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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는 이만 퇴장합니다-61화 (6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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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

“제게 왜 숨겼던 건가요?”

“저는 숨긴 적이 없습니다. 당신이 제게 묻지 않았을 뿐이죠.”

애셔가 확신한다는 듯이 말을 하자 칸이 어깨를 가볍게 으쓱이며 새 모이를

집어 들었다. 표정을 보아 하니 악의적인 감정은 없는 것 같았다.

“제가 당신에게 말을 하지 않았던 건, 제가 마탑주라는 사실을 알고서 불편해

할까 봐서였습니다. 이곳에 머무는 동안 당신이 편하게 지내다가 갔으면 했거

든요.”

“하지만…… 말을 해 줬더라면 더 좋았을 것 같아요.”

“그랬다면 지금처럼 저를 편하게 대해 주지는 않았겠죠.”

칸은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창문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창밖의 경

치를 살피려고 그러나 싶었는데, 그는 가져왔던 모이를 손바닥에 담아 바깥쪽

으로 손을 뻗었다.

“그런데 지금은 제가 마탑주라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이야기가 있어서 왔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요?”

애셔의 물음에 칸은 잠시 뜸을 들였다가 탑 주위로 모여드는 새들을 바라봤다.

“요즘 제국 광장에서 당신이 사라졌다는 이야기가 조금씩 흘러나오고 있습니

다. 아마 내일이면 그 소문은 더 빠르게 퍼져 모두 다 알게 되겠지요.”

“…….”

“그뿐만이 아니라, 당신을 찾는 이들이 사방에 깔렸습니다. 거의 지뢰밭이나

다름없는 상태죠.”

“……그런가요?”

애셔는 예상했다는 듯이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예견된 일이었다. 그

렇다고 더는 이곳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었기에 애셔는 결심한 듯 말을 하려

했지만, 그런 자신의 속마음을 읽었다는 듯이 칸은 쥐고 있던 모이를 바닥으

로 후드득 떨어트렸다.

“그 몸으로 탑을 떠나는 건 위험한 일입니다.”

“하지만 계속 이렇게 있다가는 탑에 있는 식구들도 위험해지고 말 거예요.”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희 탑의 보안이 그리 허술하지는 않으니

까요. 하나, 제가 걱정하는 건 다른 것입니다.”

“그게 무엇인가요……?”

손바닥에 있는 모이를 깨끗하게 털어 낸 칸이 아까보다 조금 날카로워진 눈으

로 애셔를 응시했다. 덩달아 흐르는 무거운 기류에 애셔가 마른침을 삼켰다.

“아무리 열성일지라도 임신하게 되면 주기적으로 알파의 페로몬을 받아야 합

니다.”

애셔는 그제야 수업 중에 아리아가 스치듯 말을 했던 게 기억이 났다.

-오메가가 임신하면 태아의 안정을 위해 상대의 페로몬을 주기적으로 받아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페로몬의 기운이 불안정하게 날뛰어 목숨까지 위험해지

는 상황이 오게 되거든요.

그때는 임신할 일이 없다고 생각했기에 대충 흘려들었던 말이었다. 애셔는 망

연자실한 표정을 지으며 아랫배를 꾹 감쌌다.

“하지만 저는…… 아이의 아빠를 만날 수가 없어요.”

그렇다고 배 속의 태아가 위험해지는 것 또한 원하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좋

겠냐는 듯이 애셔는 칸을 향해 의견을 구하는 눈빛을 보냈다.

“방법은 하나입니다. 달에 한 번씩 아이의 아빠가 있는 곳으로 가는 것. 페로

몬이 닿는 정도라면 멀리서 머물기만 해도 좋으니까요.”

“그건……! 너무 위험해요.”

“그렇다고 배 속의 아이까지 위험하게 둘 건 아니잖아요?”

애셔는 궁지에 몰린 사람처럼 배를 잡으며 입을 다물었다. 솔직히 지금 상황

에서 칸의 말처럼 하는 방법밖에는 없지만, 그렇다고 루크와 만나는 건 위험

한 일이었다. 자칫, 아이의 존재를 들킬 수도 있었다.

“꼭 페로몬을 맡아야 하는 걸까요? 그냥 물건을 통해 체취만 맡으면 안 되는

걸까요?”

칸은 알파나 오메가가 아닌 베타였다. 그런 그에게 이런 질문을 하는 것 자체

가 어울리지 않았지만, 애셔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다는 심정으로 응시했다.

“나쁘지는 않네요. 물건을 통해 체취를 느낀다면 페로몬만큼은 아니어도 날뛰

는 기운을 조금 잠재울 수 있겠네요.”

“그럼…….”

“하지만 그게 언제까지 그리 버틸 수가 있냐가 문제입니다. 만약 그게 일시적

이라면 아마 당신의 몸에 직접 변화가 생길 겁니다. 그때는 원하지 않아도 당

신이 아이의 아빠가 있는 곳으로 향하겠죠.”

솔직히 애셔는 이때까지도 그가 하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다. 미래를

생각하기에는 지금 가지고 있는 현실만으로도 버거웠으니까.

“왜 제게 이렇게까지 도움을 주는지 모르겠어요.”

“만약 아이를 가진 사람이 당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저는 도왔을 겁

니다. 애초에 한 생명을 가진 사람을 모른 척하는 게 저한테는 더 어려운 일

이니까요. 그러니 부담 가질 필요 없습니다.”

