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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는 이만 퇴장합니다-55화 (55/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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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은 샤키가 말한 대로 루크와의 약혼을 하루빨리 진행하겠다고 했다. 히트

도 터지지 않은 시점에서 약혼까지 빠르게 강행된다면 자신이 임신하는 데 있

어서 유리하지 않겠냐는 말도 덧붙이며 그는 야망이 깃든 미소를 드러냈다.

애셔는 굳이 공작과 트러블을 만들 이유가 없었기에 알겠다고 답하고는 그곳

을 빠져나왔다.

“도련님.”

샤키와 헤어진 애셔가 방으로 돌아오자 톰스가 기다렸다는 듯이 곁으로 다가

왔다. 애셔는 눈짓으로 주치의를 은밀하게 불러오라고 신호를 보내고는 침실

이 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간 불편한 곳이 없으셨습니까?”

어느새 들어온 주치의가 애셔를 향해 물었다. 애셔는 기다렸다는 듯이 몸을

반쯤 일으켜 세우고는 그에게 말했다.

“요즘 들어서 몸이 더 안 좋아진 것 같아서 불렀습니다.”

“어디가 어떻게 안 좋으신가요?”

“빈혈이 도는 건지, 앉았다 일어나면 머리가 어지럽고 체한 것처럼 답답한 기

분이 들어요. 원래도 자주 체하고 그랬지만, 요즘은 부쩍 그게 더 심해진 것

같거든요.”

애셔는 최근에 느꼈던 증상들을 주치의에게 차근차근 설명했다. 혹시 이런 부

분들이 독약에 의한 부작용이 아닐까 하는 마음에 덜컥 겁이 났지만, 차분한

표정으로 대화를 이어 갔다.

“언제부터 그러셨는지요?”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정확히는…….”

애셔가 말을 하다 말고 입술을 깨물었다. 최근 느낀 증상들은 루크와 러트를

함께 보내고 나서 생긴 증상들이었다. 정확히는 페로몬이 없어졌다는 걸 깨닫

고 나서 생긴 증상들이었다. 주치의는 애셔의 생각을 읽었다는 듯이 인자한

표정을 짓고는 애셔에게 답했다.

“우선은 맥을 짚어 봐야 할 것 같네요.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주치의는 애셔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손목을 그러쥐며 맥을 살폈다. 그러다 놀

란 듯 눈을 키웠다가 다시 한번 맥을 짚으며 물었다.

“히트가……, 오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네.”

“정말 오지 않았습니까?”

아까와 다르게 조금 날카로워진 그의 표정에 애셔가 주춤하듯 입술을 깨물었

다. 왠지 자신이 들어서는 안 될 말을 듣게 될 것 같아서 덜컥 겁이 났다. 애

셔는 대답 대신 숨을 죽인 채로 주치의를 응시했다.

“임신입니다.”

그의 입에서 거의 사형 선고와도 같은 말이 흘러나왔다. 애셔는 제대로 듣고

도 잘 못 들었다는 듯이 주치의에게 다시 물었다.

“지금…… 뭐라 하셨어요?”

“……임신하신 것 같습니다.”

어떻게 단 한 번의 실수로 임신을 할 수 있는 걸까. 열성 오메가는 아이를 배

는 것조차 확률이 희박하다고 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단번에 임신한다고? 애

셔는 닷새 동안 단 한숨도 재우지 않고 괴롭혔던 루크의 모습을 떠올리고는

입을 틀어막았다.

“괜찮으십니까?”

곧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창백해진 애셔의 모습에 주치의가 조심스럽

게 물어 왔지만 애셔에게는 그 말이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충격에 빠진 듯

오랫동안 말을 잇지 못한 채로 공허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진짜, 임신했다고요……? 그것도…….”

루크의 아이를……? 애셔는 차마 뒷말을 잇지 못한 채로 떨리는 손끝을 내려다봤다.

애셔에게 임신이라는 단어는 낯설고 생소한 단어였다. 형질이 오메가인 이상,

언젠가는 임신을 하게 되겠구나 하고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빠른 시일 내로

임신이 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애셔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아랫배에

손을 가져가 대었다.

“어떻게……,”

아직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배였지만, 애셔는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

았다. 제 안에 또 다른 생명이 자리 잡고 있다니. 믿어지지가 않아서 애셔는

눈물을 억지로 참아 내며 말했다.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입니다. 저는 도련님의 주치의지, 다른 이의 주치의가 아니니까요.”

주치의는 이미 애셔에게 돈을 받은 것만으로도 입을 닫을 생각이었다. 그 돈

은 일하지 않아도 충분히 먹고살 만큼이었으니까. 하지만 돈과 별개로 조금은

불안한지 그가 애셔에게 물었다.

“만약 이 일을 공작 저하께서 알게 되신다면 저는 어떻게 되는 건지 여쭈어

봐도 되겠습니까?”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당신은 처음부터 내 진료를 보지 않았으니까.”

애셔가 단호하게 답을 하자 그는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덧붙

였다.

