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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크의 말에 놀란 애셔는 무슨 뜻이냐는 듯한 얼굴로 응시했다. 하지만 그는
이야기가 끝났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애셔에게 인사를 건넸다.
“……벌써 가시게요?”
만나지 않은 기간만큼 스킨십을 요구하면 어쩌나 싶었는데, 그는 평소와 다르
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오히려 심란함이 가시지 않는 표정으로 애셔가
내민 상자를 꽉 움켜쥐었다. 얼마나 강하게 움켜쥐었는지, 상자는 그의 손에
볼품없이 구겨져 버렸다.
“오늘은 그만 돌아갈까 합니다. 앞으로는 계속 만나 뵙게 될 테니.”
힘이 들어간 손과 다르게 루크의 표정은 평온했다. 창가를 타고 들어오는 햇
살처럼 포근함이 깃든 미소였다. 하지만 애셔는 그 미소가 섬뜩하게 느껴져서
자리를 뜨는 루크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
루크가 돌아가고 나서 애셔는 단 한숨도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애셔는 근래
급격히 나빠진 몸을 가볍게 스트레칭하고는 침실에서 일어났다.
“……왜 이렇게 피곤하지.”
예전에는 날을 새워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지나치게 무거워진
몸을 보며 애셔는 서랍 속에 넣어 둔 약통을 꺼내 들었다.
평소에도 알약을 좋아하지 않는 애셔였다. 주치의는 그런 애셔를 배려해 약초
로 만들어진 약을 지어 주었고, 애셔는 종종 그 약을 습관처럼 먹고 있었다.
늘 가슴이 답답하고 체한 기운이 들었으니까. 그랬기에 오늘도 의심 없이 약
을 입안에 넣고는 물을 한 컵 비워 냈다.
“그래도 너무 약에 의존하는 건가…….”
앞으로는 이곳에서 누렸던 삶처럼 주치의를 불러 치료를 받을 수 없을지도 몰
랐다. 애셔는 톰스를 불러 은밀하게 주치의를 대기시키라 일렀다.
“요즘 들어 안색이 좋지 않습니다. 요즘 식사도 제대로 못 하시는 것 같고…….”
톰스가 걱정된다는 듯이 말을 덧붙였다. 솔직히 요즘 들어 앉았다 일어서기만
해도 눈앞이 점멸되는 것처럼 시야가 가렸다. 심지어 혈액 순환이 되지 않는
건지 손발이 자주 붓고 해서 주치의를 한번 만나 봐야겠다고 생각했었다.
“부작용 때문에 그러겠지.”
애셔는 제게서 페로몬의 향이 나지 않는다는 것을 떠올리고는 답했다. 그러다
애셔는 샤키의 방문에 톰스를 물리고는 자리를 안내했다.
“오늘 일 안 나갔어?”
“어.”
최근 들어 샤키는 상단을 나가는 것보다 집에서 머무는 시간이 길어졌다. 차
라리 시야에서 보이지 않으면 좋을 텐데 자꾸만 제 곁을 맴도는 샤키를 보며
애셔는 부담감이 밀려왔다.
“아버지가 너를 찾으셔.”
애셔는 올 것이 왔다는 듯이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왜 직접 왔어. 다른 사람 시키면 되는데.”
“나도 함께 가려고.”
“……어?”
“말했잖아. 너 혼자 아버지를 만나게 두지 않을 거라고.”
샤키는 단호한 얼굴로 애셔의 손을 꽉 움켜잡았다. 이렇게 불쑥 신체 접촉을
한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기에 놀랄 이유는 없었지만, 이제는 적나라하게
느껴지는 샤키의 감정에 애셔는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왜 그렇게 곤란한 표정이야. 오랜만에 동생 손이나 잡아 볼까 하고 한 건데.”
“무슨 일 있었어?”
애셔가 조심스럽게 묻자 그의 눈동자가 순간 스산하게 빛났다. 애셔는 저도
모르게 목울대를 울렁이고는 그의 눈치를 살폈다.
“……형?”
“아버지가 너와 대공의 약혼을 빠르게 진행하시겠대. 아마 다음 달이면 약혼
식을 올리게 될지도 몰라.”
루크가 떠나면서 남긴 의미심장한 말은 바로 이것을 위해서였던 것 같았다.
더는 자신을 기다려 주지 않겠다는 의지 같았으니까. 애셔는 전해지는 샤키의
아릿한 감정에 모르는 척 그의 팔을 밀어내며 안정감이 깃든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 그럼 좋아해야 하는 일이네. 어차피 할 약혼이었잖아.”
“애셔.”
“왜 그렇게 심각한 표정을 지어. 나는 정말 기쁜데.”
애셔가 밝게 웃음을 지으며 눈매를 곱게 휘었다. 샤키는 그런 애셔의 모습에
작게 긴 숨을 터트리고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가 놓길 반복했다.
“봄까지 기다려 주겠다는 약속…… 지킬 수 없을 것 같다.”
“…….”
“너는 봄이 오면 여행을 떠나겠다 했지만, 나는 네가 여행을 가지 않아도 작
위를 물려받을 생각이야.”
“하지만…… 아버지가 쉽게 물러나려고 하시지 않을 거야.”
“그래서 내가 물려받으려고. 아버지가 계획하고 있는 일들을.”
“아버지가 하시는 일을 물려받겠다고……?”
애셔는 그 말이 진심이냐는 듯이 그를 올려다봤다. 꼭 그렇게까지 해서 작위
를 물려받아야 하는 거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는 더 이상 뜻을 굽힐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만약 나 때문에 그런 거라면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 말했듯이 나는 전하가
너무 좋고, 이 약혼을 무르고 싶은 생각 또한 없거든.”
