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076*
급히 만나자고 한 황녀로 인해 샤키는 불독 왕국으로 가는 일정을 잠시 미뤘
다. 예상보다 늦어진 일정에 서둘러 상단에서 운행하는 배를 띄우고는 불독
왕국으로 향했다. 배를 타고 이동해야 하는 지형상 장시간이 소요되는 거리였
다. 샤키는 마법이 가미되어 있는 운송 수단을 이용해 빠르게 불독 왕국에 도
착했다.
“도련님.”
주위를 살피러 갔던 아리안이 어두운 표정으로 돌아왔다. 샤키는 뭔가 잘못되
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손에 책을 꽉 쥔 채로 아리안을 응시했다.
“무슨 일인데?”
“……행인들의 말을 따르면 이미 이곳에 대공 전하께서 다녀가셨다고 합니다.”
“…….”
“마을까지 전부 다 수색한 것을 보아 조사를 모두 마치신 것 같은데 어떻게
할까요?”
“하…….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샤키는 루크가 먼저 다녀갔다는 말에 허망함을 감추지 못했다. 자신이 제일
먼저 도착했을 거라 생각했는데, 황녀와 만나는 사이 그가 먼저 출발한 듯 보
였다.
“대공 전하가 어째서 이곳을 알고 있는 거지? 톰스의 뒤를 밟은 자가 우리 말
고 또 있었다는 거야?”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자의 뒤를 쫓았던 사람은 저희 말고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대공이 알고 도착한 거지? 왜, 내가 두 번째라는 건데?”
샤키는 울분을 토해 내듯 소리를 높였다. 겨우 어렵게 알아내서 이곳까지 왔
는데 이번에도 그가 먼저 선수를 쳤다. 약혼도, 공작가의 작위도. 모두 하나
같이 제게는 두 번째였다.
“그래도 내가 첫 번째이길 바랐는데…….”
모든 계획이 엉망으로 된 것 같아서 화가 치밀었다. 결국 샤키는 들고 있던
책을 바닥으로 던져 버리고는 아리안에게 명했다.
“제국으로 돌아갈 것이다.”
“주변을 더 수색하지 않으십니까?”
“대공이 먼저 왔다 갔다면 이미 이곳에는 없다는 소리겠지. 더 찾아봐야 소용
없을 것이다.”
샤키는 모래에 파묻힌 책을 노려보듯 내려다봤다. 구하기 힘든 고대 마법 책
이다 보니 애셔가 이 책을 보면 제일 먼저 기뻐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선
물 받을 대상자는 이미 이곳에 없었고, 대공이 그를 데려갔는지 아니면 찾지
못하고 돌아갔는지 아무것도 모른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그가 자신보다
애셔를 먼저 찾을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도대체 나는 무엇을 한 거냐…….”
오로지 애셔 하나만을 만나기 위해서 이곳까지 달려왔었다. 무엇보다 자신이
상단의 배를 이용하여 애셔를 찾으러 불독 왕국까지 갔다는 걸 아버지가 알게
된다면 감금은 물론, 폭력까지 휘두를지도 모른다. 더는 자신에게 아량을 베
풀지 않을 테니까.
“그나마 다행인 건가. 그래도 네가 당하지 않아서…….”
애셔가 아버지로부터 폭력을 당하고 있었다는 건 그때 이후로 알게 되었다.
그때를 다시 떠올리면 여전히 화가 치밀고 지옥을 갔다 온 것처럼 끔찍했지
만, 이제는 그 고통 속에서 벗어난 애셔를 떠올리며 샤키는 씁쓸한 표정을 지
었다.
“제국에 도착하면 블레이크 대공가로 향할 것이다.”
“장시간 집을 비우셨습니다. 공작 저하께서 걱정하실 것입니다.”
“그렇다고 혼날 게 없어지는 건 아니겠지. 최소한 반항 정도는 해 봐도 되지
않겠어?”
샤키는 록시나 황녀와 만났던 날을 떠올렸다. 록시나는 아직 끝나지 않은 내
기에 마지막 승부를 내자고 자신을 불렀다 했었다. 하지만 샤키는 그 속에 꿍
꿍이가 있다는 것쯤은 알았고, 무승부로 끝났던 그 내기를 이어서 단판을 지
었었다.
결과는 패. 결국 승리의 깃발은 록시나가 가져갔다. 샤키는 그녀에게 원하는
것을 말하라 했고 그녀는 제게 공작 작위를 내어 줄 테니 아네스트 공작을 밀
어내는 데에 협조해 달라 했다.
-저를 어찌 보고 그러십니까?
-황실이 아닌, 제국을 위해서예요. 당신도 알잖아요. 공작이 무슨 일을 벌이
고 있는지. 또, 그 일이 제국에 어떤 화를 끼칠지도.
-저는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저희 내기 조건은 그 어떤 소원도 들어주는 것이었습니다. 체스에서는 당신
이 이겼고, 검술에서는 제가 이겼습니다. 그리고 이번 내기에도 제가 이겼고
요. 자고로 검을 만지는 자라면, 한 입으로 두말은 하지 않겠지요.
록시나는 생글 웃는 얼굴로 샤키를 압박해 왔다. 우성 알파의 기운은 평범한
알파가 이겨 내기에는 버거운 힘이었다. 결국 결과에 굴복하고 만 샤키는 잠
시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하고는 바로 이곳으로 향했다.
“제길. 도대체 나보고 어쩌라고.”
