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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다면 그 날짜에 이동하는 것이 좋을 것 같네요.”
“마침, 말이기도 하네요.”
애셔는 루크의 러트 주기를 떠올리고는 담담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루크와 밤
을 보낸 지도 어느새 두 달이라는 시간이 지나 있었다. 곧 있으면 시작될 루
크의 러트에 공작은 어떡해서든 브래든을 임신하게 만들려고 할지도 몰랐다.
공작의 성격상 브래든에게 반드시 루크의 아이를 가져야 한다며 주입을 했을
테니까.
그렇게 된다면 브래든은 루크와 만나는 자리에서 의도적으로 페로몬을 흘릴지
도 모른다. 그때 애셔는 루크에게서 나오는 페로몬에 간접적으로 닿을 예정이
었다. 그게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닐지라도.
“계획대로 되어 주면 좋겠네요.”
애셔는 불안한 마음에 손을 꽉 움켜쥐고는 미미한 웃음을 지었다.
*
루크가 성에 도착하자마자 시종으로부터 공작이 황제를 알현했다는 말을 들었
다. 워낙 성미가 급한 사람이라 미리 선수를 칠거라 생각은 했지만, 생각보다
빠른 행동에 루크가 미간을 구겼다.
“그래서 폐하께서 나를 데려오라 하셨다?”
“네.”
마침 대공가에게 서신을 넣으러 가는 길인지, 시종은 루크를 향해 예를 갖추
며 길을 텄다. 루크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황제가 있는 집무실로 향하며 걸
음을 옮겼다.
오랜만에 오는 집무실은 숨이 막힐 만큼 답답했다. 어릴 때는 유독 이 문이
크고 무섭게 느껴졌는데 지금 루크에게는 평범한 문으로 다가왔다.
“폐하, 대공 전하께서 드셨습니다.”
시종의 말에 창가를 내려다보던 황제가 고개를 돌려 루크를 응시했다.
“들었다. 아네스트가의 집안에 아들이 하나 생겼다더군.”
“…….”
“형질도 우성에다가 너와 결혼을 하면 잘 어울리겠다고 말을 하더구나. 네 생
각은 어떠하냐.”
매처럼 날카롭고 매서운 붉은 눈동자가 루크를 향했다. 처음부터 루크의 의사
는 중요하지 않았다는 듯이 묻는 그를 보며 루크가 답했다.
“저는 이 약혼을 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예상치 못한 루크의 대답에 황제의 눈이 미세하게 커졌다가 작아졌다. 단 한
번도 뜻을 거스른 적 없는 아들이었는데, 아들의 눈가에는 깊은 야성이 잠재
워져 있었다.
“나는 네게 약혼을 하라 대공 자리를 내어 주었다. 한데, 이제 와 약혼을 하
지 않겠다?”
“뜻을 거스르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제게 조금의 시간을 주셨으면 합니다.”
황실의 안정을 위해 루크를 아네스트가에 팔 듯 넘겼지만, 그래도 제 아들이
었다. 비록 사생아라는 타이틀 때문에 위신이 떨어질까 봐 정 한번 주지 않고
차갑게 대했지만, 저와도 몹시 닮은 아들의 모습에 황제는 생각이 많은 눈으
로 그를 응시했다.
“내가 그리 한다면 너는 내게 무엇을 내어 줄 것이냐.”
“아버지께서 걱정하시는 것. 그것을 잠재워 드리겠습니다.”
“내가 걱정하는 것이라. 너를 내가 믿어도 되는 것이냐?”
“늘 그랬듯이,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네가 이렇게 변하게 된 것이 그 아이 때문이더냐.”
황제는 그간 루크의 보고를 꾸준히 듣고 있었다. 물론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공
작 때문에도 있었지만, 욕심 없는 아들이 혹여 다칠까 봐 그의 주변에 몰래
사람을 두어 살펴본 것도 있었다.
“네, 맞습니다.”
단 하나의 흔들림도 없는 올곧은 루크의 눈동자가 그를 응시했다. 그제야 황
제는 루크가 진정으로 갖고 싶은 게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처음으로 제게 목
소리를 내어 의사를 표하는 아들을 보며 황제는 쥐고 있던 지팡이를 내려놓고
는 그에게 말했다.
“오래 기다려 주지는 못한다. 딱 이주. 그 안으로 내가 원하는 것을 가져오거
라. 그렇다면 나 역시 네 약혼에 개입하지 않겠다.”
황제의 명이 떨어졌다. 루크는 그것만으로도 감사하다는 듯이 고개를 숙이고
는 황제의 집무실에서 빠져나왔다. 세인트는 기다렸다는 듯이 루크의 곁으로
다가와 황태자와 공작이 만나고 있다는 말을 전했다.
“황녀 전하께 지금 만나러 가겠다고 일러두도록 해.”
“네, 전하.”
공작이 황태자와 만났다면 이미 반쯤은 넘어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
지만 록시나가 개입이 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공작을 밀어내고 그 자리에
차기 공작을 앉힌다면 이야기가 달라질 테니까. 루크는 황태자와 공작이 만나
고 있을 집무실로 향했다.
