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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크와의 만남을 미룰 수 있는 만큼 미뤘다. 최소한 몸에 새겨진 흔적을 지우
는 데는 적어도 이 주라는 시간이 걸렸고, 애셔는 그 기간 동안 외출은커녕
집에만 있은 채로 보냈다. 정확히는 공작의 감시가 더 삼엄해졌기 때문이었
다. 공작은 자신이 히트가 터졌다는 걸 모르는 상태였으니까. 애셔는 달이 바
뀌어 버린 달력을 보며 서랍 속에 넣어 둔 소원의 돌을 꺼내 들었다.
“벌써 삼월이네.”
최근 서신을 주고받은 나르타에게서 다음 주에 칼과 함께 블레이크 제국에 방
문하겠다는 연락이 왔다. 안 그래도 나르타가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한 상태
였기에 애셔는 그날, 아이의 상태를 확인하고는 제국을 바로 떠날 생각이었다.
“적어도 칼이 곁에 있다면 공작의 눈은 피해서 달아날 수 있겠지.”
애셔는 소원의 돌을 응시하다가 바르한과 황태자 관련해서 서명한 문서를 발
견했다. 처음에는 이 문서를 어떡해서든 파기해 보려고 여러 가지 방법을 떠
올렸었다. 하지만 지금은 굳이 떠나야 할 시점에서 문서를 파기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진짜가 돌아오면 가짜인 자신이 계약한 문서는 아
무런 효력을 발휘하지 못할뿐더러, 애초에 루크에게 이 계약서를 들키고 싶지
않아서 지키려고 했던 거였으니까.
애셔는 생각이 많은 듯한 눈으로 돌돌 말린 계약서를 소원의 돌과 함께 떠날
때 가져가려 준비한 짐 가방 안에 넣었다. 그러다 그 가방 안에 아리아가 남
긴 편지가 들어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맞아……. 편지가 있었지.”
어쩐지 선뜻 읽을 용기가 나지 않아서 그간 가방 안에 넣어 두고만 있었다.
아리아의 죽음이, 진짜 애셔의 부재가 여전히 제 안에 남아 죄책감처럼 자리
잡고 있었으니까. 애셔는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서둘러 짐 가방을 있던 자리
에 밀어 넣고는 자리에 앉았다.
“도련님, 톰스입니다.”
“들어와.”
애셔의 말이 들리기 무섭게 톰스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쟌 사건 이후로 애셔
는 많은 이들을 곁에다 두었지만, 결국 모두를 물리고는 톰스만 제 곁에 두었
다. 다시 한번 제 곁의 사람을 믿어 보기로 했고, 그게 애셔에게도 편했으니까.
“무슨 일이야?”
“대공 전하께서 점심쯤에 당도하신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나한테는 그런 말 없었는데.”
“제 생각입니다만, 공작 저하께서 도련님 주기와 관련해 고의로 이곳에 부르
신 게 아닌가 싶습니다.”
혹시라도 다른 길로 새지는 않을까, 집 밖으로도 나가지 못하게 하면서 대공
을 직접 이곳을 부르는 것을 보니, 공작은 자신의 히트가 터지지 않는 것이
애가 타는 모양이었다. 어떡해서든 루크와 붙여 놓으려는 공작을 보며 애셔가
헛웃음을 지었다.
“어쩔 수 없겠네. 사용인들에게 준비하라 일러둬.”
“네.”
서둘러 방을 빠져나가는 톰스의 모습을 바라보며 애셔는 불안한 듯 의자에 기
대 눈을 내리감았다.
“하아…….”
지금 상황에서는 그가 자신과 러트를 보냈다는 걸 기억하느냐 안 하느냐가 중
요했다. 만약 기억을 했다면 제일 먼저 제게 연락을 취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미루고 미룬 만남에도 조급하지 않았고, 주고받은 서신에서도 별장에 대
한 그 어떤 이야기도 꺼내지 않았다.
“어쩌면 페로몬이 없어진 게 다행인 걸지도 모르겠네…….”
혹여라도 그가 기억한다면 어떡해서든 그를 입막음시켜야 했다. 떠날 시점에
서 공작에게 자신이 루크와 잤다는 걸 들킨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장담할
수 없었으니까. 애셔는 생각하기도 싫다는 듯이 거울 앞으로 다가가 옷매무새
를 정돈했다.
하늘을 닮은 옅은 눈동자만큼이나 푸른빛의 옷이 창백한 애셔의 얼굴을 누그
러트렸다. 애셔는 야위어 버린 제 양 뺨을 가볍게 내리치고는 입가에 미소를
억지로 그렸다.
“괜찮아, 잘할 수 있어.”
오랜만에 보는 루크에게 떨지 않고 덤덤하게 웃어 주고 올 생각이었다. 그가
자신을 기억하는 마지막 모습만큼은 선하고 부드러운 모습으로 남길 바랐으니
까. 하지만 심장은 그를 마주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미친 듯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영혼 없이 부르던 이름, 그리고 풀려 버린 그의 눈빛은 머릿속에서 여전히 잊
히지 않았지만, 가슴은 여전히 그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설레고 있었다. 애
셔는 두근두근, 뛰어 대는 가슴 위로 손을 얹으며 나지막이 읊조렸다.