거친 욕설과 함께 샤키가 배 위에 올라탔다. 아무리 미워해도 제게는 하나뿐
인 아버지였고 아네스트가의 든든한 기둥이었다. 그가 악행을 저지르고 있다
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자신도 역시 아버지의 야망에 동참했다. 오로
지 애셔를 위해, 그를 지켜 주기 위해서 모든 것을 다 걸었었다.
“그랬는데 도대체 너는 어디에 있는 거냐. 내가 너를 위해 무슨 짓까지 했는데.”
샤키는 제 손으로 아버지를 배신해야 한다는 생각에 죄책감이 밀려왔다. 적어
도 애셔만 있다면 괜찮을 것 같은데, 샤키는 괴로운 듯 눈을 질끈 감으며 그
대로 주저앉았다.
*
애셔를 찾지 못했다는 말에 실망한 것도 잠시, 루크는 애셔의 호위 기사인 톰
스를 잡았다는 말을 들었다. 그렇게 찾아도 보이지 않았던 톰스의 존재에 루
크는 서둘러 그가 잡혀 있는 곳으로 가 문을 벌컥 열었다.
“오셨습니까?”
톰스를 데리고 있는 기사가 뿌듯한 표정으로 루크에게 인사를 건넸다. 포상을
바라는 듯한 흡족한 표정이었다. 루크는 단조로운 시선으로 기사를 한번 응시
하고는 손에 묶인 밧줄을 풀라 일렀다.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아직 네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루크는 날카롭게 날을 세우는 톰스를 보며 천천히 다가갔다. 거무스름하게 내
려앉은 눈 밑과 함께 피폐해진 얼굴은 며칠 동안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모습
이었다. 행색이 딱 도망자 신분이었다.
“네가 어째서 그 배에 타고 있었던 것이지?”
“불독 왕국으로 도망칠까 싶어 숨어들었는데, 마침 기사가 나와서 숨어 있던
찰나였습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도망자 신세입니다. 도련님을 호위하지 못한
죄로 추격을 당하고 있었으니까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말을 하는 톰스를 보며 루크의 입술이 삐뚜름히 휘어
졌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모를 그런 작은 변화였다. 루크는 할 말이 많은 표
정으로 안에 있는 기사들을 밖으로 전부 내보낸 뒤, 톰스의 어깨를 가볍게 그
러쥐었다.
“네가 애셔의 충신이라는 것쯤은 안다. 그러니 다시 한번 묻도록 하지. 애셔
는 어디에 있지?”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혹시 배 안을 수색했던 게 도련님을 찾기 위해서였
습니까? 그럴 줄 알았더라면, 저도 함께 찾아봤어야 했는데…….”
톰스는 처음 듣는 이야기인 것처럼 눈꺼풀을 떨며 불안한 사람처럼 행동했다.
지금이라도 도련님을 만나야 한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루크는 톰스의 어
깨에 살짝 힘을 가하며 나긋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나는 거짓말을 좋아하지 않지.”
“진짜로 모릅니다. 제가 알고 있다면, 왜 대공 전하께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그야…… 애셔에게서 다른 사람이 생겼으니까.”
“……네?”
“그러니 지금부터 제대로 답을 해야 할 것이다. 애셔는 어디로 갔지?”
베타임에도 불구하고 톰스는 루크의 눈빛에 압도당하는 것 같았다. 마치, 모
든 것을 다 알고 있는 듯한 모습에 톰스가 끝까지 부정하려 했지만, 그는 얼
굴을 가까이 붙이고서는 숨을 흠뻑 마셨다.
“이렇게 페로몬을 묻히고서 내게 거짓말을 하려는 건, 죽고 싶어서인가. 아니
면 정말 애셔를 보호하고 싶어서인가.”
“…….”
“애셔를 보호하고 싶다면 솔직해지는 것이 좋을 것이다. 애셔는 지금 어디에
있는 거지? 누구와 함께 있길래, 너에게까지 놈의 페로몬 향이 묻어 있냐는
말이다.”
조곤조곤하게 말을 하고 있었지만, 그에게서 묻어나는 살기에 톰스는 몸에 한
기를 느꼈다. 아무래도 그는 애셔에게 묻어나는 페로몬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옮겨진 페로몬이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톰스는 칸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혹여라도 애셔에게 무슨 문제가 생긴다면 캘럽을 이용하세요. 애셔의 아이
아빠는 캘럽인 겁니다.
-왜, 캘럽입니까?
-그들은 분명 배 속에 있는 아이의 아빠가 누군지 궁금해 할 것입니다. 하지
만 캘럽은 베타인 우리와 다릅니다. 그러니 캘럽에게 모든 것을 넘기도록 하세요.
-괜찮을까요?
-괜찮을 겁니다. 아이의 아빠가 대공의 아이만 아니라면 그들 역시, 일을 크
게 키우고 싶어 하지 않을 테니까요.
하지만 칸의 말은 틀렸다. 대공은 배 속에 있는 아이의 아빠가 다른 이라 해
도 자신의 아이라고 키울 사람이었다. 절대적으로 자신의 것을 빼앗기지 않겠
다는 눈빛. 이건 애셔를 반드시 찾아내서 제 것으로 만들겠다는 집착의 눈빛
이었다. 톰스는 생각이 많은 눈으로 루크를 응시했다가 시선을 피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이미 페로몬까지 들켜 버린 이상 그는 자신을 놓아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제 주인은 그에게 잡히고 싶어 하지 않았다. 톰스는 애셔에게 피해가
갈 바에는 자결하겠다는 듯이 혀를 깨물려 했지만, 루크가 그대로 턱을 움켜
쥐며 읊조렸다.
“누구 마음대로 죽으려는 것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