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081*
애셔가 머문 방에서 나온 루크는 멀지 않은 곳으로 들어가 벽을 내리쳤다. 참
고 있었지만, 그간 억눌린 감정의 응어리는 쉽게 풀어지지 않았다. 루크는 자
신과의 결혼을 달갑게 받아들이지 않았던 애셔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래도 당신이 좋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겁니까.”
애셔에게 닿지 않을 말이 루크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루크는 차디찬 눈동자로
머리를 쓸어 넘기며 등을 기댔다.
“겨우 오랜만에 만났는데…….”
자신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그는 톰스만 찾았다. 그게 자신을 더 자극하게
하는지도 모르고
그는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루크는 심기가 불편하다는 듯이 목을 죄는 옷깃
을 잡아 거칠게 풀었다.
러트 기간을 억지로 참으며 독한 약을 먹으며 버텼다. 오로지 애셔를 위해서
버텼지만, 이젠 더 버틸 힘조차 없었다. 그날의 잔상이 허상인지 진짜인지 확
실치는 않지만, 자신이 애셔를 간절하게 원한다는 것쯤은 알았다.
사랑을 제대로 받아 본 적 없기에 어떻게 사랑을 줘야 하는지 모르는 자신이,
맹목적인 목적 하나로 그에게 사랑을 갈구했다. 자신 역시 지금처럼 계속해서
애정을 줄 생각이었고, 그리하면 그를 가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아무리 해도 자신을 보지 않았고, 전처럼 웃어 주지 않았다. 루크는 욱
신거리는 가슴을 쥐어짜듯 움켜잡으며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제길.”
원망은 자꾸만 애증으로 피어나 자신의 욕망을 감쌌다. 더는 절제하지 말고
그를 쟁취하라는 듯이, 알파의 소유욕이 제 안에서 불꽃을 피워 심장을 뜨겁
게 했다. 이러다 정말 질투와 감정에 눈이 멀어 괴물이 될 것 같아서 루크는
속으로나마 갈급하게 외쳤다.
제발, 자신을 사랑해 달라고. 전처럼 자신을 향해 웃어 주며 행복한 표정을
지어 달라고. 애셔의 앞에서 유지했던 이성이 흐트러지며 루크를 괴롭혔다.
루크는 폭주할 것 같은 감정을 억누르며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그러니 꼭, 결혼할 겁니다.”
결혼만 한다면 모든 것이 끝난다는 듯이 루크는 엉망이 된 제복을 정돈하며
별장을 빠져나갔다. 햇볕이 따뜻하게 들어오는 생기 있는 봄이었지만, 루크에
게는 겨울이나 다름없는 시린 날이었다.
*
애셔가 루크의 별장에 머물고 있다는 소문은 브래든의 귓가에도 들어갔다. 브
래든의 호위인 디오스는 암암리에서 정보를 파는 상인을 통해 애셔의 이야기
를 듣게 되었고, 그 소식을 브래든에게 전달했다. 디오스가 전해 준 소식을
들은 브래든은 화를 감추지 못했다.
“떠나겠다고 그렇게 호언장담하더니, 다시 돌아왔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너무 열받잖아?”
브래든은 애셔와 마지막으로 대화했던 날을 떠올렸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생각을 정리한 줄 알았더니, 그는 여전히 루크에게 미련이 남은 듯했다.
“미련이 남았다면, 그 미련을 끊어 내게 만들어야지.”
“하지만 그곳의 경비가 삼엄해서 섣불리 들어갈 수 없다고 합니다. 무엇보다
그곳에 있는 이들은 전부 대공 전하의 직속 기사들인지라, 쉽지 않은 길이고요.”
“내가 언제 들어간다고 했어?”
“네……? 그러시면 어떻게 하시려는 건지 여쭈어 봐도 될까요?”
디오스가 몹시 궁금하다는 얼굴로 브래든을 응시했다. 브래든은 이미 머릿속
에 꾀를 다 생각한 사람처럼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애셔, 그자가 이곳에서 무엇을 많이 아껴 했는지 알아?”
“그것은……. 딱히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틀렸어. 들려오는 정보에 의하면 그는 자신이 데리고 있는 사람을 많이 아꼈
다고 했어. 나는 그걸 이용할 셈이야. 그가 아끼는 자를 이용해 그를 밖으로
유인할 생각이거든.”
“만약 실패라도 하게 된다면 위험해지십니다.”
“그건 내가 아네스트가의 사람이 아니었을 때나 가능한 말이겠지. 지금은 내
곁에 아버지가 있는데, 무슨 걱정이 있겠어. 안 그래?”
우성의 유전자를 가진 가진 자신에게 권위적으로 대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네스트가라는 가문이 자신을 받쳐 주고 있는 이상 자신이 할 수 없는 일들
은 없었다. 브래든은 마지막까지 애셔를 걱정하다가 떠난 아리아를 떠올렸다.