원래 가진 성품이 그러하다는 듯이 칸이 나긋한 웃음을 지었다. 어쩐지 그 웃

음이 포근하게 느껴져서 애셔는 괜히 눈시울이 붉어졌다. 아무래도 호르몬의

변화로 인해 생긴 감정 같았다.

“……고마워요. 나중에 꼭 갚을게요.”

*

임신하면 잠이 늘어난다는데, 애셔는 자꾸만 밀려오는 졸음에 기지개를 켰다.

요즘 들어 불안한 마음과 달리 몸과 눈꺼풀이 무거웠다. 덕분에 밤과 낮의 생

활은 거의 바뀌고 있었고, 애셔는 지는 석양빛을 바라보다가 탑의 보호를 받

는 일 층 정원으로 내려왔다.

석양이 붉게 보일 만큼 짙은 노을에 애셔가 잠시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

다봤다. 이곳에 온 지도 벌써 이 주 하고도 반이나 흐른 시점이었다. 봄이 되

면 나타나겠다고 했던 브래든은 소식이 없었고, 세간은 애셔의 실종으로 인해

떠들썩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때가 되어도 나타나지 않은 브래든의 소식에 애셔는 심장이 불안해졌다. 그러

다 근처에서 들리는 부스럭대는 소리에 생각을 멈추고는 주위를 살폈다.

“……누구세요?”

쉽게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었기에 그간 안심하며 정원을 거닐었다. 하지

만 지금 유독 한 곳에서 느껴지는 강한 시선에 애셔가 그쪽으로 고개를 틀어

시선을 마주했다.

초록색 풀숲 사이로 삐죽 튀어나온 쫑긋한 귀. 가려지지 않는 풀 사이로 드러

난 동글동글한 꼬리. 그것이 토끼라는 것을 깨닫고는 경계를 풀었다.

“뭐야, 토끼잖아…….”

애셔가 긴장을 풀듯 마른 한숨을 내쉬고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혹시나

제가 아는 사람이 아닐까 하고 걱정한 게 무색한 순간이었다. 애셔는 무해한

얼굴로 토끼를 향해 눈웃음을 지었다.

“안녕?”

애셔의 인사에 토끼가 기다렸다는 듯이 빠른 속도로 깡충 뛰어오기 시작했다.

그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애셔는 거의 괴물 같은 속도에 놀라 그대로 넘어졌

다. 넘어지면서 얼마나 강하게 내리찧었는지 엉덩이뼈가 욱신거렸다.

“아야…….”

애셔가 아프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리자, 토끼가 애셔의 가슴 위로 올라와 볼

을 꾹 눌렀다. 자세히 보니 토끼 귀 옆에 엑스자 문양이 새겨져 있는 것이 보

였다.

“캐, 캘럽?”

생각지도 못한 이의 등장에 애셔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캘럽은 기다렸다는

듯이 ‘펑.’ 소리와 함께 인간화하고는 애셔를 내려다봤다.

물결치는 듯한 하늘색 머리카락과 신비스러워 보이는 보랏빛 눈동자. 여전히

터질 것 같은 근육질 몸매는 누가 봐도 캘럽이었다. 애셔는 여전히 탄탄한 캘

럽의 몸을 감탄하듯 내려다보다가 그의 몸이 나체라는 것을 깨닫고는 화들짝

눈을 가렸다.

“왜 눈을 가리는 것인가. 내가 너를 만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인내했

는데.”

캘럽은 눈을 가린 애셔의 손을 억지로 끌어내리며 시선을 마주했다. 석양이

물러나 어두워진 주위라 그런지, 캘럽의 눈동자가 아까와 달리 흑요석처럼 검

게 느껴졌다.

“오랜만이다. 내 주인.”

주인이라는 단어에 애셔의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애초에 주인이라는 단

어는 자신이 아닌 브래든이 들어야 하는 소리였다. 무엇보다 이 시점에서 자

신에게 나타난 캘럽을 보며 애셔는 많은 생각이 들었다.

“어째서 캘럽이 여기에 있어요……?”

“나는 네가 어디에 있든 알 수 있다. 하늘과 땅에 있는 동족들이 나에게 네

소식을 전해 주곤 한다.”

여전히 캘럽의 말투는 ‘다.’로 끝나는 말이었다. 부자연스러우면서도 오만한

말투가 어쩌면 짐승미가 드러나는 캘럽과 잘 어울리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옷을 하나 입지 않고 제 위에 올라타 있는 캘럽의 모습은 탑의 사람이 보면

오해하기 딱 좋은 구도였다.

“잠깐 일어나 볼래요? 일단 옷부터……!”

“왜 그렇게 부끄러워하지?”

“그거야 당신이 옷을 벗고 있으니까 그러죠.”

“뭘 새삼 부끄러워하고 그러나. 어차피 내 몸, 처음 본 것도 아니면서.”

누가 들으면 오해할 법한 말을 하며 캘럽은 애셔의 이마 아래로 내려온 머리

카락을 손가락으로 넘겨 주었다. 그러다 애셔는 허벅지 사이로 느껴지는 묵직

함에 “으아아,” 괴상한 소리를 내고는 귀 끝을 붉혔다.

“나는 네게 오는 일 년이라는 시간 동안 무사히 성년의 날까지 치렀다. 이제

나도 너처럼 건장하고 혈기 가득한 스무 살이 되었지.”

뭐든 혼자서 할 수 있는 그런 나이, 라는 말을 덧붙이며 캘럽은 애셔를 향해

농염한 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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