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074*
어둠이 스민 저녁, 애셔는 숲길이 우거진 곳으로 들어갔다. 이곳을 지나면 불
독 왕국의 수도라고 불리는 피아르 마을이 나온다 들었다. 칸이 도와준 덕분
에 하루 정도 꼬박 달려야 지날 수 있는 거리를 순식간에 도착해 다행이었지
만, 구슬이 멈춘 장소가 숲속이라는 점이 단점이었다. 애셔는 톰스와 함께 걷
다가 중간 지점에 앉아 쉬어 가기로 했다.
“물 좀 드시겠습니까?”
애셔는 톰스가 내민 물병을 받아 들고는 가볍게 목을 축였다. 이른 봄이라 그
런지 숲속에는 찬 기운이 감돌았고, 톰스는 서둘러 나뭇가지를 가져와 불을
지폈다.
“어깨에 잠시 걸치고 계십시오.”
톰스가 애셔의 어깨에 담요를 덮어 주며 주위를 살폈다. 간혹가다 짐승 소리
가 들리기는 했지만, 캘럽이 걸어 준 수호 덕분인지 근처에 다가와 위협을 가
한다거나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애셔는 조용히 모닥불을 피우고 있는
톰스를 보며 작은 생각에 잠겼다.
처음에는 자각하지 못해서 그런지 몽롱한 기억밖에 남아 있지 않았었다. 하지
만 지금은 꿈속의 존재가 누굴 원하는지, 또 어디로 가고 싶어 하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었다. 꿈에서 깨어나면 온통 머릿속은 루크 네이슨 블레이크. 그
자의 생각들로 가득했으니까. 애셔는 공허함에 눈을 느릿하게 깜박이고는 톰
스를 향해 말했다.
“있잖아…… 혹시라도 만약에 내가 잡힌다면, 톰스라도 도망갔으면 좋겠어.”
“도련님.”
“둘 다 잡히기에는 인생이 너무 아깝잖아. 무엇보다 톰스는 나를 호위한 죄밖
에 없는 걸? 그런 톰스가 다치거나 위험에 처하는 건 죽어도 못 보겠거든.”
아마 남은 인생을 후회하면서 살게 될지도 모른다. 반역죄라는 이유만으로 저
를 쫓고 있는 루크를 생각한다면 지금이라도 톰스를 제 곁에서 떼어 내고 싶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도망만 칠 수는 없잖아. 나한테는 칸이 준 팔찌도 있고, 캘
럽의 수호도 받았으니까 괜찮을 거야. 나는 생각보다 강하거든.”
“…….”
“그러니까 톰스…… 부탁할게. 정말 그런 상황이 온다면 그렇게 해 주라.”
애셔는 주위에 있는 이들이 다치지 않길 바랐다. 무엇보다도 루크가 명을 받
아 반역죄인 자신을 잡으러 올 정도면 공작가뿐만 아니라 황실에서조차 자신
을 찾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 과정에서 공작의 손에 잡혀
집안의 수치라며 목숨을 위협받는 일 또한 생길지도 모른다. 조금씩 지쳐 가
는 상황에서 애셔는 희미하게 웃으며 미리 챙겨 두었던 감자를 내밀었다.
“먹을래?”
“……도련님.”
“든든하게 먹어 둬야지. 계속해서 걸어야 하잖아.”
애셔는 배에서 신물이 올라왔지만 내색하지 않으며 톰스의 손에 감자를 하나
쥐여 주었다. 톰스는 애셔가 내민 감자를 물끄러미 내려 봤다가 애셔의 속도
에 맞춰 감자를 먹었다.
그렇게 어둠이 찾아온 숲에는 고요함이 찾아왔고 애셔는 무거워진 눈꺼풀에
눈을 비비적거렸다. 그러다 톰스의 눈가가 붉어진 것을 보고는 담요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좀 자 둬.”
“아닙니다.”
“그러기에는 눈이 아파 보여…….”
애셔는 반쯤 풀린 톰스의 눈을 보며 안쓰러운 눈빛을 보냈지만, 애셔 역시 잠
을 제대로 자지 못한 탓에 눈이 붉어져 있었다. 고생하는 톰스가 안타깝고 미
안해서 잠을 자지 않으려 노력한 탓이었다. 그걸 모를 리 없는 톰스가 끝까지
버티며 고개를 젓자 애셔는 졌다는 듯이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그럼 돌아가면서 잘까? 톰스가 먼저 자면, 내가 있다가 잘게.”
“아닙니다. 도련님이 먼저 주무시면 그다음 제가 자겠습니다.”
끝까지 고집을 부리는 톰스를 보며 애셔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톰스는 자
신이 자기 전까지는 절대로 눈을 붙일 생각이 없는 듯해 보였다. 완강하게 뜻
을 굽히지 않는 톰스의 모습에 애셔는 억지로 눈을 감으며 나무에 기댔다.
잔잔하게 흐르는 물소리가 났다. 발끝부터 느껴지는 시원함은 말로 다 할 수
없었고, 멀리서 그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애셔는 이 모든 것들이 환상
이라는 걸 알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어서 빨리 그의 온기를, 체취를……. 알
파의 페로몬을 가져오라고 몸에서 아우성치듯 자신을 이끌었다. 결국 본능은
잠들어 있는 이성을 억누르며 애셔를 움직이게 했다.
……십니다. ……님.
