
긴박한 순간인 만큼 애셔는 최대한 발버둥 쳤지만 그는 섬뜩한 미소를 짓고는
애셔의 귓가에 속삭였다.
“사실 이 단검 말이야, 내가 아리아를 죽였을 때 썼던 검이야.”
“……네?”
“어차피 죽을 날도 얼마 남지 않았고, 끝까지 너만 위하는데 그게 어찌나 보
기 싫었는지. 그래서 내가 빨리 보내 드렸어. 그녀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했던
드레스를 입혀서.”
원작에도 나오지 않았던 충격적인 결말에 애셔의 눈동자가 크게 떠졌다. 아무
리 그래도 그렇지, 자신을 키워 줬던 아리아를 제 손으로 죽인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애셔는 뜻하지 않은 브래든의 고백에 창백한 얼굴로 휘청였다.
“그러니까 너무 원망은 하지 마. 네 엄마잖아. 너를 그토록 그리워하다가 돌
아가셨는데, 네가 하루 일찍 가서 곁을 지켜 드려야지.”
“어떻게 당신이……, 아리아를……!”
“이렇게 놀란 모습을 보니 아리아가 남긴 편지를 보지 않았나 보네. 사실 그
편지, 내가 쓴 건데.”
그때는 아리아의 죽음이 제 탓인 것 같아서, 애셔의 몸으로 임신까지 해서 도
망만 다니는 모습이 한심하고 면목이 없어 보지 않았던 것뿐이었다. 그랬던
것뿐인데, 브래든은 그 편지에 그날의 진실을 모두 적어 놨다고 했다.
그러니 자신 역시 돌아오게 된다면, 아리아와 함께 똑같은 길을 걷게 될 거라
고…….
차마 담을 수 없는 말에 애셔의 눈가에 눈물이 핑 돌았다.
“왜 그랬어요? 왜! 그런 짓을 했냐고요!”
“몇 번을 말해. 너만 찾는 아리아가 싫었다고!”
“정말 그렇게밖에 생각 못 해요? 왜, 아리아가 당신과 저를 아네스트가에 바
꿔 놓고 나왔는지, 다이올은 왜! 아리아를 통해 당신을 밖으로 빼냈는지! 정
말 단 한 번도 생각 안 해 본 거냐고요!”
“당연한 거 아니야? 그녀의 욕망. 오로지 자신의 아이가 좋은 곳에서 대접받
으며 잘 먹고 잘 자랐으면 했던 어미의 마음이겠지.”
애셔는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다는 듯이 말을 자르는 브래든을 보며 실망감이
밀려왔다. 적어도 그가 아네스트가에 갔다면 공작의 실체를 알았을 거라 생각
했는데, 표정을 보니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하긴……. 당신은 우성이니까. 그러니까 공작이 아무런 짓도 하지 않았겠죠.
하지만 당신은 알아야 해요. 공작이 무슨 짓을 꾸미고, 어떤 성격을 지녔는지!”
“지금 내 걱정을 하는 거야? 왜? 우성이라는 이유로 이쁨을 받는 내가 질투가
나? 어딜 감히, 열성인 네가 나한테 훈계질이야!”
브래든은 화를 참지 못하고 그대로 애셔의 뺨을 내리치려 했다. 하지만 곧바
로 애셔의 뒤에 있던 기사에 의해 손이 붙잡혔고, 브래든의 얼굴이 종잇장처
럼 구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