“하지만 언제까지 저하와 도련님들을 속이실 수는 없을 것입니다. 만약 아이

의 형질이 베타가 아닌 오메가나 알파라면 한 달이 지난 시점에 태아에게서

페로몬의 향이 묻어 나올 테니까요.”

“태아에게서도요……?”

애셔는 태아에게서 페로몬이 묻어 나온다는 말에 흠칫 놀랐다. 이럴 때 아리

아가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애셔는 밖에 대기하고 있는 톰스에게 준비해

둔 돈을 가져오라 일렀다.

“돈은 더 받지 않겠습니다. 도련님께서 이미 주신 돈만으로도 충분하니까요.”

“뜻이 그렇다면 알겠습니다.”

완강한 주치의의 말에 애셔는 톰스에게 다시 나가 보라는 듯이 신호를 보내고

는 대화를 다시 이어 갔다.

“배 속에 있는 아이의 페로몬 향이 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건가요?

아이의 형질이 베타가 아니라면 위험할 수 있는 상황이잖아요.”

“임시로 뿌리는 향유가 있기도 하지만, 이 또한 우성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들

었습니다.”

“……….”

주치의로서는 루크를 만날 때 조심하라고 한 말인 것 같았다. 하지만 애셔는

허를 찔렀다는 듯이 입술을 꾹 다문 채로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래도 뿌리지 않으시는 것보다 나으실 겁니다. 향유는 톰스를 통해 보내 드

리도록 하겠습니다.”

할 말을 마친 주치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가 멍하니 앉아 있는 애셔를 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떼었다.

“도련님께서 기분이 나쁘실까 묻지는 않았지만, 모르시는 것 같아서 말씀드립

니다. 보통은 히트가 온 날을 시작으로 해서 태아의 주기를 세고는 합니다.”

“…….”

“나중에 도련님께서 궁금해하실 것 같아서요.”

그는 더 이상, 쓸데없는 말을 덧붙이지 않겠다는 듯이 부모처럼 다정하게 웃

어 주며 방을 빠져나갔다. 애셔는 그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고는 여전히 만지

고 있는 아랫배에 시선을 옮겼다.

“히트가 온 시점부터라…….”

그렇다면 아이는 곧 꽉 채운 한 달이 되어 갔다. 자칫하면 페로몬이 묻어 나

올 수도 있는 상황이었기에 애셔는 톰스에게 주치의를 따라가 향유를 받아 오

라 일렀다. 어떡해서든 아이의 존재를 아무도 몰라야 했으니까.

“하지만 나는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다른 이의 아이도 아닌 자신이 그토록 좋아하는 사람의 아이였지만, 그는 곧

돌아올 브래든과 약혼까지 하며 알콩달콩 행복하게 살 사람이었다.

그 누구보다 행복해야 할 그가 자신의 임신으로 인해 발목이 잡히는 건 원치

않았고, 무엇보다 그에게 진실을 말할 생각 또한 하지 않았다. 그가 사생아라

는 단어를 얼마나 끔찍하게 싫어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았으니까.

“그렇다고 네가 온 게 싫은 게 아니야. 다만 축복받아야 할 너의 인생을, 내

가 불행하게 만든 것 같아서…….”

그래서 죄책감이 들었다. 내가 정말 이 아이를 낳아도 되는 건지, 과연 잘 키

울 수 있을까에 대해 의문이 들었지만, 애셔는 이 아이만큼은 어떡해서든 지

키겠다고 다짐했다.

“그래도 나와 루크의 아이니까.”

애셔는 아이의 존재가 소중하다는 듯이 이불로 감쌌다. 비록 아이의 방문이

애셔에게는 부담으로 다가왔지만, 아이는 그와 유일하게 연결된 고리였고, 어

쩌면 자신이 욕심낼 수 있는 것 중 하나일지도 몰랐다. 애셔는 혼란스러움이

묻어나는 얼굴을 두 손에 묻었다.

처음에는 원작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뜻대로 따라 주려 했다. 하지만 배 속에

아이의 존재까지 생긴 이상, 원작의 뜻대로 움직여 줄 생각이 없었다. 원작이

숨이 막힐 만큼, 제 목을 조여 온다고 해도 어떡해서든 이들에게서 벗어나 아

이를 지키고 말 테니까. 비록 아이의 존재가 아버지의 존재를 평생 알지 못하

고 지낸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애셔는 밖에 있던 톰스를 불러 루크와의 약속을 잡으라 일렀다. 그래도 아이

의 아빠인데, 마지막 인사는 하고 가야 할 것 같아서였다. 애셔는 나르타와의

약속된 날짜를 떠올리고는 침실에서 일어나 테이블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내게는 소원의 돌이 있으니까.”

이런 상황이 된 이상, 나르타와는 제국에서 만나는 것보다 소원의 돌을 이용

해 불독 왕국에서 만나는 쪽이 좋을 것 같았다. 그게 자신에게도, 그들에게도

안전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부터는 자신을 바라보는 감시자가 하나

가 아닌 둘이 될 테니까. 애셔는 공작과 루크를 떠올리고는 서둘러 불독 왕국

의 서쪽 탑에다가 서신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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