“……나는 여전히, ……그를 많이 좋아하고 있구나.”
떠나고 싶지 않을 만큼, 자꾸만 미련이 남아 발목을 잡을 만큼 그를 좋아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거 또한 제 욕심이었다. 애셔는 자신을 원망하던 브래든의
모습을 떠올리고는 그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
예정대로 공작과 루크의 식사 자리는 이어졌다. 오랜만에 만나는 자리에서 별
다른 말은 없었지만, 공작은 식사를 마치기 무섭게 루크를 애셔의 방으로 안
내했다. 그게 예의가 없는 행동이라는 걸 알았지만, 애셔는 공작의 뜻에 맞춰
주며 루크를 방으로 안내했다.
손님으로 온 누군가가 자신의 방을 방문한 건 처음이었다. 루크 역시 이런 기
회가 없었기에 자신의 방을 유심히 훑어보다가 방 가운데에 놓인 접대용 의자
에 앉았다.
“잘 지내셨어요?”
애셔가 거울 앞에서 연습했던 표정을 지으며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띠었다.
하지만 그는 처음 만났던 그날처럼 묵묵부답을 유지한 채로 애셔의 얼굴을 빤
히 응시할 뿐이었다.
“제 얼굴에 뭐 묻었어요?”
애셔는 여전히 답이 없는 루크를 보며 농담기 서린 목소리로 입꼬리를 더 끌
어당겼다. 그렇게 하면 그에게서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한 행동이었
는데, 그럴수록 그의 표정이 굳어지는 게 느껴졌다.
“몸이 좋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그동안 계속 집에만 있었던 것입니까?”
“네, 보시다시피요.”
조사했다면 자신이 줄곧 집에만 있었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자신이 별장을
갔다는 이야기는 샤키를 제외한 아무도 모르는 이야기였으니까. 하지만 루크
는 생각이 더 깊어진 눈동자로 애셔를 향해 다시 물어 왔다.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질문의 주제를 바꾸도록 하죠.”
“…….”
“지난달 말일경에 어디에 있었습니까.”
루크의 말은 누가 봐도 조사를 한 사람의 말투였다. 하지만 애셔는 태연한 척
웃으며 나긋하게 답했다.
“둘째 형의 별장에 있었어요. 잠시 쉬고 싶었거든요.”
애셔의 말에 루크의 눈동자가 미약하게 흔들렸다. 자신이 하는 말을 믿고 싶
지 않은 듯한 눈치였다. 그 말은 즉, 자신과 별장에 있었던 일을 기억하지 못
한다는 말과 같았기에 애셔는 씁쓸한 듯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가 입가에 방긋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게 왜 궁금한지 모르겠어요. 무슨 일 있으셨어요?”
애셔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눈을 깜박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루
크는 혼란스럽다는 듯이 애셔의 시선을 피했다. 이렇게 직접적으로 시선을 피
한 일은 처음이었기에 애셔는 확신하는 표정으로 빈 주먹을 움켜쥐었다.
‘정말 기억 못 하는구나.’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그는 처음부터 자신을 알아보지 못했고, 저를 알아
보았다 하더라도 영혼 없는 눈빛으로 제 이름만 불러 댔으니까. 그래도 나름
첫 경험이었는데, 뭔가 억울한 마음에 애셔는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전하께 돌려 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무엇을 말입니까.”
루크의 말에 애셔는 대답 대신 업무를 보는 테이블 위에서 미리 챙겨 둔 작은
상자를 꺼내 왔다. 루크가 애셔에게 주었던 별장 열쇠였다.
“처음에는 어쩔 수 없이 받아 두었지만, 이제는 필요가 없을 것 같아서요.”
“……이걸 되돌려 주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말씀드렸잖아요. 제게 필요가 없을 것 같다고.”
단호함이 서린 애셔의 음색에 루크가 지친 듯한 표정으로 어금니를 꽉 으깨듯
물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모를 그런 미세한 변화였다.
“이 열쇠를 받고서 단 한 번도 별장에 온 적이 없습니까?”
“네.”
애셔는 이 말을 기다렸던 사람처럼, 그의 말에 삼 초 있다가 답하고는 열쇠가
담긴 상자를 루크의 앞으로 밀었다. 그러자 루크는 어이없다는 듯이 피식, 웃
고는 애셔를 응시하며 물었다.
“이걸 돌려주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듣는 이조차 오싹할 만큼 서늘한 말투에 애셔가 주춤하듯 잠시 말을 아꼈다.
어쩐지 그에게서 음침하고 시커먼 기운이 풍기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한쪽 입술을 미약하게 끌어 올리고는 조곤조곤한 목소리
로 답했다.
“당신은 가끔 저를 미치게 하는 데 뭐가 있습니다.”
“……네?”
“좋습니다. 이 열쇠가 필요 없다면 제가 가져가도록 하겠습니다. 대신.”
루크는 생각이 정리된 시선으로 애셔를 응시했다. 지나치다 싶을 만큼 섬뜩한
표정으로 잠시 말을 끊고는 소유욕이 가득 묻어나는 표정으로 입꼬리를 부드
럽게 휘었다.
“뒷일은 제대로 감당하셔야 할 것입니다.”