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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크와 만나고 돌아온 애셔는 생각에 잠긴 듯한 눈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제
국을 대표하는 블레이크 대공과 제국에서 힘깨나 쓴다는 아네스트 공작가. 이
둘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소원의 돌밖에 없었다. 아무런 추적
도, 동선도 들키지 않고 완벽하게 사라질 수 있는 방법이었으니까. 그랬음에
도 애셔는 여전히 심란한 표정이었다.
톰스 라이언. 현재로써는 자신에 대해서 많은 걸 알고 있는 이였다. 물론 지
금까지 보여 준 톰스의 모습은 저를 배신할 것으로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확실하게 해 두는 쪽이 나을 것 같았다. 애셔는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톰스를
부르고는 서랍 속에 넣어 둔 봉투를 하나 내밀었다
“이것이 무엇인가요?”
“잠시 여행 좀 다녀왔으면 해서 불렀어.”
애셔가 내민 돈 봉투를 톰스가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눈치가 빠른 톰스라면
자신이 그에게 돈 봉투를 내민 이유를 금방 알아챌 것이라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톰스는 애셔의 의도를 알아차리고는 말을 붙여 왔다.
“도련님.”
“그냥 좀 다녀와 주면 좋겠는데, 그것도 지금 말이야.”
애셔는 이유는 묻지 말라는 듯이 톰스의 말을 막으며 떠나 달라는 눈짓을 보
냈다. 현재로써는 그에게 해 줄 말이 없어서였지만, 톰스는 생각이 많은 듯한
눈으로 봉투를 바라보고는 재킷 안으로 넣었다.
“도련님께서 원하신다면 그리하겠습니다.”
더는 묻지 않겠다는 톰스의 대답에 애셔는 고맙다는 눈짓을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루를 마감하는 저녁이라 그런지 하늘은 붉은 석양빛으로 가득했
다. 애셔는 톰스를 뒤로하고는 창가로 다가가 하늘을 올려다봤다.
“오늘따라 예쁘네.”
아마 지금 보는 하늘은 이곳에서 보는 마지막 하늘이 될 것이다. 애셔는 배
안에 조용히 자리 잡고 있을 태아를 떠올리고는 공허한 표정으로 눈만 느릿하
게 깜박였다.
“도련님.”
저를 부르는 말에 애셔가 잠시 짧은 침묵을 유지하고는 그를 바라봤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편하게 말을 해도 된다는 뜻이었다.
“요즘 들어 도련님께서 어디론가 떠나실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그래?”
애셔는 톰스의 말에 딱히 부정도 긍정도 표하지 않은 얼굴을 하고는 두리뭉실
하게 답했다. 그러자 톰스는 기다렸다는 듯이 주먹을 꽉 움켜쥐고는 무게감이
있는 목소리로 답했다.
“만약 도련님께서 떠나셔야 하는 일이라면, 그곳에도 제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앞으로 지금처럼, 도련님의 곁에서 호위하며 곁을 지키고 싶거든요.”
그가 좋은 사람이라는 건 지금 하는 행동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진실한 눈빛
과 갈망한다는 말투. 애셔는 이미 그가 어렴풋이 제가 할 일을 짐작했을 거라
는 걸 알았기에 덤덤한 표정으로 작은 미소를 띠었다.
“톰스는 정말 유능한 사람이야. 좋은 기사고.”
“…….”
“아마, 앞으로도 더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겠지.”
“……도련님.”
애셔는 손목 옷깃에 달린 커프스를 풀었다. 장미정원에서 루크가 찾아 주었던
행운의 네 잎 클로버 모양의 커프스였다.
“이건 나한테 소중한 물건이야. 아마, 계속 그럴 테지.”
“……이걸 제게 주시는 건가요?”
“톰스는 내게 소중한 사람이니까…….”
애셔는 그동안 고마웠다는 말을 눈으로 표현하며 그의 손목에 커프스를 채워
주었다. 그러고는 세상에서 제일 예쁜 미소를 톰스에게 지어 주었다.
“잘 어울려서 다행이다.”
애셔가 뿌듯하다는 듯이 흐뭇한 표정을 짓자 톰스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이제야 비로소 곁에 있는 이들과 이별을 한 것 같아서 가슴이 후련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톰스는 그런 자신과 달리 한쪽 다리를 바닥에 굽히고는 가슴
에 손을 올린 채로 애셔에게 고개 숙였다.
“톰스 라이언. 기사의 명예를 걸고 주군인 애셔 아네스트에게 충성하고, 모든
것을 바치겠습니다.”
“……톰, 톰스?”
예기치 못한 기사의 서약에 애셔가 당황한 듯 말을 더듬거렸다. 어째서, 떠나
는 이 타이밍에 기사의 맹세를 하는 건지. 애셔가 혼란스러운 눈빛을 하자 톰
스는 고집스럽고 반듯한 눈빛을 보내며 애셔를 올려다봤다.
“도련님이 어디에 계시든 저는 도련님의 호위입니다.”
이 사실은 앞으로도 지금도 영원히 변함이 없을 거라는 듯이 그가 올곧은 눈
빛을 보냈다. 애셔는 왠지 모를 고마움에 눈시울이 붉어졌지만, 눈물을 참아
내며 고개를 작게 저었다.
“맹세는 고마워. 하지만 마음만 받을게.”
그의 미래를 위해 애셔는 끝까지 거절하며 톰스를 일으켜 세우고는 아까보다
차가운 말투로 답했다.