*
“오랜만이로군. 네가 나를 다 찾아오고.”
“아버님도 뵐 겸 들렀습니다.”
특별한 일이 아니면 찾지 않는 루크의 방문이 황태자에게는 달갑게 다가왔는
지 얼굴 위로 작은 화색이 번졌다. 루크는 그런 네르퍼의 모습을 한번 응시했
다가 뒤늦게 자리에서 일어나는 공작을 보며 사무적인 표정을 지었다.
“손님이 계셨군요.”
“알고 계실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둘 다 웃는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두 사람 사이에 묘한 신경전이 오고 갔다.
하지만 황태자에 의해 중단되며 두 사람은 자리에 앉았다.
“안 그래도 전하를 만나 뵐까 했었는데 잘 되었습니다. 들으셨는지요?”
“무엇을 말입니까?”
“폐하께서 전하와 제 아들인 브래든과의 약혼을 승낙하셨습니다.”
공작의 말에 루크는 건조한 표정을 지으며 피식, 옅은 웃음을 흘렸다. 그러자
공작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지며 불쾌함을 띠었다.
“세간에 안 좋은 소문이 퍼지고 있더군요. 애셔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임시
로 데려온 오메가라고.”
“아무리 전하라고 할지라도 집안을 모독하는 말은 삼가시지요!”
“이상하지 않습니까? 애셔가 사라지고 난 자리에 진짜가 나타났다? 그것도 제
가 약혼을 파기하려는 그 시점에서 말입니다.”
루크의 말에 공작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했다. 자존심을 회복했다 생각했
는데 많이 분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저는 못 믿겠습니다. 설령, 그 아이가 진짜라고 할지라도. 약혼하기
로 예정되어 있던 이를 두고 다른 이와 약혼이라니. 공작께선 그게 쉬우신가
봅니다?”
“말이 심하오! 어찌 그리 쉽게 말한단 말입니까?”
그래도 몇십 년을 아들이라고 키워왔을 가족이었다. 실종이라는 말로 일축하
며 모든 것을 정리하는 공작의 모습에 루크는 속에서 화가 치밀었다. 오로지
그의 야망을 위해 키워졌을 애셔를 떠올리며 루크는 더 할 얘기 없다는 듯이
황태자를 응시했다.
“얼굴도 뵈었으니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루크.”
“말씀하십시오.”
“나는 누구의 편도 서지 않을 생각이다.”
황태자의 말에 공작이 당황한 듯 “전하!”라고 말을 거들었지만, 굳이 공작이
있는 앞에서 이 말을 했다는 것은 네 뜻대로 해 보라는 뜻이었다. 나쁘지 않
은 황태자의 의사에 루크는 입가에 미소를 띠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
“도련님. 찾았습니다.”
아리안이 다급한 목소리로 샤키의 집무실에 들어왔다. 샤키는 올 것이 왔다는
듯 모든 업무를 내려놓고는 아리안에게 어서 말해 보라는 눈짓을 보냈다.
“워낙 예민한 자라 기척을 지우기 힘들었지만, 불독 왕국에 있는 서쪽의 탑
그 방향으로 갔다 합니다.”
“……서쪽의 탑이라니.”
샤키는 곤란한 듯 미간을 구겼다가 이마를 부여잡았다. 불독 왕국은 제국의
볼모로 잡혀 있는 왕국이었지만, 서쪽의 탑은 신성력이 깃들어 있는 마탑이었
다. 마법과 신성력. 같이 공존할 수 없는 것들이 뒤섞인 공간은 마탑주의 권
한 없이는 쉽게 들어갈 수 없도록 보호 마법이 걸려 있었고, 그렇다고 무작정
쳐들어가기에는 쉬운 곳이 아니었다.
오로지 제국의 힘을 받지 않는 곳. 그런 곳에 애셔가 있다면 안심이었지만,
언제까지 그곳에 둘 수만은 없었다.
“준비해. 지금 바로 갈 거야.”
“그전에 도련님. 황성에서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무슨 서신?”
“황녀 전하께서 보내신 서신인데, 조용하고 은밀한 장소에서 급히 만나고 싶
다는 연락을 취해 왔습니다.”
검술 대회 이후로 교류가 많이 없었던 황녀였다. 그런데 은밀한 장소에서 따
로 만나다니? 집안에 대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런데 도련님. 탑에는 어떻게 들어가실 건가요?”
“가서 부를 생각이야.”
“……네?”
“애셔라면 나를 피할 이유가 없으니까. 내가 부르면 나와 줄 거야.”
언제나 그랬다. 그 아이가 힘들 때면 자신이 곁에 있어 주었고 아플 때면 곁
에서 간호해 줬다. 지금도 많이 힘들어 하고 있다면 애셔에게는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 필요했다.
샤키 아네스트. 바로 나를……. 그러니 애셔는 나와 줄 것이다. 나의 부름에,
언제나 한결같이 밝게 웃으며 ‘형, 왔어?’라고 반겨 주겠지.
“그러니 준비해 놔. 황녀 전하께 이틀 뒤에 만나겠다고 기별 넣고.”
“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준비하도록 해. 아주 신속하게 움직여야 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