이명처럼 들려오는 말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자신을 꽉 끌어안았다. 처음 느껴
보는 체온이었지만, 자신이 원하는 체온은 아니었다. 애셔는 몸이 기억하는
알파의 페로몬을 찾아 움직이다 숨이 막힐 만큼 조여 오는 남자의 힘에 정신
이 팟, 하고 깨어나는 것을 느꼈다.
“제발……, 멈춰 주세요…… 도련님!”
옅은 울음기가 배어 있는 목소리에 애셔가 멍한 눈을 느릿하게 깜박였다. 그
러다 뒤늦게 몰려오는 한기에 애셔가 파리한 얼굴로 아래를 내려다봤다. 배
위까지 차오른 물을 보며 허망함을 감추지 못했다.
“나 또 걸어온 거야……?”
“……도련님.”
“나 왜 이러지? 자꾸만…… 미친놈처럼 정신이 나가고는 해.”
그것도 루크가 있는 곳으로 어서 가라고. 자꾸만 누군가가 자신에게 명하는
것 같았다. 이러다 정말 미쳐 버리는 게 아닐까 싶을 만큼 위험한 상황에 애
셔는 눈물이 왈칵 치솟았다.
“진짜…… 모르겠어. 너무 힘들고……, 흐흑……, 미쳐 버릴 것 같아.”
“괜찮으실 겁니다. 그러니 우선 물속에서 나가요.”
톰스는 혹여나 애셔와 태아에게 무슨 일이 생기지는 않을까, 걱정스러운 목소
리로 다독였다. 그러다 체온이 떨어지는지 바들바들 떨고 있는 애셔를 보며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애셔를 번쩍 안아 들었다.
“불편하시더라도 조금만 참아 주십시오.”
톰스는 미약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작게 읊조렸다가 젖은 셔츠 사이로 보이는
애셔의 몸을 발견했다. 음식을 도통 잘 못 먹는 것 같더니 역시나 애셔의 몸
은 앙상하게 말라 있었다. 톰스는 속이 상한 마음에 어금니를 꽉 으깨 물고는
모닥불이 타오르고 있는 곳으로 애셔를 옮겨 주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깜박 잠이 드는 바람에……,”
아무래도 톰스가 잠시 존 사이에 일어난 일인 것 같았다. 애셔는 창백해진 얼
굴로 고개를 느릿하게 젓고는 톰스를 향해 말했다.
“톰스…… 내가 이상한 거 아는데……. 나, 블레이크 제국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아.”
몸은 이미 알고 있었다. 자신이 누굴 원하고, 누굴 찾고 있는지. 이 병을 고
치기 위해서 자신은 제국으로 가 루크의 근처에 머물러야 했다. 이러다가는
더한 사고도 칠 것 같아서 애셔가 톰스를 올려다보자 그는 생각이 많은 얼굴
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미안해. 함께 가자고는 안 할게. 그러니까…….”
“위험하실 수도 있습니다.”
“……응.”
“그래도 가시겠다고 하시면 따르겠습니다. 하나, 한 가지만 도련님께 부탁드
려도 될까요?”
제게 무엇을 바라거나 부탁을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애셔는 톰스의 말에 음
영이 드리워진 눈꺼풀을 느릿하게 깜박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으로 돌아가게 되면 아무도 믿지 말아 주세요. 샤키 도련님까지도요…….”
“이유를 물어도 될까?”
“제가 저하로부터 잡혀 있었을 때 샤키 도련님의 도움을 받은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별장에 있었을 때 분명 들었습니다. 샤키 도련님께서 알파 군단과 연
관되어 있었다는 사실을요.”
“……그래?”
이제 와 그 일을 들추겠다거나 참견하겠다는 건 아니었지만 샤키가 그 일에
가담한 이유라면 그건 분명 자신과 연관되어 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을 지켜
주기 위해 꼭 작위를 물려받아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고는 했었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이 진짜 형제가 아니라는 걸 알았으니 원작의 전개처럼 자
신을 미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가족이라면 애틋할 만큼 아끼는 사람이었으
니까. 애셔는 씁쓸해진 얼굴로 눈을 내리깔고는 파리해진 입술을 억지로 끌어
올렸다.
“그럴게. 하지만 형을 너무 미워는 하지 마. 그가 그 일에 가담했다면 분명
나 때문일 거야. 처음부터 형은 작위 따위에 관심 없었으니까.”
“그래도 위험합니다. 세간에서도 새로 나타난 브래든을 옹호하고 있는 편이었
고요.”
“응. 톰스가 걱정하는 게 뭔지 알아.”
제국으로 돌아가게 되면 분명 자신은 제국의 표적이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상태에서 그 누구도 믿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싶은 것 같았다. 애셔가
유일하게 마음을 열고 다가간 사람은 다름 아닌 샤키였으니까. 혹여나 샤키에
게 갔다가 제게 무슨 일이 생길까 걱정되는 듯했다.
“그래도 조금은 성공했다. 이렇게 곁에 있어 주겠다는 톰스도 있고.”
애셔는 무거운 분위기를 거둬 내듯 옷을 움켜쥐며 바보처럼 웃어 버렸다. 그
간 학대를 받으며 공작의 야망으로 키워진 빙의 전 애셔가 불쌍해서, 행복할
거라 생각하며 아이를 바꿔 준 아리아의 운명이 안쓰러워서 애셔는 울음을 억
지로 참아 내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