“이제 쉬고 싶은데 자리 좀 비켜 줄래?”
애셔의 말에 톰스가 불안한 듯 눈빛을 떨었다가 “네.” 하고 작게 답했다. 어
쩐지 유독 그의 걸음이 쓸쓸한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지만, 애셔는 그런 그가
빠져나간 자리를 조용히 응시했다가 숨겨 놓은 가방을 꺼내 들었다.
“……이제 정말 안녕이네.”
공허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방 안을 가득 메웠다. 애셔는 브래든이 다시 돌
아와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정돈된 방 안을 바라보고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다들 건강하게 계시길…….”
그 말을 마지막으로 애셔는 소원의 돌을 사용하며, 그 방에서 자취를 감췄다.
마치, 이곳에 없었던 사람처럼…….
*
아네스트가에는 평소와 같은 아침이 찾아왔다. 늘 그래 왔던 것처럼 사용인들
은 정신없이 분주했고, 환기를 시키기 위해 열린 창 사이로 새 지저귀는 소리
가 났다. 하지만 평온하고 안정적이어야 할 아침에 애셔가 머물고 있었던 이
층에서는 소란스러운 소리가 났다.
“무슨 일이지?”
식사하기 위해 자리를 이동하던 공작이 곁에 있던 집사에게 물었다. 집사는
서둘러 지나가는 사용인을 잡아 이유를 물었다.
“무슨 일인데 아침부터 소란스러운 것이냐.”
“그, 그게…….”
“어허, 빨리 말하지 않을꼬?”
집사의 말에 우물쭈물하던 사용인 한 명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무릎을 꿇고
는 고개를 숙였다.
“……방 안에 계시어야 할 애셔 도련님께서 보이지 않아 찾고 있었습니다.”
“언제부터지?”
사용인과 집사의 대화에 끼어든 공작이 살기 짙은 얼굴로 물었다.
“그것이…… 아침 일곱 시쯤부터입니다.”
아침 일곱 시라는 말에 공작의 미간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최근 늦어지는
히트로 인해 애셔의 주위에 감시하는 이들을 붙여 놨었다. 공작은 집사에게
그들을 데려오라 이르고는 방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 누구도 애셔가 방을
빠져나가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고 했다.
“도대체 일들을 어떻게 처리한 것이냐!”
“죄, 죄송합니다!”
노기가 서린 목소리로 공작이 호통을 치며 감시하던 이들을 나무라자, 그들은
하나같이 머리를 조아리며 몸을 떨었다. 폴티크 아네스트. 세간에는 어려운
이들에게 정을 베푸는 인자한 이미지로 유명했지만, 그들에게는 악마나 다름
없는 인간이었다. 그런 공작이 흉흉한 기운을 풍기자 그들은 하나같이 몸만
덜덜 떨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브헬룸, 집 안에 있는 이들의 입단속을 시켜야 할 것이다.”
“네.”
공작은 집사인 브헬룸에게 그리 명하고, 고개를 조아리고 있던 이들에게는 애
셔를 지금 당장, 눈앞에 데려오라 명했다.
“만약, 데려오는 과정에서 말을 듣지 않으면 폭력을 가해도 좋다. 단, 목숨은
꼭 붙여서 데려오도록.”
공작은 무시무시한 살기를 풍기며 그들에게 나가 보라 손짓하고는 분하다는
듯이 책상을 강하게 내리쳤다.
“감히……, 나를 엿 먹여?”
현재 시점, 대공과의 약혼 이야기가 빠르게 오가며 진행되고 있었다. 약혼 조
건 역시 자신이 원하는 대로 맞춰지고 있는 시점이었고, 식만 올리면 모든 것
이 제 손에 들어올 타이밍이었다. 그런데 히트를 앞둔 이 타이밍에 소리 없이
사라지다니. 다른 이와 히트를 보내는 일 따위는 절대 있을 수 없다며 공작은
이를 드러낸 채로 이름을 읊조렸다.
“애셔 아네스트.”
악명 높은 자신의 수족의 눈을 피해 달아나다니.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다는
듯이 공작은 자신이 몰래 키우던 기사 집단의 수장 룬을 불렀다.
“존명.”
공작의 부름에 룬이라는 남자가 서둘러 예를 갖췄다. 공작은 기다렸다는 듯이
수납장에 넣어 둔 지팡이를 꺼내 들고는 명했다.
“지금 당장 애셔를 호위했던 톰스를 지하로 데려오도록 해. 도망간다거나 반
항하는 낌새라도 보인다면 다리 하나쯤은 부러트려도 좋다.”
공작의 말에 룬은 서둘러 빠져나갔다. 공작은 숨이 넘어갈 만큼 밀려오는 두
통에 분을 억지로 참아 내며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결국 너는 내 손안에 들어올 것이다.”
제국의 황제라는 타이틀만 달지 않았을 뿐이지, 제국에서 황제만큼이나 힘을
쓰는 자신이었다. 그런 자신에게 애송이 하나 잡는 것쯤은 일도 아니라는 듯
이 공작은 지팡이 속에 감춰진 칼날을 꺼내 확인했다.
“그동안 네가 누렸던 것들이 얼마나 행복했던 건지, 내가 톡톡히 알려 주도록
하마.”
그는 마치 지옥에서 온 사자처럼 눈을 흉흉하게 빛내고는 톰스가 있을 지하로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