어차피 브래든이 돌아오게 되면 이어받을 약혼이었다. 뜻하지 않는 샤키의 감
정으로 인해 원작을 틀고 싶은 마음은 더더욱 없었다. 애셔는 곧 있으면 다가
올 사월의 봄을 떠올리고는 그를 향해 말했다.
“나는 형이 엠버 형과 싸우면서까지 작위를 물려받지 않았으면 좋겠어. 설사,
가문을 위한 일일지라도 아버지가 하시는 일까지 형이 물려받는 건 아니라 생
각하거든.”
“…….”
“그러니까 형……. 나는 형이 예전처럼 검을 좋아하던 시절로 돌아갔으면 좋겠
어. 언제나 반듯하고 바른 형의 모습이……, 정말 좋거든.”
제발 아버지가 가려는 길을 가지 말아 달라는 듯이 애셔가 애처로운 눈길을
보냈다. 샤키가 망가지는 건 누구보다 원치 않았으니까. 하지만 이 분위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단체로 자신의 방을 방문하기로 했는지 엠버가 찾아와 샤키
를 발견하고는 표정을 굳혔다.
“요즘 상단 일도 잘 안 나간다고 하던데. 후계자 수업 받느라 바쁜가 보다?”
“형이야말로, 요즘 뭐 하고 다니는 건데. 아버지가 많이 걱정하고 계셔.”
엠버의 비아냥에도 샤키는 안색 하나 바꾸지 않은 채 답했다. 엠버는 그런 샤
키의 모습에 코웃음을 치고는 문가에 기대 팔짱을 꼈다.
“걱정? 우리 집에서 나를 걱정하는 사람이 있긴 있었냐?”
“형이야말로 우리 생각은 했어?”
“했었지. 네가 작위를 물려받는다고 말을 하기 전까지.”
허를 찌르는 엠버의 날카로운 말에 샤키가 가라앉은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만약 네가 나를 형으로 생각했다면 작위를 물려받겠다고 하지 않았겠지. 내
가 작위를 받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누구보다 네가 더 잘 알 테니까.”
엠버는 서운한 감정을 억누르며 샤키를 응시했다. 그러다 애셔를 한 번 바라
보고는 입술을 삐뚜름히 휘어 올렸다.
“그런데 각오는 되어 있나 모르겠네? 나를 적으로 둔다면 네가 아끼는 모든
것이 다 망가져 버릴 텐데. 그게 내가 아끼는 동생일지라도.”
엠버는 요즘 들어 샤키가 일을 나가지 않고 유독 애셔의 주위에 맴돌고 있다
는 걸 알았는지,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아무래도 엠버는 자신과 샤키가 손
을 잡았다고 생각하는 듯 보였다.
당장이라도 저를 시궁창에다가 버려 버릴 것 같은 기세에 애셔는 잠시 움찔했
지만, 곧 표정을 가다듬고는 말했다.
“……그렇게 말하면 마음이 편해?”
“뭐?”
“물론 형이 얼마나 노력했는지는 알아. 그렇다고 샤키 형이 자격이 없는 것도
아니고.”
“너 지금 뭐라고 했냐?”
“내 말은 공정하게 대결했으면 좋겠다는 거야. 소중한 걸 망가트려서까지 싸
우기에는 형도 샤키 형이 다치는 걸 원치 않잖아.”
언젠가 엠버와 대화를 하게 된다면 말을 해 주고 싶은 부분이었다. 엠버는 그
누구보다 샤키를 아끼고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 중 하나였으니까. 하지만 엠
버는 어이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짓고는 눈매를 날카롭게 치켜떴다.
“말은 똑바로 하지 그래? 샤키가 다칠까 봐 걱정되는 건 내가 아니라 너 아니냐?”
“응. 난 샤키 형이 다치길 원치 않아. 무엇보다 형도 다치는 걸 원치 않고.”
“……뭐?”
엠버는 해괴한 소리를 들은 사람처럼 미간을 구겼다. 마치 제게서 이런 소리
를 듣는 게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실성했냐?”
“아니.”
밀은 이렇게 해도 그가 자신을 무작정 싫어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만약 저
를 어떻게 하려고 했었다면 진작에 힘으로 압박을 가해 왔을 테니까. 애셔는
문득 빙의하고 나서 엠버가 루크의 별장에 찾아갔던 걸 떠올렸다.
루크의 행동이 우리 집안을 무시하는 거나 다름없다고 말을 했지만, 샤키만큼
이나 화를 냈던 엠버. 어쩌면 엠버는 제게 다가오지 않는 애셔가 얄미웠을지
도 모른다. 지금 모습만 봐도 엠버는 아슬할 만큼이나 외로워 보였다. 엠버는
애셔의 곧은 눈빛에 시선을 피하고는 그대로 방을 빠져나갔다.
“하아…….”
참았던 긴장감이 풀리자 다리가 후들거리는 것을 느꼈다. 애셔는 옆에 있던
테이블에 몸을 잠시 기댔다가 느껴지는 시선에 눈을 마주했다.
“왜 그렇게 봐?”
“새삼 많이 컸구나 싶어서.”
“……그걸 이제야 알았어?”
애셔가 싱겁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분위기를 전환하고자 한 행동이었지만,
샤키는 웃지 않은 채 자신만 물끄러미 바라보고는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이로써 확실해졌네.”
“……응?”
“내가 너를 지켜 줘야 한다는 것. 그러니까 애셔, 잘 기억해. 네가 내 전부라
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