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짜는 이만 퇴장합니다-64화 (64/95)

65

*#.065*

안개 하나 없이 갠 하늘 위로 많은 별이 떠 있었다. 애셔는 조용히 하늘을 응

시하다가, 뒤에 다가온 인기척에 뒤를 돌아봤다.

“아직은 바람이 찹니다.”

“아…….”

어느새 다가온 칸이 애셔의 어깨 위로 담요를 덮어 주었다. 애셔는 고맙다는

말과 함께 칸이 걸쳐 준 담요를 꼭 끌어당겼다.

“제국에서는 별다른 소식이 없을까요?”

“소식이라…….”

칸은 잠시 망설이듯 주춤하더니 말을 아꼈다. 뜸을 들이는 행동을 보니 제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아 보였고, 애셔는 그 어떤 이야기도 다 감내하겠

다는 듯이 그를 응시하며 말했다.

“저는 괜찮으니까 편하게 말해 주세요.”

“……사실, 아네스트가에 진짜 아들이 나타났다는 말이 돌고 있습니다.”

“그런가요?”

드디어 브래든이 나타난 걸까. 애셔는 칸의 생각했던 반응과 다르게 덤덤하게

받아들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으십니까?”

“네, 괜찮아요. 그것보다 칸이 많이 놀랐겠어요.”

“…….”

“사실 저는 알고 있었어요. 제가 공작가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거. 그래서 이

쪽으로 도망친 거고요.”

“…….”

“죄송해요. 알고 있었으면서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서.”

애셔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차마 칸의 얼굴을 볼 면목

이 없어서 잠시 그 상태로 멈춰 있자, 그가 허리를 굽혀 시선을 마주했다.

“이걸로 서로 같아졌네요?”

“……네?”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저도 당신에게 마탑주라는 사실을 숨겼잖아요. 그러

니 이걸로 비긴 거라고 생각해 두죠.”

이렇게 쉽게 넘어갈 문제가 아니었다. 제국에서 자신은 범죄자 신분으로 도망

자 신세가 되어 있을 테니, 자신을 옹호하거나 보호해 줬다가는 피해를 볼 수

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마저도 괜찮다는 듯이 싱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애

셔를 반듯하게 세웠다.

“나르타가 제게 와서 그러더군요. 당신은 외롭고 힘든 삶 속에서 유일하게 따

뜻함을 알려 준 사람이라고.”

“…….”

“가족 같은 사람이라고 말을 하는데 당신을 제가 어찌 내칠 수 있겠습니까.

나르타에게 가족이라면 탑의 수장으로서 당신을 보호해 줘야 할 의무가 있다

고 생각하거든요.”

“하지만…….”

“죄책감이나 미안함은 안 가지셔도 됩니다. 탑의 식구를 보호하는 건 마탑주

의 역할이니까요. 그것보다 고민이 있으신 것 같은데, 말씀 안 해 주실 겁니까?”

화제를 돌리려는 듯이 말을 돌리는 칸을 보며 애셔는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

“사실…… 여쭤 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그게 무엇인가요?”

“혹시 마법으로 사람의 감정을 읽는 능력을 없애는 약을 만들 수 있을까요?”

“없지는 않습니다. 다만 고위 마법이라 약을 제조하는 과정에서 실패할 확률

이 높죠.”

그동안 그렇게 약을 찾아다녔는데, 방법이 없지는 않다는 말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사람의 감정을 읽는다는 것, 그것만큼 고통스러운 게 없었다. 지금도 여전히

루크와 샤키에게 느꼈던 감정이 제 가슴을 쑤셔 파듯 욱신거리게 했으니까.

애셔는 간곡함이 담긴 눈빛으로 칸에게 말했다.

“제가 있는 재산을 다 드리겠습니다. 혹시 그 약을 만들어 줄 수 있을까요?”

“누구를 위해 사용하시려는 겁니까?”

“저를 위해서요.”

애셔는 그간 제게 보였던 칸의 호의에 비밀을 숨기지 않았다. 어쩌면 그는 정

말 자신이 믿어도 되는 사람 중 하나일 것 같았으니까. 애셔는 곧은 시선으로

칸을 응시했다.

“만약 제게 그런 능력이 있다면 저는 없애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의 감정을

읽는 능력이라면 충분히 당신을 쫓는 이들에게 이용해서 살아남을 수 있지 않

겠습니까?”

칸의 말대로 야망을 품으려면 충분히 이용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무엇보다

임신까지 한 상태에서 아이를 지키기 위해서는 그 능력이 제게 절실하게 필요

할지도 몰랐다.

“저는 이 능력을 원치 않아요. 그 능력으로 인해서 사람들의 보고 싶지 않은

감정을 느껴야 했고, 그것들이 지금은 발목을 잡아 저를 괴롭히고 있거든요.”

차라리 루크와 샤키의 감정을 몰랐더라면 그들에게 덜 미안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훗날 다시 만났을 때 거짓말을 한 자신을 보며 그들이 품을 감정을 느

끼고 싶지 않았다. 애셔는 아이에게 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약이 만들어진다

면, 주저 없이 이 능력을 지워 버리고 싶었다. 그렇게 된다면 원작의 굴레에

벗어나지 못해 그들의 손에 고통받다가 죽더라도, 그들이 생각하는 감정만큼

은 느끼지 않을 테니까.

