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짜는 이만 퇴장합니다-76화 (76/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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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흑.”

“나는 애셔를 해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내 오메가를 찾으려고 하는 것뿐.”

루크는 화가 난 눈빛으로 주머니에서 가지고 있던 손수건을 꺼내 톰스의 입에

욱여넣었다. 조금 전과 같은 상황이 절대 있어서는 안 된다는 듯한 단호한 행

동이었다.

“네게 해를 가할 생각이 없다. 하나, 애셔의 안전을 위한다면 내게 말하는 쪽

이 좋을 것이다.”

톰스 역시 지금 상황에서 애셔를 보호해 주고 지켜 줄 사람이 대공이라는 것

쯤은 알고 있었다. 그의 눈빛만 봐도 애셔를 위협하겠다는 것이 아닌 정말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 보였으니까. 누가 봐도 쌍방인 마음이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톰스가 해 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애셔가 원치 않는 만남은 자

신이 어떻게 연결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톰스는 계속되는 루크의 추궁

에도 침묵으로 일관하며 수건만 꾹 깨물었다.

*

톰스가 잡혀간 것을 끝까지 지켜본 애셔는 가지고 있는 금화 두 개로 근처에

있는 숙소를 잡았다. 기사들의 행색을 보니 블레이크 대공가의 사람인 것 같

았다. 적어도 톰스에게 해를 가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 애셔는 숙소 침대

에 걸터앉았다.

“……하아.”

조금씩 지쳐 갔다. 장시간 이어지는 도망에 애셔는 지친 듯 긴 숨을 내쉬고는

몸을 웅크렸다. 정신이 없어서 몰랐는데 배에서 느껴지는 고통의 주기가 빠른

간격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혹여라도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기는 건 아닐까

애셔는 덜컥 겁이 났다.

“……아까부터 왜 이렇게 아프지.”

숙면을 제대로 취하지 못한 채로 몸을 혹사해서 그런 것 같았다. 계속해서 이

어지는 고통에 애셔는 이불을 끌어당기며 배를 감쌌다.

“버텨 줘야 해……. 제발…….”

아이를 지키기 위해 많은 이들이 희생했다. 어떡해서든 버텨야 하는 걸 알면

서도 자신이 갈 수 있는 곳은 없었다. 애셔는 이마 위로 젖은 식은땀을 닦아

내고는 서러움을 토해 냈다.

“……흐흑.”

톰스까지 사라진 시점에서 애셔는 두려움이 밀려왔다. 자신이 이곳에서 버틸

수 있을까 하는 막연함에 애셔는 공허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다가 손등 위에

있는 살을 비틀었다.

“제발……, 정신 차려. 네가 무슨 자격으로 잠을 자.”

잠을 어떡해서든 참아 봤지만, 배를 비트는 듯한 고통에 입술을 으득 깨물었

다. 애셔는 아득해지는 정신 속에서 톰스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항구에서 멀

지 않는 곳에 자신의 주치의가 있다는 말이었다. 그의 말대로 가까운 거리에

애셔는 식은땀을 닦아 내며 짐 가방을 챙겨 들었다가 허기짐에 가방 안을 들

추었다.

“배가 고프니?”

먹은 거라곤 출발하기 전 먹었던 감자가 전부였다. 배가 고플 법한 상황에 애

셔는 가방 안에서 감자 하나를 꺼내 들고는 허겁지겁 비워 냈다. 아이를 위해

서라면 이 정도쯤은 감수하겠다는 듯이 식사를 간단히 마치고는 밖으로 나가

려 했다. 애셔는 분주한 소리에 창가가 있는 곳으로 다가가 커튼 뒤에 숨어

밖을 내다보았다.

“……결국 알아 버렸구나.”

눈치가 빠른 루크라면 톰스에게 묻어 있는 아이의 페로몬을 맡고서 그가 자신

과 함께 있었다는 사실을 유추해 냈을 것이다. 창밖에 보이는 삼엄한 기사들

의 수만 봐도 그가 자신을 찾기 위해 얼마나 혈안이 되어 있는지 알 수 있었

다. 이대로 밖에 나가는 것보다 사람들의 기척이 적은 새벽에 움직이는 쪽이

안전할 것 같았다.

애셔는 숙소 안이 보이지 않게 커튼을 치고는 침대 위에 있는 얇은 이불을 뜯

어 발목을 침대 난간에 묶었다. 그것도 부족해서 한쪽 손목까지 묶으며 침대

난간에 기댔다.

“이렇게 하면 나가지 못하겠지.”

혹시라도 자신이 깜박 잠이 든다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몰랐다. 이렇게까지 해

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 서러웠지만, 그제야 안심이 되는 건지 애셔는 배를 조

심스럽게 문질렀다.

“제발 건강하게만 태어나 주라. 그래 준다면 내가 정말 잘할게…….”

아직은 부모가 된다는 현실이 낯설었지만, 제 안에서 미약한 페로몬을 품어

내며 온기를 내는 태아를 보며 애셔는 미미하게 미소를 띠었다.

*

제국에 도착한 샤키는 예정대로 블레이크 대공가를 찾았다. 기별도 없이 찾아

간 방문이었지만, 루크는 샤키가 올 거라는 걸 알았던 사람처럼 안에 들였다.

샤키는 아리안에게 잠시 기다리라 명하고는 시종이 안내하는 접견실로 향했다.

화려한 금박으로 장식이 되어 있는 접견실 내부는 눈이 아플 만큼 반짝였다.

