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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는 이만 퇴장합니다-69화 (6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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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자는 약속에 승낙한 것은 할 말이 있어서입니다.”

“브래든 아네스트입니다.”

“…….”

“전하께서도 소개를 해 주셨는데, 저는 제 소개를 드리지 못한 것 같아서요.

불편하셨다면 죄송합니다.”

브래든이 민망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루크에게 사과를 건넸다. 평소라면 ‘괜찮

습니다.’라는 말을 형식적으로 했을 루크였다. 하지만 루크는 브래든이 제게

관심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더 쌀쌀맞은 표정으로 용건만 간

단하게 말했다.

“당신이 누구든 상관없습니다. 제가 이곳에 나온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저와 약혼을 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시러 나오신 거죠?”

“눈치가 빨라서 좋군요.”

“그럴 것 같았어요. 전하의 표정이 너무 차가우셨거든요.”

집안 대 집안으로 시작된 약혼이다 보니 조금은 제게 우호적이지 않을까 싶었

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이는 가차 없이 선을 그었으며 자신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겨울처럼 시리다 못해 싸늘한 루크의 눈빛에 브래든은 실망한

표정으로 팔을 한번 쓸었다가 움켜잡았다.

“황실 정권에 꼭 필요한 약혼이라 들었어요. 물론 약혼할 대상이 갑자기 바뀌

어서 당황스러우셨겠지만, 제가 노력할게요. 전하의 마음에 들 수 있게 뭐든

할게요. 그러니까 제게 기회를 주시면 안 되는 걸까요?”

“그럴 필요 없습니다.”

“……애셔. 그 사람 때문인가요?”

브래든의 입에서 흘러나온 애셔라는 단어에 루크의 눈썹이 슥 올라갔다. 지금

껏 표정 변화 없이 대화하던 루크였는데, 마음을 드러내듯 반응하는 눈썹에

브래든은 자존심이 상한 기분이 들었다.

“전하께선 기억하시지 못하겠지만, 애셔라는 사람보다 제가 전하를 먼저 만났

어요. 열한 살 때, 물에 빠져 죽을 뻔했는데 그때 절 구해 주신 분이 전하였

거든요.”

“그 대상이 누구든 지나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랬을 겁니다.”

“제가 특별해서가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은 거군요. 하지만 전하와 약혼할 사

람은 원래 저였습니다. 열성인 그 사람보다 우성인 제가 더 전하께 어울리는

사람이고요.”

“누가 그럽니까. 제게 어울리는 사람이 당신이라고.”

간절함이 담긴 눈빛으로 말을 하는 브래든을 보며 루크의 목소리가 한순간에

낮아졌다. 가게 안을 통째로 얼려 버릴 것 같은 스산함이었다. 저도 모르게

긴장한 브래든이 허리에 힘을 주자 루크가 가소롭다는 듯이 입매를 삐뚜름히

휘었다.

“당신 말을 들으니 한 사람이 떠오르는군요.”

“……네?”

“잘 들으십시오. 제게 어울리는 사람은 제가 정합니다. 다른 이가 아닌, 제가.”

특별한 단어가 들어가 있지 않음에도 그는 주변의 분위기를 단숨에 바꾸어 버

렸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압도하는 시선에 브래든은 떨리는 손을 움켜잡으

며 눈을 피하지 않았다.

“저의 어느 부분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건가요? 말씀해 주시면 고치겠습니다.”

“눈치도 빠르고 똑똑한 것 같은데. 굳이 두 번 말하게 하는 이유를 모르겠군

요. 그냥 아무것도 하지 마십시오.”

결론적으로 브래든이 열심히 노력한다 해서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소리

였다. 브래든은 기회조차 주지 않는 루크의 모습에 화가 치밀었다. 어떡해서

든 대공의 마음을 사로잡아 오라 했던 공작의 말을 떠올리고는 노골적으로 페

로몬을 풀었다.

“지금 뭐 하는 짓이지?”

“저는 전하가 좋습니다. 잠자리를 대신하는 것이라도 좋으니……, 크흑!”

예의 없이 공격적으로 퍼붓는 페로몬에 루크의 입에서 거친 욕설이 새어 나왔

다. 그럼에도 멈추지 않는 브래든을 보며 루크는 제 페로몬을 풀기 시작했다.

어깨를 짓누르듯 눌러 오는 루크의 페로몬은 거의 목을 움켜쥐었다고 해도 될

만큼 강력했다. 처음으로 느껴 보는 알파의 페로몬에 브래든이 목을 움켜쥐며

가쁜 숨을 흘렸다.

“……하으윽.”

“내가 봐주는 것도 여기까지다. 그러니 두 번 다시 내게 이런 혐오스러운 페

로몬을 묻힌다면, 그때는 죽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왜……! 제게는 기회조차……흑, 주지 않는 건가요?”

브래든은 억울하다는 듯이 가슴을 움켜쥐며 루크를 향해 눈시울을 붉혔지만,

루크는 페로몬을 순식간에 갈무리하고는 몸을 틀어 문가를 바라봤다.

“……바다 향?”

잘못 맡은 게 아니라면 코끝에 닿는 향은 바다 향이었다. 통째로 빌린 식당

안에 들어온 낯선 침입자. 그리고 그 향은 애셔가 헤어지자고 이별을 고했던

날 맡았던 향이었다. 그렇게 찾으려고 해도 찾지 못했던 향의 출처에 루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문가 쪽으로 다가갔다.

“너는 누구지?”

루크의 말에 망토를 쓴 남자가 흠칫 놀라며 뛰기 시작했다. 다시 봐도 작고

아담한 체구가 꿈속에서 그토록 안았던 애셔의 체격과 많이 닮아 있었다.