“한번 도전은 해 보겠습니다. 이래 봬도 불독 왕국에서 꽤 유능한 마법사입니다.”

유능하다는 단어에 애셔는 톰스가 떠올랐다. 제 곁에 머물렀던 톰스도 꽤 유

능했던 호위였다. 하지만 자신이 지금까지 그곳에서 누렸던 것들은 모두 제

것이 아니었기에 애셔는 그를 데려오지 않았다. 제게 충성을 맹세했던 톰스.

애셔는 한 번씩 생각나는 톰스의 모습에 부디 아무 별 탈 없이 잘 지내고 있

기를 바랐다.

*

“진짜가 아니라 가짜였다?”

루크는 그림자가 가져온 소식을 들으며 미간을 찌푸렸다가 도도하게 자신을

바라보던 브래든의 모습을 떠올렸다. 귀족들 사이에서도 흐트러짐 하나 없이

당당하게 바라보던 남자. 제게 알은척을 하며 불쾌한 시선을 보냈던 남자. 루

크는 그런 부류의 눈빛들을 많이 봐 왔다는 듯이 종이를 구겨 버렸다.

“그런데 진짜의 형질이 우성 오메가다?”

이걸 공작이 놓칠 이유는 없었다. 오히려 위기가 기회라는 듯이 황제를 알현

해 자신과의 약혼을 추진시키려 할 것이다. 그러면 애셔는 망나니도 모자라서

사기꾼이라는 타이틀을 얻으며 평생 도망자 신세로 살아야 했다.

“그것만은 절대 안 되지. 어떻게 찾은 내 오메가인데.”

루크는 음산한 기운을 지우지 않은 채 밖에 있던 세인트를 불렀다. 동시에 방

에 있던 그림자는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고, 세인트는 루크의 앞으로 다가와

고개를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무엇이?”

“애셔 도련님의 행방을 아직 찾지 못하여 면목이 없습니다.”

세인트는 삼 주라는 시간이 되어 가도록 오리무중인 애셔의 흔적에 고개를 들

지 못했다. 루크는 그런 세인트 앞에 서류를 하나 내밀더니, 명을 내렸다.

“최근에 애셔가 만났던 인물 리스트지. 그중 외부인이 한 명 끼어 있다.”

“그게 누구입니까?”

“칸 에볼쉬. 서쪽 탑의 마탑주더군.”

“그렇다면……!”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겠지. 하나, 아직까

지는 추측만 있다. 정확한 증거가 없다면 탑을 상대로 쳐들어가는 건 불가능

한 이야기지.”

루크는 모닥불처럼 붉게 타오르는 눈동자로 건조하게 그를 응시했다. 마치,

음침한 생각을 하는 사람처럼 그는 싸늘한 눈빛으로 입꼬리를 삐뚜름히 휘었다.

“그러니 만들어라. 증거가 없다면 만들어서라도 찾으러 가야지 않겠나? 그것

도 내 오메가가 있는 곳이라면 말이야.”

“명 받들겠습니다.”

그간 그렇게 고생해도 흔적 하나 나오지 않던 정보가 손에 쥐어졌다. 세인트

는 그것만으로도 감사하다는 듯이 서둘러 루크가 내민 서류를 들고 서재를 빠

져나갔다. 루크는 기다렸다는 듯이 들어갔던 그림자들을 불러 모았다.

“나와.”

루크의 부름에 대응하듯 그림자들은 서둘러 무릎을 꿇고는 고개를 숙였다. 루

크는 근엄하고 위엄한 자세로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림자에게 명을 내렸다.

“지금까지 조사한 공작의 약점들을 전부 정리해서 가져오도록 해. 한시라도

알파 군단이 있는 소재지를 파악해서 가져와야 할 것이다. 어떡해서든 그가

반역을 준비하고 있다는 정보를 모아서 우리 쪽에서 먼저 쳐야 한다.”

“존명.”

애셔가 사라진 시점에서 자신이 공작을 봐줘야 할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황

제는 달랐다. 그는 공작의 상단을 욕심내고 있었고 저와 아네스트가의 약혼을

이른 시일 내로 강행시킬지도 모른다. 하나, 공작이 반역을 준비하고 있다면

말이 달라진다. 황제는 점점 커지는 공작가의 세력을 경계하고 있었고, 어떻

게서든 공작가가 무너지기만을 기다리고 있기도 했다.

“황태자 전하를 만날 것이다.”

귀족들의 반발을 잠재울 수 있는 사람은 지금 귀족들 신임을 얻고 있는 황태

자였다. 공작가를 멸문시키기에는 꼭 필요한 존재였고 뜻대로 그를 움직인다

면 아네스트가는 온전히 파멸된다. 애초에 애셔가 없다면 루크가 봐줄 이유가

없는 가문이었다. 루크는 가차 없다는 듯이 눈매를 매섭게 빛내고는 서재를

빠져나갔다.

“내가 당신을 위해 이렇게까지 합니다. 그러니 순순히 잡혀 제게 와 주셔야

할 겁니다.”

당신은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내 오메가니까…….

루크는 끈적하고 집요한 소유욕을 드러내며 황성으로 향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