고가의 그림들과 대공가를 상징하는 독수리 동상까지, 우성 알파에 황실의 피

를 이어받은 대공가라서 그런지 보고만 있어도 기가 눌리는 기분이었다.

“역시 황실은 황실인가…….”

샤키는 피식, 웃으며 붉은 가죽으로 만든 소파에 앉았다. 잘 관리가 된 소파

는 앉기 부담스러울 만큼 손잡이가 황금색으로 번쩍했고, 앞에 놓인 테이블마

저 조명에 반사되어 눈을 찔렀다. 샤키는 눈을 살짝 찌푸렸다가 누군가 들어

오는 소리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락도 없이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루크는 뒤따라오는 시종에게 다과를 내오라 이르고는 샤키가 있는 맞은편에

앉았다. 본인에게 익숙한 장소라 그런지 앉는 모습조차 품위 있어 보였다. 어

딘가 절제된 것 같으면서도 반듯한 외모. 속을 읽을 수 없는 표정까지, 모두

하나같이 그에게서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가 흐르고 있었다.

“이렇게 찾아온 건 할 말이 있어서입니다. 본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불독 왕국

서쪽 탑에 다녀왔습니다.”

“그렇군요.”

“항구 주변으로 수색하는 기사들의 경비가 강화되었던데, 그 근처에 애셔가

있습니까?”

“제가 당신에게 말해 줘야 하는 이유는?”

여전히 무미건조한 루크의 입에서 단조로운 말이 흘러나왔다. 아무런 감정도

섞이지 않은 그런 목소리에 샤키는 말을 한번 끊었다가 다시 대화를 이어 갔다.

“전하께서 아시다시피 애셔는 저희 가문과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가족입니

다. 현재 도망자 신분으로 돌아다니고 있고요. 평생 동생이라 생각하며 아껴

주고 곁에 있어 줬는데, 어느 순간 사라졌습니다. 단 한마디의 말도 없이.”

“그렇습니까?”

“전하께서는 가문에 의한 만남이었겠지만 제게는 평생 가족이자 동생입니다.

그를 찾으면 제가 보호자로 데리고 있을 생각이고요.”

“보호자라……. 그런 건 이제 하지 않아도 됩니다. 앞으로 그의 보호자는 아네

스트가가 아닌 블레이크 가문이 될 터이니.”

이쯤하고 물러나라는 루크의 말에 샤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작위며 형질이

며 황실의 피까지, 모든 것을 다 가져 놓고서 애셔까지 욕심내는 그가 싫었

다. 제게는 남은 것이 하나 없는데, 그마저도 가져가는 그가 싫어서 샤키는

마지막 패를 꺼내 들었다.

“황녀 전하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전하께서도 원하시는 일이라는 것도 들었

습니다. 그래서 제가 조건을 하나 넣을까 합니다.”

“조건이라, 우선 들어 보도록 하죠.”

“제 조건은 애셔를 찾는 즉시 제게 넘겨주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밀어내고 제

가 작위에 앉게 된다면 애셔는 아네스트가에서 데리고 있을 예정이고요.”

샤키의 말에 표정 변화가 없던 루크의 얼굴 위로 작은 조소가 띠었다. 그는

꼬았던 다리를 살짝 풀어 자세를 고쳐 앉고는 날카로운 눈으로 샤키를 응시했다.

“브래든과 애셔를 아네스트가에 같이 데리고 있겠다는 건 당신의 욕심으로 들

리는군요.”

“욕심이라니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저희 가문에서 크다시피 한 동생을 다시

데려가겠다는데 그게 어찌 욕심이 됩니까?”

“동생……, 동생이라…….”

루크는 동생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조용히 읊조리고는 손에 깍지

를 낀 채로 헛웃음을 지었다.

“동생치고는 애정이 담긴 눈동자로군요. 가족의 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깊은

데, 과연 그 눈이 동생을 바라보는 형의 눈빛일지 의문스럽군요.”

“…….”

“또한, 제게 딜을 하는 방법이 틀렸습니다. 당신은 이미 록시나 황녀와 내기

를 하였고, 그 내기에서 졌습니다. 그런 당신이 내게 도움을 청하는 방법은…….”

“…….”

“지금 당장 애셔를 제 앞으로 데려오는 일. 그것이 내가 당신의 집안에 베풀

수 있는 유일한 선처입니다.”

루크의 입술에는 유려한 미소가 지어졌다. 그 미소가 가식적인 미소라는 걸

알면서도 샤키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조곤조곤 말을 하는 루크의 말은

하나도 틀린 것이 없었으니까. 억울한 듯 주먹을 움켜쥐고는 입술을 삐뚜름히

휘었다.

“제가 황녀 전하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쩌려고 그러는 건지 모르겠네

요. 전하께서도 제가 꼭 필요한 것이 아니었습니까?”

“저에게 꼭 필요한지 아닌지는 당신이 알 거 없습니다. 다만, 당신이 공작을

따라 알파 군단에 같이 합류했다는 사실은 압니다. 그러니 잘 생각하셔야 할

것입니다. 애셔를 영원히 보지 못할지, 아니면 형으로서 가끔 만나 볼 수 있

을지. 그건 당신이 잘 판단하실 거라 생각합니다.”

할 말이 끝났으면 이만 나가 보라는 루크의 말에 샤키의 입술이 곧게 다물렸

다. 자신이 무엇을 하든 눈앞에 있는 이는 자신을 쥐구멍에 몰아서라도 록시

나 황녀와 손을 잡게 할 것이다. 분했지만 지금은 작전상 잠시 후퇴를 하며

샤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전하께 신의 기호가 닿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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