만약 그녀가 애셔만 떠올리며 떠나지 않았더라면, 루크가 자신을 거절하고 애
셔를 바라보지 않았더라면, 저 역시 이렇게까지 악독하게 마음먹지는 않았을
것이다. 분수도 모르고 제 자리에 앉아 공작가의 이미지를 실추시킨 것도 모
자라,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는 그를 자신이 벌을 내려도 된다 생각했다.
“그럼 그자를 어떻게 찾으실 생각이십니까?”
“톰스라는 호위가 있다지? 듣기로는 샤키 형도 그렇게 찾아다닌다고 하던데.”
“…….”
“그런데 항구에서 소문이 자자해. 망나니를 호위했던 기사가 블레이크 기사에
게 잡혔다고. 다들 쉬쉬하는 상황이지만 누군지 감이 오지 않아?”
애셔를 끔찍하게도 아끼는 루크가 톰스를 데려갔다면 분명 해를 가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그 별장 안에 톰스도 함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디오스는
브래든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이 되물었다.
“이미 들어간 자인데 어떻게 빼돌릴 수 있을까요?”
“톰스를 내보려고 하겠지. 반역자인 신분으로 톰스를 데리고 있기에는 위험도
가 클 테니까. 물론 호위가 주인을 버리고 떠나는 일은 절대 없겠지만, 아마
그런 일이 일어날 거야. 내가 본 그자라면 분명 그러고도 남을 것 같거든.”
“…….”
“그러니 너는 별장 근처에서 걸리지 않게 잠복하고 있어. 그리고 그가 나오면
그대로 납치해서 데려와.”
톰스를 납치하라는 말에 디오스의 얼굴이 사색으로 물들었다. 톰스 라이언.
그자는 공작가에 있을 때도 꽤 유능한 사람이었다. 검술도 두뇌도 충직함도
모든 것을 다 갖춘 이였고, 섣불리 쉽게 대적할 수 있을 만큼 쉬운 상대가 아
니었다. 브래든은 망설이는 디오스를 보며 혀를 짧게 차고는 쪽지 하나를 내
밀었다.
“발칸 3번지 골목으로 들어가면 너를 도와줄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을 거야.
이 바닥에서 알아주는 질 나쁜 상단이다 보니 문제없이 잘 처리할 수 있을 거
야. 그러니 함께 움직이도록 해.”
“…….”
“정신 차리고, 일 처리는 똑바로 하자, 디오스.”
브래든은 마시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으며 싱긋 웃었다. 톰스를 잡게 되면 그
를 이용해서 애셔를 꾀어낼 생각이었다. 소문이라는 건 참 무서운 것이었으니
까. 브래든은 톰스를 납치해서 입막음하고 다른 이의 시체를 가져와 톰스의
시체로 위장할 생각이었다. 그 소식은 반드시 애셔의 귓가에 들어갈 것이고
톰스의 장례식을 공작가에서 치르겠다는 소문을 내 그를 끌어낼 계획이었다.
애셔가 나타날 수밖에 없는 극한 상황을 만들 것이고, 그 틈을 타서 고용한
인재들을 이용해 그를 납치할 생각이었다. 제 인생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은
애셔 그자를. 브래든은 흉흉해진 눈빛으로 푸른 눈동자를 일렁이며 삐딱하게
웃었다.
“그러니까 반드시 성공해야 해. 네가 톰스를 잡아 조용히 일만 처리한다면 나
는 네게 내 곁을 지킬 수 있는 영광을 줄 거야.”
거의 확정이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디오스는 기합이 잔뜩 들어간 얼굴로 크게
답을 하고는 충신다운 면모를 보였다.
“그럼 어서 나가 봐. 어서 일을 진행해야지 않겠어?”
“알겠습니다.”
브래든의 말에 디오스가 방을 빠져나갔다. 브래든은 기다렸다는 듯이 밖에 대
기하고 있던 기사 한 명을 불렀고, 그 기사에게 섬뜩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너는 저자의 뒤를 잘 지켰다가 임무가 수행되는 즉시 사살해야 할 것이야.
내 말 무슨 말인지 알겠지?”
“네.”
“이번 일만 성공하게 된다면 내 옆자리는 저자가 아닌 네가 될 테니까. 또한,
아버지에게 말씀드려서 네게 공작가의 기사 단장이라는 자리를 내어 달라 할
거야. 우리 가문에 영광스러운 일을 했는데 이 정도쯤의 보상은 충분하잖아?”
그러니 잘해 보라는 듯이 브래든이 자리에서 일어나 기사의 어깨를 가볍게 내
리쳤다.
“배신은 죽음뿐인 거 알지?”
브래든은 기사가 배신하지 못하게 본인의 가슴에 달고 있던 배지를 떼어 가슴
에 달아 주었다. 그가 배신하지 못하게, 브래든은 기사를 옭아매듯 섬찟하게
웃었다. 처음부터 제 곁을 지킬 이는 말이 많고 허세를 부리는 이가 아닌, 애
셔가 가진 인물처럼 우직하고 충직한 기사였다는 듯이 브래든은 기사에게 호
의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 어서 가서 내가 원하는 것을 가져와. 내 충성스러운 개가 되어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