만약 정말 애셔라면…….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루크가 문을 열어 그가 향한

방향으로 뛰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뛰면 닿을 그 거리에서 누군가가 망토를

쓴 이에게 손을 뻗어 왔고, 그 상태로 그는 골목으로 사라졌다.

“……애셔?”

찰나였지만 마주친 시선은 그가 누군지 알 수 있게 했다. 애셔. 그토록 보고

싶었던 이의 얼굴에 루크가 골목으로 향했지만, 막혀 있는 골목에는 누가 있

었냐는 듯이 흔적조차 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미약한 바다 향만 남겨 두고서…….

“어째서 또 도망을 간단 말입니까. 도대체, 왜.”

그렇게 자신과의 약혼이 싫은 건지 흔적조차 없이 사라진 애셔의 모습에 루크

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얼마나 강하게 쥐었는지 루크의 손등 위로 붉은 핏

줄이 푸르스름하게 튀어 올랐다.

“결국 다른 이와 있는 것을 택한 것입니까? 그런 거라면 어쩔 수 없겠군요.

직접 데리러 가는 수밖에.”

루크는 애셔의 몸에서 나는 알파의 페로몬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치, 애셔

를 보호하려는 듯 미약하게 품어 내며 제 신경을 건드리고 감정을 어지럽게

했다. 루크는 영문도 모른 채 대기하고 있는 세인트를 불러 명했다.

“지금 탑으로 갈 것이다. 준비하도록 해.”

“존명.”

*

“괜찮으십니까?”

“……네.”

대답과 달리 안색이 파리한 애셔의 모습에 칸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응시했다.

페로몬을 맡으면 모든 게 해결될 거라는 생각과 달리 애셔의 이마에는 식은땀

으로 가득했고 낯빛이 창백했다. 아슬아슬해 보이는 애셔의 모습에 칸은 그를

침대로 데려가 눕히고는 이불을 덮어 주었다.

“누워 있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고마워요. 잠시 혼자 있고 싶은데…….”

“알겠습니다.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불러 주세요.”

“그럴게요.”

애셔의 답을 듣고 나서야 칸은 자리를 비켜 주었다. 그제야 애셔는 루크와 브

래든의 모습을 떠올렸다.

햇살이 포근히 들어오는 자리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처

럼 아름다웠다. 자신이 있을 자리라고는 없어 보이는 그곳에서 애셔는 두 사

람의 페로몬을 동시에 느꼈다. 알파를 유혹하기 위한 오메가의 페로몬. 그리

고 그 페로몬을 억압하는 알파의 페로몬. 그들의 향은 임신을 해서 예민해진

애셔에게도 타격으로 다가왔다.

아래가 뻐근하게 조여 오는 감각은 서 있기 버거울 만큼 힘들었다. 이러다 정

말 큰일이 날 것 같아서 도망치려 했지만, 동시에 거둬진 알파의 페로몬에 애

셔는 그가 자신의 존재를 알아챘다는 것을 느꼈다. 루크라면 분명 아이의 페

로몬을 맡았을 테니까.

그래서 애셔는 있는 힘껏 달렸다. 하지만 그의 초인적인 속도는 당해 낼 수

없었고, 거의 잡히기 직전까지 다다랐지만, 구세주처럼 칸이 나타나 자신의

팔을 잡아당겨 이동 마법을 걸어 주었다. 아마 그때 칸이 나타나지 않았더라

면 그에게 잡혔을지도 모른다.

“분명 눈이 마주쳤었어…….”

찰나였지만 그의 얼굴은 뭐라 형용할 수 없는 표정으로 가득했다. 그리고 그

사이로 스며든 집착과 광기, 원망과 그리움. 그 뒤로 따르는 애틋함은 애셔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왜, 그런 표정인 거예요…….”

자신은 진짜가 아닌 가짜인데, 그는 여전히 자신을 원하고 있었다. 제 것이

아닌데, 자꾸만 욕심내고 싶은 감정은 그간 억눌러 왔던 마음을 비죽 튀어나

오게 했다.

“잘 버텨 보려고 했는데……, 흐흑…… 당신을 보니까…… 그게 안 되네요.”

벌써 이렇게나 힘든데 앞으로 그가 없는 곳에서 아이를 키울 생각을 하니 자

신이 없었다. 애셔는 파르르 떨리는 손끝으로 아랫배를 문지르며 작게 읊조렸다.

“보고 싶어요…… 정말 많이…….”

애셔는 자꾸만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으며 같은 말만 중얼거렸다. 그렇게

입안으로 참고 또 참았던 말이었는데, 막상 입 밖으로 뱉고 나니 감정은 주체

가 되지 않았다. 결국 애셔는 한참을 울다가 감정을 추스르고는 밖에서 걱정

하고 있을 톰스를 불렀다.

“이제 이곳을 정리할까 해. 미안하지만 내가 가는 길에 함께 가 줄 수 있을까……?”

“그 말을 해 주시길 기다렸습니다. 저는 도련님이 가시는 길이라면 그곳이 불

길 속이라도 뛰어 들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톰스…….”

언제까지 탑에만 있을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톰스는 자신을 쫓는 일행이 있

었다고 말을 했고, 그렇다는 건 자신이 이곳에 있다는 걸 이미 들켰다는 소리

와 같았다. 그게 공작가라면 더더욱 위험한 상황이었다.

“설마 나를 두고 갈 생각인 건가?”

이야기를 엿듣고 있었는지 인간화 한 캘럽이 문을 벌컥 열고 나타나 대화에

끼어들었다. 하지만 그 뒤로 칸이 나타나 캘럽의 어깨를 잡고는 말했다.

“당신은 저와 함께 있어 주는 쪽이 좋겠습니다. 여기서 저와 해야 할 것이 있

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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